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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陜川 海印寺 藏經板殿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해인사 (치인리)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기타 | |
수량/면적 | 4동 | |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 |
시대 | 조선 성종 19년(1488) | |
소유단체 | 해인사 | |
관리단체 | 해인사 |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해인사 장경판전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the Depositories for the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Temple d'Haeinsa Janggyeong Panjeon, les dépôts des tablettes du Tripitaka Koreana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경상남도 합천군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737 | |
등재연도 | 1995년 | |
등재기준 | (iv)[1], (vi)[2] | }}} |
해인사 장경판전 외부 [3] |
해인사 장경판전 내부 |
[clearfix]
1. 개요
합천 해인사에 위치한 고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15세기에 건축된 조선 전기의 서고이다. 대한민국의 국보이며[4] 또한 1995년 12월 6일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19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5]그리고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도서관 건축이기도 하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건축사 교수 제임스 W.P 캠벨은 세계의 도서관 건축물을 다룬 <세계의 도서관>을 펴내면서 첫머리에 해인사 장경판전을 언급했고# 프랑스에서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아름다운 도서관 건축에 해인사 장경판전을 꼽기도 했다. #
장경판전에 보관된 팔만대장경 자체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평생의 설법을 수록한 경전과 불교 승려들에 대한 계율 및 이에 대한 후대 고승들의 평론, 주석, 이론 강의들을 모아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장경판전도 엄연히 도서관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
개경에 지어졌던 고려 국자감이나 조선의 수도 한양의 성균관에도, 나아가 각지의 사찰 및 향교/서원에도 내부에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한 서적의 간행 및 보관을 주요 업무로 하는 도서관은 존재했지만, 대부분 건축물 자체는 몇 번이나 불에 타서 다시 지었고 보관된 서적이나 목판도 후대에 다시 갖추게 된 것이니만큼, 고려 이래의 장경판이나 조선 초기의 건축이 처음 새길 당시(13세기)의 판목 원판으로, 또 처음 지었을 때의 건축(15세기)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한국에서 장경판전이 거의 유일하며 또 가장 오래된 것이다.
2. 역사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국토가 유린당하던 중 불법의 힘으로 위란을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을 고려 후기 1236년부터 1251년까지 제작했다. 하지만 이때는 나라 사정상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전용 서고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강화도 서문 밖 선원사에 보관되었다.팔만대장경이 지금처럼 해인사에 온 것은 조선 초에 이르러서이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단 판전 건축을 시작한 시기는 조선 세조 3년(1457)으로 추정한다. 세조가 해인사에 모신 대장경 50부를 책으로 간행하여 전국의 사찰에 나누어 보관케 하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팔만대장경 전용 장경판전을 처음으로 크게 증축하고 일부분을 새로 건축했고, 정희왕후가 성종 12년(1481) 학조대사에게 명을 내려 추가로 증축한 듯하다. 기와 등에 홍치원년(弘治元年, 명나라 홍치제의 연호, 서기 1488년, 조선 성종 19년)이라는 각명(刻名)이 있으므로 완성시기는 성종 19년(1488)이라고 추정한다. 이후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개수, 보수공사를 했지만 전체적으로 15세기 세조~성종대를 거치면서 현재 모습으로 완성했다고 추정한다.
6.25 전쟁 당시 완전히 소실될 뻔한 사건이 있었는데 지리산일대 빨치산 소탕 명령을 받은 김영환 공군 대령이 폭격지점이 해인사임을 알고 폭격금지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기관총으로 적을 위협하여 빨치산들을 퇴치하는데 성공하였고 그 결과 민족의 유산인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낼 수 있었다.[6]
팔만대장경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세심하게 과학적인 설계를 한 것으로 유명하며,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제작된 고려 팔만대장경이 현재까지 7백여 년간 큰 손상 없이 8만여 장 전체가 무사히 전해지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일등 공신이다. 이는 팔만대장경보다 훨씬 훗날에 만든 국내외 여러 목판작품 대부분이 팔만대장경보다 훨씬 보존상태가 나쁘다는 점만 보아도 명약관화하다.
3. 기타
이곳은 민간인 통제구역에 속한다. 1990년대말까지만 해도 출입금지까진 아니었고 일반 불자들도 관람할 수 있었다. 심지어 부처님오신날 엄마 손 잡고 따라온 꼬마 불자들이 들락날락하면 지나가던 스님이 대장경과 장경판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해 주기도 했을 정도였다.그런데 무당 등이 무속적인 이유로 부적에 불을 붙여 장경판전 창살 안쪽으로 던져놓거나, 혹은 기독교 광신도들이 불을 놓으려 시도하거나 하는 등 여러 차례 방화 시도가 있었고, 이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아예 일반인의 출입 자체를 막아버려 이젠 해인사 승려들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화재를 방지하는 과학적인 설계가 되어있긴 해서 조선 시대에 몇 차례 해인사에 화재가 났을 때도 다른 전각이 불타는 동안 장경판전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장경판전은 기본적으로 나무로 만든 목조건물이므로 화재에 굉장히 민감하다. 소홀히 관리하다 자칫 잘못하면 숭례문처럼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런 만큼 현재 해인사에서는 자체적으로 소방차를 운용하고 있으며, 승려들이 수시로 화재 대비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네이버의 데이터센터 '각(閣)'은 해인사 장경판전의 설계 구도를 적극 반영해 지어졌다. #
4. 외부 링크
- 네이버 지식백과 유네스코 세계유산: 해인사 장경판전
- 문화유산채널: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 대장경 팔백년의 비밀
- 한국사 사전: 해인사 장경판전 - 500여 년 동안 팔만대장경을 보관해 온 해인사의 건물
- 한국어 위키백과: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 시사상식사전: 해인사 장경판전
- 학습용어 개념사전: 해인사 장경판전
5. 국보 제52호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6.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기준
기준 (ⅳ) : 해인사 장경판전은 15세기에 건립되었으며 대장경 목판 보관을 목적으로 지어진 세계에서 유일한 건축물이다. 효과적인 건물 배치와 창호 계획을 고려하는 동시에 경험을 통해 얻은 다양한 방식을 활용함으로써 대장경판을 오랜 기간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데 필요한 자연통풍과 적절한 온도 및 습도 조절이 가능한 구조를 갖추었다. 건물 안에 있는 판가 역시 실내온도와 습도가 균일하게 유지되도록 배열되어 있으며, 이러한 과학적 방법은 600년이 넘도록 변형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판의 보존 상태에서 그 효과가 입증된다.
기준 (ⅵ) : 고려 시대의 국가사업으로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그 내용의 완전성과 정확성, 판각 기술의 예술성과 기술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전 세계 불교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갖는다.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과 연관해 이해해야 하며 건축적, 과학적 측면에서 목판의 장기적 보존을 위해 15세기에 고안된 탁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기준 (ⅳ) : 해인사 장경판전은 15세기에 건립되었으며 대장경 목판 보관을 목적으로 지어진 세계에서 유일한 건축물이다. 효과적인 건물 배치와 창호 계획을 고려하는 동시에 경험을 통해 얻은 다양한 방식을 활용함으로써 대장경판을 오랜 기간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데 필요한 자연통풍과 적절한 온도 및 습도 조절이 가능한 구조를 갖추었다. 건물 안에 있는 판가 역시 실내온도와 습도가 균일하게 유지되도록 배열되어 있으며, 이러한 과학적 방법은 600년이 넘도록 변형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판의 보존 상태에서 그 효과가 입증된다.
기준 (ⅵ) : 고려 시대의 국가사업으로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그 내용의 완전성과 정확성, 판각 기술의 예술성과 기술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전 세계 불교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갖는다.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과 연관해 이해해야 하며 건축적, 과학적 측면에서 목판의 장기적 보존을 위해 15세기에 고안된 탁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해인사는 한국의 아름다운 산의 중 하나인 가야산(1,430m)에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인 802년에 지어진 후 수차례 복구와 확장을 겪었다. 그러나 그 거친 산세 덕분에 한반도가 역사적으로 겪어 왔던 숱한 전쟁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장경판고(藏經板庫)는 팔만대장경이 새겨진 8만 개의 목판들을 보관하는 네 군데의 보관소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의 형태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왕조의 세조가 통치하던 1481년에 왕비가 복구를 명했고, 1488년에 복구 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 보관소들 중의 하나인 수다라장(修多羅藏)은 1622년에 복구되었고, 또 다른 주 보관소인 법보전은 1624년(1964년 복구 작업 중에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알려짐)에 복구되었다. 보관소들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남아 원래의 기능을 해내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완전하고 정확한 불교 경전의 집성인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이 대장경은 고려 현종 재위(1010~1031) 당시에 새겨진 최초의 팔만대장경(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목판을 교체하기 위해 새겨졌으며, 몽골과 거란족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지키고자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첫 목판들은 몽골이 침략한 1232년에 만들어졌다. 기나긴 항전이 시작된 그해에 고려 왕실은 강화도로 옮아가, 1237년에 2종 113권으로 시작된 작업은 12년 후에 완료되어 목차만 3권에 달하는 1,496종 6,568권의 대장경이 탄생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한자로 새겨진 현존하는 대장경들 중에서 가장 정확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대장경 제작을 담당했던 수기대사(守其大師)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 등 당시에 볼 수 있는 모든 불교 경전들을 철저히 비교함으로써 오류를 교정하고 누락된 한자들을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그의 교정 작업은 30권에 달하는 『교정별록(校正別錄)』에 기록되어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북송관판과 거란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유일한 대장경으로, 「법원주림(法苑珠林)」,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내전수함음소(內典隨函音疏)」 등의 경전은 팔만대장경에 실리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경상남도 남해에서 제작된 뒤, 강화산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 1251년에는 제작을 마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1318년에 강화도의 선원사로 옮겨졌다가 고려 말기의 빈번한 외침 때문에 1398년에 현재의 보관소로 옮겨졌다. 기록에 따르면 국왕이 대장경의 이송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용산강(지금의 한강)으로 행차했다고 전해진다.
장경판고(藏經板庫)는 팔만대장경이 새겨진 8만 개의 목판들을 보관하는 네 군데의 보관소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의 형태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왕조의 세조가 통치하던 1481년에 왕비가 복구를 명했고, 1488년에 복구 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 보관소들 중의 하나인 수다라장(修多羅藏)은 1622년에 복구되었고, 또 다른 주 보관소인 법보전은 1624년(1964년 복구 작업 중에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알려짐)에 복구되었다. 보관소들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남아 원래의 기능을 해내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완전하고 정확한 불교 경전의 집성인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이 대장경은 고려 현종 재위(1010~1031) 당시에 새겨진 최초의 팔만대장경(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목판을 교체하기 위해 새겨졌으며, 몽골과 거란족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지키고자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첫 목판들은 몽골이 침략한 1232년에 만들어졌다. 기나긴 항전이 시작된 그해에 고려 왕실은 강화도로 옮아가, 1237년에 2종 113권으로 시작된 작업은 12년 후에 완료되어 목차만 3권에 달하는 1,496종 6,568권의 대장경이 탄생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한자로 새겨진 현존하는 대장경들 중에서 가장 정확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대장경 제작을 담당했던 수기대사(守其大師)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 등 당시에 볼 수 있는 모든 불교 경전들을 철저히 비교함으로써 오류를 교정하고 누락된 한자들을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그의 교정 작업은 30권에 달하는 『교정별록(校正別錄)』에 기록되어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북송관판과 거란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유일한 대장경으로, 「법원주림(法苑珠林)」,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내전수함음소(內典隨函音疏)」 등의 경전은 팔만대장경에 실리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경상남도 남해에서 제작된 뒤, 강화산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 1251년에는 제작을 마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1318년에 강화도의 선원사로 옮겨졌다가 고려 말기의 빈번한 외침 때문에 1398년에 현재의 보관소로 옮겨졌다. 기록에 따르면 국왕이 대장경의 이송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용산강(지금의 한강)으로 행차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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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류 역사에서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2]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3] 팔만대장경은 저기서 길쭉한 두 동에 보관되어 있고, 내부 촬영은 엄격하게 통제된다. 팔만대장경이 소장된 2개 동 사이에 작게 있는 건물 2동에도 경판이 보관되어 있는데, 팔만대장경과 별도로 해인사 자체에서 제작한 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이 경판을 사경판(寺刊版)이라고 하며,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과는 별개로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이라는 이름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4] 처음 지정될 당시 국보 제5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5] 당시에 함께 등재된 문화유산으로는 석굴암과 불국사, 종묘가 있다.[6] 웹상에서는 김영환 장군이 폭격명령을 항명하여 즉결처분의 위기에 처했다가 형인 김정렬이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역설하는 등의 노력으로 즉결처분의 위기를 넘겼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이것은 제 9대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장지량 예비역 중장이 김영환 장군의 공로를 가로챌 속셈에서 비롯된 거짓주장에서 발단된것이다. 장지량 장군의 주장과 그 반박은 해당항목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