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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01:30:48

이방자

자행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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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왕공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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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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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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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의민태자의 태자비
자행황태자비 | 慈行皇太子妃
파일:1200px-Yi_Bangja.jpg
출생 1901년 11월 4일
일본 제국 도쿄부 도요타마군 시부야마치 별저
(現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시부야)
사망 1989년 4월 30일 (향년 87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낙선재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능묘 영원(英園)
재위기간 이왕세자비
1920년 4월 28일 ~ 1926년 4월 25일
이왕비
1926년 4월 27일 ~ 1947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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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F> 본관 사성 전주 이씨[1]
방자(方子)[2]
부모 부친 나시모토 모리마사
모친 나시모토 이츠코
배우자 영친왕(의민황태자 영왕)[3]
자녀
슬하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이진 (李晋, 1921 ~ 1922)
차남 - 회은황세손 이구 (懷隱皇世孫 李玖, 1931 ~ 2005)
종교 신토천주교 (세례명: 마리아)
신체 156cm, 46kg[4]
가혜(佳惠)
작호 여왕(女王)
→ 이왕세자비 여왕(李王世子妃女王)
→ 이왕비 여왕(李王妃女王)
사시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
(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5]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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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장애자 재활협회 부회장 (1963~1982)
자행회 설립[6] (1965)
사회복지법인 명휘원 이사장, 총재 (1967~1986)
수원시 자혜학교 이사장 (1975)
광명시 명혜학교 이사장 (1982)
부용회 명예회장[7]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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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3위 훈이등보관장 (1919)
정3위 훈일등보관장 (1926)
서울특별시 문화상 (1972)
대한적십자 박애장 금상 (1977)
국민훈장 모란장 (1981)
소파상 (1981)
5.16 민족상 (1981)
국민훈장 무궁화장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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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름과 호칭3. 생애4. 가족 관계
4.1. 친가4.2. 외가4.3. 형제
4.3.1. 친자매4.3.2. 사촌 여동생
4.4. 시가
4.4.1. 가정
5. 여담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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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결혼 전 이방자 여사.png
파일:19_영친.jpg
<rowcolor=#fff> 결혼 전, 여동생 노리코와 함께 1920년 영친왕과의 결혼식 사진출처

왕공족이자 교육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의 부인이다.

1962년, 대한민국 국적 취득 후 복지 사업에 전념하였다. 한국의 마지막 왕비는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계비인 순정효황후이나, 일제강점기 이왕가까지를 범주에 포함할 경우 한국 구 황실의 마지막 왕비로 간주한다.

2. 이름과 호칭

원래 이방자는 일본 방계 황족이었으며, 부계 혈통상 스코 덴노의 18대손이다. 결혼 전의 호칭은 마사코 여왕(方子女王)였으며 지위는 여왕(女王)이었다. 여왕은 일본 황실의 칭호 중 하나다. 본래 천황의 4대손까지를 친왕(남)/내친왕(여)이라 하고 5대손부터를 왕/여왕이라 했다. 그러다가 1947년(쇼와 22년)에 현행 황실전범으로 개정된 이후부터는 손주까지를 친왕/내친왕, 증손부터를 왕/여왕이라 한다.

영친왕과 결혼하면서 왕공족의 일원이 되었다. 일본 황족은 본래 성씨가 없다. 성으로 알려진 '나시모토노미야'는 미야고(궁호)다. 미야고는 해당 미야케(宮家)의 당주에게만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정식 호칭은 그냥 '마사코 여왕(方子女王)'이었다.[8] 영친왕과 결혼 후 부인이 남편의 성을 따르게 하는 당시 일본의 민법에 따라 남편과 같은 '이(李)'씨 성이 되었다. '이방자'라는 이름은 본명인 마사코(方子)를 그대로 한국식으로 읽어서 완성된 이름이며, 일본에서는 원어 그대로 '리 마사코'라고 부른다. 남편의 성을 그대로 따랐으므로 본관은 전주 이씨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영친왕의 지위는 이왕세자였고, 순종황제가 사망한 후에 이왕이 되었다. 이에 이방자는 결혼 당시 '이왕세자비 마사코 여왕(李王世子妃方子女王)'으로 불렸고, 영친왕이 이왕에 오른 뒤에는 '이왕비 마사코 여왕(李王妃方子女王)'이 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방자는 황족 이외의 남성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신적강하가 될 수도 있었지만, 당시 왕공족은 일본 황실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여왕' 칭호를 유지하라는 다이쇼 덴노의 칙령(『관보』 제2320호 「궁정록사」)도 있었기에 이후에도 여왕 지위를 유지하였다. 1947년(쇼와 22년) 왕공족 제도 폐지 뒤에는 그저 '이방자(리 마사코)'로 불렸다.

대한민국에선 대한제국의 기준에 맞출 경우 '영친왕비(英親王妃)'라고 부르거나 '의민황태자비(懿愍皇太子妃)'라고 부르는데, 사실 이는 틀렸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라는 사시(私諡)[9]를 올렸으므로 대한제국에 맞춘 다면 '자행비'가 올바른 명칭이기 때문이다.

기타 존호를 앞에 쓰고 시호를 맨 끝에 붙이는 조선의 관행상, 시호로 호칭할 경우 '자행황태자비'나 '자행태자비'가 된다. 그런데 왜 '자행비'로 부르는 게 맞냐면, 대한제국 황태자비의 시호는 '○○비'였기 때문이다. 순명효황후가 황태자비로서 받은 시호는 '순명비'였다. 중국에선 이런 경우 '○○황태자비'로 시호를 올렸는데, 이방자의 사시는 이를 참고해서 지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의민황태자비'든 '자행비'든 간에 상기해야할 점이 있다. 이방자는 대한제국황태자비로 정식 책봉받은 적이 없다는 것. 왜냐하면 1897년부터 1910년까지 존속했던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인 1920년에 영친왕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은 왕공족을 여전히 황족으로 여겼기 때문에,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왕공족과 결혼한 이나 왕공족으로 태어난 이들도 일반적으로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간주하는 편이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들은 '대한제국의 황족'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방자 외에 1912년생인 덕혜옹주이우, 1931년생인 이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당시 왕공족으로서 이왕세자 지위에 있었던 이은과 결혼한 이방자를 '황태자비'로 대우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옳지 않다. 다만 황태자 이은의 하나뿐인 아내이기 때문에 황태자비로 여기고 대우했던 것이다. '자행황태자비'라는 황태자비 자격의 시호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멸망한 대한제국 황실을 대신하여 사사로이 올린 시호(사시)일 뿐이다. 그 때문인지 이방자는 사시나 그 약칭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다.

'이방자 비'라 부르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 명칭은 일본 황실의 호칭 체계에 따른 것(이름+비)이라 현대 한국에선 원칙적으로는 적절한 호칭이 아니다. 다만 왕공족 시절의 이방자를 가리키는 경우에 한해서 쓰이는 경우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호칭은 '이방자 여사'이며, 엄밀히 따지면 이 호칭이 가장 적절하다. 현대 한국에서 사시를 인정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이왕가 시절의 호칭을 부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전에 본인 스스로 '이방자 여사'라는 명칭으로 대중매체와 접촉했으며, 1981년 한 여성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였던 배우 장미희가 "호칭을 어떻게 할까요? 비 전하(妃殿下)라고 해야 할까요?"라고 묻자, 이방자 본인이 "그냥 편한 대로 '여사'라는 호칭을 써 주세요."라고 직접 대답한 적이 있다.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방자/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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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족 관계

파일:2ba0aeeb413ba641cb723dae154df559.jpg
어린 시절의 이방자.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4.1. 친가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梨本宮守正王)일본 황실의 분가인 나시모토노미야의 당주로,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과 '뇨보(女房)'라는 직위의 시녀였다고 전해지는 측실 하라다 미쓰코(原田光枝子)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구니노미야 다다(久邇宮多田)였으나, 메이지 덴노의 명에 의해 작은할아버지 모리오사(守脩) 친왕이 창설한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양자로 입적되면서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으로 개명했다. 모리마사 왕의 형제로는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10],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등이 있다.

메이지유신 이전의 남성 황족들은 유명한 사찰에서 대처승로 있었으나, 메이지유신 이후로는 승려 대신 군인이 되어야 했다. 이방자의 할아버지인 아사히코 친왕도 밀교(천태종) 사찰인 쇼렌인(青蓮院)의 주지승었으나 환속했고, 아버지 모리마사 왕도 군인이 되었다. 사실 나시모토미야 가문 자체가 교토 산젠인(三千院)의 별칭 중 하나였던 '나시모토보(梨本坊)'에서 따온 것으로, 히에이산 엔랴쿠지(延暦寺) 근처에 있던 커다란 배나무 옆에 암자를 지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이후 모리마사 왕은 이세 신궁신주도 맡았는데, 그 때문에 패전 후 일본 황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전범으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세 신궁은 일본 황실의 조상신을 모시는 신토의 핵심을 이루는 장소이므로, 국가신토에 대한 처벌을 이유로 상징적으로 기소·처벌된 것이다. 모리마사 왕은 스가모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패전 후인 1947년 10월 14일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을 제외한 모든 구황족들은 황적이탈하여 평민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황족이던 나시모토노미야 가문도 이때부터 평민 나시모토 가문이 되었고, 신분과 재산을 잃고 어려움을 겪었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는 이런 일화도 나온다. GHQ가 구황족들에게도 막대한 세금을 내도록 요구하자, 일자리가 없던 구황족들은 당연히 저택과 별장 등을 팔아서 겨우 생계를 이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집에 침입해서 옷가지까지 모조리 쓸어가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는데, 이를 알고 불쌍히 여긴 황실에서 옷을 하사해서 한동안 그 옷을 입고 다녀야만 했다고 한다.

모리마사 왕은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이복동생 다카 왕의 막내아들인 노리히코1966년 나시모토 가문에 입적되었다.

다만, 모리마사 왕 생전에는 외손자(차녀 노리코의 3남) 요시미쓰(儀光)가 양자로 들어왔으나 관계가 악화되어 파양했고, 이후에 새로이 양자로 들어온 사람이 노리히코. 참고로 현재도 그렇지만 황실전범에서는 황족의 양자 입양을 허락하지 않는데, 역설적으로 황적이탈로 평민이 되었기 때문에 양자를 들일 수 있었던 것.

노리히코는 5촌인 마사코 여왕(正子女王, 1926-)[11]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내 마사코와 자녀들도 노리히코와 함께 나시모토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노리히코와 마사코는 1980년 이혼했고, 이때부터 자녀들과 관계가 소원해진 노리히코는 아들을 후계자에서 제외해 버렸다. 2002년 노리히코는 황족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다카오(隆夫, 1938-)라는 사람을 양자로 입적했고, 이 사람이 현재 나시모토 가문의 당주이다.

====# 일본 구황족 가계도 #====
쇼와 22년(1947년) 직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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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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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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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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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라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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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외가

어머니 이츠코(伊都子) 비는 화족 나베시마 가문 출신으로, 나베시마 나오히로(鍋島直大)와 후처 히로하시 나가코(廣橋榮子)의 딸이다. 나오히로에게는 차녀(셋째), 나가코에게는 장녀(첫째)가 된다.

나베시마 가문은 히젠국(肥前國) 사가(佐賀) 번의 다이묘 가문으로,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시게임진왜란 때 대규모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한 바 있다. 나오시게는 임진왜란 당시 2진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로 참전했다. 휘하라고는 하지만 출정 당시 가토의 본진보다도 병력이 많았다. 선조의 두 서자 임해군순화군을 사로잡기도 했다. 정유재란 때는 4진으로 왔고, 울산성 전투 당시 조명 연합군에 의해 울산성에 고립된 가토를 구원하였다.

왜란 이후 나오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동군)의 편에 가담했고,[12] 사가 성을 짓는 등 가문의 기초를 다졌고, 나오시게의 아들 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茂)가 사가 번의 번주가 되었다.

이방자의 외할아버지인 나오히로는 제11대 번주였다. 사가 번이 속한 히젠 지역이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과 더불어 토막운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나오히로도 무진전쟁에 참전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화족 제도가 생기자 나오히로는 후작 작위를 받았고,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서 일했으며, 영국 유학 이후에는 외교관으로도 일했다.

본래 나오히로는 우메타니 타메코(梅溪胤子)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으나, 타메코가 죽은 후 히로하시 나가코와 재혼하여 4남 4녀를 더 낳았고, 아사치요(朝千代)라는 측실에게서도 딸을 1명 낳았다.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에 있을 때 낳은 차녀에게 '이츠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이는 '이탈리아(伊)의 수도(都)에서 낳은 아이(子)'라는 뜻이다.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들어 일본청일전쟁, 의화단 운동 진압, 러일전쟁 등을 치르며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해외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본 여성들도 애국부인회와 간호부인회 등의 단체를 조직해 후방에서 일본군을 지원했다. 나베시마 가문의 근거지인 사가현에서도 승려(대처승)의 딸인 오쿠무라 이오코(奥村五百子)에 의하여 애국부인회가 결성되었고, 이오코는 일본 전역을 순회하며 열성적으로 활동했다.[13]

황족·화족 여성들도 이러한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방자의 외할머니 나가코와 어머니 이츠코도 일본적십자사 간호부인회에서 활동했다. 나가코는 간호부인회 총괄 책임자로서 1900년 7월 1일 요코하마 항구에서 청나라로 떠나는 적십자사 간호부들을 배웅했다. 이츠코는 붕대 감는 법, 의복 및 침상 교환하는 법 등을 배웠고, 결혼하여 이방자를 낳은 후로도 간호 교육을 받았다.

나오히로의 4녀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는 훗날 다이쇼 덴노의 차남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장모가 되었다. 노부코는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가쿠슈인 동창회장 및 황족·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1959년 평민 쇼다 미치코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시집올 때는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츠코도 여동생 노부코와 함께 미치코를 반대했다. 이츠코는 평생에 걸쳐 일기를 썼는데,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다고.

나오히로와 측실 아사치요 사이에서 태어난 5녀 마츠다이라 도시코(松平俊子)는, 의친왕의 장남이자 자신의 시조카가 되는 이건의 장모가 되었다.

메이지유신대정봉환으로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붕괴되고 천황이 직접 일본을 통치하게 되자, 일본의 유력한 다이묘 가문들은 황족 가문과 결혼하려고 애썼다. 다이묘들은 가문의 격을 높이고 싶었고, 대부분 별로 유복하지 못했던 황족들은 경제적인 도움을 원했기에, 일종의 윈 - 윈인 셈이었다.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의 아들 모리마사 왕과 나베시마 가문의 딸 이츠코의 결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에 나베시마 가문은 이츠코를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시집보내면서, 재물을 그야말로 쏟아부었다. 한 예로, 프랑스 파리까지 하인을 보내어 왕관 등 각종 보석 세트를 만들어왔는데, 하인이 일본과 프랑스를 오가는 시간과 보석 세트를 만드는 시간을 다 합하여 꼬박 1년 반이나 걸렸다고 한다. 왕관 하나에만 2만 몇천원이었고, 보석 세트를 다 합하면 십 수만 원이나 들었다. 당시는 일본 총리의 연봉이 9,600원이었고, 30,000원만 있어도 그 이자만으로 평생 부유하게 살던 시절이었다. 거기다가 하인의 교통비와 프랑스에 머무는 비용까지 합하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게다가 혼수로 왕관과 보석만 마련해 간 것도 아닐 테니, 상상도 되지 않는 규모이다.

4.3. 형제

4.3.1. 친자매

친자매로는 6살 아래의 여동생 히로하시 노리코(廣橋規子, 1907-1985)가 유일하다. 노리코 여왕은 방계 황족인 야마시나노미야 다케히코 왕(山階宮武彦王, 1898-1987)[14]의 후처가 될 예정이었으나, 다케히코 왕의 정신병으로 인해 약혼이 취소되었다.

다케히코 왕은 1922년 방계 황족인 사키코 여왕(佐紀子女王)과 결혼했으나, 관동 대지진 때 임신 중이던 사키코 비가 건물 붕괴로 깔려 사망했고, 그 충격으로 다케히코 왕은 정신병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 다케히코 왕은 1931년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편입되었고(최종 계급은 일본 해군 소좌), 1947년 황적이탈 당시 평민으로 격하되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1987년 8월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야마시나노미야 가문은 직계 기준으로는 단절되었다. 다케히코 왕의 친남동생인 요시마로(芳麿, 1900-1989)는 전쟁 전에 후작 직위를 받고 신적강하했는데, 그도 자식이 없어 여동생 아사노 야스코(淺野安子)의 차남 요시마사(芳正)를 양자로 들여야 했다. 그리고 더 아래에 있던 이복 남동생들도 신적강하하여 황적에서 이탈했다.

파혼 이후 노리코 여왕은 히로하시 타다미츠(廣橋眞光) 백작과 결혼하여 백작부인이 되었고, 3남 2녀를 낳았다. 타다미츠는 노리코의 외할머니 나가코의 오빠인 히로하시 마사미츠(廣橋賢光)의 아들로, 노리코의 어머니 이츠코 비에게는 외사촌 남동생이며, 노리코 본인에게는 당숙이 된다.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딸만 둘이라서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노리코의 3남 요시미츠(儀光)가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입적되었다. 그러나 요시미츠는 외할머니 이츠코 비와 사이가 나빠져 파양되었다. 이후 위에서 서술한 대로 노리히코와 다카오가 나시모토 가문을 이었다.

4.3.2. 사촌 여동생

사촌 여동생 중에는 훗날의 고준 황후가 된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있다. 이방자는 1984년경향신문》에 기고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어린 시절의 나가코 여왕에 대하여 "여성으로서 마음씨가 곱고, 우아하고, 총명하며, 노래를 잘 불렀다."라고 회고했으며, 히로히토 황태자의 비가 된 나가코 여왕에 대해 "내 백부님[15]의 딸이며 사촌 여동생이기 때문에, 그녀가 황태자비가 된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이종사촌 여동생인 마츠다이라 세츠코아이즈 번의 마지막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손녀로,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비가 되었다. 또 다른 이종사촌 여동생 마츠다이라 요시코(松平誠子)는 의친왕의 장남 이건의 아내가 되었으나, 패전 후 이혼하였다. 이때 요시코는 이름의 한자를 佳子로 고쳤는데, 고준 황후의 증손녀 카코 공주와 같은 한자이다.

4.4. 시가

4.4.1. 가정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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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 여사와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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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 작품을 만들고 있는 이방자 여사
김수임 할머니는 일본어가 능숙했고, 중국에서 일본인과 같은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 일본 요리도 곧잘 만들어 이방자 여사와 첫 만남부터 대화가 잘 통했다고 한다. 더욱이 복지사업을 구상하던 이방자 여사에게 할머니는 '장애인 교사'의 어머니로서 대단한 열성과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첫 눈에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힘을 합쳐 1967년 심신 장애아를 위한 복지단체인 자행회(慈行會)를 발족시켰다. 1971년에는 사회복지법인 명휘원(명휘는 영친왕의 아호)을 설립하는 등 그 당시 개념조차 정립이 안 돼 있던 '장애인 복지와 사회복지'를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이방자 여사와의 첫 만남부터 계속되는 참배에 대한 소회를 풀어 지난 1월 15일 <영왕비 전하의 뜻을 따라>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이방자 여사와 얽힌 여러 가지 일화를 잔잔하게 들려준다. 이 책에 글귀 중 하나다.
"본의 아니게 일생을 두 나라 국민으로 일본에도 한국에도 성(誠)을 다하신 그분을 곁에서 25년 동안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웠고, 아껴주신 고마움을 한 순간도 잊지 못하며 고집쟁이 내 인생의 역사를 바꾸어주신 덕분에 오늘도 남 위해 살려고 노력하는 나날이 나이를 잊고 힘에 겨운 목표를 향해 기적을 바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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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매쌍작(寒梅雙雀)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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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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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를 이은 왕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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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마지막 근현식
한국 측에서 촬영 협조를 받았기 때문인지 역사적 서술에서 일제강점기를 의도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일례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잠시나마[37] 언급되는가 하면,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에 대해 남편 영친왕이 격노해서 뛰쳐나가려 하고, 이방자는 학살에 대해 "너무 심하다"고 한탄하는 장면까지 있었다. 그러나 드라마의 타이틀에도 언급되는 주 소재가 부부애인 만큼, 둘 사이에서 있었던 일 중 껄쩍지근한 면[38], 특히 일본에 불리한 측면은 언급없이 넘어가는 부분도 있기는 하다. 경제 사정으로 상당히 고생했던 일본 패망 이후의 삶 전까지의 내용만 다루고 있는데 이방자 여사는 전후 작은아들인 이구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던 기간을 가장 행복한 시기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이 내용까지 다루려면 긴 방영 기간이 필요했을 것. 일제강점기를 다룬 작품임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많이 보이는 괜찮은 작품이다.
* 19811226 KBS방송된 [2시간 드라마] 얼굴 1부에 이방자 여사 본인이 잠시등장한다
https://youtu.be/r-8wW6a7-uM?t=160

[1] 일본 방계황족이라 원래 성씨가 없었으나 결혼 후 남편 영친왕 이은의 성을 따랐으므로 자연스레 전주 이씨가 되었다.[2] 일본어 발음은 '마사코'인데, 일본에서는 왕공족 제도 폐지 후 '리(이) 마사코'라고 부르기도 했다.[3] 영친왕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의민황태자 영왕'이란 명칭은 처음 들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는 영친왕이 1970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사적으로 시호를 올리는 사시(私諡)제도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시호는 여러 문제가 있는데 황태자 책봉 전의 칭호는 영왕이 아닌 영친왕이고, 황태자한테 친왕을 붙이는 것은 일본의 예법이고, 황태자로 책봉이 되면 친왕 칭호는 붙이지 않는 것이 본래 예법이다. 하지만 어차피 사시 제도는 아무런 법적인 효력도 없긴 하나, 영친왕이 마지막으로 종묘 영녕전 세실에 모셔지게 되면서, 통상 명칭은 영친왕이지만, 사시에 올려진 것은 의민황태자 영왕이라 했기에 병기한다.[4] 출처[5] 사망 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으로부터 받은 사시(私諡)로, 이방자가 1966년 설립한 심신장애자재활원 자행회(慈行會)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6] 장애인교육과 복지증진을 위해 창립한 자선단체.[7]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남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들 중 해방 직후 귀국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임.[8] 다만 성씨가 없는 일본 황족 특성상, 당주가 아니더라도 미야고를 성씨처럼 쓰기도 한다.[9] 사적인 시호. 영친왕과 이방자는 순정효황후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망했으므로 공적인 시호를 받지 못했다.[10] 고준 황후(나가코)의 아버지이자 쇼와 덴노의 장인. 훗날 조명하 의사의 타이중 의거에 피습당해 암살당했다.[11] 고준 황후의 큰오빠인 구니노미야 아사아키라 왕(久邇宮朝融王)의 장녀.[12] 당초 아들인 가츠시게는 서군에 가담했으나 동군의 승리를 예측한 나오시게는 아들을 전선에서 이탈시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죄의 뜻을 전하는 등 동군에 가담하였다.[13] 한편 이오코는 일본의 폭력 우익조직 흑룡회를 등에 업고 전라남도 광주에 왔으며, 한국일본 불교를 포교하고 일본인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14] 아버지 쪽으로 6촌이 된다.[15]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사실 더 위로도 가야노미야 구니노리 왕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병약해서 구니노미야 가문을 잇지 못하고, 구니요시 왕이 구니노미야 가문을 이었다.[16] 의친왕의 차남으로, 후에 운현궁 종가의 영선군 이준용에게 양자 출계한다.[17] 의친왕의 3남으로, 후에 소현세자파 종가의 이기손에게 양자 출계한다. #[18] 의친왕의 4남으로, 후에 은전군의 종가인 은전궁 종주 이헌용에게 양자 출계한다.[19] 의친왕의 5남으로, 후에 인평대군의 종가인 대궁 종주 이인용에게 양자 출계한다.[20] 의친왕의 7남으로, 후에 연령군의 종가인 계동궁 종주 이기용에게 양자 출계한다.[21] 엄격하게 말하면 발음 문제이지 대한민국 사람이면 어느정도 알아들을수 있는 상황이다.[22] 자세히 들어 보면 순헌황귀비시어머니라고 인터뷰 했다.[23] 때문에 운보 김기창, 이당 김은호 등의 화가들이 친일파 논란을 겪는데 비해, 되려 이방자 여사의 서예과 그림 등은 이런 논란없이 인기가 있는 편이다.[24] 출처 : #.[25] 출처 : #.[26] 오히려 이석 씨야말로 중앙정부나 문화재청도 아닌, 전주시민들의 세비를 그것도 무상에 어거지로 받아 승광재라는 곳에 살면서 멋대로 사용(私用)해 몇 번씩이나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오히려 이방자 여사의 자선활동이야말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지원을 받아 이뤄진 것으로서 철저히 공익을 위해 행해진 것이다. 이때문에 육영수의 차녀인 박근령이 이방자 동상 건립 때 축하인사를 건네기도 했다.[27] 주로 지적장애아, 지체장애아.[28] 이방자 여사가 1989년에 사망한 후, 김수환 추기경은 창덕궁 낙선재에서 장례 미사를 주례했다.[29] 출처 : #.[30] 출처 : #.[31]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세월이여 왕조여〉를 기본 텍스트로 하고, 이후 황손 이구가 사망한 2005년까지 조선 황실의 근황을 정리하여 보완했다.[32] 송몽규의 조카이다.[33] 1권: 《못생긴 엄 상궁의 천하》, 2권: 《황태자동경 인질살이》, 3권: 《왕세자 혼혈 결혼의 비밀》, 4권: 《평민이 된 왕 이은의 천하》.[34] 영친왕을 맡은 오카다 준이치의 한국어가 엄청나게 어눌한데 정작 영친왕은 일본어와 한국어를 둘 다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던 사람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당시 인기 남녀 배우가 대한제국황족 역할을 맡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35] 극 중 영친왕 내외가 입고나온 대례복과 궁중 한복도 MBC 의상팀에서 제공해준거라고 한다. MBC와 미국 CBS, 일본 후지 TV 등은 서로 민간 네트워크 제휴 관계를 맺고 있고 MBC는 후지TV 오다이바 사옥에 도쿄 지국이 있고 거꾸로 후지TV는 MBC의 상암 본사에 서울지국이 있다.[36] 궁녀의 경우 전익령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재연 배우인 변신호가 연기했다. 특히 전익령이 연기한 궁녀 이천희는 어린 시절의 영친왕과 매우 친한 사이로 나오고 이후 궁을 나와 일반인과 결혼해서 낳은 딸이 숙명여학교에 진학하여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영친왕을 만나는 모습도 나온다.[37] 안중근 의사가 손가락을 끊고 단지동맹으로서 맹세하는 장면까지 묘사한다.[38] 이방자 여사에 앞서 이미 영친왕과 약혼했던 민갑완의 존재를 일언반구도 없이 그냥 건너뛴다.[39] 일본의 새로운 연호인 레이와 제정의 관여한 인물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