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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2:15:53

감(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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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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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 )
1.1. 회산 감씨
1.1.1. 항렬표(行列表)
2. 실존 인물
2.1. 한국2.2. 중국
3. 감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4. 가상 인물5. 여담

1. (달 )

한국과 중국에 존재하는 성씨.

(夏)나라 초기에 지금의 산시성 후현 남서쪽에 감(甘)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강(姜)씨 성의 일파로 후에 동쪽에 있던 지금의 허난성 이양으로 이동했다. (商)나라 때에 이르러 감인(甘人)[1]의 수령 감반(甘盤)[2]은 상나라 왕 소을(小乙)의 신하가 되고, 이어서 부열(傅說)과 함께 상나라 고종(高宗) 무정(武丁)의 현신(賢臣)이 되어 무정을 보좌하여 나라의 중흥[3]을 이루었다. 이런즉 북송(北宋)의 <광운>(廣韻)[4]에서 이르길, 감(甘)씨 성은 무정의 신하인 감반(甘盤)의 후손이고, 무정 때 상나라가 (殷)(지금의 허난성 안양시 샤오툰 일대)[5]에 있던 연고로 이 계통의 감씨는 안양(安陽)에서 나왔다.

다른 계통의 감씨(甘氏)는 희(姬)씨 성에서[6] 기원된 바 춘추시대에 형성되고 뤄양에서 비롯되었으니 (周) 혜왕(惠王) 희랑(姬閬)의 아들 숙대(叔帶)의 후손이다. <사기>(史記) 주나라 본기(周本紀)에 혜후(惠后)[7]가 숙대를 낳고 혜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기색은>(史記索隱)[8]에 이르길, 숙대는 혜왕의 아들이자 양왕의 동생으로 감(甘) 땅에 봉해졌기에 <좌전>(左傳)에서는 감소공(甘昭公)이라고 칭한다. <정의>(正義)에서는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하여 이르길, 감성(甘城)은 뤄주 허난현[9] 남서쪽 25리에 있는데 숙대가 감읍(甘邑)에 봉함을 받아 감소공(甘昭公)이라 불렸고 이후 읍 이름을 성씨로 삼았으니 바로 감(甘)씨이다.

한국의 감씨는 회산, 창원, 합포 등이 있으나 모두 창원을 뜻하는 말로 같은 뿌리이며 회산 단본이다. 감(甘)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6,024명으로 조사되었다.

1.1. 회산 감씨

{{{#!wiki style="margin: -1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230><tablebordercolor=#004db1>
檜山 甘氏
회산 감씨
}}}
<colbgcolor=#004db1> 관향 경상남도 창원시
시조 감규(甘揆)
중시조 감철(甘喆)
집성촌 충청북도 충주시
경상남도 창원시
경상남도 거창군
경상남도 창녕군
인구 6,024명(2015년)
회산 감씨(檜山 甘氏)의 시조는 원나라 성종 때의 한림원(翰林院) 태학사(太學士) 감규(甘揆)이다. 자는 양원(養元), 호는 연강(延岡)이다. 1351년(충정왕 3) 원나라에 와 있었던 공민왕(恭愍王)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종하여 고려에 들어왔다. 이때 감규와 함께 공소(孔紹), 장경(張敬), 황보영(皇甫榮), 독고억(獨孤億), 서문(西門)씨, 남궁(南宮)씨, 변숙(邊肅) 등 7인도 함께 들어와 8학사가 되었다. 그는 고려조에서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고 후에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A] 배위는 정경부인 함평 이씨로 태사 겸 대제학 이흡(李潝)[11]의 딸이다.

시조 감규가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진 후 14대손[12] 감수화(甘受和)에 이르기까지 연릉(延陵)[13]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A] 이후 15대손[15]인 중시조 감철(甘喆)이 북벌을 간하여 중지하게 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16]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회산(檜山)[17]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B]

회산 감씨 족보에 의하면, 고려조에 평장사 감기(甘箕)[19], 평장사 감흥협(甘興鋏)[20], 평장사 감희(甘熙)[21]를 비롯하여 이부상서[22] 감철의(甘鐵顗)[23], 밀직제학[24] 감소연(甘紹延)[25], 중추부사 감진요(甘震耀)[26], 이부시랑[27] 감전형(甘全形)[28], 이부시랑 감침(甘鍼)[29], 평장사 감붕후(甘棚垕)[30] 등의 인물을 배출하였다고 한다.[A]

조선조에서는 중시조 감철(甘喆)[32]의 손자로서 예부승지[33]를 지낸 감원한(甘元漢)[34]과 이조참의에 오른 감익한(甘益漢)[35] 형제가 뛰어났다.[B] 특히 감익한은 1455년 (단종 3)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봉하자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를 입은 충신이었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원종공신에 녹훈된 내금위 정략장군[37] 감경인(甘景仁)[38]과 사후 군자감 직장에 추증된 감경륜(甘景倫)[39] 형제가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동학농민운동을 평정하고 품계가 절충장군[40]에 이른 감재원(甘在元)과 김해부사[41]를 지낸 감기현(甘麒鉉) 부자가 있었다.

시조 감규의 묘는 충청도 공모산(功慕山)에 있었고 어제(御製) 신도비가 무곡산(舞谷山)에 있었다고 하나 실전되었다. 이에 후손들이 세거지인 창원시 내리동에 제단과 신도비를 설치하고, 매년 음력 4월 15일 향사를 지낸다. 병진보(丙辰譜)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감씨가 합포 감씨, 창녕 감씨, 거창 감씨, 충주 감씨, 부령 감씨 등 5본이 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세거지명이라고 하며, 회산 감씨 단일본이라고 한다.

2015년 기준 국내에 총 6,024명이 있는 희성이다. 발음, 표기에 따라서 강씨, 김씨와 혼동하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한다.

1.1.1. 항렬표(行列表)

35세 현(鉉), 태(泰)
36세 ○영(泳), ○식(植), ○주(柱)
37세 상(相), 경(炅), 병(炳)
38세 ○병(炳), ○규(圭), ○은(垠)
39세 동(東)
40세 ○희(熙)
41세 채(埰)
42세 ○석(錫)
43세 호(浩)
44세 ○근(根)
45세 형(炯)

2. 실존 인물

2.1. 한국


2.2. 중국


3. 감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

4. 가상 인물

5. 여담



[1] 하나라 초기 감(甘) 땅에서 살다 이후 동쪽으로 이동해 온 일족.[2] 상나라 왕 소을(小乙)은 재위 6년에 아들 무정(武丁)을 하(河)에 살게 하고 감반(甘盤)에게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후 무정이 상나라 고종(高宗)으로 즉위하고 부열(傅說)과 함께 감반을 중용하여 중흥을 이루었으니 감반은 고종의 스승이자 신하이다.[3] '무정중흥'(武丁中興) 또는 '무정성세'(武丁盛世)라고 한다.[4] 대송중수광운(大宋重修廣韻)의 약칭이다.[5] 은(殷)으로 도읍을 옮긴 18대 왕 반경(세조)부터 29대 왕 제신(주왕)까지의 상나라를 만상(晩商)이라고 하며, 이 때문에 상나라를 은나라로 칭하기도 한다.[6] 희(姬)는 주나라의 왕성이었다. 참고로 주나라가 멸망한 후 다수의 주나라 왕족들은 정체성 유지를 위해서인지 주(周)씨로 자기의 씨를 바꿨다.[7] 숙대는 후비 혜후의 소생이고 양왕은 정비의 소생으로 이복형제간이다.[8] 당나라의 사마정(司馬貞)이 <사기집해>(史記集解)를 근거로 지은 사기(史記)의 주석서. <사기집해>(史記集解), <사기색은>(史記索隱), <사기정의>(史記正義)를 통틀어 사기(史記) 삼가주(三家注)라고 한다.[9] 현재의 허난성 뤄양시.[A] 족보의 기록으로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11] 潝은 물 빨리 흐르는 소리 , 웅덩이에 빠질 의 2가지로 읽힌다.[12] 시조 15세.[13] 황해남도 연안군의 옛 명칭. 고려의 수도가 개경(현재의 개성직할시)이었으므로 중국에서 도래하여 우리나라에 정착한 사람들은 개경 인근의 연안, 해주 등을 본관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A] [15] 시조 16세.[16] 고려의 종2품 상계 문관의 품계이다. 다만 감철이 조선 후기 효종대의 인물이므로 연대상 모순이다.[17]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B] 족보의 기록으로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기록이 없다.[19] 시조 2세. 시조 감규의 아들.[20] 시조 4세. 시조 감규의 증손.[21] 시조 5세. 시조 감규의 현손.[22] 고려시대 이부의 장관직인 상서로 정3품 관직이다. 조선시대 이조판서와 비슷하다.[23] 시조 6세.[24] 밀직사의 제학으로 정3품 관직.[25] 시조 7세.[26] 시조 8세.[27] 고려시대 이부의 차관직인 시랑으로 정4품 관직이다.[28] 시조 10세.[29] 시조 11세.[30] 시조 13세.[A] [32] 시조 16세.[33] 조선시대 승정원의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등 6승지는 각각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자문을 맡기도 하였다. 예부승지(禮部承旨)는 예방승지(禮房承旨)라고도 하며 예조의 자문을 맡은 우승지를 말한다.[34] 시조 18세.[35] 시조 18세.[B] [37] 무신 종4품 상계의 품계명.[38] 시조 25세.[39] 시조 25세.[40]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명.[41] 부사는 정3품 지방관직이다.[42] 현재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대이다. 병진보(丙辰譜)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감씨가 합포 감씨, 창녕 감씨, 거창 감씨, 충주 감씨, 부녕 감씨 등 5본이 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세거지명이라고 하며, 회산 감씨 단일본이라고 한다.[43] 종6품의 지방직.[44] 정6품.[45]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명.[46] 중추부의 첨지사. 정3품 관직.[47]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명.[48] 중추부의 첨지사. 정3품 관직이다.[49] 현감은 종6품 지방관직이다.[50] 부사는 종3품 지방관직이다.[51] 생몰년 1914년~1950년.[52] 승상(丞相)에 상당하는 재상직. 감라는 불과 12세에 상경이 되었다.[53] 본래 (魯)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54] 소의무혜유애령현왕(昭毅武惠遺愛靈顯王).[55] 감스트라는 예명은 감씨가 아니라, 노르웨이의 축구 선수인 모르텐 감스트 페데르센에서 따온 것이다.[56] 335가구 중 북한 지역에 거주하던 가구수는 24가구가 전부였으며, 대부분 황해도 지방에 거주하였다. 비슷한 사례로 가씨, 범씨, 사공씨, 팽씨, 형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