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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37대 내각총리대신 요나이 미쓰마사''' |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80년 3월 2일 | ||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 |||
사망 | 1948년 4월 20일 (향년 68세) | ||
홋카이도 쿠시로 지청 (현 홋카이도 쿠시로 종합진흥국) | |||
재임기간 | 제37대 내각총리대신 | ||
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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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해군대학교 (갑종12기) | ||
종교 | 신토 |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약력 | 제20대 제2함대참모장 제3대 제3함대사령장관 제26대 제2함대사령장관 제30대 사세보진수부사령장관 제33대 요코스카진수부사령장관 제24대 제1함대사령장관 제23대 연합함대사령장관 제39-41·49-52대 해군대신 제37대 내각총리대신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해군병학교 (29기) | ||
복무 | 일본제국 해군 | ||
1903년 ~ 1940년 1944년 ~ 1948년 | |||
최종 계급 | 대장 | ||
참전 | 러일전쟁 중일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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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군인, 정치인. 37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자 연합함대 사령장관. 4년에 걸쳐 해군대신을 지냈으며 해군성의 마지막 해군대신을 지내기도 했다.2. 생애
2.1. 초기
1880년 모리오카[1]의 번사였던 요나이 히데마사의 장남으로,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선거에서 낙선하고 사업에 실패해 집안이 곤궁해져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로 고학하며 대학교 진학 대신 해군병학교에 들어가 1901년 졸업했다.2.2. 군인 시절
이후 1903년 소위로 임관, 1905년 러일전쟁에 참가했다. 이후 1914년 해군대학을 졸업하여 러시아와 폴란드 주재무관으로 부임하였다. 1차대전 후에는 베를린의 주 독일 대사관의 무관으로 가 정보수집을 담당하고, 중국에서도 근무했다. 성격이 온화하고, 전투와 참모직을 오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었다.1930년, 중장이 되어 조선 진해요항부[2]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진해사령관 자리는 '사직 5분 전'이라느니 '유배형'이라느니 하는 소리가 도는 한직이었다. 요나이 제독 자신도 동기들에게 "언제라도 사임할 각오가 되어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 시절에는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후 1932년 3함대사령관이 되었고 사세보 진수부의 사령관으로 있을 적에 토모즈루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조사관인 해군중장 모리타 칸이치 제독이 사세보에 조사차 파견되었을 때 요나이는 좌천되거나 해임될 수도 있었으나, 요나이는 "이 사건은 해군의 근간에 관련되는 것이다. 나는 어찌되어도 좋으니 확실하게 살펴달라."라고 하였다. 이 말로 조사관이 오히려 크게 감격했다고.
연합함대 사령장관 당시 요나이 제독 |
1937년 2월에는 하야시 내각에서 제39대 해군대신으로 임명되어 해군대장으로 진급, 이후 제1차 고노에 내각, 히라누마 내각에서도 해군대신을 지냈다. 1938년 11월 25일에는 격화되는 중일전쟁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과 함께 하이난다오 공략을 주장했는데, 장차 대미 대영 개전을 위한 포석이라 생각하였다. 이 주장을 해군 상층부가 받아들여 하이난다오를 점령했다.
요나이는 제1차 고노에 내각 당시 나치 독일이 중재하여 중국과 협상한다는 계획에 찬성하였고, 히라누마 내각 안에서도 삼국동맹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차관. 이노우에 시게요시 해군성 군무국장과 함께 해군 좌파 삼인방으로 일컬어졌다.[3]
2.3. 총리 시절
제37대 총리 취임 후 |
중일전쟁 전사자의 유자녀들을 총리관저에 불러 위문하는 요나이 제독.[4] |
온건파인 요나이 제독을 해군 내 강경파뿐 아니라 육군도 싫어했기에 취임 당일까지 요나이 내각을 타도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취임 반년 후에 육군은 삼국동맹 체결을 요구했으나, 요나이 제독은 '독일 때문에 일본을 불구덩이로 밀어넣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러자 육군은 하타 슌로쿠(畑俊六)[5] 육군대신을 사직시켜서 후임 총리대신으로 밀면서 요나이 내각을 압박했다. 당시에는 육군대신, 해군대신은 히로타 내각에서 군부대신 현역무관제가 부활했기 때문에 현역 무관만 맡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그렇기에 후임을 세우지 않으면 내각은 무너졌다. 그렇기에 요나이 제독을 하릴없이 물러나야 했다. 히로히토 천황은 "요나이 내각은 이어질 줄 알았다. 저 내각이 없다면 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결국 요나이 내각 붕괴 직후 설립된 제2차 고노에 내각 시기인 1940년 9월 27일 삼국동맹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2.4. 이후
이후 정계에서 떠나 생활하다가 1943년 부건빌 섬에서 친구였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전사하자 아사히 신문에 추도문을 기고하고 국장의 위원장이 되었다. 당시 야마모토 제독을 신령으로 모시는 신사를 건립하려던 움직임이 있었으나, 야마모토 제독의 성격을 알았기에 이를 "야마모토가 싫어한다."라는 말로 반대해 계획을 중지시켰다.1944년 도조 히데키 내각이 쓰러지고 고이소 내각에서 다시 현역으로 복귀, 해군대신을 맡았다. 이 시기 가이텐의 제식화를 최종 결재했다. 고이소 내각이 붕괴된 후에 도조로부터 내각총리대신에 입각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총리직은 다시는 하기 싫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1945년 스즈키 내각에서도 해군대신을 유임하였다. 원래는 고이소 내각 퇴진 시 함께 물러날 생각이었으나 스즈키 간타로 총리가 부탁하여 유임했다.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6]와 함께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고 일본이 항복하는 데 앞장섰다.
육상(陸相)은 전황이 호각이라고 하는데, 부건빌, 사이판, 레이테, 이오지마, 오키나와에서 분명히 우리는 모조리 패했네. 개별 전투에서 무용담이 있었을지언정, 그것은 전쟁의 승패와는 다른 문제지... 일본은 이 전쟁에서 졌어.
항복 직전 일본 최고전쟁지도회의 중 결호작전을 주장하며 아직 전황이 팽팽하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에게 한 일갈.
그때까지 일본 육군은 중국 전선이나 동남아시아에 상당수 점령지가 남아있었고, 본토에서의 무차별 동원으로 그나마 쥐어짤 여력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해군은 말 그대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함선들은 모항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면서 미군의 공습 표적지가 되어버린 사실상 빈사상태였기에 더 현실적인 판단이 가능했다. 거기에 요나이 제독은 원래부터 유화론자였기에 적극적으로 항복을 지지했던 것이다.항복 직전 일본 최고전쟁지도회의 중 결호작전을 주장하며 아직 전황이 팽팽하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에게 한 일갈.
이 무렵의 일화가 하나 있다. 1945년 8월 12일 종전 직전, 주전파인 해군군령부 차장 오니시 다키지로 제독[7]이 종전반대의 입장을 천황에게 직접(!) 상주하자 요나이 제독은 격노하여 크게 꾸짖었는데, 그 소리에 문 밖의 초롱이 흔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종전 후, 요나이 제독은 전범으로 지목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들어갈 것을 각오하였으나, 미군은 그가 삼국동맹을 반대하였고, 기소된 前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이 요나이는 전범이 아니라 주장하여 도쿄 전범재판에 기소되지는 않았다. 다만 증인으로 출석해 전쟁 수행이 부당했음과 천황에겐 책임이 없음을 변호했다.
이후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과 시데하라 내각에서 해군대신을 계속 맡았으나 일본 해군은 이미 종전 후 무장해제된 마당이라 할 일이 없었다. 1945년 12월 1일 육군성과 해군성이 각각 제1복원성, 제2복원성으로 개편됨에 따라 물러나고 마지막 해군대신으로 남았다. 두 복원성은 시데하라 기주로 총리가 초대 제1복원대신과 제2복원대신을, 후임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제2대 제1복원대신과 제2복원대신을 전부 겸임했다. 제1차 요시다 내각에서 제1복원성과 제2복원성이 복원청으로 통합 격하되어 복원청 총재를 시데하라가 다시 맡았다. 복원청은 가타야마 내각 시절 폐지되어 제1복원국과 제2복원국이 후생성 인양원호원으로 이관되면서 폐지되었다. 이와는 별개로 제3차 요시다 내각에서 보안청이 설치되면서, 보안청은 제5차 요시다 내각에서 방위청으로 바뀌어 한동안 방위청으로 지속되다가, 2007년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에 들어서야 비로소 지금의 방위성으로 승격되었다.
전쟁 이후 고혈압, 뇌출혈로 쇠약해져 고생하다가[8] 1948년 4월 20일 폐렴으로 죽게 된다. 이후 1960년 고향인 모리오카 하치만 신사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모리오카 하치만 신사 경내에 있는 요나이 제독의 동상 |
3. 평가
중일전쟁의 확대와 대미전 개전 등을 반대한 선견지명과 호감을 주는 성격 등으로 일본 내에서도, 전후 미국 등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좋은 편이고, 국내에서도 그가 딱히 조선에 대해 악랄한 수준의 뭔가를 하지 않은 탓인지 나쁜 평가는 없다. 일각에서는 그가 해군선옥론을 대중에게 퍼뜨린 장본인이라는 주장이 있다.군국주의 광기의 일본 제국을 그리 좋게 보지 않던 소위 국까 성향의 인물로 '핵폭탄이 전쟁을 끝내줬으니 축복이나 다름없다.'는 투로 발언했기에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는 선견지명이었다. 만약 핵으로 전쟁이 안 끝났다면, 몰락작전이 실행되어 일본제국은 그야말로 멸망했을 테니까.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말년에 고혈압으로 고생하던 요나이를 가리켜 "목숨을 바쳐 일본을 구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마지막 일본 제국 해군대장인 이노우에 시게요시가 전후에 평가한 역대 해군대장 1등, 2등, 3등 대장 분류에서 1등 대장은 단 세명 뿐인데 요나이 미쓰마사와 야마모토 곤노효에, 가토 도모사부로다.
4. 기타
전후 요나이는 매일 정좌해서 쇼와 덴노의 옥음방송 815자를 정서하는 것을 죽을 때까지 일과로 삼았다고 한다. 이것을 부하나 지인들에게 선물했는데 가보로 간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9] 이런 풍습은 원래 불교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특정 불경이나 진언을 반복해서 쓰는 것은 같은 대승불교권인 한국에서도 현재도 여전히 시행되는 종교적 수행이자 신행방법이다. 요나이는 단지 그 대상을 불경이 아닌 옥음방송으로 했을 뿐.도쿄의 아자부에 위치한 주일한국대사관 관저는 원래 요나이가 별장으로 쓰던 곳이었다.
1935년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관으로 재임 당시 자기의 현역 생활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에 서술된 사건으로 인하여 1936년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친보되는데 요나이는 늘 사령장관이 되는것을 꿈꿔왔고 이것이 진짜 나의 마지막 영예라고 하며 굉장히 좋아했다. 하지만 임명된지 2개월만에 히로타 내각이 붕괴되고 하야시 내각이 조직되며 해군대신으로 임명되는데 명예롭던 직위인 연합함대사령장관을 포기하고 해군대신으로 옮겨가며 자신의 지인인 타카하시 미요시 해군대장에게 직위를 놓친 푸념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5. 매체에서
태평양전쟁을 다룬 매체에서는 꽤 자주 얼굴을 비추는 인물로 '지팡구'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모토 아키라가 연기했다)' 등에도 등장한다. 생각 자체가 없는 대부분의 일본군 상부에 비해 멀쩡해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조력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일본 패망 하루전'에도 등장하여 아나미 육군대신의 반대 측에 서서 종전을 강하게 주장한다.[10][1]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대신과 동향 사람이다. 정치적으로는 대립했지만 사적으로는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2] 일본해군에서는 군항의 등급을 진수부 - 경비부 - 요항부로 크게 나누었는데 이 중 요항부의 규모가 가장 작았다.[3] 해군대신은 내각의 국무대신으로 중요사안에 반대할 수 있었고, 해군차관은 해군성의 2인자, 군무국장은 해군성 내 각 국장 중 서열 1위의 자리였다. 해군성 내 가장 중요한 정무 결정라인에 삼국동맹 반대파가 앉아있었다. 이에 따라 당시 군국주의와 팽창정책에 동조하던 대중과 극우파들 사이에서 저 3명을 척살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고. 육군 측은 눈엣가시로 여기던 상황이였다.[4] 보통 육군 출신 정치인들이 퇴역 후에도 공직에 있으면서 육군 제복을 상시 입는 데 비해, 해군은 근무 시간이나 행사 외엔 사복 정장을 착용하는 경향이 있어서, 요나이 역시 사복 차림을 많이 했다. 사이토 마코토 제독이 조선총독 및 총리 시절 사복 정장 차림으로 근무한 것도 이런 경향 탓이다.[5] 전쟁 말, 고이소 구니아키 후임 총리대신을 결정할 때 도조, 고이소, 히로타 고키 등의 육군파가 총리대신 후보로 추천한 그 사람이다. 육군 원수의 칭호를 받았다. 나중에 도조는 육군이 본토방위의 근간이라며 본토결전을 속행하기 위해 그를 추천했으나, 정작 하타 원수는 본토결전에 반대했다. 서부 지역을 총괄하는 제2총군 사령관이었으나 2총군 사령부는 히로시마에 있었다. 사령관 본인은 원자폭탄 투하 당일 출장을 가 있어서 살아남았으나 사령관을 제외한 사령부 총원은 한 줌 잿더미가 되었다. 그리고 관동군 시찰을 나갔다가 소련군의 포로로 잡힌다.[6] 한국계 일본인이다.[7] 일본 패망 하루전에서 사코미즈 히사츠네 내각서기관장(오카다 게이스케 전 총리의 조카이다.)과 아나미 육군대신에게 2천만 국민을 카미카제로 쓰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했던 인물. 이 얘기로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에게 한 소리 듣자 헛소리하지 말라고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친다.[8] 2015년 개봉 영화, '일본 패망 하루전'에서 고혈압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혈압이 280까지 올라간다는 대사도 나왔다.[9] 서예를 해본 사람들은 한 자 한 자 정서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알 것이다. 자세도 힘들거니와 서예를 쓰려면 붓과 종이가 직각을 이뤄야 한다. 이런 상태로 한 획마다 정확하게 써야 하는데 이렇게 815자로 써야 한다면...[10] 여담으로 요나이 해군대신을 맡았던 배우 나카무라 이쿠지는 2016년 신 고지라에서 재해담당 장관으로 출연한다. 한편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는 우가키 마토메 역할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