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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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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jor General / Rear Adm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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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F:육군 항공대, M: 해병대, N: 주방위군 C: 해안경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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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 첨자 :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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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18f><colcolor=#fff> 미합중국 초대 제3함대 사령관
윌리엄 홀시
William Halsey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_Halsey.jpg
본명 윌리엄 프레드릭 홀시 2세[1]
William Frederick Halsey Jr.
출생 1882년 10월 30일
뉴저지주 엘리자베스
사망 1959년 8월 16일 (향년 76세)
뉴욕주 피셔아일랜드
묘소 알링턴 국립묘지
재임기간 제2대 남태평양 전역 사령관
1942년 10월 18일 ~ 1944년 6월 15일
초대 제3함대 사령관
1943년 3월 15일 ~ 1945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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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18f><colcolor=#ffffff> 복무 미합중국 해군
1904년 ~ 1959년
최종 계급 원수 (미합중국 해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과달카날 해전
레이테 만 해전
주요 서훈 육군수훈근무훈장
해군수훈근무훈장 (4회)
해군십자장
아시아-태평양 전역 메달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메달
}}}}}}}}}
1. 개요2. 일생
2.1. 생도 시절2.2. 제2차 세계대전 이전2.3. 제2차 세계대전2.4. 전쟁 이후
3. 평가4. 일화5. 대중매체에서6. 어록7. 진급 내역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historyofwar.org/halsey.jpg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더 많이 죽이는 겁니다![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군제독. 최종 계급은 원수였다. 별명은 Bull(황소), Japs Killer(쪽발이 킬러), Fighting Chicken(싸움닭).[3]

체스터 니미츠, 어니스트 킹, 윌리엄 리히와 함께 미 해군 역사상 아직까진 단 4명 뿐인 해군 원수 중 한 명이다.[4]

위에 나오는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같은 문구를 봐도 알 수 있듯 적을 대하는 태도가 꽤나 무자비했던 사람으로, 육군의 자칭 Sons Of Bitches. 조지 S. 패튼이나 공군의 석기시대 매니아 커티스 르메이의 해군 버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홀시는 부하들을 아껴서[5] 전쟁 후반기에 심각한 여러 실책을 저질러도 부하 가운데 그를 좋아하는 팬층도 단단했다고 한다.

미국인들 중에는 그의 전투력과 군인으로서 자질 등이 다소 과대평가 됐다는 의견이 있다. # 그 때문인지 전선에서 활약한 제독이지만 아직 홀시의 이름을 단 함급이 없다.

2. 일생

2.1. 생도 시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가 동명이인이고 해군 대령까지 지냈던 인물인데, 홀시와 체스터 니미츠가 사관생도였던 시절에 중령이었던 아버지가 해사 항해학부 부장으로 근무했다보니 홀시와 니미츠가 홀시 시니어에게 함상 훈련을 받기도 했다.

2.2. 제2차 세계대전 이전

행정상의 이유로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하자마자 바로 대위까지 진급(사실상 중위 계급을 스킵)해 버린 독특한 전력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장성으로서의 활약만이 알려져 있지만,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대서양 함대의 어뢰 전대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어뢰정구축함을 지휘하면서 상당한 공훈을 세운 인물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공적으로 이미 해군십자훈장(Navy Cross)을 수훈한 경력이 있다. 이후 구축함 전단을 지휘하다가 1930년대 초반에 해군대학(Naval war college) 과정을 수료했다.

1934년, 홀시의 이후 삶의 방향을 결정할 중요한 일이 발생한다. 당시 미 해군은 항공모함을 차례차례 건조시켜 취역시키면서 해군항공대를 급속도로 확충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 해군에서 항공모함의 함장을 맡기 위해서는 해군항공조종사(Naval Aviator) 또는 최소한 항공관측사(Air Observer) 자격[6]이 있어야 했다.[7] 당시 홀시 대령은 이미 50세를 넘긴 장년의 나이였으므로 누가봐도 해군항공조종사 과정을 이수하기는 무리였고, 그래서 미 해군 항공국장 어니스트 킹 당시 소장은 어떻게든 홀시를 항공모함 함장과 해군항공대의 일원으로 밀어주기 위해[8] 항공관측사 자격과정을 이수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황소 홀시는 상대적으로 편한 항공관측사 과정을 거부하고, 아예 12주짜리 정식 해군항공조종사 과정을 수료했다 홀시는 1935년 무려 52세의 나이로 해군조종사 윙을 가슴에 달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최고령 해군조종사 기록이다. 이후 홀시는 항모 새러토가의 함장을 거쳐 1938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해군 제독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후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였고 1940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태평양 함대에 배속되어 있었으며, CV-6 엔터프라이즈를 중심으로 한 태평양함대 TF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2.3. 제2차 세계대전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부터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사이에 있었던 주요 항공모함 작전의 야전 사령관은 홀시 제독이었다. 진주만 공습 당시 홀시는 엔터프라이즈를 타고 웨이크섬에 비행기 갖다주러 갔다가 오고 있었는데, 태풍을 만나 회항한다고 입항이 늦어져 진주만 공습의 목표물이 되지 않았다. 이후 진주만에 입항한 뒤 미국의 분노를 잘 나타내는 이른바 "이 전쟁이 끝나면(끝나기도 전에)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 직전에 대상포진을 앓는 바람에 상관인 체스터 니미츠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하선하여 장기간 요양을 해야 했고, 그 후임으로 엔터프라이즈 기동부대를 지휘했던 사람이 훗날 홀시 제독과 함께 태평양 함대의 야전 지휘관으로 활약하는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다.

과달카날 전투 중반에 완전히 회복되었으며, 원래 프랭크 플레처 제독의 후임으로 항모기동부대를 지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과달카날 전투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로버트 곰리 제독이 워낙 소극적인 지휘를 하고 있었던 까닭에[9] 교체해달라는 요청이 어니스트 킹 제독의 귀에 들어가고 있었고, 스프루언스 제독이 항모 운용에 적응하기 시작한 시점이라서, 곰리 제독을 대신하여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으로 부임[10]하였다.[11] 당시 이 소식을 들은 남태평양 방면의 해군과 해병대원들 모두 환호했다고 하며, 이후 적극적인 지원을 하여 과달카날 해전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얻는데 일조를 하였다.

이후 남태평양 해역군의 해군 부대를 중심으로 미 제3함대[12]가 창설되자 대장계급을 부여받고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남서태평양해역군[13]과 긴밀한 협력 하에 수레바퀴 작전(Operation Cartwheel)[14]에 참여하였다. 대부분의 해군 고위 장성들은 맥아더를 껄끄럽게 생각했지만, 맹장 스타일이면서도 인화력 또한 좋았던 윌리엄 홀시는 맥아더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맥아더 또한 자신을 인정해주는 홀시 제독을 꽤나 좋아했는데, 자신이 태평양 전선의 완전한 지휘권을 잡으면 홀시에게 함대 전체를 맡기겠다고 하면서 그 유명한 '당신을 넬슨보다 더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주겠소.”'라는 발언까지 했다.출처 물론 눈치도 빨랐던 홀시는 '킹 제독에게 맥아더 장군 제안을 한번 말은 해보겠습니다'라고 슬쩍 빠져나갔다.

남태평양의 주요 섬들이 정리된 후로는 딱히 굵직한 전투가 없었는데, 그 때문에 홀시 제독의 능력을 묵혀 두기 아깝다고 판단한 태평양 함대는 전투 부대의 지휘관을 스프루언스 제독과 홀시 제독이 1년씩 번갈아가면서 지휘하도록 조치하였다. 이 때문에 홀시 제독이 지휘하는 동안은 3함대,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하는 동안은 5함대로 불리면서 사령부 참모진만 바뀌었다뿐, 사실 부대원은 바뀌지 않은 해괴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15]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일본군 해군 오자와 지사부로의 유인 작전에 낚여서 주력 부대를 끌고 추적하는 바람에 상륙 부대가 털릴 뻔한 적도 있으며, 이후에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데도 대처 미숙으로 함대가 2번이나 피해를[16] 보아서 군사법원에 소환되어 강제로 퇴역할 뻔한 적도 있는 다소 아쉬운 이력도 남아 있다.[17] 이것이 홀시 제독이 저지른 몇 안되는 전략상의 실책이었다. 그러나 단순 실책이라기에는 800명 가량이 태풍에 휘말려 죽는 등 그 여파가 매우 컸다. 전투가 아닌 태풍에 의해 함재기 150대와 구축함 3척 침몰, 함선 수십 척 손상, 790명의 사망자 발생 등이 일어난 것이다.[18] 그러나 이러한 실책에도 평소의 인맥관리와 열성팬들의 두터운 지지 덕분에 퇴임을 당하지 않았다.[19]

이후 일본 침공 직전에 스프루언스 제독과 교대하였다가, 다시 귀환하여 일본의 항복 때까지 함대를 지휘하였다. 참고로 일본이 항복문서를 서명한 전함 미주리가 바로 홀시 제독의 기함이다.

2.4. 전쟁 이후

일본군의 항복 후 항복 조인식에 참석한 홀시 제독은 그 후 10월 25일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서 퇴역신청을 냈는데, 오히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4일 후에 그를 원수로 추대했다. 원래 원수로 추대되는 것은 전쟁 중에 이미 결정이 난 상태지만 동일한 함대를 교대로 지휘하면서 아직 대장계급인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의 문제 등이 있어서 미루어진 것이었다.

그 외에 46년 시점에서 홀시는 해군의 소장급 제독 조기퇴역 선정 위원회(가칭) 의 위원장으로 활동했는데 이 위원회의 구성원은 모두 4성 제독들로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토마스 킨케이드, 존 타워즈, 마크 미처 제독(타워스와 미처는 전후에 대장으로 승진) 등이 있었고 모두 전쟁에서 활약한 최고위 지휘관들이었다.[20]

전쟁 중의 팽창으로 늘어난 제독들의 정원을 종전 후 군축의 흐름 속에서 구조조정을 단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된 이 위원회는 당시 복무중이던 215명의 해군 소장들[21] 중 50명을 선정해서 조기퇴역을 권고하기위한 목적으로 활동했다. 이 외에 여러가지 전후 처리 업무들을 수행한 홀시는 1947년에 퇴역했다. 그 후 홀시는 정부 임원과 여러 회사의 중역들을 거치다가 1957년에 뇌졸중으로 모든 직함에서 물러났고, 2년 뒤인 1959년 8월 16일, 자택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홀시의 장례는 국장으로 진행되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치됐다.

3. 평가

레이테 만 해전에서 적의 기만전술에 말려든 일화[22]태풍으로 워낙 유명했지만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기동부대를 이끌어온 베테랑[23]이기도 했다. 또한 둘리틀 특공대, 산타크루즈 해전, 과달카날 해전, 시부얀 해전, 구레 군항 공습 등 다양한 전투에서 기동부대를 지휘한 지휘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는 여러모로 레이먼드 스프루언스처럼 유동적으로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불확실한 정보만으로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인물격인 지휘관이라기 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한 자리나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로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많다.

물론 고위 제독으로써 역량이 아주 부족한 것은 아니기에[24]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 재직 시절 수레바퀴 작전을 이끈 홀시는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줬는데. 흔히 알려져 있던 불같은 성미와는 전혀 다르게 전술,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와 그렇지 않는 곳을 잘 구분해서 전쟁 중기부터 미군이 벌인 개구리 뛰기의 초석이 된다. 이밖에도 홀시 제독의 전략적 식견이 돋보인 사례로 필리핀 탈환전이 있다. 미군은 원래 필리핀 해 해전 이후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에 1944년 12월 경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홀시는 필리핀 해 해전으로 일본군의 잔존 항공전력이 박살났음을 확신하고는 곧장 필리핀 남부가 아닌 중부(= 마닐라에 더 가까운)인 레이테 섬에 원래 계획보다 2개월 앞당긴 1944년 10월에 상륙하자는 과감한 제안을 했다. 필리핀 탈환전은 이 제안대로 따라갔고 미군은 일본군의 허를 찔러 전략적 기습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덤으로 부랴부랴 결전장으로 뛰쳐 나온 연합함대의 잔존전력까지 분쇄하면서 일본해군에게 최후의 일격을 먹이기도 했다. 물론 홀시 본인은 그 결전장에서 심각하게 체면을 구겼다.

또한 육군을 제외한 미군의 타 군종과 호주 같은 타국 군대를 깔보았던 맥아더 장군과 달리, 특유의 친화력을 잘 살린 지휘 덕분에 휘하 육군과 해병대 장성들과의 마찰이나 그의 구역에 있었던 동맹국인 뉴질랜드 군과 마찰도 없었고, 같은 해군의 마크 미처 제독과 리치먼드 K. 터너 제독 같은 실력 좋으면서도 성격이 정 반대인 제독들을 마찰 없이 지휘를 하며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나중엔 해군을 무시하던 맥아더 장군과도 거의 관포지교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다만 오점으로 남은 레이테만 해전에서 오자와에게 낚인 일화도 홀시의 명백한 실책이기는 하다. 이는 당시 홀시 뿐 아니라 미군 측은 오자와 함대가 대체 무슨 임무를 맡았기에 거기서 알짱대고 있었는지 종전까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25] 물론 미군 측 입장에서는 오자와 함대가 뭐하러 온 건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최소한 일본 항모가 함재기 전력이 필리핀해 해전에서 전멸하고, 따라서 미군 항모 기동부대에 별 위협을 가할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자와의 항모를 끝장내러 쫓아간건 홀시가 내린 결정이고 따라서 홀시의 큰 실책인건 분명하다.

홀시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항모를 쫓기로 한 이 결정도 레이테 섬 해전 직전에 있었던 필리핀 해 해전에서의 결과와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필리핀 해 해전에서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하는 미 항모 기동부대는 일본의 항공모함을 전멸시키지는 못 했지만 일본의 함재기와 조종사에 치명타를 입히면서 일본 항모들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실제로도 일본 항모부대는 이후로 두번다시 미군에게 함대 항공전을 시도하지 못한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스프루언스는 필리핀 해 해전 이후 일본 항모부대를 끝장 내지 못했다는 실망 섞인 불평을 들어야 했다. 단적인 예로 기동부대의 전단장 중 한명인 클라크 소장은 필리핀해 해전의 결과를 두고 백년에 한번 올만한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전쟁의 전체적인 진행과정을 고려하면 상륙중인 미육군을 엄호하는 것이 타당했다. 하지만 직전의 필리핀해 해전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적 항공모함을 멀쩡히 냅둔 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전체적으로 홀시는 준수한 지휘관 중 하나였으며, 5성 제독 임명과 각종 상훈으로 실력을 증명한 지휘관이다. 한편으로는 다소 감정적인 성격이 강하고 불패의 명장 스프루언스 제독과 비교되면서 저평가되는 경우가 있다. 베테랑 사령관임에도 레이테에서 적의 기만책에 속아 넘어간 실수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태풍에 대한 오판으로 함대의 진로를 잘못 잡아서 멀쩡한 전함들과 800여 수병의 목숨을 싸워보지도 못하고 태풍에 죽게 만든 일 등으로 인해 평가가 많이 깎인다.

당시 생존 장병중에는 홀시 제독의 5성 진급에 격분하는 사람이 현재까지도 존재한다. 홀시 제독은 전후 각종 언론 프로그램에서 일련의 사건에 대해 자기 변호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물론 하술할 아이스크림 사건 등에서 드러나듯 제독으로 수병들 사이에서 사적으로 계급을 앞세워 권위주의적 행동을 하지 않았고, 수병들의 관리와 복지에도 신경썼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4. 일화

5. 대중매체에서

6. 어록

성격만큼이나 강렬하고 인상적인 말도 많이 남겼다. 아래는 그 말들.
"Before we're through with them, the Japanese language will be spoken only in hell."
'이 전쟁이 끝나면,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39]
진주만 공습 당시에 기동부대를 이끌고 진주만으로 오던 중이었는데 약간의 시간 차이[40]로 진주만 공습이 끝난 후에 도착해서 진주만의 참상을 보고 한 말.[41]

'이 전쟁이 끝나면'이라고 번역된 것이지만 실제로 "Before we're through with them"은 "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로 해석하는 게 정확하다. 만약 일본 제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홋카이도 주둔군을 쓸어버리고 혼슈 동북부로 내려오는 소련군을 보고도 항복하지 않아서 몰락 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됐으면 진짜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일본은 핵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I'll take it! If anything gets in my way, we'll shoot first and argue afterwards."
"내가 책임지겠소! 내 앞길을 가로막는 게 있다면 일단 쏴 버리고, 언쟁은 그 나중의 일이오."
진주만 공습 이후 기동부대를 이끌고 웨이크섬으로 가려는 그를 허즈번드 킴멜이 막으며 "자네 혼자 전쟁할 생각인가? 책임은 누가 지는데?"라고 하자 한 대답이다.

홀시는 분명 지략과 용맹이 균형이 잡힌 훌륭한 제독이었지만 감정적인 면이 종종 이성을 앞지를 때가 있었는데, 이 때도 그런 상황이었다. 건실한 타입의 제독이던 킴멜은 혹시나 홀시가 함대를 이끌고 갔다가 더 주력함 손실을 입어 돌이킬 수 없을 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때는 일본군의 기세가 절정에 달하던 때로 일본군이 눈에 불을 키고 찾던 항공모함을 아무 대비없이 끌고 갔다가 잠수함이나 공습 또는 적 주력함대와 마주쳐서 잃어버렸다면 아마 태평양 전쟁은 더욱 길어졌을 것이다.
"Attack. Repeat, attack!"
"공격하라. 반복한다, 공격한다!"
산타크루즈 해전 당시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이 적을 발견했다고 통신을 주자 그가 한 대답.
"Hit hard, hit fast, hit often!"
"강하게 쳐라, 빠르게 쳐라, 계속 쳐라!"
그의 좌우명이다. 홀시 제독이 모델이 된 해군 모병 포스터에도 쓰였으며 각각 전함의 함포사격, 함재기 이함, 대공포의 화망을 그려넣어 표현했다. 월드 오브 워쉽의 캠페인 제목에도 쓰였다.
"I never trust a fighting man who doesn't smoke or drink."
"술•담배 안하는 전사는 신뢰가 안 가던데. "
전형적인 무사의 시크함이 묻어나온다. 가까운 후배이자 친구인 레이몬드 스프루언스를 놀리는 농담. 스프루언스는 평소 술담배를 하지 않고 체력단련에 열중하는 편이었다.
"All problems become smaller if you don't dodge them, but confront them. Touch a thistle timidly, and it pricks you; grasp it boldly, and its spines crumble."
"모든 문제는 피하지 않고 맞설 때 작아진다. 엉겅퀴를 소심하게 만지면 찔리지만 대담하게 움켜쥐면 가시가 뭉개지듯 말이다. "
흔히 홀시를 장비 같은 맹장으로만 생각하는데 가끔 깊은 통찰의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일단 세게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42]
"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더 많이 죽이는 겁니다!"
남서태평양 방면 사령관이 되고 과달카날 시찰에서 앞으로의 전략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대답이다.
파일:external/www.balloon-juice.com/halsey.jpg
홀시 제독님께서는, "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더 많이 죽이자!" 라고 훈화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성실한 복무가 노랭이 새퀴들을 족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Admiral Halsey says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You will Help kill the yellow bastards if YOU DO YOUR JOB WELL.
이게 기사화된 이후로는 태평양 방면의 미군은 물론이고 미국 본토에서도 크게 유행하였다. 국내 인터넷에서도 홀시가 한 말 하면 많이 나오는 말.
"The only good Jap is a Jap who's been dead six months.”
"좋은 쪽발이는 오직 죽은 지 6개월 지난 쪽발이 뿐이다."
출처: LIFE지 1944년 1월 24일자 30페이지
"The Third Fleet's sunken and damaged ships have been salvaged and are retiring at high speed toward the enemy."
"제3함대의 침몰 및 손상된 함들은 현재 해저에서 인양되었으며 적을 향해 급속 퇴각중"
대만 항공전에서 일본군이 항모 19척, 전함 4척, 순양함 7척, 함종 불명 15척 격침 및 격파라는 거짓 보고정신승리를 올린 것을 도쿄 로즈가 발표하자 체스터 니미츠 제독에게 보낸 전문. 그 전투 하나에서 항모 19척을 잡았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태평양전쟁 전체에서 격침당한 미군 항모의 총 수는 11척에 불과하다.# 물론 태반은 호위항모들.
"There are no great men, there are only great challenges, which ordinary men like you and me are forced by circumstances to meet."
"세상에 위대한 사람은 없다. 오직 당신이나 나같이 평범한 인물들이 일어나 맞서야 하는 위대한 도전이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홀시가 남긴 말이다. 임팩트가 부족해서 그렇지 홀시가 남긴 문구 중에는 가장 멋진 말. 브래디 제임스의 논픽션인 아버지의 깃발에도 기록되어 있다. 본인의 전공과 미국 국방을 위해 세운 위대한 업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 어록은 여러 버전의 녹취가 있다.)
At the end of WWII, all the towns and cities across the country were looking for a “Hero” to celebrate America’s victory with, Los Angeles chose Admiral Halsey and had a ceremony on the steps of the LA County courthouse to honor America’s hero and at the end of it when Admiral Halsey was leaving, they had a line of sideboys.
The sideboys were active duty and retired Chief Petty Officers that had been brought in from all over the country who had served with Admiral Halsey at one point in their careers.
Admiral Halsey approached one of the retired Chiefs, and they winked at each other.
Later on that evening at a reception for Admiral Halsey, one of the civilian guests at the event asked the Admiral about the wink he shared with the Chief. Admiral Halsey explained, “That man was my Chief when I was an Ensign, and no one before or after taught me as much about ships or men as he did.
You civilians don’t understand. You go down to Long Beach and you see those battleships sitting there, and you think that they float on water, don’t you?”
The guest replied, “Yes, sir, I guess I do.”
To which Admiral Halsey stated, “You are wrong. They are carried to sea on the backs of those Chief Petty Officers.”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온 미국의 도시와 마을은 승리의 기쁨을 함께할 "영웅" 을 찾아다녔고, 로스앤젤레스는 그 주인공으로 홀시 제독을 지목해 LA 카운티 법원의 계단에서 영웅을 기리는 행사를 벌였다. 홀시 제독이 행사가 끝나고 자리를 떠날 때 즈음에는 위병들이 사열해 그를 맞이했다.
위병들은 전국에서 모인 현역 혹은 전역한 CPO들이었고, 모두 한번씩은 홀시 제독 아래에서 근무했던 부사관들이었다.
홀시 제독은 전역한 부사관 하나에게 다가가서는 서로 윙크를 주고받았다.
그 날 저녁 만찬에서 한 민간인이 제독에게 그 윙크가 무슨 의미였는지 물었다. 홀시가 설명하길, "그 사람은 내가 소위였던 시절 내 부사관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나에게 함선이나 수병들에 대해서 그만큼 가르쳐 준 적이 없소.
당신들 민간인들은 모르겠지요. 롱 비치에 내려가서 거기에 전함들이 가만 앉아 있는 걸 보고 있자면, 그것들이 그냥 물에 떠 있는 것이리라 생각되지 않소?"
하객은 "네, 그렇겠지요" 라고 대답했다.
홀시가 거기에 대답하기를, "틀렸소. 군함은 그 CPO들의 등에 업혀서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오."
군함에서 기술적으로 전문성을 요하는 CPO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말이다.
"쪽발이(Japs)들도 끝이군."
이미 폭망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카미카제로 발악하는 일본군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시크하게 내뱉은 말이다.

7. 진급 내역



[1] 사람마다 읽는 방법이 다양해서 홀시 외에도 헐지, 할제이, 할시, 핼시 등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심지어 일본어 중역 판에서는 '하루제'라고 나오기도 한다.[2] 과달카날 시찰에서 그가 앞으로의 전략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대답이다.[3] 위의 "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더 많이 죽이는 겁니다!"라는 명언을 하기 전에도 성격이 꽤나 과격해서 별명이 싸움닭이었다.[4] 여담으로 조지 듀이는 해군 대원수로 군 생활을 마쳤으나, 이건 명예직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는 대장(4성 제독)까지만 진급했고, 원수(5성 제독)는 되지 못했다.[5] 수백억 원을 써서 부하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배급하거나 잠수함 승무원을 특별히 챙겨주는 등 부하들을 위한 군 복지 증진에 노력했다.[6] 쉽게 말하면 전투기나 폭격기의 후방석[7] 2차대전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미 해군에서 항공모함 함장의 자리는 항해병과가 아니라 항공병과 대령 TO이다. 예를 들어 미드웨이 해전에 출격했던 미 해군 3 항모의 함장(요크타운 - 엘리엇 벅매스터 대령, 엔터프라이즈 - 조지 머레이 대령, 호넷 - 마크 미처 소장(진))들은 전부 해군조종사 출신들이다. 현대 미군에서도 해군항공대 중령 정도에서 항해병과로 파견을 나가 구축함에서 부장으로 항해 업무를 배우고 돌아아 대령으로 승진하면 항모 함장에 앉는다. 반대로 항해병과 중령이 항공모함 부장으로 착임하여 항공병과 출신 함장(대령)을 보좌하여 업무를 수행한다.[8] 당시 홀시는 어니스트 킹에 의해 항공모함 새러토가의 함장으로 내정되어 있었다.[9] 이것은 곰리 제독이 변화한 상황에 파악을 못하고 부임 당시에 부여받은 목표인 호주와 미국 서해안의 연결선 방어에만 급급했던 탓이다. 심지어 저러고 있을 때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 장군은 해군이 과달카날에서 전선 유지에만 급한 걸 보고 "안 그래도 유럽에 보낼 비행기도 모자라 죽겠는데 그쪽에서 이런 식으로 하면 앞으로 재미없을 것"이라는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10] 참고로 태평양함대 사령관 겸 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로버트 곰리 제독 이전에 이미 홀시 제독을 남서태평양 방면 해군 사령관으로 추천해둔 상태였다. 특히 곰리 제독을 임명한 것은 어니스트 킹 제독의 해군 인사상 최악의 인사가 되고 말았는데, 곰리 제독은 애초에 참모만 맡았을 뿐, 현지 사령관은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격전지의 엄청난 부담감을 짊어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11] 이때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외친 말이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이다.[12] 남태평양 주둔 미국 해군에 번호 함대를 부여하여 제3함대로 개칭되었다. 홀시 제독의 경우 이미 42년 10월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으로 전구사령관(통합군)이 되었으며 직책상으로 제3함대의 사령관도 겸직했다.[13] 미국이 치른 태평양 전쟁은 크게 볼 때 맥아더 장군과 니미츠 제독이 각각 책임지는 2곳의 전쟁 구역으로 나뉘었다. 니미츠가 태평양해역군을, 맥아더가 남서태평양해역군을 지휘하고 있었으며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뉴기니섬 ,오스트레일리아 등, 육군의 대규모 주둔이 가능한 큰 섬들과 ANZAC 연합국의 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작은 섬들과 태평양 지역은 전부 니미츠의 구역이었다. 니미츠 제독이 관할하는 구역 자체도 무척 넓어서 다시 남태평양, 중부태평양, 북태평양으로 나눠서 중부태평양은 직접 책임지고 나머지는 홀시 제독 같은 부하 장성들을 책임자로 앉혀서 위임했다.[14] 과달카날 전투 종료 후 일본군의 전략거점인 라바울을 목표로 실행한 1943년 전 기간에 걸친 남태평양(맥아더, 홀시)의 미군들이 벌인 공세전역작전, 홀시 제독의 미군은 중부, 북부 솔로몬제도의 주요 섬들을 점령했고 맥아더 장군의 미군은 북부 파푸아 지역을 장악, 뉴브리튼 섬 서부에 상륙했다. 1943년 후반 미군의 전략이 변경되면서(개구리 뛰기) 양쪽의 미군은 라바울을 포위한 채 그 외곽 거점들만 점령하고 1944년 3월경 종결되었다.[15] 이 함대의 주력 기동부대의 부대명도 38기동함대, 58기동함대였는데 이 역시 3함대, 5함대라는 함대 이름 때문이고, 실제로는 똑같은 부대이다.[16] 1944년 12월 태풍 코브라에 구축함 3척이 침몰하고 다수의 함선이 손상을 입었고 1945년 6월 태풍 코니에는 침몰은 없었지만, 다수의 함선이 손상을 입었다.[17] 홀시를 퇴역시키면 승리의 공이 모두 육군의 맥아더에게 돌아가 버린다는 해군의 내부 사정으로 인해 처벌은 받지 않았다. Quora 전직 군인의 성명에 따르면 당시 어니스트 킹과 체스터 니미츠는 홀시의 실책을 전해 듣고 크게 격분했다고 한다. 그러나 향후 경위 보고서를 작성할 때 이들 둘은 홀시를 크게 비호했고 니미츠는 자신이 직접 주최한 군사재판에서 홀시의 책임을 덮어주는 쪽으로 마무리했다. 홀시와 친하던 상원 내 홀시 지지세력들도 홀시에게 힘을 써줬다고 한다.[18] Quora의 관련 질문 가운데 전직 군인이 분석하고 최다 추천을 받은 답변에 따르면 홀시는 잘못된 기상정보를 믿고 주변 만류에도 3함대를 태풍 속으로 강행 돌파시키면서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당시 사망한 790명은 익사하거나 추운 바닷물에 동사했으며 90명 가량만 구조됐다. 소식을 전해 들은 니미츠 제독은 격분했고 킹 제독은 아예 화를 참지 못하고 사무실 물건을 바닥에 마구 내동댕이쳤다.[19] 대신 부하였던 제38기동부대 존 매케인 시니어 중장이 제대군인부 차관으로 견책성 전출을 가게되었다.[20] 같은 시기, 미국 육군에선 최소 212명의 전시 준장들의 계급을 일괄적으로 대령으로 강등시키는 구조 조정과, 소장 이상의 윗 계급들도 경우에 따라선 1 ~ 2 계급 강등이 진행 중이었다. 아마도 육군에서는 군축 목적으로 해군과 비슷한 인사조정 위원회가 있었을 것이고, 정황 상 제이콥 데버스 장군 (육군 대장, 육군 지상군 사령관) 이 그 위원장인 것으로 추정[21] 이 정원이 얼마나 많냐면, 훗날 9년 후인 1955년에 알레이 버크 소장이 해군참모총장으로 전격 발탁될 당시에 그의 선임 2, 3, 4성제독이 92명이었다.[22] 레이테에서 실수하게 된 원인은 진주만 공습 당시 공습에 참가한 항공모함 중 한 척인 즈이카쿠 때문이다. 그러나 홀시가 즈이카쿠가 미끼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갔다는 의견도 설득력이 있다. 홀시는 진주만 공습에 가담했던 즈이카쿠를 잡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릴 성격이었기 때문. 실제로 레이테 만 해전 당시에 홀시가 저 행동을 저지른 원인이 즈이카쿠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다른 전대 역시 이것만은 인정했다. 심지어 저 당시, 정확히는 사마르 해전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77.43임무전대, 일명 태피3마저도 후에 홀시로부터 "당시 즈이카쿠를 잡으러 갔고 결국 격침시키는데 성공했다."라는 해명을 듣고는 저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필리핀 해 해전에서 승장임에도 부하인 마크 미처 제독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이유 역시 즈이카쿠를 살려서 보냈다는 게 가장 컸다.[23] 태평양 전쟁 초기부터 미드웨이 해전까지 기동부대를 지휘해 왔다.[24] "머리가 나쁘다"는 어니스트 킹 제독의 평가가 있던 건 사실이다. 다만 킹 제독이 똑똑하다고 인정한 사람은 본인과 스프루언스 제독 둘 뿐이다. 그는 당시 미 해군 최고의 두뇌 중 하나였는데 성격도 특이한 편이라 그 자신보다 판단력이 떨어지면 모조리 머리 나쁜 놈으로 취급했다.[25] 노나카 이쿠지로 et.al, 왜 일본 제국은 실패하였는가? : 태평양 전쟁에서 배우는 조직경영 중 2.5 레이테 해전:자기인식의 실패(서울:주영사, 2006-07-04) pp230[26] 일단 짬밥 순으로는 해사 1년 후배지만 니미츠는 고등학교를 마치지 않고 해사에 진학했기 때문에 동기들에 비해 나이가 어렸다. 엄밀히는 미군 기준으로는 새까만 후배가 아니다. 아이젠하워가 맥아더의 전속부관 출신이었다. 파격적이긴 하지만 미군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27] 이 내용은 홀시가 2차 대전 종전 후에 썼던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참고로 이 시기에 좀 유명하다 싶은 장성들이 죄다 자서전을 써서 팔아먹는 것을 니미츠가 싫어했다고. 이 내용은 니미츠 제독의 언급이 없이 홀시 제독 자서전에만 나오므로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 홀시 제독은 자기 인맥 관리와 이미지 관리의 귀재로도 유명했다.[28] 사실 홀시가 심기가 불편한 것도 이유겠지만, 부하들의 사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신이라 불리는 것들이 많이 남아있는 해군에서 터부시되는 것들을 원천제거하여 부하들이 불안해 하거나 입방아에 오르지 않는 일은 지휘관으로서 홀시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29] 일본군은 정말 여러 척의 군함을 격침시킨 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 피해는 중순양함 캔버라가 대파되었고 항모 프랭클린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던 것뿐이지만.[30] "The Third Fleet's sunken and damaged ships have been salvaged and are retiring at high speed toward the enemy."[31] 오바마 대통령의 상대였던 존 매케인의 할아버지다. 참고로 존 매케인의 아버지 존 매케인 주니어 제독도 월남전 당시 해군 대장으로 태평양사령관까지 올랐던 사람.[32] 단 이 말을 했을 때만 해도 칠면조 사냥 때의 스프루언스의 행동에 대한 비판 여론이 존재했을 때이다. 전후 일본 기록의 조사 및 1980년대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스프루언스의 행동이 가장 적합한 행동이었다.[33] 대표적으로 함교 창문이 있다. 최초의 핵추진 항공모함인 CVN-65부터 이 창문을 달고 있었으며 스크랩 된 후에는 CVN-80에게 넘겨줄 예정.[34]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체스터 니미츠는 "다시 한 번 그런 말을 입에 올렸다가는 귀관을 보직에서 해임시키겠다" 라고 강하게 질책했다. 전후에 천황은 일본을 점령하고 나서 병사들의 희생을 줄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35]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 영감 역할을 맡았던 배우. 2009년 별세.[36] 원작 자체가 대단히 스프루언스를 찬양한다.[37] '전쟁과 폭풍(The wind of war)', '전쟁과 추억(War and Remembrance)'으로 갈라서 제작되었으며, 한국에서는 KBS-1에서 심야에 전편은 1986년에 방영했고, 후편은 1989년 방영했다.[38] 홀시 휘하에서 전함군을 이끌고 있는 중이었다.[39] J. Bryan (1947). Admiral Halsey's Story. Whittlesey House. pp. 75–76. ISBN 978-1-4325-6693-7.[40] 열대폭풍으로 인해 늦었다.[41] 이 때 홀시 제독의 기동함대에 소속된 항공모함 중 한 척이 후에 해전사의 전설을 만드는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2번 함 USS 엔터프라이즈.[42] 만화 피너츠에서 스누피가 따라한 대사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