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29대 황제 필리푸스 아라부스 PHILIPPVS ARAB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Marcus Julius Philippus) |
출생 | 204년 |
로마 제국 필리포폴리스 | |
사망 | 249년 9월 24일 (향년 45세) |
로마 제국 베로나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44년 2월 ~ 249년 9월 (5년) | |
전임자 | 고르디아누스 3세 |
후임자 | 데키우스 |
부모 | 아버지 : 율리우스 마리누스 |
배우자 | 마르키아 오타킬리아 세베라 |
자녀 | 필리푸스 2세, 율리아 세베라(혹은 세베리나) 외 아들 1명(추정)[1] |
종교 | 로마 다신교(또는 초기 기독교)(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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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제29대 황제. 시리아 베두인족 출신으로, 로마가 제정으로 넘어간 이후로 처음으로 로마 황제가 된 아랍인이다. 건국 천년제를 연 로마 황제로 5년간의 짧은 치세 동안 3세기 중 가장 안정적으로 통치한 점이 높게 평가받는다. 허나 고대 로마의 종교와 관습을 중요시한 모습에도, 사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왜냐하면 의문이 가득한 제위 계승 과정,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 아래에서 티메시테우스와 함께 벌인 정치공작 등으로 이미지가 나빴던데다, 유능한 행정능력과 별개로 제 식구 감싸기와 가문 신격화 조치, 갈라치기식 정치행보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정적이 늘어났기 때문이다.필리푸스의 코고노멘 아라부스(Arabus)는 단순히 그가 아랍 출신이라는 단순한 뜻이다. 영어명은 아예 Philip the Arab(아랍인 필립).
242년 티메시테우스가 사위인 고르디아누스 3세를 대동해 벌인 페르시아 원정에 참가했다가 243년 티메시테우스가 죽자 후임 근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병사들을 선동해 장인 티메시테우스의 죽음 후 낙담한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암살했다는 설과 고르디아누스 3세가 전사하자 군대의 추대를 받고 황제로 즉위했다는 설로 나뉜다. 이후 샤푸르 1세에게 매우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고 전쟁을 끝냈다. 로마로 돌아온 뒤 로마 건국 천년제를 치렀지만, 248년부터 모이시아, 판노니아를 시작으로 군대 병사들이 충성을 거부하는 일련의 항명 사건을 시작으로 고트족의 침공 등으로 민심까지 이반하게 된다. 이에 그는 원로원 중진 의원 데키우스를 보내 반란 진압을 명하는데, 도리어 토벌군이 249년 데키우스를 옹립하고 필리푸스를 불신임해버린다. 따라서 내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공동황제인 아들 필리푸스 2세와 함께 베로나에서 데키우스군에게 패배하고 아들과 함께 살해(혹은 자살)당한다. 데키우스가 원로원에게 정식 황제로 임명된 직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지고 그 남자 일족은 멸문당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필리푸스는 서기 204년 무렵 시리아 트라코나티 지역에서 현지 시민인 율리우스 마리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부모 모두 기사계급이었다고 하며, 그의 선조는 시리아 베두인 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집안은 로마가 제정으로 넘어간 후 20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선 완전히 로마화하여 지역 사회에서 명망높은 가문이었다. 그가 아주 보잘 것 없는 신분이라는 기록이 몇 개 있지만, 이 인물을 폄하하기 위한 목적이 명확히 보인 탓에 현대 역사학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필리푸스는 234년 로마 총독 오타킬리우스 세베루스[2]의 딸 마르키아 오타킬리아 세베라와 결혼했는데, 그가 비천한 신분이었다면 이 결혼이 성사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3]
한편 4세기 작성된 고대 기록에서는 형제로 율리우스 프리스쿠스가 있었고 그가 이부동생이라고 주장되지만, 현대 학자들은 고르디아누스 부자, 푸피에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타키투스 등과 마찬가지로 명확하게 조작된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현대 연구들을 통해 밝혀진 바로는 프리스쿠스는 동복형이라고 한다.
친형 프리스쿠스와 함께 시리아 일대의 토호 집안 출신답게, 전형적인 로마식 교육을 받고 성장했으며, 프리스쿠스가 먼저 로마로 건너가 관료생활을 하면서 로마정계에서 경력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세한 이야기는 그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알 수는 없다. 다만, 그 출신민족과 성씨가 시리아 에메사 일대의 태양신 숭배 토착왕가 에메사 가문과 같고, 고향 근처가 에메사인 까닭에 세베루스 왕조의 시리아 여제들과 일찍부터 연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 필리푸스는 이들의 비호 아래 쉽게 프라이토리아니 장교로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최근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율리우스 프리스쿠스가 이 일대에서 고도의 군사업무를 담당했고, 필리푸스 역시 형과 비슷한 업무를 해온데다 티메시테우스의 최측근인 까닭에 의외로 세베루스 왕조에서 끗발 날리던 에메사 왕가의 시리아 여제들 인사들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자세한 초기 경력은 불확실하지만, 형 프리스쿠스가 241년 임페리움을 가진 근위대장이 된, 실권자 티메시테우스의 오른팔이었고, 프리스쿠스가 1년 뒤인 242년 동료 근위대장에 취임한 까닭에 필리푸스 역시 이 무렵부터 내각 일원으로 활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고대기록과 증거상 필리푸스는 티메시테우스 최측근인 형과 함께 프라이토리아니를 통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티메시테우스와 프리스쿠스가 근위대장이 된 이후 필리푸스 장인, 처남 등도 승승장구한 것을 봤을 때 필리푸스는 황제 자문회의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 혹은 황제 자문회의 소속 위원 중 한 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찬탈 또는 옹립
필리푸스는 군무에 오른 이래 출세를 거듭하다가 고르디아누스 3세 치하에서 중요한 직무를 맡고, 근위대장까지 오른 형 프리스쿠스 덕분에 승승장구했다. 학자들은 이를 통해 프리스쿠스와 필리푸스 형제가 동향 출신인 티메시테우스 측근이었으며 고르디아누스 3세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음을 추측하는데, 어떤 이들은 두 사람이 사실상 섭정인 티메시테우스 밑에서 주요 실무를 담당한 주요 고위관료라고 확언한다.243년 고르디아누스 3세의 장인 티메시테우스가 돌연사했다. 일각에선 필리푸스 형제에게 독살됐을 것이라고 하나,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풍토병인 이질로 사망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티메시테우스의 오른팔, 왼팔 노릇을 하며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그들이, 자신들을 온전히 손아귀에 집어 넣고 통제한 티메시테우스를 죽일 이유도 없고, 근위대 역시 자신들의 보호막인 티메시테우스 제거 요청을 따를 확률이 매우 희박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티메시테우스는 매우 영리한데다 사교성이 대단했다. 그는 주변을 잘 활용할 줄 알고, 부하들을 잘 챙겨줬으며, 영악하고 사람을 다루는 재주가 상당히 뛰어났다. 또 티메시테우스는 동향이라는 이유로 실권을 쥐자마자 형제를 제국 권력의 최정점으로 이끌어준 그들의 은인이었다. 즉, 필리푸스 형제가 사람을 고용해 티메시테우스를 죽일 이유는 전혀 없었다.
멀쩡하던 장인이 어이없게 죽자, 어린 황제는 크게 낙담했다. 하지만 황제와 로마는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었고, 군심을 다독여야 했다. 이에 근위대장 프리스쿠스 등은 티메시테우스의 후임으로 필리푸스를 추천했다. 이때 그들은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임명하면서, 고르디아누스 가문 출신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의 또 다른 외삼촌[4] 혹은 모후의 사촌오빠로 추정되는 원로원 의원 마이키우스 고르디아누스도 근위대장으로 지명토록 했다. 이는 프리스쿠스와 필리푸스 모두 티메시테우스 사후, 고르디아누스 3세를 돕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조언 직후 소년황제와 프리스쿠스는 황제의 친척 마이키우스 고르디아누스를 새로운 근위대장에 지명했고, 그에게 상당한 권한을 줬다.
마이키우스 고르디아누스가 또 다른 근위대장으로 임명되어 실권을 가졌어도 불안요소가 많았다. 특히, 새롭게 근위대장이 된 필리푸스의 존재는 고르디아누스 3세 입장에선 분명 불안 요소가 많았다. 필리푸스는 오랫동안 프라이토리아니를 관리한데다 티메시테우스 곁에서 온갖 정치공작을 벌인 사람, 그것도 오랜 기간 동안 고도의 군사, 공작 업무 등을 맡은 근위대 장교 출신이었다. 즉, 티메시테우스처럼 그 능력이 출중하지 않는 이상, 소년황제가 믿을 수 있는 최측근이라고한들 다루기 무척 어려운 존재였다. 따라서 티메시테우스의 뒤를 이어 필리푸스가 신임 근위대장이 된 것은, 당연히 고르디아누스 3세 사후 필리푸스가 찬탈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했다.
믿을 수 없는 고대기록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필리푸스는 고르디아누스가 장인이 갑작스럽게 죽은 후 낙담한 나머지 아무것도 못하는 틈을 타 병사들을 선동했고, 244년 2월 11일에 고르디아누스를 암살하고 황위에 올랐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기술한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배경에서 제국의 고위직까지 올랐는데, 이 사실은 과감하면서도 유능한 지도자였음을 입증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과감함은 제위를 노리는 쪽으로 발휘되었고, 그의 능력은 관대한 황제를 보필하는 것이 아니라 축출하는 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최근 교전국 페르시아 측의 기록 등이 주목받고 새롭게 연구되면서, 필리푸스가 로마 고대기록 주장처럼 어린 황제를 암살하고 찬탈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을 잃고 있다. 필리푸스 형제가 선동을 통해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암살했다는 이야기는 너무 끼워맞추기 식일 뿐만 아니라, 망연자실해 심신미약 상태의 황제가 갑자기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며 키르케시움 근처 진지에서 병사들에게 "나와 필리푸스 둘 중 하나를 선택해달라"고 연설했다는 이야기는, 황제나 필리푸스 형제가 미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정도로 이상한 이야기가 많다는 평.
사산왕조 페르시아 측의 주장과 로마 측의 주장을 합친 새로운 주장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 사후 멘붕 상태였지만 마냥 손을 놓지만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군 수뇌부들과 함께 군대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244년 2월 예정대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 진격은 페르시아군의 반격을 받아 혼전 중 패배한다. 이어 그들은 크테시폰 공방전을 펼쳤는데, 페르시아 측의 기록들에 따르면, 사산조 군대와 크테시폰을 놓고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가 로마군은 대패하고 고르디아누스 3세는 낙마 후 전사했다. 따라서 로마군은 패퇴했고, 고르디아누스 3세는 큰 상처를 입으며 전사했다. 이후 로마군은 키르케시움 근처 진지에서 동방 상황에 능통하고 군을 안정적으로 통제한, 현직 근위대장 필리푸스를 지지해 그를 황제로 옹립한다.
분명한 사실은 고르디아누스 3세는 244년 2월 두 번째 전투를 전후로 완전히 근위대와 군단병 모두에게 신뢰를 잃어버렸고, 당시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행보가 두 주장에서 불분명할 정도로 갈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케펜호펜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의 경우, 교전국 페르시아의 기록 등을 근거로 고르디아누스 3세가 필리푸스 아라부스 등의 음모로 암살되었다고 단정짓지 않고 있는데, 두번째 주장은 이전까지의 주장보다 의문점이 덜 하고, 양측의 기록을 토대로 구성됐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고르디아누스 3세의 죽음 못지 않게 이후의 사태 수습 방향도 두 가지 버전이 전해진다. 첫 주장의 연장선이기도 한 첫번째 버전에 따르면, 황제를 암살한 직후 원정 중인 병사들은 후임 황제로 당시 근위대장이던 필리푸스를 지지했고, 필리푸스는 즉위 후 그곳에 고르디아누스 3세의 시신을 묻고 그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또 다른 버전에 따르면, 로마군을 이끈 필리푸스 등이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자상하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인기가 있던 고르디아누스 3세의 평판과 새 황제의 정통성 확보 등을 의식해, 죽은 황제의 시신을 수습한 뒤 로마로 옮기고 신격화시켰다고 한다.
2.3. 샤푸르 1세와 강화를 체결하다
필리푸스는 자신이 황제로 인정받으려면 로마로 돌아가서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필리푸스는 로마군이 점령한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돌려주고 아르메니아가 페르시아의 영향권 내에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그는 금화 50만 데나리우스를 페르시아에게 배상금 명목으로 바치는 데 동의했다. 그는 이 배상금 지불을 위해 동방 속주에 막대한 세금을 물었고, 이로 인해 민심은 요동쳤고 병사들은 다 이겨가던 전쟁을 중단시킨 데다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물론 필리푸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 고르디아누스 황제 사망 후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고, 어서 로마로 돌아가서 황제로서 입지를 굳혀야 했으니까.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맺고 동방 속주에 가혹한 세금을 매겨 민심을 동요케 한 것은 제국과 그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중대한 실책이었다.
2.4. 로마 건국 천년제
필리푸스는 형 프리스쿠스를 동방 총독으로 남기고 처남 세베리아누스를 모이시아와 마케도니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244년 늦여름 로마에 도착했고 원로원으로부터 황제 즉위를 승인받았다. 필리푸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고 아내 오타킬리아 세베라를 황후로 지명했으며 아버지 마리누스를 신격화했다. 필리푸스는 자신이 시리아 출신이어도 혈통이 아라비아 출신인 데다 로마에 남은 원로원과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에게 찬탈의 의심을 받고 황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불안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원로원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자신의 고향에 자신과 가족의 모습을 담은 동상들을 세웠다. 또한 그는 군대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막대한 보너스를 군대에 하사했다. 이 때문에 재정이 휘청거리자, 그는 각 속주에 막대한 세금을 물렸고 다뉴브 강 이북의 게르만족에게 보내던 공납금 지급을 중단했다.245년, 필리푸스는 카르피족이 다뉴브 강을 건너 모이시아를 약탈하고 발칸반도를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이끌고 발칸 반도로 진입했다. 그는 필리포폴리스에 본부를 세운 후 다뉴브 강을 가로질러 카르피족을 밀어내 다키아로 돌려보냈다. 한편 동방에서는 페르시아가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면서 다시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이렇듯 외적의 침입이 심상치 않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로마로 돌아와서 248년 4월 21일 로마 건국 천년제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기념 동전이 대량으로 발행되었고 온갖 연극과 행사가 개최되었다. 당대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검투사 천 명이 콜로세움에서 관객들을 위해 희생되었고 표범, 하마, 사자, 코뿔소 등 수백마리의 동물이 죽었다고 한다.
2.5. 몰락
천년제, 세습제 구축 속 축제 분위기 속에서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이미 몰락 중이었다. 3일에 걸친 희생제로 수백마리 동물을 밤낮으로 도살하던 중에 몰락의 길이 열렸다.필리푸스는 245년 티메시테우스가 확립한 안정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본인의 완벽한 통치 체제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가 무리하게 페르시아 수도까지 기병대를 이끌고 들어갔다가 황제가 전사한 패전을 정리해야만 했다. 필리푸스가 보조금 지급 중단 결정을 하고, 샤푸르 1세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엄청난 배상금을 동부 속주들에게서 징세로 끌어 모은 것은 민심을 동요케 했다.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됐는데, 필리푸스는 천년제 전에 형, 처남을 모두 제국 동방을 중심으로 부임시키면서 세습제 포석을 깔면서도, 끊임없이 다뉴브 강 이남의 발칸 반도가 위협받고 있음을 깔끔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245년 확립된 안정을 티메시테우스 생전에 함께 구축한 뒤, 본인 스스로는 군사적 승리 후 246년 카르피쿠스 막시무스라는 거창한 칭호의 영광을 취했지만, 정작 다키아 문제 등 발목 잡힐 위험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 사이, 아르메니아 왕국에서 페르시아의 샤한샤 샤푸르 1세의 권위를 인정하기 않겠다고 하면서 전쟁이 터졌고, 이는 필리푸스 시대 아래에서 과중된 세금에 시달린 동부 속주, 다뉴브 강 이남의 발칸 반도 일대 속주들의 민심을 계속 흔들었다.
2.5.1. 파카티아누스의 반란
248년 말, 카르피족과의 계속된 전쟁 속에서 전쟁 결과는 필리푸스 아라부스 체제에 의심과 불만이 커지고 있는 발칸반도 일대의 핵심 방어선 일대를 뒤흔들었다. 공교롭게도 여기에서 큰 불만을 쏟아낸 곳은 항명이 터질 때마다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증폭이 커진 판노니아와 모이시아 일대 군단들이었다. 이들 군단들은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로마군 장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리누스 파카티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다행히 이 반란은 손쉽게 진압됐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로마군 중 다뉴브 강 방어선을 지킨 핵심 군단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혼란이 커지자, 호시탐탐 남하를 생각한 국경 밖의 강력한 게르만족들이 판노니아를 들이쳤다. 콰디족이 이때 판노니아를 쳐들어왔는데, 동시에 고트족이 다뉴브 강을 넘어 다누비우스 방어선이라고 부르는 로마군의 핵심 방어선에서 일제히 쏟아져 내려 왔다. 고트족은 국경을 넘자마자 모이시아,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2.5.2. 데키우스의 로마 진군
248년 말, 고트족과 콰디족은 다뉴브 강을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략했고 마르시아노폴리스를 포위했다. 또한 동방에서는 필리푸스가 부과한 막대한 세금에 반발한 시민들이 마르쿠스 요타피아누스의 지휘에 따라 폭동을 일으켰으며, 다뉴브 강변 로마군도 파카티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필리푸스는 일단 발칸 반도 문제부터 수습하기로 하고 다뉴브 방면군 사령관 데키우스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이런 상황 속에서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그 일가라면 속으로 부글부글 끓던 제국 동부 지방이 더 크게 들고 일어났다. 요타피아누스의 지휘보다 문제가 커진 것은 각 동부 지방에서 과도한 과세에 대응하여, 또 다른 봉기를 계속 일으킨 일이었다. 마르쿠스 실반나쿠스, 스폰시아누스가 반란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이어 전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다누비우스 방어선 일대 군단, 관료들이 파카티아누스의 반란을 진압한 데키우스를 249년 봄 황제로 선포했다. 조시무스의 기록에서 드러나듯이 데키우스는 황제 자리에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병사, 관료, 주민들이 보라색 옷을 입히면서 건널 수 없게 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해졌다. 이에 데키우스는 황제로 선포되자, 모든 것을 수락할 수 밖에 없게 됐다. 그는 자신을 옹립한 다누비우스 방어선 군단들 중 방어 병력을 제외한 부대를 꾸려 곧바로 로마 진군을 단행했다.
2.6. 최후
데키우스는 249년 봄 로마로 진군했다. 이때 이집트에서 폭동이 일어나 로마-이집트 간 밀 공급에 차질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수도 로마에서는 밀 공급량이 줄어들었고, 주화의 가치가 떨어져 인플레이션 폭등으로 그 여파가 심각해졌다. 이렇게 되자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내편, 네편을 갈라 치며 균형 감각 속에서 위기를 돌파한 필리푸스는 어쩔 줄 몰라했다. 원로원은 연이은 보고로 충격에 빠졌고, 재정 상태가 악화되는 가운데에서 필리푸스가 어떤 해결책도 내지 못하고, 데키우스와의 타협 문제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자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니 원로원 안은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필리푸스 아라부스 두 황제 아래에서 견제받고 소외된 비(非) 동방 출신 원로원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필리푸스는 원로원이 자신을 대놓고 탄핵하지 않았음에도, 황제 자리에서 퇴위하거나 데키우스와 내전을 벌여야 되는 양자택일 상황에 놓였다. 그렇지만 퇴위를 한다는 것은 선택지에서 좋은 결정이 아니었다. 이에 필리푸스는 249년 여름 어려운 상황에서도 군대를 가까스로 모아 데키우스의 군대와 맞서 싸우기로 했다. 그렇지만 양군이 맞붙었을 때, 필리푸스는 데키우스에게 패배했다. 필리푸스는 휘하 병력을 너무 쉽게 잃었고, 데키우스는 필리푸스 군을 압도했다.
패배 속에서 그해 9월,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재기의 기회조차 꿈꾸지 못한 채 부하들에게 버림받고 절망에 빠진 채 자살했다. 필리푸스가 전투 중 불신임을 받고 암살되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필리푸스는 데키우스와 맞붙은 때를 전후로 어이없게 죽었다. 공동황제이자 후계자인 장남 필리푸스 2세 역시 아버지가 자살 혹은 암살된 직후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 손에 제거됐다.
데키우스가 승리하고, 필리푸스 부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원로원은 데키우스의 즉위를 승인하고 필리푸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 이후,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형, 처남은 흔적도 없이 이후 로마의 모든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렇지만 그의 아내 마르키아 오타킬리아 세베라는 살해되지 않았다.
3. 평가
의문스러운 즉위, 굴욕적인 평화협상 후 벌인 쇼맨쉽, 끝없는 갈라치기와 갈등 유발, 반란과 패전, 기록말살형 등을 이유로 과거에는 찬탈자, 겁쟁이 등으로 평가받은 황제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르러 3세기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재평가받고 있는 군주다.필리푸스가 재평가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5년여의 재위기간이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고 제국의 불안한 점을 한계가 명확한 원수정 체제 아래에서 유지한 부분이 거론된다. 또 그가 후임자 데키우스와 달리, 기독교를 로마의 일부로 포용하면서도 로마의 전통과 로마인이라는 자부심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한 부분도 그가 재평가받는 이유다.
하지만 이런 재평가와 별개로 필리푸스의 지나친 포용정책 외에는 꽤나 무능했고 비열한 구석이 많이 있었다. 필리푸스는 행정적으로 유능했는데 로마 전통과 관습 회복을 주장하면서, 원로원과 로마 지식인 사회를 끝없이 "내편, 네편" 으로 이분화시켜 갈등을 황제가 유발시키고 여론의 불만은 빵과 서커스 제공으로 잠재우면서 공작정치를 벌이는 등 비겁한 통치술을 많이 사용했다. 또 페르시아와의 굴욕 협상 이후 벌인 지나친 증세와 동방에서 벌인 무자비한 착취에 가까운 세금징수 방식, 다뉴브 강 일대의 게르만족과의 일방적인 협상 파기로 벌어진 서방 일대에서의 위기 고조, 고향에서의 대대적인 개인 신격화 조치와 가족 신격화 조치 등도 문제가 많았다. 하여 그는 원로원과 로마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몰락하고,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이유가 됐다.
4. 여담
- 후임 황제인 발레리아누스가 샤푸르 1세에 의해 노획당했고 샤푸르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 황제가 말을 타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디딤돌이 되어주는 형태의 부조를 많이 새겼다. 그런데 아라부스 역시 호구스런 강화를 맺은 업적(?)으로 발레리아누스랑 같이 무릎을 꿇고 디딤돌이 된 모습으로 부조에 들어가게 되었다.
- 그의 치세 중에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중지되었고, 4세기의 기독교 역사학자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필리푸스는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콘스탄티누스 1세보다 앞선 최초의 기독교도 로마황제가 된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이 기록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일부 학자들은 에우세비우스가 필리푸스를 기독교 신자로 간주한 것은 필리푸스가 다른 로마 황제들과는 달리 기독교도들에게 관대했기 때문이라고 본다.[5]
- 고향 인근에 세베루스 왕조의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가 속한 에메사 왕가의 본거지가 있고, 사용한 노멘(성씨) 역시 율리우스인 까닭에 에메사 왕가의 먼 후손이라는 의견도 종종 있다. 하지만 필리푸스가 민족, 출신성씨가 맞다고 해도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자매가 속한 에메사의 율리우스 가문 사람이 맞는지는 확실치 않다.
[1] 247년생인 차남 퀸투스 필리푸스 세베루스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2] 혹은 세베리아누스[3] 필리푸스가 결혼할 당시, 그의 계급은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였고 맡았던 임무 역시 비천한 신분이라면 오를 수 없는 행정 분야와 고도의 군사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4] 고르디아누스 2세의 남자 형제[5] 다만, 이와는 별개로,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살았던 레반트 지역의 아랍인 정주 농경민들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던 건 사실이다. 무함마드의 등장 이전까지 아랍 다신교를 믿은 이들은 아랍인 유목민인 베두인들이었고, 이들은 레반트 지역 아랍인들과는 달리 아라비아 반도의 내륙 지역에 주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