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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15:42:52

펑크 록

조선 펑크에서 넘어옴
록 음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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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 록의 대표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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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itzkrieg Bop
라몬즈 (1976)
New 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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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 록
Punk Rock
<colbgcolor=#ff1179><colcolor=#ffec2d> 기원 장르 개러지 록, 프로토 펑크, 로큰롤, 로커빌리, 하드 록, 글램 록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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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틀:국기|]][[틀:국기|]] |
[[호주|]][[틀:국기|]][[틀:국기|]]
등장 시기 1950년대 후기 - 1970년대 중기
시초작 Ramones (1976, 라몬즈)
New Rose (1976, 댐드)
시대 1976년 - 현재
전성기 1976년 - 1978년
하위 장르 아나코 펑크, 셀틱 펑크, 아트 펑크, 하드코어 펑크, 호러 펑크, 팝 펑크, 스케이트 펑크
파생 장르 포스트 펑크, 뉴웨이브, 얼터너티브 록, 인디 록
퓨전 장르 댄스 펑크, 데스록, 개러지 펑크, 글램 펑크, 그런지, 사이코빌리, 펑크 블루스, 스카 펑크, 서프 펑크
중심지 뉴욕시, 런던, 버밍엄, 리즈
관련 문서 펑크 룩, 펑크 문화
1. 개요2. 상세3. 역사
3.1. 펑크의 뿌리, 개러지 록3.2. 프로토 펑크3.3. 본격적인 펑크록의 시작, 뉴욕펑크
3.3.1. CBGB의 탄생
3.4. 영국 펑크의 부흥
3.4.1. 1977년, 역사적인 해
3.5. 펑크 록의 종말과 분화3.6. 펑크 록 그 후3.7. 한국의 펑크 : 조선 펑크3.8. 일본의 펑크
4. 관련 문서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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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만장자 록밴드들은 이제 사랑 타령이나 할 뿐이다. 실업자들에게 사랑 노래는 필요 없다. 더 후, 롤링 스톤스, 핑크 플로이드는 거슬린다. 그들은 이제 우리를 대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백만장자들에 의해 컨트롤되는 음반 시장에 저항할 것이다.
- 존 라이든, 섹스 피스톨즈의 보컬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형성된 펑크 문화와 연계되었던 음악 장르.

너저분하고 반항적인 비주얼에 신랄하고 시니컬한 가사와 보컬, 짧고 굵은 파워코드 반복 위주로 흘러가는 양상이 대표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대표적인 양상이 이렇다는 것이지, 반례도 많을 뿐더러 수많은 갈래로 갈라진 장르 특성상 음악적으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힘들다. 본 문서는 서구권 펑크의 역사 중 태동기~1970년대의 펑크, 소위 말하는 클래식 펑크를 중점으로 다룬다.

훵크(Funk)와는 다른 장르다. 훵크(Funk)에 대해서는 펑크(음악)문서 참조.

2. 상세

정확히 펑크 록이란 '누구나 할 수 있다'라는 평등주의적 DIY (Do It Yourself) 에토스를 내세운 펑크 문화 운동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펑크 록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1970년대 후반에도 단순한 3코드 위주의 음악(섹스 피스톨즈 등)부터,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했던 밴드(더 클래시 등)까지 다양한 밴드가 있었으며, 후대에는 록의 다른 어느 장르보다도 다양한 장르로 분화되었다.

사실 펑크 록은 음악적인 장르라기 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모든 흐름이 그렇듯 펑크 록도 직간접적인 선조가 있는데, 미국에서 라몬즈뉴욕 돌스가 영국 펑크에 영향을 주고 이후에 영국에서 펑크가 반짝 유행하다가 미국은 원래 펑크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미국 일부 지역, 특히 동부에서만 하드코어 펑크로 변형해갔고 일부 스래시 메탈이나 기타 장르의 록에 영향 주었지만 주류는 아니었다.[1] 그러다 90년대가 도래하고서 헤비 메탈에 질리던 미국인들은 새로운 대안으로서 펑크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후대 얼터너티브 록[2] 팝 펑크로 직계 계보가 이어지게 된다. 당시 이에 관심을 가지던 몇몇 음반 기획사들이 언더그라운드 밴드 몇몇과 계약하면서 일부 성공한 사례가 그린 데이, 너바나 정도가 된다. 이 외에도 슈게이징, 이모코어 등 다방면적으로 영향력을 뻗어나가기도 했다.

강력한 디스토션 사운드와 괴성에 가까운 보컬로 헤비 메탈과 구별이 애매한 경우가 있다. 비평가 스티브 왁스먼(Steve Waksman)은 소음에 대해서 헤비메탈과 펑크가 인식하는 방향이 다르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만 둘 중 하나만 제대로 들어보면 사실 금방 구분이 가능하다. 일단 톤이랑 비트만 들어도 구분이 가능한 경우도 있는데 둘다 날카롭고 소리와 빠른 속도를 내지만 펑크는 지저분한 톤과 리듬감이 확실히 있는 비트를 내고 메탈은 무겁고 금속성이 강한 톤을 사용하고 리듬감은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 구분할 수 있는 방법으로 리프가 있는데, 펑크는 파워코드 위주로 단순하고 1~2마디 위주의 리프를 쓰는 반면 메탈은 한줄 피킹이 더 많이 쓰이고 보통 긴 마디 위주의 리프를 쓴다.[3] 무슨 말인지 모르겠거나 메탈도 파워코드 쓰고 펑크도 긴 리프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너바나메탈리카 노래 중 아무거나 골라 하나씩만 들어보자. 펑크와 메탈은 기타 톤이나 파트 구분이나 곡 길이, 구조 등등... 오히려 다른점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펑크(Funk)와 구분이 필요한 용어다. 한국 한정으로 P와 F의 ㅍ자라는 같은 발음 표기 때문에 음독법이 같아 혼동되기 쉬운데, Funk는 흑인 음악에서 비롯된 뿌리부터 다른 장르다. 이에 구분하고자 Funk를 펑키(Funky), 훵크라는 다른 발음으로도 불리긴 하지만 정식적으로 불리진 않는다.[4] 갱 오브 포같이 Punk와 Funk 두 장르를 모두 섭렵하는 부류도 존재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장르이므로 영어 표기법에 주의하고 섹스 피스톨즈레드 핫 칠리 페퍼스 두 밴드가 펑크 표기라는 이유로 동부류로 엮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원래 "펑크"라는 단어는 1950년대 내내 "못쓰는 것", "폐물"이라는 뜻의 속어로 쓰이던 단어였다. 이러던 것이 점점 "조무래기", "양아치"같은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punkass라든지 펑크가 들어간 속어가 아직도 많이 쓰이고 있다.

"펑크 록" 이라는 단어는 1970년대 초반부터 쓰이고 있었다. 1960년대의 인기는 없지만 과격하고 단순한 밴드들을 가리켜서 "펑크 뮤지션"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고[5], 1970년대 초반 평론가들이 1960년대 음악을 회고하면서 그들의 장르를 "펑크 록"이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펑크라는 단어가 일종의 과격하고 저열한 음악을 가리키는 용도로 음악 업계에서 제법 쓰이고 있었으며, 1970년대 초반에는 거의 하나의 확립된 기의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펑크 록 애호를 자처하는 이들을 보통 펑쓰(Punx)라고 부른다. 하드록/헤비메탈메탈헤드와 비슷한 용법.

3. 역사

3.1. 펑크의 뿌리, 개러지 록

1950년대 중후반,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는 로큰롤이나 로커빌리 음악들이 주류 음악으로 떠올랐다. 보수세력들은 이게 흑인음악이고 외설적이라며 탄압한데다가, 로큰롤 뮤지션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사망하거나 활동을 중단해버려서 미국에서 로큰롤 음악은 죽은 장르가 되어버렸다. 그 대신 1960년대 초반에는 아예 가사가 없는 경음악류의 서프 음악이유행하기도 했다. 그런 서프음악은 굉장히 복잡한 연주를 요하는 기교적인 음악이라서 전문 악사가 아닌 일반 젊은이들이 카피하며 커버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음악이었다.

그러다가 1963년경부터 비틀즈, 그리고 뒤이어 롤링 스톤즈, 더 후, 킹크스 등과 같은 영국의 록밴드들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오며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는 현상을 만들었다. 이들의 음악은 연주가 크게 기교적이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이었고, 따라부를 수 있는 가사까지 있어서 이에 매료된 미국의 젊은이들은 즉각적인 영향을 받아 여러 밴드를 결성하여 이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흉내내었다.

이들은 처음엔 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의 음악을 커버하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아마추어다보니 정밀하게 연주를 카피하기보다는 되는대로 조악하고 거칠게 커버했고 이런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방식은 오히려 이들만의 스타일이 되었다. 이들은 미국 문화의 특징인 차고(개러지)에 주로 모여서 연주를 연습했기 때문에 개러지 록 밴드라고 불리게 되었고, 차차 영국 밴드들의 카피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자작곡을 만들며 아마추어적인 취미 록 밴드에서 정식 록 밴드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들은 이후 펑크 록 뮤지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서 펑크록의 조상으로 평가받게 된다.

Nuggets: Original Artyfacts from the First Psychedelic Era 1965–1968 같은 컴필에서도 개러지 록과 펑크 록을 이어주는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3.2. 프로토 펑크

1960년대 후반(거의 1969~1972년), 디트로이트에서는 새로운 음악이 등장한다. 도저히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을 수준의 과격한 음악과 무대 매너로 뭇 사람들에게 그냥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뮤지션들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펑크록의 과격함에 직접적인 씨앗을 제공한 MC5다. 이들은 당시로서는 도저히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수준의 음량과 폭력적인 무대매너로 악명높은 밴드가 된다. 이들은 또한 68혁명으로 요약되는 시대의 밴드 답게 당시 학생 운동과 흑표당, 마르크스주의 등에 영향을 받은 굉장히 정치적인 밴드이기도 했으며, 때문에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근처에서 벌어진 생명의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디트로이트의 분위기에 따라, 더 도어즈의 영향을 받은 한 젊은이가 풍운아처럼 나타난다. 바로 이기 팝인데, 당시 연주보다는 기행을 일삼는 젊은이었다. 이기 팝은 더 스투지스라는 자신의 밴드를 만들어서 공연을 하는데, 무대위에서 마이크로 자신의 머리를 쳐서 피가 흐르게 자해를 한다거나, BDSM적인 악세서리를 차고 공연한다거나, 관중에게 뛰어든다거나, 관객들에게 땅콩버터를 뿌리는 등 해괴한 퍼포먼스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6]충격과 공포의 1970년 신시내티 페스티벌 공연영상

1970년, 19살이였던 보스턴의 조나단 리치맨이 등장해 벨벳 언더그라운드 팬을 자청하고 나서며 밴드를 하나 결성했다. 그 밴드는 모던 러버스였다. 모던 러버스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멤버였던 존 케일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첫 앨범을 만들었지만, 계약 문제로 이래저래 앨범 발매는 지체되었고 결국 앨범 발매를 보지도 못하고 해산했다. 하지만 1976년 뒤늦게 발매된 모던 러버스의 첫 앨범 The Modern Lovers는 꺼벙한 리치맨의 보컬과 극히 단순한 코드로 이뤄진 로큰롤로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리치맨을 비롯한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가면서 뉴욕 펑크 씬에 스며들었다. 드러머였던 데이비드 로빈슨은 카스로 들어갔고 키보디스트 제리 해리슨은 토킹 헤즈 제4의 멤버가 되면서 그들의 전성기를 함께 했다.

이들은 현재에 프로토 펑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후대에 나온 펑크 록 바로 이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시간상으로 펑크 바로 직전의 거칠고 단순한 록 음악을 프로토 펑크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잘 살린 밴드들을 프로토 펑크라 부르기도 한다.

3.3. 본격적인 펑크록의 시작, 뉴욕펑크

이런 디트로이트의 록 음악과 비슷한 흐름이 뉴욕에서도 일어나는데, 이들을 '뉴욕 펑크'라고 부른다. 이들은 '개라지 록' 흐름보다는 좀 더 예술적이고 의식적이였다. 익스페리멘탈 록 밴드인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그 시초이며 그 후 뉴욕 돌스라몬즈[7]가 그 뒤를 따랐다.

특히 뉴욕 돌스는 '런던 펑크'라 불리는 펑크의 대표적 모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후일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로 활약하는 맬컴 매클래런이 잠시 매니저로 일했다. 라몬즈 역시 '런던 펑크'에 음악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사실상 당시 유행하던 글램 록의 영향 하에 있었지만, 너무나도 거칠고 단순한 연주로 인해 사실상 최초의 뉴욕 펑크로 평가된다.

3.3.1. CBGB의 탄생


CBGB 내부 전경


라몬즈의 1977년 라이브 실황

1973년, 뉴욕시 맨해튼의 빈민가인 바워리(Bowery)에 새로운 클럽이 하나 등장했다. 이 클럽은 원래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들을 무대에 올리는 작은 클럽이었는데, 어느날 한 젊은이가 공연을 하고자 연락을 해왔다. 이 젊은이가 이끄는 밴드는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이 밴드가 맘에 든 클럽 오너 힐리 크리스탈은 매주 일요일에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젊은이가 바로 톰 벌레인이었고, 이들이 바로 텔레비전이다.

그리고 대충 비슷한 시기에 시인이자 칼럼니스트인 한 여성이 이끄는 밴드 역시 CBGB의 무대에 서게 된다. 이들은 록 역사상 최초로 음유시와 록 음악을 결합한 밴드로 평가되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패티 스미스가 이끄는 패티 스미스 밴드였다.

뒤를 이어 등장한 밴드들 역시 록 음악 역사에 굵직굵직한 발자취를 남기는 밴드들이었다. 애초에 스틸레토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밴드는 블론디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고, 가죽 재킷을 걸치고 연주를 지지리도 못하던 네명의 젊은이들이 만든 밴드는 라몬즈였고, 좀 찐따같아 보이지만 매우 독특한 연주를 하는 세명의 젊은이들이 모인 밴드 이름은 토킹 헤즈였고, 아무리 봐도 뒷골목 불량배에 지나지 않는 다섯 젊은이들이 모인 밴드는 데드 보이즈였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밴드들이 뒤를 이어 등장했다.

그런데 사실 CBGB는 원래 펑크록이니 뭐니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클럽이었다. CBGB의 원래 이름은 Country Bluegrass Blues and Other Music For Uplifting Gormandizers였다. 직역하면 "떠오르는 음악 잡식가들을 위한 컨트리 뮤직, 블루그래스와 다른 음악들"정도.[8]

패티 스미스, 텔레비전등은 예술적인 펑크를 추구해 후일 1980년대부터 시작되는 인디 록의 흐름을 선취했다. 이런 예술적 펑크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그룹은 다름아닌 R.E.M.이다.

CBGB에 있던 밴드들이 중요하게 평가되는 이유는, 이쯤 되어서야 정식으로 록 평론가들 사이에서 "펑크 록"이란 장르가 하나의 확립된 장르로 받아들여졌고, 펑크 자체가 하나의 고유명사화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 전까지 뉴욕에는 뉴욕의 오리지널리티가 살아있는 록 음악이 별로 없었다. 뉴욕은 오로지 재즈와 포크 음악의 고향이었고, 미국의 록 밴드들은 1960년대 후반 내내 샌프란시스코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는 히피 문화의 중심지가 샌프란시스코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에는 글램 록의 부흥으로 영국과 미국이 록 음악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뉴욕에서 뉴욕만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는 음악이 등장하자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음악 씬은 환호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사실 세계 최초의 펑크 팬진인 "PUNK"도 이 시기 뉴욕에서 발행되었다.[9]

당시 바워리라는 장소의 특성도 음악의 형성에 한몫 했다고 한다. 텔레비전의 베이시스트였던 리처드 헬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에 CBGB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은 대부분 근처의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스트리퍼나 마약쟁이, 포주, 불량배 같은 사람들이었다."라고 한다.

한편, CBGB는 훗날 80년대에도 하드코어 펑크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맡는 등 언더그라운드 무브먼트 성지격으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이후로도 펑크를 위주로 수많은 라이브를 개최하곤 했지만, 세월이 흘러 언더그라운드 펑크의 사양세와 치솟는 임대료 문제에 봉착하여 경영난을 앓다가 2006년 10월 15일 패티 스미스의 라이브를 피날레로 폐업하고 만다. 더욱이 설립자 '힐리 크리스탈'마저 이듬해 작고함으로서 펑크 역사의 페이지로만 남게 되었으며, 이후 간헐적으로 펑크 기념 행사나 이름을 차용한 라이브 바로서 계승하는 방식으로 명맥을 잇는다.

하지만 뉴욕 펑크는 확실한 한계가 있었다. 패티 스미스와 텔레비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지나치게 예술적이고 과격한 음악이었기 때문에 대중과의 거리가 너무 컸다는 것. 게다가 미국은 여러모로 영국이나 유럽보다 보수적인 국가였다. 물론 미국 사회 내부는 마약이나 총기 문제로 병들어가고 있었지만,[10] 대중매체는 오로지 반듯하고 정화된 음악만을 공급하려 노력했고, 각 지역의 프로모터들 또한 대중의 취향에 맞는 "좋은 음악"만을 공급하려고 했다. 또한 1960년대의 상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조금이라도 과격하거나 외설의혹이 있는 공연은 어김없이 경찰관 입회 하에 진행되었다.[11]

미국에서 펑크록은 분명 언더그라운드에서 번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음악이 후대까지 계속 전해지고 발전되려면 적어도 대중들이 들었을때 이름을 딱 알아차릴 스타급 밴드가 한두개쯤은 있어야 하는데, 그런게 없었다. 라몬즈는 차트 바닥을 기었으며 텔레비전은 영국에서 인기를 얻으려는 찰나 해체했고, 패티 스미스는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협업한 'Because the Night'가 히트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지만 직후 결혼한 뒤 은퇴해버렸다. (그나마다 1980년대 말에 복귀했다.) 토킹 헤즈는 해체하지 않고 비교적 오래갔으나 음악이 너무 시대를 앞서가서 컬트적 인기에 머물렀다. 그나마 블론디가 뉴웨이브와 디스코를 결합해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었지만 고작 4년 밖에 가지 못했다. 데드 보이즈는 차트는커녕 3년만에 해체했다.

게다가 미국은 실제로는 굉장히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중산층아메리칸 드림이 있는 나라였고, 1960년대의 사회갈등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상황이었다.[12] 게다가 오일쇼크까지 겹쳤지만 미국의 젊은이들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디스코를 찾았다. 뉴욕 펑크는 세상에 뛰어 나오기 전에 넘어야 할 진입장벽이 너무나도 높았던 것.

그리고 가장 큰 문제로는 생각 외로 영국이나 미국이나 서브컬쳐히피가 거의 대부분이었고(아직 1970년대) 영국은 테디보이 정도가 어느 정도 나대고 있었다.

결국 바통은 런던으로 넘어가게 된다.

3.4. 영국 펑크의 부흥

물론 영국 내에서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닌지라, '펍 록'이라는 독자적인 운동이 있었다. 이들은 아레나 록에 반대하여 클럽이나 술집에서 공연하면서 원초적인 록 사운드 회귀 운동을 벌였다. 덕스 딜럭스, 에디 앤 더 핫 로즈, 닥터필굿, 이언 듀리, 닉 로우엘비스 코스텔로가 대표 아티스트다.

이런 흐름들은 모두 1976년 런던에서 '런던 펑크'라는 이름으로 재탄생되어 폭발하게 된다. 그 뒤로는 모두가 아는 대로. 섹스 피스톨즈, 버즈콕스, 댐드, 수지 앤 더 밴시스, 더 클래시, 샴 69, 더 바이브레이터스 등 걸출한 펑크 밴드들이 나와 수많은 이슈들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 시기 영국의 펑크 록 부흥을 보여준 음악 프로그램으로 'So It Goes'가 유명하다.[13]

또한 이때가 되면서 펑크하면 떠올리는 것은 영국 펑크 같은 막장 컨셉, 누더기 같은 패션, 반체제적인 가사라는 이미지가 강해졌다.

펑크 록은 또한 펑크 룩이라고 하는 포스트모던적 패션을 수반했다. 물론 영국 펑크와 미국 펑크 양쪽에서 펑크 룩은 상당부분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음악도 마찬가지인데 미국은 1980년대에 블랙 플래그같은 하드코어 펑크(나중에 영국에도 생기지만)가 생겨났고,영국은 펑크가 유행한지 얼마 안돼서 포스트 펑크고딕 록이 생겨났다.

3.4.1. 1977년, 역사적인 해

1977년은 런던 펑크가 폭발하면서 기록적인 이슈들을 많이 배출한 해였다.

미국에서 펑크록이 단순히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음악을 일궈내는 운동이었다고 하면, 영국에서의 펑크록은 좀 더 복잡한 사회상황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일단 영국은 당시 거의 막장 상태였다. 미국도 오일쇼크에 충격을 받기는 했으나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서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효율적인 경제구조로 인해 점점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과거의 태평성대만 믿고 혁신을 게을리 했으며, 노동자들은 사회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노동조건에 불만을 품고 끊임없이 파업을 강행했다. 노동당의 정책은 족족 실패했으며, 결국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까지 받는 형편이 되었다(영국병 참조).

영국은 그야말로 망조가 들어가고 있었다. 공공기관은 기능을 하지 못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실업수당에 의지해 살아갔으며,[14] 학교는 계속해서 실업자를 쏟아냈다. 중년층 이상은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이 투쟁해왔던 지난 10년"을 이야기하며 젊은이들의 나태를 질타했다. 영국은 오랜 세월 너무도 변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상황에서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인종갈등까지 겹쳐서, 서인도제도(자메이카등)에서 넘어온 흑인, 파키스탄인, 기타등등 다양한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영국으로 1950~60년대 내내 넘어왔으며, 인종갈등에 대해 전혀 대비책이 없던 런던의 빈민가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특히나 영국의 앵글로색슨 백인들은 배타적이었고, 영국의 노동계급은 불안한 사회상황과 인종문제로 인해 폭력사태가 끊이지 않았다.[15] 사상적으로도 극단주의가 횡행하게 된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지지도가 올라갔을 정도...

당시 펑크 뮤지션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알만 하다.
당시에는 엄청났어요. 매일같이 신문과 뉴스에는 파업 소식이 들려왔고, 환경미화원들이 파업해서 길거리에 사람 키보다 높이 쓰레기가 쌓이기도 했고, 무덤 파는 인부들이 파업을 해서 시체가 줄줄이 쌓여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실업수당으로 살아갔죠.
스티브 존스, 섹스 피스톨즈의 기타리스트 - 영화 The filth and the fury 중
사실 저는 그때 직업이 없었어요. 일자리를 구해보려 해도 (급료가 턱없이 낮거나 너무 힘든 일이거나 해서) 마음에 드는 일자리가 없었구요. 그래서 "노느니 뭐하냐 밴드나 해보자"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빌리 아이돌 - 다큐멘터리 "히스토리 오브 로큰롤" 중
저는 그때 집이 없어서 연습실에서 자거나 스쿼팅[16]을 해서 살곤 했어요. 한때는 템즈 강가의 망한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살기도 했는데, 더 클래쉬의 초기 곡들은 거기서 쓰여졌죠.
조 스트러머 - 더 클래시의 리드싱어, 기타리스트

영국은 미국과 달리 독특한 생활양식을 고수하는 노동계급이 있었다. 이들은 펑크록의 태도와 정신에 일치하는 면이 많았다. 상류 계층에 대한 적대감, 계급의식, 거칠음 등 다른 나라의 노동계층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계층이었다.[17]

펑크록은 이러한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디스토피아를 그려내는 음악이 된다. "에라이 이놈의 세상 망해라!"가 영국 펑크의 시발점이었던 것. 앞서 말했듯 1976년에 가속화되던 펑크 붐은 1977년에 절정을 찍어서 런던에 활동하는 펑크밴드만 100개가 넘고, 거리에는 찢어진 셔츠와 본디지 팬츠를 입은 젊은이들이 우글거렸다. 젊은이들의 재킷에는 온갖 반항적인 구호("No future", "Britain's Burning"등)들이 적혀있었고 당장 내일이라도 지구가 끝날 것같은 분위기였다.

이때의 밴드들은 점점 더 과격해졌고, 가사나 사운드에 있어 훨씬 무시무시한 발전을 이루어서 현재의 록 음악의 헤비 사운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섹스 피스톨즈는 말할 것도 없고, 더 클래시는 펑크록의 음악적인 부분에서 심도있는 발전을 이끌었다. 1977년에는 한때 런던에서 활동하는 펑크 밴드만 100개가 넘을 정도의 규모였다. 소위 말하는 2세대 런던 펑크 밴드들(슬로터 앤 더 독스, 이터, 999, 미넌스)이 모두 이때 등장했다.[18] 그리고 영국에서 뉴 웨이브가 수면위로 떠오른 시기이기도 하다. XTC같은 밴드들이 1970년대 초중반부터 꾸준히 준비해왔다고 할지라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1977년이 다 되어서였다. 스트랭글러즈, 붐타운 래츠, 아담 앤 더 앤츠등의 밴드들이 이 시기에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19]

3.5. 펑크 록의 종말과 분화

펑크 록의 종말은 의외로 일찍 찾아왔다. 그 이유는 워낙 주변인적인 문화였던 펑크 문화가 주류 미디어의 간택을 받고 대중매체에 편입되기 시작하면서 그 정체성 자체가 분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펑크록 밴드들에게는 셀아웃[20]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무했고[21], 당시 밴드들은 "새로운" 음악에 빠졌을 뿐 "배타적인" 음악에 빠져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애초에 음악하고 돈 벌면서 사회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전제이기도 했고 진짜 사회운동을 하려면 폭동을 일으켰어야 했다.

그러나 음악 그 자체로 놓고 봤을때 기존 록 음악의 안티테제격인 음악이었음은 변함이 없고, 이러한 음악이 주류 미디어에 지속적으로 얼굴을 비추고 기존의 락스타들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펑크 록은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현상이 생겨난 것이다. 가사와 음악으로는 니힐리즘이나 기존의 세계에 대한 부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들이 새로운 질서의 주류가 되어버린 것. 그리고 이미 올라간 위치가 있기 때문에 옛날처럼 조그마한 클럽에서 공연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결국 펑크 록은 1977년에 정점을 찍고, 1978년에 뉴 웨이브, 포스트 펑크, 하드코어 펑크, Oi 펑크[22] 등 수많은 하위 장르로 분화된다. 이때부터 펑크 문화도 세분화되어서 더 이상 1977년도 그대로의 펑크문화는 남지 않게 된다.[23]

3.6. 펑크 록 그 후

펑크 록의 최대의 유산은 인디로 불리는 대안적 음악 활동을 제시한 것에 있다. 기존의 밴드는 제일 잘 나가는 밴드는 스타디움에서, 그 아래는 텔레비전에서, 그보다 아래는 메이저급 클럽에서, 마이너 클럽에서는 이제 막 시작한 밴드들이 연주하면서 순차적으로 오르고 내리는 구조였다. 그러나 DIY의 확산으로 인하여 저 도식을 거부하고 기획사 없이, 때로는 1인 기획사를 설립하여서 클럽 공연을 중심으로 텔레비전 출연이나 기타 대규모 프로모션을 거부하는 밴드들이 등장했고 일련의 흐름을 인디라고 부르면서 현재의 언더그라운드 밴드 문화를 만들었다. 또한, 이러한 움직임이 안티-록스타적인 태도를 만들어 냈고, 이는 훗날 제도권에 저항하는 태도로서의 순수주의적 예술사조로서의 인디록의 모태가 되었다.

런던 펑크 자체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 운동이였으나, 영향력은 무시무시했다. 런던 펑크의 초신성 이후로도 흩어진 유산들은 여전히 건재하여 '펑크'라는 브랜드는 2020년대 오늘날까지도 현역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장르였으며, 펑크가 낳은 자손들만 해도 포스트 펑크, 하드코어 펑크, 팝 펑크,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Emo 등 각 시대를 상징하는 무브먼트들이었고 그외 파생 장르들도 숱하게 다양했던 모체가 된 것이다. 사실상 하드 록과 더불어 록의 전체적 카테고리를 양분하는 거대한 영역으로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24]

일단의 "펑크 록 순수주의자"들은 당시 일어나기 시작한 뉴웨이브의 지적인 요소에 반감을 가지고 스킨헤드 문화와 융합하여 Oi! 무브먼트를 일으킨다. 샴 69, 콕 스패러, 코크니 리젝츠등의 밴드가 이 시기의 밴드들이다. 거의 차이가 없기는 한데, 이는 훗날 스트리트펑크를 파생시킨다.

현재의 펑크록은 그래서 태도에 관한 문화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린데이의 빌리 조 암스트롱이 말했듯 "내가 쓰레기통을 차면 펑크지만 네가 쓰레기통을 차면 그건 따라하는거다"라고 할 정도로 현대에 와선 일종의 태도가 수반된 어떤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지만 펑크 록이 현대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바로 "누구나 할 수 있다(Anyone can do it)"와 "네 스스로 해라(Do it yourself)"라는 슬로건이다. 음악 자체는 그다지 큰 기교가 없지만, 록 음악의 본연의 가치에 충실한 정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끊임없이 록 자체의 원천을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록 역사의 분기점을 마련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록 음악은 점점 어려워졌을 것이고 결국 고상한 예술의 어떤 것으로 흡수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크다.

3.7. 한국의 펑크 : 조선 펑크


2021년 방영한 아카이브K 중 조선 펑크를 설명하는 부분.


태동기의 조선 펑크를 보여주는 크라잉 넛1997년 클럽 드럭[25] 라이브 실황.

서양권에선 이미 1970년대에 절정을 누리던 펑크였지만, 한국은 서슬퍼런 군사독재 치하 속에서 저항 정신을 넘어 약간 똘끼도 있어야 할법한 펑크 록은 개념조차 수입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탄생한 밴드가 있으니, 집안 단칸방에서 삼형제끼리 결성된 산울림이 그것이었다. 산울림은 사이키델릭의 영향을 받은듯 독창적인 사운드와 염세적인 가사들로 한국 가요사에 한 획을 그었던 록밴드이자 한국 최초의 프로토 펑크 밴드로 평가받기도 한다.[26] 그러나 산울림도 이른바 후술된 90년대 조선 펑크와는 엄연히 차이가 있었고, 가뭄에 콩나듯 탄생한 이런 밴드 외에는 괄목할만한 움직임없이 1980년대까지는 한국 내에서 펑크는 사실상 절멸 상태였다.

이렇게 침묵하기만 하던 한국내 펑크씬은 1990년대에 들어 싹을 틔우기 시작했는데, 이는 세기말 문화계 황제였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락쪽에도 접근을 하고[27] 서울도 지역마다 저마다 색다른 가요 문화가 융성하던 시기 동안,[28] 화가 등 예술인을 많이 배출하던 홍익대학교 근처의 홍대 거리가 펑크 등의 전위적인 예술인들의 메카로 떠오르면서 싹이 피게 된 것이다.[29] 이런 분위기 속에 1994년 '드럭'이라는 펑크 클럽이 홍대거리에 개점했고, 1995년부터 라이브 공연을 하면서 전국 각지의 펑쓰들이 모여[30] 라몬즈, 섹스 피스톨즈, 더 클래시 등 펑크 클래식들과 당시 선풍적이던 너바나, 그린데이, 블루 하츠[31] 등의 얼터너티브 펑크네오 펑크 추종자들의 아지트를 자처했고 이들은 클럽의 전폭적인 지원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이런 펑쓰들 중 두각을 나타낸 밴드라면 단연 크라잉 넛으로, 이들이 매일같이 벌였던 게릴라 공연과 함께 커트 코베인 추모 1주기 공연, 스트리트 펑크 쇼 등의 야외 공연 등을 기획하면서 양지로의 진출을 꾀하게 되고 매스컴 또한 타게 되면서 홍대 등지에선 나름의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드럭의 또다른 기둥이자 조선 펑크의 양대주자 노브레인, 스페셜리스트끼리 결성된 삐삐밴드까지[32] 1995년을 기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조선 펑크[33]의 시작을 알린다. 당시 이들의 컬쳐쇼크급 신선했던 문화는 당시 X세대였던 학생들을 매료시켰고 음악방송 차트에도 진입하는 등 상업적인 성공도 제법 달성하면서 한국 대중가요계의 한 흐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로도 레이지본, Rux[34], 타카피, 껌엑스 등의 후발 주자들이 탄생하고 지상파 음악 방송까지 출현하는 등 조선 펑크는 2000년대 초반까지 건재함을 알리곤 했다. 그러나 펑크의 정확한 이해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흉내내는 정도의 기획성 한국 펑크 밴드 양성으로 변질됐고, 홍대 거리의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공연 클럽이라는 근간이 사라져가는 등 위기를 겪은데 이어, 2005년 밴드 카우치생방송 음악캠프 알몸노출 사건을 일으켜 '조선 펑크=관종 정신병자들이 하는 장르'라는 식의 치명타를 가하면서 조선펑크는 순식간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35] 특히 카우치 성기 노출 사건은 한국 펑크계를 넘어 한창 성장하고 있던 한국 인디계 1세대까지 대거 박살내었던 원흉의 핵으로[36], 특히 펑크계는 사건에 경악한 대중들로부터 사회적으로 곱지 못한 시선을 오랫동안 시달려야만 했으며[37], 이후로는 조선 펑크씬에선 눈에 띄는 신인도 등장하지 않고 그나마 등장하던 밴드들도 큰 반향이 없거나 조선 펑크를 재료 삼아 걸치기만 하는 정도에 지나게 된다. 이후 기존 세대 터줏대감인 노브레인, 크라잉넛 등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명맥만 잇고 있을 뿐 조선 펑크의 전성기는 이렇게 너무도 허망하게 끝나고 만다.

이렇게 짧고 굵었던 조선 펑크였지만 대중음악사적으로도 언급할 유산이 몇 있는데, 일단 대표적으로 90년대 중후반 국내(홍대) 인디 음악,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포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크라잉 넛옐로우 키친의 합작품 스플릿 앨범 '아워 네이션 1집'은 국내 최초의 자주제작 음반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으며[38] 최초의 인디음악 차트 입성도 조선 펑크로서[39], 명실상부 인디씬의 선봉장을 자처했던 장르였다. 이런 조선 펑크의 인기로 인디씬의 가능성을 봐서인지 당시 홍대엔 수많은 라이브 카페들이 들어서게 되며, 사장 취향에 따라[40] 여러 장르의 인디 뮤지션들이 공연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당시 같은 언더그라운드에 있었던 힙합 역시 이때를 토대로 2000년대 들어 메인스트림으로 나오게 된다. 당시 조선 펑크와 함께 1990년대 말 1세대 인디계의 양대산맥을 이뤘던 델리 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자우림 등 한국 모던 록 역시 이때를 기점으로 계보가 내려오고 있다.

또다른 조선 펑크의 유산으로는[41], 1990년대까지 2인 이상은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하는건 불법이라는[42] 시대에 역행하는 법을 폐지시키고 밴드의 라이브 클럽 공연을 합법화시키는데 앞장서며, 공연 문화를 진보시킨 점이 있다. 1990년대 중후반 홍대 인디 음악 붐이 일며 이런 점이 지적되자 홍대 인디씬이 연합해 1998년 관련 행사를 하는 등 문제점을 알렸고, 몇몇 연예인들도 지지 의사를 보이며 이에 동참하자 정부는 이런 건의를 받아들여 1999년부턴 라이브 클럽 밴드 공연이 합법화된다.

한편, 일련의 피바람을 버틴 조선 펑크의 잔당들은 각자마다 공연장 및 레이블을 설립하고 언더그라운드에서 자주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는 DIY 행보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2000년대 후반에는 타바코 쥬스, 밤섬해적단[43], 갤럭시 익스프레스 등이 펑크씬의 계보를 이어갔고 2010년대는 톡식, 아이씨사이다, 데드버튼즈, THE VALIANT 레이블을 위시로 초록불꽃소년단, 레드닷, 더 베거스 등 신진 펑크들까지 활약하는 등 씬에서 이따금씩 펑크 밴드가 등장하곤 한다. 2022년 한국의 신진 펑크 밴드.

3.8. 일본의 펑크

펑크가 선풍적이던 70년대엔 일본 내에서도 일본 록 열풍이 불었고 신좌파 등 사회주의 저항 운동이 생겨나는 등 펑크를 품기엔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곤 했다.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정통 펑크는 아닌지언정 RC 석세션, 두뇌경찰 등은 펑크의 사상적인 영향하에서 저항정신을 선보이곤 했으며, 이후 70년대 말엽엔 아나키 등 런던 펑크 밴드부터 시작해서 INU, 더 루스터스, 프릭션, 더 스탈린, 자가타라 까지 등장하며 음악적인 조류는 물론 폭주족 및 펑크 패션이란 서브컬쳐를 일본에 이식시키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런던 펑크뿐만 아니라 뉴욕의 뉴웨이브 펑크 또한 흡수하여 플라스틱스, P-MODEL 등 기라성 펑크밴드들 또한 등장함으로서 일본의 일렉트로닉 뮤직, 테크노, 시부야계의 초석을 닦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서구권의 영향을 받은 일본 펑크는 1985년 독자적인 조류로 나아가며 자생하게 되는 중요한 밴드를 배출하게 되는데, 그 주인공은 블루 하츠. 보다 대중적인 멜로디와 솔직한 가사를 녹여내는 팝 펑크를 선보이며 일본내 펑크 밴드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블루하츠의 영향력 아래 소위 청춘펑크라 불리는 장르적 조류를 형성한 GOING STEADY[44], 삼보마스터, 가가가 SP 등의 밴드들이 2000년대 초반 반향을 일으키며 밴드씬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물론 발자크와 같이 미스피츠를 연상케하는 언더펑크를 주도하던 밴드도 있었고, 무엇보다 언더 펑크 밴드들은 비주얼계와 같이 일본 록 뮤지션들의 패션에 엄청나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야가미 이오리같은 패션의 원류가 바로 앞서 말한 발자크다.

세계적으로 펑크의 인기가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아직까지 건재한 유일한 씬이 일본이다.[45] 메이져 데뷔한 밴드도 꽤 많고, Wanima같은 밴드는 유튜브에서 가장 조회수가 높은 곡이 1억뷰를 넘길 정도로 아직까지 건재하다. TV출연 없이 2000년대 초반에 Making the road를 100만장 이상 판매한 Hi-standard, 2000년 중반의 Ellegarden에서부터 내려오는 역사가 큰 역할을 하는 듯. 일본의 웬만한 펑크밴드들은 위 두 밴드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된다.

2000년대의 주요 펑크밴드는 위에 언급한 둘을 제외하고 STRAIGHTENER, 9mm Parabellum Bullet, GING NANG BOYZ, ART-SCHOOL, MONGOL800, 삼보마스터, LAST ALLIANCE, the band apart, HAWAIIAN6, Northern19, locofrank, 10-FEET, BRAHMAN, dustbox, HEY-SMITH 등이 있고, 2010년대에는 WANIMA, SHANK, KOTORI, FOMARE, Dizzy Sunfist, NAMBA69, AIRFLIP, Age Factory 등을 꼽을 수 있다. 단순히 펑크 록만을 한다기 보단 최근 일본 락 밴드의 유행인 '믹스쳐'[46]를 살리는 듯한 행보를 보여주며, 대부분 공통적으로 라이브하우스 순회를 하면서 라이브에 초 강세를 두는 특징이 있다.

4. 관련 문서

5. 참고



[1] 이 80년대[2] 너바나를 필두로 펑크 요소를 강하게 받아들인 장르지만, 헤비 메탈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펄 잼 등등 반례도 많아 펑크만의 후신이라 볼수는 없다.[3] 이 때문에 딱히 끊기는 마디 구분이 힘들어서 리듬감을 느끼기 힘들다는 말도 있다.[4] 더욱이 Punk만 록으로 분류되는게 아니라 Funk에서도 Funk rock이라는 하위 장르가 존재한다.[5] 일례로 프랭크 자파사이키델릭 록히피를 비꼰 Flower Punk라는 곡을 1968년에 발표했다.[6] 이기 팝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아래에 따로 이야기하게 되는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있다. 이기 팝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루 리드를 보고, "저 사람 노래 되게 이상하게 하는데 가수하네? 그럼 나도 해도 되겠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7] 흔히 아는 펑크록 연주법인 쓰리코드 연주와 미니멀리즘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쓰리코드 연주와 미니멀리즘은 1958년에 링크 레이(Link Wray)가 발표한 Rumble가 최초이다. 덧붙여 이 곡은 최초로 퍼즈톤 기타로 연주된 최초의 곡이다.) 보컬 조이 라몬은 "사실 우리가 먼저인데, 말콤 맥라렌이 우리걸 가져가서 영국의 떨거지들에게 가르쳐주었고, 그게 섹스 피스톨즈다" 라면서 죽을 때 까지 런던펑크들을 깠다.(물론 그래도 사이 좋게 같이 공연을 많이 했다.)[8] 원래 1970년대의 펑크록이 대부분 블루스컨트리 뮤직, 1950~60년대의 로큰롤을 하드록적인 방식(뉴욕 돌즈,섹스 피스톨즈, 라몬즈, 더 클래시)이나 전위적인 방식(텔레비전)으로 연주한 것이다.[9] 그래서인지 팬진 "PUNK"의 발행인 중 한명이었던 렉스 맥닐은 훗날 런던펑크를 엄청나게 씹어댄다. 맥닐은 다큐멘터리에 나올때마다 "우리가 X빠지게 공들여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준비해놨더니, 영국놈들이 가져가서 락스타 음악으로 바꿔놓았다. 게다가 섹스 피스톨즈 이전 밴드들은 완전히 그 존재 자체가 묻혀 버렸다."라거나, "사실 나는 그때 이런 괴상한 음악을 한다고 엄마한테 말을 못했다. 자연히 부모님은 내가 직업없는 백수인줄 알고 있었고 하지만 지금 와서 나는 내가 이런 무브먼트의 한 축이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아직도 엄마한테 전화로 '엄마 그때 펑크 무브먼트 그거 내가 잡지만들고 그랬잖아'라고 하면 엄마는 '얘, 그거 영국 사람들이 하던거 아니니?'라고 하신다. 아이고 어무이..."라고 했다.[10]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 이러한 1970년대 후반의 미국 분위기가 잘 살아있다.[11] 더 도어즈의 짐 모리슨은 이러한 상황을 하도 많이 겪다가 빡치는 바람에 공연 중 검열삭제를 꺼냈다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많이 돌았다. 체포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꺼냈는지 안꺼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12] 베트남전도 끝나가고 있었고, 더 이상 대규모의 민중항쟁도 없었다. 일종의 디스토피아같은 분위기만 대도시에 감돌고 있었다고 한다.[13] 진행자는 조이 디비전을 발굴한 팩토리 레코드의 사장 토니 윌슨(Tony Wilson)이다.[14] 1960년대의 영국병과는 달리 이때의 젊은이들은 진짜로 일이 없어서 실업수당으로 연명했다.[15] 1976년에는 인종화합을 위한 축제였던 노팅 힐 페스티벌에서 경찰과의 충돌로 인해 노팅 힐 폭동이 발발한다. 더 클래쉬는 이때 뜻하지 않게 폭동에 참가했다가 White riot이라는 곡을 쓰게 된다.[16] squatting. 빈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 거주하는 행위. 당시 영국에서 빈민들이 스쿼팅을 하는 건 드물지 않았으며, 네덜란드 또한 당시 스쿼팅이 극심한 국가 중 하나였다.[17] 이러한 점은 조지 오웰의 르포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도 잘 드러난다.[18] 결성 시기 또한 1976~1977년경이었다.[19] 뉴웨이브는 사실 초기에 펑크라는 단어를 대체하기 위한 방책으로 등장했는데(펑크 록이라는 이름으로는 공연장 대관이 어려웠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펑크록이 분화되었고, "신디사이저를 사용하고 덜 과격한 미니멀리즘 음악"이라는 의미로 정착된다. 포스트펑크의 탄생에 중요한 요소를 제공했다.[20] 펑크 무브먼트에서 펑크 본연의 순수함을 잃고 락스타가 되기 위해 안달난 밴드나 레이블을 일컫는 단어. 셀아웃 자체가 "배신자"라는 뜻이 있다. 물론 지금은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더이상 인디나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순수성이라는것 자체가 의미 없어진 면이 많기 때문에 셀아웃이라는 단어 자체가 구닥다리 사어 취급을 받고 있다.[21] 셀아웃 자체가 1980년대 초반 하드코어 펑크 탄생 이후에 생겨난 개념이다.[22] oi는 영국에서 주로 노동계급들이 쓰는 말로 뜻은 hey이다. 영국에서도 hey를 쓰기는 하지만 oi는 영국만의 표현.[23] 섹스 피스톨즈의 보컬리스트 쟈니 로튼은 영화 시드와 낸시에서 모히칸 머리를 한 엑스트라가 등장하는 것을 보고 "1970년대 후반에 그런 머리 모양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일갈한 바가 있다. 사실 1980년대초 이전 까지 펑크 스타일은 지금 기준으로 봤을때 상당히 기괴하고 지저분했다. 심지어 1970년대 후반에 데뷔했던 더 익스플로이티드도 데뷔 당시 모히칸 스타일을 했지만 그 당시 더 익스플로이티드 같은 모히칸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유행하지는 못했으며, 더 익스플로이티드의 모히칸 머리를 오히려 시원찮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24] 하드 록에 있어서도 브레이킹 주법, 저항 정신을 흡수하는 등 펑크로부터 영향을 부여받고 했다.[25] 1994년 개업 당시만 해도 음악감상실 비슷한 가게였으나, 이석문 사장이 1995년 4월 5일 너바나 커트 코베인 사망 1주기 추모 공연을 처음 열면서 홍대식 라이브 카페의 시작을 알렸다고 한다. 웃긴건 당시만 해도 유흥업소 아닌 한 라이브 클럽에서 2인 이상 공연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경찰한테 들키면 벌금 물면서 계속 공연했다고 한다. 이런 문제가 지적되자 후술되어있듯 1999년부턴 합법화된다.[26] 굳이 펑크만이 아니어도 당대 한국 락계는 전반적으로 독재정권의 탄압 하에 짓밟혀 재기조차 요원했던 시절이었다. 1975년 신중현을 비롯한 가수 다수의 대마초 파동 사건이 대표적인 예. 그래도 빽판을 중심으로 나름의 수요층이 있던 헤비 메탈과는 달리 펑크는 그 빽판조차 희귀품 취급일 지경이었고, 그나마 헤비메탈은 1980년대 중반 백두산, 시나위 등의 등장으로 잠시 인기를 얻었지만, 펑크는 독재정치가 청산된 1990년대에 들어서야 수입되기 시작한다.[27] 1집이야 전형적인 댄스곡이었지만, 2집 이후부터는 시나위 출신이 아니랄까봐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중간중간에 록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갔다. 그러나 정작 국내 펑크 커뮤니티는 상업적인 음악이라는 이유로 서태지를 경멸하는 경향을 보인다. 초창기의 노브레인을 위시한 당시 '드럭'으로 대표되는 홍대인디펑크 씬과 서태지간의 갈등은 락계에 유명한 이야기. 물론 닥터코어 911과 디아볼로의 맴버들이 서태지의 세션 밴드로 들어간다든지, Pia, NELL, 바닐리 유니티 등의 인디밴드들이 서태지의 지원하에 활동하며 동경하게 된다든지 등 락계에서도 의견이 나뉘며 교류에 긍정적인 쪽은 원활한 상호교류가 있었다. 여담으로 비슷하게 1990년대 초 신해철이 결성한 밴드 N.EX.T가 당시 록부심 쩌는 보수적인 록덕후들한텐 너무 상업적이고 실험적이라는 다소 어이없는 이유로 '넥스트의 음악은 진정한 락이 아니다'라며 까인 적이 있었다. 이후 신해철이 여러 인디밴드를 도와주며 이런 말들이 사장되긴 했지만.[28] 대표적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중심의 댄스와 발라드 등 대중들의 주류음악 방송이 주를 이뤘던 여의도, 동아기획 등 언더그라운드 포크 및 민중가요 중심의 신촌, 준전문~전문 공연인들이 활동하던 대학로 등.[29] 크라잉넛 멤버들 썰에 따르면, 당시 옆동네 신촌조차도 머리 염색하고 온갖 해괴한 패션으로 무장한 자신들이 걸어다니면 어르신들이 이상하게 볼때라, 그나마 홍대거리는 자신들이 거닐면 홍대 예술인이겠거니 싶어 덜 눈치 보여서 홍대에 자기들같은 부류들이 몰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종의 탈출구였던 것.[30] 노브레인의 보컬 이성우 역시 마산에 살다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크라잉넛 소식을 듣고 무작정 홍대로 상경해 이석문 사장 꼬드겨 드럭에서 관리인 생활을 하는 대신 먹고 자며 일종의 연습생 개념으로 지내다가, 사장님이 연결해준 밴드 친구들과 노브레인을 결성한다. SNS도 없던 시기 혼자 무대뽀로 상경할만큼 좋게 보면 패기남, 나쁘게 보면 무대책남이었던 셈. 펑쓰 합격[31] 서구권 밴드가 아닌 일본 밴드지만, 이들이 1980년대 일본에 뿌린 펑크붐은 바다 건너 한국에서도 일부 영향을 끼치며 노브레인 등이 이들을 흠모하며 스타일을 흡수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32] 삐삐밴드도 편의상 조선펑크씬의 일원으로 넣는 견해들도 보이곤 하지만 이들은 정통 펑크와는 거리가 있다. 우선 강기영(달파란)과 박현준은 조선펑크씬이 형성되기 한참 전인 1990년대 초부터 하드록/헤비메탈 음악으로 활동했다. 이후 강기영 특유의 실험적인 시도가 바로 펑크록이었는데, 일반적인 조선 펑크 밴드들과는 달리 노이즈와 다채로운 기계음이 가미된 얼터너티브 펑크 장르를 선보였다. 또한 크라잉넛, 노브레인과는 달리 드럭이 아닌 블루데블 클럽 출신(유앤미블루, 자우림, 임현정과 동문)이라는 차별점 또한 많은 밴드다.[33] 당시 평론가들이 이들의 음악이나 패션을 보고 '이건 서구권 정통 펑크가 아닌 가짜 펑크다'라는 식의 평을 내리자, "그래? 그럼 우리는 영국 펑크 안하고 조선 펑크 할래!"라는 독자 조류를 선언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 펑크란 말은 어떤 뚜렷한 독자적 노선을 지향해서 내세웠다기보단, 당시 국내 펑크 록을 이끈 밴드들이 자유롭게 음악하고 싶어서 펑크 록 하는건데, 평론가들이 또 지들 관점에서 우리 음악을 재단하려고 하네 라는 일종의 반발심에서 분출된(크라잉넛의 대표곡 말달리자의 닥쳐 부분도 당시 평론가들을 상상하며 쓴 것이었다고 한다) 한국 펑크씬의 무브먼트 및 슬로건 개념에 가까웠다.[34] 럭스의 경우는 노브레인과 데뷔 연도가 같은, 엄연한 1996년 데뷔 동기로 1세대로도 분류되곤 하나, 활약상은 약간 늦은 편이었다.[35] 이미지적 타격이 1차였고, 이로 인한 학부모 세대들의 부정적 반응이 이어지면서, 자녀 세대들이 조선 펑크를 하거나 관심을 가지는 것조차 경계하는 기류가 한동안 이어져 관중이 줄어드니 자연히 씬도 몰락하게 된다. 그나마 인디 음악 자체는 세월이 지나 2세대로 넘어가면서 숨통을 틔게 되지만, 조선 펑크는 여전히 이때의 타격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36] 공중파 방송들이 이 사건 이후 인디 음악계에 대한 관심 자체를 줄여버려, 노출이 줄어드니 당연히 홍보 효과도 떨어져 인디씬도 다시 매니아 영역으로 쇠락하게 된다.[37] 한 예로 펑크 록 패션으로 돌아다니다 보면 쟤들도 성기 노출하는 거 아니야 라는 식의 수군거림을 들었다고 한다.[38] 1996년 10월 발매. 국내 초창기 인디 음악의 효시라 불리는 비둘기는 하늘의 쥐보다도 1개월 빨리 발매된 기록이다.[39] 1998년 아워 네이션 2집에 수록된 노브레인의 '바나 사나이'가 그 주인공.[40] 예를 들어 홍대 인디 1세대의 또다른 유명 라이브 클럽이었던 블루 데빌스의 경우, 사장이 펑크하는 애들은 시끄럽다고 질색해서 다른 장르 뮤지션들만 받았다고 한다. 자우림 등이 대표적. 참고로 당시 뮤지션들은 딱히 돈 받고 무대에 선건 아니고, 받아도 소액이거나 식당 술 무료 등 다른 서비스를 제공받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다만 연습실 대용이라 그 돈 굳는 것 + 홍보 효과 + 청중들한테 노래할 수 있다는 만족감 때문에 다른 일로 돈 벌면서 앨범 준비하는 등 계속 했다고 한다. 걔중엔 크라잉넛처럼 진짜 사장이 자기 돈 투자해서 앨범 내주는 경우도 있긴 했다지만 애초에 사장님들도 임대 받아서 가게 하는 처지가 많았던걸 감안하면 많진 않았을듯.[41] 사실 이건 조선 펑크만의 유산이라기보단 홍대 인디씬 전체의 유산이라고 보는게 더 맞긴 하다.[42] 1970년대부터 시행된 법의 영향으로, 당시는 유흥업소가 아닌 일반 음식점에서 2인 이상이 공연하거나 관객들이 일어나 춤추는 행위가 불법이었다. 덕분에 벌금 물 것 각오하고 공연하거나 아니면 최대한 경찰 눈 피해 셔터맨까지 동원해가며 공연을 했던 고생담이 전해지기도 했다.[43] 엄밀히 말하면 이들의 음악적 색채는 그라인드코어스러운 익스트림 메탈 무언가에 가깝지만, 이들이 선보였던 가사나 행위 자체는 펑크의 저항정신과 어느정도 결을 같이하고 있다. 실제로도 몇몇 공연에서는 추억의 조선펑크 넘버들을 커버한 적도 있다.[44] GING NANG BOYZ의 전신[45] 제이락=일본식 펑크록 이라고 알고있는 사람도 있을정도.[46] 일본에서 장르의 혼합을 칭할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인데, 신인밴드들 뿐만아닌 선배밴드들 역시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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