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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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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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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부대빈 장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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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의 후궁
옥산부대빈 장씨 | 玉山府大嬪 張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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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의 폐비
폐비 장씨 | 廢妃 張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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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빈묘.jpg
대빈묘 전경
출생 1659년 11월 3일[1]
조선 한성부 북부 연은방 불광산계
(現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일대)
사망 1701년 11월 9일[2][3][4] (향년 42세)
조선 한성부 창경궁 취선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대빈묘(大嬪墓)
재위기간 조선 숙원
1687년 1월 23일 ~ 1688년 11월 19일
조선 소의
1688년 11월 19일 ~ 1689년 2월 4일
조선 희빈
1689년 2월 4일 ~ 1690년 11월 12일
조선 왕비
1690년 11월 12일 ~ 1694년 4월 25일
조선 희빈
1694년 4월 25일 ~ 1701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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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인동 장씨[5]
옥정(玉貞)[6]
부모 부친 - 옥산부원군 장형
(玉山府院君 張炯, 1623 ~ 1669)
모친 - 파산부부인 파평 윤씨
(坡山府夫人 坡平 尹氏, 1626 ~ 1698)
형제자매 2남 2녀 중 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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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 오빠 - 장희식(張希栻, 1640 ~ ?)
친언니 - 김지중(金志重)의 처
친오빠 - 장희재(張希載, 1651 ~ 1701)
배우자 숙종
자녀
슬하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경종(景宗, 1688 ~ 1724)
차남 - 이성수(李盛壽, 1690 ~ 1690)
종교 성리학무교(巫敎)
봉작 숙원(淑媛) → 소의(昭儀)
→ 희빈(禧嬪) → 왕비(王妃)
희빈(禧嬪) → 부대빈(府大嬪)
당호 취선당(就善堂)[7][8]
사당 대빈궁(大嬪宮)
존호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9]
}}}}}}}}} ||
1. 개요2. 생애3. 가계
3.1. 친가(인동 장씨)3.2. 외가(파평 윤씨)3.3. 시가(전주 이씨)3.4. 배우자 / 자녀
4. 여담5. 관련 문서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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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89236A> 희빈 장씨를 다룬 KBS 〈역사의 라이벌〉 영상
조선 19대 국왕 숙종후궁이자 20대 국왕 경종의 생모이다. 1689년(숙종 15년)[10]부터 1694년(숙종 20년)까지 왕비로 있었지만 폐비였던 전임 왕비 인현왕후가 삼불거로 복위하게 되면서 중혼법에 따라 다시 후궁으로 강등해 돌아갔다. 정식 명호는 1722년(경종 2년)에 새로이 창안된 작위인 '부대빈(府大嬪)'을 쓴 옥산부대빈 장씨이지만 1725년(영조 즉위년)에 세워진 구호에 따라 다시 '희빈'이란 강칭으로 널리 이용됐기에 현대인에겐 '희빈 장씨', '장희빈', 혹은 그녀의 이름이었던 '장옥정(張玉貞)'[11]으로 익숙하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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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계

3.1. 친가(인동 장씨)

가계를 보면, 주로 무과·의과·역과에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고, 이들 중 대부분이 1701년(숙종 27년), 무고의 옥연좌되어 유배 또는 처형당하는 등 말년이 좋지 않았고, 국문을 받는 도중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종 대에 비로소 '사죄인(死罪人)'이라고 하여, 유배지에서 죽은 사람들이 풀려났지만, 사실상, 집안이 몰락하였다.[12][13] 다만, 영조, 정조 재위 연간에, 7~8촌[인척관계] 사람들이 과거 급제하여 장형의 대를, 양자를 통해 잇는 등 집안을 겨우겨우 이어나갔다.

3.2. 외가(파평 윤씨)

3.3. 시가(전주 이씨)

3.4. 배우자 / 자녀

4. 여담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전에 역관 장현은 국중(國中)의 거부로서 복창군 이정과 복선군 이남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의 옥사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頗有容色)."
숙종실록》 숙종 12년(1686년,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사간원의 한성우가 궁인 장씨를 염려하여 왕에게 미인을 경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실록》 숙종 12년(1686년,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4일 (갑자) 2번째기사
"김창협이 장씨의 미색에 마음이 현혹되어 은총을 열어준다는 비난을 없게 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숙종실록》 숙종 12년(1686년,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9월 13일 (갑오) 1번째기사
파일:장희빈.jpg
* 실록에 '미인'이라 기록된 여인인지라, 희빈 장씨의 미모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호기심이 매우 크다. 그러다보니 여럿 그림들이 희빈의 얼굴인 양 알려져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위의 사진. 하지만, 희빈의 초상화는 전해지는 게 없다. 저 그림은 고영훈 화백의 서양화 기법으로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애초에 왕실의 여인이 기생 마냥 떨잠을 비대칭으로 꽃은 것부터 말이 되지 않으며, 동양화라고 볼 수도 없는 그림이다. 즉, 이 그림은 그저 동양화도 초상화도 아닌 상상화이며 장희빈의 진짜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5. 관련 문서

6. 대중매체에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희빈 장씨/대중매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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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9월 19일.[2] 음력 10월 10일.[3]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8일 (辛酉) 8번째기사 中 "지금 나는 종사(宗社)를 위하고 세자를 위하여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니, 어찌 즐겨 하는 일이겠는가? 장씨는 전의 비망기(備忘記)에 의하여 하여금 자진(自盡)하게 하라."[4]숙종실록》 37권, 숙종 28년(1702년, 청 강희(康熙) 41년) (壬午) 10월 9일 (병술) 2번째기사 中 "내일이 곧 장씨(張氏)의 초기(初朞)이므로 […\]"[5] 양주파 22세. 족보[6]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 단암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丹巖漫錄)>에 적혀 있다.[7] 중전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굿했던 장소로 쓰이기도 했으며 '장희빈의 호'로 불리기도 했다.[8] 나중 가서는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동궁이 되기도 하였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였다.[9] 왕을 낳은 다른 후궁들과는 다르게 시호를 받지 못하였다. 옥산부대빈은 존호(尊號)이지 시호(諡號)가 아니다.[10] 책비례를 올린 1690년(숙종 16년) 음력 10월 22일부터를 왕비 재임 기간이라 책정하기도 하지만 이는 오류이다. 세자빈 출신으로 남편이 왕으로 즉위하여 왕비가 된 역대 왕후들의 책비례는 모두 선왕의 국상을 마친 후(대체로 남편의 재위 2년이 된 해)에 이뤄졌다는 사실을 모른 탓. 옥정은 전비였던 인현왕후가 폐출된 지 나흘째 된 날인 숙종 14년(1689년, 기사년) 음력 5월 6일에 후임 왕비로 지정되어 5월 13일에 왕비로 정호됐으며, 당시 장렬왕후의 국상 중이었기에 책비례는 원칙대로 국상을 마친 후로 미뤄져 다음해인 숙종 16년에 치러진 것이다.[11] 인현왕후 민씨의 작은오빠이자 영조의 킹메이커 3인방 중 한 명이었던 단암 민진원의 <단암만록(丹巖漫錄)>에 기록되어 있다.[12] 《경종실록》 4권, 경종 1년(1721년, 신축 / 청 강희(康熙) 60년) 9월 29일 (정사) 3번째기사[13] 오죽하면 무고의 옥 이후, 장형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풍비박산이 났다. 장형의 5촌 항렬 내에는 거의 죽었거나 중죄수로 유배를 갔고, 7촌 항렬 내에는 나이가 모두 어려 맡길 수 없었고, 결국 사위 김지중이 그들이 장성할 때까지만이라도 잠시 맡기로 결정되었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1701년,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1월 25일 (무신) 5번째기사[14] 1664년(현종 5) 태어나, 1684년(숙종 10) 식년시에서 의과에 합격하였다. 장희재가 유배 간 뒤, 소식이나 알고자 2~3개월에 한 번 장희재의 집을 들렀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웅천현(熊川縣)에 정배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황해도 재령(載寧)으로 이배되었다.[15] 6차례에 걸쳐 국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16] 1713년(숙종 39) 황해도 봉산(鳳山)에 유배 중이었는데, 유배지를 벗어나 '서울 집에 왕래하고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등 보통 사람처럼 생활하다가 걸렸다.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906010_002|숙종실록 54권, 숙종 39년 6월 10일 을유 2번째기사][17] 두 아들 장문유, 장두유가 무과에 합격할 때, '자시하(慈侍下)'라는 기록되어있다. 당시에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 무고의 옥에는 연좌되지 않았다.[18] 1675년(숙종 1) 태어나 1697년(숙종 23) 무과에 합격하였다. 처음에 흥양현(興陽縣)에 정배되었다가 임천(林川)으로 이배되었다.[19] 1697년(숙종 23) 무과에 합격하였다. 처음에 광양현(光陽縣)에 정배되었다가 홍산(鴻山)으로 이배되었다.[20] 1717년(숙종 43) 식년시 역과 1등 1위로 합격,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랐다. 원래 생부는 장천강인데 장천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21] 칠원현(漆原縣)에 정배되었다가 1712년(숙종 33)에 풀려났다.[22] 아명은 억기(億基)였는데, 조정에서 혼동하여 장태유와 장억기가 다른 사람인 줄 알고 잡아들이려고 한 적이 있다. 하동현(河東縣)에 정배되었다가 제천(堤川)으로 이배되었다.[23] 효종 대에 궁녀로 입궁해서 상궁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무고의 옥 당시에 장현의 딸 '장 상궁'이 오빠 장천한과 재산을 놓고 다퉈서 사이가 안 좋다는 증언이 나왔다.[24] 변승업과 부인 영천 이씨의 큰며느리.[25] 1665년(현종 6년) 태어나서 1683년(숙종 9년) 증광시에서 의과에 합격하였다. 무고의 옥에 연좌되어 사천현(泗川縣,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북부지역)에 정배되었다가 울진(蔚珍)으로 이배되었다.[26] 1668년(현종 9년) 태어나서 1690년(숙종 16년) 증광시에서 역과에 합격하였다. 곤양군(昆陽郡,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에 정배되었다가 강릉(江陵)으로 이배되었다.[27] 1640년(인조 18년) 태어나, 1657년(효종 8년) 식년시에서 나이 18세에 역과에 합격하였다. 자는 사흠(士欽)이다.[28] 국문을 받았지만 현저하게 드러난 죄가 없다고 하여 풀려났다.[29] 장희재로부터 받아 희빈 장씨에게 전달하는 등 매흉에 참여한 죄로 군기시 앞길에서 처형에 처해졌다. #[30] 인현왕후의 상중에 희빈 장씨가 입을 상복을 물어보거나 창호를 뚫어 인현왕후가 어떤지 확인하는 등 정세를 탐문했다는 죄로 해남현(海南縣)의 노비가 되는 처분을 받았다. #[31] 새로 태어난 대군이 졸서한 후에, 정원과 옥당에서 대전과 중전, 세자궁에 안부를 묻자 '알았다'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년, 청 강희(康熙) 29년) 9월 16일 (계묘) 1번째기사[32] 과거에는 실록에서 미인으로 기록된 여인이 장희빈뿐이라는 말이 인터넷에 나돌아다녔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록에 미인으로 기록된 여인은 장희빈을 제외하면 강혜장숙여비 한씨와 어리(태종실록), 한영정의 막내 딸이자 강혜장숙여비 한씨의 누이인 한계란(세종실록), 순빈 봉씨(세종실록), 안평대군 이용의 계집종인 귀비(성종실록), 승평부대부인 박씨(연산군 일기), 경빈 박씨, 윤순의 아내 구씨(중종실록), 정난정(명종실록), 역관의 딸 순빈 김씨(선조실록), 소원 신씨와 소용 임씨, 효인의 아내(광해군 일기), 의순공주, 숭선군의 첩 영이(효종실록), 옥례, 오정창의 딸(숙종실록)가 있다. 장희빈은 실록에 기록된 미녀들 중에 가장 외모 칭찬이 많은 여인이지, 실록에 유일하게 기록된 미녀는 아니다.[33] 애초에 외모가 못났으면 숙종에게 총애받지도, 인현왕후를 밀어내고 왕비까지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중전까지 올라가는 데는 정치적인 이유도 컸지만 미모 덕도 상당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34] 숙종1661년(현종 2년)생, 인경왕후는 숙종과 동갑1661년(현종 2년, =)생, 인현왕후1667년(현종 8년, -6)생, 희빈 장씨는 1659년(효종 10년, +2)생, 숙빈 최씨1670년(현종 11년, -9)생, 인원왕후1687년(숙종 13년, -26)생, 영빈 김씨1669년(현종 10년, -8)생, 귀인 김씨1690년(숙종 16년, -29)생이다.[35] 본관(인동 장씨)인 인동(현 경상북도 구미시칠곡군 각 일부)의 별칭인 '옥산'에서 따왔다.[36] 선대왕의 3년상을 마치고 신주를 태묘(=종묘)에 부묘할 때 선대왕보다 먼저 사망하여 혼전에 모셔두었던 선대왕의 왕후들의 신주 역시 이때 함께 부묘한다. 문제는 희빈은 후궁인데 숙종이 희빈의 혼궁을 궐 밖 사제가 아닌 궁에 설치해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숙종과 선후들의 부묘례를 행할 때 희빈의 신주 역시 궐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태묘에 부묘는 할 수 없으니 새로 사당을 세워야 하는데 희빈의 명호로 세우기는 초라하여 추존이 논의된 것이다.[37] 조선시대까지의 옛 한자 문화 국가에선 태와 대를 병용했다.[38] 국대부인과 더불어 중국(위진시대~송나라)과 고려에서 제왕 혹은 태자의 생모를 봉증한 작위 중에 하나로, 적첩의 차별이 강화된 위진 시대에 창안되어 중국이 몽골(원 제국)에 강제 합방되기 전까지 두루 쓰였다.[39] 삼한국대부인은 국호를 조선의 최고 행정단위인 부로 바꾸고 앞에 연고지의 읍호를 더한 OO부부인으로 개칭, X한국대부인(X한은 삼한인 진한 마한 변한 중 하나를 사용)은 부 아래 행정단위인 군으로 바꿔 OO군부인으로 개칭. 단, 남편이 아닌 자식으로 인해 귀해진 경우엔 특별히 대를 더함.[40] 이후 정조가 인조 때의 봉원을 전례삼아 사친인 사도세자의 무덤(현륭원)을 봉원했다.[41] 폐비 윤씨연산군을 낳고 성격이 포악해져서 쫓겨난거고, 단경왕후중종반정 때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 참여에 거절해서 역적으로 몰려 죽어버리는 바람에 역적의 딸이라 하여 왕비에 오른 지 7일 만에 반정군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고 사후 복위되었다.[42] 김인의 고발했던 내용이 하나같이 지나치게 허황되어 무고라 판결된 가운데 숙빈 최씨가 한밤중에 숙종의 침소로 나아가 김인이 고발했던 것 중 자신의 외숙모 봉영이 장희재의 사주를 받고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고 눈물로 애원, 호소했다.[43] 수사 결과 숙빈의 외숙모 봉영은 외부 음식은 궁중에 들일 수 없다는 궁인들의 말에 애초 궁에 음식을 들인 적도 없었으며, 숙빈의 연잉군 출산 당시에 아예 입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사주를 받았던 숙빈이 눈엣가시였던 외숙모 일가를 더불어 제거할 목적으로 이러한 위증을 벌였던 것. 숙빈은 1695년(숙종 21년) 음력 3월 23일 스스로 복위 운동을 전개했던 인현왕후가 사제(경북 김천시 청음사)에서 전국 노론에게서 은을 모아 뇌물을 주었던 대상으로 고발됐던 인물이다. 이 당시 숙종의 폐인(嬖人: 왕의 총애를 받는 여인)은 숙빈이 유일했다.[44] 사실 인현왕후 역시 폐출은 반대파 남인들조차 대거 반대했을 정도로 명분이 너무 없었다. 그래서 숙종이 억지로 내세운 게 칠거지악 중 일부를 저지르고 투기를 했다는 명분이었다. 그런데 전자는 칠거지악 중에서도 눈감고 그냥 넘어갈 만한 가벼운 사항이었고 투기는 폐비 윤씨 급으로 실질적인 선을 넘는 게 아닌 이상 어느 정도는 인정해주고 넘어가는 게 오히려 도리이자 미덕이였다. 인현왕후는 정황상 투기는 했지만 선을 크게 넘은 건 아니었고, 그나마 제일 문제가 되었던 게 시어머니 명성왕후가 꿈에 나타나서 계시를 내렸다는 것 정도인데, 이조차 숙종의 평소 성격이라면 보통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이래 보나 저래 보나 인현왕후-희빈 장씨 간의 왕비 쟁탈전과 두 사람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숙종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내명부의 질서를 제멋대로 어지럽히고 휘저은 탓이 크다.[45] 참고로 인현왕후가 명성왕후가 꿈에서 자신에게 계시를 내렸다고 말한 것은 폐위되기 3년 전인 1686년이었다. 한마디로 숙종 본인도 이미 넘어간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서야 그걸 핑계로 폐위를 한 것은 1686년 당시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살아있기 때문에 넘어간 게 큰데 그러다가 1688년 장렬왕후가 승하한 지 얼마 안 되어 원자정호를 무리하게 정하고 그 후 1년여 만인 1689년 여전히 국상 중인데도 3년 전 일을 트집 잡아 어거지로 폐위하는 것부터 장렬왕후의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저지르는 패륜이나 다름없다.[46] 선조기는 하나 정황상 방계 조상이다. 장남 경종은 자식 없이 사망했으며 차남 성수 또한 요절하여 현재 희빈의 직계 자손은 없다.[47] 한국사 시리즈 주인공 3명 중 유일하게 생전 조상과 대화했다. 강마루의 경우는 조상의 영혼이 나타났기에 생전 조상은 아니다. 하지만 신천지가 조상 신돌석을 만났다...[48] 고모라 하면 아버지의 여자 형제를 일컫는 말이니 책 설정상 장희재의 딸이었을 듯.[49] 실제 희빈 장씨의 본명 대신 '장희빈'을 그대로 주인공의 이름으로 쓰고 있다. 또한 장희빈의 절친이자 더블 주역에 해당하는 캐릭터는 인현왕후.[50] 다만 그녀의 아들인 경종아라곤의 캐서린의 장녀인 메리 1세와 자주 비교된다.[51] 다른 간신들은 대중들이 왕이 싫어도 직접 비판할 수 없어서 대신 비판의 화살을 돌려 왕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면 반대로 원균은 대중들 절대 대다수가 해당 인물에 대한 진심어린 혐오 때문에 직접 비판하는 것이었는데 선조가 자신에게까지 비판의 화살이 쏠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영웅화한 존재이다. 정리하자면 다른 간신들은 국왕을 비판할 수 없기 때문에 비판받는 것이었고 원균국왕을 비판할 수 없기 때문에 옹호받은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왕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왕조 시대의 기본 기조가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52] 간택후궁 출신으로는 정현왕후, 장경왕후 등이 있었다.[53] 노론의 기록에는 소론 역시 역신당으로 정의하고 있으나 소론의 입장이 공교롭다. 대표적으로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영조의 승하 직후에 집필을 시작했다. 이긍익은 자신의 조부이자 경종의 충신이었던 이진검 형제 및 영조를 적대하고 노론을 잠시나마 무너트렸던 소론의 행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경종 편 집필을 완전히 포기하고 숙종 편에서 왕대별을 종료했으며 숙종편에서도 노소 분당의 시기를 명확히 기록치 않고 기사환국 전후의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이 충돌하였던 내용 및 기사환국과 더불어 일시적이나마 소론 정권이 세워졌다는 사실, 인현왕후의 폐위 사건 후에도 다수의 소론이 정계에서 활동했으며 인현왕후의 복위 당시 소론이 인현왕후의 복위를 반대하며 희빈 장씨의 지지 세력으로 돌아섰던 사실 등을 전면 삭제한다. 그렇게 소론 역시 인현왕후에게 충성을 바쳤던 당파인 양 각색함으로써 훗날 자칫 재개될 수 있을 검열에서 자신의 가문과 소론이 화를 입을 것을 예방한다. 이후 이긍익의 8촌 손자인 이시원이 이 책을 참조하여 《국조문헌》을 집필하였고 이시원의 손자 이건창이 《국조문헌》에서 당쟁 관련만 발췌하여 《당의통략》을 만들었다. 근대 사학계에서 《연려실기술》을 두고 소론이 쓴 책인데 노론에 대해 담담하게 썼으니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책이라 착각하여 열람이 제한된 정사 대신 절대적인 고증 사료로 채택하고 추가 자료로 채택한 《당의통략》을 두고 소론이 쓴 책이니 노론이 쓴 책보다는 덜 편파적일 것이며 저자와 집필 시기가 다른데 《연려실기술》과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으니 환국서인을 대표한 인현왕후와 남인을 대표한 희빈 장씨의 대결로 정의해 현재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애초 일부 왜곡이 들어간 사료를 바탕하여 정리한 잘못된 정의였기에 모순적 위화감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정사 기록이 일반 열람으로 전환된 후 현대 역사서가 아닌 정사를 직접 열람하여 연구하는 학자들이 늘어나며 정의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54] 출처는 영빈 김씨의 외재종오빠였던 농수 이진정이 이문정이란 필명으로 쓴 《농수 수문록》의 내용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소문으로 들은 것을 기록했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비슷한 용례로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를 때렸을 때 용례가 있다. <숙종실록>에는 "어느 날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라고 국역되어 있지만 원문을 확인해보면 "一日, 內殿命撻之, 益懷怨毒,"로 한자 "撻(때릴 달)"만 쓰였을 뿐 매질할 때 쓴 수단이나 부위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한자 "撻(때릴 달)"은 회초리든 매든 몽둥이든 채찍이든 무겁지 않은 것을 손에 쥐고 인간이나 동물을 매우 빠른 속도로 매질할 때 쓰는 한자로 영어 단어로는 to whip에 해당된다. "撻(때릴 달)"에는 분명 훈계 목적으로 가느다란 회초리로 종아리, 손바닥, 엉덩이를 때리는 것도 포함되니 오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문서에 수단과 부위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없고 스승 혹은 부모에게 엄한 교육을 받았다의 비유법으로 쓴 것이 아닌 이상 '종아리를 회초리질했다.'로 한정하여 번역해서는 안 되는 한자다.[55] 후두부인 뇌수 부근에 난 종기. 크기가 작으면 절, 크면 옹저라 함.[56] 痰火: 재발과 발작의 원인이 된 과정(경종의 절증 발병->경종의 완치 후 절증 발병->절증 치료 과정 중 외감(外感: 감기, 독감)->담화 발작)과 약재에 비추어 담천과 화천의 합병인 담화 천식으로 추정.[57] <연려실기술> 중 숙종이 인현왕후를 두고 "원자가 탄생한 뒤에 더욱 불평하고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 있으면서 말하기를 '처음에는 여자가 쓰는 모자를 만들었는데 이제는 남자의 모자를 쓴다니 실로 뜻밖이다.'하고 궁인들 중에도 왕자가 탄생한 것이 의외의 일이라고 말하는 자가 몇이 있으니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국본(國本)을 일찍 정한 본의가 이것이다."라고 말한 말이 전한다. 실록 열람권이 없었던 이긍익인현왕후의 결함을 축소, 은폐하기 위해 <숙종실록>에서 일부가 삭제되어 올려진 사실을 모르고 《기사유문(己巳遺聞)》에 실렸던 내용을 그대로 다 넣어버린 듯. <숙종실록>에 수록된 것은 "원자(元子)가 탄생하자 더욱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실로 이는 뜻밖이다.'하였다. 일찍 국본(國本)을 정한 데에는 뜻이 있는 것이다."로, 중간 부분의 내용이 생략됐다. 이 발언은 인현왕후가 폐비될 때 '원자를 모해한 죄'로 적용됐다.[58]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1427년, 정미) 9월 29일 갑인 2번째기사 中 "여달(如達)은 어두운 밤을 타서 무뢰배(無賴輩)와 결당(結黨)하여 거리와 마을을 휩쓸고 다니다가, 유감동(兪甘同)이란 여인을 만나 그가 조사(朝士)의 아내인 줄을 알면서도 순찰을 핑계하고는 위협과 공갈을 가하여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서 밤새도록 희롱했다.[59]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1436년, 병진) 10월 26일 무자 2번째기사 中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60] 소설 《인현왕후전》에도 장씨의 최후로 비슷하게 그려졌는데 장씨가 경종의 생식기를 훼손한 내용은 없다.[61] 조선에서는 신체가 훼손된 채로 죽으면 영혼 역시 사망 전 신체가 훼손된 채로 영구히 남는다고 믿었다. 때문에 사형도 사사형>교형>참형>능지형 순. 능지형도 거열형으로 바꿨다가 이 또한 참수시킨 뒤 사체를 거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