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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0:15:00

남(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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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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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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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래3. 본관
3.1. 영양3.2. 의령3.3. 고성3.4. 남원3.5. 남평3.6. 남양3.7. 고령3.8. 그 외
4. 영양 김씨와의 관계5. 실존 인물
5.1. 남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
6. 가상 인물

1. 개요



남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양, 의령, 고성 남씨는 모두 같은 뿌리로 신라 시대 사람인 남민(南敏)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후술할 유래 문단에도 나와있지만, 귀화 성씨 중 하나이다. 총 인구수는 275,648명으로, 막상 찾아보면 그렇게 흔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문 편도 아니다. 그냥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다. 통계상으로 경상도에 인구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으며[1] 서울, 경기도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 외에 지역별 인구 비율 차이는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 전라도는 비교적 적게 분포하지만 엄청 희귀한 극소수인건 아니다.

대표적인 본관은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세 개가 있는데, 이외에도 남원, 남평, 남양, 고령 등이 있다.

같은 한자가 들어가 있는 복성남궁(南宮)씨[2]와 혼동하지 않게 주의하자. 보통 이름이 남궁으로 시작하면 남씨일 확률도 희박하지만 있긴 있으나, 남궁 씨일 확률이 아주 높다. 이름에 궁 자를 넣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

한국 외에도 한자 문화권에서는 무조건 존재하는 성씨이다.

2. 유래

시조 남민은 원래 당현종(唐玄宗) 때 형주자사(荆州刺史)와 이부상서(吏部尙書), 금자광록대부 문하성좌시중(門下省左侍中)을 지낸 김충(金忠)이다. 755년(당나라 천보 14년)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玄宗)이 (蜀)으로 행차할 때에 시종하였다. 이후 당나라의 안렴사(按廉使)로서 원병(援兵)을 청하러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경상북도 영덕(盈德)의 죽도(竹島) 혹은 축산도(丑山島)에 표류하게 되었는데, 신라에서 살기를 원하였다. 이에 경덕왕이 이러한 사실을 당현종에게 알리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현종은 "십생구사지신(十生九死之臣)을 신례(臣禮)로 부를 수 없으니 소원(所願)대로 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 후 경덕왕은 그가 예주여남(汝南)에서 왔다고 하여 남씨(南氏)를 내리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내렸다. 이로써 남씨(南氏)의 시조가 되었다.

다만 당대의 기록상 김충(金忠)이라는 인물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 안렴사(按廉使)라는 관직이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는 점, 안사의 난을 전후로 청병을 위해 당에서 일본으로 사절을 파견한 바가 없는 점을 보았을 때 남민(南敏)과 관련된 기록은 곧이곧대로 믿기 힘든 부분들이 많다. 한편, 지금까지 발견한 사료들을 통틀어 놓고 보았을 때 한반도에서 최초의 남씨 성을 가졌던 것으로 확인된 인물은 다름아닌 고구려 유민인 남단덕(南單德)[3]이다. 묘지명에서 전하는 바로는 "요동(고구려) 자제들을 나누어서 당의 군현에 분산 거주시켰다. (남단덕 가문은) 고구려 자제 중 으뜸이어서 안동도호부에 배치 거주했고, 조부인 남적(南狄)은 당의 마미주(磨米州) 도독을 역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미주, 즉 마미성은 고구려 요동 지역에 있던 성으로서 남단덕 가문은 아마도 마미성의 성주였을 것이다.
과거 전근대에 걸쳐 소중화 사상과 숭화 사상이 만연했음을 감안하면 남씨 성을 가진 고구려인이 중화인(中華人)의 후예를 참칭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3. 본관

대표적인 본관은 7대손인 대장군(大將軍) 남진용(南鎭勇)의 세 아들에게서 갈라져 나온다. 이들 세 아들이 영양, 의령, 고성의 세 군데에 각각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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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남씨 종문.svg
영양, 의령, 고성 남씨
英陽, 宜寧, 固城 南氏
}}}
관향 경상북도 영양군, 경상남도 의령군, 고성군
시조 남민(南敏)
중시조 영양 남씨 - 남홍보(南洪甫)
의령 남씨 - 남군보(南君甫)
고성 남씨 - 남광보(南匡甫)
[clearfix]

3.1. 영양

첫째 아들인 남홍보(南洪甫)를 중시조로 하는 남씨의 분파. 주로 대구광역시, 영양군, 안동시, 울진군, 영덕군, 청송군경상북도 지역과 경상북도와 인접한 강원도 동해시, 삼척시 등의 주변 지역에 분포한다. 특히 안동시와 울진군에 거주하는 영양 남씨의 비율이 매우 높은데 울진의 남씨는 대광공파로, 안동의 남씨는 밀직공 안동파(남군보를 관조로 모심)로 세부 분류가 된다. 조선 시대의 격암 남사고와 전 국가정보원장남재준이 영양 남씨이다.

3.2. 의령

둘째 아들인 남군보(南君甫)를 중시조로 하는 남씨의 분파. 이중 남재(在)와 남은(誾)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었고, 세 본관 중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한 본관이 되었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남재, 남은 형제를 비롯하여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문종의 고명3대신으로써 문종/단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남지, 계유정난 이후 신공신파였던 병조판서 남이 장군이나 생육신의 한 사람이자 육신전을 지은 남효온도 의령 남씨이다. 중종 때 사림파이자 영의정을 지낸 남곤, 광해군 때 소북의 영수였던 남이공, 인조 때 좌의정을 지낸 남이웅, 숙종대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소론의 영수였던 남구만, 정조의 세손시절 스승이었던 형조판서 남유용, 노론 시파로서 세도정치기에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 또한 의령 남씨이다. 의령 남씨는 부산광역시, 창원시, 함안군, 의령군과 같은 경상남도 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4] 서울시 송파구에 대종회가 있으며 현재도 운영중이다.

3.3. 고성

셋째 아들인 남광보(南匡甫)를 중시조로 하는 남씨의 분파. 세 본관 중에 역사적으로 가장 존재감이 없는데, 의령 남씨가 조선의 개국공신인 데 반해 고성 남씨는 고려 멸망과 함께 낙향했기 때문이다. 아들들이 다시 조선 관직에 진출하였지만 후손들이 두 번의 각종 사화에 휘말리면서 조선 시대에는 별다른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참고로 시랑공파(侍郞公派)와 사농공파(司農公派)로 나뉜다.
주요 인물로는 1436년 중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직제학을 지낸 남수문(南秀文)과 덕흥대원군의 사위이자 선조의 매제인 남충원(南忠元) 등이 있다.

3.4. 남원

남원 남씨 시조는 남중룡으로 고려 때 군기감을 지냈다. 그러나 이 외에는 어떤 문헌도 전해지지 않아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인구수는 2000년 기준으로 2,174명이다.

3.5. 남평

남평 남씨는 증보문헌비고에서 조차 나오지 않는 성씨로 시조, 연원 등을 알 수 없다. 인구수는 2000년 기준으로 2,426명이다.

3.6. 남양

남양 남씨도 시조와 유래가 전해지지 않는 성씨로 인구수는 2000년 기준으로 4,321명이다. 과거 급제자로는 1637년(인조 15)에 별시 무과에 병과 2116위로 급제한 남귀생(南貴生, 1598 ~ ?)이 있다.[5]

3.7. 고령

고령 남씨도 남평, 남양 남씨와 같이 증보문헌비고에서 존재하지 않는 성씨로 역시 시조와 연원 등을 알 수 없다. 인구수는 2000년 기준으로 1,824명이다.

3.8. 그 외

여기에 등재된 성씨는 모두 시조와 연원을 알 수 없으며, 인구수는 2000년을 기준으로 하였음을 밝힌다.

4. 영양 김씨와의 관계

어떻게 보면 영양 김씨는 남씨의 분파로도 볼 수 있다. 김충의 맏아들 김석중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김석중이 남씨로 성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5. 실존 인물

5.1. 남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

6. 가상 인물



[1] 남씨의 주요 본관 세 곳인 영양군, 의령군, 고성군 모두 경상도 지역이다. 안동시, 울진군, 청송군, 영덕군, 창원시를 비롯해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등 경상도권 지역에 상당히 많이 거주하고 있다.[2] 이 성씨를 사용하는 인물은 대표적으로 배우 남궁민, 독립유공자 남궁억이 있다.[3] 699년 평양성에서 태어나 요동에서 자랐다고 한다.[4] 그 외에는 영동군이나 논산시 등 충청도 지역에도 거주 비율이 높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남씨 인구 비율이 비교적 낮은 전라도 지역 중에서는 순천시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5] 당시 거주지는 전라도 장성현(현 전라남도 장성군). 직역 겸사복(兼司僕). 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남수(南守).[6] 과거 급제자로 1637년(인조 15) 별시 무과에 병과 1883위로 급제한 남현남(南賢男, 1598 ~ ?)이 있었다. 당시 거주지는 경상도 성주목(현 경상북도 성주군). 직역 겸사복(兼司僕). 아버지는 보인(保人) 남현손(南玄孫).[7] 이쪽은 남녘 남(南)이 아닌 쪽 람(藍)[8] 성이 남씨 이름이 궁봉식이라고 본인 입으로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