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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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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및 성장2. 고려대학교 입학과 6.3 항쟁3. 현대건설 평사원에서 사장으로4. 제14-15대 국회의원5. 제32대 서울특별시장6. 제17대 대통령
6.1. 대통령 선거6.2. 이명박 정부
6.2.1. 재임 시절 주요 사건
7. 퇴임 후
7.1. 구속7.2. 재판7.3. 수감7.4. 사면 및 복권 이후

1. 출생 및 성장

일제강점기였던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마을에서 아버지 이충우와 어머니 채태원 사이의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이충우는 원래 포항 흥해읍이 고향인데, 대구 반야월 출신의 채태원과 결혼한 뒤인 1935년에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목장 노동자로 생활하고 있었다. 이명박의 형제들은 모두 상(相)자 돌림인데 이명박만 그렇지 않은 이유는, 어머니가 이명박을 임신했을 당시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는 밝을 명(明)에 넓을 박(博)으로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1] 다만 족보에는 다른 형제들처럼 돌림자에 맞춰 이상정(李相定)으로 올라가 있다. 이 때문에 17대 대선 당시 '형제들과 어머니가 다르다'는 의혹을 받아 DNA 검사까지 받는 일도 있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이명박은 가족들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여 경북 영일군 흥해읍[2]덕실마을에 정착했고, 2년 후 포항읍내로 이사했다. 한국으로 오는 귀국편 여객선이 침몰하여 일본에서 모아둔 재산을 모두 잃고 목숨만 겨우 건졌다고 한다. 극빈층이 되어버린 일가는 포항에 정착한 후에도 아버지는 계속해서 목장 노동자로 일했고 어머니는 과일행상을 했다.

초등학교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당시 북한의 폭격으로 인해 바로 위의 누나인 귀애와 막내 남동생 상필이 사망한다. 전쟁 때문에 집안 형편은 더욱 나빠졌고, 이명박의 가족은 단칸방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이명박은 중학교에서도 수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집안 형편도 어렵고 3남으로서 고등학교에 진학할 상황이 아니었다. 전교 2등을 했는데 이 성적이면 도내 명문고인 경북고등학교에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형편상 진학이 어려워[3] 부모님을 담임교사가 불러서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를 추천하였고 진학하게 된다.[4] 낮에는 거리에서 뻥튀기과일 등을 팔며 일했고, 밤에 공부한 이명박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내내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이명박 형인 이상득의 주장에 따르면 아버지가 동지상고의 재단이사였기에 형제가 모두 동지상고로 진학했다고 하며# 이를 두고 사실 이명박 집안이 가난하지 않았던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으나, 이상득 증언에는 집안형편에 대한 분명한 묘사가 없고 같은 신동아 기사 중 이명박의 은사인 동지상고 교사 인터뷰에는 이명박이 야간반을 다녔고 등록금을 대기 어려운 형편에 밤에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증언#했으니 그 시절 고등학교 재단이사라는 것이 지금처럼 대단한 지위가 아니라 월급쟁이 소시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 고려대학교 입학과 6.3 항쟁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합숙소에 들어가 일당 노동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명박은 동숭동, 안암동, 신촌 대학가를 돌아다니며 대학생에 대한 선망을 가지게 된다. 이후에 포항중학교 동창을 찾아간다. 그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친구였다. 그 학교를 나와 대학을 가겠다고? 현실적으로 무리다. 포기하라고 했지만, 형인 이상득은 이명박에게 '기회는 오니까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라'는 취지의 편지를 보냈다. 대학을 갈 수 있을거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구해서 대학 입시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입시 준비라는 것이, 낮에는 일당 노동자로 일을 하고 밤에 합숙소 구석에서 작게 불을 켜놓고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합숙소에서 같이 생활하던 다른 노동자들에게서 '잠 좀 자게 불 좀 끄라'는 원성을 듣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과정 끝에 결국 1961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합격하게 된다. 당시 고려대학교 경영학은 신설되어서 경쟁률이 높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5]

파일:경향신문 1961년 3월 14일 석간 3면2.jpg
경향신문 1961년 3월 14일 석간 3면에 실린 고려대학교 합격자 명단이다. 붉은 동그라미 표시가 이명박.[6]

합격 당시에는 대학 중퇴 학력을 만들기 위해 등록만 해놓고 자퇴할 생각이었으나, 1학기 이상 다녀야 학적이 생긴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고 좌절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이태원 시장에다가 이명박의 사정을 말하고 다녔고, 시장 전체에 소문이 났다. 이후 시장에서 평판이 매우 좋았던 어머니[7] 덕분에 시장 상인들이 돈을 모아 이명박에게 등록금을 선불로 주고, 시장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일을 시켜 갚도록 한 것이다. 그 돈으로 이명박은 처음 의도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학 입학 후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은 계속되었고, 이런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2학년 1학기 때 군입대를 결심하게 된다.[8] 그러나 논산훈련소 신체검사에서 기관지 확장증으로 귀가조치되어 병역면제 처분을 받았다. 이때 군의관은 도대체 스무 살밖에 안 된 놈이 몸을 어떻게 굴렀기에 이 모양이냐며 군대에서도 이런 몸은 안받아준다고 일갈했다. 이에 이명박은 군 생활 하며 치료를 받고 싶다고 입대를 허락해달라 사정했지만 군의관은 군대가 무슨 요양소냐고 되물으며 단칼에 거절했다.[9] 어릴 적부터 몇 달을 드러누워도 병원비 때문에 병원에 한 번 가본적 없는 이명박은 이때가 돼서야 비로소 축농증기관지 확장증이라는 지병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시기에 대해 이명박은 '남들은 군대를 빼고 싶어서 여러 연줄을 동원하는데, 자신은 군대에 가고 싶어 안달난 마치 열악한 군대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군대를 가고 싶었어도 몸 때문에 맘대로 가지도 못했다.'고 자평한다.[10]

복학 후 3학년 때는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64년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한일수교를 강행하자 이명박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서 이에 반대하였다. 한일수교에 반대하는 6.3 항쟁이 일어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시위의 주동자[11] 중 한 명이었던 이명박에게도 수배령이 떨어져 도피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경찰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자 결국 자수하여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자수 후 선고가 내려지고 풀려나기까지 6개월 동안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딱 한 번 면회에 와서, '가 자랑스럽다'는 이야기를 짧게 하고 돌아간다. 출소 후, 12월 15일에 이명박의 어머니 채태원은 심장병이 악화되어 사망하게 된다. 이명박은 이 한 해가 가장 큰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한다.

파일:이명박_민주화운동.jpg
6.3 항쟁 주동자로 재판을 받는 당시 이명박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우측에서 세번째)

파일:63항쟁주동자계보도.jpg
6.3 항쟁 당시 경찰 문건(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에 시위 주동자로 기록되어 있는 이명박#

6.3 항쟁 때 이명박과 함께 활동했던 인맥들은 6.3 동지회를 결성해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곤 했는데, 그 중에 당시 중앙대학교 학생이었던 이재오경기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손학규도 있었다. 훗날 이 세 명은 김영삼 대통령이 발탁하여 정계에 입문하고 보수정당에서 같이 정치활동을 하게 된다.

3. 현대건설 평사원에서 사장으로

파일:Abj7sPo.jpg
현대건설 신입사원 시절 증명사진
이명박은 현대건설 입사 필기시험에 합격했음에도 학생운동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전과 때문에 최종입사가 불가능하게 되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젊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막는다면 국가가 영원히 책임지게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부당한 취직방해를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이에 이낙선 청와대 민정비서관은 이 문장에 깊이 감명받아 현대건설에 이명박의 과거를 문제 삼지 말도록 조치했다. 면접에서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창조입니다"라고 답했고, 결국 1965년 현대건설 경리과 평사원으로 입사하게 된다.

훗날 정주영 회장은 이명박에 대해 "얼굴은 새카만 녀석이 눈은 살아있었다. 한쪽 눈이 찌그러져 있는데, 똘망똘망하게 보여 합격시켰다. 나중에 청와대에 갔더니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명박이라고 있지요? 아주 고약한 녀석인데 정치권에 기웃거릴 줄 알았더니 현대로 갔더군요. 인간 좀 만들어 보세요.'라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에게 "이명박을 잘 보라!"며 감시 할 것을 주문했지만, 정 회장이 "이명박을 잘 돌봐줘라"는 말로 오해했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이는 카더라 통신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에 학생운동 출신이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쓸 정도로 이명박이 배짱이 있다는 점을 정주영이 눈여겨 보았을 수도 있다.
파일:정주영 회장과 함께.jpg
정주영 회장과 함께

1965년(24세) 평사원으로 입사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1968년(27세)에 과장, 1969년(28세)에 부장, 1971년(30세)에 이사, 1973년(32세)에 전무, 1974년(33세)에 부사장, 1977년(36세)에 대표이사 사장, 1988년(47세)에 회장[12]본인이 직접 현대건설 회장을 현대그룹 회장직과 겸하고 있다가 현대건설 회장직을 직접 이명박에게 물려준 것이다.]에까지 올랐다[13]. 이와 관련해서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이명박이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현대건설 사장 조성근의 아내 김보환[14]과 가수 태진아가 간통한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었는데, 이 사건 덕분에 이명박이 사장이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여 대통령까지 했으니 태진아가 나비 효과를 일으켜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셈이라는 말이 인터넷상에서 떠돈 적이 있었다. 하지만 태진아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이명박의 사장 취임은 간통 사건이 발생하고 2년이 지난 1977년에서야 이루어졌으며,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하는 건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매우 일반적인 일이므로 그 사건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조성근은 박정희 대통령과 5.16 군사정변의 동지로, 예비역 소장이었다. 건설부 장관을 지내다가 낙하산으로 현대건설에 와서 5년 채우고 다시 국제그룹 산하 대하건설 사장으로 옮겨갔다. 즉, 정주영 회장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조성근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감독하기도 했다. 그는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경부고속도로는 정상적인 공사가 아니었다. 전투였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당시 경부고속도로 공사는 부족한 기술로 짧은 시간에 완공하려다 보니 북한의 건설현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인명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현대건설 사장 재임 시절엔 이라크 건설 수주에 주력하였다. 당시 현대건설은 중동에서 연이어 터진 전쟁으로 막대한 공사 미수금이 쌓여 있었고, 대금 회수에 차질을 빚던 상황이었다. 이명박은 공적 자금을 투여받은 후 각종 국내외 공사를 무난히 진척시키며 위기를 극복했으나, 이라크 정부로부터 공사미수금 2억 달러(당시 1조 703억 원)를 회수하는 것은 실패했고, 이는 2000년 현대건설 부도의 원인이 되었다는 시각이 있다.[15] 이명박 본인도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나의 전쟁은 패배로 끝났고, 원인이야 무엇이든 회사가 손해를 봤다면 관련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조직의 냉엄한 생리'라며 책임을 느끼는 듯이 기술했다. 완공(1985년) 당시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페낭대교를 건설하기도 했다.
파일:hyundai_mb.jpg
말레이시아 건설 현장을 순시하는 이명박

1990년 KBS 2TV 주말 연속극 야망의 세월이 방영됐는데 현대그룹의 성장사를 다룬 드라마였다. 문제는 주인공이 이명박이었고, 이명박이 '중소기업이었던 현대를 대기업으로 키웠다'라는 내용이었다.[16] 당시 야망의 세월은 최대 시청률 50%를 찍을 정도로 대인기였고 드라마가 방영될 수록 이명박은 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샐러리맨의 신화가 되어갔다.

정주영 회장은 야망의 세월에 대해 '작가의 장난'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자신과 다른 직원들이 주도했던 일까지 전부 이명박의 치적으로 묘사되었고, 이명박이 하지 않은 일도 이명박이 한 것처럼 과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17] 이명박의 현대건설 입사동기이자 미국 건설회사 벡텔의 부회장을 지낸 이상백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현대건설은 자신들이 입사할 때부터 이미 국내 5대 건설사 중 하나였고, 현대건설의 성장은 전적으로 정주영 회장 덕분이며 모든 아이디어, 전략, 결단은 정 회장에게서 나왔고 그 외의 사람은 모두 스태프일 뿐이라며 '이명박 신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평했다. 다만 그러면서도 그는 이명박을 '그 스태프 중의 수장'으로 표현했고, 부지런함이 세계 금메달감이었으며 그러한 근면성실함으로 정주영 회장의 신임을 받았다는 등, 기업 입장에서 훌륭한 직원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는 정주영 회장 역시 '그런 면이 인정되어 승진이 빨랐다'며 높이 사는 부분. 이명박은 회사 일을 하면서 사적으로 이익을 취한 적도 없고, 아랫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고 한다.정주영 시사저널 회고록

이명박이 중소기업 현대를 대기업으로 키웠다는 것은 엄연히 사실이 아니지만, 이명박 개인이 짧은 시간 동안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젊은 나이에 대기업 회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샐러리맨 신화'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과 정주영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틀어진 것은 정주영 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며 정계에 진출할 때부터였다. 이명박은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치를 하기보단 기업에 남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며 정주영의 정계 진출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 무렵 이명박은 조선일보에 정주영 회장의 정계 진출 계획을 제보하기도 했다.이명박, '정주영 대선출마' <조선>에 흘려 이후 정주영은 1991년 12월 이명박에게 "나와 함께 정치를 하든지, 아니면 현대에서 나가든지"라는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줬고, 이명박은 결국 사표를 내고 현대를 나왔다. 이명박은 이것에 대해서는 자서전에서 '현대라는 재벌이 정치 참여를 통해 권력을 갖게 됐을 때 사회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했지만, 재벌 총수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것이 내가 정 회장의 창당에 반대한 이유였다'고 밝혔다.

중기공장 부장 시절에는 직원들이 화투판을 벌이자 기강을 잡기위해 출근시간을 7시에서 6시로 앞당겼고 맨손체조와 구보를 도는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 때 여직원들도 예외는 없었으며 그것 때문에 여직원들은 화장때문에 30분 늦춰달라 아우성을 쳤다.

4. 제14-15대 국회의원

(출처: 정치합시다)

1992년 정주영 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14대 총선 정국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와중에 현대를 나온 이명박은 경제 전문가 영입이라는 명목으로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14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에 출마하게 되면서[18] 정주영과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이명박은 해당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한편 뒤이어 치러진 14대 대선에서 정주영은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고 3위로 낙선했다.

1995년 대정부질문에서 이명박은 서울~부산 간의 운송비가 부산~미국 LA 간의 해상운송비보다 비싸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강낙동강을 연결하는 '경부운하'를 건설할 것을 김영삼 정부에 제안했는데, 이때 이명박의 한반도 대운하 구상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1995년 국회의원 임기가 아직 1년 남아 있었지만, 같은 해 처음 민선으로 치러진 서울특별시장 선거 후보자 선출을 위한 민주자유당 경선에 출마하였다. 최종 경선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정원식 前 국무총리에게 패배하였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정치신인임에도 불구하고 11~14대 종로구 국회의원 이종찬, 그리고 노무현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19] 그러나 그의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이 그의 선거비용이 법정비용을 초과했다고 언론에 폭로했다. 그 뒤 김유찬은 말을 바꿔 폭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서신을 쓰고 미국으로 도피하였다. 이명박 측에 의하면 김유찬은 1996년에 5급 비서관으로 승진시켜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종찬 후보에게 3억 원을 받기로 하고 폭로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그러나 김유찬은 이종찬 후보 측으로부터 받은 돈은 50만원이 전부라며 부인했다.

위 사건으로 이명박은 1997년 9월 1심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700만 원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1998년 2월에는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도전하기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같은 해 4월 항소심에서 벌금 400만 원이 선고되어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결국 서울시장 경선을 포기하고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객원연구원으로 떠났다. 이명박의 사퇴로 무주공산이 된 종로구에서는 재보궐선거가 실시되었고, 노무현 후보가 다시 도전하여 당선되었다. 1999년 4월 대법원에서 벌금형이 확정되어 이명박의 공직선거 피선거권이 박탈되었다. 그러나 1년 후 광복절 특사사면복권되었다.[20]

5. 제32대 서울특별시장

5.1. 이명박 시정(2002~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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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명박서울시장선거벽보.jpg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출마 당시 선거벽보
파일:external/www.allinkorea.net/2007101435461006.jpg

피선거권이 회복된 것을 계기로,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서울특별시장 선거 후보로 선출되어 출마하였다. 당시 여당의 후보는 당시 떠오르던 청년 정치인 김민석.[21] 여론조사에서는 오차범위 내로 상당히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김민석으로부터 과거의 여러 의혹을 제기받아 이때부터 과거 비리가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사업'과 '대중교통 체계 개편'을 공약으로 내걸어 일찌감치 분위기를 잡았고, 후보토론에서도 판정승을 거두며 52%의 득표율로 당선에 성공했다. 이명박은 1941년 생, 김민석은 1964년 생이니 완전히 조카뻘인 상대와 싸워서 이긴 셈이다.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생겨난 별명은 불도저 시장.[22] 특유의 추진력으로, 그리고 현대건설 CEO 경력을 살려서 토목·건축적인 정책을 밀고 나가 서울 외관을 바꿨다고 해서 생겨난 별명이다.

좌파나 진보적 성향 정치평론가도 "대통령 이명박"의 행적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서울시장 이명박"의 행적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당시에 야당 쪽 인사임에도 초창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도 의외로 괜찮았었다. 노 전 대통령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행정력을 신뢰해서 팍팍 지원해줬고 이 시장도 노 전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하는 등 대통령-야당 주요인사로서의 관계는 이상적이었다고 평가해도 될 정도였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장 이명박을 욕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후술할 몇몇 사건들 때문이다.

파일:이명박히딩크.jpg

이른바 히딩크 기념사진 사건. 이명박이 서울시장에 당선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거스 히딩크 감독에 대한 명예 서울특별시민증 수여식을 하기 위해 히딩크를 서울시청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히딩크의 얼굴 한번 보려고 오는 서울시민들을 경찰력으로 차단한 뒤 한다는 짓이 바로 자기 아들 이시형과 히딩크를 같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게 한 것이었다. 이 당시의 이시형의 복장도 참 가관인데 공식석상임에도 불구하고 반바지에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굉장한 결례다. 특히나 그 자리에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도 있었던 자리였다.

또 하나의 잘못은 이명박의 서울특별시장 선거 유세에 동원된 아르바이트생들의 급여를 착복한 일이었다. 물론 아르바이트생들과 소송이 붙었고 그로 인해 착복한 급여를 정상적으로 지급 조치했다.

게다가 "서울특별시 전체를 여호와 하나님모두 다 바치겠습니다."라는 발언을 해 서울 시민들 중 비기독교인들, 특히 불교 신자들을 분노하게 했다.#[24][25]

취임 후, 공약대로 청계천 복원사업을 시행하여[26] 우여곡절의 과정 끝에 공사는 마무리를 짓는 데 성공하였다. 이명박의 서울 시장 대표적인 커리어이자 그를 대통령으로 진화시킨 최대의 교두보로 화자되지만, 임기 내에 끝내려는 무리한 시도 때문에 이런저런 도 많은 공사였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2004년 서울특별시 대중교통체계 개편 역시 주요 커리어로서 교통 카드 티머니도 이때 도입되었고 버스의 번호는 지역에 따라, 색은 종류에 따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였으며 이용 요금은 환승 횟수가 아닌 이동 거리 비례로 바꿔 당시 어려웠던 버스 회사의 재정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또한 부분적으로 시행되던 중앙버스전용차로제를 서울시 전체로 확대하여 대중교통의 질을 높이기도 했다. 2007년 타임지에서는 위 2가지 정책을 높이 사 '환경 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이 인정하는 성공적인 정책이지만, 당시에는 버스번호가 늘어나서 중, 장년층이 외우기 어렵다는 등 상당수의 불편하다는 반응도 잠시 있었고, 버스에 붙여놓은 G, R, Y, B[27] 로고 때문에 지랄염병 버스라고 비난받기도 했다.[28] 이후 해당 칸에 광고를 붙이면서 영문자 로고는 사라졌다. 특히 이 점은 한글 단체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이 개편 정책은 2004년 7월부터 적용되었으나 2003년 말부터 출고하는 버스는 미리 개편된 체계에 따라 새 디자인으로 도색하고 나왔다.

이 외에도 뉴타운 사업 및 서울숲 조성, 숭례문 개방 등을 통해 대선을 향한 고지를 밟아간다. 아리수 브랜드화[29]도 이명박 시장의 성공적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한편 이명박 재임 시기는 스타크래프트 열풍이 제대로 불었던 시기였는데, 취임 1주년쯤 된 시기에 WCG 2003에서 우승한 이용범과 스타크래프트 대결을 해 화제를 불러 모았다.[30] 이 시기에도 60을 넘긴 할아버지였기에 젊은 층에 큰 어필을 할 수 있었다. 또 정치인이 꼽사리껴서 민폐 끼친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 무려 6개월이나 연습을 했다고는 하나, 아쉽게 4드론으로 5분만에 게임이 끝났다고.[31] 그와중에 기사에 따르면 정찰기를 잡았다고 하나 저저전이므로 스포어 콜로니가 오버로드를 잡아낸 게 아니고서야 드론을 잡은 걸 기자 멋대로 번역해 정찰기라고 적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이용범은...

잘 언급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서울 시내에 많았던 경유버스들을 천연가스 버스로 전면 개편하기 시작한 것도 이명박이다. 오세훈 시장에 와서 완성된 이 사업도 미세먼지가 이슈가 되고 있는 현재와서 다시 호평을 받는 사업. 실제로 지금까지 연구결과를 보면 미세먼지가 늘어나는 국내 요인 중 노후한 경유차에 의한 부분이 꽤나 크다는 결과가 많다. 또 실제로 경유 버스가 줄어드는 기간에는 매년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가 감소하기도 했고. 이 역시 초기에는 미비한 천연가스 충전소 보급이나 떨어지는 엔진 출력, 연비 문제로 불편함을 호소하는 버스 기사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반면 이명박 때 대중교통 정책의 유일한 오점이라면 굴절버스 도입. 이명박 재임 때던 2004년에 굴절버스를 대거 도입했으나 문제는 비용 절감을 이유로 검증되고 한국에서 테스트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스카니아 옴니시티가 아닌 이베코-이리스버스의 시티클래스를 도입하면서 처참하게 망했다. 성능도 딸려서 냉난방 풀로 돌리면 가속도 안 되고, 이 냉난방이 완전 자동에 수동으로 조절도 못 해서 승객들이 크게 불편해했다. 거기다 고장은 시도때도없이 나는데 부품은 들여오려면 2~3주는 기본이었다. 당시 굴절버스는 잘 굴러가기만 했다면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냈지만 문제는 잘 굴러가지도 않는 산업 폐기물이나 다름없던 버스의 문제 때문에 새로 굴절버스는 도입되지 않았고 내구연한의 반도 채우지 않은 채로 오세훈이 재임하자마자 빼버리더니[32], 박원순 재임 때는 단 한대도 남지 않고 없어졌다.

청계천서울특별시 시내버스 개편 이미지가 컸지만 그 외에도 서울특별시장으로서의 이명박은 김형민 초대 시장 이래 시정능력 면에서 따지면 으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대단히 우수했다. 김현옥에 이어 제2의 불도저 시장으로 불릴 정도였다. 시장이 3번 바뀌고 대통령도 3번이나 바뀌었지만 이명박 시장의 흔적은 아직도 여러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청계천은 서울특별시를 넘어 세계인이 즐겨찾는 명소가 되었고 버스체계 개편은 이후 경기도와 인천광역시까지 수도권 통합 요금에 참여함으로서 수도권 주민들의 교통비 부담이 대폭 줄었다. 서울숲은 서울의 대표적인 유치원, 어린이집, 초중고등학교 소풍 장소가 되었다. 서울시장으로서 성공했기에 대통령이 된 것이므로 서울시장 이명박은 가히 이명박의 리즈 시절 2기이자, 그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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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대통령 선거를 위해 차기 시장으로 당선된 같은 당의 오세훈에게 시장직을 이임하고 잠시 물러났다.

6. 제17대 대통령

6.1. 대통령 선거

부산 학산여고를 방문한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파일:MBgaka.jpg
선거운동하는 이명박 대통령후보
당 살림을 사는 당대표를 뽑는 게 아닙니다. 나라를 살릴 대통령을 뽑는 선거입니다, 여러분! 저 이명박은 여러분의 꿈을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한나라당 내부 경선 연설 中

서울시장 퇴임 이후 유력 대권주자로 떠오른 이명박은 이듬 해 곧바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33][34] 당시 상황은 참여정부의 민생, 경제 파탄과 실정을 심판해야 한다는 정권 심판론이 매우 우세했고, 노무현 정부의 임기 후반 ~ 말기(2006년 ~ 2008년)의 지지율 저하와 민주당 정권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 및 당시 분열과 막장을 보여주던 여당 대통합민주신당의 바닥을 찌르는 지지율로 인해 후보선출 이전부터 보수계 정당인 한나라당 소속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기정 사실화될 정도였다.[35] 이 때문인지 사실상 한나라당 경선만 뚫으면 사실상 17대 대통령이 된 거라는 말까지 나오는 등 대선 본선보다도 한나라당의 경선이 더 치열해지는 양상이 발생했는데, 가장 유력한 경쟁자인 박근혜 후보와의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 하는 경쟁이 발생했다. 이명박은 여론 지지도, 박근혜는 당내 지지도가 우세했는데, 경선 룰에 따라서 승부가 뒤집어질 수 있는 그야말로 초접전이었다.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네거티브로 인해 둘의 과거 비리는 이때 대부분 드러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며[36], 여담으로 유명한 발언인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와 "저거 어떻게 쥐어박고 싶었어"도 이때 생겨난 것이다. 그러다 북핵 실험 등 박근혜에게 불리한 사건이 하나둘씩 터지기 시작했고, 혈투 끝에 우세했던 여론 지지율을 앞세워 경선에서 승리하여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본선은 거의 이명박의 독주체제였다. 이회창의 한나라당 탈당 및 후보 독자출마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정동영후보의 지지율은 이명박의 절반수준, 이회창은 정동영 후보의 절반의 양상으로 흘러갔다.[37] 정동영후보와 이회창 측은 BBK 주가조작 사건을 내세우며 이명박을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이명박은 747 공약대운하 공사를 내세워 마이페이스를 걸어갔고 결국 지지율은 득표율로 그대로 연결되어 이명박은 정동영 후보를 무려 531만표차로 꺾고 여유롭게 당선되었다. 표차가 가장 큰 선거가 되었지만[38], 정동영과 이회창 외에도 권영길, 문국현 등의 유력후보가 난립한 선거였기에, 과반 득표율은 달성하지 못하고 48.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39] 특히 이명박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부활 이후 서울에서 이긴 최초의[40] 보수정당 후보이자 서울에서 가장 큰 득표수 차로 이긴 후보[41][42]가 되었다.

제17대 대선에서 이명박 당시 후보자가 얻은 득표율도 압도적으로 과반수를 달성했지만, 당시 유력 대선 주자로 이명박 외에도, 손학규, 고건, 이회창, 이해찬, 박근혜, 정운찬[43], 이재오 등이 있었는데, 이재오는 이명박을 노골적으로 도와주는 친이 핵심 실세였고 12월 5일, 검찰의 BBK 무혐의 발표직후 30%대까지 추락하던 이명박의 지지율이 다시올라 묻지마식으로 이명박을 지지하는 여론이 형성되며 유력 대선주자 설문 조사로도 대선막판부로 갈수록 중도층의 지지율을 이명박이 흡수하게 됐다. 또한, 당시 이명박의 강력한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손학규와 고건이 경선에서 탈락하거나 불출마 선언을 했고 손학규김종인[44]이 정동영지지를 선언하며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하였고, 그나마 대선에 나와 이명박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이회창마저도 이명박의 득표율에 4배 정도로 밀리면서 13대 대선에서 노태우김영삼김대중을 밀어버렸던 득표차의 2배이상(531만 7708표)으로 압도적인 득표차로 정동영후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6.2. 이명박 정부

재임 당시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은 이명박 정부 문서를 참고할 것.

6.2.1. 재임 시절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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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연설하는 이명박.[45][46]

7. 퇴임 후

임기 막판의 급작스러운 독도 방문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론 지지율을 올리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후 대선 과정에서 존재감이 희석되었다. 이유는 2012년은 연초부터 대선에 집중되었고, 당시 국민들은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것인지, 아니면 정권교체인지 관심을 쏟았기에 이명박은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18대 대선 직후에는 엄연히 현직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전직 대통령 취급을 받았을 만큼 박근혜에게 관심이 모두 쏠렸다. 선거과정에서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 등 악재가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자당 후보 박근혜가 선거의 여왕이란 이야기가 있듯이 박근혜는 2012년 총선과 대선과정에서 꾸준히 노력하여 18대 대선에 당선되면서 보수 정권을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50]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등장한 이후 중앙정계나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있다. 지방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가 기자들을 목격하고 일부러 자리를 피하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퇴임 이후에는 크게 매스컴에 부각되길 원치 않는 듯.

퇴임 이후에는 사무실을 마련해서[51] 재단활동을 벌이는 등 개인적인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페이스북으로 간간이 근황을 알릴 뿐이다. 해외순방을 자주 다니며 여러가지 대외적인 행사에 참여하곤 하며 훈 센 캄보디아 총리의 경제고문을 맡았던 적이 있었다.[52] 운동을 하거나 자전거를 자주 타는 모습을 보여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비교적 정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른바 4자방 (4대강 정비 사업, 자원외교, 방산비리) 비리 의혹 등 본인 임기 중의 사건과 검찰수사 여부가 여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으며, 자서전으로 '대통령의 시간 2008 ~ 2013'을 출판하였다.

2015년 10월 베트남벤처기업 세일즈 명목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조문을 오며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53]

2016년 8월 그의 측근이 월간조선과 가진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차기 정권은 반드시 내 손으로 창출하겠다고 최근 들어 누누히 강조해 왔다고 한다. 링크된 기사에 따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이 차기 정권 창출에 기여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배경에 대해 잡지는 "박근혜와 완전히 등을 대고 갈라선 친이 세력이 의지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박근혜가 임기 중 자신을 박대한 데 따른 섭섭함을 간접적으로 토로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분석했다.[54] 또한 측근에 따르면 이명박이 염두에 두고 있는 차기 대권주자로는 반기문 UN 사무총장, 김무성새누리당 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었다고 한다. 특히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직접 저울질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드러났었다. 나머지 2명에 대해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최근 들어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는 측근들과 같은 여러 인물들이 방문하면서 활기를 띠고 있다고 한다는 사실도 전했다. 또한 최근 들어 그의 기분이 좋아졌다는 사실 또한 전했다.

다만 이명박 측은 이 보도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홍보수석을 지냈던 김두우KBS와의 통화에서 "우리가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알아봤지만 그런 발언을 했다는 사람은 없었고, 아마도 측근이라고 하긴 좀 그런 사람 중 하나가 자기 생각을 담아 과장한 것 같다”고 밝혔고, 이명박 전 대통령도 해당 보도에 대해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느냐"며 언짢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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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일, 청계천에서 열린 청계천시민걷기대회에 참가한 이명박의 모습. 퇴임 직전까지만 해도 나이에 비해서 상당한 동안이었는데 이젠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는 못하는 느낌이다.

2016년 10월의 비공식적 인터뷰에서는 가장 먼저 박근혜박근혜 정부를 상당히 강한 어조로 비난함과 더불어, 문재인, 박원순도 싸잡아 비판하면서,[55] 차기 정권 재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하였다. 다만, 한나라당 시절 유력인사로 같이 했던 6년 동생인 손학규에 대해서는 '그 사람도 참, 그 사람은 한나라당에 계속 있었으면 당 내 대통령 후보 경선은 물론 18대 대통령 후보로 대선에도 나올 수 있는 인재인데 괜히 옮겨가지고...'라면서 안타까워 하는 견해를 보였다. 기사에 따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국경제신문과 가진 비공식 인터뷰에서 반기문 UN 사무총장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56][57] 차기 정권 재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행적을 봤을 때, 반기문을 높이 쳤다는 말은 그냥 립서비스였거나, 본심을 숨기기 위해서였다고 보여진다.

2016년 11월 21일, 김영삼 1주기를 불과 1주일 앞두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참배해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 씨를 만난 이후에,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공식적으로 박근혜에 대한 견해를 표명했다. "부끄러운 일로 정말 참담한 심정... 박근혜가 국민의 뜻을 잘 받아줘야"라고 박근혜를 비난하는 견해를 확실히 밝히고, 박근혜 탄핵까지도 고려해봐야 한다면서 탄핵에도 동의하는 견해를 보였다. #

2017년 첫날부터 새누리당을 곧 탈당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실 10월~11월 초에 탈당할 생각이었지만, 여러 사람들이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일까봐 잠시 동안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반기문/개혁보수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58]

2017년 1월 11일, 늘푸른한국당이 창당식을 거행하면서 창당되었는데, 아직은 본인에 대한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창당식에 축하 인사차 나오지는 않았다. 추후에 늘푸른한국당을 겉보기에 소극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언론에 근황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59]

2017년 5월 17일, 박근혜 정부 시절 외부활동에 잠잠했다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갑자기 선행활동에 나서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링크 따라서 같은 정당이었으면서도 박근혜와는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었음을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2017년 6월 2일, 이낙연문재인 정부의 사실상 첫 총리로 임명되면서 이낙연이 이명박의 사무실을 예방하였고, 거기서 이명박은 이낙연에게 "언젠가 이렇게 크게 될 줄 알았다,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덕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허니문 기간은 얼마가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여러가지 논란들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국정원 대선개입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주도하고, 공영방송에 대한 낙하산 인사와 언론인 탄압으로 언론환경을 초토화시키고,[60] 여기에 국정원, 사이버사령부, 기무사를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댓글을 달면서 대선과 총선에 직접적으로 개입했으며, 보수단체들을 동원하며 관제데모를 실시 및 야권 인사들에 대한 흑색선전을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다스 실소유주 논란을 비롯하여 BBK 주가조작 사건, 제2롯데월드 특혜 의혹[61]캐나다 농협 사기대출 사건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비리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는데 아직도 4대강 사업방산비리, 자원외교에서의 비리 등은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로 수많은 문제들이 급부상하며 비판여론과 검찰수사가 점점 수위를 높여가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이에 김어준의 파파이스 시청자 사이에서 "다스는 누구 겁니까?"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진보 지지자들의 여론은 갈수록 험악해져서 '진정한 적폐청산은 이명박을 처단해야 끝이 난다'는 여론이 2017년부터 갈수록 확산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박근혜와 함께 문재인 정부로부터 수사 대상에 올라 그 결과 전직 대통령 2명이 동시에 수사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전두환노태우가 수사대상이 된 이후 두 번째이다.


2017년 11월 12일 바레인으로 출국하기 전 기자회견 장면.

2017년 11월 12일, 강연을 위해 바레인으로 출국하기 직전, 기자들에게 "지난 6개월간 적폐청산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개혁이냐, 감정풀이냐 정치보복냐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저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오면서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 "(하지만) 새로운 정부가 들어와서 오히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갈등과 분열이 깊어졌다고 생각해서 저는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 등의 답변을 남겼다. #링크 여담으로 여기서 기자들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 오기 전 영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를 마치 검찰 포토라인에 세운 것처럼 대하는 장면들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수많은 플래쉬 세례에 "눈이 부시니까 좀 꺼요"라고 말했음에도 기자들이 그냥 무시하고 계속해서 플래쉬 세례를 가했는데 이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매우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자들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답변 이후 "김관진 장관이 구속되었는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2013년 국정원 댓글 사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을 물어보았지만 "상식에 벗어나는 질문은 하지 말라"며 짜증내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기자회견이 이어지기 전부터 청년민중당을 비롯한 좌파단체와 일부 시민단체에서 "이명박을 구속하라"라는 구호를 끊임없이 외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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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날 입장 표명에서 3분 40초 동안 총 7번 혀를 '낼름'거려서 신문기사화되기도 했다.[62]


2017년 12월 19일에는 자신의 생일 잔치에 가기 전에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역시나 이전처럼 질문에 답을 회피했다. 한편 생일잔치에 따라온 시민들은 "이명박을 구속하라"라는 구호를 끊임없이 외쳤고 한 시민은 이명박에게 직접 달려들다가 경호원들에 의해 끌려나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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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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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2일 밤 11시 7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구속영장이 인용되어 서울동부구치소에 구속된다.

7.2.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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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9일, 서울중앙지검이명박을 구속 기소했다.

2020년 10월 29일, 대법에서 원심의 판결을 확정하여 징역 17년 벌금 130억원이 확정되었다. 따라서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경호를 제외한 모든 예우가 박탈되었고 2022년 5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의 퇴임 이전까지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 중 예우를 받는 사람은 단 1명도 없게 되었다.

형기를 집행할 경우 95세가 되어야 출소 가능하다.

재차 기술하지만 결론으로 이명박은 이날 이후로 경호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더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다.[63]

7.3. 수감

2020년 11월 2일 서울동부구치소에 재수감되었다. 12월 21일 지병 치료를 위해 구치소를 나와 외부 병원에서 50여일 지내다가, 2021년 2월 10일에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한 학생에게 보낸 옥중 편지에서는 "평생 정직하게 살아왔다"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수감 중 받는 편지에 종종 답장하고 있는데, 지금껏 인터넷에 공개된 답신만 21년 12월말 기준으로 20개 가량 된다. 편지로 이명박에게 인싸라는 별명을 알려주자[64] '인싸 이명박'라는 이름으로 답장을 해서 이슈가 되기도 했다. 옥중 생활을 하면서 일과시간에 편지를 받아 읽고 답신을 쓰는 것으로 짐작된다. 나이가 팔순인 만큼 징역을 선고받은 죄수라고 해도 교도소 측에서도 노역을 시키거나 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나이 때문에 거동이 쉽지 않은 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 결국 독방에서 시간을 많이 보낼 수밖에 없고, 자연스럽게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는 등의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2021년 말 노태우전두환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최고령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이명박은 퇴임한지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 같은 경우 빌 클린턴처럼 20년 넘은 대통령이나[65] 지미 카터처럼 40년을 넘은 대통령[66]도 있는 것과는 다른 차이점.

2021년 12월 2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되었지만, 이명박은 포함되지 않았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이명박 사면 의사를 밝혔다. 여러모로 사면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2022년 6월 28일 건강악화를 사유로 신청한 형집행정지가 받아들여져 3개월 일시 석방되었다. #

6월 말 들어 이재용 삼성 부회장, 김경수 전 경남지사와 함께 광복절 사면 대상으로 점쳐지고 있다. 사면이 유력하다는 얘기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이재용만 사면되고 이명박과 그에 딸려가는 김경수는 사면이 무산되었다. 과반 이상이 사면을 반대하는데 현 정권의 지지율이 급락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그와 함께 '법과 원칙'을 강조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반대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해당 소식을 들은 후 본인은 국정에 도움이 된다면 사면 안 돼도 괜찮다며 그러려니 했지만, 사면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윤석열이 또 약속을 어긴다며 반응이 좋지 못하고 최측근 이재오는 흑화해서 국민의 힘을 국민의 이라고 언급하며 비판했다.이재오 “국민의힘 아닌 국민의짐”

다만 건강상의 이유로 이 전 대통령에 대한 형집행정지가 진행중인 가운데, 정지기간은 추가 연장될 것으로 보인다.

2022년 9월 23일 건강상의 이유로 인하여 이 전 대통령에 대한 형집행정지 정지기간이 3개월 연장되었다.

7.4. 사면 및 복권 이후

파일:이명박 사면.jpg

2022년 윤석열 정부 특별사면으로 사면, 복권되었다. 2022년 12월 28일 0시[67]를 기해 잔여 형기 14년 6월과 잔여 벌금 82억 원이 면제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면을 결정한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장관문재인 정부 시절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서울중앙지방검찰청 3차장을 각 맡아 당사자를 감옥으로 보냈던 사람들이다.[68]

전국지표조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명박 사면에 대해서는 찬성 39%, 반대 53%로 사면에 대한 부정적 기류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 #

이명박 대통령의 사면으로 현재 구속된 전직 대통령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비록 사면 및 복권은 되었지만, 이것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까지 복권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현직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통해 복권된 건 공민권(투표권/피선거권)이며 별도 법률로 규정되어 있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로써 MB는 경호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어떤 예우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며 국립현충원 안장 혜택도 잃었다.

2022년 12월 30일 오전에 병원에서 퇴원한 뒤 곧바로 소망교회를 들렀다가 논현동 자택으로 향했다. 자택 앞에는 이재오권성동을 비롯한 옛 친이계 인사들[69]과 지지자들이 모여서 이명박을 환영했고, 이명박도 차에서 내려서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화답했다.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국민께 심려 끼쳐 대단히 송구'하다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2023년 1월 9일, 오는 3월 8일에 열릴 국민의힘 제3차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후보로 출마한 김기현 의원의 선거 캠프 개소식에 축전을 보냈다.# 뒤이어 전당대회에 출마한 안철수 의원과 # 윤상현 의원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사실상 두문불출하며 칩거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과는 달리 어느정도 정치적인 활동을 재개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70]

윤석열UAE 순방을 마친 후 이명박에게 전화를 걸어 순방 성과와 향후 외교 관계에 관해 의논했다고 한다.# 홍준표 등 일부 여권 인사들은 이명박의 재임 시절 자원외교를 통한 외교적 성과를 언급하며 이명박을 중동 특사로 파견하는게 어떻냐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제안한 상황이다.[71]

2023년 3월 15일, 국민의힘 당대표로 당선된 김기현 대표와 자택에서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 대표에게 조언을 해주면서 윤석열 대통령의 제3자 배상안을 호평하기도 했다.

2023년 3월 22일, 사면 후 첫 공식일정으로 5년만에 천안함 묘역을 참배했다.*

2023년 4월 26일 이명박 정부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을 맡은 유인촌 전 장관이 주연을 맡은 연극 파우스트를 관람했다. 당뇨로 건강에 적신호가 커진 가운데 가벼운 대외 활동의 일환이라는 설명이다.# 이날 연극이 상영되는 LG아트센터에 입장하며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어떻게 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큰 기대가 되며 잘될 거다"고 답했고, 연극 종료 후 다른 기자가 최근 당정의 지지율 하락과 관련해 질문하자 "그런 데 대해서 언급할 위치가 아니다"라고 답한 후 귀가했다. #

파일:20230515000300_0.jpg

2023년 5월 15일 오전, 서울시장 재임 당시 청계천 복원사업에 함께했던 공무원들의 모임인 일명 ‘청사모’ 회원들 및 이재오 등 대통령 재임 시절 인사들과 함께 청계천을 방문했다. #[72] 약 6km 정도를 걸으며 시민들과 인사를 나눈 뒤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질문에 “언급하기 조심스럽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답했다.[73] 추후 4대강보도 방문할 계획이라고 한다.

2023년 8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의 아버지인 윤기중 교수가 별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아내인 김윤옥과 함께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을 했다.

2023년 9월 12일, 제주도를 방문하여 중소기업중앙회가 롯데호텔 제주에서 주최한 2023 중소기업 리더스포럼 개막식에서 공개 연설을 했다. 사면 후 첫 공개 연설로, 연설 과정에서 자신의 수감 생활을 오지 여행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했다.

2023년 9월 14일, 김태호 의원과 오찬을 가졌다. 김태호 의원은 본인의 페이스북에서 "오늘 이 전 대통령을 뵈었는데 걱정이 많으셨다"며 "내년 선거가 중요한데, 윤 대통령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도 걱정이 된다"고 밝혔다고 한다.[74]

2023년 10월 25일, 여주에서 열린 4대강 강천보 걷기 행사에 참석했다, 이날 기자가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과 여당의 지지율에 대한 의견을 반복적으로 물었으나 이명박은 "할 말 없어, 난 내 삶을 잘 살거야", "자네는 내가 말 실수하기를 바라나?"라며 딱 자르며 언급을 피했다. [75]

연말에는 서울 양재동에서 서예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

2023년 12월 13일부터 12월 21일까지,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서예전을 개최했다. 개막식에 부인인 김윤옥 여사와 같이 참석해서 인사말을 전했다. 이재오, 맹형규, 정운찬, 권성동, 김대기등 친이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

2024년 5월 16일에는 고향인 포항시를 11년만에 방문했다. 1박 2일 일정이었던 가운데 첫날에 KTX를 타고 포항역에 도착한 뒤, 고향마을인 덕실마을을 찾아 경주 이씨 재실인 이상재에서 기념식수와 현판 제막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마지막날에는 포항제일교회에서 조찬 기도회를 가졌고, 고려대 61학번 동기이자 최측근인 천신일 세중그룹 회장의 포스텍 학위수여식에서 축사를 하기도 했다.#

2024년 5월 29일,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일정으로 방한한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얀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이 논현동 사저를 찾아 이명박 전 대통령과 만났다. 현직 국가 정상이 해외순방 도중 전직 정상의 자택을 방문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인데, 이번 접견은 UAE 측 요구로 성사됐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대한민국의 바라카 원전 수주를 계기로 한국과 아랍에미리트 간 외교관계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

2024년 8월 12일, 윤석열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김윤옥 여사와 같이 한남동 대통령 관저를 방문해서 부부 동반으로 만찬을 함께 했는데, 친이계 출신인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 부부도 같이 동석했다.#

2024년 10월 23일, 형 이상득대한민국 국회부의장이 숙환으로 사망하면서 형님상을 당했다. 이후 빈소가 있는 아산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을 한 뒤, 취재진 앞에서 인터뷰를 통해 "형 덕분에 희망을 얻어 늦게라도 대학에 갈 수 있었다"며 "국가를 위해 일하신 분"이라고 밝히며 눈물을 흘리면서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1] “명박”이라는 이름은 한국에서는 꽤나 특이한 이름이지만 일본어로 읽어보면 “아키히로”라는 굉장히 평범한 이름이 된다. 따라서 당시 창씨개명 후 일본에 거주하던 상황을 고려하면 일본식 이름으로 붙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2] 현 포항시 북구 흥해읍. 그로 인하여 2007년 포항에서의 대선 경선 당시 본인의 고향이 포항이라며 운을 뗐다.[3] 당시 어머니는 '명박이 고등학교 보냅니다.'라고 이야기했다고.[4] 이 당시 동지상고는 전교 1등에게만 장학금을 주었기에 어머니가 이명박에게 '항상 1등을 하여 장학금으로만 학비를 해결해라, 그렇지 않으면 학교를 다니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당시 동지상고는 실업계라 대학 진학과는 관련이 없어 대부분의 학생이 공부를 포기했고, 그 덕에 이명박은 운 좋게 계속 1등을 할 수 있게 되었다.[5] 참고로 당시 서울대학교는 입시에서 제2외국어가 필수였는데, 이명박의 모교 동지상고는 실업계라 제2외국어를 가르치지 않아서 서울대는 애초에 불가능했다고 한다.[6] 이때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고 대학교 수도 적었기 때문에 대학교 합격자 명단을 신문 기사로 공개하는게 일반적이었다.[7] 어머니는 시장에서 상인들끼리 분란이 발생하면 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고 한다.[8] '신화는 없다'라는 자서전 언급 상 아르바이트를 해도 대부분 학비로 나가고 끼니를 제때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자원입대를 하여 끼니 해결 및 대학자금을 조금이라도 모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술할 이유로 퇴짜맞는다.[9] 이명박이 대학다니던 시절에는 20대 인구가 많아서 현역판정률이 50% 정도밖에 안되던 시절이다. 그래서 조금만 건강이 나빠도 면제가 가능했는데, 2024년 현재 기준으로 보면...[10]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는 치료가 가능하지만 과거에는 의학 수준도 열악했고 이명박의 경제 사정 또한 상당히 열악했기에 병원 문턱에도 가지 못했던 실정이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한때 병역비리 논란도 있었다.[11] 고려대서울대의 학생회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12] 거기다 "회장"이라는 직책명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그룹" 회장 다음으로 높은, 거의 오너 일가만 앉을 수 있는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다. 정주영[13] 심지어 이명박이 현대건설 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1991년 사장이었던 이내흔이 그보다 5살이나 더 많았다.[14] 1930년생으로, 당시 45세. 태진아와 만날 때마다 용돈조로 몇백만 원씩 주며 만남을 이어오다 결국 조성근 사장이 형사들을 대동하고 여관에 쳐들어가 현행범으로 검거되었으며, 조성근 사장은 태진아를 고소했다가 이후 합의이혼을 하며 고소를 취하하여 구속에서 풀려났다. 김보환씨와 태진아 어머니랑 나이가 비슷했다고 한다.[15] 다만, 이것이 공사미수금 회수 실패가 원인이 아니라 대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던 정주영 회장에 대한 정부 차원의 자금 압박이 원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16] 이명박이 입사할 당시에도 이미 현대건설은 국내 5대 건설사였다.[17] 대표적으로 소양강댐 건설, 태국 건설 현장 폭동 장면.[18] 원래는 전국구가 아닌 본인 거주지인 논현동 인근지역인 서울 강남구 을 지역에 출마하려고 했다.[19] 당시 이명박의 지원유세단이 상당히 화려했는데, 전성기를 누리던 이경규, 임채무, 김해숙이 지원유세를 했다.[20]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김대중 대통령이 영수회담을 가졌는데, 한나라당이 김대중 정부의 추경예산 편성과 남북 경협자금을 승인해주는 대신에 이명박, 홍준표 등 선거법 위반 사범들에 대한 사면에 합의했다.[21] 386세대의 대표주자로서 이 당시도 상당히 스타 정치인이었다. 33세에 제15대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386세대 대표주자라는 위상을 밀어붙이며 서울시장까지 노렸으나 이명박에 밀려 낙선하였다. 제16대 대선에서 정몽준을 지지하며 당을 옮기면서 철새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이후 가출한 아들이 집에 돌아온 심정이라는 말을 남기며 민주당에 복당하여 제17대 총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훗날 친정인 더불어민주당에 복귀하여 제21대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20년만에 국회에 복귀하였다.[22] 본래 김현옥 시장이 가지고 있던 별명이다.[23] 다만 이후 행정수도 이전 논의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관계가 틀어졌고[76] 이후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게 되지만, 이후로도 서울시장으로서 굳건한 정책추진력을 보여주기도 했고 당시 대통령이 각종 실책과 논란을 남발하는 통에 대다수 진보 진영으로부터도 손절당하던 터라 이러한 반목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24] 이 발언 때문에 이명박은 대통령 취임 이후 불교계를 각별히 신경썼다. 하지만 그의 재임기 중에 180석 이상을 가진 거대여당인 한나라당에서 템플스테이 예산을 삭감하는 바람에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사퇴하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고, 부처님 오신 날에 동자승 푸대접 논란까지 발생했다.[25] 또한 대선 때 이명박에게 맞선 후보가 2004년 17대 총선 당시 노인 발언으로 크게 곤욕을 치렀던 정동영이었기 때문에 이명박의 이 발언이 대선에서 이슈화되지 못했던 행운도 있었다.[26] 정확히는 취임 1년차가 된 직후였던 2003년 7월 1일부터 시작하였다.[27] 각각 녹색,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의 영문자 앞을 따왔다.[28] 원래 순서는 순환버스 Y, 지선버스 G, 간선버스 B, 광역버스 R.[29] 단순히 이름만 붙인 게 아니라 품질관리를 도입한 계기가 되었고 오세훈, 박원순 시장 시기에도 아리수의 품질관리가 잘 계승되고 있다. 따라서 아리수 브랜드 런칭 역시 이명박 시장의 치적 중 하나로 인정받을 만하다.[30] 종족은 저그.[31] 이 부분은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4드론이라기엔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몇몇개 나왔기 때문. 당시에 저저전 4드론은 이런 관광 싸움에서도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쓰레기 전술 취급받았고 이명박은 드론을 잡아냈다. 4드론은 정찰보낼 드론이 없으므로 저글링 뽑고 드론까지 끌고와서 관광태우려 한 모양인데, 저글링과 드론이 이명박의 본진에 도착할 때쯤이면 이명박도 9드론 후에 저글링이 막 나오거나 성큰 콜로니가 나왔을 때다. 이용범이 엄청난 신컨으로 활약했거나 이명박이 엄청난 발컨으로 게임을 그르쳤거나인데, 어찌되었건 이용범은 이기고도 욕을 먹었다는 말이 있다.[32] 이명박 재임 말기부터 운행에서 제외된 것도 상당수였다. 즉 3년도 못 채운 것.[33] 서울시장을 그만두고 잠시동안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34] 출마선언은 2007년 3월, 저서 <어머니> 출판기념회에서 진행했다. 당시 YS를 비롯해 강재섭 대표와 한나라당 국회의원 63명이 참석했으며 지지자 2만명이 몰리기도 했다.[35] 정확히 말하면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과 이후 여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의 인기가 너무 바닥이어서 출마선언을 하지도 않은 이회창에 밀려 지지율 3위에 그쳤다. 이런 국민적인 배척정서에 노무현 역시 범여권인 대통합민주신당을 외면했고 이 때문에 당시 여권 지지자들 역시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등 제3지대 진보정당에 표를 주거나 이회창 같은 보수진영으로 가거나 심지어 그냥 이명박을 지지하는등 범여권에게는 악재만 계속 쌓여갔다. 결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동영이명박에 5백만표차이로 패하게 된다.[36] 당장 다스 실소유주 논란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최초로 언론에서 언급된 게 이 시기다. 그것도 민주당 쪽에서 끄집어낸 것도 아니고 서로를 향한 네거티브로 사용됐으니...[37] 이회창이 이명박의 지지율만 흡수할 것이란 여권의 예상과는 달리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도 상당수 흡수했다. 대통합민주신당한나라당도 좋아하지 않았던 20대의 표심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 이회창 지지율의 대부분은 이인제의 지지율을 전부 흡수한 것이라 볼 수 있다.[38] 이 기록은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이 경신한다.[39]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48.67%, 거의 절반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40]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서울에서 승리함으로서 이제는 이명박이 '서울에서 이긴 유일한 보수정당 대선후보'가 아니게 되었다.[41] 박근혜 탄핵으로 인해 예정보다 7개월여 앞당겨 치러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서울지역 최다표차 기록을 경신하지 못했다.[42] 민주당계 정당은 13, 14, 15대 김대중, 16대 노무현, 18대 문재인 모두 서울에서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했다.[43] 이 당시는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비노계의 대권 주자로 언급됐는데, 한나라당열린우리당에서 모두 언급되었다.[44] 그는 대선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정동영 후보를 지지했다. 그냥 단순한 지지가 아니라 정동영의 대선 후보 등록 회견 때부터 손잡고 옆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에서 정동영이명박에 패하며 5백만표차이로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45] 2010년 3월부터는 백내장 수술로인해 안경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46] 여담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연설을 하고난 직후부터 2010년 3월이전까지의 모습은 아래사진과 같았다고 볼수가 있다. 또한 2010년대 초반까지 이명박 대통령을 언급하는 코미디프로(ex:개그콘서트의 안윤상이 유명인들의 성대모사를 하는 장면들)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던 사진이였다.
파일:이명박 공식사진.jpg
[47]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2월 25일자로 종료되기 이전의 사건이긴 하나, 이명박이 서울시장 시절 숭례문을 개방했기에 직접적인 연관점도 많았다. 물론 대부분의 사후 처리는 이명박 재임 중 이루어졌고, 복원은 박근혜 정부에 이루어 졌다.[48] 남북관계를 완전히 냉각시킨 시발점으로서 의미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로 금강산에는 단 1명의 남한 관광객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49] 아동 포르노의 정의가 실제 아동 청소년에서 아동 청소년으로 인식되는으로 바뀌었다.[50] 친이와 친박은 같은 보수정당 내에서도 견원지간이었다. 17대 대선 당시 서로에 대한 네거티브 공방을 아주 공격적으로 전개했던 것이 유명하며 2008년 총선 때는 당권을 잡은 친이계가 친박계 현역 의원들을 상대로 공천학살을 자행해 상당수의 현역의원들이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친박연대라는 별도의 신당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2010년 세종시 수정안 사태 때도 박근혜는 MB 정부의 수정안에 반대하면서 대립했고, 대선과 같은 해에 치러진 총선에서 비대위원장이 된 박근혜는 4년 전의 한풀이를 하듯 친이계/비박계 의원들을 상대로 공천학살을 했다.[51] 사무실이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에 위치한 임대료 월 1,300만 원에 달하는 임대료에 퇴임 직전에 공사한 삼성동 자택 유지비용도 그토록 아방궁이라 공세를 벌였던 노무현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자택보다 높은 것으로 드러나 물의를 빚었다. 특히 임대료와 자택 수리비용은 모두 다 국민 혈세로 충당된다는 사실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52] 사실 대통령 취임 이전에도 7년간 맡았던 적이 있었다.[53] 사실 그는 김영삼과 인연이 있는데, 김영삼이 "우리는 도덕적 선구자가 아닌 능력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기며 정치계로 발굴해낸 인물이었다.[54] 다만, 이명박도 김영삼처럼 속으로는 박근혜를 맘에 안 들어했기 때문에, 정권 초에는 오히려 친박 계열들을 경선에서 대부분 쳐내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움직임 및 구실이 생기면 트집잡아서 박근혜를 쳐내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즉, 이런 의사표현은 박근혜에 대한 강한 불만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55] 다만, 박원순과는 MB 정부 시절 전, 서울시장~대선후보 시절까지는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MB 정부 출범 직후 상호간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대립하는 모양새로 변했다. 검색 엔진에서 찾아봐도 나오며, 박원순 문서를 참조해도 알 수 있다.[56] 반면 김무성은 어렵다고 평가했다. 개인적으로는 오세훈을 생각하고 싶으나, 오세훈도 아직 경쟁력에서 떨어진다고 평가했다.[57] 다만, 손학규에 대해서도 먼저 평가한 것과 아쉬워하는 평가를 남긴 것을 고려하면 손학규 같은 인사를 내세울 가능성도 충분하다.[58] 늘푸른한국당의 창당 예정일이 2017년 1월 내인데, 탈당 견해를 밝힌 시기와 창당 시기를 고려하면, 곧 탈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이명박이 대통령 시절, 차기 대선후보로 염두에 두고 지지했던 인물은 이재오와 정운찬이었고, 이 두 인물 모두 이곳에 있다. 여러 가지로 시기를 고려해서 탈당 시기를 정했을 것 같다.[59] 다만, 이명박 대통령과 늘푸른한국당의 성격을 감안했을 때,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 방식으로 적극 지원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여겨진다.[60] 이 때문에 과거 공정성과 신뢰도에서 1위를 달리던 MBC가 극우 언론매체로 변질되며 정권의 어용방송으로 전락해버렸다. 훗날 MBC 블랙리스트 사태까지 터지면서 이명박 정권의 시궁창스러운 공영방송의 현실이 제대로 드러났다.[61] BBK 주가조작은 최종적으로 공소사실에서 제외됐고(#), 제2롯데월드 특혜 의혹은 문재인 정부 감사원의 감사 결과 근거가 없는 것으로 결론났다.#[62] 참고로, 공범자들에서 최승호 PD에게 언론 장악의 책임을 추궁당할 때에도 혀를 '낼름'거렸다. 현 상황에 대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상당히 초조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63] 실형선고가 되었더라도 단지 전직 대통령의 예우 대상에서 대부분 하지 않기로 한 것일 뿐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재임하였던 역사적 사실까지 당연부정되지는 않는다.[64] 이명박이 외교적으로 발이 넓고 오바마와도 친해서 생긴 별명이다.[65] 다만 이 사람은 46세의 젊은 나이에 취임했으며 후에 대통령이 되는 동갑내기 친구들보다 더 늦게 태어났다. 이 사람보다 늦게 태어난 미국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가 유일.[66] 물론 이건 이 사람이 장수한 것이다.[67] 이는 형집행정지의 기간이 12월 28일까지이기 때문이다.[68] 윤석열 당시 서울지검장은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을 직접 면담 및 설득해 이명박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관철시키기까지 했다.[69] 지금은 대다수의 친이계 인사들이 이명박을 감옥으로 보냈던 윤석열의 정치세력인 친윤계 인사로 활동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단,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재오 상임고문은 비윤 성향에 가깝다.[70] 어쩌면 당연한 것이 박근혜는 수감 중에도 계속 입원치료를 받는 등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으므로 뭘 할 수가 없다.[71] 하지만 고령에 당뇨 환자로 몸이 안 좋은 데다가 비리 혐의로 수감 생활마저 한지라 여러모로 부적합하다는 의견도 있다. 혐의는 둘째치더라도 수감 생활은 젊은 사람들에게도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데 이명박은 학생운동가 출신이라 젊은 시절 고문 후유증이 진행될 나이이며 수감 생활도 한 두번 한 것이 아니기에 건강이 좋을 리가 없다. 그 이전에 비행기 탈 몸상태인지부터가 미지수이기도 하고.[72] 촬영된 사진으로 봤을 때 당뇨가 심각해진 수준으로 보인다는 의견이 있다.[73] 최측근 이재오가 방송에서 여권과 대통령실에 대해 비판적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상반된 행보.[74] 김태호는 친이계 정치인으로, 이명박 정부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나 자진 사퇴한 바 있다.[75] 다만 날 선 대답이 아니라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후 해당 기자가 국회 출입기자라서 어쩔 수 없이 질문을 했다며 사과하자 "국회 출입기자가 여길 오면 안 되지"라며 웃으며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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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사실 이는 서울시장이라는 직책 상, 균형발전이니 안보라니 해도 어쨌든 도시의 동력을 빼가겠다는 건데 반발하는 게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