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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히트 원더/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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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분류 기준3. 목록
3.1. 한국3.2. 미국
3.2.1. 메가히트곡 하나만의 원 히트 원더3.2.2. 탑텐히트곡 하나만의 원 히트 원더3.2.3. 중박히트곡 하나만의 원 히트 원더3.2.4. 소박히트곡 하나만의 원 히트 원더3.2.5. 대한민국에서 먹여살린 노래들
3.3. 영국3.4. 일본3.5. 기타 국가3.6. 분류 필요
4. 원 히트 원더로 오해하기 쉬운 사례
4.1. 미국에서 원 히트 원더가 아닌 경우4.2. 미국 외 국가에서 원 히트 원더가 아닌 경우4.3. 본진이 다른 경우4.4. 한국에서만 한곡갑4.5. 한 곡만 발표한 경우

1. 개요

원 히트 원더의 사례들을 정리한 문서. 원 히트 원더의 국내 사례 중 가장 많이 보이는 케이스는 드라마 주제곡으로 뜬 가수들의 경우이며 이들 거의 대부분이 후속곡을 발표하지 못했거나, 냈더라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채 잊혀졌다. 이 문서에 나온 노래는 그 중 일부일 뿐. (곡명 - 가수이며 곡명 가나다, 알파벳, 숫자 순으로 정렬)

주의할 점은 여기에 적힌 예들이 메가 히트곡이 아님[1]에도 불구하고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빌보드는 40위 권이라도 충분히 히트곡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장 규모지만[2] 우리나라 가요 시장이 탑40 정도의 인지도로 원 히트 원더라는 타이틀을 가질만한 규모인지 그리고 그런 타이틀로 붙여줄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또한 원 히트 원더인 가수로 오해하는 사례들은 1980년대에 음악을 들었던 분들이 봤을 때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케이스가 많은데 20년 이상의 세월과 세대차 때문에 해당가수를 잘 몰라서 벌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작성할 때 대충 쓰지 말고 신빙성 있는 자료를 찾고 난 다음에 작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세월의 영향 + 세대차 때문에 젊은 세대들이 모르는 관계로 인한 억울한 경우를 구분하기 위해 아래 문서의 첫머리에 분류 기준을 제시해 놓는다.

2. 분류 기준

원 히트 원더의 해외 사례 모음.

3. 목록

3.1. 한국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원 히트 원더/사례/한국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2. 미국

3.2.1. 메가히트곡 하나만의 원 히트 원더

3.2.2. 탑텐히트곡 하나만의 원 히트 원더

3.2.3. 중박히트곡 하나만의 원 히트 원더

3.2.4. 소박히트곡 하나만의 원 히트 원더

3.2.5. 대한민국에서 먹여살린 노래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에서만 주목받았던 해외 가요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말 그대로 한국에서 유독 인기를 끈 곡들을 말한다. 이런 노래들의 대부분은 순전히 곡 자체의 힘만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한국 방송 프로그램이나 한국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자주 쓰이면서 알려진 곡이라 한국에서만 인기를 끌었다.

꼭 원 히트 원더가 아니라고 해도 이런 경우는 있다. 가수 자체는 인기 가수지만 곡은 본국이나 다른 국가에서 별 주목을 못 받았는데 한국에서만 인기를 끄는 경우.

3.3. 영국

3.4. 일본

3.5. 기타 국가

3.6. 분류 필요

4. 원 히트 원더로 오해하기 쉬운 사례

4.1. 미국에서 원 히트 원더가 아닌 경우

4.2. 미국 외 국가에서 원 히트 원더가 아닌 경우

4.3. 본진이 다른 경우

미국 팝 시장은 세계 최고 규모를 자랑하는데다가 다인종 국가라는 특성상 많은 나라의 가수들이 미국시장 진출을 시도한다. 성공적으로 팝시장에서도 자리를 잡는 뮤지션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문화장벽이나 음악적 트렌드 등 여러가지 사유로 본토에서만큼 힘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미국 시장에 진출을 시도했던 곡, 혹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곡 하나만으로 기억되어 원 히트 원더 취급을 받는 가수들이 많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 사람들은 해외시장 진출을 시도할 만큼 본토에서 큰 입지를 다진 이들로, 커리어로 보면 결코 원 히트 원더가 아니다. 오히려 자국 음악계에서는 손꼽히는 가수들이 많다.

4.4. 한국에서만 한곡갑


음악 활동을 하면서 같은 음악만 주야장천할 수 없어서 가끔씩 다른 장르나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하기도 하는데, 하필 이 곡만 한국에서 딱 꽂혀서 뜨는 바람에 음악가의 실체와는 정 반대로 알려지는 케이스.

특히 이 장르는 해외 헤비메탈 밴드가 특히 심하다. 한국은 하드 록, 헤비메탈 씬이란게 사실상 없는 반면, 일본과 함께 하드 록의 연주에 발라드의 작법을 적용한 일명 록발라드라는 장르가 대중적인 장르로 독립되어 있다. 그래서, 일부 헤비메탈 밴드들 중 딱 1곡이 록발라드의 정의에 부합한 덕에 그곡만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서 그 곡만 집중적으로 노래방서 연습하는 친구들은 물론이고, 그걸 들으려고 전체 앨범을 샀더니 정반대로 두구두구쿵쾅쿵쾅하는 바람에 놀라서 앨범을 환불하는 사례가 가끔씩 등장한다.

4.5. 한 곡만 발표한 경우



[1] 예를 들어 가요톱텐이나 인기가요같은 가요 프로그램 차트에서 20~30위권 정도의 인지도인 노래.[2] 탑100에만 들어도 가수로서 인지도가 생기고 탑40여도 밥 걱정은 안 하며 탑10이면 신세를 고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런데 현실은 이러한 농담보다 더해서, 40위권까지 안 가고 최소 Top100에만 들어도 밥벌이는 된다고 봐도 되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팝 시장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3] 1993년을 비롯한 1990년대와 2000년대는 미국 흑인 음악의 최전성기였다. 이 연말 차트 성적 역시 이를 대변한다.[4] 신기록을 깰 정도로 큰 히트를 했던 곡도 연말 차트 1위를 기록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미국 음악 시장이 얼마나 크고 복잡한지를 보여준다.[5] 나나 체리의 동생이기도 하다.[6] 다만 본토인 미국과 달리 호주에서는 .'Thank you(2위)', 'God only knows(11위)', *American dream(40위)가 50위 안에 들며 인기를 얻어서 호주 한정으로는 원 히트 원더가 아니다.[7] 1963년 4월 12일 도쿄도 가츠시카 구 출신으로 현재 가면라이더 히비키의 주제곡을 부른 후세 아키라의 둘째 부인이기도 하다. 참고로 후세 아키라는 당대 최고의 미국 배우이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한 영화배우인 올리비아 핫세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89년에 이혼 후에 한참있다가 2013년에 모리카와 유카리와 재혼했다.[8] 오리콘 주간 1위, 레코초쿠 다운로드 월간 9위.[9] 1958년 9월 1일생의 여성보컬인 Armi는 본명이 Armi Anja Orvokki Aavikko이며 2002년 01월 02일에 폐렴으로 인해서 향년 43세로 사망했다. 남성보컬인 Danny는 1942년 9월 24일생으로 본명은 Ilkka Johannes Lipsanen이며 현재도 음악활동을 솔로로 계속하고 있다.[10] 핀란드 원판 뮤직비디오, 미국 패러디, 영국 패러디, 일본 패러디[11] 트랩의 대가라고 불리는 Gucci Mane이 피처링을 했다.[12] The Chi-Lites의 1971년 노래 커버.[13] 1990년~1991년 사이 빌보드 핫 100 4위, 1991년 빌보드 연말 차트 57위.[14] 1989년 빌보드 핫 100 6위, 1989년 빌보드 연말 차트 88위.[15] 1989년 빌보드 핫 100 10위[16] 1991년 빌보드 핫 100 7위, 1991년 빌보드 연말 차트 70위.[17]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쓴 노래를 커버한 것이다.[18] 원곡은 더 라스가 불렀다.[19] 배드핑거도 성공을 못한 건 아니라서 1970년대 초반 빌보드 핫 100 10위 권 안에 들어가는 히트곡 3개를 내놓긴 했다. 1970년의 Come and Get It이 핫 100 7위, 같은 해의 "No Matter What"이 핫 100 8위, 1971년과 1972년 사이에 Day after Day가 핫 100 4위. 이 외에도 1972년의 "Baby Blue"가 빌보드 핫 100 14위를 거두는 등 어느 정도 성공하긴 했다.[20] 사실 부진이라기보다는 틴팝 아이돌에서 벗어나 음악적인 성숙을 이룬 것으로 보는 게 맞다. 떨어진 판매량과는 반대로, 이후로 발매한 앨범들이 평단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기 때문.[21] 한국으로 치면 '홍대여신'처럼 인디 음악계의 뮤즈라는 뜻.[22] 1966년 12월 27일에 싱글로 발매되었다.[23] 1967년 11월 21일에 싱글로 발매되었다.[24] 본래 빌리 퓨리의 백밴드였다.[25] 꽤 흥미로운 사실인데, 이 곡은 세계 여러 국가 중에서도 일본에서 아주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것도 뒤늦게. 1972년 당시에는 일본에서 별 반응이 없었지만, 이 노래 특유의 단순하고 활기찬 멜로디가 일본인들의 취향에 잘 맞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1976년 다니엘이 재발매한 버전이 오리콘 차트에서 15주 연속 1위를 했다. 일본에서만 무려 약 200만 장을 팔았다. 오리콘의 조사에 따르면 이는 현재까지 일본에서의 해외 아티스트 싱글 최다 판매량이라고 한다.[26] 상당히 짠내나게 해체한 케이스인데, 우선 히트를 했음에도 밴드가 와해되어 버렸고 차기작 작업 당시엔 4명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Come on Eileen의 명성이 있었기에 멤버 케빈 롤런드는 심혈을 기울여 Don't Stand Me Down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난산 끝에 나온 앨범은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Come on Eileen같은 팔릴만한 싱글은 하나도 없었고 판매량은 처참하게 망하고 말았다. 여기다 제작 과정에 질려버린 멤버들이 전부 탈퇴하면서 밴드 역시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덕분에 Don't Stand Me Down은 팝 역사상 불운한 걸작 앨범을 꼽을때 자주 거론되는 편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추억팔이 공연 정도는 하는 것 같다.[27] 특이하게 양 극단으로 다 있다. Before the Dawn은 그룹 유일한 락발라드인데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제법 있는 반면, 페인킬러는 원래 JD의 스타일이 아닌 스래쉬 메탈을 받아들인 케이스인데 대표곡 취급받는다. 실제로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곡은 Breaking The Law.[28] 페인킬러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전성기였던 80년대 스타일에 비하면 굉장히 이질적인 앨범이다. 대표곡인 Breaking the Law나 Metal Gods같이 미드템포에 보컬이 중간 음역대에서 주로 노는 곡들도 많고, 페이스 빠른 곡들도 Freewheel Burning, Screming for Vengeance 정도이지 페인킬러처럼 스래쉬 메탈 스타일로 곡 내내 미친듯이 내달리는 곡은 없었다. 이 앨범에서 첫 합류한 드러머 스캇 트래비스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더블(베이스)페달을 보다 많이 활용하며 스타일이 확 달라으며, 80년대와 달리 신디사이저를 거의 쓰지 않은 것도 큰 차이점이었다. 오히려 후반부의 A Touch of Evil같은 곡이 기존의 스타일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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