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퀼라를 들고 다니는 군인을 아퀼리페르(Aquilifer)라고 하며, 보통 베테랑 군인이 역할을 맡았다. 로마군은 아퀼라를 몹시 신성시해서 전투 중에 꼭 사수했고, 이와 함께하면 반드시 승리하리라 믿었다. 때문에 병사들이 우물쭈물하면 아퀼라를 전선 앞에 내세워 사기를 올리기도 했고, 병사들이 열의에 차서 아퀼라를 든 기수에게 앞장설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그 유명한 카이사르의 10군단이 해당 사례의 주인공. 이들은 브리타니아 원정 당시 브리타니아인들의 저항으로 해변에 상륙하는 것을 병사들이 우물쭈물하자 10군단 기수가 독수리 기를 치켜들고 앞서 상륙하면서 로마군의 상륙작전을 이끌었으며, 탑수스 전투 당시에도 앞선 파업으로 카이사르의 신임을 잃었다고 생각한 10군단 병사들은 기수를 재촉하여 명령없이 적진으로 돌진하기도 하였다.
또한 아퀼라가 적에게 빼앗기면 레기오 전체의 큰 수치라 생각했다. 때문에 적에게 노획되면 반드시 되찾아야만 했다. 이를 보여준 사례로 3개의 군단이 통째로 전멸했던 바루스의 토이토부르크 전투, 그리고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이 있다. 특히 크라수스의 파트리아 원정에서 기록적인 참패와 함께 원정에 참여한 독수리 군기들을 모두 분실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파르티아와의 국교 회복 조건으로 이때 파르티아가 탈취해간 독수리 군기의 반환을 요청했다. 파르티아가 이를 받아들이고 돌려주자,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외교 업적록에 적어둘 만큼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후 토이토부르크 전투 당시에 탈취당한 독수리 군기도 티베리우스 황제가 아르미니우스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2개를 되찾았다.
517년 집정관인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의 모습을 새긴 상아 조각품. 왼손에 아퀼라가 올라와 있는 셉터를 쥐고 있다.
아퀼라는 이후 동로마 제국 시기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허나 이전처럼 군기로 쓰이지는 않고, 집정관직과 황제를 나타내는 상징물 내지는 문장 도안으로 쓰였다. 때문에 이 시대 집정관의 모습을 새긴 조각은, 한 손에는 아퀼라가 있는 셉터를 쥐고 있는 자세로 묘사되곤 한다.
역대 동로마 황제의 초상을 찍은 솔리두스 동전에서도 아퀼라 셉터를 넣었다. 허나 이는 8세기 초 필리피코스를 마지막으로 끝난다. 필리피코스 이후의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적 상징을 더욱 선호했던 탓이다.[1] 물론 이는 황제들의 사정이고, 제국 신민들은 여전히 아퀼라를 상징으로써 즐겨 사용했다.
동로마 후반의 아퀼라는 디자인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데, 바로 머리가 하나 더 늘어난 것. 이는 고대 아시리아와 히타이트의 독수리 문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사키오스 1세가 본관인 옛 히타이트 지역과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고안한 것이다. 이후 팔레올로고스 치하에 와서 쌍두수리란 문장으로 정립된 해당 아퀼라는, 동로마를 넘어서 서유럽과 튀르크권까리 즐겨 사용하는 문장이 된다.
14세기의 신성로마제국 국기
15세기부터 멸망까지 쓴 문장
서로마를 부분적으로 계승한[2]신성 로마 제국 또한 아퀼라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옛 로마처럼 머리가 하나인 아퀼라를 사용했지만, 이후 15세기부터 동로마와 마찬가지로 쌍두수리를 사용했다. 해당 아퀼라는 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1]성상 파괴주의 운동으로 인한 우상물 금지 탓도 있고, 동서 대분열로 서방 카톨릭과 맞서는 동방 정교회의 수호자적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2]볼테르의 평과 함께 퍼진 오해와 달리, 옛 서로마인들과 교황 및 로마시로부터 인정받은 덕에 로마 칭호가 마냥 사칭은 아니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의 로마에서 멸망없이 이어져 온 십자군 이전 동로마에 비하면, 정통성이 없다시피 했던 것은 사실이다.[3] 러시아 제국은 동로마의 후계를,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제국은 서로마-신성로마의 후계를 자처했다. 불가리아와 오스만 제국도 그 시작은 튀르크족 위주의 국가였으나, 동로마 유민들을 흡수하면서 로마의 후예를 자처했다.[4] 황제 즉위 근거도 로마도 공화국이었다가 제국이 되었단 것에서 정통성을 찾았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