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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08:31:56

혼노지의 변

적은 혼노지에 있다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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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아케치 미츠히데는 왜 난을 일으켰나?
3.1. 야망설3.2. 원한설3.3. 시코쿠 원정 회피설3.4. 초조설3.5. 흑막설
3.5.1. 아시카가 요시아키 설3.5.2. 조정 흑막설3.5.3. 예수회설3.5.4. 하시바 히데요시설3.5.5. 도쿠가와 이에야스 설3.5.6. 기타설
4. 변 이후5. 창작물 별 묘사6. 기타

1. 개요

本能寺の変

1582년 6월 21일(텐쇼天正 10년 6월 2일), 일본 교토 혼노지에서 일어난 사건.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인 아케치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켜 노부나가가 살해당한 사건이다. 또한 노부나가의 장남인 오다 노부타다도 싸우다가 결국 자결했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1]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로, 야마자키 전투, 키요스 회의를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면서 근세 일본사를 뒤흔들어 놓았다.

2.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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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2년, 오다 노부나가는 수도인 교토 인근 키나이 지방을 거의[2] 장악하고 3월에는 숙적이었던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켰다. 도카이의 미카와 · 도토미 · 스루가 3국을 차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래전부터 노부나가의 동맹이었고, 간토호조 가문과 도호쿠의 다테 가문, 모가미 가문 등은 노부나가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남은 지역은 이제 주고쿠, 시코쿠, 호쿠리쿠, 규슈뿐이었다. 주고쿠의 모리 가문은 하시바 히데요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세가 약해진 상황이었고, 호쿠리쿠의 우에스기 가문은 우에스기 겐신이 사망한 뒤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시코쿠에서는 원래 시코쿠의 절반의 지배자인 미요시씨 일족인 소고 마사야스 · 미요시 야스나가 · 아타기 노부야스 등이 노부나가의 편에 서서 쵸소카베 가문과 일전을 치를 태세였기 때문에 쵸소카베 가문은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규슈에서는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 분고의 오토모 가문, 히젠의 류조지 가문이 자기네들끼리 3파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이들 역시 노부나가에 대항할만한 세력까지는 아니었고 이로서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3]

그런 가운데 미츠히데는 다케다 가문 토벌전에서 귀환한 뒤 다케다 가문 토벌전에서 큰 공이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접대할 것을 명령받고 5월 15일부터 이를 진행했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모리 가문을 상대하는 와중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에게 본거지로 돌아가 주고쿠로 출전해 히데요시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츠히데는 이에 5월 26일, 자신의 본거지 성 중 하나인 탄바의 카메야마 성으로 가서 출진 준비를 했다. 그리고 5월 28일과 29일, 아타고 산의 신을 숭배하는 아타고 신사에 공물을 바쳤다. 통상적인 출전 준비 과정으로 볼 수 있으나, 이때 아케치 미츠히데는 의미심장한 하이쿠를 지었다.
時は今 雨が下しる 五月哉
지금 이때는 / 비가 밑을 적시는 / 5월이로다
이는 훈독하면 단순히 비가 세상을 적시는 5월 풍정 혹은 노부나가가 지배하는 세상의 5월 풍정을 노래한 글(時は今 天が下知る 五月哉)이라고 해석되나, 음독하면 ときはいま あめがしたしる さつきかな가 되는데 이는 "토키(土岐)는 지금, 천하(天が下→天下)를 지배하는(知る→支配する) 5월이로다"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는 '토키[4] 출신의 내가 바야흐로 이 5월에 천하를 얻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칠 것을 암시한 걸로 해석한다.

한편 노부나가 본인도 5월 29일, 히데요시를 구원하기 위한 병력을 기다리기 위해 아즈치성을 출발해 교토 혼노지로 향했다. 이때 노부나가가 데리고 간 수행원은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적은 수행원만 이끌고 간 것은 혼노지가 있는 기나이 지역을 담당하는 장수가 아케치 미츠히데였기 때문이었다. 노부나가는 혹시 문제가 생기더라도 미츠히데가 이끄는 병력이 있으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게다가 혼노지는 단순한 절이 아니라 방비가 잘 되어있는 성채[5]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 점도 노부나가가 안심한 요인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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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노지 복원도
어쨌든 노부나가는 혼노지에 도착했고, 장남인 오다 노부타다는 교토 안의 묘카쿠지에 들어갔다. 노부나가는 6월 1일, 혼노지에서 다과회를 베풀고 있었다. 한편, 비슷한 시간에 아케치 미츠히데는 휘하의 13,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교토로 향했다. 기록 중에는 미츠히데가 카메야마 성을 떠나면서는 병사들에게 노부나가가 열병식을 하려한다고 했다가 카츠라가와 강을 건넌 뒤에 노부나가를 치겠다는 이야기를 병사들에게 선포했다고는 하지만, 대체로 역사학자들은 실제 혼노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일반 병사들은 미츠히데의 의도를 몰랐고 극소수의 가신들 말고는 노부나가를 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고 본다.

6월 2일 새벽, 미츠히데가 이끄는 1만 3천여 명의 병력은 혼노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미츠히데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敵は本能寺にあり!
적은 혼노지에 있다![6]
6월 2일의 이른 아침[7] 아케치 미츠히데가 이끄는 병력이 혼노지를 완전 포위했고, 노부나가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 노부나가는 하인들이 싸우는 소리로 생각하고 측근에게 무슨 일인지를 보고 오게 했다. 그러나 측근이 "혼노지가 많은 병력에게 포위되어 있고, 병력의 문장이 도라지.[8]"라고 보고하자 노부나가는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노부나가는 "도리가 없다, 어쩔 수 없군. (是非に及ばず)"[9][10]이라고 말하며 몰려드는 적들에 활을 쏘며 맞섰다. 그러다가 활이 끊어지자 창을 잡고 계속 싸워나갔다. 그러나 적의 숫자는 훨씬 많았고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게 되자 싸움을 포기하고 안쪽으로 들어가 모리 란마루에게 불을 지르게 한 뒤 그 안으로 뛰어들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란마루도 아케치군의 장수 야스다 사쿠베라는 무장에게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재미있게도 혼노지 근처에는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성당이 있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도 혼노지의 변을 다루고 있는데, 프로이스의 기록에 의하면 미츠히데 군은 새벽 3시 무렵,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혼노지에 들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된 이유는 6월 2일에 미츠히데 군이 합류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다 가의 문지기들이 방심한 탓이었다. 노부나가는 화살을 쏘며 미츠히데 군에 맞서다가 미츠히데 군 휘하의 조총 부대의 총격으로 왼쪽 어깨에 총알이 관통하자 안쪽의 미닫이문을 닫은 뒤 불을 질러 자살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는 사이토 토시미츠의 가신인 야스다 사쿠베가 모리 란마루를 죽이고, 노부나가를 부상입혔다고 한다. 여담으로 야스다 사쿠베는 1597년에 할복했는데 이유는 뺨에 발생한 피부병의 악화로 인한것이었다. 참 기이한 것이, 노부나가와 사망한 날이 같았다.

노부나가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탓에 이것이 후대에 상당한 떡밥으로 남았다. 하지만 불탄 혼노지가 워낙 거대했던 탓에 그 잔해를 헤치고 노부나가의 시체를 찾는 게 무리여서 그냥 내버려뒀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한편 묘카쿠지에 들어간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는 혼노지에서 위급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구원하러 가려했지만 이미 상황이 종료돼버리자 측근들은 노부타다에게 도망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노부타다는 이미 미츠히데가 아즈치 성으로 향하는 길을 봉쇄하고 있을 것이라 판단해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고 수비가 용이하지 않은 묘카쿠지에서 니조 성으로 옮기게 된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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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미츠히데는 노부타다를 잡으러 니조 성으로 향했다. 니조 성의 인원은 소수였으나 워낙 완강하게 저항하여 미츠히데 군은 세 번이나 퇴각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교토의 기마무사들까지 움직일 조짐을 보여 반란이 실패할 우려가 생기자, 미츠히데 군은 최후의 수단으로 니조 성 바로 옆의 고노에 사키히사의 저택 지붕 위로 올라가 총과 화살을 마구 퍼부었다. 이 공격으로 노부타다의 대부분의 측근들이 사망했고 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게된 노부타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죽은 가신은 무라이 사다카츠, 스가야 나가요리, 사이토 토시하루[12] 등이다.

3. 아케치 미츠히데는 왜 난을 일으켰나?

혼노지의 변은 일본사 최고의 미스테리로 손꼽힌다. 미츠히데가 왜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최측근이었던 주동자가 뜬금없이 사건을 일으켜 상사를 살해했고, 빠르게 진압되었다.

미츠히데의 모반은 대단히 뜬금없는 일이었음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후쿠치야마시 향토자료관에서 소장 중인 미츠히데가 직접 쓴 "아케치 미츠히데 가중군법"이라는 문서에서 알 수 있다. 아케치가의 군비와 군사체제에 대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이 문서의 말미에는 노부나가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노부나가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아케치 가문 대대로 충성해야 한다.'는 문구가 있다. 게다가 이 문서가 작성된 시점은 1581년(텐쇼 9년) 6월 2일, 즉 혼노지의 변 1년 전이다. 이 문서대로라면 미츠히데는 불과 1년 만에 노부나가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지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미츠히데 자신조차도 왜 노부나가에게 맞서 모반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미츠히데가 죽기 며칠 전 직접 호소카와 후지타카에게 편지를 써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의문스러운 "我等不慮の義"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혼노지의 변은 우리에게 뜻하지 않게 갑자기 일어났다는 것이다. 본인이 저지른 짓임에도 "그 사건은 참 우리한테 뜻하지 않게 일어났지."라며 남일인양 적혀있다.

미츠히데 자신이 왜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는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수많은 주장과 추측이 난무한다. 대체로 미츠히데가 천하를 갖기 위해 그랬다는 '야망설'과 노부나가에게 품은 원한 때문에 그랬다는 '원한설', 시코쿠 출전을 회피하기 위해 그랬다는 '시코쿠 원정 회피설', 초조함 때문에 그랬다는 '초조설', 미츠히데의 모반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미츠히데의 뒤에 숨은 흑막이 있을 것이라는 '흑막설' 등으로 크게 다섯 가지 설이 오늘날까지 논의된다.

3.1. 야망설

어찌 보면 제일 단순하고도 명쾌한 설명. 미츠히데가 '그냥 자기가 일본을 먹고 싶어서'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해 노부나가를 쳤다는 것이다. 전국 시대 연구의 대가인 타카야나기의 주장으로, 그는 원한설의 근거로 제기되는 사항들이 후대에 부풀려지거나 억측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프로이스의 "일본사" 기록을 근거로 합리적인 성격인 미츠히데와 노부나가가 서로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미츠히데가 뜬금없이 모반을 일으켰기 때문에 야망 때문에 그랬을까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상식적으로 아케치가 반역을 일으키면 아케치에게 동조해줄 사람도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진짜 야망이 있었다면 사전 작업도 하지 않고 모반을 일으켰을까라는 지적도 있다. 예를 들어 미츠히데는 자신과 사돈인 호소카와 유사이츠츠이 준케이 등 기나이의 유력자들이 자신을 지지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아 실패했다. 노부나가를 뒤엎을 생각이 있었다면 우선 이들부터 완전히 포섭한 뒤에 난을 일으켰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동서고금의 모반이나 쿠데타 가운데 정말로 철저하게 완벽한 준비를 갖추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로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루비콘 강 도하 또한 본래 도박수에 가까운 쿠데타 시도였으며, 이후에 그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사건은 공화파가 "카이사르만 죽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별다른 후속 대책 없이 덜컥 카이사르를 죽였다가 뒷수습에 실패하여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권력을 내어주었다. 미츠히데도 일단 저지르면 전부 다 자기 것이 되리라고 생각했건, 아니면 다른 다이묘들과 사이좋게 나눠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건간에 노부나가만 죽이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13]

그리고 당대의 권력자가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 부하들에 대한 경계는 당연히 하기 마련이고, 100%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는 쿠데타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어느 정도는 운에 맡기고 실행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쿠데타는 별별 어처구니 없는 이유, 심지어 지극히 사소한 불운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성공한 경우라도 기록을 자세히 검토하면 필연적이었다기보다는 상당한 '행운'이 따라준 경우도 적지 않다.[14] 그러니까 노부나가는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미츠히데가 완벽한 모반 준비를 갖추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야망설에 대해서는 혼노지의 변 전후에 미츠히데의 움직임은 일관해서 노부나가를 타도하고 자신이 일본의 정점에 서는 것이었다는 것이 가장 큰 근거가 될 수 있다.

다만 아케치 미츠히데 자신이 그렇게 무모한 야심가가 아니었다는 것이 또 걸림돌. 인격자나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인식은 후대의 묘사니까 차치하더라도,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술에 의하면 상당히 약아빠진 인물로 묘사되는데 그건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걸 사람도 아니라는 말도 된다. 더군다나 이전에 주군을 바꾼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래에서 언급할 원한설 등이 겹쳤다고 하더라도 당대의 혁혁한 다이묘인 오다 노부나가를 직접 치느니 다른 데에 의탁하는 쪽이 상식적으로 안전한 방책이었다. 가장 간단한 설명이긴 하지만 정황상으로도 시기상으로도, 심지어 반란의 주체까지도 왜? 라는 의문이 남는 것은 여전하다.

다만 평소에는 똑똑해보이던 인물들도 막상 권력을 잡을 기회가 보였다 싶으면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소위 "권력욕이 이성을 마비시킨 경우". 카이사르만 제거하면 다 될 것이라고 믿었던 원로원 세력들처럼 미츠히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리라는 법은 없다.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키케로옥타비아누스의 역량을 제대로 재지 못해 몰락한 것처럼 미츠히데도 주요 가신 몇몇만 제압하면 오다 가의 가신단을 그대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젖었을 가능성도 있다.

3.2. 원한설

아케치가 노부나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다는 주장. 에도 시대에는 노부나가가 계속 아케치에게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자 아케치가 원한을 품었고 이것이 폭발해 혼노지의 변을 일으키게 된 것이란 식의 설명이 대세였다고 한다. 대체로 원한을 품게 만든 사건들로 제기되는 사항은 이렇다.

어떤 기록에는 아케치가 고바야카와 다카카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나는 요즘 노부나가 때문에 화가 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라고 써보냈다고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고, 원한을 품게된 사항들이란 것도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게 중론이다. 일부 학자들은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혼노지의 변 몇 달 전에 아케치가 노부나가에게 뭔가를 말하면 노부나가가 화를 내고 아케치는 방문을 열고 나와버리는 일이 있었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이때 화가 나서 모반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32권짜리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과 NHK 대하드라마 토시이에와 마츠, 사나다마루에서는 이 설을 채택하였다. 소하치의 소설에선 이에야스에 대한 대접 문제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코슈에서의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이에야스가 방문하자 오다 노부나가는 아케치에게 이 일을 맡겼다. 아케치는 오다 가문의 힘을 과시할겸 상당히 거창하게 준비했는데, 노부나가는 이 준비 상황을 보고 '아무리 응접이 중요하다지만 이에야스 따위에게 이런 식으로까지 하냐? 이건 오히려 나를 모욕하는 일이다.'라며 노발대발했다. 옆에 있던 시동에게 아케치를 때리게 하는 모욕을 줬을 정도. 이 일과 이후의 사건들 때문에 아케치는 자신이 오다에게 버림받았다고 오해하고 보복을 행했다는 주장.

토시이에와 마츠에서는 미츠히데가 가짜인질, 다케다와 내통을 한것으로 노부나가가 의심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숙청후보에 올랐음을 알고 있었다. 위의 원한설이 다 채용되어 연못에 접시를 던지는 장면을 제외하면 다 영상화되었다. 니와 나가히데로 부터 영지 몰수를 전해들으며 모반을 결심. 다만 미츠히데의 캐릭터가 다소 음흉하게 그려졌고 혼노지에서 다케다의 넋을 달래주겠다는 소리를 하는 것을 봐선 야망설도 조금은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원한의 이유가 이것이라 단정지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이 그 시대의 일본 문화는 지금의 다테마에, 혼네 문화보다 훨씬 더 심했다. 심하면 몇 십 년 전의 작은 일에도 원한을 가져서 그걸 숨기고 웃는 얼굴로 지내다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뒤끝이 엄청난 시대였기에 무엇이 원한의 이유였는지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그 당시에는 악의가 없는 사소한 말장난이나 농담도 10년, 20년 뒤에 등에 칼이 맞는 이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에서 보여준 미츠히데의 성격을 따지면 가능성이 낮겠지만, 그 때의 문화를 생각해보면 혼노지의 변 이전에 오다 노부나가가 미츠히데에게 한 사소한 농담,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런 것들이 원한의 원인일 가능성이 없진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3.3. 시코쿠 원정 회피설

미츠히데가 시코쿠 원정을 피하기 위해 모반을 꾀했다는 설.

이는 시코쿠의 정세와 관련이 있다.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에게 시코쿠의 쵸소카베(長宗我部) 가문을 복속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츠히데는 자신의 가신인 사이토 토시미츠의 여동생을 쵸소카베 모토치카와 혼인을 맺게 했다. 이로 인해 사이토 토시미츠와 쵸소카베 가문은 인척 관계가 되었고 미츠히데와도 연줄이 닿은 상태였다. 한편 초소카베 가문의 아와 침공에 저항하다 성을 내주고 항복한 미요시 야스토시의 아버지 미요시 야스나가(자신은 가와치 슈고다이로 있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해 오다 가문을 섬기고 있었다)는 하시바 히데요시와 연결해 시코쿠를 되찾으려고 하는 중이었다.

미츠히데는 쵸소카베 가문을 앞세워서 시코쿠를 통일해야 한다고 노부나가에게 진언했지만, 노부나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1582년 2월, 미요시 야스나가와 쵸소카베 모토치카에게 교토로 올라올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이를 거부하자 시코쿠를 무력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간베 노부타카를 총대장으로 삼아 시코쿠 정벌에 나서게 했다. 다시 말해서 미츠히데의 시코쿠 정책이 노부나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

이에 따라 미요시 야스나가가 먼저 선봉으로 시코쿠에 들어가고 노부타카 등이 이끄는 본대가 6월 2일 오사카에서 출진할 예정이었다. 미츠히데는 이를 막기 위해서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다는 것이 이 설의 핵심이다. 어느 정도는 체면을 구기게 된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분노가 생겨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을 수도 있지만 이것 역시 확실한 증거는 없는 상태다.

3.4. 초조설

미츠히데가 앞날이 어찌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모반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주장. 미츠히데는 사실 오다 가의 고유 가신도 아니었고, 노부나가 밑에 있은지도 몇 년 밖에 되지 않은 가신 중 신참자였다. 그럼에도 미츠히데는 가신들 중에서 상당히 중용되었는데 미츠히데 자신의 능력이 있기도 했지만 노부나가의 신임이 컸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580년, 노부나가가 여러 가신들을 내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비록 미츠히데는 내쳐지지는 않았으나 노부나가의 신임을 점점 잃어가는 게 아닌가라는 불안감이 들었고 이 때문에 모반을 일으켰다는 것이 초조설의 핵심이다. 대체로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의 신임을 잃어가고 있었던게 아닌가에 대한 사항으로 꼽히는 것들은 이렇다.

어떤 학자는 당시 미츠히데의 나이가 무려 67세였고, 자신의 뒤를 이을 적자인 아케치 미츠요시의 나이가 겨우 19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자신이 죽은 뒤에 아들이 노부나가에게 기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모반의 원인이 된게 아닌가라고 보기도 한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오다 노부나가에서는 기본적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와 오다 노부나가의 복잡한 관계를 묘사하면서 초조설을 베이스로 해서 원한설, 야망설을 적절히 조합한 복합적인 원인을 제시하였다.

3.5. 흑막설

미츠히데의 모반이 워낙 뜬금없었기 때문에 사실 미츠히데의 뒤에 누군가가 있던 게 아니냐는 주장. 실로 다양한 인물들이 흑막으로 제기되는데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는 주장도 있는가 하면 거의 음모론 수준의 주장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된다.

3.5.1. 아시카가 요시아키 설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한 무로마치 막부의 옛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자신의 원래 가신이었던 미츠히데를 사주하여 노부나가를 쳤다는 설. 미에 대학의 후지타 교수가 이 설을 주장하고 있다.

날로 세력이 커져가는 노부나가에게 불안감을 느낀 조정은 원하는 대로 직책을 주겠다고 하는 사네히토 친왕의 친서를 보내 노부나가를 슬쩍 떠보려 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여기에 답을 하지 않고 친서를 되돌려보냈다. 이 사건을 듣게 된 아시카가는 '노부나가가 조정에 정이대장군, 즉 쇼군의 직을 요구하지 않겠는가.'라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 노부나가의 신임을 잃고 한직으로 쫓겨난 자신의 원래 가신인 미츠히데를 사주해 노부나가를 죽이게 했다는 것이 이 설의 핵심이다.

후지타 교수는 이 설의 근거로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 직전에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쪽에서 진수성찬을 대접해 드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17]에서 미츠히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의 존재가 드러나는 점이라든지, 혼노지의 변 이후 미츠히데가 기이사이카슈나 토바시 시게하루에게 보낸 서신에서 "상의(上意)"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미츠히데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의 명령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는데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또한 노부타다를 제압할 때 실제 전투를 지휘한 인물이 아시카가의 중신인 이세 타다오기였다는 것도 근거로 제기된다.

하지만 이 설을 따르게 될 경우 아시카가를 비호한 모리 가문이 혼노지의 변을 미리 알고있어야 하는데, 모리 가문이 혼노지의 변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설이 성립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 만약 아시카가가 혼노지의 변을 사주했다면 아시카가를 비호하던 모리 가문에게도 이를 미리 알렸어야 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모리 가문이 혼노지의 변을 미리 알았느냐 몰랐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는 전투 중이던 모리 가문과 급히 강화를 맺게 되는데 모리 가문이 히데요시와 화해할 때의 반응이 이미 혼노지의 변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고[18] 또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지금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히데요시이기 때문에 지금 화해해야 한다."라고 강력하게 화해를 지지했다는 점도 근거로 제기된다. 또한 기슈의 사이가당이나 토바시 시게하루가 미츠히데를 지지했기 때문에 모리 가문이 혼노지의 변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지적이 있다. 그렇지만 히데요시와 모리 가가 화친할 때 이 조건으로서 모리측의 중신 시미즈 무네하루가 자결했는데, 만약 혼노지의 변을 양쪽 다 알고있는 상황이었으면 어째서 모리가 좀 더 튕겨서 시미즈를 살리도록 하거나 히데요시로서도 이유 없이 강짜를 부렸는지가 의문이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는 미츠히데가 아시카가의 가신이었는가를 확실하게 증명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아시카가 흑막설은 나름 근거가 있는 듯 하면서도 여전히 논란 중이다.

3.5.2. 조정 흑막설

노부나가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조정에서 미츠히데를 사주했다는 설. 사주의 주체로는 오기마치 천황, 사네히토 친왕, 고노에 사키히사 등의 문신세력 등이 제기된다.

노부나가는 태정대신, 관백, 정이대장군(쇼군) 이 셋 중 어떤 직책이든지 원하는 대로 주겠다는 사네히토 친왕의 서찰을 받고도 이에 답을 하지 않고 돌려보냈었다. 조정의 의도는 노부나가가 쇼군 직을 원할 것인가를 알아보려고 서찰을 보낸 것이었지만, 노부나가가 답을 하지 않고 돌려보내자 노부나가가 이전의 가마쿠라 막부무로마치 막부에서 행했던 것처럼 조정과 협조하는 체제 대신 조정을 제압하고 허수아비로 만들려는 게 아닌가라고 불안감을 느꼈다는 해석이다.[19][20]

조정 흑막설의 근거로는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를 평정한 뒤 미츠히데가 조정에 들어가자 조정에서 미츠히데의 공을 치하하며 금품을 하사한 점, 간베 노부타카가 고노에 사키히사에 대해 대해 추토령을 내려 집요하게 행방을 뒤쫓은 점, 당대의 중요 기록인 겸전어기에 혼노지의 변의 전후 1개월의 상황이 빠져있다는 점등이 꼽힌다.

당시 조정에서는 '노부나가가 바쿠후의 쇼군이 아니라, 조정의 중요 정무직책인 산쇼쿠(三職)를 요구하려는 게 아닌가.'라고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노부나가가 혼노지에 온 것을 사네가와 친왕의 서찰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온 것으로 생각하고 노부나가가 쇼군이 아닌 산쇼쿠를 원한다는 대답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혼노지를 쳤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조정 흑막설 역시 여러가지 반론이 제기된다. 노부나가가 산쇼쿠가 아닌 쇼군에 취임하겠다고 대답하려고 혼노지에 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흑막의 한 명으로 지적되는 고노에 사키히사는 대표적인 친노부나가 공가 중의 한 명이며, 노부나가가 죽은 뒤에 노부나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와카(和歌)를 남겼고 출가까지 했다. 간베 노부타카가 고노에 사키히사의 행방을 뒤쫓은 것은 그가 흑막이라서라기 보다는 니조 성의 바로 옆에 있던 고노에 사키히사의 집의 지붕에 아케치 군이 올라가도록 허용한 것을 따지기 위함이었다는 지적 역시 존재. 또한 오기마치 덴노나 사네히토 친왕도 명확한 증거가 없으며 오히려 사네히토 친왕은 니조 성의 싸움에 휘말려 위험할 뻔 했던 사실이 알려져서 조정 흑막설의 반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뒤에 조정에서 내린 칙서나 칼의 하사에서 미츠히데를 칭찬한 부분이 없고 미츠히데 자신도 조정의 칙명을 받아 노부나가를 쳤다고 말한 바가 없다는 점이 가장 강력한 반론의 근거로 제기된다. 만약 미츠히데가 조정의 은밀한 칙명을 받은 것이라면 '왜 조정에서 그에게 전혀 혜택을 주지 않았는가?'라는 모순이 생기는 탓이다.[21]

3.5.3. 예수회설

예수회가 일본의 정권 교체를 획책하여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다는 설. 타치바나 쿄코가 이 설을 주장했다.

이 설은 애당초 노부나가가 예수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는데,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자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날것을 우려해 미츠히데를 앞세워 노부나가를 죽이게 했다는 것이다. 예수회의 최종 목적은 명을 정복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노부나가에게서 히데요시로 권력을 넘어가게 해서 이 목적을 이루려 했다는 것이다.

예수회 흑막설의 근거로 제기되는 것은 미츠히데가 그리스도교인이었다는 것, 예수회가 노부나가에게 막대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를 말도 안 되는 음모론으로 치부한다. 미츠히데가 그리스도 교인이었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 있다. 미츠히데가 사용한 문장이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것이고 딸 타마코와 가신인 타카야마 우콘 등이 그리스도 교인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것이 혼노지의 변의 배후에 예수회가 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또한 예수회가 노부나가에게 막대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것 또한 터무니없는 낭설로 치부되고 있다. 오히려 예수회는 일본에서 얻은 수입의 절반 이상을 인도에 송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내 예수회를 유지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고 한다. 이 설을 주장한 타카야마 쿄코가 근거로 삼는 문헌이 에도 시대에 작성된 신빙성이 떨어지는 "아케치 전쟁기" 등이고 이런 문헌들의 이야기를 검증 없이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3.5.4. 하시바 히데요시설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흑막이라는 설. 만약 이 설이 사실이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전국시대 다이묘의 전형적 모습인 하극상 루트를 탄 인물이 된다.

히데요시는 주고쿠의 모리 가문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당시의 상황은 모리 가문이 매우 불리한 처지였기 때문에 빗추 타카마츠 성을 구원하러 보낼 병력은 15,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과연 히데요시가 구원병을 요청할 이유가 있었나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있다. 그리고 혼노지의 변의 소식을 듣자마자 타카마츠 성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다. 그리고 모리 가문과 화해한 뒤 전력을 온전히 보전하여 귀환했다. 11일만에 대군을 이끌고 귀환했다는 점, 혼노지의 변 이후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키요스 회의에서 1인자로 서게 된 점을 들어 사전에 미리 모의하지 않는 이상 이렇게 신속하게 일을 처리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흑막설을 주장한다.

히데요시가 불필요한 구원 요청을 한 이유에 대해서 이 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노부나가가 관직 취임 문제나 덴노의 퇴위 논란 등으로 교토에 올라와야 했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이 때를 노렸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노부나가가 의심하지 않고 노부나가를 칠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불필요한 구원 요청을 하여 미츠히데의 병력이 움직일 근거를 마련했고 이에 노부나가는 의심 없이 미츠히데에게 히데요시를 구원하러 병력을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의 약점은 히데요시와 미츠히데가 공모했다는 객관적 증거를 전혀 찾을수가 없다는 점이다. 히데요시가 구원을 요청한 것은 히데요시가 출전할 당시 모리 가문의 병력이 5만이라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히데요시의 전선과 미츠히데가 출동할 전선이 서로 달랐으며, 모리 가문과의 화해로 이뤄진 이른바 주고쿠 반환에 대해서도 히데요시가 우연히 그런 공을 세운 것이지 미리 예측하고 그랬 던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또한 히데요시가 구원을 요청한 것은 히데요시 특유의 보신책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자칫 히데요시 혼자서 큰 공을 세우게 되면 노부나가가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구원병을 요청하여 노부나가 자신을 불러서 공을 양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히데요시와 미츠히데가 공모했다면,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토벌할 때 미츠히데가 왜 이 사실을 폭로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일어난다. 히데요시가 미츠히데와 공모했음을 밝히게 되면 히데요시는 궁지에 빠지는데도 말이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조금이라도 비정상적인 움직임이나 음모의 기미가 보였었다면 히데요시를 적대한 오다 노부카츠, 시바타 가츠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왜 이런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겠는가도 히데요시 흑막설의 약점으로 지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혼노지의 변 최대의 수혜자가 히데요시라서 그런지 흑막설 중에서는 은근히 많이들 지지하는 설이라 창작물에서도 제법 많이 차용되곤 한다. '폭렬닌자 고에몬'이라는 영화[22]와 '효우게모노',[23] 노부나가 콘체르토 극장판,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가 그 예. 류성룡의 징비록 같은 조선의 기록에서도 '히데요시는 전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기술이 있을 정도였다.[24]

3.5.5. 도쿠가와 이에야스 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흑막이었다는 설. 이 설은 흑막설 중에선 비교적 정황 증거가 많다. 미츠히데가 히데요시에게 토벌되어 죽은 게 아니라 도망쳐서 이후 이에야스의 치세에 중요한 역할을 한 승려 난코보 텐카이, 즉 텐카이가 되었다는 설과 결부되어 논의된다.

자신을 아케치 미츠히데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역사학자 아케치 켄자부로(明智憲三郎, 1947~)[25]가 주장하는 설로, 굳이 따지자면 이 설에 위 히데요시 배후설이 섞인 것에 가깝다. 이 사람의 주장으로는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 후 명나라 원정(唐入り)을 계획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이에야스와 내통하여 변을 일으켰다는 것. 변을 일으킨 결정적인 방아쇠는 주고쿠 지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러 간 자리에서 노부나가가 이에야스 암살 작전을 흘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가 히데요시와 내통하고 있었고, 이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히데요시가 변이 터지자마자 회군하는 바람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결과적으로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혼노지의 변 직전인 5월 15일, 미츠히데는 이에야스를 접대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이에야스를 접대하는 과정에서 물고기가 썩는 사태가 벌어졌고 노부나가는 미츠히데를 심하게 질책하며 이에야스를 접대하는 임무에서 해제했다고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기록되었다. 이에야스 흑막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노부나가가 심하게 질책한 이유는 물고기가 썩어서가 아니라, 실은 미츠히데에게 이에야스를 은밀히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지만 미츠히데가 수행하지 못하거나, 혹은 수행을 거부해서 분노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흔히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의형제를 맺은 동맹 사이로 알려졌지만, 실은 노부나가에게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와 다케다를 견제하기 위한 장기말에 불과했다고 이들은 본다. 그래서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게 되자 노부나가는 '이제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어진 이에야스를 완전히 복속시켜 가신으로 만들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멸망시킬 것인가.'하는 선택만을 남겨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도 이런 노부나가의 의도를 간파하고 미츠히데와 공모해 노부나가를 암살하게 된 것이 혼노지의 변이라는 게 이 설의 핵심.

어느정도 정황적으로 봤을 때 이에야스로선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한 이후의 상황을 장담하기 힘들었던 것일 수도 있고, 노부나가의 살의를 눈치챈 이에야스가 먼저 선수를 치려했던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아케치의 병사들은 혼노지를 치는 것이 대체 무슨 유익이 있는가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노부나가를 노린 게 아니라 이에야스를 노린 게 아닐까."라고 했다는 기록이나, "노인잡담"이라는 책에서 "아케치가 난을 일으켰을 때 이에야스는 이것이 노부나가가 틈을 보아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 근거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에야스의 이용가치가 떨어졌다고 보기는 다소 애매하다. 비록 다케다를 복속시켜 영지를 편입해도 동쪽에는 이마가와 잔당과 호조 우지야스가 구축한 판도를 물려받은 호조 우지마사후호조씨 세력이 있었고, 북쪽에는 우에스기 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주고쿠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보내 모리와 일전을 치르고 있었다. 호조나 우에스기나 강성한 세력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동쪽을 막아줄 수 있는 이에야스의 이용가치가 여기서 주장하는 대로 적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한 이에야스가 노부나가로 인해 부인 츠키야마도노와 장남 마츠다이라 노부야스를 잃은 원한을 풀려했다는 설도 있다. 미츠히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츠히데의 가신인 사이토 토시미츠의 딸인 사이토 후쿠[26]도쿠가와 이에미츠유모로 천거했다는 점에서 양측간에 뭔가 오고가는 것이 있지 않았겠는가라는 지적도 있다.[27][28]

그러나 '신중한 성격의 이에야스가 과연 이런 모험을 감수하려고 했겠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후쿠를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유모로 천거한 것은 미츠히데가 아니라 교토의 치안을 맡은 이타쿠라 가츠시게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미츠히데와 이에야스가 관계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에야스가 흑막이었다면 왜 히데요시보다 먼저 앞서서 행동에 나서지 않았겠는가 하는 점 또한 이 설의 약점이다. 당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보다 먼저 앞서서 행동에 나서기는커녕 이가 닌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망쳤기 때문이다. 또한 누가 득을 보았느냐라고 따져도 애매한게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영토의 핵심인 오와리와 미노, 기나이는 전부 히데요시가 차지했고, 이에야스는 이제 막 오다 영토로 편입된 구 다케다 가문의 영토인 카이, 시나노 지역[29]만 차지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3.5.6. 기타설

4. 변 이후

절대자였던 노부나가가 반란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오다 세력권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쵸소카베 모토치카 공략을 위해 사카이에 모여 있던 시코쿠 원정군은 많은 이탈자가 발생하여 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오다 노부타카오다 사천왕이었던 니와 나가히데는 미츠히데를 독자적으로 공격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미츠히데 토벌의 공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시바타 카츠이에는 사건 당시,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밀어붙이고 있던 중으로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당일에는 우에스기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우오츠성을 함락시켜 에치고를 눈 앞에 두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나 노부나가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군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우에스기 카게카츠엣추, 시나노 양 쪽에서 오다군에게 협공당할 위기였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멸망의 위기를 벗어났다.

오다군이 점령하였던 타케다 가문의 영지인 카이, 시나노에서는 구 타케다 유신들과 호족들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 해당 지역에 다이묘로 임명되었던 오다가의 가신들은 영지를 포기하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오다 가문 세력들이 빠진 카이-시나노는 영지가 공백지가 되어버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호조 우지마사,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 3자간 치열한 영토 싸움(텐쇼진고의 난)을 벌이는 무대가 되었다.

코스케에 영지를 받고 간토 간레이에 임명된 오다 사천왕 타키가와 카즈마스후호조씨에게 공격받아 대패, 시나노를 거쳐 미노로 귀환하였으나 시간을 너무 지체하여 키요스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으며 이로 인해 오다 가문 내에서 위상이 추락하게 된다. 오다 세력권의 한복판이었던 기나이 지방에서도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이 알려지자 도적 및 무사 사냥이 횡행할 정도로 치안이 나빠졌으며 사건 당시 사카이에 와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목숨을 걸고 이가 지방을 넘어 겨우 본거지 미카와에 도착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하여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토벌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대혼란을 종식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혼노지의 변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히데요시는 즉각 모리 군과 휴전하고 엄청난 강행군으로 회군(주고쿠 대회군)[33]하여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츠히데를 바로 패배시키고 제거하여 혼란을 수습하였으며 이 후 열린 키요스 회의에서 대권을 잡게 되었다.[34]

5. 창작물 별 묘사

대체로 근래의 일본 사극들에서는 미츠히데를 모반을 꾀한 인물로 보기보다는 동정적이거나 우호적으로 그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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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혁신에서는 원한설, 시코쿠 원정 회피설 등에 기반한 이벤트 발동 조건을 가지고 있다.

원한설에 기반한 혼노지의 변 발동 이벤트
도쿠가와 가문의 시점에서 보는 혼노지의 변
혼노지의 변 이벤트 /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승리하는 가상의 결과

천도에서는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정이대장군에 취임할 수 있도록 공작했으나, 노부나가는 이것을 각하하고 미츠히데에게 서쪽으로 군을 수송할 것을 명령하고 스스로는 사의를 표할 뜻으로 조정에 갈 채비를 한다. 이 때 모종의 결심을 한 미츠히데는 노부나가가 혼노지에 머무른 날 밤에 야습을 감행한다. 아케치 대의 공격 대상은 혼노지 근처의 니조 성이고 니조 성의 성주는 노부타다로 설정되어 있다. 니조 성이 함락되면 노부나가는 란마루에게 안쪽으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때를 보아 불을 지를 것을 명한 뒤 안쪽으로 사라진다. 불타는 혼노지를 보며 탄식하는 듯한 미츠히데의 독백으로 혼노지의 변 이벤트는 일단락되며, 결과로 오다가는 사분오열되며 아케치는 야카미 성과 니조 성을 수중에 두게 된다. 후속 이벤트로 회군하는 히데요시의 군에 대처하기 위해 야카미 성을 버릴지 말지의 여부를 정하는데, 여기서 야카미 성을 버리지 않을 경우 패배하고 미츠히데는 농민들에게 암살당한다. 니조 성이 함락되지 않은 경우, 오다 가는 유지되고 아케치는 소수의 병력만이 남은 야카미 성에서 독립하게 된다. 여러모로 미츠히데가 주인공 격인 이벤트. 이벤트 내내 이어지는 미츠히데의 독백이 백미.

창조에서는 전국전 이벤트로 노부나가,노부타다,히데요시,미츠히데,카츠이에를 지정된 장소에 옮기면 실행된다. 이벤트 영상 후, 노부나가의 가독이 히데요시에게 계승되고 (만약 서국을 완전히 정벌한 이후라면 서국 전부가 히데요시의 영역이 된다) 카츠이에는 북쪽, 이에야스는 동쪽의 전국전 이전 노부나가 영지를 계승하며 미츠히데는 니조고쇼 주변 지역을 차지한다. 사이슈 오다가가 부활해 있으며 다른 노부나가 진영과는 아케치를 제외하고 모두 동맹 상태. 군사력이 충분하다면 시나리오 시작하자마자 니조고쇼로 쳐들어가 엔딩을 볼 수도 있다.

이인도 타도 노부나가에서는 게임 극초반부에 아케치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간접적으로만 언급된다. 여기선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살아남아 아즈치 성으로 귀환한다.

포켓몬 +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미츠히데 스토리가 모반에 대한 고민인데 결국 여기서 조차 반란을 일으킨다.

5.2. 태합입지전 5

여기서는 조정 흑막설과 아시카가 요시아키 흑막설이 결합된 형태. 미츠히데가 조정과 요시아키 둘에게 모두 사주를 받아 정변을 일으킨다. 미츠히데로 플레이하여 노부나가를 처치하고, 회군한 히데요시 부대까지 박살내면 역사대로 죽지 않고 계속 플레이가 가능한데, 어이없게도 미츠히데가 다이묘가 되는 게 아니라 아시카가 요시아키 소속 국주(삼국지 시리즈로 치면 군단장)로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를 격파하였다고 하더라도 세력 전부가 와해된 건 아니라, 주변의 히데요시, 카츠이에, 노부카츠, 노부타카는 물론이고, 도쿠가와와도 적대관계가 되어 난이도가 꽤나 높다. 물론 미츠히데는 국주 신분이라 마음대로 동맹을 맺을 수 있으니 사나다 가문과 동맹을 맺고 사나다 유키무라에게 풍림화산을 배운다면 난이도가 매우 낮아진다.[54]

5.3. 오다 노부나가전

영걸전 시리즈의 스토리 분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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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bottom: -15px;"
영걸전 공명전 모리 모토나리
맥성 전투
이릉 전투
추풍오장원 없음
오다 노부나가 조조전
혼노지의 변 마초 요격전
※ : 주인공이 사망하고 다른 주인공으로 교체되므로 분기점이 없음.
● : 주인공이 중도에 사망하는 분기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가상 분기만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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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최후반부의 중요 전투이자 본 게임의 스토리를 결정하는 분기점.

게임 진행 중에 미츠히데를 팰 건지 말 건지가 3-4번 정도 뜨는데 이 중 두 번 이상 미츠히데를 패면 미츠히데가 배신하지만, 한 번 이하로 패면 미츠히데가 배반하지 않아 혼노지의 변과 해당 전투 결과에 따라 파생되는 다음 전투가 생략되고 시코쿠 평정전-간토 평정전-천하통일 엔딩 루트로 넘어간다.

전투 전에 '도망친다'와 '포기한다'를 선택할 수 있다.

포기하면 불타는 혼노지에서 자결하는 엔딩 동영상과 함께 사망 엔딩으로 끝난다. 이러면 스토리는 여기서 끝.

도망친다를 선택하면 전투가 시작된다. 적군의 엄청난 병력을 뚫고 북서쪽의 목표지점에 도달하면 승리. 적이 엄청 많긴 한데 멍청하게도 북쪽은 텅 비어있는 배치라 너무나도 쉽게 클리어 가능. 시작시에 사쿠마 노부모리하야시 히데사다,[55] 3턴 시작때 원군으로 아들 노부타다와 우군들이 등장하므로 얘들로 적당히 길막해주며 그냥 도망가면 된다.[56] 전장이 교토라서 동서남북으로 가도도 시원시원하게 뚫려 있는데다가 적군은 대부분 보병인데 노부나가는 기병이라 일찌감치 달아날 수 있다. 참고로 이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면 도망가던 노부나가가 강가에서 체포당하고 미츠히데 면전에서 참수당하는 비참한 배드 엔딩을 맛볼 수 있다.

승리 분기로는 3가지가 있는데 미츠히데를 퇴각시키거나 11턴 이내로 퇴각할경우 야마자키 전투[57], 12턴 이후에 북동쪽으로 도망갔을 경우 시즈가타케 전투[58], 12턴 이후에 동쪽으로 도망갔을 경우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59] 분기이다. 야마자키 전투 분기의 경우 이후 미츠히데가 배반하지 않았을 때의 분기와 동일하고, 나가쿠테 전투 분기의 경우는 이에야스와 싸우게 되는 일직선분기이나, 시즈가타케 전투 분기의 경우는 11턴이내에 시바타와 접촉하면 시코쿠 분기로 가게 되고, 12턴 이후에 접촉하면 이에야스 분기로 가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혼노지의 변에서 살아남은 뒤의 최종 분기는 크게 시코쿠 평정 후 호조 우지마사를 잡는 분기 or 이에야스를 먼저 격파하고 이에야스-우지마사 연합군을 잡는 분기로 나뉜다.

5.4. 인왕, 인왕 2

코에이 테크모의 인왕 시리즈에서는 노부나가가 게임의 키 아이템인 영석에서 내뿜는 에너지 암리타를 탐했다는 이유로 미츠히데가 대의를 위해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다고 나온다. 이 과정에서 노부나가는 2편의 주인공 히데치요에게 자신의 수호령 효비신을 맡기고 노히메와 함께 요괴 화차에 산화한다. 노부나가가 죽고 나서야 사건의 모든 전말이 드러나는데, 미츠히데에게 노부나가를 치도록 설득한 사람은 그의 가신인 음양사 사이토 토시미츠, 정확히는 그에게 빙의된 2편 스토리의 흑막급 인물인 카신코지였고, 카신 거사는 토시미츠를 요괴 료멘스쿠나로 변화시켜 미츠히데의 병력 대부분을 학살한다.

주인공과 일전을 벌인 끝에 토시미츠는 료멘스쿠나에게서 해방되어 주인공에게 도주한 미츠히데의 안전을 부탁하고, 뒤이어 도착한 키노시타 토키치로의 병사들 손으로 온몸을 난자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영석을 탐한 인물은 노부나가가 아니라 도키치로였음이 밝혀진다. 즉, 이 모든것이 카신코지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사건이었다는 것. 주인공은 사건의 전말을 알고는 미츠히데를 찾고, 그의 목 대신 머리카락을 잘라 목숨을 살려준다. 미츠히데는 토시미츠의 딸인 후쿠를 데려가서 이름을 텐카이로 바꾸고 승려가 된다.

5.5. 노부나가의 셰프

독특하게도 원인이 야망도 원한도 아닌, 충성심에서 온 것으로 나온다.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 후 계획한 해외출정이 외국세력이 일본을 경계토록 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실패할 확률이 높고, 노부나가도 후대인들에게 수백 년 동안 정신 나갔다고 조롱받게 할 우책이기 때문에,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 대신 이를 실행하겠다고 결심한다.

노부나가의 셰프의 주인공 켄은 타임슬립한 현대인 요리사라서 혼노지의 변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과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죽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처음 둘에게 접대할 음식을 준비할 때부터 난감해 했는데, 자신이 연루되는 여러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과연 역사를 수정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래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다 끝내 자신이 역사를 바꿔서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미츠히데와 노부나가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도록 애를 쓰고 효과가 있어 미츠히데는 카신코지 같은 다른 현대인의 꼬임에도 넘어가지않고 노부나가에게 열심을 다한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 후의 해외 군사원정 계획을 미츠히데에게 털어놓자, 이는 노부나가가 역사에 사욕으로 일본 전체를 전쟁으로 이끈 전쟁광이라는 오명을 쓰게 하리라 생각하고, 차라리 노부나가 대신 자신이 그 오명을 뒤집어쓰겠다고 마음을 정하곤 본격적으로 모반을 계획하기 시작한다.[60]

이 대화가 있기 이전에는 가신들의 회의에 참석해서 이야기하던 도중 뜬금없이 노부나가가 아라키 무라시게가 왜 반란에 실패했는지 이야기 하며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노부나가 본인을 어떻게 공격해야 성공할지 말해보도록 시킨다.

이에 주저하나 노부나가가 괜찮다고 허가,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쓰러트리고 반란에 성공하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설명한다. 이야기 하는 시점의 미츠히데는 전혀 모르지만 사실상 이후 역사에서 발생하는 혼노지의 변의 돌아가는 상황들을 죄다 요약해 놓은 것들이다.

노부나가는 다섯째를 설명하면서 아라키 무라시게가 반란에 실패한 이유는 계획을 세우면서 정보가 사전이 노출돼서라고 짚고, 따라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노부나가 자신은 삼엄한 경비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면 노부타다와 같은 곳에 있지 않는다고 밝힌다. 그리고 만약 자신과 아들 노부타다가 함께 있게 되는 경우는 하늘이 노부나가를 죽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이 이야기 직후 지나가다가 이를 엿들은 켄이 기겁해서 난입한다.

6. 기타



[1] 에도 막부 말기의 라이 산요가 쓴 <일본외사>에서 나온 말이라는데, 한국에서는 이원복의 오류로 '적은 내부에 있다'는 의미로 일본에서 사용된다고 잘못 설명했다. 정작 일본에서는 '진짜 목적, 목표는 따로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각종 일본어사전이나 일본어 위키피디아에서도 이런 의미로 풀이한다. 참고 자료 혼노지의 변이 노부나가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미츠히데 따위야..' 하고 방심하다 당한 뒤통수 치기였고, 어떻게 보면 노부나가 본인이 (미츠히데를 막 대해서) 뿌린 씨를 돌려받은 거라는 견지에서 보자면 '적은 내부에 있다'는 해석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조직 내부의 잠재적인 적'을 가리키는 말은 불경 범망경에서 유래한 사자 뱃 속의 벌레라는 말이 또 있다. 다만, 애초에 이 해석에는 중대한 허점이 있는데, 이건 노부나가가 아니라 미츠히데가 말한 거다. 즉, 이 해석대로라면 배신자가 배신을 하면서 외친 대사를 거꾸로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으로 쓰는 셈이 된다.[2] 고야잔의 일향종 세력이 아직 노부나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고 기이 지방 무사들도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던지라 완전히 장악한 상황은 아니었다.[3] 이 당시 오다 노부나가가 단독으로 동원시킬 수 있는 병력의 수는 무려 7만에 근접했다. 그 이전 전국의 다이묘들 중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던 다케다 신겐이 동원할 수 있던 병력이 3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본의 최강이 된 것이다.[4] 土岐, 무로마치 막부미노 슈고로 임명하여 미노를 지배한 집안으로, 겐지의 분파이고 아케치 가문의 원류. 토키 가문을 몰아내고 미노를 차지한 것이 사이토 도산, 즉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이다.[5] 1580년 절을 대대적으로 개증축하여 성채를 갖춘 절로 탈바꿈된 상태였다. 2007년 혼노지가 있는 일대를 발굴한 결과 이런 흔적들을 확인했다고 한다.[6] 이 말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에도 시대의 라이 산요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그나마도 역사 기록이 아니라 라이 산요의 시 한 구절이다. 그렇기에 미츠히데가 정말로 이 말을 했는지는 불확실하며, 이 말 자체는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7] 대체로 새벽 4시로 추정한다.[8] 아케치 가문의 가몬이다.[9] 일본어 발음으로는 '제히니오요바즈(ぜひにおよばず)'로 현대어의 '시카타나이(しかたない)'에 해당한다. 노부나가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타 규이치의 저술로 오다 노부나가 연구의 1차 사료이자 1급 사료로 평가받는 신장공기에서 전하는 말인데, 혼노지의 변 이후에 오타 규이치가 혼노지의 변 당시 노부나가의 마지막 모습을 서술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탐문하러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 당시 노부나가 옆에 거의 마지막까지 있었던 시녀들과 만났고, 그 시녀들에게 '노부나가 님이 마지막에 뭐라고 하셨느냐'고 규이치가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10] 오쿠보 다다요가 쓴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에 의하면 "조노스케(城之介=오다 노부나가의 장남인 노부타다의 관직명)냐?"라고 했다고 되어 있다. 즉, 처음엔 아케치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 하고 자신의 장남을 의심했다는 얘기다.[11] 하지만 이것은 노부타다의 판단 착오였다. 미츠히데가 포위를 하고는 있었지만 포위망이 허술했던 탓에 오다 나가마스 등은 도망칠 수 있었다. 노부다타가 니조성이 아닌 아즈치 성으로 도망쳤다면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노부타다의 운명이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12] 사이토 도산의 막내 아들이다.[13] 애초에 쿠데타는 철저하게 완벽한 준비를 하는 것 자체가 구조상 불가능한게 쿠데타란게 군사+정권+등을 다 틀어쥔 상대를 대상으로 일으키는 것이므로 쿠데타 모의에 대한 사실이 조금이라도 새나갔다간 역관광당하기 일쑤라 쿠데타를 기획하는 쪽은 정말 믿을만한 이들만 참여를 권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가담한 이들은 당연히 전체 군이나 정치계에서 소수일 수밖에 없다. 이 말은 또 철저한 준비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14] 당장에 5.16도 진압할 책임이 있는 윤보선장면이 각각 승인, 아무 대응도 안함이라는 행보를 보여 성공한 면도 있었다.[15] 바리에이션에 따라서는 이 말을 들으면서 하급자들이 보는 앞에서 개맞듯 두들겨 맞았다는 말도 있다.[16] 히데요시가 하리마노쿠니의 칸키성 공략 시나 미타 성을 공격할 때 원군으로 히데요시를 구원했던 적이 있었다. 게다가 히데요시가 비록 천한 신분 출신이라고는 해도 미츠히데보다 먼저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었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선배인 셈이고 미츠히데도 여기에 딱히 이론을 제기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17] 이 쪽은 우에스기 가문을 말하며, 진수성찬을 대접해 드려야 한다는 것은 협력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우에스기 가문이 진수성찬을 대접해 드려야 할 존재가 대체 누구인가를 생각해보면 아시카가 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18] 사쿠마 전쟁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렇다고 한다.[19] 쇼군인 정이대장군과 함께 태정대신, 관백 이 세 관직은, 천황가 아래 최고위 귀족인 오섭가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들에 있어서 신분 상승의 최고 정점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이보다 의전상 위에 있는 직위는 황족 밖에 없었다. 쇼군은 당대 일본의 실권자이며, 태정대신과 관백의 권한과 위상은 조선으로 치면 각각 영의정섭정에 해당하는 조정의 중추이자 대표였다. 이런 자리를 셋 모두 제안했는데도 노부나가는 전부 거부한 것이다.[20] 여기에 대해서는 삼관추임문제(三官推任問題) 참조.[21] 토사구팽 내지는 증거인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혼노지의 변은 성공했고 오다는 확실히 죽었다. 조정 입장에선 딱히 숨길 이유가 없다.[22] 아래에도 설명되지만 무려 최홍만이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 다만 일본어가 어색할 것을 우려했는지 대사는 없으며, 영화평은 그럭저럭 볼만하다.[23] 효우게모노에서는 히데요시가 슬쩍 미츠히데를 간접적으로 부추겨 미츠히데가 스스로 봉기하게 유도했다는 설정이다.[24] 단 류성룡은 히데요시가 전왕을 몰아냈다는 기록과 함께, '다른 얘기도 전해지는데 전왕은 다른 이에게 죽었고 히데요시는 그 자를 없앤 후 왕이 되었다고 한다'는 이야기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25] 만화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의 원작을 이를 토대로 썼다. 본인에 의하면 미츠히데가 죽은 후 성을 아케타(明田)로 바꿨으나, 증조부 대에 메이지 유신 이후 족보를 찾아 정부에 자신이 아케치 미츠히데의 후손이라 주장하여 다시 아케치 성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켄자부로가 실제 아케치 미츠히데의 후손인지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성을 되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족보 역시 관동대지진 때 미츠히데의 다른 유품들과 함께 소실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게이오기주쿠대학 공학부 출신이며 난코보 텐카이와 미츠히데가 동일인물이란 설을 제기한 아케치 타키로(明智滝郎)가 이 사람의 조부다.[26] 후의 카스가노츠보네[27] 하지만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의 이름을 빌어 자신이 처단했다는 말도 있다. 사실 츠키야마도노는 이에야스보다 연상에 친 이마가와라는 뒷배가 있어서 이마가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던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을 가능성이 높다.[28]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적어도 이에야스 본인은 이마가와 밑에 있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후 바로 자기 영지로 튄 데다가 이마가와의 가장 큰 적이자 요시모토를 죽인 오다 노부나가와 바로 손을 잡았기 때문. 상술했다시피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이름을 빌어 이에야스 본인이 숙청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많고 거기에는 충분한 인과관계도 존재한다.[29] 시나노 북쪽 지역의 사나다 마사유키를 제외.[30] 통설로도 미츠히데의 집안이 사이토 도산을 섬겼다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물론 그렇다고 노히메와 관계가 있었다는 증거는 못 되지만.[31] 애초에 혼노지 당시면 사이토 도산은 아들의 모반으로 죽고 노부나가는 성공적으로 미노 장악을 끝낸지 오랜데. 뜬금없이 사이토 도산의 반쯤 농담인 밀명이 근거로 나오는 게 우습다.[32] 포로 학살은 기본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그대로 살려준다는 그 당시 불문율까지 무시하며 사람들을 죽였다.[33] 대략 30시간 만에 70km를 주파한 셈이라고 한다. 맑은 날이었다고 해도 충분히 비현실적이지만, 히데요시가 회군할 때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34] 혼노지의 변이 6월 21일 일어났고 키요스 회의가 7월 16일 열렸으니 사건이 터지고 한 달도 안 되어 모든 걸 수습하고 대권을 잡은 것이다.[35] 후일 주인공 후루타와 히데요시도 같은 관계를 맺는데, 정치적인 득실을 계산하거나 밀고 당길 것 없이 그냥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같은 사이라는 뜻이며 말년의 히데요시는 자신을 알아주는 노부나가를 명예욕, 출세욕에 눈이 멀어 죽였음을 유회하여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36] 본심은 이런 형태로 후루타에게 일부러 노부나가를 죽인 죄책감을 털어놓고 편해지고 싶어서 였다.[37] 덕분에 플레이 가능 무장이 미츠히데 외에는 다 싹쓸이 오다군 이외의 인물로 교체되어 버린다. 분명 오다의 장인데.[38] 히데요시에게 '지금이 천하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天下を取るべき好機ではないか)'라고 부추겼다는 기록이 있다.[39] 또한 영화 고에몬에서는 주인공 이시카와 고에몬으로 출연하는데, 작중 노부나가의 갑옷을 입고 세키가하라 전투에 난입하는데, 이를 보고 병사들이 노부나가가 살아돌아왔다고 놀라는 장면이 있다.[40] 의역하자면 혼노지가 미쳤어요 내지는 혼노지가 약빨았다 정도.[41] 이 만화에서 사키히사는 화양부인이라는 구미호를 빙의신 겸 섹스파트너로 거느린데다 중국무술을 익힌 괴물같은 사내다. 더불어 계략도 뛰어나다.[42] 본래 노우히메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으나 사이토 도산에 파혼된 과거가 있었다.[43] 덤으로 란마루도 생존했으며 노부나가가 멀쩡하게 살아있으므로 야스케도 아직 추방되지 않았다. 하지만 장남 오다 노부타다는 사망한다.[44] 역시 개로 태어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통쾌하다고 말한다.[45] 실제 역사에서는 그의 형인 시마즈 요시히사가 당주였다. 때문에 노부나가도 요시히사가 아닌 요시히로가 시마즈가의 당주인 것을 알고 의문을 품는다.[46] 이전에도 몇 번 미츠히데를 걷어차는 의 묘사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이에야스를 접대하는 자리에서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의 옷에 음식을 쏟자 미츠히데를 부채로 때린다.[47] 대표적으로 노부나가가 혼간지와의 싸움에 지친 제장들을 위로하기는커녕 계속 압박하고 무리한 싸움을 요구한다. 더불어 이전에 성을 지을 때 노부나가가 신성한 불상을 함부로 탁탁 치며 별 것 아닌 듯 여기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서도 미츠히데가 이를 탐탁지 않게 바라본다.[48] 아라키 무리시게를 비롯해 아시카가 쇼군을 받드는 세력이 계속 노부나가와 적대해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아케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요시아키를 찾아가 교토로 복귀할 것을 종용하지만 요시아키는 미츠히데 혼자 있는 교토라면 복귀를 생각해보겠다고 답한다. 즉, 노부나가가 있는 한 교토로 올라갈 생각이 없다는 의미다.[49] 본작에선 노부나가에 반발한 인물들이 주요하게 등장한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노부나가를 배신하며, 미츠히데에게 그 이유를 토로하고 히라구모를 맡긴다. 미츠부치 후지히데는 끝까지 아시카가 쇼군을 따르며 할복한다. 사쿠마 노부모리 역시 오케하자마 전투 때부터 묘하게 노부나가를 못 미더워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결국 밉보여 추방된다. 미츠히데의 사돈 아라키 무리시게 역시 아시카가 쇼군에 대한 충성심을 토로하며 끝까지 노부나가에게 적대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츠다이라 노부야스 할복때부터 계속 일이 이렇게 된다면 자신들도 자신들의 뜻을 관철할 수밖에 없다며 노부나가에 대한 불만을 미츠히데에게 대놓고 드러낸다.[50] 죽기 직전 아츠모리를 부르거나 할복하는 장면은 없다. 또한 노히메 역시 등장하지 않는다.[51] 혼노지의 변 당일이다.[52] 루이스 프로이스의 예수회 예배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혼노지가 있었다.[53] 오메가 일족의 조상이 퍼펙트 오리진에 의해 추방당하면서 성은 완벽팔식(Perfect Eighth) 싱맨의 데몰리션 웨이브에 의해 파괴되었다.[54] 히데요시와의 이벤트 전투에서도 큰 도움이 되며 미츠히데는 1582년 시나리오에선 시작부터 국주이므로 다케다 가문이 망하고 사나다 가문이 독립하자마자 풍림화산을 배워두는 것을 추천.[55] 다만 이들을 추방했다면 원군으로 나오지 않는다.[56] 실제 역사에서 노부타다는 혼노지의 변 때 사망하지만 노부나가가 도망치는데 성공하면 얘들은 퇴각하더라도 사망처리되지 않고 바로 다음 전투에서 버젓이 살아 돌아오니 굳이 살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좋다.[57] 여기서는 노부나가가 미츠히데를 직접 토벌하며 턴이 흘러가면서 차례대로 아군 장수들이 원군으로 온다.[58] 노부나가가 숨어서 요양하는 사이,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가 싸움을 벌이는데 이때 노부나가가 난입하여 전투를 멈춘다.[59]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요시가 싸울때 노부나가가 개입하고 이에야스가 최종보스가 된다.[60] 이 계획은 미츠히데 이외엔 켄과 히데요시만이 알았다. 히데요시에겐 정벌군을 맡기고 미츠히데는 정복지의 통치와 외교를, 서양 문화에 해박한 켄에게 그 미츠히데의 보좌를 맡길 생각이었다, 히데요시가 권력자가 된 말년에 왜 명나라 정벌이라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임진왜란을 결행했는지를 두고, 노부나가의 유지를 잇기 위함이라는 이유를 붙인 설정이다.[61] 이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남산의 부장들에 나오지는 않았기 때문(김영삼은 언급은 되었다)에 실제 인물 얘기를 하자면 간혹 도쿠가와 이에야스노태우김영삼에 비견되기도 한다. 도요토미의 라이벌 혹은 경쟁자였다가 도요토미에게 협력하여 2인자 자리를 얻어내고 이후 1인자의 자리에 올라서자 도요토미 가를 박살냈다는 점에서 착안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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