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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 | 예카테리나 1세 | 표트르 2세 | 안나 이바노브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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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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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 |||
출생 | 1672년 6월 9일 | ||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 |||
사망 | 1725년 2월 8일 (향년 52세)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묘소 |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 ||
재위기간 | 루스 차르 | ||
1682년 5월 7일 ~ 1721년 11월 2일 | |||
전러시아의 황제 | |||
1721년 11월 2일 ~ 1725년 2월 8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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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 (Пётръ Алексѣ́евичъ Рома́новъ[1]) | ||
아버지 |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 ||
어머니 | 나탈리야 키릴로브나 나리슈키나 | ||
형제자매 | 드미트리, 예브도키야, 마르파, 알렉세이, 소피야 알렉세예브나, 예카테리나, 마리야, 표도르 3세, 표도시아, 시메온, 이반 5세, 나탈리야 | ||
배우자 | 예브도키야 로푸히나 (1689년 결혼 / 1698년 이혼) | ||
예카테리나 1세 (1712년 결혼) | |||
자녀 |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 안나 페트로브나[2],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나탈리야 페트로브나[3]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신체 | 203cm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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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급진적인 서구화 개혁을 통해 러시아 제국을 개편한 황제. 이러한 개혁과 더불어 대외적으로는 북유럽의 강국이었던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러시아를 북방의 확고한 패자로 만들었으며, 아조프해와 발트해를 장악하고 발트함대를 창설하여 러시아 해군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표트르는 베드로에서 따온 이름이므로 문화권에 따라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영어권), '페터 대제'(Peter der Große, 독일어권), '피에르 대제'(Pierre le Grande, 프랑스어권), '페드루 대제'(Pedro o Grande, 포르투갈어권)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2.1. 즉위 초기까지
로마노프 왕조의 2대 차르인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와 두 번째 황후 나탈리야 키릴로브나의 아들로 1672년에 태어났다. 표트르가 4살 때에 아버지가 승하하자 이복형 표도르 3세가 차르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표도르는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6년 만에 사망했다. 이에 표트르가 차기 황제로 낙점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이복누나 소피야 알렉세예브나가 스트렐치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일단 이복형 이반[4]과 표트르가 공동 황제에 오르고 소피야가 섭정을 맡는 것으로 문제가 일단락되었다.이때 소피야 공주의 집권은 그야말로 피의 권력투쟁으로 당시 황후의 친인척들은 황궁에서 근위대, 스트렐치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표트르 또한 이를 목도한다.
소피야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탈리야는 표트르를 시골 마을로 보내서 키우게 했다. 그런데 이 마을이 마침 러시아에 일하러 온 유럽 상인들과 기술자들[5]의 정착촌과[6] 가까웠기 때문에, 어린 표트르는 그들과 가까이 지내며 당시 최신의 기술들을 배울 수 있었다.[7] 특히 표트르가 흥미있어한 것은 서구식 군대 전술, 항해술, 조선술, 포술 등이었으며, 배운 것을 실천해보기 위해 또래의 귀족 자제들을 모아 '놀이 군대(Потешные войска)'를 만들어 놀면서 자연스럽게 최신 군사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8] 그런데 말이 놀이 군대지 실탄까지 쏘며 훈련을 해 첫 전투에서 20여 명이 살상되기도 했다.
1689년 이복누나 소피야와 애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표트르는 이를 신속하게 진압하고 소피야를 수녀원에 가두었다. 이는 반란이라기보다는 당시 청나라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잇따라 패한 그녀에 대한 귀족들의 여론이 나빠지자, 국면 전환용으로 벌인 사건이 커진 것이다. 또한 표트르가 소피야의 반란을 쉽게 진압할 수 있었던 데는, 서유럽 출신자들로 만든 용병대의 대장인 고든과 표트르의 두터운 친분 덕분에 최정예부대인 용병대가 표트르 편을 든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반은 표트르와 관계가 우호적이어서 실권은 표트르에게 넘겨주었으나 쫒겨나지 않고 명목상의 차르 자리를 계속 유지한 채 살다가 곧 병사했다.
사실 이런 일 때문에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즉 황제가 결정이 아니고 섭정이자 제위 찬탈자인 소피야의 결정이었으므로 무효라는 논리였다. 이반이 1696년에 죽자 그 때부터 표트르는 단독 황제로 러시아를 다스렸다.
2.2. 오스만 제국과의 대립
러시아의 남쪽 진출을 위해 오스만 제국의 봉신 크림 칸국이 지배하는 아조프를 공격하나 해군이 없던 러시아가 아조프를 완전히 포위한다는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결국 해군의 지원을 받은 튀르크(오스만 제국 - 크림 칸국)에게 패배한다.패배로 인해 해군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해군을 편성, 이후 해군과 함께 아조프를 공략하여 승리한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졌으며 현재 러시아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방에 눈을 돌리게 된다.
2.3. 서유럽 사절단
1698년, 표트르는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서유럽으로 대규모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서유럽에서 기술이나 사회정책도 배워오라는 뜻으로 젊은 귀족들도 대거 포함시켰는데, 표트르 자신도 황제의 신분을 숨기고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으로 슬쩍 끼어들었다.프로이센 왕국에서는 포병 부사관 코스프레를 하고 대포 조작 기술을 배웠고,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는 목수 코스프레를 하고 손수 배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잉글랜드에서는 수학, 기하학을 배우고 해군 체험도 하면서 명예 제독의 지위도 얻었다. 그리니치 천문대도 방문하고 뉴턴의 연구에 대하여 듣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의학이나 해부학까지 수강했는데, 수강 중 시체를 보고 토한 자들을 크게 문책하며 시체를 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9] 거기다 시체 해부하는 것까지 참관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사실 사절단이건 방문국 사람들이건 다들 '표트르' 미하일로프가 코스프레 중인 표트르 1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단 키부터가 2m를 넘는 거인이기 때문에 무척 눈에 띄었을 것이다. 단지 당사자가 열심히 코스프레를 하니 장단을 맞춰줬을 뿐. 또 아무리 코스프레에 맞춰줘도 일국의 군주를 포병 부사관이나 목수처럼 굴릴 수는 없으니 일반 귀족의 예로 대우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자국을 방문 중인 외국 군주의 신변에 위협이 가거나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정말 난리가 날 테니 표트르가 방문하는 나라의 군주들은 다들 노심초사하며 호위를 겹겹이 붙였다. 거기에 표트르 또한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악동이라[10] 각 나라에서는 제발 차르가 자기 나라에 오지 말아주십사 했다고 한다.
유학 동안에 표트르 1세는 러시아가 유럽 열강들에 비해 심각하게 뒤떨어진다는 것을 실감했으며 정치, 제도, 군사, 문화 등 러시아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음을 체감하며 러시아를 서유럽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동시에 해운의 중요성을 체감하며 바다에 집착하게 되었다.
유학 중간에 소피아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표트르는 급히 귀국하여 손수 처리했다. 진짜 반란이라는 설부터 반대파를 처단할 음모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백여 명의 사형수들을 속옷 차림으로 줄세운 다음 하나 하나 직접 목을 도끼로 쳤다고 한다.[11]
2.4. 대북방전쟁
1697년, 이웃 강국 스웨덴에서는 칼 11세가 병사하고 16살의 칼 12세가 즉위했다. 당연한 일로서 당시 팽창중이던 스웨덴과의 대립은 결국 21년간의 대북방전쟁의 시작을 알렸다.[12]1700년 루스 차르국군은 나르바 전투에서 패하였다. 스웨덴군은 약 1만~1만 2천명, 루스 차르국군은 약 3만 7천명이었는데, 스웨덴은 질적으로 크게 우세했고 사령관인 표트르 1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공격했다. 거기다 눈보라가 스웨덴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불자 그를 이용해 기동을 은폐하고, 루스 차르국군을 세 토막낸 다음 각개격파하였으며, 패주하던 루스 차르국군이 강가에 몰렸는데 다리가 무너지는 등의 요소들이 작용해 스웨덴군은 6백여명이 전사했지만 루스 차르국군은 9천여명이 전사하고 2만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당했다. 거기다 대포 2백여문과 수만정의 머스킷 등 막대한 양의 장비를 빼앗겼다. 스웨덴군은 나르바 요새에서 루스 차르국군에 포위당했을 때, 루스 차르국군이 준비가 미흡하고 포병이 약하고 탄약이 부족한 것을 알아챘기에 질적 우세를 확신했고 전투 도중에 루스 차르국군에게 고용된 외국인 장교들이 총사령관 드 크로아 공작과 함께 항복까지 해버렸다. 이때 칼 12세가 모스크바로 진격했다면 혼란 시대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할 수 있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로 군을 돌려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후,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전역 교회의 종 1/3을 녹여 대포를 만들고 교회와 상인들로부터 고율의 세금을 거둬들여 서유럽제 신형 머스켓 수만 정을 사들이는 등 철저히 복수의 칼을 갈았고 칼 1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작센 선제후국을 유린하는 사이 스웨덴령 잉에르만란드와 스웨덴령 리보니아의 도르파트, 나르바를 공격해 점령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승리를 거두고 아우구스트 2세를 폐위시킨 칼 12세는 곧바로 표트르 1세를 위협했다. 표트르 1세는 그로드노[13]에서 칼 12세와 소규모 병력끼리 맞붙었으나 쪽도 못쓰고 발려 점령한 잉에르만란드를 되돌려주고 나르바와 도르파트도 배상금을 받으면 돌려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칼 12세는 새로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내놓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엄포를 놓았고 스웨덴군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정면으로 스웨덴군과 붙어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표트르 1세는 청야전술로 최대한 시간을 끌었고 칼 12세도 스몰렌스크를 통해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전통적인 최단 침공경로를 포기하고 우크라이나로 남하했다. 표트르 1세는 길어진 스웨덴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고립시켰고, 결국 칼 12세가 부상당한 틈을 타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칼 1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표트르 1세는 무리하게 몰다비아 공국 원정을 계획하다가 1710년 프루트강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패하였고 추격해온 오스만 제국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결국 병력을 보전하는 조건으로 물러나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얻은 아조프를 반환했다. 이때 표트르는 임신한 자신의 정부(情婦)인 예카테리나 1세와 같이 있었기에 하마터면 러시아 황제 부부가 나란히 동물원 우리에 갇힐 뻔했다. 거기다 당시 오스만 제국 궁정에 칼 12세가 망명해 있던 것을 생각하면 만약 표트르가 포로로 잡혔다면 결코 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만이 아조프를 되찾은 것에 만족하고 대북방전쟁에서 빠지자 기회를 놓치지 않은 표트르는 연합군과 함께 계속해서 스웨덴을 밀어붙여 발트해 지역의 스웨덴령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를 점령하고 핀란드 전역을 유린했다.[14] 노르웨이 침공 중 전사한 칼 12세의 뒤를 이은 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남편 프레드리크 1세와 협상한 끝에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스웨덴령 잉에르만란드,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 발트해 연안 지역과 핀란드의 비보리와 켁스홀름을 포함한 카리알라 일부 지역을 얻으면서 발트해로 향하는 출구를 얻어냈다.
스웨덴과의 일전과 승리는 표트르 1세의 대표적 업적이다. 본인도 이를 평생동안 자랑스러워했으며 승리를 기념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페테르고프의 여름궁전 중심부에 삼손이 숫사자를 죽이는 모습을 조각한 분수를 만들어놓았다. 죽는 대상으로 숫사자를 선정한 이유는 스웨덴의 국장이 숫사자이기 때문.
2.5. 서구화 개혁
당시 러시아는 심각한 상황이였는데 경제는 낙후된 수공업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 비효율적인 산업들이 여전하여 활력을 잃었으며 사회는 그때 당시 기준으로도 미신과 편견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 러시아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 포보보노프에 의하면 마을에 외국인이 오면 주인이 옷을 벗어 불태우고 집안의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정교회 신부를 모셔다 다시 세례를 받을 정도였다.직접 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관찰한 표트르 1세는 서구화를 개혁의 근간으로 삼고 러시아의 사회, 정치, 문화, 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친 개혁과 변화를 추구한다. 운이 좋게도 17세기 표트르 1세가 유럽에 갈 시기 프랑스, 독일에는 전제 군주제, 영국은 의회 제도가 생기고 실제로 이미 자본주의의 개념이 생겨났으며, 시민 사회를 기반으로 공업과 사유재산이 생겨나던 시기였다. 반면 러시아는 15세기에 벌써 중앙 집권 국가가 탄생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발전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러시아는 전방위적 개혁이 필요했던 시기였고, 유럽에서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러시아는 군사 기술과 교육의 후진성을 체감하며 유럽에 비해 심각하게 뒤떨어짐을 체감하고 있었다.
2.5.1. 근대적 관료 체제
한편 행정면으로는 귀족의회인 보야르 두마를 폐지하고 원로원을 만들었다. 1722년에는 14관등 제도를 만들어 러시아에 근대적 관료 체계를 정립했다. 또한 표트르 1세는 귀족[15]들의 정교회 문화권 특유의 긴 턱수염을 자르게 하고,또한 귀족의 모든 재산을 장자가 상속하도록 하는 상속령을 제정한다. 결국 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귀족 자제들은 수입이 크게 줄어들어 어쩔 수 없이 군대에 가거나 공부를 하거나 사업을 벌여야 했다.
또한 귀족들이 반강제적으로 공부[16]를 하게 제도를 개편한다.
그외에도 박물관 도서관 사용의 장려 및 러시아 과학원의 설립, 독일 등에서 외국인 과학자 초청이 이루어졌다.
2.5.2. 생활 문화
유럽의 식문화, 복장 양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생활 문화의 개혁도 단행한다.표트르의 서구화 정책으로 러시아의 음식문화에 변화가 생겼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근대화된 새로운 식습관이 들어선다. 나이프, 포크 및 스푼의 세 세트를 식탁에 앉은 모두에게 나누어 주어 음식을 먹게 하는 식습관이 대표적. 그외에도 유럽 요리사들이 들어와 서구의 식음료를 전파하면서 새로운 음식들과 요리법들의 도입됐다. 독일의 영향으로 양배추를 소금에 절여 먹거나 육류 소시지를 양배추와 함께 쪄서 먹기 시작했으며, 귀족은 포도주를 마시고 커피를 마실 것이 장려됐다. 야채 샐러드도 독일의 영향이다.
유럽의 복장들이 적극 도입됐다. 러시아의 전통 복장을 비실용적이라 생각[17]한 표트르는 러시아의 전통 복장을 유럽식으로 변경할 것을 장려했다.[18] 이를 위해 독일풍의 외투를 지급하며 러시아의 전통 복장을 포기할 것을 장려하고 남자는 조끼, 바지와 모자를 여자는 스커트, 셔츠, 유럽식 구두를 신을 것을 명하고, 아예 새로운 복장 양식을 성문에 전시해 사람들에게 홍보하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의 전통 복장으로 오가면 옷을 서구식에 맞게 자르고 벌금을 내게 했다. 때문에 이 시기에 유럽식 복장이 러시아로 대거 들어오게 된다.
역법도 개혁을 단행해 그 이전까지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러시아력이라는 독자적인 달력을 써왔던 것을 율리우스력으로 개편하였고, 새해를 축하하는 날을 9월 1일에서 1월 14일로 변경하였다.
2.5.3. 화폐개혁
러시아는 지금까지 공식적인 화폐 발행없이 외국 화폐를 써왔는데[19] 표트르는 영국을 방문하는 동안 영국 왕립 조폐국을 견학해서 정부가 화폐 발행을 하는 것을 보고 러시아의 무역 발전을 위해서는 국가에서 발행하고 유통시키는 공식적인 화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2.5.4. 인지 제도, 우체국 실행, 훈장 도입
익명의 편지를 받아 인지(印紙)를 실행하는데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음을 깨닫고 이후 편지를 보낸 사람을 찾도록 해 포상을 내린다. 또한 우체국을 설립, 정부의 공식 우편물을 배달을 하도록 하고 이후 모든 사람이 서신을 보낼 수 있도록 우편 출장소를 일부 개설하기도 한다.전통적으로 러시아는 보상할 일이 있다면 토지, 농노, 현금을 하사했는데 서유럽에서는 훈장을 주는 것을 본 표트르는 이게 국가의 재정을 절약한다는 걸 깨달아 이를 도입한다.
2.5.5. 의료 개혁
표트르 1세 통치기에 의사와 약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들이 창설된다. 1700년에는 모든 군병원에 약국이 설립된다. 1701년에 모스크바에 8개의 사립약국을 개설하는 칙령이 발표되었고 이후로 모스크바를 제외한 다른 도시들에도 약국이 문을 연다. 또한 약초 재배를 위한 종자들이 수입되었으며, 이를 재배하기 위한 전문 정원들도 창설된다.2.5.6.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1703년 스웨덴령 잉에르만란드를 점령한 표트르 1세는 새로운 수도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발트해 연안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네바강 하구 삼각주에 있는 섬에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지었고, 그 도시의 이름을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지었다. 1712년 이 도시는 결국 완공되어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는데, 이 도시가 바로 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후 러시아의 귀족들과 백성들을 강제로 여기에다 이주시켰다. 그러나 늪지대 위에 도시를 만드는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폐렴과 결핵 등 전염병으로 죽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평했다.다만 '뼈 위에 세운 도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애시당초 '뼈 위에 세운 도시'가 진실이면 땅을 파서 뼈를 찾는 것으로 간단하게 증명 가능한데, 소련 시대에 표트르 1세 격하를 목적으로 발굴 탐사가 이루어졌지만 증거가 없었다.
무엇보다 극초기 1년의 동원이나 전쟁포로들을 제외하면 임금도 주고, 1~3달 주기로 교대로 시켰고, 전염병 돌면 최소한의 의약품도 지급해주거나[20] 공사에서 면제시켜줬다.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는 당대의 기록과 증언이 있고 초기 역사가들은 이것을 그대로 차용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공식적인 기록이나 구체적인 수치자료는 없다. 단순히 모호하게 많이 죽었다는 증언을 제외하고 수치를 제시한 걸 보면 당시 러시아를 여행한 영국 귀족 프랜시스 대쉬우드는 공사 초기에만 30만명이 죽었다고 러시아인들로부터 들었다고 기록했고 이런 식의 기록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10만~100만 정도로 나오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치다. 정말 수백, 수십만의 인력을 동원할 능력이 있고 그만한 손실이 나도 끄떡없다면 애시당초 러시아가 스웨덴, 오스만을 가볍게 즈려밟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 내부의 공식 보고서로 1712년에 2,210명의 기술자 중에서 365명이 도망갔고 61명 사망했다, 1717년에 32,000명의 노동자들 중에서 1,000명이 전염병에 걸렸다는 식의 단편적인 공식 수치는 해당 내용과는 오히려 상반되는 내용이다.
어쨌든 정확히 얼마나 동원되고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는게 정설이다. 그러나 수십만이 죽었다는 건 너무 비현실적이고 정황 증거상 최대치를 잡아도 동원자 수는 대략 30만[21], 사망자 수는 수만 정도인 것으로 예측된다. 전근대의 대규모 공사이니만큼 분명 많은 사람이 죽었긴 하겠지만, 정 반대로 그 전근대 대규모 공사의 평균치를 넘어서는 건 아니었다는 소리. 엄밀히 도시를 세우려던게 아니라 적의 영토를 점령하고 최전선에서 방어거점을 구축하는 거였기에 순수하게 건설보다는 전투나 비전투손실 등의 여러 요인들이 복잡하게 작용했다보니 애매한 면이 있다. 물론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게 구체적인 수치를 드러내지 않는 문학적 표현이기에 큰 상관은 없긴 하다.
표트르 1세의 서구화 개혁 의지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도시의 이름 그 자체인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어가 아니다. 러시아어로는 "페트로그라드"[22]가 되어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스웨덴어 '상트(Санкт/Sankt)'와 독일어 '페테르부르크(Петербург/Petersburg)'가 합쳐진 이름으로 당시에 독일어권이 선진화된 지역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새로 짓는 수도 이름에 외국어 발음을 붙였다.
러시아 과학원 역사연구소측 연구원(대국굴기, 강대국의 조건 러시아편. p40)에 의하면 초기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부근에 건설할 것이 검토되기도 했지만 오스만 제국, 크림 타타르족의 저지로 인해 최종적으로 오늘날 위치에 건설하기로 정해졌다고 한다.[23] 이 점을 밝히며 표트르 1세가 꿈꾸던 발트해 해군은 안타깝지만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러시아의 수도도 결국 모스크바로 다시 옮겨졌다고 표트르의 발트해 해군의 꿈은 실패했다고 평했다.
2.5.7. 1721, 황제 등극
1721년 11월 2일,[24] 표트르 1세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귀족들로부터 "전 러시아의 황제(Императоръ Всероссійскій: 임페라토르 프세로시스키)"[25] 칭호를 받았고, 그와 동시에 옛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제국(Pоссiйская Имперiя)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네덜란드 공화국과 프로이센 왕국이 가장 먼저 이를 승인했고 1723년 스웨덴이, 1739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1742년에는 영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이, 1745년에는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왕국이, 마지막으로 1764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승인을 하면서 러시아는 이로서 완전한 황제국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2.6. 후계자 문제
2.6.1. 아들에게 사형 선고
표트르 1세는 후계 관련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특히 표트르 1세는 좋은 부모가 아니었는데 황태자 알렉세이는 아버지 표트르 1세에게 큰 불만을 가졌다. 특히 그의 개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또 표트르가 귀족의 딸인 어머니 예브도키야를 소박놓고 하녀 출신인 정부(情婦) 마르타 헬레나 스코브론스카[26]와 놀아난 것도 한 원인이다.러시아 국내에서는 아들(알렉세이)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 흘러나왔다. 결국 알렉세이는 이 소문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추궁을 받게 되자 정부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피난했다. 이에 표트르 1세는 정부를 구슬려서 알렉세이에게 편지를 보내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고 했으나 알렉세이가 돌아오자마자 오히려 체포한 다음 법원에 알렉세이의 처분을 맡겼다. 이때 실질적인 납치 음모를 꾸민 주인공이 톨스토이 백작[27]으로, 납치 사건의 실질적 가담자인 정부는 다른 귀족과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한다.
1718년, 결국 재판소는 알렉세이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알렉세이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표트르가 손수 고문치사를 시켰다거나 사형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신빙성은 없다. 표트르는 비록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아비로서의 정은 어쩔 수 없었는지 몸소 아들의 장례식을 거행했으며 장례 당일에는 눈물을 쏟아내며 애통함을 숨기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표트르 1세가 알렉세이 황태자[28]를 계속 살려뒀다면 표트르 2세 말고도 또 다른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표트르 2세가 자녀를 못 얻고 죽더라도 다른 자녀들이 계승하여 로마노프 왕조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로마노프 왕조는 스웨덴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독일 귀족, 카를 페터 울리히의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을 통해 이어졌다.
2.7. 죽음과 후계
1725년 표트르 1세는 자신이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후를 맞았는데, 사인은 요로결석이었다. 평소에 술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29]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도시 건설 공사장을 순시 중 인부들이 네바 강에 빠진 것을 보고 친히 물에 뛰어들었다가 폐렴에 걸린 것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지만, 이는 일종의 설화일 뿐 신빙성은 희박하다.이 당시 후계자인 황태손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정부(情婦)였다가 두 번째 황후가 된 예카테리나 1세가 차기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녀도 몇 년 뒤 공식 행사에서 속옷 차림으로 오래 서 있는 바람에 고열로 사망하고,[30] 황태손인 표트르 2세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지만 표트르 2세마저도 천연두에 걸려 일찍 사망하면서 러시아는 혼란을 겪는다.
그 후 예카테리나 1세의 차녀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정국을 안정시켰다.
3. 평가
3.1. 업적
러시아에서는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를 발전시킨 위대한 개혁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문물들을 모두 표트르 대제가 도입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인들이 제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와 커피, 담배는 모두 표트르 대제가 서구를 여행하면서 발견하고 러시아에 들여왔던 문물이다.또한 대륙 국가이던 러시아에 해양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한 것도 큰 업적이다. 1703년 발트함대를 창설해 대북방전쟁 후반부에 스웨덴 해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고, 17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아드미랄티 조선소를 만들어 이후 강구트급 전함 중 두 척(= 강구트와 폴타바)이 아드미랄티 조선소에서 건조되는 등[31] 수많은 함선들을 생산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닷가에는 바다를 향해 달리는 모습의 표트르 1세 기마상이 있고,[32] 현재 러시아 해군의 주력함이자 세계 최대의 수상 전투함인 키로프급 4번함의 함명이 표트르 벨리키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한 후 이전에 비해 러시아의 교역량은 수십배로 늘었으며, 바르샤바에만 있던 대사관도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 당시 쓰인《차르 표트르 1세 폐하가 1700년 스웨덴 국왕 칼 12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게 된 정당한 법적 근거에 대한 강론》[33]을 보면 당시까지 국제 무대의 구석에 있던 러시아가 유럽의 공식적 외교 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외교적 부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강대한 군대, 세련된 외교,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전해지는 수많은 외국 문물[34]은 표트르 대제 즉위 30년간 러시아를 일변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귀족이라도 군공을 세우지 않으면 고위장교로 올라가기 힘들었기에 귀족들이 러시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이는 조국전쟁(러시아 원정) 이후 러시아 최초의 개혁 운동이라 불리는 데카브리스트의 움직임을 낳는 계기로도 이루어진다.
3.2. 한계
중요한 점은 다른 누구도 아닌 표트르의 후손인 이후 러시아 황제들과 차르주의자들이 표트르 1세를 폭군이자 계몽자로서의 양면성이 존재하는 복잡한 인물로 평가했다[35]는 점이다. 오히려 반체제적 성향이 짙었던 사회주의자, 서구주의자들이 표트르 1세를 칭송하거나 고평가했을 정도다. 즉, 바로 그 제정 시대에서부터 평가가 극도로 갈리는 인물이었다.표트르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왕권을 제약하는 보야르들을 타도하고 표트르 1세의 왕권을 강화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었지 백성들을 위하지는 않았다. 개혁을 시행하는 와중에 벌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사업, 근대화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드는데 이 당시 러시아는 그것을 감당할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표트르 1세는 귀족과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여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려 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귀족과 백성들의 개혁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무엇보다도 표트르는 유럽의 선진적인 정치 체제를 도입하는데 매우 소극적이였다. 유럽 국가의 놀라운 발전의 근원은 사유 재산의 보호와 같은 시민의 권리와 자유, 군주의 권력 제한 자치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표트르와 러시아 제국이 범한 중대한 실수였고 크나큰 비극이 된다.[36] 괜히 표트르의 죽음 이후 러시아의 사회 개혁 움직임이 크게 후퇴한게 아니다. 제국 내 농노, 이민족 뿐 아니라 귀족, 성직자들도 그야말로 강압 속에서 시달릴대로 시달려서 지쳤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와 관련해서 전반적으로 복잡한 평가다. 표트르 1세는 대북방전쟁 당시 칼 12세와 손잡고 대항했던 카자크 헤트만 이반 마제파를 제압하고 카자크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사에 동원하거나 카자크 자치권을 제한했다. 그러나 당시의 카자크들은 동일 집단이거나 우크라이나인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는 아니었고 오히려 같은 카자크끼리 혹은 농민들과 싸우는 경우도 많았다. 단적으로 마제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표트르 편을 든 충성파 카자크 지도자들 중에서도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위인으로 존경받는 이들이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역사가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는 표트르 1세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가혹하게 통치했으며 개혁에도 많은 한계가 있었고 여러 실책과 악행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표트르에게도 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며 국가를 위함이었지 사익을 위함은 아니었다고 선을 그었고 또한 우크라이나의 계몽과 발전을 이끌고 특히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차별을 막은 것은 호평하는 등 나름대로의 복잡한 역할과 명암이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37]
사실 표트르 1세의 우크라이나 정책은 모순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전제군주정을 추구하면서 가장 강력한 봉건세력인 자포리제 카자크들의 자치권을 철폐한 반면 서구화 정책을 추구하고 전통적인 러시아 대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옛 소러시아인, 폴란드인을 적극적으로 등용해야 했다. 즉 차별한 것도 있고 탄압한 것도 있지만 민족주의적인 이유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표트르 1세 시기에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영토에 거주하는 카자크들을 비롯한 루스인들은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없었다. 이 당시에는 우크라이나 지역은 소러시아라고 불렸고 우크라이나란 개념이나 우크라이나인의 정체성은 19세기에 와서야 형성되었다.
3.3. 논란
러시아의 서구화나 중앙집권화라 하면 대개 표트르 1세를 떠올리지만 표트르 1세의 개혁이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그렇지 "과연 본질적인 변화가 있었나?"에 대해서는 제정 시대 학자들부터 논란이 분분했고 실제로는 부황 알렉세이 1세가 기반을 마련한 플랜의 급진적인 진행에 불과하다거나 시대의 흐름을 잘 탔을 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표트르 1세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파벨 밀류코프의 경우 "개혁은 러시아 국가 발전 양상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표트르 1세는 단지 그것을 촉진하면서 흐름을 잘 탔을 뿐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지는 않았다."고 평했다.모스크바 대공국 시절에 이반 3세가 바로 그 신성 로마 제국의 카이저한테조차 대등한 황제임을 내세웠고[38]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인정받았다. 또한 이반 4세 시대부터 군사 및 정치 제도에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모방한 서구화 개혁이 시작되었으며, 보리스 고두노프 때는 서구식 예술 작품이 유행했다. 미하일 1세 재위기에 모스크바 총대주교 필라렛[39]의 주도로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스웨덴군을 모방한 군사 분야의 서구화가 진행되었으며 스웨덴 및 네덜란드와 활발한 국제 무역이 시행되고 있었다. 고로 이 분야에서 딱히 표트르 1세가 특출난 존재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는 당대인들이 표트르 1세의 계몽자로서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그 이전 시대를 후진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왜곡한 경향이 있다는게 밝혀짐으로서 더더욱 복잡해졌다. 즉, 표트르 1세 이전과 이후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주장은 오히려 정치적, 이념적으로 만들어진 표트르 전설(Петровская Легенд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표트르 1세가 주목받는 것은 군사, 정치, 기술, 행정 등의 분야에서 전례 없는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수염을 자른다든가, 서유럽식 의복을 입다든가 하는 일반 평민들의 생활 양식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4. 대중매체에서
- 스위스의 배우 막시밀리안 셸[40]이 주연하고 양지운이 더빙한 미국의 4부작 미니 시리즈《Peter the Great(1986)》가 꽤 유명하다. 노엄 촘스키의 친척인 마빈 J. 촘스키가 공동 감독하고, 한국에서는 1988년 8월 6일부터 9일까지 밤 9시 50분에 MBC 심야특선 외화 드라마《피터 대제》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오마 샤리프나 멜 페러 등 배우진은 화려하고 제작비도 많이 들여 볼거리도 많다. 다만 이 작품은 고증이나 연대기는 엉망이다. 만나지도 않은 아이작 뉴턴이 나오거나, 폴타바 전투 10년 전에 죽은 영국인 용병 장교 패트릭 고든[41]이 버젓히 폴타바에서 나온다. 1990년대 러시아에서 만든 전기 영화는 고증으로서는 완벽한 작품이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행정, 외교, 군사 순으로 6, 6, 6 능력치를 지닌 군주로 등장한다. 이 게임에서 6, 6, 6은 풀스탯 능력치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전 시리즈에서 그의 능력치는 최고치를 찍는다.
- 엠파이어: 토탈 워에서도 러시아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5. 여담
- 누가 러시아인 아니랄까봐 술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술고래였다. 문제는 술에 취했다 하면 그렇잖아도 다혈질인 성격이 더욱 더러워져 완전 개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이때 누구든 표트르의 비위를 거슬렀다가는 가차없이 두들겨맞기 일쑤였다. 과음으로 인해 말년에 이르러서는 요로결석을 심하게 앓았는데, 의사들이 수술로 제거한 결석들의 양이 4파운드(약 1.8kg)나 되었다. 죽기 얼마 전에는 요독증에 걸려 오줌을 못 눠서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불구하고 술을 계속 퍼마셨다. 방광에 구멍을 뚫어서 오줌을 빼내기도 했지만 결국 요로결석과 요독증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게다가 사후 부검에서 표트르 1세는 방광이 심각하게 썩어있었다.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왕 아우구스트 2세는 동유럽의 운명을 건 대북방전쟁에서 트롤링을 일삼아,[43] 스웨덴의 소년왕 칼 12세에게 바르샤바가 점령당해 왕위에서 쫒겨났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에 빌붙어서 전쟁에서 승리한 뒤 겨우겨우 다시 왕위에 올랐다. 아우구스트 2세는 이때 표트르 대제에게 받은 은혜에 어찌나 감사했는지 즉위 기념 선물로, 생명의 은인인 표트르 대제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는 포르노 그림을 선물로 보내며 유럽 제일의 난봉꾼다운 기행을 벌였다. 웃긴 건 표트르 대제도 성격이 별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고 기행이라면 동유럽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인물이어서, 포르노 선물에 대해 기껏 살려줬더니 모욕했다며 화를 내기는 커녕 "이 녀석 완전 내 스타일"이라며 오히려 좋아했다. 이후 아우구스트 2세는 표트르 대제라는 매우 든든한 큰형님이[44] 생겨서 거칠 것없이 막 행동했으며 러시아의 뒷빽만 믿는 경향이 강해졌다. 아우구스트 2세는 아예 강약약강이란 게 없었던건지 자신의 나라보다 국력이 강력한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는 옷을 안입은 여성의 초상화를 선물했다. 이 선물을 받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당연히 표면상 화를 냈지만, 이후 표트르 대제처럼 아우구스트 2세의 선물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 훗날 러시아의 장군이 되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을 등용했다. 이때 표트르 1세는 간니발에게 고급 교육을 받게 했으며, 간니발이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자 간니발의 대부가 되었다. 성씨 간니발은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인 한니발 바르카의 이름을 딴 것으로 간니발은 한니발의 러시아어 표기. 미들네임의 '페드로비치'도 표트르가 간니발의 대부를 서줬기 때문에 표트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간니발은 오랫동안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오늘날의 연구 결과로는 실제 에티오피아가 아니라 현대의 카메룬 북동쪽 차드 호 인근 출신이란 추측이 나오고 있다. 간니발은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외증조부다. 후손인 푸시킨은 자신의 외증조부 혈통과 이국적인 외모를 자랑스러워 했다고.
표트르 대제와 역대 러시아 제국 황제들의 키.[45] |
- 키가 엄청나게 컸는데, 지금 기준으로도 장신이다 못해 거인인 203cm였다. 당시에는 영양상태가 영 좋지 못해서 서양인이라고 해도 평균 키가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으며, 인류 역사상 200cm 이상인 군주는 드물다.[46] 게다가 얼굴도 꽤 훤칠하게 잘생겼는데 이 둘이 맞물려서 어딜 가도 눈에 띄었다. 현재까지도 역대 러시아의 역대 지도자 중 최장신이다.[47]
[1] 1919년 이후의 맞춤법으로는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Романов.[2] 표트르 3세의 어머니.[3] 원래는 14명이나 되는 자녀를 뒀으나 위의 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나마 위의 4명에 포함된 막내딸 나탈리야 페트로브나 역시 6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4] 당뇨로 추정되는 병으로 거의 죽기 직전이었고 장님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저하되었다. 누나 소피야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제위에 오르기도 힘든 상태.[5] 주로 스코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독일 출신들이었다.[6] 쿠쿠이(KyKyй)라고 부르는 서유럽 이주민들의 마을이었다. 당시에 러시아인들은 유럽 이주민들을 모두 독일인이라고 불렀다.[7] 네덜란드인에게서는 산수와 기하학, 축성술, 항해술을 배웠고 스코틀랜드인과 스웨덴인에게선 전술을 배울 수 있었다.[8] 이때 표트르가 이러한 병정놀이에 빠져 교육받기를 등한시한다고 여겨 실권을 잡은 이복누나 소피야는 표트르의 부탁에 진짜 창, 폭약, 대포까지 보내주면서 놀이를 부추긴다.[9] 정확히는 시체의 조직을 입으로 절단하라고 지시한것 같다.[10] 머무르는 집마다 총탄 자국이 가득하고 바닥은 엉망이었다고 한다. 영국에 갔을 때는 겉옷만 걸치고 윌리엄 3세를 만나러 가기도 하고 고급 식기를 사용하는 데에 서투르기도 하여 영국인들은 표트르 대제를 부정적으로 보았다.[11] 키가 2m가 넘는 거구에다가 힘도 엄청난 장사여서 은쟁반을 손으로 구기고 말편자도 펼 수 있을 정도였기에 가능한 퍼포먼스였다. 물론 아무리 장사라도 백명이 넘는 사형수의 목을 다 치는건 힘든 일인지라 사형 후반에는 표트르파 귀족들이 도와줬다고 한다.[12] 이 때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서 재미있는 법안을 만들었다. 그 전까지 러시아인들이 가정에서 자유롭게 만들었던 보드카를 앞으로는 국가에서만 제조와 판매를 독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표트르 대제가 사망하기 직전, 러시아 정부가 벌어들이는 세금의 40%는 보드카 판매에서 나올 정도였다. 물론 표트르 대제는 민심을 얻기 위해서 전쟁에 참가하는 병사들이나 노동자들에게는 매일 무료로 보드카를 지급해주었다고 한다. 덤으로 병사들에게 보드카를 지급한다고 홍보하자 군 지원율이 상당히 높아졌다고도 한다.(…)[13] 현 벨라루스 흐로드나.[14] 이때 루스 차르국군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한 핀란드는 때마침 기근과 역병까지 덮치면서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사망하였다.[15] 농노와 성직자에게는 면도가 면제되었다. 즉 수염세는 명백히 귀족들의 재산권을 약화시켜 기를 꺾기 위한 목적이 다분했던 정책이었다.[16] 의무교육 규정을 만들어 귀족 자제들이 일정 이상의 교육을 해야만 결혼이 가능했고 귀족 신분을 지킬 수 있었다.[17] 비실용적으로 생각한 것도 있고 서유럽에서 러시아의 전통 복장에 대해 멸시하는 풍조에 대한 대책이기도 했다. 본인이 일행을 이끌고 서유럽을 여행하던 도중 러시아의 전통 복장에 대해 조소를 받기도 했다.[18] 긴 소맷자락이 대표적. 아예 연회에서 귀족들의 옷의 소매를 자르기도 한다.[19] 주로 쓰던 화폐는 있었는데 이 은화는 상인들이 필요에 의해 외국의 화폐를 개조해서 쓰던 것이였다.[20] 물론 전근대의 열악한 의학수준을 감안하면 의약품을 지급해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21] 한꺼번에 30만명을 동원 했다는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동원 소집과 해제를 반복한 것의 총 누적 수치다. 반복적인 소집과 해제 사이에서 분명히 중복되는 인원들이 상당수 있었기에 말 그대로 최대치고 실제로는 훨씬 적었다고 봐야한다.[22] 여담으로 페트로그라드라는 이름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과 사이가 안 좋아졌을 때 본래 이름 대신 사용되었던 이름이기도 하다. 이후 소련 시절 내내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을 따다 붙인 레닌그라드로 불리다가 소련 해체 후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환원되었다.[23] 어차피 오데사가 러시아 제국 영토가 된 것은 1792년 이아시 조약 이후이다. 그 전까지 오데사는 오스만 제국 실리스트레 에야레트(Eyālet-i Silistre)에 속했다.[24] 당시 러시아가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0일.[25] 러시아가 제국을 칭한 것은 전 러시아의 차르를 자칭한 이반 4세가 최초이지만 서구식 황제 개념인 임페라토르 칭호를 받은 군주는 표트르 1세가 최초이다.[26] 전시 억류자로 노예로 팔려와서 표트르의 신하의 집의 가정부로 있다가 헌납된 여자다. 나중에 표트르의 정부로 살았는데, 표트르가 황후를 폐위한 뒤에 정식으로 결혼했다.[27] 작가 톨스토이의 직계 조상이다.[28]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와는 다르다.[29] 실제로 요로결석의 원인 중 하나가 알코올 중독이다. 지금이야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이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물 많이 마시고 과일 잘 먹자 파석술이 개발되기 전까지의 요로결석은 난치병이었다.[30] 이때 강추위가 심했는데 이로 인해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된 것이다.[31] 나머지 두 척은 네바강을 끼고 마주하고 있는 발트 조선소(여기는 1856년 민간 조선소로 설립되었다.)에서 건조했다.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로 남아 꾸준히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32] 이 기마상을 보고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청동기마상》이라는 시를 남겼다.[33] 《표트르 대제 ~러시아를 일으킨 리더십~》번역본 참고.[34] 표트르 대제 이후 가라앉을 때도 있었으며, 농민들에게는 그다지 많이 퍼지지 않은 면도 있다.[35] 니콜라이 2세의 경우는 표트르 1세를 자신이 가장 덜 좋아하는 선조라고 언급했다[36] 다만 이는 너무 현대적 기준을 적용한 결과론적인 평가인데 이 당시에는 베네치아, 네덜란드, 제노바 등의 공화국들은 여럿 존재했지만 이들 공화국들도 참정권은 귀족 내지 상류층이나 가질 수 있었던 현대 기준에서 과두정이었고, 보통 선거 개념은 생소한 것이었다. 따라서 시민권과 자유, 사유재산권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건 귀족 계층밖에 없었다. 표트르 1세가 저걸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전제군주로서 봉건귀족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 훗날 차르나 보수주의자들이 전제권력에 집착한 이유도 비슷하다. 왕권이 약화되면 귀족이 자유를 얻게 되고, 이 귀족들은 농노를 마음대로 착취하고, 분노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켜서 국가가 망하게 되니, 이러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 실제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이 쇠퇴의 길을 걸은것도 귀족들의 권한이 너무 세져서 국왕도 제대로 견제를 못했기 때문이었다.[37] 이러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평가는 당시 표트르의 대척점으로 올려진 이반 마제파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제대로 된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사관으로 너무 이상화되거나 일부 예외적인 인물들이 띄워져서 그렇지 오히려 당시 카자크들은 대부분은 마적단, 지방군벌에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었고 적지 않은 농노를 착취하는 폴란드 슐라흐타와 별 차이 없이 카자크 지도자들은 당대 우크라이나인들로부터도 증오의 대상이었다. 단적으로 표트르 1세가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사에 동원했다고 하지만 우크라이나 내 정적들을 숙청하고 차르의 신임을 얻기 위해 이걸 적극적으로 이용한 인물이 바로 마제파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주도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어도 이는 러시아령 우크라이나의 가장 강력한 봉건영주의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했으며 마제파가 표트르 1세의 가장 적극적인 동조자이자 수혜자였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때문에 마제파는 소련 해체 이후 민족 영웅으로 떠받들어졌지만 생전에는 친러와 반러를 막론하고 우크라이나인에게도 평이 좋은 인물은 아니었다. 코스토마로프는 사실상 폴란드인인 마제파는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도 진심으로 조국이라 생각치 않았으며 자신의 사익만을 위해 차르에게 충성하며 소러시아인들을 착취했고 자신의 사익이 위협받자 차르를 배신하고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구실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철저한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때문에 마제파의 봉기는 후대의 민족주의적 사관에 의해 러시아 지배에 대항하는 우크라이나의 저항이라는 이미지가 덧붙여졌을뿐 실제로는 전제군주와 봉건영주의 충돌 정도로 여겨진다.[38] 즉, 애시당초 차르-임페라토르를 동양적인 왕-황제 개념으로 보는게 잘못되었다.[39] 당시 차르와 함께 공동 통치자였다.[40] 그 유명한 샘 페킨파 감독의 영화 <철십자 훈장>에서 악덕 지휘관 스트란스키 대위 역으로 열연한 배우다.[41] 배우는 나치 장군 역을 자주 맡았던 영국의 배우 '제레미 켐프'다.[42] 다만 표트르가 세다기보다, 그가 이끄는 러시아 문명. 특히 러시아의 고유 지구인 라브라가 너프를 받았음에도 너무 강력하다는 게 문제다. 정작 표트르 자신의 지도자 특성은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지도자들 중에서 최하위권이다.[43] 러시아 빽과 인구 3배 차이라는 체급 차이만 믿고 먼저 공격했다가 역으로 지도에서 지워졌다.[44] 아우구스트 2세가 표트르 대제보다 2살 많은 형이다.[45] 기타 황족까지 합치면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1856 ~ 1929)이 198cm로 가장 크다.[46]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200cm),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201cm)가 대표적인 케이스이다.[47] 두 번째로 키가 큰 사람은 190cm의 알렉산드르 3세, 세 번째는 189cm의 안나 이바노브나와 니콜라이 1세, 네 번째는 187cm의 보리스 옐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