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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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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惟政| Yujeong
통도사 소장 사명당영정(泗溟堂影幀)[1]
본관 풍천 임씨[2]
출생 1544년 10월 17일
(중종 39년, 음력 1544년 10월 2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상서이동면 고라리
(現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사명대사생가로 642[3])
사망 1610년 10월 12일
(광해군 2년, 음력 1610년 8월 26일)
(향년 65세, 65년 2개월 26일 / 23,828일)
경상도 합천군 각사면 치인리 해인사
(現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병사 (입적)
학력 <사략> 수학 (1551년)
황여헌의 문하 (1557년)
불교 출가, 신묵의 문하 (1559년)
선과 급제 (1561년)
과회 노수신의 문하 (1562년)
서산대사 휴정의 문하 (1575년)
직업 승려, 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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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풍천 임씨 정승공파[4]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공훈 알 수 없음[5]
최종
관등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속성과
속명
임응규(任應奎)
이환(離幻)
송운(松雲), 종봉(鍾峯)
당호 사명당(泗溟堂)
종교 유교 (성리학, 1559년 출가 이전), 불교(1559년 출가 이후)
작품 《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부모 부: 임수성 (任守成, ? - 1559)
모: 불명 (? - 1558)
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 개요2. 생애
2.1. 초창기2.2. 임진왜란2.3. 일본과의 강화 협상2.4. 최후
3. 저서4. 관련 유적지5. 여담
5.1. 야사 및 설화
6. 대중매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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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옳은 일이 아니고는 이로움을 찾지마라. 밝은 곳에는 해와 달이 있어서 비추고,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어서 다 안다. 참으로 내 것이 아니거든, 털 한올이라도 탐하지 마라.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종이와 부채를 건네며 유정에게 글을 요구하자 써 준 글귀 중[6]

조선 중기의 승려이자 승장(僧將).

'법명'인 '유정'보다 '당호'인 '사명당'으로 더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존경하는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 지칭할 때가 많다.[7] 승려의 몸으로 국난이 닥치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 조약 등 공훈을 세워 민족 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2. 생애

그대 보지 못했던가?
세거리 마을에 형 형 하면서 절하고
떠들썩한 저자에 아버지 아버지 하며 아는 것을.

또 보지 못했던가?
주리면 밥 생각 목마르면 물 생각하여
앉으나 누우나 움직이나 고요하나 항시 따르는 것을.

고래가 성내어 바닷물 모두 마셔버리면
밝은 달에 산호가지는 훤히 드러난다네.
종문[8]의 옛 곡조 어떻게 부를 건가 생각컨데
돌 조각상 한밤중 옥피리를 불리라.[9]
송원의 가장 큰 어르신인 노승에게 준 글귀

아래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일부 발췌했다.

2.1. 초창기

1544년(중종 39) 음력 10월 2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상서이동면 고라리(現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400번지)에서 아버지 임수성(任守成, ? ~ 1559)[10]과 어머니 달성 서씨(? ~ 1558)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11]

1557년(명종 12) 13세 나이로 황여헌(黃汝獻)을 사사(師事)하다가 이후 2년동안 부모를 여의는 아픔을 겪고[12], 결국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 ? ~ ?)에게 선(禪)을 받아 신묵(信默)의 가르침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불교오의(奧義)를 깨달았다.

승려가 된 1년 뒤인 1561년(명종 16) 승과(僧科)[13] 선종시(禪宗試)에 합격하고, 당시 학자이자 시인이던 박순, 허봉, 임제 등과 교제했고, 특히 허봉은 자신의 남동생을 그의 제자로 삼게 해 불교와 문학을 공부하도록 했다. 심지어 노수신과 교류하면서 그에게 『노자』『장자』『문자』『열자』와 여러 시를 배웠다고 한다.

이후 승려로서 불교의 개혁과 진흥 등을 노력하다가 1575년(선조 8) 32세의 나이로 봉은사의 주지로 추대되었지만,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로 찾아가 서산대사 휴정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각성했고, 휴정은 그에게 '사명(泗溟)'이라는 당호를 붙어주었다. 이후 금강산 보덕사(報德寺)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유람하다가 1586년(선조 19) 43세 때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로 뜰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했고, 이후 1589년(선조 22) 오대산 영감란야(靈鑑蘭若)에 있다가 기축옥사에 죄없이 걸렸으나 무죄 석방되어 금강산에서 3년 동안 지냈다.

2.2. 임진왜란

파일: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대사 박서보 작 전쟁기념관, 한국문화정보원(공공누리).jpg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대사 (박서보 작)[14]
10월에 상남(湘南)[15]으로 의병이 건너가니
나팔소리, 깃발(旗) 그림자. 강 옆 성에 흩날린다.
칼집 속 보검은 한밤중에 울부짖나니
원컨대 요사(妖邪)를 베어 성명[16]에 보답코자….
의승병을 이끌고 평안도 순안으로 가던 유정대사가 읊은 시

49세가 되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던 휴정의 격문을 받고 머물고 있던 금강산 유점사[17]에서 200여 명의 승려들을 모아 의병을 모집했고, 평안도 순안으로 이동해 휴정의 휘하에서 활약하면서 '의승도대장'이 되어[18] 이듬해 체찰사 류성룡과 이 무렵 조선을 구원하러 온 명군과 함께 평양성 수복에 공을 세우고, 이후 그해 3월에 '선교종 판사(禪敎宗 判事)'에 제수되었고, 이후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도에서 왜군을 무찌르면서 '당상(堂上)'에 오르기도 했다.

이 무렵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가 강화 협상을 주도할 때, 1594년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 도원수 권율 등과 의논하고 가토 기요마사가 있는 울산 진중으로 방문해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고(관련 기록 1, 관련 기록 2), 이를 통해 당시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의 진실을 듣고, 조정에 이를 알렸다.

여담으로, 당시 유정과 가토의 담판은 두고두고 회자되는데, 자신의 진으로 몸소 찾아온 유정에게 가토는 "조선의 보배가 무엇이오?" 하고 묻자, 사명당은 "조선의 보배는 조선 것이 아니라 일본 것이오." 하고 답했다. 가토가 의아하게 여겨 그 보배가 무엇인지 묻자, 사명당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생각하오." 하고 답해 가토와 주변의 일본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조선에게 최악의 적장[19]인 가토의 목을 베어 바친다면, 높은 벼슬을 받고 부유하게 살 수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 대답을 듣고 가토가 놀라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20] 조금만 생각해봐도 적진에 들어가 적장 앞에서 '네 목을 따서 바치면 여럿 팔자 고친다'는 식의 말을 하기란 웬만한 강심장 아니면 하기 힘들기 때문에 유정의 비범함이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유정은 이후에도 가토의 요구에 적진으로 가서 여러 번 회담을 가졌고, 그 결과를 '토적보민사소', '을미상소언사' 등을 올려 선조에게 전시 대처와 부국강병에 대한 의견들을 전했다.

이후 그해 11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고, 선조의 퇴속(退俗) 권유를 거부하고, 영남에 내려가 팔공(八公)·용기(龍起)·금오(金烏)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무기를 저축한 후 인신(印信, 도장이나 관인)을 되돌리고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벌어지자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의 도산(島山)에 쳐들어갔으며,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을 따라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이르러 공을 세워 종2품 가선대부(架善大夫, 종2품 하계의 계급)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중추부의 동지사 보직)에 제수되었다.

2.3. 일본과의 강화 협상


有約江湖晩 (강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지 오래되었지만)
紅塵已十年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낸 것이 벌써 10년이네)
白鷗如有意 (갈매기는 그 뜻을 잊지 않은듯)
故故近樓前 (기웃기웃 누각 앞으로 다가오는구나)
일본 교토의 고쇼지(興聖寺)가 소장하고 있는 한시 유묵.[2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났고, 이후 일본의 정권을 차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꾀했고, 이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를 통해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조선 조정은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계속되는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사신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 전란이 마무리된 지 6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라 선뜻 나서지 않는 관리들이 없었고, 결국 전란 이후 강원도에 머물던 유정을 불러 일본으로 가게 했다.[22]

이에 1604년(선조 37) 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교토에서 협상을 하면서 조선과 일본은 기나긴 대치를 거두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이는 이후 조선 통신사로 이어졌다. 특히 그는 이 협상을 마치고 돌아올 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포로로 끌려 온 조선인 약 3,500여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왔으며, 이에 그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고 어마(御馬: 임금이 타던 말)를 하사받았다.[23]

2.4. 최후

협상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 잠시 묘향산에 들려 스승의 영탑에 예를 표하고[24], 이후 해인사에 머물던 중 병으로 인해 1610년(광해군 2) 그 곳에서 세수 65세, 법랍 50세로 입적했다. 사실 광해군은 서쪽 경계가 불안해 그로 하여금 서쪽을 지키게 하려고 했지만, 그가 병으로 인해 명을 행하지 못하자 약을 지어서 보냈으며, 그가 입적하자 매우 슬퍼하면서 장례를 지원할 정도로 조선시대 숭유억불이 일상인 가운데 왕에게 이렇게까지 대우받았던 승려도 없었다.

입적한 후 다비한 그의 사리는 해인사의 부속 암자인 홍제암 내 부도에 안치했으며, 이후 세워진 비석과 함께 보물로 지정[25]되었다.

3. 저서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었고, 이후로는 강화 협상을 하는 등 조선을 구한 승려 중 1명으로 입적 이후 제자로 거둔 승려들과 '유발제자' 격인 허균이 그가 남긴 시문 등을 모아 7권의 『사명당대사집』을 남겼고,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도 같이 전하고 있다.

4. 관련 유적지

5. 여담

5.1. 야사 및 설화

사실 유정과 관련해서는 박문수, 이항복 못지않게 많은 야사나 설화가 많은 편이다. 위에서 언급된 '임진왜란' 당시 가토와의 면담뿐만 아니라 여러 야사나 설화 등이 있는데, 순서대로 보면 다음과 같다.
사명당이 일본에 사절단으로 입국시 일본에서 지위가 높은 누군가가 '조선에서 오는 중이 영험하다던데 어디 시험 좀 해볼까?' 하는 생각에 항구에서 궁궐로 오는 길에 1만여 자가 넘는 글씨가 빼곡히 쓰인 병풍을 쭉 세워 놓고 사명당을 가마에 태운 다음 그 병풍 옆을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궁궐에 당도하자 그는 "이름 높은 스님께서 오셨구려! 어디 오시는 길에 병풍이 있던데 보았소?" 하고 물었는데, 사명당은 "아 그거요?" 하더니 병풍 속 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밤새도록 좔좔 읊었을 뿐 아니라 오자가 하나 난 것까지 완벽히 짚어내어 일본인들을 데꿀멍시켰다. 판본에 따라서는 줄줄 외우다가 딱 한 폭만 말하지 못하자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의 대답은 "그런 것도 있었나? 난 못 봤소." 였고,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한 폭이 바람 때문에 접혀서 가려져 있었다고도 한다.
숙소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오셨으니 대사 목욕이나 하셔야죠?" 하면서 욕탕으로 안내했다. 사명당은 욕탕에 들어서자 깜짝 놀랐는데 욕탕에 독사들이 드글드글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시험하려는 의도를 알아챈 사명당이 쥐고 있던 염주를 탕 안에 던져 넣자 염주가 무언가에 부딪쳐 탕 소리가 났고 독사들에게 닿지 않았다. 제 아무리 이라도 온열탕에서 무사할 리 없으므로 욕탕의 밑바닥 두꺼운 유리판을 덮고 그 밑으로 독사들을 풀었던 것이다. 사명당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였다.
사명당이 침소에 들어가자 방바닥이 미친 듯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사명당을 태워 죽이려는지 숙소에 을 잔뜩 땐 탓이다. 일본에는 온돌이 없어서 불을 지필 수 없다는 걸 고려해서 특별히 무쇠로 만든 방을 준비했다는 판본도 있다.[29] 사명당은 "이 놈들이 역시나…"하면서 얼음 빙() 자와 겨울 동() 자를 쓴 부적을 천장과 벽에다 붙여놓고 명상에 잠겼다. 사명당이 뛰쳐나오길 기다리던 일본인들은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죽었나 싶어 방을 열었더니 방 안에 고드름이 얼어있었다.[30] 어떤 판본은 이를 보자 반대로 얼려 죽일 수 있나 싶어 방 주위에 얼음으로 둘러싸고 소금을 쳐 놨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방문을 여니 찜질방이 되었더라는 얘기도 있다. 당연히 일본인들은 KO패를 인정하고 만다.
다른 판본에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명당을 시뻘겋게 달아오른 철마 위에 앉히려 하자 사명당이 결국 폭발하여 팔만대장경을 외우자 일본 전역에 태풍이 불어 대홍수가 나버리고[31]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제서야 잘못을 빌자 일본인의 대를 끊기 위해 매년 일본인 여자 아이의 가죽 300장과 일본인 남자 아이의 불알을 석 섬 서 말씩 조공으로 바치라 해서 결국 도쿠가와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간신히 모면했다고도 전한다.[32] 이후 귀국한 사명당은 금부도사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33]

이러한 야사나 설화들의 공통점은 사명당의 성격이 괄괄하다는 것과 이야기가 와전되고 바뀌는 와중에도 인물상 자체가 크게 변하지는 않은 것이다.[34]

6. 대중매체

7. 관련 문서



[1]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0-2호이다. 그의 진영(眞影)은 많이 전해지지만 별로 외모가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2] 정승공파(政丞公派) 12세 응(應) 항렬.[3] 지번 주소로는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400[4] 시조 12세손[5]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공신인 것으로 추정된다.[6] 1594년 왜군이 서생포(울산), 거제도, 창원 등에 성을 쌓으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유정이 권율 도원수의 지시에 따라서 서생포(울산)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를 찾아가서 네 차례 회담을 하였다.[7] 하지만 본인 스스로는 '송운(松雲)'이라는 당호를 더 즐겨 썼다.[8] 선종[9] "종문(선종)의 옛 곡조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서 노승이 사명당에게 선종의 가르침을 물어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이 매우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이는 일종의 선문답이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해석하자면 고래가 바닷물을 다 마실 리도 없고 돌 조각상이 옥피리를 불 리도 없으니,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 또한 그렇게 신비하게 숨겨져 있고, 또한 밝게 빛나며 아름다운 노래로 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10] 任守으로 표기된 자료도 있다.[11] 아래 '대중매체' 문단에 나오는 일부 위인전에는 형 대신 누이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2] 1558년에 어머니 달성 서씨, 1559년 아버지 임수성이 세상을 떠났다.[13] 승려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으로 고려 광종 이후 지속되다가 1507년(중종 1) 폐지되었다가 명종 즉위 후 불교에 심취해 있었던 문정왕후의 영향으로 잠깐 불교가 부흥하면서 부활되었다.[14] 1592년 금강산 유점사가 작품의 배경이다.[15] 현재의 평안남도 중화군으로 평양(平壤)에서 40여 km 떨어진 곳이다.[16] 임금이 내린 명령[17] 이때 주변 9개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기도 했다.[18] 당시 73세였던 휴정은 선조의 명을 받고 의승병을 모으는 격문을 쓰긴 했지만, 자신의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물러나면서 유정이 승군(僧軍)을 통솔했다.[19] 가토는 한양을 점령한 뒤 왕릉을 파헤치고 경복궁을 불태웠으며, 이후 함경도까지 가서 조선의 왕자들을 포로로 잡기까지 했다.[20] 이는 이후 유정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협상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일본인들이 "이 사람이 보배 이야기를 했던 그 화상(설보화상)인가?"라고 입을 모았을 정도로 널리 퍼졌다.[21] 1605년(선조 38) 강화협상을 위해 일본에 갔을 때 고쇼지를 창건한 승려 엔니 료젠(円耳了然)에게 남긴 것으로, 2018년 BTN불교TV가 '사명대사 다큐멘터리' 촬영 중에 존재를 확인하여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 전시됐다.[22] 관련 기록. 당시 조선 조정의 생각해 놓은 방안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사신조차 비난의 논평을 지을 정도이다.[23] 이때 돌아온 포로들은 이후 조선의 관리들에 의해 별다른 연고가 없는 반반한 처자는 첩이나 종으로 삼았고(남편이 있으면 남편을 없앴다), 남자는 노비로 삼는 짓이 빈번히 일어나자 선조에게 "이거 좀 막아야 하지 않느냐?"라면서 진언했지만, 정작 선조는 문제를 일으킨 관리가 한둘이 아니고, 포로 따위는 관심이 없어서 그냥 씹었다.역시 암조[24] 이는 휴정이 1604년 1월 입적해 유정이 추모를 하기 위해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명으로 일본에 간 것이다.[25] 2021년 지정번호제가 폐지되기 전 '보물 1301호'였다.[26] 무안면 소재지 부근에 있으며, 국난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비석으로 유명하다.[27] '홍제'란 유정의 다른 별칭으로 '널리 구제한다'는 뜻을 지닌다. 여담으로 이 비는 한국 불교사에서 큰 의의가 있는데, 승려의 묘비라고 할 수 있는 고승비는 신라, 고려 때는 활발히 제작되다가 숭유억불을 채택한 조선 시대 들어서는 건국 직후인 태조 연간에 세워진 것을 제외하고 15세기, 16세기 200년 동안 세우지 못하다가 무려 2백 년 만에 세워진 이 비를 기점으로 19세기까지 170여개가 세워졌다.[28] 일본에서는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특별한 탄압이 없었고 덕분에 불교는 쑥쑥 자라나 헤이안 시대 말 그 강력한 후지와라 씨를 억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누렸던 시라카와 덴노조차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으며 센고쿠 시대에 이르면 일개 절 하나가 아예 영주 노릇까지 할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에, 장수가 여기도 그러려니 하고 보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을 법도 하다. 근데 일본에서 그랬으면 그 절에 소속된 승병들에게 개털렸을 거라는 게 함정.[29] 〈임진록〉에서는 구리로 만든 방에다 넣고 밖에서 불을 피워 방을 달궜다고 한다. 〈맹꽁이 서당〉에서는 숙소에 불을 지피라고 명령받은 부하가 "맹꽁이 서당처럼 말이죠?" 라고 개그를 친다.[30] 이 일화는 〈머털도사와 108요괴〉에서도 나온다. 내기 요괴머털이를 오래 못 버티게 하려고 장작을 마구 쑤셔넣어서 온돌방을 데웠는데 문을 열어 보니까 방 안에 고드름이 얼어있고 머털이가 "으. 춥다. 문 닫아라." 라고 한다. 이 야사에서 몹시 추운 것을 빗대는 '사명당의 사첫방'이라는 속담이 나왔다. '사첫방'은 손님이 묵는 곳을 뜻하는 '사처'의 방이라는 말. 국립국어원 표준대사전에 실리기는 했지만 지금은 잘 안 쓰이는 속담이다.[31] <임진록>에서는 이 내려와 왜왕이 기대고 있던 누각을 신나게 흔들어댔다고 한다.[32] 하도 쇼킹한 스토리라서 아동용에서는 다시는 전쟁 못 일으키게 를 왕창 뜯어냈다고 바꾸었다. 왜왕이 "어떻게 그 많은 쇠를 마련하겠습니까?"라고 변명하자 "전쟁 일으키려고 만든 무기 녹이면 되지 않나?" 하고 데꿀멍을 하게 만든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어느 패전국이라도 차라리 죽을 각오로 다시 싸울지언정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애초에 아무리 조선이 일본의 침공을 격퇴했으나 그 과정에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이런 요구를 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말이다. 전해지는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사명대사가 인피를 공물로 요구하자 일본의 공주 하나가 "나부터 벗겨라."라고 저주하며 자진했다고 한다. 전쟁 직후 조선인의 일본인에 대한 분노가 이만큼 컸다는 반증이다.[33] 판본에 따라서는 바다 위에 구리 방석을 올려놔 그 위에 앉도록 했는데 사명당은 구리 방석을 가볍게 들어 바다에 내던지고 태연하게 앉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철로 지은 집에 가두고 불을 질렀는데도 무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34] 동시대인인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도 유정은 고승이지만 휴정에 비하면 인품이 비루하다고 나온다.[35] 실제 역사와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표현하는 장수의 숫자에 한계를 둔 당시 게임 시스템 내에서 나쁘지 않은 각색이었다.[36] 이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다 마찬가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