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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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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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전라남도 나주시 | |||
시조 | 임비(林庇) | |||
집성촌 |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경기도 화성시 • 성남시 충청남도 청양군 • 서천군 • 금산군 충청남도 논산시 • 당진시 전라북도 부안군 • 남원시 • 완주군 전라남도 나주시 • 함평군 • 무안군 • 완도군 • 곡성군 • 진도군 • 순천시 • 여수시 • 장성군 경상남도 산청군 • 함양군 • 진주시 • 김해시 • 창녕군 • 거제시 • 마산시 • 의령군 • 하동군 • 남해군 • 양산시 • 통영시 경상북도 영천시 • 경주시 • 포항시 | |||
인구 | 289,558명(2015년) | |||
링크 | 나주임씨대종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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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주 임씨(羅州 林氏)는 고려 왕조의 대장군인 임비(林庇)를 시조로 하는 대한민국의 성씨이다.2. 상세
임씨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가문이다. 그 다음이 평택 임씨(平澤 林氏)[1]이다. 풍천 임씨(豊川 任氏)도 규모가 큰 편이지만 이쪽은 임(任)씨이다.[2]나주 임씨는 항렬자를 비교적 잘 지키는 가문인데, 이름이 임◯택(澤)이나[3] 임채(采)◯[4]인 사람은 높은 확률로 나주 임씨로 볼 수 있다.
3. 기원
나주 임씨는 임비[5]를 원조로 삼는데, 선세에 유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임비 위로도 또 여러 대(代) 높은 벼슬을 지낸 분이 있었다고 하나 세대가 아주 멀고, 문적을 증거할 수 없어 지금 상고해 밝힐 수가 없다고 한다.임비의 9세손 임탁(林卓)이 해남 감무, 해주 감목, 이름을 알 수 없는 관청의 소윤 등을 역임하던 중 조선 왕조가 개국했다. 이후 회진(會津)[6]으로 정착하여 세거하면서 본관을 회진으로 했다. 회진현(會津縣)이 나주(羅州)에 속하게 됨에 따라 후손들이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7]
3.1. 임팔급 시조설
BC 1,000년경 중국의 상나라 왕자 비간(比干)이 당대의 폭군이었던 주왕(紂王)의 숙부로서 주왕의 폭정을 만류하니 주왕이 "예로부터 충신의 염통에는 구멍이 9개가 있다고 했는데 진실로 충신이라면 염통에 구멍이 9개가 있겠다."라고 하면서 숙부인 비간을 죽였다. 비간공(比干公)이 상나라 말기에 주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정부인 진씨(正夫人 陳氏)가 임신 중에 장림산(長林山)으로 피신하여 살다가 아들을 낳으니 천(泉)이라 했다.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周)나라가 건국(建國)되자 무왕(武王)이 비간공의 아들 천(泉)을 찾아 임씨(林氏)의 성과 견(堅)이라는 이름을 사(賜)한데서 임씨(林氏) 성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는 사실 평택 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로[* 임팔급은 [족보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건너온 사람이지만 이마저도 숭화 사상의 영향으로 각색되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존재한다.] 나주 임씨와는 관련이 없으나[8] 한국의 적지 않은 가문들이 중국에 그 성씨의 기원을 두었지만 실제로는 조상대에서 중국과는 아무련 관련이 없던 가문들이 후세에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이야기를 창작했던 사례들이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여진다.
3.2. 추정 : 대성팔족
인구의 번성에는 많은 변수가 있다. 그러나 임씨는 지방의 자원을 집중시킬 수 있는 한반도 고대 국가 왕족이었던 적은 없으니 그에 따라 대체로 큰 틀에서 일반적인 인구수의 증가 추세를 따라갔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평택 임씨에 비하여 유의미하게 더 많은 나주 임씨의 인구수는 이 둘 사이의 기원에 어느 정도 시간차가 있었던 것이 그 원인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나주 임씨의 기원은 평택 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의 한반도 이주보다도 조금 더 앞에 있었을 것이다. 나주 임씨를 제외한 나머지 절대 다수의 임씨가[9] 평택 임씨와 그 분가들이기에 그 이전에 임씨에 관한 기록이 있다면 소거법을 사용할 수 있다.시조인 고려시대 대장군 임비 이전에도 존재해왔던 점, 나주의 지리적 위치, 그리고 종가에서 발굴되는 유물 및 유적으로 짐작해보아 나주 임씨가 마한 침미다례 권역의 토착세력, 혹은 백제의 대성팔족 중 목(木)씨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백제의 남방 정복 이후 현지의 유력 세력으로 정착하게 된 것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여진다.[10]
이와 관련하여 일본의 고대 씨족을 정리한 서적인 《신찬성씨록》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이외에도 목귀의 후손으로 하야시(林)씨, 오호이시노하야시(大石林)씨[13], 하야시노후히토(林史)씨가 언급된다. 2개의 성씨는 카바네를 받았지만 나머지 2개는 카바네를 받지 못했는데 세력이 떨어지는 가문이었던 걸로 보여진다.
백제의 대성팔족 중 하나인 목(木)씨는 백제의 극초기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부여씨 왕가와 함께 북방에서 이주해내려온 가문이라기보단 현지 마한 토착세력 중에서 백제의 지배층으로 편입된 것으로 여겨진다.[14] 또한 발음의 유사성 및 고대에는 국명 혹은 지명 등을 성씨로 삼았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목씨가 한때 마한의 영수국이었던 목지국(目支國)의 지배층에서 유래됐다는 가설이 있다.[15][16] 즉 나주 임씨는 백제 말기 ~ 멸망 즈음에 어떠한 형태로든 목씨로부터 분가했고, 그 중 일부는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는 대신 남는 걸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혹은 《신찬성씨록》이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나온 책이라는 점을 봤을 때, 백제가 멸망한 이후 목씨들이 신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성씨를 바꾸라는 압박을 받아 통일신라가 들어설 시점에 목씨들이 임씨로 성씨를 바꾼 걸로 보인다. 개성(改姓) 및 분가 시점이 멸망 즈음이라면 전해 내려오는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모호한 점도 그 때문일 것으로, 삼국통일 이후 백제계는 고구려계보다도 낮은 신분으로 흡수되면서 성씨를 대외적으로 쓰는 것이 제약되는 상황이었다. 나무 목(木)을 두 개 붙이면 그게 바로 수풀 림(林)이다. 한자를 살짝 바꾸어 성을 바꾸는 방식은 한자를 사용한 동양권 전반에서 흔한 방식이었고, 조선 초기에 왕(王)씨들에 대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전씨(全氏), 옥씨(玉氏) 등 한자가 비슷한 성씨로 바꾸었던 야사가 전해진다.
즉 다시 말해서 분가 시점이 백제의 멸망 즈음이라면 이들은 생존을 위해서 목씨에서 임씨로 성씨를 바꾸었을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다. 자연스레 고려시대 이전의 근본적인 가문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망실되거나 잊혀지면서 숨겨지게 된 것이고, 이런 추론에 따르면 나주 임씨의 형성은 평택 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의 한반도 정착에 비해 최소 210년 정도 더 앞선다.[17]
4. 분파
나주 임씨는 조선 초기부터 분파되기 시작하는데, 임탁의 손자인 임유소(林有巢)를 파조(派祖)로 도정공파(都正公派)가 분리되었고, 임유소의 형 임시소의 손자 대에서 큰손자인 임귀연(林貴椽) 후손이 장수공파(長水公派)·정자공파(正字公派)·절도공파(節度公派)·첨지공파(僉知公派)·생원공파(生員公派)·첨추공파(僉樞公派)로, 둘째손자인 임귀량(林貴樑)의 후손(後孫)이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분파(分派)되었다.이 외에도 집성촌 목록을 보면 금수공파(錦繡公派), 가의공파(嘉儀公派), 동지공파(同知公派) 등 여러 공파가 현존한다. 북한에 속하는 황해도 장연, 해주 등지에도 많은 집성촌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공파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파악되지 않았다.
5. 인물
5.1. 중근세
- 임붕(林鵬) :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3사를 두루 지내고, 벼슬은 승지·병사에서 그쳤다.
- 임복(林復) : 임붕의 아들이자 박진(朴晉)의 첫째 사위.[18]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다가 이듬해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에 유배되었다. 1551년 순회세자의 탄생으로 특사령이 내려져 고향에 돌아갔다가 선조 초기에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무고를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강항(姜沆)의 저서인 수은집(睡隱集)의 풍암임공행장(楓岩林公行狀)에 따르면 거북선으로 추정되는 배의 설계에 관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9][20]
- 임진(林晉) : 임붕의 셋째 아들이며, 임복의 아우. 1546년(명종 1)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을 거쳐 전라수사(全羅水使)‧제주목사(濟州牧使)‧회령부사(會寧府使)‧장흥부사(長興府使)‧오도병마절도사(五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했다. 제주목사 시절에 청백리(淸白吏)로서 청정비가 세워졌으며, 1568년(선조 1) 전라도우수사(全羅道右水使)로 있을 때는 흑산도(黑山島)에 나타난 수적(水賊)을 토벌하여 이듬해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랐다.
- 임제(林悌) : 조선의 3대 천재시인으로 불리었으며, 임진의 맏아들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興陽縣監)·서북도 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관서 도사(關西都事)·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다. 허목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 임서(林㥠) : 임복의 아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에 뽑히고, 1601년 승정원주서에 제수되었다가 성균관전적에 승진하고, 이어 공조·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전라도안핵사·무장현감 등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병조정랑이 되었고 이듬해 지평으로 있을 때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였다가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자 그는 수성찰방(輸城察訪)으로 좌천되고, 이어 덕원군수로 나갔다가 파직되었다. 1612년 봉산군수가 되고 이어 승지 등을 역임하다가,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21년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다시 고향에 내려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안동부사가 되고, 이어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쌓였던 폐단을 일소하고 농업의 권장과 군사의 조련 등에 힘썼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적을 토벌하는 한편, 군량을 보급하는 등 열성을 다하여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되고 임기가 만료되자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제수되었다. 저서로 《석촌유고》가 있다.
- 임담(林潭) : 1616년(광해군 8) 생원이 되고,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병자호란 때 사헌부지평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총융사의 종사관이 되어 남격대(南格臺)를 수비했고, 화의가 성립된 뒤 진휼어사(賑恤御史)로 호남지방에 내려갔다. 1639년 좌승지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1644년 경상도관찰사로 서원이 사당화하는 폐습을 상소했다. 1646년 충청도관찰사로 유탁(柳濯)의 모반사건을 처결한 후, 그 공으로 품계가 오르고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 뒤 형조·예조·병조·이조의 참판과 대사간·도승지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1650년(효종 1) 다시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였다. 1652년 청나라 사신의 반송사(伴送使)로 다녀오다가 가산에서 죽었다.
- 임한호(林漢浩) : 179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를 지냈다.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에 복직되고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형조판서·이조판서·우빈객 등을 지내고 우의정에 올랐다.
5.2. 근현대
- 임병직(林炳稷) :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가, 외교관.
- 임갑수(林甲守) : 독립운동가.
- 임석규(林奭奎) : 제헌 국회의원.
- 임종기(林鍾基) : 제8·10·11·12대 국회의원.
- 임덕규(林德圭) : 언론인, 정치인, 국회의원
- 임동원(林東源) : 제25·27대 통일부 장관. 제 24대 국가정보원장.
- 임권택(林權澤) : 영화감독, 석좌교수.
- 임부택(林富澤) : 대한민국 육군 소장. 제1 군단장 역임. 6.25 때 장성으로 1962년 예편. 태극무공훈장.
- 임성규(林聲奎, 1939년 ~ 2012년) : 제33·34·35대 충청남도 논산시장.
- 임성훈(방송인)(林成勳) : 가수 겸 MC. 본명은 임종상.
- 임인택(林寅澤) : 제35대 국토교통부 장관
- 임은정(법조인)(林恩貞) : 대구지검 중요경제범죄조사단 부장검사
- 임재정(林在正) : 제11대 국회의원
- 임종령(林鍾玲) : 통역가
- 임지연(林智姸) : 배우
- 임채정(林采正) : 제14~17대 국회의원 및 국회의장.
- 임채진(林采珍) : 제36대 검찰총장.
- 임채무(林采茂) : 배우
- 임채민(1958)(林采民) : 제3대 국무총리실장, 제4대 보건복지부 장관.
- 임여진(林汝眞) : 걸그룹 멤버, 전 이달의 소녀, 현 루셈블의 여진
[1] 국내에 있는 임(林)씨의 다수는 평택 임씨로부터 분파한 가문들이다. 다만 평택 임씨를 모든 임(林)씨의 근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평택 임씨로부터 분가한 가문들의 경우, 본가에 비해 인구수가 적고 본가에서 분적한 기록이 있는 반면에, 나주 임씨는 평택 임씨보다 인구수도 6만 명 정도 더 많고(임씨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다) 분적한 기록도 없다.[2] 풍천 임씨의 인구수는 191,261명이다.[3] 30세 ◯택(澤) 항렬.[4] 31세 채(采)◯ 항렬.[5] 나주임씨 대종중 홈페이지에선 대장군(종3품)을 지냈다고 쓰여있지만 기록에 따라서는 최고 지휘관인 상장군(정3품)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임비 이후 2세손 임영발(林永拔)이 직장동정(直長同正), 3세손 임양간(林良幹)이 정용장군(精勇將軍), 4세손 임박(林朴)이 봉익대부 행호군(奉翊大夫行護軍)을 지내는 등 8세손까지 주로 무관의 직책을 가진 것을 보아 군반씨족이었는지에 대한 여부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임비가 상장군과 동일한 품계인 정3품에 해당하는 판사재지사를 지내거나 후대에 감무나, 소윤 같은 문관 직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한 여부는 불투명하다.[6] 현재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7] 대종중 홈페이지 등은 이를 두문동72현과 엮곤 하는데 이는 후대에 첨가된 야사에 해당하며 그나마 공식적인 기록에 등장하는 임씨인 임선미는 평택 임씨이다. 관직명인 감무의 경우 7품 이하의 과거급제자를 임용한다는 규정이 공민왕 대에 마련되었으므로 과거시험을 봐야 했다. 그러나 고려의 과거시험은 문종 대에 성과 본관을 반드시 기입해야만 응시가 가능하게 되었으므로 회진 이전의 본관이 필요해진다는 모순이 생긴다. 또한 9대손 쯤 되면 인구가 나름 늘어났을 터인데 다 같이 집단 이주라도 하는게 아닌 이상 임탁 홀로 정착하여 본관을 정한다는 것은 다소 부자연스러운 부분이다. 적어도 임탁이 관직에 오르기 전에 공식적인 본관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그전까지 모호하게 쓰던 본관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 임탁이거나.[8] 평택 임씨로부터 분가한 임씨들은 그 인구수가 본가에 비해 적으며, 분가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게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만 나주 임씨의 인구수는 2015년 센서스 기준, 평택 임씨 대비 1.3배 정도이다. 또한 분가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9] 물론 林씨를 말하는 것이다.[10] 목씨는 백제의 남방 정복과정에서 활약하며 세력을 키운 가문이었다.[11] 하야시(林)가 성씨에 해당하는 우지(氏)이고, 무라지(連)는 등급을 나타내는 카바네(姓)이다.[12] 귀족을 가리키는 말.[13] 현대어로는 오오이시노하야시.[14] 다만 근초고왕 시대의 기록에도 이미 등장하므로 적어도 백제의 본격적인 남방정벌 이전에는 이미 지배층으로 편입된 가문이다. 백제가 수도를 웅진성으로 옮긴 뒤에 지배층에 편입된 백씨, 연씨, 사씨 등의 금강 유역을 연고로 하는 가문들보다 훨씬 더 빨리 지배층에 편입되었으므로 기원 자체는 이들보다 북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이는 목씨가 천안 일대를 기반으로 삼았던 목지국 출신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의 신뢰성을 보완해준다.[15] 백제의 정복활동에 따라 목지국이 천안에서 익산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나주로 후퇴했다는 <목지국이동설>이 제기된 바 있었으나 고고학적으로 근거가 없어서 현재는 사실상 폐기된 가설이다. 목지국은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 일대가 중심지였던 것으로 거의 확증되어 있으며, 익산은 고조선 준왕 집단의 후예로 보이는 건마국, 나주 일대는 신미국을 중심으로 뭉친 연맹체인 침미다례의 세력권이었다. 그런데 목씨 자체는 그 행적으로 봐서 백제의 남방정벌에서 유력한 역할을 하며 세력을 키웠던 가문으로 추정되며 그래서 가야 관련 기록에 유독 많이 등장한다. 또한 남방의 마한 잔여세력 정복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정복자로서 감독을 위해 남방에 영지를 가지고 정착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6] 목지국 일대는 백제시대에 대목악군(大木岳郡)이었고, 고려시대에는 목주(木州)로 불렸으며, 조선시대부터는 목천(木川)이 되어 오늘날에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이라는 지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목지국에서 유래한 게 맞다면 현대까지도 끈질기게 목지국의 흔적이 살아남은 셈이다.[17] 살아남은 이 목씨 가문 및 그 후예인 현대 임씨 구성원 대부분은 천안 청당동 목지국 세력의 분가인 용원리 세력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 청당동 세력은 계속 저항을 멈추지 않아 비류왕 재위기 말기 혹은 근초고왕 즉위 초기 시점에서 처참할 정도로 공중분해당하고 마는데, 역사서에는 실리지 않았고 백제측 기록도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나, 대단히 좋지 못한 일이 벌어졌을 것은 짐작이 어렵지 않다.[18] 그러나 박진의 딸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일찍 사망했다.[19] <변사10여조>(邊事十餘條)를 올려 상소(上疏)했는데 임금께서 칭찬하고 장려하면서 비답(批答)을 내렸다. 그 중에서 창이 달린 배의 제도(戈船之制)는 비변사(備邊司)에서 각도(各道) 수사(水使)에게 영을 내려 그 모양에 따라 만들어 갑작스런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십 몇년이 되어 과연 임진변란(壬辰變亂)때 통제사 이순신 등이 이 제도로 많이 승리했다.[20] 上疏獻邊事十餘條下批嘉奬其中戈舡之制備邊司令各道水使依樣裝造以備倉卒數十餘年而果有壬辰之變統制使李舜臣等多以此制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