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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15:59:00

벌휴 이사금

석벌휴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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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9대 국왕
벌휴 이사금 | 伐休 尼師今
출생
(음력)
연대 미상
사로국 서라벌
사망
(음력)
196년 4월
사로국 서라벌
능묘 미상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9대 국왕
184년 3월 ~ 196년 4월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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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석씨
벌휴(伐休)
부모 부친 석구추
모친 지진내례부인
왕후 석골정의 모후
자녀 태자 석골정(昔骨正)
왕자 석이매(昔伊買)
태손 석조분[1]
왕호 벌휴 이사금(伐休 尼師今)
발휘 이사금(發暉 尼師今)
별호 성인(聖人) }}}}}}}}}

1. 개요2. 생애3. 연대 문제
3.1. 박씨-석씨-김씨 실제 즉위기간의 중복 문제
4. 《삼국사기》 기록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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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9대이자, 석탈해 이후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석씨 왕조의 2번째 군주. 칭호는 이사금.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탈해 이사금손자다. 아버지는 탈해 이사금(제4대)의 아들 각간 구추(仇鄒)고 어머니는 김씨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이다. 박씨 마지막 임금인 아달라 이사금(제8대)에게 아들이 없어 그가 군주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신덕왕(제53대)을 보고 교차검증하면 아달라 이사금은 신덕왕 박경휘의 조상이 되는 후손이 있던 걸로 보이기 때문에 적자가 없었다는 뜻이고 서자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벌휴 이사금은 모친이 김씨 족단 소속인 걸로 보아 즉위 과정에서 김씨 족단의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이 벌휴 이사금의 왕비가 누구였는지 또한 신라사 초기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지만, 그에게 아들이 둘 있었던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다. 장남 골정의 아들들이 조분 이사금(제11대)과 첨해 이사금(제12대)이며, 차남 이매의 아들이 내해 이사금(제10대)이었다.

2. 생애

삼국사기》에 따르면 벌휴 이사금이 바람구름을 점쳐 홍수, 가뭄, 풍흉을 예지했으며,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봐 성인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한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내례부인이 벌휴 이사금의 차남 석이매와 정분이 난 걸로 추정되는 기록[2]이 있는 등 왕위 계승에 있어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대중역사가 박영규의 해석에 따르면 석씨계가 석탈해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면서 정치보다는 주로 제사를 지내는 신관 가문으로 바뀌었다가 신진 세력인 김알지 계열 김씨계가 석씨계와 연계해 지마 이사금(제6대)의 딸인 내례부인과 같은 박씨계 일부의 지지를 받아 당시 왕을 몰아내고, 새로이 벌휴 이사금을 왕으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벌휴 이사금이 탈해 이사금의 신성성을 빌어 왕위에 오른 것으로 해석한다. 보통 한 왕조의 건국자들이 미화되는 것을 추정해 보면 '성인'이라는 서술도 그런 맥락으로 추측된다. 어쨌거나 당시 신라는 아직 제정분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은 확실하며, 아달라 이사금의 재위기 마지막 10년 부분이 비어있다는 점을 봐도 정치적 혼란이 있었던 것이 명백해 보인다.

재위 기간이 신라 초기 국왕치고는 다소 짧은 12년인데 그가 적지 않는 나이에 즉위했음을 암시한다. 재위 기간이 짧은 만큼 역사 기록도 상대적으로 적지만 그 중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것은 백제와의 전쟁이다. 참고로 석씨 세력이 박씨 세력을 밀어낼 만큼 당시에 힘이 있었기 때문인지 석씨 시대가 시작되면서 신라는 이전 박씨 시대보다 군사 활동의 범위가 경주 근처에서 경상도 이곳저곳으로 훨씬 넓어지고, 여러 소국을 정복해 급격하게 세력을 확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185년에 파진찬 김구도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으로 추정되는 소문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정벌하기도 했다.

일단 앞서에서도 확인되지만, 백제와의 전쟁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 초기 신라사의 기년 문제가 두드러짐과 동시에, 백제사와 견주어 실제 일어났을 사건의 연대 추정 또한 가능하다.

188년에 백제군이 먼저 서쪽 변경을 공격했는데 미추 이사금의 아버지인 파진찬 김구도가 막았고, 189년에는 김구도가 반격해 구양에서 백제군을 격파해 500여 명을 죽였으며, 190년에 백제가 서쪽 국경의 원산향(경상북도 예천군 추정)을 공격하고, 부곡성(경상북도 군위군 추정)을 공격할 때는 김구도가 기병 500명을 이끌고 백제군과 싸웠으나 백제군의 도망가는 척 하다 기습하는 전술에 말려들어 대패했다. 그 결과 왕은 김구도에게 책임을 물어 벼슬을 깎아 부곡성주로 삼고, 설지를 좌군주로 임명했는데 김구도가 부곡성주가 되었다는 기록을 보아 부곡성을 뺏기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님 뺏겼어도 후에 되찾았든가.

일단 백제가 충북 내륙부를 넘어 경북까지 찔러보는 게 가능해진 건, 충남북 내륙부에 그 영향력을 유지하던 목지국을 3세기 후반에 타도한 시기 이후로 해석된다. 과거엔 아래로 거느리던 거수국인 백제의 밑에 강제로 들어간 목지국은 그 후에도 4세기 중반까진 저항을 멈추진 않았으나, 어쨌든 백제군이 충북 일대를 넘어 경북 일대까지 드나들 수 있었던 시기는 목지국의 권위가 없어져버린 3세기 후반 이후로 제한된다. 그러니 위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3세기 후반~4세기 초반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벌휴 이사금의 할아버지 석탈해가 실제로는 고고학적 증거로 3세기 초중반 인물로 해석되는 신라사의 최근 동향과 다시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한편 김구도는 이때부터 조용히 있었는지 기록이 없다가 나중에 아들이 왕이 된 뒤 갈문왕으로 추증된다.

192년에 인 1,000여 명이 기아로 신라에 피난을 와 식량을 구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도 실제로 있었다면, 문헌상 기년인 192년보다는 대단히 나중에 벌어진 일로 해석됨이 마땅하다.

3. 연대 문제

사서에 따르면 벌휴 이사금탈해 이사금의 손자인데 《삼국사기》 기록을 적힌 대로 믿는다면 탈해 이사금이 서기 80년에 사망했고, 벌휴 이사금은 184년에 즉위했으니 104년 차이가 나는데 당연히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일단 이 부분은 신라사같은 경우, 고고학적 연대와 《삼국사기》 연대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건 김씨 왕실이 확립되는 내물 마립간(제17대)때부터로 여겨지며, 이 부분을 근거로 《삼국사기》 서술 전체를 불신했던 일본 학자들의 식민사관적 분석은 현재 와선 적어도 가계도와 기사 자체는 교차검증되는 것으로 판단되어 논파된 지 오래이다. 고고학계에서는 신라는 2세기 후반 건국되었고 혁거세 거서간의 손자인 유리 이사금이 3세기 초반에 즉위한 것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벌휴 이사금은 적어도 기년은 의문시되지만 실제로 탈해 이사금의 손자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탈해가 신화적 인물이라는 성격이 있으니 석씨 집단의 실질적 시조가 벌휴 아니냐는 설은 지금 와선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져 있다. 탈해 이사금유리 이사금(제3대)과의 일화 및 3세기 중후반부터 융성해져서 아예 사로국과의 문화적, 경제적 차이가 두드러지는 수로왕 금관국과의 대립은 고고학적 증거로도 강력하게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상 신라의 초기 기년이 신뢰할 수 없음을 국내 학계에서 고고학적 성과로 다시 확인하기 전에는, 한때 벌휴의 왕위 계승성을 높이기 위해 실제로는 누군가의 몇 대 손인 자가 누구의 아들이네 손자네 하는 식으로 계보 자체를 몇 단계 올렸다는 추측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한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도 그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불가하다.[3] 게다가 신라는 그 말기까지도 혈통에 대한 신성성이 컸는데 함부로 《족보》를 조작하거나 사칭한다면, 아예 재위 자체를 할 수 없었다. 그 왕건과 견훤마저도 함부로 대놓고 고구려 고씨 왕실 및 백제 부여씨 왕실과의 연관성을 주장하진 못했다.[4]

벌휴 이사금이 즉위한 해가 혁거세 거서간과 똑같이 갑자(甲子)년인 것도 이 부분에서 놓칠 수 없는 단서다. 하필 육십갑자 중 첫 번째로 연대를 끼워 맞추었다는 의혹을 받기 딱 좋은데 이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신라 측의 기년 수정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신라는 기년 인상하는 와중에도 계보는 삼국 중에서 제일 정확하게 기록해놓은 덕분에 기록에 공백이 많은 백제보다 세대를 통해 실제 기년을 추적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5][6]

일본서기이주갑인상이 악명 높지만 백제와 신라도 기년 조작을 했기 때문에 때때로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 연대가 백제, 신라보다 더 정확한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석우로는 일본서기의 우류조부리지간과 동일인물로 추정되는데, 이주갑인상을 사용하면 4세기 초반(200 → 320년)에 사망했고 우로의 아들 흘해 이사금은 310~356년에 즉위한 것으로 나온다. 신라의 기년 조작이 정상화되기 시작하는 건 흘해 바로 다음 대인 내물 마립간대부터고[7] 흘해가 우로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사실로 보기 때문에 우로는 실제로 4세기 전반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3.1. 박씨-석씨-김씨 실제 즉위기간의 중복 문제

현대 고고학자들과 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신라 건국은 2세기 후반인데 신라 초기 왕들 중 대부분이 4세기 인물이다.

현대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6세기 중반까지도 신라의 왕은 신라에 속한 여러 간(干)=왕들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다. 6세기 중반 복호계 김씨가 다른 족단보다 명확한 우위를 점하게 된 6세기 중반 법흥왕-입종갈문왕의 대까지도 국내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들 외에 7명의 왕과 함께 사건 해결을 논했다고 한다. 이때 가면 복호계 김씨가 타 족단보다 명확한 우위를 차지하긴 하지만, 이때까지도 왕이라 불린 자들이 여럿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학자들이 신라 왕조의 족보를 상고해 세대를 계산한 결과, 3성(姓) 왕조는 동시대에 존재한 것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문제는 고고학 연구가 진척될수록 박씨, 석씨, 김씨 왕조의 실제 세대가 족보와 일부 맞지 않는 점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꼼꼼하게 해놔서 딱딱 맞아떨어지는 편이긴 한데, 가끔 가다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박씨 왕조는 혁거세-남해-유리-파사-지마, 혁거세-남해-유리-일성-아달라의 두 계보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현대 고고학계 연구와 일본서기 연구에 따르면 파사의 실제 재위기간은 4세기 초중반이고, 지마의 실제 재위기간은 4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 유리 시절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낙랑군을 격파해 낙랑군에 대규모 유민들이 사로국으로 피난을 왔다고 하는데, 낙랑인들이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 신라로 처음 대규모 남하한 시기는 2세기 중후반, 낙랑군이 멸망한 시기는 313년이다. 거기다 6부 17관등 제도가 정착된 건 진흥왕의 대에 가서의 일이다.

박씨 왕조가 사서에서 혁거세의 부계 후손임이 강조되며, 석씨 왕조에도 박씨 왕후가 여럿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박씨 왕조는 실제로 2세기 후반부터 이어진 혁거세의 부계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파사, 지마, 일성, 아달라가 모두 4세기 인물이 맞을 경우 혁거세부터 파사까지의 사이에 수세대가 누락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내례부인 박씨인데, 사서에서는 내례부인 박씨로 지마의 딸이자 아달라의 왕후 내례부인과 이매와의 사이에서 내해를 낳은 내례부인 박씨 둘이 등장한다. 족보에 따르면 내례부인은 혁거세의 5대손으로, 혁거세의 5대손으로 기록된 이매와 동세대다. 그리고 4세기 초반에 출생한 흘해의 모계를 기준으로 상고하면, 내해는 실제로 3세기 중후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지마의 딸 내례부인과 내해의 어머니 내례부인은 동명이인에 속한다. 후대 기년 인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본래는 동명이인인 지마의 딸 내례부인(4세기 중후반)과 내해의 어머니 내례부인(3세기 중후반)은 1세기에 가까운 시대 차이가 있는데 동일인물로 묶었다고 볼 수 있다.

우로는 혁거세-남해-아효부인-구추-벌휴-이매-내해-우로로 혁거세의 7대손이며, 우로의 처 명원부인은 혁거세-남해-아효부인-구추-벌휴-골정-골정의 딸-아이혜부인-명원부인으로 혁거세의 8대손이다. 조분이 5촌/3촌인 아이혜부인과 혼인하고, 우로가 6촌/3촌인 명원부인과 혼인하면서 1대의 차이가 난 것이다. 모계를 기준으로 흘해는 혁거세-남해-아효부인-구추-벌휴-골정의 딸-아이혜부인-명원부인-흘해로 혁거세의 9대손이다. 고대에는 10대 중후반에 여성이 혼인해 20대에 자식을 가졌기 때문에, 2세기 후반부터 4세기 초반 흘해의 탄생까지 9대가 흐른 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320년 당시 우로와 파사는 신라의 간(干)이었으며, 실제로 우로는 고고학적으로 4세기 초반에 활동한 인물임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따라서 우로와 파사는 동시대 사람이며, 우로가 사망할 당시 흘해는 갓난아기였으므로 320년생이라 간주할 수 있다. 흘해의 모계를 추적하면, 혁거세-남해-아효부인-구추-벌휴-골정-골정의 딸-아이혜부인-명원부인-흘해로 흘해는 모계로는 혁거세의 9대손에 속한다. 명원부인은 혁거세의 7대손인 우로의 누이 아이혜부인의 딸로 3촌 조카이기도 하기에, 우로와 흘해는 고대 기준 조손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서에 따르면 파사는 혁거세의 3대손이지만, 막상 혁거세의 7대손인 우로와 동시대에 등장한다. 거기다 우로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320년에 갓난아기 흘해를 두고 사망하고, 우로-명원부인-흘해의 세대 차를 고려하면 우로는 3세기 후반 출생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파사의 재위기간은 고고학 연대에 따르면 4세기 초중반이기 때문에 우로와 동세대가 아니라 더 아래 세대일 가능성이 높다. 박씨 왕조의 기년을 인상하는 과정에서 조상 몇 명을 누락시킨 것으로 보인다.

석씨는 대수는 정확히 맞는 걸로 보이는데, 아효부인과 혼인한 게 정말로 탈해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족보에 따르면 탈해는 3세기 초반 인물인데, 학계에서는 석씨 왕조가 실제로는 3세기 중후반에 성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고학적인 석씨 족단의 사로국 출몰 시기도 그렇고, 석씨 왕조의 시조가 충돌했다는 금관국의 시조 수로왕의 치세가 3세기 중후반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석씨 왕조 특유의 꽉꽉 채운 대수를 고려하면, 3세기 중후반 석씨 왕조의 진짜 시조는 벌휴 이사금이고 석씨 왕조가 연대를 인상하는 과정에서 조부인 탈해를 내세운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석씨 족단이 동해 바다를 타고 내려온 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서 일어난 것으로 여겨지는데, 탈해는 처음으로 북쪽에서 배 타고 남하를 시작한 석씨 족단의 기념비적인 조상이고, 구추나 벌휴 대에 김해에 갔다가 김해 대성동 고분군 세력이 김해에서 확고부동한 우위를 점하며 수로왕의 금관국 왕조가 열리자 다시 배 타고 경주로 올라가서 사로국의 석씨 족단이 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 석씨 왕조와 금관국 모두 이상할 정도로 '석씨의 시조'와 '금관국 시조'의 충돌을 강조하는 신화가 내려오는 것으로 보아 석씨 왕조와 금관국의 형성 시기에 두 집단이 서로 한 번 충돌한 건 사실로 보인다.

그리고 석씨 왕은 '해(解)' 돌림이 많아서, 탈해 외에도 내해, 첨해, 흘해처럼 이름이 비슷한 인물이 여럿 존재하며 탈해 시절 기록의 일부가 실제로는 이들인데 탈해 시절로 인상되어 기록된 정황이 있다. 대표적으로 탈해와 금관국 왕이 신라군과 가야군을 데리고 전쟁을 벌였다는 기사인데, 해당 기사에서는 금관국의 왕이 정확히 누구인지 나오지 않는다.[8]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신라와 금관국이 군사를 이끌고 정면 충돌을 벌인 것은 빨라도 4세기 초중반에 가서이다. 실제로는 첨해나 흘해가 거등왕, 마품왕, 거질미왕 중 하나와 전쟁을 한 걸로 보인다.

석씨 족단이 3세기 중후반에 정착했다면, 아효부인과 혼인한 건 실제로는 왕후가 누구인지 아예 기록에 남지 않은 벌휴 이사금이고, 석씨 족단의 최초의 왕은 벌휴 이사금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

유리와 아효부인의 세대를 벌휴의 대수와 맞출 경우 유리와 아효부인은 혁거세의 4대손이 된다. 혁거세의 재위기간이 60년이라 기록된 점과 사서에서 남해와 석씨 족단과의 관계가 강조되는 점을 고려하면 남해는 유리와 아효부인의 아버지가 맞고 혁거세의 재위기간은 본인에 더해 혁거세와 남해 사이의 사이의 세대까지 합쳤다고 가정할 수 있다. 흘해가 혁거세의 9대손이라는 기록은 모계의 세대상 맞아 보이므로, 벌휴에 맞춰 세대를 조정하면 남해는 혁거세의 아들이 아니라 증손자(3대)일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60년이라는 재위 기록이 본인을 포함해 3대가 되어 맞아떨어진다.

이매와의 사이에서 내해를 낳은 내례부인은 사서에 따르면 혁거세의 5대손인데, 이매 또한 혁거세의 5대손으로 동세대이다. 사서에 따르면 유리에게는 정체불명의 딸 2명이 있었는데, 벌휴와 유리를 동세대로 배치할 경우 내해의 어머니 내례부인은 유리와 1대 차이가 난다. 따라서 내해의 어머니 내례부인은 유리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구도의 딸 옥모부인이 골정과의 사이에서 골정의 딸, 조분, 첨해를 낳았다는 건 세대가 맞지 않다. 따라서 유리의 나머지 딸은 골정의 부인 옥모부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골정, 이매는 외숙부인 유리의 딸과 결혼한 것이므로 4촌혼이 된다.

유리 이사금은 사서에서 왕후가 일지 갈문왕의 딸, 허루 갈문왕의 딸 박씨, 사요 갈문왕의 딸로 기록이 엇갈리는데, 파사가 유리의 아들로 기록되었음을 고려하면 한쪽이 오기인 것이 아니라 파사가 유리의 후손이라서 증조모, 할머니, 어머니가 모두 유리의 왕후로 기록에 남은 것일 수도 있다. 파사의 형으로 기록된 일성이 일지 갈문왕의 외손자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일지 갈문왕의 딸은 실제로 유리의 왕후였을 수도 있다. 또 허루 갈문왕은 사서에서 박씨와 김씨로 기록이 엇갈리는데, 허루 갈문왕 김씨는 사서에서 파사의 장인으로 나오며, 김씨 족단이 처음 신라에 출몰한 4세기 초반과 시대가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허루 갈문왕 박씨와 허루 갈문왕 김씨는 내례부인 박씨처럼 동명이인으로 보인다.

사서에 따르면 골정의 딸은 이매의 아들 내해와 4촌혼했기 때문에 세대가 같다. 골정의 딸이 4촌 내해와의 사이에서 낳은 게 아이혜부인, 이음, 우로이며, 아이혜부인은 골정의 아들 조분과 5촌/3촌혼을 한다. 아이혜부인은 5촌/3촌인 조분과의 사이에서 명원부인, 광명부인, 걸숙을 낳았으며, 명원부인은 아이혜부인의 형제 우로와 6촌/3촌혼을 해서 흘해를 낳았다. 파사의 주 활동 기간이 4세기 초중반인 점과 파사의 부인 사성부인 김씨가 4세기 초반 김씨 족단이 충주 금릉동에서 사로국에 이주한 뒤에 혼인한 것으로 추정되는 점, 파사의 4대손 박제상의 나이를 고려하면 우로(7대손)보다는 명원부인(8대손) 쪽이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경우 파사는 혁거세의 8대손이 되어 혁거세의 4대손인 유리의 세대에서 파사의 세대까지 4대가 삭제된다. 유리의 왕후가 사서에서 셋으로 오락가락하는 건 파사의 어머니, 할머니, 증조모가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9]

구도의 딸 옥모부인은 남편이 골정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골정-골정의 딸-아이혜부인-명원부인-흘해까지 4대 차이가 있는데, 흘해가 320년에 태어났음을 고려하면 골정은 3세기 중후반 인물이므로 고고학적으로 4세기 초반 인물인 구도의 딸은 골정의 부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4세기 중반에 활동한 남동생 미추는 '누나의 손녀'와 결혼했는데, 명원부인의 형제인 걸숙의 아들이 기림임만 확인될 뿐 부인이 누구인지 불명임을 고려하면 시대상 걸숙일 가능성이 높다.

광명부인도 실제로는 명원부인의 여동생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명원부인이 흘해를 낳은 320년과 광명부인이 세 아들을 낳은 380년대~393년까지 62년이라는 세월 차이가 있으므로, 부계도 아닌 모계에서 2대 차이는 비정상이다. 따라서 명원부인은 아이혜부인의 딸이 아니라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4세기 중반 미추가 '누나의 손녀'와 혼인하였고, 아이혜부인의 친손자가 기림, 아이혜부인의 외손자가 흘해임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처자식에 대한 기록이 일체 없는 기림이나 흘해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10] 그리고 4세기 후반에 보반부인아류부인이 각각 미추의 조카 내물과 미추의 종손인 실성과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

제상은 파사의 4대손인데, 파사가 걸숙과 동세대고 치술부인이 걸숙의 4대손일 경우 제상과 치술부인은 동세대가 된다. 다만 치술부인은 삼국유사에서만 기록에 나오고 어머니가 기록에 없는데, 실성 350년대생, 제상 370년대생 추정, 미사흔 393년생이고 아류부인의 언니 보반부인이 380년대~393년에 자식을 낳았고, 아류부인의 딸 차로부인이 410년대에 눌지와 혼인한 것으로 추정됨을 고려하면 아류부인은 380~390년대에 차로부인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치술부인은 아류부인의 딸보다는 실성의 전처의 딸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런 일련의 정황을 살펴보면, 신라 왕조, 특히 박씨 왕조의 세대 누락이 매우 심함을 알 수 있다. 박씨 왕조는 2세기 후반, 3세기 중후반, 4세기 초반까지의 사이가 전부 누락되어 있다 봐도 무방하다. 석씨 왕조는 유례를 제외하면 대수는 정확한 걸로 보이지만 석씨 왕조도 은근히 누락되어 있고, 김씨 왕조도 4세기 초반 옥모부인과 4세기 중반 광명부인을 3세기 중후반과 4세기 초반으로 당기는 등 세대 오류가 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신라 초기 왕조의 세대도 전부 신뢰하기는 무리가 있다.

4세기 신라에서 왕으로 불린 인물은 한둘이 아니었고, 사서에 기록된 인물들 외에도 일정 이상의 세를 가진 갈문왕과 여러 간들 또한 왕으로 불릴 정도의 권위는 갖고 있었다. 신라가 후대 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내물 이전 16명을 선택해서 기년 인상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도 후대 왕의 사건을 선대 왕으로 인상해서 기록한 정황이 있는 등 신라 초기 기록은 문제가 많다. 사서 편찬 과정에서 삭제된 박씨 왕들은 다른 왕들의 기록에 섞여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4.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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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신라 1권 (新羅 一)」 2권 「신라 2권 (新羅 二)」
혁거세 · 남해 · 유리 · 석탈해 · 파사 · 지마 · 일성 아달라 · 벌휴 · 내해 · 조분 · 첨해 · 미추 · 유례 · 기림 · 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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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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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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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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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年春三月 벌휴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다
二年春一月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사면하다
二年春二月 소문국을 정벌하다
三年春一月 주·군을 순행하다
三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三年秋七月 상서로운 벼 이삭을 바치다
四年春三月 토목 공사로 하여 농사의 시기를 뺏는 일이 없도록 하다
四年冬十月 북쪽 지방에 큰 눈이 오다
五年春二月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해 오자 구도에게 막도록 하다
六年秋七月 구도가 백제와 구양에서 싸워 이기다
七年秋八月 구도를 부곡성주로 좌천시키다
八年秋九月 치우기가 각성과 항성에 나타나다
九年春一月 국량을 아찬으로 삼고 술명을 일길찬으로 삼다
九年春三月 서울에 큰 눈이 오다
九年夏五月 물난리가 크게 나다
十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年春三月 한기부의 여자가 한 번에 4남 1녀를 낳다
十年夏六月 왜인이 먹을 것을 구하러 오다
十一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三年春二月 궁실을 중수하다
十三年春三月 가물다
十三年夏四月 왕이 죽다

특이하게 일식 기록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온다. 아마 박씨 왕실에서 석씨 왕실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혼란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천문 관련 학문이나 부서 혹은 사관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기 이전 신라의 일식 기록에서, 낙랑군이 고구려 제15대 미천왕에게 접수되는 시점인 4세기 초반 이전 기록들은 주로 낙랑군의 기록을 복붙한 것으로 해석되는 추세다. 신라의 일식 기록은 기년의 정확도가 대단히 의심되는 초기사 부분과는 달리, 하필이면 고구려가 낙랑군을 접수하는 4세기 초반까지는 어느 정도 교차검증되는 편이다. 가장 개연성있는 추측은 낙랑군 유민이 해당 기록을 갖고 신라로 들어왔거나 신라가 낙랑군과의 활발한 교류 과정에서 접수했다는 것인데, 현재로선 어디까지나 추측이 될 수밖엔 없다. 자세한 내용은 김용운 교수의 《한국수학사》 참조. 아마 일식 자체의 기록은 실제 있었던 기년과 일치할 가능성이 높지만 박-석 교체가 그렇게 무난하지만은 않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 원사료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연대를 배치할 때 해당 연대에 끼워넣었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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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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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제 청평군 박민 세조 알지왕 사요왕
 
 
 
 
 
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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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효
昔4
시조 탈해왕
지소례왕 일지왕 태조 성한왕 사요왕의 딸
 
 
 
 
 
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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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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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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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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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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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0px"[왕조 보기]
[朴] 밀양 박씨 왕조 [聖] 경주 김씨 성골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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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경주 김씨 마립간조 추존 국왕 및 왕족
[범례]
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1] 조분 이사금을 태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2] 내해 이사금의 부모는 아버지가 석이매, 어머니가 내례부인으로 적혀 있다. 이 내례부인이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내례부인과 같은 사람인지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3] 강종훈 교수의 《신라 상고사 연구》,《삼국사기 사료비판론》, 《한국고대사 사료비판론》 등 저서 참조.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총서 16권《삼국사기 초기기록, 이디까지 믿을 수 있나》등 참조[4] 한편 왕건의 선대로도 추정되는 고구려계 귀족 왕씨 가문의 정확한 출자는 현재로서는 불명이다. 고구려 편입 이전 낙랑군의 왕씨 가문은 두 종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건너온 가문, 왕조처럼 토착 낙랑인 출신임이 확실시되는 가문 이렇게 있었는데, 출자가 어쨌든 두 가문 모두 고구려에서 무려 삼백 여 년 이상 있었기에 고구려인이 맞지만 동북공정론자들은 왕건의 출신 가문이 전자라고 믿고 싶을 개연성이 강한 건 사실이다. 견훤의 이씨 가문은 사벌국 지배층 후예이자 5세기부터 400년에 걸쳐 대대로 신라 왕실 친위대로 복무한 가문으로 도중에 진흥왕소비 부여씨의 후손과 한 번 통혼한 걸로 추정된다. 왕건 가문은 6두품으로 대우받을 정도의 고구려 고위 귀족 출신이고 견훤 가문은 5두품이라도 400년간 신라 왕실 친위대를 대대로 해온 가문이었지만 그뿐이었다. 왕건과 견훤의 가문이 후삼국시대 다른 호족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할 정도 가문이었으면 사실을 그대로 밝히면 되지 각종 거짓부렁을 칠 필요가 없었다. 후삼국시대 다른 호족 가문들과 비교하면 격이 떨어지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딱히 높은 것도 아니었다.[5] 기년 인상은 2세기 후반 건국을 기원전 1세기로 인상한 백제도 했는데 백제는 기록의 부실함과 잦은 수도 이전 탓에 신라보다 기년 추적이 어렵다. 심지어 가계라도 양심적인 신라와 달리 백제는 근초고왕 이전 초고왕계와 고이왕계 가계를 심하게 왜곡했고, 기년이 정상화된 이후에도 가계 왜곡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구이신왕-비유왕, 개로왕-문주왕, 동성왕-무령왕, 위덕왕-혜왕) 무왕은 말기 임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계가 오리무중이다.[6] 반대로 고구려는 고고학적으로도 사서 건국 연대와 거의 같은 게 확인되지만 대신 53~165년까지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즉위기간, 나이, 가족관계, 세대가 엉망진창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광개토대왕추모왕의 17세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경우 유리명왕-고재사-신대왕 사이에 무려 4세대나 삭제되었다.(삼국사기에는 13세손이라 나온다) 그나마 고구려는 이들만 왜곡된 거지만.[7] 다만 이후에도 한동안 몇 년 정도 기년 인상이 일어났다는 가설도 있다. 그래도 이때부터 거의 정상화된 건 확실하다.[8] 수로왕의 사건이라 명확히 나오는 건 4세기 극초반으로 추정되는 파사 시절 국제 분쟁 해결을 금관국의 나이 많은 시조왕인 수로왕에게 대신 떠넘겼다가 한기부 보제가 결례를 범해서 소동이 일어나는 것뿐이다.[9] 이중 일지 갈문왕의 딸 박씨가 파사의 형 또는 조카인 일성 이사금의 아버지 또는 외조부라 기록된 점을 고려하면 파사의 어머니는 일지의 딸로 추정된다.[10] 기림이 아니라 흘해일 경우 흘해가 옥모부인의 딸과 혼인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