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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8 08:50:53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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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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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누스 1세
서방 동방
콘스탄티누스 왕조 공동 즉위 콘스탄티누스 2세 · 콘스탄스
비정통 마그넨티우스 · 율리우스 네포티아누스 · 베트라니오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서방 동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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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왕조 율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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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1세 | 그라티아누스 | 발렌티니아누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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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우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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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브리아 왕조 레온 3세 | 콘스탄티노스 5세 | 아르타바스도스 · 니키포로스 | 2차 재위 콘스탄티노스 5세 | 레온 4세 | 콘스탄티노스 6세 | 이리니
니키포로스 왕조 니키포로스 1세 | 스타브라키오스 | 미하일 1세 랑가베스 · 테오필락토스 · 스타브라키오스
- 레온 5세 · 콘스탄티노스
아모리아 왕조 미하일 2세 | 테오필로스 | 미하일 3세
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 레온 6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콘스탄티노스 7세 | 로마노스 1세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 로마노스 2세 | 니키포로스 2세 | 요안니스 1세 | 바실리오스 2세 | 콘스탄티노스 8세 | 로마노스 3세 | 미하일 4세 | 미하일 5세 | 공동 즉위 조이 · 테오도라 | 콘스탄티노스 9세 | 2차 재위 테오도라
- 미하일 6세
콤니노스 왕조 이사키오스 1세
두카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10세 | 미하일 7세 ·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로마노스 4세 · 레온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3세
콤니노스 왕조 알렉시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요안니스 2세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 마누일 1세 | 알렉시오스 2세 | 안드로니코스 1세
앙겔로스 왕조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3세 | 2차 재위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4세 | 알렉시오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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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카리스 왕조 테오도로스 1세 | 요안니스 3세 | 테오도로스 2세 | 요안니스 4세 | 미하일 8세
비정통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동방
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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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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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ignotus: 불명
황제 겸 집정관 }}}
201년 202년 202년 보결 203년 204년
루키우스 안니우스 파비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무렌니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
마르쿠스 노니우스 아리우스 무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레갈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라비우스 리보
204년 보결 205년 206년 206년 보결 207년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리베랄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툴리우스 마르수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막시무스
ignotus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페트로니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파우스티누스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
208년 209년 210년 211년 212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테렌티우스 겐티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퀸투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플라우티우스 아비투스 아울루스 트리아리우스 루피누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
212년 보결 213년 214년 215년 216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퀸투스 마이키우스 라이투스 푸블리우스 카티우스 사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데키무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케리알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
217년 218년 218년 보결 219년 22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세베루스 마크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메시우스 엑스트리카투스 마르쿠스 오클라티니우스 아드벤투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
221년 222년 223년 224년 225년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사비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비텔리우스 셀레우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세르비우스 칼푸르니우스 도미티우스 덱스테르
226년 227년 228년 229년 23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퀸투스 아이아키우스 모데스투스 크레스켄티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아그리콜라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라일리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이키우스 프로부스 카시우스 디오 섹스투스 카티우스 클레멘티누스 프리스킬리아누스
231년 232년 233년 234년 235년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일리그니아누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파테르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우르바누스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티아누스
236년 237년 238년 239년 24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피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펠릭스 코르넬리아누스 폰티우스 프로쿨루스 폰티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베누스투스
241년 242년 243년 244년 24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아티쿠스 사비니아누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아리아누스 티베리우스 폴리에누스 아르메니우스 페레그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클로디우스 폼페이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레피두스 프라이텍스타투스 가이우스 케르보니우스 파푸스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마이시우스 티티아누스
246년 247년 248년 249년 25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알리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아퀼리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51년 252년 253년 254년 25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발비누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256년 257년 258년 259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투스쿠스 (눔미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덱스테르)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뭄미우스 바수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260년 261년 262년 263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사이쿨라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알비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도나투스 루키우스 페트로니우스 타우루스 볼루시아누스 눔미우스 파우스티아누스 덱스테르 (막시무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퀴에투스 아우구스투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호노라티아누스
264년 265년 266년 26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
사투르니누스 루킬루스 사비닐루스 아르케실라우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268년 269년 270년 271년
아스파시우스 파테르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마리니아누스 파테르누스 비리우스 오르피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산크투스
272년 273년 274년 275년
티투스 플라비우스 포스투미우스 퀴에투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타키투스 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벨둠니아누스 율리우스 플라키디아누스 카피톨리누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켈리누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276년 277년 278년 279년 28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노니우스 파테르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81년 282년 283년 284년 28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오비니우스 루피누스 마닐리우스 바수스 Ⅱ)
285년 286년 287년 288년
티투스 클라우디우스 아우렐리우스 아리스토불루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베티우스 아퀼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폼포니우스 야누아리아누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서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288년 보결 289년 289년 보결 289년 보결
… a 마르쿠스 마그리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케이오니우스 프로쿨루스
… ivianus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퀸티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코엘리아누스 헬비우스 클레멘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89년 보결 290년 291년 292년
플라비우스 데키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아프라니우스 한니발리아누스
… ninius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시우스 디오 율리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93년 294년 295년 296년 29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눔미우스 투스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안니우스 아눌리누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298년 299년 300년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비리우스 갈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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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35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CLAVDIVS GOTHICVS
파일:고티쿠스두상.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클라우디우스
(Marcus Aurelius Valerius Claudius)
제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피우스 펠릭스 인빅투스 아우구스투스
출생 214년 5월 10일
로마 제국
사망 270년 1월/4월 (향년 55세)
로마 제국 판노니아 시르미움
재위 기간 로마 황제
268년 ~ 270년 (2년)
전임자 갈리에누스
후임자 퀸틸루스
부모 아버지 : 고르디아누스 2세(의문)[1]
종교 로마 다신교
1. 개요2. 생애
2.1. 황제 즉위 전2.2. 황제 등극2.3. 갈리에누스 암살에 가담했는가?2.4. 원로원의 지지를 받다2.5. 고트 전쟁2.6. 사망
3. 성 발렌티노와 클라우디우스4.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사생아?5.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혈연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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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35대 황제. 3~4세기 동안 등장한 일리리아 출신 로마인 황제 계보 중 첫 번째 황제로, 이전의 데키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의 데키우스 왕조,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의 리키니우스 왕조(발레리아누스 왕조)를 부정하고 고르디아누스 1세를 시작으로 하는 고르디아누스 왕조의 중건자로 서술되는 경우가 있다.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콘스탄티누스 왕조에게 혈통적 정통성의 시작으로 칭송받은 인물로, 여러 고대기록에 따르면 "로마화된 야만족" 출신이다.

임페라토르로 즉위하기 전까지 발레리아누스갈리에누스 아래에서 로마군 중요 지휘관직을 역임했으며, 즉위 이후에도 오늘날 유럽 동부, 중부 지역의 게르만족들의 위협 속에서 로마의 영토와 문화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던 진정한 로마인 중 한명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갈리에누스밀라노 포위 공격 당시 부하의 배신으로 268년 9월 암살된 직후,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예비병력을 모아 아우레올루스 등 반란자들을 제압했다. 이때 그는 병사들과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에 즉위했으며, 이후에도 반역자들을 토벌하고 알레만니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는 269년 나이수스 전투에서 다뉴브 강을 건너 로마 제국을 크게 위협한 고트족을 섬멸해 '고트족을 정복한 자'라는 의미로 고티쿠스(Gothicus)라는 존칭이 붙었다. 그러나 고트족 섬멸 직후, 고트족 군대에서 처음 발생한 전염병에 걸려 재위 2년 만에 시르미움에서 병사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전

클라우디우스 2세라고도 불리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전염병에 걸려 사망할 당시, 56살이었다고 하며 동생은 퀸틸루스가 있었고 동생에겐 자녀가 두명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정보 외에는 그가 정확히 어느 곳에서 태어났고 어떤 가문 출신이며 가족관계는 어땠는지 불확실해 알 수 없다.

익명의 저자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일가의 명령으로 저술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그가 플라비우스 일족의 일원으로 4세기 콘스탄티우스 1세(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버지)와 친척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오늘날 황제들의 일생을 다룬 책 중 가장 오류가 많고, 버전도 여러 개가 발견될 정도로 주장도 중구난방이다. 더욱이 그 내용도 죄다 아첨과 날조 등이 많고, 필사 과정에서 여기저기 조작한 흔적이 넘쳐 문제가 많다. 당장 이 책은 그 정당성까지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진영과 콘스탄티누스 일가 진영 사이에서 서로 주장이 대비되는 모양새도 띠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그가 콘스탄티우스 1세의 친척이라는 주장은 아예 설득력이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이 황제의 삶에 대해 살펴볼 때 역사가들은 비문, 동전 외에는 보통 조시무스, 요안니스 조나라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에우트로피우스 등 로마사 사가들의 기록을 참고한다.

클라우디우스라는 이름을 로마인들에게 불리는 이름으로 사용해, 사람들에게 클라우디우스 2세 또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라고 불린다. 따라서 얼핏보면 그 유명한 클라우디우스 가문 후손 또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분파 중 어느 한 가문의 클리엔테스 후손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2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때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먼 후손도 아니고[2], 각 속주에 수 많은 클리엔테스를 거느린[3] 클라우디우스 가문에게 로마시민권과 성씨를 하사받은 클리엔테스의 후손이 아니다. 앞 세대 황제 중 푸피에누스처럼 모계가 클라우디우스 가문 태생으로 모계가문을 이어받은 이탈리아 혈통의 로마귀족도 절대 아니다[4][5]. 즉, 그는 로마 제국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나 아피 클라우디우스부터 시작된 클라우디우스 일족 내 분파가문들의 후손도 아니고, 이들과 그의 조상이 어떤 클리엔텔라 관계도 아닌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클라우디우스라는 인칭 이름이 성씨(姓氏)가 아니고 성씨 뒤에 붙은 분파성씨 혹은 지파성씨로 번안되는 코그노멘인 사람이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즉위 전 본명이자 정식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다.

사실 공화정 말부터 로마인들은 건국 당시처럼 이름을 짓는 관습에서 벗어나거나, 각자 성향에 따라 자녀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경향이 생겼다. 물론, 귀족이나 최상류층의 경우에는 자신들과 연관된 조상들 이름을 양가에서 각각 따서 지어주긴 했는데, 속주민들은 본인이나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이런 전통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그래서 제정이 안정되고 300여년이 훨씬 지난 3세기 클라우디우스 2세가 활동하던 무렵에는 로마화한 야만족들이나 제국 각지의 자유민들은 과거 카이사르 등 해당 가문 수장에게 씨족명을 하사받은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로마의 명문가 이름들인 리키니우스,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같은 씨족명을 성씨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당시에는 사라진 왕조 중 기사계급 가문인 플라비우스 등도 성씨나 개인 이름으로 썼기 때문에, 성 만으로 당사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서로마제국 시대 스틸리코의 일대기를 저술한 이집트 시인 클라우디아누스처럼 로마 귀족들의 성씨나 해당 가문 남성이나 여성들이 사용한 이름을 변형해[6] 자신의 성씨나 이름으로 사용한 경우도 많았고, 원로원 의원 중 속주출신 신참자나 제정 중기 이후 등장한 귀족가문들 중에는 자신의 성씨나 이름에 명문가 이름을 조합해 이를 개인이름과 성씨로 합쳐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클리엔테스 후손이어도 진짜 로마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7]. 또 이 시기 성공한 속주 태생 로마인들은 클리엔테스 후손이 아니어도 자신의 풀네임에 있는 유명 성씨를 이유로 본인이 알고 보면 이 가문 후손이라는 말도 했다. 다시 말해, 이 당시 속주출신이나 로마화한 야만족 후손 로마인들 중 명문가 이름을 사용한 이들은 공화정 초기나 왕정 시대에 존재했다가 제정 초기에 사라진 가문 이름이나 있어도 후손이 거의 없는 집안 이름을 성씨나 개인이름으로 많이 사용했고, 일부는 성공 후 아예 족보를 만들어 자신이 그들의 후손이라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는 235년 멸문한 세베루스 왕조 시대 전부터 나온 현상이었는데, 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경우에는 황제 본인이 세간에 레반트인, 시리아인이라고 자꾸 비난받자[8] 자신이 오래된 메텔루스 집안 후손이라며 아예 족보까지 만들게 했다. 또 3세기때 황제로 즉위한 황제 중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처럼 출신가문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일가에게 로마시민권을 받은 클리엔테스 후손도 이런 모습을 보였는데, 이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모친이 그라쿠스 형제의 셈프로니우스 가문 태생이라는 이유로 풀네임 안에 이 이름이 있다는 것을 비문 안에 넣고 내세우기도 했다.

따라서 현대 역사가들은 3세기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역시 여러 근거를 이유로, 로마화한 야만족의 후손 내지 그의 출신지인 오늘날 세르비아에서 살던 농민의 후손이라고 확언한다. 당장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 이후 속주민들이 대부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을 볼 때, 클라우디우스 2세의 가족들이 최소 본인 부모 대에 시민권을 받은 속주 자유민 태생이었던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태어난 곳은,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이나 모이시아의 나이수스 중 하나로 짐작된다. 그런데 후자 주장의 경우에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그와 콘스탄티우스 1세, 콘스탄티누스 1세 부자와 연결짓기 위해 나이수스를 공통점으로 찾아 어거지로 붙였다는 가설도 있고 그럴 확률이 매우 높아 논란이 있다. 한편 4세기 말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카이사르의 전형>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사생아라고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전형>이라는 저서는 위서로 까이고 있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보다 형편없는 위서 중 위서로 무시받고 있어, 역사학계는 이 기록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아예 무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를 알려주는 사료는 확실히 없다. 다만 성인이 되자마자 군대에 입대하여 성실과 용기를 보여줘 데키우스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고대기록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로마화된 야만족이었고 하층민 출신으로 일찍이 군생활을 했고 일찍부터 힘이 장사였고 저절로 내뿜는 카리스마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가 현역 군인인 시절의 전설에 따르면, 타고난 힘과 운동능력은 앞세대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버금갔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힘이 대단했는지, 주먹질로 말을 때려 이빨을 다 날렸을 정도였다고. 다른 기록에서도 이야기는 같은데,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처럼 힘이 장사라서 250년 레슬링 선수와 경기 중 상대가 자신의 성기를 움켜 잡으며 반칙을 하자, 그 즉시 상대를 제압하면서 그 선수의 치아를 날려버렸다고 한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원로원과 민중은 클라우디우스를 장군감으로 지목하고 있었으며 발레리아누스가 그를 연대장급 장교로 내버려둔 것에 비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곧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장군으로 승진시켜 일리리아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트라키아, 모에시아, 다키아, 판노니아, 달마티아의 로마군을 지휘하게 했고, 그 뒤에는 이집트 사령관과 아프리카 총독으로 임명했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는 그의 명성을 질투하고 그가 황제가 될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의 사료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에누스 시대에도 중용되어 갈리에누스가 창설한 기병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2.2. 황제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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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60년대의 로마 제국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갈리에누스의 아버지이자 공동황제였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맞서 싸우다가 에데사 전투에서 샤푸르 1세의 책략에 휘말려 자신의 근위대장을 비롯한 제국 최고 수뇌부들과 함께 포로가 됐다. 아울러 로마 제국은 이 사건 이후 게르만족과 페르시아의 대대적인 침략과 각지에서 황제를 칭하는 반역자들의 난립에 시달렸다. 급기야 제국 동방에서 오데나투스제노비아팔미라 제국이 건국했고 갈리아에선 포스투무스갈리아 제국이 건국되어 로마에서 떨어져 나갔다. 갈리에누스는 이 난국을 해결하고자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반역자들을 소탕하고 외적과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268년, 그동안 갈리에누스와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던 기병대 사령관 아우레올루스가 자신을 포스투무스 황제의 대리인으로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진압에 나섰고 밀라노 근처의 폰티롤로 누에보에서 격전 끝에 아우레올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우레올루스를 밀라노에 가둬놓고 포위했다. 그런데 그는 포위 공격 도중 부하들에게 살해당했고, 갈리에누스의 동생이자 발레리아누스의 차남 소 발레리아누스까지 암살됐다.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갈리에누스는 죽기 직전에 황제의 자주색 의생을 클라우디우스에게 물려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는 당시 파비아 인근에서 독립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반역자들은 이미 클라우디우스를 황위에 올릴 계획이었기 때문에 갈리에누스의 유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군대는 의심과 적개심을 표시했지만, 1인당 20닢의 금화가 은사금으로 하사되자 곧 사그라들었다.

갈리에누스 형제 암살 당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암살에 가담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 역시 이 암살에 가담했고, 갈리에누스 사후 황제 형제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정중히 치러줬다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그가 암살과 무관하게 보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 갈리에누스가 아우레올루스를 토벌하던 중 암살된 사건에 관해, 이를 기록한 고대 기록 모두는 일관되게 갈리에누스의 죽음과 그 일가의 멸망 모두 고위 장교, 관료들이 갈리에누스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불신임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 갈리에누스를 직접 암살하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그가 갈리에누스를 불신임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불신임을 행사해 반란을 일으키거나, 갈리에누스가 죽자마자 원로원과 손을 잡고 기록말살형이나 연좌제를 행사하려고 한 이들과는 생각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갈리에누스 암살 이후, 황제 휘하의 병사들은 갈리에누스의 후임으로 암살과 직접 관련이 없고, 설령 암살에 간접적으로 가담했어도 과격하지 않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를 추대해 황제로 선포했다. 이는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육체적으로 강건했고, 용감했으며 과감함과 잔인함[9]도 동시에 갖춘 성격 탓에 군대의 지지를 얻었던 이유가 컸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이유 외에도 갈리에누스 암살을 계획한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와 클라우디우스 간의 모종의 관계도 있고, 그와 헤라클리아누스가 은근히 경쟁구도를 유지한 사이였다는 말도 있어 야만족 출신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즉위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2.3. 갈리에누스 암살에 가담했는가?

역사가 조시무스요안니스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 암살을 주도한 이는 근위대장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였다. 하지만 조나라스는 헤라클리아누스와 공모한 이가 마르키아누스라고 지목한 반면 조시무스는 갈리에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라고 지목했다. 헤라클리아누스가 갈리에누스를 암살하기로 결의한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로마 원로원은 갈리에누스의 가족과 그의 지지자들의 처형을 명령했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이를 막고 그의 전임자를 신격화할 것을 요구해 승인을 얻어냈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가 반역에 가담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클라우디우스가 암살 주동세력의 핵심인사라는 점이다. 이외에도 그가 제위에 오른 직후, 갈리에누스를 살해하고 자신을 옹립한 헤라클리아누스에게 자결을 명령했다는 것도 , 원로원의 갈리에누스 아들과 아내 살해를 묵인한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그가 전임 황제를 살해한 자에게 정당한 복수를 한 것인지, 헤라클리아누스와 공모해 전임 황제를 암살한 후 자신이 암살에 가담했다는 걸 은폐하기 위해 토사구팽한 것인지는 현재까지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조나라스가 클라우디우스의 갈리에누스 암살 의혹을 배제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클라우디우스를 존경한다는 걸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로 대변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사관을 생각하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진범일 확률은 높아 보이거나, 높지 않아도 갈리에누스 몰락의 결정타를 날렸다고 평가할 정도로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2.4. 원로원의 지지를 받다

15년간의 갈리에누스 치세기 동안,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7년간 공동통치를 한 발레리아누스·갈리에누스 부자의 지원, 이후 단독 통치를 한 갈리에누스의 추천과 발탁이 없었다면 제국의 고위직 근처도 승진할 수 없던 “로마화된 야만족”이었다. 물론, 고대 기록 중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2세의 경우에는 그가 데키우스 황제 밑에서 테르모필레 방어전 파견 속에서 아카이아 속주 총독에게서 다르다니아 출신 병사 200명, 기병 20기, 크레타 궁병 60명, 잘 무장한 신병 1000명을 보내라는 명을 듣고 테르모필레 수비대를 이끈 대대장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렇지만 이 믿을 수 없는 위서 가까운 기록의 주장은 이미 조작된 것이 확인된 상태다. 왜냐하면 테르모필레 수비대는 데키우스가 죽고 3년이 지난 254년 조직된데다, 클라우디우스 2세의 경우에는 데키우스 시절에 대대장을 맡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주장을 놓고 시대 착오라는 조심스러운 평가와 함께, 클라우디우스 2세의 경력 중 분명한 시작이 된 254년의 이 수비대를 이끌게 된 시점은 그가 종종 리키니우스 왕조로 서술된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의 도움을 결정적으로 받아 대대장이 됐다는 확실한 증거로 다수의 학자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실제 발칸반도 출신의 로마황제는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데키우스 두 명 뿐이었다. 이중 데키우스는 성씨인 메시우스, 그 처가 등에서 확인되듯 고향과 성장한 동네만 발칸반도인 이탈리아 혈통의 로마 최상류층 출신이었기 때문에 논외라고 볼 수 있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역시 제 실력으로 로마시민권을 차지한 인물로 카라칼라의 <안토니니아 칙령>을 통해 개인이름과 성(姓)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을 받은 케이스와는 거리가 멀었던 하층민 출신 대대장이었다.

더욱이 클리엔텔라 관습이 뿌리 깊게 박힌 로마 제국 안에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리키니우스 가문, 에그나티우스 가문 등의 도움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사람 중 대표주자였다. 그는 갈리에누스 시대 동안 등장한 다누비우스 강 유역 방어선 장교 중 헤라클리아누스, 아폴리나리스, 플라키디아누스 등처럼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의 기용으로 명성을 얻고 군대 고위직을 차지한, 비(非 ) 원로원 의석 신분의 일리리쿰 신(新) 귀족, 즉 군인귀족에 불과했다. 따라서 3세기 당시 등장한, 그는 세베루스 시대에 등장한 백인대장, 대대장 출신으로 원로원에 입성한 세베루스 귀족 집단보다 혈통, 행정 능력적으로 부족한 직업군인에 가까웠다.[10]

이를 종합해보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로마 원로원에게 지지를 받아야 함에도 마냥 전임자들을 부정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던 처지였다. 그리고 이런 현실처럼 그는 상식적인 사람이었고, 이런 점을 누구보다 우선시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로서는 슬기롭게 본인의 상황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놓인 또 다른 문제는 그가 제위에 오를 당시, 원로원의 영향력이 약화됐다고 해도 그 안에는 여전히 부와 권력을 쥔 세습 귀족과 그리스, 푸닉, 시리아 출신의 신흥 권세가들이 수두룩했고 그들 중 상당수가 갈리에누스라면 이를 갈 정도로 미워하는 이들이 많아 마냥 원로원을 외면하기도 어려운 점이었다. 즉, 원로원을 생각하면 갈리에누스를 부정하거나 그 측근을 버려야 하는데, 본인이 갈리에누스의 클리엔테스 중 대표주자라서 원로원 입장에서 죽은 전임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라는 사내는 매우 귀족적인 원로원이 볼 때 속주 출신의 하층민임에도 무척 점잖고 교양 넘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는 다른 발칸 출신 직업군인들과 달리 정치력이 탁월하고 매사가 용의주도할 정도로 특출난 먼치킨이었다고 하며, 다혈질이라서 종종 반야만족 소리를 들어도 아우 퀸틸루스와 함께 순수 군인 장교 출신답지 않은 면모가 많았다고 한다. 또 잔인하다는 평 역시 "끔찍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인정도 없이 모질다"는 인격적 측면의 결함이 아니라, 부하들을 군율에 따라 엄히 다루는 측면의 잔인한 태도라서, 이런 상황에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잔인함'은 곧 그가 적을 상대로 무자비하고, 군율을 어긴 부하들에게는 원칙주의자였다는 것을 뜻했다. 즉, 등극 전부터 클라우디우스 2세는 후일의 프로부스와 함께, 교양, 인품, 행보 모두 일리리아 출신 장교 집단 엘리트 중 원로원이나 로마 서민들이 미워할 구석이 없는 사내였다. 여기에 더해 그는 갈리에누스 치세기에 대한 불만, 원로원과 황제의 대립을 잘 알고 있었던 장군을 넘어, 여러 번 만남을 통해 원로원 입장에선 갈리에누스 쪽 인사 중 말이 통하는 상대로 평가받고 있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등극 당시, 타개책을 여러개 손에 쥐고 있었고, 원로원에게 상식적으로 대처만 한다면 점수를 잃을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신중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칼이 있음에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같은 부류처럼 거칠게 원로원을 겁박하거나 테러 행위를 자행할 만큼 잔혹하지 않았다.

그는 순수한 하층민 출신 군인 황제임에도 무척 점잖았고, 원로원에게 정중히 제위 등극 승인을 요청해 황제에 올랐다. 이후 그는 여러 조치를 통해, 원로원의 우려를 씻어 냈다. 그 시작은 클라우디우스가 보여준 언행일치된 행동이었다. 그는 원로원을 마구잡이로 기소해 처벌한다거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처럼 원로원을 압박하는 일을 보여주지 않았다.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처럼 내편 내편으로 원로원을 가르고, 프라이토리아니를 이용해 겉으로는 유화해보임에도 그 속은 공안정국인 세상을 만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여러 원로원 인물 중 자신에게 유화적인 여러 인물을 선정해 그들의 정치력을 도움삼아 행동했고, 스스로를 군인 장교 출신이 아닌 원로원 의원의 일부처럼 처신했다. 이렇게 되니, 원로원은 새 황제를 금방 인정하고, 그에게 진심으로 지지를 보냈다.

그 시작은 상술한대로 갈리에누스 일가가 원로원에게 그 계모와 소 발레리아누스 일가를 제외하고 죽임을 당할 때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 사건을 종결지었던 사건이었다. 이때 그는 갈리에누스를 신격화하고, 갈리에누스와 소 발레리아누스 유해만은 고이 아피아 가도의 리키니우스 가문 개인묘지에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소 발레리아누스의 친모로 갈리에누스의 계모인 코르넬리아 갈로니아에게서 황제를 상징하는 제국 휘장을 전달받는 정치적 쇼를 벌이고, 그녀와 소 발레리아누스 가족만은 손대지 않았다. 당연한 말인데 이때 그는 코르넬리우스 가문과 갈로니우스 가문의 피를 이은 그녀를 보호해주면서 아주 오래된 극소수의 로마 원류 귀족들에게서 좋은 평가까지 얻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세베루스 왕조 시대 당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추천 아래 원로원에 들어간, 백인대장 출신의 전직 근위대장 안티오키아누스의 아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를 자기 사람으로 포섭했다. 이 당시 그는 안티오키아누스의 동료 비리우스 오르피투스도 함께 밀어주면서, 이탈리아 출신들과도 손을 잡았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방계황족으로, 엘라가발루스의 황후까지 올랐던 안니아 파우스티나의 사위였다. 이 사람의 아내는 저명한 이탈리아 귀족 출신 가문 태생인 폼포니아 움미디아다. 그는 당시 원로원 과 서민들에게 훌륭한 인품, 재능으로 존경을 받던 원로원 중진 의원이었다. 그는 당시 원로원 의장 격인 프린켑스 세나투스 직을 맡고 있던 폼포니우스 바수스의 매형이었고, 그 뿌리 중 하나가 그리스 혈통이라서 아버지가 세베루스 왕조때 발탁된 백인대장 출신이라고 해도 엄연히 외가와 처가가 원로원 주류 세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인사였다. 따라서 안티오키아누스를 포섭하고 그와 그 친구들에게 직위 보장까지 약속하고 실천에 옮긴 행동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성공리에 원로원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된 비결이 됐다.

한편 269년, 고트족과의 전쟁을 치르기 전 갈리에누스 시대 동안 집정관, 수도 장관을 지낸 파테르누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아 집정관에 올랐다. 이는 그가 순수 군인임에도 원로원을 존중할 것이며 제 스스로 원로원 일원임을 선포한 행동이었다. 즉,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처럼 마냥 원로원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며, 갈리에누스처럼 개혁을 빙자해 원로원을 때려 잡고 제 측근만 키우지 않겠다고 몸소 행동에 옮긴 것이다. 이런 행동은 큰 도움이 됐다.

이런 행동들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갈리에누스에게 쏠린 불만으로 단단히 화난 원로원과 갈리에누스 암살 당시 억울하게 죽은 소 발레리아누스 일가 및 그 친척들 모두에게 지지를 받게 됐다. 의심스럽게 그를 관찰하던 그리스, 푸닉, 아나톨리아 출신 신흥 권세가들은 그를 지지했고, 이는 그들이 지지했던 고르디아누스 일가의 옛 세력까지 일개 발칸 출신 하층민 황제가 집어 삼키는데 큰 힘이 됐다. 그래서 후일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와 같이, 발칸 출신 황제들의 정통성 확보에 집중한 이들은 그를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와 연결짓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정통성을 고르디아누스 3세 이후 끊긴 고르디아누스 가문과 연결지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대내외의 반란, 침공으로 말미암아 골머리를 앓았다. 이는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힌 이후 벌어진, 발레리아누스·갈리에누스 부자 시대의 불안한 상황까지 후임자인 그가 뒤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2.5. 고트 전쟁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오를 무렵, 로마 제국은 고트족의 대대적인 침략에 직면했다. 267년, 고트족은 여러 게르만족과 함께 500척의 배를 이끌고 흑해 연안에 침략해 수많은 해안 도시들을 황폐화시키고 비잔티움과 시지쿠스를 파괴했다. 그들은 수개월 동안 지중해에서 날뛰며 수많은 재물과 포로를 약탈하고 본토로 돌아간 후 이듬 해에 재차 침입했다. 하지만 작년에 고트족 해적들에게 호되게 당했던 로마군은 이번에는 해군을 제때 투입해 그들을 저지했고, 육로로 쳐들어온 고트족 역시 네스토스 강 근처에서 달마티아 기병대의 공격으로 3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했다.

네스토스 전투에서 고트족을 격퇴한 갈리에누스는 아우레올루스의 반란을 진압하러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 사이, 고트족은 재차 대규모 침략을 감행해 발칸 반도를 휩쓸며 수많은 인명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한편 갈리에누스는 암살되었고 그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는 아우레올루스와 추종자들을 모조리 처형한 뒤 고트족을 토벌하러 발칸 반도로 향했다. 서기 269년, 클라우디우스는 나이수스[11]에서 기병대를 매복한 후 고트족을 유인한 후 방심한 적을 습격했다. 훗날 로마 제국 황제에 오르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때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맹활약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고트족 5만여 명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어 노예 시장에 팔렸다고 한다.

살아남은 고트족들은 마케도니아로 탈출했지만 로마 기병대의 끈질긴 추격과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아 여러 병사들이 굶어죽자 하에무스 산맥으로 숨었다. 이에 클라우디우스는 하에무스 산맥을 포위했고, 고트족은 로마군에게 포위된 채 추운 겨울을 보내는동안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대다수가 사망하고 일부 전사들만 살아남아 로마군에게 투항했다. 로마 원로원은 이 승리에 감격하며 클라우디우스에게 '고티쿠스'란 존칭을 바쳤다.

이는 곧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해 뒤에 제위를 차지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로 대표된 순수한 군인 출신의 비(非) 원로원 소속 황제 중 원로원에게 제대로 인정받았다는 상징이 됐다. 그래서 그에게 내려진 이 아그노멘은 이후 갈리에누스가 실패한 귀족 로마 황제라는 평을 받는 상황 속에서, 그가 235년 이후부터 시작된 당시 35년 가까운 제국의 불안감 속에서, 처음으로 일련의 강인한 황제라는 찬사를 후대까지 얻는 상징이 됐다.[12]

2.6. 사망

클라우디우스는 고트족을 섬멸한 뒤 반달족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고트족을 몰살시킨 전염병은 로마군에게도 퍼졌고 많은 로마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급기야 클라우디우스 마저 전염병에 걸려 며칠간 신음하다가 270년 3월 시르미움에서 숨을 거두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한 후 원로원은 퀸틸루스를 황제로 추대했지만 군대는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두 황제는 제국의 재위를 놓고 대립했으나 곧 퀸틸루스가 사망하고[13]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3. 성 발렌티노와 클라우디우스

5세기 또는 6세기에 출판된 'Passio Marii et Marthae'에 따르면, 성 발렌티노가 269년 2월 14일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순교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발렌티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을 때 자신을 감시하는 관리의 양녀가 맹인이라는 걸 알고 이를 치료해주자 관리와 그의 가족이 전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이 소식을 들은 클라우디우스는 발렌티노를 참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발렌티노가 실존 인물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으며 클라우디우스가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 본다.

4.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사생아?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조차 평범해보일 정도로, 찬사와 위조가 가득한 4세기 라틴어 사서 <황제의 전형(에피토메 데 카이사리부스)>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사생아로, 고르디아누스 1세의 손자이자 고르디아누스 3세의 사촌이며 법적 형제라고 기록되어 있다.[14]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 저서 내용은 거짓이다. 이 주장에 대해 올리비에 헥스터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갈리에누스 일가를 멸족시킨 사실상 장본인이 클라우디우스 2세이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취약한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고향에서 큰 공을 세운 클라우디우스 2세와 자신을 연결지었음을 지적한다.

이 책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고르디아누스 2세의 아들로, 전임자인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발레리아누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갈리에누스)가 부적격자이며 덜 떨어진 인물들 밑에 있다가 갈리에누스가 침상에서 죽어가면서 그를 후임으로 지명하고 평화롭게 죽은 양 적혀 있다.

4세기에 만들어진 라틴어로 된 이 책은 당대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가계를 정당화하고, 그 일가의 혈통이 대단함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익명의 저자가 만들었다. 따라서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부터 가계가 이상하게 적혀 있고,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의 경우 이름이 잘못 적혀 있는데다 서술을 보면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통해 정통성이 이어지며,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조카손들인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정통성이 위대하다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을 보면 디오클레티아누스 역시 악인으로 서술되어 있고, 콘스탄티누스 1세가 어릴 적 그에게 핍박받았다는 식으로 기술됐다.

5.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혈연관계?

4세기 이후 등장한 이야기와 믿을 수 없는 기록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대제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와 친척이었고 대제의 할머니 클라우디아의 큰아버지였다고 한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플라비우스 가문, 즉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직계조라고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믿기 힘든 기록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퀸틸루스 형제에게는 또 다른 남자형제 크리스푸스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클라우디아라는 딸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크리스푸스의 딸인 클라우디아는 성인이 된 뒤 에우트로피우스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즉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즉, 이 기록만 보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자신의 고향 나이수스에서 고트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황제의 조카딸이 낳은 손자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주장은 현재 거짓말로 평가받는다. 당장 대제의 아버지 클로루스의 일생만 보더라도 이는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고 분석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족벌주의를 바탕으로 한 로마 사회에서 클로루스가 3세기 황제 중 모든 로마인들에게 평가가 훌륭했던 황제의 조카딸이 낳은 아들이라면 콘스탄티우스 1세의 경력 이전에 모든 사서에서 그 이야기가 안 나올리가 없고 본인 역시 이를 내세우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고향에서 큰 전쟁을 치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자신을 연결하려는 의도에서 족보를 세탁했다고 의심받고 있고, 대부분의 학자들 역시 대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주변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든 지어내려고 한 게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1] 현재는 거짓으로 평가된 기록상 주장이다.[2]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후손들과 그 가문(클라우디우스 네로 가,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가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은 네로 시대 내내 남녀노소 상관없이 죄다 반역죄 같은 죄를 뒤집어쓰고 살해당했다. 그래서 네로 생전 이미 아우구스투스 일가 직계는 네로 외에는 여성황족 일가와 사돈 가문들까지 거진 혈통이 끊긴 상태였다.[3]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오래된 역사와 공화정 이래 최고 명문 중 하나가 된 까닭에 도시 하나가 클리엔테스인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분파 중 하나인 네로 가문의 클리엔테스는 카이사르 암살 직후 벌어진 내전 당시 기록에서 나오듯 스파르타 시 전체가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부 가문의 클리엔테스였다. 또 로마 제정시대 원로원 의원 명부와 집정관 역임자 기록을 보면 클라우디우스 황제때 시민권과 씨족명을 하사받아 개인이름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라는 것을 붙인 그리스, 소아시아 출신 로마인들도 많이 보이며, 이 가문의 성씨를 개인 이름으로 사용한 신참자 귀족들도 꽤 보인다.[4] 즉위 전 풀네임에 아예 외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변형 성씨인 클로디우스를 성에 붙여 사용하면서 클라우디우스 가의 피를 이어받은 남성들의 전통에 따라 이 가문에서 많이 쓰는 마르쿠스를 프라이노멘으로 사용했다.[5]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푸피에누스가 대장장이 아들로 미천한 가문 태생이라고 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연구와 2000년대에 이탈리아 각지에서 나온 유적, 유물 등을 통해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의 아피우스 딸 클로디아 풀크라이고 푸피에누스의 아버지 역시 에트루리아계 세습귀족인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가 출신의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인 것이 밝혀졌다.[6] 사실 -anus라고 붙이는 경우는 양자입적된 남성이 친가 성씨에 붙여 사용해 입적된 뒤 바꾼 이름 뒤에 사용한 이름 중 하나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의 경우, 외할머니의 남동생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본래 성씨인 옥타비우스를 옥타비아누스로 바꾸고 입양되면서 취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붙여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라는 풀네임을 취했다.[7] 카이사르에게 율리우스 성씨를 하사받은 갈리아 족장 후손 중 이런 경우가 제정 시대에 많았다고 한다.[8] 이 황제의 경우에는 애당초 세베루스 왕조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즉 카라칼라, 게타 형제의 이모 율리아 마이사의 둘째 딸 율리아 마마이아가 낳은 아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창건자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었다.[9] 기록상 전하는 '잔인하다'는 성격은 로마 황제 중 사전적 의미로 잔인한 것을 보여준 네로, 비텔리우스,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같은 잔인함과는 다르다. 로마군 뿐만 아니라 근세 전까지 병사들에게 지지를 받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종종 언급되는 이 표현은 적을 상대로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모습과 함께 군율을 어긴 아군 병사들을 상대로 무관용으로 엄하게 대처한 태도를 뜻했다. 즉, 인격적인 측면의 결함이 아니었다. 다만, 클라우디우스 2세와 함께 잔인하다고 언급된 아우렐리아누스는 사전적 의미 아래의 '잔인하다'는 측면에서도 부합된 인물이었다. 그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처럼 냉혹함을 넘어 처벌을 할 때 필요 이상으로 관용 없이 처벌했다. 특히, 그는 사소한 일탈까지도 관료를 숙청할 때 잔뜩 잡아 당긴 나무에 팔, 다리를 묶고 나무를 동시에 활쏘듯이 펼치는 식으로 찢어 죽이는 등 주변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잔인한 방법을 사용했다.[10] 물론 후일 황제가 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처럼 발칸 출신의 로마군인 중, 그것도 안토니니아 칙령 혜택자 중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퀸틸루스 형제처럼 평범한 속주민 출신 이상인 케이스도 여럿 있었다.[11]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고향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나이수스에서 클라우디우스 2세가 대승으로 거두고 그 공로로 존칭까지 받은 탓에 콘스탄티누스 1세 생전부터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대제의 가문의 인연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4세기 이후 기록에서는 클라우디우스 2세와 콘스탄티누스의 플라비우스 가문이 친척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됐다고 한다.[12] 익히 알려졌듯이, 그 다음으로 이런 수준의 찬사를 받은 사람은 공교롭게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함께 능력 측면에서 비견되거나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한 수 위라고 평가받은 아우렐리아누스였다. 그는 아예 질서를 회복한 사람을 넘어 분리주의자들의 야심 속에서 이를 수습하고 제국을 재건한 사람이라는 후대의 평이 있을 정도의 가공할 위업을 달성했다.[13] 자살 또는 군인에 의한 암살 추정[14] 물론 이 책의 내용이 전부 거짓이라는 것은 또 아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부모가 원로원 의원 아눌리누스의 노예들로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낳은 뒤에야 자유민이 되었다, 카루스가 갈리아 나르보 태생의 로마귀족이다 등의 주장은 사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