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단군(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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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 환인 | ||
부모 | 부왕 환웅 / 단수신 모후 웅녀 / 환웅의 손녀 | ||
배우자 | 비서갑(非西岬) 하백의 딸[9] | ||
자녀 | 부루[10], 주몽[11], 송양 | ||
신장 | 170cm[추정] | ||
왕호 | 단군왕검(檀君王儉) | ||
별호 | 신인(神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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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왕검(仙人王儉)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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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군신화에서 등장하는 고조선(단군조선)의 초대 군주 또는 토착 고조선의 군주들이 세습했던 군주의 호칭으로 추정되는 말이다.[13] 이 문서는 초대 단군만을 설명한다.2. 상세
2.1. 어원
정확한 명칭은 단군왕검(檀君王儉[14])이지만 일반적으로 단군이라고 지칭된다. 친근하게 단군 할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며 한국의 역사를 열었다고 알려지는 신화 속 인물이다. 즉 한민족의 시조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른 바 단군신화의 해석은 다양하지만 적어도 근대 이래로 표면적인 이야기 자체보다는 현실적인 관점으로 문장들을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단군(檀君)은 이름이며 왕명은 왕검인데 김영하 교수에 의하면 단군은 몽골 신화의 텡그리와 같은 의미이며 왕검은 일본에서 군주를 뜻하는 오오키미와 비슷한 것이다.[15] 하지만 대종교 등에서는 여전히 단군을 왕명으로 보고 1대 단군 2대 단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왕검(王儉)의 경우 '임금'의 향찰식 표기라는 주장이 있다.# 향찰에선 2음절짜리 고유어(고대 한국어)를 기록할 때 첫 음절은 훈차, 둘째 음절은 음차하곤 했는데, 王儉도 王은 훈, 儉은 음으로 보인다는 것. 이럴 때 첫 음절은 중세 한국어를 기반으로 원래 발음을 재구해야 한다. 그 예로 川理(*NAli, *나리, 내)나 國惡(*NALak, *나락, 나라) 등이 있다.[16] 만약 王儉도 같은 표기법으로 쓰인 것이라면 원래 형태는 중세국어 '님〯금〮'을 기반으로 *NIMkem, *님검 정도로 재구할 수 있다. 王儉이 이사금과 같은 말이라는 설을 따른다면 *NISkem, *닛검 이 되겠다.
만약 '왕검'이 '임금'과 같다면 후대에 붙여진 칭호일 수도 있다. 당대 중국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의 지도자는 원래 '후(侯)'라고 하다가 기원전 323년경에야 '왕'을 칭했기 때문. 물론 내적으로는 계속 왕검/님검이라고 칭했고 후나 왕은 대외적인 칭호였을지도 모른다.
2.2. 역사학적 해석
근대에 들어와서는 신채호를 필두로 강대한 고조선의 신앙적, 정치적인 집권군주로서 단군이 조명되고, 이에 따라 단군 신앙도 나철의 대종교로 조직화되어 민족주의적 일획을 담당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경일로 지정되어 현대 국가 성립 초기에도 반영되어 개천절로 이어졌으나, 개천절은 원래 음력 10월 3일이므로 대한민국 수립 후까지도 음력으로 지켜왔는데, 1949년에 문교부가 위촉한 ‘개천절 음·양력 환용(換用)심의회’의 심의결과 음·양력 환산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와 ‘10월 3일’이라는 기록이 소중하다는 의견에 따라, 1949년 10월 1일에 공포된「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거, 음력 10월 3일을 양력 10월 3일로 바꾸어 거행하게 되었다.#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것이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 일대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던 과도기의 역사적 믿음이 반영된 산물로 보기도 했다. 곰과 호랑이를 숭배하던 토테미즘의 신석기 사회에, 천손 신앙을 가진 청동기 집단이 유입되어 그들이 호랑이 집단과 곰 집단을 흡수한 후, 훗날 고조선으로 발전하는 단군 집단을 이루었다는 정도로 해석했던 것이다. 5세기 중엽의 고구려 벽화 고분인 각저총 씨름도에도 단군 신화의 모티브를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어 주목을 받았다. 즉 많은 새가 앉아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곰과 호랑이의 형상이 서로 등을 지고 앉아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다만 단군왕검이 처음 문헌상에 등장하는 것은 13세기 말에 등장한 《삼국유사》이고,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문헌 《고기》(古記)는 현전하지 않는다.[17] 1145년에 나온 《삼국사기》에 평양의 원래 주인으로 '선인왕검(仙人王儉)'이 언급되는 것을 보아 적어도 고려 중기에는 신화의 구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왕검은 단군을 칭하는 명칭이기 때문에 '선인왕검'이 '단군'으로 강력하게 추정되기는 하나 명확히 단군이라 명시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7세기 신라의 통일 이후 단군 신앙의 중심지였을 평양은 신라와 발해의 중간지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평양성이 잡초가 무성한 폐허가 되는 등 어떤 상황이었는지조차 파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전 시대의 전승이 계속해서 이어졌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후기 기록을 중국 사서에서 빌려써서 장수왕 등의 몇몇 군주들은 내정 기록보다 조공 기록이 더 많을 정도인지라 풍습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않을 정도라 이해가 안가는것도 아니지만. "단군"이라는 이름을 비롯하여, 신화 전체 모습이 확인되는 것은 《삼국유사》가 쓰인 시기를 비롯한 13~14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후 조선 초기에는 황해도 구월산[18]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 환인 · 환웅 · 단군을 모시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시기 단군은 민간 신앙의 중요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9] 때문에 최근의 역사학계에서는 단군을 대동강 유역에서 한정적으로 신봉되던 지방신으로 보는 견해가 점점 늘어나고 있고, 실제 청동기 시대 역사를 반영한 사실로 보는 데 소극적이다.[20][21]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서 대종교의 아류로 만들어진 태백교(太白敎)·단단학회(檀檀學會)와 같은 종교 집단의 유사역사학은 오늘날까지도 암암리에 사회 저변에 자리하고 있어서 문제가 된다.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은 단군은 실존인물이므로 '단군사화'라고 불러야 하며 '단군신화'라는 용어를 말하면 친일 식민사학자라고 몰아가기 일쑤지만, 민영휘, 영선군, 박영효, 이재극 등과 친일 유림단체들도 단군을 숭배하고 단군릉수축운동을 진행했다. 영상
애초에 '단군신화'는 주몽신화, 박혁거세신화, 수로왕신화같이 한국사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역사속에서도 흔하게 나타나는 건국신화로서 단어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하등 없다. 그저 고조선의 건국신화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일이니 용어 사용에 대한 문제제기는 환빠들만의 주장으로 간주하고 무시하면 된다. 애초에 내용부터 현실성이 떨어지는 전설이라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하더라도 신화라고 부르는게 당연한 것이다.
3. 단군 신화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의 것이나 이 외에도 《제왕운기》나 《세종실록지리지》 <단군세기> 등 다양한 서적에 여러 판본들이 존재한다. 단군에 대한 신화는 이같은 문헌기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구전문학으로도 전해내려왔는데, 상기된 문헌기록 역시 구전문학을 채록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많다.단군은 실존 인물일 가능성이 높지만 일종의 신화적 존재라는 성격이 강해 사실상 그의 대한 기록의 대다수는 이같이 신화적 성격을 가진다는 특징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단군 신화 문서 참고하십시오.
4. 단군 신앙
삼국 시대나 남북국 시대엔 단군에 관한 숭배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고구려에서 섬기던 '가한신(可汗神)'이 단군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단군의 제사에 대한 기록은 현재 고려시대부터 확인 되는데,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구월산에 삼성사가 있어 단인, 단웅, 단군을 모셨다고 한다. 다만 고려 시대 초, 중기엔 단군 숭배가 그리 크지 않았다. 7대 목종 시기에 삼성사 의주(儀注)[22]를 만들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고려 시대에 정부가 삼성사에 제사를 지냈거나, 지방 관리가 지낸 제사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23] 고려에서 단군의 비중이 늘어나는 건 말기로, 고종 대에 강화도로 대피한 뒤 강화도의 유적이 단군의 유적으로 알려졌고, 제왕운기와 삼국유사에선 단군이 시조로 높여졌다.[24]조선 왕조가 열린 뒤, 태종이 평양에 기자 사당을 지은 뒤 단군을 동쪽에 배향했다. 세종이 단군-동명성왕 사당을 지어 독립적으로 제사를 지냈고, 영조가 숭령전이란 액호를 내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25] 삼성사에서의 제사는 숭령전이 건립되며 중지되었는데 건물 자체는 지역 차원에서 보존하며 유지되었다. 이후 제사를 평양으로 옮겨버린 탓에 역병이 나돌았다는 소문이 돌며 지역여론의 항의가 거세지자 성종 대에 복구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26] 숭령전, 삼성사 외에도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 평양시 강동군의 단군묘[27] 등이 있고 동국통감 등 조선 시대 사서엔 단군이 시조로서 확실하게 등장하는 등 단군 숭배는 조선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28]
구한말엔 민족주의가 대두되며 단군이 매우 중시됐고, 더 나아가 단군을 신으로 숭배하는 대종교가 탄생했다.[29] 민간 무속 신앙에도 단군은 숭배 대상이었으며, 지금까지 논란이 많은 증산도 계통의 종교들에서도 단군을 숭배한다.
현재엔 단군과 관련된 장소론 평양 숭령전과 단군릉, 구월산 삼성사,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각지에 세워진 단군성전 등이 있다.
일본에도 단군을 제신으로 모신 신사가 있다. 가고시마현에 위치한 곳으로 옥산(玉山)신궁, 타마야마 진구라고 한다. # 왜란 시기에 끌려갔던 조선 도공들의 후예가 만든 것이다. 현지에 방문해 본 결과 야트막한 동산자락의 가족묘당으로 추측되는 묘역 위쪽에 위치해 있는데, 신물은 집체만한 바윗돌이고 그 바윗돌 위에 신당을 지었다. 규모가 작은 편이며 관리인원이 상주하지도 않고, 여느 신사들과는 달리 상시개방 하지도 않는 듯하다.
4.1. 대종교
자세한 내용은 대종교 문서 참고하십시오.구한말에 창시된 민족주의 성향의 종교. 주신을 환인으로, 단군을 신으로 받들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를 믿었을 정도로 융성했으나 현재는 교세가 매우 위축되었다.
4.2. 단군상
보통 학교나 특정 위인과 관련이 깊은 지자체에는 위인의 동상이 흔하게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유독 단군상만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개신교 신자들이 반달을 저지르는 경우가 잦은데, 극단적 개신교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민족의 조상신으로 숭배되기도 하는 단군의 상은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극단적 개신교인들은 단군상 뿐만아니라 절의 불상 등의 파손행위를 행하기도 한다.한때 활발하게 설치되었던 단군상은 단월드(구 단학선원)에 의해 세워진 것인데, 이 단체 역시 논란이 아주 많다. #
다만 단군상이 종교단체에서 자신들의 종교 홍보를 목적으로 세웠다고 이를 파괴함은 공공시설 파괴나 사유재산 침해에 해당하는 범죄다. 단군상은 기본적으로 해당 학교에 기부의 형식으로 증정된 것이기 때문에 해당 학교에 소유권이 있다. 종교의 자유가 타인의 재산까지 맘대로 빼앗을 권리를 주는 건 아니다.
사실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절차로 단군상을 철거하고 싶다면 그냥 해당 학교 기물에 권리가 있는 인물이나 집단에서 단군상 철거를 설득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어떤 논리를 들어 설득할지는 철거를 희망하는 이들이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립학교라면 해당 재단에 요청하고, 공립학교라면 해당 학교 교장에게 권한이 있으니 교장에게 요청하여 그들이 철거를 허락하면 온전히 합법적으로 단군상을 철거할 수 있다. 학부모회를 통한 요청은 이사장이나 교장도 쉽게 무시하지 못하기에 해당 학교 학부모회를 설득하는 게 가장 좋다. 이런 방법으로 합법적으로 철거된 단군상도 많고, 이렇게 철거된 경우는 문제될 게 없기에 이슈도 되지 않는다.
개신교 측에서는 아예 단군상문제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이후 이슬람 선교 및 단군상대책위원회로 발전했다.
4.3. 향산제
'향산제'는 함경도 지역에서 음력 10월 1일부터 10일 사이에 지내는 가택제사로 과거 고대 국가에서 10월에 제사를 지내던 풍습이 내려오는 것인데, 함경남도 단천시, 함경북도 무산군에서는 이 향산제를 '단군제'라 부르며 단군에게 제사지내며, 함경북도 명천군은 이름은 '상산제' 혹은 '향산제'라 부르지만 제사의 대상은 단군이다.5. 관련 유적
5.1. 구월산 삼성사
삼성사의 모습.삼성사(三聖祠)가 구월산(九月山) 성당리(聖堂里) 소증산(小甑山)에 있으며...【단인(檀因)·단웅(檀雄)·단군(檀君)의 사당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삼성사는 단군의 유적 중 가장 확실하고 오래된 유적으로 고려, 조선시대에 있던 신사(무교)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부터 나오며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나온다[30]. 또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고려 7대 목종 시기에 만든 의주(儀注)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즉 최소 7대 목종 시기부터 삼성사가 있었다. 삼성사 옆엔 장장평 혹 장당경이라 부르는 터가 있는데 이곳이 단군의 도읍지였다고 전한다.《세종실록》<지리지>
이 산의 동쪽 재(嶺)는 높고 크고 길어서 일식 정도 가야 안악군(安岳郡)에 이르러 끝납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천왕(檀君天王)을 문화현 사람들은 삼성당(三聖堂)이라고 항상 부르며, 그 산 아래에 있는 동리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고 일컫습니다. 신당(神堂)의 안팎에는 까마귀와 참새들이 깃들이지 아니하며,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가물 때를 당하여 비를 빌면 다소 응보를 얻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아마도 단군의 도읍이 이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삼성당은 지금도 아직 있어서 그 자취를 볼 수가 있으나, 지금은 땅 모양을 살펴보건대, 문화현의 동쪽에 이름을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단군의 도읍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증험(證驗)이 될 만한 것은 다만 동서 난산(東西 卵山)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이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라고 합니다.
신(臣)이 살펴본 바로는, 단군은 요(堯) 임금과 같은 때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때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이 넘습니다. 어찌 아래로 내려와 기자 묘와 합치하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단목(檀木) 곁에 내려와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三聖) 설은 진실로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0년(1428) 6월 14일자 기사. / 황해도 문화현 출신의 우의정 유관(柳寬)의 상소 중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아마도 단군의 도읍이 이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삼성당은 지금도 아직 있어서 그 자취를 볼 수가 있으나, 지금은 땅 모양을 살펴보건대, 문화현의 동쪽에 이름을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단군의 도읍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증험(證驗)이 될 만한 것은 다만 동서 난산(東西 卵山)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이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라고 합니다.
신(臣)이 살펴본 바로는, 단군은 요(堯) 임금과 같은 때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때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이 넘습니다. 어찌 아래로 내려와 기자 묘와 합치하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단목(檀木) 곁에 내려와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三聖) 설은 진실로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0년(1428) 6월 14일자 기사. / 황해도 문화현 출신의 우의정 유관(柳寬)의 상소 중
아사달산으로 여겨지는 구월산에는 북쪽 벽에 단웅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 단인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 단군천왕(檀君天王)을 모신 삼성사(三聖祠)가 있었다. 이 삼성사는 세종 때 평양으로 단군사당을 옮기면서[31] 폐쇄했는데, 단종 때 이 지방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당을 옮긴 것 때문에 변괴가 발생하고 역병이 돈다는 원망의 목소리가 있었다.
신(臣)이 황해도 백성의 발병한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 날에 문화현(文化縣) 단군(檀君)의 사당을 평양에 옮긴 뒤에, 괴이한 기운이 뭉치어 마치 귀신 모양 같은 것이 있어 밤에 다니며 검은 기운이 진(陣)을 이루고 행동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바라보고 놀라고 괴이하여 숨어 피하고, 이것으로 전파하여 고하였습니다.' 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병의 발생이 실로 단군의 사당을 옮긴 까닭이다. 여기(癘氣)가 먼저 구월산의 산간 민호에서 일어나 점점 문화 · 장연 · 재령 · 신천 등지에 번지어 전염되어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니, 민생이 불쌍하다.' 하였습니다.
(중략) 대저 단군이 평양을 떠난 지 400여 세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신이 되었으니, 여기에서 임금 노릇을 하였고 여기에서 신이 되었으니 이 땅을 싫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기자가 40대(代)를 전하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왕검성에 도읍하여 2세(世)를 전하였고, 고구려는 705년을 전하였으며, 신라가 (이 지역을) 병합한 것이 200여 년이고, 고려 왕씨는 400여 년을 전하였으니, 단군이 평양을 떠난 것은 아득하게 먼데, 평양을 돌아보고 연연하겠습니까? 또 산신이 되어 토인(土人)의 높이고 제사하는 것을 받았으니 어찌 평양에 즐겁게 옮기어 동명왕(東明王)과 사당을 함께 하려고 하겠습니까?
《삼국유사》의 주(註)에서 이른, 환인천제(桓因天帝)는 곧 유관(柳觀)의 상서에서 말한 단인(檀因)이고, 환웅(桓雄)은 천제의 서자(庶子)이니, 곧 이른바 단웅(檀雄)이라 하겠습니다. 상고 사람들이 그 근본을 잊지 못하여 사우(寺宇)를 창립하고 환(桓)을 고쳐 단(檀)으로 하였으며, 삼성이라 호칭하였으니, 과연 어느 시대에 창건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단군을 평양으로 옮기었는데 이성(二聖)은 어느 땅에 두었겠습니까? 이것은 단군이 토인에게 원망을 일으킬 뿐 아니라 이성(二聖)도 반드시 괴이한 것을 마음대로 하고 여역을 지어 백성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단종 즉위년(1452) 6월 28일자 기사 / 황해도 지역에 창궐하는 전염병에 대한 경창부윤 이선제의 상서문
(중략) 대저 단군이 평양을 떠난 지 400여 세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신이 되었으니, 여기에서 임금 노릇을 하였고 여기에서 신이 되었으니 이 땅을 싫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기자가 40대(代)를 전하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왕검성에 도읍하여 2세(世)를 전하였고, 고구려는 705년을 전하였으며, 신라가 (이 지역을) 병합한 것이 200여 년이고, 고려 왕씨는 400여 년을 전하였으니, 단군이 평양을 떠난 것은 아득하게 먼데, 평양을 돌아보고 연연하겠습니까? 또 산신이 되어 토인(土人)의 높이고 제사하는 것을 받았으니 어찌 평양에 즐겁게 옮기어 동명왕(東明王)과 사당을 함께 하려고 하겠습니까?
《삼국유사》의 주(註)에서 이른, 환인천제(桓因天帝)는 곧 유관(柳觀)의 상서에서 말한 단인(檀因)이고, 환웅(桓雄)은 천제의 서자(庶子)이니, 곧 이른바 단웅(檀雄)이라 하겠습니다. 상고 사람들이 그 근본을 잊지 못하여 사우(寺宇)를 창립하고 환(桓)을 고쳐 단(檀)으로 하였으며, 삼성이라 호칭하였으니, 과연 어느 시대에 창건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단군을 평양으로 옮기었는데 이성(二聖)은 어느 땅에 두었겠습니까? 이것은 단군이 토인에게 원망을 일으킬 뿐 아니라 이성(二聖)도 반드시 괴이한 것을 마음대로 하고 여역을 지어 백성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단종 즉위년(1452) 6월 28일자 기사 / 황해도 지역에 창궐하는 전염병에 대한 경창부윤 이선제의 상서문
이런 소문은 성종 시대까지 돌았다.
또한 성종 때 황해도 관찰사 이예가 이 삼성단의 사적을 조사한 문서에 의하면, 삼성단의 서쪽 협실(夾室)에는 구월산대왕(九月山大王)이 가운데 있고, 왼쪽에 토지정신(土地精神)이, 오른쪽에 사직사자(四直使者)가 있어 그 위판이 남향을 하고 있었다 한다.
5.2. 마니산 참성단
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돌로 쌓아서 단의 높이가 10척이며, 위로는 모지고 아래는 궁글며, 단 위의 사면(四面)이 각기 6척 6촌이고, 아래의 너비가 각기 15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석단(石壇)이라."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고려사》 및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강화도 마니산의 꼭대기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강화도에는 의외로 단군에 관한 유적들이 많이 있는 편이다. 또한 참성단 자체가 최소 삼국시대 이전부터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기록이 허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니산 참성단에서 채화하는 모습.*
5.3. 전등산 삼랑성
전등산(傳燈山)【일명(一名)은 삼랑성(三郞城)이니, 참성(塹城)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았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강화도 전등산의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은 것이라 한다. 다만 고고학적으로는 삼국시대의 성으로 본다.
강화 삼랑성의 모습.*
5.4. 평양 단군릉
자세한 내용은 단군릉 문서 참고하십시오.북한은 1993년 발굴한 평양에 위치한 고구려 양식 무덤을 단군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측은 고구려 시대에 복원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단군릉의 위치가 북한이기 때문에 확인을 하려면 통일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태지만 북한의 단독 조사이기 때문에 한국을 포함한 사학계는 회의적이다.
북한이 단군릉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출토된 뼈의 방사성 측정 연대인데, 이에 대해 이견이 많다. 그리고 평양이 단군 시대부터의 중심이라며 체제 선전에 써먹는다. 그전까지 고조선의 중심에 대한 북한의 학설은 요령 중심설이었다. 그러다가 평양 단군릉 발견 이후로 평양 중심설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단군릉 자체가 회의적이다 보니 그 배경에 대해서 이런 저런 추측이 많다.
중국과의 관계, 체제 안정화 등. 즉, 단군릉 발굴을 통해 학설이 바뀐 게 아니라 학설을 바꿀 필요가 있어서 단군릉을 만들어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북'조선'의 건국자 '김일성 = 단군', 2세 '김정일 = 왕건'(통일의 주역) 개념으로 국민들을 세뇌시키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6. 표준영정
자세한 내용은 표준영정 문서 참고하십시오.단군 표준영정 |
다만, 현대의 창작물이기 때문에 큰 역사적 의미는 없다.[32] 현재에 들어선 표준영정 자체가 여러 문제가 있어 비판을 자주 받는 관계로 예전처럼 많이 쓰이는 편은 아니다.
여러 잎사귀들로 치장되어 있던 70년대 이전의 단군 초상화들과는 달리 그러한 장식들은 사라진 형태이다.
7. 여담
자세한 내용은 단군 이래 문서 참고하십시오.
* 언론 등에서 심심하면 강조하고 싶은 내용에 '단군 이래 최대' 등의 문구로 등장하기도 한다. 곧 '유사 이래 최대'라는 말과 같은 의미.[33]
* 단국대학교의 단국이 바로 이 단군의 '단'과 애국의 '국'을 합쳐 만든 것이며 남북을 막론한 단군의 건국 정신을 받들자는 김구 선생의 뜻이 반영돼 지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단국대학교의 상징 동물 역시 곰이다.
* 언론 등에서 심심하면 강조하고 싶은 내용에 '단군 이래 최대' 등의 문구로 등장하기도 한다. 곧 '유사 이래 최대'라는 말과 같은 의미.[33]
* 단국대학교의 단국이 바로 이 단군의 '단'과 애국의 '국'을 합쳐 만든 것이며 남북을 막론한 단군의 건국 정신을 받들자는 김구 선생의 뜻이 반영돼 지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단국대학교의 상징 동물 역시 곰이다.
- 《산해경》의 <중차구경> 끄트머리에는 옥산 이후 십삼편에서 "다시 동쪽으로 150리를 가면 웅산(熊山)이라는 곳이다. 이곳에 곰의 굴이 있는데 늘 신인(神人)이 드나든다. 여름에는 열리고 겨울이면 닫히는데 이 굴이 겨울에 열리면 반드시 전쟁이 난다."는 기록이 있어 환인과 웅녀와 엮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산경》이다.
- 한민족의 조상인 만큼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가사에서 첫 번째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 우스개로 부동산 사기당하신 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외세에게 침입받기 쉽고 석유 한 방울 안 나는데다 여름이면 같은 위도 지역들보다 덥고 겨울이면 추운 땅에 터를 잡았냐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농담일 뿐, 애초에 단군왕검이 터를잡았다고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초기 위치는 만주 지방쪽이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었을 시절 생존가능한 곳에 터를 잡은 건 대단한 것이다. 고조선의 발상지는 요서(십이대영자 문화) 지방으로 추정되며 한반도가 고조선의 중심이 된 건 후대의 일로 기원전 3세기 초반에 연나라에게 요녕 지역을 잃은 후부터다. 물론 요서지방도 한반도랑 별 다를바 없어서 여름에 매우 덥고 겨울에는 강원도를 뛰어넘을 정도로 추우며 일교차가 끝내주는 등 차라리 한반도가 낫게 보일 지경.
사람 사는 건 어딜 가나 똑같은지 폴란드 최초의 왕조를 창건한 미에슈코 1세나 포르투갈 왕국의 건국자인 아폰수 1세, 이스라엘의 모세도 비슷한 농담이 있다. 모세는 아예 이스라엘 총리(골다 메이어)가 깠을 정도. 이스라엘인을 40년이나 광야를 해메게 한 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땅으로 이끌었다고.[34]
- 프로 야구에서 두산 베어스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를 단군 신화 매치라고도 한다. 위와 연관지어서 KBO 리그 심판 최규순 금전요구 사건이 터졌을 때 단군 신화가 "사실은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매수한 것"이라는 드립이 터지기도 했다.
- 1990년대 중반에 단군 신화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단군의 땅이라는 텍스트 MUD 게임이 서비스되었다. 한국 최초의 상용화된 다중사용자 게임 중에 하나이다. 또 일부 머드 게임에서 최고 레벨에 달한 사용자를 단군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 2006년 SBS에서 단군을 주제로 한 사극을 기획 중이라고 밝히고 다음해인 2007년 'SBS 2007년 대기획'을 통해 100부작 대하사극이 될 것임을 밝혔으나 2010년에 마지막 기획 기사를 남기고 아무런 얘기가 없는 걸 보니 결국 무산된 모양.
- 2019년 9월 23일 단군문화포럼 주최 '독립운동의 상징, 단군 영정 전시회'에서 1883년 10월 봉안한 단군 영정을 선보인다고 밝혔다. 전시회는 9월 26일부터 10월 15일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린다. 단군 초상화는 20세기 이후에 제작한 그림만 존재한다고 알려져 이 그림이 현존 최고(最古) 작품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
- 한민족의 시조를 상징하는 만큼, 어떤 순서의 첫 번째를 비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을 관습적으로 "단군의 후손"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8.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단군/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9. 관련 문서
[1]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9호.[2] 참고로 정인호가 집필한《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에 실린 ‘동국(東國)을 창립(創立)하신 단군(檀君)의 상(像)’ 삽화가 가장 오래된 단군 초상화로 유명하며, 그외에도 여러 그림이 있다. 대종교에서 쓰는 것도 있으며 황해도 삼성사에서 쓰는 것, 김종래가 그린 것, 홍석창이 그린 현정회에서 쓰는 것도 있다.[3] 신화상 기원전 2333년 이전[4] 1900년 대한제국 고종 추존.[5] 《제왕운기》에선 1048년.[6] 초대 단군만을 본 것이 아닌 전체 고조선의 단군(추정)들의 재위기간을 합친 것으로 추정되거나 아직 확실하지 않아 보이는 기록이다. 자세한 것은 후술.[7] 단군은 종교지배자를 뜻한다(제사장).[8] 왕검은 정치 지배자를 말한다.[9] 《삼국유사》에선 유화부인과 동일인물로 나온다.[10] 해부루왕(解扶婁王)[11] 추모왕(鄒牟王)[추정] 단군릉에서 발견된 단군의 유골이라고 주장하는 유골의 키이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단군릉에 묻힌 인물이 단군이 아닌 고구려의 지방귀족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군의 키가 아닌 무덤에 묻혀있던 고구려 지방귀족의 키일 가능성이 높다.[13] (예: 2대 단군 - 3대 단군...)[14] 고조선의 후기 수도인 왕검성과 같은 검소할 검 자이다.[15] 이를 통해 단군왕검이란 "하늘의 임금님"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16] 첫 음절은 고대 발음이 기록된 것이 아닌 중세 한국어에서 따온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대문자로 쓰는 것이 관습이다.[17] 사실 일연이 인용한 책 중에 제목이 《고기》(古記)인 서적이 있는지, 또는 그냥 옛날 기록(고기, 古記)이라는 뜻인지도 불명확하다. 다만 조선 초기까지는 고기류의 서적들이 다수 현존해있었고, 여러 서적에서도 인용되어 그 내용이 어떠한지 알수는 이다. 다만 설화적인 내용 또는 과장된 내용이 상당수를 차지했던 관계로 슬프게도 후세의 서적에 온전히 전해지지는 못했다..[18] 오늘날 황해남도 안악군.[19] 조선시대 중국(명)에서 사신이 오면 의주→평양→한성(서울) 순으로 들어오는 게 순리였는데, 평양에서 지방관들의 대접을 받으며 기거할 때 반드시 이 삼성사에 들러 제례를 갖췄다고 한다. 조선 초기 영묘조(세종조)까지의 일이다.[20] 아래에서도 설명하겠지만, 단군 신화의 연대 자체가 ① 단군이 중국의 요와 동시대의 인물 → ② 요의 역사적 존재를 사실로 인정하고 연대를 비정 → ③ 단군의 역사적 연대를 획정이라는 방식으로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는 요 임금은커녕 하나라조차 사실로 인정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논리의 고리 자체가 끊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단군 신화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역사시대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비난하면서도 기원전 2333년이라는 연대는 철석같이 믿는 이중잣대를 들이댄다. 다만 정말로 환빠인 사람들은 대체로 삼황오제를 긍정하며 단지 한국에 유리하게 해석할 뿐이다.[21] 다만 무작정 이중잣대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요임금 관련 부분은 나중에 추가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 혹은 고조선 시대의 구전전설이 평양 일대에서 계속 전해져 내려오다가 구체적인 연대 제시를 통한 신뢰성 상승이나 중국에 지지 않는 국가적 자긍심 고취 등의 이유로 요 임금 관련 내용이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원래 구전전설이나 설화, 전설 등의 문학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살이 붙는 특징이 있다.[22] 제사 의례를 기록하고 주석을 단 글.[23] 고려사엔 동명성제사에 고려 정부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압을 내려 제사 지내고, 평양 관리들은 매달 1일, 15일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를 보아 고려 초, 중기엔 동명성왕 숭배가 단군 숭배보다 더 컸다는 걸 알 수 있다.[24] 이는 고려 중기에 제작된 삼국사기에선 단군의 기록을 아예 넣지 않은 것과 대비된다. '선인 왕검'의 기록은 있지만 선인 왕검이 곧 단군인지는 알 수 없다.[25] 이때 기자는 따로 숭인전에 배향되었지만 동명성왕은 숭령전에 같이 배향되었는데 해모수가 단군과 동일시되면서 동명성왕은 단군의 아들로 취급되었던 걸로 추정된다.[26] 다만 원래는 위패와 목상을 같이 모시고 있었는데, 태종 대 재상 하륜이 전국의 사당에 모셔져 있던 목상들을 혁파하고 위패만 모실 것을 건의하여 삼성사에서도 목상은 없어지고 위패만 남게 된다. 이 목상은 복구되지 않은 걸로 보인다.[27] 대한제국 때 단군릉으로 격상됐다.[28] 더불어 위만은 감히 단군의 정통성을 해한 찬탈자였기 때문에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져 극히 멸시받게 되었다.[29] 참고로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이지만, 대종교 측에서 주신으로 받드는 것은 단군이 아닌 환인이다.[30] 삼국사기 잡지 지리에선 안 나온다.[31] 평양으로 옮긴 단군사당이 바로 평양의 숭령전이다.[32] 물론 예전에 단군을 묘사한 그림들도 기껏해야 조선시대 후기의 작품이라 매한가지이긴 하다.[33] 비슷한 사례로 일본에서는 일본 신화의 창조신 이자나기를 같은 용례로 쓴다. 대표적으로 일본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이자, 리즈 시절인 이자나기 경기가 있다. 이쪽은 원래는 1950년대 전반 경제 성장으로 인한 호황을 진무 천황 이후 최대 호경기라고 해서 '진무 경기'라고 했다가, 1950년대 후반 호황이 계속 이어지자 아마테라스 오오카미 이후 최대라는 의미로 해당 신에 대한 신화에 등장하는 '이와토 경기'라고 한 이후, 1960년대 호경기에는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이자나기 경기'라고 한 것.[34] 다만 이후 이스라엘에서 셰일가스가 꽤 많이 난다는 것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