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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종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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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종파사건
八月 宗派事件

August Faction Incident
파일:조선로동당_제3차대회.jpg
<colbgcolor=#bc002d,#222222><colcolor=white> 다른 이름 두 번째 고난의 행군[1]
8월 전원회의 사건[2]
발생일자 1956년 4월 ~ 1956년 12월
1956년 8월 30일[3]
발생장소 평양시
원인 - 스탈린 사망과 스탈린 격하 운동
- 김일성 개인 우상화에 대한 불만
- 만주파에 반대되는 경공업 우선 정책 추구
결과 -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등 동무들의 종파적 음모에 대하여」 결정서 채택
- 소련파, 연안파 숙청 및 와해
- 김일성 유일지배체제 확립

1. 개요2. 배경
2.1. 6.25 전쟁 이전 북한의 권력구도
2.1.1. 주요 정치 파벌2.1.2. 소련의 김일성 선택 과정2.1.3. 남침 준비 시기2.1.4. 김무정과 박헌영의 숙청
2.2. 6.25 이후
2.2.1. 전후 복구 사업2.2.2. 스탈린 격하 운동2.2.3.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
3. 전개4. 결과5. 끝없는 숙청6. 후폭풍7. 8월 종파사건이 성공했다면8. 대중매체에서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956년 8월 30일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3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박창옥, 서휘, 윤공흠, 리필규 등이 김일성의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으나 김일성 친위세력들의 거센 반발을 받고 실패한 사건. 이들은 전부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며, 이로써 확고한 김일성 1인지배체제가 확립되었다. 북한인민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수령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전체주의 독재 국가로 바뀌게 된 단초가 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8월 종파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북한 정권, 정확히는 김일성 입장에서 8월에, 종파분자들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오랫동안 자료 부족으로 인해 북한의 공식 설명에 의존했던 결과이며 1990년대부터 백준기 교수를 시작으로 더 중립적인 '8월 전원회의 사건'으로 불러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 때문에 최신 논문들은 '8월 전원회의 사건'으로 많이 부른다.

북한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공개적으로 김일성을 비판하고 그 권력에 도전했던 사건이다. 북한 내부에서 알려지지 않은 쿠데타 시도 등이 더 있었을 수도 있지만 공식적인 회의에서 김일성에게 도전했던 사건은 이 사건이 유일하다.

2. 배경

2.1. 6.25 전쟁 이전 북한의 권력구도

초기의 북한 정권은 김일성을 지도자로 하는 조선로동당의 일당제 인민민주주의(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였지만, 그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조선로동당은 출신 배경과 성향이 다른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계열의 정당과 계파가 소련의 지원과 강요로 합당해서 출범한 포괄정당이었다. 당시 북한의 모든 좌익세력이 통합해 출발하였기 때문에 이 때의 정부 구성은 여러 정파의 연립정부에 가까웠다고 보는 게 맞다. 이런 형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위성국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소련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동독 지역에서 독일 사회민주당독일공산당을 강제로 합병해서 사회주의통일당(SED)을 만들고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했던 공산주의자 발터 울브리히트를 서기장으로 세웠다.

2.1.1. 주요 정치 파벌

파일:조선로동당_로고.svg 과거 조선로동당의 파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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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공흠
박일우
방호산
서휘
김창만
박효삼
김웅
리필규
리상조
김일성
김책
김광협
최용건
강건
김일
허가이
박창옥
남일
방학세
정상진
박헌영
김삼룡
이주하
리강국
리승엽
허헌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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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여러 정파가 소련군정의 압력으로 합당해서 출범한 정당이 조선로동당이었다. 이들은 6.25 전쟁까지만 해도 서로를 견제하고 있긴 했으나 전시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각자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별개의 정당이었던것이 갑자기 하나의 정당이 되었기 때문에 남한의 여러 정당들이 그렇듯(...) 당대 조선로동당 내에서도 계파갈등이나 김일성에 대한 비토는 많이 있었다. 일례로 김무정은 '중위나 대위 달고 들어온 놈들이 무슨 장군이냐!'는 말을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만 전쟁 전에는 김일성의 견제로 인해 스스로의 명성만큼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고 심지어는 6.25 전쟁 중에 낙동강 공략 실패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숙청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김일성은 스탈린의 점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박헌영을 제외하고 다른 세력들에게 모두 지도자로 인정받았으며, 박헌영조차도 6.25 전쟁 개전을 앞두고 남침 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김일성을 수령으로 부르면서 그의 우상화 정책에 동참했다. '연안파', '소련파' 등은 어디까지나 출신지를 바탕으로 임의로 붙인 표현에 불과하고 이들은 실제 파벌이 아니며, 이미 학계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연안파, 소련파 표현을 쓰지 않고 쓰더라도 파벌이 아니라는 조심스러운 각주를 붙인다. 패전 후 김일성은 박헌영을 희생양으로 몰아 박살을 냈고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허가이도 숙청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최창익, 박창옥, 박영빈 등 소위 김일성의 '정적'들이라던 인물들은 좋다고 팔 걷어 붙히고 참여하여 남로당파와 허가이를 쳐죽이고 그들이 가진 자리를 나눠가지면서 김일성의 오른팔 자리를 굳혔다. 최창익, 박창옥 등은 모두 김일성 우상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고 고려인 박창옥, 박영빈 등이 선전선동부장을 역임하면서 문예정책, 우상화 정책을 주도하였다.

전후 복구계획 과정에서 '연안파'와 '소련파'가 경공업 중시정책, 유연한 농업 정책을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 맞섰다는 학설이 유명한데, 이는 1970년대 오코노기 마사오가 제시한 학설이다. 과거 북한 자료가 없던 시절에는 그런대로 받아들여진 주장이고 지금도 이렇게 설명하는 경우가 많으나, 나중에 소련 자료, 중국 자료들이 풀리면서 최창익, 박창옥 등이 오히려 김일성과 대단히 사이가 좋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특히 박창옥은 중공업 반대론자가 아니라 소련 측에 북한은 밥이 아니라 중공업이 필요하다고 바락바락 덤벼들 정도로 공업화를 지지한 인물이었다. 김일성은 박창옥을 제1부수상에 임명하는 것을 고려할 정도로 박창옥을 이뻐했고 이 때문에 박정애 등이 노골적으로 질투할 정도였다.

그런데 김일성이 무리하게 밀어붙힌 공업화 계획으로 인하여 1954~1955년 사이에 대기근이 발생하고, 경공업과 농업을 강조한 소련의 말렌코프 노선이 등장하면서 김일성에 대한 소련의 간섭이 강화되었다. 김일성은 박창옥과 김일에게 죄를 뒤집어씌웠고 날벼락을 맞은 고려인들은 중공업 정책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김일성에게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할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이는 김일성을 몰아내고 자기들이 권력을 잡겠다는 발상이 아니라 김일성의 폭주를 막기 위한 억제장치를 도입하는 것 정도였으나, 김일성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피의 보복을 감행하였는데, 이때 김일성의 칼질에 대거 동참한 것이 다름 아닌 최창익, 윤공흠, 리필규, 서휘 등 연안계다. 이들은 대대적으로 고려인들을 두개의 의자에 앉은 이중국적자 찌끄러기들, 조선말도 모르는[6] 오만한 대국주의자들로 몰아서 개박살을 내버렸다.

하지만 김일성은 고려인들을 몰락시키고 다시 연안계에 그 자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박금철, 한상두, 박정애, 정일룡 등 자신을 추종하는, 경력에 결함이 있는 인물들을 대신 최고 지도부에 끌어들이고 연안계는 동지들을 핍박한 놈들이라고 역으로 토사구팽해버렸다. 한때 김일성의 부관으로까지 평가받았던 최창익은 정치위원회 석상에서 김일성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나서 쓸모 없는 인간으로 취급받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 앞서 고려인과 연안계들은 '아첨쟁이'들을 몰아내고 진짜 혁명가들인 자신들을 중용할 것을 김일성에게 요구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의 측근들의 잘못은 곧 자신의 잘못이라서 이들을 해임시키느니 차라리 자신이 사퇴한다고 배수진을 쳤다. 결국 3차 당대회는 완전히 김일성 최측근의 잔치판이 되었고, 소위 '8월 그룹'으로 불린 개혁파들은 정확히 자신들이 마르틴 니묄러의 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와 똑같은 상황에 처했음을 알고 거의 발악적인 저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북한에서 매도한 것과 달리 쿠데타가 아니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한 합법적 반격이었고, 김일성을 숙청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빨치산으로 죽다 살아났던 김일성에게는 약간의 반발이라도 용납되지 않았다.

2.1.2. 소련의 김일성 선택 과정

1945년 광복 직후 북한에서의 김일성 권력은 그렇게 절대적이지 못했다.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이긴 했지만 위의 정파설명처럼 북한 정권 성립된 이후부터 그의 만주파(+갑산파)는 허가이의 소련파, 김무정과 박일우의 연안파, 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로당파 등 여러 정파의 견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은 소련파가 아니었는데 소련에서 김일성을 최고지도자로 내세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래서 이미 보천보 전투로 인지도를 쌓아올린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운 것이었다. 다만 대중들 사이에서 김일성이라는 인물 자체가 유명해도 위인전의 영향으로 김일성을 여운형이나 이승만, 김구와 비슷하게 노회한 인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김일성이 북한에 입성하자 김일성이 생각보다 젊은 모습을 보고 이게 진짜 김일성이냐면서 김일성 가짜설까지 제기될 정도였는데, 김일성은 군부와의 적극적 접촉으로 최대한 소련에 협조하는 듯한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하여 소련측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자신이 지도자가 되고자 최선을 다했다.

2.1.3. 남침 준비 시기

아무튼 1948년 9월 9일 정부를 수립한 이후 북한은, 인플레에 시달리는 남한·중국·일본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활용해 국방력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남쪽에서는 반민특위 해산 및 김구 암살 사건 등이 잇따라 벌어지자 이승만에 대한 민심이반이 일어나서 2대 총선에서 친 이승만파가 개헌저지선조차 확보못하는 대참패를 했고, 정부에서는 북진통일을 외치며 불안감을 조성하자[8] 애치슨 라인 선포로 미국이 남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보류하는듯한 모습을 보였다.

김일성은 이런 흐름을 보면서 남침을 하면 단박에 통일할 철호의 기회라 생각하며 남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 당국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적 손실이 큰 상황에서[9] 북한이 남침을 하면 미국이 남한을 지원하여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거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과 소련 당국에서 북한의 남침에 대해 승인하지 않으려 했지만,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48차례씩이나 찾아가서 남침 승인을 요구했고 스탈린도 처음에는 김일성을 문전박대했지만, 결국 지속적인 요청에 못이겨 남침을 승인했다. 물론 소련은 전쟁이 터지고 나서도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꺼려서 북한에 대한 대규모 군사지원에는 소극적이었다.

2.1.4. 김무정과 박헌영의 숙청

그러나 전쟁은 북한 지도부의 기대와는 완전 다르게 진행되었다. 개전 초기에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면서 적화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지만, 예상과 달리 미군이 참전한 것이다. 그것도 대단히 빠른 시간에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엄청나게 많은 병력을 전선에 투입하면서 순식간에 전세가 완전히 뒤집힌다. 미 24사단의 스미스 부대가 겪은 오산 전투 이후 인천상륙작전까지 미군은 주일미군과 미국 본토로부터 가용한 부대의 병력을 최대한 빠르게 한국 전선에 투입시키려고 노력했다. 특히 낙동강 방어전에서 정말 레이스였다.

이 때문에 북한은 초창기의 예상과 달리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가 중공군의 난입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간신히 패전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제 궁지에 몰려버린 김일성은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으로 권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쟁 실패의 잘못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고 여기서 그 대상으로 떠오른게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이었다. 김일성 정권은 전쟁이 한참 잔행 중이던 1953년에 이미 박헌영을 체포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남로당파 간부들을 점점 제거하기 시작했다. 전 북한 내무상, 내가 치른 북한의 숙청

남로당이 먼저 숙청된 건 중국인민지원군 수십만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과 연계된 연안파를 정면공격하는 것은 힘들었기 때문이다. 소련 군정이 직접 심어두고 간 소련파 간부들에 대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남로당계는 인원은 상당하고 간부들의 명성만 높았지 북한 내 기반과 외부 후원자가 전무한 속빈 강정이었다. 애초에 남로당계 수천여명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부터 남쪽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로 미군정과의 관계가 파탄나버리고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무장봉기가 실패하자, 할 수 없이 자신들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맨몸으로 월북한 사람들었는데, 그나마 마지막 보루였던 박헌영이 집권하지 못하자 자신들의 명성만큼의 지위를 얻지도 못했고, 당연히 이들은 남한으로 다시 돌아가기만을 원했다.

그러던 참에 김일성이 남한을 침공할 계획을 들고 나오자, 이를 반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낀 김일성과 대립하던 파벌들이 남침에 대한 의견을 내놓음으로써 입지를 다지고자 했다. 박헌영은 1946년에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의 무력 통일론을 반대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선인민군이 진격을 개시하면 남조선에 남아 있는 과거 당원들과 좌익계 대중들이 들불처럼 봉기해서 인민군을 도울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했다. 이들은 일단 한반도가 적화통일이 된다면 자신들의 본거지인 남한의 지역적 기반을 활용해서 전후에 남로당파 자신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특히 남로당계는 남쪽과의 접촉이 완전히 봉쇄된 상황에서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내려온 좌익계 대중조직, 구 남로당 조직이 아직도 지하에 유지되고 있다고 제멋대로 판단했다. 그리고 이들이 전쟁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면 자신들의 발언권이 크게 강화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박헌영의 호언장담과 달리 남쪽에선 이미 대구 10.1 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 제주 4.3 사건 등을 거치면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집요한 탄압으로 좌익계 대중조직, 구 남로당 조직은 완전히 괴멸되었고, 대부분의 간부들은 월북 또는 우익으로 전향한 상태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권이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일으키기까지 했으니, 무장봉기는 고사하고 파업 비슷한 것도 없었다. 결국, 김일성은 전세가 뒤집힌 다음에 "남조선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물자 수송을 3일만 막아줬어도 우리 노동당이 전쟁에서 이겼다!" 라면서 박헌영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사실, 실제로 6.25 전쟁 초기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몰렸을 때 국군은 거의 궤멸 상태였고, 미군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만약에 부산, 대구 등지에서 민중봉기 혹은 노동자 파업으로 군수품 수송이 어느 정도 지체가 됐다면 초반부터 전세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로 한반도가 적화통일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박헌영과 남로당계도 전쟁 실패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니, 남한 침공 실패의 책임을 독박 씌우기도 쉬웠다. 실제로, 김일성은 박헌영을 숙청할 때 그야말로 빡돌아서 "야, 이 새끼야! 그게 무슨 말인가?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만 아니라 너한테도 책임이 있어! 너 어찌 정세판단을 그렇게 했는가? 나는 남조선의 정세는 모른다." 라고 화를 내면서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까지 집어던졌다고 한다.

더욱이 남로당계의 지도자였던 박헌영의 경우 해당 시기 김일성을 아득히 능가하는 개인 숭배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개인 숭배라고 하면 김일성을 생각하지만, 이 당시에는 박헌영에 대한 개인 숭배가 훨씬 심했다. 8.15 해방 직후 서울 시내에 "박헌영 동무는 우리의 부름에 답하라" 라는 전단이 나붙고, 월북 이후에도 사무실에 박헌영의 사진이 거리에 걸리는가 하면 박헌영 지지자들이 박헌영 선집을 발간해 바칠 정도였다. 특히 분단 이후 월북한 남쪽 출신 공산주의자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만한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개인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런 인물이 조직적인 세력화를 통하여 김일성에게 맞서기 시작한다면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정치적인 위협이 되었을 가능성도 컸다.

또한, 김일성은 항상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무정 또한 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체포한 뒤 숙청해버렸다. 김일성이 김무정을 밀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였다. 김무정이 "평양 방어는 무리다" 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억지로 평양 방어를 떠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일성은 평양이 함락당하자 방어사령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무정을 강제로 실각시켰다. 하지만, 김무정은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인민군 죄수부대장을 지내다가 8로군 시절부터 전우들이 많았던 중국 측의 요구로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병사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식으로 전쟁을 하는 도중에도 김일성은 반대파를 체포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였고,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는 미제침략자들에 맞서서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강변하면서 권력을 계속 강화해 나갔는데, 북한이 정전 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을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기념하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여기에 스탈린 우상화를 따라한 김일성의 개인 숭배 현상과 맞물려서 김일성파의 권력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

2.2. 6.25 이후

2.2.1. 전후 복구 사업

북한은 6.25 전쟁 당시 UN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있었다. 중요 도시인 평양시, 원산시를 비롯해 각종 인프라 시설들이 폭격으로 인하여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은 종전 직후부터 공산 국가들, 주로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공업화에 집착한 김일성의 구상에 대해서 소련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북한 내부에서도 중앙은행 총재 김찬을 비롯해서 일단 인민들을 먹여살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인물들이 있었다.

'민생 개선을 위한 경공업 우선 노선'과 '국력 신장을 위한 중공업 우선 노선'의 충돌은 20세기 이후 개발도상국에서 신흥공업국으로의 이행을 겪은 나라 대부분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가능한 한 빨리 공업기반을 확충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한된 자본을 어느 영역에 우선적으로 투입할 것인지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인데[10] 가까이는 산업화 시기 대한민국이 비슷했고, 멀리는 러시아 혁명 직후의 소련 역시 일국사회주의론과 연속혁명론의 충돌에서 이 문제가 중요한 논점이 되었다.

북한에서 이 갈등이 보인 특수한 양상은 단순히 국내 경제 노선 갈등이 아니라 정치외교적 대외 노선의 방향에 대한 갈등의 영역에 걸쳐 있었다. 당시 동구권 구성 국가의 상당수는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가였고, 이 때문에 동구권 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서구권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를 근거로 이후 브레즈네프 독트린 등의 제한 주권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국제적 혁명을 주장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이 이런 노선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리고 이 당시의 소련은 자국의 강한 영향력과 그에 기반한 진영 내부의 높은 통일성 및 유기적 연합성을 근거로 일종의 '공산주의 국제 분업'을 지향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각 국가가 각각 독자적으로 산업을 육성할 경우 진영 전체로 보면 심한 중복투자가 일어나게 되니 각 국가마다 유리한 분야를 찾아 그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하자는 것. 즉 한 국가 내에서 이뤄지는 지역별 특화 산업 육성을 국가를 넘어 진영 전체 단위로 하자는 말이었다. 당시 서구진영에 비해 경제력 및 생산력이 열세이던 동구권의 입장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서구권에 맞설 수 있는 경제적 역량을 구축하기 위한 계획이었기는 하나, 한 나라 안에서도 특정 지방에 고부가가치 산업이 집중되면 다른 지역에서는 자기 지역이 소외되었다는 불만이 터져나오는데, 하물며 주권을 가진 국가 사이에서야 필연적으로 기술집약적 중공업을 가져간 나라가 광업이나 농업 등 저부가가치 산업을 가져간 나라에 갑질하려 한다는 불평불만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이 구상에서 북한이 이미 상당한 산업기반을 갖춘 동유럽 국가들을 제치고 중공업이나 기술집약산업을 배정받기는 어려웠다. 만약 이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북한에 배정될만한 산업은 지하자원을 기반으로 한 광업 및 자급자족을 위한 농업, 경공업 정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으로는 극동에서 한국과 일본을 거점으로 하는 미국을 상대하기 위한 군사적 거점 역할을 기대할 수 있고, 이를 위해 제한된 중공업 육성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으나 북한 바로 옆인 만주에 일제가 건설한 공업 기반들이 있는 상황에서 중공업에 대한 투자가 크게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긴 힘들었다.

어쨌든 공업복구는 차근차근 이루어졌지만 농업을 경시하는 식으로 계획을 잘못 짜는 바람에 농산물 보급에 차질이 생겨 1955년 봄에 보릿고개가 닥쳐오면서 굶어죽는 사람들까지 속출했고, 이 때문에 김일성이 위기에 처할듯 싶었지만 김일성은 책임을 돌리면서 이를 돌파하는 형국이었다.

2.2.2. 스탈린 격하 운동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권시에는 스탈린의 개인 숭배가 추진되었고 스탈린은 신격화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는 스탈린 개인 숭배를 비판하고 스탈린의 신격화는 중지된다. 이후 소련 지도부는 집단 지도 체제를 형성하면서 자본주의 세력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게 되었고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극단적인 권력 투쟁의 형태는 많이 약화되었다.

소련은 공산주의 세력의 리더로서 자의 반 타의 반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었다. 소련 공산당의 변화는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가던 김일성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자 위기였다. 반대로 김일성의 숙청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반대파에게는 김일성을 비판하고 실각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2.2.3.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

북한은 소련은 물론 중국의 내정간섭을 일정 부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일단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의 분열을 이용하여 양쪽을 오가면서 삥을 뜯었고 덕분에 북한은 엄청난 외교적 이득을 보았다. 이들은 이런 김일성을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70년대까지 소련으로 하여금 "우리 말 더럽게 안 듣는 동쪽의 작은 나라"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고 1980년대에는 변화하지 않는 북한을 두고 조롱거리로 삼기까지 이른다. 박노자안드레이 란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말에 따르면 당시 많은 가정에서 독소전쟁 때나 사용했던 수준의 북한 선전책자를 일부러 구독까지 해가며 유머 잡지처럼 활용했다고 한다.[11] 그리고 란코프는 TV조선모란봉 클럽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당시 소련에서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이상하고 웃긴 나라, 미친 독재국가였다고 발언했으며, 북한을 동맹국으로 인식한 적이 없으며 소련 지도층은 북한을 매우 싫어했다고도 증언했다.

그래서 김일성 대신 각각 자신들과 친밀한 인사들이 정권을 잡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의 반대파인 박헌영·최창익·김두봉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박헌영은 모스크바의 국제레닌대학을 졸업하고 소련에서도 활동하였으며 '조선의 레닌'이라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명망 있는 공산주의자였다. 소련과 중국은 여러 차례 박헌영을 죽이지 말고 중국 또는 소련으로 보낼 것을 김일성에게 요구하였는데 김일성은 눈치를 보다가 결국 박헌영을 제거해버렸다. 김무정은 숙청된 후 중국의 요청으로 인하여 중국으로 보내졌다. 특히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중국과 상의도 없이 연안파를 대거 숙청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3. 전개

위에서 서술한 소련공산당에서의 스탈린 개인 숭배 비판 이후 김일성의 반대파들은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1956년 4월에 예정되어있던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김일성 개인숭배 비판과 당 운영의 민주화가 논의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개인숭배 움직임과 관련하여 오히려 엉뚱하게 개인숭배를 박헌영의 책임으로 뒤집어 씌우며 자아비판을 거부했다. 게다가 중공업 위주의 정책노선은 수정되지 않았으며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실망한 '8월 그룹'은 소련 대사관과 접촉하면서 자신들의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으나 공개된 소련 외교문서에서 8월 그룹은 김일성 실각을 애초에 도모한 적도 없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나마 리필규 등은 수틀리면 무력도 써야 한다고 강력히 언급했으나 그런 그조차도 일단은 김일성을 설득하여 박금철, 한상두, 박정애 같은 무능한 아첨꾼을 쫓아낸다는 것을 1차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술하였듯이 김일성은 자신의 측근들과 자신은 일심동체라고 어깃장을 부렸으며, 다만 최창익, 박의완 등에게 상무위원회 위원 자리를 주고, 박창옥, 윤공흠, 리상조, 리필규 등을 중앙위원회에 선거시켜주면서 약간의 당근을 제시했다. 또한 윤공흠을 부수상에 임명함으로 8월 그룹의 와해를 유도했다. 윤공흠 부수상 임명은 김광협의 반발로 무산.

하지만 이미 몰릴 데로 몰려 있던 8월 그룹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반격을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이 1956년 6월 1일부터 장기간 소련과 동유럽을 순방하는 외교활동을 위해 출국하면서 북한을 비우자 김일성 반대파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김일성 반대파의 움직임은 최용건을 필두로 한 김일성의 심복들에게 포착된다. 최용건은 반대파의 움직임을 즉시 김일성에게 알렸고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에 박정애남일을 파견하여 소련에게 더 이상 반대파 인사들과 접촉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등 자신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무마하기 위하여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획한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 이상의 공산주의 운동 경력을 갖고 있고 당내에서 명망이 높았던 최용건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여들이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최용건은 결국 동북항일연군 시절부터 함께 활동했던 김일성 쪽으로 붙어서 오히려 김일성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8월 종파사건에서 최용건의 역할이 어땠는지는 굉장히 논쟁적이다. 왜냐하면 그래도 지도자감으로 인정받은 김일성과 달리 무식하고 성격이 포악한 최용건은 심각하게 인기가 없었고, 1955년 김일성이 빈말로 최용건을 수상에 임명하겠다고 제안하자 모든 세력이 결사반대하고 나설 정도였다. 최용건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가 8월 그룹에 가담할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 것은 건재국장 리필규인데, 션즈화 교수는 리필규의 증언이 문제적이라고 평가한다. 다만 평양시 당위원회 부위원장 홍순관의 증언에 따르면, 최용건이 빨치산 파이지만 민족보위상 재직 시절 김일성과 마찰이 많아서 김일성 반대파로 들어갈 수도 있다고 본 사람들이 많았는데, 김일성이 최용건을 회유하였고, 리필규와 달리 최용건을 좋아하지 않았던 윤공흠이 전원회의 석상에서 조선민주당 소속이었던 최용건을 다짜고짜 당 정치위원, 부위원장에 등용함으로 당내 민주주의를 파괴했다고 비판하자 빡돈 최용건이 천황 폐하 만세 외치던 개새끼가[12] 어디서 망언이냐고 윤공흠을 구타하려고 달려드는 등 최용건이 8월 그룹에 가담할 가능성은 완전히 날아가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김일성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김일성파의 조직력이었다. 다른 계파들, 즉 소련파는 아예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았고 연안파는 고만고만한 지도자들이 많은 데다가 남로당파는 박헌영 및 남로당 쪽 지도자들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서 거의 와해 직전이었다. 반면 김일성파는 만주 빨치산 시절부터 김일성을 정점으로 똘똘 뭉쳐있었기 때문에 이런 권력 투쟁시에 다른 계파에 비해 조직력이 강했다.

김일성에 대한 반대파의 공개적인 도전은 1956년 8월 30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발언한 김일성의 지지파들은 서휘와 윤공흠이 책임자로 있던 직업동맹과 상업성을 비판했는데, 이는 김일성 지지파가 반대파의 중심인물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의 반대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윤공흠이 김일성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윤공흠은 김일성의 개인 숭배를 비판해야 하는 핵심을 벗어나 김일성의 간부정책 비판으로 방향을 벗어나게 된다. 이는 김일성 지지자들이 다수였던 전원회의 참석자들을 자극하였고 윤공흠은 이들에 의해 억지로 단상에서 끌려내려오게 된다. 중국으로 망명한 서휘는 윤공흠이 김일성의 간부들, 특히 당시 당 간부들의 신망이 높았던 최용건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은 '비정치적 과오'였다고 생전의 회고에서 밝히고 있다.

회의장의 살벌한 분위기를 체험한 윤공흠과 서휘 등 연안파 인사들은 회의장을 빠져나와 자동차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하여 신의주시로 향한다. 이들의 탈출은 김일성 반대파들의 권력투쟁에서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었다. 오후에 계속된 회의에서 김일성 지지파들은 반대파를 강도 높게 비판했고 반대파의 대표였던 최창익은 "당의 노선에는 문제가 없으나 개인 숭배의 움직임에는 문제가 있다"고 발언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후였다. 소련파인 박창옥은 "자신은 어떤 그룹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발언하였지만 주석단과 회의장에서의 항의가 들끓어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서휘와 윤공흠, 리필규는 출당 조치되고 최창익과 박창옥의 당직은 박탈되었다. 동시에 최창익박창옥은 내각부수상직 등의 정부 직위도 박탈되었다. 즉, 반대파의 정치적 숙청으로 결과가 도출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운동이었던 8월 종파사건은 이렇게 김일성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사실 김일성 반대파들의 계획은 생각보다 허술했다. 김일성 지지파들의 수가 더 많은 상황에서 한번의 회의를 통해서 김일성을 끌어내린다는건 어려운 일이었고 게다가 김일성의 개인숭배 문제나 정책문제를 공격하는 데에 집중하지 않고 당내에서 신망이 높았던 최용건을 공격하면서 더욱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신들을 부추겼던 소련이나 역시 김일성에 불만이 있던 중국의 개입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두 나라는 생각보다는 적극적으로 북한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출당된 인사들의 복당을 요구하는 정도로만 개입했다. 과거 소련과 중국 자료가 공개되기 이전까지 소련 측의 태도에 대해서 김일성이 못마땅했던 소련이 연안계를 이용하여 김일성을 회치려 했다는 주장이 많았으나, 문서고가 열리고 나서 중국은 애초에 이들에 대해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으며, 소련도 괜히 헝가리나 폴란드같은 대소동이 북한에도 벌어질까봐 내정간섭을 하려 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연안계를 일부러 방패막이로 내세웠느니 어쩌니 하는 것도 오해였으며 북한의 고려인, 연안계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소련, 중국 출신이라고 외국 명령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그런 인간들이 아니었다.

4. 결과

8월 전원회의의 조치는 즉시 중국과 소련에 알려졌다. 중국에 망명한 서휘와 윤공흠, 그리고 당시 주소 북한대사인 리상조 등은 중국과 소련에게 북한에 개입하여 이러한 결과들을 수정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소련은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김일성에게 8월 전원회의의 조치를 철회하고 관련자들을 다시 복권시켜줄 것을 요구할 목적으로 아나스타스 미코얀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했다. 미코얀은 소련의 총정치국 부서기장으로 러시아 혁명을 눈으로 본 사람이기도 했으며, 헝가리 등 동유럽의 민주화 바람을 잠재운 인물이라 김일성이 함부로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소련 측 대표단은 방북 전 중소회담 일정을 가졌는데, 독재 체제를 계속 유지하는 중국을 못마땅하게 여긴 소련 측이 스탈린 격하 운동을 운운하며 집단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회담 내내 언급했다. 사실 중국 입장에서도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말들이었기에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소련의 회담 상대 미코얀은 위에도 상술하였다시피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고, 덕택에 소련에 의해서 독재 체제에서 집단 체제로 바뀐 전례가 있던 중국은 털린다. 그런데 중국은 바로 뒤에 연달아서 북중회담을 했는데 북한의 처사에 격분한 중국은 소련에게 감정이 안 좋았음에도 다음날 비행기로 북한으로 미코얀과 같이 방문하겠다고 선언하기에[13] 이르렀다. 이것만 놓고 봐도 중국조차 얼마나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김일성은 미코얀과 펑더화이가 참석한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에서 자신에게 과오가 있음을 인정하기보다는 최창익과 박창옥의 죄를 입증하고 자신이 취한 조치가 정당했음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술핵으로 무장한 주한미군과 한국전쟁으로 대폭 증강된 한국군이 건재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동맹국들의 요구를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방문단 포스가 너무 강력했다. 결국 김일성은 굴복, 최창익의 출당 조치를 철회하는 굴욕을 겪고 자중하는 모양새를 펼친다.

하지만, 실질적인 복권 절차는 차일피일 미루면서 시간을 끌었다. 윤공흠과 서휘 등 중국으로 망명한 김일성 반대파들 또한 김일성의 박해가 두려워 귀국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그들은 이후에도 계속 중국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김일성은 도리어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고 자신에게 반대하던 반대파들을 회유하는 한편 반대파의 완전한 제거를 위하여 '반종파투쟁'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김두봉, 오기섭, 류축운 등이 현직에서 해임되는 등 1957년 여름까지 200여 명의 반대파 인사들이 '종파주의자'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종파주의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두봉을 국가수반의 자리에서 내쫓아 실각시킨다.

이후 1958년, 소련과 중국이 공산권의 헤게모니를 놓고 충돌하면서 김일성의 단일 체제 수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소련과 중국 모두 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여념이 없었고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협상을 벌이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원시적 형태의 주체사상이 처음 등장하는데, 결국 1970년대에 가면 김일성 개인 숭배와 세습을 정당화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완전히 대체한다.

결국 김일성은 중국과 접촉해 지지를 약속하는 대신 북한에 주둔 중이던 중공군을 철수시키고 펑더화이의 내정간섭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는 엄청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김일성 반대파를 지킬 방패막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미코얀과 펑더화이의 개입으로 목숨을 부지했던 최창익과 박창옥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숙청당했고 기타 김일성 반대파들 역시 비슷한 말로를 맞이했다. 이러한 숙청은 1960년까지 이어졌고 김일성의 숙청을 피하여 소련이나 중국으로 도망친 사람만 수만여 명에 달했다.

즉,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을 막기 위하여 내정간섭까지 불사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견뎌내고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다. 오히려 김일성은 더 많은 반대파들을 숙청, 제거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화하고 주체사상을 결합시켜 자신을 완벽하게 신격화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 세습을 정당화하며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아닌 봉건주의 사상으로 전락한다.

지금까지도 북한과 중국은 겉으로는 우애를 과시하지만 속으로는 불신과 대립이 여전하다. 당시 철군문제와 연안파 숙청으로 관계가 더 냉랭해졌고, 김일성은 "수십만의 군대가 우리 땅에 머무르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자 소련은 "중국지원군이 조선에 계속 주둔하는 것이 조선 인민과 모든 사회주의 진영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서 주둔을 지지했으나 결국 1954년 중국군 7개 사단이 철수했고 이듬해 3월 6개 사단이 추가로 떠났으며 1956년 4월 북-중 관계가 심각해졌을 때도 44만의 지원군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었다. 완전히 철수하기까지는 2년이 더 걸렸다.

5. 끝없는 숙청

김일성은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자가 아니라면 같은 파벌인 갑산파라고 해도 숱하게 숙청하였으며 자신의 충복이었던 자들도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면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심복이었던 김광협.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는 8월 종파사건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 한다. 8월 종파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수의 '종파주의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정치범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지속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김일성 반대파의 대표나 다름없었던 최창익은 완전히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처형당해 일생을 마쳤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그의 먼 친척까지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시골로 강제 이주당하는 등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탈북자는 자신이 최창익의 재종손녀인데 최창익의 재종질인 아버지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고 자신은 다행히 어머니의 출신 성분이 좋아 어머니와 함께 회령으로 추방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녀의 할아버지는 최창익과 6촌 관계였으며, 이 때문에 본인의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할머니, 본인의 아버지를 포함한 이들의 자식 4형제를 포함한 총 18명의 가족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 7촌 조카의 가족이 이 정도 꼴을 당했으니 그보다 훨씬 가까운 관계의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최창익의 숙청으로 인한 피해는 황장엽의 탈북 이후의 숙청으로 인한 피해와 거의 비슷한 규모였다고 하니, 그 혹독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김일성이 숙청한 연안파의 총합은 더욱 어마어마해 숙청 피해자 총합이 6만 명 내지 9만 명[14]에 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1 #2

박헌영 역시 이때 목숨이 달아났다. 최종 재판은 이루어졌지만 그가 미군정과 내통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우길 단서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이에 김일성은 당시 내무상 방학세에게 "방 동무, 리론가 박헌영은 지금 어떻게 됐느냐. 문제의 증거는 완벽하게 확보했느냐."라고 묻다가 나중에는 아예 "증거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오늘 밤에 목을 따버려!"라고 말하여 당일 비공식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사망 시기는 빠르면 8월 종파사건이 벌어지기 전인 7월, 늦어도 1956년 12월에서 1957년 초로 추정되고 있다.

6. 후폭풍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만 해도 북한에는 제한적이지만 나름 민주적인 의사 결정 과정이 있었다. 이전에는 이러한 시처럼 조직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고, 소련 등에서 들여온 해외 문화의 유입으로 문화적으로도 비교적 풍요로웠으며, 자유로운 이동은 가능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김일성의 1인 독재가 공고화되면서 그러한 자유는 사그라들기 시작하다가 1967년 도서정리사업으로 북한의 사회적 자유는 말살, 2024년 현재까지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인권 실태를 만들어놨다.

또한 이 사건 전까지는 비록 김일성 위주로 서술되기는 했지만 북한의 역사책이나 역사교과서에 조선독립동맹이나 조선의용군의 활동도 기록되어 있었지만 이후로는 오직 김일성의 독립운동만이 기록되게 된다.

7. 8월 종파사건이 성공했다면

만일 8월 종파사건에서 김일성이 실각했다면? 아니면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의 자리는 유지하더라도 권력이 제한되고 여러 정치 세력들이 서로 견제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면? 북한이 적어도 지금과 같은 수준의 최악의 독재국가이자 파탄국가로 전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방식이 되었다면 북한은 현실의 김일성이 신격화되는 김씨 세습 왕조 체제가 아니고 소련[15], 구 동유럽, 중국[16], 쿠바, 베트남, 라오스 등의 다른 공산 국가들처럼 임기가 제한된 최고지도자를 중심으로 당, 정, 군의 최고위 간부들이 권력을 공유하는 집단지도체제 형태가 완성됐을지도 모른다.[17] 물론 이 경우 소련이나 몽골, 동유럽 국가들처럼 자본주의로의 복귀 열풍이 불면서 공산 정권 자체가 무너졌을지, 아니면 중국, 베트남, 라오스, 쿠바처럼 내부 통제에 성공해서 체제 자체는 유지하되 내부 개혁으로 관료 체제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정도에 그쳤을지에 대해선 어느 쪽으로 흘러갔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집단지도체제의 경우, 자본주의로 완전히 복귀하거나, 쿠바처럼 관료적 계획경제 체제의 큰 틀을 그대로 유지하기보다는 1980년대 중국과 베트남이 개혁 개방에 나서면서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고, 국가계획경제 체제는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부분적이지만 상당 부분 도입할 때 북한도 함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랬다면 북한은 중국처럼 일당 지배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경제 개발에 올인하는 개발독재의 길을 밟았을 것이고, 2010년대의 중국-대만 관계키프로스-북키프로스 관계, 1980년대 동독-서독 관계처럼 남북한도 완전한 통일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대규모 군사 대치와 위협을 그만두고 무역과 문화 교류가 자유로운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이 셋 중 21세기까지 현존한 둘은 2022년 기준 규정 여행문서 지참만으로 출입경심사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며, 당시 독일도 장벽은 있었으나 동서 왕래 자체가 원천 봉쇄된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도 지금처럼 처절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도 방문을 위해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선에서 끝났을 것이다.

실제로 덩샤오핑을 위시한 중국 최고지도부는 1980년대에 개혁개방을 시작하며 김일성에게도 여러 차례 함께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런 영향으로 북한 경제 관료 일부는 중국에서 연수를 받으면서 개혁개방 정책을 공부하고, 1984년에 합영법을 발표하면서 조총련계 일본 자본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도 했지만 시늉에 그쳐 중국 지도부가 대단히 실망했다고 한다.

베트남도 1986년부터 도이머이 정책을 표방하면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18] 부분적으로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했으며, 옆나라 라오스도 이를 본받아 개혁개방을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수십 년간 전쟁을 했던 베트남도 미국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고 군사 협력과[19] 경제 교류를 하고 있는데 북한만 미국과 과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20]

그래서 최소한 북한이 정치, 경제 같은 분야에서 지금과 같은 막장 상태가 되진 않았을 지도 모르고 남북관계와 한반도의 군사적 대립 상황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똑같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일당제 인민민주주의 체제라도 북한의 우스꽝스러운 봉건 세습 왕조 체제, 당 관료와 군부가 적당히 권력을 균점하면서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당 안팎에서도 국가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획책하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의 다양성은 보장하는 중국, 베트남, 라오스, 쿠바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반면에 김일성은 이 사건의 배경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망 이후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과 다른 파들의 존재 그 자체에 있음을 지목하고 완전한 1인 독재 체제를 위해 진행을 서둘렀다.

결과적으로 8월 종파사건에서 수령 김일성을 끌어내리지 못한 것이 김정일을 거쳐 지금의 김정은까지 실질적 왕조인 백두혈통으로 이어졌으니 북한 주민에게는 불행의 시작으로 볼 수 있겠다.

8. 대중매체에서

현재까지 대중매체에서 다뤄진건 1981년에 방영된 MBC제1공화국이 유일하다. 1982년 1월 7일 방영된 34회 '김일성과 숙청극' 편으로 국정환이 김일성 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는 실제 사건과는 달리 작은 회의실에서 10여명의 간부들끼리 논쟁을 벌이는 식으로 묘사된다.

9. 관련 문서


[1] Second Arduous March.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일어난 대규모 기아 사태는 '세 번째 고난의 행군\'이다. 첫 번째는 1938년 12월부터 1939년 3월까지 김일성의 전략적 오판으로 보천보 전투가 있은 후 일본에 의한 대규모 토벌 작전을 피해 다닌 시기를 뜻하고, 두 번째는 이 사건과 천리마 운동까지를 뜻한다.[2] 대한민국 학계에서 부르는 중립적인 표현.[3]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3기 제2차 전원회의가 진행된 날이다. 조선로동당 내에서 김일성을 반대하는 이들은 이 날 당과 국가의 개혁을 위한 비판 발언들을 쏟아내려 하고 있었지만 최용건을 비롯한 만주파의 김일성 친위세력들은 이미 낌새를 감지하고 소련파와 연안파를 쳐낼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윤공흠이 발언을 하려고 할 때 끌어내리도록 한 것도 최용건이다.[4] 이들 중 김도만의 경우 박금철을 찬양하는 '일편단심'이라는 영화를 만드는 등 박금철과 가까운 관계였던 건 분명하다. 갑산공작위원회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해방 이후에 북한에서 박금철 등 갑산파 일원들과 계파를 형성했을 가능성은 있다.[5] 한반도의 현대사를 바꾼 분기점으로 평가되는 동아일보의 고의적인 오보가 큰 영향을 미쳤다.[6] 이 점 때문에 북한에서는 남한에서 알려진 것과 달리 러시아어 유래 외래어가 그렇게 까지는 많이는 안 쓰이고 오히려 영어에서 유래한 외래어(미싸일, 호텔, 모자이크, 마이크, 뽀트 등)가 더 많이 쓰인다. 그런데 해방정국 시기의 소련에 충성하던 김일성을 두고 일어난 소문이 분단으로 인한 단절 탓에 거의 최신 주장이 되었고, 러시아와 가까워서 분단 이전에도 사투리에 러시아어 유래 외래어가 많던 함경도 위주 출신의 탈북민의 증언이 많아 그 반대의 주장이 교과서에까지 실렸을 정도다.[7] 김일성이 1940년에 연해주로 월경하고 김책이 1943년에 가장 늦게 넘어갔다. 이 와중에 김정일이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8] 정작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가 말로는 북진통일을 외치면서 정작 국방력 증대에 무능함을 보였다.[9] 이 당시에 소련 당국이 재빠른 인구복구를 위해 무자녀자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늘렸고, 미혼부, 미혼모 가릴거없이 한부모 가정에 대해서 대대적인 지원을 단행했을 정도였다. 그 영향이 지금까지도 남아서 러시아에서 동거와 미혼모, 미혼부에 대한 인식이 관대하다.[10] 이 갈등을 겪지 않는 경우는, 현대와 같이 산업구조가 고도화되기 이전인 19세기 무렵에 이미 산업화가 진행되어 축적된 자본을 통해 비교적 여유있게 산업구조 발달을 감당한 열강 혹은 아직 산업기반이 확충되지 않은 상태인 저개발 국가가 해당된다.[11]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문서에서 당시 소련 사람들이 접했을 법한 개그 내용들을 상당량 접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동쪽 변방의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에 불과한 김일성을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도 능가하는 사상가, 지도자이자 '인류의 대성인'으로 칭송하고 소련 지도자들도 김일성에게 굽실거린다고 주장하고 있었으니 소련 사람들이 비웃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12] 윤공흠은 지주 집안 출신으로 일본 비행학교를 졸업했다.[13] 이 때 중국 측의 대표는 펑더화이였는데 6.25 전쟁의 조중연합군 총사령관이자 당시 마오의 오른팔로 김일성과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14] 정황상 이들의 가족까지 포함한 수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15]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망 이후부터[16] 덩샤오핑 집권 직후부터 시진핑 집권 이전까지[17] 김일성 견제에 성공했다면 내각 수상이나 조선노동당 위원장 자리는 김일성 반대파들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최창익이 맡았을 것이다. 또한 김두봉도 연안파였던 만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자리는 김두봉이 이후로도 몇 년 동안 계속 맡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창익도 당시 62세(1895년생)로 나이가 꽤 많았기 때문에 소련이나 동독, 중국, 베트남처럼 다음 지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관례를 따랐을지도 모를 일이다.[18] 사실 베트남의 대미 관계 개선은 파리 평화 협정 이후 줄곧 계속되었다. 미국의 전쟁을 경험한 북베트남은 전후 베트남의 재건과 발전에 있어 미국이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소련보다 미국과 친한 게 유익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베트남의 패망, 미군 유해 문제로 인해 관계 정상화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이 때문에 베트남은 일시적으로 소련과 관계를 개선하는 노선을 채택했다.[19] 베트남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깜라인만 해군 기지를 미 해군 태평양 함대에 임대한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현재도 임대는 아니지만, 미 해군 함정들이 종종 깜라인만 군항에 입항하고 있다. 이는, 베트남의 국력이 중국과 맞서기에는 현실적으로 너무 힘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20] 이 점은 이상할 것도 없는 게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자’기 때문에 미국에 대해 쿨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양민 학살 문제에 대해서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고. 먼저 전쟁을 일으켰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거꾸로 밀려서 나라가 망할 뻔하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북한(여기에 전쟁 기간 내내 엄청난 폭격을 당한 건 덤)과는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