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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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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생애

1. 개요2. 유년~청년기 시절
2.1. 대학 입학 전까지2.2. 대학 시절2.3. 군 복무2.4. 사법시험
3. 인권 변호사 시절4. 제16대 대통령 선거5. 정치 활동6. 대통령 퇴임 이후

[clearfix]

1. 개요

2. 유년~청년기 시절

2.1. 대학 입학 전까지

주민 등록상으로 문재인은 1953년 1월 24일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아버지 문용형(文龍炯), 어머니 강한옥(姜漢玉)[1] 사이에서 둘째 및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재인의 아버지 문용형은 대대로 이북 함경남도 함흥군 흥남읍[2] 운성리 솔안마을 중 문조격이 세운 남평 문씨 집성촌#에서 살았고, 당시 명문이던 함흥농고를 졸업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흥남읍사무소에서 농업계장[3]으로 근무하였다. 해방 이후 북한 정권 밑에서 농업과장으로 일했으나 일제 문관 경력 때문에 북한 정권으로부터 지속적인 사상 검증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2월 24일 흥남 철수LST 온양호[4]를 타고 아무것도 없이 무일푼으로 월남하였고, 문재인은 피난민촌이 몰려있던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태어났다.

문재인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일제에 이어 소련 군정과 북한 치하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조선로동당에게 너무도 시달렸기 때문에 "공무원 생활은 절대 하지 않겠다."라면서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노무자로 일했다. 어머니는 거리에 나가 계란 행상으로 가계를 꾸렸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의식주 문제가 개선되자, 문재인의 부모님은 문재인을 초등학교에 보낼 겸 부산 영도구로 이사하고 문재인은 남항국민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문재인의 가족은 줄곧 부산에 거주하게 된다. 이 때문에 문재인이 거제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전쟁 피난이라는 상황에서 잠깐 살았던 곳이고 실질적으로 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로 보는 경향도 있다.[5][6]

부산에서 아버지 문용형은 처음에 양말을 떼다 판매상에게 공급하는 사업을 벌렸으나, 결국 사업에는 실패하고 빚만 졌다고 한다. 그래서 문재인이 어린 시절 어머니가 실질적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는데, 구호물자로 얻은 옷가지를 파는 좌판이나 연탄 배달 소매상 등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성당에서 전지 분유 가루를 나눠 줄 때 그것을 받아올 그릇이 없었다고 한다. 이 지독한 가난에 대해, 문재인은 훗날 "집에 자전거를 살 만한 형편이 아니어서 지금도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2012년 SBS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 제작진이 문재인에게 보조 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선물로 주었다.

국민학교 시절 학교에 매달 내야 하는 '월사금'[7]을 못 내서 담임이 집에 가서 받아오라고 하면 그냥 같이 못 낸 친구들과 바닷가에 가서 놀다가 학교 마칠 때 시간 맞춰서 교실로 되돌아갔다고 한다.[8] 동네 성당에서 나눠주는 전지분유를 배급받은 고마움에 어머니가 먼저 세례성사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문재인 본인도 부모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 영도구에 있는 천주교 부산교구 신선성당[9]에서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초등학교 5~6학년 때는 복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참고로, 문재인의 세례명티모테오[10]다.

1965년 부산 남항국민학교를 졸업했고, 당시 지역의 명문이었던 경남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 도서관에 가거나 책을 대출받아 읽는 일을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했다고 한다.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 당시 애독서는 삼국지사상계였는데, 특히 삼국지에서는 박종화, 김구용, 정비석 등의 삼국지 판본을 다 섭렵하면서 역사와 대의명분에 대한 중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존경하는 인물은 '대의명분의 사나이' 관우라고 했고, 유비가 10만 군중을 이끌던 에피소드를 들어 유비가 실은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11]
파일:문재인 학창시절.webp
문재인 전 대통령의 학창 시절

1968년 경남중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재단의 경남고등학교(25회)에 수석으로 진학했다.[12][13] 경남고는 당시 부산 최고의 명문고 중 하나였다.[14] 고교 입학 후 한동안 학내에서 '문과에 문재인, 이과에 승효상'이란 말이 있었을 정도로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가난한 가정 환경에 낙망해 술·담배에도 손을 대며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2학년 때는 같은 반 친구가 시험 중 답을 보여 달라고 해서 부탁을 들어줬는데, 하필 답을 적은 종이가 교실을 한바탕 돌게 되면서 보여준 문재인과 마지막에 본 학생 둘만 정학을 받았다. 3학년 때는 축구 시합 후 친구들과 학교 뒷산에서 술과 담배를 하다가 당직 교사에게 걸려서 유기 정학을 당하기도 했었다. 결국 이런 방황으로 인해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중·고교 시절 단짝 친구가 소아마비 때문에 다리가 불편했다고 한다. 항상 이 친구의 가방을 들고 등·하교를 하곤 했는데, 때문에 매일 지각을 했다고 한다. 소풍 때는 이 친구를 업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15] 훗날 이 친구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나, 집안 사정상 사법시험 공부를 그만두고 사업을 했다가 크게 실패했다. 그러자 문재인은 이 친구에게 고시원비, 새 책값, 용돈 등 모든 비용을 대주며 사법시험에 재도전할 것을 권했다. 그 친구는 2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인천지법 부장판사를 맡다 퇴직한 김정학 판사다. 더 자세한 기사

2.2. 대학 시절

대학 입시에 낙방한 후 재수를 했는데, 1971년 종로학원[16] 진입 시험에서 1등을 하면서 학원비를 면제받고 재수를 시작했지만, 재수 이후에도 1972년 입시에서 서울대학교에 낙방하고, 후기로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에 문과 수석을 차지하면서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보통 당시 후기 모집 대학 중 최고 명문대는 문과에 성균관대학교, 이과에 한양대학교가 꼽혔다. 보통 전기에 서울대나 연고대에 떨어지면 후기에 성균관대 법대, 한양대 공대 등을 지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17] 성대, 한양대 외에도 당시 후기대 중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가 경희대보다 확실히 입결이 높았었다. 그러나 문재인은 특이하게 경희대학교를 선택했다. 4년 장학금도 이유였겠지만 그보다도 설립자 조영식이 문재인의 아버지처럼 같은 실향민이라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파일:문재인 대학생 시절.jpg
문재인의 20대 시절. 훗날 아내가 되는 김정숙과 함께.

경희대에 입학하면서 같은 학교를 다니던, 훗날 아내가 되는 김정숙을 만났다. 학교 축제 파트너로 처음 만났는데, 김 여사가 알랭 들롱 닮은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는 친구 오빠 말을 듣고 혹해서 만나게 되었다고. 그런데 첫인상이 상당히 촌스러워서 김 여사가 실망했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오고 가다 만나면 인사하는 사이, 지금으로 치면 썸 타는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위를 이끌던 중 페퍼포그에서 발사한 응축된 최루 가스를 직격으로 맞아 기절했는데 이때 김 여사가 직접 간호해 주면서 사이가 깊어졌다. 쓰러져 있다가 눈을 떠보니 아내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고.

훗날 《문재인의 운명》에서, 대학 저학년 때 리영희베트남 전쟁 논문(미국을 비판하면서 월남의 패망을 예견했는데 예상이 맞았다는 내용)을 창비에서 읽고서 진실의 승리에 희열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세간에는 '문재인이 월남이 패망하는 모습을 보고 희열을 느꼈다'라고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

3학년 재학 시절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문재인은 유신 헌법 반대 시위를 하면서 사법 고시를 준비하던 법학과 동기들에게도 열심히 시위 동참을 호소했는데, 법대 동기였던 고조흥이 "우리는 너와 생각이 다르다"며 쫓아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치른 사시 1차 합격자는 고시반에서 공부 안 하고 민주화 운동을 했던 문재인 혼자뿐이었다는 반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경희대의 전설이 된다.[18] 훗날 고조흥은 문재인이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먼저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 등 법조계 경력을 쌓기 시작하면서 후에 한나라당 후보로 재보궐 선거에 당선되면서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의원이던 시절에, 공직 채용 시험 때 군 가산점제를 주는 병역법 개정안을 발의한 적이 있었다. [19]

2.3. 군 복무

경희대학교 4학년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20],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했다가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지만[21], 대학에서 제적당했다.[22] 이후 군에 입대했는데, 육군 제39보병사단 신병훈련소에서 신병 교육을 받은 뒤 특전병으로 차출되어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 제3특전대대 대대본부 작전과 교육병으로 복무하였다. 이때 사령관이 정병주 장군[23], 여단장이 전두환, 대대장이 장세동이었는데 훗날 일어나는 12.12 군사반란에서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이들 밑에서 일반 사병으로 복무했던 문재인의 미래를 돌이켜 보면 역사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파일:특전사 문재인.jpg

항간에서는 문재인이 대대본부 작전과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한 거니까 꿀을 빤 거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육군특수전사령부에선 장교, 부사관뿐만 아니라 특전병들 중 특전대대에 배치된 일부 인원은 여러 훈련들을 모두 똑같이 받았고, 특히 특전여단들을 계속 새로 창설하면서 전체 특전사 인원의 대폭 증가가 이루어졌던 1970년대 중반경부터는 특전병이 전투 인원으로 편제되던 시절도 있었다.[24] 문재인도 팀 소속은 아니었지만, 대대 본부에 근무하며 기본적인 훈련을 받았다. 특전사에서 주특기가 폭파였고, 심지어 수중 침투 훈련인 스쿠버 훈련까지 자원해서 받았다. 참고로, 현재 특전사에서 폭파 주특기는 오직 간부만 가능한 주특기다. 전투 지원 및 행정 업무만 하는 지금의 특전병도 특수전 훈련이 아닌 다른 훈련들(공수 훈련 등)은 받는다. 물론, 특전사의 주력인 특전사 간부[25]들보다는 훨씬 수월한 것은 맞다. 그런데, 문재인은 1970년대에 특전병으로 복무한 사람이라는 것이다.[26]

1976년 제1공수특전여단에서 고급 인명 구조 교육 수료, 1977년 대대 스쿠버 교육 이수[27], 자대 작전과 행정병 근무 시 48회의 강하 훈련 등의 훈련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함께 복무한 후임의 이야기에 따르면 강하 훈련을 배정하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먼저 뛰고 넣어야' 불만을 적게 들어서 강하 횟수가 많을 수밖에 없었으며, 강하를 즐겼던 문재인은 동료 행정병들 대신 뛰어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 횟수는 월계 공수휘장에 해당할 정도인데, 이는 복무 기간이 짧은 현재의 특전병들 사이에서는 매우 드문 기록이다.(출처)

파일:고급인명구조원.jpg
특전사 시절, 고급 인명 구조원 강습을 수료해 받은 수료증. 대한적십자사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했다.

군 복무 중에는 당시 특전사 사령관이었던 정병주 장군과 여단장이었던 전두환으로부터 2차례의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받기도 했다.

당시 문재인과 같은 부대에서 교육장교로 있었던 노창남 예비역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문재인이 이등병이었던 시절 폭파 과정 훈련에서 최우수자로 선정됐는데, 특전사장교, 부사관 등 직업 군인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이 성적 우수자로 선발되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일반 사병이, 그것도 가장 낮은 계급의 이등병이 성적 최우수자로 상을 받는 일은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군 생활을 모범적으로 잘했기 때문에, 전역할 때 간부들이 "군대에 말뚝을 박으라"면서 강하게 권유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28]

문재인이 특전사 복무 중이던 1976년 8월에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졌고, 이때 미루나무 제거 작전에 보복 작전 팀으로 문재인이 복무하던 제1공수특전여단 대원들이 투입되었다. 다만, 일부 나도는 소문과는 달리 문재인은 직접 보복 작전을 하던 '현장 팀'이 아니라, 부대에서 현장의 작전 진행 상황을 수집/보고/감독하던 '작전 상황 팀' 소속이었다.#(판문점의 보복 작전 현장에 직접 투입된 것은 특전사의 '장교'와 '부사관'들이었다.)

이러한 특전사 복무 경력과 일부 정치인들의 병역 비리 의혹이 대비되면서, 군 복무가 아킬레스건이 아니라 되려 메리트로 작용하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 되었다. 특히 2016년 10월 송민순외교부 장관 회고록 파문이 터지자, 일부 보수 세력들은 문재인을 향해 색깔론 공세를 펼쳤는데, 문재인은 이를 두고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들이 걸핏하면 종북 타령이냐?"라면서 국가 안보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보수 진영에서는 정작 군 복무를 면제받은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사실을 꼬집기도 했다.#

당시 그가 특전사 예하 제3대대에 배치받았을 때 '시위하다 온 애', '교도소에 있다 온 놈'이라는 전력 때문에 대대본부 예하의 각 부서에선 그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는 아직 '운동권'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러자, 대대 인사과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몰랐던 작전과 교육계한테 "똑똑한 놈이 새로 왔다"며 설득하여, 대대 본부 작전과에 문재인을 배치시켰다. 배치 받은 후에야 다른 장교들에게 문재인 신병이 '시위하다 온 애'라는 사실을 들은 교육장교 노창남 당시 중위는 다음 날 인사과장에게 항의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노창남 예비역 대령의 회고문[29]

문재인이 속해있던 제3특전대대 본부 작전과에서 같이 근무했던 노창남 예비역 대령은 2012년 18대 대선 당시에 문재인과 같이 군 복무 했던 사람들을 비롯해 문재인을 지지하는 특전사 출신 700여 명을 모아 '문재인과 특전사 전우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그리고 노 대령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새 당대표를 뽑는 2.8 전당 대회가 열렸을 때에도 문재인 지지를 호소하는 글을 새정치민주연합 대의원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군 시절 생활에 대한 증언들을 보면 장교, 부사관, 선후임 동기 모두 입을 모아 문재인은 한 번도 후임을 때린적이 없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게 운명인데 우리는 후임을 때리지 말자"고 동기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선임이 문재인을 빠따로 치고 "이제 네가 후임들을 때리라"고 가버렸는데[30], 문재인은 자기만 맞고 한 번도 후임을 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때려야 할 때면 소리만 크게 나도록 엎드려뻗쳐를 시킨 다음 군화 밑바닥을 빠따로 쳤다고 한다. 그 뒤 후임들에게는 구타 악습이 없어졌다고 한다.#1 #2

2.4. 사법시험

1978년에 전역하고 고향으로 되돌아와서, 진로 문제를 고민하던 중 아버지가 심장 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자신이 잘되는 모습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든 문재인은 이를 계기로 사법시험에 매달리기로 결심하고,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대흥사 암자로 가서 공부에 몰두했다.[31]

그다음 해 1979년 사법시험에 2번째로 1차 합격하였다. 단, 준비 소홀로 2차는 다음 해로 목표를 정했다. 그런데 그때 부마항쟁이 시작돼, 다음 해 1980년에는 학교와 복학 논의가 시작되면서 뜻하지 않게 복학생 대표가 되었다. 1980년 복학하면서 4월 학내 시위 와중에 사법시험 2차 시험을 치렀을 무렵,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24시 비상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발표하고 민주화 운동 전력이 있는 대학생 등 반정부 인사들이 '계엄 포고령'을 위반했다면서 마구잡이로 구속했다.

그래서 문재인도 5월 17일 저녁 강화도 예비 처가에 다녀오는 길에 잡혀 또 구속됐다.[32] 이런 사유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실제로 국가유공자 자격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 구속된 지 1달이 지나는 중 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2차 합격했다.[33] 보통은 1차 합격을 하면 2차 시험을 위해 총력을 다해 매달리는데, 문재인은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도 사법시험 공부까지 병행해서 합격한 것이다.

2차 합격 소식을 당시 여자친구였던 김정숙 여사가 직접 유치장으로 면회를 와서 알려줬다고 한다.[34] 그리고 대학 관계자들이 면회를 와서 합격 소식을 전하자, 구치소 직원들과 안기부 직원들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고 한다. 계속 반말을 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문재인을 보고 "영감님"[35]이라고 부르며, 유치장 밖으로는 못 나가니까 학교 관계자나 면회객을 유치장 안에 들어가게 해서 축하주를 마시게도 해줬다고 한다.

그해 경희대학교 출신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2명이라[36] 다급해진 대학 측은 총력을 기울여 구명 노력을 펼쳐서, 며칠 후 석방되었다.[37] 이후 3차 면접 직전에 안기부에서 그를 호텔로 불러 "지금도 생각이 그때와 같은가?" 라고 사실상의 전향 의사를 타진했지만[38] 합격 취소를 각오하고 "그때 나의 행동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훗날 썰전에서 이 3차 면접 때 "안기부로부터 전향 요구를 받았을 때,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그 손을 덥석 잡아버리자니 너무도 굴욕적으로 느껴져서 거부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호텔 밖으로 나와서 후회했다고 한다. 사실 사법시험 합격자가 귀한 경희대학교의 구명 노력과 당시 전두환 정권의 일시적인 유화책 실시라는 행운이 겹쳐 훗날 불합격이라는 불행은 결과적으로 면했지만, 당시로선 소신을 지키려다 몇 년간의 공부를 도로 아미타불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을 만든 셈이었던지라 후회하는 마음이 든 것도 인간적으로 이해가 갈 만한 부분이다. 다행히 그해에는 3차 면접에서 아무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다음 해부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3차에서 탈락했다고 한다.[39]

3. 인권 변호사 시절

사법연수원 12기 출신으로, 조영래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고승덕 변호사와 사법연수원 동기다.[40]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된 것도 이 시절. 성적은 수석이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차석으로 졸업해 대한민국 법무부장관상을 받았고, 판사를 희망하였으나 집시법 위반 전력이 있는 이유로 판사로 임용되지는 못했다.[41][42] 판사 임용이 좌절되고 거대 로펌의 제의도 있었지만[43], 문재인은 어머니가 계신 부산으로 낙향했다.

이때 연수원 동기인 박정규노무현 변호사를 소개해 주었고[44], 의기투합한 둘은 '변호사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45] 이후 노무현과 더불어 부산의 대표적인 재야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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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의 명함. 도로명주소부산광역시 서구 임시수도기념로 21-10 (부민동3가)이며 현재 이 자리에는 PC방과 노래방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부산지방법원, 부산지방검찰청 등의 이전으로 인해 인근에 있는 부산법조타운으로 이전한 상태.[46]

처음부터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사무소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고 만나다 보니 차츰 부울경 지역에서 대표적인 노동 및 인권 변호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그리고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약칭 부민협)이 설립되면서 부산 민주화 운동의 구심체가 마련되었고, 노무현 변호사와 문재인 변호사는 33인의 대표 발기인으로 들어가 부민협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후 3년 동안 300여 건 이상의 소송에서 70%대의 승소율을 자랑했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때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가 결성되었는데, 부산 국본의 상임집행위원장이 노무현 변호사였고 상임집행위원이 문재인이었다. 이 둘은 당시 박정희가 만들고 전두환이 계승한 통일주체국민회의하의 대통령 간선제를 국민 투표에 의하여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로 바꾸기 위한 민주화 운동을 했다.

6월 항쟁을 통해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개표 방송을 지켜보다가 노태우가 당선되는 것을 보고 스트레스를 받아 약 3주 정도 몸살을 앓고 나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샜다고 하며,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노무현과 함께 국회의원 공천 제안을 받게 되었다. 노무현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서 당선, 13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계에 입문하였지만, 문재인은 거절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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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재야에 남은 문재인은 꾸준히 젊은 변호사들을 영입하여 법률 사무소 이름을 '법무법인 부산'으로 바꾸고 대표 변호사를 지냈다.

부산 대표 인권 변호사였던 만큼 1988년 12월 10일 발행한 국민일보 1호에서 ‘인권 변호사 문재인 씨’로 소개되기도 했다. 유엔 세계 인권 선언 40주년에 창간한 국민일보가 한국 인권 운동 특집으로 계획된 인터뷰였다. 국민일보는 당시 문재인 변호사를 승소율 70%를 자랑하는 능력 있는 변호사이자, 민주 노조의 산파라고 소개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묻는 당시 인터뷰에서 "노동 현장의 인권 유린을 참을 수 없다"고 성토했다.*

최동원 선수의 부탁으로 선수협 고문변호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 당시 부산에서 본인이 다시 언급하기도. 문재인의 야구 사랑에 대해서 쓴 기사. 한겨레신문의 부산 지사 설립을 위해 변호사 신용 대출로 빌린 2억을 쾌척해 주었으며[47], 한겨레신문의 창간위원과 부산 지사장을 맡기도 했다. 이 돈은 지금까지도 받지 않고 있다. 또한 1989년 창립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1990년 창립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고문변호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 비디오 게임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젤다의 전설 영문판 대사를 아들에게 번역해 줬다.[48][49] 이후 제19대 국회 재임 기간인 2014년에는 G-STAR를 찾았고, 대통령 재임 기간인 2020년에도 어린이날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현실의 청와대에서 직접 만나지 못해서 랜선으로 만난 어린이들과 마인크래프트에서 샌드박스 네트워크가 만든 청와대 맵에 본인과 김정숙 여사 캐릭터를 등장시켰고[50] 정권 말기인 2022년 3월에는 김정주 넥슨 창업자를 애도하는 등 게임에 대한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1990년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의 변호를 맡은 적이 있으며, 2016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해당 사건을 다룰 때 출연해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사건의 여러 정황상 용의자들이 무죄라고 확신했지만[51], 누명을 벗겨주는 데 실패했다"며 본인의 35년 변호사 인생에서 가장 안타깝고 한이 남은 사건이라고 회고했다. 참고로 이 시기는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 많은 범죄가 일소되었지만, 그만큼 대한민국 경찰청, 대한민국 검찰청 등 우리나라 사정 기관들이 실적 올리기에 눈이 돌아가 있던 시기라 애꿎은 사람들이 사소한 트집 하나 때문에 범죄자로 몰려 수없이 체포되었고, 고문 수사 및 진술 강요 역시 만연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멀리 갈 것 없이 화성 8차 사건이 있지 않는가.

1992년 12월 포항제철에서 노동 운동을 하다 해고된 노동자 이건기는 당시 문재인 변호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건기의 변호를 맡기로 한 문재인 변호팀은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경주지법에서 열린 1심부터 대법원에서 열린 3심까지 모두 승소를 이끌어냈고, 덕분에 이건기는 불가능해 보였던 복직에 성공하게 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이건기는 문재인 변호사가 훗날 정치인이 돼, 2012년 18대 대선에 출마했을 때 새누리당의 초강세 지역이었던 경상북도를 누비며 문 후보의 선거를 도왔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통령 후보 경선 기간 중이었던 2017년 3월 28일에는 이 복직 일화를 본인 페이스북에 공개하며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페이스북 원문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1990년에 특별검사로 임명되어 활동한 적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소유지담당변호사'로 1988년 도입된 제도로 특별검사와 유사한 성격으로, 언론 등에서는 특별검사로 불린다. 고소고발인의 재정신청 사건에서 못 미더운 검사를 대신하는 역할로, 법원이 임명한다.[52] 이 사건은 1987년에 부산항에서 건강 매트리스를 밀수하다가 적발된 박명률이란 인물이 당시 세관원이었던 임흥우와 양현배 등 3명에게 붙잡혀 물고문을 당해 자백했다고 재정신청을 낸 이른바 부산 세관의 고문세관원 재정신청사건으로 문재인은 이 사건에서 박윤성 변호사와 함께 공소유지 담당 변호사로 활동했다. 한 사건에 2명이 지정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였다고.#

1996년에는 페스카마호 선상 살인 사건의 주범들을 변호했었다. 2012년 18대 대선 당시 이것으로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문재인 후보는 본인이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것을 흑역사로 여기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사건 항목에 서술된 주석의 내용을 빌리자면, 변호사 윤리 규칙 제19조 제1항엔 "변호사는 의뢰인이나 사건의 내용이 사회 일반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수임을 거절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즉,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 하더라도 형사 절차에서 최소한의 절차적 기본권은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 법치주의의 정신이며, 이를 조력하는 것은 변호사의 당연한 사명이라는 것이다. 특히 인권 변호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애초에 이런 사건의 변호는 흔히 생각하듯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법에 따라 적절한 선에서 처벌을 받도록 조율하는 것이라 논란거리가 될 만한 일이 아니라는 반론이 존재한다.

2000년에는 미쯔비시 중공업을 대상으로 군함도 강제 징용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서 미쯔비시를 패소시킨 적이 있다. 1심과 2심에서는 기각이 되었지만, 대법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부산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고, 부산고등법원에서는 원고들에게 각각 1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미쯔비시 중공업은 이에 불복하고 상고하여 현재 대법원에서 계류 중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일본제철 강제징용 소송 참고.

2002년, 가족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15년을 복역한 신귀영 씨의 재심 변호사를 맡았다. 또한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판정을 받았던 <한국 사회의 이해> 의 이적표현물 취소를 위한 변호인단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

이후 부산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부산 지부와 경남 지부장을 역임하며 꾸준히 시민 사회 활동을 하였다.

더불어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주자로 떠오른 2016년에는 대선 준비를 위한 비용(사무실 임대료 등)을 마련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법무법인 부산'의 지분(22.56%)을 처분(8,370만 원)하였다고 한다.

4.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2년 4월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 노무현은 문재인에게 그해 6월 열리는 제3회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으로 출마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문재인은 '나는 참모용'이라며 거절했다. 노무현의 정치 입문 권유를 거절하던 문재인은 그 후 변호사 일에만 열중하다 2002년 10월 노무현의 대선 캠프 '국민참여운동본부' 부산 지역 본부 선대위원장을 맡아 노무현의 당선에 기여했다. 그 유명한 '문재인을 친구로 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는 노무현의 발언이 여기서 나온 것.
저는 제가 아주 존경하는 나이는 저보다 적은 아주 믿음직한 친구 문재인이를 제 친구로 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대통령감이 됩니다. 나는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습니다.#
2002년 당시 노무현 대선 후보

부산 지역 본부장을 맡으며 희망저금통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2월부터는 추미애 당시 민주당 선대위원장과 함께 전국 유세에 동행했다. 대선 당일에는 부산 지역 캠프에서 선거 상황을 지휘했다.

5. 정치 활동

정치인의 정의가 정무직공무원정당인이므로, 특별한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무직공무원인 민정수석비서관 시절부터 정치 활동으로 분류한다.

5.1. 참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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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내정 문재인 변호사[53]

청와대에서 일하던 시기에는 부정 청탁을 받지 않기 위해 친구를 만나지 않았고, 아내에게도 백화점 출입을 금했다고 한다. 또한 "고위 공직자 부인들 사이의 교류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고. 그것뿐만 아니라 아예 동창회에 얼굴을 비추지도 않았고, 고등학교 동창인 고위 공직자가 문재인의 방에 들렀다가 얼굴도 못 본 채 쫓겨난 적도 있으며, 또한 청와대 출입 기자단과 단 한 차례의 식사나 환담 자리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 SBS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는,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주택청약저축을 들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 문재인이 "주택청약저축은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데, 우리 가족은 집이 있으니 해당되지 않는다. 해약하라."라고 했다는 일화가 소개되었다. 여담으로, 이때 김정숙 여사는 면박을 듣고 너무 화가 나서 속으로 "니가 나중에 얼마나 잘되나 보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7년 영부인이 되었다.

5.1.1.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1기

2003. - 2004.02.
2002년 대선이 끝난 뒤 문재인은 다시 변호사 업무에 복귀하려 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으로 2003년 2월부터 2004년 2월까지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제안했을 때 문재인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설득했다고 한다. 이에 문재인은 "공직을 맡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이다.", "나보고 정치하라고 하지 말라"라는 2가지 조건을 내걸고 제안을 수락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후 탄핵으로 인해 민정 수석을 한 번 더 하였으며,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다. 노 대통령 사망 이후에는 정치에 입문하여 국회의원, 당대표를 거쳐 19대 대통령이 되었다. 2가지 조건 다 어겼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에서 육사 출신 이학봉, 김용갑과 사정수석비서관 허삼수 이후 첫 비검사 출신 민정수석이었다. 민정수석으로 지내면서 국정원, 검찰 개혁에 꽤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청와대 직원들에게는 늘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업무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녹내장과 고혈압으로 인한 건강 악화, 그리고 열린우리당의 총선 출마 압력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공직 생활에 회의를 느꼈고[54], 이에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난다.[55]

5.1.2. 휴식기

그렇게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네팔에서 트레킹을 하던 중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영자 신문[56]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 통과 소식을 알게 된다. 문재인은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을 꾸려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 자격으로 탄핵 사건에 임한다. 두 달간의 공방 끝에 결국 탄핵 소추안은 기각되었다.

5.1.3.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

2004.05. - 2005.01.
탄핵 정국이 끝나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업무에 복귀한 직후, 문재인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어 청와대에 복귀하게 된다. 그 후 다시 민정수석을 거치면서 왕수석으로 불렸던 적이 있으며, 참여정부 말기에는 대통령비서실장을 맡게 되면서[57] 참여정부 시절 대부분을 청와대에서 보내게 된다.[58] 수석비서관으로 활동하다가 천정배 법무부장관의 후임으로 갈 뻔했으나, 여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5.1.4.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2기

2005.01. - 2006.05.
2006년 부산 지역 기자들과 만나 "대통령도 부산 출신인데 부산 시민들이 왜 (참여정부를) 부산 정권으로 안 받아들이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한 지역에서 한 정당이 지방선거를 독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열린우리당새천년민주당의 통합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대통령의 의지"라고 한 발언에 대해 한나라당 대변인은 "지역감정 조장 발언"이라면서 "선거법 위반 여부를 조사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은 노무현 정부가 국민과 호남인을 대상으로 사기극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민정수석으로 일하던 시절, 당시 참여정부 실세였던 이해찬 국무총리가 골프로 인해 구설수에 휘말리자 어떻게 조치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해임하라고 촉구하기도 했으며, 이해찬 총리의 후임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민정수석으로 유임됐다. 문희상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매제가 경찰청장 후보에 오르자 '대통령 비서실장의 매제가 경찰청장이 되면 국민들이 어찌 납득하겠냐'며 반대했다.[59] * 그리고 고위 공직자 후보 검증을 담당하는 민정수석으로 일하면서 총 35명의 검증을 맡았는데 이 중 단 1명만 낙마했다. 청문보고서가 채택이 불발되거나 부적격 의견이 포함된 인사도 고작 4명.*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이 소개한 일화에 따르면, 사학법 문제로 교육위 의원, 교육부 장관, 청와대 교육수석이 청와대에 모여 '당정청 회의'를 열었는데 교육부 장관이 "나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사표를 내겠다"며 강수를 두었다. 그러자 당시 회의의 일원이었던 문재인이 회의 내내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럼 관두시죠"라며 일침을 가했다고 한다. 국가 정책을 조율하는 데 자신의 자리를 압박 수단으로 사용할 거라면 관두라는 뜻이었다고.

5.1.5. 대통령비서실장

2007.03. - 2008.02.
2007년 일본 정부우토로 마을[60]의 도시화, 개발 & 정비 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마을을 철거하려고 했을 때, 당시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은 그 소식을 접하고 정부 예산 30억 원을 우토로 마을에 지원하도록 도와 마을 부지 6,000평 중 2,000평을 매입할 수 있게 해서 우토로 마을 주민들이 거주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12년 우토로 마을 주민회는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당시 참여정부의 지원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문재인 측에게도 감사패를 전달했다.#

문재인 전 대표와 절친한 관계로 알려진 노영민 전 의원은 충청북도의 지역 언론인 '충북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참여정부 시절 전체 국정 현안 중의 95%는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선에서 처리됐다고 주장했다. 노 전 의원의 발언에 따르면, 정부 부처끼리 의견 조율이 끝내 안 돼 노무현 대통령에게까지 올라간 국정 현안은 5% 정도도 안 되었고, 나머지 95%는 모두 문재인 비서실장 선에서 매듭이 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문재인 전 대표가 차기 대권을 잡는다면, 국정 현안을 파악하기 위해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5.2. 노무현의 죽음과 정계 입문

2008년 참여정부를 마치고 경상남도 양산시로 들어가 칩거하였다. 양산에서는 농사를 지으며 김정숙 여사와 어느 정도 행복한 생활을 했다고 회고했다. 가끔 노 전 대통령이 거주하던 봉하마을에 찾아가 농사일을 돕거나 담소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러다 2009년에 박연차 게이트 당시에 뇌물수수혐의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을 당시 담당 변호인이었으며 검찰청 수사에도 동행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결국 서거하였고, 문재인은 국민장에서 상주를 맡았다. 국민장에서 많은 시민들과 정치인, 권양숙 여사를 비롯한 유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이 시기부터 정치 참여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입관식은 가지 않았다고 하는데, 마음이 착잡해서 차마 들어가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된 후에 알려진 사실인데 정봉주가 말하길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탈진하기 직전까지 통곡을 하여 죽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아내가 119를 불렀다고 한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정치판으로 나와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61] 그래서 "그럼 노무현에 대한 책이라도 한 권 내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쓴 책이 <문재인의 운명>이었다. 이 책이 대박이 나고 "독자를 위해서 서울에서 북 콘서트 한번 열어야 하지 않겠냐"고 1회성으로 시작한 북 콘서트가 또 다시 대박이 나고, 결국 전국순회콘서트로 이어지고 결국 그를 정치로 나오게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에 가장 크게 관여한 사람이, 바로 이해찬 전 국회의원. 북콘서트를 기획하고 진행까지 맡은 사람이 탁현민 성공회대 교수였다.

2010년~2011년까지 한명숙 전 총리에 뒤를 이어 2대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며 노무현 시민학교 강의와 봉하마을 오리 쌀 사업 등 생전 노 전 대통령이 주로 했던 사업들을 주로 하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이 시기 노무현시민학교 강의에 자주 나오기도 했다.

5.3. 제19대 국회의원

그렇게 정치와는 거리를 두다가 상술했듯 자서전 <운명>을 출판하고, 그게 대박이 나면서 북콘서트를 시작하면서 문재인은 야권의 유력 후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2011년 9월 문성근, 박원순 등과 함께 정치세력인 혁신과 통합을 창당하고, 2011년 12월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하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2012년 2월 민주통합당이 출범한 뒤에는 상임고문을 맡아 선거유세를 시작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3당 합당 이후 보수 정당이 항상 강세를 보여왔던 부산광역시사상구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55%의 득표율을 얻어 새누리당손수조 후보[62](43.76%)를 제치고 당선되었다.[63] 3당 합당 이후 사상구에서 당선된 첫 번째 민주당 후보이며, 19대 총선 당시 영남권 전체에서 단 3명뿐인 민주통합당 소속 당선인이었기도 하다.[64]

2012년 4월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사임하고 상임이사로 직책을 바꿨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도 의원직은 사퇴하지 않았고, 선거 패배 이후에는 의정 활동에만 전념했다.

2014년 여름 즈음에 부산에 수해가 발생했을 때,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사상구를 찾아오지 않았다고 보수 진영이 비판한 적이 있다. 문재인 당시 의원은 이때 '유민 아빠' 김영오의 단식 투쟁을 말리기 위해 본인도 단식 중이었는데, 이것을 두고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는 중요하고 자기 지역구는 안 중요하냐는 소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허나 이에 대해서는, 당시 사상구는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 규모가 미미한 편이었는데[65], 이는 사상구에서 하천 정비 사업 등 수해 방지 대책을 잘 세워놓은 덕분이었으며[66] 문재인 의원은 사상구에서 진행 중인 사업의 중요성을 일일이 설명하고 예산을 삭감 없이 잘 지켜내어 힘을 보탰다는 반론이 있다.[67]

5.4. 제18대 대통령 선거

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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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새누리당 박근혜 당선
2 민주통합당 문재인
3 통합진보당 이정희 사퇴*
4 무소속 박종선
5 김소연
6 강지원
7 김순자
*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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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먼저다
사람이 먼저인 나라
새 시대를 여는 첫 대통령
국민후보[68]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의 슬로건

2012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3주기에서 출마 시사를 했고, 6월 17일 서대문 역사공원에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16일, 전국 13개 시*도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정세균, 손학규, 김두관 후보를 상대로 13연승 전승을 거두고 대선 후보 경선에서 56%의 득표율을 얻어 민주통합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은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후보 경선 문서에서 다루고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대선 후보 선출 이후, 용광로 선대위를 구성해 계파를 초월한 선거 캠프를 꾸릴 것을 천명했다. 캠프 명칭은 <담쟁이 캠프>. 도종환 시인의 시 <담쟁이>에서 따온 것이다.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다른 후보들과 당원, 대의원을 포괄해, 시민 사회와도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캠프를 꾸린 셈. 하지만 현재 더불어민주당에서 비주류로 분류되는 의원들이 힘을 보탰다는 증언은 거의 없었고, 그때 민주통합당 의원들 중에서 사실상 수수방관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거꾸로 힘을 보태려던 의원들도 유세차 위에 올라가지 못하는 등 이미 친문 위주의 선거가 치러졌다는 증언도 있다. 경선에서 패배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선거 캐치프레이즈 <저녁이 있는 삶>을 문재인에게 양보하기도 했지만, 선거에 쓰이지는 않았다.

대선 후보 정책으로 '순환 출자 금지' 및 '출차총액제한제 재도입', '소상공인 특별법 제정' 등의 재벌 개혁, 경제민주화를 골자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대검 중수부 폐지' 등의 검찰 개혁, '노인 장기 요양, 사회서비스 제도 충당', '보편적 반값등록금', '소득과 무관한 보편 의료비지원' 등의 복지 정책을 내세웠다. 또한 애묘인답게 정책공약집에는 심지어 반려 동물 권리를 위한 법안까지 있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안철수와 함께 야권 후보 단일화를 놓고 지난한 협상을 벌였지만, 단일화 방식이 계속 합의되지 않아 혹자에게는 1987년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며 불안감을 조성하다가, 공개 TV 토론회 이후 2012년 11월 23일, 안철수가 예비 후보직에서 물러남으로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민주진영 단일후보로 출마했다. 이 외에도 당시에 지지한 사람들은 아래와 같았다. 출처박근혜, 이정희와 3번의 대선 후보 TV 토론회를 벌였다. 1, 2회의 토론회에서는 이정희의 박근혜 맹공을 관전만 하며 존재감이 없다가[70], 이정희 후보 사퇴 후 3차 토론회에서는 박근혜 후보와 1:1 토론을 벌였다.

선거 결과 새누리당박근혜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했다. 이는 당시 역대 최다 득표 낙선(14,692,632표, 48.02%) 기록이다.[71]

작곡가 김형석이 캠페인 송 사람이 웃는다로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문 후보의 정책 공약 '5개의 문, 단 하나의 문'에 감동 받아서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선 캠페인 송으로는 보기 힘든 고퀄을 자랑하나,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떠들썩한 유세차량에서 시끄럽게 나오는 캠페인 송에 비해 임팩트는 약했던 편. 이후 김형석은 2015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을 공개지지했던 신해철이 자신의 대표곡인 <그대에게>를 문재인 캠프에 캠페인 송으로 편곡까지 해서 음원을 캠프에 제공했다. 부제는 <그대에게 : Reboot The Nation (ver.1.0)>.

2012 런던 올림픽과 대선을 앞두고 있었을 때, 직접 유도복까지 입으면서 유도 국가대표 선수단을 만나서 격려한 적이 있었다. 연합뉴스

대선 패배 이후 "대권 재도전은 없다" 라며 패배를 인정했고, 23일 선대위 캠프를 해단시키고 2013년 초까지 칩거했다.

5.4.1. 관련 문서

5.5. 잠행 (2013-2014년)

이 시기 문재인은 대선 패배의 책임, 비노 세력의 등장으로 당 내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으로 인해 책임론은 점점 줄어들었으나 딱히 의견을 내지는 않다가, 6월 4일 엄정한 수사 촉구 성명, 10월 23일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지난 대선은 불공정했다. 미리 알았든 몰랐든 박근혜 대통령은 그 수혜자"라는 성명을 냈다(#기사). 그 외에는 의정 활동에만 전념하며 정치 생활을 하다가 2013년 11월 6일 남북정상회담 NLL 관련 기록 초본 삭제 관련하여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았다. 검찰청에 출두한 문재인은 "잡으라는 도둑은 안 잡고 신고한 사람을 처벌하는 꼴" 이라며 검찰 수사를 비판했고, "참여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은 NLL을 확실히 지켰다" 라고 밝히며 NLL에 관련된 새누리당의 주장은 사실이 아님을 확인시켰다.

2014년 3월 민주당안철수새정치연합이 합당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이 출범하였는데, 당 대표는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 체제로 가게 되었고, 문재인과 친노는 당내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한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이틀 후 팽목항을 찾았으며, 7월부터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던 유가족 유민아빠 김영오를 응원하기 위해 함께 단식투쟁을 벌인다.[72] 이 시기 면도를 하지 못해 수염이 많이 길어진 채로 천막에 앉아 있는 문재인의 모습은 지금도 회자된다. 때문에 돌려까는 영상이 나왔다.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이때 박근혜정부는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하여 그의 단식에 대해 '국민적 비난'이 가도록 지시, 비난 보도와 곡필을 강요했다고 한다.그 와중에 28초에 내로남불을 언급하는 차주인-'지가 단식하고 자빠졌네'

파일:문재인 세월호 단식2.jpg[73]

2014년 8월에 대구의 한 취객이 문재인 당시 의원을 죽이러 간다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가 검거되는 일이 있었다.# 문재인 의원이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유가족들을 위해선 그렇게 열심히 뛰면서 정작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을 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사실 문재인 의원은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했을 때 유족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다만 이를 알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1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그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던 유족 박성찬이 문 의원의 경상남도 양산시 자택을 방문해 문 의원을 만나고 SNS에 남긴 글이 공개되면서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2014년 10월에는 눈가가 퉁퉁 부은 모습으로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장에 출석해 잠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보톡스 및 성형 시술의 부작용이 아니냐는 둥 별의별 소리가 나왔었으나, 고향에서 제초 작업을 하다 벌레에 쏘인 것이 악화되어 저렇게 됐다고. 다만 그와는 별개로 문재인의 인상이 달라지긴 했다. 2012년 대선 포스터와 2017년의 대선 포스터를 비교해도 5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꽤 차이가 느껴질 정도.

2014년 11월 7.30 재보궐선거의 참패로 인해 공동대표 김한길, 안철수가 사퇴하고 비대위 체제로 운영되던 새정치민주연합의 제2대 당대표 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5.6.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대표

5.6.1. 2015년

문재인/2015년 참고.

5.6.2. 2016년

문재인/2016년 참고.

5.7. 잠행 (2016-2017년)

5.7.1. 2017년

문재인/2017년 참고.

5.8. 제19대 대통령 선거

파일:문재인19대대선벽보.jpg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의 슬로건
"문재인의 19대 대선 당선은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인 복권이 이루어 진 것."
썰전 19대 대선 특집 중 문재인 당선에 대한 유시민의 평가

2017년 5월 9일 박근혜의 파면으로 일찍 치러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41.1%[7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위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역대 최다 표차[75]로 여유롭게 따돌렸다.

5.8.1. 관련 문서

5.9. 문재인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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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대통령의 궐위로 인한 선거를 치른 탓에, 대한민국 제6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집권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말하는 "제3기 민주정부", "더불어민주당 정부"의 문재인 정부다.

6. 대통령 퇴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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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9년 10월 29일 오후에 사망했다. 향년 92세.[2] 북한에서는 '함경남도 함흥시 흥남구역'의 일부로 관리하고 있다.[3] 일제 직위는 계장이 없으며 말단->주임->과장 순서라는 주장이 있으나 네이버 신문 라이브러리에 '係長'이라고만 검색해도 공무원인 계장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1935년 6월 18일 동아일보의 경성부직제를 변경한다는 기사로 각 계장을 과장으로 승격하는 데 적지 않은 인건비 예산이 소요될 것을 우려하는 기사 등[4] 미국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 관련 행사에 자신의 어머니도 이 배에 탔다고 말했으나, 정작 어머니는 자신이 LST를 탔고 흥남이 폭파된 것을 배에서 봤으며 다음 날이 크리스마스라 군인들이 사탕을 나눠 줬다고 증언했으니 온양호가 맞다. 메리디스 빅토리는 민간선이라 군인들이 없었으며 23일 날 철수함.[5] 문재인 본인은 부산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자란 데다 대학교는 서울에서 다닌 후 인권 변호사 시절부터 참여정부의 청와대 참모가 되기 전까지는 다시 부산에서 살았다. 그리고 제19대 국회의원 재임 당시에는 부산광역시 사상구 엄궁동에 자택을 둔 적이 있고 현재도 부산 인근인 경상남도 양산시에 사저가 있다. 즉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기간이 생애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다 2022년 퇴임 후에는 양산 사저로 돌아가서 살겠다는 마음을 굳힌 상태다. 반면 거제 출신이란 정체성은 일단 본인은 거의 나타내지 않고 있다.[6] 문재인의 모친도 2019년 사망 전까지 쭉 부산에 거주했다.[7] 옛날에 스승에게 감사의 뜻으로 제자들이 자진해서 다달이 바치던 돈을 의미했으나, 의미가 변질되어 반강제적으로 매달 내는 수업료가 되었다. 당시에는 법적으로 초등 교육의 무상화가 명문화되었지만 실제로는 거의 일지켜졌다. 물론 현재는 사라진 지 오래다.[8] 옛날에는 흔한 풍경이었다. 검정 고무신에도 기영가족이 월사금을 못 내서 학교에서 혼나거나 수업을 땡땡이치는 풍경이 나오니...[9] 훗날 문재인은 경희대학교 재학 시절에 만난 여자친구 김정숙과 이 성당에서 결혼식(혼인성사)을 치르게 된다.[10] 사도 바오로의 제자. 티모테오 성인의 축일이 1월 26일인데, 마침 이 축일은 문재인의 생일과 비슷한 시기에 있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세례명이 정해졌을 수도 있다. 보통 세례명을 정할 때는 부모나 세례 받는 본인이 세례명을 정할 수도 있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생일과 비슷한 시기에 축일이 걸려 있는 세례명을 고르는 경우가 꽤 있다.[11] 출처: 문재인 대담집 <운명에서 희망으로>#1 #2[12] 문재인, 서병수, 박맹우, 박종웅, 승효상, 송정규, 최철국, 김정태(1952), 진익철, 배기동 모두 경남고 25회 졸업생이다.[13] 여담으로 2012년 대선 때 NLL 관련 발언 등으로 인해 정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자유한국당김무성 의원은 문재인과 경남중학교 1년 선후배 사이인데, 두 사람은 각각 새정치민주연합새누리당의 대표이던 시절에 재경 지역 경남중고 합동 동문회에 참석하여 옆자리에 나란히 앉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사적으로는 친한 50년 지기 사이라고 한다. 정치인들 초대를 꽤 자제했던 김무성 딸의 결혼식에 문재인이 오자, 놀랍게도 김무성이 문재인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어, 문재인이 왔나? 고맙다."라고 환영했다는 것은 꽤 유명한 일화다. 당시 김무성의 주변 사람들도 꽤 놀랐다고 한다. 물론, 문재인은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서 순수하게 신부의 아버지의 지인으로서 간 것이었다.[76][14] 이 학교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전까지 부산고등학교와 함께 부산 양대 최고 명문고로 꼽혔다.[15] 문재인과 친구가 없어 다들 기다렸더니, 문재인이 그 친구를 업고 오고 있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은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업고 왔다고 한다.[16] 당시에 종로학원이 좋은 학원이기는 했지만 아직 초창기여서 전성기인 1990년대 때의 종로학원과는 양과 질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당시에는 양영학원이 최고의 명문 재수 학원으로 꼽혔다. 다만 양영학원 대신 장학금을 노리고 종로학원에 진학했을 수 있다. 다만 종로학원이 한창 잘나가던 시절인 1980~90년대 이 학원을 다닌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종로학원에는 장학금이 없었다고 한다. 서울대 수석을 해도 학원비 면제 등의 혜택은 없었다고.[17] 유명 법조인 혹은 법조인 출신 중 성대 출신이 많이 보이는 이유다. 대표적으로 황교안이 있다.[18] 지금의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이 법학과이던 시절부터 내려오던 3대 전설 중 하나라고 한다.[19] 2007년 7월 1일에 군 가산점제에 대해서 KBS 생방송 심야 토론을 나간 적이 있었는데, 정작 고조흥은 크게 한마디 못 하고 인지도가 공기였던 반면에, 오히려 문재인의 후배였던 전원책이 선전했다. 전원책은 이날 여러 직설 화법을 구사했는데, 이게 바로 전거성 어록의 시초이기도 하다.[20] 당시 총학생회장은 한나라당 부총재를 지냈던 강삼재 전 의원이었다. 집회 당일 경찰의 불심 검문을 따돌리고 학교에 늦게 도착해 학생들을 모아놓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게 되자, 선언문을 작성하여 내용을 가장 잘 알고 있던 문재인이 총대를 맨 것이다.[21] 참고로 이 판사는 시국 사건을 집행유예로 풀어줬다는 이유로, 얼마 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었다고 한다.[22] 후술되어 있지만, 재밌게도 대표적 보수 논객인 전원책 변호사 역시 문재인 대통령과 경희대 법대 동문이라는 사실이 썰전에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보다 무려 3년 후배라고. 전원책은 "문재인을 그 시절에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23] 항목에 좀 더 자세히 기술돼 있는데,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12.12 군사반란장태완 장군과 더불어 맞서서 같이 싸웠던 몇 안 되는 강직한 장군이었다.[24] 당시 병 복무 기간은 3년으로 매우 길어서 실제 작전 팀에 편제해도 별문제가 없었기 때문. 특전부사관들의 의무 복무 기간은 4년이다.[25] 특전장교 및 특전부사관[26] 당시에 장교나 부사관으로 군 복무를 한 사람들에게 군 복무 한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의 군 복무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간부건 병사건 훈련 똑같이 받고 지내서 간부들과 병사들 간의 간극, 다시 말해, 우리의 주적은 간부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 시기에 대학생은 절반이 군 면제, 나머지 절반은 방위, 나머지는 군대였던 1970년대였고, 군기가 엄청 빡셌던 건 말할 것도 없다. 뭣보다 유신 시대였던 지라, 대통령을 비판하기라도 하는 순간 예비군이라도 집단 폭행을 당하는 게 당연지사로 여겨지던 시대에서 꿀을 빨았다는 단어 자체가 애초에 말이 안 된다. 선진 병영이고 뭐고 없었던 시절이다.[27] 참고로 특전사의 스쿠버 교육은 특수전사령부에서 직접 시행하는 사령부 해척조 교육과, 대대 해상 훈련 기간에 각 특전대대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축약형 교육인 대대 해척조 교육이 있는데 문재인은 후자의 교육을 받은 것. 아무튼 문재인은 병인데도 자원해서 교육받았다.[28] 당시 쌍팔년도 군대 시절에는 대학 진학률도 높지 않았고 군 생활도 힘들었기 때문에, 군 생활을 잘하는 병사에게 간부들이 군입대를 권유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현재 상사, 원사들 중에는 군 복무 중에 한번 사고 쳤다가 대대장이 "영창 갈래? 말뚝 박을래?" 해서 말뚝 박은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고 한다.[29] 이를 두고 사람들은 애국심이 없으면 이런 식으로 시위를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애국심이 있기 때문에 군 복무 당시에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이고.[30] 일명 줄빠따[31] 송영길 의원 말에 따르면 대흥사로 들어갔을 때, 주민 등록상 주소를 부산광역시에서 대흥사가 있는 해남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사법고시 와중에도 예비군훈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였다고.#[32] 법대생답게 사복경찰들에게 "영장을 가져오라"고 했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울 때라 경찰들이 "영장은 무슨 영장? 계엄령 떨어졌어!"하고 잡아갔다고. 그리고 바로 그다음 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다.[33] 3차는 면접이였는데 '별일' 없으면 합격하는 요식 행위였다. 단, 문재인의 경우가 그 '별일'에 해당되는 케이스였다.[34] 문재인은 막판 2달은 시위하느라 아예 공부를 못 했기 때문에 떨어졌을 거라 포기하고 있었지만, 김정숙이 혹시나 해서 합격자 벽보를 보러 갔다가 이름을 발견했다.[35] 검사에게 쓰던 호칭. 다만 정중한 호칭은 아니었다. 대우는 해 줘야 되는데, 아니꼬울 때 부르는 호칭.물론 그 전까지 일과 법대생에 불과했다면 충분히 존칭이라고 불리울 수는 있다. 사법시험이 만만한 것도 아니고.[36] 80년까지는 사시 합격 인원이 100명 선이었다. 참고로 그 전에는 더 적었다. 합격 인원이 70명밖에 안 되던 시절도 있었으며, 노무현이 바로 이 시기에 합격한 사람이다. 합격자 중 유일한 고졸이기도 했다.[37] 경희대학교 대학원장이 육사 1기 출신 김점곤 교수였다. 6.25 전쟁평양시에 제일 먼저 진입한 연대장으로 기록돼 있는 인물이다. 그가 중대장일 때 육사 2기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점곤 중대장 밑에서 소대장을 했다고 한다. 그가 계엄사 쪽으로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한다. 기소 전이라 가능했던 일이었다.[38] 운동권을 하다가 사법시험 합격 후 출세를 위해 군사 독재 정권 편으로 전향을 한 법조인들이 좀 있다. 5공 치하에서 고문 의혹을 받고 있는 정형근 전 의원도 한때는 서울대학교 학생회장이었고, 시위를 여러 차례 주동했다가 사시 합격 이후 공안검사로 변신했으며, 박근혜 탄핵 당시 박근혜 측에 선 이경재(법조인) 변호사도 마찬가지 테크를 타서 공안검사를 했다.[39] 전두환 집권기 내내 그랬던 건 아니고 1981~82년 3차 시험 당시만 해당되고 그 이후에는 예전처럼 시국 관련자여도 합격시켜 주긴 했다. 자세한 건 사법시험 면접 탈락 사건 참고.[40] 유독 이 기수에 야권 성향 유명인들이 많은 것은, 12기부터 정치범 전력이 있는 사법고시 합격자들에 대한 사법연수원 입학 규제가 풀렸기 때문이다. 이때는 전두환 정권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으로 민주화 세력이 한풀 꺾인 줄 알고, 여러 가지 유화책을 펴던 때였다. 그리하여 교복 자율화, 통행금지 해제, 이념 서적 판매 금지 해제 등의 자유화 조치가 잠깐 떨어졌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에서 소위 운동권 합격자를 받아들였다. 문재인을 비롯한 여러 재야 법조인은 혜택을 본 셈이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 세력의 투쟁이 커지자, 전두환 정권은 다시 폭압적으로 정책을 펼친다.[41] 문재인을 제친 12기 수석은 김용덕 前 대법관이다.[42] 문재인과 연수원 12기 동기였던 박시환 前 대법관은 이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때 문재인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대리인단의 일원을 맡았고 탄핵 기각 이후 대법관이 됐다. 박시환 전 대법관은 진보 성향의 판사로서 대법원장의 대법관 인사로 인한 사법 파동의 주역이기도 하다. 대법관으로 재직 시에 김영란, 김지형, 전수안, 이홍훈과 함께 진보 성향으로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이들을 '독수리 5형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당시 사법연수원 교수가 훗날 노무현 탄핵 심판 당시 대통령측 대리인단이자 후에 노무현이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이용훈 판사였다. 원래 노무현은 이용훈 전 대법원장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문재인이 사법연수원 당시 인연으로 부탁해 이용훈이 노무현 대리인단으로 참여한 것.[43] 문재인 구술 "김앤장을 비롯해 괜찮은 로펌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변호사 상과는 달랐다. 보통 서민들이 겪는 사건들 속에서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는 그런 모습이었다. 어머니도 모실 겸 부산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44] 노무현과 박정규는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고시 공부를 함께 했던 인연이 있었다. 늦게 사법고시에 합격한 박정규는 나이 때문에 판검사로 임용받기는 늦은 나이라 연수원을 나오면 변호사를 하겠다는 뜻을 비쳤고, 노무현은 "연수원을 마치면 같이 일하자"고 하고 본인 사무실에 방과 책상까지 준비했는데 박정규가 뜻밖에 검사로 임용되면서, 미안해진 박정규는 문재인을 자신을 대신해 소개해 준 것이었다.[45] 실제는 기존에 노무현이 하던 변호사 사무실에 문재인이 들어갔다고 보는 게 맞는다.[46] 도로명주소부산광역시 연제구 법원로 28, 400호 (거제동, 부산법조타운).[47] 참고로 1988 서울 올림픽 복권 1등 당첨금이 1억 원이었고 금리가 10%를 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1억 원을 은행에 1년간 예금해 놓으면 몇 년 치 봉급이 나왔을 정도로 큰돈이었다.[48] 본인이 게임에 일가견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아들이 못 알아듣는 영어판으로 게임을 하는게 마음에 걸려서 번역해 준 것이다.[49] 당시에는 패미컴 같은 게임들은 죄다 대만이나 홍콩에서 일본, 미국 같은 데서 발매된 게임을 불법 복제 한 경우가 많아 영어, 일본어 심지어 일부는 중국어 (번체자)로 되어있어서 영어, 일어 중국어를 못하는 아이들은 그냥 이해 못 하면서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50] 더빙까지 했다.[51] 문재인의 회고에 따르면, 공범으로 지목된 인물은 거의 맹인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나빴고, 그것 때문에 군 복무까지 면제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건 발생 장소는 완전히 돌밭이었고, 범인과 피해자는 거기에서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였다고 한다. 게다가 사건 발생 시각은 달빛조차 없었던 칠흑 같은 밤이었다고 한다.[52]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에서 조영황 변호사가 처음 공소유지담당변호사를 맡으면서 유명해졌다. 이후 2007년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폐지되었다.[53] 기사는 14년전인 2003년 기사인데, 첫 댓글은 2017년 5월 2일,19대 대선 1주일 전에 달렸다.[54] 이 시기에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치아가 10개쯤 빠졌다고 한다.[55] 다음 민정수석을 맡은 사람은 본인을 처음 노무현에게 소개해 주었던 박정규 부장검사였다. 그리고 박정규 다음에 또 문재인이 이 자리로 돌아왔다. 여태까지 민정수석을 두 번 역임한 사람은 문재인이 유일하다.[56] 처음엔 'Impeach'라는 단어를 보고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대통령 탄핵 소추 사태가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탄핵(impeach)을 영어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57] 2012년 NLL 대화록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것도 이 시기에 비서실장을 역임했기 때문이다.[58] 정리하자면 민정수석 → 시민사회수석 → 민정수석 → 비서실장 순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했다.[59] 문희상의 매제는 배우 이하늬의 아버지다. 문희상은 이하늬의 외삼촌 되는 셈.[60]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렸던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다. 무한도전에도 소개된 적이 있었다.[61] 애초부터 정치를 할 생각이 없어서 노무현한테도 민정수석까지만 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발을 들였지만 마음 자체가 계속 답답했던 건지 18대 대선 출마에도 부담스럽다고 하기도 했다.[62] 부산 사상에 있는 주례여고 학생회장이 유일한 경력인 27세 청년이었다. 박근혜 키즈로 발탁되어 문재인을 저격하기 위해 전략 공천되었다.[63] 이 선거에서 장제원이 나왔더라면, 당시의 현역 프리미엄과 부친의 후광에 힘입어 문재인을 제치고 당선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친이계인 장제원이 야권 잠룡을 꺾는 모습은 아무리 같은 당이라도 친박계입장에서 떨떠름할 수밖에 없다.[64] 나머지 두명은 김해 갑의 민홍철과 사하 을의 조경태이다. 이후 조경태는 20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에 입당한다.[65] 다른 지역의 경우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곳도 있는데, 사상구 주민들 중에는 사상구엔 수해가 없는 줄 아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66] 사상구는 1990년대에 한 번 크게 침수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하천 및 배수 시설 등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67] 좀 더 설명하자면, 사상구 바로 옆의 북구에서는 문자 그대로 수해가 할퀴고 간 피해를 입었으나, 사상구의 경우 백양산 운수천(계곡) 등산로 등이 일부 유실된 외에 지역 주민들의 생활 터전에서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 수해 이후에도 예산을 확보하고 추가적으로 우수관거를 정비하는 사업을 벌이고 교통개선사업 등을 함으로써 사상구청(새누리당 소속 구청장)과 사상구 국회의원(민주당 소속) 모두 수해로 인한 피해도 없고 사후 대처, 지역 현안 등을 잘 챙겼다는 평가를 들었다.[68] 이 슬로건은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내걸었던 슬로건이기도 하다.[69]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당시 현역 국회의원이기도 했다.[70] 이때 토론회의 상황을 임재범의 <너를 위해>의 가사를 빌어 표현한 게시물이 인기를 끌었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이 댓글은 SNL에서 한 번 더 패러디 되기도 했다.SNL코리아 시즌2 참고 영상[71] 그리고 이 기록은 10년 후 제20대 대통령 선거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한 이재명 후보가 갱신한다.[72] 단식하던 김영오를 말리다 되려 본인까지 휘말려서 9일간 한 듯.[73] 이때 문재인이 읽던 책은 미국의 교육 지도자인 파커 J.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이라는 책이었다. 약 4년 후인 2018년 3월에 저자 파머 본인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그 모습이 담긴 사진을 소개하며 '인내하다 보면 언젠가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을 거란 심정으로 바다에 던진 병이 먼 해안가에 가서 닿는다'는 글을 올려서 화제가 되었다.[74] 13,423,800표[75] 5,570,951표차. 득표율로는 17.1%포인트차. 참고로 19대 대선 이전에는 17대 대선이 대선 후보 1, 2위간 역대 최다 표차를 남긴 대선이었다.

[76] 정치적 입장만 놓고 보면 2012년 대선 때, 지금은 거짓으로 밝혀진 노무현 대통령 NLL 포기 발언 논란에 불을 붙여 당시 문재인 후보를 종북 좌파로 몰아세우는 데에 크게 일조한 사람이 김무성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놀랄 만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