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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씨 몰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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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명칭에 대하여
2. 설명3. 진행4. 처형된 왕씨 숫자5. 중지6. 결과7. 처분된 왕씨 혹은 처분 대상으로 지목당한 왕씨8. 성을 바꿔 살아남다9. 비슷한 전 왕가 숙청 사례
9.1. 구 왕조 → 신 왕조
9.1.1. 왕실에 준하는 지위였던 세습 실권자 가문
9.2. 군주제 → 공화제
10.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왕씨 몰살'이란 조선 초에 일어난 일부 개성 왕씨 왕족들에 대한 몰살 사건이다.

태조 3년 순흥군 왕승, 정양군 왕우 일가와 여자, 방계를 제외하고 왕위에 가까운 남자 후손 135명이 삼척, 강화도, 거제도에서 제거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때 죽은 사람들까지 아울러 놓은 《개성 왕씨 대동보》에 의하면 150여 명이다. 제34대 공양왕 중심으로 직계 유력 남자 후손들만 제거한 후, 남은 왕씨들은 외가 성으로, 사성 개성 왕씨들은 원래 성씨로 되돌려서 왕씨만 아니게 만드는 선에서 끝났다. 이 같은 조치로 태조 신성대왕 왕건 이래 잦은 사성 정책으로 불어난 개성 왕씨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기록이 많지 않아 왕씨 처분에 대한 인식은 전적으로 정사가 아닌 야사에 의존해 왔다. 실록에 나오지 않는 내용도 다수 수록되어 있는 《승정원일기》를 포함한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의 사료들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관계로 사료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국내 학계의 관심이 부족해서 많지 않은 논문들이 지엽적인 논의에 머물렀기 때문에 방대한 데이터 수집을 중시하는 미국쪽에서 일률적으로 정리하기 이전에는 명확한 전개와 처분 규모에 대한 각종 추측이 횡행했다.

1.1. 명칭에 대하여

국내의 학술 논문들 중 현재 본 문서의 표제어인 왕씨 몰살(王氏沒殺)과 같은 용어 사용은 학계에서는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다. 학계에서 비슷한 용어 사용례들을 찾아보아도 해당 사건을 지칭할 때 왕씨 제거(王氏削除)[1], 왕씨 처분(王氏處分)[2], 왕씨 학살(王氏虐殺)[3] 또는 조선 초기 당대에도 사용된 바 있는 왕씨 영절(王氏永絶)[4]이란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지 왕씨 몰살(王氏沒殺)이란 표현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 다만 직접적으로 '왕씨 몰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당대의 사건을 몰살[5]로 표현한 국내 논문들도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그 외 숙청[6]이나 '왕씨 제거'는 아니지만 제거[7]란 표현을 쓴 논문들 또한 확인이 된다. 그 밖에 유진 박(Eugene Y. Park) 펜실베니아대 교수는 그의 SCI 논문들에서 <the May 1394 massacre>(1394년 5월 몰살)[8]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대 실록의 기록들에서는 주로 '영절'(永絶)이나 '청거'(請去)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다.[9]

2. 설명

개성 왕씨고려 474년간의 국성으로 번영한 가문이었지만[10]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새로 건국하면서 조선의 안정에 걸림돌이 되는 방해물로 간주되었다. 개국 초기에 왕씨들을 섬으로 옮겼다가 시간이 약간 지나자 다시 섬에서 나와도 된다며, 재주있는 왕씨들은 벼슬도 하게 해준다고 했다. 태조 3년 1월 16일 그러나 김가행(金可行)과 박중질(朴仲質)이 점쟁이에게 태조와 공양왕 중 누구 운세가 더 좋은지, 왕씨들 중에서는 누가 제일 운세가 좋은지 물어보는 역모 행위를 하자 고려 왕씨 일부를 거제도로 다시 옮겼다. #

왕씨 몰살을 요구하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태조도 마침내 왕씨를 제거하기로 결정했고, 4월 15일에 윤방경 등이 강화도에 있던 왕씨 일족들을 강화 나루에서 익사시켰다. 4월 17일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 왕요 일가가 교살당했고, 4월 20일에 손흥종 등이 거제도에 모아놓았던 왕씨 일족을 바다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제거 대상자는 《개성 왕씨 대동보》에서는 공양왕을 포함해 약 150여 명이라 전하며[11], 이 사건을 연구한 재미 한국사학자인 유진 박 펜실베니아대 교수#가 참조한 사료인 공주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혼기(魂記)>와 이 <초혼기> -명부-에 기록된 규모도 삼척에서 공양군 왕요 포함 8명[12], 거제도에서 수연군 왕규 등 111명, 강화도에서 학성부원군 왕향 등 16명, 도합 135명으로 역시나 비슷한 규모이다.

이후 지속적으로 감시와 색출이 법제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왕씨들은 지방에서 쥐죽은듯 숨어지냈다.[13] 태종 13년 공주에서 일어난 왕거을오미 사건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탄압을 중단시키기 이전까지 개성 왕씨들은 약 20여년간 숨죽여 지내다가 태종과 세종을 거쳐 점차 점차 처우가 개선되어 문종~세조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조선 지배층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3. 진행

태조의 즉위 직후에는 공양왕과 세자 왕석에 대한 처분 문제만 논의되었을 뿐 나머지 왕씨들을 어떻게 할지는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500년 가까운 통일왕조의 왕족으로서 용손(龍孫)으로 신성화되었던 왕씨들에 대한 처분은 곧 심각한 화두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고려 왕실 처분 문제에 대한 최초의 논의는 태조 원년 7월 20일에 이루어졌다. 사헌부 대사헌 민개(閔開)가 전조 왕씨들을 외방에 둘 것을 청하자 태조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1.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과 아들 왕강(王康)은 나라에 공이 있으니 논하지 말라.
2.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와 아들 왕조(王珇), 왕관(王琯)은 고려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니 논하지 말라.
3. 나머지는 거제와 강화에 나누어 분치하라.

왕승과 왕강 부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여를 했는지 기록이 없어 오늘날에도 인지도는 거의 없지만 매우 드라마틱한 인물상으로 개성 왕씨지만 왕씨의 사직을 버리고 이씨의 사직을 택해 공신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왕강은 조선에 충성하며 관직 생활을 함에도 지모와 계략이 빼어나다는 이유로 신하들이 거듭 처분을 요구했던 점이나 태조가 학식과 실무 능력을 칭찬했던 점으로 보아 정치적 수사를 감안해도 당대에 상당히 유능하고 자질을 인정받는 인물이었던듯 싶다. 왕우는 공양왕의 형제이자 이방번의 장인이기에 태조가 보호했다.[14]

강화와 거제에 나누어 분치케한 방법은 상나라의 탕왕이 걸을 남소로 나가 거처하게 하고, 서주의 무왕이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을 제후로 봉해 잔존한 상나라의 후손들을 다스리게 한 방식과 유사하다. 어느 쪽이든 목숨은 보장해 주는 쪽이었다.

7월 28일 정도전이 지어 반포한 태조의 즉위 후 첫 교서에서 왕씨에 대한 정책은 다음과 같다.

1. 왕우에게 기내(畿內)의 마전군(麻田郡)을 주고,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도록 한다.
2. 나머지 자손들은 외방(外方)에서 편리한 데에 따라 거주하게 하고, 그들의 처자와 동복(僮僕)들은 그전과 같이 한 곳에 모여 살게 하는데 소재 관사에서 힘써 구휼하여 그들의 처소가 어디인지를 놓치지 말 것

일거수 일투족을 감찰하되 어쨌든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의사를 유지했다.

아무튼 태조 원년 8월 7일 원주에 있던 왕요를 '공양군'(恭讓君)으로 삼아 간성군(杆城郡)에 두어 폐주 신세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왕씨의 제사는 아우 왕우가 맡으며, 전 왕대비 안씨는 '의화궁주'(義和宮主)로 삼아 처우를 보장하는 조치가 발표되었다. 일일이 언급되진 않으나 뒷날 왕강, 왕승보, 왕승귀와 나란히 탄핵받는 영복군(永福君) 왕격(王鬲)이 태조 원년 9월 3일 거제나 강화가 아닌 화령부(和寧府)로 안치되었다는 《실록》 기사까지 감안하면 7월 18일 기사처럼 왕승과 왕우 가족을 제외한 이들이 몽땅 강화와 거제로 전부 보내진게 아니라 상당수는 외방종편(外方從便 서울 이외 지방에 거주케 하는 형벌)이 행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외방종편'이면 뒷날 이거이나 이숙번이 받은 형벌로 무겁다고 보긴 힘들었다. 태조는 보유할 수 있는 노비 숫자를 20명 이내로 제한한[15] 부분을 제외하면 외방에 보내진 왕씨들의 생활을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

중앙에 남은 왕씨 중에 왕강은 왕승보(王承寶)와 함께 특별히 개경에 불러와서[16] 굴포의 운하건설 작업을 맡겼고, 운하 건설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왕강의 학식과 실무 능력은 극찬하며 그를 남재와 같은 '회군공신'(回軍功臣)의 예로 대우하게 했다. 왕조와 왕관은 외가의 성을 따라 노씨로 성을 바꾸게 한 다음 대장군과 상장군으로 삼았고, 형제의 아버지인 왕우도 주기적으로 궁에 초청해 격구를 하며[17] 챙겨주었다.

뒷날 왕우 부자를 끝까지 지켜준 점이나 왕강을 섬으로 보내야 한다는(=죽여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청을 뿌리치고 연고가 있는 공주로 귀양보내는 선에서 끝낸 태조의 조치를 감안하면 이들에 대한 후대가 전부 위선이라고 보긴 힘들다. 공양왕 옹립때까진 한 배를 탔다 돌아선 정몽주에게 인내심을 발휘했던 태조는 왕씨라도 우리편임이 명확하고 능력이 되면 임용해 책임있는 자리에 올려도 되지 않겠느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변방 무장 출신으로 자기 힘으로 정적들을 쓰러뜨리고 올라선 창업군주 태조의 의사였고,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의 의견이 아니었다. 조정의 실권을 쥔 중신들은 건국 직후 이색, 우현보, 설장수 등 온건파 56인을 바다에 던져서(擠之於海) 제거하자고 주장했던 이들이었다. 왕씨를 방치, 봉건하자는 온건론의 기반은 태조 1인의 관용이 전부라서 당대 정치적 격변에 따라 태조의 의향이 바뀌면 얼마든지 뒤집어질 방침이었다.
밭을 손질하는 사람은 반드시 풀을 뽑고, 집을 짓는 사람은 반드시 터를 다지니,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도 마땅히 환난(患難)을 미연(未然)에 없애서 나라의 기틀을 영세(永世)토록 전해야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고려 왕조의 후손(後孫)을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나누어 두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주현(州縣)에 뒤섞여 사는 사람이 있으니, 만일에 무뢰배(無賴輩) 가운데 왕씨(王氏)인 것을 구실로 삼아 난리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게 된다면 그들을 보전하는 방책이 못됩니다. 원컨대, 모두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두어서 미리 방비하게 하소서.[18]

태조 즉위 후 2개월이 막 지난 시점에 대사헌 남재가 올린 <시무상서문>이다. 남재는 정도전, 조준과 함께 태조 추대 세력 가운데 핵심인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었다. 그가 대사헌의 직분을 역임하며 올린 <시무상서문>은 정도전을 비롯한 공신 세력 대다수의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볼 수 있다. 상소에선 왕업의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왕씨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그들을 모두 강화와 거제에 분치토록 하자 청하고 있다. 역으로 해석보면 태조 즉위 직후 거제와 강화에 옮기라는 지시가 예외없이 적용된 사안이 아니며, 상당수 왕씨들이 지방 군현에 흩어져 지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태조는 도당과는 뚜렷한 온도 차이를 보이며 재위 2년차까진 입장이 변치않았다.
도승지 이직(李稷)에게 명하여 도평의사사에 전지하였다.
"예로부터 왕자(王者)가 처음에 대업(大業)을 정할 적에 오히려 전조(前朝)의 후손이 자기의 후환(後患)이 될까 두려워하여, 의심과 꺼리는 마음을 많이 내어 반드시 목 베어 없애버리고자 하였는데, 나는 그렇지 아니하다. 하늘이 과궁(寡躬)을 명하여 한 나라의 군주로 삼았으니, 무릇 경내(境內)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나의 적자(赤子) 인지라, 피아(彼我)의 차별이 없이 똑같이 사랑하여 하늘의 뜻에 보답해야 될 것이다. 이미 공양왕은 편리한 데 따라서 편안히 거주하게 하고, 처자(妻子)와 동복(童僕)들도 예전과 같이 모여 있게 하였으나, 다만 그 족속(族屬)들은 해도(海島)에 들어가 거처하여 생계(生計)가 고생스러우니, 내가 심히 민망하게 여긴다. 그 왕씨(王氏)의 족속으로서 거제(巨濟)에 있는 사람은 시일을 정하여 육지로 나오게 하고 각기 육지의 주군(州郡)에 안치(安置)하여 생계(生計)를 이루어 안정된 처소를 잃지 말게 하되, 만약 재간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간택(揀擇)하여 서용(敍用)해서 공도(公道)를 보이게 할 것이니, 도평의사사에 영을 내려 빨리 시행하라."
도평의사사에서 이에 경상도 안렴사와 거제 병마사에게 이문(移文)하여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해서, 완산(完山)·상주(尙州)·영해(寧海)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였다.[19]

공양왕을 원하는 장소에 기거케 하는 한편 거제에 있는 왕씨들을 육지로 나오게 하여 주군에 안치토록 지시했다. 원년에 하달한 처리 방침보다 한결 전향적인 조치로 도당에 시행을 서두르도록 촉구하기까지 했다.

전향적 조처의 배경에는 명나라의 인정이 있었다. 홍무제는 홍무 25년 윤12월 초9일에
'동이의 국호로는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고 했고, 이 같은 결정은 태조 2년 2월 15일 주문사(奏文使) 한상질(韓尙質)이 명나라 예부의 <자문>을 전달함으로서 알려졌다.[20] 명실공히 고려의 국왕이 아닌 신왕조 조선의 군주로서 권위를 인정받은 태조는 고려 왕족들도 자신의 신민으로 포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리라 미뤄짐작할 수 있다. 도당은 이에 따랐고 전술한 왕강과 왕승보의 개경행도 이때 진행되었다.

하지만 도당의 의지는 태조와는 전혀 달랐고, 무엇보다 섬에서 나와 지방에서 살게해준 태조의 호의는 의도와 달리 결코 왕씨들에게 좋게 작용하지 않았다. 거제와 강화라는 좁은 섬에서는 생활은 불편하지만 바다 건너 섬안에만 있으니 감시가 쉬워서 꾸미지도 않은 역모 누명을 쓸일도 없다. 국립공원안 천연기념물쯤 되는 셈인데 육지로 올라와 넓게 흩어져 지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왕래하고 모이기는 한결 쉬워지는데 감시는 어려운만큼 아주 작은 빌미만으로 역적 혐의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고 그렇게 되었다.

불길은 '흥국사 9공신' 중 한 명인 박위(朴葳)로부터 시작되었다. 박위는 태조 2년 3월 전 문하평리로서 양광도에 나아가 왜구를 막거나, 전함을 제조하는 등 태조 2년까지 국방 부분 외 정치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한 그가 태조 3년 정월 병진일 순군옥(巡軍獄)에 수감된다.

이유는 박위가 동래현령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을 시켜 밀성(密城)에 사는 장님 점쟁이 이흥무(李興茂)에게 점을 치게 한 까닭이었다. 점괘는
'공양왕의 명운이 태조와 비교해 누가 더 나으며, 왕씨 가운데 누가 명운이 귀한 사람인가.'
하는 극히 민감한 내용이었다. 이흥무는 남평군(南平君) 왕화(王和)의 명운이 가장 귀하고, 그 아우 영평군(鈴平君) 왕거(王琚)가 다음이라고 말해주었으며, 순군옥에서 심문받을 때도 그대로 토설했다.

왕씨들은 다시 거제도로 옮겨지고, 왕화와 왕거는 안동옥에 수감되었는데 대간과 형조에서는 더 나아가 왕강, 왕승보, 왕승귀, 왕격과 공양왕 부자를 모두 제거할 논의를 시작한다. 대간과 형조에서는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려 공양왕과 여러 왕씨들을 섬에 안치했다가 모두 대역죄로 제거하기를 청했다.
"어제 왕씨(王氏)를 제거하자는 한 가지 일로써 장소(章疏)에 연명(連名)하여 올려 청하였으나, 즉시 윤허를 얻지 못하고, 여러 번 전하의 귀를 번거롭게 했사오니 낭패됨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지극히 공평하고 사심이 없는 것은 하늘이고, 지극히 어리석어도 신지(神智)한 것은 백성이니, 천도(天道)는 왕씨(王氏)에게 화(禍)를 주고 전하에게 복을 준 것이 아니라, 곧 무도(無道)한 자에게 화(禍)를 주고 유도(有道)한 사람에게 복(福)을 준 것이며, 민심(民心)은 왕씨를 미워하고 전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곧 무도한 자를 미워하고 유도한 사람을 사랑한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천명(天命)을 개혁하여 나라를 세웠으니, 진실로 마땅히 하늘의 명령을 듣고 사람의 마음을 따라야 될 것이온데, 대간(臺諫)과 법관(法官)이 〈왕씨의 제거를〉 두세 번이나 청하였는데도 전하께서 장소(章疏)를 머물러 두고 내려보내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대저 큰 과오를 석방하는 것은 《춘추》(春秋)에서 경계한 바이며, 사람을 능히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람을 능히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은 선유(先儒)의 격언입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왕씨 제거를 요청한 명분은 철저히 유학 논리에 기반했다.
지금 공양(恭讓)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끊어졌으므로 스스로 감내하지 못함을 알고서 물러가 밖에서 살고 있으며, 처자(妻子)가 한 곳에서 모여 살고 조석(朝夕)의 접대가 그전과 같으니, 이것은 전하의 하늘과 같은 덕이옵니다. 이를 은덕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반역을 도모하여 자신이 흔단(釁端)을 일으켰으니, 이것은 곧 하늘이 죄 있는 자를 토벌하는 것으로서 변경할 수 없는 정리(定理)입니다. 악(惡)을 제거하면서도 그 근본을 힘쓰지 않는다면 간웅(奸雄)과 호협(豪俠)들의 잠복(潛伏)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저들 박중질(朴仲質)과 김가행(金可行)이 점친 것은 공양군(恭讓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왕씨들이 혹은 서울에서, 혹은 기전(畿甸)에서 거리낌없이 행동하면서 절도(節度)가 없는 사람은 매우 염려스러운데, 하물며 왕강과 왕격은 지모와 계략이 남보다 뛰어나고, 왕승보와 왕승귀는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남보다 뛰어났으니, 모두 능히 재주를 믿고 화란(禍亂)을 일으킬 만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강력한 발언은 바로 이 다음이다.
전조태조후손에게 훈계를 전하면서 백제 사람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지난번에 후손들이 그 훈계를 준수했더라면 전주 사람인 전하께서 또한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습니까?[21][22]

결국 대간과 형조는 모든 업무를 중지하고 왕씨 제거를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즉 태조 3 년 동래 현령 金可行과 鹽場官 朴仲質 등이 왕씨들의 명운을 점치는 일이 발생하자,[23] 臺諫과 刑曹에서는 고려 왕족들을 위험세력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먼 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이 사건은 단순히 왕씨의 命運을 점쳐 본 것뿐이라며 처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전히 유화적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대간 등의 세력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고려 왕족과 구세력들이 왕씨복립운동을 일으킬 것이라며 거듭 이들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중략..) 이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394년(태조 3) 4월에는 공양왕을 비롯한 전 왕씨들의 참형을 주장하는 상소를 빗발같이 올렸다.
- 한상길. (2009).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禪學》(선학), 23
삼성은 4월부터 주요 왕씨들을 유배보낼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태조가 받아들이지 않자 급기야 대치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대간과 형조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정사를 보지 않게 되고, 태조는 이들의 강한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듯 하다. 왕강, 왕승보, 왕격 등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술을 내려주면서 각기 貶所로 돌아가라며 명하였고, 결국 이들은 전국 각지로 유배되었다.[24] 이러한 태조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대간과 형조가 원한 것은 그들을 귀양 보내고 섬에 두는 것이 아닌 완전한 제거 즉 주살에 목적이 있었다.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여러 날에 걸쳐 왕씨 제거에 대한 대조와 형간의 간청이 이어졌다.
-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2021, vol., no.99, pp. 41-88 (48 pages)

상황이 이렇게 되자 태조는 결국 왕강 등 4인을 불러들여 위로한 뒤 왕강은 공주로, 왕격은 안변으로, 왕승보는 영흥으로, 왕승귀는 합포로 귀양보내어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래도 이들은 연고가 있거나 외지에서는 제법 큰 고을들로 보내줘 사정이 나았다. 이튿날 왕씨들에 대한 감시를 보다 철저히 하도록 방침이 내려져 강화부에서 왕씨의 노약자들까지 동태를 아뢰게 했다. 나아가 공양왕 부자를 삼척으로 안치시켰다.

하지만 대간과 형조는 만족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박위와 이흥무의 점복 명운에서 비롯한 옥사를 통해 왕씨 제거의 명분을 상소하자 마침내 도당에 명하여 대소 각 관사와 한량, 기로를 모아 가부를 진술하여 바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25] 조정 실세들이 모인 도평의사사, 법률 집행을 맡은 형조, 젊은 언관들이 모은 대간이 모두 한결같이 왕씨 제거를 강력 요구하고 있었으니 결론은 뻔했다. 서운관(書雲觀), 전의(典醫), 요물고(料物庫)의 하급 관원 수십명만이 해도에 안치시키자는 온건론을 표방했고, 나머지는 모두 극형을 주장했다.

중추원부사 정남진(鄭南晋)과 형조의랑 함부림(咸傅霖)을 삼척에, 형조전서 윤방경(尹邦慶)과 대장군 오몽을(吳蒙乙)을 강화도에, 형조전서 손흥종(孫興宗)과 첨절제사 심효생(沈孝生)을 거제도에 파견해 왕씨들을 바다에 던져 죽이도록 했다.

4월 15일에는 강화도에서 공양왕의 숙부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왕향(王珦) 등 16명을 강화 나루에서 빠뜨려 죽였고, 4월 17일 공양왕과 폐세자 왕석이 삼척에서 교살되었다. 4월 20일에는 거제도에서 수연군(壽延君) 왕규(王珪) 등 110여 명이 바다에 던져졌다. 나아가 고려왕조에서 왕씨로 사성받은 이들은 모두 본성으로 돌아가게하고,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은 개성 왕씨가 아니라도 외가 성을 따르라는 방침이 내려졌다.[26]

이로서 왕위에 가까운 유력 왕씨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대간과 중신들은 더 원했다. 태조가 전 왕조의 제사를 받든다는 명분으로 보호한 귀의군 왕우와 그의 두 아들에 대한 공격을 다시 시작했다.

태조 4년 4월 25일 간관 이고(李皐) 등은 왕우 3부자가 흉모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며 다른 나라로 달아나 걱정을 끼칠 수 있으니 3부자를 강화도로 옮겨 출입을 금하고, 잡인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여 환란의 근원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이 유폐지 앞서 강화도에서 던져진 왕씨들처럼 죽이자는 소리인데 태조는 잘라버렸다. 그리고 2개월 가량 지나 7월 이고는 다른 건으로 풍문탄핵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7월 5일에 파직된다.

태조가 끝까지 막아주긴 했으나 이토록 시달리며 마음 고생한 왕우는 태조 6년 2월에 사망하고, 귀의군 작위를 이어받아 노씨에서 왕씨로 복성한 상장군 왕조가 뒤를 이었으나 왕조와 아우 왕관은 이방번의 사돈이었던 탓에 무인정사때 불똥이 튀어 비명횡사한다.

왕씨에 대한 기찰은 이어져 태조 6년 12월 왕씨(王氏)의 서얼 백안(伯顔), 연금(延金), 금만(金萬)이 가명으로 도성에 출입했다가 적발되어 참수되었고, 동년 12월 8일 약사노(藥師奴)라는 왕씨 서얼이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공양왕을 비롯한 고려 왕족의 참살은 원래 태조의 의지가 아니었다. 태조는 관대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무장 출신이었지만 공격적 성향보다는 합리적이고 온후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특히 역성혁명의 반윤리적 여론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화합과 단결을 위한 다양한 조처를 시행하였다. 이를 위해 고려 왕족과 관료들을 임시로 유배 조치하였다가, 다시 관직에 등용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신왕조의 기반과 질서를 갖추기 위해서는 건국에 참여한 신하들의 도움과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즉 이제 막 왕조를 세운 태조의 입장에서 신하들의 입장과 세력은 무시못할 상황이었다. 그들은 구체제의 회생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시키기 위해 12차례나 상소를 올려 왕족의 처벌을 청하였고, 그때마다 태조는 간신히 물리쳤다. 그러나 결국 대간과 형조를 중심으로 한 臣權의 위세를 더 이상 막아내지 못하고,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고려 왕족을 멸족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건국초의 정치적 상황이 바로 삼화사 수륙재 개설의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태조는 신하들과 맞서면서까지 고려 왕족을 보호하려 했다. 이는 고려 왕족이 회생하여 조선을 위협할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이었고, 또 그에 대처할 만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과는 자신의 명으로 고려 왕족을 몰살하게 되었고, 태조는 이에 대한 자책감과 미안함을 지녔던 듯하다. 온후한 성품의 태조는 이 자책감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마침내 수륙재를 생각해냈다. 이에 따라 왕족을 멸한 지 10개월 만인 이듬해 1394년 2월 관음굴과 견암사, 그리고 삼화사에 수륙재를 개설, 매년 봄과 가을에 항상 거행하게 했다. 《태조실록》 4년 2월 24일 기사의 말미에 보이는 “고려의 왕씨를 위한 것이었다.”는 짤막한 기사를 통해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 한상길. (2009).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禪學》(선학), 23

결국 이러한 진행 과정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왕씨 몰살은 태조 본인의 의지보다는 조선 건국에 참여한 개국공신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제 막 왕조를 세운 태조의 입장에서는 신하들의 입장과 세력은 무시못할 상황이었고, 태업과 함께 12차례나 상소를 올려 왕씨들의 처벌을 청하는 그들의 요청을 계속 물리칠 수 만도 없는 상황에서 결국 태조는 조선 건국에 참여한 개국공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신의 명으로 고려 왕족들을 몰살하게 되었던 것이다.[27]

4. 처형된 왕씨 숫자

정확한 수를 파악할 수 없는 추가 숙청을 제외하고 강화도, 삼척, 거제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숫자는 아이 포함 개성 왕씨 남성 135명이다.

1. 조선 개국에 협력한 왕승 일가
2. 이성계 및 조선 개국 세력과 혼맥으로 이어진 왕우 일가
3. 여성
4. 방계

이들을 제외하고 직계 남성들 130여명이 제거되었다. 후술할 희생자 명부에 '왕씨쌍생소아'(王氏雙生小兒), '소아'(小兒)같은 기술이 있어 유력 왕씨 남성이라면 나이 구분을 두지 않고 제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연구한 사람은 재미 한국사학자 유진 박 펜실베니아대 교수이다.# 박 교수는 강화도, 거제도, 삼척 등지에서 일어난 제거 작업으로 희생된 희생자 규모를 135명으로 규명했다. 이는 당시 희생당한 인물의 원혼을 빌기 위해 작성된 <제문>에 근거했는데 실제로도 공양왕 직계를 포함해 고려 말 왕위 계승권에 근접한 왕씨 '남성'을 중심으로 제거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여인들과 방계 왕씨, 조선 개국 세력과 혼맥으로 얽혀 있는 인물은 숙청에서 제외되었다.

유진 박 교수가 참조한 사료는 18세기 문인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의 문집인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 전문이 옮겨져 있는 <공주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혼기(魂記)>다.[28] 공주는 왕씨에게 특별한 장소인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이성계가 사돈 왕우와 나란히 거론하며 숙청 대상에서 제외시킨 순흥군 왕승의 아들 왕강을 제거하라는 중신들의 요청을 거부한 이성계가 왕강과 아우 왕휴 등을 귀양보낸 고장이며, 왕승의 사위이자 태종 이방원의 스승으로 왕자의 난때 태종에게 협력해 공신 반열에 오른 우현보의 아들 우홍부의 연고지이다. 공주 동학사에는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의 위패를 모신 삼은각(三隱閣)이 자리잡고 있는데 1394년 길재가 고려 국왕과 정몽주를 제향하며 건립되었다.

이 <혼기>의 존재 자체는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뒤쪽에 실린 계유정난 희생자들의 명단과는 대조적으로 앞에 실린 왕씨 희생자들의 명단은 거제도와 강화도로 나누어 죽거나 귀양간 이들의 명단을 상세히 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조명받지 못했다.

조선 제19대 숙종 시기 단종과 사육신을 복권시키면서 부딪친 딜레마는 세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조선 전기에 가장 중요한 임금중 한 명인 세조를 부정할순 없고, 단종과 사육신도 포기할수 없었던 유학자들은 세조의 비도덕적 행위를 어떻게든 묻어버리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는데 그중 하나가 공주 동학사의 <초혼기>다.

세조 3년 9월 세조가 공주 계룡산 동학사에 거동하게 되었는데 그곳 중들이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의 명단을 적은 <초혼기>(招魂記)를 써서 넋들을 위로하고 있음을 보고 불쌍히 여겨 직접 제수를 마련해 단종과 단종 충신들을 추모하며 초혼제를 지냈다는 이야기였다.

공주 동학사 이야기는 당대 무척 널리 퍼졌던 지어낸 이야기로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대신들이 언급하는가하면(《숙종실록》 권 63, 45년 4월 30일, -행판중추부사 이이명의 언급-), 당대 최고의 거유 송시열의 《송자대전》(권 193 <墓表> -高麗典書朴公墓表-), 정조 15년 단종릉인 장릉에 배식단을 설치하며 정조가 내린 교서에서 배식단 설치의 전례로 동학사가 언급되며, 일제강점기에 동학사에 얽힌 전승과 사적을 정리한 송주헌의 《동학지》(東鶴誌)에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물론 세조가 이들을 추모했다는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세조 3년 7월에 세조는 귀양가서 일을 꾸미다가 발각된 금성대군을 사사하느라 바쁜 정국을 보냈고, 9월에는 맏이인 의경세자가 사망하는 흉액을 겪었다. 한가하게 공주로 나들이할 일이 없었다. 세조 12년에 고성 탕정에 피부병을 치료할겸 해서 간적은 있으나 고성-강릉-오대산-횡성-원주을 거쳤지 계룡산에 가지는 않았다. 지방 야사를 유학자들이 주워섬겨서 역사로 빚어낸 것이다. 하지만 세조는 간적이 없을 뿐 죽은 이들의 이름을 적은 <초혼기>와 제사는 존재했다.

제16대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의 아들이자 제14대 선조의 부마였던 신익성은 인조 20년(1642) 심희세가 간행한 성삼문의 문집 《성근보집서》의 <서문>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흔쾌히 받아들인 신익성은 일찍이 동학사의 <사부>(死簿)를 보고 성삼문과 가족들이 모두 해를 입었음을 알았으니, 명 성조 영락제가 혜종 건문제의 충신이었던 방효유의 10족을 멸한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써주었다. 제21대 영조 44년(1768)에 간행된 하위지의 문집 《단계유고》(丹溪遺稿)의 <부록>(附錄)에서도 <동학사 초혼기>를 인용해 41인의 희생자를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제22대 정조때 규장감 검서관 성해응이 등장한다. 연경재 성해응은 정조 12년(1788)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왕명을 받은 각종 편찬작업에 투입되었다. 단종의 충신들을 배향한 장릉 배식단과 《배식록》은 정조 15년에 완성되었으며, 노비에 무당까지 총망라해 단종에게 충성한 이들을 추렸다.

규장각에서는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는데, 성해응도 이에 참여하여 공주 동학사의 <초혼기>를 조사했으며, 13장으로 구성된 <초혼기> 전문을 인용하고 해설한 글이 그의 문집 《연경재전집》에 남아 지금까지 전한다.

이 <초혼기>는 역대 고려 왕과 태조 3년에 죽은 개성 왕씨들을 한 명, 한 명 언급하며 시작한다. 어떻게 된 사연인가 하니 태조 3년 4월에 삼척, 강화, 거제에 보내놓은 왕씨 직계 남성들이 죽자 이듬해 태조는 죽은 왕씨들의 혼백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비는 수륙재(불교식 천도재)를 지냈고, 권근에게 시켜서 《연화경》(불경) 3부와 37부의 《수륙의문》(水陸儀文, 의례 절차를 정리한 의례서)를 펴내게 했다. 이때 작성된 희생자 명부가 동학사에 전해져 보전되어 내려온 것이다.

왕씨들을 추모하면서 작성된 <초혼기>는 이후 조선 초기에 옥사로 죽은 이들이 생길 때마다 하나 둘씩 추가해서 늘려온 명부로 단종 복위를 꾀한 집현전 학자들을 거쳐 제8대 예종때 죽은 남이와 강순까지 기록하며 끝난다.

이 명부에 기록된 왕씨는 삼척에서 공양군 왕요 포함 8명[29], 거제도에서 수연군 왕규 등 111명, 강화도에서 학성부원군 왕향 등 16명, 도합 135명이다. 《개성 왕씨 대봉보》에 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을 감안해도 150여명 선으로 이와 별 차이가 나지 않으며 족보는 정양군 왕우같이 이성계가 보호해 화를 입지 않은 이들까지 이때 죽은 것으로 적는 오류가 있어 이런 이들을 빼고 나면 거의 차이가 없다.

여기에 왕씨에서 떨어져 나간게 거의 확실한 옥씨와 《개성 왕씨 족보》에서도 대거 확인되는 유(柳)씨, 이(李)씨, 여타 외가성으로 개성한 수많은 왕씨들을 감안하면 이상할 것 없다. 외가의 지위가 친가와 동등했던 고려는 외가성을 써서 형제끼리 성이 다른 경우도 꽤 흔했다. 당사자가 모를뿐 왕씨 후손은 지금 개성 왕씨 숫자보다 많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에게 딸을 시집보낸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의 일가를 보자. 왕씨가 살아남기 위해 성을 바꿨다는 이야기에는 후세의 조작인 경우도 있지만 왕우의 아들들은 일시적으로 노씨로 성을 바꿨음이 《실록》에서 확인된다. 서초패왕 항우가 패망한 이후 유(劉)씨로 성을 갈아버린 항백의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이성계가 직접 구명해줬고 무엇보다 왕씨의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기에 왕씨 성을 유지해야만 했던 왕우의 아들들도 잠깐이니마 왕씨 성을 버리며 숙였는데 방계들이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편 개성 왕씨지만 조선 개국에 협력해 2대에 걸쳐 이성계에게 충성한 순흥군 왕승과 맏이 왕강의 집안이 성을 바꿔 남양 전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거짓이다. 이방원의 공신인 전흥이 왕강의 아들이라는 주장인데 《실록》과 현지 묘비명을 참조하면 왕강과 함께 귀양가 공주에 터잡고 친인척들의 비호를 받아 무사히 대를 이은 왕강의 아우 왕휴와 왕휴의 아들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의 존재가 확인된다.

《실록》에서도 유력 왕씨들을 처리한 다음에는 숨어사는 왕씨의 존재가 들통나더라도 적당히 다른 성으로 바꾸게 한 선에서 그친 정황이 확인된다.
노조(盧珇)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노관(盧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사람들은〉 왕우(王瑀)의 두 아들인데 외가(外家)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노조는 고려 왕조의 정강군(定康君)이다.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3일 기미 1번째기사 -왕우 아들의 성을 외가를 따라 노씨로 하게 하다-
고려 왕조에서 왕씨(王氏)로 사성(賜姓)이 된 사람에게는 모두 본성(本姓)을 따르게 하고, 무릇 왕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또한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게 하였다.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4월 26일 을미 1번째기사 -왕씨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다-

5. 중지

왕우의 아들 왕관과 왕조가 제1차 왕자의 난때 죽어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어진 태종 시대 왕거을오미 사건을 통해 복권이 시작되었다. 왕거을오미 사건은 태조의 배려로 공주에 숨어 살던 왕휴의 후손을 김여지가 일부러 제보해서 공식적으로 복권시켜준 사건으로 태종과 김여지간에 사전 교감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앞서 말했듯 공주는 우현보 집안의 연고지이며 우현보는 사적으로 태종의 스승이니 이쪽 연줄이 활용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문종 시대 왕우지가 '왕순례'라는 이름을 받아 왕씨 가문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대를 거치며 의전상 상당한 우대를 받았다.

이들은 모두 개성 왕씨이면서 고려를 버리고 조선 건국을 도운 왕승의 후손이었다. 왕순례가 서자로 근근히 대를 잇다가 손자를 끝으로 후손이 단절되면서 전조 제사를 받드는 일을 오래하진 못했지만 가만 있었다면 왕승과 왕강, 왕휴 모두 유력 왕족으로 거제도 앞바다 수온을 몸으로 측정했을테니 이성계를 도운 보람이 없진 않았다 하겠다.

이후론 다른 왕씨들 중에서 숭의전을 지킬 후손을 정하게 되는데 선조때부터 왕훈(王勳)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 자세한 내용은 이왕삼각 문서를 참고.

단종을 죽이러 갔다가 시를 읊었다고 《청구영언》에 기록된 금부도사 왕방연은 왕순례보다는 서울에 살았던 동양군파인 왕미의 자손일 가능성이 더 높다. 왕방연은 음서로 출사하여 벼슬이 금오랑(金吾郞)에 이르렀다.[30]

동양군파는 지금까지 내려오는 개성 왕씨의 90%를 차지하는데다, 그가 살던 곳은 아예 왕촌(지금의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1451번지)이라 불렸을 정도이다.

6. 결과

유력 왕씨를 죽이고, 죽이지 않은 왕씨도 조선 초기 수십년간 숨어살게 만든 숙청 작업의 결과, 고려 왕조의 부흥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기사를 보면 이성계가 온건한 입장을 취하자 법을 맡은 형조부터, 핵심 중신들이 모인 도평의사사에, 젊은 관료들이 모인 대간까지 일치단결해서 왕씨를 발본색원해 주멸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는데 공신들의 위기감이 젊은 신료들에게까지 공유된 것으로 여겨진다.

개성 왕씨가 공식적으로 지배층(사족)으로 복귀하고 나서도 누구도 고려 왕조 부흥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준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지난날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가 왕조가 사라진 지 시간이 많이 지나서까지 고구려부흥운동, 백제부흥운동, 신라부흥운동, 발해부흥운동이 일어나 계속 나라를 되살리려 시도했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31] 자신들은 고려의 신하로 남고자 한 원천석길재조차 자신의 자식, 제자들이 조선 왕조에서 벼슬살이하는 건 만류하지 않았고 이색의 제자인 권근도 뜻을 꺾고 조선 조정에 합류했으니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만하다. 이 철저한 숙청 덕분에 신생 왕조 조선은 1차, 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태조의 난) 같은 크고 굵직굵직한 위기를 겪고도 단단한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설령 왕씨 본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그들은 민심을 얻지 못한 채 왕조 부흥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희박하게나마 존재하던 왕조 부흥 가능성이 왕씨 몰살로 인해 아예 0%가 되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성계의 한양 천도는 고려 후기부터 있었던 남경길지설, 천도론의 연장선으로 왕씨 제거와는 연관이 없다. 공민왕, 우왕 때도 거론되었고 공양왕 때도 이성계 측에서 간접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일이었다. 개성이 입지가 좋아서 수도가 된 게 아니라 왕건이 개성의 호족이어서 수도가 된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 중기부터 입지에 문제점을 꾸준히 드러냈다. 수도라서 몰리는 인구에 비해 면적은 심하게 좁았고 경작지가 적어 기근에 취약하며, 강과 거리가 꽤 있어 수운 활용에도 불편해 천도 논의가 꽤 나왔다. 그 때마다 수백년 도읍, '풍패지향'이라는 관성으로 버텼다. 공양왕 때 이루지 못한건 나라 살림이 어려운데 토목공사가 웬말이냐는 명분을 권신이라도 어쨌든 신하인 이성계가 반박할 명분과 권위가 없었기 때문으로 조선 건국 이후 창업군주의 권위와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명분으로 밀어붙여서야 가능했다. 이성계는 개국 이후 겨우 한 달만에 한양 천도 카드를 꺼내들었고 정도전을 비롯한 신하들은 처음에 완강히 반대했다.

왕씨를 죽여서 이성계에 대한 민심이 나빠졌다 볼 근거도 없다.[32] 태조대 실시된 과거들은 야사와 달리 개국에 반대하던 온건파들까지 슬슬 합류해 합격자 정원 꽉꽉 채워서 성황리에 치러졌고, 태조 3년에 조성된 수도 한성부의 인구 상당수는 개성에서 이주시킨 인구였다. 그리고 무인정사가 끝나고 혼란한 상황에서 정변 세력은 개성 환도를 단행했다. 개성은 조선 초기 제2수도로서 재환도 이후에도 세종 20년 개성유후사를 개성유수부로 개편하고 경기감사가 당연직으로 2명의 개성정유수 중 1직을 겸할 정도로 개성에 대한 특별대우는 지속되었다.[33] 심지어 개성유수는 경관직으로 지위 자체가 8도 관찰사(감사)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 지방관직을 거친 뒤에 지방관을 사실상 졸업하는 자리가 바로 개성유수였다.

17세기부터 <개성소외론> 같은 야사가 등장한 이유는 16세기 이후 개성의 위상변화 때문이다. 조선시대 유생들의 수학기관은 절과 학당, 향교 등인데 개성은 수도 한성에서 가까워 접근성이 좋은데다 고려시대부터 수도라 학당도 있고, 공부하러 들어갈 절도 지천에 널려있어 개성문인들은 맘껏 혜택을 누리며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다. 성종과 연산군대에 개성의 유생들이 개성 유생들을 위한 알성시(특별과거)를 열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신료들이 그랬다간 한성 사람들이 개성에 가서 시험친다며 반대한 사례에서 엿보이듯 조선시대 지리관념상으로도 개성은 한성과 같은 권역으로 여겨져서 조정 입장에서 불이익을 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들어 조선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가 완전히 정착하고[34] 한성의 절대적 우위가 고착화되어 개성과 한성의 격차는 비교할 수 없게 커졌고, 반면 사화와 당쟁으로 중앙의 관인층이 각 지방으로 흩어져 서원을 통한 자체적인 교육과 전승 체계를 마련하면서 중앙에 비해 낙후되었던 지방의 학문적 역량이 향상되면서 개성과 타 지방의 차이는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재난으로 도시가 쑥밭이 되면서 학문교육 시설도 재가 되어버리니 개성의 이점은 완전히 사라졌고, 서경덕(徐敬德), 차천로(車天輅), 최립(崔岦) 같은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한 15~16세기의 영예는 끊어져 버렸다. 과거부터 누려온 메리트가 모두 사라지고 자부심을 드높일 문인들도 배출되지 않은 상실감과 박탈감, 피해의식이 <개성소외론>이란 가공의 역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개성의 떨어진 자존감은 18세기에 노론-낙론 종장들에게서 수학한 유학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나서야 회복된다.

그리고 상업은 소외받아 융성한 게 아니라 500년간 수도로 기능하며 원래 상업 종사자가 많던 도시였다. 태조 왕건부터가 예성강 하구를 기점으로 무역을 해 부를 쌓은 해상 세력 출신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4대문 안쪽 시전 상인의 유래가 한성으로 강제이주된 개성 상인이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연려실기술을 비롯한 야사에서는 왕씨 몰살 직후 이성계의 꿈에 태조 왕건이 나타나서 "내가 삼한을 통일하고 백성들을 편안히 한 공이 있거늘 어찌 내 후손들을 해치느냐? 너희 또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고 경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7. 처분된 왕씨 혹은 처분 대상으로 지목당한 왕씨

8. 성을 바꿔 살아남다

노조(盧珇)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노관(盧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사람들은〉 왕우(王瑀)의 두 아들인데 외가(外家)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노조는 고려 왕조의 정강군(定康君)이다.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3일 기미 1번째기사 -왕우 아들의 성을 외가를 따라 노씨로 하게 하다-
고려 왕조에서 왕씨(王氏)로 사성(賜姓)이 된 사람에게는 모두 본성(本姓)을 따르게 하고, 무릇 왕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또한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게 하였다.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4월 26일 을미 1번째기사 -왕씨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다-

《개성 왕씨 세보》에 유(柳)씨, 이(李)씨 등 외가성으로 개성했다는 기록이 남은 왕씨들이 있고, 태종 13년 왕거을오미가 외가성인 이씨 성으로 살고 있었던 사례와 같이 왕씨 대신 외가성으로 바꾼 왕씨들은 직계 제거가 진행 중이던 조선 초기에 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왕씨 일가의 대부분이 멸족을 당하게 되자 한자 '왕'(王)을 약간 변형시켜 옥(玉), 금(琴), 마(馬), 전(田), 전(全), 김(金), 차(車), 신(申)씨 등의 다른 성씨 혹은 왕을 상징하는 용(龍)씨의 성으로 행세하며 숨어 살면서 혈통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왕'(王)자를 변형시킨 형태가 아닌 성관 중에도 의흥 박씨처럼 고려 왕족의 후손을 자처하는 경우[35]도 있는데 가계를 왕족으로 세탁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 봐야 한다.

​족보가 아닌 공신력 있는 기록, 고려시대 과거합격자 명단인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과 《고려문과방목》(高麗文科榜目)에서 왕사온이 옥사온이라고도 기록되어 동일인이 성만 바꾼게 확인되는 옥씨(의령 옥씨 단일본)가 유일하게 교차 검증이 되고 나머지 성관은 일방적인 주장 외에 근거가 전혀 없다.

옥씨의 사례를 감안하면 성을 바꿔 숨어지내고 그 바꾼 성을 후대까지 유지하는 사례가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은 갈아탄 외가성을 유지하거나, 태종~세조를 거치며 왕씨에 대한 경계가 수그러드는 과정에서 복성한 것으로 보인다. 예외적으로 옥씨는 문헌 기록 외에 왕씨 집성촌이 경남 의령에 있었을 정도로 관계가 깊다.

9. 비슷한 전 왕가 숙청 사례

9.1. 구 왕조 → 신 왕조

세계사에서 살펴보면 사실 전 왕조가 몰락한 후 새 왕조가 정권 보위를 위해 전 왕조의 일원들을 숙청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흔하다.

흔히 전대 황족들을 보호해줬다고 알려진 북송 태조 조광윤의 일화 역시 철저히 미화되고 왜곡된 기록으로 시종훈 본인은 요절, 그의 아우들도 요절 내지는 기록이 끊어져 알 수 없다는 의미심장한 기록(구양수의 구오대사)만 남긴 채 역사속에 사라지며 송은 시씨의 제사조차 100년 넘게 지내주지 않는, 유교국가 특성상 조선이 고려에게 한 것보다 더 심한 폭거를 저질렀다. 송 황실이 뒤늦게 시씨의 후손을 수소문해 제사를 지내준 것도 무슨 인도적인 의도가 아니라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고, 장성한 자식이 딸 밖에 없었던 송 인종의 절박함이 전대의 제사를 지내주지 못 한 데서 원인을 찾았기 때문이다. 조씨의 후대에 감격한 시씨들이 애산 전투에서 마지막을 함께했다는 이야기도 진위 확인이 불가능한 야사로 마지막 숭의공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9.1.1. 왕실에 준하는 지위였던 세습 실권자 가문

9.2. 군주제 → 공화제

10.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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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정수, <조선 초기 崇義殿 설치와 四位 享祀-16位 功臣從祀의 성립>, 《조선시대사학보》 2013, vol., no.67, pp. 5-42 (38 pages); 박성준, <태조의 공론정치: 현안해결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2011, vol.10, no.1, pp. 29-47 (19 pages);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2021, vol., no.99, pp. 41-88 (48 pages); 김인호, <조선전기 숭의전의 설치와 역사인식> 《사학연구》 2005, vol., no.78, pp. 111-146 (36 pages); 윤정, <정종대 상왕 태조의 임어와 개성 덕수궁> 《서울학연구》 2015, vol., no.58, 통권 58호 pp. 167-208 (42 pages)[2] 한정수, <조선 초기 王氏處分論의 대두와 전개>, 《사학연구》 2014, vol., no.114, pp. 1-36 (36 pages);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2021, vol., no.99, pp. 41-88 (48 pages)[3]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2021, vol., no.99, pp. 41-88 (48 pages)[4] 한정수, <조선 초기 王氏處分論의 대두와 전개>, 《사학연구》 2014, vol., no.114, pp. 1-36 (36 pages)[5] 김영두. (2010). <단종충신 追復 논의와 세조의 사육신 인식>. 《사학연구》, 98; 문경호. (2014). <여말 선초 조운제도의 연속과 변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17(1); 강호선. (2013). <조선 태조 4년 國行水陸齋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 62; 한상길. (2009).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禪學》(선학), 23[6]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2021, vol., no.99, pp. 41-88 (48 pages); 한상길. (2009).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禪學》(선학), 23; 김인호, <조선전기 숭의전의 설치와 역사인식> 《사학연구》 2005, vol., no.78, pp. 111-146 (36 pages); 한형주, <조선시대 ‘역대시조묘’에 대한 의례적 고찰> 《국학연구》 2019, vol., no.39, pp. 281-317 (37 pages)[7] 강호선. (2013). <조선 태조 4년 國行水陸齋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 62; 최인실, <『와유록』의 「사대부가거처」, 『택리지』의 원본인가> 《한국문화》 2019, vol., no.86, pp. 275-303 (29 pages)[8] 국립국어원의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s Korean-English Learners' Dictionary에서는 massacre이란 영단어를 학살 또는 몰살로 번역했다. 다만 해당 영단어는 토론을 거쳐 문서 표제어에 맞춘 몰살로 통일해서 번역하기로 했는데 참고로 massacre이란 단어는 학살로도 번역이 가능하며 가령 시민 5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했던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을 지칭할 때도 사용된 단어로서 국내 학계에서도 이를 '보스턴 학살 사건'이라 번역하므로 규모와 상관없이 학살이란 번역도 충분히 가능한 번역이다.[9] 삼성에서 왕씨를 제거하자고 청하니 윤허치 않다, 삼성에서 왕씨를 제거토록 청하니, 윤허치 않다, 삼성에서 남은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윤허치 않다,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관원들을 삼척, 강화, 거제도에 보내다[10] 특히 태조 왕건 시기 호족 포섭정책으로 조금이라도 유력한 호족에게 국성 하사를 남발하다시피 했기에 왕족과 사실상 혈연적인 관계가 전혀 없다시피해도 왕씨 성을 가진 경우가 매우 많았다.[11] 다만 《개성 왕씨 대봉보》엔 몰살당하지 않고 나중에 병사한 이성계사돈 왕우와 그의 아들 왕조, 왕관까지 포함되어 있는 등 일부 오류가 있기 때문에 해당 인원수에서 몇 명은 제외해야 한다.[12] <동학사 초혼기>는 무안대군 이방번의 장인이라 화를 면한 공양왕의 형 왕우와 그 두 아들을 명단에 포함시키고, 공양왕과 함께 죽은 폐세자 왕석을 빠뜨린 오류가 있어 이걸 빼고 더하면 8명이다[13]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역사와 담론》, 99 (2021).[14] 왕우는 1397년에 죽었다. 피살당하지는 않았지만 대간과 형조에서 지속적으로 탄핵을 당해 마음 고생을 많이 하다가 죽었으며, 작위를 이은 왕조와 왕관은 이듬해에 일어난 무인정사 때 방번의 사돈이라는 신분 때문에 정안공 이방원의 칼에 맞아 죽었다.[15] 《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20일[16]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5월 26일[17]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4월 4일 / 《태조실록》 권4, 태조 3년 12월 1일[18] 《태조실록》 권2, 태조 1년 9월 21일[19]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5월 26일[20]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2월 15일[21]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6일[22] <훈요 10조> - 8조- 지역의 해석을 백제로 오해한 부분이다. 최근엔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청주에 있었던 친궁예 세력에 대한 경고로 설명하고 있다.[23] 《태조실록》, 태조 3년 1월 16일.[24] 《태조실록》 권 5, 태조 3년 2월 26일 병신(2).[25]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4월 14일[26]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4월 26일[27] 한상길. (2009).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禪學》(선학), 23[28] 성해응, 《연경재전집》 <외집> 권37 <동학사혼기석>(東學寺魂記釋)[29] <동학사 초혼기>는 무안대군 이방번의 장인이라 화를 면한 공양왕의 형 왕우와 그 두 아들을 명단에 포함시키고, 공양왕과 함께 죽은 폐세자 왕석을 빠뜨린 오류가 있어 이걸 빼고 더하면 8명[30]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은 그의 이름을 따 '왕방골'이라 한다.[31] 물론 상기 사례들은 나라는 그대로인데 왕조 교체만 일어났던 고려-조선의 경우와는 달리 아예 나라 자체가 사라져버렸다는 차이가 있다. 발해 유민들의 경우에는 아예 이질적인 이민족인 거란족의 요나라여진족의 금나라의 지배를 받기도 했고.[32] 개성의 역사성은 고려의 수도에만 있지 않다. 개성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이 고려의 수도라는 점 못지않게 조선 왕실의 어향,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고 태종이 성장한 풍패지향이란 점을 자랑스러워 했다. 세종 즉위년(1418)에 개성의 태조 잠저에 사당을 짓고 '목청전'(穆淸殿)이라 이름하여 어진을 봉안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개성 사람들은 200년이 넘게 요청한 끝에 대한제국 시기인 광무 5년(1901)에 재건하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했을 정도로 조선의 역사도 중요하게 여겼다.[33] 유후사를 유수부로 고친 것은 원래 유후는 관직명이지 행정구역 단위명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중국의 사례를 상고해보니 제2수도에는 유수부를 두는 게 관례라서 유수부를 설치한 것이다. 즉 명칭만 바뀐 것이지 제2수도라는 지위는 똑같다.[34] 속현, 향-부곡-소 같은 고려시대의 차별적 행정구역은 조선 개국 후에 바로 사라진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사라지다가 16세기에 가서 완전히 사라졌다.[35] 고려말 병부상서 벼슬을 지내던 왕을규가 조선 건국 이후 화를 피해 은거하다가 조선 태종때 외가의 성을 따라 박씨로 바꾸고 본관을 의흥(義興)으로 삼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출처는 자기네 족보인 의흥박씨세보(義興朴氏世譜)밖에 없다.[36] 사마씨는 이미 조모 시해로 문제를 일으켜 조씨 학살은 부담되었으려니와 일단 선양 자체는 순조롭게 이뤄져서 딱히 조씨를 학살하지 않아도 되었을 뿐더러 오히려 본인들이 받은 선양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조씨를 우대할 필요가 있었지만 유유는 북벌이 밀리는 상황에서 선양에 나선데다 황제가 지적장애라서 도저히 선양을 받을 수 없었다.[37] 그래도 호찌민은 바오다이를 이웃나라 중국의 청왕조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와 같이 공산 체제에 편입시키려고 하는 등 구 응우옌 황실을 존중하려 했다. 물론 정작 응우옌 왕조를 무너뜨린 장본인인 응오딘지엠은 그런 거 없었다.[38] 이름은 양려화(楊麗華).[39] 선제의 아들로, 즉위 당시 겨우 8세였다.[40] 그 업보인지 해릉양왕 본인도 쿠데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해릉양왕의 자손들도 몰살당했다. 또한 사서의 기록과는 달리 몇몇 야율씨가 살아남아 원나라에 봉사했고, 실질적인 멸족은 후대의 일이다.[41] 이는 다우르족이 거란족 중 대하씨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42] 사실 영락제가 정난의 변으로 조카를 몰아내고 제위에 올랐음을 감안하면 영락제의 업보라고 볼 수도 있다. 단지 같은 한족이 아니라 이민족의 주도로 영락제의 후손들이 몰살되어서 그렇지... 허나 영락제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는 게 먼저 선빵을 친 것은 영락제가 맞지만 당시 건문제는 황족들을 하나하나 숙청하고 있었고 또 그 최종점은 영락제였기에 그대로 죽기 VS 저항이라도 해보기의 선택지가 강요되었다. 물론 성공한 이후의 모습은 조금 비윤리적이지만 말이다.[43] 주원장의 미미한 아들의 자손인 화가 석도나, 주원장의 직계도 아닌 화가 팔대산인도 명나라 황실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몰살 위기에 몰려, 승려가 되어 미친 사람처럼 살면서 그림이나 그리다가 자손도 남기지 못했는데 하물며 직계인 영락제의 자손이 남아 있었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44] 다만 현재는 합의에 따라 둘 다 작위 요구자/아시아 항목에서 삭제되었다.[45] 그나마 만주국의 황제위 요구자는 선통제의 이복동생인 아이신기오로 푸런의 후손이라서 선통제의 가까운 방계 자손이지만 청나라의 왕위 요구자는 도광제의 직계 후손이며 함풍제부터 선통제까지의 청나라 황제들에게는 모두 방계 후손이다. 대한제국의 황제위 요구자들이 모두 고종의 직계 자손이며 그에 따라 순종의 가까운 방계 자손인 것과 비교하면 후자가 매우 비참한 상황이다.[46] 다만 이는 히데요시의 자업자득인데 히데요리가 태어나기 전만 해도 히데요시의 후계자는 조카인 히데츠구였는데 문제는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를 숙청한다. 그런데 히데츠구만 죽인 것도 아니라서 히데츠구와 그의 처자 30여명까지 몽땅 죽였다. 히데츠구가 히데요리의 자리를 위협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만큼 우환을 방지하기 위해선 잔혹한 숙청이 어느 정도 필요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충수가 되었다. 히데요시의 후계자였던 만큼 히데츠구는 유력 다이묘들과 혼인관계에 있었는데 히데츠구의 처자까지 죽였다는 것은 그 다이묘들의 딸과 외손자까지 죽였다는 얘기이므로 이에 일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을 들기도 했으며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리와 그 어린 쿠니마츠까지 죽었음에도 당대 백성들도 그래도 히데요리에 대해서는 히데요리 생존설이 도는 등으로 보아 동정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태합 전하가 히데요리에게 천하를 물려주기 위해 죄없는 히데츠구와 그 일가를 학살한 업보"라고 말했다.[47] 정확하게는, 히데요시의 누나의 아들 하시바 히데카츠와 사극으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오고우(요도도노의 여동생) 사이에 낳은 딸 하나만 살아남았다. 다만 그녀가 자식을 많이 낳아 방계 후손이 많이 퍼지긴 했다.[48] 엄밀히 말해 왕족들이 '대거' 학살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면 당시 부르봉 왕조에는 루이 15세 후손 빼곤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 후손이 없었는데 이유는 루이 14세는 여러 자손들을 얻었으나 말년에 줄줄이 병 걸려 죽고 살아남은건 미리 에스파냐로 가 왕이 된 필리프 5세와 둘째 증손자인 루이 15세 뿐이었다. 물론 방계 친족은 있었지만 그들은 오를레앙 등 다른 성씨를 쓰고 있었다. 사생아도 있겠지만 서양에서 사생아는 정식 왕족 취급을 받지 못했으므로 제외.[49] 참고로 왕가 재산도 몰수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말 그대로 왕가의 재산만 몰수했다. 프랑스 왕은 왕가와 공작가 두 가문의 가주였고, 공작가의 재산은 그대로 남겨졌고, 현재 방계가 소유하고 있다.[50] 황족 뿐만이 아니고 일반 한족 백성들도 같이 수십만 이상씩 갈아버렸다.[51] 단 영국에 나가 있던 샤리프 알리 빈 알 후세인 등 이라크의 하심 구 왕가 사람들은 생존했다. 이 때문인지 이라크의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이라크 내 일부 군주주의 세력들 사이에서는 영국에 거주 중인 이들을 내세워 이라크의 왕정복고를 추진해 보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