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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01:22:29

위화

위화
余华|Yu Hua
파일:위화.webp
본명 위화 (余华/余華, yú huá)
출생 1960년 4월 3일 ([age(1960-04-03)]세)
저장성 항저우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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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작가, 교수
현직 베이징사범대학 문학 교수[1](2019. 04. ~)
링크 공식 블로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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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colbgcolor=#fff,#191919>베이징 루쉰문학대학 (중국작가협회 소설 창작반 / 졸업)
민족 한족
사조 아방가르드(1980년대 한정)
부모 아버지 화쯔즈(华自治)
어머니 위페이원(余佩文)
배우자 천훙(陈虹)[3]
자녀 아들 위하이궈(余海果)(1993년생)[4]
활동 기간 1983년 – 현재
데뷔작 첫 번째 기숙사(1983년)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발치사 활동2.3. 작가 활동
3. 특징4. 작품 목록
4.1. 장편소설4.2. 중·단편 소설집4.3. 에세이
5. 수상 경력6. 기타7. 관련 문서8.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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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위화-2.jpg

중국소설가, 수필가. 현대 중국 문학계의 대표적인 거장 중 한 명으로 꼽힌다.[5]

2. 생애

2.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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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위화(왼쪽)

1960년 4월 3일 중국 저장성 항저우 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위화의 부모님은 의사로 일했기 때문에, 가족은 장례식장 건너편 병원 구내에 살고 있었다. 이런 환경으로 그의 유년 시절은 죽음에 가까웠다. 이 영향으로 그의 후기 작품들의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ㅁ자 형태의 사합원의 1층에는 위화 가족의 집과 영안실이, 2층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터인 병원이 있었다. 그 당시 중국 농촌의 병원은 대개 뒷마당의 연못에 환자들의 살점과 피를 버려 파리가 들끓는 비위생적인 곳이었다. 어설픈 환경이지만 위화의 가족은 화목하게 일상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위화의 집에도 들이닥친다. 위화의 아버지가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권파로 몰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집안에서 자아비판투쟁이 벌어지고 초등학생인 위화와 중학생 형이 부모에게 "마오쩌둥 주석님을 향해 맹세할 수 있어요?"라며 죄를 추궁한다. 비판투쟁 뒤에는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스스로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쓴다. 위화는 "두 분은 그저 쇼를 하고 당신들의 혁명정신과 정치적 각오를 드러내기 위해 대자보를 쓴 것"이라고 한다. 위화의 부모는 '억고사첨반'이라는 구사회에서 빈민들이 먹던 음식을 일부러 먹으며 이웃에 반성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쇼'도 한다. 라오바이싱(老百姓, 서민)들에게 일상생활이 중요했지, 마오쩌둥의 대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일상이라는 '풍성한 숲'에 등장한 전기톱이었다.

위화의 어린 시절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바로 이 문화대혁명이다. 이 사건은 그의 7세부터 17세까지 일어났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작품들 중 많은 작품들이 그 당시 만연했던 폭력혼란을 포함하고 있다. 위화는 "평온하고 질서 있는 사회는 그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없다."리고 밝혔다. 그의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잔인한 폭력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좋아하는 것이다. 위화의 사생활은 그의 젊은 시절 사회경제적 도전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그의 글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 위화의 글에는 그의 삶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그는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어린 시절과 10대 시절을 모두 보내는 작가인 '60년대 세대'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위화는 문화대혁명이 들이닥친 어린시절 읽을 책이 없어서 ‘마오쩌둥 선집’을 읽었는데[6] 선집의 주해에서 읽는 재미를 발견했다고 한다.

여타 혁명 책들과 마찬가지로 “감정은 없었지만, 주해에는 이야기와 사건과 인물이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문화혁명 후기에 접어든 고등학생 때는 서양 소설 책도 ‘몰래’ 빌려 읽을 수 있었지만, 서문과 결말이 뜯겨져 나간 경우가 많았다. 결말을 알 수 없는 소설을 읽은 것이 상상력 훈련법이었던 것 같다고 그는 회고한다. 위화는 당시를 떠올리며 "사실 저는 루쉰의 작품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과 산문, 시가 전부 루쉰 아니면 마오쩌둥의 작품이었으니까요. 어렸을 때 저는 중국에 작가가 루쉰과 마오쩌둥 두 사람밖에 없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위화는 자신의 작품에 유난히 문화대혁명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책이 없던 시절이었다. 내가 접한 책은 모택동 선집과 루신의 작품이 전부였다. 당시 유행했던 대자보 읽기가 내 독서였다. 대자보에는 거짓말과 공격, 무고, 폭로가 넘쳤다. 사람들은 갖가지 죄목을 발명하고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웠다. 대자보에 실린 범죄들은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학교를 오고가면서 대자보를 읽었다."
"나는 문화혁명이 시작할 때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끝나던 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문화혁명은 권위에 도전하라고 시켰기 때문에, 선생님을 비난하고 그 권위에 도전해야 칭찬을 들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공부를 안 했다는 뜻이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중학교에 구경을 갔던 첫날을 잊을 수가 없다. 모든 학생은 창문에 매달려서 운동장에서 하는 축구 경기를 구경하거나, 교실에서 왁자하게 떠들고 있었다. 선생님은 아무도 보지 않는데 칠판에서 혼자 소리 내어 문제를 풀더라. 나와 친구들이 놀라 형들에게 '수업 시간인데 왜 공부를 안 해요?'라고 물었다. 그 형은 웃으면서 책상에서 분필 조각을 꺼내 선생님에게 던지더니 '이게 혁명이다'라고 하더라. 선생님은 분필을 살짝 피하고 다시 문제를 풀고…. 시골에서 그런 식으로 학교에 다녔는데 대학은 무슨 대학인가. 고등학교 졸업 직전에 대학 시험이라는 걸 보라고 해서 시험을 보긴 했다. 합격자 발표 날 선생님이 들뜬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기에 기대를 했더니 그러더라. '너희 다 떨어졌다'고, 하하."#

2.2. 발치사 활동

위화는 항저우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청소년기를 하이양의 우위안현에서 보냈다. 그곳은 작은 마을이고 마을의 분위기는 단조롭다고 생각됐지만, 위화는 이 배경으로 많은 소설에서의 글들을 그의 등장인물들의 배경으로서 사용한다.

그는 자신을 위한 글쓰기는 하이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후, 5년 동안 치의학을 전공했다. 위화는 하루 종일 사람들의 입을 들여다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1983년에 소설가로 직업을 바꾸었다. 당시의 상황을 위화는 이렇게 적었다.
반양은 전국 대입전형을 위해 내가 대학 입학할 때의 상황을 적은 글을 쓰라고 했다. 내가 애초에 대학을 못 갔다고 하니 반양은 그게 더 재미있다고 했다. 반양은 내 친구인데 어떻게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는지 글을 쓰라고 해서 책상에 앉아 19년 전의 경험을 써야 했다. 나는 197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마침 대학입시를 극복하는 것을 만났다. 졸업을 할 때만 해도 공농병 대학생, 고등학교 졸업 후 농촌이나 공장에서 2년간 일을 해야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 당시 우리는 마음속으로 다 준비하며 살아갔다. 가을 이후 농촌으로 새 둥지를 틀어야 하는데, 갑자기 와서 우리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학에도 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자기가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 가서 살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고, 농촌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갈 수 있을지 어떨지, 이미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지조차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우리 학생들은 모두 '문혁'이 시작된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문혁'이 끝난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중학교에 다닌 것을 기억한다. 수업 종소리와 수업 종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릴 때 책장을 끼고 수업하러 나갔다가 수업이 끝나는 친구가 교실에서 쏟아져 나오는 걸 자주 봤다. 선생님이 강의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학생들이 밑에서 히죽거리며 자기 얘기를 하고, 수업시간에 교실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창문으로 기어 나가도 된다.

4년 동안 중학교를 다니다 보니, 대학입시 공부를 할 때, 우리 많은 친구들은 여전히 열심히 하지 못했다. 비록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도, 아무도 열심히 수업을 듣지 않고, 나쁜 습관을 한번에 고치지 못했다. 하지만 역대 졸업생들은 농촌이나 공장에서 몇 년, 십수 년을 보내며 삶의 어려움을 겪었던 만큼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76년에 첫 번째 대학입시가 찾아와서, 우리 전체 해염현에서는 40여 명의 수험생이 뽑혔는데, 그 중 재학생은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 대학입시 전에 지원서를 썼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땐 확실히 다들 대학을 잘 몰랐는데, 대부분 학우들이 베이징대학칭화대학를 썼거나, 푸단대학, 난카이 같은 명문대학도 자기가 붙든 안 붙든 일단 붙든, 우리는 지원서를 쓰는 것이 자기에게 붙는 것이 중요한지, 그저 노는 것으로만 여겼었다. 수능날 학교 정문에는 붉은 하트 2가지 준비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교실 칠판에도 이 8글자가 적혀 있는데 2가지 준비가 합격과 낙방이다. 홍의(紅心) 하나는 조국의 어떤 직책에서도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 정말 모두 붉은 하트였다. 하나의 준비, 즉 합격이었다. 그러나 후에야 우리가 실제로 후일을 준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모두 낙방했다. 대학입시 점수가 나온 날, 나는 2명의 학생들과 거리에서 놀고 있었는데, 우리 선생님이 우리를 불러서 목소리가 좀 떨렸다. 그는 대학입시 점수가 나왔다고 말했다. 우리도 덩달아 신이 났고, 그러자 우리 선생님이 '너네 다 떨어졌어'라고 말했다.

이렇게 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고, 우리 학년 친구들 중 3명만 합격했다. 그래서 친구들은 길거리에서 마주칠 때 낙제생들이었고, 모두들 시룽시룽 웃으면서 괜찮았는데, 낙제생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아무도 괴로워하지 않았다. 나중에 나는 대학에 다시 응시하지 않았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계속 응시하길 원하셨다. 나는 다시 대학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매우 아쉬워했다. 부모님은 나보다 더 자신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는 별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일에 참가했다. 먼저 위생학교에서 1년을 공부한 후, 진의 위생원에 배치되어 치과의사가 되었다.

우리 위생원이 길거리에 있어 한가할 때면 나는 창가에 서서 바깥의 큰 길을 바라보며 때때로 1~2시간 동안 멍하니 바라보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를 구경하던 중 나는 갑자기 슬픔이 밀려왔고, 평생 이 거리를 지켜볼 것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앞길이 막막해졌다. 바로 이 순간, 나는 내 일생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운명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위화는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1년 과정을 밟았다. 그는 6년 동안 치과의사 생활을 한다. 치과의사 생활은 위화가 이런 '개인의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계기가 된다. 그 해 위화는 남부지방에서 한 병원에서 일하게 된다. 당시 마오쩌둥은 강력한 공공위생 방역체계를 세웠다. 그러나 예산이 부족해 전국의 병원들은 주사기를 재활용했다. 당시 중국에서 치과의사는 박봉의 가난한 직업이었다. 위화는 "1980년대 중국에서는 치과의사도 가난했고 작가도 가난했다. 그러나 치과의사는 고생하면서 가난했고, 작가는 자유로우면서 가난했다. 나는 이를 뽑는 일보다는 글을 쓰는 게 좋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위화가 속한 병원도 마찬가지였는데 수차례 사용한 주사바늘은 구부러져 주민들에게 주사를 놔주면 살점이 뜯겨 나오기 일쑤였다. 특히 위화는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주사를 놔준 뒤 괴로워한다. 그때부터 그는 주사바늘을 평평하게 갈기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고통에 울부짖던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노동자들의 고통을 의식할 수 있었다. 나는 왜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기 전에 노동자들의 고통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노동자들과 아이들에게 예방주사를 놓기 전에 먼저 구부러진 주삿바늘을 내 팔에 찔러보았더라면, 그리고 바늘에 달려 나온 나의 피와 살점을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아이들이 고통으로 울부짖기 전에, 노동자들이 극심한 통증을 못 이기고 신음하기 전에,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 중국의 고통은 나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975년 남부지방의 한 병원에서 ‘발치사(이 뽑는 사람)’로 일할 당시 가난한 중국 노동자들의 고통을 저의 고통으로 의식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그러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았죠. 중국의 고통은 곧 저의 고통입니다.”#

2.3. 작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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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시절의 위화

치과의사 생활방식에 싫증이 나자 위화는 더 심각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치과의사 활동을 하다가, 적성에 안맞음을 깨닫는다. 시내 중심가의 병원에서 근무했던 위화는 썩은 이를 뽑기 위해 남의 입을 들여다보는 일보다 창밖 내다보기를 좋아했다. 거기에는 입냄새 대신 활기가 있었다. 특히 그의 눈을 끈 것은 병원 근처 문화관엘 들락거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좁은 방에 갇힌 치과의사와 달리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오고갔고, 늘 놀면서도 잘먹고 잘사는 듯했다. 그 사람들에게 위화가 물었다. '당신들은 일은 안 하고 종일 왔다갔다, 돌아다니기만 하는군요?' '우리 일은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것이라오.' '그래요? 그렇게 좋은 직업이 있었군요.' 위화는 그래서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원한다고 누구나 작가가 될 수는 없었다. 자신의 글 솜씨를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위화는 몇 편의 글을 썼고, 1983년 베이징의 한 문학잡지 편집인의 눈에 띄었다.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달려가 편집인이 던져주는 글의 교정을 봐주기도 했다. '당신, 글재주가 상당하다. 이 뽑지 말고 문화관에 들어가도 좋다.' 그래서 위화는 작가가 됐다.
"당시엔 어차피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에 박봉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입안을 들여다보는 일이 아주 고역이었다. 입안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곳이다. 5년 동안 내가 뽑은 이가 1만개가 넘는다면 대충 상상이 되지 않나. 그렇게 정신 없이 이를 뽑던 어느 날 창밖을 내다보는데 앞 건물인 문화원 사람들이 하릴없이 거리를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당신들은 왜 일을 안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거리를 오가는 것이 자기네들이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문화원은 나라가 돈을 대서 문학 작품을 만들어내는 곳이고, 소설가가 되면 거기서 일할 수 있다고 하더라. 그때부터 여기저기 문학잡지에 소설을 써서 보냈고 1983년 11월에 내 소설 <첫 번째 기숙사>를 싣기로 했다는 '베이징문학'의 전화를 받았다. 결국 문화원에 자리도 얻었다."[7]#

그 뒤 치과의사 직업을 버리고 현 문화관과 가흥문련에 들어가 문예 창작을 배웠다. 또 위화는 2차례 베이징 루쉰문학원에 들어가 공부했고, 나중에 부인이 된 시인 진홍을 만났다. 진홍이 베이징에서 일했기 때문에 위화는 후에 베이징으로 이주한다. 현재는 그의 고향인 저장성 항저우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1983년 소설가로 데뷔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83년 단편소설 <첫 번째 기숙사(第一宿舍)>를 발표한 이후 지금까지 소설가로 활동 중이다. 1983년 소설이 발표되기 시작해 1980년대에는 마위안(馬原), 홍펑(洪峰), 쑤통(蘇童), 거페이(格非) 등과 같은 작가들과 함께 중국 문학의 흐름을 형성해 평론계에서 중국 3세대 작가군을 일컫는 ‘선봉파(先鋒派)’의 수장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신조(新潮·뉴웨이브) 소설가’라고도 불렸다. 당시 위화는 종래의 리얼리즘을 기조로 하는 중국 문학에 반항해, 실험적인 구성과 문체에 의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작법적으로는 외국 문학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리얼리즘의 틀을 깨뜨린 새로움과 실험성이 있었기에 동시에 등장한 다른 젊은 작가 쑤퉁, 격비 등과 함께 선봉파로 불렸다. 1990년대에는 이러한 특징을 완전히 변화시켜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을 가미한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인생'과 '허삼관 매혈기'와 같은 걸작을 써내며 모두 히트시키며 중국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으로 발돋움 한다. 2000년대에는 대하소설 형제를 써내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이 작품도 상하권을 합쳐 100만부 이상 넘게 팔렸다. 2015년에는 10년만에 장편소설 제7일을 발표한다. 이 작품 역시 좋은 평을 받았고 서양권에서 높게 평가받았다.

위화는 중국 당대문학작가 중에선 한국에서 잘 알려진 작가에 속한다.[8] 위화의 생애는 중국이 겪은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중국이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다른 변화를 겪었던 시기에 성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문화대혁명 때 성장했다. 그 후 개혁개방과 90년대 경제의 폭발적인 도약, 그리고 새로운 세기의 환상적인 야성, 우리의 세계관과 우리의 가치체제가 모두 뒤바뀌었다." 그는 또한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작가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위화는 중국과 동아시아, 그리고 서구권 세계를 목표로 한 중국 자체에 대한 그의 많은 작품들을 헌정해 왔다. 그는 또한 그가 중국에 관한 이슈들을 묘사하는 뉴욕 타임스에 월간 칼럼을 쓰기도 한다.#

그의 많은 글들은 폭력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또한 그의 좀 더 친근한 문체로도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대표작 '인생'라는 책이 "문화혁명의 잔인함과 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황혼 속의 소년"과 같은 "더 온화한 이야기"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글의 핵심 측면 중 하나는 부조리를 다루는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현실적인 작가이고, 만약 내 이야기가 종종 터무니없다면, 그것은 단지 터무니없는 현실의 투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변화함에 따라, 그는 그것과 함께 오는 부조리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글이 너무 폭력적이라는 비판에 답하면서 그는 "폭력은 내 잠재의식 속에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고 말하며 현실에서 그가 보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응답한다. 또 그는 "기본적으로 쓰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쓴다. 하지만 자기 검열을 안 하는건 아니다. 사람들의 문화대혁명 목격담을 들어보면 소설 속 폭력장면보다 끔찍한 경우가 수 없이 많았다. 2000년대 이후 성의 범람 상태여서 내 소설 속 성애 묘사는 현실에 비추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물론 독자들이 감당하지 못할까봐 수위를 조절하기는 한다. 내용이 지나치다고 항의하는 독자가 많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위화 소설의 특징이라면 특유의 해학적 분위기로 극단의 상황, 또는 고통스러움(특히나 중국 현대사를)을 유머로 표현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제일 잘 표현된 것은 장편소설 <살아간다는 것(活着)> 이며 국내에선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장예모 감독이 동명의 이름으로 영화화 한 것도 있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중국 내에서 영향력이 큰 작가들 중 한 명이다. 모옌이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까지 '중국 작가중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모옌 아니면 위화'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국 내외에서 인정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2017년 인터뷰에 따르면 100년 전 중국과 현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3편을 동시에 집필 중이라고 한다.# 집필 속도가 굉장히 느린 작가라 출간까지 꽤 시간이 걸릴듯하다. 2021년 3월 8년만의 신작 소설 <문성(文城)>을 발표했다.

3. 특징

처음 작가가 됐을 때 소설가의 의무란 좋은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의 일을 잘하면 된다, 그것이 의무다, 라고 생각했다. 소설가로 살아온 지 30년이 되었는데 지금 드는 생각은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만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용감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작가로서 중국 정부의 말을 따르게 되면 설령 정부에 대한 비판 의식이 있더라도 작품이 그에 따라가게 된다. 작가의 현실감각은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이야기’라는 건 스토리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이야기를 얼마나 생동감 있고 풍부하게 표현하는지가 중요하다. 결국 이야기를 읽었을 때 독자들의 감정을 얼마나 불러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래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글일수록 오히려 단순할 수 있다. 많은 작가들이 표현할 때 디테일한 표현에 초점을 둔다. 그걸 어떻게 표현하는지가 중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저 같은 경우에는) 거의 직감으로 쓴다. 어떤 부분은 간단하게 쓰고, 또 어떤 부분은 상세하게 써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예전에 어떤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지 질문을 받은 적 있다. 하지만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독자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었을 때 좋아하는 부분도 상이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작가나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을 쓰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독자들을 위해서 글을 쓰기도 한다. 자신도 소설을 많이 읽는 한 명의 독자이기 때문이다.#

위화는 1980년대 신인 시절에는 난해한 아방가르드 문학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유명해진 이후로 위화는 작품의 특징을 그때 그때 조정했고, 1990년대 첫 장편 소설 '가랑비 속의 외침'부터 그의 작품은 더 이상 난해하지 않고 현실적인 서술에 적절한 현대적 의식을 불어넣어 간결한 필치와 충만한 감정으로 최대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라 불리며 그의 작품은 어렵지 않고 흡입력이 있으며 대중적이어서 소설의 관심 없는 사람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는게 특징이다.[9] 또 그의 소설은 작품들 면면에 흐르는 뜨거운 인간애, 휴머니즘적인 성향으로 감동적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에는 어려운 말이 없다. 복잡한 문장도, 특별한 복선도 없다. 독자를 놀라게 하는 반전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재미있고 감동적인 글을 써낸다. 평론가들은 그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중국사회에 대한 관심, 그리고 상상력과 이 상상력의 방향을 잡아줄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평한다. 또 그의 작품에는 슬픔과 풍자와 희극과 비극이 작품 속에 버무려진다. 국공내전, 공산혁명, 인민공사,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같은 굵직굵직한 중국 현대의 역사적 사건도 자연스레 작품 속에 녹아든다. 이 점에서 위화는 근현대 중국 문학의 아버지 루쉰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평가다.[10] 루쉰도 ‘아Q정전(阿Q正傳)’과 ‘쿵이지(孔乙己)’ 등 작품에서 모순덩어리 주인공을 내세워 중국 근대의 부조리와 위선을 꼬집은 바 있다.

또 그는 프란츠 카프카가와바타 야스나리[11],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12] 그에 말에 따르면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대화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혹은 ‘심리 묘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 주인공이라면, 카프카에게선 부조리한 기법의 서사를, 윌리엄 포크너로부터는 갑자기 튀어나온 에피소드로 플롯이 엉뚱하게 흘러가는 위트를 배웠다고 밝혔다.[13] 또한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단편 작가이자 수필가인 루쉰에 대한 그의 감사와, 루쉰의 작품이 위화의 문체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위화는 루쉰의 글이 많이 읽혀야 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실제로 그것들을 싫어했다. 그는 이제 루쉰의 작품이 아이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믿는다.[14] 그러나 1990년대에 그는 글쓰기에 충분한 경험을 쌓은 후, 루쉰의 작품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갑자기 그 가치와 힘을 깨닫게 되었다. 위화는 루쉰의 우화적인 작문 스타일을 단순하지만 매우 풍부하고 강력하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루쉰을 중국의 가장 위대한 작가들 중 한 명으로 여긴다.

또 그는 그의 수필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에서 스스로 정의하는 작가의 역할은 ‘다른 사람에게 또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돈을 받는 사람’이다. 이 한 문장은 위화 소설을 바라보는 키워드다. 가치가 있는가 아닌가를 나누지 않는 서사, 그리고 이를 ‘전달’하는 방식 역시 평범하면서도 쉽고 직설적인 서술이다. 돈을 받는다는 ‘대중 소설가’로서의 입장도 명확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는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거나 “위대한 작가가 갖춰야 할 가장 어려우면서도 필수적인 요소는 사람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위화에게 글을 쓴다는 건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위화는 소설을 쓸 때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잘 고민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독자의 반응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주인공을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함께 숨 쉴 뿐이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생명력을 얻고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글을 쓸 때 `나`란 존재는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서술하고 있는 어떤 인물이 되어버리죠. 끊임없이 글을 쓰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경험이에요."

위화는 인터뷰에서 그의 작품이 순수하고 세밀한 서술로 일상의 언어질서를 타파하고 자족적인 화법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또 하나의 기이하고 괴이하며, 은밀하고 잔인한 외부세계와 진실한 텍스트 세계를 구축해 텍스트의 진실에 도달한다고 밝혔다. 위화는 "모든 창작이 진실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나의 이 진실은 생활 속의 그런 진실이 아니다. 삶은 진실성이 없고 거짓과 거짓이 뒤섞여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위화의 작품은 어린 시절에 겪은 문화대혁명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중국 현대사를 주제로 저술에 널리 퍼져 있다. 그의 이야기는 종종 마오쩌둥의 통치하에서 중국을 비롯하여 국공내전과 문화대혁명, 그리고 마오이즘 이후의 중국을 포함한 역사적 시기에 작은 도시들을 배경으로 한다. 유년기는 또한 그의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결과적으로 주제를 가볍게 하지는 않는 주제이다. 위화는 '호섬관 매혈기'에서 보듯 폭력, 잔인성, 죽음에 대한 잔인한 묘사뿐만 아니라 '중국 하층민의 곤경'을 둘러싼 주제로 잘 알려져 있다. 위화는 또 다른 대표작 형제에서 더 혼란스러운 주제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위화는 카프카의 영향을 받은 그의 과거 모델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의 본질은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죠. 거장들이 스스로 마음을 놓을 수 있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할 수 없겠습니까?"라고 밝혔다. 이 작품에서 그는 비극과 희극의 동시 표현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또한 위화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에 전근대적인 중국 소설 요소들을 포함시켰다. 그는 글에서 블랙 코미디와 특이한 인식과 묘사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클래식 음악, 고전음악의 이야기 구조, 그리고 사실 '허삼관 매혈기'에서는 월극(粵劇)의 스타일에서 차용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매번 장편소설 한 편을 쓰고 난 후, 나는 비우고 다시 쌓는 데 몇 년이 걸리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나는 바로 다음 편을 쓸 수 있지만, 나는 한 가지 상황이 있다. 96년도에 이미 쓰기 시작했는데, 내가 그 당시에 완성하지 못한 것은 이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내 언어가 더 이상 간결하지 않고 게으르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적을수록 더 좋아지고 문제를 깨닫기 시작했다. 당신이 매우 만족하는 책을 쓴 후 - 독자들이 만족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 책은 오랫동안 당신을 통제할 것이다. 다른 책을 쓰면 당신은 항상 그것에 의해 통제될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제거할 시간이 필요하다. 완전히 잊어버려라. 완전히 지워버리려면 최소한 3~5년이 걸린다. 지운 후에는 새로운 작품을 쓸 수 있다. 이 때 감정도 새롭다. 이것이 하나의 이유다.

또 다른 이유로는 위대한 작가들의 모든 작품들을, 그들이 많이 쓰든 적게 쓰든, 다른 사람들이 많이 읽는 것은 한두 권이라는 것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널리 읽히는 책이 바로 '백년의 고독'이고,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바로 '보바리 부인'이다. 스탕달은 '적과 흑'이다. 나중에 나는 당신이 그렇게 많이 썼을 뿐만 아니라, 이미 위대한 작가 반열에 올랐어도, 후세에 읽히는 것이 바로 한두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10권의 책을 쓸 수 있는 정력보다 나의 그런 노력에 5권의 책에 담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아예 조금 덜 쓰게 될 것이다.#

작품의 대부분이 일정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위화의 작품은 소설과 논픽션 모두에서 신비스럽고 풍부한 문학적 우주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 받는다. 위화의 말처럼 필연적으로 그의 소설은 중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그는 역사를 소개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그는 "작가로서의 책임과 관심은 제 작품에 진정한 중국인, 진정한 중국인을 창조하는 데 있습니다."고 밝혔다. 그의 경력 초기에, 그는 아방가르드한 특징으로 작품의 복잡성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인간 심리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전통적인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후로 문필계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뒤 스타일을 완전히 바꿨고,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너무 복잡하지 않게 작품을 조정했다. 이 스타일 적용 후, 그는 "현실적 사회"의 내레이션에 주로 구성된 그의 작품에 적절한 양의 현대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장편을 딱 5편만 써서 과작을 하는 작가이며 다작 작가는 아니다.[15]

그는 양보다 질에 초점을 맞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대부분의 작품을 재밌게 볼 수 있다. 복잡성과 독특한 언어 스타일로 알려진 그의 효과적인 문체와 의사소통 방식은 언어학의 일상적인 규칙을 깨고 어떤 의미에서는 언어 체계를 형성한다. 복잡한 기초와 함께, 위화의 작품은 소설과 논픽션 모두에서 신비롭고 풍부한 문학적 우주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전에 단편소설을 쓸 때는 그랬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소설 속 인물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스스로 말을 할 줄 안다. 나는 인물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들이 그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덕분에 훨씬 더 생생한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탄생했다고 해야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서구권에서 아방가르드 작가로 알려져있다. 위화는 그의 아방가르드 장르를 깊이 구현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 위화는 '18세에 집을 나서 먼 길을 가다(十八岁出门远行)'의 출판으로 문학계에 공식적으로 소개된 현대 아방가르드 작가이다. 이 단편들은 혼란과 잔인함의 순간에 나레이터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애쓴다. 이 책은 세계가 자신의 온전성을 파괴했다는 느낌을 묘사하고 있으며, 따라서 초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깨진 전통적인 현실관을 드러내고 있다. 아방가르드 소설가들 사이에서, 위화는 우스꽝스러운 사람들과 시적 폭력을 결합하여 인간주의의 철학적 관념에 도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범적이다라고 평가받는다. 그는 섬세하고 예리하기로 유명하다. 선구적인 작가로서 현실과 삶 앞에서 위화의 생각은 어떤 공공의 상상의 행복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평범한 행복의 모습을 의식적으로 통과하고, 더 비밀스러운 영혼의 경지에 들어가 원래의 삶의 상태를 고문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과 미적 스타일에 새로운 높이까지 반항한다.

서구권에서 위화는 가장 재능 있고 개인적으로는 전위 소설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문학계와 독자들에게 많은 충격과 관심을 불러일으킨 소설의 형태로 인간 삶의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성찰을 깊게 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 아방가르드 소설의 대표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위화는 가장 유망한 아방가르드 작가 혹은 실험적인 작가 중 한 명으로 여겨졌고, 많은 비평가들은 그를 포스트 모더니즘의 중국화 소설이나 포스트 모더니즘 글의 가장 좋은 예라고 여겼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그는 이러한 스타일을 덜어내고 전통적인 "심리학적인" "리얼리즘적인" 서술 쪽으로 약간 옮겨가는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단편소설, 소설, 소설들을 거쳤다. 이 시기의 위화의 소설은 인간의 폭력, 본능욕망, 전통과 역사를 깊고 상세하게 분석한다. 이 작품들은 주로 인간 본성의 악과 인간 본성의 악에 의해 야기된 일련의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을 드러낸다. '1986', '한 종류의 현실',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그리고 다른 초기 작품들은 폭력과 욕망, 충동의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적이고 상세한 가상의 폭력, 피와 죽음에 대한 그의 거의 잔인한 무관심 톤이다. 위화는 "이런 종류의 인간 본성의 변화를 없애야 합니다. 독자들이 인간의 피를 흘리는 유리창을 열도록 말이죠. 독자들이 이것이 공석의 의미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소설을 쓰며 내린 결론은 '훌륭한 작가는 훌륭한 독자여야 한다', '사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훌륭한 독자란 "평범한 작품 말고 위대한 작품을 많이 읽어 취향과 교양의 수준이 높아져서 글을 쓸 때 자연히 스스로 아주 높은 기준을 요구하게 되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사람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한 유대인을 구한 폴란드 농민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자기 집 지하실에 유대인을 숨겨준 이 폴란드인은 왜 생명의 위험을 감수했냐는 질문에 "저는 유대인이 뭔지 모릅니다. 저는 그저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 뿐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을 아는' 작가로 그는 루쉰, 윌리엄 셰익스피어, 하비에르 마리아스,[16] 스탕달, 영화감독으로는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등을 꼽는다. 위화는 "글쓰기에는 끊임없이 앞을 막는 장애물이 나타납니다. 동시에 글쓰기는 물줄기가 모여 도랑을 이루는 과정이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장애물이 눈앞에 있을 때는 아주 거대하게 느껴지지만, 이를 피하거나 넘어서고 나면 갑자기 그리 거대하지 않게 느껴지고, 그저 종이호랑이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용기 있는 작가들은 항상 장애물을 향해 전진하고, 종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넘어섭니다. 지나친 다음에야 깨닫고 이렇게 가볍게 지나쳤나 하고 놀라는 경우도 많지요."라고 말했다.

또 그는 문학을, 소설을 소설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문학은 소설가의 손에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의 형태로 나오며 편집자의 손·평론가의 손으로, 나라가 바뀌며 번역가의 손으로, 시대가 지나며 독자의 손으로 계속 완성되어 나간다고 말했다. 위화는 "현실을 그대로 문학으로 옮겨놓으면 문학이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신문방송에 실리는 사건 사고를 소설적 언어로 소설책에 옮겨놓는다고 문학이 될까? 그 실제사건이 문학적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다. 그는 관찰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통찰력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대로 보이는 것 외에 무엇을 볼 것인가? 사실 이면에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어떻게, 왜 볼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위화는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그러나 통찰력으로 방향을 잡아주지 못한다면, 상상은 터무니없는 공상으로 전락할 것이다"고 말했다.

4. 작품 목록

4.1.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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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17] 在細雨中呼喊 (1992)
기쁨과 슬픔, 흥분과 무료함, 감탄과 환명이 뒤얽힌 유년 시절을 '시간'이 아닌, '기억' 의 순서에 따라 풀어낸 작품. 폭력과 죽음에 천착한 실험성 강한 중단편을 쓰던, 소위 선봉파의 대표 작가 위화가 1993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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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18][19] 活着 (1993)
위화의 대표작이자 중국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걸작. 작가 위화에 따르면 이 작품은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고난을 견뎌내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위화는 <인생>을 통해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이 시대를 가장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애정 어린 헌사와도 같은 소설이다. 중국 본토 내에서 꾸준하게 팔리는 스테디셀러[20]이며 현재까지 중국내에서만 2,000만부 이상이 팔린 대히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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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21] 许三观卖血记 (1995)
한평생 피를 팔아 가족을 위기에서 구해낸 속 깊은 아버지 허삼관의 이야기. 작가 위화에 따르면 이 작품은 '평등'에 관한 이야기이다. 위화가 1995년에 발표한 장편소설로, 중국을 넘어 세계 문단의 극찬을 받았다. 살아가기 위해 그야말로 목숨 건 매혈 여로를 걷는 한 남자의 고단한 삶이 희비극이 교차하는 구조를 통해 보여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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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22] 兄弟 (2005)
모든 가치관과 도덕이 무너지고, '돈'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현대 중국 사회의 초상을 그린다. 이광두와 송강, 성이 다르고 한 살 차이 나는 둘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의붓형제가 된다. 이 책은 '위화 소설의 집대성'이라고 평가받으며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의 소설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의 대하소설이며 총 2부로 나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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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23] 第七天 (2013)
'기차가 낳은 아이' 양페이는 태어나면서 생모와 이별하고 철도 선로 인부였던 아버지에게 극적으로 구출되어 그의 아들로 살아가게 된다. 양페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나서 7일 동안 연옥에서 이승의 인연들을 만나 그동안의 앙금도 풀고 사랑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작가는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그늘이 되고 만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품고 있으며, 사회의 부조리마저 유머러스하고 흡인력 있는 이야기로 탈바꿈시키는 위화의 특징이 이 작품에서 넘치도록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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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文城 (2022)
가끔 위화가 소설가가 아니라 마법사 아닐까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쉬우면서도 심오하고, 웃기면서도 슬픈 작품들을 쓸 수 있을까. 나 혼자 ‘위화적인 순간’이라고 부르는 시간들이 있다. 너무 재미있고 뒤가 궁금한데, 갑작스럽게 가슴이 미어져서 책장을 잠시 덮고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시간. 그의 책을 읽고 나면 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저절로 다짐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자. 불행을 담담히 받아들이자. 잔인해지지 말자. 전쟁을 막자. 『원청』에는 위화적인 순간이 무척 많았다. 책장을 덮고 눈을 감았다가, 인물들의 운명을 알고 싶어 다시 펼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모든 분께 추천하고 싶다.
- 장강명 (소설가)

4.2. 중·단편 소설집

위화가 1980년대 신인 시절에 쓰던 중·단편 소설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소위 '선봉파의 기수'라고 불리던 시기에 완성한 작품들로 실험적이고 다소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국내에서 출간된 작품들은 중국에서 출간된 표제작들과 다르며, 출판사별로 출간된 시기가 달라 국내에서 출간된 작품들 순서대로 나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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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내게는 이름이 없다 我沒有自己的名字 (1986년-1998[24])
주로 초기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만큼 선봉파 작가로서의 면모를 확인해볼 수 있는 실험적인 작품이 많다. 데뷔작 '18세에 집을 나서 먼 길을 가다'를 비롯, 총 17편의 소설을 수록했다. 푸짐한 입담으로,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빚은 허름하고 우스꽝스러운 소시민들의 이야기다. 그의 이름을 알린 출세작 '18세에 집을 나서 먼 길을 사다'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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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집)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世事如烟 (1988)
1988년에 발표된 위화의 중편소설 4편을 묶었다. 가장 가까운 이들인 가족과 이웃 관계에 숨어 있는 폭력과 살의를 다룬 이야기들. 당시 위화는 환상에 가까운 시공간과 엽기적인 인물들, 잔인한 사건과 죽음의 연쇄로 점철된 중단편 소설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선봉파 소설의 대표 작가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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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무더운 여름[25] (1989-1995)
작가 위화가 직접 가려 뽑아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작품들을 묶은 소설집. 이 책에 실린 6개 작품은 위화가 1989년부터 1995년 사이에 쓴 소설들로, 초기 위화 작품에서 보이는 실험적인 경향과 그의 장편소설에서 드러나는 익살스럽고 서사 중심적인 경향이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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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집) 4월 3일 사건 (1987-1992)
위화가 직접 선정한 중편소설 4편을 묶었다. 1987년부터 1992년 사이에 쓴 이 작품들은 당시 20대였던 청년 위화의 과감한 형식 실험과 삶의 근원을 탐구하고자 한 주제의식이 특히 돋보인다. 인간 내면의 공포와 억압, 인간을 둘러싼 폭력과 죽음을 통해 우리 삶의 근원에 닿고자 한 청년 위화의 전위적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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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집) 재앙은 피할 수 없다 難逃劫數 (1980년대 후반 저술)
1980년대 후반에 썼던 소설들 가운데 직접 고른 작품들로, 한국 독자들이 익히 접해왔던 그의 장편들과는 다른 맛과 색을 담고 있다.

4.3.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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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十個詞彙中的中國 (2011)
중국에서 유일하게 금서 지정을 당한 위화의 책. 형제에서 보여준 중국 사회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을 이 책에서는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2009년 위화는 미국 퍼모나 대학(Pomona College)에서 당대 중국에 관한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 강연의 원고를 준비하며 이 책을 썼다. 원제는 '10개 단어 속의 중국(十個詞彙中的中國)'이다. 저자는 인민, 영수(領水),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 등 10개의 단어 속에 중국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10개의 단어를 10쌍의 눈으로 삼아 10개의 방향에서 중국을 응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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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我們生活在巨大的差距里 (2015)
이 산문집은, 세계 곳곳의 여행기에서부터 독서 일기, 자신의 소설에 대한 스스로의 해설, 그리고 마오쩌둥 시대라는 하나의 극단의 시대에서 시장경제라는 또하나의 극단의 시대로 가고 있는 기형적인 오늘 중국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 부모로서 보여주는 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축구와 미국 프로농구 '광팬'인 위화의 발랄한 모습까지 다채로운 이야기를 망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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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2018)
글쓰기와 독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담은 신작 에세이로, 서울, 베이징, 프랑크푸르트, 뉴욕, 베오그라드 등 세계 곳곳에서 그곳 독자를 대상으로 강연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읽는 이가 장벽 없이 위화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입말을 살려 옮겼다. 이 책은 위화 혼자 쓴 책이라기보다는 독자와의 협업으로 완성한 것이다. 1999년부터 2018년 1월까지, 서울에서부터 베오그라드까지, 위화는 그곳에 있었고 그곳 독자를 만나 그들과 함께 이 책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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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文學或者音樂 (2019)
앞서 출간된 3권의 책에서 힘 있는 문장으로 깊이 있는 산문을 보여준 그가 이번 책을 통해 문학과 음악에 심취하여 보낸 청년기의 위화를 회고하고, 작가로서의 삶과 창작 활동에 영감을 준 다양한 예술작품의 세계로 안내한다. 아이작 싱어, 윌리엄 포크너, 루쉰, 카프카, 보르헤스 등 탁월한 작가는 물론, 말러, 차이코프스키, 브람스 등 위대한 작곡가까지, 위화 작가가 젊은 시절에 만난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을 예리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적절한 비유를 가미하여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유연하게 펼쳐 보인다.

5. 수상 경력

6. 기타

"저는 현실적인 작가입니다. 그리고 제 이야기가 종종 터무니없다면, 그것은 단지 터무니없는 현실의 투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내년에 55세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저는 항상 부조리한 것들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문화대혁명은 터무니없었고, 오늘날의 중국은 훨씬 더 그렇게 보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계속해서 불합리하게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것에 대한 인식을 쉽게 잃을 수 있습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여러분은 마오쩌둥초상화를 모든 곳에서 보셨을 겁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도요. 하지만 아무도 화장실 벽에 있는 마오를 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중국에서의 삶의 부조리에 너무 익숙해서 중국인들은 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지도 않습니다. 중국 사회는 부조리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현실적인 작가로서 저는 그러한 변화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관광객으로 중국을 방문해서 호텔에 체크인한다면, 커피 테이블과 그 옆에 재떨이의 "금연" 스티커가 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쓰고 싶은 겁니다. '금연' 스티커 옆에 있는 재떨이 말이에요."#
문화대혁명 시기에 유일한 구호는 ‘문화예술은 정치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에 저는 그것에 반대했어요. 문학은 문학이고, 정치는 정치라고 생각했죠. 한데 오늘날 중국이 격변을 겪고보니 정치가 문학에 끼치는 영향을 부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됐습니다. 제 작품에 정치적 요소가 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대 정치는 정부의 일방적 하달인 반면, 제 작품 속의 정치는 제가 사회를 보는 관점입니다.”#
"나는 중국 작가로서 정부의 편에 서서 정부를 지지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지식인이라면 독립된 정의를 가져야 한다. 나는 원칙적인 면에서 전혀 타협하지 않았다."#
"나는 문화대혁명도 현대사회도 비판하고 싶다. 나는 '모든 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책임이 있다'는 입센의 말을 생각하며 소설을 쓴다. 나는 중국 사회의 거대한 병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총체적으로 병든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병자'라고 느꼈다. 그것이 내가 '형제'를 쓴 이유다"#
“문화대혁명(문혁) 때도, 최근 30년간의 개혁개방 시기에도 중국은 정상적이지 않았지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7. 관련 문서

8. 외부 링크



[1] 위화의 친구인 작가 모옌도 이 곳에 교수로 있다.[2] 2011년 3월 8일 이후로 업데이트 안하는 중.[3] 아내도 작가이며 시인이다.[4] 영화감독이다. 아버지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를 연출하기도 했으며 위화는 각본을 썼다.[5] 보통 모옌, 위화, 옌롄커 이 3명이 세계적인 위상을 지닌 중국의 현대 소설가들로 꼽힌다. 모옌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위화와 옌롄커는 매년 꾸준히 노벨문학상 도박사 예측에 언급된다. 또 최근에는 찬쉐(残雪)라는 여성 아방가르드 작가도 도박사 예측에 자주 언급된다. 실제로 이 셋은 2020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듯 하다.1, 2[6] 또 다른 책은 루쉰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실제로 루쉰의 책은 문혁 당시 금서로 지정되지 않고 오히려 중국공산당에 찬양을 받았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당시 읽을 책이 없어 금서가 아닌 루쉰의 작품을 내려놓지 못하고 반복해서 읽었고, 루쉰은 위화가 싫어했던 유일한 작가가 되었다. 문화대혁명 이후 한 번도 루쉰 작품을 읽지 않았으나, 1996년 어느 영화감독이 루쉰의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위화에게 각색과 기획 맡겼고, 이를 계기로 루쉰 소설집을 산 위화는 소설을 영화화하지 말아달라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루쉰을 망가뜨리지 맙시다. 루쉰은 정말 위대한 작가거든요”[7] 실제로 그렇게 한가하게 일하냐는 질문에 "진짜 그랬다. 출근 첫날 2시간 늦게 출근했는데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온종일 일해야 하는 가난뱅이가, 하루 종일 빈둥대도 되는 가난뱅이가 된 것이다. 나는 출근해서 잠을 자며 정오 정도까지 빈둥거리다가 집에 가서 소설을 썼다. 점차 1주에 1번씩 출근을 했고, 나중에는 1달에 하루 출근을 했다. 월급 받는 날에 월급봉투를 받으러 간 거였다. 공산주의가 돌아가는 게 그렇다, 하하. 친구들은 나한테 그런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좋은 것만 빼먹는 놈이라고. 공산주의일 때는 제대로 일도 안 하고 나라가 주는 작가 월급을 받다가, 자유시장이 열리니까 로열티를 받아먹는다고."라고 답했다.[8] 국내에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가 나왔기 때문에, 중국 현대 작가 중 인지도는 최상위이기도 하다.[9] 그의 책이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이야기의 힘' 덕분일 것이다. 그의 소설은 탄탄한 서사와 절묘하고 분명한 캐릭터, 그리고 유머를 특징으로 한다. 익살과 해학은 그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서민들의 고난 가득한 삶을 묘사하면서도 그는 웃음기를 잃지 않는다.[10] 다만 위화와 루쉰의 차이점은 루쉰의 소설은 중국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쉰이 작품은 난해하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중국의 역사적 주요 사건을 비유를 통해 적어 나가며 비꼬며 풍자했다. 그래서 루쉰의 소설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모르면 단순 계몽소설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11] 그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저는 줄곧 그를 흉내 냈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나서야 제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지요. 아직 젊을 때였고 지나칠 정도로 그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제 소설은 갈수록 형편없어지고 있었지요. 저의 글쓰기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는 오랏줄에 꽁꽁 묶여 있었던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후에 카프카의 작품을 말하며 함정에 빠져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12] 다만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레프 톨스토이라고 말했다. 그는 "'왜'라고 물으면 나는 그저 '안나 카레니나'를 보라. 얼마나 좋나'라고 답한다."라고 밝혔다. 위화는 그 책이 그가 읽은 그 무엇보다도 위대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3] 보통 작가들은 성인이 되기 전 세계 고전문학을 두루 섭렵하고 창작을 시작한다. 하지만 위화는 그의 학창시절이 문혁과 시간대가 겹치는 바람에 루쉰과 마오쩌둥의 작품만 합법적으로 읽을 수 있었고, 스무 살이 넘어서야 가와바타 야스나리, 어니스트 헤밍웨이, 프란츠 카프카, 스탕달,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마르셀 프루스트, 윌리엄 포크너,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등 작품을 읽었다.[14] 그는 루쉰의 책을 학생용이 아닌 어른용이라고 답했다.[15] 이런 스타일 때문에 작품을 빨리 쓸 수 있는 모옌이 부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작가마다 글 쓰는 방식이 다 다르다. 한숨에 써내려가는 사람이 있고 계속 글을 잡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나는 모옌이 글 쓰는 방식이 부럽다. 그는 긴 시간 동안 생각을 한 다음에 그 생각이 충분해지면 한숨에 글을 써내려간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글 쓰면서) 짧게 아픔을 겪고, 나는 길게 아픔을 겪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에게는 그런(단숨에 쓰는) 능력은 없는 것 같다."[16] 스페인의 소설가. 대표작으로 《새하얀 마음》,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가 있다.[17] 영어 제목은 Cries in the Drizzle[18] 한국에서 처음엔 '살아간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나왔으나 후에 '인생'으로 변경되었다.[19] 영어 제목은 To Live.[20] 위화에 말에 의하면 2012년 한 해에만 인생이 41만권이 팔렸고 2013년에도 40만부 이상 팔릴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2018년에는 한해에만 200만부가 팔렸다.# 실제로 이 책은 중국 인터넷 서점인 당당왕(当当网)에서 2020년 12월 기준 여전히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21] 영어 제목은 Chronicle of a Blood Merchant.[22] 영어 제목은 Brothers.[23] 영어 제목은 The Seventh Day.[24] 1986년에서 1998년까지 발표한 17편의 단편소설 모음집.[25] 원래 위화의 책은 푸른 숲에서 독점적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부터 문학동네에서도 출판되고 있다.[26] Giuseppe Acerbi International Literary Prize,[27] The Grand Prize Ivo Andric[28] Premio Bottari Lattes Grinzane[29] 그 뒤로는 김용-모옌(莫言)-퉁화(桐華, 가장 아름다운 시절/보보경심 작가.)-얼웨허(二月河, 강희대제와 같은 제왕삼부곡 시리즈 작가.)[30] 1위는 삼체를 쓴 류츠신.[31] 인생은 1993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어마어마한 스테디셀러라는 뜻이다.[32] 후보 명단은 중국 대륙 4000여 개 오프라인 서점, 수직형 직영 서점, JD.com, Tmall Bookstore 및 전국의 소셜 그룹과 같은 제 3 자 플랫폼, 커뮤니티 등 총 1만 개가 넘는 오프라인 서점들을 오픈북 중국 도서소매시장 모니터링 자료에서 따온 것이다.[33] 첩보 소설로 유명해진 인물. 장편소설로 『암호해독자』 『암산』 『바람소리』 『바람의 말』 등이 있고 『암산』으로 제7회 마오둔문학상을 수상했다.[34] 그 외에 작가로는 모옌, 자핑와, 왕멍, 이중톈, 우샤오보, 탕자싼샤오, 난파이싼수가 뽑혔다.[35] 이 영화의 평은 상당히 좋다. 장예모 감독의 대표작이며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주인공 갈우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36] 위화는 이 영화에 대해 “당시 장 감독이 내 소설들 중 하나를 영화로 패러디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작품을 놓고 함께 고민했죠. 결국 지금의 ‘인생’으로 결정됐어요. 지금 봐도 손색없는 영화입니다. 물론 화려한 영상이 더해진 오늘날의 영화들에 비하면 시대가 지났다는 느낌은 들죠.”라고 평했다.[37] 루쉰 특유의 상징적인 요소로 난해한데다 계몽적이고 이데올로기성이 강해 오늘날 중국의 사회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이다.[38] 신학기 교과서에서 퇴출된 글은 루쉰의 ‘아Q정전’, ‘약(藥)’을 비롯해 ‘냥야산의 다섯장사’, ‘공작, 동남쪽으로 날다’, ‘뇌우’(雷雨) 등 20여편이다.[39] 그외에 바진(巴金)의 산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 등이 차지했다.[40] 이때 같이 위화의 허삼과매혈기와 같이 등재된 작품이 김용설산비호(雪山飛狐), 아청(阿城)의 장기왕(棋王)이다.[41] '산자이'는 중국산 모조품을 뜻하는 말이다. 원래는 '울타리를 갖춘 산장'이라는 뜻인데 '가난한 지역'으로 의미가 확장됐고, 최근에는 정부가 관여하지 못하는 모방품이라는 뜻으로 흔히 쓰인다.[42] 세계적인 건축가다. 중국 사회와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자택 감금을 당했다. 현재는 중국을 떠난 상태. 2015년 7월에 독일로 출국하여 베를린에 머무르다가 2019년부터는 영국에 거주하고 있다.[43] 중국 국내에 시상하는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다.[44] 마오둔문학상을 제외하면 루쉰문학상이 가장 권위있다.[45] 이문구 작가는 위화의 소설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기도 했다.[46] 문학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주제로 열린 특강이었다.[47] 이전까지는 작가협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으나 2010년대부터 소속됐다.[48] 백원담(인생), 최용만(허삼관 매혈기, 형제, 가랑비 속의 외침), 박자영(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이보경(내게는 이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