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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7년 7월 1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소재한 분당샘물교회 교인들이 단기 선교를 목적으로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의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이유로 여행금지국가인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에 입국을 강행했다가 현지 이슬람 근본주의 과격단체 탈레반에게 인질로 붙잡힌 사건.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을 생환시키기 위해 많은 인력과 세금을 투입했다.2. 사건 정황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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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때 당시에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에 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고 탈레반 과도정부가 들어선 현재도 아프가니스탄에 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다. 사건으로부터 5개월 전인 2007년 2월에는 탈레반이 자신들의 동료들을 석방해 달라는 조건을 걸기 위해 한국인들을 납치하려 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도 선교사 등에게 육로 이동을 금지할 것을 권고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여행제한국가로 분류한 상태였다.[1] 샘물교회에도 정부에서 협조 공문을 보낸 적이 있으며, 사건으로부터 2개월 전인 같은 해 5월에도 각별한 신변 주의 요청과 함께 특히 아프가니스탄 남부 지역의 방문은 자제할 것,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현지에 나가있는 선교사 단체들도 철수를 적극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에 가려던 대부분의 선교사 단체들은 계획을 포기했지만 샘물교회의 선택은 달랐다.
이 일행이 출발 당일 찍은 사진 우측의 푸른색 셔츠를 입은 사람의 이름은 심성민으로, 사살당한 두 명 중 한 명이다. 밑의 사진은 모두의 얼굴이 훤히 공개돼있는데도 모자이크를 한 이유는 알 수 없다. |
일행이 모두 모여 찍은 다른 사진 좌측 하단 푸른색 셔츠가 심성민, 가장 우측의 푸른색 반팔을 입고 있는 사람이 배형규 목사다. |
참고로 위 사진과 관련하여 [age(2007-07-13)]년째 게시 중단/블라인드 처리가 진행되고 있다. 블라인드당한 사람의 포스팅, 아카이브
납치 주체인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을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실제로 통치한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 세력으로, 협상 전술이나 언론 관계, 대중 심리전 등에 능숙했다. 이들이 납치된 2007년 7월 19일부터 풀려난 후 한국에 입국하는 (사건이 완전히 종료되는) 9월 2일까지의 기간이 44일이나 되었다는 점, 인원이 23명이나 되었다는 점, 한국의 개신교계가 엄청난 관심을 가졌던 점 등이 고려되어 언론에서는 엄청난 물량의 보도들을 쏟아냈다.
3. 피랍자 명단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20~30대로 젊은 편이었고 학생이거나 주부, 직장인이어도 사회 초년생들이다. 나이는 모두 당시 기준이며 특이사항이 있는 경우 별도 표기한다. 출처 기사에 들어가면 사진도 나온다.- 배형규(남, 42, 목사) (사망)
- 심성민(남, 29) (사망)
- 유경식(남, 55, 최연장자이자 교회 장로)[2]
- 제창희(남, 38)
- 송병우(남, 33)
- 고세훈(남, 27)
- 서경석(남, 27)
- 이지영(여, 36, 현지 인솔자)
- 박혜영(여, 34, 현지 인솔자)
- 임현주(여, 32, 현지 인솔자)
- 김지나(여, 32, 최초 석방)
- 김경자(여, 37, 최초 석방)
- 차혜진(여, 31)[3]
- 이선영(여, 37)
- 서명화(여, 29, 서경석과 친남매)
- 이정란(여, 33)
- 유정화(여, 39)
- 김윤영(여, 35)
- 이성은(여, 24)
- 이영경(여, 22, 최연소자)
- 한지영(여, 34)
- 안혜진(여, 31)
- 이주연(여, 27)
4. 사건의 경위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 관련 그래픽 |
2007년 7월 13일, 분당샘물교회 배형규 목사 외 분당샘물교회 남녀 교인 19명이 열흘간의 단기선교 목적으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 베이징의 서우두 국제공항과 UAE 두바이를 거쳐 14일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도착했다. 출국 인원은 (배 목사 포함) 20명이었지만, 현지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선교사 3명이 통역 및 안내 목적으로 합류해서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동안 총 23명이 움직였다. 이들은 7월 22일에 일정을 끝내고, 출국하여 23일에 인천공항으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7월 15~18일 마자르이샤리프 지역에서 선교를 겸해 의료봉사와 어린이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나 7월 19일 오후, 카불에서 (정부에서 특히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했던) 남부 지역 칸다하르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카불에서 170여 km 거리에 있는 가즈니 주 카라바그 지역에서 탈레반에 납치당했다. 참고로 당시 월간 군사잡지 플래툰의 기사에서는 이들이 지나갔던 길을 촬영했는데, "해당 지역을 호위 차량들 없이 버스 한 대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평가했다.[4]
이 소식은 7월 20일 영국 로이터 통신을 통해 국내에 전해졌다. 탈레반 대변인 카리 유수프 아마디는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한 한국군을 21일 정오까지 전원 철군하지 않을 경우 인질들을 모두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 그 날로 외교통상부는 국외테러사건 대책본부를 설치했다.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충청남도 계룡시 계룡대의 별장에서 군 관계자들과 골프 모임 등을 할 예정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21일 새벽 소식을 듣고, 모임을 일찍 마치고 급히 상경하여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후 탈레반은 협상 시간을 하루하루 연장했다.
한국 정부가 한국군 철군에 대해 "연말에 철수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탈레반은 새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7월 22일 19시까지 한국인 인질과 같은 수의 탈레반 수감자(포로)를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7월 21일, 노무현 대통령은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에게 전화해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CNN을 통해 인질 석방을 촉구하는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아프간에서 철군하겠다는 계획을 재확인시킨 뒤 카불 현지에 협상단을 급파했다.
7월 22일, 정부 대책반이 카불에 도착해 아프간 정부, 부족 원로, 종교 지도자들에게 직·간접적 접촉과 중재를 요청했다.
7월 23일, 탈레반은 한국 정부와 직접 협상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석방을 요구하는 수감자 수를 23명에서 가즈니주에 수감된 탈레반 수감자 55명 전원으로 늘렸다.
한국 정부는 피랍자 23명 중 18명을 우선 석방시키자고 제안했다. 탈레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7월 25일 끝내 희생자가 나왔다. 탈레반은 협상이 결렬되었음을 선언하고, 인질 중 남자 1명을 살해했음을 밝혔던 것이다. 또한 26일까지 하루 안에 수감자 8명이 석방되지 않으면, 다른 인질도 모두 살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26일 정부는 피살자가 배형규 목사(42, 남, 1965년 7월 25일생)임을 확인했다.
7월 26일, 한국 정부는 백종천 청와대 안보정책실장을 대통령 특사로 아프간에 파견했다. 7월 29일, 백종천 특사는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을 만나, 인질·수감자 맞교환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프간 정부는 불가 입장을 밝혔다.
탈레반이 협상시한을 수시로 변경하고, 인질·탈레반 수감자 맞교환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7월 31일,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온지 5일 만에 두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심성민(29, 남, 1978년 6월 29일생)이 살해 당한 것이다. 탈레반은 수감자 석방에 대한 긍정적인 답이 없을 경우, 나머지 인질을 살해하기 시작할 것이라 위협했다. 또 한국과 미국의 군사 작전이 시작되면, 인질을 살해할 것이라고 밝혔다.
탈레반과의 대면 접촉이 이뤄진 후에야, 해결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8월 3일 아프간 주재 대한민국 대사와 탈레반 측은 직접협상 장소를 정하기 위해 통화했다.
8월 1일과 3일 사망자들의 시신이 각각 인도되었다. 정확한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 국과수가 부검을 실시한 결과, 두 사람은 모두 총으로 사살 당해 참혹하게 죽었다. 배 목사는 머리에 1발, 몸통에 6발, 모두 7발이나 되는 총상을 입었고, 심씨는 머리에 2발, 몸통에 2발을 맞은 것으로 확인됐다.
8월 6일, 미국 부시 대통령과 아프간 카르자이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탈레반에 대한 양보 불가 입장을 재확인했다. 아프간 정부가 인질과 탈레반 수감자 맞교환을 거부하고, 미국도 이에 동조하자, 한국 정부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탈레반을 설득할 묘안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8월 7일, 외교통상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했다. 10일에 처음으로 한국 정부와 탈레반이 대면 협상을 시작했으며, 이는 가즈니주 적신월사(ICRC)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탈레반 대표는 한국인 인질 8명과 같은 수의 탈레반 수감자 맞교환 조건이라는 기존 입장을 반복했고, 한국 정부 대표는 탈레반 수감자 석방은 권한 밖의 일이라며, 탈레반에 인도주의적 차원의 석방을 요청했다.
8월 11~12일, 2차 대면협상 과정에서 탈레반은 선의의 표시로 건강이 악화되던 여성 인질 2명 석방을 발표했고, 이들은 13일에 석방됐다.
8월 16일, 한국·탈레반 대표는 가즈니에서 3차 대면협상을 재개했다. 탈레반이 8월 중순부터 인질·수감자 맞교환 조건을 철회할 의사를 내비쳤다.
8월 27일, 한국 정부가 아프간에 파병된 다산·동의부대를 3개월 연장 주둔 후, 철수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인질 협상은 본격적으로 진척됐다. 마침내 8월 28일, 한국·탈레반 대표는 4차 대면협상을 갖고, 인질 19명 전원 석방에 합의했다. 한국·탈레반 협상팀은 ▲아프간 내 한국군 연내 철수 ▲아프가니스탄 내 비정부기구 활동 한국인 8월 내 철수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 활동 금지 ▲한국인 철수과정의 안전 보장 ▲탈레반 수감자 석방 요구 철회 등 5개 조항에 합의했다. #
이후 8월 29일 인질 12명이 석방되었고, 30일에는 나머지 7명이 모두 석방되었다. 피랍된 지 42일 만이었다. 먼저 석방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생존 인원 19명은 9월 2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 육군 특전사를 투입하여 구출해 오는 방법과 협상 중에서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고, 미군 역시 구출을 위해 특수부대를 준비시켰다. 하지만 현지의 미군과 신생 아프간군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첩첩산중의 땅굴 속으로 병력을 투입하면, 말 그대로 대규모 대 게릴라전이 되어, 인질은 인질대로 죽고, 특수부대는 특수부대대로 피해를 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성공한다고 해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했으므로, 결국 협상을 통해 인질들을 빼오는 길을 택했다. 그나마 이라크에서 날뛰면서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고는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질의 목을 자르는 이라크 무장단체 유일신과 성전과는 다르게, 당시의 탈레반은 최소한의 협상의 여지는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실제로 특전사 제707특수임무대 요원들이 아프가니스탄 현지에 급파되어서 인질 구출 작전 준비를 했었다는 것이 훗날 밝혀졌다. # 아카이브. 결국 협상 타결로 인질들이 석방되어서 실제작전에 투입은 되지 않았지만, 구출 계획 구상을 위한 억류 지역의 지형 정보 조사, 탈레반 무장 세력의 이동 경로 및 은거지, 동향 등의 첩보 수집과 무기 분석 등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 인질이 무사히 풀려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 공로로 인정 받아, 그 특전사 대원들 중 일부가 훈장 및 표창을 받았다. # 정부의 인질 석방 노력을 적극 지원하도록 카불로 파견된 군사협조단 또한, 공로를 인정 받아, 카불 군사협조단장을 맡은 육군 준장 전인범 장군 등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아예 특전사 1~2개 여단을 투입해서 현지에 있는 미군,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국제안보지원군의 협력을 받으며, 가즈니 주의 탈레반을 소탕하려는 작전도 합참이 구상했었고,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까지 이런 방안이 보고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아카이브.
이 사건과 관련하여 수많은 각종 의혹 및 해명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2007년 9월 당시 포스팅 및 기사 모음을 참고하면 된다.
5. 논란과 비판
사단의 근원지였던 분당 샘물교회 |
대한민국 정부가 중동 외교를 실패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자국 정부가 경고했지만 무법천지에 기어이 제 발로 들어갔다가 극성 테러 단체에게 납치됐으니 정부로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부가 이들을 구하려고 군 병력을 몇 만이나 배치해서 선전포고할 수도 없는 일이고, 군대를 보내서 구출하는 것이 확실하면 모를까 그렇게 해서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다가 애꿎은 군인이 수십 명씩 죽는다면 본말전도가 따로 없다.
그렇다고 '너희들이 스스로 순교하겠다며 갔잖아. 그냥 거기서 죽어라' 하고 방치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잡혀간 사람들의 정신 나간 행동 때문에 분개한 많은 사람들이 순교한다고 한 말 그대로 죽게 놔두라고 주장하긴 했지만, 그런다고 진짜 그렇게 한다면 국가는 '국민의 보호'라는 주요 임무 중 하나를 저버리는 셈이 된다. 국민이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등을 다해 국가를 지원하듯이 국가도 아무리 멍청하고 개념 없는 행위를 한 사람이더라도 자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당시 야당과 언론들도 국가의 자국민 보호 필요성을 강조하는 바람에 노무현 정부는 결국 그들을 구하는 데 나서야 했다.
애초에 (넓은 범위의) 탈레반이 그리 쉽게 소탕할 수 있는 거였다면 소련군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물러났을 리가 없고, 천조국 군대라고 불리는 미군이 장장 20년 동안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러야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훗날의 일이지만 결국 2021년에 미군이 철수한 지 겨우 몇 주 만에 탈레반은 다시 총공세를 펴더니 수도를 함락, 정부를 전복시켰다. 그 정도로 끈질기고 강성한 무장 단체다. 그리고 그 당시 한국 정부의 대처에서 실수가 있었는데, 아프가니스탄은 아랍어가 모어가 아니라 파슈토어, 다리어가 모어임에도 중동=아랍=이슬람이라는 고정 관념 때문에 아랍어 구사자를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했다가 의사소통에 실패한 적이 있었다. 정부 테러 대응 전략 있기는 있나, 원칙·요령·지식없는 3無협상 혼선, 탈레반 말도 몰라 아랍어교수 파견(매일경제).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라크에서 일하다 한국군의 이라크 철수를 요구한 무장 세력에 의해 납치되어 결국 참수 살해당한 김선일의 경우와 비교해 볼 만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던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여론도, 정부의 대응도 크게 달랐다. 김선일은 어디까지나 무역상사의 직원으로서 합법적으로 일하러 갔다가 변을 당했다. 김선일도 내심 선교할 생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위험하긴 하지만) 떳떳하게 직장 업무를 하러 갔다가 납치당한 무고한 피해자다. 게다가 김선일 사건은 2004년, 이 샘물교회 사건은 2007년의 일이다. 즉 김선일이 갈 때만 해도 중동은 '치안이 조금 위험한 곳' 정도였다. 이는 해외 파병 장병들도 비슷해서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해외 체험과 각종 수당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며 반기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런 김선일의 죽음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경각심이 높아진 상태였다.
기자회견장에서 뻔뻔한 표정을 짓는 피랍자 |
그러나 버스에서 환하게 웃는 피랍자 |
잘한 것 하나 없는 이들에게 1등석이 배정되었다.[5] |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물가를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다년간의 전투 경험을 가진 무자헤딘 15,000명을 거느린 아프가니스탄 최대 계파 보스를 동원해 탈레반을 치게 만들고 그 정권을 붕괴시켰을 때, 작전 대가로 치른 금액이 현찰박치기 500만 달러라는 것이다.
2007년 여름 벌어졌던 한국 단기선교단 납치 사건 당시 인질의 몸값으로 치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용이 100만에서 4,000만 달러까지 다양한데,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밝혀지든 간에, 이 500만 달러와 비교해서 감을 잡으면 좋을 거라고 본다.
원문, 아카이브
다시 말해서 만약 이들을 빼내오려고 돈을 준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이들의 몸값으로 탈레반에게 건넨 돈은 미군이 15,000명 규모인 아프가니스탄 최대 군벌 하나를 통째로 매수하는 데 든 돈에 거의 근접하거나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엄청난 액수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액수만으로 단순 비교를 하기는 어렵다. 미군과 연합한 군벌인 북부동맹은 남쪽을 장악한 다른 군벌인 탈레반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미국은 탈레반을 견제하기 위해 북부동맹을 필요로 했고, 북부동맹은 탈레반을 몰아내고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장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500만 달러가 없다 하더라도 서로 협력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미군은 특수전 병력 파견 등을 통해 북부동맹을 지원하여 탈레반을 몰아냈기 때문에 단순히 북부동맹을 매수하기 위해 500만 달러를 지원한 것이 아니다. 자세한 사항은 북부동맹 문서와 아흐마드 샤 마수드 문서 참조.2007년 여름 벌어졌던 한국 단기선교단 납치 사건 당시 인질의 몸값으로 치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용이 100만에서 4,000만 달러까지 다양한데,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밝혀지든 간에, 이 500만 달러와 비교해서 감을 잡으면 좋을 거라고 본다.
원문, 아카이브
실제로 2007년 9월 1일, 로이터 통신은 “몸값으로 2,000만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187억 원) 이상을 받았으며, 그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통신망을 재정비해 더 많은 자살 공격을 위한 차량을 사들일 예정”이라는 탈레반 고위 인사의 발언을 인용해 보도했으며, 알자지라 방송은 당시 한국 정부가 탈레반에게 2,000만 파운드(약 378억 원)을 지불했다고 보도하기까지 했다. 정부는 당시 이 같은 사실을 부인했지만, 이후에도 외신에서는 "탈레반이 한국 정부로부터 몸값을 받은 뒤 무기를 사들였다"는 보도까지 내며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
탈레반을 토벌하는 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련과 미국도 털려서 나온 곳이고, 토벌을 시도했다면 그 과정에서 인질의 목숨도 위험해진다. 당시 협상에서 외교 안보 당국은 여러 실책을 범했다. 당국은 철군 계획을 너무 일찍 밝혀 협상에 활용할 지렛대를 일찌감치 소진했다. 또 직접 협상과 석방금 지급 의혹이라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향후 한국인이 테러 집단에 인질로 잡힐 수 있는 위험도를 높인 측면이 있다.
윤태영 경남대 경호보안학과 교수의 논문 '한국의 국외인질테러 대응 체계와 활동 평가: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을 중심으로'를 인용하자면, 사건 직후 탈레반의 철군 요구가 있자마자 기존의 철군 계획이지만, 7월 21일, 이를 조급하게 발표함으로써, 인질 석방에 활용할 수 있는 협상 카드를 소진했다. 또 테러 집단과의 직접 협상 불가라는 국제 사회의 원칙을 파기하고, 직접 대면 협상에 나서 인질을 석방시켰다. 이는 향후 국외 테러 발생 시 한국 정부의 운신의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했고, 한국인에 대한 인질 테러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미국과의 불협화음도 큰 문제였다.
게다가 김만복 국정원장의 지나치게 잦은 언론 등장, '썬글라스 맨'으로 통칭된 국가정보원 협상 전담자의 귀중한 인력 정보 노출 등 국가정보원 자체도 대단한 손실과 비판을 면치 못했다. 김만복 국정원장은 그 외에 여러 것으로도 까였다.
또한, 기본적으로 해외 선교 활동에 긍정적인 열성적 개신교 신자들의 경우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경우가 많다. 해외 선교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도 아프가니스탄처럼 너무나도 위험한 지역에 어리고 미숙한 학생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신학적 지식과 전문 지식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선교단을 1~2주일 정도 단기로 보내는 것은 선교 활동이 아니라 그냥 쇼나 미친 짓으로 여긴다. 이 사건 피랍자들도 대부분 본업이 종교 관련자나 선교사가 아닌 비전문가 젊은이들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니까 모든 위험들이 우리를 피해갈 거야"라고 믿으며 선교 활동을 '놀이동산 공포체험' 정도로 여겼나본데 그 믿음이 옳다면 로마 제국 아래에서 순교한 수많은 초대교회의 신도들은 신에게 버림을 받아서 죽은 것이 된다.
아프가니스탄은 언제라고 할 것도 없이 극단적으로 위험한 곳이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만 봐도 탈레반들이 어떻게 아프가니스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온갖 반인륜적인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견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에서도 선교단 파송을 아예 포기하거나 파견할 것이라면 장기간에 걸쳐 철저한 교육과 준비를 거친 전문적인 선교사 중심으로 정예 팀을 꾸려서 보내야 한다는 사람이 많다.
6. 영향
6.1. 대한민국 여권법 개정
대한민국은 2004년 김선일 피랍 사건 이후 여행경보제도를 도입하였다.다만 본 사건 이전까지는 여행경보제도에 여행금지로 묶여도 법적 구속력은 없었는데, 이는 "안전하지 않은 지역으로의 국민의 여행의 자유라는 법익"이 "국민의 신체와 안전의 보호 및 국가적 차원의 공익이라는 법익"보다 컸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국가가 위험국가를 알려주니 가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국가가 책임지기 어려우니 개인의 선택에 맡기겠다에 가까웠다.
하지만 샘물교회 피랍사건에서 일개 개인이 아닌 단체가 피랍되는 문제가 생기고, 이 과정에서 국가적 체면 손실과 많은 세금 낭비로 인하여, 결국 여권법이 또 한번 제정되어 여행금지 국가에 입국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묻도록 여권법이 개정되었다. 이제는 살아서 돌아와도 최소 벌금형에 벌금을 내지 못하면 해당 액수만큼 노역장 유치, 여행금지 국가에서 한 행동에 따라 징역살이까지 가능하게 된 것이다.[6]
이로인해 김선일씨 피랍사건은 한국 여행 경보제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면, 샘물교회 사건은 여행금지국가의 법적구속력이 생기게 된 명분을 제공한 상징적인 사건이다.
6.2. 개신교의 평판 저하 가속화
개신교단과 해당 교회측은 사안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일관하였으며, 이 사건 이후로도 국민들을 향한 사과나 향후 대책 없이, 지속적으로 다른 대형 사건들을 일으켜 반감을 더욱 심하게 키우고만 있다.단순히 선교로 벌어진 해프닝이 아닌, 국가에서 법으로 금지하는 일을 저질러 국가에 수백억 원 대의 막대한 피해를 일으킨 (금전적인 의미에서는) 테러 사건에 가까운 엄청난 일이었다. 2008년 벌어진 서울 숭례문 방화 사건의 피해액이 200억대로 추산된다. 샘물교회는 국가 최중요 문화재를 파괴하는 것 이상의 피해를 대한민국에 입힌 것이다. 샘물교회 사건은 개신교 선교에는 악영향만 미쳤으며, 건전한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개신교의 평판은 2000년 서울 지하철 4호선 이수역 역명과 관련한 총신대학교의 억지 주장과 이에 항복한 서울시 지명위원회로 인해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자세한 사연은 이수역/역명 논란 문서 참조. 아직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인 1990년대에 발생했던 다미선교회 휴거 소동과 만민중앙교회 MBC 습격 사건과는 달리, 이수역 역명과 관련한 총신대의 억지 주장은 개신교 정통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산하의 신학대학교에서 일으킨 논란이었던 데다 인터넷이 각 가정으로까지 널리 확산된 시기에 발생한 파문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파장이 매우 컸다.
2007년 당시 개신교는 대내외적인 불신과 이미지 추락 가운데, 한국의 개신교 초기의 부흥운동을 본받은 의욕적인 부흥운동을 펼쳤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을 벌인 지 100주년이라며 기념했다. 하지만 이 사태가 찬물을 제대로 끼얹어 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개신교 내부에서도 '일방주의적인 선교를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늘 그렇듯 개혁적 목소리는 비주류인 탓에 묵살 당했다.
사실 이들을 보낸 특정 교회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한국 선교사들 상당수가 국외 극빈 지역으로 가서는 현지 사정이나 반감을 눈곱만큼도 배려 않고, 막무가내로 개신교 선교를 시도하여 도리어 개신교에 반감을 키운 경우가 많았다. 2007년 피랍 사건 당시에도 샘물교회 봉사단이 들어오기 몇 년 전부터 이미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평화 축제 사건을 비롯한 온갖 실책 때문에 한국이라면 치를 떠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이슬람교 중에서 극단적인 분파는 비신자를 멸시하고, 배교자라면 죽여도 된다고 본다. 이 때문에 배교자는 사람으로 안 여기고, 망명 뒤에도 온갖 테러를 가할 정도다. 국가적으로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물론 이렇게 개종자를 잔혹하게 대하는 행태는 (개신교를 비판하는 것과는 별도로) 이슬람 근본주의 문서에 나와있듯이 무슬림들을 경멸의 대상으로 분류하게 하는 데 아주 큰 몫을 한다. 상황이 이런데, 이슬람을 대상으로 한 선교를 쉽게 보면 아주 큰일나는 것이다.
6.2.1. 사이버상의 반개신교 정서 가속화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이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얼마 전에 출판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반기독교와 무신론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덩달아 <만들어진 신>도 꽤 잘 팔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80년대 초에 시작해서 2000년대에 단군상 절단인증 사건에 의한 반발 여론 이후, PC통신을 시작으로 서서히 관심을 모으고 있던 반기독교 운동은 이 사건을 계기로 2007년 전후에 급격히 팽창하였다.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 인터넷에서 반기독교, 정확히는 반개신교 세력들이 여론을 주름 잡게 된 계기가 이 사건이라 봐도 무방하다. 당시 한국에서 천주교는 그나마 대외적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쌓아둬서 기독교 전체에 포괄적으로 해당되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부류에게나 비판 받았다. 천주교가 전통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프랑스나 남미 같은 지역에서 세속적 진보주의자들에게 비판 받는 것과 정반대의 상황인 셈이었다.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서 그 전에도 여러 가지 사건사고들로 이미지가 결코 좋진 않았지만, 결정타를 날린 것이 이 사건이라는 점만은 부정하기 어렵다.6.3. 태상호 기자의 증언
호비스트 출판사의 플래툰의 태상호 기자가 아프가니스탄에 종군 취재 목적으로 갔을 때였다. 이 때는 아프가니스탄 피랍이 일어나기 몇 년 전이다. 태상호 기자가 50km 거리를 이동하는데, 미군이 장갑 험비 5대로 에스코트해줘야 했다. 본인도 "만약 죽더라도 아무런 보상과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는 각서를 ISAF의 감시하에 쓰고, 자비로 구매한 방탄복과 방탄모를 착용한 후 인적이 드문 새벽을 이용해 이동했다. 왜냐하면, 미군이 방탄복이나 방탄모를 빌려줬는데, 해당 장비가 적절한 방호력을 제공해 주지 못할 경우 문제가 커지기 때문이다. 종군기자들 역시 방탄 장비는 스스로 갖춘다.태상호 기자가 카불 시내에 도착했는데, 아프가니스탄 호텔에서 한국인이라고 말하자, 주변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호텔에서 빨리 나가라며 내쫓았다고 했다. 결국 독일 기자단 숙소에 얹혀 살아야 했는데, 독일인 기자가 그 이유를 설명하길, "한국에서 온 개신교 단체들의 선교를 목적으로 한 행사로 인해, 한국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감이 극히 심해졌다."고 했다고 한다. 현지 공무원에게는 '운동축제'로 신고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 설명을 하며 보여준 아프가니스탄 국내 신문에 그 이야기가 1면으로 나와있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는 태상호 기자를 포함한 한국 국적의 일반인이나 자원봉사자, 그리고 왕진 가방이나 이를 실은 차량으로 봉사 겸 선교 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이 있었다. 의료 선교사들의 경우, 의료 기술이 열약하거나 오지라서 병원조차도 없는 곳에서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사람들이다. 물론 처음엔 별 관심이 없거나 경계하기도 하지만, 진료를 잘 본다면 선교라도 기꺼이 들어줄 의향이라도 생긴다. 일례로 자신도 병자이면서 필리핀에서 자차를 이끌고 달동네나 오지까지 가서 무료 봉사를 하다, 2018년 8월 위암으로 사망한 박누가 선교사[7](외과의사) 대표적. # 이런 한국인들은 아프가니스탄 현지인들에게 스스로를 그나마 상대적으로 평판이 나았던 중국인이라고 해야 했다.
그런데 사실 중국인들도 현지에서 매춘이나 금지품 밀수에 돼지고기 판매, 재건사업 관련 일자리 독점으로 큰 미움을 받고 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종교 선교가 아니라 철저하게 돈벌이가 목적임에도 중화사상이 원인이 되어, 중국인들도 미움을 많이 받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꽤 많이 죽었다. 2004년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으로 간 채수문 중령의 글을 보면, 중국인 노동자 숙소에 폭탄이 터져 25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 당했던 일이 거론된 바가 있다.
이런 위험한 곳에 선교를 가겠다고 하니, 여행 계획을 알게 된 한국 정부에서는 당연히 못하게 말렸다. 공식 공문을 보내 경고까지 했는데, 이들은 위에 나와 있듯이, 베이징과 두바이를 거쳐, 기어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위험 지역임을 알리는 간판 앞에서 웃으면서 기념 사진까지 찍었다. 그래놓고선 납치되자, 뒤늦게 "엄마 보고 싶어요, 밥이 먹고 싶어요." 이러면서 후회하면서 애걸복걸한 것은 안전불감증이 빚어낸 웃기는 상황이다. 결국 이들을 구하려고 고생한 건 한국 정부였고, 인질들 몸값은 국민 세금이었다.
여담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 활약한 강성주 아프가니스탄 특명전권대사는 얼마 뒤 도미니카 공화국 특명 전권대사로 갔는데, 거기서 옆나라인 (관할지역) 아이티에 벌어진 2010년 아이티 지진을 맞게 된다. 한 술 더 떠서 아이티 지진 구조대 보도 논란까지 겪어야 했으니 그야말로 멘붕이다.
6.4. 저널리즘의 저하
이후 여권법이 개정되어 여행금지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이로 인해 저널리즘, 특히 종군기자가 크게 퇴색되어 언론탄압의 우려를 보이고 있다. 특히 예외적여권사용허가서를 위해서 작성하는 서류는 제한사항이 너무 많은 데다가 발급도 늦어서 사실상 종군기자를 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고, 특히 소속 없이 일하는 기자들은 취재가 더더욱 불가능하다. 때문에 한국의 언론은 국제적 이슈를 외신에서 받아쓰는 것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6.5. 국외 반응
6.5.1. 아리프 아쉬츠,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도둑>
튀르키예인 사진 작가인 아리프 아쉬츠가 한국을 1년 동안 여행하고 지내면서 쓴 책인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도둑>을 보면, 이 사건이 튀르키예에서도 화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튀르키예에서의 반응도 역시나 '쟤들 왜 저러냐?' 비웃기 일쑤였다고 한다. 튀르키예는 이슬람권이지만 철저한 정교분리 정책을 실시하는 나라다. 종교적 광신 자체를 국가에 해악이 된다고 치를 떨던 케말 아타튀르크 전 대통령의 영향이 크다. 여담으로 케말 아타튀르크는 정교분리 원칙을 확고히 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지은이 아리프 아쉬츠도 한국에서 1년 동안 살면서 삼겹살, 제육볶음, 탕수육, 족발 등등 돼지고기는 물론, 소주와 복분자와 온갖 한국 술을 질리도록 즐겼다고 서술하며, 한국 식당에서 먹는 소주와 삼겹살 사진도 찍어 책에 올렸다.때문에 튀르키예에서는 무슬림도 길거리에서 저 모양으로 이슬람교를 선교한답시고 한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처럼 굴면, 졸지에 이슬람 과격파로 몰려 정치범수용소에 갇힌다고 글로 쓰면서 비아냥거렸다. 튀르키예는 이슬람이 절대다수인 나라이고, 최근 들어서 에르도안 같은 종교 꼴통이 집권하지만, 여전히 인식은 세속적이다. 그 예로 튀르키예 몰래카메라에는 아랍인처럼 입고, "알라 후 아크바르"라고 하는 외치는 건데 튀르키예인들 반응은 "폭탄 테러다!"라고 난리법석을 부리며 대피할 정도로 저런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에 치를 떨고 같이 생각하지 말라고 여긴다. 아쉬츠 역시 "나도 무슬림이지만, 평생 외국 나가서 비무슬림에게 이슬람교 강요와 선교는 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 이런 종교 권유하는 말 들으면 나조차 어이없고 무섭다."고 소감을 쓸 정도였다.
아랍, 그 가운데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천하의 근본주의 이슬람 국가조차도 길거리에서 대놓고 이슬람만 천국, 다른 종교 죄다 지옥 이따위 짓 하면 사이드 쿠틉 같은 류의 극단주의 사상 지지자로 생각되어 순식간에 잡혀들어간다. 그것도 그냥 정치범수용소가 아니라 테러리스트와 진배 없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믿으려면 조용히 믿자.'는 어디서나 진리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조차도 가끔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가 벌어진다. 현재도 이미 근본주의 나라임에도 이들에게는 이조차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나라들도 이런 사상엔 가차없고 아주 치를 떤다.
더불어 튀르키예 곳곳에서 성지순례를 온 한국인들이 허구한 날 튀르키예인들에게 "자기들 교회 믿어라" 그런다는 소리도 첨가했다. 그리고 이 책자에서 이걸 다룬 부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이 샘물교회가 듣자 하니 네팔 쪽으로 갔다는데, 거기라고 그런 광신적 선교를 좋아하겠느냐?'... 나라 망신 인증이다.
6.5.2. 국외 인터넷에서의 반응
피랍 소식은 국외 인터넷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 대부분은 조롱조였다. 미국인들은 "우리네 일부 목사들보다도 더한 자들이 있어서 한 시름 놓았다."는 의견이 꽤 있었고, 나머지 나라들에서도 너무 미개한 종교관이라며 비웃음 일색이었다.어떤 교회들은 예수의 고난에 빗대어 전도, 선교 과정에서 듣는 비난을 자랑스러워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리가 흔히 겪는 민폐와는 스케일의 차원이 다르다.
6.5.3. 종교계 반응
한편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피랍자들의 신변 안전 및 무사 귀환을 바란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발표했고, 세계 각국의 이슬람 지도자들 역시 탈레반 측에 피랍자들의 안전 보장 및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고 나서기도 했다.6.6. 이 사건의 보도에 대한 논란
2009년 3월과 6월, 예멘에서 역시 무개념 개신교 선교 활동에 대한 현지의 격앙된 감정이 원인이 되어, 한국인을 노린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예멘 문서에도 나오듯이, 이건 무턱대고 "우리 종교 믿으라"던 선교사들이 자초했다. 또한 간호사로 일하던 독일인과 한국인이 납치 당해 피살된 사건이 벌어졌다. 해당 사망자인 엄영선이 생전에 남긴 블로그 글이나 몇몇 교회 반응을 보면, 그녀는 준선교사라며 간호봉사도 하며 선교 목적도 있었기에, 순수 간호사로서 간 것은 아니다. 같이 사살된 독일인도 마찬가지였다. 예멘에서도 테러범이 아니라 현지인들에게 종교 강요한 탓이라며, 흐지부지 넘어가버려 범인들은 일절 처벌 당하지 않았다. 물론 이 샘물교회 사건 범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탈레반이 저질렀던 거랑 달리, 예멘 사건은 이슬람 극단 세력 어디도 끼어들지 않았다는 결론이 났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은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와 다르게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해 묻혔다.때문에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 아프가니스탄 일을 더 깊게 파고들어 확대했다는 비난섞인 분석도 있었다. 2007년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많은 신문사에서 이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노무현 정부 외교 실패'라는 식으로 결론 지어 정부를 비판했는데, 정작 정권 교체가 되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2009년 예멘 테러가 일어나 한국 여성 엄영선이 죽자, 이에 대하여는 몇 번 보도하고 철저하게 파묻었으며, 이 예멘 사태가 터지자, 2년간 줄기차게 이 사건을 소환하던 월간조선 등이 이후 아프가니스탄 사건 이야기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는 것. 오죽하면, 엄영선의 유족조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때는 언론이 그리도 많이 보도하고 관심을 가져다주더니만, 한국의 개신교 단체나 교회들도 엄영선에 대해선 언급을 피하더라." 하면서 당시 울분을 토했을 정도였다.
물론 일부 보수 측에선 피랍과 테러는 성격이 다른데, 일부 친노 진영에서 정치적인 의도로 더 이런 논란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한다. 예를 들어, 이라크에서 노동자 1명이 테러 공격으로 사망했다면 기사에 단신으로 보도되고 묻혔을 만한 사안이나, 김선일을 납치하여 인질극을 벌이며 협상을 제시하자, 모든 지상파 방송에서 대서특필한 바 있다.김선일 1명으로도 그 정도였을 정도인데, 하물며 수십 명이 단체로 납치당해서 인질극 협상을 벌이는 상황이니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사안이며, 어느 정도였냐 하면 당시 이렇게 많은 인질이 한꺼번에 잡힌 건 워낙 드물어서 다른 나라에서도 관심을 가졌다는 주장이다. 인질극 협상, 그것도 유례없는 수십 명 인질이 붙잡혀있다 보니 정부의 외교 사안도 시험대에 올랐던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애초에 이 사건의 본질은 당시 정부가 잘못했다기보다는 정부의 경고조차 무시하고 아프간에 무리한 선교 활동을 벌이러 간 샘물교회 측과 이들을 납치한 테러 단체가 가장 큰 잘못의 주체였기에, 사실 지금이나 그때나 정부 잘못이 크다는 주장은 네티즌들에게 큰 공감은 얻지 못했다. 당시에 네이버 뉴스란에 흔하게 보이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xxx가 벌어질 때 노무현은 뭐했나?"라는 비판이 달릴 때, 이 아프간 피랍 사태 때만큼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노무현 책임없다.""노무현은 할 만큼 했고, 정부가 가지 말라는데 멋대로 간 이들이 잘못이다."라는 반박이 달릴 정도로 아프간 피랍 사태에 노무현 정부의 책임은 없다는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7. 잘못 알려진 사실
- 외교부가 비행 티켓을 강제 취소하자 교회 측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까지 걸겠다고 강력히 반발하면서 결국 두 번째 티켓은 취소 못하고 경고만 했다?
- 출국 사실을 안 외교부는 전용 비행기를 보내 간곡하게 돌아오기를 부탁했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 피랍자들이 두바이 면세점에서 명품 쇼핑을 했다?
네티즌들이 인천공항에 입국하는 이들의 사진을 면밀히 관찰한 뒤 '두바이 쇼핑몰에서 명품을 쇼핑한 증거'라는 주장이 인터넷에 퍼졌다. 이는 곧 '혈세 낭비하게 하더니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집에 오게됐다고 희희낙락하며 면세점 명품 쇼핑을 즐겼댄다! 얼마나 생각이 없는 거야?'라는 식의 루머로 이어져 더욱 피랍자들의 평판을 악화시켰지만 거짓이다. 네티즌들이 든 근거와 그것이 사실이 아닌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피랍자들이 하나씩 들고 있는 남색 바탕에 노란 아랍식 무늬가 있는 종이 쇼핑백이 '두바이 면세점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이들이 전원 석방된 날 카불 주재 한국 대사관이 이들의 소지품을 담으라고 현지에서 일률적으로 지급한 것이다. 대사관은 이들 피랍자에게 입기 편한 후드 점퍼와 트레이닝복을 제공했고, 피랍자들은 이 문제의 쇼핑백에 자신이 피랍 기간 입었던 옷가지 등을 집어넣었다. 일부 네티즌은 이 가방에 같은 파란색 태그가 붙은 것을 두고 면세점에서 쇼핑을 했다고 주장하였지만, 이 태그는 이들이 카불에서 두바이로 이동할 때 타고 온 유엔 특별기의 수화물 검사표다. - 한 남성 피랍자가 들고 있는 비닐봉투의 상표가 '두바이에서 아주 비싸게 팔리는 신발 매장'이다?
→ 'SHOE MARK'라는 신발 매장의 상표가 찍혔는데 이 매장은 두바이 면세점엔 없고 두바이 시내 중저가 상품을 판매하는 쇼핑몰에 입점한 신발 브랜드다. 이 매장에서 파는 신발의 가격은 3만~5만원 정도다. - 빨간색 옷을 입은 여성이 옷 앞에 명품으로 보이는 선글라스를 걸쳤는데 두바이에서 산 명품 아니냐?
→석방 직후 카불의 호텔에서 이미 앞 가슴에 같은 선글라스를 걸치고 있었다. 선글라스는 물론 시계까지 차고 있다. 따라서 두바이에서 산 물건이 아니다. 정부 협상팀이 이에 대해 설명하기를, 피랍자들이 5~6개 조로 나뉘면서 다양한 성향의 탈레반에 억류됐는데 어느 탈레반은 소지품을 모조리 빼앗았는가 하면 다른 쪽은 개인 소지품은 어느 정도 인질이 보관하도록 허용했다.
애초에 이들을 한국행 비행편 탑승구까지 인도했다는 정부 관계자가 "(피랍자들은) 한국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탑승 시간에 빠듯하게 공항에 갔다"며 "여유롭게 공항 내 면세점에서 쇼핑을 할 시간은 물론 돈도 없었다"고 말하면서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
8. 기타
- 이 사건 당시 발생한 사망자 2명 중 심성민은 학군 39기로, 2001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장교 신분으로 병역을 이행하고, 2003년에 중위로 만기 전역한 지 4년 만에 사망했다. 그가 개신교 신자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 신자였던 것이 더 사실에 부합하는 듯하다. 그 후로 그의 아버지가 교회를 상대로 고소한 적이 있었다. #
- 당시 비슷한 시기에, 소말리아에서 납치된 어선(마부노 호)의 한국인 선원들이 거의 6개월째 피랍 상태였는데, 언론은커녕 가족들 외엔 아무도 관심조차 없고, 심지어 배의 소유주조차 이들을 무시했던 게 뒤늦게 알려졌다. 이에 '정부는 개신교 관계자들이 납치되니까 구하러 다니고 6개월째 갇혀 지낸 사람들은 버린 거냐?' 하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론을 비롯한 여론부터 무관심했다는 게 팩트지만. 이런 한국인 선원 납치 사태는 2020년대에도 간간이 벌어지고 있다. #
- 일본 애니메이션 갤러리에서는 당시 초기 탈레반의 행동을 착각하여[8] 츤데레와 결합시켜 츤데반이라는 개드립을 탄생시켜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린 바가 있다. 아카이브. 물론 그 뒤에 탈레반이 피랍자 중 둘의 목숨을 앗아가면서 이 말은 그야말로 망언이 되어버렸다.
- 이 사건이 인터콥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이 있는데, 그 이유는 2006년에 일으킨 아프가니스탄 평화 축제 사건 탓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표면적으로 큰 상관은 없다. 단, 선교를 간 인원 중 일부가 인터콥 소속이라는 말은 있다. 뉴스앤조이의 기사에 의하면, 분명히 분당 샘물교회의 홈페이지에 '아프간 인솔자들 중에서 선교사 이은주가 인터콥 소속'이라고 표기되었다. #. 또 간 이유 중 하나가 그 자의 설득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다.
- 당시 피랍자의 가족 중에는 교회를 돌며, '기대가 크며 신나고 재미난다.' 하는 간증을 한 사람도 있었다. # 심지어 구조 후에도 열심히 하나님만 찾으면서, 이후에도 이때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피랍되었을 때 짜릿했네 어쩌네 하는 간증을 하고 다녔다니 그야말로 광신이다.
- 일부 극성 개신교인들은 이 사건 이전에도 단기 개신교 선교 여행을 가서 이슬람 모스크에 몰래 올라가서 찬송가를 부르고 예배를 드리는 등 다른 종교의 정서를 무시하는 행동을 일삼고서 자뻑하거나,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을 과자 등으로 유혹하며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한국어 찬송가를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깃들게 했다는 식의 어이없는 짓들을 하고는 싸이월드나 블로그 등에 자랑스럽게 후기를 올려대곤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런 글들이 발굴되면서 개신교 단기 선교 여행에 대한 많은 비판이 일었다.
- 다음 아고라에서 활동하는 네티즌들이 '샘물교회 자성 촉구 국민운동(샘자국)' 이라는 시민단체를 결성하고, 카페를 개설하였다. 샘자국은 2007년 9월 9일 샘물교회 및 개신교계의 자성 촉구, 사죄를 요구하는 집회를 2008년 5월 25일까지 10회에 걸쳐 개최하였다. 샘자국은 후일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한국 종교개혁 시민연대'로 이름을 변경했다.
- 샘물교회 역시 피랍 당시 웃지도 못할 거짓말을 해서 개신교에 대한 호감을 더 떨어뜨렸는데, 바로 "아프가니스탄은 우리들의 친구입니다" 와 "봉사하러 간 사람들입니다"이다. 무엇보다 선교를 봉사로 바꿔서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점은 개신교의 안티를 더 많이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언론에게 선교라는 단어를 봉사로 바꿔달라는 부분에서 로비가 오가는 것도 포착돼서 더더욱 욕을 먹었다. 또 웃긴 것이 샘물교회에서는 아프가니스탄 피랍자들은 선교 활동이 아닌, 봉사활동 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정작 샘물교회의 현수막에는 아프가니스탄 선교팀 구명을 위한 기도회로 되어 있어, 그 사진이 떡하니 봉사 활동이라고 주장하는 중앙일보 기사에 같이 올려져, 말과 사진이 다름으로써 화제가 되었다.
#, @ 이 기사는 대부분 삭제 처리되었고, 이곳에 남은 것이 유일하다.
진보 개신교 신문으로 알려진 <뉴스앤조이>의 이광하 편집장 (목사)은 "선교란 좁은 의미에서 보면 기도와 전도에만 국한시킬 수도 있지만, 흔히 교계에서 갖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선교에는 교인들이 행하는 모든 봉사활동을 다 포함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짧은 기간에 걸쳐 현지에서 봉사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단기 선교'라는 명칭이 붙는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반응은 그저 차가웠다. 게다가 샘물교회 홈페이지에서 '아프간 단기 선교 지원서'와 '2007 샘물 여름단기선교에 관한 질문서'라고 떡하니 쓰인 문건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유서를 쓰고, 아프가니스탄에 선교를 갔다는 것이 루머라며 소송을 한다 난리를 쳤지만, 결국 모든 것이 사실임이 밝혀져버리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이곳 참조. 그래서 베댓도 없다던 유서가 왜 생겨나냐고 비판하는 댓글들이다.
- 인질들이 무사 귀환한 뒤,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는 설교를 통해 '탈레반 납치범들이 여자 성도들을 성폭행하려고 시도했으나, 남자 성도들이 목숨을 걸고 이들을 막아서 여자 성도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발언을 했다. 비록 국가적으로 초대형 사고를 치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정의롭고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워보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남자라 한들, 모두 AK 소총으로 무장한 테러범들에게 맨몸으로 맞서 동료 여성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테러범들이 들고 있는 총은 장난감 총이 아니었고,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이 살해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탈레반은 필요할 경우 실제로 총을 발사하여 사람을 죽이는 데에도 익숙한 자들이었다. 안 그래도 여론이 좋지 않아, 이들의 석방 관련 뉴스에 "여자들은 성폭행을 당했을 것"이라는 댓글이 난무하고, 국내 언론만 보도하지 않았을 뿐 외신을 통해서는 이미 "여자 교인들이 강간을 당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는 상황에서(미국 ABC의 뉴스 보도를 시작으로 퍼졌다) 박은조 목사의 이러한 발언은 오히려 여신도들이 강간을 당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발언으로 해석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 한국 정부는 피랍자들에게 피해 금액의 일부(항공료, 체류비 등 도합 6천만원)에 대한 반환을 하라고 했지만 이들은 반발했다. 이때 한 말이 그 유명한 "불 꺼줬다고 소방관한테 돈 내냐", "놀러 간 사람들도 아닌데, 구상권 청구가 웬 말이냐" 이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화재 피해자들이 정부가 불 지르지 말라고 했는데 질렀냐"고 반응했다. 물론 소방관이 불 꺼줬다고 돈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방화는 범죄 행위에다 민폐다. 이들이 이 사건을 진화된 화재 사건에 빗대겠다고 하면, 주의사항을 명백히 무시하고 어떻게든 불을 지르려고 하고, 그 때문에 예방까지 해줬는데 무슨 본인이 화형 당하러 가는 잔 다르크인 것마냥 오만 비장한 척은 다 하며 불 싸지르고 꺼달라고 난리치는 격이며, 이 사건의 원인인 그들은 방화범이나 다름없다. 그렇긴 해도 결국 교인들 성금을 모아서 내긴 냈다고 한다. # 성금이란 말을 보면 알겠지만, 결국 본인들이 안 내고 남한테 떠넘긴 셈이다. 교회의 탓도 없지 않겠지만... 그런데 알고 보니 저 피랍자들이 출국하기 전 각각 220만 원씩을 교회 측에 재정으로 맡겨두고 출국했다는 게 알려져 사실상 교회 측이 부담하는 비용은 거의 없었던 걸로 알려져 또 한 번 화제가 된다. 또 교회 측이든, 피랍자 본인이든, 정부가 부담한 구조 금액(몸값)에는 한 푼도 보태지 않았다.
- 해당 사건에 대한 변명으로 가득 찬 '아프간의 밀알'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사실 샘물교회 측과 아무 협의도 안한 채, 특정 출판사에서 일방적으로 출판하였다고 한다.
- 이 당시 정부에서 최악의 경우 구출 작전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707 특수임무대대 대원들을 국가정보원 요원들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현지로 급파시켜서 구체적인 인질 구출 작전 준비를 했다. 기사. 결국 한국 정부와 탈레반의 협상이 타결돼서 인질들이 석방되어 무력충돌 없이 마무리되었다. 이는 이후 레인보우 식스 시즈에서 제707특수임무대대 오퍼레이터인 비질의 아프가니스탄 파견 경력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추정된다.
-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을 수행한 일명 '선글라스 맨'이 직접 탈레반 요원과의 협상에 나선 국정원 요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보통은 절대로 얼굴이 노출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 경우는 탈레반 쪽 협상 대표가 "아프간 정부에 쫓기고 있는 우리가 카메라 앞에 노출될 것이니, 당신들도 공개적으로 나와라." 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외교가에서는 한국외대 이란어과 출신이고, 아프가니스탄의 언어인 파슈툰어와 이란의 페르시아어 등에 능통한 중동 전문가이며, 이스라엘에서 대테러 협상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국가정보원의 대테러 요원이며, 협상 타결 후의 언론 인터뷰 때는 탈레반 쪽 협상 대표가 어깨동무까지 하면서 친근감을 표시했을 정도로 협상을 잘 이끌었다고 한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 인물이 국군정보사령부/기무사령부 요원이라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는데, 앞서 언급했듯, 인질 구출 작전 때문에 군이 개입되기 직전 상황까지도 갔었기 때문이다. 다만 국군정보사령부 요원들의 경우에는 이라크, 소말리아 파병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 이전부터 현지에 사전 팀이 들어가는 등 바쁘게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곳이었고, 정보사령부 공작장교들은 기밀도가 국정원 블랙들과 비교해도 훨씬 높기 때문에 저리 언론에 대놓고 나오는건 말이 되지 않았다. 특히 기무사는 국내활동 방첩부대이기 때문에 저런 해외파견 정보활동과는 거리가 멀어서 아예 고려대상으로조차도 적절하지 않은 추측이었다.
-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1년 넘게 주둔한 채수문 중령(대령으로 예편)은 이 사건이 터지자, 아프가니스탄 경험담을 다룬 책자에서 은근히 깠다. 바로 불교 측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의료 봉사를 하며 선교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왜 개신교는 문제를 일으키냐"면서 비난했다. 불교 측에선 탈레반 구역도 가서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일부 비구니가 고집을 부렸으나, 한국군 평화유지군에서 "너무 위험하다"고 경고하자, 고위 승단에 연락을 하더니만, "한국군 측에 걱정 끼쳐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며 물러났던 경험을 이야기를 하면서 "불교 측은 한국 정부나 평화유지군 측 말을 고분고분 듣고 이후 위험지역에 얼씬도 안 하더라. 그런데 개신교는 위험 지역에 가서 순교하면 자랑인지 아는가 보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나 평화유지군 말을 무시한다"면서 매섭게 비판했다.
- 마지막 동의부대인 11진의 주둔 기간 중 일어난 일인데, 해당 부대는 당시 사건이 터지자, 일부 의료진을 투입하는 등 부대 차원에서 모든 지원을 다 했다. 예를 들어, 여성 인질 석방에 대비하여 단 3명밖에 없는 간호장교 중 2명이나 차출하였다. 이에 기존에 하던 아프간인 의료 지원 업무를 남아 있는 동의부대원들만 해야 하기 때문에 업무 과부하가 걸려 43일 동안 탈진 직전까지 갈 정도로 엄청난 고생을 했다. 도저히 병원 운영이 힘들어 중단할지도 검토했지만, 한국 군인들이 아프간인들에게 의료 지원한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는 게 테러범들과 협상에 유리하다고 하여 중단도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부대 차원에서 최악의 고통을 겪은 끝에 샘물 교회 선교단을 귀국시키는 데 일조하였지만, 피랍자들은 돌아가고 나서 단 한 번도 감사하다는 표시를 한 적이 없다. 애초에 이 사실을 알기나 했는지 의문.
- 김형석(1955) 독립기념관장이 한민족복지재단 사무총장 및 회장을 맡았던 2007년, 샘물교회 측에 비자 발급을 도와주어 무리한 선교를 도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8.1.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간다?
2010년 8월, 샘물교회에서 또 정부 몰래 선교사를 파견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2011년 2월에도 또 아프가니스탄에 간다고 한다. 게다가 선교를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여행금지국가에서 해제해달라는 요청까지 해버렸다. 당연하지만, 이 요청은 기각되었다.사실 교회 입장에서는 참 구미가 당기는 아이템일 것이다. 교회도 일종의 장사라고 보면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교도들의 본진에 가서 포교를 하는 것은 가장 돈이 되는 고객(=광신도)들에게 가장 어필할 수 있는 황금 콘텐츠이기 때문에, 보내는 윗대가리들 입장에서는 운 좋게 무사히 다녀오면 그걸로도 '위험한 곳에 선교하러 다녀왔다.'는 일종의 업적이 된다. 이 피랍 사태처럼 일이 터지면 어쩌냐고? 죽은 사람은 순교자라고 치켜 세워주고, 무사히 돌아온 사람은 "하나님의 가호(?)를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하면 그만. 즉 잃을 게 없는 장사다. 실제로 샘물교회는 언론과 국민의 폭풍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피랍 사태 이후로 세를 크게 불렸다.
사실 아프가니스탄 피랍 당시에도 "자기들 멋대로 간 걸 왜 우리가 돈을 주고 빼와야 하나? 협상 불가!"라는 의견과 "간 건 충분히 괘씸하지만 그래도 우리 국민인데 어떻게 내버려 두나. 미워도 자식 새끼인데, 살려놓고 두들겨 패든지 해야 할 것 아닌가" 측으로 여론이 갈렸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들을 괘씸하게 생각한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또 이런 일이 났다가는 구출은 해준다고 해도 이후 대가는 철저하게 치르게 할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2014년 2월 시나이 반도 버스 폭탄테러 사건이 터졌을 때, 여론의 반응은 '또냐?'라며 아주 싸늘했다.
한편, 피해자들의 잘못과 별도로 가해자 측에 대한 감정도 엄청나게 나빠졌다. 아무리 피해자 측에서 안전불감증으로 위험을 자초했다 해도, 사람을 납치하고 감금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짓이 극악무도한 흉악범죄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 안 그래도 이미 9.11 테러와 김선일 피살 사건으로 이슬람권에 대한 감정이 이전보다 훨씬 나빠진 상태였는데,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계기로 피랍자들도 비난을 받았지만 동시에 이슬람교에 대한 평판이 매우 악화됐다. '과격한 종교', '테러를 옹호하고 인질을 잡아 살해하는 게 당연한 종교'라는 극단적인 혐오 발언을 당연하게 여기며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정도의 혐오가 뿌리 박았으며, 아예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결국 개신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의 평판도 이 사건으로 땅에 떨어져 버렸으며, 이런 상황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8.2. 이후
- 사태 와중에 차인표의 글이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아프가니스탄 피랍자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외국인을 도와주는 것에 아니꼬워하는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비판하며, '배형규 목사가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경악스러운 말을 한 것. 때문에 바른 생활 사나이로 알려져있던 차인표가 한동안 욕을 많이 먹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신해철의 "사람의 목숨이 어떤 것보다 최우선. 그러나 피랍자 분들은 돌아오면 고개를 숙이고 반성해야 한다."라는 말과 대조되기도 했다. 이후 차인표는 이 사건에 관련되는 것을 최대한 피하더니, 1년 후 이러한 인터뷰에서 피랍 사건을 계기로 많은 비판을 받은 한국 개신교의 선교 방식에 대해 질문을 받자, "누군가를 대표해서 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다만, 개신교의 선교 방식이 전부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한다. 현재 자신이 후원 중인 양육기구는 선교가 금지된 무슬림 국가에 몰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국가에서 교회를 기점으로 하는 방식이다."라고 입장을 바꿨다.
- 예장통합 총회는 2010년 95회 총회에서 배형규 목사를 순교자로 추서했고, 용인시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 영정이 모셔진 것은 물론이며, 배형규 목사 순교기념비가 세워졌다. 장로회 예장통합에서 순교자를 공식 배출한 것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종교 나름의 논리라는 것이 있지만, 외부인들에게는 황당한 처사로 비칠 뿐이었다. 희생자에 대한 추모비가 아니라 기념비라고 한 이유는 죽어서 천국을 갔으니 기념할 일이라는 것이다. 예장통합 총회에서 순교자로 지정하게 된 것도 제주노회(배형규 목사는 제주 출신)의 요청으로 된 것이다.
배형규 목사 순교 기념비.
- 2010년 7월 23일, 생존자 21명 중 14명이 '피랍 당시 소회와 고백' 을 실은 책을 25일자로 출간한다고 보도되었다. 1명은 8월에 낸다고 한다. 아프간 봉사단 피살 3년-오해와 진실... 가족들 엄청난 몸값 지불 호화여행 사실무근. 아카이브. 기사 제목만 봐도 감이 오겠지만, 저 기사는 개신교 관련 내용을 전문으로 하는 기자가 썼다. 같은 기자의 다른 기사를 한 번 감상해 보자. 물론 이런 기사와 같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카이브) 당연히 불쏘시개감. (미션라이프 기자. 앞 기사를 쓴 바로 그 기자이다. 이 기사를 보면 피랍된 개신교인들을 순교자로 포장해놨다.) 같은 날, 피랍자의 가족들이 엄청난 돈을 마련해서 그 돈으로 피랍자들을 구출했다는 개드립이 나돌았다. #
- 그리고 2010년 7월 27일, 희생자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전쟁과 내란 등으로 위험 지역이었다." 하며, "정부는 왜 그곳에 갔냐고 묻기 전에 여권 사용을 제한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는 것을 막았어야 했다."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위에서도 언급한 개신교 신자도 아닌데, 사망해서 분당샘물교회에도 소송을 걸었던 사망자의 아버지이다. #, 아카이브. 이 때문에 교회가 '돈이 없다'며 보상을 안 해주니까,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정부에 소송을 걸어서 이 사건을 다시 이슈화해 교회 측을 압박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분당샘물교회 정도 되는 규모의 교회가 돈이 없을 가능성은 제로다. 통상 그 정도 규모의 교회라면, 1년 예산이 수십 억 단위는 그냥 넘어가기 때문. 정작 같이 피랍 당하고 살해된 목사의 유족들은 교회의 배상을 받았다. 단, 보상액수에 대한 양측의 의견차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2011년 4월 25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6부(정일영 부장판사)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관련 기사, 판결문, 아카이브.
- 2011년 7월 31일에는 샘물교회 안에 '아프간 순교자 기념관'을 만들고 개관식을 가졌다. 관련 기사기념관 사이트. 2007년 당시 전 국민적 민폐 행각을 기념관까지 만들고, 그 피랍자들이 나와 신앙 간증까지 하는 광경에 사람들은 한 마디로 '한심하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 라고 반응했다. 어떤 이는 '아예 성인으로 시성하고, 순교자 축일(기념일) 날짜까지 지정해달라고 가톨릭 교황청한테 요청하지 그러냐?'며 비아냥거렸다. 가톨릭 교황청에서는 복자 혹은 성인으로 시복, 시성할 경우 곧바로 축일 날짜까지 지정해준다.
- 아프가니스탄 순교자 기념관을 개관하는 동시에 분당샘물교회는 순교 5주기를 기념해 <별, 순례의 길을 가다>라는 추모집도 발간했다.
- 당시 피랍자 중 한명이었던 차혜진은 2011년 기독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프칸 피랍보다 귀국후 한국에서의 박해가 더 상처였다”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은 바 있다. # 참고로 차혜진은 이후 남장로교 역사를 주제로 인터뷰를 하러 만났던 인요한[10]과 인연이 되어 혼인했고 딸을 낳았다. #
- 2013년 12월, 한국위기관리재단이라는 개신교 연관단체의 본 사건에 대한 종합보고서를 발간하며 보도자료를 발표했는데, 이 내용이 또 가관이다. 참조, 아카이브. '언론의 부정확한 보도', '일부 네티즌의 악의적 정보 조작으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었다'를 시작으로, '위기 상황 인식과 위기관리 역량이 결여된 현장 코디와 동행한 점'이 최악의 조건을 구성하는 한 요인으로 규정했다.
- 2014년에도 인터넷 블로그에서 이 사건과 관련해서 상습적인 신고를 한 것이 확인되었다. 네티즌 게시물 관련해서 신고를 때려서 포스팅을 블라인드를 시키게 하는 듯하다. 바로 위 사진의 건만으로도 알 수 있다.
- 이 사건이 벌어진 지, [age(2007-07-13)]년이 지난 지금도 샘물교회는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려는 듯, 자신들과 이 사건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담겨있는 블로그/게시물, 심지어는 샘물교회에 대한 비판 없이 단순히 사건을 서술한 글, 관련 방송을 캡쳐한 글(아카이브)까지도 명예훼손을 이유로 들며, 무차별로 게시물 중단 요청을 하고 있다. 때문에 잊고 있던 사건을 새삼 되돌아보게 되는 사람들도 많다. 분노하여 게시물을 재게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도 깨알같이 게시물 중단 신청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해당 사건에 대한 게시글은 블로거에선 아무런 영향이 없는 듯하다. 블로거는 구글이 운영하며, 게시중단 요청은 해외 업체 상대로는 소용이 없다. 해외 업체는 한국 법을 따를 의무가 없기 때문. 2007년에 나온 조선일보 관련 사설을 소개한 게시물마저도 모조리 신고하는 반면, 정작 링크된 조선일보 사설은 아직도 멀쩡한 것을 보면, 다국적 기업과 대형 언론사를 상대로는 아무 짓도 못 하는 모양이다.
- 이 사건을 미화하는 것으로 보이는 영화가 2014년 4월 17일 개봉되었다. 제목은 시선. 참조, 아카이브. 이 영화의 연출자는 원로 영화 감독인 이장호 감독이다. 물론, 이장호 감독은 이전에도 <낮은 데로 임하소서> 등 여러 편의 개신교 관련 영화를 제작한 바가 있지만, 그가 이런 개신교계의 흑역사를 미화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영화의 연출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대표작이자, 70년대 한국 영화의 명작으로 꼽히는 <별들의 고향>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모로 씁쓸할 노릇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로 으르렁대는 웹 커뮤니티들 모두가 하나 되어 까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이 영화 촬영 중 풍토병에 감염되어 베테랑 배우 박용식이 2013년 8월 사망하는 사건까지 생겼다. 장소는 동남아로 각색한 듯하다. 캄보디아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이렇게 반응이 안 좋은 영화가 평점이 폭풍 상승했지만 이런 알바 풀기와 다르게 흥행은 전국 1만 수준으로 망했다.
- 2021년 2월 9일 MBC PD수첩에서 인터콥에 관해 <목숨을 건 선교사들> 편을 방송했는데, 후반부에 이 사건을 다뤘다. 위에도 나와있듯이 인터콥은 "자기들과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지만, 샘물교회 관계자와 당시 박은조 담임목사는 "현지 안내를 맡았던 선교사가 인터콥에서 훈련을 받았다"며, "해외 파송을 교회에서 직접 보낼 수 없어, 중간 단체가 껴야 한다"며 인터콥의 개입을 인정했다. 심지어 피랍인원 중에도 인터콥 훈련생 소속이 몇몇 있었는데, 잡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인터뷰에 응한 양국주 선교사는 "최바울은 해외 선교에서의 핍박, 어러움을 극복하는 게 신앙이라 여긴다"며, "그것을 즐기는 것 같다"고 힐난했다. 끝부분엔 이 사태의 두 번째 희생자인 심성민의 아버지가 인터뷰에 응했다.(방송에서는 심OO씨로 언급되며, 아버지도 실명이 나오지 않는다.) 사건 이후, 5년간 부부가 죽은 듯이 살아가야만 했고, 아내는 후각, 청각 등에도 어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도 "내 자식이라도 나라에서 나가지 말라고 한 걸 나간 거니까 잘했다고는 못한다"며, 사건 이후 매일 일기를 쓰며 슬픔을 달랜다고 한다. 아래는 그 일기의 일부.교회는 어찌하여 안전이 검증되지 않은 전쟁터에 그 많은 꽃다운 청춘의 인생들을 선교와 봉사의 미명 아래 보내에서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죽음으로 돌아오게 하여 그 후에 따르는 수많은 문제점과 부조화 등을 어떻게 치유, 보상할 것인가 엄히 묻노니 교회와 그 책임자는 여기에서 파생된 모든 일들에 대하여 응분의 책임을 지고 보상토록 해야 한다.보내어진 그네들은 약간의 그곳 언어들이나 풍습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진 모르나 안전에 대비한 필요한 교육들은 없어 제일 중요한 과제를 빠뜨렸다.
- 2021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잡고 한국에 협력을 요청한 와중에, 연합뉴스와 문자메시지 등을 통한 인터뷰에서 파병 한국군 살해와 샘물교회 피랍사건에 대해 묻자, "자결권에 따라 우리 권리를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외국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고 주장하며, "이제 과거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를 바라봐야 하는 게 시급한 문제"라고 얼버무렸다. #
- 미국은 이 사태에 대해 한국 정부가 탈레반과 협상했다는 것에 굉장히 실망했다고 한다. # 하지만 10년도 안 가, 미국이 그 아프가니스탄에서 물러나려고 하면서 차츰 탈레반이랑 협상하던 탓에 이젠 미국에서도 잊혀진 일이다. 결국 2021년 미국은 20년 동안 엄청난 돈과 인력을 들여 헛된 전쟁을 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전군 철수했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문서 참고.
- Why? 시리즈 <현대사회의 변화> 편에서는 해당 피랍사건에 대해 탈레반이 외부 세력의 개입에 불만을 품었다고 설명하지만, 샘물교회의 불법 입국이나 기념관 건립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 2022년 3월 6일, 이근 우크라이나 의용군 참전 논란이 터지면서 이 사건이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 2023년 1월 18일에 개봉한 영화 <교섭>은 이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다.
[1] 당시에는 여행금지국가 제도가 없었다.[2] 2017년 교통사고로 사망[3] 후일 인요한과 결혼하게 된다. 차혜진이 인요한을 인터뷰하러 왔을 때 인연을 맺어 결혼했으며 2014년 딸을 낳았다.[4] 해당 기자는 당연히 호위 인원을 동반하여 촬영였다.[5] 정확하게는 대한항공의 프레스티지 슬리퍼 또는 플러스로 비즈니스 좌석이다.[6] 현재 대한민국의 여행금지 국가는 전쟁국가, 중동의 테러단체가 활동하는 국가, 사실상 국가 기능이 정지된 국가인데, 상술한 두 이유인 국가에 취재 이외의 내용으로 입국한다면 전쟁에 참여, 또는 테러단체에 참여 등 한국의 대외 외교에 큰 문제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행위이며, 그 행위에 따라 살인, 전쟁범죄 가담 등을 통해 다른 법률도 위반할 수 있다.[7] 본명 : 박병출[8] 당시 탈레반에서 초콜릿과 과일 등 아프간에서 구하기 어려운 다과류를 인질들에 제공하고 있다고 선전전을 해서 디씨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서도 좀 속아넘어가는 분위기가 있었다.[9] 정확히는 자기가 가서 때려잡고 온다는 식의 발언에 가깝긴 하다.[10] 인요한은 재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