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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0:44:35

을사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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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을사오적
파일:李址鎔.jpg 파일:091152026000.jpg 파일:1611073604797.png 파일:이완용.jpg 파일:091749561000.jpg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1. 개요2. 목록
2.1. 을사오적2.2. 을사삼흉
3. 반대자4. 에피소드
4.1.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5. 패러디
5.1. 정치5.2. 음식5.3. 스포츠5.4. 게임5.5. 드라마5.6. 인터넷
6. 관련 문서

1. 개요

乙巳五賊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한국 침략 과정에서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한국 측 대신 가운데 늑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를 뜻하는 말이다. 을사늑약은 이들을 통해 대한제국과 일본간에 공식적으로 처리되었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함으로써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령으로 전락시키고 국제사회가 일제의 조선 지배를 합법적으로 보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1906년 3월 12일 공립신문에 난망자오적(難忘者五賊)이란 기사가 실린 이후 오적(五賊)으로 통칭되기 시작했고 현재는 을사오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 목록

2.1. 을사오적

을사년 5인의 적. 을사늑약의 체결에 가담한 5명의 주요 친일 인사들이다.
<rowcolor=#FFF> 이름 직위 오늘날의 직위 사진
이지용
(李址鎔)
내부대신 행정안전부장관 파일:1611073612992.jpg
박제순
(朴齊純)
외부대신 외교부장관 파일:1611073620852.png
이근택
(李根澤)
군부대신 국방부장관 파일:1611073604797.png
이완용
(李完用)
학부대신 교육부장관 파일:1611073610177.jpg
권중현[1]
(權重顯)
농상공부대신 농림축산식품부장관 +
산업통상자원부장관
파일:1611073624532.png
매국노를 대표하는 집단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지녔다. 매국노하면 을사오적, 을사오적하면 매국노가 떠오를 정도로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하다.[2] 많고 많은 매국노가 기록된 친일인명사전에서도 맨 첫 장을 장식한 인사들이다.

2.2. 을사삼흉

일러두기
본 문서에 등장하는 '을사삼흉'이라는 단어는 정식 학술 용어가 아닙니다.
<rowcolor=#FFF> 이름 직위 오늘날의 직위 사진
이재극
(李載克)
궁내부대신 대통령비서실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Lee_Jae-geuk_Portrait.jpg
민영기
(閔泳綺)
탁지부대신 기획재정부장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in_Yeong-gi_Portrait.jpg
이하영
(李夏榮)
법부대신 법무부장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Lee_Ha-yeong_Portrait.jpg
을사조약 체결에는 찬성하지 않은 자들 중에서, 고종을 협박했던 궁내부대신 이재극[3],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조약 체결 이후에는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법부대신 이하영, 경술국치 이후로 훈장작위(남작)를 받고 친일파로 살았던 탁지대신 민영기#를 을사삼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하영은 반대에서 찬성으로 입장을 바꾼 후 조약 체결 과정에서 박제순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위 8명 중 이완용을 제외하고는 잘 모른다. 문서 최상단 틀만 보아도 이완용은 수많은 매국노들 중에서도 혼자 을사오적, 경술국적, 정미칠적에 전부 포함되어 있다.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나라를 팔아먹기 바빴던 정말 독보적인 수준의 매국노라는 뜻이고, 그 임팩트가 너무 강해 우리나라 역사에 정말 관심이 있거나, 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저 나머지 사람들러리들의 이름이 바로바로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정미칠적에 포함된 송병준이 일진회로 인해 더 유명하다. 심지어 이완용을 제외한 을사오적이 얼마나 존재감이 없는가 하면, 송병준이용구를 을사오적의 일원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3. 반대자

이름 직위 오늘날의 직위 사진
한규설
(韓圭卨)
참정대신 부총리 + 국무총리
직무대행
파일:1611332825188.png
이러한 상황에서 위의 을사오적이나 을사삼흉과는 다르게 끝까지 확실히 반대의 의견을 피력한 인물은 당신 참정대신 한규설이었다. 한규설은 을사늑약 체결 시에 지속적으로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고 체결 이후 외부적 압력으로 인해 참정대신에서 해임되었다.

4. 에피소드

외부대신인 만큼 박제순은 원래 "외교권은 안 된다"라고 하던 자인데, 당일에는 겁먹고 "마음대로 하시오"하고는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어줬다.[4]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바로 교섭(交涉)이니 찬성과 반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외부대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외교권(外交權)이 넘어가는 것을 어찌 감히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한규설과 함께 조약문 수정에는 불참하지만 합방 때 똑같은 짓을 한다. 반대하다가 결국에 끝에는 찬성, 그리고 경술국적 등극. 권중현도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황실의 존엄 및 안녕이 포함되면 상관없다는 식의 말로 결국 찬성.

이지용의 경우는 그들과 달리 나이도 제일 어리고, 이전부터 친일파로 설쳐대면서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을 다 하게 했던 인간이다. 그만큼 뼛속까지 친일파라 일본만 철석같이 믿던 자인데, 도박 중독자가 돼서 죽을 때는 "일본에게 속았다"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다만 외교 한 가지만 이웃 나라에 맡긴 것이고, 부강해지면 되찾을 수 있다"면서 보호국이 되는 것을 실컷 우겼다고 하는데, 사실 한일의정서 때도 일본한테 뇌물 쳐받은 인간이라 대한제국이 부강해지느니 어쩌느니 한 건 다 스스로 꾸며낸 말이고, 자기 부와 권력 가지려고 한 앞잡이짓이다.

일각에서는 군부대신 이근택의 경우 고종의 충복이나 다름없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고종의 밀명으로 친일파에 든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근택은 훨씬 전에 궁정 쿠데타를 기획한 적도 있다.# 사실 근왕파였던 것으로만 따지면 이완용도 아관파천 때 적극적으로 활동한 고종의 측근[5][6]이었다.

4.1.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사실 이들에게도 소수를 제외하면[7] 변명거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을사조약 전에 한일의정서와 1차 한일협약을 허용한 상황이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이 진행한 을사조약을 막기 힘들게 했다. 게다가 저 을사오적이라는 이들 가운데 애초에 뚜렷하게 찬성을 표현한 이는 없다. 그 이완용조차도 "저는 황제 폐하께 이러저러하게 말씀을 올렸습니다만 찬성한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라고 했었고, 박제순은 어쨌든 절대 반대한다는 표현을 했으며, 그 외에도 대부분 "저는 조선의 대신인데 어찌 조선의 권리를 넘기는 일을 찬성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식으로 돌려서 어정쩡하게 표현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그 말을 듣고는 반대하지 않으면 찬성이라는 괴상한 논리를 펼친 것인지 "음... 그럼 찬성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라는 이상한 해석을 통해 찬성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거짓 딜레마의 일종이다.

이들이 만약 목숨을 걸고 똘똘 뭉쳐 결사반대했다면? 조선의 거의 모든 다른 친일파들마저 결사반대하는 아주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이상 그래도 딱히 변하는 건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아마 이들을 모두 해고시키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죽여버리고[8][9] 그 자리에 다른 친일파들을 앉혀서라도 을사조약을 체결해냈을 것이다.

즉, 이미 사실상 대한제국 내각은 모든 요소를 일본에게 빼앗겨 실권을 잃은 상태였고, 비상시국에 적합한 군주가 아니었던 무르고 우유부단한 황제, 개혁의 기회를 잡지 못하게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던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의 삼박자의 잘못이 거듭된 끝에 저 을사오적이라는 거대한 인물들로 터진 것이다. 을사오적이 멀쩡한 나라를 팔아먹었다며 저들만 탓하는 것 역시 상황에 대해 알지 못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한규설처럼 대한제국의 대신으로서 결사반대해서 해고되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했어야 옳았다. 국가에 충정을 바치라고 평소에 백성들이 굶어죽는 와중에도 나라의 녹을 주며 풍요롭게 살도록 해 준 것인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자기 보신을 위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아무것도 안 했으니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논점은 저들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저들만의 잘못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5. 패러디

을사오적이라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큰 죄를 지은 배신자'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한다.

을사오적의 패러디는 주로 을사오적의 '을' 대신 다른 단어가 들어가거나 '을사'를 해당 연도의 육십갑자 또는 다른 단어로 바꾼 패러디가 많이 존재한다.[10]

비슷한 매국노 총칭으로 정미칠적이랑 경술국적 등이 있지만 당연히 을사오적이 인지도로는 압도적이다. 우선 다섯명이라는 인원이 생각보다 많이 나오는데다가 을사조약이 국권침탈 과정 도중 가장 자세히 배우는 사건들중 하나다. 또한 경술국치야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가 된 것은 역사에 아무런 관심 없던 사람도 알지만 경술국적이란 용어 자체가 쓰이는 빈도가 적으며 정미칠적또한 정미 7조약 자체가 군대해산을 제외하면 쉽게 넘기는 경우가 잦고 무엇보다 일곱명은 이미 부정적,긍정적 의미로도 쓰이는 대체어가 있다.

5.1. 정치

5.2. 음식

5.3. 스포츠

5.4. 게임

5.5. 드라마

5.6. 인터넷

6. 관련 문서


[1] 아이러니하게도 권중현의 조상이 권율이순신이다. 부모가 각각 권율과 이순신의 9대손이다.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두 조상의 유전자가 만나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셈이다.[2] 해외 위키피다아에서도 정미칠적, 경술국적은 중국어, 일본어 위키피디아 정도밖에 문서가 없는 것과 정반대로 을사오적은 영어, 프랑스어, 말레이어, 인도네시아어를 넘어 우크라이나어, 노르웨이어 위키피디아에도 문서가 있을 정도다.[3]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이토는 이를 찬성으로 취급했다. 이토는 추궁에도 무조건 반대를 고수한 한규설을 제외하고는 모두 찬성으로 취급하였다.[4] 외무대신인 만큼 조약의 대표였다. 이 조약이 황제의 명의가 아닌 외무대신과 이토의 명의로 나온 것을 기억하자.[5] 이완용은 젊을 때 무려 고종의 아들 세자(훗날의 순종)를 직접 가르치던 선생이었을 정도니 측근이 아닐 수가 없다. 이완용은 당대 조선 공무원들 중 영어를 가장 잘한다고 소문났던 사람이고, 훗날에도 자기가 나라를 팔아 일본인이 되었음에도 미국인과는 통역 없이 이야기하고 오히려 일본인과는 일본어 통역을 썼다. 일본어를 몰라서, 젊을 때 영국에서 살았던 이토 히로부미와 영어로만 대화했다.[6] 원래 반일 친미 친러 성향, 즉 서양파였던 이완용이 돌변하여 고종과 러시아를 버리고 친일파가 된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20세기 초 러일전쟁 영향도 있지만, 그전에 이미 19세기 말 아관파천 때 노력에 비해 이후 고종에게 천대를 받은 원한이라는 설이 있다.[7] 이지용은 을사조약 이전에 한일의정서와 1차 한일협약의 앞잡이였기에 변명거리도 없는 골수 친일파 매국노이다. 단지 이때는 러일전쟁 종전 이전이라 고종이 러시아 승리를 기대하던 시기라 일본군대가 한반도와 만주에 있던 상황 속 리스크를 덜 지려고 고종이 반대를 제대로 못한 감이 있다. 물론 그건 고종이 반대를 잘 못했던 사정이 그런 거고, 이지용은 오히려 그 핑계로 밀어붙였으니 다르다. 좋건 나쁘건 친일파.[8] 당시 일본 제국은 일국의 왕비직접 칼로 베어죽이고 시체까지 태워버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후대의 일이지만 일본 제국은 군국주의에 반대했던 자국의 총리마저 총으로 죽이기도 한다. 하라 다카시, 이누카이 츠요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사이토 마코토, 5.15 사건, 2.26 사건 문서를 참조.[9] 만약 이들이 을사조약을 결사반대했다면 당장 죽여서 반동을 일으키기보다는, 일단 모두 해임시키고 다른 친일파들을 앉혀서 을사조약을 체결한 다음, 합병을 완전히 끝낸 뒤에 처형했을 것이다.[10] 대표로 계모오적.[11] 해당 사건이 1년도 아닌 한달만 더 늦었다면 백만 붙인 을사백오적이 될 뻔했다. 해당 년도가 을사늑약 이후 119년 뒤고 달은 마지막 달이였으며, 그 이듬해인 2025년은 을사늑약이 일어난지 정확히 120년이며, 1905년 기준 60간지가 정확히 두 바퀴를 돌 때이다.[12] 정진석 정무수석이 트위터에 "튀김닭의 원가가 6200원인 점을 감안하면 롯데마트가 마리당 1200원 손해보고 판매하는 건데 대기업인 롯데마트가 매일 600만원씩 손해보면서 닭 5000마리 팔려고 영세업자 3만여 명의 원성을 사는 걸까"라고 남겼다.[13] 이들은 정진석이 통큰치킨 판매 중단 관련해서 트위터에 올린 글에 동의를 표해가지고 역적 취급을 당했다.[14] 당시 터키 대통령과 찍은 사진으로 인해 아예 역적 취급을 당했다.[15] 주장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과 골키퍼가 골문을 비우고 나와서 손흥민에게 빈집털이를 허용 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역적 취급을 당했다.[16] 심영이 전화를 달라니까 중환자실이라서 전화는 없으니 푹 쉬라고만 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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