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50대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Theodosius I | Θεοδόσιος Α΄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Flavius Theodosius |
출생 | 347년 1월 11일 |
로마 제국 카우카/이탈리카 | |
사망 | 395년 1월 17일 (향년 48세) |
로마 제국 메디올라눔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79년 1월 19일 ~ 395년 1월 17일 (16년 16일) | |
전임자 | 발렌스 |
후임자 | 아르카디우스 동방 호노리우스 서방 |
부모 | 아버지 : 대 테오도시우스 어머니 : 테르만티아 |
배우자 | 아일리아 플라킬리아 플라비아 갈라 |
자녀 | 풀케리아[1] 아르카디우스 호노리우스 |
종교 | 그리스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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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50대 황제이자,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시조. 정식 이름은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테오도시우스 1세, 테오도시우스 대제로도 불린다.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어로 하느님이(ο Θεος), 준(δώ) 사람, 즉 하느님이 내린 사람이라는 뜻이다.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고 이교도를 탄압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군사와 내정 면에서 보통 이상의 뛰어난 통치력을 발휘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관철한 유능한 군인 황제이긴 했으나, 대제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그리스도교를 국교화한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통일 로마 제국의 실질적 마지막 황제인 셈으로, 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사후 이런 황제를 다시 가지려면 마르키아누스[2]가 즉위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고 바로 그것이 제국의 쇠락을 가져온 여러 결정타들 중 하나였다.
2. 생애
2.1. 내력과 초기
지금의 스페인에 소재한 코카(Coca) - 당시에는 카우카(Cauc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칭 테오도시우스 백작(Count Theodosius, 신의 아버지 테오도시우스로 추존)으로 불리는 서로마 제국의 장군으로,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최측근 무장이었다.대제를 다룬 고대 기록들은 테오도시우스 일가가 로마 제국 최초의 히스파니아 지방 출신 황제 트라야누스와 관련 있는 듯 교묘하게 묘사하고 있고, 그 일가가 대대로 오늘날의 세비야 지방 내 로마 식민도시 이탈리카 일대를 지배한 지역 유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현대 학자들의 연구들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 1세 일가는 히스파니아 토착민들로 트라야누스 황제처럼 그 일가가 이탈리아에서 히스파니아로 이주한 로마인도 아니며, 집안에서 가지고 있었다는 카우카와 이탈리카 일대의 토지들도 부친이 군에 복무하면서 받은 봉토였다고 한다. 당연한 말인데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제위에 오른 이후, 자신의 출신지인 이베리아 반도를 찾거나 그곳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집안은 부친 시절부터 제국의 핵심이 된 신흥 가문인데다, 대제 역시 즉위 전까지는 전형적인 직업군인장교였다. 따라서 고대 기록 내용처럼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훌륭한 가정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성장 과정 역시 동세대의 지주나 유지 일가 자제들과 차이가 있었다. 여러 학자들은 테오도시우스가 직업군인의 아들들이 대개 그렇듯, 아버지가 복무한 부대를 돌아다니며 군업무를 배웠다고 말한다. 즉, 혈통과 고향이 이베리아 반도였을 뿐 부친이 근무한 주둔지를 돌아다니며 세습 직업군인장교 수업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테오도시우스 1세는 비슷한 나이대의 원로원 의원들과 달리 샌님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368년, 브리타니아 일대가 색슨 족과 스콧 족 등의 만족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위기에 처하자[3]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장군과 함께 출전, 약관의 나이에 공을 세우고 374년에 모이시아의 장관(Dux)으로 부임하여 도나우 강 북쪽의 고트족과 반달족을 무마하는 등, 순조로운 커리어를 쌓았지만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장군이 시기하는 자들에 의해 반역죄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처형되면서 군에서 물러나 고향 스페인으로 돌아간다.
2.2. 난세에 즉위하다
그러나 378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발렌스가 고트족의 연합군에 대패하고 전사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마비상태에 이르자, 서로마 제국을 지키는 데에도 힘이 부쳤던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테오도시우스를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하게 된다. 이는 테오도시우스가 모이시아 장관 시절 보여주었던 군사적 역량을 그라티아누스가 중시하였고, 또한 당시 로마 제국군 내에서 테오도시우스 일가가 상당한 명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거의 붕괴 직전의 상태까지 갔던 동로마 제국 야전군의 재편성에 기어코 성공했고 야만족들을 이이제이 전술로 서로 싸우게 만든 다음 상당한 수효를 포이데라티로 만들어 아군으로 부리는 것까지 해냈다. 또한 사산조와의 뜨거운 감자인 아르메니아 문제를 잘 해결하였고, 아르메니아에서 친로마파가 친사산조파에게 탄압받아 구원을 요청했을 때도 그대로 묵살하는 등의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 동쪽 국경 문제도 해결하였다.
2.3. 외세와의 전쟁
379년에 황제로 즉위한 테오도시우스는 380년까지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착실히 전과를 거두며 381년에 고트족의 대왕 아타나리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트라키아 속주에 고트족을 대거 이주시킨다. 이때부터 동로마 제국군에 고트족 출신의 장군이 대거 기용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후일 "로마 약탈"을 진두 지휘하게 되는 서고트 족의 대왕 알라리크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와 대립하는 등, 고트족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의 선택은 나름대로 합리적이었다.383년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3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테오도시우스는 비로소 안정된 통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무렵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가 브리타니아의 군사령관이었던 마그누스 막시무스에게 살해당하면서 다시 내전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도 테오도시우스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와의 타협을 선택, 그에게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의 영유를 인정하고, 대신 그라티아누스의 동생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다스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선에서 개입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후 387년에 다시 한번 동고트 족을 크게 격파하면서 정세가 안정되고,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테오도시우스는 마침내 거병, 388년 사바 강 유역에서 막시무스를 격파하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했다. 다만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끝내 무력한 황제로 삶을 마쳤기 때문에, 이때부터 395년까지 7년간은 사실상 테오도시우스가 두 로마 제국을 함께 다스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4. 테살로니카 칙령
테오도시우스는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국교로 삼았는데, 391년 행정법으로 상세한 내용을 규정했다. 이로써 로마 제국은 명실상부한 그리스도교 제국으로 변모했다.(테오도시우스의 이교 박해) 이교도 탄압은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비그리스도인들은 공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이단 종파의 탄압까지 나타나기 시작한 상황에서 이교도가 탄압받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조치에서 나온 이교도들의 불만이 다시 내전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테오도시우스가 갈리아 방위를 맡겼던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 장군에게 살해[4]되자 테오도시우스는 즉각 개입을 천명했다. 아르보가스트는 이에 맞서 그리스도인을 가장한 이교도이자 문법 및 수사학 교수였던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그리스도교 탄압을 천명했다. 이 대립구도는 394년 9월 6일,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의 동로마 제국군이 반란군을 최종적으로 궤멸시키면서 끝났다. 또한 이 반란 진압에는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도움도 한몫 했다. 암브로시우스 항목 참조.
2.5. 내치와 군사
내치에서도 율리아누스 이래로 발렌스도 계승했던 감세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는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가격통제 정책 등을 폐지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는 등, 당시로서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쳐 경제 상태를 크게 호전시켰다.다만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적어도 전술 및 일선 부대 지휘 측면에서는 보통 이상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일선 부대 지휘관으로서 근무할 때 성적은 영 시원치 않았던 모양으로, 부대 관리나 군정, 군수, 보급 이런 측면에서 대단한 능력을 보이긴 했고 사실 그것 덕택에 승진하긴 했지만, 소규모 부대 지휘관으로서 일선 지휘할 때부터 두각을 드러낸 명장이었던 카이사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비교하면 확연히 딸려 보이는 일면이었다. 굳이 말하면 군재만 놓고 볼 경우 중국 삼국지 시대 동탁과 비슷한 유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는 황제가 된 이후로도 어디까지나 최고 지휘관은 그였고, 대부분을 승리로 이끌어 당당한 장군 황제들 중 하나라고 말하기에 부족함 없는 업적은 일구었다. 동탁은 군정 능력 자체는 정말 뛰어났으나 인격이나 상식 자체가 상당히 바닥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때문에 원소나 조조처럼 전술적 단점을 보조해줄 인재들은 물론 기존 수도 관료들까지 한마음으로 동탁이 망하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반면 테오도시우스는 즉위 전부터도 다름아닌 수도 관료층은 물론 장교단에서도 평가가 두루 괜찮은 상식적인 인격자였고 즉위 후에도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상식인이었다. 그래서 비록 스틸리코 외에는 제대로 기록이 남지 않았지만, 자신의 전술적 능력 부족을 보완해줄 능력 있는 부하들의 도움을 두루 받았다는 차이가 있었다.
2.6. 안티오키아 폭동(387년)
영문으론 Riot of the Statues.안티오키아의 대주교가 세 사람이나 나와 치열하게 대립하자 테오도시우스가 결론을 내려 판결을 내렸는데, 셋을 따르는 신자들 중 3분의 2는 당연히 테오도시우스의 판단에 불만을 품었다. 그런 와중에 고트족과의 전쟁 및 평화비용으로 세금까지 늘어나자 불만이 더욱 거세져버렸다.
따지고 보자면 고트족이 벌이는 유럽전쟁의 비용을 안티오크 및 아시아 지역이 물었으니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이렇게 터지기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즉위 10주년 기념 축제에 자발적인 헌금을 빙자한 특별세금이 한 차례 더 부과되자 백성들이 해당 관아로 찾아가 탄원했다. 이들의 행동을 범죄적인 문제로 일관하는 관리들의 태도에 불만이 분노가 된 안티오키아 백성들은 황제의 동상을 산산조각내고 온 거리를 끌고 다녔다. 폭동은 순식간에 진압되었으나 사건의 보고서가 황제에게 발송되자 백성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테오도시우스는 안티오키아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따라서 토지, 특권, 세입에 대한 권리를 모두 박탈하고, 목욕탕과 원형경기장, 극장을 폐쇄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고문과 함께 심문했으며 죄인의 재산을 모두 경매에 붙였다. 다만 안티오키아 대주교 플라비우스가 찾아와 자비를 간청하자 테오도시우스가 사면령을 내렸다.
2.7. 테살로니카 폭동과 학살, 사죄(390년)
이에 비하여 테살로니카에선 정 반대의 잔인무도한 행동을 보여줬는데, 일단 원인은 보테리크라는 장군이었다.당시 보테리크는 아름다운 미소년 노예를 소유했는데, 콜로세움에서 전차를 모는 전사 하나가 이 미소년 노예를 건드렸다 한다. 보테리크는 그자를 투옥하고 심문했는데, 이 전사가 현대로 치면 스포츠 스타나 다름없었던지라 폭동이 일어났다. 정확히는 여러 차례 불만이 쌓여왔다가 이 일이 빌미가 되어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탈리아 전쟁으로 병력이 빠진 상황인지라 보테리크와 부관들은 민중에게 살해당하고 토막나 온 거리에 끌려다녔다.
테오도시우스가 이 사건을 두고 판결을 내렸는데 그 내용이 지금까지 보였던 행보와는 전혀 달랐다.[5] 군중을 기념공연을 해주겠다 하여 경기장에 모이게 하여 거기서 학살하였다.[6] 두 아들 중 하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한 상인이 있었는데 병사는 두 아이를 모두 죽였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병사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고 한다.
테살로니키 학살의 참상을 듣고 대노한 메디올라눔(밀라노의 옛 지명)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메디올라눔을 방문하고 그곳의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러 가던 황제를 내쫓아버렸다. 결국 테오도시우스 1세는 남루한 옷을 입은 채로 무릎을 꿇고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후대의 카노사의 굴욕에 비견하기에는 어렵다. 주교는 황제의 권력을 넘볼 수 없었고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와 가까운 사이였다. 역시학자들은 정말로 교회의 권위가 높아서 일어난 굴욕이라기보단, 학살로 인기가 추락한 테오도시우스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황제의 신앙심과 겸손한 면모를 부각시킨 행동이었으리라 생각한다.
2.8. 사망
하지만 그 직후인 395년 1월, 테오도시우스는 지병인 수종으로 50세도 안 돼서 사망, 그의 뒤는 그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승계했다. 둘 다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들이어서 제국은 권신들의 시대를 맞았다. 그중에서도 유조를 직접 받은 탁고대신 3명[7]중에서도, 황제의 질녀이자 양녀와 결혼으로 맺어진 혈연, 실병력을 부릴 수 있는 군사령관(magister militum)[8]이라는 점들이 시너지를 이룬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선두주자로 앞서 나갔고, 향후 한동안 로마 정국은, 특히 서로마에서는 그의 독무대였다.2.9. 제국 최종 분할
그의 사후 로마 제국은 그의 두 아들이 각각 서방황제, 동방황제로 분할 통치제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나중에 서방황제가 통치하는 서방지역이 오도아케르가 이끄는 게르만족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때를 제국의 최종 분할로 여긴다. 물론 후대의 생각과 달리 당대에는 최종 분할로 여기지 않고 "과거에 그래왔던 것 처럼"[9] 아르카디우스가 동방 구역 담당, 호노리우스가 서방 구역 담당으로 분담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도 그걸 상정하고 유언하였고, 그게 최종 분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3. 평가
3.1. 전반적 평가
군사와 내치 그리고 외교에서 두루두루 업적을 보였다. 흔히 "3대제"로 불리는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중에서 가장 덜 알려진 인물이고 솔직히 업적도 앞과 뒤의 황제들에 비하면 좀 못하지만, 테오도시우스는 가족과 신하들을 죽이지도 않았고 재정 붕괴나 재정 악화도 초래한 적이 없는 데다가 그 두 황제보다 훨씬 더한 악조건에서 치세를 시작했고, 또한 성급히 화를 터뜨리는 버릇은 있었어도 잘못을 지적하고 직언하는 신하들에게 관대했다. 물론 신하를 비롯한 주변인들이 불편한 소리를 했을 때 관대했다는 이야기지, 학살 경력이나 정치/종교적 반대파들에 대한 대응을 보면 전반적으로는 관대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잔혹한 인물이었다. 잔혹한 군주가 명군이 되는 경우도 많으나, 그러려면 그 잔혹함을 커버할 만큼 능력이 좋아야 하는데 테오도시우스 1세는 능력이 어느 정도 있긴 했어도 본인 치세의 결과물을 보면 그 정도까지 능력이 있었다고 보긴 힘들다.[10][11]그가 자기가 박살내놓은 서로마 제국 방면 야전군의 재편성과 재건은 끝내 해내지 못한 점, 그리고 혈육이 아닌 사람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도 없었으면서 그의 두 아들을 뛰어난 군주로 육성하긴 커녕 가진 권력도 제대로 행사할 능력이 없는 암군으로 만든 점은 큰 그늘이지만, 설마 자기도 한창 때 병이 들어 죽을 것까지 예상할 수는 없었을 테니 약간은 변호가 가능하긴 하다. 그의 후계 정책의 오류가 로마 제국을 영원히 분할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잘못된 것으로, 보다시피 서로마와의 내전을 끝낸 직후에 사망해버렸다.
3.2. 서로마 야전군의 붕괴와 후계자 문제
서로마 야전군의 전면적인 붕괴의 원인이 된 프리기두스 전투를 초래한 것은 바로 테오도시우스 본인이다.[12][13] 이런 시점에서 본다면 '수습하지도 못할[14] 상황을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난 황제'라는 평가도 나올 수 있다. 프리기두스 전투 직전 서로마 대립황제로 성숙하고 검증된 능력을 가진 부하가 아닌 어린애 호노리우스를 지목한 것도 비판거리다. 이 지목이 서로마 멸망에 큰 역할을 담당한 나비효과를 불러온 것은 물론이요, 자신의 종교 정책 자체가 엄청난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마당에 공동황제가 어린애라면 리스크가 한층 더 커지기 때문. 뿐만 아니라, 아직 어린 나이의 호노리우스는 둘째 치고, 스스로가 사망할 당시 이미 아주 적은 나이라고는 할 수 없던 아르카디우스를 제대로 후계자로 양성하지 못했던 것도 비판거리이다. 손가락만 빨던 암군 아르카디우스가 오래 살지 못하고, 또 그 후계자인 손자 테오도시우스 2세가 아르카디우스와는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의 명군인데다 오래 살기까지 했다는 건 로마 입장에서 운이 좋은 일이었다.[15]또한 엄연히 손자의 업적인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나 테오도시우스 법전이 이 사람의 업적인 것으로 자주 오인되기도 한다.[16][17] 아무래도 '대제'이다 보니 화려해보이는 업적은 웬만하면 이 사람이 했을 거라는 인식이 있는 듯. 엄밀히 말해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대제의 칭호를 받게 된 가시적인 '업적'은 그리스도교 국교화밖에 없다.[18]
이처럼 '대제'로 불리기에는 여러모로 업적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로 그리스도교 사가들에 의해서 높이 추앙된 점에 기인하여, 오늘날에는 이로 인한 까도 적지 않다. 가장 과대평가된 로마 황제 중 하나인, 무자비한 테오도시우스(영문) 다른 '대제' 3명이 오늘날의 세속적인 기준으로도 대제라는 타이틀에 큰 태클이 안 걸리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4. 기타
신탁으로 유명한 델포이 신전을 폐쇄한 인물이기도 하다. 델포이 신전의 예언자는 이때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선언했고, 델포이 신전이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참고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것은 폐쇄 5년 후였으며, 알라리크에 의해 로마 약탈이 일어난 것이 15년 후였다고 한다.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다는 얘기도 있는데 사실 이슬람의 칼리프 우마르도 유사한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누가 더 책임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테오도시우스가 파괴했다는 주장에선 이미 몰락할 때로 몰락하여 이집트 정벌군 사령관 아므르 이븐 알 아스와 그의 장교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대해 아는 바 없었으며 심지에 그에 관련된 소문을 들은 적 조차 없었고 따라서 광신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4세기 말에 파괴했을거라고 본다. 우마르가 그랬다는 주장으로는 비록 그리스도교 시대에 쇠퇴하긴 했지만 이 도서관을 결국 불태워서 상당한 그리스 고전을 소실시킨 건, 642년에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한 칼리프 우마르였으며 초기 선출 칼리프 시대의 칼리프들은 대부분 호학에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진 뛰어난 지도자들이었지만, 우마르만은 예외였다고 주장한다.
사실 도서관은 한번에 드라마틱하게 파괴되었다기보단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파괴되었다고 보는 게 요즘 학계의 의견이다. 일단 도서관의 위치가 호수와 바다 사이에 있어서 끊임없이 관리해주지 않으면 습기 때문에 문서가 쉽게 상했다. 당시 소장했던 문서들은 대부분 화재나 습기에 취약한 파피루스였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는 동방의 최대 항구이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많은 정복자들의 1순위 공격목표가 되었던 곳이다.
확실한 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알렉산드리아 공성전 때 화재에 불탄 적이 있고, 기원후 3세기 후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치세에 반란군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이후 서기 391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테오필루스에 의해 폐쇄당하고 장서는 세라페움이라는 별관으로 옮겨졌으며 그 다음은 종교적인 이유로 테오필루스와 키릴루스 형제가 주교로 있던 385~420년 동안 부도서관이던 세라페움을 불경하다는 이유로 완전히 파괴했다. 642년 이슬람의 알렉산드리아 정복 이후 여러 이슬람 사료에서 도서관이 파괴되었단 내용이 나온다. 이슬람 장군 암르 이븐 알 아스가 642년 지하드를 진행하면서 도서관을 끝장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5세기 신학자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이전부터 도서관은 이미 파괴되고 있었다고 적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 중 의외로 체육 교과서에 등장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은 후, 그리스 성소에서 열리던 올림픽이 이교도의 축제로 간주돼 폐지되었다는 내용.
[1] 376년 ~ 385년.[2] 450년부터 457년까지 재위한 동로마 황제. 종전까지 훈족에게 바치던 연공을 중단하고,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3]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대음모(Great Conspiracy)라고 부른다. 소설 "눈 속의 독수리"에서 이 시기를 묘사하고 있다.[4] 자살이라는 말도 있지만 정황상 아르보가스트가 권력 의지가 강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죽였음이 거의 확실하다. 자살이었다고 해도 강요된 자살이었을 것이다.[5] 사실 많은 역사적 인물이 그러하듯이 정확히는 선과 악이 혼합된 인물일 것이다. 애초에 아리우스파를 숙청하기 위해 꽤나 잔혹한 음모를 많이 꾸며야 했다.[6] 대략 7천에서 1만 5천이 죽었다고 한다.[7]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 스틸리코, 암브로시오이다.[8] 앞의 심마쿠스는 순수 문민 귀족, 암브로시오는 주교라서 황족이자 군사령관인 스틸리코에 비해 영향력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9] 디오클레티아누스 부터 그라티아누스 까지[10] 그리고 보통 전근대와 근현대를 막론하고 높으신 분들에게 잔혹하고 힘 없는 백성들에게 관대한 군주는 성군으로, 높으신 분들에게 관대하고 백성들에게 잔인한 군주는 폭군으로 간주되는 게 인류사에서 보편적인 인식인데, 테오도시우스는 명백하게 후자에 속한다.[11] 어떻게 보면 이전의 도미티아누스와 완벽하게 대조되는 행보를 보였다고 볼 수 있다. 주변인들에게 관대했지만 일반 백성에게 매우 잔혹했던 테오도시우스와 달리 도미티아누스는 정치가들에게 매우 오만방자하고 잔혹하게 굴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학살 같은 정신나간 짓거리는 한 바가 없고 경제 정책도 매우 현명하게 펴서 수혜자들에게는 인기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이럼에도 후대에 대제로 떠받들어진 테오도시우스에 비해 폭군이라고 욕을 먹은 도미티아누스가 억울할 지경이다. 물론 이건 후대 로마의 정치적 사정과 종교적 의견이 개입된 관점에 영향을 받은 것일 뿐, 전근대적으로도 그런 어른의 사정이 개입되지 않은 보편적 관점으론 도미티아누스보다 테오도시우스가 훨씬 폭군의 정의에 부합한다.[12] 에우게니우스는 즉위 이후 테오도시우스에게 자신을 인정해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나중에 어쩔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당시 시점에서 에우게니우스 측에게 테오도시우스와의 내전을 먼저 촉발할 의도가 없었음은 분명하다. 일단 선제공격 책임부터가 테오도시우스에게 있고 에우게니우스는 그저 반격하려다 패배한 것 뿐이니 에우게니우스 측에게는 내전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이전에 테오도시우스가 비기독교도 장병들에게 옹립된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협상을 통해 인정했던 전적이 있으니만큼, 에우게니우스 입장에선 마그누스 막시무스보다 훨씬 제대로 된 절차를 갖추고 즉위한 자신을 단지 종교 정책에서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 선제공격하는 비이성적인 행보를 보일 것을 예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니만큼 에우게니우스가 친 다신교 정책으로 테오도시우스를 '도발' 했다는 친기독교적 시각도 공정한 시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명분론 면에서도, 실권은 없었으나 엄연히 로마 원로원의 옹립으로 나름 명분을 갖추고 즉위한 에우게니우스를 승인하는둥 마는둥 몇 달 간 미적대다가 거부하고, 곧이어 곧바로 내전을 시작하였다.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의 집권에 구린 면이 많긴 했어도 정작 테오도시우스가 대안이랍시고 내세운 아들 호노리우스는 자기 아들이라는 거 외엔 아무것도 없는 듣보잡 애송이였기에, 프리기두스 전투 직전 테오도시우스에게 명분이 있다고 보는 게 불가능한 이상, 프리기두스 전투의 책임은 결국 테오도시우스가 가장 크게 질 수 밖에 없다.[13] 그나마 테오도시우스에게 좁쌀만한 명분이라도 찾아보자면 에우게니우스의 뒷배였던 아르보가스트가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시해했다는 의혹이 매우 짙다는 것 밖에 없는데, 정작 발렌티니아누스와 비슷하게 하극상으로 죽은 그라티아누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테오도시우스가 발렌티니아누스를 위해 출정했다는 주장을 해 봤자 테오도시우스만 위선자가 되는 꼴이다. 발렌티니아누스와 달리 그라티아누스가 반역자의 아들이던 자신을 공동황제로 지명해준 큰 은인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14] 동서분할 직후 서로마의 상황을 보면 테오도시우스 본인이 이 개판을 수습할 수 있었다는 보장도 딱히 없긴 하다.[15] 아르카디우스-테오도시우스 부자의 수명이 서로 바뀌었다고 가정하면 동로마에게는 상상도 하기 싫을 끔찍한 결과가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테오도시우스 2세가 태어난 건 1세가 죽고 6년 뒤의 일이고, 2세의 훌륭한 후원인이었던 안테미우스의 출세에 기여한 바도 없다. 즉 이 양반은 자식들 교육은 개판도 완전 상개판을 쳐놓고 손자가 명군이 되는 데 기여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다. 즉 당대의 심각한 실정이 후대의 노력으로 수습되면서 명예가 덜 손상된 케이스에 지나지 않는다.[16]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테오도시우스 2세의 성벽, 테오도시우스 2세의 법전으로 봐야한다.[17] 이 또한 엄밀히 말하면 섭정이나 신료들의 공이지만[18] 내전에서 승리하여 제국을 재통합했다는 것도 업적이긴 한데, 이걸 가지고 대제라고 한다면 테오도시우스 1세나 콘스탄티누스 1세 외에도 베스파시아누스, 세베루스, 아우렐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우스 2세 등도 대제로 높여야 한다. 통치자로서의 재능을 보면 이들은 테오도시우스 이상이다. 당연히 이들은 후계자를 육성한 실적이나 선정하는 안목도 테오도시우스에게 비교하는 게 실례일 수준이다. 그나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큰아들 카라칼라의 만행 때문에 욕을 좀 먹는 편이긴 하나, 그래도 카라칼라는 단점만큼이나 장점도 명확한 인물이었으니만큼 잘한 게 거의 없는 테오도시우스의 두 후계자보단 나았다. 콘스탄티우스도 유능한 후계자를 선정할 안목이 있었음에도 그 후계자를 배려하긴 커녕 견제만 하다 적전분열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테오도시우스 못지 않게 욕을 먹을 점이 있긴 한데, 그래도 똑같이 중병 걸려 요절하기 직전에 선택을 잘 한 덕에 큰 위기는 막았다. 즉 테오도시우스랑 달리 자기가 쳐놓은 개판을 어떨게든 수습은 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