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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71717><colcolor=#fff> 트렌트 레즈너 Trent Reznor | |||
본명 | 마이클 트렌트 레즈너[1] Michael Trent Reznor | ||
출생 | 1965년 5월 17일 ([age(1965-05-17)]세) | ||
펜실베이니아 주 뉴캐슬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프로듀서 | ||
소속 그룹 | 나인 인치 네일스 (1988년~) 하우 투 디스트로이 에인절스 (2009년~) | ||
서명 | |||
링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000,#dd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771717><colcolor=#fff> 학력 | 앨러게니 대학교(Allegheny College) (컴퓨터 공학 / 중퇴) | |
배우자 | 마리퀸 맨디그 레즈너 (2009년 결혼)[2] | ||
자녀 | 5명[3] | ||
신장 | 170cm | ||
민족 | 독일계 미국인, 아일랜드계 미국인 | ||
종교 | 무종교(유신론)[4][5] | ||
활동 기간 | 1982년 – 현재 | ||
장르 | 인더스트리얼, 인더스트리얼 락, 인더스트리얼 메탈, 앰비언트, 신스팝 | ||
사용 악기 | 보컬, 기타, 베이스, 피아노, 색소폰, 신디사이저, 드럼머신 | ||
데뷔 | 1988년, 《Purest Feeling》 | ||
대표작 | <소셜 네트워크>, <소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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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영화 음악 작곡가, 프로듀서. 록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의 창립자이자 상징이다.
1988년 나인 인치 네일스를 결성하고 수십 년이 지난 현재에도 꾸준히 높은 퀄리티의 음악을 창작해내는 음악가이며 지금도 많은 음악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아티스트이다. 또한 아카데미상, 그래미상[6], 에미상, 골든글로브상, 영국 아카데미상을 모두 수상한 아티스트다.[7]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마이클 트렌트 레즈너(Michael Trent Reznor)는 1965년 5월 17일 펜실베이니아주 뉴캐슬(New Castle)에서 낸시 루(Nancy Lou)와 마이클 레즈너(Michael Reznor)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계[8]이자 아일랜드계이며 상업 미술가였고, 고조할아버지는 냉난방 기기 전문 기업 레즈너 컴퍼니의 창립자인 조지 레즈너(George Reznor)이다. 링크 1링크 2 다만 고조할아버지의 회사는 1963년에 매각되어 트렌트 레즈너와는 무관하다. 링크레즈너는 펜실베이니아주 머서(Mercer)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0대였을 때 결혼하여 레즈너를 낳은 부모님이 레즈너가 5살 때 이혼을 하면서, 레즈너는 외조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고, 여동생인 테라 레즈너[9](Tera Reznor)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래도 부모님이 가까운 곳에 거주했기 때문에 자주 왕래는 했다고 한다.
레즈너는 5살 무렵에 외할머니의 권유로 클래식 피아노 교육을 받게 된다. 본인도 이를 좋아했고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외할아버지인 빌 클락(Bill Clark)은 1995년 인터뷰에서 "레즈너는 어릴 적부터 음악이 일상인 아이였고, 재능을 타고난 아이였다."고 회상했으며, 어린 시절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리타 베글린(Rita Beglin)은 "레즈너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면, 흡사 Harry Connick, Jr.를 떠올리게 했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음악에 타고난 재능을 보인 아이였다.
아버지는 그를 위해 월리처 전자 피아노를 사 주었는데, 그것이 레즈너가 다뤄 본 최초의 전자 악기였다. 이후 조부모가 무그 프로디지를 선물했는데,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한다.링크
또한, SF 장르를 좋아해서 TV 드라마 600만불의 사나이의 팬이었다고 한다. 소머즈가 죽었을 때 슬픔에 빠졌다고. 링크
한편, 레즈너는 펜실베니아에서의 숨 막힐 듯한 삶이 외부 세계로부터 격리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고 언급했었다. 1994년 9월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음악 산업에 뛰어든 계기에 대해 말했다.
"시골을 탈출해서 새로운 세계로 나가고 싶던 욕망을 제외하면, 솔직히 왜 이 일을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내 고향이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었지만, 그냥 옥수수 밭 뿐이었다. 내 인생 경험은 영화 감상, TV 시청, 독서, 잡지를 보는 것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매일 TV를 보는 것으로 문화를 접하게 되면, TV에서 나오는 각종 멋진 장소, 흥미로운 곳, 멋있는 직업과 커리어를 가진 사람들의 이미지에 휩싸이게 된다. 그 어느 것도 내가 있었던 곳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10]
다만, 이 인터뷰가 나간 직후 자신의 발언이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전달되어 곤혹스러워했다고 한다. 저 당시 기사들을 보면 이혼 가정, 조손가정 출신임이 강조되어 있었는데, 자신의 부모님이 자식을 비참한 환경에 빠트린 막장부모로 비칠까 우려했는지, 부모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시골이라 지루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런 환경이었기에 음악에 대한 관심이 왕성해졌다고.
레즈너는 Mercer Area Junior / Senior High School에서 테너 색소폰과 튜바를 배웠다. 그리고 재즈와 마칭 밴드의 멤버였다. 이 시기에 로컬 밴드 Option 30에 가입하여 일주일에 세 번 공연을 하곤 했다. 머서 고등학교의 전 밴드 감독이자 훗날 이 학교의 교장이 된 Hendley Hoge는 레즈너를 매우 긍정적이고 사교적인 아이로 기억했다. 출처: <People> 1995년 2월 6일자, "The Music of Rage"
또한 레즈너는 고등학교 시절 연극에 참여하여 직접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유다 역할을 연기했으며, 급우들로부터 "Best in Drama"라는 투표를 받기도 했다. 출처 사실 음악을 하기 전에 배우를 할까하는 생각도 했었다고... 198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인근의 앨러게니 대학교(Allegheny College)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게 된다.
참고로 앨러게니 대학교는 1815년에 설립되었으며, 제25대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를 비롯해 정치인을 다수 배출하기도 한 유서 깊은 대학이다. 링크 인터뷰에서는 본인이 겸손하게 발언하여 대단치 않은 대학으로 오해하기 쉽지만[11], 인지도가 낮을 뿐 결코 지잡대가 아니다.
대학 시절, 전공 공부와 음악 활동을 병행했고, 연애도 했다. 훗날 애틀랜틱 레코드의 A&R 직원으로 근무했던 당시 여친의 회상에 따르면, 트윙키에 초를 꽂아 생일축하 케이크를 만들어 주는 사랑스러운 남친이었고,[12] 아버지의 차로 드라이브를 시켜주기도 했다고 한다. 링크
다만, 음악과 학업을 병행하는 것이 너무나 벅차서 결국 그는 대학을 중퇴한다.
2.2. 음악계 진출 이후
1년 후, 레즈너는 대학교를 중퇴하고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로 이동해 음악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클리블랜드에서의 첫번째 밴드는 커버 밴드 Urge였다. 1985년, The Innocent라는 밴드의 키보디스트로 합류를 하고 Livin' In the Street 이라는 앨범을 발표했지만, 3개월 후에 밴드를 탈퇴했다. 1986년 로컬 밴드 Exotic Birds에 들어갔고 영화 Light of Days(1987)에서 The Problems라는 가상의 밴드로 출연했었다. 또한 이 시기에 신스팝 밴드 Slam Bamboo의 키보디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이후 레즈너는 Cleveland의 라이트 트랙 스튜디오(Right Track Studio)에서 보조 엔지니어 및 잡역부로 일했다. 스튜디오 주인 바트 코스터(Bart Koster)는 레즈너에 대해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열중했어요. 바닥에 왁스칠 한 번 하는 것도 끝내주게 했었죠"라고 회상했다. 화장실 변기에 붙어있는 음모를 하나하나 떼내는 등의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신임을 쌓아간 레즈너는 코스터에게 스튜디오를 쓰지 않는 시간 동안 자신의 노래 데모를 무료로 녹음 할 수 있겠냐는 요청했고, 코스터는 흔쾌히 승낙했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첫 데모를 녹음하는 동안, 레즈너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밴드원을 찾을 수 없었다. 방법을 궁리 하던 레즈너는 프린스에게 영감을 받아 드럼을 제외한 모든 악기를 직접 연주하기로 결심했다.[13] 이렇게 완성된 데모를 레즈너는 여러 레이블에 돌렸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레이블 중 TVT 레코드와 계약하게 된다. 데모 곡 중 9곡은 비공식적으로 1988년 《Purest Feeling》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으며, 이들 곡은 Nine Inch Nails라는 이름으로 발매된 최초의 공식 릴리즈인 《Pretty Hate Machine》에 많은 부분이 수정된 형태로 재수록된다.
당시 레즈너는 저예산으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느라 풍선에 비디오 카메라를 메달았는데, 이 풍선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고, 이를 발견한 한 농부가 조폭에 살해당한 사람의 비디오로 의심해 경찰에 신고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FBI까지 등판해 사건을 조사했다고 한다.링크
2.3. 나인 인치 네일스
자세한 내용은 나인 인치 네일스 문서 참고하십시오.2.4. How To Destroy Angels
2009년에 Mariqueen Maandig와 결혼식을 올린 레즈너는 투어에 지쳤다면서 나인 인치 네일스를 그만 둔다.이후 신혼 생활을 즐기던 레즈너는
2010년에 첫 EP가 나왔다. 수록곡인 'The Space In Between'의 뮤비는 당시 로스의 매부였던 루퍼스 샌더스 감독이 촬영했는데, 여기서도 레즈너와 Mariqueen은 부부로 출연하나 둘 다 살해당하는 역할이다(...).
2.5. 영화 음악
올리버 스톤의 내츄럴 본 킬러스(1994)[14]와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1997)의 사운드트랙을 프로듀스하기도 했다. 평단과 팬들의 반응은 좋은 편. 로스트 하이웨이에 수록된 'The Perfect Drug'는 자신이 작곡한 곡들 중에서 제일 팝적인 코러스가 등장하는 곡이라고 자평한 바 있다. 여담으로 트렌트 레즈너는 시간에 쫒겨 급하게 쓴 곡이란 이유로 이 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데다 결말 처리의 문제로 그동안 라이브로 단 한 번도 이 곡을 공연한 적이 없었으나, 2018년 9월 18일 북미투어 공연에서 최초로 공연했다.레즈너는 본인 명의로 2010년에 NIN의 프로듀서인 애티커스 로스와 함께 데이비드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 사운드트랙을 작업했다. 라디오헤드의 Creep 합창 버전을 사용했던 트레일러와는 정 반대되는, 본인의 직전 앨범 Ghosts I-IV와 비슷한 스타일의 사운드트랙을 만들어 평단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심지어 LP판으로까지 판매하며 상업적으로도 크게 밀었고, 83회 아카데미 사운드트랙 상을 수상했으며 Best Original Score 부문은 아카데미와 68회 골든글러브(2011년), 모두 수상했다.
아카데미 사운드트랙상 수상 당시 모습, 카메리가 관객석에 있는 여성 둘을 비춰 주는데, 트렌트 레즈너의 아내인 마리퀸 만디그와 애티커스 로스의 아내인 Claudia Sarne이다. 둘 다 깨알같이 아내를 언급한다.
데이비드 핀처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캐런 오가 보컬을 맡은 레드 제플린의 Immigrant Song 커버에 맞춘 트레일러부터 난리가 났고, 《소셜 네트워크》에서 탄력을 받아, 그리고 팬 및 평단의 압도적인 반응을 의식했는지, 영화 러닝타임보다 더 긴 3CD 구성으로 음반을 발매했다. 사운드트랙 평도 아주 좋고 영화 평도 덩달아 좋은 것까진 좋았으나, 아카데미 후보에도 올라가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2년 그래미 어워즈 BEST SCORE SOUNDTRACK FOR VISUAL MEDIA 부문에서 수상을 하긴 했다. <나를 찾아줘>의 사운드트랙도 맡았는데, 가수가 가수이니만큼 일반적인 리듬이 아닌 특유의 느낌을 준다.
2020년에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로 인해 결국 해를 넘겨 2021년에 개봉된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작품 소울에서도 애티커스 로스와 함께 영화 음악을 맡았다. 레즈너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가족 영화의 음악을 맡은 셈. 소울의 음악도 극찬을 받았으며, 2021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유력한 수상 후보로 꼽혔다. 또한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가 작곡한 맹크 역시 음악상 후보에 올라 음악상 부문에 두 개에 후보를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레즈너는 "초현실적이다."라고 말하며 입장을 표했다.# 또한 당시 빌보드 인터뷰에서 소셜 네트워크로 아카데미 영화 음악상을 받았을 때를 회고했는데, 너무나 떨려서 제대로 일어설 수는 있을지 걱정했다고 한다. 심지어 니콜 키드먼 키가 25피트로 보일 정도였다고(...)
그리고 결국 2021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소울로 음악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그는 아카데미 영화 음악상을 두 번 받는 기록을 세웠다.
3. 참여 작품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모든 음악은 애티커스 로스와 함께 공동 작곡했다.3.1. 영화
연도 | 제목 | 감독 | 비고 |
<colbgcolor=#fff,#1f2023> 1994년 | <colbgcolor=#fff,#1f2023> 올리버 스톤의 킬러 Natural Born Killers | <colbgcolor=#fff,#1f2023> 올리버 스톤 | <colbgcolor=#fff,#1f2023> 프로듀싱 및 세 곡 작곡 |
1997년 | 로스트 하이웨이 Lost Highway | 데이비드 린치 | 프로듀싱 및 세 곡 작곡 |
2010년 | 소셜 네트워크 The Social Network | 데이비드 핀처 |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 골든글로브 음악상 수상 |
2011년 |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 | 그래미 최우수 스코어 사운드트랙 앨범 수상 영국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 | |
2013년 | 사운드 시티 Sound City | 데이브 그롤 | 데이브 그롤, 조시 호미와 함께 한 곡(Mantra)만 공동 작곡 |
2014년 | 나를 찾아줘 Gone Girl | 데이비드 핀처 | 골든글로브 음악상 후보 그래미 최우수 스코어 사운드트랙 앨범 후보 |
2016년 | 비포 더 플러드 Before the Flood | 피셔 스티븐스 | 로스, 구스타보 산타올랄라, 모과이와 함께 공동 작곡 |
패트리어트 데이 Patriots Day | 피터 버그 | ||
2018년 | 미드 90 Mid90s | 조나 힐 | 선곡도 로스와 함께 담당 |
버드 박스 Bird Box | 수잔느 비에르 | ||
2019년 | 웨이브스 Waves | 트레이 에드워드 슐츠 | |
2020년 | 맹크 Mank | 데이비드 핀처 |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 골든글로브 음악상 후보 영국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 |
소울 Soul | 피트 닥터 | 재즈 파트는 존 바티스트가 작곡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 골든글로브 음악상 수상 영국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 | |
2021년 | 22 vs. 지구 22 vs. Earth | 케빈 놀팅 | |
2022년 | 본즈 앤 올 Bones & All | 루카 구아다니노 | |
빛의 시네마 Empire Of Light | 샘 멘데스 | ||
2023년 | 더 킬러 The Killer | 데이비드 핀처 | |
닌자터틀: 뮤턴트 대소동 Teenage Mutant Ninja Turtles: Mutant Mayhem | 제프 로웨 | ||
2024년 | 챌린저스 Challengers | 루카 구아다니노 | 골든글로브 음악상 후보 |
퀴어 Queer | |||
2025년 | 트론: 아레스 Tron: Ares | 요아힘 뢰닝 | 나인 인치 네일스 명의로 참여 |
미정 | 애프터 더 헌트 After the Hunt | 루카 구아다니노 |
3.2. TV
연도 | 제목 | 비고 |
<colbgcolor=#fff,#1f2023> 2017년 | <colbgcolor=#fff,#1f2023> 베트남 전쟁 The Vietnam War | <colbgcolor=#fff,#1f2023> |
2018년 | 제4권력 The Fourth Estate | 메인 타이틀만 작곡 |
2019년 | 왓치맨 Watchmen | 에미상 미니시리즈, 영화, 스페셜 부문 작곡상 수상 |
3.3. 게임
연도 | 제목 | 비고 |
<colbgcolor=#fff,#1f2023> 1996년 | <colbgcolor=#fff,#1f2023> 퀘이크 Quake | <colbgcolor=#fff,#1f2023> 단독 작곡 나인 인치 네일스 명의로 작곡 |
2012년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2 Call of Duty: Black Ops II | 메인 타이틀만 작곡 |
3.4. 외부 프로듀스
90년대 중반 마릴린 맨슨 앨범에서 일부 곡을 프로듀싱하고 작곡에도 참여한 적은 있으나, 앨범 전체의 프로듀스를 맡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연도 | 아티스트 | 앨범명 | 비고 |
<colbgcolor=#fff,#1f2023> 2007년 | <colbgcolor=#fff,#1f2023> Saul Williams | <colbgcolor=#fff,#1f2023> The Inevitable Rise and Liberation of NiggyTardust! | <colbgcolor=#fff,#1f2023> 트렌트 레즈너 |
2021년 | 할시 | If I Can't Have Love, I Want Power | 트렌트 레즈너, 애티커스 로스 |
2023년 | Fever Ray [15] | Radical Romantics[16] | 애티커스 로스와 함께 앨범에서 두 곡 프로듀스. 타이틀 곡인 'Even It Out'은[17] Fever Ray와 Johannes Berglund, 8번 트랙은 Fever Ray와 프로듀스했다. |
4. 여담
- 코트니 러브에게 스토킹을 당하여 스튜디오를 게이 포르노 사진으로 도배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은 레즈너가 싫어하는 스튜디오 남직원들을 쫒아내기 위함이었다 한다. 어떤 남직원이 호모포비아적인 발언을 하자 당황하라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한다. 1994년 롤링스톤 인터뷰에 따르면 1992년 EP 앨범 <Broken> 녹음 당시 에피소드라고 나와 있다.
- 이와 관련해 언급되는 의외의 인물이 토리 에이모스인데, 레즈너가 The Downward Spiral 앨범을 녹음했던 Le Pig 스튜디오에서 토리의 곡에 백 보컬로 참여해 레코딩을 했다. 그 곡이 'Past Mission'[18]이다. 토리 에이모스와 트렌트 레즈너가 평소 서로를 음악적으로 리스펙했기 때문에 성사된 콜라보레이션이었고, 이 시기에 이들은 서로의 곡에 가사를 인용하는 식으로 리스펙을 했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는 둘이 사귀는 사이였으나 코트니가 훼방을 놓았다는 식의 루머가 있었다. 다만, 레즈너와 토리는 어디까지나 음악적인 우정일 뿐이었다고 선을 그었다. 현재는 각자 가정이 있는 관계로 당연히 언급을 자제하는 분위기이나, 토리 에이모스가 2014년에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공연에서 나인 인치 네일스의 'Something I Can Never Have'를 연주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음악적으로는 여전히 리스펙하는 듯하다. 링크
- 젊은 시절, 미남으로도 유명했다. 90년대 당시 기사들을 보면 키아누 리브스와 종종 비교되기도 했는데, 저 당시는 꽃미남 스타일이었다.[19] 텀블러 등에서 80년대 말, 90년대 초반 이미지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시절에는 몸매가 슬림해서 딱 달라붙는 가죽 의상, 가터벨트, 긴 장갑, 망사 스타킹 등 어지간한 여성들도 소화하기 힘든 파격적인 복장까지 무난하게 소화했다(...).패션 변천사 팬아트
* 한편 이기 팝은 2020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시상식에서 연사로 나서, 젊은 시절 그의 모습에 대한 인상을 말한 바 있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을 듣고 관심이 생겨 찾아보니, 15세기 스페인에서 온 듯한 얼굴이었다면서, 조로를 연기해도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서 만약, 그가 옛날에 살았던 인물이면, 엘 그레코나 벨라스케스가 그린 초상화가 프라도 미술관에 걸려 있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링크 물론, 음악에 대한 발언도 많이 했지만, 이기 팝이 보기에도 레즈너의 외모가 깊은 인상을 남긴 듯하다.
- 헬스 매니아라고 한다.[20] 유일하게 갖고 있는 취미가 게임과 식스팩 만들기라고.
- 어린 시절부터 고양이털, 옥수수[21], 돼지풀, 잔디, 먼지, 꽃가루 알레르기 등 온갖 알레르기를 달고 살아서 귓병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저 기사만 하더라도 레즈너가 투어 도중 알레르기 때문에 온몸에 발진이 났을 때 기자가 호텔 방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해서 작성한 것이었다.
- 유명인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매스컴에 의해 자신의 이미지가 왜곡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링크 앞서 언급된 1994년 롤링스톤 인터뷰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한 것도 그렇고,[22] 자신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괴기스럽게 알려진다거나 반대로,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가상의 캐릭터를 연기한 것으로 해석되는 것도 원치 않는 듯하다.
-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로 토킹 헤즈의 Remain in Light을 꼽았다.#
- 데이비드 보위와 굉장히 친했으며, 스승과 제자같은 관계였다. 트렌트는 보위를 엄청나게 존경했다. 보위 또한 트렌트의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 전폭적으로 NIN을 지원해줬다.
1995년에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 투어를 다니던 시절,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중독에 시달리던 레즈너에게 잔소리를 하는 대신 "죽음이나 절망으로 끝날 필요 없이 더 나은 방법이 있다(“You know, there is a better way here, and it doesn’t have to end in despair or in death, in the bottom.”)"라고 조언했다 한다. 그래서 투어가 끝난 후에 재활 치료를 받았다.링크
1997년엔 보위의 'I'm Afraid of Americans'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스토커로 열연했다. 이 뮤비를 촬영할 당시, 존경하는 선배의 뮤비에 출연한 것은 영광이었으나, 중독에 빠졌던 자신을 떠올리며 부끄러움도 느꼈다고 했다.[23] 이후 중독이 재발하여 앞서 언급된 2000년도 펜타닐 흡입 사건이 터졌지만, 중독을 완전히 극복한 뒤 2004년에 투어 중인 보위를 백스테이지에서 만나 쑥스럽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레즈너는 "제가 그때 러그에 토한 놈입니다"라고 말을 꺼낸 후 "그동안 깨끗했습니다"라고 말을 이어가자 보위는 "네가 해낼 줄 알았다"라면서 따뜻하게 포옹해 주었다고 한다.링크
1997년엔 보위의 'I'm Afraid of Americans'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스토커로 열연했다. 이 뮤비를 촬영할 당시, 존경하는 선배의 뮤비에 출연한 것은 영광이었으나, 중독에 빠졌던 자신을 떠올리며 부끄러움도 느꼈다고 했다.[23] 이후 중독이 재발하여 앞서 언급된 2000년도 펜타닐 흡입 사건이 터졌지만, 중독을 완전히 극복한 뒤 2004년에 투어 중인 보위를 백스테이지에서 만나 쑥스럽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레즈너는 "제가 그때 러그에 토한 놈입니다"라고 말을 꺼낸 후 "그동안 깨끗했습니다"라고 말을 이어가자 보위는 "네가 해낼 줄 알았다"라면서 따뜻하게 포옹해 주었다고 한다.링크
- 2006년, 41번째 생일날에 자신의 모교인 고등학교에 금의환향했다는 기사가 지역 언론에 실렸다. 링크 이날 레즈너는 머서 고등학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모교의 선배로서 장학금도 기부한다고. 2011년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음악상을 받았을 때는 그 지역이 축제 분위기였다 한다.
- 5월 17일생으로 퀸즈 오브 더 스톤 에이지의 조시 호미와 생일이 같다. 레즈너가 8살 형이다.
- 정치적으로는 도널드 트럼프를 극혐하는 진보 성향[24]이지만, 버락 오바마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원래 버락 오바마의 당선을 환영했던 입장이었지만, 2013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NSA 기밀자료 폭로사건으로 망명한 에드워드 스노든과 경제를 파탄시킨 금융 범죄자들을 언급하며,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아무도 이런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편리할 때만 목소리를 높인다며 <Year Zero>가 실현됐다고 강력 비판했다. 참고로 <Year Zero>는 미국인들의 정치 무관심으로 인한 디스토피아를 주제로 한 나인 인치 네일스의 앨범이다.링크
- 2021년 마릴린 맨슨의 성추문이 터지자 그를 비판하는 성명문을 발표했다.# 맨슨이 90년대에 발간한 자서전에 그와 레즈너가 함께 여성에게 약을 먹인 후 겁탈했다고 집필한 내용이 재조명돼서 그런 듯 하다.# 레즈너는 맨슨의 회고록의 한 구절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 알려졌을 때 아주 화가 났다고 주장했다. 또한 25년 전에 마릴린 맨슨과 관계를 끊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25][26]
- 주로 트렌트 레즈너를 마릴린 맨슨과 비교할 때 "맨슨은 싸이코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점잖고 지적인 사람", "레즈너는 비교적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 진짜로 막나가는 또라이 같은 인물"이라는 인식이 꽤 있었다.[27]
그러나 정작 '지적인' 가사를 쓰며 사려깊은 사회 운동가/개혁가로서의 반전 이미지를 만들어온 마릴린 맨슨은 현재 각종 성폭행 혐의로 추락한 반면, 레즈너는 가족과 함께 안정적인 생활에 정착하며 2020년대를 기준으로 둘은 상이한 행보를 보인다. 또한 레즈너는 소셜 네트워크와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로 아카데미상을 수차례 수상하여 영화음악으로도 능력을 인정받은 작곡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팝으로도 영역을 넓혀 할시의 정규앨범을 프로듀싱하여 호평을 받는 등 다방면으로 성공을 거둔 거물이 되었다.[28]
사실 2000년대 중반부터 맨슨과 레즈너의 평가는 서서히 판도가 뒤바뀔 조짐이 있었는데,[29] 맨슨이 주변사람의 도움없이는 성공을 못했을 상이었으면서 맨슨 본인이 그 주변사람들을 홀대했다 하여 욕을 먹고 있는 것과 상이하게[30] 레즈너는 애초에 주변사람들의 도움 없이도 혼자 성공한 상이며 주변인에게 큰 피해를 끼친 사례도 없어서 인간관계에서 욕먹는 일은 레즈너가 현저히 적은 편이다.
- 마릴린 맨슨과 전 멤버들과의 법정 소송을 다룬 기사를 보면, 마릴린 맨슨 밴드의 전 멤버 중 하나인 데이지 버코위츠(본명: 스코트 푸츠키)가 맨슨과 레즈너를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있다. 데이지는 레즈너가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었으나 맨슨에게 집중했다("Reznor was friendly to everyone," Putesky says, "but his concern was Brian.")고 회고했는데, 비판은 맨슨 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기사엔 Antichrist Superstar 녹음 과정에서 레즈너가 데이지의 기타를 부순 유명한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31] 그래도 레즈너의 기행(?)은 사적인 장소에서만 이루어졌다. 공공장소 기물 파손을 했거나 주변 사람을 폭행하여 매체 가십란에 오르내리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맨슨은 일반인까지 건드려서 문제가 되었다. 일례로 맨슨은 2008년 이티피 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내한했을 당시 호텔 마운틴 스위트룸 기물 전반을 파손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제작 협력사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반면, 레즈너의 경우는 4번의 내한 동안 저런 괴담이 한 번도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신사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이 있다. 참고로 맨슨이 내한 당시 호텔에서 벌인 소동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맨슨 측이 바로 호텔 측에 변상을 했기 때문이다.[32]
- What.CD라는 비공개 음악 토렌트 사이트 회원이었다고 한다. What.CD 폐쇄 당시 기사로 알려진 적이 있다
4.1. 매체에서의 언급
국내 언론에서 트렌트 레즈너는 의외로 늦게 언급되었다. 그의 원맨 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의 전성기인 1994년 The Downward Spiral 때 언급된 것이 아니라, 1996년에 그래미 어워즈 기사로 언급되었는데, 메탈 부문 수상을 했다는 내용이 전부다.링크[33]다만 1994년에 국내 라디오에서 인더스트리얼이란 장르를 소개할 때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이 나온 적은 있으나, '이런 장르도 있다' 정도로 잠시 언급되었을 뿐이고, 저 당시 우리나라 록 마니아들 사이에선 얼터너티브 대표 주자인 너바나가 대세여서 완전히 묻혀 버렸다. 물론 너바나의 스타성이 워낙 강력하기도 했지만,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은 보수적인 록 마니아들의 관점에선 이단이었고, 당시 국내 록 마니아들은 본고장 록 마니아들보다 더욱 보수적이었던 탓으로 짐작된다.
의외로 영화팬들은 나인 인치 네일스나 트렌트 레즈너를 일반 대중들보다 훨씬 먼저 접했을 수 있다. 1996년에 국내 개봉한 영화 클루리스에서 나인 인치 네일스가 언급되는데, 비록 국내에서 크게 흥행한 영화는 아니었으나, 알리시아 실버스톤의 미모와 패션이 우리나라의 10대 소녀 타깃 잡지에서 화제가 된 바 있으므로 알리시아 실버스톤의 팬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았다. 영화에서 나인 인치 네일스는 4차원 날라리 남학생인 트래비스가 좋아하는 밴드로 언급된다. [34]
또한 1997년에는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를 통해서 언급되었다. 데이비드 린치는 비록 대중적이진 않지만, 영화광 사이에선 꽤 인지도가 높은 인물로 영화의 수록곡인 'The Perfet Drug'가 이 시기에 알려졌다. 그 덕분에 당시 MTV와 제휴한 우리나라 음악 방송 채널인 엠넷에서 이 곡의 뮤비를 방영한 적이 있다. 이때 우연히 레즈너의 비주얼을 접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언급량이 늘어난 것은 1999년 The Fragile 앨범 때부터인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테크노가 주목을 받자, 락과 테크노를 접목한 음악의 선구자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메이저급 일간지 기준으로 사진이 등장하는 기사도 이때가 처음이다. 그래서 국내 음악팬들에겐 이 시절 멀끔한 이미지가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었으며, 2000년대 초반 블로그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짤도 이 시절 짤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가 하필이면 마릴린 맨슨이 인기를 끌던 시기였고, 맨슨이 레즈너를 부정적으로 언급했던 탓에, 상술했던 것과 같은 이미지가 박혔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레즈너가 영화 음악가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현재에는 애니메이션 소울의 OST를 맡은 사람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으며, 루리웹, 디시인사이드 같은 남초 커뮤니티에선 약물 중독을 헬스로 극복한 뮤지션이라 하여 존경과 부러움의 시선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여성 락 마니아들의 경우, 레즈너의 90년대 초중반 패션이 재조명되어 뜻밖에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1] 아버지와 퍼스트 네임(마이클)이 같아 가족들 사이에서 미들 네임인 트렌트로 불리게 되었고, 이 때문에 미들 네임인 트렌트를 퍼스트 네임처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2] 필리핀계 미국인으로, 무려 16살 연하다. 사이키델릭 록 인디밴드 West indan Girl의 보컬로 활동하던 시절 레즈너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고, 밴드를 탈퇴한다. 결혼 발표 당시 West indan Girl 홈페이지에 축하 메시지가 올라온 것으로 보아 탈퇴는 원만하게 이뤄진 듯. 링크 이후, 레즈너와 함께 프로젝트 밴드 How To Destroy Angels의 보컬로 참여하는 중이다.[3] 2010년 10월에 첫아들 Lazarus Echo Reznor, 2011년 12월에 둘째 아들 Balthazar Venn Reznor, 2015년에 출생한 셋째 아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2016년에 딸 Nova Lux Reznor, 2020년 초에 5번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성별과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4] 종교를 가지지만 않았을 뿐 신의 존재는 믿는다고 밝혔다. 인생을 살면서 겪은 어두운 시기가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물리학과 생물학을 넘어선 것이라고 한다. 링크[5] 2집 The Downward Spiral의 Heresy에서는 앨범 내의 화자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비판하기도 했다.[6] 두 번은 나인 인치 네일스로서 수상을 했고, 세 번째 수상은 현재 같이 활동하고 있는 애티커스 로스와 함께 영화 음악으로 수상을 했다.[7] 토니상까지 수상할 경우 EGOT을 달성하게 된다.[8] 본래 Reznor는 독일계 성씨이다. 링크 서양권에서도 흔하지 않은 성씨라고 한다.[9] 트렌트 레즈너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어딘가 모르게 낯설지만, 데이빗 보위와 만나게 해주거나 자신의 라이브 공연에 초대하는 등 여동생을 챙기는 것을 보면 나름 오빠 노릇을 톡톡히 하는 듯하다.[10] 1995년 잡지 <Details>와의 인터뷰에서 1994년 당시 롤링스톤과 가진 인터뷰는 비참한 어린 시절의 느낌을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여담으로 <Details>와의 인터뷰는 1994년도 롤링스톤 인터뷰에 나간 내용을 정정하는 내용이 많다. 일례로 "but essentially Nine Inch Nails are theater. What we do is closer to Alice Cooper than Pearl Jam.(본질적으로 나인 인치 네일스는 연극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펄 잼보다 앨리스 쿠퍼와 더 가까워요.)"라는 발언에 대해서는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불쾌해했다. 2013년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에선 이와 관련해 키스의 진 시몬스나 앨리스 쿠퍼와는 달리 캐릭터를 위해 곡을 쓰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만화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에 나오는 콘셉트에 좀 더 가깝다. 본인 음악이 할로윈 코스프레인 것처럼 오해받을 상황이었으니 불쾌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11] 본인의 전공인 컴퓨터 공학으로 유명한 대학은 따로 있으므로, 대학 부심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12] 우리나라로 치면 초코파이에 생일 초를 꽂은 것과 같다.[13] 이후 레즈너는 가끔 다른 뮤지션, 드러머 및 관련 전문가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밴드 스튜디오 레코딩에서는 이러한 규칙을 고수하였다.[14] 국내 개봉 제목은 올리버 스톤의 킬러[15] 스웨덴의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인 Karin Dreijer의 예명이다.[16] 이 앨범은 Karin Dreijer 본인이 모든 곡을 프로듀스했으며, 몇몇 곡은 나인 인치 네일스를 비롯한 외부 프로듀서가 참여했다.[17] 뮤비가 후방 주의. 나인 인치 네일스가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18] 토리 에이모스가 성폭력 피해자가 된 후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예수를 만난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와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가사에 등장하는 장미향은 트라우마를 극복한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링크[19] 참고로 아래 사진은 1992년도 모습이다.[20] 헬스 매니아가 된 계기는 코카인과 알코올 중독 때문이라고 한다. 2000년에 헤로인을 코카인으로 착각하고 흡입했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링크 다만, 기사에도 나오듯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차이나 화이트 헤로인으로 불리는 펜타닐 계통 마약을 코카인으로 착각하고 흡입한 것인데, 펜타닐 항목에도 나오듯이 기존의 헤로인보다 훨씬 강력하며, 치사량은 코카인의 500분의 1이다(...). 이후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고. The Downward Spiral 시절까지는 슬림한 몸매였으나 The Fragile을 거쳐 With Teeth에 이르러서는 근육질의 몸매를 소유하게 되었다.[21] 무비 촬영시 옥수수 녹말을 뒤집어썼다는 것으로 보아 옥수수 성분 자체가 아니라 옥수수 껍질 알레르기인 것으로 보인다. 복숭아 털 알레르기와 비슷한 케이스. 참고로, '옥수수 알레르기'로 검색해 보면, 집에서 옥수수를 삶았을 때 옥수수 껍질을 만져서 알레르기 증상이 나타났다는 체험담이 의외로 흔하다.[22] 레즈너가 언급하지도 않은 앨리스 쿠퍼나 펄 잼의 에디베더를 엮어 어그로를 끈 롤링 스톤 기사도 그렇지만, 저 당시 기사들을 보면 90년대 당시 얼터너티브 락커들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적용하여, 결손가정에서 자라난 사회부적응 문제아라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었으며, 이는 트렌트 레즈너뿐만 아니라 동시대 다른 뮤지션들 기사에서도 나타난 프레임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되었듯이 긍정적인 학생으로 기억하는 모교 은사들의 증언도 있다.[23] 그도 그럴 것이 가사에 '조니는 코카인을 빤다(Johnny wants to suck on a Coke)'는 구절이 있는데, 레즈너가 뮤비에서 연기한 게 바로 가사 속 미국인 조니다(...) 선배님 앞에서 디스 당하는 기분이었을 듯하다.링크[24] 자녀가 욕설을 배울까 봐, 트럼프가 나오는 뉴스 장면이 아이들 눈에 띄면 TV를 음소거 상태로 만든다고 한다.[25] 문제의 구절은 1995년에 맨슨이 Empyrean magazine과 인터뷰하면서 나온 말이며, 이것이 1998년에 출판된 회고록인 'The Long Hard Road Out of Hell'에 등장한 것인데, 책 속에 나온 편집자 주에 따르면, 당시 잡지 측이 정보를 얻기 위해 윤리적 절차를 어기고 인터뷰를 했다고 여겨서 잡지에는 인쇄되지 않은 내용이라 한다. 회고록 발매 당시에는 성폭행이 논란이 된 것이 아니라, 맨슨이 레즈너를 비난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레즈너 팬들은 책 발간 의도가 악의적이라 의심하기도 했다.[26] 2000년 9월 영국의 록 전문지 <커랭>과 인터뷰했을 때도 맨슨의 회고록을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 링크 여기서, 맨슨이 성폭행을 자백했는데, 왜 피해자는 고소를 안 하고 경찰은 수사를 안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나올 수 있는데, 놀랍게도 아마존에 올라온 독자 리뷰를 보면 생각보다 이상한 내용은 아니다라며 호평이 많다.링크, 위키피디아의 해당 문서에도 회고록이 당시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고 나와 있다. 당시 독자들은 이를 성폭행으로 생각하지 않고, 캐릭터를 연기하는 차원에서 나온 일종의 쇼맨십으로 생각한 듯하다. 또한 회고록을 보도한 매체에서도 책에 나온 내용이 과연 사실인지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한다. 한편 맨슨은 이 논란과 관련해 모든 일은 당사자와 합의해서 했다고 주장했다.[27] 후술할 맨슨의 소송 기사에도 이런 시각이 드러나 있다. 링크 2004년 기사인데, 기자는 레즈너를 맨슨을 미혹시킨 최면술사에 비유한다. 사실 맨슨의 무대 기행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평가에 대해 의아하게 느낄 수 있지만, 마릴린 맨슨이 라이브에서 저지르는 기행은 팬들 사이에서 '특이한 행동을 통한 날카로운 사회비판' 이라는 느낌으로 높게 평가받으며 맨슨이 쓴 가사 역시 전문 언론인 수준의 통찰력과 소설가 수준의 예술성 (...)을 가졌다는 식으로 찬양받는다.[28] 여담으로, 당시 레즈너는 먼저 가정을 이룬 사람으로서 임신한 할시에게 멘토 역할을 하는 따스한 인생 선배의 모습도 보였다. 링크[29] 존 5와의 불화를 시작으로 맨슨의 실제 성격이 상당히 히스테릭한 성격임이 드러났다. 존 5 역시 이를 직접 언급하면서 맨슨에 대해서 실력은 있으나 길게 함께 하기에는 부적절할 정도로 성격 차이가 났다고 맨슨을 평했다.[30] 맨슨은 라이브에서 과격한 퍼포먼스를 하면서 멤버들을 휘말리게 해서 피해를 끼치는 건 예사이며, 로열티 지급문제 등으로 탈퇴한 멤버들의 수 역시 많다. 존 5의 탈퇴를 기점으로 해서 맨슨의 대한 평가는 서서히 "싸이코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점잖고 지적인 사람"에서 "점잖고 지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싸이코같은 사람"으로 바뀌었다(...).[31] 레즈너가 마릴린 맨슨 2집인 Antichrist Superstar 작업 당시 프로듀서로 참여할 때, 데이지 버코위츠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기타를 치지 않자, 내가 하는 걸 잘 보라면서 데이지의 기타를 가져가 부쉈다. 참고로 Antichrist Superstar 앨범 녹음 당시 맨슨은 앨범의 주제에 걸맞은 감정 상태를 이끌어 낸다면서 의도적으로 자해를 하고 약물을 복용했고, 이는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으며, 기물 파손도 그 일환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진짜 문제는 저런 기행보다는 작업 과정에서 데이지의 의견이 존중받지 못한 것이었고, 결국 데이지는 그 사건 이후 마릴린 맨슨을 탈퇴했다. 본래 데이지는 밴드 초기에 작곡에 많은 부분을 기여했는데, 레즈너가 프로듀서였을 때는 데이지의 역할이 제약받은 것이다. 맨슨을 상대로 한 소송도 밴드 재직 당시 본인의 음악 기여도를 인정받겠다는 것이었고, 결국 승소했다. 여담으로 과거에는 영화 촬영 시 감독이 배우의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도발을 한다는 이야기가 흔했으니, Antichrist Superstar 앨범 작업 과정에서의 기행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런 점을 참작해도 당시 레즈너의 소통 불능에 대한 비판 의견이 많았다. 앞서 언급한 할시 앨범 작업 당시, 할시의 의도를 최대한 존중해 작업한 것과 비교하면 이후에는 많이 변한 듯 하다.[32] 레즈너는 한때 음악적 견해차로 인해 나인 인치 네일스 투어 멤버인 로버트 패트릭, 크리스 브레나와도 갈등이 있긴 했지만, 결국은 화해하고 2022년 9월 24일 클리블랜드에서 전현직 투어 멤버들이 완전체로 모이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33] 물론, 록 전문지에선 그보다 훨씬 일찍 언급되었을 터이지만, 아무래도 일반 대중들에겐 쉽게 손이 가지 않는 매체이다 보니, 음악인들만 아는 그사세 인물이었다.[34] 영화 결말에서 트래비스는 대마초 끊고 스케이드보드 선수로 재능을 발휘한다. 약 끊고 운동에 빠진 것부터가 레즈너와 똑같다. 다만 영화의 미국 개봉 시기는 1995년이므로 극중 시점은 레즈너가 The Downward Spiral을 발매하고 셀프 디스트럭트 투어를 다니던 시기인데 이 시기 레즈너는 대마도 아니고 무려 코카인을 빨았다. 픽션이지만 가수가 오히려 팬을 닮아간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