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 국민훈장 수훈자 | |
<colbgcolor=#EEC008><colcolor=#00A99A> 연도 | <colbgcolor=#00A99A><colcolor=#EEC008> 2007년 | |
이름 | 장훈 | |
분야 | 스포츠 | |
사유 | 재외동포 사회 발전 기여 | |
국민훈장무궁화장(1등급) |
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 |
<colbgcolor=#EF8B01><colcolor=#F8D1A6> 연도 | <colbgcolor=#F8D1A6><colcolor=#EF8B01> 1980년 |
이름 | 장훈 |
분야 | 스포츠 |
사유 |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 |
체육훈장맹호장(2등급)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000> |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4번 타자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f49c00>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나가사와 후지오 (永沢富士雄) | 이토 켄타로 (伊藤健太郎) | 나카지마 하루야스 (中島治康) | 츠츠이 오사무 (筒井修) | 마에카와 하치로 (前川八郎) | |
1936夏 | 1936夏-1943 | 1936夏-1948 | 1936秋 | 1937秋 | |
<rowcolor=#f49c00>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미즈하라 시게루 (水原茂) | 카와카미 테츠하루 (川上哲治) | 아오타 노보루 (青田昇) | 키구레 리쿠조 (木暮力三) | 나카무라 마사미 (中村政美) | |
1937秋 | 1939-1958 | 1943-1952 | 1943 | 1943-1944 | |
<rowcolor=#f49c00>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스다 히로시 (須田博) | 콘도 사다오 (近藤貞雄) | 카와바타 히로시 (川畑博) | 쿠로사와 토시오 (黒沢俊夫) | 코마츠바라 히로키 (小松原博喜) | |
1944 | 1944 | 1944 | 1946 | 1947 | |
<rowcolor=#f49c00>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히라야마 키쿠지 (平山菊二) | 우노 미츠오 (宇野光雄) | 미나미무라 후카시 (南村不可止) | 테즈카 아키하루 (手塚明治) | 미야모토 토시오 (宮本敏雄) | |
1948 | 1951-1953 | 1951-1952 | 1953-1954 | 1955-1961 | |
<rowcolor=#f49c00>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
히가사 카즈오 (樋笠一夫) | 후지오 시게루 (藤尾茂) | 카시와에다 분지 (柏枝文治) | 요나미네 카나메 (与那嶺要) | 나가시마 시게오 (長嶋茂雄) | |
1955 | 1955-1961 | 1955 | 1958 | 1958-1974 | |
<rowcolor=#f49c00>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
사카자키 카즈히코 (坂崎一彦) | 쿠니마츠 아키라 (国松彰) | 오 사다하루 (王貞治) | 이케자와 요시유키 (池沢義行) | 모리 마사아키 (森昌彦) | |
1959-1962 | 1960-1968 | 1962-1980 | 1963 | 1964-1965 | |
<rowcolor=#f49c00> 제31대 | 제32대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
아이바 요시히로 (相羽欣厚) | 요시다 카츠토요 (吉田勝豊) | 타나카 쿠스오 (田中久寿男) | 타카쿠라 테루유키 (高倉照幸) | 모리나가 카츠야 (森永勝也) | |
1965 | 1965 | 1967 | 1967 | 1967 | |
<rowcolor=#f49c00> 제36대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시바타 이사오 (柴田勲) | 스에츠구 토시미츠 (末次利光) | 야나기다 마사히로 (柳田真宏) | 장훈 (張勳) | 아와구치 켄지 (淡口憲治) | |
1969 | 1970-1975 | 1974 | 1976-1979 | 1976 | |
<rowcolor=#f49c00>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제45대 | |
데이비 존슨 (ジョンソン) | 존 시핀 (シピン) | 야마모토 코지 | 로이 화이트 (ホワイト) | 나카하타 키요시 (中畑清) | |
1976 | 1978-1979 | 1979-1980 | 1980-1982 | 1981-1988 | |
<rowcolor=#f49c00> 제46대 | 제47대 | 제48대 | 제49대 | 제50대 | |
게리 토마슨 (トマソン) | 마츠바라 마코토 (松原誠) | 하라 타츠노리 (原辰徳) | 레지 스미스 (スミス) | 워렌 크로마티 (クロマティ) | |
1981 | 1981 | 1982-1995 | 1983-1984 | 1984-1990 | |
<rowcolor=#f49c00> 제51대 | 제52대 | 제53대 | 제54대 | 제55대 | |
루밍쑤 (呂明賜) | 코마다 노리히로 (駒田徳広) | 요시무라 사다아키 (吉村禎章) | 마이크 브라운 (ブラウン) | 필 브래들리 (ブラッドリー) | |
1988 | 1988-1992 | 1990-1998 | 1990 | 1991 | |
<rowcolor=#f49c00> 제56대 | 제57대 | 제58대 | 제59대 | 제60대 | |
로이드 모즈비 (モスビー) | 제시 바필드 (バーフィールド) | 오카자키 카오루 (岡崎郁) | 오쿠보 히로모토 (大久保博元) | 오치아이 히로미츠 (落合博満) | |
1992-1993 | 1993 | 1993 | 1993 | 1994-1996 | |
<rowcolor=#f49c00> 제61대 | 제62대 | 제63대 | 제64대 | 제65대 | |
히로사와 카츠미 (広沢克実) | 마츠이 히데키 (松井秀喜) | 셰인 맥 (マック) | 키요하라 카즈히로 (清原和博) | 이시이 히로오 (石井浩郎) | |
1995-1998 | 1995-2002 | 1996 | 1997-2005 | 1997-1999 | |
<rowcolor=#f49c00> 제66대 | 제67대 | 제68대 | 제69대 | 제70대 | |
타카하시 요시노부 (高橋由伸) | 도밍고 마르티네스 (マルティネス) | 로베르토 페타지니 (ペタジーニ) | 코쿠보 히로키 (小久保裕紀) | 이승엽 (李承燁) | |
1999-2014 | 1999 | 2003-2004 | 2004-2006 | 2006-2008 | |
<rowcolor=#f49c00> 제71대 | 제72대 | 제73대 | 제74대 | 제75대 | |
니오카 토모히로 (二岡智宏) | 아베 신노스케 (阿部慎之助)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小笠原道大) | 알렉스 라미레스 (ラミレス) | 초노 히사요시 (長野久義) | |
2006 | 2007-2019 | 2007 | 2008-2011 | 2011-2016 | |
<rowcolor=#f49c00> 제76대 | 제77대 | 제78대 | 제79대 | 제80대 | |
무라타 슈이치 (村田修一) | 호세 로페스 (ロペス) | 존 보우커 (ボウカー) | 레슬리 앤더슨 (アンダーソン) | 프레데릭 세페다 (セペダ) | |
2012-2017 | 2013-2014 | 2013 | 2014-2015 | 2014 | |
<rowcolor=#f49c00> 제81대 | 제82대 | 제83대 | 제84대 | 제85대 | |
오오타 타이시 (大田泰示) | 사카모토 하야토 (坂本勇人) | 나카이 다이스케 (中井大介) | 카메이 요시유키 (亀井善行) | 개럿 존스 (ジョーンズ) | |
2014-2015 | 2015~ | 2015 | 2015 | 2016 | |
<rowcolor=#f49c00> 제86대 | 제87대 | 제88대 | 제89대 | 제90대 | |
루이스 크루즈 (クルーズ) | 케이시 맥기 (マギー) | 알렉스 게레로 (ゲレーロ) | 오카모토 카즈마 (岡本和真) | 마루 요시히로 (丸佳浩) | |
2016 | 2017-2018 | 2018 | 2018~ | 2020 | |
<rowcolor=#f49c00> 제91대 | |||||
나카타 쇼 (中田翔) | |||||
2022 | |||||
1) 연도는 해당 선수가 4번 타자로 1경기 이상 출장한 해. 2) 볼드체는 일본야구전당 헌액자. |
장훈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NPB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 |||||||||||||||||||||||||||||||||||||||||||||||||||||||||||||||||||||||||||||
1962 |
일본 야구 전당 헌액자 | |
하리모토 이사오 | |
헌액 연도 | 1990년 |
헌액 방식 | 경기자 표창 |
일본 프로야구 명구회 | ||||
<rowcolor=#000000> 등록명 | 기록 | 가입자격 획득일자 | 가입자격 획득당시 연령 | 비고 |
하리모토 이사오 | 3085안타[1] | 1972년 8월 19일 | 32세 2개월 | 최초 발족 멤버 18인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fb1e5> | 퍼시픽 리그 역대 신인상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아라마키 아츠시 마이니치 / 투수 | 카케야마 카즈오 난카이 / 내야수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내야수 | 토요다 야스미츠 니시테츠 / 내야수 | 타우라 모토지 난카이 / 투수 | |
<rowcolor=#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에노모토 키하치 마이니치 / 내야수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투수 | 키무라 타모츠 난카이 / 투수 |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 외야수 | 장훈 토에이 / 외야수 | |
<rowcolor=#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수상자 없음 | 토쿠히쿠 토시아키 킨테츠 / 투수 | 오자키 유키오 토에이 / 투수 | 수상자 없음 | 수상자 없음 | |
<rowcolor=#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이케나카 마사아키 니시테츠 / 투수 | 수상자 없음 | 타카하시 요시마사 토에이 / 투수 | 수상자 없음 | 아리토 미치요 롯데 / 외야수 | |
<rowcolor=#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사토 미치오 난카이 / 투수 | 미나가와 야스오 토에이 / 투수 | 카토 하지메 니시테츠 / 투수 | 니이미 사토시 닛타쿠홈 / 투수 | 미츠이 마사하루 롯데 / 투수 | |
<rowcolor=#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야마구치 타카시 한큐 / 투수 | 후지타 마나부 난카이 / 투수 | 사토 요시노리 한큐 / 투수 | 무라카미 유키히로 난카이 / 투수 | 마츠누마 히로히사 세이부 / 투수 | |
<rowcolor=#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키다 이사무 닛폰햄 / 투수 |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 내야수 | 오오이시 다이치로 킨테츠 / 내야수 | 후타무라 타다미 닛폰햄 / 외야수 | 후지타 히로마사 한큐 / 포수 | |
<rowcolor=#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쿠마노 테루미츠 한큐 / 외야수 | 키요하라 카즈히로 세이부 / 내야수 | 아와노 히데유키 킨테츠 / 투수 | 모리야마 료지 세이부 / 투수 | 사카이 츠토무 오릭스 / 투수 | |
<rowcolor=#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노모 히데오 킨테츠 / 투수 | 하세가와 시게토시 오릭스 / 투수 | 타카무라 히로시 킨테츠 / 투수 | 스기야마 켄토 세이부 / 투수 | 와타나베 히데카즈 다이에 / 투수 | |
<rowcolor=#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히라이 마사후미 오릭스 / 투수 | 카네코 마코토 닛폰햄 / 내야수 | 코사카 마코토 롯데 / 투수 | 오제키 타츠야 세이부 / 외야수 |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 투수 | |
<rowcolor=#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수상자 없음 | 오쿠보 마사노부 오릭스 / 투수 | 쇼다 이츠키 닛폰햄 / 투수 | 와다 츠요시 다이에 / 투수 | 미세 코지 다이에 / 투수 | |
<rowcolor=#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쿠보 야스토모 롯데 / 투수 | 야기 토모야 닛폰햄 / 투수 | 다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투수 | 코마츠 사토시 오릭스 / 투수 | 셋츠 타다시 소프트뱅크 / 투수 | |
<rowcolor=#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사카키바라 료 닛폰햄 / 투수 | 마키타 카즈히사 세이부 / 투수 | 마스다 나오야 롯데 / 투수 | 노리모토 타카히로 라쿠텐 / 투수 | 이시카와 아유무 롯데 / 투수 | |
<rowcolor=#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아리하라 코헤이 닛폰햄 / 투수 | 타카나시 히로토시 닛폰햄 / 투수 | 겐다 소스케 세이부 / 내야수 | 타나카 카즈키 라쿠텐 / 외야수 | 타카하시 레이 소프트뱅크 / 투수 | |
<rowcolor=#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타이라 카이마 세이부 / 투수 | 미야기 히로야 오릭스 / 투수 | 미즈카미 요시노부 세이부 / 투수 | 야마시타 슌페이타 오릭스 / 투수 | / | }}}}}}}}} |
1962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최우수 선수(MVP) |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 → | 장훈 (도에이 플라이어스) | →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
1961년, 1967~1970년, 1972년, 1974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수위타자 |
1960~1970년, 1972~1974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나인 |
1976~197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나인 |
보유 기록 | |
통산 최다 안타 | 3,085안타 |
통산 최다 맹타상 | 251회 |
최연소 2,000안타 | 만 32세 2개월 |
최소경기 2,500안타 | 2185경기 |
시즌 타율 3할대 이상 | 16회[2] |
시즌 타율 3할 3푼 이상 | 11회[3] |
연속 시즌 타율 3할대 이상 | 9시즌[4] |
연속 시즌 타격 10위권 진입 | 15시즌[5] |
연속 시즌 100안타 이상 | 20시즌[6] |
시즌 타율 3할 5푼 이상을 양대 리그에서 기록 | 1970년, 1972년 (도에이) 1976년 (요미우리) |
타격 10위권 진입 | 17회[7] |
연속 타수 안타 | 9타수[8] |
연속 경기 안타 | 30경기[9] |
연속 타석 출루 | 13타석[10] |
연속 시즌 두 자릿수 도루 | 16시즌[11] |
한 이닝 2개의 2루타 | 1961년 5월 6일[12] |
장훈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도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10번 | ||||
→ | 장훈 (1959~1975) | → | |||
{{{#fd5a1e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10번}}} | |||||
→ | 장훈 (1976~1979) | → | 코마다 노리히로 (1988~1993) | ||
{{{#fff [[치바 롯데 마린즈|롯데 오리온즈]] 등번호 10번}}} | |||||
→ | 장훈 (1980~1981) | → |
}}} ||
장훈 張勳 | Jang Hun | |
일본명 | 하리모토 이사오 (張本勲) |
출생 | 1940년 6월 19일 ([age(1940-06-19)]세) |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미나미구 | |
본적 | 경상남도 창녕군 |
거주지 | 일본 도쿄도 오타구 덴엔조후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히로시마 시립 히지야마 초등학교 (졸업) 히로시마 시립 단바라 중학교 (졸업) 히로시마현 마츠모토 상업 고등학교[13] (전학) 나니와 상업 고등학교[14] (졸업) |
신체 | 181cm / 85kg |
포지션 | 좌익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 입단 | 1959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토에이) |
소속팀 | 토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1959~1975)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1979) 롯데 오리온즈 (1980~1981) |
지도자 |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1군 수석・타격코치[15] (1973) |
해설위원 | TBS 텔레비전 야구 해설위원 (1982~2006) |
경력 | KBO 총재 특별보좌 (1982~2005) |
상훈 | 체육훈장 맹호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
본관 | 인동 장씨 |
가족 | 아버지 장상정, 어머니 박순분, 큰누나 장점자[16], 작은누나 장정자, 형 장세열 아내[17], 슬하 2녀 |
[clearfix]
1. 개요
"내가 한국에 처음 온 건 (한국인이라) 고시엔대회에 나가지 못하고 한·일 친선 고교야구에 출전했을 때야. 공항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아리랑을 부르는데 가슴이 찡하더라고. 난 조국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어. 국적은 종이 하나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만, 민족의 피는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깐."
- 2018년 《조선일보》 인터뷰 中 #
대한민국의 야구인, 방송인.- 2018년 《조선일보》 인터뷰 中 #
특히 토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한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손에 꼽히는 레전드 타자이자, 재일 한국인 신분으로 일본프로야구 유일의 3,000안타를 기록하는 위업을 이루면서도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지 않아 야구계 후배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현역 시절에는 도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롯데 오리온즈 소속 야구선수였으며, 포지션은 좌익수였다.
현역 은퇴 후에는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빙그레 이글스, 쌍방울 레이더스, 주니치 드래곤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LG 트윈스에서 타격 인스트럭터를 역임했고, 1982년부터 TBS 테레비 소속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006년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또한 동기간에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특별보좌도 병행했다.
2. 유소년기
자세한 내용은 장훈(야구인)/유소년기 문서 참고하십시오.3. 선수 경력
장훈의 선수 경력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통합 선수 경력: 장훈(야구인)/선수 경력 | ||
플라이어즈-파이터즈 시절 | 요미우리 시절 | 롯데 시절 |
3.1. 각종 기록 및 타이틀(NPB)
- 통산 출장경기 : 2752경기 (역대 3위)
- 통산 타율 : 0.31915 (역대 3위)[18]
- 통산 안타 : 3085개 (역대 1위)
- 통산 홈런 : 504개 (역대 7위)
- 통산 타점 : 1676 타점 (역대 4위)
- 통산 도루 : 319 도루 (역대 20위)
- 통산 희생번트 : 4개
- 통산 희생플라이 : 90개 (역대 5위)
- 통산 사사구 : 1274개 (역대 3위)
- 통산 사구 : 78개
- 통산 고의사구 : 228개 (역대 2위)[19]
- 통산 삼진 : 815 삼진
- 통산 병살타 : 145개
3.1.1. 타이틀
- 신인왕 (1959)
- MVP - 1회 (1962)
- 수위타자 - 7회 (1961, 1967~1970, 1972, 1974) ※일본 타이 기록[20]
- 최고출루율 - 9회 (1962, 1964, 1967~1970, 1972~1974)
- 최다안타 - 3회 (1970년, 1972년, 1976년) - 당시는 타이틀이 아님[21]
- 베스트 나인 - 16회 (1960~1970, 1972~1974, 1976~1977)
- 올스타전 - 18회 (1960~1964, 1966~1978)
- 올스타전 MVP - 3회 (1960년 제3차전, 1962년 제2차전, 1974년 제3차전)
- 사이클 히트 1회 (1961.5. 7)
- 일본시리즈 타격상 - 1회 (1977)
-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90)
3.1.2. 주요 기록
- 시즌 타율 : .3834 (1970년) ※역대 4위, 달성 당시에는 일본 기록.[22]
- 4년 연속 수위타자 (1967~1970) ※역대 2위[23]
- 시즌 타율 3할 5푼 이상을 양대 리그에서 기록 (도에이 : 1970년, 1972년 / 요미우리 : 1976년) ※일본 유일 기록
- 시즌 타율 3할 이상 : 16회 (1960년 ~ 1962년, 1964년, 1966년 ~ 1974년, 1976년 ~ 1978년) ※일본 기록.
- 시즌 타율 3할 3푼 이상 : 11회 (1961년, 1962년, 1966년 ~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7년) ※일본 기록.
- 9년 연속 시즌 타율 3할대 이상 (1966년 ~ 1974년) ※일본 기록.
- 시즌 150안타 이상 : 9회 (1961년, 1962년, 1964년, 1969년 ~ 1972년, 1976년, 1977년) ※역대 2위 타이.
- 시즌 100안타 이상 : 20회 (1959년 ~ 1978년) ※역대 2위.
- 시즌 20홈런 이상 : 16회 (1961년 ~ 1973년, 1976년 ~ 1978년) ※역대 3위 타이.
- 타격 10위권 진입 : 17회 (1960년 ~ 1974년, 1976년, 1977년) ※일본 타이 기록.
- 타격 10위권 15년 연속 진입 (1960년 ~ 1974년) ※퍼시픽 리그 기록.
- 20년 연속 시즌 100안타 이상 (1959년 ~ 1978년)[24]
- 20년 연속 시즌 두 자릿수 홈런 (1959년 ~ 1978년) ※역대 4위 타이.
- 13년 연속 시즌 20홈런 이상 (1961년 ~ 1973년) ※역대 3위 타이.
- 16년 연속 시즌 두 자릿수 도루 (1959년 ~ 1974년)
- 9타수 연속 안타 (1974년 5월 23일 ~ 5월 26일)
- 30경기 연속 안타 (1976년 5월 13일 ~ 6월 20일)
- 13타석 연속 출루 (1974년 5월 23일 ~ 5월 26일)
- 1이닝 2개의 2루타 (1961년 5월 6일) ※일본 타이 기록.
- 만 32세 2개월 만에 통산 2000안타 달성 (1972년 8월 19일) ※최연소 기록이자 역대 2위.
- 1733경기 만에 통산 2000안타 달성 (1972년 8월 19일) ※역대 3위.
- 2185경기 만에 2500안타 달성 (1976년 6월 10일)
- 일본 시리즈 통산 타율 : .370 (73타수 27안타) ※70타수 이상에서는 역대 1위
- 통산 타율 3할대·500홈런·300도루 ※사상 유일
3.2. 상징적인 등번호 10번
데뷔 첫 해부터 은퇴할 때까지 3팀에서 썼던 등번호 '10번'은 영구결번은 아니지만 그 뒤 여러 야구 후배들에게 좌타자의 상징적인 번호가 되었다.- 장효조는 롤모델인 장훈의 등번호 10번을 삼성에서 달고 싶었으나, 선배 허규옥이 차지하고 있어서 사용하지 못했다. 결국 사정사정하여 허규옥이 등번호를 14번으로 변경하고, 장효조가 10번을 차지한다.
- 양준혁도 장효조와 장훈을 본받는 좌타자가 되고 싶다며 삼성 데뷔 시절부터 10번을 사용했고 영구결번의 영예를 안았다.
- 김기태도 장훈을 롤모델로 삼아 아마추어 시절부터 등번호 10번을 사용했고,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하고[25] 1994년부터는 등번호 10번을 사용했다. 10번을 달기 시작한 1994년에는 커리어 사상 첫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다. 장훈과 김기태는 한일 슈퍼게임과 쌍방울의 일본 스프링캠프 타격지도 등으로 여러 번 만난적이 있다.
그 외에도 이정훈, 이숭용, 김민호 등 리그에서 이름을 떨쳤던 왼손타자들은 장훈의 영향을 받아 '10번'을 선호했다. 2024년 기준 NC 다이노스의 박세혁과 LG 트윈스의 오지환[26] 등이 10번을 달고 있다.
4. 평가
1990년 일본야구전당에 헌액된 장훈의 동판[27] |
데뷔 시즌인 1959 시즌에 신인상을 수상하고 1962 시즌에는 일본시리즈 우승[28] 및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통산 2,752경기 출장, 통산 타율 .319, 3,085안타, 504홈런, 1,676타점, 319도루, 수위타자 7회, 최고출루율 9회, 베스트나인 16회의 활약을 하며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더욱 대단한 것은 화상으로 인한 오른손 장애[29]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피폭[30]을 극복하고 이러한 타격 실력을 보여줬다. 이러한 맹활약으로 현역 말엽인 1978년 7월 24일 명구회 발족 멤버가 됐고 1990년에 일본야구전당에 헌액되었다.
1981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후에는 모국인 대한민국의 프로야구 리그 출범에 큰 도움을 줬으며 TBS 테레비 등에서 해설자와 평론가를 맡아 야구계에 대한 조언이나 쓴소리를 자주 한다. 장훈을 잘 모르는 젊은 팬들 중 일부는 한물간 노인이 무슨 자격으로 쓴소리를 하느냐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정작 일본 야구 선수들은 그의 쓴소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듣는 편이다. 그가 선수 시절 세운 기록이 워낙 넘사벽인데다 도덕적으로도 흠결이 없는 슈퍼스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야구 선수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31] 어른 중 한 명이 장훈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선수 생활을 일본에서만 했고 이후에도 일본을 주 활동 무대로 하고 있지만 끝까지 대한민국 국적을 바꾸지 않고 활약한 위대한 한국인이다. 더구나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멸시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으나 스스로 일본인들의 멸시와 차별, 질투와 시기를 이겨냈고[32] 일본 구단 측의 끈질긴 귀화 요청도 거부한 끝에 한국인 선수로서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타자로 우뚝 서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 덕에 1980년에는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훈했고, 2007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의 선수이며, 위대한 기록을 남긴 한국인이기에 국내에서도 꾸준히 언급되며 야구팬들에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장훈의 외부 활동이 줄어들고, 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며 새로 유입된 팬들에겐 접하기 쉽지 않은 야구인이 되어갔다. 다만 수준 높은 리그의 올타임급 레전드[33]로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반드시 꼽힌다.
1960~197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선수이고 당시 한국 야구인들에게는 첫째가는 우상이었고 한국 언론에서도 그의 일본에서의 활약상과 결혼에 관한 소문, 3000안타 달성 소식이 크게 화제가 되었을 정도로 유명인이었으나, 2010년대 중반부턴 국내에서 언급되는 빈도가 줄어들며 이 시기부터 야구를 보기 시작한 젊은 야구팬들에게는 활약상과 위상에 비해 그의 인지도가 낮아졌다. 다만 그럼에도 한국 야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상징성을 가진 인물이며,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항상 꼽혀온 잊혀질 수 없는 존재.[34]
4.1. 추장대엽
자세한 내용은 추강대엽 문서 참고하십시오.KBO 리그보다 상위 리그인 NPB에서 명실공히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인 레전드이기에 대한민국 역대 프로야구 선수 올타임 라인에 늘 거론되어왔으며, 특히 한국 야구 역대 최고의 타자 중 한명으로 추강대엽 논쟁 이전의 추대엽, 추승호 시절에도 항상 야구팬들에게 언급되어 왔다. 당시엔 추대엽, 추승호가 큰 논란거리는 아니었기에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는데, 강정호가 MLB에서 활약하기 시작하자 추강대엽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이 붉어지는 바람에 장훈도 같이 소환되는 경우가 잦았다. 이후 강정호가 음주운전으로 커리어를 일찍 마감하게 되며 논쟁은 더욱 심해졌고, 시간이 지날 수록 야구팬들은 추장대엽을 지지하고 있다. 추장대엽 일원들은 전부 경상도 출신들이다.
5. 은퇴 이후
네놈에게 떽!
은퇴 후 줄곧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고, TV방송에서 연예인 못지 않는 입담을 과시하고 있다. 아래의 예를 보자면 그의 기믹은 호통치는 거성의 이미지인 듯.[35] 그래서, 은퇴 이후 플레잉 코치로 잠깐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현재까지 지도자로 일을 한 적은 없었다.
TBS 테레비계 선데이 모닝의 코너 '주간 고견코너'에 오사와 케이지와 함께 고정출연하고 있다. 내용은 아무래도 야구 중심이지만, 방송 초기부터 인기를 얻고 있어 방송 분량을 많이 뽑아내고 있다. 오사와 케이지는 2010년 10월 7일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이후 장훈 옹의 파트너는 주로 일본프로야구 OB들이 게스트 형식으로 출연하여 매주 바뀌고 있다.
떽! 이라며 꾸짖는 모습은 프로그램의 명물이 되었다. 원래는 불교식 호통소리인 할(喝[36]), 일본어로는 가츠. 닛폰햄 직속 후배인 신조 츠요시에게는 항상 엄하게 대하는데 닛폰햄의 캠프에 갔을 때에는 백네트 뒤에 있던 신조로부터 반대로 "떽!"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장훈은 신조를 꽤 높게 평가하는데, 신조가 2006년을 마지고 은퇴를 발표했을 때에는, "곤혹스럽네요"고 이야기하며 그때만큼은 "떽" 하지 않았다. 그 흔한 타격 타이틀 한 번도 차지한 적이 없는 기요하라 가즈히로에게 "말도 안 되네요"라고 폄하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일본 프로야구를 빛낸 후배이니 최근에는 이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일본 야구 대표팀이 한국과 미국에 패배해 메달 획득에 실패하자, 엄청난 독설을 퍼부었다.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물론, 같이 따라갔던 다부치 코이치, 야마모토 코지 코치, 심지어 일본프로야구연맹도 같이 박살이 났다. 얼마나 "떽!"을 퍼부었는지 옆에 있던 오사와 케이지가 "어유 오늘 무섭군요"라고 한마디 보탰을 정도.마스터즈 토너먼트 리그(OB리그)에서 삼진을 당하면 거꾸로 팬으로부터 "떽!"이라 야유를 받는다. 그리고 그 장면이 TV에 나오곤 하면 스스로 "떽!" 하며 꾸짖는다. 2005년에는 마스터즈 토너먼트 리그에 참가한지 5년 만에 첫 안타를 때렸다. 본인은 "투수인 호시노 노부유키가 적당히 던진 공을 쳤을 뿐"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보수적이고 완고한 성격 때문인지 남자 선수가 우승을 하거나 은퇴를 할 때 감정에 복받쳐 우는 장면이 나오면 불쾌하다는 듯 "남자가 사람들 앞에서 훌쩍훌쩍 울면 못쓴다! 떽이다!!"라고 하는 투의 코멘트를 날린다. 이런 투의 발언은 장훈 옹의 유행어 내지는 트레이드 마크로 정착된 듯 한데, 이 얘기를 할 때 다른 해설자나 사회자는 킥킥대곤 한다. 한편, 여성에게는 "떽!" 대지는 않지만 가끔 부진을 보이는 선수에게는 "떽!" 대곤 한다. 한 예로, 부진을 거듭하고 있던 프로골퍼 미야자토 아이에게 "떽!" 하고 일갈했다. 2005년 NHK배 국제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감격에 겨워 통곡하던 오다 노부나리에게는 "반(半) 떽이다!"라고 호통을 쳤다. 사회자인 세키구치 히로시를 비롯해 다른 해설자는 장훈의 "떽!"에 실소했으며, 오사와는 반대로 "오오오! 멋진데!" 하고 격찬(?)했다.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의 이시이 타쿠로가 2006년 5월 11일 대 라쿠텐 전에서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하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했을 때는 정말 드물게 "훌륭하다(天晴ㅡ 앗파레)!"라고 말했다. 뒤이어 "자연스럽게 흘린 눈물이니까. 게다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제대로 인터뷰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격찬했다. 참고로 이시이 타쿠로는 투수로서 승리를 기록하고[37] 이후 타자로 전향한 선수 중에서 2번째로 2000안타를 기록했다. 첫 번째는 카와카미 테츠하루 전 요미우리 감독.
야구에 대한 생각은 꽤 보수적이다. 특히 일본프로야구 정상급 선수들의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전문가 중 한 명인데 "일본야구에 신세를 졌는데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라고 호통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메이저리그나 일본인 메이저리거에 대한 얘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 일본프로야구로 복귀하는 선수에 대해서는 1년 간의 출장금지 페널티를 주자는 의견을 서슴없이 내기도. 이러한 입장은 2012년 현재도 마찬가지여서 이 선수, 저 선수, 그 선수 등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데 대해 가차없이 떽!을 날렸다. 2012년 말 오타니 쇼헤이가 메이저리그 진출과 일본 잔류를 두고 갈등을 할 때도 대놓고 반대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좀더 힘을 길러서 가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38] 또한 2013년 WBC 3회 대회에 일본프로야구 노조가 참가 거부를 밝히자 "그동안 노조가 하는 짓이 맘에 안 들었는데[39], 처음으로 노조의 행동이 맘에 든다."라고 이야기까지 했다. 이쯤되면 장훈 옹의 메이저리그에 대한 시각이 그리 좋지 않음을 알 수 있다.[40] 비슷한 생각으로 2013년 7월에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메이커 노릇을 하던 가와사키 무네노리를 두고 "타율 2할 2푼을 못치는게 선수냐?"는 말을 방송에서 했다가 다르빗슈 유가 트위터로 "가와사키는 팀에 꼭 필요한 선수다. 그 방송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선수를 헐뜯기 위해서?"라며 일갈을 하기도 했다. 이에 일본 언론과 팬들은 다르빗슈가 친정팀 대선배를 대놓고 비판한 것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일본프로야구에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야구 같은건 보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AM2VI99yWow MLB가 보고싶은 이유는 오타니 선수의 연이은 대활약을 보려고라고 말할 정도로 NPB 출신 선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엄청남과 동시에, 미국 메이저리그에 대한 시각이 좋지 않다.
이렇듯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일본인 선수에 비판적인 장훈도 우에하라 고지만큼은 칭찬해 줬는데...문제는 그 발언 수위가 높다는 것. “우에하라 공은 美 애송이들이 칠 수 없다"[41]는 명언을 남겼다. 다만 이점과 위의 메이저리그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은 그가 어릴 적 미국의 핵공격에 의해 큰누나를 비롯한 주변인을 잃었다는 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일본이 자초한 전쟁이라지만 일본인도 아닌 본인이 실제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니 개인감정적으로는 미국에 반감을 가질 수 있고 실제로 본인 자서전에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피력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교진군에 대한 강한 동경과 애정이 있었다. 그 때문에 마쓰이 히데키가 교진군을 뛰쳐나와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을 때나 카와이 마사히로[42]가 은퇴를 철회하고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을 때에는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한민족이라는 같은 피가 흘러서 그런지 이승엽에게는 절대로 "떽!" 대며 일갈하지 않았다. 이승엽의 치바 롯데 마린즈(2004~2005) 시절,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2군행의 지시에 대해서는 "승엽이가 컨디션을 되찾으면 수십 승을 하는 데 원동력이 될 수 있는데, 발렌타인은 눈앞의 승리에 안달났다."라고 비판했다. 이 때부터 장훈은 "승엽이가 도움을 요청해오면 언제라도 힘이 되고 싶다"라고 이야기하며 옆에서 많이 격려를 해줬으며, 특히 2006년 교진으로 이적하고 맹활약을 펼쳤을 때 2007 시즌을 앞두고 트리플크라운도 가능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2010년 이승엽의 연봉이 6억엔(약 84억원)에서 5,000만엔(약 7억원)으로 대폭 삭감에 그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 때, 장훈은 '그런 대접을 받고 일본에 (이승엽이) 있을 필요는 없다'며 '협상 과정에서 연봉이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일본에 남는 것보다 빨리 돌아와 한국 야구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43]
2015년 4월 중순에 자신이 출연하는 코너에서 이번에는 현역 최고령 축구선수인 미우라 카즈요시를 저격하했는데, J2리그는 야구로 말하면 2군이니까 화제성이 없다, 나이 먹었으면 은퇴하고 지도자에 도전하라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사실 이는 장훈이 2부 리그의 개념 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44] 장훈의 발언으로 인해 일본 축구계는 격분했다. 이 발언은 축구를 넘어, 일본 프로스포츠의 살아있는 전설 그 자체를 말도 안되는 논리로 비난한 것이며, 일본프로축구의 수준을 폄하한 것이기 때문. 나아가 일본 프로스포츠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너무한 것 아니냐" "당장 발언 취소하고 사과하라"는 격한 반응이 일고 있다. 평소 J리그를 달가워하지 않는 국내 축구팬들도 "장훈이 도대체 누군데 망언을 하냐"며 미우라를 옹호했다.[45] 하지만 정작 미우라 본인은 장훈같은 사람이 자신을 알아준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더 열심히 하란 소리로 알겠다며 센스있게 받아쳤다. 덕분에 수위 높은 발언을 한 장훈만 뻘쭘해졌다. 참고로 미우라는 오랜 요미우리 팬[46]이라고 한다.[47]
KBS에서 장훈의 다큐를 제작했는데, 이때 모교 후배들이 달려와 자신들에게 "떽!"을 외쳐달라고 했으나 '떽(喝)'의 일본 발음인 '카츠'가 승리(勝)의 일본 발음과 유사해서 KBS 방송 자막엔 '떽'이 아닌 '승리'라는 오역 자막이 나왔다. 한편 이 방송에서 장훈의 능숙한 한국어를 들을 수 있는데 일본에서 평생을 살아온 재일교포임에도 한국어 발음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그리고, 형과 어머니의 묘에 성묘하면서 본인은 '인동 장씨'임을 밝혔다.
2015 WBSC 프리미어 12 준결승 때 선발 오타니 쇼헤이를 7이닝만 쓰고 내린 고쿠보 히로키 일본 대표팀 감독에게는 너무 안이한 생각을 했다며 맹독설을 퍼부었다. 오히려 오타니 쇼헤이를 더 길게 가져가야 했어야 한다고.
2019년 7월 28일의 고견 코너에서는, 163km를 던지는 유망주 사사키 로키가 혹사 우려 때문에 코시엔 이와테현 대회 결승전에 등판하지 않아 결국 팀이 패배한 일을 두고 감독과 선수를 맹비난해 논란이 되었다. 고령에 보수적인 야구관이야 익히 알려져 있지만, 이날 한 발언들인 "4번 등판에 450개밖에 안 던졌다" "부상이 두려우면 스포츠를 그만둬야 한다" "감독이 미국물이 들었다. 미국에서는 투수를 소모품이라 생각하지만, 동양인은 던지고 또 던져서 성장한다" 를 보면 현재의 야구 상식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위의 가와사키 건으로 장훈을 비판한 적이 있던 다르빗슈 유는 본인 트위터에서 "신룡에게 소원을 빌 수 있다면 이 코너를 폐지해달라고 하고 싶다" 라고 재차 비판했다. 이후 사사키 로키가 프로에 진출한 뒤로도 소속팀인 치바 롯데 마린즈는 이런 장훈의 의견과는 정반대로 특별 대우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장기간에 걸쳐 선수를 매우 세심하게 관리 및 육성했고 결국 2022시즌 퍼펙트 게임이란 대기록으로 보답을 받았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금메달을 예상했고, 그렇게 되었다. 이어서 일본 여자 복싱 금메달리스트인 이리에 세나에 대해 "결혼도 안 한 아가씨가 얼굴을 때린다니. 이런 경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구나"라고 말해 한일 양국 모두 성차별 및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일본복싱연맹은 이 발언이 나왔던 TBS 방송사에 항의했고 장훈은 이에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2021년 11월, 2021년을 끝으로 개인 사정으로 선데이 모닝에서 하차한다는 뜻을 밝혔다. 2022년부터는 선데이 모닝에 부정기 게스트로 출연할 예정이다.
한 분야의 레전드이자 대선배지만 완고하고 거칠며 구설수에 오를 말을 많이 한다는 점, 그리고 재일교포 출신이란 점에서 와다 아키코와 비슷하단 의견도 가끔 보인다.[48] 실제로 와다 아키코가 후배인 야스다 미사코를 상대로 실언을 해서 욕 먹을 때 장훈과 비슷하게 쓸데없는 말만 한다는 의견이 인터넷에 있었다(...).
2024년 5월 28일 교진군 홈경기 왕정치데이에 시구자로 나섰는데, 수척해진 모습으로 지팡이에 의지한 채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여 장내를 술렁이게 했다. 시구 영상과 기사에는 그의 건강을 걱정하며 응원하는 팬들의 댓글이 이어졌다.기사
2024년 6월 21일, 그는 근황을 묻는 일본 매체 '분슌 온라인'의 질문에 허리를 다쳐서 지난 봄에 수술을 했고 고령이라 근육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뿐이라고 답하며, 살이 좀 빠지기는 했지만 어디가 많이 아픈 것은 아니고 지팡이 짚고 잘 돌아다니고 있고 술도 잘 마시고 생생하게 지낸다고 말하며 시중의 억측을 일축했다.
6. 재일 한국인으로서
국적은 종이 하나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만, 민족의 피라는 것은 그럴 수 없죠.
ㅡ KBS와의 인터뷰에서,#
ㅡ KBS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한류 붐 등으로 한국인이란 사실을 공공연히 밝히는 재일교포도 많아지고 있지만, 장훈이 현역으로 뛰던 시절에는 애초부터 국적을 밝힌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일본에 건너온 후, 죽기 전까지 일본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완고한 모친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장훈은 2024년 현재까지도 일본으로 귀화를 선택하지 않고 여전히 대한민국 시민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 한편으로는, 태어나서 자라고 입지를 세운 일본에 대한 생각도 깊어,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출장하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일본의 국위를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민족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가정 내에서는 어릴 적부터 한국어로 말하며 자란 관계로 지금도 한국어는 능통하다. 1991년에 일본에서 개최된 제 1회 한일 야구 슈퍼게임의 중계에서는, 대한민국 TV 방송 측의 야구 해설자로서 출연해, 막힘없는 해설로 한국의 야구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왕정치의 단일시즌 홈런 신기록 55개에 근접했을때는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라'고 조언했다.
위에 언급했지만 고교시절에는 재일 한국인 선발팀에 선정되어 한국으로 원정을 가서 고국의 야구팬들에게 대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동대문야구장이 철거될 무렵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옛날 여기서 엿장수한테 엿도 사먹고 그랬는데.."라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같은 재일교포인 프로레슬러 역도산과도 친분이 깊었다. 둘 다 천성이 거칠었던 탓에 술자리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던 듯 하다. 어느 날은 장훈이 역도산에게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제의하자 역도산은 분개하며 "너는 내가 당한 차별을 알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사실 역도산은 스모 리키시 시절 차별을 받았던 트라우마 탓에 일상 생활에서도 한국어를 전혀 쓰지 않았고[49], 역도산이 야쿠자에게 피살당할 때까지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실제로 일본인들 중 아직도 모르는 사람은 많다.
당시 일본프로야구계에서는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간과하여 야구선수가 배트보다 무거운 것을 드는 걸 금기시 하던 시기였는데 장훈은 '체력'을 강조하는 역도산의 권유를 받아 역도산의 레슬링 도장에서 본격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가 현역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 2005년까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특별 보좌관직을 맡았다. KBO 창설 당시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 큰 경기나 행사가 있을 땐 나가시마 시게오와 스승 미즈하라 시게루를 함께 초청하여 모셨을 정도.[50][51] 특히 일본에서 전성기를 지났거나 여러 차별로 별 활약을 못한 재일 한국인 선수들을 한국프로야구에 뛰게 추천한 이도 바로 장훈 옹이다.(대표적인 사례가 송재박이다.) 일본의 스포츠 선수 출신으로서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7. 여담
자세한 내용은 장훈(야구인)/여담 문서 참고하십시오.8. 어록
"현역 시절 3,085개의 안타를 쳤지만 단 한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습니다. 필사적으로 쳤지요. 다시 태어나도 두 번 다시 야구 선수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되돌아보면 잘 해도 70~80%는 실패했으니까요. 23년간 괴로웠습니다."#
- 2017년 중앙일보 인터뷰 中
- 2017년 중앙일보 인터뷰 中
타격은 여자의 마음과 같다. 오늘 잘 맞다가 다음 날에 맞지 않는다.
2할 9푼을 치는 타자와 3할 타자의 차이는 단순하다. 2할 9푼 타자는 4타수 2안타에 만족을 하지만, 3할 타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4타수 3안타 또는 4타수 4안타를 치기 위해 타석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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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1960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교육가·독립운동가 | 1969 이인 법조인·독립운동가 | 1969 닐 암스트롱 · 마이클 콜린스 · 버즈 올드린 우주비행사 | ||
1969 제헌국회의원 154명 | 1969 조동식 교육인 | 1970 김수환 추기경 | 1970 백낙준 교육인 | 1970 이상백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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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이근 의사 | 2017 박한철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 2017 반기문 외교관, UN사무총장 | 2017 양승태 법조인, 대법원장 | 2018 김종필 국무총리 | |
2018 노회찬 정치인 | 2018 박재갑 의사 | 2018 이석태 법조인 | 2018 조규광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 2018 한승헌 법조인, 감사원장 | |
2018 정세균 국회의장 | 2019 윤한덕 의사 | 2019 이국종 의사 | 2020 이이화 사학자 | 2020 전태일 노동운동가 | |
2020 문희상 국회의장 | 2021 최종태 기업인 | 2022 박병석 국회의장 | 2023 송창근 기업인 | 2023 김박 기업인 | |
2023 자승 종교인 | 2024 이임성 법조인 | 2024 윤대원 의사, 교육인 | }}}}}}}}} |
10. 관련 문서
[1] 유일한 3000안타 클럽 가입자[2] 1960년 ~ 1962년, 1964년, 1966년 ~ 1974년, 1976년 ~ 1978년[3] 1961년, 1962년, 1966년 ~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7년[4] 1966년 ~ 1974년[5] 퍼시픽 리그 기록. 1960년 ~ 1974년[6] 오 사다하루와 타이 기록.[7] 타이 기록.[8] 1974년 5월 23일 ~ 5월 26일[9] 1976년 5월 13일 ~ 6월 20일[10] 1974년 5월 23일 ~ 5월 26일[11] 1959년 ~ 1974년[12] 타이 기록.[13] 현) 히로시마현 세토우치 고등학교[14] 현) 오사카 체육대학 나미쇼 중・고등학교[15] 플레잉 코치[16] 히로시마 원폭으로 12세에 사망.[17] 아내도 재일교포다.[18] 1위는 레론 리, 2위는 와카마츠 츠토무.[19] 1위는 427개의 오 사다하루.[20] 7년 연속 수위타자 기록을 가진 스즈키 이치로가 공동 보유하고 있다. 이치로가 타이기록을 달성한 후에 MLB에 진출하였고, NPB 복귀 없이 은퇴하면서 기록 갱신은 하지 못하였다.[21] 1994년부터 시상되었다.[22] 역대 1위는 랜디 바스(1986년)의 0.389, 역대 2위는 스즈키 이치로(2000년)의 0.387, 역대 3위는 스즈키 이치로(1994년)의 0.385이다.[23] 역대 1위는 스즈키 이치로의 7년 연속 타격왕 기록(1994~2000)이다.[24] 20년 이상 연속으로 시즌 100안타를 기록한 것은 오 사다하루와 장훈 뿐이며, 입단 1년차부터 한정하면 장훈이 유일.[25] 1991년 입단 당시부터 1993년까지는 선배 김호근에 밀려 3번을 달았다.[26] 경기고 시절에 10번을 달았고, 이후 2019년부터 10번을 달고 있다.[27] 동판 속 장훈은 역대 소속됐던 도에이 플라이어즈-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요미우리 자이언츠/롯데 오리온즈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활약한 도에이가 아닌 요미우리의 모자를 썼는데 아마도 닛폰햄이 도에이 시절부터 모기업이 두 차례 바뀐 것도 있고, 요미우리 시절 커리어 사상 단일 시즌 최다안타(1976년 시즌 182안타)를 기록했던 것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28] 이 우승이 장훈의 처음이자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이다.[29] 엄지가 바깥쪽으로 휘어졌고, 넷째 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붙어있다. 이 사고로 인해 원래 오른손잡이지만 야구를 하기 위해 왼손잡이로 전향했다.[30] 피폭을 숨기고 있다가 환갑이 넘어서야 사실을 밝혔다. #기사[31] 스즈키 이치로가 가장 존경하는 스타이자 롤모델이 바로 장훈이다.[32] 장훈과 동시대에 도에이와 롯데에서 현역 생활을 같이 했던 후배 백인천이 회상한 바에 따르면 당시 내야 관중석에 앉아있던 상대팀 극성 팬들이 외야 관중석으로 넘어와서 장훈과 백인천을 향해 "야! 조센징!"이라고 부르면서 욕설과 조롱을 시전했다고 한다. 이 욕설과 조롱은 두 사람이 출장하는 거의 매 경기마다 이어졌다. 게다가 팬들은 물론 같은 선수들끼리도 멸시와 조롱은 극심했다. 그가 타석에 들어설 때 옆에 있던 상대팀 포수가 욕을 하는 것은 예사였고 심지어 같은 팀의 일본인 선수들까지도 장훈을 향해 "조센징!"이라고 부르며 욕을 했다고 한다. 물론 장훈이 본인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준 후에는 누구도 장훈을 향해 욕을 하지 못했다.[33] 한국인 중 추신수는 올스타급까지 찍었고, 누적 역시 준수하지만 텍사스 시절 먹튀 때문에 명전은 불가능한 성적이다. 과거 박찬호를 포함해서 류현진은 솔리드 스타터급이지만 장훈은 NPB 역사상 손에 꼽는 레전드이다. 당장 통산기록만 보아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마일스톤인 3000안타와 500홈런을 NPB에서 모두 달성했다. 물론 선술한 네 명은 메이저 선수이지만 장훈이 뛰던 시절에는 장훈보다 커리어가 아래였던 백인천조차 불혹의 나이로 4할을 칠 정도로 한국 야구와 일본 야구의 격차는 극단적이었다.[34] 강정호의 MLB 활약으로 추강대엽이라는 한국 야구 타자 본좌 라인과 관련한 논쟁이 인터넷 상에서 촉발된 적 있다.[35] 하지만 박명수는 철저히 예능형에 가깝다. 박명수는 완고한 스타일이라기 보단 오히려 출연자들에게 독설을 퍼부은 만큼 역관광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훈은 뚝심있게 호통을 이어가는 스타일.[36] 한국에선 꾸짖을 갈로 더 유명한 한자다.[37] 투수로서 통산 1승 4패 기록.[38] 장훈 옹은 오타니가 투타겸업을 선언하자 그의 트리플 크라운급 타격재능에 흠뻑 반하여 160km/h를 던지는 투수로서의 자질도 좋지만 타격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 몇 안 되는 전문가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실상 오타니라는 선수 자체에 흠뻑 빠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39] 2004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해체로 일본프로야구 재편문제가 있었을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을 중심으로 10개구단 단일 리그로 환원하자는 구상이 거론되었다. 이에 후루타 아츠야 선수회장과 긴테쓰의 이와쿠마 히사시 등 선수들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있었고, 선수회가 파업까지 불사하며 격렬히 반대한 것을 의미한다. 장훈 옹은 이 구상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40] 그런데 1960~70년대에 MLB-NPB의 친선경기를 하면 MLB 측에서 MLB에서 당장 통할 선수로 장훈 옹을 꼽았다는 건 아이러니한 사실이다.[41] 이 기사에 대해 "일본 기사 번역 과정에 문제가 있던거 아닌가, 기자가 방송을 곡해한 것 아닌가"라는 반응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 장훈은 같은 방송 패널인 가네다 마사이치와 함께 "메이저 타자들은 'ヘボ(일본어 "下手"와 비슷한 뉘앙스라고 보면 된다. 서투르다, 어설프다 등의 의미. 젊은이들은 잘 쓰지 않는다.)'" "메이저 타자들은 떨어지는 공 던지면 그냥 아웃"라는 발언을 다르빗슈가 메이저에서 활약한 2012년부터 자주 해 왔다. 한국에서야 저 기사로 처음 알려져서 화제가 되었지, 오히려 기사에 나온 해당 일자 방송은 일본에서는 그다지 화제도 되지 않았다. 장훈이 한두번 저런 발언을 한것도 아니고 해서.[42] 전 요미우리 유격수, 선수회장 역임, 번트의 달인.[43] 다만, 이승엽은 2010년 한국 복귀 인터뷰에서 장훈의 5,000만엔 발언이 싫었다고 말하였다.[44] 축구에서 2부 리그 소속 클럽들은 각자 팀 내 최정예 선수들을 구성하여 1부 리그 승격을 위해 사활을 건다. 그리고 이런 2부 리그 클럽들도 2군 팀은 따로 갖고 있다. 당장 대한민국 프로축구 2부 리그인 K리그 챌린지 소속 클럽들도 1부 리그 클럽들과는 별개로 2군 팀과 유스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는 J2리그도 마찬가지. 유럽으로 확대해보자면 잉글랜드 4부 리그 프로 클럽들도 각자 2군 팀을 보유하고 있다.[45] 사실 국내 축구팬들은 예전부터 일본인 선수더라도 미우라에겐 존경을 표해왔다. 1967년생으로 2015년 기준으로 40대 후반이니 선수는 커녕 축구 감독으로서도 마냥 젊기만 하진 않은 나이에 프로 축구 선수로서 조커로라도 활약할 정도로 자기관리가 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것이기 때문. 나카타 히데토시, 혼다 케이스케와 더불어 일본 선수임에도 국내 축구팬들에게 크게 지지받는 선수다.[46] 미우라가 J리그에서 데뷔했을 당시 소속팀인 베르디는 요미우리-니혼테레비 미디어그룹에서 소유하고 있었다.[47] 이걸 비유하자면 김응용이나 김성근이 김병지나 이동국보고 은퇴하라고 쓴소리하는거랑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 어떤 스포츠 원로들도 타종목 선수에게 일갈하진 않는다. 일종의 불문율. 그랬다간 그 종목 팬들로부터 어마어마한 폭격을 맞을 것이다.[48] 단 와다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49] 어느 날 역도산이 수제자 김일과 잡담을 하던 중 기쿄(桔梗, 도라지)라는 단어를 꺼냈는데, 김일이 기쿄의 뜻을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역도산은 김일에게 "기쿄를 모르나? 도라지라는 뜻이다"라고 일러준 적은 있었다. 김일이 그에게서 들은 유일한 한국어가 "도라지"라는 단어였다고 한다. 방한했을 때도, 높으신 분들과의 대담에서 한국어를 다 잊어버린 척 했다고 한다.[50] 미즈하라는 한국프로야구 출범 전 한국을 방문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지만, 하필 출범 개막전 전날인 1982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나 개막전에 초대될 수 없었다.[51] 여담으로 1982년 몬트리올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13개국 야구인들을 시구자로 초청했는데, 한국 야구인 대표로 초청되어 일본 야구인 대표로 초청된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시구를 하기도 했다. 다만, 이미 1960년대부터 메이저리그 측에서 통명으로 알려졌던지라, 당시 중계방송을 보면 국적은 대한민국이지만 이름은 하리모토 이사오로 소개된다. 참고로 시구 행사에는 요기 베라, 듀크 스나이더(이상 미국), 미니 미뇨소(쿠바), 후안 마리샬(도미니카공화국), 올란도 세페다(푸에르토리코) 등도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