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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 1990년대 | 2000년대 | 2010년대 | 2020년대 | ||||||
개별 문서가 있는 트레이드 | ||||||||||
2009년 4월 20일 | 김상현, 박기남 ↔ 강철민 | |||||||||
2013년 5월 6일 | 김상현, 진해수 ↔ 송은범, 신승현 | |||||||||
2015년 5월 2일 | 박세웅 ↔ 장성우 | |||||||||
2017년 4월 7일 | 노수광 ↔ 김민식 | |||||||||
2020년 6월 7일 | 류지혁 ↔ 홍건희 | |||||||||
2020년 8월 12일 | 장현식, 김태진 ↔ 문경찬, 박정수 | |||||||||
2021년 3월 25일 | 양석환 ↔ 함덕주 | |||||||||
2021년 7월 27일 | 서건창 ↔ 정찬헌 | |||||||||
2023년 4월 27일 | 김태훈 ↔ 이원석 | |||||||||
2023년 7월 29일 | 최원태 ↔ 이주형, 김동규 | |||||||||
2024년 5월 28일 | 박병호 ↔ 오재일 |
토론 합의사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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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이적 후 메인 칩 아닌 선수의 활약이 기존 메인 칩 선수를 넘어선다고 판단될 경우 2명 모두 표기. 문단명에 이동한 모든 선수가 이미 기록된 경우 '등 n대n' 표기 생략.)
* 한 팀이 현금만 지불한 트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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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금이 부분 포함된 트레이드
(단, 이적 선수가 3명 이상일 경우 'ㅇㅇㅇ 등 n명' 으로 축약 표기. 총액이 1억 이상일 경우 십만 단위 이하 생략.)
* 지명권 트레이드
* 선수+현금+지명권의 급부 숫자가 적은 쪽을 좌변에 표기
* 한 팀이 현금만 지불한 트레이드
ㅇㅇㅇ 현금 트레이드 |
* 현금이 부분 포함된 트레이드
현금을 'n억 n천n백만' 표기 |
* 지명권 트레이드
문단명에 지명선수 표기 안함 |
- 개별 트레이드 문서의 표제어는 그대로 유지
1. 개요2. 1990년
2.1. 김경문 현금 트레이드2.2. 김평호 현금 트레이드2.3. 유동효 현금 트레이드2.4. 김상호 ↔ 최일언2.5. 이재홍 현금 트레이드2.6. 오영일 현금 트레이드2.7. 김신부 ↔ 이길환2.8. 차동철, 장호익 현금 트레이드2.9. 이상구 ↔ 김인호2.10. 김호근 현금 트레이드2.11. 김경문 ↔ 송재박2.12. 윤석환, 조범현 현금 트레이드
3. 1991년4. 1992년4.1. 고원부 현금 트레이드4.2. 김재박 무상 트레이드4.3. 이동석 현금 트레이드4.4. 최해명 ↔ 박종철 등 2대34.5. 박준태 ↔ 윤덕규4.6. 정성룡 ↔ 김승남4.7. 김성길, 신경식 ↔ 정영규, 4천만4.8. 조양근 ↔ 이국성
5. 1993년5.1. 백인호, 박노준 현금 트레이드5.2. 한희민 ↔ 박철희, 3천만5.3. 오희주 현금 트레이드5.4. 박선일 ↔ 이상목5.5. 구윤 현금 트레이드5.6. 강길용 ↔ 김광림 등 1대25.7. 송태일 ↔ 김상재5.8. 김상훈 ↔ 한대화 등 2대45.9. 박철우, 윤재호 ↔ 송인호, 3천 5백만5.10. 김용국, 윤용하 현금 트레이드
6. 1994년7. 1995년7.1. 조한철 ↔ 전종화7.2. 전형도 ↔ 조경택7.3. 최한림 ↔ 김현욱 등 2대27.4. 나성열 ↔ 이종호 등 2대27.5. 이중화 현금 트레이드7.6. 박은진 ↔ 김상국7.7. 진상봉 ↔ 김주성
8. 1996년8.1. 92년 1차 지명권 ↔ 최상덕, 현금8.2. 강봉수 ↔ 황대연8.3. 동봉철 ↔ 이병훈 등 2대28.4. 김경하 ↔ 송인호8.5. 정회선 ↔ 이종두, 김성현8.6. 조현 ↔ 송유석, 동봉철8.7. 최훈재 ↔ 최향남8.8. 김미호, 박지환 현금 트레이드8.9. 이정훈 ↔ 박현영, 강영수8.10. 한대화 ↔ 신영균8.11. 강기웅 ↔ 이희성, 최광훈
9. 1997년9.1. 전준호 현금 트레이드9.2. 김승남, 구한성 현금 트레이드9.3. 김충민, 1천5백만 ↔ 나성열, 김성한9.4. 김광림 ↔ 강영수, 공의식 9.5. 윤형배 현금 트레이드9.6. 이동수 ↔ 김종훈 등 2대29.7. 홍우태 ↔ 박상현9.8. 이종운 ↔ 강대호9.9. 김태형 현금 트레이드9.10. 조계현 현금 트레이드9.11. 박경완 ↔ 김형남, 이근엽, 9억9.12. 김동호 ↔ 송구홍 등 2대29.13. 김광현 현금 트레이드
10. 1998년10.1. 박현영 ↔ 99년 2차 1라운드 지명권10.2. 동봉철 ↔ 정영규10.3. 안상준 현금 트레이드10.4. 이동수 ↔ 박성기 등 2대210.5. 조규제 ↔ 박정현, 가내영, 6억10.6. 박종호 ↔ 최창호10.7. 김실 ↔ 박상근, 박상현10.8. 최기문 ↔ 차명주10.9. 노장진 ↔ 최익성, 박태순10.10. 임창식 ↔ 동봉철, 이민호10.11. 임창용 ↔ 양준혁 등 3명, 20억 10.12. 권명철 ↔ 최훈재, 이재만10.13. 김기태, 김현욱 ↔ 이계성, 양용모, 20억10.14. 김상진 현금 트레이드
11. 1999년11.1. 임선동 ↔ 안병원, 7억11.2. 김상호, 류택현 현금 트레이드11.3. 송구홍 ↔ 오봉옥 등 2대211.4. 박성기 현금 트레이드11.5. 김경원 ↔ 홍원기, 전상렬11.6. 장용대 ↔ 강필선11.7. 진갑용 ↔ 이상훈, 4억11.8. 심재학 ↔ 최원호11.9. 00년 2차 1라운드 지명권 현금 트레이드11.10. 이계성 ↔ 김광현
12. 관련 문서1. 개요
KBO 리그에서의 1990년대의 트레이드를 사건별로 기술한다.세부 제목은 트레이드의 중심이 된 코어 선수 1명으로 최대한 줄여서 서술하고, FA이적이나 방출후 영입 같은 선수 이동은 기술하지 않는다.
2. 1990년
김평호 차동철 장호익 | - | 유동효 김신부 이상구 김경문[A] | - |
- | - | 김경문[A] 오영일 이길환 김인호 송재박 | 윤석환 조범현 |
3 / 0 | - | 4 / 5 | 0 / 2 |
김경문[A] 최일언 김호근 송재박 윤석환 조범현 | 김상호 이재홍 오영일 이길환 | 김인호 | - |
김상호 김경문[A] | 최일언 김신부 차동철 장호익 | 이상구 | 김평호 유동효 이재홍 |
6 / 2 | 4 / 4 | 1 / 1 | 0 / 3 |
Out In |
2.1. 김경문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0.01.03 |
김경문 | 2600만원 |
2.2. 김평호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0.01.10 |
김평호 | 1300만원 |
신생 제8구단 쌍방울을 위한 지원 성격의 트레이드 5. 김평호는 91시즌 35도루를 기록하는 등 주력 면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2.3. 유동효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0.01.10 |
유동효 | 1400만원 |
신생 제8구단 쌍방울을 위한 지원 성격의 트레이드 6. 참고로 이말년이 딸이름 짓기 대회에서 유동효 싸인볼을 경품으로 걸었다.[5]유동효는 쌍방울에서 기회를 많이 받았으나 시즌 타율 2할 3푼을 넘은 적 없이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2.4. 김상호 ↔ 최일언
트레이드 일자 | 1990.01.22 |
김상호 | 최일언 |
OB의 간판 투수였던 최일언과 MBC의 유망주였던 김상호를 주고 받은 트레이드로 LG는 즉시 전력 투수를 OB는 장타력을 가진 외야 자원을 보강하기 위해 이루어진 트레이드다.
MBC 청룡이 럭키금성그룹에 인수된 후 처음 단행한 트레이드이자 탈쥐효과의 원조. 잠실야구장을 홈으로 쓰는 두 팀 간 처음으로 진행한 트레이드이기도 하다. LG로 넘어가기 직전 영입한 백인천 감독의 히트앤 런 전술과 맞지 않아 단행한 트레이드.
LG는 그 해 우승했지만 최일언은 3승에 그쳤고 김상호는 OB 이적 후 잠실구장 구단 첫 홈런왕은 물론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일조했다. MVP 수상은 덤.[6][7] 다만 94년에 항명 파동을 일으킨 주동자 중 한명이었음에도 연봉을 백지위임하던 다른 선수와는 달리 자기 혼자 연봉을 올려받겠다고 악을 쓰는 바람에[8][9] 우승 뒤에도 OB와 사이는 좋지 않아서 이후에 다시 LG로 반품된다. 그리고 노쇠화 속에 성적하락을 겪으며 그대로 은퇴.
이후 최일언은 LG에 1군 투수코치로 부임하면서 29년만에 복귀했다.
2.5. 이재홍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0.01.25 |
이재홍 | 1300만원 |
신생 제8구단 쌍방울을 위한 지원 성격의 트레이드 7. 이재홍은 92시즌 릴리프로 100이닝을 넘기는 투구를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2.6. 오영일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0.01.30 |
오영일 | 2700만원 |
한때 MBC 청룡의 에이스였지만 혹사와 그로 인한 부상을 겪으며 망가졌던 오영일을 LG가 내보낸 트레이드. 사실상 선수 경력을 이어갈 수 없는 상태였던 오영일은 태평양에서 8과 ⅔이닝만을 던지고 은퇴했다.
2.7. 김신부 ↔ 이길환
트레이드 일자 | 1990.01.30 |
김신부 | 이길환 |
두 선수 모두 다음 시즌을 넘기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말았다.
2.8. 차동철, 장호익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0.02.06 |
차동철 장호익 | 5천만원 |
2.9. 이상구 ↔ 김인호
트레이드 일자 | 1990.03.21 |
이상구 | 김인호 |
롯데가 당시 부족했던 좌완투수 풀을 채우기 위해 유틸리티 플레이어 김인호를 내준 트레이드. 이상구는 금방 은퇴하며 잊혀졌지만 김인호는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2001년까지 뛰면서 명백한 태평양의 승리로 끝난 트레이드다.
2.10. 김호근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0.04.26 |
김호근 | 현금 |
2.11. 김경문 ↔ 송재박
트레이드 일자 | 1990.12.18 |
김경문 | 송재박 |
1982년 OB의 우승을 이끈 주전 포수였다는 상징성 때문인지 노쇠화 때문에 사실상 활용가치가 없었음에도 김경문을 OB에서 은퇴시키기 위해 굳이 다시 데려온 트레이드. 맞상대였던 송재박도 얼마 못 가 태평양에서 은퇴한 뒤 코치로 OB에 돌아왔고, 이 둘은 두산 베어스에서 코칭스태프로 재회한다.
2.12. 윤석환, 조범현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0.12.30 |
윤석환 조범현 | 4350만원 |
3. 1991년
- | 강영수 | 이광우 | 김성갑 |
- | 신경식 허규옥 | 박노준 | - |
0 / 0 | 1 / 2 | 1 / 1 | 1 / 0 |
이상대 | 허규옥 전종화 | 신경식 박노준 | - |
김성갑 | - | 강영수 이광우 | 이상대 전종화 |
1 / 1 | 2 / 0 | 2 / 2 | 0 / 2 |
Out In |
아래에 열거된 트레이드 외에도 웨이버 공시 후 트레이드가 한 차례 존재하였다.[10][11]
3.1. 강영수 ↔ 신경식
트레이드 일자 | 1991.1.14 |
강영수 | 신경식 |
이 트레이드를 통해 OB에 입단한 강영수는 이후 항명 파동에 가담했다가 방출되어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했으며 이적한 1995년 당해 커리어 하이를 갱신했다. 신경식 또한 베어스에서의 활약을 이어가 91시즌 전경기 출장에 3할 타율 142안타를 기록하고 2시즌 후 쌍방울로 이적했다. 안터지던 거포 유망주와 검증된 좌타자를 교환해서 양팀이 잘 써먹은 성공한 트레이드.
3.2. 허규옥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1.01.16 |
허규옥 | 2500만원 |
최동원 보복성 트레이드에 포함되어 롯데로 이적했던 허규옥이 다시 친정으로 복귀했지만 이후 별다른 활약을 못보이고 2년만에 은퇴했다.
3.3. 김성갑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1.02.02 |
김성갑 | 2100만원 |
김성갑은 이후 박재홍이 들어오는 96년 이전까지 주로 1번이나 2번 타자로 많이 나서게 된다. 하지만 뛰어난 수비에 비해 타율이 너무 좋지 않아서 태평양 타선은 짜임새가 좋지 못했다. 현대야구였다면 하위타선이 어울렸을 성적이고 빙그레에서도 하위타선을 전전했지만, 작전수행능력이 좋은 타자를 2번으로 사용하던 당시 야구관의 영향으로 태평양 이적 후 2번타자로 자주 나서게 된다.[12]
여담으로 이 트레이드 때문에 대전광역시에서 태어난 김성갑의 딸 유이가 인천광역시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후 김성갑은 2023시즌을 앞두고 32년만에 한화 코치로 복귀하였다.
3.4. 이상대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1.05.15 |
이상대 | 현금 |
3.5. 전종화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1.06.28 |
전종화 | 1500만원 |
전종화는 이후 김호근과 포수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나 쌍방울 주전 포수의 몫은 박경완에게 돌아갔다.
3.6. 이광우 ↔ 박노준
트레이드 일자 | 1991.12.05 |
이광우 | 박노준 |
이광우는 OB 이적 후 1993~1994시즌동안 불펜의 핵심투수가 되었으며 1995~1996시즌 부상 및 재활이후에도 은퇴할 때 까지 쏠쏠한 활약을 보여준 반면 박노준은 해태 이적후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1993년 쌍방울로 트레이드 되면서 OB가 완승한 트레이드.
4. 1992년
김승남 | 고원부 이동석 조양근 | 이현택 최해명 정성룡 김성길 신경식 | - |
정성룡 | 이국성 | 박종철 김기완 이창원 김승남 | - |
1 / 1 | 3 / 1 | 5 / 4 | 0 / 0 |
박준태 | 김재박 윤덕규 이국성 | 박종철 김기완 이창원 | - |
김재박 윤덕규 | 박준태 조양근 | 이동석 이현택 최해명 김성길 신경식 | 고원부 |
1 / 2 | 3 / 2 | 3 / 5 | 0 / 1 |
Out In |
아래에 열거된 트레이드 외에 트레이드 마감 시한인 6월 30일에 웨이버 공시 후 트레이드가 2차례[13] 발생하였다.
4.1. 고원부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2.01.09 |
고원부 | 6천만원 |
고원부는 트레이드 직후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영덕 감독 곁을 떠나 서울 팀에 가게 되어 상쾌한 입장을 보였으나 시즌 중 방출되고 말았다.
4.2. 김재박 무상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2.02.11 |
김재박 | |
LG 프런트는 MBC 청룡과 다르다는 점을 어필하려 했고 이 때문에 92시즌을 앞두고 이광환 감독 선임과 함께 MBC-LG의 프랜차이즈 스타 김재박을 태평양으로 보냈다. 이후 김재박은 1년 만에 은퇴했고 코치로 95년까지 활동 후 후신 현대 유니콘스 감독을 맡아 현대왕조를 이끌었다. 그 후 김재박은 07시즌을 앞두고 LG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오랜만에 친정으로 돌아오긴 하는데...
4.3. 이동석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2.04.10 |
이동석 | 2250만원 |
4.4. 최해명 ↔ 박종철 등 2대3
트레이드 일자 | 1992.05.07 |
최해명 이현택 | 박종철 김기완 이창원 |
4.5. 박준태 ↔ 윤덕규
트레이드 일자 | 1992.06.30 |
박준태 | 윤덕규 |
그나마 태평양은 윤덕규를 짧게나마 잘 써먹었지만, LG로 간 박준태는 포텐이 터지지 못했다. 전일수(현 KBO 심판)가 이때 같이 트레이드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일수는 태평양에서 방출된 뒤에 LG로 갔다.[15] 여담으로 이 트레이드는 마침 두 팀이 인천에서 맞붙었던 기간에 이뤄진 트레이드였다. 이튿날인 7월 1일 공교롭게도 윤덕규가 태평양 유니폼을 입고 끝내기 안타를 쳤는데 그 순간 3루쪽 LG 덕아웃을 향해 헬멧을 집어던진 일화가 유명하다.
4.6. 정성룡 ↔ 김승남
트레이드 일자 | 1992.11.17 |
정성룡 | 김승남 |
4.7. 김성길, 신경식 ↔ 정영규, 4천만
트레이드 일자 | 1992.11.26 |
김성길 신경식 | 정영규 4천만원 |
우용득 감독 체제로 새출발한 삼성이 노장이자 김성근 전 감독과 각별한 사이였던 김성길, 신경식을 정리하기 위해 쌍방울에 신인드래프트 2차 2순위로 지명된 정영규를 상대로 단행한 트레이드. 김성길과 신경식은 에이징 커브를 극복하지 못한 채 부진했고, 정영규 또한 대학 야구 홈런왕 출신답지 않은 부진한 성적만 내다가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 후 한시즌이나마 포텐을 터트리면서 양팀 모두 실패한 트레이드였다.
4.8. 조양근 ↔ 이국성
트레이드 일자 | 1992.12.05 |
조양근 | 이국성 |
5. 1993년
5.1. 백인호, 박노준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3.1.20 |
백인호 박노준 | 5천만원 |
5.2. 한희민 ↔ 박철희, 3천만
트레이드 일자 | 1993.01.25 |
한희민 | 박철희 3천만원 |
에이스 투수인 한희민은 92년도 김영덕 감독의 송진우 밀어주기로 인해 감독 그리고 구단과 마찰이 있었고, 결국 93년에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었으나 성적은 과거와 같지 않았다.
한희민은 삼성에서 방출당한 이후 한국인 최초로 대만프로야구에서 뛰게된다.
5.3. 오희주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3.1.28 |
오희주 | 5천만원 |
5.4. 박선일 ↔ 이상목
트레이드 일자 | 1993.06.14 |
박선일 | 이상목 |
당시 암울했던 삼성의 포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단행한 트레이드. 박선일은 포수로서는 거의 끝난 이만수를 대신하여 김성현과 함께 동시에 기용하면서 서로 다른 스타일로 투수를 이끌어 팀의 1993년 정규 시즌 2위를 이끄는데 성공했으나 그 이후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반면 이상목은 1994년부터 강병철이 야심차게 키우면서 경험을 쌓았고 이후 1999년에는 정민철, 송진우의 뒤를 잇는 3선발로 맹활약하며 한화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고 FA 대박까지 치면서 한화가 완승했다고 볼 수 있다.
5.5. 구윤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3.06.29 |
구윤 | 2천만원 |
5.6. 강길용 ↔ 김광림 등 1대2
트레이드 일자 | 1993.11.22 |
강길용 | 김광림 최동창 |
이 트레이드로 인해 김광림은 그해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골든 글러브를 OB가 아닌 쌍방울 소속으로 받아야 했다.[16] 김광림은 쌍방울로의 트레이드 소식을 듣고 "앞이 캄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17] 그래도 김광림은 95시즌 타격왕에 오르며 회춘하여 트레이드를 시킨 OB에 복수하게 된다. 반면 반대급부로 넘어온 강길용은 단 6승만을 거두고 방출. 쌍방울의 완벽한 트레이드 승리였다.
5.7. 송태일 ↔ 김상재
트레이드 일자 | 1993.11.25 |
송태일 | 김상재 |
5.8. 김상훈 ↔ 한대화 등 2대4
트레이드 일자 | 1993.12.01 |
김상훈 이병훈 | 한대화 신동수 허문회 김봉재 |
1990년대 초반 이뤄진 트레이드 사례 중에서 많이 언급되는 트레이드로 사실상 LG와 해태 양팀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1:1로 맞바뀌는 당시로도 예상치 못한 딜이어서 엄청난 충격을 준 트레이드였다.[18]
비록 1년이긴 하지만 한대화가 정신적 지주[19] 로서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일조했고 신동수와 허문회도 괜찮게 활약한 반면에 김상훈은 조기은퇴. 이병훈은 김응용 감독에게 찍혀서 방황하다가 삼성으로 이적하게 된다.[20] 결국 LG가 완승한 트레이드. [21]
5.9. 박철우, 윤재호 ↔ 송인호, 3천 5백만
트레이드 일자 | 1993.12.13 |
박철우 윤재호 | 송인호 3천 5백만원 |
5.10. 김용국, 윤용하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3.12.28 |
김용국 윤용하 | 6천만원 |
6. 1994년
장채근 | 정경훈 정영규 | - | - |
최해식 | 이정훈 장정순 | - | - |
1 / 1 | 2 / 2 | - | - |
이정훈 장정순 | - | 최해식 | - |
정경훈 정영규 | - | 장채근 | - |
2 / 2 | - | 1 / 1 | - |
Out In |
6.1. 장채근 ↔ 최해식, 1천만, 95년 2차 1라운드 지명권
트레이드 일자 | 1994.06.07 |
장채근 | 최해식 1천만원 1995년 2차 1라운드 지명권 |
이원식은 그럭저럭 1군에 자리잡았고 최해식은 해태로 이적[22] 후 주전포수가 되었지만, 트레이드 즈음 기량이 점차 떨어지고 있던 장채근은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1995년 은퇴하면서 해태의 승리로 끝난 트레이드.[23]
6.2. 이정훈 ↔ 정경훈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 1994.12.01 |
이정훈 장정순 | 정경훈 정영규 |
올드 한화팬들 앞에서 절대로 말을 꺼내면 안될 최악의 트레이드. 당시 한화팬들 중 이정훈 트레이드는 안 된다라고 트레이드에 반대한 팬들이 있었다. 이정훈과 장정순은 각각 1996년~1997년 사이에 은퇴했고, 정영규는 저니맨 생활을 하면서 2001년 은퇴. 정경훈은 1999년을 끝으로 은퇴.
7. 1995년
조한철 | 나성열 김민태 박은진 | 전형도 이종호 지화선 이중화 김상국 진상봉 | - |
전종화 | 이종호 지화선 김상국 | 조경택 나성열 김민태 박은진 김주성 | - |
1 / 1 | 3 / 3 | 6 / 5 | - |
김현욱 류명선 | - | 조경택 | 전종화 최한림 윤혁 김주성 |
최한림 윤혁 이중화 | - | 전형도 | 조한철 김현욱 류명선 진상봉 |
2 / 3 | - | 1 / 1 | 4 / 4 |
Out In |
7.1. 조한철 ↔ 전종화
트레이드 일자 | 1995.02.07 |
조한철 | 전종화 |
7.2. 전형도 ↔ 조경택
트레이드 일자 | 1995.04.17 |
전형도 | 조경택 |
7.3. 최한림 ↔ 김현욱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 1995.05.10 |
최한림 윤혁 | 김현욱 류명선 |
당시 퇴물이었던 류명선을 보내기 위해 김현욱을 곁다리로 보냈는데 정작 김현욱이 김성근 감독 체제 하에서 97년 구원 20승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하여 쌍방울의 유일한 리즈 시절을 이끌었다. 그리고 쌍방울의 재정난으로 인해 1999년에 다시 삼성에 트레이드되었는데 거의 매년 80이닝은 거뜬히 먹어줘서 은퇴 때까지 삼성의 대들보로 활약한다. 반면 쌍방울의 팀 사정 상 주전으로 뛰던 최한림과 윤혁은 삼성에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7.4. 나성열 ↔ 이종호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 1995.05.11 |
나성열 김민태 | 이종호 지화선 |
나성열은 단 10이닝만 등판 후 다시 쌍방울로 트레이드되고, 이종호는 103게임 출장 후 96시즌, 지화선은 101게임 출장 후 97시즌 이후 방출. 그나마 김민태가 4시즌 동안 80게임 130이닝을 소화하며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7.5. 이중화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5.05.30 |
이중화 | 현금 |
7.6. 박은진 ↔ 김상국
트레이드 일자 | 1995.11.01 |
박은진 | 김상국 |
태평양은 주전 포수 김동기의 부진으로 인해 1년이나마 김상국을 써먹기라도 했지, 박은진은 1년만에 방출되면서 잊혀졌다.
7.7. 진상봉 ↔ 김주성
트레이드 일자 | 1995.12.26 |
진상봉 | 김주성 |
8. 1996년
박현영 강영수 | 강봉수 김경하 조현 최훈재 한대화 | 김미호 박지환 | 이병훈 김훈 송인호 송유석 동봉철[B] 92년 1차 지명권 |
이정훈 | 황대연 송인호 송유석 동봉철 최향남 신영균 | - | 최상덕 동봉철[B] 김태룡 김경하 조현 최훈재 |
2 / 1 | 5 / 6 | 2 / 0 | 6 / 6 |
동봉철 김태룡 이종두 김성현 이정훈 | 황대연 | 최상덕 이희성 최광훈 | 정회선 신영균 |
이병훈 김훈 정회선 박현영 강영수 이희성 최광훈 | 강봉수 | 92년 1차 지명권 (해태) | 이종두 김성현 한대화 김미호 박지환 |
5 / 7 | 1 / 1 | 3 / 1 | 2 / 5 |
Out In |
강기웅이 명단에 없는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현대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은퇴했기 때문이다.
8.1. 92년 1차 지명권 ↔ 최상덕, 현금
트레이드 일자 | 1996.02.27 |
92년 1차 지명권 | 최상덕 현금 |
해태 지명을 거부하고 대학 진학 후 현대 피닉스에 입단했던 박재홍을 새로 창단한 유니콘스에 프로 데뷔하려는 목적으로 단행한 트레이드.
이 트레이드로 인해 박재홍은 광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인천 야구의 레전드로 기억되고 있지만 신인 시절 광주에 가면 아재 팬들로부터 "고향 버리고 돈만 바란 놈"이라며 무수한 욕설을 들어야 했다. 2003~4년에 잠시 고향팀 KIA에 몸담았지만 막상 KIA에서는 개인이나 팀이나 도움이 되지 못했고 다시 인천 팀인 SK에서 부활하면서 확실한 인천 야구를 상징한 선수로 자리잡았다. 트레이드 맞상대 최상덕도 1998년부터 맹활약하면서 타이거즈 암흑기 시절의 레전드로 평가받고 있다.
8.2. 강봉수 ↔ 황대연
트레이드 일자 | 1996.05.07 |
강봉수 | 황대연 |
8.3. 동봉철 ↔ 이병훈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 1996.05.25 |
동봉철 김태룡 | 이병훈 김훈 |
백인천이 전력 강화를 위해 단행한 트레이드. 이 트레이드를 기점으로 동봉철이 저니맨으로 전락하고 만다. 김태룡은 내야백업으로 어느정도 나왔으며, 이병훈은 음주운전 사고로 얻은 부상으로 은퇴했다.
8.4. 김경하 ↔ 송인호
트레이드 일자 | 1996.06.29 |
김경하 | 송인호 |
8.5. 정회선 ↔ 이종두, 김성현
트레이드 일자 | 1996.10.31 |
정회선 | 이종두 김성현 |
당시 류중일, 강기웅의 노쇠화로 헐거워진 키스톤 뎁스를 채울 목적으로 제 4 외야수였던 이종두와 백업 포수 김성현을 내주고 당시 대졸 내야수들 중 상위권이란 평가를 받던 정회선을 영입했으나 커리어 내내 1군 2타석만을 소화하며 대차게 망했다. 반대급부로 넘어간 선수 중 두 선수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은퇴한 지라 잊혀진 트레이드가 되었다.
8.6. 조현 ↔ 송유석, 동봉철
트레이드 일자 | 1996.11.06[26] |
조현 | 송유석 동봉철 |
조현은 고교 시절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27] 2년동안 그다지 활약을 하지 못하고 해태에 트레이드되었다가 더욱 별 볼일 없는 성적을 남기고 방출됐다. 송유석은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의 보복으로 LG로 옮긴 뒤 좋은 활약을 했기 때문에 이 트레이드는 LG가 재미를 봤다. 전설의 타이거즈 송유석-정회열 편에서 송유석이 LG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볼 수 있다.
8.7. 최훈재 ↔ 최향남
트레이드 일자 | 1996.11.06 |
최훈재 | 최향남 |
바로 전날 조현 트레이드에 이은 또 하나의 트레이드.
최훈재가 어느 정도 활약했지만[28] 최향남이 LG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며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8.8. 김미호, 박지환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6.11.08 |
김미호 박지환 | 현금 |
쌍방울로 건너간 두 명 모두 큰 활약이 없었다.
8.9. 이정훈 ↔ 박현영, 강영수
트레이드 일자 | 1996.11.15 |
이정훈 | 박현영 강영수 |
당시 33세로 퇴물 취급 받던 노장 이정훈과 백업 포수 박현영, 73년생 외야 유망주 강영수[29]를 맞바꾼 트레이드. 특별히 누가 이득이라고 말하기 애매할 정도로 트레이드된 팀에 있던 기간도 짧았다. 트레이드된 선수들 모두 머지않아 은퇴했다. 이만수 이후 포수난에 시달리던 삼성이 주도한 트레이드로 보이나 실패하였다.
8.10. 한대화 ↔ 신영균
트레이드 일자 | 1996.11.15 |
한대화 | 신영균 |
1994년 우승 이후 그저 그런 성적을 거둔 한대화를 보낸 트레이드. 결론은 둘다 손해.
8.11. 강기웅 ↔ 이희성, 최광훈
트레이드 일자 | 1996.11.18 |
강기웅 | 이희성 최광훈 |
강기웅이 백인천 삼성 감독과 사이가 틀어진데다 하락세가 뚜렷했기 때문에 팀 리빌딩 차원에서 이뤄진 트레이드. 하지만 트레이드 발표 직후 강기웅은 현대 유니콘스 합류를 거부하고 은퇴를 선언해버렸고, 결국 현대에서 임의탈퇴 공시되면서 그라운드를 떠났다.
강기웅이 팀 합류를 거부하고 은퇴해버리자 현대 유니콘스는 사실상 삼성에 선수 2명을 거저 줘버린 셈이 됐다. 하지만 반대로 삼성에 건너간 이희성도 1997년 13경기 출장에 그치고 1년만에 방출당하며 유니폼을 벗었고, 최광훈도 1군에 올라오지 못하며 양 팀 다 손해만 봤다.
9. 1997년
9.1. 전준호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7.04.09 |
전준호 | 5억원 |
현대 피닉스로부터 문동환을 받기 위해 계약금(약 4억원)과 그 이자(약 1억원)의 반환의무를 면제받는 조건으로 단행된 트레이드. 김대익의 성장 가능성을 믿고[30] 전준호를 보낸 롯데는 이후 삼성에서 트레이드로 김주찬을, FA로 정수근을 영입하기 전까지 오랜 기간동안 1번 타자 부재에 시달리며 고생을 하게된다. 전준호는 첫 해 현대에서 개인 커리어로우를 달성했지만, 이듬해 철지부심 연습을 하여 부활을 알리며, 오랜만에 우승 반지를 획득과 골든글러브를 차지하는 겹경사를 누리며, 현대 왕조의 일등공신이 된다.
그리고 전준호는 2022시즌을 앞두고 24년만에 코치로 롯데에 복귀하게 됐다.
9.2. 김승남, 구한성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7.05.20 |
김승남 구한성 | 4천만원 |
둘 다 큰 활약 없이 방출되었다.
9.3. 김충민, 1천5백만 ↔ 나성열, 김성한
트레이드 일자 | 1997.05.25 |
김충민 1500만원 | 김성한 나성열 |
백업 포수 김충민과 두 투수 자원인 김성한, 나성열 간의 트레이드. 김성한은 시즌 후 방출, 나성열도 4이닝만을 투구하고 방출. 김충민은 한 시즌 뿐이지만 98시즌 123경기를 출장하며 주전포수로 힘을 보태며 한화가 근소하게 승리한 트레이드였다.
9.4. 김광림 ↔ 강영수, 공의식
트레이드 일자 | 1997.06.08 |
김광림 | 강영수 공의식 |
시즌 중반 현대는 답답한 타선에 성적이 최하위로 내려가자 왼손잡이 선수가 부족한 마당에 쌍방울의 교타자 김광림을 트레이드 해온다. 김광림은 99시즌 다시 쌍방울로 돌아가 은퇴하였고, 그 사이 강영수와 공의식은 방출되었다. 쌍방울에겐 소득이 없었지만, 현대는 김광림의 경험으로 98시즌 우승을 맛봤으니 현대가 이득을 본 케이스.
9.5. 윤형배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7.06.27[31] |
윤형배 | 3800만원 |
9.6. 이동수 ↔ 김종훈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 1997.06.27 |
이동수 박석진 | 김종훈 박동희 |
크보 역사상 제일 불운했던 신인왕이자 사실상 최초의 저니맨 칭호를 받았던 이동수의 여정의 서막이 이 트레이드가 되겠다. 결과만 놓고 보면 양팀 다 이득을 챙긴 케이스지만 정작 트레이드 주축 선수들이 아닌 보조적으로 따라간 선수들이 더 활약한 특이한 케이스기도 하다.
삼성은 김종훈이 2007년까지 준주전으로 꾸준히 나와 준데다 큰 경기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포스트시즌에서 적극 중용되어 활약, 우승반지를 3개나 얻었다. 롯데로 간 박석진은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 친정팀 삼성을 상대로 비수를 꽂기도 했고, 이후 전천후 투수로 자주 나오며 올림픽 국가대표까지 해봤다.
반면 두 팀 간 트레이드의 핵심으로 주목받았던 이동수와 박동희는 별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이동수는 얼마 못 가 다시 쌍방울로 재트레이드된 데 이어 여러 팀을 전전하는 저니맨이 되었고, 한때 롯데의 마무리였던 박동희 역시 삼성 이적 후에는 퇴물로 전락하며 다시는 부활하지 못했고,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갈베스, 김진웅과 더불어 삼성팬들의 뒷목을 잡게했다. 이후 2002년 시즌 도중 삼성에서 웨이버 공시당해 은퇴했다.
9.7. 홍우태 ↔ 박상현
트레이드 일자 | 1997.06.30 |
홍우태 | 박상현 |
9.8. 이종운 ↔ 강대호
트레이드 일자 | 1997.10.03 |
이종운 | 강대호 |
남두오성의 몰락으로 정의할 수 있는 트레이드. 트레이드 자체는 어느 팀도 제대로 이득을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종운은 얼마안가서 은퇴를 한다. 그러나 이 트레이드로 인해 훗날 본인이 감독이 될 때 이 때 친분이 생겼던 장종훈을 롯데 타격코치로 부르게 된다.
9.9. 김태형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7.10.07 |
김태형 | 1500만원 |
트레이드 직후 김태형이 은퇴하면서 아무 의미 없는 트레이드가 되었다.
9.10. 조계현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7.11.10 |
조계현 | 4억원 |
사실 조계현이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으로 구단의 눈밖에 난 것도 있지만, 당해년도 모기업인 해태제과가 IMF 사태로 부도가 나자 삼성이 현금 트레이드 연락을 먼저 취했다. 이후 선배 이순철 역시 방출되어 함께 98시즌 삼성에 건너간다.
9.11. 박경완 ↔ 김형남, 이근엽, 9억
트레이드 일자 | 1997.11.15 |
박경완 | 김형남 이근엽 9억원 |
IMF 외환 위기로 구단 사정이 어려워진 쌍방울의 '선수 세일' 1탄.[32] 박경완을 내주는 조건으로 선수 2명과 9억원의 현금을 받았는데 사실은 선수보다 현금이 더 중심에 있던 트레이드라고 볼 수 있다.
박경완은 현대에서 주전 포수로 자리잡자마자 무시무시한 핵 타선이 됐고 결국 1998년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한편, 쌍방울로 건너간 김형남은 쌍방울의 환경에서 야구 포기를 했고 이근엽은 쌍방울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은퇴를 한다.
9.12. 김동호 ↔ 송구홍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 1997.12.26 |
김동호 박철웅 | 송구홍 이병석 |
이상훈과 이종범의 해외 진출로 양 팀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는 트레이드. 결과는 둘 다 이득을 보지 못했다. 특히 박철웅이 트레이드 직후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면서 해태는 1998시즌 도중 안상준을 보상 차원으로 트레이드했다.[33]
9.13. 김광현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7.12.26 |
김광현 | 5천만원 |
10. 1998년
안상준 임창용 최훈재 이재만 | 동봉철 박종호 | 99년 2차 1라운드 지명권 김현민 박성기 조규제 김실 임창식 김기태 김현욱 | 최익성 박태순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 이계성 양용모 |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 권명철 | 정영규 안상준 최창호 | 박계원 이동수 박정현 가내영 박상근 박상현 동봉철 이민호 이계성 양용모 | 99년 2차 1라운드 지명권 (쌍방울) 노장진 임창용 김기태 김현욱 김상진 |
4 / 4 | 2 / 3 | 8 / 10 | 7 / 6 |
박정현 가내영 최창호 | 박상근 박상현 최기문 권명철 김상진 | 정영규 노장진 동봉철[C] 이민호 | 박계원 이동수 차명주 |
조규제 박종호 | 김실 차명주 최훈재 이재만 | 동봉철[C] 최익성 박태순 임창식 | 김현민 박성기 최기문 |
3 / 2 | 5 / 4 | 4 / 4 | 3 / 3 |
Out In |
IMF 사태로 인해 모기업이 큰 타격을 받은 쌍방울 레이더스가 운영 자금이 궁해지면서 돈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1997년 11월의 주포 박경완 트레이드를 시작으로 1998년과 1999년에 걸쳐 여러 선수들이 팔려나갔다. 이들은 대부분 주축선수 ↔ 유망주,현금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쌍방울은 지명권 장사도 했으며, 이 때문에 쌍방울 해체 이후로 KBO에서는 지명권 트레이드가 금지되었다가 2019년 하반기에 부활하였다.
한편, 위에 열거된 트레이드 외에도 웨이버 공시 후 트레이드가 1차례[36]있었다.
10.1. 박현영 ↔ 99년 2차 1라운드 지명권
트레이드 일자 | 1998.02.24[37] |
박현영 | 99년 2차 1라운드 지명권 |
삼성은 1999년 2차 1라운드 지명권으로 투수 라형진을 지명했다. 라형진은 몇 시즌 스윙맨 노릇을 하다 은퇴했고 박현영은 1군에서 한 시즌만 뛰고 방출되었다.
10.2. 동봉철 ↔ 정영규
트레이드 일자 | 1998.05.01 |
동봉철 | 정영규 |
10.3. 안상준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8.05.15 |
안상준 | 1억 5천만원 |
이 트레이드 덕에 해태는 어렵게나마 외국인 선수를 데려올 수 있었는데 그 선수가 하필 숀 헤어(...).
10.4. 이동수 ↔ 박성기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 1998.06.05 |
이동수 박계원 | 박성기 김현민 |
쌍방울 구단의 존폐가 위협받던 시절의 트레이드임에도 불구하고 묻힌 트레이드. 이동수의 저니맨이 된 트레이드 중 하나. 쌍방울의 초창기 마운드를 지탱해 왔던 박성기가 이 때 나갔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0.5. 조규제 ↔ 박정현, 가내영, 6억
트레이드 일자 | 1998.07.31 |
조규제 | 박정현 가내영 6억원 |
태평양에서 무진장하게 혹사당한 박정현이 끝끝내 재기불가 라는 판정을 받아 팀내 패전처리로 뛰던 가내영과 묶여 쌍방울로 건너간다.
이후 조규제는 2000년 시즌 끝나고 전력보강선수로 조웅천과 묶여서 SK로 갔다.[38]
10.6. 박종호 ↔ 최창호
트레이드 일자 | 1998.07.31 |
박종호 | 최창호 |
위의 조규제 트레이드와 같은 날 이루어진 트레이드. 결과적으로 볼 때 박종호를 들여온 현대의 완승이었으며 인천야구의 산 증인이었던 최창호는 그저... 일단 다섯 살이나 더 높고 당시 부상에 흔들리던 최창호를 받아온 LG 프런트들이 삽질을 했다. 이 후 박종호는 현대 왕조를 이끌며 국대에 뽑히기도 하고 타격왕 + 골든글러브도 수여받고 이 후 FA가 되어 꽤 많은 돈을 받고 삼성에 건너가서 우승도 또 맛보는 경험을 가진 반면 최창호는 은퇴 할 때 까지 우승반지는 커녕 준우승만 두 번 경험하고 은퇴를 한다.
10.7. 김실 ↔ 박상근, 박상현
트레이드 일자 | 1998.07.31 |
김실 | 박상근 박상현 |
법정관리를 받던 쌍방울의 기업 사정 상 김실의 고액 연봉을 감당하기 어려웠기에 트레이드로 내보냈다. 베어스 이적 후에는 이미 전성기가 지난 탓인지 그다지 활약하지 못했다. 박상근은 다음 시즌 8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 박상현은 시즌 후 바로 방출 당하면서 나름 쌍방울의 주축이었던 김실을 트레이드한 결과 또한 당시 쌍방울의 처절한 현실을 방증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10.8. 최기문 ↔ 차명주
트레이드 일자 | 1998.10.23 |
최기문 | 차명주 |
OB는 좌완 필승조를, 롯데는 주전 포수를 얻는데 성공한 윈윈 트레이드.
롯데에서 폐기물 급의 거품 투수로 악명높았던 차명주를 트레이드하기 위해 먼저 접선했고, OB도 마침 진갑용이라는 확실한 주전 포수가 있어서 유망주 최기문을 롯데로 넘길 수 있었다.
10.9. 노장진 ↔ 최익성, 박태순
트레이드 일자 | 1998.11.03 |
노장진 | 최익성 박태순 |
최익성이 본격적으로 저니맨이 된 트레이드가 이 트레이드다. 성적 때문인 것은 당연히 아니고, 당시 감독인 서정환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트레이드된 것이다. 최익성은 1999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활약을 하여 팀 우승에 공헌했으나 바로 이듬해 선수협 참여때문에 괘씸죄로 LG에 트레이드 되었다. 트레이드 상대였던 노장진은 그놈의 사생활 문제 때문에 그렇지[40] 삼성에서의 활약은 좋은 편이어서... 99년에 15승, 그리고 2002년에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면서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다.
다만 삼성이 완전한 이득이었는지는 평가가 갈린다. 1998년 최익성을 트레이드하면서 삼성은 2001년 박한이가 첫 해부터 완전히 주전으로 자리잡고 2002년 강동우가 2년을 날린 부상 이후 다시 부활하기 전까지 수비능력이 최악에 들어가는 신동주(야구), 김기태를 넣어야 했고 외국인 선수를 외야 한 자리에 무조건 채워야 했을 정도[41] 답이 없는 외야를 구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최익성이 몇 년 정도 1997년보다는 못해도 그보다 살짝 못미치는 정도의 성적만 꾸준히 내 줬어도 공격력과 수비를 겸비한 안정적인 외야 운영이 가능했을 것이다.[42] 특히 이 트레이드는 강동우가 정상적인 생활 자체도 불가능할 수 있다는 그 엄청난 부상을 당한 후에 서정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얼마나 정신나간 트레이드였는지를 알 수가 있지 않은가? 또한 트레이드로 온 노장진도 비교적 성적이 좋았던 1999, 2002년을 제외하고는 시즌 매 경기마다 들쑥날쑥한 성적을 기록했기에 더 그렇다.
이 트레이드와 임창용 혹사 그리고 충격적인 그 경기 때문에 서정환은 삼성 역사에 자랑스럽게도 금지어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대구아재들에게 있어서 최익성과 신동주를 가장 아픈 손가락에 넣는 이유가 둘 다 삼성에서 우승 경력이 아예 없다. 후배 강동우나 박한이가 함께 우승 경력이 있어 무엇보다도 아쉬울 수 밖에 없는 따름.
10.10. 임창식 ↔ 동봉철, 이민호
트레이드 일자 | 1998.11.03 |
임창식 | 동봉철 이민호 |
10.11. 임창용 ↔ 양준혁 등 3명, 20억
트레이드 일자 | 1998.12.14 |
임창용 |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 20억원 |
해태가 자금난으로 인해 주축선수를 팔려하자 삼성이 거액과 함께 프랜차이즈 선수 스타였던 양준혁을 내놓으면서 여러모로 야구계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초대형 트레이드.
양준혁은 삼성이 아니면 은퇴를 불사하여 트레이드를 완강히 거부하려다가[43] 결국 훈련에 합류하고, 99년도 역시 뛰어난 성적을 올리긴 했지만[44], 선수협 문제도 있었고 김응용과 양준혁의 담판 때의 조건[45]으로 다시 LG로 트레이드됐다.[46] 이 트레이드로 삼성을 포함한 모든 구단에 찍힌 상태였다. 그 이후 선수협 구성의 주동자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2001년 시즌이 끝나고 FA가 예정되었을 때 암묵적으로 영입을 하지 말자는 구단 사이의 밀약이 나돌았을 정도[47]였다. 원래 삼성도 영입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전 해태의 감독인 김응용이 일단 그 문제를 넘어서 무조건 영입을 해야하는 선수라고 강력하게 요구해서 겨우 양준혁은 삼성으로 이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응룡 감독은 2000년 구단의 어려움으로 1년만 더한다는 조건하에 의리를 지키고 당시 감독 제의를 내비친 삼성 구단에는 나중에 가겠다고 했으며. 결국, 임기 종료 후 2001년 삼성 라이온즈에 취임을 하게 되었다.. 임창용은 99년 그 해 전설이 되었지만, 마지막이 좋지 못했다. 정규시즌과 포스트시즌을 가리지 않은 서정환의 엄청난 혹사가 동반되었기 때문이었다.[48]
트레이드 상대였던 황두성은 이후 해태에서 2년간 패전처리 및 2군에서 짱박혀있다가 퇴출된다. 이후 현대로 건너가 신고선수를 하여 쭉 선수 생활하다가, 뛰어난 롱릴리프, 셋업맨으로 활약하다가 현대가 망하고 신생팀인 히어로즈에서도 있다가 방출 후에는 돈 때문에 자기를 버린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가 곧바로 코치 제의를 하자 트레이닝 코치 신분으로 삼성으로 돌아오게 된다. 곽채진은 1999년에 잠깐 활약하였으나 이후엔 별다른 성적을 내진 못하였고 2003년 두산으로 이적한 이후 은퇴하였다.
일단 7년(99~05) + 2년(14~15)동안 삼성의 주축 선수로 활약한 임창용 때문에 삼성의 이득이라고 보는 시선이 많다. 양준혁을 1년밖에 쓰지 못한 해태도 그렇고 무엇보다 해태는 재정난으로 인해 현금을 받기 위해서 주축 선수를 손해보는 트레이드였기 때문. 거기다 양준혁과 임창용이 같은 팀 유니폼입기 시작한 2002년부터 코시우승만 3차례를 일궈내며 삼성의 압도적인 이득이 되고 말았다.
10.12. 권명철 ↔ 최훈재, 이재만
트레이드 일자 | 1998.12.24 |
권명철 | 최훈재 이재만 |
해태로서는 양준혁이 트레이드를 끝까지 거부할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97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던 좌타 외야수 최훈재와 좌완 불펜투수 이재만을 내주는 출혈을 감수하면서 선발진을 보강할 목적으로 권명철을 데려왔다. 권명철로서는 1995년 우승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보니 해태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아[49] 재기할 수 있는 기회기도 했다.
그러나 해태로 옮겨간 권명철은 1999년 초 한화와의 시범경기 도중 이영우의 살인태클에 넘어져[50] 발목 골절로 그대로 시즌아웃됐고, 결국 해태에서는 한 경기도 뛰어보지 못하고 이듬해인 2000 시즌 개막 직전 신생팀 SK 와이번스의 창단지원선수로 이적하면서 1년만에 해태를 떠났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두산에 넘어온 최훈재는 두산에서 몇 년간 대타로 쏠쏠히 나와준 데다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의 우승 주역으로 활약하고 은퇴하면서 두산의 압승으로 끝났다.
10.13. 김기태, 김현욱 ↔ 이계성, 양용모, 20억
트레이드 일자 | 1998.12.25 |
김기태 김현욱 | 이계성 양용모 20억원 |
팀의 중심이였던 김기태와 김현욱마저 이 트레이드가 이뤄진 이후 김성근 당시 쌍방울 감독이 허탈해했을 정도였다.[51]
김기태는 삼성 이적 후 이승엽과 함께 클린업을 구성했고 2001년 마해영의 영입으로 자리를 잃기 전까지는 좋은 타격 성적으로 팀에 기여했다. 팀 내 입지를 잃고 최악의 시즌을 보낸 이후 쌍방울의 선수단을 승계한 SK에 트레이드로 입단했고 한창 때의 모습은 아니지만 빼어난 활약으로 본인 커리어 4번째 골든글러브를 거머쥔 후 2005년 은퇴했다.
김현욱은 이미 불펜에서 어마어마한 이닝을 소화하며 부상 우려가 있는 선수였지만 2003년까지 불펜에서 수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다만, 혹사로 인해 망가진 무릎으로 인해 2004년 시즌 중 수술을 받았고 2005년 끝내 은퇴했다.
이계성은 99년 2군에 박혀있다가 1년만에 삼성으로 재트레이드되었고 양용모는 타격도 수비도 안 되지만 포수도 볼 수 있는 유틸리티란 장점 하나만 가진 선수였기에 여기저기 백업만 돌다가 선수단이 승계된 SK에서 얇은 뎁스 덕에 많은 타석을 받으며 1군 출전을 이어갔으나 2002년 시즌 종료 후 FA 포수 박경완이 영입되며 방출되었다.
10.14. 김상진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8.12.30 |
김상진 | 6억 5천만원 |
임창용, 김기태 트레이드와 함께 원조 '돈성'시대의 시작을 알린 트레이드. 다만 김상진은 삼성에 와서 별 활약 없이 평범하게 부진했고 이후 2002년에 SK로 트레이드 되었다.
한편 OB 베어스가 1999년 1월 5일부로 두산 베어스로 팀명을 변경함에 따라 이 트레이드는 OB 베어스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트레이드가 되었다.
11. 1999년
아래에 트레이드 외에도 웨이버 공시 후 트레이드가 한 차례[52] 있었다.
11.1. 임선동 ↔ 안병원, 7억
트레이드 일자 | 1999.01.03 |
임선동 | 안병원 7억원 |
임선동 계약파동 후 LG가 2년의 유예기간을 마치면서 현대에 넘겨줘야하는 상황이기에 단행된 트레이드. 안병원은 트레이드 이후 LG에서 얼마안가 은퇴하여 묻혀졌고 임선동은 2000년도에 18승으로 공동 다승왕+골든글러브에 오르고 이후 2~3년간은 선발을 지켜줬다. 사실상 현대의 승리. 임선동은 이름 값에 비하면 많이 아쉽지만 현대의 두번째 우승 일등공신이였다.
11.2. 김상호, 류택현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9.01.22 |
김상호 류택현 | 1억원 |
당시 두산의 자금난도 있었고 2년 연속 준우승에 머무은 LG는 우승을 위해 1995년 시즌 OB 우승을 견인한 김상호를 다시 데려왔지만 별 활약 없이 은퇴했다. 그 대신 OB가 유지현 대신 94년 1차로 지명한 류택현이 불펜 투수로서 암흑기 투수진을 지탱하고 홀드왕을 기록하는 등 롱런하며 투수 최다 출장 기록 마일스톤을 세우는 등 활약하면서 LG 입장에서는 성공적인 트레이드.
한편 두산 베어스가 팀명을 변경한 후 처음으로 진행한 트레이드다.
11.3. 송구홍 ↔ 오봉옥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 1999.04.16 |
송구홍 박재용 | 오봉옥 박계원 |
오봉옥은 타이거즈에서의 말년까지 좋은 선발 및 구원 투수로써 활약했고 박계원은 99년 주전 김종국의 부상으로 유격수로 기용되어서 활약한다. 반면 송구홍, 박재용은 별 활약 없이 은퇴. 한때 20-20을 치면서 주목받았었던 송구홍은 완전히 처절한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11.4. 박성기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9.04.20 |
박성기 | 현금 |
11.5. 김경원 ↔ 홍원기, 전상렬
트레이드 일자 | 1999.05.14 |
김경원 | 홍원기 전상렬 |
한화는 투수진 보강을 위해 홍원기를 트레이드 카드로 써 투수를 데려오려고 했고, 이에 현대 유니콘스가 조웅천과의 트레이드를 제의했지만 결렬.[53] 이후 한화에서 두산의 김경원을 원한다는 의사를 표하자, 두산에서는 홍원기에 전상렬을 추가로 해서 2:1 트레이드에 합의를 본다.
결과적으로 김경원이 한화에서 불만 지르다가 큰 활약없이 2001년에 은퇴한 반면 전상렬과 홍원기는 두산에서 쏠쏠히 활약하고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두산의 승리로 끝났다. 그래도 김경원 개인적으로는 트레이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99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든 덕분에 OB에 이어 한화에서도 우승반지는 하나 얻고 갔다.
11.6. 장용대 ↔ 강필선
트레이드 일자 | 1999.07.23 |
장용대 | 강필선 |
현대 피닉스 소속의 강필선을 유니콘스로 불러들이기 위해 쌍방울에 장용대를 내주고 강필선의 지명권을 받아온 트레이드. 둘 다 1군 기록이 거의 없다.
11.7. 진갑용 ↔ 이상훈, 4억
트레이드 일자 | 1999.07.31 |
진갑용 | 이상훈 4억원 |
이만수 은퇴 이후 포수난에 시달리던 삼성은 김영진 등을 기용해봤지만 신통치 않았고 때마침 1996년 베어스가 꼴찌를 하면서 얻은 진갑용이 홍성흔에 밀려 자리가 없자[54] 긴급 트레이드 했다. 이후 삼성의 포수 문제는 적어도 2010년대 초반까지는 걱정 할 필요가 없었기에 이 트레이드는 확실한 삼성의 승리였다.[55] 다만 트레이드 상대였던 이상훈 역시 두산에서 나름 소소한 활약을 보여주었기에 두산 입장에서도 크게 손해 본 트레이드는 아니다
11.8. 심재학 ↔ 최원호
트레이드 일자 | 1999.10.18 |
심재학 | 최원호 |
심재학, 최원호 모두 2000년에 각 팀에서 활약한 윈-윈 트레이드.
심재학은 심정수의 선수협 관련 문제로 맞 상대가 되면서[56] 1년만에 두산으로 트레이드된다. 두산에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FA 대박으로 KIA로 이적하였지만, 초반의 성적은 괜찮았으나 노쇠화가 오면서 밀렸고, 최희섭, 나지완이 KIA에 입단하면서 결정타를 맞는다. 결국, 부상에 허덕이던 심재학은 2008년 1경기 1타석 만에 쓸쓸하게 은퇴하게 된다.[57]
최원호 역시 LG에서 선발 자원으로 기회를 받다가 2005년 풀시즌 선발 로테이션을 돌면서 13승을 거두는 활약상을 보였고 이후로도 스윙맨으로 출전하며 2009년까지 오랫동안 활약했다. 다만, 2002년에는 삼성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 허용투수가 되기도 하였다.
11.9. 00년 2차 1라운드 지명권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 1999.11.02[58] |
2000년 2차 1라운드 지명권 | 5억원 |
현대는 2000년 2차 1라운드 지명권으로 투수 마일영을 지명했다.
이 트레이드를 계기로 이후 KBO에서 지명권 양도는 금지가 되었고, 21년이 지나서야 다시 지명권 트레이드가 부활하게 된다.
11.10. 이계성 ↔ 김광현
트레이드 일자 | 1999.12.22[59] |
이계성 | 김광현 |
쌍방울 레이더스 최후의 트레이드. 이계성은 1년 만에 친정 팀으로 돌아갔고, 이후 마해영 트레이드 때 신인급인 김주찬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 김광현은 쌍방울을 승계한 SK 와이번스에서 1군 기록 없이 방출되었다.
12. 관련 문서
[A] 1월 OB에서 태평양으로 트레이드 후 12월 OB로 재트레이드[A] [A] [A] [5] 집정리 과정에서 잃어버렸다.[6] 이게 중요한 것이 LG는 MBC를 포함하더라도 프로야구 38년동안 MVP를 단 한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만약 트레이드를 안했다면 이런 대굴욕은 피했을지도.[7] 더불어 LG에서 타팀으로 이적한 선수가 새 팀에서 홈런왕을 먹은 경우가 김상호 이외에도 김상현과 박병호가 있다.[8] 그리고 OB 구단측은 그의 은퇴를 불사한 이 발언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당시 여론이 구단측에 불리했던지라 어떻게든 갈등을 봉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9] 김상호 역시 본인에게 불리한 상황임에도 연봉 올려달라고 강짜로 나온 이유는 그간 OB측과 연봉협상에서 매년 마찰을 일으켰었기 때문. 오죽했으면 여기서 더 깎이느니 선수 때려치고 개인사업에 집중하는게 낫겠다고 했을까...[10] 한명수(LG) ↔ 현금(OB)[11] 참고로, 한명수는 이강철를 필두로 이름을 날리던 동국대 야구부에 같은 85학번 투수이자 2차 1라운드 지명자로 나름 기대를 모았으나 그에 미치지 못하다가 트레이드된 것이다. 트레이드 후 한명수는 1군 등판 없이 은퇴했다.[12] 이러한 타순 배치는 21세기 들어서도 오랫동안 잔존하다가, 2010년대를 넘어서며 강한 2번타자론이 등장해 점차 사장되는 추세다.[13] 김력(태평양)↔현금(롯데), 전일수(태평양)↔미상(LG)[14] 실제로 이적료는 없었는데 이는 LG그룹 고위층의 의견이라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재박을 태평양으로 현금 트레이드 하겠다는 계획이 구단 고위층에 전해지자 이를 들은 구본무 당시 LG 구단주는 "김재박이라는 슈퍼스타를 돈 받고 팔아치우는 것은 LG의 이름에도 어울리지 않고 김재박에게 예의가 아니다"라며 무상 트레이드를 지시했다고 한다.[15] 정확히는 트레이드가 맞으나 웨이버 공시절차를 거친 트레이드이다.[16]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호명되는 소속팀은 상을 받는 날의 소속팀을 기준으로 한다. 이 당시만 해도 12월 11일에 시상식이 고정적으로 진행됐는데 이날 이전에 팀을 옮겼다면 옮긴 팀의 이름으로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 참석해야 한다.[17] 사실 이는 비단 김광림에만 해당되는 경우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쌍방울은 전력이 매우 약한데다 연고지인 전북에서도 지역 기반이 허약한 비인기 구단이었으며 구단의 지원 규모도 다른 대기업 구단보다 못한 팀이었기 때문이다.[18] 이 트레이드의 배경으로 김응용 감독과 한대화의 불화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1993년 올스타전 당시 손바닥 부상을 당했던 한대화가 얼음찜질을 하러 덕아웃에 들어가 있다가 김응용 감독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 사건 후에 불화설이 더 크게 불거졌다. 당사자들은 올스타전이라서 장난을 친 것이라 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19] 위계질서와 군기가 강했던 해태에서 뛰다가 LG로 이적하고 보니 너무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놀랐고 기강을 잡아나갔다. 1996년 시즌을 끝으로 역시 해태에서 LG로 넘어온 송유석도 한대화와 같은 생각이었으며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20] 술을 너무 좋아했던 나머지 김응용 감독이 '술만 아니었으면 대성했을 놈인데..' 하면서 안타까워한 선수가 이병훈이었다.[21] LG의 역대 수십건의 트레이드중에 거의 유일하다시피 '완승'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트레이드이다.[22] 대학 졸업 당시에도 고향팀 쌍방울보다 오히려 해태 입단을 원했었고 쌍방울 모 코치의 폭행으로 실명 위기까지 갈뻔하며 쌍방울을 떠나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당시 주전포수는 정회열이었으나 정회열의 어깨부상 및 저조한 도루저지율 덕분에 도루송구에 강점이 있었던 최해식이 주전마스크를 차지했고 정회열은 삼성으로 떠났다.[23]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밝혀지기로 은퇴 후 장채근은 해태 배터리코치로 복귀하여 많은 연습량으로 최해식을 조련했다.[B] 5월 삼성에서 트레이드 후 11월 LG로 트레이드[B] [26] 기사에서는 11월 5일로 나와있으나, KBO 연감에서는 11월 6일로 기록되었다.[27] 알루미늄 배트를 쓰던 고교야구계에서 나무 배트를 쓰는 프로야구로 넘어오면서 나무 배트에 적응하지 못했다.[28] LG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된 선수들 중 거의 유일하게 해태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29] 65년생 외야수 강영수와는 동명이인.[30] 실제로 97, 98시즌은 롯데의 기대대로 잘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시점이었던 99시즌을 반 이상 말아먹는 바람에 그 이후 약점이 간파되고 성적도 평범하여 부상과 부진으로 결국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고 역할도 대타로 한정. 그리고 은퇴.[31] KBO 연감 상 트레이드 날짜는 6월 30일[32] 이 시기 무시무시한 자본력으로 무장한 현대와 삼성이 경쟁적으로 쌍방울로부터 선수를 사오게 된다.[33] 그 때 LG로부터 받은 트레이드머니로 숀 헤어를 긴급 영입했지만 망했다.[C] 5월 한화에서 트레이드 후 11월 쌍방울로 트레이드[C] [36] 김훈(삼성)↔미상(쌍방울)[37] 어찌된 이유인지 KBO 연감 상에서는 누락되어 있다.[38] 박경완이 FA로 SK로 건너가자 현대는 보상선수로 조규제를 데려온다. 하지만 조규제는 1시즌만 뛰고 FA 선언 후 고향팀인 KIA 타이거즈로 간다.[39] 3년 연속 1위 달성은 현재 차명주 밖에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다.[40] 술도 좋아하고 바깥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자면, 당시 국내투수중 최향남과 성향이 같았고 둘 다 현역병으로 군생활을 했던 이력이 있다.[41] 1999년 찰스 스미스[60], 빌리 홀 [61], 2000년 훌리오 프랑코[62], 2001년 매니 마르티네스[42] 98년 최익성의 성적은 타율 2할 6푼 언저리에 홈런 13개 도루 20개를 기록했다. 어지간히 선발과 백업을 드나드면서 이렇게 하는 것도 대단하다.[43] 박재홍도 결국 양준혁 처럼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되었다. 물론 해태 시절의 타이거즈가 아니니 다행이긴 하려만... 막상 타이거즈에서는 별로 좋지 못한 성적에 어느 사건의 범인으로 오해받으면서 결국 2004년 말 SK로 트레이드 된다.[44] 특히 삼성에 있던 시기 커리어하이를 작성했지만, 이미 돈이 없는 해태로 건너가 작년과 같은 연봉인 1억 500만원에 동결이 되었다고 인터뷰를 했었다.[45] 해태 훈련에 합류하는 대신 1년만 뛰고 타 팀으로 트레이드시켜 주는 조건이었다.[46] 여기서도 타격왕을 차지할 정도로 98년 성적과 비슷했다.[47] 하지만, 당시 이야기를 보면 현대 유니콘스나 SK 와이번스는 양준혁 영입에 긍정적이였다고[48] 임창용의 선수 경력 생활을 보면, 삼성에서의 활약도 순탄치 못했을 정도로 엄청 굴려 먹혔다.[49] 해태는 1999년 시즌 시작 직전 하와이 스프링캠프에서 이강철과 이대진이 부상을 당한데다 1997 한국시리즈 헹가래 투수이던 김상진의 위암투병으로 인해 투수진에 구멍이 뚫렸고, 이에 권명철이 선발 한 축을 맡아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50] 그리고 한화는 이듬해인 2000 시범경기에서도 댄 로마이어가 2루수 홍현우에게 똑같은 수법으로 살인태클을 시전했다.[51] 당시 쌍방울의 선수들 인터뷰 회고록에 따르면, 팀의 기둥인 김기태와 김현욱을 트레이드를 하지 못하면 나머지 선수들 월급이 밀리기는 커녕 줄 수 없다라는 구단의 대응에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강행된 트레이드였다고 한다...[52] 최승민(LG)↔미상(쌍방울)[53] 여담이지만 홍원기는 훗날 두산을 거쳐 현대 유니폼을 입게 되고, 그 후신격인 팀에서 코치를 거쳐 감독까지 오른다.[54] 홍성흔은 당시 입단 1년차 신인이였다.[55] 다만 진갑용은 약물 복용 때문에 삼성팬들의 호불호가 엄청나게 많이 갈린다. 삼성은 진갑용 은퇴 이후 이지영과 백업 포수들로 버티다 FA 매물로 나온 강민호를 사게 되었다. 지불한 금액 대비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4년간의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후 트레이드로 영입한 김태군과 보상선수로 지명한 김재성을 영입하면서 리그 내 포수 강팀으로 꼽히고 있다.[56] 사람들은 이것을 심-심 트레이드 라고 했다. 마침 성이 같아서.[57] 동시에 그 트레이드 상대이자 프로 데뷔, 동기인 심정수도 동년대에 은퇴를 하게 된다. 나이는 심재학이 4세 위이다. 심재학은 대졸이며 심정수는 고졸로 입단.[58] 2000 신인 2차 지명이 실시된 날이다.[59] KBO 연감에서는 누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