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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6:37:34

포석정

경주 포석정지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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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경주 포석정지
慶州 鮑石亭址
Poseokjeong Pavilion Site\, Gyeongju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 경북 경주시 배동 454-3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수량/면적 5\,234㎡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시대 통일신라시대
소유단체 경주시
관리단체 경주시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colbgcolor=#000>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colcolor=#fff> 국가·위치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경상북도 경주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976
등재연도 2000년
등재기준 (ii)[1], (iii)[2] }}}
파일:경주포석정지석구.jpg
<colbgcolor=#4a2d5b> 경주 포석정지[3]

1. 개요2. 역사3. 구조4. 용도 논쟁5. 관람
5.1. 입장료
6. 외부 링크7. 사적 제1호8. 여담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순환로 816 (배동)에 위치한 사적지. 공식 명칭은 '경주 포석정지'로 통일신라의 의례 및 연회 장소로 이용되었던 정자(亭子) '포석정'이 위치했던 터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4]

2000년 12월, 경주시에 소재한 많은 문화유산과 함께 경주역사유적지구의 일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총 다섯개의 지구로 나뉘는데 '경주 포석정지'의 경우 '남산 지구'에 속한다.

2. 역사

조성 연대는 전하지 않으나, 주로 통일신라 시대의 기록에 등장한다. 관련 기록은 극히 부족하지만, 묘사에 따르면 대체로 국왕들이 유흥을 즐기던 놀이 공간이었던 듯하다. 헌강왕 때 기록에 다음과 같이 처음 언급되어 남북국시대인 8-9세기에 건립되었다고 추정한다.
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임금의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왕이 홀로 보았다. 어떤 사람[신]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니 왕 스스로가 춤을 추어 그 모양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祥審)이라고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紀異第二) 처용랑 망해사(處容郞 望海寺) 中

또한 효녀 지은 설화에서 화랑 김효종이 지은을 만나기 전 이곳에서 놀았다는 대목이 있지만 포석정의 용도를 짐작할 기록은 아니다.

삼국사기》를 포함한 여러 기록에서 927년, 경애왕후백제의 왕 견훤이 경주를 급습해올 당시에 이곳에서 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고 전해지며 견훤에게 붙잡혀 자결을 강요당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그렇지 않아도 국세가 기울어가던 신라의 망국은 사실상 확정되어 버렸다. 경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순왕이 이후 고려의 왕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신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이 고울부(高鬱府)[5]에서 우리[신라] 군사를 침범하였다.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장수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1만을 내어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王京)을 공격해 들어갔다.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어찌할 바를 몰라, 왕과 비는 후궁(後宮)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종실 친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6]와 부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적의 포로가 된 자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땅을 기면서 노복이 되기를 구걸했으나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견훤은 또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공사(公私)의 재물 모두 빼앗고, 궁궐로 들어가 좌우에 명하여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은 비와 첩 몇 명과 후궁에 있다가 군대 진영으로 잡혀갔는데, [견훤이] 핍박하여 왕을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부하들이 비와 첩을 간음토록 내버려두었다. 왕의 친척 동생을 권지국사(權知國事)[7]로 세우니, 그가 경순왕(敬順王)이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제12(新羅本紀 第十二) 경애왕(景哀王) 4년 가을 9월(四年秋九月) 中

3. 구조

보통 포석정이라고 하면 포어(鮑魚)[8]의 형태를 모방하여 만든 석구(石溝)를 말하지만 사실 이 석구는 포석정의 한 가지 부속기물일 뿐이다. 일부 네티즌은 구덩이가 무슨 연회 장소냐며 말하지만, 본래 이 위에 포석정의 본 건물이 있었는데 뒤에 없어진 것이다.

포석정의 석구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기 위한 용도이다. 유상곡수연은 4세기 위진남북조시대서예왕희지에서 비롯됐다.[9] 물이 흐르는 수로의 첫 부분에 술이 담긴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수로를 타고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는 구조인데, 수로를 기가 막히게 설계하여 술잔이 떠내려가는 중에도 기울어지거나 부딪히지 않았다 한다. 술잔이 떠내려가는 동안 시를 짓고 만약 못 지으면 벌주 3잔을 마시는 식으로 노는 것이 유상곡수연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수로를 물길을 꼬고 수로의 깊이까지 계산하여 설계하여 술잔이 오래 떠내려가게 하여 시를 지을 시간을 벌었다고 한다. 술잔 타이머 관련기사 석굴암과 함께 통일신라 석조건축기술의 정밀함을 그리고 목제 주령구와 더불어 신라인들의 술게임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적.[10]

다만 일제강점기 1915년 철거 후 재설치하는 과정에서 없어진 돌은 새로 보충하는 등 임의로 보수되어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은 잃어버렸다고 한다. 거기에 위 사진 속에도 보이는 나무가 자라면서 돌을 건드려 미세하게 밀려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므로 지금은 물이 흐르고 술잔을 띄워도 끝까지 흔들림없이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

크기를 다양하게 다듬은 돌 63개가 사용됐고 크기는 길이 10.3 m, 폭 7 m 정도이고, 물길 길이는 약 22m이다. 물길의 폭은 최소 24 cm에서 최대 40 cm로 다양하지만, 평균적으로 30 cm 정도이다. 깊이도 평균적으로 22 cm 정도이며 물길의 입구와 출구의 낙차는 40 cm 정도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각 위치마다 속도가 천차만별이다. 뒷산에서 물을 받아 토하는 거북 모양 돌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1871-73년 사이에 누군가가 안동으로 옮겨갔다고 전할 뿐 소재를 모른다. 만약 정말로 물을 토하는 거북이가 있었다면 곧 그 거북이 돌 밑에 배수로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4. 용도 논쟁

포석정 관련기록은 비록 부족하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등에서는 한결같이 왕들이 놀이를 즐기던 곳으로 서술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신라의 경애왕이 후백제의 왕 견훤이 수도인 경주까지 침공해왔을 때에도 포석정에 나아가 놀고 있었다는 기록이 때문에 후대 사람들에게는 망국의 상징 내지는 암군의 사치에 비유되는 등 이미지가 썩 좋지는 못하다.

다만 제사공간이었는데 놀이공간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에서 헌강왕은 여기서 춤을 춰서 산신을 만났다고 하고, 특히 경애왕이 여기서 놀다가 잡혀 죽은 부분에서는 정황상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적국의 왕이 수도 코앞까지 진격해오는 다급한 상황이었고, 심지어 경애왕 본인조차 이를 알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구원까지 청하던 판에 포석정에서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11] 그래서 '신라는 망할 만했으니 망했다.'는 프로파간다가 필요했던 후백제나 고려가 만들어 퍼뜨린 이야기로 보고는, 사실 포석정이 연회, 제사용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견훤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최후의 발악으로 하늘에 제사라도 지냈다는 말이다.

이도 어디까지나 한 가지 가설일 따름이고 그대로 수긍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비록 분량이 극히 적기는 하지만, 포석정에 관련된 여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포석정은 그저 놀이공간이었다. 진위 논란으로 보통 배제하는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祀)라고 제사시설이라 하지만[12] 이를 제외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고려사 등에서는 포석정이 제사와 관련되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포석정에는 물 위에 술잔을 띄워놓고 시를 짓는 놀이인 유상곡수연을 위한 수로까지 설치되었는데, 나라를 위해 왕이 직접 행차해서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에 그런 향락적인 놀이공간이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정말로 신라의 왕들이 포석정에서 제사를 지냈다면, 이는 요즘으로 비유컨데 나이트클럽에서 향 피우고 제사상 차리는 격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서는 지금으로서는 기록을 따라서 포석정을 국왕의 놀이공간 정도로 추측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고 주장한다.[13]

그러나 이 시대는 현대가 아니라 고대 사회고, 고대사회는 성과 속이 그렇게 딱딱 구분되던 시대가 아니었다. 제사와 잔치가 한자리에서 벌어지는 것은 사실 동서양 고대 사회에서 흔한 현상이었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비유다. 사실 현대에도 소위 호상 소리 듣는 평안하게 자연사한 노인의 장례식이나 좀 규모 있는 집안 제사 같으면 잔치 분위기가 맴돌기도 하는데 고대에서 잔치에서 제례적 의미를 빼거나 반대로 제례에서 잔치적 성격을 빼기는 더더욱 힘들다. 당장 고려가 국경일로 치르던 팔관회연등회만 해도 종교행사이지만 동시에 축제이고, 현대 명절에 치르는 차례나 서양의 무슨무슨 성인의 축일들도 마찬가지다.

또 한편으로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잡혀 죽었다는 음력 11월이 양력으로 치면 1월 한겨울인지라, 야외에서 유상곡수연을 하면서 한가하게 논다는 것은 다소 부자연스럽다. 인근 1 km 거리에 신라의(특히 박씨)의 성지나정신궁, 배동 삼릉 같은 시설이 밀집한 지역이기 때문에 이를 제사공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다만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가 견훤에게 공격받아 죽은 시기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비록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경애왕이 11월에 죽었다고 하였으나, 《삼국사기》 견훤열전에서는 10월이라고 하였고, 《고려사》 태조세가와 《고려사절요》에서는 경애왕이 죽은 시기를 9월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음력 9~11월이 양력으로 환산하면 늦가을~겨울철로 모두 야외에서 술 마시고 놀기에 추운 계절이라는 점은 마찬가지긴 하나, 추운 날씨라고 꼭 야외에서 행사를 열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덧붙여 난정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애초에 유상곡수는 액을 쫓는 제의의 일종인 계사(稧事)의 뒤풀이 격으로 이루어진 행사였다. 따라서 포석정을 제의공간과 놀이공간으로 딱부러지게 구분하려는 것 자체가 현대인의 편견이라는 점도 감안되어야 한다.

일부 학자들은 동궁과 월지처럼 이곳을 행궁이나 이궁을 지어서 휴식이나 제사를 동시에 겸할 수 있는 시설이라는 추정을 한다.

5. 관람

입장료는 성인 1천 원. 대중교통은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500번, 505번, 506번, 507번, 508번을 타고 포석정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입장권은 주차장 옆에 있는 '포석정지 방문자센터'에서 구입하면 된다. 주차하였으면 입장권 구입시 차량번호를 불러주면 무료주차가 가능하다. 방문자센터 내 포석정 관련 영상관과 포석정 모형이 있다.

사실 동그란 포석정 수로는 위에서 언급했듯 신라시대 포석정의 '일부 시설'이다. 유물이 출토되고 건물터가 확인됐지만 2018년 현재 볼거리는 수로뿐이다. 입장료가 있는 경주의 네임드 유적지 중에서는 가장 썰렁한 축에 속하므로 역덕이 아니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네임드 관광지만 찾아다니는 단체관광객들은 포석정만 보고 바로 버스 타고 떠나기도 하지만 이 근처는 주변에 보물 63호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이나 소나무숲 사진 포인트로 유명한 경애왕릉, 배동 삼릉 등 다른 유적도 많고, 포석정 바로 뒤는 야외 박물관이란 별명이 있는 남산의 등산로 중 하나이기도 하므로 연계해서 둘러볼 수도 있다.

5.1. 입장료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주차요금
소형차 2,000원
대형차 4,000원
입장료
성인 2,000원
청소년/군인 1000원
어린이 500원
입장권을 구매하면 주차는 무료로 가능하다. 경주시민은 주소가 표시된 신분증을 제시하면 입장료가 면제된다.

만 65세 이상 국가유공자나 장애인 등은 무료입장을 할 수 있으나, 주차비는 내야 한다.

6. 외부 링크


파일:란팅 중국.jpg
포석정 유상곡수의 유래로 여겨지는 중국 사오싱 (소흥)의 난정

7. 사적 제1호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5)때로 본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본다.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8. 여담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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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4]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5]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 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이다. 그런데 《고려사》 권57 지리 1 영주(永州)(현재의 영천시. 현재의 영주시는 일제강점기 당시 부군면 통폐합 당시 영천군이 2개 있었기 때문에 영주군이 된 것이다.)조에 “영주(永州)는 고려 초에 신라시대의 임고군(臨皐郡)과 도동(道同)·임천(臨川) 2현을 합하여 설치한 것으로, 일명 고울부(高鬱府)라고도 한다”고 한 점에서 현재의 경북 영천 지방이 곧 고울부였음을 알 수 있다.[6] 삼공(三公)과 구경(九卿)과 대부(大夫), 곧 벼슬이 높은 사람들을 말한다.[7] ‘권’은 임시의 뜻이고 ‘지’는 맡는다는 뜻이므로, 권지국사는 아직 왕호를 인정받지 못한 기간 동안에 임시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린다는 뜻의 칭호로, 권서국사(權署國事)라고도 한다.[8] 소금에 절인 생선, 전복을 가리킨다. 통설은 전복.[9] 한국에서 유상곡수연을 즐기기 위해 만든 시설 중 다른 것으로 조선시대 창덕궁 후원 옥류천의 유적이 있으며, 일본 나라시헤이조궁이나 중국 청더피서산장 등 동아시아에 여러 곳이 있다.[10] 그런데 술잔을 띄우는 게 아니라, 수로에다가 물 대신 술을 흘려보내고 그걸 떠다먹는 방식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11] 드라마 태조 왕건 에서도 연회장 처럼 묘사되었는데 참고로 태조왕건 해당회차 방영 직전 역사스페셜에서도 유상곡수터라고 설명했다. 해당 방송 이후 태조왕건에서 역사스페셜 방영분을 참고하여 유상곡수터로 각본을 수정하지 않고 연회장의 모습 그대로 방영했다 하여 시청자들이 다소 아쉬워 했다.[12] 다만 포석정 제사시설 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필사본 화랑세기 긍정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13] 굳이 따지자면, 견훤이 경주로 접근해오다가 군사를 돌리고 물러났다든가 혹은 오던 중에 고려의 공격을 받아 격퇴당했다는 등의 잘못된 정보를 입수하고는 기념으로 연회를 하다가 꼼짝없이 당했을 가능성 정도는 생각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