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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2:09:29

영제(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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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ece5b6>
후한 제12대 황제
영제 | 靈帝
파일:문릉.jpg
문릉 전경.
출생 156년[1]
후한 병주 하간국
(現 허베이성 창저우시 인근)
즉위 168년 2월 17일
후한 하남군 낙양 외하문 만수정
(現 허난성 뤄양시)
사망 189년 5월 13일 (향년 33세)
후한 하남군 낙양 남궁 가덕전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문릉(文陵)
재위기간 후한의 황제
168년 2월 17일 ~ 189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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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ece5b6> 성씨 유(劉)
굉(宏)
부모 부황 효인황
모후 효인황후
형제자매 외아들
배우자 효령황후, 영사황후, 영회황후
자녀 2남 1녀
작호 해독정후(解瀆亭侯)
시호 효령황제(孝靈皇帝)
연호 건녕(建寧, 168년 ~ 172년)
희평(熹平, 172년 ~ 178년)
광화(光和, 178년 ~ 184년)
중평(中平, 184년 ~ 189년)
}}}}}}}}} ||
1. 개요2. 생애
2.1. 2차 당고의 금(169)2.2. 매관매직의 선두주자2.3. 환관과 척신이 설치고 난세가 시작되다
3. 가족 관계4. 평가5. 기타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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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나라의 제27대 황제이자, 후한의 제12대 황제. 는 굉(宏).

시법에 의하면 귀신 령() 자는 혼군에게 주는 시호다.[2] 환제와 함께 환령(桓靈)이라고 묶여 불리며 후한 말의 대표적 암군으로 손꼽힌다.

명 4대 암군 가운데 정덕제만력제를 섞어 놓은 것 같은 한심한 황제였다. 무능한데 돈에만 미쳐버린 사람으로, 황제라는 작자가 앞장서서 매관매직을 장려하는 정신나간 짓거리를 하였다. 후한은 그야말로 영제 때문에 망했고 십상시태평도 또한 영제의 혼치로 벌어진 증상에 가까웠다.

영제의 아들들인 소제헌제동탁, 이각곽사, 조조에게 실권을 빼앗겨서 자신들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고 퇴위당했다. 따라서 영제는 실권이 있었던 마지막 후한 황제라고 할 수 있다.

영제는 장제의 현손, 하간효왕 유개(劉開)의 증손, 해독정후(解瀆亭侯)인 유숙(劉淑)[3]의 손자, 해독정후인 유장(劉萇)[4]의 아들이다. 친모는 효인황후 동씨[5]이며, 외삼촌은 동총, 외사촌은 동중, 동승이 된다.[6]

환제의 5촌 조카로 환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에게는 배후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환관들과 권력 다툼을 하던 대장군 두무두태후에게 옹립되어 13세에 즉위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두무는 당고의 금 때문에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2. 생애

2.1. 2차 당고의 금(169)

즉위 직후 2차 당고의 금이 벌어졌다. 두무는 정권이 영제로 바뀐 직후, 당인의 금고를 해제하여 청류당에 속한 사람들을 등용함과 동시에 그들과 결탁하여 환관을 일소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외척 두씨 세력은 진번 · 이응 등 청류에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을 등용하며 기회를 엿보았지만 오히려 환관들에게 계획이 들통나 거센 역습을 받고 패배했다.

두무는 일찌감치 자살해버렸고, 이응을 포함해서 잡혀 죽은 자만 100여 명이 넘었고, 사죄(死罪), 유죄(流罪), 금고의 처분을 받은 자는 600~700명이 되었다. 태학생 1천 명이 체포되어 사인 집단은 강한 타격을 받았다. 사건에 연루된 외척들도 마찬가지였고. 결론적으로 환관을 제어할 집단들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브레이크가 사라졌다.

단순히 금고형에 처했던 1차 사건과는 달리 아예 이들을 사형에 처하는 등 호족 및 사대부 세력을 극단적으로 배척하면서, 후한 정권에 대한 지지는 폭락했다. 즉, 환제의 '당고의 금'은 말그대로 금령 정도였지만, 영제의 당고의 금은 다른 말로 '당고의 옥'이었다. 대규모 옥사와 국문으로 시작부터 외척과 사족보다 환관이 우위를 점하도록 확정을 지었다.

이후로도 영제는 사족들을 대대적인 언론 탄압으로 축출했고, 직언을 매우 싫어하여 직언이 들어오는 족족 목을 날려버렸다. 이러다보니 영제의 독재와 무능, 불통에 실망하고 질린 사대부들은 출사를 포기하고 기반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했으며, 영제의 뜻에 영합하는 친황제 세력, 즉 환관 세력과 약삭빠른 사대부들만 권세를 누렸으니 여기서 청류파와 탁류파라는 기준이 생겨났다. 황제에게 영합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 영합하는 사람은 더럽다고 칭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2.2. 매관매직의 선두주자

사실 영제가 원래는 황실과 거리가 있었고 집안이 가난하였기에 장사꾼으로 큰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려고 했다. 그래서 두씨 일족은 배후에 세력이 없어 다루기 쉬우리란 이유로 영제를 황제로 옹립했지만, 결과적으로 영제는 당고의 금과 두씨 일족을 숙정하여 불과 13세 나이에 견제세력이 전무한 절대왕권을 구축했다.

물론 영제가 13세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는 환관들에게 이용당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일반 사회와 격리된 중국 황실의 특성상 환관 세력은 황제권에 기생하는 방법이 아니고는 권력을 휘두를 수 없었고, 따라서 그들이 황제 독재 체제를 옹호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렇기에 환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환관들을 통해 강력한 외척세력을 박살낸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영제 자신 역시 치세 전반에 걸쳐 반대세력을 폭압적으로 숙청함으로써 강력한 황권을 유지하는 일만큼은 무척 열심이었다.

문제는 영제가 가난한 시절에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일에 완전히 몰두했기 때문에 황제가 되어서도 오직 돈벌이만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영제는 즉위할 때까지는 돈을 실컷 쓸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으나, 실제로는 아무리 군주라고 해도 국가예산을 쓰는 데는 엄연히 정해진 절차가 있었던 데다[7], 이미 영제 이전부터 심해진 부정부패로 엉망이 되어가던 후한의 국고는 황제가 마음대로 예산을 빼서 쓸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다 보니 영제는 마음 먹은 대로 돈을 쓸 수 없음을 알자 각종 기묘한 핑곗거리를 만들어 비자금을 조성했고, 최종적으로는 아예 모든 벼슬에 정가를 매기며 황제인 자신이 직접 매관매직에 나서는 기행을 벌였다. 당시 후한에서 이미 매관매직이 환관과 외척을 통해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이렇게 대놓고 황제가 매관매직에 나선 경우는 전무후무했다.[8] 심지어는 벼슬을 외상으로 팔고 부임 후 정가의 2배를 내는 제도까지 도입했다. 안 내면 당연히 관직을 박탈했다. 더 골때리는 사실은 신용카드마냥 진짜 관직 매매가를 월 단위 할부로 치를 수 있게까지 했다는 것.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매관매직이 십상시들의 소행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전부 다 돈에 미친 영제가 벌인 악행이었다.[9] 나중에는 신임 관리는 물론 자리를 옮기는 기존 관리들도 반드시 궁궐 수리 명목으로 돈을 바쳐야 부임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직한 사람들은 황명이 떨어진 이상 가지 않는 것은 황제를 거역하는 대죄가 되고, 그렇다고 당장 돈을 낼 재력도 없고, 돈을 내려면 황제에게 외상으로 빚을 진 뒤 백성들을 수탈하는 방법밖에 없었기에 부임하기를 싫어하여 사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자 영제는 사직하는 관리들한테 화가 나서 부임(= 황제에게 돈을 헌납)을 하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협박하여 견디지 못한 관리들이 자살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좋은 예로 거록태수로 임명된 사마직이란 관리는 평소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는데, 영제는 사마직이 청렴하다는 이유로 '특별히' 정가인 2천만 전의 15%에 해당하는 3백만 전을 깎아주면서 사마직에게 부임(= 돈 헌납)을 강요했다. 영제의 명령을 거절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것도 차마 못할 짓이라고 생각하던 사마직은 고민 끝에 임지인 거록으로 향하던 중 자살했다.

관리들은 황제에게 진 빚을 질질 끌 수 없으니 백성들에게 온갖 탈법, 불법행위를 자행하여 돈을 긁어모아 바치게 되었고, 이는 황제가 시킨 것이나 다름없어 이러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영제 자신도 가렴주구를 하여 이러한 현상을 더욱 조장하였기 때문자에 황실의 부정부패는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매관매직이 공식화되자 통치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야심가와 협잡꾼들이 한 몫 잡아볼 심산으로 관직 경매에 끼어들었다. 게다가 영제는 벼슬의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관직의 재임기간을 대폭 줄여 임기는 대체로 1년을 넘지 못했다.

거액을 바치고 관직에 출사한 협잡꾼과 야바위꾼들이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영제에게 거액의 상납금을 바치고, 고위 관료들에게도 뇌물을 바치고 자신들도 본전을 뽑고 한 몫 잡기 위해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했다. 일례를 들어보면 최고 실세였던 환관 왕보의 양자 왕길은 패국상으로 재임하던 기간 중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넘는 1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이는 왕길이 제 욕심을 충족시키고자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과 요역을 부과했고, 이를 제때에 이행하지 못하는 백성들은 모조리 잡아들여 매질해 죽인 것이다. 이러다보니 굶어 죽거나 맞아 죽지 않은 백성들은 착취를 견디지 못해 고향을 버리고 유랑하는 유랑민이 되거나 나중에는 아예 도적떼가 되었다.

이런 지경이니 당대에 매관매직이 아닌 방법으로 관리가 된 사람이라는 게 도적 퇴치 전문가로 명성이 자자한 손견, 장거장순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현위가 된 유비 정도에 불과했다. 후에 유비가 독우를 패고 도망간 이유도 벼슬을 얻는 과정에서 매관매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짤릴 줄 알고 선수를 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매관매직으로 생긴 수익의 대부분은 영제 개인의 비자금이 되었다. 서원의 창고에 돈이 꽉꽉 들어차다 못해 넘쳐나자, 영제는 아예 황궁 밖의 십상시들의 창고에 나눠 보관토록 하는 꼼꼼함을 보이기도 했다. 십상시는 환관 세력 내에서도 대체로 신흥세력에 속하는데, 이들은 영제의 비자금 마련이라는 목표에 따라 영제와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충실하게 보필하면서 떠오른 비선조직이었다. 그 중간에서 단단히 한몫 챙겼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즉, 영제는 '한나라'라는 회사의 회장이 되어서 매관 매직 사업으로 돈을 번 뒤, 이윤의 대부분을 비자금으로 빼돌렸단 소리가 된다. 황제 단위의 기업정치였다.

당연히 이에 대해 직언하는 신하들도 증오하여 그들을 내쫓거나 죽이는 등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철저히 숙청했다. 막강한 황권을 구축하는 것과 그 권력을 이용한 개인 비자금 조성에는 무척 열정적이었지만, 정작 국가경영에는 관심이 없었고 재위 내내 십상시의 간신질에 놀아나고 향락에만 빠져 살았다. 여색은 기본이고,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토목공사를 벌여 스프링클러로 도로를 청소하는 첨단 설비를 만들어놓고 즐거워하였다.

때로는 스스로 장군 복장을 하고 무상장군(無上將軍)이라 칭하며 군대를 사열하면서 놀거나, 아예 자기는 상인으로 차려 입고 작은 모의 시장을 만들어 궁녀들을 저잣거리 여성들로 삼아서 장사 놀이를 했다.궁녀들이 곧 사치품들을 사고 팔기는커녕 서로 자기가 갖겠다며 아귀다툼을 벌였고, 광기 들린 영제는 그 꼴을 보면서 술을 마시고 즐겼다고 한다. 거기다 본인이 키우는 개에게 관료들이 쓰는 관인 진현관을 씌워놓고 희롱하고 놀았다.[10]

또한 나귀를 수레에 여러 마리 묶어놓고 낙양 도심을 질주하기도 했는데, 낙양 사람들은 이걸 한심하게 여기기는 커녕 너도 나도 즐거워하며 이 꼬라지를 따라했다. 이 때문에 당나귀를 타는 것이 유행이 되어 당나귀 값이 말보다 비싸졌다는 해프닝도 있다. 후한서에 나오는 영제가 타고 다닌 흰 당나귀는 바로 은거하는 자의 상징이 되었다. 또 퉁소를 잘 불었다고 한다.

영제가 돈벌이와 향락에만 빠져사는 동안 후한은 도적떼의 약탈이 빈발하는 가운데 관리들의 수탈이 더욱 가혹해지자 백성들은 토지를 버리고 유랑하기 시작하는 막장이 되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기근이 일어나고 질병이 돌아서 아사자와 유랑자가 속출했다. 국방이 안전하지도 않아 그동안 변방에 숨어살던 선비족, 강족 등의 이민족들이 기회를 엿보아 침입하여 변방을 약탈하는 사태들이 연달아 터지기 시작했다. 이를 보면 후한 조정은 질서와 안보유지라는 국가의 기본적 기능을 포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무한 수탈이 반복됐으니 한나라는 스스로 망한 것이지 다른 누가 멸망시킨 것이 결코 아니다. 말 그대로 황제와 대신들이 모두 벼슬하는 도둑놈들이 되었으니, 황건적의 난이 괜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영제가 황제로서 정무를 얼마나 보지 않았던지[11] 옥새가 어디 있는지 까먹는 지경까지 갔고 결국 옥새를 진짜로 분실하고 말았다. 물론 옥새는 황제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라 엄연히 부보랑(符寶郞)이라고 하는 옥새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직책이 있었다. 따라서 영제가 정무에 관심이 없기도 했겠지만 그것이 중요하다기보다는 나라의 혼란상이 옥새를 담당하는 관료들까지 제 소임을 하지 않거나 부재할 정도로 심각했다고 봄이 적절하다.

2.3. 환관과 척신이 설치고 난세가 시작되다

이런 폐정의 결과 184년에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같은 해에 서량에서는 변장, 한수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186년에는 흑산적이 하북을 휩쓸었고, 187년에는 장거, 장순의 난이 일어나는 등 10만 명 이상이 가담한 초대형 반란들이 각지에서 잇다랐다. 마침 185년에는 초신성이 나타났는데,[12] 《후한서》 <천문지>에는 "점을 쳐 보자 병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했다.#

이에 앞선 178년에 영제는 황후였던 송씨를 내치고 송씨 일족을 숙청, 배후세력이 없던 천민 출신 하씨(영사황후)를 새 황후로 세웠다. 하씨의 오라비 하진은 하남윤으로 승진했고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184년에는 대장군으로 승진해 반란 진압의 총지휘를 맡았다. 그는 성공적으로 진압을 마치고 영제와 십상시의 탄압대상이었던 지방 유림 세력인 청류파에게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그 위상이 크게 상승했다.

지방 유림 세력이 반란에 합류할 것이 우려되었기에 당고는 해제되었고, 황건적의 난 진압에 합세했던 청류파들은 당고의 해제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했으며, 황건난 발발 이전부터 청류파를 규합하며 재야의 거두로 떠올라 있던 원소가 하진을 지지하면서 하진과 십상시와의 대립은 깊어져 갔다. 동시에 하 황후와 영제의 친어머니인 효인황후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다.

188년, 황건적의 난을 필두로 한 반란들이 대충 마무리되자 영제는 스스로 무상장군(無上將軍)[13]을 자칭하며 아껴두던 비자금을 풀어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를 설치하고, 십상시 중 건석을 상군 교위로 삼아 서원팔교위의 통수권을 맡겼고, 이하 중군 교위 원소, 하군 교위 포홍, 전군 교위 조조, 조군좌 교위 조융, 조군우 교위 풍방, 좌교위 하모, 우교위 순우경(淳于瓊)이 통솔했다.[14] 영제의 서원군 창설은 각지에서 반란이 잇다르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중앙군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낀 모양이다. 특히 상군 교위 건석은 무상 장군인 영제를 대리해 서원군을 지휘하는 형식으로 군부 최고위직인 대장군 하진조차 일개 교위인 건석의 명령에 따랐는데, 이는 하진을 견제하려는 조치인 것 같다.

또 영제는 그해 유언의 제안을 받아들여 목(牧) 제도를 부활시켰다. 원래 기원전 1세기 말 전한 성제 시절에 주목(州牧)을 설치했다가 폐지하였다. 기원후 25년 후한이 건국된 이래로 주의 장관을 자사(刺史)라고 불렀는데, 야심을 품은 유언의 제의로 188년부터 일부 자사를 목(牧)으로 바꿔 불렀다. 후한의 호족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대토지를 바탕으로 소작농을 부리고 사병을 키우는 등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다. 후한 말기에는 중앙 관리를 능가하는 세력을 얻어 환제대에는 호족들이 "우리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라는 말을 하고 다닐 정도로 횡포가 극에 달했고, 후한 정권의 지방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목 제도 부활은 이런 상황에서 호족들을 장악해 보려는 의도였다. 이뿐만 아니라 영제의 실정으로 발생한 당고의 금, 황건적의 난을 비롯한 각지의 난으로 인해 지방의 통제력이 더욱 약화된 후한 체제를 보완하기 위한 면도 있었다. 이는 중앙군의 강화를 노린 서원팔교위와 성격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목은 주의 관원들을 감독하는 감찰관일 뿐 아니라 주 전체를 다스리는 수장이었다. 목이 되면 한 주의 군사력과 인력, 재력을 한손에 거머쥐었다. 이 정책은 후한의 지방자치화, 다르게 말하면 후한의 사분오열을 가속화시켰다.[15]

황건적의 난이 진압되었지만, 난을 진압한 관리들은 후한의 분열을 이끌고 있었고, 이미 이때 후한은 국가 멸망 테크의 궤도로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제는 이러한 혼란 속에 중병에 걸려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주색에 빠져서 몸에 많이 해를 끼쳤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일찍 사망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에 뒤이어 일어난 십상시의 난동탁의 집권은 한나라를 끝장내버렸다. 한마디로 국민들에게 피해만 주고 죽어버린 더러운 황제다. 그래서 그의 시호도 어지럽히고 그 어지러움을 덜어내지 못한 어리석은 군주라는 뜻의 영(靈)이다. 그의 학정은 위진남북조시대라는 중국사 최대의 혼란을 야기했으며 400년이 지난 수나라문제나 되어야 안정되었다.

3. 가족 관계

4. 평가

상인 마인드로 황제 노릇을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보여준 반면교사이자 위진남북조라는 중국사 최악의 혼란기를 열어젖힌, 나쁜 의미로 역사적인 황제였다. 전대의 주유왕, 이세황제와 후대의 수양제, 당의종, 송휘종, 만력제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악의 군주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장기적인 피해로 따지면 이들 중에서도 영제가 제일 압도적이다. 어떤 의미로는 중국사 최악의 황제.

제갈량의 출사표에 따르면 유비와 제갈량은 후한이 어떻게 망했는지 여러 차례 논의하면서 환제와 영제의 어지러움을 탄식하고 통한해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 후한을 결정적으로 박살낸 사람은 동탁이지만, 환제가 환관전횡의 배경을 조성했다면 영제는 망조든 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며 후한의 사회 체계 전체를 통째로 헤집어 놓았다. 정통성 없는 동탁의 집권이라는 계기 하나만으로 겉껍데기만 남은 국가 시스템이 한 방에 공중분해되고 수십 년간의 내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이 시기 먹고살기 힘들어진 사람들은 옛 진(秦)나라에 의해 6국이 멸망하자 고조선으로 대거 이동했듯이 대규모로 이민갔다고 한다.

암군의 측면이 두드러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개인의 권력과 권위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직언하는 신하들을 내치거나 죽이는 행보는 폭군의 그것으로 매관매직과 환관 중용, 신권의 약화를 통해 자기 자신의 위치를 극도로 강화하고자 하는 면모가 보인다. 하황후와 하진을 중용하면서 환관 세력을 통제하고 내부의 충성경쟁을 시킨 것이나,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황보숭, 주준, 노식 같은 인물들이 활동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은 것을 보면 정치감각이 제로라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그의 정치감각이 대단히 근시안적이라는 점과, 본인의 안위와 욕구에는 철두철미하게 충실하지만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의도가 대단히 노골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로 누릴 것은 다 누리고 하고 싶은 것은 다하면서 자기 자리와 권위는 안전하게 보존한, 나쁜 의미로 임금답게 살다 간 인물이다. 일단 영제의 치세가 후대에 끼친 큰 악영향을 두 가지만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황건적의 난을 비롯한 거대 민란과 매관매직 등으로 인한 실정으로 인해 지방호족들의 군벌화가 급속도로 진행됨.

영제 이전의 지방호족들은 수도로 천거한 관리를 내보냄으로서 중앙 정계와의 관계를 느슨하게 유지하되, 지역 내의 영향력 발휘 및 실권은 장악하는 형식에 만족했다. 호족들 입장에서는 굳이 군사력을 키워 중앙 정계와 적대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중앙정부는 중앙정부대로 그들과 적대하지 않고 관직 등용등을 통해 그들의 실권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중앙정계로 진출한 청류파가 지방호족 + 유학자들의 조합이었던 것도 이에 영향을 끼쳤다. 정치적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는 중앙권력의 존재는 지역에 근거를 든 그들에고도 실질적인 메리트였을 뿐만 아니라, 힘이 아니라 명분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유가적 가치추구와도 충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중앙정부에 대응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한정권의 실책을 어느 정도나마 해소할 수 있었던 청류파를 완전히 멸족시키다시피 몰아낸 영제의 환류파 편들기 매관매직에 의한 극단적인 친위세력 양성 구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가렴주구 행태는 호족들과 유학자들은 물론이고 그 아래에 있던 바닥 민심마저 한나라에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특히 민심이 흔들리면서 황건적의 난을 비롯한 민란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도적들이 들끓었다. 한나라에 의존하는 권력구도가 흔들리고 호족들은 본격적으로 각자도생에 들어갔다. 이 와중에 세력과 군사력을 갖춘 지방관들이 호족의 협력 하에 군벌이 되어 각종 위협으로부터 각 지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부상했다. 비록 십상시의 난과 동탁의 난이라는 대규모 사건이 있었다고나 하나, 영제의 폭정이 아니었더라면 중앙정부의 정치적 난맥만으로 군벌들에 의해 나라가 쪼개지는 군웅할거와 삼국의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2. 한 황실을 보존할 유능한 정치집단과 친위세력을 자기가 알아서 파괴함.

청류파든 환류파든 외척이든 간에 각자 나름의 욕심과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한 황실에 접근한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 중에서는 능력과 충심을 가지고 한나라와 한 황실을 보위할 지사들이 분명히 있었고, 오랜 기간 존속해온 한왕조의 권위와 정통성, 그리고 유구한 통치에는 그런 지사들이 충분히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영제는 본인의 권위와 권력에만 집착하면서 황제가 없으면 존속할 수 없는 환관세력과 관직을 내려준 황제 자신에게만 철저히 복종하는 탐관오리들만으로 중앙정권을 구성하고자 했고, 그에 속하지 않는 이들을 잔인하게 숙청하거나 내쫓음으로서 한황실에 대한 권위와 정통성을 시궁창에 처박아버렸다.

이렇듯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암군이 되다 보니, 군주에게 충성할 명분이 사라졌다. 한황실을 걱정하는 지사들은 탄식하며 낙향하거나 은거했다. 올라가봤자 관직도 못 가지고 돈 없고 왕의 눈에 거슬리면 죽거나 쫓겨나는 판에 무슨 수로 상소를 하고 간언을 한단 말인가? 이를 보자면 황건적의 난 당시에 하진황보숭, 주준, 노식 같은 능력 있고 제정신 박힌 인재들을 등용할 수 있었던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특히 호족 세력들을 상대로 대놓고 빅엿을 먹임으로써 지역 호족들 중에서 중앙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이를 지지할 근왕세력을 실질적으로 말소시키는 바람에 한황실을 완벽하게 고립시키는 등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그나마 황실을 지키고, 새로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야심가들과 환관 사이의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하진이 허무하게 암살당하고 나서부터는 사실상 정치세력으로서의 근왕세력은 끝나버리고 만다. 당장 영제 시절 전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방관 + 호족 + 중앙정계의 실력자들과 극소수의 지사들의 활약으로 이를 실패한 민란수준에서 정리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후소제 시절에 이르러서는 군공도 없이 제멋대로 중앙에 이민족 군대를 끌고 온 군벌에 불과한 동탁이 수도로 진군하여 명분도 없이 황제를 갈아치워도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할 지경이었다. 각 군벌들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세력을 넓히려고 시도하면서 전국이 전란기로 완전히 접어들어 한황실의 권위가 밑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이렇듯 모든 면에서 엉망진창인 정치를 하였던 영제와 선황제였던 환제를 함께 엮어 아예 환령(桓靈)이라는 합성어가 만들어졌으며, 환령지말(桓靈之末)은 이 혼란했던 시대 이름으로 통용된다. 덧붙이면 그래도 환령 가운데서는 환제가 나았다고 볼 수 있다. 시법에서는 국토를 개척하고 먼 곳을 복속시킨 것을 환()이라고 하며, 어지럽지만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을 영()이라고 했다. 그래서 '환(桓)'이라는 시호는 제(齊)나라제환공, 오(吳)나라 장사환왕 손책의 경우처럼 정말로 영토를 넓혀 국력을 향상시킨 군주가 받았던 반면, '영(靈)'이라는 시호는 춘추시대 진(晉)나라영공처럼 무도한 임금에게 내리는 시호였다. 그러나 환제 이후로 환(桓)과 영(靈)이라는 시호 모두 어리석은 임금에게 주는 시호가 되었고, 환령(桓靈)동아시아 몇 천 년 역사 내내 암군의 대명사가 되어 자자손손 대차게 까이게 된다.

환령지말은 한국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정사 삼국지》 <한조>에서는 이 시기 살기 힘들어진 중국의 백성들이 한반도로 많이 유입됐다고 쓰고 있고 실제 고고학적으로도 이 시기 한반도 남부까지 기존과 다른 외부문물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훗날 서진의 사례 교위 유의는 당시 황제였던 사마염을 환령에 비유하였다. 이에 어이없어한 사마염이 "아니,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으로 부를 축적한 황제들이 아니오? 짐이 그들과 동급이란 말인가?!"라고 불쾌해 하자 유의는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을 해서 (일부에 불과하지만) 국고라도 충당했지 폐하께서는 매관매직을 하여 폐하의 살림만 채우시니 환제와 영제보다도 못하옵니다!"라며 폭풍같이 디스했다. 이에 사마염은 화를 내지 않고 "환제와 영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짐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 하며 웃어넘겼다.

영제는 이런 신하가 나오는 족족 목을 날렸으니 확실히 그런 점에서는 사마염이 영제보다 낫다고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영제가 몰아붙인 황제 독재가 얼마가 기형적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제가 절대황권을 위해 귀족과 관료, 지방 세력을 탄압하며 직언을 듣는 족족 목을 날린 것은 역으로 따지면 그런 피비린내 나는 숙청 없이는 영제의 황제독재가 제대로 유지될 수 없는 위태로운 체제였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마염은 난세를 직접 통일한 제국의 첫 황제라는 정치, 군사적 권위가 있어 영제만큼 신료들을 과격하게 숙청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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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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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지의 시작이 이 사람의 말년이어서 부각이 안 되는 감이 있는데, 삼국시대 세 나라의 시조격 군웅들과 같은 세대였다. 조조, 손견보다 1살 연하며 유비보다는 5살 연상이다. 후한이 얼마나 소년 황제 부자 국가였는지 알게 해주는 점.[2] 혼군에게 주는 다른 시호로는 , 등이 있다. 특히 볕 양() 자는 전쟁 하나로 나라를 완전히 믹서기에 넣고 갈아버린 수양제의 시호에 들어간다.[3] 손자가 황제가 된 후 효원황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 하씨도 효원황후로 추존되었다.[4] 익주목 유언의 아들 유장(劉璋)과 동명이인이다. 아들이 황제가 되자 그는 효인황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 동씨도 효인황후로 추존되었다.[5] 효인황후는 삼국지연의에서는 독살, 정사에서는 갑자기 죽었다고 하거나 병사했다고 한다.[6] 선주전 주석. 이른바 '동태후'는 사실 황후였던 적이 없었다. 친자인 영제 때문에 효인황후로 높여지고, 궁호를 영락(永樂)으로 하며 태후로 예우되었던 것이다. 동태후는 아들이 매관매직을 하는 데 앞장서고, 자신이 직접 기른 진류왕을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는 등 영제의 혼치를 보태는 입장이었지만, 하태후하진에게 쫓겨나 귀양지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이유로 삼국지 소설 등에서는 상대적 보정을 받았다.[7] 중국에서 황제의 개인자산인 내탕금과 국가예산은 별개의 존재였다. 물론 군주도 먹고 살며 품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지속적으로 상당한 돈이 떨어져 나가기에 전근대에서 오늘날까지 군주국들은 군주 일가의 재산과는 별개로 국가예산에서 일부를 떼어 왕실/황실 자금으로 편성한다. 예컨대 프랑스 왕국에서는 왕실과 관련된 예산이 국가 예산의 2-3% 정도였다. 따라서 군주가 국가예산을 사적으로 유용해서는 안 되고, 국가 역시 (군주가 직접 내탕금을 공금에 풀지 않는 한)군주의 사유재산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8] 다만 유럽에서도 절대주의 시절 프랑스의 경우 일부 중요 직책을 제외하면 매관매직이 합법화되었다. 이는 영제처럼 돈 펑펑 쓰기 위해서라는 정신나간 이유는 아니고, 돈이 많지만 신분은 낮은 부르주아 계층이 귀족으로 편입되어 기존의 군인 출신 귀족 계층을 견제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9] 잘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영제는 어쨌든 황제였다. 후대의 헌제 때마냥 황제를 허수아비를 만들 수 있을 권력을 가진 동탁, 조조 같은 신하도 없었고, 아직 한 황실이 그 정도까지 망하진 않은 수준이었기에 당연히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아닌 일개 신하에 불과한 환관이 황제도 안 하는 매관매직을 한다? 역모나 마찬가지인 월권행위라 당장 구족이 멸해질 사안이다. 장양이고 뭐고 얄짤없다.[10] 중국사에 장군 놀이를 하는 황제는 간혹 있었으니 장군 행세는 그렇다고 쳐도 당시 천한 신분으로 여겨진 상인을 따라하면서 놀던 황제는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영제는 어린 시절의 가난했던 기억이 정말 사무치게 박혀서 재물에 극도로 집착하게 된 듯하다.[11] 일반적 상황에서 대신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정책현안을 황제에게 올리면, 황제는 내용을 검토한 다음 가부결정을 해야 한다. 승인한다면 옥새를 찍고 기각하면 찍지 않는다. 물론 황제가 직접 생각해낸 정책현안은 자기가 직접 옥새를 찍으면 되기 때문에 굳이 가부결정을 할 필요는 없지만, 명군 반열에 올라간 황제들은 내용을 대신들에게 물어보고 상의한 다음 결정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무를 열심히 보는 황제는 손에서 옥새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현대 국가들도 최고지도자(대통령이나 수상(의원내각제), 국왕 등)들이 의회에서 통과된 안건이나 행정명령을 발령해야 하는 상황에서 열심히 서명을 한다. 미국 대통령들을 보면 온갖 안건들에 대해 최종 가부를 결정할 때 서명(사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서명이 옛날 옥새 날인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12]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초신성이다.[13] 이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즉 최고의 장군이라는 의미로 144년 11월에 도적인 서봉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자칭했던 적이 있다.[14] 이 중 원소, 조조는 후한에서 삼국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이끌 주역이 되어 적수가 되었으며 순우경은 원소의 부하가 되었다.[15] 영제 시절만 해도 마등, 한수, 공손찬, 동탁이 어느 정도 군벌화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들은 변경에서 강족, 선비 혹은 자기네들끼리 난투를 벌이느라 중앙정계 입장에서는 관심도 없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군벌이 됨은 유언의 건의로 군정권을 가진 주목이 설치되면서부터였고, 그전까지 한나라 내륙으로는 군벌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십상시의 난과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한 왕조의 영향력이 사라지면서 그때부터 군웅할거라는 군벌들의 난투가 시작되었고 그것을 조정이 "인정해줄 테니까 우리한테 세금 꼬박꼬박 잘 바치고 개기지 마라"라면서 줬던 게 주목이라는 관직이었으니까.[16] 생전에는 후궁이었는데 헌제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되었다.[17]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사료에 某(아무개)라 되어 있다.[18] 초반에 언급하였을 때는 실제 나이로 나왔지만 황건적의 난 당시 좌풍을 노식에게 보냈을 때부터는 노인으로 나온다.[19] 이는 184년에 사망한 장각 3형제와도 마찬가지. 노식의 경우 190년 캠페인에서 기용은 가능하지만 독자 세력으로 출현하지는 않으며, 유총 세력은 군웅할거에서도 플레이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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