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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 추존 황제 | |||
<colbgcolor=#a11><colcolor=#ece5b6> 전한 제7대 황제 무제 | 武帝 | |||
무릉 전경. | |||
출생 | 기원전 156년 | ||
전한 장안 미앙궁 (現 산시성 시안시) | |||
즉위 | 기원전 141년 3월 9일 | ||
전한 장안 미앙궁 (現 산시성 시안시) | |||
사망 | 기원전 87년 3월 29일 (향년 69세) | ||
전한 장안 미앙궁 (現 산시성 시안시) | |||
능묘 | 무릉(茂陵) | ||
재위기간 | 전한 황태자 | ||
기원전 150년 ~ 기원전 141년 3월 9일 (9년) | |||
전한의 황제 | |||
기원전 141년 3월 9일 ~ 기원전 87년 3월 29일 (54년 2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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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철(徹) | ||
부모 | 부황 경황제 모후 효경황후 | ||
형제자매 | 14남 3녀 중 11남 | ||
배우자 | 효무황후, 무사황후 | ||
자녀 | 6남 6녀 | ||
신장 | 188cm[1] | ||
종교 | 유교 | ||
작호 | 교동왕(膠東王) | ||
묘호 | 세종(世宗) | ||
시호 | 효무황제(孝武皇帝) | ||
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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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한나라의 제7대 황제.한무제(漢武帝)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룩한 문경지치를 이어받아 한무성세라는 전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군주였지만, 무리한 토목공사와 흉노와의 기나긴 전쟁 등 대외 원정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나는[3] 등 여러 실책과 문제점이 쌓이게 되면서 훗날 전한이 붕괴되는 폐단을 낳게 된 역설적인 군주이기도 하다.[4]
2. 생애
2.1. 황제가 되기까지
원래 한무제 유철은 부황 경제의 11번째 아들[5]로 교동왕(膠東王)이었다. 경제[6]는 박황후에게서는 자식이 없었고, 대신 6명의 후궁에게서 14명의 아들을 보았다. 또한 무제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장자인 유영이 황태자로 있었으니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한 한나라에서 유철이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그러나 박황후가 폐위된 뒤에 누구를 새 황후로 삼느냐가 문제가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유철의 어머니인 왕지는 경제의 유일한 친누나였던 관도공주의 딸 진아교와 아들 유철을 혼인시킨 후, 관도공주가 경제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자신이 새 황후가 되고, 유철을 태자로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에는 당시 태자였던 유영의 생모 율희의 실수도 있었는데, 관도공주는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태자 유영에게 딸을 시집보내려고 했지만 율희가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아마도 경제에게 많은 후궁들을 보내던 관도공주에 대한 반감과 자신이 이미 태자의 어머니이니 황후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 외에 경제가 자신이 죽으면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고 율희에게 말했을 때, 도리어 황제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그 결과 경제는 율희에 대한 마음이 떠났고, 이러한 기회를 이용한 왕지와 관도공주 사이에 오고간 공작의 결과, 율희가 아닌 왕지가 새 황후가 되었으며, 유영은 태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유철이 새로운 태자가 되었다. 이후 경제는 황태자 폐위를 반대한 주아부를 유사하게 했고, 유영의 스승이자 효문황후의 조카이며,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한 위기후 두영을 실각시킨 뒤, 왕지의 동생인 무안후 전분을 승상에 앉혔다. 한편 황태제를 노린 경제의 동생 양효왕 유무는 비록 어머니의 편애 때문에 대놓고 제거할 수는 없었으나 입조를 막는 등 냉대했다. 그 후에야 유철, 즉 한무제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2. 한무성세(漢武盛世)
무제 유철은 즉위 직후 널리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대책을 묻고, 여기에 응한 동중서의 대책을 채택함으로써 유가를 중국의 국교로 만드는 길을 열어 세계 최초로 유학을 관학으로 공인했다. 즉위 초에는 할머니 효문황후의 눈치를 보았으나, 할머니가 죽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최초의 유교식 학교인 명당(明堂)과 태학(太學)을 건립하는 등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기고, 위기후 두영을 처형하는 등 효문황후의 친정 일족을 숙청했다.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한무제는 절대로 유학을 국가 전체의 시스템으로 만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나라는 문경지치를 포함하여 상당 부분 도가적인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고, 효문황후는 이러한 통치 체제를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무제는 오히려 법가적인 성향을 아주 강하게 드러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린 관리인 '순리'와 가혹하게 다스린 '혹리'를 각각 별도로 다루고 있는데, 이 가혹한 법가적 관리인 혹리들의 상당수가 바로 한무제 시기의 인물들이었다. 육가와의 문답을 통해서 유교를 한나라에 받아들인 한고조의 목적이 유교 이념으로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위•아래가 없었던 초기 조정의 위상을 잡기 위한 것이었던 것처럼, 한무제가 동중서의 제안을 체택한 것도 문경지치의 도가적 지침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한무제는 유교라는 이름을 걸어놓고, 실제로는 법가적인 통치를 행했으며, 이 모든 통치의 중심에 자신을 두었다. 다만 진시황의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건국된 한나라의 특성상 법가의 이름을 대놓고 내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대신 내놓은 것이 바로 유교였다. 이후의 전한시대에도 유교는 거의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원제가 유학에 심취하기 시작한 이래[7] 왕망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유교 논리가 국가의 통치 논리와 합일되기 시작했다.
한나라를 중앙집권적 체제로 완성시킨 것도 무제의 시대부터였다. 무제 때까지 한나라는 군국제라고 해서 수도 장안과 주변 지역만 황제의 직할령으로 두고, 동쪽 중원의 대부분에는 유씨 방계 황족이 각자의 군사력을 가지고 반독립적으로 다스리는 제후국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초7국의 난에서의 패배로 제후의 힘은 약해져 있었는데, 기원전 127년 무제는 주보언(主父偃)[8]의 헌책에 따라 제후왕국의 봉지를 모든 자제들에게 분봉(分封)토록 하는 <추은령>(推恩令)을 반포했다. 그 전까지는 제후국이 적장자 1명에게만 승계되었으므로 각 제후국이 대대로 힘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천자가 제후들에게 '은혜를 널리 베풀어' 적장자는 물론 모든 자식들에게 영지를 나누게 하니, 다음 세대가 되면 아들 수만큼 제후국이 잘게 쪼개진다. 이처럼 작아진 제후국들은 더 이상 장안의 한나라 중앙정부에 대항할 힘을 갖출 수가 없었다.
당연히 제후왕들에게는 전혀 은혜롭지 않은 처분이었으나 적장자가 아닌 왕족들은 당연히 원하며 반겼다. 오초7국의 난을 거치면서 힘이 크게 약화된 제후왕들은 감히 이를 거스를 수 없어 결국 군국제는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즉 문제 때 가의가 주장한 제도가 결국 2대 뒤인 무제 때 도입된 것이다. 결국 한무제 때쯤이면 전국시대부터 부침을 겪으며 이어진 기존의 제후왕국들은 사실상 거의 다 소멸했다. 이후 제후왕이라는 지위는 단지 명목상의 통치자일 뿐 실제 행정은 군현(郡縣)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9]
또 둔전제를 시행하여, 군인들에게 변방을 지키는 동시에 현지에서 둔전을 개간하여 군수 물자를 확보하도록 했으며, 흉노로부터 빼앗은 북방 영역으로 이주한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했다. 이를 대전법(代田法)이라고 한다.
2.3. 한무성세의 그림자
만약에 무제의 영웅적인 재주와 위대한 지략이
문제(文帝)와 경제(景帝)가 공손함과 검소함으로 이 백성들을 구제했던 일을 바꾸지만 않았더라면,
설사《시경》이나《서경》에서 칭송한 일이라 하더라도 무엇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한서》 <무제기>
문제(文帝)와 경제(景帝)가 공손함과 검소함으로 이 백성들을 구제했던 일을 바꾸지만 않았더라면,
설사《시경》이나《서경》에서 칭송한 일이라 하더라도 무엇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한서》 <무제기>
한무성세(漢武盛世)라는 말이 존재하면서도 한무제가 후대 사람들로부터 비판의 주요 대상이 된 것은 화려하고 웅대했던 제국의 겉모습 뒤편으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제국의 역량이 지나치게 소모되었고, 이것이 결국 전한의 쇠퇴 원인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제 본인의 군주로서의 결함으로 인한 사치 및 신하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 역시 제국의 쇠퇴에 기여했다.
2.3.1. 대규모의 토목공사
한무제의 장대한 정복 활동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사나이의 로망을 자극한 기린아 곽거병의 원정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한제국의 강대함과 위대함을 칭송하게 했으며, 한무제 - 곽거병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부르게 했지만 무제 당대의 백성들과 신하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민초들을 고통의 나락에 밀어 처넣어주신 폭군이었다. 문제 ~ 경제 시대부터 이어진 곡식이 썩어나고 창고에는 온갖 재화가 가득한 태평성대를 박살낸 원수에 가까웠던 군주가 무제였다. 특히 재위 초기의 백성을 위해 베풀던 선정은 할머니인 효문황후의 간섭을 받던 시절이 대부분이었으며, 효문황후가 죽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폭군으로서의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우선, 무제는 재위 2년째부터 자신의 능(무릉)을 건설하게 했는데,[12] 효문황후가 죽은 뒤로는 그 규모를 진시황의 여산에 버금갈 정도로 크게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전한(서한) 역대 황제들의 황릉 건설과 사회•정치사 등을 다룬 12부작 가량의 다큐멘터리인 중국 CCTV의 <서한제릉>을 보면 무제는 무릉 내에 지하궁전을 건설하여 황장제주로 꾸미고, 방마다 제물을 가득 채웠으며 능침 주변으로는 수백 마리 이상의 동물이 순장된 갱을 만들었다.
노년이 된 치세 말년에는 미앙궁과 장락궁을 놔둔 채, 새로 크고 화려한 건장궁을 건축하고, 또 이곳 저곳에 별궁을 지었으며, 거액의 비용을 들여 동쪽의 태산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했는데 천자의 위엄을 보이는 목적 외에도 그것이 불로장생과 연결된다는 속설이 작용했다고 한다.
기린아 곽거병의 우주를 뚫는 화려하고도 장대한 대흉노 원정에 한나라의 국고를 아낌없이 탈탈탈 털었고, 여기에 추가로 무제 본인이 벌이는 대규모 토목공사들이 겹치면서 재정이 엄청나게 낭비되었다. 그리고 이를 메우기 위한 백성들의 고통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기만 했다. 게다가 곽거병의 원정을 비롯한 한나라의 흉노, 남월, 고조선에 대한 공격은 제국의 엄청난 재정 낭비를 불러 일으켰고, 그 부담을 덜어줄 추가적인 재정 마련의 일환이 된 것도 아니었다.
2.3.2. 흉노 원정과 재정 문제
무제 치세 전반에 걸쳐, 흉노 원정은 지속되었다. 기원전 129년 한나라는 흉노를 파멸시키거나 혹은 복속시키겠다는 대전략을 세운 후, 최초의 대규모 장거리 원정을 실행했다. 전쟁 첫 10년에 걸쳐 한나라는 결정적인 승리를 여러 번 거두었다. 허나 흉노와의 전쟁은 서서히 결말이 나지 않는 지리한 혈투로 고착화되었다. 기원전 129년에 이뤄진 첫 대규모 원정을 보면, 각기 다른 기병부대 4개가 동원되었는데, 각 기병부대는 정예병 1만 명이었다. 기원전 119년 원정에선 독립적인 기병부대 2개를 동원했는데, 각 기병부대의 숫자는 5만 명 정도였다. 기원전 97년에 이르면, 기병 7만 명과 보병 14만 명이 흉노 원정에 파견되었다. 한나라 군대의 공세는 막강한 기병대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다만 역사서에 나온 숫자를 꼭 문자 그대로 신뢰할 필요는 없는데, 한나라의 사관들은 말버릇처럼 기병에 대해 "수만수만"을 읊조렸기 때문이다.[13][14]기원전 119년 원정에서는 말을 14만 필이나 동원했는데 살아돌아온 건 고작 3민 필뿐이었다고 하니 원정에서의 소모가 막대했다. 이런 대규모 기병 공세는 수양제가 113만 명을 동원해 고구려 원정을 갔을 때 중기병만 10만 명을 동원하거나, 원명교체기인 1372년쯤에 명태조홍무제가 기병 15만 을 3등분해서 몽골 원정을 행했던 때를 제외하면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한나라를 제외하면 고대의 그 어떤 정주 제국도 보병은 몰라도, 10만 기에 이르는 기병을 지속적으로 장거리 원정에 투사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 제국,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전성기의 인도 마우리아 제국 어디도, 보병은 몰라도 10만 기 혹은 그에 육박하는 기병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것도 수비가 아니라 장거리 원정에 투입한 사실은 없다. 무제의 통치 이후인 한선제의 치세 때, 흉노가 퇴각하다가 잘못 걸려서 선우의 친족들과 공주까지 포함된 3만 9천 명이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15] 이런 물량 공세에, 흉노 역시 무작정 도망가는 작전을 맘놓고 편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확실히 무제가 흉노와 치킨게임을 하며, 끝내 격퇴하여 밟은 것이 여파가 꽤 길게 갔고, 북방 유목민족에 대해서 확실한 주도권을 잡긴 했지만, 덕분에 거대해진 제국을 유지하고, 계속되는 전쟁 비용과 토목공사 비용을 대기 위해 무제는 새로운 농업 생산량 증대 기술을 도입했다. 그는 흉노 원정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원수 3년(기원전 120년), 제나라 출신의 소금상인이었던 동곽함양(東郭咸陽)과 남양 출신의 철물상인이었던 공근(孔僅)이라는 특출한 재무적 역량을 가진 인재 두 명을 뽑았고, 이들을 탁월한 재정 능력을 지닌 낙양의 대상인 가문 출신 인물인 상홍양에게 붙여주었다. 무제는 상홍양을 기용하여 소금과 철을 전매했으며, 물가 조절을 빌미로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해 상업에 대해서 심한 통제를 가했다. 이를 통해 무제는 부유한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박박 긁어 많은 원성을 샀다. 상홍양의 정책은 훗날
'막대한 국방비의 재원 마련을 위해, 비정상적인 경제계획과 재정정책, 특별세의 고안과 시장통제계획을 도입했다.'
는 비판을 받았다.[16] '균수'는 관청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이었고, '평준'은 물가를 조절하는 것으로서 이 점은 사마천이 엄청나게 까기도 했다. 무제와 상홍양의 정책은 상업의 발전을 억누르는 원인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부유한 상인의 매점매석을 근절해서 물가를 안정시켰으며,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17] 무제 사후, 재정정책의 당위성을 놓고 외조(찬성파)와 내조(반대파)가 사상적,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논의를 기록한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염철론》이었다. 외조와 내조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아 결국 직접적으로 충돌하기에 이른다. 이때 술의 전매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소금과 철은 무제 시기의 전매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정쟁은 국가 정책의 대립인 동시에 고명 대신[18]들 간의 권력투쟁의 장이었다. 여기서 소제는 내조의 수장인 곽광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일제 사후 내조의 제2인자였던 상관걸과 외조의 수장이었던 상홍양 등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 연날왕 유단을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으나 들키고 말았다. 상관걸과 상홍양을 비롯한 일족이 모조리 멸족을 당했고 균수법과 평준법을 비롯한 무제 시기의 신정책들은 곽광의 측근 두언년의 손으로 대부분 폐기되고 말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염철 판매에 대한 국가 개입과 경제정책의 국가 주도는 이미 춘추시대 초기 제환공 시절 관중이 시행했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것이었고 후대의 중국 왕조 및 한국 왕조들도 사용해왔으며 현대 중국에서도 2017년까지 소금 전매제가 유지되어오다가 시대의 변화로 더 이상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기가 되어서야 폐지되었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한무제의 지나친 씀씀이와 흉노 원정으로 인한 재정 적자 때문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낭비를 거듭하다 보니 백성들에게 부담이 엄청나게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30년쯤 뒤 하후승은 그런 피해를
"온 백성이 유랑민이 되었고 그 절반은 죽었으며, 풍년이 들어도 기아를 면치 못해 서로 아이를 바꾸어 잡아먹었다."
고 묘사했다. 단, 그렇다고 아예 방조한 것은 아니어서 무제는 구난 사업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편이었다. 문제는 구난 사업을 펼쳐도 백성들에게 입힌 피해가 너무 막대했기에 구난이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저 한시적인 불만 달래기에 불과했다는 점이다.토목공사에서 언급되었듯이 곽거병의 흉노 원정의 경우, 한나라의 재정에 기여하는 바는 쥐뿔만큼도 없었다. 정복전쟁으로 얻는 이익이란 것이 결국 농사지을 땅과 농사 지어서 세금 바칠 백성들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흉노는 유목민족이었고 이들이 사는 초원 지대는 농토로서는 효용이 전무했기에 결국 지면 당연히 파산이지만 이겨봤자 적자인, 전혀 수지가 안 남는 장사였다. 이 채산성이라곤 1도 없는 헛땅을 얻어 유지하자고, 무수한 병사들의 목숨과 대규모 군량 등의 국가 자원을 한두 해도 아니고 수십 년이나 지속적으로 쏟아부어댄 것이다. 흉노가 그 이후로 깨갱해서 한나라에 쳐들어가지 않았다면 국방비 절감 효과를 낳아 재정에 기여했겠지만, 한나라가 예전과 달리 정말로 멸망시키려 하는 터라 흉노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맞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머나먼 원정을 성공한 곽거병 휘하 군대의 공을 치하하는 데 아낌없이 상을 듬뿍듬뿍 내려줬기 때문에 한나라의 재정 상태는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2.3.3. 무원칙한 신하 대우
무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격이 매우 좋지 않았고, 우생학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신하들을 죽이거나 가혹하게 처벌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19] 또한 무제는 신하들을 대우할 때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보였다. 이 때문에 억울하게 죽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예가 바로 이릉과 사마천이다. 이릉은 소규모 병력으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펼치다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흉노에게 투항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것에는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은 무제 본인의 책임이 컸다.그럼에도 무제는 분노만 터뜨려 소식을 전하러 왔던 이릉의 부하 진보락한테 책임을 물어 강제로 자살하게 했고, 평소 이릉과 안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에게는 감히 이릉을 변호했다는 이유[20]로 처음엔 사형을 명령했지만 여기서 알량한 아량을 베푸는 척 하면서 몇 가지 선택지를 줬는데 그 선택지들이라는 게 참으로 골때렸다. 사마천에게 벌금 50만 전[21] 궁형, 사형 중에서 선택하도록 했는데, 어지간한 재력가들조차도 갖고 있을리가 없는 큰 돈을 관리에 불과한 사마천이 보유했을리가 없었다.[22]
그래도 사마천은 자신이 한창 집필 중이었던 사서를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굴욕도 감내하고 살아남아야만 했으므로, 결국 궁형을 선택했고 무제는 사마천이 택한 대로 궁형을 집행했다. 이후 다시 후회했는지 이릉 구출 작전을 시도했지만, 문제는 무제가 흉노의 군사를 이릉이 훈련시켰다는 헛소문[23]만 듣고는 알아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킨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이릉은 큰 충격을 받고는 분노하여 탈출할 생각을 접고, 흉노에게 전향해서 장군이 되었으며 훗날 한나라의 전향 설득을 대놓고 거부하기까지 했다. 제대로 된 확인도 없이 일을 키운 셈이었는데 실질적인 책임은 무제 본인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 이를 변호한 사람을 도리어 처벌한 것이다. 이 이릉과 사마천의 이야기는 무제가 가지고 있었던 성격의 문제점을 비판할 때 많이 인용하는 얘기이다.[24]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이렇게 이릉과 사마천을 천시하면서까지 무제가 편애했던 이광리는 훗날 정예군 7만 명을 이끌고 흉노와 싸우던 도중 제위 계승 문제[25]에 휘말리자 어떻게든 위기를 빠져나갈 생각을 하다가 끝내 흉노를 상대로 전공을 세워서 살아남는다는 미친 생각을 하고 무작정 북진했다. 하지만 연연산(燕然山) 전투에서 호록고 선우 휘하의 흉노군 5만 명한테 참패하고 투항해버렸다. 한나라는 이 전투에서 7만 명 중 1천 명에 한두 명 정도로만 생환했다고 기록에 전할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토목공사로 악화된 재정문제에 높은 세금을 견디다 못한 폭동까지 겹쳐 그동안 추진해왔던 흉노 정벌을 포기해야만 했다. 물론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무제는 장안에 남아 있었던 이광리의 일족을 몰살하는 인성질을 시전했다.[26]
결과론적으로 볼 때 훗날 서구권에서도 인정하는 역사가였던 사마천을 인성질로 조지고, 당대에나 후대에나 영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27] 이광리를 싸고 돈 점에서 무제의 성격과 인재 안목은 좋게 봐주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무제가 인재 채용에서 조건과 자격을 가리지 않아 곽거병이 사로잡은 흉노족 왕자인 김일제(金日磾)나 상관걸, 상인의 아들이었던 상홍양, 이광, 장건 등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발탁하기도 했다고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무제는 신하들에게 무자비하며 가혹한 군주였고, 이 정도의 인물 발탁은 다른 군주들도 그럭저럭 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28] 특히 곽거병, 곽광 형제나 위청, 이광리 같은 인물들은 무제의 인척이었다.[29]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는 애매한데 '박사'는 이미 전국시대부터 각국에 설치된 관직이었으며, 진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따랐고 진나라의 제도를 이은 한(漢)나라에서도 숙손통(叔孫通) 이후 여러 종류의 박사를 두었다. 이것을 오경박사까지 진전시킨 것은 무제(武帝) 재위 초년의 동중서(董仲舒)의 상주 때문이었으며, 각 박사관에 제자 50명을 증원하고 유학의 교양이 있는 관리를 특히 승진시키는 방침을 취했다. 이로써 유학이 발전했다.
그리고 정작 무제는 인재를 보는 안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고조선 정벌을 들 수 있다. 무제가 양복을 누선장군, 순체를 좌장군으로 삼아 고조선을 침공하도록 했을 때, 양복은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했다가 격파당해 10여 일을 숨어 있었다. 그나마 왕검성 내부의 갈등을 이용하여 고조선 멸망의 공을 세운 순체조차 양복과 대립하다가, 공손수에게 양복을 모함하여 체포하게 만드는 등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이전에는 고조선에 굳이 누가 봐도 받아들이기 힘든 항복조건을 강요해 차라리 저항하도록 만들어 일을 크게 키웠다. 또한 순체와 양복의 중재자로 파견된 공손수는 사정을 제대로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음에도 순체의 말만 듣고는 양복을 독단적으로 체포하여 무제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했다. 물론 처벌은 제대로 이뤄져서 순체와 공손수는 처형되었고, 양복은 속전을 내는 대가로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애초에 중책을 맡으면 안 되는 무능력자 3명에게 직책을 맡겨 일을 엄청 키운 무제는 정작 책임을 지지 않았다.
2.4. 여태자(戾太子) 사건(무고의 화)과 쓸쓸한 최후
게다가 무제 스스로가 궁정 내에서의 음모의 결과로 옥좌에 앉았기 때문인지, 옥좌를 둘러싼 음모와 유혈사태가 그치지 않았다. 기원전 122년부터 종실인 회남왕, 형산왕, 강도왕의 반역 음모가 차례로 발각되어 처형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무려 2만 명이 넘는 인원이 한 자리에서 처형되기도 했다.더구나 무제는 가족들에게도 냉혹하고 무자비했는데, 말년에는 노망이 나버려 오나라의 손권처럼 모함에 넘어가 황후를 폐위하여 자살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딸들인 제읍공주와 양석공주도 간통 및 저주 행위를 했다고 하여 참수형에 처했으며, 뒤이어 아들인 여태자 유거(劉據)와 며느리, 손자, 손녀들마저 죽음으로 내모는 과오를 범했다.
무제는 후궁 구익부인(鉤弋夫人)을 총애하여 그 사이에서 늘그막에 어린 황자인 유불릉(劉弗陵)을 낳았는데, 이후 태자를 바꾸려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 평소 강직한 성격이라서 태자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무제의 최측근 수형도위(水衡都尉) 강충(江充)은 훗날 태자에게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30] 무당과 짜고, 여태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을 무제에게 했고, 이에 무제는 여태자를 의심하게 되었다. 한편 계속된 모함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 화가 난 태자가 강충과 무당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에 강충 일행과 작당을 했던 소문이라는 환관이 장안에서 도망쳐 나와 무제에게[31] 알렸다. 무제는 태자가 저지른 살인에 충격을 받았으나 이때까지도
"태자가 두려운데다가 강충과 원수를 져서 벌인 일일 것이다."
라며 사신을 보내 태자를 다독이면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신은 태자에게 해를 입을 것이 두려워서 태자가 있는 장안에 들어가지 않고, 무제에게 태자가 모반했다며 거짓 보고를 했다. 이에 노발대발한 무제는 태자를 폐위시키고 체포를 명령했다. 하지만 체포에 불복한 여태자는 거병하여 장락궁의 호위 군사 및 황후궁의 궁노수와 병사를 풀어 장안을 통제하려고 했다. 무제는 보고를 받은 후 우선 사람을 보내 동태를 살피도록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기세에 밀려 장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 태자가 기어이 반란을 꾸미고 있으며 사자인 자신도 죽이려고 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그러자 분노한 무제는 관군을 소집했으며 소집된 군대로 장안을 포위하는 한편, 성문을 굳게 닫아 장안 내에서 한 명도 도망쳐 나오지 못하게 했다. 태자는 성안에서 간신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선포했으며, 임안에게 북군을 장악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안은 북군에 들어가자마자 태자를 배신하고는 군영의 문을 단단히 닫도록 했다. 태자는 장안의 동서남북 네 시장에서 인부들을 잡아 병사 수만 명을 충당했다. 이 군대로 그는 관군을 이끌고온 승상 유굴리[32]와 5일 동안 혈전을 벌였다. 시간이 지나 장안의 백성들은 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점점 유굴리에게 합류하게 되었다. 자신의 불리함을 깨달은 태자는 휘하 병사들까지 관군에게 항복하자 장안 동쪽 복양문으로 나가 도망쳤다.
반란을 진압한 무제는 장안으로 돌아왔고, 명령을 내려 여태자의 어머니였던 위황후의 인수를 회수하여 폐후로 만들었는데[33] 이에 위황후는 자신의 말로를 예감하고 자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 대신들은 무제한테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누구 하나 말을 못했다.[34] 그래서 지방의 한 장자가 무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부자간에 원수처럼 되지 말아야 하며, 태자가 함부로 부친의 군대를 일으킨 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지 결코 모반은 아니었다며 사면을 요청했다. 무제는 이 상소문을 보고 다소 감동은 했지만, 그렇다고 태자를 용서하지는 않았기에 상소는 소용이 없었다.
결국 태자는 관군의 추격을 받으며 도망치다가 신발 장수의 집에 숨었으나, 결국 발각되자 목을 매어 자살했다. 태자의 두 아들도 관군의 투항 요구를 거부하며 저항하다가 교전 중에 전사했다. 태자와 아들들을 숨겨준 신발 장수도 관군에게 살해되었다. 태자의 후궁인 사양제,[35] 아들 유진, 며느리 왕씨, 딸을 비롯한 태자의 가족과 위황후의 친정을 비롯해 태자를 따르던 이들도 무사하지 못하고 대거 처형당했다. 하지만 여태자의 손자이자 무제의 증손자로 아직 갓난아기였던 유순(劉詢), 즉 훗날의 선제는 다행히도 위씨 일족에 의해 목숨을 부지해, 무제와 소제가 붕어한 이후 창읍왕을 쫓아낸 곽광에게 제10대 황제로 옹립되었다.
원래 여태자의 다음 서열은 제회왕 유굉이었으나, 여태자보다도 일찍 죽었고, 창읍애왕 유박을 태자로 삼자는 여론도 있었으나, 그도 얼마 못 가 죽었다. 광릉여왕 유서와 연날왕 유단은 무제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최종적으로 막내 아들이었던 유불릉을 황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유불릉의 생모인 구익부인은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때 구익부인은 아무 죄도 없었는데 있지도 않은 역모죄로 처형된 터라 신하들이 경악할 정도였다. 그래서 신하들이 이유를 묻자 무제는
"구익부인은 여태후처럼 국정을 농단할 것이니, 이를 방지하려고 그랬는데 왜 모르냐."
라며 오히려 신하들에게 화를 냈다.[36]이듬해에 조사를 거쳐 이 여태자 사건은 강충의 무고로 밝혀졌고, 증거가 전부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무제 역시 태자의 거병이 강충의 핍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거기에 전천추[37]의 말을 듣고 감동한 무제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여 아들을 위한 궁궐 건축을 명령했고,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궁'이라는 뜻인 사자궁(思子宮)을 완성하여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강충의 삼족을 멸하고 강충의 일당들을 불태워 죽였다.[38] 하지만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충격이 심했는지 얼마 안 가 무제는 실의에 빠졌고, 건강까지 악화되어 병을 앓다가 곽광과 흉노족 출신인 김일제 등에게 후사를 맡기고는 기원전 87년 향년 70세 나이로 쓸쓸히 죽었다.[39]
3. 평가
한나라를 대표하는 황제로서 그에 맞는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다혈질적인 성격과 무리한 원정, 대규모의 토목공사들로 인해 역사가에 따라서 명군인지, 아니면 암군이면서 심지어 폭군인지,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양면적인 황제이다.420년이라는 기나긴 전•후한의 역사속에서 오랜 기간(54년) 재위한 황제였다.[40] 동쪽의 고조선과 남쪽의 남월을 정복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북쪽의 흉노 제국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며, 서쪽으로는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등 사방에 걸친 대규모의 정복전쟁으로 굵직한 전쟁사적 업적들이 꽤 있어 중국사 전체를 놓고 봐도 언급이 많이 되는 황제이다. 또한 한국사에서는 고조선[41]을, 베트남사에서는 남월을 멸망시켜 역사적으로 중요한 황제이다.
한편 무제는 전한의 법령을 완성시켰고, 관료 체계를 완비하며, 염•철 전매법, 균수법, 평준법 등의 경제정책을 시행했다. 그가 실행한 정책은 후한시대 이후까지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으며, 유학 또한 무제의 시대에 국학의 위치로 올라섰다. 정리하자면 진시황과 한고조에 의해 건설된 광활한 통일 중화제국이 세종 무황제 유철의 긴 치세 때, 비로소 최강의 황금기를 구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모적인 원정을 일으키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황릉을 짓는 등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동시에 단행했으며, 이로 인해 심각하게 낭비된 제국의 재정을 충당하고, 무리한 정복전쟁으로 인한 군비 확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세와 세금의 신설을 단행해 민중들의 삶을 고달프게 했다. 또한 재위 초기에는 신비주의를 배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이에 빠졌다가 황후, 황태자와의 내전, 즉 무고의 화라는 피비린내나는 참혹한 비극을 겪기도 했다. 한나라를 엄청난 군사 제국으로 성장시킨 큰 업적들도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있었지만, 할아버지 문제와 아버지 경제가 문경지치 기간 동안 이룩한 한나라의 국력을 대거 낭비하는 등 폐해도 상당히 남긴 황제였기 때문에 명군과 암군의 경계선상에 애매하게 걸친 형국이다.
성격이 꽤나 다혈질이었는지 심기를 거스르게 하면 혈족이라도 용서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죽였다. 특히 무제의 치세때 고문당하거나 잔혹한 형벌로 죽은 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알고 보면 큰 잘못도 없는 사마천을 고자로[42] 만들어버리기도 했고, 애먼 이릉의 일족을 몰살[43]시켜 이릉으로 하여금 흉노 제국에 투항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연호를 사용한 황제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무제 유철은 복잡다단한 황제였다. 그의 치세를 상징하는 단어로는
한무성세
(漢武盛世)
가 있으나,[44] 그보다는 (漢武盛世)
진황한무
(秦皇漢武)
가 더 많이 쓰인다. 여러모로 진시황과 비슷하게 업적도, 과오도 뚜렷했던 황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어찌보면 진시황보다 더 심한데, 진시황은 거슬리는 말을 듣더라도 일단 머리를 식힌 다음,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나서 죽일지 말지를 결정했지만[45] 한무제는 그런 것도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다행히도(?) 한나라가 바로 멸망하지 않았다는 점 뿐이었다. 사실 그러니까 미화를 해서 한무성세니 하고 치켜세워주는 것이겠지만, 실제 무제는 폭군이자 암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그 "한무성세"를 위해 한나라는 재정이 파탄나는 큰 대가를 치르고 나중에는 멸망의 계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秦皇漢武)
개인으로서는 똑똑했을지 몰라도, 황제로서는 훌륭하다고 보기 어려운 케이스다. 재정 악화와 외척 세력의 대두 등, 무제의 통치 후유증으로 서한의 통치력엔 금이 가게 되었다.
또, 이에 대해서 흥미로운 주장도 있다. 독일의 중국사학자 한스 반 에스는 꽤 과감한 내용을 담은 연구를 하나 내놓았다. 그는《사기》에 서술된 진 시황제의 전쟁사적 행적을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상당 부분이 한무제의 군사적 행적들과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그런 부분들이 너무 많고,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해당 구절들에 대한 상당히 꼼꼼한 대조와 분석의 결과, 반 에스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사마천의 본래 목적은 시황제와 진나라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무제를 비판하려는 것이었다."
라는 것이다.물론 이 주장은 의고의 전통이 강한 서구의 중국사학자들의 주장 중에서도 조금 심하게 많이 나간 케이스이고, 대다수는 사마천의 서술이 대체로 신뢰할 만한 사료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반 에스가 내놓은 주장의 가치도 분명하다. 피네스(Pines)는 반 에스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46]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라고 말했다. 사실 위의 총평 문단이나 행적만 봐도《사기》<진시황본기>의 행적과 너무도 흡사하고 심지어는 더 나쁜 적도 있었다.한국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극악무도한 침략자로 여겨지며, 스스로를 흉노의 후예로 여기는 몽골인·튀르키예인·헝가리인 민족주의자들에게도 흉노의 전성기를 끝장내버린 극악무도한 침략자로 여겨진다.
4. 후일담
무덤인 무릉(茂陵)은 지금도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는데, 한나라 황릉 중 최대 규모이다. 전한이 멸망하고 일어난 적미군이 무릉의 부장품을 꺼냈지만 전부 꺼내지는 못했으며, 서진 말기 민제 사마업이 자금이 없자 무릉을 털어 확보했다는 기록이 있다.
- 조선의 세종은"대체로 사람이란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진다. 아무리 강직한 사람이라도 마침내는 해이해지기 쉽다. 임금이란 부지런하고 검소해야 정치를 잘할 수 있다. 문제와 경제는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성공했으나, 무제는 방종하고 지나친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실패했다."
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47] 반면 세종의 2남인 수양대군이었던 세조는 무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48]
5. 대중매체
전한의 무제를 소재로 중국에서 드라마를 제작했는데 제목은 <한무대제>(漢武大帝)였다. 중국의 여섯 개 방송국이 연합해 3년 동안 제작비 66억 위안를 들어 만들었다. 총 58부작으로 감독은 청나라 제5대 세종 옹정제를 다룬 드라마인 <옹정왕조>를 연출했던 호매였다. 무제 역은 유명 배우인 진보국으로 작중에서 가공할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드라마 내내 소년 시절부터 판단력이 혼미해져 황태자와 대립하는 등의 노년기의 모습까지도 잘 보여주고 있다.
첫 화의 첫 장면은 말년의 한무제가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고 사마천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여기서 무제는 사마천에게 이렇게 말한다.
첫 화의 첫 장면은 말년의 한무제가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고 사마천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여기서 무제는 사마천에게 이렇게 말한다.
"짐은 그대가 쓴 책을 보았다. 너는 짐이 너를 죽여버리기를 바라겠지. 천추 만대가 모두 너의 충성과 절개를 찬양하고, 짐을 폭군이라 욕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너는 이 책을 가지고 가도 좋다... 어떤 이들은 짐에게 너의 책을 태워 버리라고 말했지만, 짐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짐이 너의 책을 국가의 정사로 삼을 수는 없지만 한 사관의 말로 남길 것이다."
멋있는 장면이긴 하지만, 애초에 사마천을 고자로 만든 것도 한무제이고, 사마천의 최후 중 현실성이 높은 것으로 보이는 다시 한 번 황제를 비판했다가 처형당한 것의 실행자가 한무제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사마천의 입장에서 본다면 병 주고 약주기에 가까웠을 것이다.현재 2015년, 한국에서 방송한 분량을 왓챠 등에서 제공하는데, 자막의 번역 상태는 나쁘지 않으나 여러 인물들이나 고유명사의 음을 잘못 옮긴 부분이 많다. 예컨데 조조(晁錯)를 조착이라고 하거나, 흉노 선우의 황후인 연지(閼氏)를 알씨, 중항열(中行說)을 중행열이라고 하였다.* 《삼국전투기 》비류전투 1편에서 흰 수염 기른 유비의 모습으로 딱 한 컷 등장하여 한나라의 변군(대방군, 낙랑군)에 대해 설명했다.
- 《Why? 한국사 시리즈 09. 전쟁》편에서 고조선과 한나라 전쟁 파트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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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경잡기》라는 책에 한무제가 입은 금루옷의 길이가 188cm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 최초로 연호를 사용한 것은 이때이다. 그 이전의 연호들은 후대에 소급 적용한 것으로 그 당시에 실제로 쓰인 연호는 아니었다.[3] 그래서 텅 빈 국고를 다시 채우기 위해 각종 경제정책(= 염•철 전매법, 균수법, 평준법)을 실시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민생에는 악순환이 되었다.[4] 여담으로 한무제와 비슷한 테크를 탄 인물이 있는데, 바로 청나라의 제6대 고종 건륭제이다.[5] 《한서》 <제후왕전>에 10번째로 나오기 때문에 10남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11번째로 나오는 광천혜왕이 《한서》 <경십삼왕전> 중 <광천혜왕전>에서 무제의 형으로 언급되기 때문에 광천혜왕과 무제의 순서만 바꿔보면 11남이 된다. 12번째로 나오는 교동강왕은 대놓고 한무제의 동생이라고 하기 때문에 11번째 밑으로는 가지 않는다. 결국 이복형보다 왕에 봉해진 순서가 먼저라는 건데, 광천혜왕의 어머니가 한무제 어머니의 동생으로 지위가 낮아기에 그런 듯 하다.[6] 경제가 고조 유방의 손자였으니, 그 아들인 무제는 증손자였다.[7] 한선제는 태자가 유학에 심취한다는 말을 듣고는 "나라 말아먹을 짓"이라며 굉장히 짜증을 냈다.[8] 성이 '주보'이고 이름이 '언'이었다. 여기서 父는 아비 '부'가 아니고 미칭인 甫와 동일한 의미라 '보'로 읽는다.[9] 단적으로 후한 말 난세가 시작되었을 때, 예전과 달리 왕·공·후 등이 아니라 주목(州牧)·주자사(州刺史), 군태수(郡太守), 아니면 중앙 조정의 재상 직위를 가진 자(동탁·조조 등)가 지역 군벌로 떠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후 조조가 위왕, 손권이 오왕, 유비가 한중왕이 되긴 하지만 무제 이전 시대의 왕들이 애초에 제후이기 때문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후한 말에 새로 등장한 왕들은 어디까지나 왕이 되기 전에 군벌로서 세력을 구축한 상태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왕을 자칭한 것이었기 때문에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오초7국의 난 때는 제후들이 왕이라서 지방에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면, 후한 말~삼국시대에는 지방 군벌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대가 흐름에 따라 원인과 결과가 뒤집혔다고 볼 수 있다.[10] 원래는 흉노에 맞설 동맹을 구하려 했던 것이었지만.[11] 민월과 동월이 있었다. 명목상으로 한나라의 제후국이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도 독립을 누렸다.[12] 능을 일찍 건설함은 평균 수명이 짦았던 당시의 황제라면 당연히 하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무제가 장수하긴 했지만 본인이 장수할지 말지를 미리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능을 일찍 만드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13] 데이비드 A. 그라프(2001), 《중세 중국의 전쟁에 관하여, 300-900년》, Routledge[14] 중국 학자 창춘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상비군 60만~70만 명에, 보유한 기병만 30만 명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상비군은 아마도 항구적으로 주둔하는 둔전병이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 기병의 경우, 《사기》에 따르면 진나라의 병력은 호분 100만 명, 병거 1천 승, 기마 1만 필이라고 해서 기병 비율이 1%도 채 못 되었는데 이후 늘어났다고는 해도 서양학자인 데이비드 그라프가 언급한 대로 어느 정도는 뻥튀기가 감안된 듯싶다. 한나라가 기병 10만 명씩을 동원한 것도 전례 없는 일이었다.링크[15] 기록에 따라서는 단위가 급이어서 포로가 아니라, 살해된 인원의 수일 수도 있다.[16] 중국 학자 창춘수의 비판[17] 위안싱페이 저, 장연 역, 《중국문명대시야 1》(中华文明大视野 1)[18] 내조의 수장인 곽광, 내조의 제3인자인 상관걸과 외조의 사실상의 수장인 상홍양, 그리고 내조의 제2인자인 김일제 등이었다. 이중 김일제는 소제가 즉위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19] 무능한 자들을 제거하거나 죽이면 유능한 자들만 남는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무제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는데 이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20] 당시 이릉의 상관은 이광리였는데 그는 한무제의 후궁이었던 효무이부인(孝武李夫人)의 오빠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한 것을 이광리와 그를 임명한 무제에 대한 비판으로 읽은 것이다.[21] 그런데 이 금액이 현대의 한화로 따지면 천억 원 단위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거액이었다. 당대 기준으로도 병력 5천 명을 1년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일반인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정말 그 정도 돈을 가진 사람이 있긴 해서 저 돈을 내고 참형은 면한 사람도 있긴 했다. 근데 그 사람도 대신 평민으로 강등당했으니, 설사 사마천에게 돈 50만 전이 있었던들 그리 편한 선택지는 아니었다.[22] 저 당시 기준으로 관리로서 50만 전을 보유하려면 그 직급이 대장군이나 대사마 이상은 되어야 했다. 참고로 둘은 같은 관품이지만 대장군은 무관직, 대사마는 문관직이라는 차이가 있었다.[23] 엄밀히 말하자면 흉노의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 훈련시킨 사람이 이릉이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로, 이서(李緖)라는 또다른 한나라 출신의 항장이 가르쳤는데 이름이 비슷해서 이릉 구출작전에 나선 장졸들이 잘못 들은 것이었다.[24] 참고로 무제는 홧김에 사마천을 고자로 만들어놓고는 나중엔 미안했던지 사마천을 벌해야 한다는 사람들을 싹 죽이고(...) 사마천을 불러다가 "그깟 거(?) 없다고 뭐가 대수냐. 겨우 그거 없다고 기죽지 마라" 하는 위로(?)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25] 이광리가 승상 유굴리와 함께 자신의 외조카인 창읍왕 유박을 황태자로 내세우려다가, 이를 내자령 곽양이 무제한테 고발하는 바람에 유굴리는 요참형을 당했고, 그 일족도 목이 날아갔다.[26] 이광리 역시 최후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이광리는 투항 이후 당시 선우였던 호록고의 사위가 되어 크게 대접받았는데, 한나라 출신의 권력가였던 위율이 이광리를 질투하여 선우의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 무당을 시켜서 이광리를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내도록 만들었다. 이에 이광리는 독한 저주를 내뱉으며 살해당했고, 이후 흉노 땅에 기근과 역병이 끊이질 않자 호록고 선우는 두려워하며 이광리를 위한 사당을 세워주었다고 한다.[27] 이광리는 흉노 원정 이전에 대완국(페르가나) 원정을 나간 적이 있었다. 이때 "이사성(貳師城)에 가서 좋은 말을 취하겠다"며 이사장군(貳師將軍)이라 거창하게 호칭하고 진격했으나 성 하나 점령하지 못하고 사상자만 내면서 빌빌댔다. 그래서 회군하려고 했으나 한무제는 "돌아오면 목을 베겠다"며 옥문관(玉門關)을 틀어 막아 하릴없이 계속 싸워야 했다. 그나마 한무제가 일단 지원을 보내줬고, 그 지원을 받은 이광리는 제대로 싸워 대완을 평정하고 돌아왔지만 피해가 아주 많았다. 당시 이광리의 형제였던 이연년과 이계가 간통으로 처형되었는데, 한무제는 이런 이광리를 딱히 여겨 해서후(海西侯)에 봉했다. 한마디로, 대완 원정은 한군 병사들만 무수히 전장에서 희생시키면서 얻은 전과였던 것이다. 앞서 이릉이 항복한 흉노와의 전투에서도 이광리는 어느 정도 승승장구하다가 흉노 본대와의 전투에서 대패했으나 조충국(趙充國)의 활약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28] 한무제의 재위 기간에 임명된 승상 13명 중 3명이 자살, 3명이 참살당했고, 집안이 멸족된 이는 수없이 많았다. 또 특정 신하들에 대한 편애나 혐오가 심했는데 앞서 사마천이나 이릉의 일 이외에도 김일제의 아들은 감히 황제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장난을 치는, 자칫하면 대역무도로 몰릴 수 있는 짓을 했음에도 그를 총애했으나 이광과 같은 이는 운수가 사납다는 이유로(...) 위청에게 대놓고 전장에서 멀리 둘 것을 지시했다. 이 일이 꼬여 결국 맹장으로 이름이 났던 이광은 자결하고 말았다.[29] 곽거병이나 위청 또한 무제의 안목이 뛰어났다기보단 낙하산 인사가 의외로 능력이 있었던 운 좋은 사례라고 봐야 할 것이다.[30] 사실 틀린 것도 아닌 것이 태자와 사이가 좋지 못했기에, 태자가 황위를 계승하면 가장 먼저 보복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때의 무제는 고령에다가 건강도 좋지 못하여 붕어할 가능성도 놓았기에 강충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었다.[31] 이때 무제는 건강이 악화되어 장안에서 나와 함양의 감천궁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32] 무제의 이복형이었던 중산정왕 유승의 아들이었다. 유굴리의 아들이 이광리의 딸과 결혼했기에 이광리와는 사돈지간이었다. 유굴리는 여태자 사건 이후 이광리와 함께 창읍애왕 유박을 황태자로 내세우려다가 곽양의 폭로로 들통이 났고 이로 인해 무제의 분노를 사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허리가 잘려 죽는 요참형에 처해졌다. 특히 무제는 유굴리의 가족들도 전부 참수하여 저잣거리에 목을 내걸었다.[33] 왜냐하면 위황후는 태자가 저지른 살인을 알면서도 그를 감싸주었고, 부황에게 용서를 빌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이는 명백한 반역이었기 때문이다.[34] 특히 무제는 신하들이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무자비하게 처벌한 만큼 간언을 할 수가 없었다.[35] 양제는 이름이 아니라 태자의 후궁이 받는 품계 가운데 하나다.[36] 이때의 일은 자귀모사(子貴母死), 즉 '아들이 귀해지면 어머니는 죽는다'는 명칭으로 훗날 탁발선비족이 세운 북위 왕조에서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고조 효문제의 치세에 이르러 폐지되었다.[37] 유굴리가 처형당한 후 후임 승상에 임명되었다.[38] 구익부인을 죽인 것도 강충의 배후에 구익부인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39] 사실 당시는 평균 수명이 짧았던 시대인 만큼 무제는 상당히 장수했다.[40] 이 기록은 청나라의 제4대 성조 강희제의 61년 치세에서 비로소 깨졌다.[41] 위만조선[42] 자신의 비위를 안 맞췄다고 그랬는데 원래는 죽일 생각이었겠지만 그에게 선택지(참수형 or 돈 50만 전어치 벌금 or 중성화 수술. 사마천은 이 셋 중 중성화 수술을 선택했다.)를 주자 대의를 의해 의외(?)로 굴욕을 참고 궁형을 선택한 것이다. 자세한건 사마천 항목 참조.[43] 심지어, 이릉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이릉은 아예 잘못조차 없었다. 이릉의 가족을 처형한 구실이었던 '이릉이 흉노에게 병법을 전수한다'는 전언은 사실 이릉이 아닌 (한나라에서 투항한) 이서라는 사람이 한 일이었던 것이다.[44] 물론 상기했듯이 부황 경제의 업적을 무제가 날로 먹으려고 끼어든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많다.[45] 분서갱유도 나름 진시황의 기준으로는 진나라를 위해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자식들에게도 잔혹했던 무제와는 달리 진시황은 아들인 부소가 간언을 했을 때 크게 화를 내며 변방으로 쫓아냈지만 죽이지는 않았고, 임종이 왔을 때도 부소를 후계자로 임명했다.[46] 특히 교차검증을 할 수 있는 독립된 사료가 부재할 때.[47] 공교롭게도 한무제의 묘호가 세종이었다.[48] 송태조 조광윤에 대한 평과 그 스스로의 행보에서 보이듯이 세조는 절대권력을 휘두른 군주를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