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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9:44:32

이광수(소설가)

가야마 미쓰로에서 넘어옴
동경삼재 東京三才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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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李光洙 | Yi Kwang-su
파일:李光洙.png
출생 1892년 3월 4일
평안도 정주군 갈지통 광동리
(現 평안북도 정주시 오산동)#
사망 1950년 10월 25일 (향년 58세)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 고개동
사인 폐결핵 악화로 인한 병사
창씨명 카야마 미츠로 ([ruby(香山光郎, ruby=かやまみつろう)])[1]
본관 전주 이씨 안원대군파 26대손[2]
춘원(春園)
직업 소설가, 시인, 언론인
학력 다이세이진죠중학교 (現 다이세이고등학교)
메이지가쿠인 (現 메이지가쿠인고등학교)
와세다대학 (철학 / 중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 / 중퇴)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3.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의 행적
3.1. 친일 동기와 카멜레온 본능3.2.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3.3. 이광수만 뭇매를 맞았다?
4. 작품5. 문학적 평가
5.1. 긍정적 평가5.2. 부정적 평가
6. 대중매체에서7. 기타8.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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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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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일본정부 밑에서 일본에 협력한 자, 아니한 자를 가리고
협력한 자 중에서도 참으로 협력한 자, 할 수 없어서 한 자를 가린다고 하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더 엄격하게 말하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도 (일본 정부에 대한) 협력이다."
《나의 고백》 中 '친일파의 변' [3]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무정》
일제강점기문인,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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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광동리의 몰락한 양반 가정에서 소작농 이종원(李鍾元)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동학의 농민들에게 발견된 그는 곧 동학에 들어가 서기가 되었으나 당국의 탄압으로 동학이 해체되자 1904년에 수도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상경한 직후 친일파 송병준이 그의 문학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이 운영하던 친일 단체 일진회에 그를 추천했다. 그는 일진회의 후원으로 1905년 일본으로 유학했는데 다이세이(大成)중학교를 거쳐 메이지 학원으로 편입하였고 메이지 학원에서 수학하면서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

1910년 경술국치가 발생한 직후 일제의 회유로 메이지 학원을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잠시 교편을 잡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1915년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 당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데 참여했다는 이유로 학업을 그만두었다. 한편 1917년에는 결핵에 걸려 고생했는데 이때 그를 간호했던 당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학생 허영숙과 사귀었다.

1917년 신한청년당에 가입한 그는 신한 청년당 활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최초의 장편소설인 무정을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무정>은 다음해 단행본을 내어 1만 부가 팔렸다. 지금이야 1만 부가 장난이지 경성부는 1920년대 말에야 인구 25만 명이었고 1926년까지도 전 인구의 99%가 문맹이었으며[4] 1930년에 이르러서도 70% ~ 80% 이상이 문맹이었다.[5] 즉, 글을 읽을 줄 아는 5만-8만 명 가운데 1만 부가 팔렸다는 것이다. 당시의 책은 사면 서너 명이서 번갈아 보고 헌 책방에서 바꿔 보는 게 예사였음을 감안하면 초초특급 베스트셀러. <무정>의 스토리 전개로 독자들이 젊은층과 노년층으로 나뉘어서 논쟁도 했다고 할 정도다.

무정의 성공으로 당시 문인으로서 그의 인기는 단연 톱이었고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 문인[6]으로 꼽혔다. 그는 여운형의 추천을 받아서 1919년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해 독립신문의 발행을 맡았고, 이어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한일관계 사료집 주필이 되어 편찬을 주도했다. 당시 사진(기사에서 3번째)
파일:History Commission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EB%AF%BC%EC%A1%B1%EA%B0%9C%EC%A1%B0%EB%A1%A0.jpg
1919년 6월 17일, 독립운동열강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설치한 기관 임시사료편찬회(臨時史料編纂會)[7] 위원들. 앞줄 왼쪽부터 미상, 우승규, 이광수, 김두봉, 김병조 뒷줄 왼쪽부터 이원익, 장붕, 미상, 안창호, 김여제, 김홍서, 박현환. 민족개조론과 민족개조의 의의가 적힌 기록.

그러나 자금난으로 압박받고 과로로 육신이 피폐해진 그는 1921년 2월 16일 애인이자 한국 최초의 산부인과 여의사인 허영숙을 만난 후 안창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1년 4월 허영숙을 따라서 귀국을 택했다. 두 사람은 귀국한 지 한 달이 지난 1921년 5월에 결혼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인물임에도 귀국한 뒤 총독부로부터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해 임정 요인들 사이에서는 일제의 스파이 아니냐는 의혹이 크게 돌았다.[8]

결국 이듬해 1922년 5월 월간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친일파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민족 개조론에서 조선은 열악한 민족성으로 인해 "쇠퇴 또 쇠퇴" 라고 하면서 그 구제의 길은 오직 민족개조운동에 있을 뿐임을 거듭 강조했다. 물론 허술 그 자체인 이론이라 동경 유학생 최원순[9], 학자 신상우, 조선일보 논설 주필 신일용 등에게 가루가 되도록 논파당했다. 참고로 민족 개조론은 안창호의 이론에서 출발하긴 하였으나 안창호의 이론은 착실히 대비해서 결정적 순간을 노리고 결과적으로는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는 내용이다. 이광수의 동족혐오에 가까운 민족 개조론과는 다르다.
파일:external/search.i815.or.kr/033_007.jpg
민족적 경륜
1924년 민족개조론에 이어 동아일보민족적 경륜 을 기고했다가 크게 물의를 빚고 그는 동아일보에서 쫓겨났다. 이후 동아일보에 <재생>, <마의태자>, <단종애사>, <흙> 등 많은 장편 소설들을 연재했으며 결국 1926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다시 복직했다. 그 사이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 영문과에 선과생(選科生: 다른 학교에서 수학한 것을 인정받아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일본 유학 시절 얻은 폐병 때문에 1926년 9월부터 1928년 3월 31일까지 네 차례 휴학했고 결국 1930년 1월 학칙에 의해 제적됐다.# 1931년에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조선일보로 옮겼다. 이후 조선일보에 장편 소설들을 연재하고 글을 썼다.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취임해서 1934년까지 지냈다. 그렇게 잘 지내나 싶었는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제가 그를 투옥하였다.[10]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 친일 어용 단체인 조선 문인 협회 회장을 맡으며 스스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향산광랑)'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11]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며 일제의 학도병으로 나갈 것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파일:이광수와 최남선의 체포 기사.jpg
이광수와 최남선에 대한 체포 기사
- 조선일보 2월 9일자

1945년 8월 16일 서울 근교 사릉 인근에 살면서 해방을 맞이했고 8월 18일에는 군중들 사이에 '친일파 이광수 타도' 같은 구호가 나붙기도 했다. 전술한 친일 행위 때문에 먼저 자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고 1946년에 가족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당대 풍습까지 어겨 가면서 아내와 합의이혼[12]을 하고 8촌 친척인 운허의 도움을 받아 봉선사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특위 체포자 제2호로 연행되었지만 아들이 혈서를 쓴 덕과 고혈압 증세가 심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어쨌든 그는 해방 후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폐결핵에 시달리던 상황이라 건강이 나빴는데 1950년 6.25 전쟁 당시 유명세로 인하여 조선인민군에게 당시 말하는 소위 "모시기 정책"[13]의 일환으로 끌려갔다. 유명인이다 보니 이름값을 활용하려고 사실상 납북한 것이다.

이미 건강이 좋지 않던 차에 맹추위까지 겹치던 와중에 무리하게 강계로 이동하여 병이 악화되었는데 그의 건강상태를 전해들은 벽초 홍명희가 한때의 친분을 생각하여 김일성에게 부탁해 강계에서 근처에 있던 인민군 병원으로 옮겨주어서 치료를 받았지만 이미 상태가 호전되기에는 늦었던지라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사실 납북된 후 폭사했다고 추정하는 정지용보다는 편하게 갔다. 김일성은 그를 혐오했는지 1955년 12월의 유명한 '주체연설'에서 "리광수는 또 조선사람은 일본제국주의자들과 《동조동근》이라고 떠벌이던 놈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자를 내세운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절대로 못한다고 막았습니다."라고 마구 욕했다. 뭐, 당대에도 욕을 많이 먹었던 네임드였기도 했고 광복 이후로는 오늘내일하는 병자였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6.25 전쟁 중에 적당히 죽은 것이 더 험한 꼴 보지 않고 간 격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에 끌려가서 사망했다는 설, (1980년 당시 기준으로) 현재 나이가 많아서 작품 활동은 안 하고 편히 산다는 설, 문예봉을 유혹했다는 설, 모 어용 단체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 숙청당했다는 설[14] 등 여러 가지 설이 돌았으나 1990년대 이후 남북교류가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아래의 설이 정설이 되었다.

삼남 이영근이 1991년 북한을 방문해서 이광수가 북한 당국에게 자강도 강계로 이송되던 중에 동상이 심해져 10월 25일 사망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으며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회의에서 제헌 국회의원출신의 최태규가 강계의 인민군 병원으로 후송 중에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2006년 발견된 미국 CIA의 기밀문건에서도 그의 행적이 확인되었는데 평양 교도소에서 10월 10일 석방되었던 농학자 신동기가 자신이 석방될 당시에 이광수가 평양 교화소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신동기는 납북된 이후 북한 측에 전향 권유를 받았지만 거부하자 평양 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10일에 석방되었고 자신이 석방될 때 이광수와 김동인의 이복동생으로 제헌의회 의장을 지낸 김동원, 독립운동가 출신 명제세 등이 수감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증언과 문건들을 종합하면 이광수는 10월 10일까지도 평양 교화소에 수감되었지만 건강이 악화되자 이를 보고받은 홍명희김일성에게 부탁해 국군이 평양을 수복한 10월 20일 이전에 임시수도 강계의 인민군 병원으로 이광수를 후송시켜 달라고 부탁하여 만포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병원까지 가지도 못하고 차안에서 사망했다. #

사망한 후 자강도 만포군에 그대로 시신을 묻었는데 폭격으로 무덤이 평지가 된 후에 그 위로 그대로 아파트를 올려서 한동안 무덤조차 없는 신세였으나 이광수를 다시 안장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서 아파트를 철거하고 이광수의 유해를 발굴해서 재북인사릉에 묻었다.

2003년에 북한재북인사릉이 조성되었을 때 이장되어 현재 무덤은 재북인사릉에 있다. 북한에서도 문학적으로 인정한다는 얘기다. 김일성과 달리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김정일의 구시대 예술가 복권 사업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3.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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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 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郎)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 일체 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했다.
1940년 2월 20일자 매일신보 사설란에 이광수가 '창씨와 나' 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 창씨개명을 적극 권장하는 내용이다.
'미국과 영국을 쳐라'
하옵신 대조를 나리시다
12월 8일 해뜰 때
빛나는 소화 16년

하와이 진주만
적악을 때리는 황군의 첫 벽력

웨스트 버어지니어오클라호마
태평양 미함대 부서지다

이어서 치는 남양의 해공육
프린스.업.웨일즈 영함대 기함
앵글의 죄악과 운명을 안고
구안탄 바다 깊이 스러져 버리다.

아시아의 성역은 원래
천손 민족이 번영할 기업


앵글의 발에 더럽힌 지 2백년
우리 임금 이제 광복을 선하시다.
1942년 1월 '신시대'에 기고한 시 선전대조(宣戰大詔). 순수 일본인 뺨치는 광신적인 모습이 잘 드러난다.[15]

이미 1910~20년대에도 일제와 유착해 <대구에서>, <유랑조선청년 구제의 건>을 쓰며 조금씩 조짐을 보였고 1930년대 들어 파시즘까지 받아들여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찬양했지만 이러한 것들은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항변할 여지도 있다. 본격적인 친일 행보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석방된 후 그는 시와 소설을 쓰거나 강연을 하면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시로는 가끔씩 부른 노래(1939년 2월)를, 소설로는 진정 마음이 만나고서야(心相觸れてこそ)(1940년 3월 ~ 7월, 녹기)[16]를 기점으로 친일 문학을 시작했다. 내선일체와 조선 문학(1940년 4월, 조선), 지원병 훈련소의 하루(1940년 11월, 국민 총력), 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1942년 12월, 국민 문학), 폐하의 성업에(1943년 2월, 춘추), 모든 것을 바치리(1945년 1월 18일, 매일신보) 등 103편의 시, 소설, 논설 등을 기고하였다.

당시 일제의 동맹국이었던 나치 독일히틀러를 찬양하는 글도 썼다.
“나는 쇼와 5년(1930)경에 <나의 투쟁>의 일부를 번역 출판하였다. 그리고 이 전체주의야말로 명백히 세계를 풍미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한자(漢字)로 전체주의란 말은 <동광>에 내가 처음 쓴 말이다. 그때에는 파쇼라는 말은 있었으나 전체주의란 말은 없었다. ‘민족의 제전’이라는 영화에 히틀러 총통이 올림픽대회를 구경하는 스냅이 수매(枚) 있었다. 독일 선수가 아슬아슬할 때에 두 주먹을 쥐고 조바심하는 것이며, 독일 선수가 이긴 때에 기뻐하는 광경 등이었다. 인간으로서의 그의 풍모를 보는 듯해서 기뻤다. 그는 가정도 없고 향락도 없고 오직 애국으로 생활을 삼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동광총서’의 하나로 가장 먼저 번역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면서 자신이 처음으로 사용한 전체주의가 세계를 풍미할 것을 ‘예언’했다고 밝혔고 ‘옛 조선인의 근본도덕: 전체주의와 구실주의 인생관’(<동광> 1932년 6월호)에서 개인주의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전체주의의 미덕을 강조하였는데 그런 그에게 히틀러가 가정도 없고 향락도 없고 오직 애국으로 생활을 삼고 있는 ‘진정한 영웅’으로 보인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계몽적 열정에 사로잡혀 천재와 영웅의 도래를 갈망하던 그에게 ‘독일 민족의 힘’을 몸소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영웅 히틀러는 ‘거지와도 같은’ 조선 민족이 당당한 ‘대일본 국민’의 일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숭배해야 할 ‘신인’(神人)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가 <나의 투쟁> 번역을 표나게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17]

그는 <나의 투쟁>을 번역한 뒤에 쓴 ‘힘의 재인식’(<동광> 1931년 12월호)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주는 힘이다. 삼라만상은 에네르기의 천변만화적 율동이다. 힘이 없으면 우주는 없다. 아시아 대륙의 하늘에는 바야흐로 전운이 꿈틀거린다. 진군나팔이 있고 돌격의 호령이 있고 포연포향(砲煙砲響)이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에게 정히 없는 것이 이 힘이다. 몸의 힘, 골의 힘, 정신의 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가 총출동 대연출하는 금일의 무대에 일역을 맡지 못하고 막 뒤에 쭈그리고 앉은 성명 없는 백성이다. 우리에게 힘이 오르는 날 인류의 무대는 우리에게 정중한 출연청구장을 보낼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전쟁은 민족의 힘의 발현이며, 민족의 힘과 힘이 마주치는 소리다. 그런데 무기력한 조선 민족은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구경만 하고 있는 형편이다. 민족주의자 이광수는 외친다. 전쟁의 무대에 당당한 주연으로 발탁되기 위해 힘을 기르라고.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우주의 힘’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강해지라고.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그 외에도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자료는 너무 많다. 이 문서에 서술된 것들은 극히 일부이며 일반인이 보통 아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어 생각 이상으로 매우 심각한 정도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들 가운데 내용이 무려 12페이지로, 가장 길다. 한국 현대사 연구 권위자인 서중석 교수는 "이광수가 쓴 친일 문학 작품은 108편으로 이 부분은 문학계 친일파 인사들 가운데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말했다.

3.1. 친일 동기와 카멜레온 본능

그의 친일 동기와 해방 후 카멜레온 같은 변신 본능에 대해 이해하려면 당대 지식인들의 머릿속에 있는 '식민지 근대주의'의 기만성과 위선성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는 이미 1904년 일진회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을 할 당시부터 일본이 근대 문명이자 개화된 국가라고 생각했으며 일본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 자신이 조선 민중들을 개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제국주의가 지배하던 20세기 초반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제국, 국민 국가를 이룬 선진적인 나라는 일본 뿐이니 어차피 해방이 안 된다면 조선인들도 일본인과 동일한 국민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18]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게 된 동기는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자신의 스승 격인 도산 안창호 선생이 사망했을 때였다. 당시 이광수는 매우 커다란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

물론 해방이 안 된다는 전제 하에서 백번 양보해서 본다면 그의 행동은 조선인들을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지만. 그가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두 동등한 집단이 상호공존하는 길을 찾고자 했다면 옹호론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길은 조선인의 권익 증진이 아니라 조선인의 정체성을 없애는 길이었다. 그나마 억지로 민족 개조론과 민족적 경륜은 자치론이라고 분류해 봐도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로는 조선민족은 그냥 일본인이 되는 게 낫다는 결론 외에는 확인할 수 없다. 즉, 조선 민족이 어려운 것은 조선인들이 일본 내 소수민족이라 그래. 조선인들끼리도 뭔가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네(민족적 경륜), 아니 조선인이 일본인이 되면 아무 문제 없어지잖아, 이것이 과거의 조선인이었던 현재 일본인들을 위한 길이다.(창씨와 나)

원로 현대사학자 서중석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친일 동기와는 별개로 그의 계몽주의 사상부터 문제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의 인간관과 민족관은 인본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봤다. '민족의식이 말살돼 정체성을 상실한 인간은 다른 민족으로부터 멸시받는다.'는 사고가 그의 내면에도 자리잡아 있다.

3.2.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

그는 이런 친일 행위로 인하여 반민특위로부터 결국 연행되었는데 당시 변명은 다음과 같았다.그리고 이같은 친일 행위를 했던 최린은 이 말을 듣고 짧고 굵게 "입 닥쳐"라는 평을 남겼다고 한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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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친일 행위를 변호한 <나의 고백>과 <돌베개>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은 논조로 자신의 친일 행위를 변호하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그런데 뉴라이트일뽕과 같은 일부 세력들은 이것을 답습하여 이광수의 친일이 어쩔 수 없었으며 동료 지식인을 구출[20]하기 위한 행동이었고 이광수는 사실 거짓 친일, 실제는 독립 염원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면서 '이광수는 민족의 양심수' 라고 옹호하며 '학병을 나가지 않으면 학병을 나가서 받는 것 이상의 고생을 할 것 같기에 나가라고 했다' 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일제가 학병에 나가지 않는 학생은 강제 제적하여 징병, 학병보다 전방에 배치하는 식으로 자발적인 지원을 강제한 면은 있다고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해방 후 그는 자기는 흥사단이 본업이고 문학은 부업이라는 투로 말해 은근하게 넌지시 어쩔 수 없었음을 말했지만 그러기에는 혼자 독보적으로 많은 친일문학[21]을 작성했기 때문에 이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의견이다.

3.3. 이광수만 뭇매를 맞았다?

이광수는 빽이 없어서 더 뭇매를 맞았다는 의견 또한 있다. 일단 일제강점기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박마리아[22] 전국적인 친일 강연을 했지만 스리슬쩍 넘어간 사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전국 강연'과 '기사'는 그 파급력 자체가 다르다. 인터넷이 발달한 21세기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강연에 비해봐도 기사가 일단 증거가 더 분명하게 남고 알려지기도 쉬웠다. 그는 이후에도 난 잘못한 거 없다며 극구 부인하며 스스로 더 어그로를 끌었다.(...) 애초에 빽이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던 셈이다. 게다가 이광수는 누누이 언급되었듯 창씨개명 정책이 시행되기도 전에 조선 이름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일본식 이름으로 갈아 버렸던 악질 친일 종자다. 애초에 거의 모든 식자를 독자로 거느릴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친일 행각을 하면 그 정도에 관계없이 유명한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도 전 국민의 지탄을 받으며 자유당 정권에게도 버림받고 일가족이 자살해서 비명에 간 이기붕의 마누라인 박마리아는 빽이 있었을까?

또 한편으로는 '이광수만 비난받는 것은 억울하다'라는 의견도 있기는 있지만, 마찬가지로 그의 행적을 조금만 살펴봐도 그런 주장이 왜 궤변 취급받는지는 다들 잘 알 것이다. 그는 1948년 작성된 '친일파 군상' 에 '광병적(狂炳的) 친일급 열렬 행위자'로 분명히 규정되어 있다. # 더 많이 까여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하다못해 최소한 김동환, 채만식, 최린 같이 친일한 죄를 뉘우치고 진심어린 반성을 하는 자세를 보였더라면 적어도 이렇게까지 증오받지는 않았겠지만, 이광수는 죽는 날까지도 후안무치하고 적반하장적인 태도로만 일관했으니 결코 면죄받을 여지가 없다.

4. 작품

5. 문학적 평가

5.1. 긍정적 평가

이광수는 전근대에 머물러 있던 서사문학의 내적 문법을 바꾸고 현대성을 수혈하면서 비로소 한국어가 자아와 세계를 동시적으로 포획하는 현대소설에 적합한 문자라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현대를 향한 다양한 줄기들은 이광수에게 와서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었고, 그것은 그대로 한국 현대 서사의 장강(長江)이 되었다. 이 장강에 기대 한국의 서사문학은 꽃을 피웠다. 이광수는 한국 현대 서사문학이 발아(發芽)하는 기점이자 여명의 외침이고 아울러 무시무시한 빅뱅이다. 이광수라는 빅뱅을 겪지 않았다면 한국 서사문학의 밤하늘을 찬연하게 수놓는 성좌(星座)는 아직 없었을지도 모른다.
장석주, <나는 문학이다>
그의 등장은 통상적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그의 저서 <이광수와 그의 시대>에서 이광수의 작품 세계를 한국근현대문학사에 큰 비중과 의의를 가진 것으로 접근 및 평가하였다. 김현도 "한국 현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고 이광수의 업적을 인정하였다.[27]

소설가 김원일은 “일제 말기에 그가 보인 친일행각은 따지더라도 그의 문학은 우리의 자산으로 존중을 받아야 한다”면서 “인간의 흑백논리로 단칼에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평하였다.

2002년 계간 <문학인>과 한국문예창작학회가 진행한 20세기 한국 문학사 10대 사건 및 100대 소설 선정 투표#에서 이광수는 전 부문에 이름을 올렸으며 특히 논쟁 사조 분야에서는 "이광수의 등장" 자체가 10대 사건 중 하나로 뽑혔다. 이런 것을 볼 때 이광수에 대한 평가에 과장이 있었을지언정 그가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단 것을 부정하긴 힘들다.

5.2. 부정적 평가

원래 문학사에서 '최초'라는 것의 의미는 경우에 따라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지만 일단 정치적 내지 문화적 식민지가 수립된 곳에서는 본국과의 연관을 떠난 문학사적 논의는 지방성의 노출밖에 안된다. 일본이 아닌 한국의 전통과 식민지 한국의 현실에 뿌리박은 문학, 즉 참으로 한국적인 동시에 반식민지적인 문학으로서 '최초'가 아니라, 서울의 것을 지방에 가져 오는 식으로 '내지'의 것을 조선에 가져온 '최초'의 것이라면 그것은 내지건 서울이건 빨리 다녀오는 자가 이기는 게임이지 문학이 아니며, 더구나 그 근거지가 제나라 서울이 아닌 식민지통치자의 본국인 경우 그러한 '최초'에 지나친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한국이 식민지라는 핵심적 사실을 은폐하는 데 일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백낙청, <시민문학론>

그는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개화기~일제강점기 문학가로 국문학 성립기였던 당대에 누구보다 큰 영향력을 미쳤지만 유명세에 비해 작가로서의 능력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의 작품 가운데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읽혀질 만한 문학성을 갖춘 작품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당장 이웃나라 일본의 근현대 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 중국 근현대 문학의 아버지 루쉰과 비교해보자. 이들은 시대를 초월한 고전들을 만들어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을 읽고 있다. 반면 이광수의 작품은 그런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문학에서 그 시대상과 고민을 세련된 방식으로 드러내거나 인간성에 대한 본질에 대한 질문을 시대를 관통하여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28]

한 나라를 대표하는 문학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들은 문학성 이전에 태동기에 널리 받아들여져 읽혀지며 방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예를 들어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에드가 앨런 포허먼 멜빌이 아니라 지금은 한물 간 초인주의를 주창한 랠프 월도 에머슨이나 청교도의 위선을 드러낸 작가 너새니얼 호손이 꼽히는 이유도 작가 생전에는 널리 인정받으면서 당대 사조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29] 하지만 이광수는 같은 동경삼재인 홍명희나 조금 뒤에 등장하는 염상섭보다 훨씬 가치가 오래가지 않은 작품만 남겼다.

친일 행적을 밟은 문인이라는 점에서 이광수와 비교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서정주이다. 그러나 서정주는 친일행위와 해방 이후 독재정권에 아부해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의 시재(詩材)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한국어가 품은 표현력의 극한을 보여준 그의 시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학생들이 읽고 사람들은 그의 시집을 꾸준히 찾게 만든다. 이광수가 정말 천재였고 그의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준이었다면 그의 작품은 서정주의 작품처럼 현대에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겠지만 현재 시점에서 그의 작품 중 널리 알려진 것은 무정밖에 없으며, 무정조차도 최초의 장편소설이라는 타이틀로 유명한 것이지 소설로서의 평가는 좋지 않다.

따라서 한국 현대문학사를 연구하고 분석해야 하는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이광수가 여전히 중요한 인물이겠지만 그의 작품 자체만 보면 그저 문학적인 생명력을 다한 구시대의 유산 같은 작품일 뿐이다. 글 못 쓰는 국문학의 아버지

6. 대중매체에서

6.1. 영화

6.2. 소설

6.3. 드라마

6.4. 연극

7. 기타

8. 참고 문헌



[1] 교과서 등지에서는 국립국어원일본어 표기법을 따른 가야마 미쓰로로 표기한다.[2] 26대손 ◯수(洙) 항렬[3] 이광수가 말을 꺼내서 대중적으로 확산된 '친일 공범론'의 주된 논리로 당시 모두가 친일을 했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당시 반민족 행위를 했던 모든 친일파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었다. 친일파들은 '인재 중용론'도 주장했는데 친일파의 국정 운영 경험을 활용해야 하니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4] 물론 일본어 문맹을 기준으로 삼은거 지만 사실 한글 문맹을 기준으로 삼아도 여전히 인구의 절대 다수가 문맹이긴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당시 신문 등 출간물들은 한자 범벅이었기 때문에 한글을 알아도 한자를 모르면 신문과 잡지 같은 당대 출간물을 읽기 힘듦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별 다를 건 없었다.[5] 실제로 남이든 북이든 간에 현대 수준으로 문맹률이 급속도로 줄기 시작한 건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 일이다.[6] 홍명회, 이광수, 최남선은 같은 시기에 동경 유학을 하였고 양건식과 신형철 등이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이라며 이들을 '동경삼재'라고 불렀다. 셋은 귀국 후 잡지 소년에 함께 글을 기고했고 동경 삼재라는 이름은 (일제 시대하) 조선 삼재로 변했다. 이후 최남선과 이광수는 친일, 홍명희는 모시기로 입북했다.[7] 총재 안창호, 주임 이광수.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편찬사업이 완료된 그 해 9월 해체되었다.[8]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p298[9] 최원순은 열악하다는 조선인의 민족정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고 반문하였으며 이어 '그리고 설사 이러한 현상이 있더라도 이는 조선인의 고질적이고 유전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을 가했다.[10] 감옥 생활을 무대로 한 단편 무명이 바로 이때를 소재로 했다.[11] 향산(香山: 가야마)이란 성은 일본 나라현 카시하라시에 있는 향구산(香久山: 가구야마)에서 딴 것이다. 이광수는 진무 덴노가 카시하라시에서 처음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카시하라시에 있는 향구산의 이름을 성씨로 택했다고 선씨고심담(1940년 1월 15일, 매일신보)에서 밝혔다. 향구산은 일본 나라 시대에 궁궐 후지와라쿄(藤原京)를 둘러싼 야마토 3산 중 가장 신성한 산으로 숭앙받았고 만엽집 등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역사적·종교적 가치를 인정하여 향구산 등 야마토 3산을 1968년 '역사적 풍토 특별보존지구'로 지정하였다. (다만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진무 덴노가 처음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곳은 야마토 3산 중 우네비산{畝傍山: 무방산}이라고 한다.) 상당수의 창씨개명한 사람들도 어떻게든 자기 본래의 성을 남기려고 했던 것에 비하면 이광수가 만든 성은 많이 지나쳤다. 일제 입장에서도 꽤나 불경하다. 한편 이름 '광랑'은 본명 광수를 일본식으로 고친 것이다.[12] 혼자 집안의 생계를 책임졌던 허영숙은 집안을 잘 돌보지 않는 남편에 대해 불만이 많은 상황이었는데 친일 문제까지 겹쳐서 결국 이혼했다. 하지만 납북된 이광수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자 말년에는 이광수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였고 이를 위해 1975년에 미국에서 잠시 귀국하였는데 몇 달만에 사망하였다. 현재 이광수 기념비는 봉선사 입구에 있다.[13] 6.25 전쟁 당시 서울에 진주한 조선인민군은 유명한 사람들을 '모셔가는' 짓을 많이 했다. "전쟁이 났으니 선생님을 안전한 후방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라며 회유하다가 말 안 들으면 그냥 납북시키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끌려간 사람도 있고 전쟁과 분단을 장기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냥저냥 따라간 사람도 많다고 한다.[14] 퀴즈 아카데미에 문제로 나왔다.[15] 그러다가 격분한 미국이 항공모함(에식스급 항공모함,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과 구축함(플레처급 구축함, 기어링급 구축함), 수송선(리버티선)을 그냥 많이 만든 것도 아니고 붕어빵 찍듯 생산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그것도 모자라 최신형 전함까지 4대씩 뽑는다. (원랜 아이오와급도 6척씩 뽑을 예정이었고 이것보다 더 큰 몬태나급 전함도 5척씩 뽑을 예정이었다.)[16] 제목 자체가 어색한데 원제 작품 자체가 일본어로 작성된 일본어 소설이라 일본어 제목이 원제라서 한국어로 번역하다 보니 그렇다. '마음이 서로 만나고서야'라는 제목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의 마음과 일본인의 마음이 서로 만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본격적인 친일의 주제를 담고 있다. 사랑을 위해 고난을 이겨내려고 하는 일본인과 조선인 남녀 커플 2쌍(타케오 - 석란, 충식 - 후미에 커플이 주인공인데 충식과 석란이 친남매고 충식과 타케오는 친한 친구다.)을 통해 '내선일체'론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내용의 멜로 소설이다. 원래 장편 소설로 기획되었는데 월간으로 1장씩 5장까지만 연재되다가 중단된 미완의 장편 소설이지만 이미 5장 내에 충분히 내선일체에 대한 많은 논리가 서술되어 있어 서사적 완성을 떠나 친일적인 내용의 홍보를 위해서라면 뒷부분이 없어도 무방했을 수 있는 작품이다.[17] 정작 나의 투쟁의 저자인 히틀러는 이 책을 흑역사 취급했지만...[18] 제1차 세계 대전영국이 자치권 약속해놓고 인도인들 이용한 다음에 입씻기 전까지만 해도 마하트마 간디도 이런 주장을 했지만 이용만 실컷 하고 나서 입을 씻고 암리차르에서 비무장 시위대를 썰어내는 등 영국의 병크를 보고 인도의 완전 독립을 부르짖게 되었다.[19] 최린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은 일제 패망 후 광복 때 재판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오히려 "나의 행동에 대해 절대로 변명이나 하지 않는다. 차라리 나를 죽여 민족의식의 본보기로 속죄를 하겠다."고 뒤늦게 뉘우친 인물이라 평가가 괜찮다.[20] 독립운동하는 청년들을 잡아와서 "네가 친일 글을 쓰면 풀어주고 아니면 고문을 하거나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협박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글을 썼고 나중엔 마약까지 손을 대었다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광수의 과하다 싶게 많은 친일작품의 수나 해방 후의 자기옹호 등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수 있다. 물론 야담이다.[21] 무려 108편(!!!)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제연구소, 계간 《실천문학》, 나라와 문화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이 공동 발표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있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3자리 수로 글을 썼다. 아무리 적극적인 친일문학가도 열 몇편 쓰는 게 고작이었으며, 대부분 10개 미만 ~ 열몇 개 정도이고 이광수 빼고 제일 많은 친일 문학을 쓴 사람이 주요한으로 이광수의 절반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43편이다.[22] 교수는 현대에도 충분히 위상이 높고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직업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과 차원이 다른 수준의 대접을 받았다. 비단 교수뿐만이 아니라 대학은커녕 대학생도 적었기 때문에 단순 대학 학부생도 지금보다 위상이 높았고, 군인도 징병된 병사가 아닌 사관학교 출신 군인은 지식인으로 취급받았다. 당장 이승만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 땄다고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이 박사'라는 별칭으로 불렀던 시기다.[23] 삼국유사 권3 탑상 제4 조신조(調信條)에 실려 있다. 꿈을 통한 인생의 허무를 주제로 한 이야기.[24] 가끔 용감한 사람이 나오기는 하는데 꾀가 없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금방 죽는다.[25] 다만 글은 좋아서 팔리기는 많이 팔렸다.[26]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고증이 암울한데 노량 해전에서 조명 연합군이 2백 명이 죽고 수십 척이 침몰했다는 이야기가 버젓이 나온다. 일제강점기라 패배주의가 만연해서 서술하는 게 기본이다. 소설 마의태자에서도 왕건이 강비와 연모가 있는 내용이 있으니 이 작품만 가지고 비난하는 게 다가 아니다.[27] 다만 김현과 김윤식 모두 이광수의 친일 행적을 오점으로 지적하며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상처라고 평하긴 했다.[28] 실제로 후배 소설가인 채만식은 레디메이드 인생이라는 소설을 통해 이광수의 대표작 무정의 주제를 비꼬았다. 게다가 레디메이드 인생은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를 전달하는 명작으로 평가받는 반면 무정은 교과서에나 잠깐 나올 정도다.[29] 포우는 생전에는 북부 문인들과 대립하는 편집자이자 작가로써 어느 정도 이름을 알렸지만 거장 대우는 받지 못했다. 멜빌 역시 생전에는 괜찮은 해양모험소설가일 뿐 그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당대 독자들에게 퇴물 취급받았다.[30] 이광수가 만든 단편 소설인데 극본은 이은성, 연출은 장형일이 맡았다.[31] 스토리가 작가(김갑수)와 PD(최수종)가 이광수의 일생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형태인데 첫 장면이 PD가 작가에게 이광수 특집극의 대본 집필을 의뢰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가서 작가가 연출한 연극을 보는 장면이다.[32] 출처는 별건곤 제 63호의 각계명남명녀(各界名男名女), 뒤로 본 인물학(人物學).[33] 그런데 이게 상해 임시정부 활동 시절의 일이었다. 임정 사람들은 이광수가 독립운동의 의지가 약해져서 허영숙을 사귀더니 임정을 버리고 그녀와 서울로 도망친 것으로 생각했고 따라서 이광수는 배신자라고 인식되었다. 일례로 임정 인사였던 안창호는 일경에 붙잡혀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 그가 넣어준 사식을 거절했다.[34] 최서해가 1932년 사망하여 변절한 이광수를 보지 못해 존경했다 운운하는 주장이 있는데 최서해 마지막 직장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학예부장이다. 일평생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리며 한이 맺힐 대로 맺힌 최서해는 돈도 제대로 안 주면서 선언문 비슷한 글만 요구하는 카프에 진절머리쳤고 먹고 살기 위해 총독부 기관지조차도 마다하지 않았다.[35] 인간적으로 싫어한 건 아니다.[36] 이 개그는 김동인 버전으로 나오기도 한다.[37] 경성제국대학은 1924년 처음 예과를 개설하였고 이들이 본과로 올라가는 1926년에 본과를 개설했다.[38] 춘원의 아들의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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