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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61년 3월 7일 (음력 명종 16년 2월 12일) |
한성부 성명방 (現 서울특별시 중구) | |
사망 | 1613년 11월 20일 (향년 52세) (음력 광해군 5년 10월 9일) |
경기 양근군 용진 (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 |
재임기간 | 제90대 영의정 |
1602년 3월 26일 ~ 1604년 5월 7일 (음력 선조 35년 2월 3일 ~ 선조 37년 4월 9일) | |
제95대 영의정 | |
1609년 10월 3일 ~ 1611년 9월 21일 (음력 광해군 원년 9월 6일 ~ 광해군 3년 8월 24일) | |
제97대 영의정 | |
1612년 9월 4일 ~ 1613년 9월 26일 (음력 광해군 4년 8월 10일 ~ 광해군 5년 8월 13일) | |
묘소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
봉호 | |
시호 | 문익(文翼) |
본관 | 광주 이씨[2] |
자 | 명보(明甫) |
호 |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
부모 | 부친 - 이민성(李民聖) 모친 - 문화 류씨 류예선(柳禮善)의 딸 |
부인 | 한산 이씨(? ~ 1592) - 이산해의 딸 |
자녀 | 장남 - 이여규(李如圭) 차남 - 이여벽(李如璧) 3남 - 이여황(李如璜, 1590 ~ 1632) 장녀 - 정기숭(鄭基崇)의 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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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정승.2. 생애
조선 중기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인 광주 이씨 출신이다.[3] 한성 성명방(誠明坊: 지금의 남대문과 필동의 사이)에서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류전[4]의 누이 동생인 어머니 류씨(柳氏)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소년기에는 영의정으로 있던 류전의 집이 있는 경기도 포천으로 가서 성장한다. 자라면서 영특하다고 명성이 돌았으며, 이후 토정 이지함의 눈에 띄어, 그의 조카로 동인의 중진이자 이후 북인의 영수가 되는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다.1580년 약관 20세 나이에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5] 이후 대제학 이이의 눈에 들어[6] 승승장구 하며, 1591년 예조 참판에 오르고 겨우 31세에 대제학을 겸임했다. 당시 이덕형의 학문과 인품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며 조선 역사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 사신과 교섭을 벌이기도 했으나 결렬되었다. 그후 청원사로 명나라로 가 만력제를 설득하여 명나라의 원병을 얻어오는 데 성공한다. 이항복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군사 정책을 수행하였다. 1598년 38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었다. 40살 이전에 정승이 된 케이스는, 세조 때 구성군 이준 이후 최초다. 그나마도 이준은 종친이었고 세조의 정치적 판단으로 인해서 능력보다는 라인 잘 타서 정승된 케이스. 이덕형 역시 선조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재상이 되었지만 그의 능력이 없었으면 재상이 되었을리 만무하다. 1884년에 갑신정변 당시 홍영식이 당시 만 27세의 나이로 우의정과 좌의정이 되었으나 정변을 일으켜 된 것이므로 실력으로 되었다고 볼 수 없다. 이후 좌의정, 1602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이 영의정 역시 구성군 이준과 같은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면 조선 역사상 최연소 기록이다. 이항복과 함께 현실적인 판단으로 임진왜란 극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임해군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광해군의 눈 밖에 났다.[7] 이덕형은 편의상 친인척에 따라 남인, 북인과 모두 이어질 수 있는 범 동인 계열로 분류되나 본인 스스로 붕당과 거리를 두었고, 1613년 유일한 동지였던 이항복이 축출되면서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덕형은 결국 이항복 없이 혼자서 무리하게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사형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다가 역적을 옹호했다는 혐의로 탄핵당하고 삭탈관직되었다.[8] 이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피폐해지면서, 실의에 빠져 시골집으로 돌아간 지 2개월 만에 숨졌다.[9] 이덕형의 죽음을 들은 이항복은 곧바로 이덕형의 사저로 찾아가 유가족들과 함께 곡을 하고 그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할 때 이덕형은 이항복도 함께 해주기를 원했지만 이항복은 거절했고, 삭탈관직된 이덕형은 실의에 빠졌다가 곧 사망했다. 이덕형은 사망한 후에도 눈을 감지 않고 있었는데, 이때 이항복이 찾아와 자신이 함께 하지 못한 이유[10]를 설명해 주자 그제야 눈을 감았다고 한다. 실제로는 이덕형이 독촉해서 결국 이항복과 함께 반대 의견을 올리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그 사이에 이항복이 천거한 인물이 광해군 연간을 휩쓴 옥사의 수많은 피해자들 중 하나로 걸려들면서 이항복 본인도 축출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복귀한 이항복은 이후 인목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완전히 실각하고 함경남도 북청도호부로 유배된 뒤 사망했다. 남인계와 서인계 전반에서 두루 존경을 받던 정치 원로 이덕형과 이항복의 실각과 죽음으로, 두 당파는 광해군과 집권세력인 북인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묘지명은 평생 친구인 이항복이 썼다.링크
3. 기타
-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이덕형의 외모에 관해 다소 와전된 이야기가 떠돌아다닌다. 예를 들면 "이덕형의 외모가 뛰어나서 조정에 나갈 때 태양이 2개가 뜬다고 말할 정도였다더라" 같은 것들인데 이것들은 전부 근래에 창작된 이야기다. 일단 이덕형의 외모에 관한 기록이 정사에는 전혀 없고 태양에 빗댄 부분도 말이 안 되는데 당시 태양에 비유될 수 있는 건 오직 왕뿐이었으며 왕 이외에 태양에 빗댄다는 건 반역하겠다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당대에 이덕형의 외모가 뛰어났다고 받아들여졌다는 일화는 정약용이 이덕형의 초상화를 보고 쓴 감상문에서 이덕형의 얼굴을 아름답다(媺)고 한 것, 후대의 관료가 이덕형의 초상화를 보고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사람들이 이덕형의 모습을 중국 소상팔경(瀟湘八景)의 하나인 동정추월(洞庭秋月), 즉 호수를 비추는 가을 달이라는 어구에 비유했다고 언급한 것 정도가 있다.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태양과 관련된 이야기는 여기서 와전된 것 같다. 또한 정약용에 따르면 단순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체구까지 컸다고 하니 눈에 띄는 겉모습이었던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명나라 사람들이 유달리 이덕형을 잘 기억하고 찾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조선의 초상화는 터럭 하나만 달라도 다른 사람이라고 할만큼 실제 인물에 충실하게 그리기도 했고.
- 이항복과 더불어 조선 왕조 사상 아마도 최강의 개그 콤비인 오성과 한음의 1명. 한음은 그의 호이다. 다만 오성은 이항복의 호가 아닌 '오성 부원군'이라는 작위의 이름에서 따온 것. 실제 이항복의 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백사(白沙)이다. 이항복과는 평생의 우정과 둘이서 같이 남긴 장난기어린 코믹 에피소드로 유명하여 평생을 같이한 유쾌한 친구로서 어린이 동화집의 단골 소재이나 사실은 이항복보다 5살 어리다. 이순신과 류성룡의 친분 관계라든지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나이를 초월한 우정이 있기는 하나 이는 두 사람 모두가 성인이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두 사람은 반말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한음문고 연보에 의하면 이덕형이 이항복과 처음 교유하게 것은 1578년 가을 무렵으로 이때 이덕형은 생원시[11], 진사시[12]를 치렀다. 당시 이덕형은 18세, 이항복은 23세였다. 이후 1580년 2월 이항복은 알성시[13]에, 동년 3월 이덕형은 별시[14]에 급제하여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만났다는 것은 야사라는 이야기인데 둘이 하도 친하게 지내다보니 이런 야사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깐깐했지만 이항복에게는 찡찡대는 성격이 강했는데 편지에 이항복을 형이라 부르며 "나 몸이 아파요", "지난번에 임금께 올린 상소는 좀 아니었어요", "형도 내 마음 몰라!", "이 사람 관직 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걸로 보아 친하기는 친했던듯 하다.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러 갈 때 서로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배웅했다. 이들을 소재로 한 박수동 화백의 만화 <오성과 한음>도 유명하다.
- 평소에는 사람이 멍해 보이고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지만[15] 일을 처리할 때는 빛이 날 정도로 빠르고 꼼꼼했다고 한다. 이항복이 평소 '나댄다' 싶을 정도로 분방한 인물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이리저리 눈치보고 다닌데 비해 이덕형은 평소에는 온화했으나 원칙에 충실하여 서슴없이 직언을 했다. 대표적인 것이 공신첩 사양으로 임진왜란 직후 선조에 의해 공신 직첩이 여기저기 남발되자 자신에게 주어진 공신 직첩(호성 공신, 선무 공신 모두에 추천되었다)을 부끄러워서 못 받겠다고 고사했다. 보다 정확히는 호성 공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로 모시고 피난한 공을 치하한 것인데 이덕형은 다른 일도 아니고 일본 및 명나라와의 외교 교섭 문제 때문에 선조의 곁을 떠나 있었던 시간이 길었다. 이 때문에 본인은 임금을 충분히 모시지 못했다고 끝까지 공신 책봉을 사양한 것. 한편으로 보면 이덕형 같이 진짜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고사한다는 것 자체가 강한 어필인 셈. 이항복 역시 같은 이유로 공신직을 사양했으나 선조의 눈물어린 호소[16]와 장인이자 선무 공신이 된 권율 등과의 관계 때문에 1등 공신 책봉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이 공신 책봉과 관련하여 논하기를 이항복은 합당하고 이덕형은 분통하고 류영경은 비루하다 하였다.
- 북인을 이끌던 이산해의 사위이자 이후 북인이 갈라져 생긴 대북의 영수 이이첨이 그의 10촌 형제임에도 그는 남인으로 남았으나 당색이 강하지는 않았다. 당장 그의 절친 이항복이 분류하면 서인이기도 했고.
- 재치가 부족하고 사려가 지나쳐 이런저런 일로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샀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명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일이 있었던 모양으로, 이런 경우에는 주로 이항복이 나서서 해명해주고는 했다. 일화 중에 하나로 그가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접대할 때 그가 이산해의 사위란 것을 알고 "같은 이씨끼리 혼인하다니 금수만도 못한 자"[17]라 여겨 박대할 때 해명하지 못하고 앓고 있었다. 이를 본 이항복이 이여송에게 "원래 이덕형은 김씨 성이었는데 재주가 뛰어나 임금이 국성인 이씨 성을 하사하여 이덕형이 되었다"고 적당히 둘러대서 무마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이여송은 국성을 하사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를 오해하여 박대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후 이덕형에게 예를 갖추어 대했다.
- 다른 야사로 첩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후 복구 등으로 자택에서 출퇴근하기 곤란할 정도로 바빠지자 궁 근처의 집에 첩을 데려다 놓고 음식을 차리도록 했다. 하루는 몹시 더운 날 이덕형이 첩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덕형이 미처 부탁도 하기 전에 첩이 음료수인 제호탕을 내왔다. 그 모습을 본 이덕형이 "더이상 첩으로 두지 않을 테니 본가로 돌아가시오."라며 쫓아냈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첩은 이항복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이항복도 평소 이덕형이 그 첩을 아꼈던 것을 알고 있어서 의아해하며 이덕형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이덕형은 "그녀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운 날 미처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제호탕을 내온 것은 참으로 총명하고 사랑받을만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시국이 어려운 때에 재상인 내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가는 나라 일을 그르칠 것이라 여겨 단호하게 내쫓은 것이다."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 서인 강경파인 이귀와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야사하고 다르게 이덕형의 죽마고우는 이항복이 아니라 이귀였다. 궁핍하게 살고 있는 이귀를 위해 매번 봉록을 쪼개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귀는 <한음언행록>에서 자신이 병에 걸려 죽어 갈때 이덕형이 정성껏 돌봐주어 살려주었으며, 자신이 이덕형의 장인 이산해를 심하게 비방하였음에도 딴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며 남과 타협할 줄을 몰랐던 자신을 끝까지 정성으로 대해 주었다며 이덕형을 그리워 하였다.
4. 대중매체
5. 관련 문서
[1] 인조반정 이후 익사공신, 형난공신 삭제로 인한 삭탈.[2] 좌의정공파(左議政公派)[3] 이 집안은 조선 초, 중기 최고 권력 가문의 하나였지만 연산군 때 멸문지화라 부를 정도로 크게 타격을 입는다. 자세한 것은 이극돈 및 무오사화와 이이첨 항목을 확인. 한창 때는 성종이 "아들을 낳는다면 광주 이씨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할 것이오."라고 할 정도로 인재들이 많았다. 좌의정공파(左議政公派)[4]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고 기억력이 매우 비상했다고 전해진다. 후술할 류희서의 부친. 활을 쏘던 어떤 무인에게 "그 화살통이 마음에 드니 나에게 줄 수 없겠는가?"라고 청했다가, 그 무인에게 "화살통 하나로 대감과 소인의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라는 말로 거절당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그 무인은 뒷날 조선을 구한다.[5] 경진(庚辰) 3월 18일 별시방(別試榜) 을과 1위로 전체 27명 중 2위를 기록했다(갑과 1명, 을과 7명, 병과 19명). 당시 기본적인 과거 합격자는 등급을 갑과, 을과, 병과로 나뉘어 갑과를 3명, 을과를 7명, 병과를 23명으로 총 33명을 뽑았다. 물론 그 사이에서도 등수를 나눠 벼슬을 다르게 하였다. 그러나 별시는 기본적인 정기 과거 시험이 아니라서 왕이 원할 때 치렀고 합격자 인원은 당시 관리 자리가 부족할 때 뽑는 시험이다 보니 그 부족한 만큼 유동적으로 하여 보통 33명보다 많이 적었다. 그러니 실제로는 합격자 수가 더 적어 더 치열했다.[6] 묘지명에도 이항복과 함께 이이의 추천을 받았던 이야기가 나온다.[7] 임해군이 이덕형의 외사촌이자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었다는 도승지 류희서를 살해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덕형은 임해군에게 은혜를 베풀 것을 주장했다. 대인배 인증. 하지만 임해군은 어차피 사형당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사형시키려는 이유가 좀 억지여서 그렇지.[8] 계축옥사에 영창대군을 끌어들인 건 누가 봐도 어거지였지만 일단 역모에 말려든 이상 처벌 자체를 막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 시기의 광해군은 역모 사건이면 거의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옥사를 무한정 확장시켜 나갔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덕형은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은 국왕이 법을 어기는 행위"라며 처형에 반대하고 은혜를 베풀 것을 주장하였다. 사실 이덕형의 주장은 맞는 말이긴 했다.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아무리 역적이라도 영창대군처럼 어리면 노비형이 최고형이었다. 10살도 안된 아동이 반역의 수괴가 되는건 교육이 아무리 빠른 국가에서도 불가능하고 인정받지 못하기에 막장국가 조차도 법적으로도 영창대군의 나이면 직접적인 사형선고와 집행까지 하는 경우는 어지간해선 없다. 이덕형의 성품이 강직하기에 어린 영창대군을 구명하려고 했던 것이다.[9] 조선시대 당시에는 이덕형의 본관인 광주 인근인 양근군이었지만,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해당한다. 조안면 송촌리에 이덕형이 말년을 보낸 별장 터가 유적지로 남아있다.[10] "이제 곧 폐모론이 일어날 텐데, 그때 반대하다가 죽음을 맞이할 신하가 하나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나"[11] 居首. 수위. 전체 수석인지는 불명.[12] 第三. 3등. 갑과, 을과, 병과처럼 1등, 2등, 3등 중 3등이며 전체 순위는 불명.[13] 병과 4위.[14] 을과 1위.[15] 그 때문인지 박수동 화백의 만화 <오성과 한음>에서도 오성은 키가 작고 잔꾀에 능한 제리 스타일로 나오는데 한음은 키가 약간 크고 당하는 역할을 많이 맡는 멀대 스타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최후의 일격은 한음이 주로 먹인다.[1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가 이순신을 비롯한 장수들에게는 1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 없다고 깠다.[17] 당연히 이덕형과 이산해의 집안은 본관이 달라서 동성동본 금혼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본관이라는 개념이 없는 중국의 장군으로서는 조선의 관례를 모르니 오해할 수밖에 없다.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라서 동래 부사 송상현의 첩은 이씨라는 이유로 조선 왕족으로 오인받았다. 이덕형의 부인인 한산 이씨는 임진왜란 때 피난을 떠나다가 일본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안타깝게도 이 말은 피난민 무리 사이에서 떠돈 헛소문이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그녀에게 정려를 내렸으며 이덕형은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후 본처를 두지 않은 것은 한산 이씨를 유일한 본처로 여김으로 한산 이씨에 대한 각별한 마음과 도리와 예우를 지킨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