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섬을 관할하는 지자체에 대한 내용은 사도시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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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佐渡島, ruby=さどがしま)]일본 니가타현 북서쪽에 있는 섬. 섬 전체가 니가타현 사도시에 속하며 면적은 855km²로 한국의 섬들과 비교하면 가장 큰 제주도(1,850km²)의 절반 정도 수준이며, 두 번째로 큰 거제도(379.5km²)보다는 두 배 이상 크다.[1] 일본에서는 본토 4개 섬을 포함해 6번째로 큰 섬이며 본토에 속한 섬 중에서는 가장 크다.[2] 사도섬은 동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3]
일본에서 이 섬을 일컫는 명칭으로 사도가시마(さどがしま)와 사도시마(さどしま) 두 가지가 있다. 본토 일본인들 중에도 '사도시마'로 읽는 사람이 많지만 현지인들은 사도가시마(佐渡ヶ島)라고 부른다. 이 섬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이름은 '사도가'가 아니라 '사도'이다.
조선중기에 작성된 간양록에 '見付島(견부도)'라고도 한다#고 기재되었다.
한국에는 '사도섬'이라는 명칭으로 많이 알려졌다. 일본 정부 관광국에서는#에 따르면 '사도가시마섬'과 '사도섬'을 혼용하고 주 니가타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는 '사도섬'을 사용한다.
현재 인구는 5만 2천명 수준으로, 최대 인구는 1945년 조사된 약 11만 9천명이다. # 사도섬의 인구는 인구가 3만 명인 쓰시마섬[4]처럼 점점 감소하고 있다. 이키섬도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4만 명이 넘었으나 현재는 2만 4천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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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이 畿内 | ||||
도산도 東山道 | ||||
산인도 山陰道 | ||||
산요도 山陽道 | ||||
첨자 † :무츠국에서 이와키국(磐城国), 이와시로국(岩代国), 리쿠젠국(陸前国), 리쿠추국(陸中国), 리쿠오국(陸奥国)이 추가로 분리 신설되었다. | }}}}}}}}} |
사도시가 설치된 2004년 이후는 사도시 문서의 역사 문단 참조.
원래는 사도라는 다른 율령국이었으나 근대 들어서 니가타현에 편입되었다. 옛날에 유배지로도 악명이 높았던 섬이다. 에도 시대에는 사도봉행이 놓였다. 유배객으로서 많은 귀족들이 사도로 들어왔고 니시미카와 사금산이 있어 예부터 금의 섬으로 알려졌다.
사도국이 성립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701년에 이곳에 사와다군(雜太郡/雑太郡)을 두었고 721년에 사와다군, 카모군(加茂郡), 시모치군(羽茂郡)의 3군으로 나뉘었다. 가마쿠라 막부가 슈고다이로서 혼마씨를 사도에 파견하였다. 동시에 사도에 들어온 고케닌 시부야, 아이하라 씨 등과 함께 센고쿠 시대까지 이들이 사도를 지배했다.
에치고국의 다이묘 우에스기 겐신의 뒤를 이은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평정해 혼마씨는 멸망하였고 에도 막부가 사도 봉행소를 두어 사도국을 지배하였다. 1601년부터 1989년까지 대략 400년간 금을 채광했으며 17세기에는 세계 최대 금 생산지였다. #.사도금광[5]에서 산출된 금은 막부의 재정을 넉넉하게 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때 사도 봉행소를 폐지하고 사도현이 되었다. 1871년 1차 부현 통합으로 아이카와현이 되었고 1876년의 2차 부현 통합으로 니가타현에 흡수되었다. 1896년에는 사도 3군(사와다군, 카모군, 시모치군)이 사도군으로 통합되었다.
3. 교통
섬 동쪽에 사도 공항이 있는데 한때 니가타 공항을 연결하는 노선만 한정하여 운항하게 된 적이 있었으나 누적된 적자로 인하여 2014년 이후로 사실상 운항이 중단되었다. 도로 교통은 섬내에서는 350번 국도, 45번 니가타현도가 부설되었다. 사도가 섬과 일본 본토[6]를 오가는 이동수단은 어쩔 수 없이 여객선 혹은 페리를 타고 가야 하는 불편이 있다.페리는 제3섹터 회사인 사도 기선에 의해 운항되고 있다. 사도 기선은 일본 최초의 제3섹터 회사로 니가타현이 지분의 35.51%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섬 동부의 료츠에서 니가타시로 가는 노선과 섬 서부의 오기[7]에 서 조에츠시 나오에츠항으로 가는 노선이 운항 중이다. 교통카드 사용도 가능하다.
섬내에는 버스 교통이 있다.
4. 사도 광산
자세한 내용은 사도 광산 문서 참고하십시오.5. 기타
- 이곳에는 다이쇼 시대, 나가오카 철도[9]에서 사도철도를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등의 이유로 면허를 반납하여 건설되지 못하였다. 현재는 니가타 교통에서 같은 구간을 지나는 버스노선을 운행중이다. 특히 원맨운전으로 전환되기 전 까지는 버스정류장을 역으로 칭하였으며 이 중 현재 카나이[10] 정류장은 한자까지 동일한 카나자와역이었다. 철도와 전혀 관계 없지는 않았던 것이 철도 위탁 화물을 취급했다.(...) 현재까지도 버스 시간표상에 노선번호가 아닌 ‘본선’으로 표시되고 있다.
- 월북한 미군 중 하나였던 찰스 로버트 젠킨스가 탈북 후에 아내 소가 히토미와 함께 여기서 살았다. 아내의 고향이어서 이곳에 정착했고, 사망할 때까지 기념품 가게를 운영했다.
- 2024년 11월 24일, '사도광산 추도식'이 개최되었지만,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반쪽짜리 행사를 가졌다.#하지만 당사자는 계속 참배전력을 부인했으며,최초 보도한 교도통신의 오보로 드러났다.이후 교도통신은 외교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과 당사자의 확인을 거치지 않고 보도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오보 인정과 더불어 피해자 본인에게도 사장이 직접 찾아가서 사과했다.#
- 2024년 11월 25일, 일본이 주최하는 사도광산 강제징용자에 대한 추도식에 불참한 정부와 사도광산 유가족들이 조선인 숙소터에서 별도로 '추도행사'를 개최했다. # 이후 유감을 표명했고 일본 정부의 누구에게 뭐라고 유감을 표명했는가를 명시하지는 않았다.#
[1] 서울(605.2km²)과 성남(141.8km²)을 합친 것보다 크다.[2] 1.혼슈 2.홋카이도 3.규슈 4.시코쿠 5.오키나와섬 6.사도섬 7.아마미오섬(아마미 군도) 8.쓰시마섬 9.아와지섬 10.아마쿠사 시노시마(下島) 11.야쿠섬 12.다네가섬 13.후쿠에섬(고토시) 14.이리오모테섬(야에야마 제도) 15.도쿠노섬(아마미 군도) 16.도섬 17.아마쿠사 우에시마(上島)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러시아와 분쟁 중인 '북방 영토'의 섬 3개는 제외.(이투루프섬, 쿠나시르섬, 시코탄섬)[3] 사도 섬은 약 800km2 가량으로 울릉도보다 약 10배 크며, 제주도의 절반 정도 크기이다.[4] 한때 7만 명에 근접한 수준에 도달하였으나 점점 감소하는 중이다.[5] 일본의 광산은 금광이니 은광이니 하는 명칭이 아니라 자원+山으로 표기한다. ex) 금광: 킨잔(金山), 은광: 긴잔(銀山)[6] 니가타 등이 이에 해당된다.[7] 타라이부네(たらい船)라고 하는 나무 대야 배 승선 체험을 할 수 있다.[8] 니가타현에서 따오기는 곧 니가타를 상징하는 새이기도 해서 도쿄와 니가타를 잇는 신칸센의 등급에는 토키가 있으며 니가타시의 가장 높은 빌딩이자 컨벤션 홀로 쓰이는 빌딩의 이름 또한 새의 이름을 빌려와 토키멧세(朱鷺メッセ)로 명명되었다.[9] 한때는 도큐 전철 그룹 산하였던적도 있으며, 니가타현 본토(나가오카시)에서도 철도를 운행하였으나 1995년 철수하여 현재는 에치고 교통이라는 이름으로 버스 노선만 운영 중이고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이 회사 사장 출신이며 이때의 경력을 토대로 신칸센 정비법의 기본이 되는 다나카 구상을 추진한다.[10] 이전 지명이 카나자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