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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16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5세 Ptolemy XV Caesar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 Πτολεμαῖος | Ptolemy Caesar[1] | |
출생 | 기원전 47년 6월 23일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
사망 | 기원전 30년 8월 말 (향년 17세)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44년 ~ 기원전 30년 (약 14년) | ||
전임자 | 클레오파트라 7세 | |
후임자 | 없음 파라오직 폐지 | |
부모 | 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2]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 | |
종교 | 이집트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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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이사리온(Caesarion)은 고대 로마의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들이다. 어머니와 함께 이집트의 공치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이자 최후의 파라오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공동 통치하는 형태였고 본인은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않아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클레오파트라 7세가 최후의 파라오 취급을 받는다.정식 칭호는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 본명은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이며, 카이사리온은 애칭으로 '작은 카이사르'라는 뜻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로 도망친 정적 폼페이우스를 쫓아서 이집트를 침공했을 때, 클레오파트라 7세는 로마군의 힘을 빌려 이집트의 지배권을 얻기 위하여 카이사르의 애인이 되었다. 카이사리온은 이때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장남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의 아내가 아닌 애인이었고, 카이사리온 역시 정식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닌 사생아였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아들에게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붙이고 공공연하게 카이사르의 아들임을 주장하였고, 카이사르 역시 카이사리온을 자신의 적자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클레오파트라 7세의 행동에 대해서 특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당대에 '카이사르의 사생아'는 그리 드문 타이틀은 아니었다. 사실 카이사르는 정식 결혼 관계에서는 자식을 얻지 못했지만 여성관계가 난잡했던 만큼[3] 사생아가 있다는 소문은 많이 돌았고, 그 가운데는 카이사르의 암살범 가운데 한 명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도 있었다.[4][5]
2. 생애
기원전 44년에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와 이집트의 공동왕이 되었다. 하지만 겨우 3세의 소년이었기 때문에 통치권을 행사하지는 못했고, 이집트의 실권은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 및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한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가 쥐고 있었다.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아들임을 근거로 하여,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를 공격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주장대로라면 카이사리온은 정당한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애시당초 카이사르의 유언장에는 분명히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반면 카이사리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명분도 있었다.[6] 따라서 양 진영 간에서 전쟁이 벌어진다.(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이끌던 군대가 옥타비아누스군에 패배하고, 이집트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완전히 점령되자 카이사리온 역시 사로잡혔다. 안토니우스는 자결하고,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리온을 살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카이사리온은 '카이사르의 친자'이며,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였기 때문에 뻔히 자신의 정통성에 위협이 될 카이사리온을 살려둬서 화근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자살한 뒤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의 지시로 살해되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리온을 홍해의 항구 베레니케로 보내서 해외로 도피시키려 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리온을 알렉산드리아로 불러와서 살해하도록 지시했다. 일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가 보낸 부하가 카이사리온에게 클레오파트라 7세가 죽은 것을 숨기고, 어머니가 부른다며 거짓말을 했고, 이에 속아넘어간 카이사리온이 순순히 알렉산드리아로 왔다가 끔살당했다고 한다. 혹은 에티오피아에서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다.참조
카이사리온의 죽음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단절되었고, 풍요로운 이집트 왕국은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의 직할령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후로는 역대 황제들이 대대로 물려받는 황제 직할지로서 로마의 충실한 밀셔틀로서 700여년 간 존속하였다.[7]
3. 평가
비록 카이사리온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됐고 어린 나이이기는 했으나, 카이사르는 원하고자 했다면 충분히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인 카이사리온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할 수 있는 기간이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를 카이사르가 처음부터 카이사리온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여기에는 충분히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 만일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지위를 이어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클레오파트라 7세가 어린 아들 카이사리온을 휘어잡고 막후에서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로마는 명목상으로는 '로마 시민'들이 주권을 가진 공화정이었다.
이 당시 세계를 정복했다는 자존심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또한 공화정의 전통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던 로마인들이 단지 "카이사르의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이집트의 여왕이 로마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결코 좋게 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카이사리온이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들인 이상, 아무리 카이사르의 친자라고 해도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될 수는 없었다. 카이사리온을 통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가 로마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로마 시민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음이 분명하다.[8][9][10]
실제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대상으로 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의 치마 폭에 놀아나서 로마의 영토를 팔아먹는다는 프로파간다를 퍼트렸고, 옥타비아누스가 퍼트린 프로파간다는 조강지처를 버렸다는 점과 함께[11] 로마 시민들을 공분에 휩싸이게 하였다.[12] 반면에 안토니우스 측에서 퍼트린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친자이므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이 있다"는 프로파간다는 거의 먹혀들지 않았다. 카이사르 자신이 유언장으로 친자 카이사리온 대신에 양자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니, 카이사리온을 세우는 것이 카이사르 본인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기 때문이다.[13]
로마 시민들이 안토니우스에게 반발하는 여론이 강했던 것을 보면, 클레오파트라 7세가 혼인이나 혈연을 통하여 로마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때로부터 상당히 오랜 세월이 흘러 공화정이 형식화되고 제정이 거의 완전히 정착된 플라비우스 왕조 시기에도 티투스 황제는 유대 왕국의 공주 베레니케를 사랑하였으나, '제2의 클레오파트라'를 우려한 로마 시민들의 반발 여론 때문에 티투스는 결혼을 하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물론 정치적 센스가 출중하고 두뇌가 명석한[14]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러한 로마 시민들의 생각을 미리 내다보지 못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또 그렇다고 해서 카이사르가 특별히 카이사리온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배려를 해줄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카이사리온에게 아무것도 안 해주는 것이 가장 큰 배려일 것이다. 카이사리온은 이미 클레오파트라 7세의 배에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귀하신 몸이다. 카이사르 덕분에 클레오파트라 7세의 이집트 지배권은 반석 위에 올라가 있었고[15] 카이사리온은 별일만 없다면 정당하게 이집트 왕위를 이어받아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왕으로서 통치하게 될 것이다.[16] 게다가 그는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로마인과의 관련성도 충분히 있으므로 이를 내세워 크게 이상한 짓을 하거나[17] 폭군 짓거리를 하여 백성의 신망을 잃어 내버려 두는 것 자체로 위험해지거나, 부국강병을 한답시고 선을 넘어 로마의 신경을 긁어놓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18][19] 로마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이집트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말 그대로 가만히만 있어도 최소한 이집트의 파라오로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다.
따라서 카이사르가 무리하게 뻔히 예상되는 시민들의 반발을 무릅쓰면서 로마에서 자신이 차지하던 지위를 물려줄 까닭이 전혀 없다. 카이사르가 카이사리온에게 자신의 혈육으로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피비린내 나는 암투가 시시때때로 벌어지며 수도 없이 목숨을 위협받고 힘겹게 버텨내야 하는 로마 정계에서의 삶보다는 부유하고 화려한 동방 이집트 왕으로서 절대군주이자 신적인 권위를 누리면서 편안한 인생을 보내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는 망해가는 나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왕족들의 내분과 내전이 심심하면 터졌고, 지배층인 그리스계와 피지배층인 이집트계의 갈등으로 이집트인 반란이 숱하게 터졌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7세 집권기는 아니었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정적들을 싹 처리해주어서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는데다가, 클레오파트라 7세는 통치자로 재능도 있어 그리스계와 이집트계를 잘 조율해 이집트인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다.[21] 클레오파트라 7세는 통치기간중 두 번이나 로마를 방문(BC 46, 44)했는데도 이집트 국내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30년전 선선대 왕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살해당하던 때나 10년전 선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딸 베레니케 4세와 내전을 벌여 그녀를 처형하던 때와 비교하면 천지차이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이집트가 안정되자 부를 뿜어내기 시작했고, 병력수로는 옥타비아누스보다도 많았던 안토니우스의 로마군 유지비는 대부분 이집트가 부담했을 정도다. 만약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안토니우스와 연합해 동지중해의 패권을 노리는 대신 로마의 보호국으로 만족했다면, 카이사리온은 부유한 이집트의 파라오로서 만족스런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리온을 이용하여 로마를 뒤흔들려 하였고 결국 카이사리온은 정치적 상징물 혹은 클레오파트라를 위한 도구로서 이용만 당하다가 어린 나이에 최후를 맞고 말았다.
4. 대중문화
드라마 <ROME>에서는 사실 카이사르의 아들이 아니라 티투스 풀로의 자식으로 나온다. 카이사르와 만나기 전 클레오파트라 7세가 풀로와 원나잇 스탠드를 해서 낳은 자식인데, 아무래도 카이사르가 나이가 많았기에 그에게서 정상적으로 아들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보험을 들어놓은 것. 참고로 실존인물은 사망 당시 17세였지만 본작에선 11세였던 아역배우가 역할을 맡아 나이가 다소 어려졌다.시즌 1에서 갓난아기로 나온 이후 한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시즌 2 막판에 성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역할은 세상물정 모르는 재수없는 발암덩어리 도련님 포지션(...). 상황이 위급함에도 무조건 어머니가 다 해결해 주실거라 믿다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 현실부정을 하는 모습은 압권. 자신을 찾는 로마 병사들이 검문을 할 때 지휘관이 이집트어로 자신을 떠보자 곧바로 낚여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보레누스가 칼맞아 초주검이 되는데 일조했다. 결말에서는 제반사정을 어느정도 파악한 옥타비아누스의 묵인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풀로와 도피하게 된다.[22] 도피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옥타비아누스에게 복수하겠다는 헛소리는 덤.
PS2용 리메이크판인 아르고스의 전사의 주인공인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등장. 역사대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들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가 마지막에 아무네트에게 아들을 구해달라 요청하고 아무네트가 이를 받아들여 아무네트를 따라 로마로 가서 감추어진 존재로 자라게 된다.
[1] 별칭은 '카이사리온(Καισαρίων: 작은 카이사르)'.[2] 단 카이사르는 국내외 정치적 문제 때문에 평생 카이사리온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3] 개선식에서 사람들은 그를 향해 대머리 난봉꾼이라 하였고 소 카토에게 정치적으로 공격받을 때 그 계기가 된 편지의 내용을 본 소 카토는 작작 좀 밝히라고 했는데 편지의 내용인 즉 소 카토의 누이가 카이사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 문제는 이 전에 소 카토가 카이사르가 편지를 읽을 때 저게 카이사르가 모반을 꾸미고 있다는 증거라고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대놓고 말하며 설레발을 치다가 편지를 반 강제로 뺏어 읽고 있었다는 점이었고(이때 카이사르는 그냥 아니 이거 걍 사적인 편진데? 라고 했지 딱히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소 카토만 망신당했다.[4] 카이사르 사후 약 115년 뒤, 네 황제의 해에 라인 강 국경의 공백을 틈타서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바타비아 반란을 일으킬 때에도 반란군 지도자들 중 하나인 율리우스 사비누스가 카이사르의 사생아의 후손을 자처했을 정도였다.[5] Sabinum super insitam vanitatem falsae stirpis gloria incendebat: proaviam suam divo Iulio per Gallias bellanti corpore atque adulterio placuisse. Tac. Hist. 4. 55[6] 애시당초 카이사르는 생전에도 카이사리온을 공식적으로 자기 아들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이 말인즉슨, 카이사르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든 정말로 카이사리온의 핏줄을 의심했든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든 간에 카이사리온을 자기 후계로 고려한 적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7] 이후 640년에 이슬람 제국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집트를 탈취하면서 이집트는 새로운 역사로 접어든다. 이집트에 대한 로마의 착취적인 대우로 인해, 그리 많지도 않았던 무슬림 군대에 순순히 항복한 셈. 이는 큰 나비효과를 낳아 밀셔틀을 잃은 동로마 제국은 엄청난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고, 이슬람은 이집트를 발판 삼아 아프리카로 진출했고 지브롤터를 넘어 이베리아까지 정복했다.[8] 사실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 본인은 제국을 건설할 생각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물론 이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이후 로마의 지배권 확립에 대한 청사진을 보이지도 못했다는 점도 있고 또, 아우구스투스의 제국 자체는 애시당초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생겨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9] 그리고 로마는 상속인을 꼭 자식으로 지명하지 않고 유명인이나 친척, 불특정 다수에게 물려주는 것을 꺼리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10] 그게 아니더라도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을 경우 왕이 되려고 한다는 오명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민중파로서의 인기와 영향력도 잃었을 것이 뻔했다.[11] 카이사르도 클레오파트라 7세와 불륜을 저질렀지만 카이사르는 최소한 자신의 불륜을 자기 스스로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고(물론 실제로는 공공연한 비밀이나 마찬가지였고 카이사르가 바람둥이라는 사실은 로마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정실은 정실로서 대했고 내연녀나 애첩은 정실부인 이상으로 대접해주진 않았으며 여성관계를 로마 정치에 끌어들이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비록 정략결혼이라고는 하지만 정처를 내치고 내연녀와 재혼했으며 무엇보다도 로마 영토를 멋대로 클레오파트라의 자식들에게 주려고 했다. 거기다 당시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소 옥타비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친누나였고 현숙한 여성으로 유명했는데 실제로 안토니우스와 그녀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식들도 대부분 옥타비아가 맡아서 키웠다.[12] 옥타비아누스에게 더욱 유리했던 점은 이 프로파간다가 결코 거짓이 아닌 진실이었다는 것이다.[13] 로마의 유명인이 자신의 후계자로 양자를 고르는 일은 적지않게 있었다. 물론 카이사리온은 친자라고는 하지만 적자는 아니었으므로(이집트 왕가에서는 적자가 맞지만) 유언장으로 그 정통성을 인정받은 옥타비아누스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었다.[14] 카이사르가 영웅이었는지 독재자였는지는 역사가들마다 다르게 보지만, 어쨌든 그가 탁월한 정치력을 가졌다는 것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15] 이미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정적들을 죄다 숙청해놨다.[16] 당시 로마에서 수입하던 밀은 전부 이집트에 있는 나일 강 하류의 삼각지대에서 나왔으므로 이집트 왕가는 당시 가장 부유한 왕가였다. 무력이 약했던 게 문제이긴 했으나 로마랑 사이좋게 지낸다면 부국강병은 못 돼도 태평성대 정도는 누리고 살 수 있었다.[17] 대표적인 예로 엘라가발루스가 있다. 엘라가발루스는 동맹국왕이 아닌 로마의 황제지만 기행이 도를 넘어 냅두는 것 자체가 위험했기 때문에 실권자였던 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에게 제거당했다.[18] 대표적인 예로 마우레타니아 틴지타나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있다. 통치력으론 명군이었으나 은연중에 로마에게 거슬릴 만한 짓을 반복하여 칼리굴라에게 제거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예까지 갈 것도 없이,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와 결혼하여 지중해 세계를 뒤흔들려고 했던 짓 자체가 로마의 신경을 긁어 도발하는 짓이기도 하였다.[19] 다만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결혼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어디까지나 옥타비아누스 개인의 원한에 불과할 뿐이지만, 문제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아이들, 그리고 안토니우스 자신과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에게 멋대로 로마가 획득한 영토를 내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20] 카이사르 본인도 로마 정계에서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적이 있었다. 술라의 감시를 받았던 적도 있고 카틸리나 사건에 연루될 뻔도 했다. 갈리아 원정이라는 대업적을 세웠는데도 원로원 최종권고를 받기도 했으며 결국은 암살당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죽을 고비 외에도 젊었을 적 비티니아에 망명해 있었을 때 비티니아 왕의 남총이었다는 조롱성 루머에 시달린 것은 덤이었다.[21] 클레오파트라 7세는 유창한 이집트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데 그녀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역대 이집트 국왕 중 유일한 이집트어 사용자라는 점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문제점을 알 수 있다.[22] 옥타비아누스가 눈치를 챘는지 나오진 않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설정상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귀신같이 꿰뚫어보는 화술의 달인이다. 풀로가 거짓말 하는걸 모를 리 없다. 풀로가 오랜 친구이자 생명의 은인이니 묵인하고 넘어가 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