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13:43:57

선조(조선)/평가

런주에서 넘어옴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BF1400><tablebgcolor=#bf1400><:>
조선 국왕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c224;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black,#ddd> 태조 <colbgcolor=#fff,#1f2023>생애 | 건원릉 | 왕씨 몰살 | 이성계 여진족설 | 조선태조어진 | 전어도 | 종계변무 | 평가 | 여담 | 대중매체 | 가족관계
<rowcolor=black,#ddd> 태종 생애 | 평가 | 헌릉 | 태종우 | 일화 | 가족 관계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세종 업적 | 비판과 반론 | 특이한 기록들 | 한양 대화재 | 가족 관계 | 영릉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세조 생애 | 평가 | 광릉 | 어진 | 대중매체 | 기타
<rowcolor=black,#ddd> 예종 민수사옥 | 남이의 옥
<rowcolor=black,#ddd> 성종 생애 | 선릉
<rowcolor=black,#ddd> 연산군 생애 | 연산군묘
<rowcolor=black,#ddd> 선조 평가 | 목릉
<rowcolor=black,#ddd> 광해군 생애 | 대동법 | 평가 | 광해군묘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인조 평가 | 장릉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영조 생애 | 인물(성격) | 원릉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정조 생애 | 정조 어찰첩, 정조 한글어찰첩 | 가계 | 정조 어진 | 건릉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순조 홍경래의 난 | 세도정치
<rowcolor=black,#ddd> 철종 생애 | 임술농민봉기
<rowcolor=black,#ddd> 고종 생애 | 즉위 배경 | 홍릉 | 평가 | 여담
<rowcolor=black,#ddd> 순종 유릉 | 대중매체
}}}}}}}}} ||



선조 관련 문서
평가 · 목릉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1. 개요2. 긍정적 평가
2.1. 전란 전의 인재 등용2.2. 전쟁 대비2.3. 전후 처리
3. 부정적 평가
3.1. 이순신을 향한 의심과 박대3.2. 명나라 도주 계획3.3. 전쟁으로 떨어진 권위3.4. 공신 책봉 문제3.5. 왕자 관리 실패
3.5.1. 다른 왕들과 비교
3.6. 말년의 인재 등용 실패3.7. 치세의 핵심 업적이 부족하다는 견해3.8. 인사관리 차별과 줏대없는 행보
4. 논란
4.1. 선조의 온전치 못한 정신상태4.2. 선조와 이순신4.3. 방계승통 열등감 낭설

1. 개요

조선의 14대 왕 선조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긍정적 평가

2.1. 전란 전의 인재 등용

선조는 명종이 죽기 전에 보였던 처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무감각이 좋은 편이었다. 재위 10년 즈음부터는 로 분열된 신하들을 적절히 이용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등 꽤나 좋은 정치적 수완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붕당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려 했는데 양당의 상호 견제를 통해 결과적으로는 신권 억제에 성공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선조는 밑바닥인 인간성과 별개로 지능이 낮은 멍청한 왕은 아니었다. 일단 명종 대에 자리잡고 있었던 우수한 인재들 덕분에 선조는 선택권이 많았다. 전시 총리 류성룡, 성리학의 거두 이황[1]이이, 도체찰사 전문 이원익, 오성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이덕형, 이산해, 정철, 윤두수, 정탁, 이순신, 권율, 정인홍, 정문부, 이준경, 기대승, 홍섬, 권철, 이탁, 박순, 노수신, 이양원, 최흥원, 심수경, 심의겸, 심충겸, 성혼, 김명원, 박계현, 송기수, 오탁, 강사상, 한응인, 허욱, 이헌국, 김응남, 정유길, 유홍, 이헌국, 김계휘, 이호민, 유희춘, 신흠, 오윤겸, 박충원, 성영, 이시언, 심희수, 이정암, 배흥립, 서성, 박동량, 홍담, 정창연, 허성, 한효순, 이정구, 윤승훈, 유근, 윤방, 송언신, 노직, 이광, 윤선각, 김수 등이 모두 선조 대에 인물이다. 심지어 어의조차도 그 유명한 허준이다. -한석봉은 쓸모가 없어서 인재로 안쳐준다.

임진왜란 전 이순신의 파격적일 정도의 승진류성룡의 추천이 있었다고는 하나 대간에서 전례 없는 고속 승진을 거세게 반대했던 상황에서 선조가 밀어붙여서 나온 결과이다. 이순신은 이전까지 역임한 최고 관직이 종4품 직위였고[2] 현직으로는 종6품 정읍 현감이라는 낮은 직위에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전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유능한 장수들을 중요 거점에 배치시키는 작업의 일환이었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적합한 직책을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는 하나의 방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순신의 승진 속도 또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선조가 어찌나 밀어붙였는지 대간이 이러한 빠른 승진은 전례가 없다면서 강하게 반발했을 정도였다. 종6품 현감을 정3품 수사인 전라좌수사 자리에 올리는 것은 당시 관점에서 보나 지금 관점에서 보나 대단히 파격적인 행위였다. 현대로 치면 일개 대대장 수준의 이제 조금 일할 것 같다 싶은 중급 장교에게 뜬금없이 을 달아주고 해군 최고위 보직인 함대사령관에 임명하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이다. 오죽하면 신하들은 물론이고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 본인조차도 이 정도로 터무니없는 파격적인 승진에는 반대할 정도였으나 선조는 순차적으로 승진시키면 되지않냐며 단 1개월만에 전라좌수사로 승진시켰다.

또한 40까지 백수로 지내다 뒤늦게 문과에 급제한 권율을 무신으로 전향시켜서 최종적으로는 도원수 자리에까지 올렸다. 물론 권율 자신의 능력도 있었다지만 중요한 것은 이순신이나 권율이나 그러한 인재 승진에 있어 최종 결재권자는 결국 선조 본인이라는 점이다. 다만 권율은 이순신과는 달리 집안의 배경과 인맥이 크기는 했다. 권율의 인품과 능력이 좋기는 했으나 이러한 배경과 인맥이나 특히 무엇보다도 선조의 인선이 없었더라면 결국 권율도 그저 그런 선비로 말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원익과 같이 선조 시절에 중용받은 신하들은 이후에 왕조를 그나마 유지시켜주었던 여러 개혁안에 대해서 탐색했으며 이원익은 결국 광해군[3] 즉위 직후 이후 백년간 개혁의 효시[4][5][6][7]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의 초안을 올림으로써 후대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외에도 허준을 지원하며 《동의보감(東醫寶鑑)》[8]의 편찬을 명했던 사실 역시 그가 제법 안목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물론 유독 선조 치세에 인재가 많아 보이는 것은 6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활약할 인물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능력을 보일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다. 당장 구국지사들만 해도 한 둘이 아니며 사실 이순신도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나라를 구한 성웅이 아니라 그냥 '엄격하고 유능한 장수' 정도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전쟁이 없었다면 이순신이나 권율이나 장성급으로 승진했을지도 의문이라서 아예 역사에 존재감이 없는 이들로 남을 수도 있었다고 할 것이다.

2.2. 전쟁 대비

임진왜란 중의 대처는 왕으로서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했기에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책임 자체를 전적으로 선조에게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임진왜란의 원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나 분쟁이 있어서 조선이 빌미를 제공한 전쟁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임진왜란의 성격을 앞에 두고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았어야 했다는 주장은 일본에 대한 내정간섭이나 정복을 시도하라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는다.[9]

그리고 실제로 선조는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양반들과 백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임진왜란의 규모가 너무 터무니없이 컸기에 크게 도움이 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만큼 큰 전쟁이 터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기에 선조가 아주 놀고만 있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10]

선조가 통신사 파견 이후 대책 논의 과정에서 낙관론을 주장한 김성일을 신뢰했다는 에피소드 때문에 전쟁 대비가 미흡하여 피해를 자초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1591년부터 축성 및 전력 증강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이 실록, 징비록, 난중잡록 등 여러 사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거기에다 김성일도 낙관론을 주장할 만한 객관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통신사로 일본에 도착할 당시 토목 공사를 한창 진행하는 등 오랜 전란의 상처를 회복하는데 바빠서 도무지 전쟁을 시작할 여력이 있는 나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곧 조선을 칠 거라 생각하는 것은 교통사고를 당해 겨우 고비를 넘기고 재활을 갓 시작한 격투기 선수가 당신을 샌드백으로 삼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것이나 다름 없이 무리한 가정이었다. 심지어 징비록에는 통신사들이 왔음에도 도요토미가 정벌을 나가 있어 통신사들이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결국 그 때까지의 일본 정치는 불안정했다고 볼 수 밖에는 없다.

오히려 준비를 너무 급하게 해서 작은 읍성 위주로 수용 인원을 늘리는 쪽으로 축성했기에 임진왜란 같은 국가간 전면전 상황에서는 효율이 떨어진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류성룡징비록에서 이 점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1592년 4월 이전까지 10만명 이상 대규모 침공을 예상한 사람이 누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류성룡도 할 말이 없는 것도 맞다. 류성룡 본인부터도 그러한 예상은 못했을 것이니까 말이다. 당시 조선은 이전 역사의 선례, 특히 을묘왜변의 경험을 토대로 약 1만명 단위의 연안 침략을 상정하고 준비했다. 이는 당시 조선 뿐만 아니라 후대의 관점으로 보아도 매우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조선 건국 이래 10만명의 군대가 쳐들어 온 적도 없고 명이 임진년에 5만명을, 정유년에 10만명을 파병하면서 명과 조선이 부담해야 했던 엄청난 인적, 물적 지출을 감안하면 바다 건너 남의 나라에 20만명을 몰아넣는 국가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 분열되어 있었던 나라에서 말이다. 나라를 통일시킨 지 1년~2년 지난 나라가 바다 건너 나라에 대규모 침공을 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11]

오히려 지방 양반들과 일반 백성들이 방위 태세 정비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12] 징비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어떤 관리는 "요 앞에 물길이 있는데 어떻게 왜놈들이 오나요?" 라고 했다는데 이에 류성룡은 바다도 건너는데 작은 물길 하나를 못 건너겠냐고 서술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일단 당시 백성들의 전쟁 대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시궁창이었는데 명종 대에 을묘왜변도 있었고 옆 동네 사정을 뻔히 봤으면서도 전쟁대비에 매우 부정적인 백성들과 유생들은 결국 임진왜란 때 목숨으로 대가를 치렀다.

경상감사 김수는 지역 유생들까지 축성 작업에 동원시키는 등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다 지역 사족층과 충돌하고 민심을 이반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유생들까지 동원한 것은 의외에 가까웠는데 유생은 양반 계층이라서 원래는 군대 가고 성 쌓는 일에 동원되는 것이 정상이지만 "나라를 위해 공부한다!" 라고 하면 아무도 뭐라 못했었기 때문이다. 전라도에서는 전라감사 이광이 했었던 전쟁 준비 과정에서 쌓인 불만이 전쟁 발발 후 근왕병 모집 과정에서 터져버리며 왜군이 쳐들어온 와중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반란군 진압부터 해야 할 정도였다. 선조 역시 과도한 전쟁준비가 민심을 이반케 한 점을 인정하는 교서를 내렸다.
(중략) 내 즉위한 지 25년이 되었으나 비록 인덕이 백성에 미치지 못하고 은택을 베풀지 못하고,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하여 국정에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본심인 즉 근년에 북방 국경의 많은 변고가 있었음에 비추어 군정이 해이함을 알고 성지를 높이고 호를 깊이 파고 병갑을 굳게 해서 외환外寇을 막는다고 하여, 중외에 명령하여 감독을 엄히 하였더니, 실지로는 성이 높아지니 국세가 날로 약해지고, 성지의 호가 깊어질수록 백성의 원망도 깊어져서 끝내 와해가 되어 이 지경에 이르고, (중략)
<정만록>, 이호응 역주

내가 비록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치에 실수한 것이 많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어여삐여기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8월 1일 무자 7번째기사
게다가 개전 직전 경상좌수영의 진포 이동 현황과 개전 직후 경상도 내 조선군의 움직임을 추적해보면 분명히 왜군의 침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고, 각 군현의 군사들이 어디로 모이고, 이동하고, 방어 중심은 어디인지 대응 매뉴얼 자체는 이미 세세하게 짜놨었다. 본래 왜구는 섬이 많은 전라도나 경상 우도 지역을 중심으로 들어오며 섬이 거의 없고 해안선이 단조로운 경상 좌도는 방어 중심에서 다소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직전에는 경상좌수영 관할하에 포항, 울산, 경주, 기장, 영덕 등지에 흩어져 있던 진포 7개를 모두 남동해안 주방어선인 부산-동래 인근으로 재배치 시켰으며 경상좌수군은 지상군으로 전환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진지하게 침입을 생각하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조치였다.[13]

전쟁 준비에 골몰했던 시기가 왜관에서 왜인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이후라는 주장이 종종 있는데 위에서도 거론되는 전시를 대비한 인재 채용이나 김수가 전쟁 준비를 심하게 한다고 욕지거리 들어먹은 시점은 보다시피 임란으로부터 단 1년 전이다. 통신사가 일본에서 복귀한 시점을 고려하면 일단 전쟁 준비를 하기는 했다. 다만 그해 11월 김성일이 일본이 안 온다니까 왜 불필요한 일을 해서 소요를 일으키느냐는 논지의 시폐 10조를 상소했고 선조가 이를 받아들여 그 후 축성건은 흐지부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것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는 점인데 시페 10조에서 문제를 삼은 것 중 하나가 이순신 등의 장수들의 특진 비판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놓고 보면 관점에 따라서 선조가 전쟁 준비를 미흡하게 했다고도 볼 수 있을지언정 치명적이었던 요인은 준비를 했다 또는 준비를 안 했다가 아니라 선조가 했던 그 준비의 시간이 택도 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단 1년 만에 전국이 축성 작업을 하고 알맞은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등의 작업을 했어야 했다는 것인데 이것을 1년 만에 준비하는 것은 현대 국가 수준의 시스템이나 정복 전쟁을 한창 벌이는 제국마냥 만날 전쟁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면 힘들다. 더군다나 조선은 전근대에도 유난히 작은 정부로 버티던 나라였음에도 저렇게 급하게 해서 탈이 났다. 이 전쟁 대비는 비록 급박하고 정신없이 진행했지만 그럼에도 개전 20일만에 한양이 함락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잘 작동했으며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침공했던 15만명의 일본군 중 7만명이 남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까 아주 쓸모 없는 짓도 아니었다.

2.3. 전후 처리

전후 처리 과정도 후계자인 광해군에 비하면 상당히 괜찮았다는 연구가 있다. 적어도 선조는 광해군처럼 무리하게 수없이 궁궐을 짓는다 수선을 떨지도 않았고 검소하게 살며 기껏해야 승하 1년 전에 창덕궁에 대한 재건 공사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전란 중에 《동의보감(東醫寶鑑)》[14]의 편찬을 명하고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15][16][17][18][19][20][21][22]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하고[23][24][25][26] 전후 토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신축년(선조 34년)부터[27] 갑진년(선조 37년)까지 계묘양전(癸卯量田)을 실시해서[28][29][30][31] 전결 확보를 시도했으며[32][33][34][35][36] 납속책을 확대해서[37] 세수증대를 꾀하는 등의 전후 정비를 하였다.

선조가 내걸었던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는 기조에 대해 설명하자면 1600년 9월에 비변사는 12개조를 선조에게 제출했고[38][39] 본격적으로 전후 복구 사업을 실시했다. 조정에서도 더이상 민간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고 왕조 재건의 주체는 조선의 민간 사회와 백성이며 이들의 경제적 성장의 안정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을사년(선조 38년)에 공안개정(乙巳貢案)을 통해 농민들의 부세 부담을 3분의 1로 낮춰주는[40] 과감한 감세 정책을 실시했으며[41] 개간장려를 위해서 산림과 천택의 전면 개방[42][43][44][45][46][47][48] 등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49]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임진왜란 발발 이후 1년만에 한성으로 돌아오자마자 훈련도감을 설치하고[50] 조총 도입 및 개량을 시도했으며[51] 여진에 대한 견제도 계속 실시해서 노토 부락을 정벌하고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건주 여진이 세력을 확장하는 기세를 보이자 정보를 염탐하며 여진의 상황을 명 조정에 알려 대신 처리하게 하는 모습도 보였다.

3. 부정적 평가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움은 많으시나 덕을 쓰심이 넓지 못하고 좋은 말 듣기를 매우 좋아하나 많은 의심을 버리지 못하십니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이 힘써 건의하는 것을 지나치지 않은가 의심하고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는 자를 교만스럽거나 과격하다고 의심하십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얻으면, 그에게 당파가 있지 않은가 의심하고 남의 죄와 허물을 공격하면 편파적으로 모함하지 않은가 의심하십니다. 더욱이 명령을 내리실 때면 말씀하시는 기풍이 곱지 못하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며칠전 교지(敎旨)에 말씀하시기를 "대언(大言)을 다투어 아뢰고 전에 없던 일을 행하기 좋아하고 있으니, 마땅히 풍속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올바로 될 것이다."고 하셨는데, 이 교지가 나오자마나 여러 사람들의 의혹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율곡 이이, 만언봉사(1574년)[52]

"한산을 고수하여 호표(虎豹)가 버티고 있는 듯한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반드시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말해도 소용이 없지만 어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방치한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은 배만이라도 수습하여 양호(兩湖) 지방을 방수(防守)해야 한다."
선조 실록 90권, 선조 30년 7월 22일 신해 3번째기사[53]

"흉적이 조금 물러가고 종묘 사직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는 참으로 대인(양호)의 공덕이라 감사함을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절을 하여 사례하겠습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이러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상이 굳이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상이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戰船)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대인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과인에 있어서는 참으로 미안합니다."
선조 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20일 정축 1번째기사[54]

"지난날 내가 국세가 위급함을 지나치게 걱정하여 풍진(風塵)001)(註 001)(풍진(風塵) : 전쟁.) 의 경보가 뜻밖에 생겨나고 수습할 수 없는 재앙이 조석 사이에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거듭 경들을 번거롭게 하면서 망령되이 물은 일이 있었는데, 끝내 방비책을 진달하지 않았다. 만약 적변이 갑자기 발생하면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릴 것인가. 지난 임진년에 김성일(金誠一) 등이 망령되게 사설(邪說)을 주창하여 ‘왜적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내가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을 기롱하였고, 변방 방비에 뜻을 둔 사람들까지 배척하였으며, 심지어는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파견하는 것까지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다가 왜적이 깊이 쳐들어오자 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은 체찰사(體察使)의 명을 받고서도 가지 않았고, 신립(申砬)은 시정의 건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행장(行長)의 10만 대군을 막다가 단번에 여지없이 패하여 나라가 뒤집어졌었다. 이제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선조 수정 실록 35권, 선조 34년 2월 1일 경오 1번째기사

"이번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나라 장사(將士)[55]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殘賊)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일찍이 제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權栗)은 행주(幸州)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 나은 편이다.

그리고 중국 군대가 나오게 된 연유를 논하자면 모두가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별도로 훈명(勳名)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생각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종한 사람을 녹훈할 적에 아울러 녹훈하도록 말했었다. 그러나 이는 대신들이 의논하여 처리하는 데 달렸다."
선조 실록 135권, 선조 34년 3월 14일 임자 8번째기사[56]

"내 오늘의 일을 살펴보건대 우리 나라는 무략이 강하지 못하고, 조종조의 일로 말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싸워서 승리한 적이 있지 않다.[57][58] 우리 나라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59] 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 2백 년 이래 여대(麗代)의 문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으로 보면 문장과 무략이 모두 고려 때만 못한 셈이다. 장수에 있어서도 고려 때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 밖에 결진하여 포휘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어디에서 2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60] 이는 사람의 수효가 전조보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사천(公私賤)은 날로 번성하는데 반해 군졸의 액수는 날로 감축되기 때문이니, 호령과 군정 또한 전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의(私意)로 헤아려 보건대 송(宋)나라 조정과 너무도 비슷하다. 자고로 국세가 이와 같으면 반드시 이적(夷狄)의 화를 받는 법인데 우리 나라의 일이 실로 염려된다. 무략만 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재집(宰執)들 중에도 병법을 아는 사람이 없고 신진 문사들은 전연 무사(武事)를 모르고 있다. 내가 조신(朝臣)들을 경홀히 여기는 마음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시세(時勢)를 알지 못하여 그렇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인가? 무신은 책망할 것도 없거니와 반드시 독서한 연후에야 고금 성패의 이치를 알 수 있다. 열 가지 일을 알아도 한 가지 일을 시행하는 자 또한 드문데 하물며 전연 옛글을 모르는 데야 말해 뭐하겠는가. 고사(古史) 뿐 아니라 병가(兵家)의 글을 아는 자 또한 전무하다."[61]

하니, 아뢰기를,

"과연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들과 병법을 논한 적이 있었는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장(武將)은 활을 당기고 말을 달리는 일밖에 다른 기능이 없고, 문신은 오직 시구(詩句)의 연마만을 힘쓸 뿐이다. 내가 털끝만큼이라도 경홀히 여기는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경에게 숨기지 않고 다 말하는 것뿐이니 말로 본의를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왜적은 한당(漢唐)의 성세에도 당해내기 어려웠으나 북적(北賊)에 이르러는 하나의 양장(良將)이면 충분한 것인데도 이처럼 어려우니, 실로 통탄할 일이다. 축적이 많은 후에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옛사람이 부국 강병(富國强兵)이라고 하였으나 부강만을 위주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축적이 있은 후에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62]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에는 매우 부유하였는처럼 가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山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왜국 역시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지는 않다."[63] 그런데 왜국은 몇 개의 도로 나뉘었는지 모르겠다."
선조 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기사

3.1. 이순신을 향한 의심과 박대

당대에도 이순신을 박대한 것을 두고 욕을 많을 먹었고 후대에는 아예 박제되어 카카오맵목릉 리뷰 등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 별점 테러까지 당할 정도이다. 선조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세종대왕과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이자 성웅이순신을 아주 노골적으로 의심하고 박대했는데, 이는 당시 신하들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매우 부정적으로 비쳐졌다는 기록이 많다. 그 일련의 행위는 군신 관계 이전에 인간 대 인간으로 봐도 정말 한심한 수준이었다는 평가는 조선 시대나 현대나 별 이견이 없다. 심지어 평시에 그런 짓을 했다면 모를까, 전시에 그랬다는 것이 질이 매우 안 좋았다.

선조는 전란 직전 현대에는 기록은 없으나 당시 전공을 올리던 원균을 전라좌수사에서 경상우수사로 영전시켰으며, 이후 원균의 허풍만을 믿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이후 원균을 그 자리에 임명하고 부산포로 진격하라는 명을 내려서 칠천량 해전의 참패에 일조하게 된다. 당시 구국의 영웅이자 현재진행형으로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장수를 의심이 가는 점이 있다는 이유로 적이 흘린 가짜 정보인지 사실인지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적의 본진인 부산을 공격해 부산으로 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는 어명을 거역했다"라는 핑계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고문한 것이다. 이는 이순신 입장에서도 할 말이 많은 것이, 당시 가토는 이미 바다를 건너와 버린 상황이었기에 선조가 아니라 선조 할아버지가 살아돌아와서 그를 잡으라고 명령했어도 별 수 없었다. 는 원래 무능해서 원래 별 수 없지 않나... 증조할아버지를 살려냈으면 어떻게 되지 않았을까 애초에 이 일을 기획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자신과 가토의 널리 알려진 불화를 이용해 이순신을 제거하려 했는지, 아니면 진짜로 조선에서 가토를 제거하기를 바란 것인지 두 관점이 있고, 따라서 고니시와 가토가 짜고 친 고스톱으로 보거나 고니시의 예상과 다른 전개가 되었다는 것으로 갈린다. 물론 어느 쪽이든 결국 왜적에게만 좋은 짓 해 준 꼴이니, 다른 자도 아닌 국가의 지도자가 나서서 이적 행위를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은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헐뜯고 있습니다. 만일 율로 다스린다면 마땅히 둘을 다 죄주어 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순신은 왜변 초에 병선(兵船)을 모아 적의 진로를 차단하여 참괵(斬馘)을 바친 공로가 많았고, 원균의 경우는 당초 이순신과 협력하여 역시 적의 선봉을 꺾는 성과를 올렸으니, 이 두 사람의 충성과 공로는 모두 가상합니다. 위에서 특별히 잘 화합시켜 진정시킬 수 있는 대책을 생각하시어 급히 선전관을 보내 하서하여 국가의 위급을 우선으로 돌보라고 권하면서 마치 한 광무(漢光武)가 가복(賈復)과 구순(寇恂)에게 하듯444)[64] 하신다면, 저 두 사람 또한 전혀 양심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찌 감격한 마음으로 성상의 명령을 공경히 받들어서 옛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성상의 뜻을 몸받지 않고 끝까지 깨닫지 못한 채 그전의 잘못을 영영 고집한다면, 그때에는 자연 나라의 법이 그들을 처리할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두 사람은 틈이 벌어질 대로 벌어졌으니, 원균을 체차(遞差)하여 그들의 분쟁을 지식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나의 생각에는 이순신은 대장으로서 하는 짓이 잘못된 것 같으니, 그중 한 사람을 체직시키지 않을 수 없다. 혹 이순신을 체차할 경우는 원균으로 통제사를 삼을 수 있거니와, 혹 원균을 체차할 경우는 다른 사람을 차출해야 할 것이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57권, 선조 27년 11월 28일 임인 2번째기사[65]
게다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막중한 임무가 지워진 자리에 무능한 주제에 허장성세만 높은 자를 떡하니 앉혀놔 조선 수군이 궤멸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국가를 다시 한 번 전란으로 내몰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무서울 게 없어진 일본군은 과거 임진년에는 발을 들이지 못했던 전라도를 마음껏 유린한다. 이 때 남원성과 황석산성, 그리고 전주성이 일본군에 함락되면서 수천의 백성과 군사들이 죽었고, 조선은 다시 한 번 아비규환에 빠진다. 특히 이 시기 이순신의 통제영이 있던 한산도는 물론이고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까지 일본군에게 넘어간데다, 이날 이후 이순신은 결국 자신의 본영인 여수에 돌아가지 못한 채 영면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선조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쳐도 정유재란의 원인은 거의 전적으로 선조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유재란 자체는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명나라에 말도 안 되는 중2병급 협상안을 내놓은 순간부터 이미 징조가 보이긴 했으나,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인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 만약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이 승전하거나 최소한 방어에 성공했다면 정유재란은 그냥 무력 시위 정도로 끝났을 수도 있다. 심지어 그때까지만 해도 이순신이 꾸준히 전력을 증강한 덕에 일본 수군을 충분히 막고도 남을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7년 전쟁기간동안 홀로 200척을 해먹는 지휘관 원균만 아니었다면 정유재란은 거의 확정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 정론이다.[66]

게다가 원균의 무능함을 미리 몰라봤던 것이야 뭐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그 밑천이 진작에 다 드러난 칠천량 해전을 겪었으니 원균이 졸장 중의 졸장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다 드러난 판에도 최종 인사 책임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자꾸 속 보이는 정치질을 시도했다. 선조는 칠천량 해전이 원균을 임명한 자신의 책임이 아닌 엉뚱한 하늘의 잘못이라고 끝까지 책임을 회피했고, 명량 해전에서 13척으로 300척으로 알려진 일본 수군의 대함대를 상대로 믿을 수 없는 승전을 거둔 이순신을 두려워하며 그가 전사하는 그날까지도 경계하고 시기했다. 일례로 전후 원균이 이후 이순신, 권율과 동일한 선무공신 1등으로 서훈된 것도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시기와 견제로 인한 발로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나마 원균에게 권율, 이순신과 동일한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가 아닌 종1품 숭록대부가 추서된 건 아무리 그래도 칠천량 해전이라는 졸전을 일으킨 원균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수군 명장 이순신, 육군 명장 권율과 동일한 반열로 대우하는 건 이들에 대한 모욕이고 지나치다고 신하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신하들은 그나마 선조의 눈치를 봐서 원균을 2등으로 올려놨지만 신하들 입장에서는 원균의 이름이 공신 목록에 올라가 있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결국 선조가 이순신을 그렇게 싫어한 이유는 그저 하찮은 질투심 탓인데 이에 그치지 않고 나중에 자기 아들인 광해군에게도 똑같은 이유로 똑같은 짓거리를 해대서 조선의 미래마저 심하게 훼손시키게 된다.

무엇보다 이순신이 잡혀간 정유년은 이순신 개인에게도 매우 불행한 해였다. 아들이 압송되었다는 소식에 어머니 변 씨가 83세의 고령임에도 수도 한양에 투옥된 아들을 보려고 무리하게 여수에서 올라오다가 배 위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선조를 비롯한 수뇌부들에서 나온 수군 폐지론에 맞서가면서 애써 길러낸 최강의 조선 수군은 한순간에 궤멸되었다. 더군다나 이순신이 아끼던 셋째 아들 이면은 의병으로써 활동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인 아산으로 쳐들어온 일본군과 장렬히 싸우다 죽었다. 이는 어머니의 죽음만큼 이순신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정유재란이 확대되지 않았다면 이순신의 아들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며 내려보낸 교지를 보면 당시 모친상 중인 이순신이 통제사 임무를 거절할까 봐 왕이 신하에게 자신의 잘못을 비는 문구가 적혀 있긴 하다. 어찌 보면 파격적인 교지이긴 하나, 문제는 선조가 이순신의 통제사 직책은 돌려주면서 정작 그의 품계는 돌려주지 않아 휘하 수사들이 맞먹으려 까불어도 뭐라 할 수 없는 애매한 지휘권을 돌려주는 식으로 끝까지 찌질하게 굴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시기한 것마저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정유년 12월에 선조는 이순신이 상중이라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여 그에게 고기 반찬을 하사했다. 이 대목은 어찌 보면 신하의 건강을 염려한 자비로운 왕의 선물로 볼 수 있으나 이순신의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는 선조가 내린 고기 선물을 결코 순수한 의도라고 볼 수 없었을 것이고, 막말로 고인드립 내지 패드립으로 간주될 수 있는 저열한 짓거리였다. 실제로 이날 난중일기에 이순신은 선조가 고기 반찬을 하사한 일을 가지고 “비통, 비통하다”[67]라고 적었다.[68] 아무튼 이순신은 다시 복귀하여 징하게 질척대는 이런 저런 견제에도 명량 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선조는 칭찬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이순신의 이름이 높아지자 매우 불편해했으며, 여기에 대한 포상조차 주지 않았다. 그나마 정2품 정헌대부로 품계가 복귀된 것도 명나라 경리 양호가 "도대체 왜 이런 전공을 세운 장수에게 치하를 하지 않은 거냐"라며 계속 압박했기 때문이다.[69]

선조와 이순신 양측이 처해있는 입장과 전공, 나라를 위한 희생 정신, 부하 관리와 민심의 안정화까지 종합해 결론짓자면 선조의 능력과 선택은 명백히 이순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선조가 어떤 감정과 속셈으로 이렇게까지 이순신을 홀대했을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방계 혈통이라는 정통성 컴플렉스로 인한 자격지심이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송고종이나 숭정제처럼 고군분투하는 장수를 모함으로 아예 죽여버리는 최악의 멍청이 짓까지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하지만 만약 이랬다면 조선은 일본의 영토가 되고 선조는 연산군도 뛰어넘는 조선최악의 폭군이 됬을 것이다.[70]

3.2. 명나라 도주 계획

상이 영변 행궁(行宮)에 납시어 호종한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최흥원(崔興源)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주(定州)로 이주하고 싶으시더라도 우선은 여기에 머무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에 머무를 것이니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정철이 아뢰길,
"세자가 지금은 여기에 머물다가 끝내는 정주(定州)로 갈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귀성(龜城)이나 강변(江邊) 등처로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세자가 여기에 머무르면 힘이 분산되어 조정이 모양을 이루지 못할 성싶고 인심도 역시 요동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종하는 관원을 여기에 많이 머물게 하고 나는 가벼운 행장으로 옮겨갈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우선 평양의 소식이 오는 것을 기다려 봄이 어떻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머물자고 권하는 것이나 피하자고 권하는 것이 각각 소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다시 갈 만한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말하여 보라. 만약 있다면 내가 따를 것이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왜적의 기세가 꺾이면 북도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가산 군수(嘉山郡守) 심신겸(沈信謙)이 행재소(行在所)에 와 있었는데, 상이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가산까지의 거리를 물어보도록 하니, 입계(入啓)하기를,
"90리 길입니다. 그러나 큰 강(江)이 둘이 있고, 가산에서 의주(義州)까지는 촌락이 다 비어 있으므로 인연(人煙)이 매우 드뭅니다."
하자, 철이 아뢰기를,
"서북 지방은 조금 완전하여 우리 나라 강토가 아직은 다 함락당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피할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강계(江界)는 사람들이 모두 방어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랫사람들은 어느 곳이든 못 갈 곳이 없겠지만 나는 정주(定州)로 피해야겠다. 평양이 함락당하면 함경도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괵이 아뢰기를,
"평양이 함락당하면 우리 나라는 보전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자, 철이 아뢰기를,
"임진(臨津)은 왜적이 주인이 되고 우리가 객(客)이 되었지만, 평양은 우리가 주인이 되고 왜적이 객(客)이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김정목(金庭睦)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왜적이 만약 뗏목을 만들어 일시에 진격해 오면 그 예봉(銳鋒)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피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요동으로 들어갈 것을 의논하고 있는데 요동으로 일단 들어가면 조종(祖宗)의 종묘(宗廟)·사직(社稷)을 장차 누구에게 부탁하시겠습니까."
하자, 철이 아뢰기를,
"1주(州)·1읍(邑)만 가지고서도 역시 도모할 수 있습니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중국이 우리를 받아주지 않고 왜적이 또 뒤에서 핍박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정주(定州)로 이주한다는 분부가 있자 인심이 동요되고 있으니 잘 생각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괵이 아뢰기를,
"시종신(侍從臣)을 보내어 조치하는 일을 우선 멈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괵이 아뢰기를,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전일에 왜적과 통신(通信)한 일이 있었으니 중국에서 그다지 믿어주지 않을 성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요동에 들어갈 수 없단 말인가. 왜적의 문서(文書) 중에, 그들의 장수를 8도에 나누어 보내겠다고 하였으니, 우리 나라 지방에서는 피할 만한 곳이 없을 성싶다."
하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5번째 기사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 갈 만한 지역을 말하지 않는가. 내가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하였다. 상이 세자(世子)를 이곳에 주류(駐留)시켜 두고 떠나는 것이 괜찮겠느냐고 하문하자, 철(澈)이 아뢰기를,
"만약 왜적의 형세가 가까와지면 동궁도 어떻게 여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하고,[71]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7번째기사

상이 이르기를,
"요동으로 가든지 다른 곳으로 가든지간에 부질없이 의논만 할 것이 아니라 속히 결정하여 그 때를 당해서 갈팡질팡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니, 대신들이 아뢰기를,
"당초에 요동으로 가자는 계책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의논을 들은 뒤로는 신민들이 경악하였으나 달려가 하소연할 곳도 없었으니 그 안타깝고 절박한 실정이 난리를 만난 초기보다 심하여 허둥지둥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왜적들이 가까이 닥쳐왔지만 하삼도가 모두 완전하고 강원·함경 등도 역시 병화(兵禍)를 입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수많은 신민들을 어디에 맡기시고 굳이 필부(匹夫)의 행동을 하려고 하십니까.[72]
그리고 명나라에서 대접하여 허락할는지의 여부도 예측할 수 없으며, 일행 사이에 비빈(妃嬪)도 뒤떨어져 갈 수 없는데, 요동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하여 복색(服色)도 다르고 말소리도 전혀 다르니, 비웃고 업신여기며 무례(無禮)히 굴면 어떻게 저지하겠습니까. 비록 요동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곳의 풍토와 음식을 어떻게 견디시렵니까. 생각이 이에 이르자 눈물이 절로 흐릅니다. 요동으로 가는 문제는 신들은 결코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명나라 병사들이 비록 많이 왔지만 우리 나라에서 향도하는 군사가 없어서는 안 되니 이 향도군을 모집하는 것도 시급합니다. 본주(本州)에 토병(土兵)들이 거의 1천 명쯤 되니, 지금 비록 무너져 흩어졌지만 만약 과거(科擧)로써 소집한다면 그들을 모으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병조(兵曹)에서 내일 활쏘는 것을 시험보이려고 하니, 상께서 당분간 여기에 머무르셨다가 다시 왜적의 소식을 들은 다음 수상(水上)을 경유하여 벽동(碧潼)에 이르러 며칠 머무르시다가 또 강계(江界)로 가 형세를 보고 또 설한령(薛罕嶺)을 경유하여 함흥(咸興)에 이르시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4일 임자 1번째기사

신잡(申磼)[73]이 아뢰기를,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필부로 자처하기를 좋게 여긴다면 이 땅에 있더라도 피란할 수 있을 것입니다."[74]
...
신잡은 아뢰기를,
"여기 있는 군신(群臣)들이 누군들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가[75]가 우리 땅에 머물러 계신다면 거의 일푼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일단 요동으로 건너가면 통역(通譯)하는 무리들도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은 물론, 곳곳의 의병들도 모두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장(諸將)[76]들은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만을 두려워합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 기축 1번째기사

임용한: 일단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다라는 것에 대해서 좀 변명이랄까? 해명을 좀 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너무 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게 있어요. 예를 들면 수도를 버리고 후퇴하는 건 서양 사람들 입장에선 하나도 문제가 안 돼요. (허준: 그럼요.) 단 이건 있어요. 봉건 영주가 적이 쳐들어 왔는데 도망가잖아요? 그러면 그 주민들한테 모든 인망을 잊(잃)어버려요. 왜? "내가 영주로도 군림하고 평소에 세금받는 거는 너희들을 지켜주기 위해서야!" (라는 것이 당시 사회 시스템이었으니까요.) 근데 산적이 쳐들어 왔는데 보안관이 도망을 쳤어. 그럼 보안관은 끝이죠. 근데 왕은 보안관이 아니에요. 보안관(일)부터 전체 조직을 관리하는 사람이지. 그래서 전쟁을 포기하고 자기 할 일을 안 했느냐가 우리가 최종적으로 판단할 일이지 피했다나 피난 갔다는 것을 갖고 우리는 비겁하다라고 말할 순 없는 거에요.[77]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18:22~19:15)
선조가 단순히 도망쳤다고 해서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결국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라는 점이다. 결과론적으로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은 의도야 어떻든 마냥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선택이었다. 도망을 안 쳐서 왕이 잡혔다면 조선은 그대로 멸망했을 것이다. 비정하지만 혹 사로잡히지 않고 죽었다면 세자를 새 왕으로 옹립하고 버틸 수라도 있는 반면, 현직 왕이 생포당하면 그대로 패배 확정이기에 나라를 위해서라도 왕은 유사시 안전한 곳으로 도망칠 필요가 있다.[78]

현대에도 국가 원수가 잡히거나 사망하면 거의 패배하는데, 과거는 특히 더했다. 당시 일본의 병법도 적장만 잡으면 끝이라는 논리 하에 전국시대를 보냈고[79],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1순위 목표로 선조의 신변 확보를 두고 한성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선조의 도피로 인해 예상치 않게 전쟁이 길어져 조선군이 재집결한 시간이 벌어지고 일본군은 각지에서 보급로가 끊기고 충무공의병의 활약, 명나라의 지원군 등으로 인해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80][81][82]

일본군은 최단 시간 내에 한양을 점령했으나 정작 목표였던 왕의 확보에는 실패하면서, 오로지 한양만을 위해 진격하느라 외면했던 각지에서 의병과 관군이 튀어나오며 전쟁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왜란이 터지고 빠르게 명나라로 향해 원군을 요청한다는 선조의 선택지는 사실 그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83] 다행히 그 선택지가 먹혀들었고, 명의 원군을 얻어냈으며,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관군과 의병이 일어날 시간도 벌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침략을 당한 전쟁에서 승전해 나라를 지켜냈다는 결론은 적어도 사실이다.

진짜 문제는 선조가 도망을 간 이유가 '조선이 무사하려면 일단 내가 버텨야 한다!' 같은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선조의 행보는 전쟁 수행을 위한 일시 후퇴와는 전혀 상관없이 국가의 존망을 책임지기 싫어서 벌인 도주였다. 위에서 말한 대로 선조의 후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후퇴 이후 다시 병력을 모으고 방어선을 재정비하는 등의 일본군에 맞서 조선을 지키려는 행보가 있었어야 하는데,[84] 선조는 그 부분에 있어서 매우 부족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선조는 피난이 아니라 당장의 군사적 대응은 당시 겨우 10대 중후반이었던 세자인 광해군과 신하들에게 모두 떠넘겨 버린채[85] 아예 나라를 버리고 요동을 넘어가려 했다는 것이다.[86] 이렇게 되면 가타부타 이야기할 필요 없이 그냥 대단히 적극적인 선조의 행위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져버릴 수 있었고, 그건 누가 봐도 조선이 망해도 상관없으니 나는 살겠다는 제스처였다.[87][88]

특히 이 요동 도주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선조가 막판에 나라를 버릴 수 없다고 마음을 돌려서 안 간 게 아니고 명나라 측에서 일국의 왕이 전쟁 중에 왜 나라를 버리고 외국으로 오냐며 받아주지 않아서 도망을 못친 것이다. 선조가 어찌나 빠르고 간단히 나라를 버렸는지 명나라 조정에서 선조가 도주하는 것이 계략이고 몸을 피하는 척해서 일본과 내통하여 명나라를 치려는 음모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농담이 아니고 국가원수가 싸움다운 싸움도 안 해보고 도주하더니 "지원좀"도 아니고 "망명할게" 하면 이상하게 볼 일이 맞다. 게다가 일본군의 진군속도는 가히 경이로울 지경이라 아무 전투도 없이 진격한 것과 거의 동일할 정도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본인이야 "안남국도 멸망당한 뒤 입조하니 전쟁이 끝나고 회복시켜줬다"며 다시 돌아올 마음을 밝혔지만, 안남국의 사례[89]는 정말 운이 좋았던 하나의 고사일 뿐, 왕이 나라를 떠나고 멸망한 사례는 훨씬 많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었다. 더욱이 무슨 대단한 계획이 있어서 몽진하는 것도 아닌, 자기 목숨 하나 보존하겠다고 나라와 백성의 목숨을 몽땅 버리고 도망쳐서 명과 조선 둘 다 위기에 몰아넣은 작자 따위에게 망명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신하들도 매우 강경하게 반대했다. 6월 13일 기사에서 선조가 요동으로 들어가기 위해 정주로 가겠다고 은근슬쩍 운을 띄우자 정철이 평양의 소식을 기다려야 하며 아직 강토가 완전히 함락되지 않았으니 중국으로 가면 안 된다고 간언하지만 끝까지 도망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며, 8월에 이르러서는 선조가 총애하는 신하인 신잡조차 선조에게 대놓고 요동을 건너는 순간 왕이 아니라 필부가 된다며 필부가 되기를 원하면 이 땅에서도 피란할 수 있다는 강도 높은 비판으로 반대했을 정도였다. 의역하자면 정 요동에 가고 싶다면 퇴위하고 서인이 되어 가거라라고 선조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실제로 선조의 행적에 대해서 실망한 명과 조선의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움직임까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진짜로 선조가 요동으로 넘어가면, 신하들이 반발하며 선조를 폐위하고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했을 수도 있다.[90] 조선시대가 한국사 왕조들 중에서 왕이 강력했다고 하나,[91] 이 시기 선조의 권위는 그의 실책들 때문에 밑바닥이었다.[92][93]

더불어 선조는 의주로 도주하는 과정에서 임진강에서는 배를 불태우고 평양성에서는 앞에서는 평양성을 지키겠다고 백성을 속이고는 밤에 몰래 도주하는 등 백성들의 피난을 방해하는 행보로도 욕을 먹고 있다. 게다가 병법에 대해서도 무지해[94] 전과의 보고에 대하여 사실관계 확인을 명확히 하지 못해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그 자리에 앉혀서 칠천량 해전을 초래했으며[95] 일본 육군의 육상 보급선을 흔들어놓은 의병 지휘관들에게 이후 공신들의 공과를 논함에 있어 행한 하대는 옹호할 거리가 있을 수 없다.

그저 순전히 개인적 안위만을 생각해 적극적으로 나라를 버리려고 했고 결국 그것을 보다 못해 조선을 지키기 위해 명과 신하가 합심해서 왕을 폐위시키려는 상황까지 만든 것은 결국 선조 본인이었다. 또한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왜적이 따라올까봐 임진강의 배를 모두 불태워 백성들마저 도망칠 수 없게 했으며, 평양성으로 도주 후 평양을 지키겠다고 선언해놓고 야반에 몰래 도망친 점은 도저히 옹호를 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고 나서 종전 후에 '사실 조선군은 한 거 1도 없고 내가 데려온 명군이 다 해준 거임!'이라며 자신의 무책임한 빤쓰런을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 점이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옹호하기 힘든 추태를 보인 탓에 현대에는 런조[96][97]라는 새 묘호를 받고 신나게 까인다.

3.3. 전쟁으로 떨어진 권위

사신은 논한다. 상(上)이 200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당저(當宁)452)[98] 에 이르러서 남김없이 다 멸망시켜 놓고 겸퇴(謙退)하면서 다시는 백성의 윗자리에 군림(軍臨)하지 않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병을 이유로 총명(聰明)하고 인효(仁孝)한 후사(後嗣)에게 대위(大位)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 심정은 진실로 서글프나 그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신(大臣)으로서는 눈물을 흘리며 봉행(奉行)하더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극력 간쟁(間爭)하여 반드시 승락(承諾)을 받고서야 그만두려 하는가. 왜적이 물러가기 전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왜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환도(還都)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환도한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중국의 조사(詔使)가 공관(公館)에 있으므로 할 수가 없다고 하고, 조사가 돌아간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세자(儲宮)가 어려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세월을 끌며 말을 바꿔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치 어린아이가 서로 희롱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사리(事理)인가. 당시에 세자의 나이가 이미 약관(弱冠)이었고 학문도 고명(高明)하였으며 덕망도 이미 성숙하였으니 대위(大位)를 이어받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난을 평정하고 화를 종식시켰을 것인데, 계속 어린 세자(沖嗣)라고 하였다. 옛부터 약관의 어린 세자가 언제 있었던가. 끊임없이 간쟁하여 상의 훌륭했던 생각을 중지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7일 무오 5번째기사[99]
선조가 붕당의 상호 견제를 통해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고는 하나, 숙종의 환국과 영조의 척신정치와 마찬가지로 선조가 택한 왕권 강화 시도의 방식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국가적으로 전혀 유익하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된다.[100] 실제로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는 광해군 시기 봉산옥사, 계축옥사로 대표되는 대북의 폭주와 연관이 없다 할 수 없고, 더 나아가면 인조반정과 대북의 몰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선조는 한 술 더 떠서 가족 관리 측면에서도 평가가 매우 좋지 못하다. 우선 일찍부터 여색을 탐한다는 비판을 들었으며, 특히 후궁들이 뒷배를 믿고 워낙 횡포를 부려 대 원성이 심각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몽진 도중 선조가 특히 총애했던 후궁 인빈의 가마는 백성들에게 돌을 맞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은 선조의 총애를 받는 척신이었고, 이산해와 결탁해 정철을 실각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김공량은 내수사 별좌 시절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유명해 부정축재를 일삼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그의 탐학질로 인해 폭동을 일으키자 진압하거나 사태 해결은커녕 강원도로 도망가는 추태를 벌였다. 이런 사례는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일 때도 나타난다.

더불어 선조가 전쟁 중에 보였던 온갖 추태 때문에 권위가 너무 떨어져서, 평시라면 반역에 버금가는 하야 요구가 대놓고 제기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선조 25년 11월 7일 상소가 바로 그것이다.
유학(幼學) 남이순(南以順)·송희록(宋希祿)이 상소하여 백성들 뜻에 의해 동궁(東宮)에게 선위(禪位)할 것을 청하니, 비망기(備忘記)로 일렀다.
"전에 동궁으로 하여금 전단(專斷)하게 하도록 전교하였으나 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것이 어떤 일이기에 한갓 말뿐이었겠는가. 그만둘 수가 없다. 나는 평소 고질이 있어 날로 심해지는데 40이 되도록 죽지 않을 줄은 평소 생각조차 못했었다. 근일에는 두눈이 침침하여 곧 장님이 될 상황이니 비록 그대로 왕위에 있고자 해도 그 형세가 어찌할 수 없으니 마땅히 전의 뜻에 따라 근신(近臣)을 보내 내 뜻을 유시(諭示)하여 모든 크고 작은 일을 먼저 결단한 후에 아뢰게 하라. 이곳에서는 다만 사대(事大)와 청병(請兵)하는 일 하나만을 조치할 것이니, 이 역시 적을 토벌하는 일이다. 내선(內禪)하는 일 또한 나의 평소 뜻으로서 즉시 행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곳이 중국과의 경계여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 염려되어서이지 감히 욕심을 내어 무릅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은 마땅히 적을 섬멸하기를 기다려 시행해야 하니, 이런 뜻을 아울러 알라."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7일 계해 3번째기사
상술되었듯 선조는 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이순신을 비롯한 인재들을 잘 등용했는데, 왜란이 터지고 이몽학의 난이 발생한 이후로 생긴 의심병과 타고난 이기주의로 인해 나중에는 이들을 모두 숙청하기에만 바빠 신하들 사이에서도 긴장과 경계심을 이끌어 쓸데없이 적을 만든 것도 있었다.

게다가 세자인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며 왜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안, 정작 본인은 어떻게든 적을 막을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압록강을 건너 명으로 도망가서 살 궁리나 하고 자빠져 있으니 대체 누가 왕인지 헷갈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당시 조선 조정의 대신들 입장에서도 임진왜란 시기에 보여 준 선조의 모습은 너무나도 무책임하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다. 선조 25년 6월 18일 기사를 보면 요동으로 피하려는 선조에게 서인인 정철과 남인인 류성룡이 양위를 요구하러 갔다가 서로 눈치만 보다가 나왔을 정도다.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11월에 이르러서는 남이순, 송희록 등의 유생들 또한 '동궁에게 양위하라' 며 상소를 올리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선조가 반정당한 왕들 수준의 정치적 입지에 몰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막말로 이 정도의 실책이라면 정말 반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지만, 제 그릇에 맞지도 않는 권력에 대한 욕심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렬했던 선조는 역으로 이 양위 파동을 자신의 끈 떨어진 권위를 다시 세우는 데 이용했다. 선조는 조선 종묘 역사 중에서 선위 선언을 가장 많이 남발한 임금인데, 알다시피 그 선위 파동은 전부 속 훤히 들여다보이는 쇼에 불과했다. 그래도 꼴에 왕이라고, 어쨌든 전쟁 중에도 신하들은 선조를 말리며 자신의 충심을 보여야 했고, 세자인 광해군 역시 쉴 새 없이 대궐 뜰에 엎드려 어명을 거두어 달라며 빌어야 했다. 아래는 임진왜란 발발 첫 해와 이듬해에 벌어진 선조의 선위 소동에 대한 선조 실록의 기록이다.
윤두수 등이 세 번 아뢰고, 양사(兩司)와 【대사간(大司諫) 이해수(李海壽), 사간 이유징(李幼澄), 장령(掌令) 이시언(李時彦), 헌납(獻納) 김정목(金廷睦), 지평(持平) 길회(吉誨)·이광정(李光廷). 】 옥당(玉堂) 【응교(應敎) 구성(具宬), 정자(正字) 윤경립(尹敬立). 】 및 정원이 모두 차자를 올리니, 상이 일렀다.
"고질 때문에 사람들 뜻에 따르고자 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이처럼 소란을 떠니 우선 후일을 기다리겠다."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8일 갑자 4번째기사

상이 정원에 전교하였다.
"이제 평양을 이미 탈환하여 명나라 군사가 전진하니 부흥을 기약할 만하다. 다만 거리가 점점 멀어져 소식을 듣거나 책응(策應)하는 등 여러 일이 이 한 모퉁이에 있어 모두 그 편의를 잃었다. 과매(寡昧)한 사정은 지난번에 이미 모두 다 말하였다. 날이 갈수록 병이 고질화되고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심해지니 하루라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어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며 위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것이 어떤 일이라고 늘 말하면서 변명하는 자같이 하겠는가. 거기다가 요즈음은 중국 관원을 접대하는 일 때문에 추위를 무릅쓰고 애를 썼더니 한질(寒疾)이 더욱 심하여 전진하기에 쉽지 않은 형편이다. 그러니 승지를 보내어 어보(御寶)를 받들어 먼저 동궁(東宮)에게 선위(禪位)한 다음 빨리 안주(安州)로 나아가도록 하여 협력하여 책응하는 것이 옳다. 나는 뒤를 따라서 출발하도록 하겠다. 다시 말하지 말고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3일 무진 1번째기사

영의정 이하가 임시로 대리하라는 것을 정지하도록 세 번 계청(啓請)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렇게 무익할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어찌 사람에게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하는가. 대신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국가를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기 때문이다. 경들의 이 말은 아마도 대신의 말이 아닌 듯하다. 필부의 뜻도 오히려 빼앗을 수 없는데 경들이 어찌 병이 들어 흙으로 만든 등신 같은 사람을 구박할 수 있겠는가. 천리나 되는 먼 변방에서 반년 동안 풍상(風霜)에 찌들었으니 죽지 않은 것만도 이미 이상한 일이다. 마음 병과 눈병 그리고 머리 병과 다리 병이 반복해서 몸에 얽혀 반신(半身)이 온전하지 못하고 온몸이 모두 아파 방에 드러누워 땅속으로 들어가기만 기다린다."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27일 임오 1번째기사[101]

비망기(備忘記)로 전교하였다.
"나는 젊어서부터 병이 많아 반생(半生)을 약으로 연명(延命)하고 있는데, 이는 약방(藥房)의 제인(諸人)들도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이다. 전일 옥당(玉堂)에 내린 비답(批答)에 ‘인간 세상에 뜻이 없다.’고 한 말에서 더욱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니 지금 다시 말하지 않겠다. 겨울이면 방안에 틀어박히고, 봄·가을에도 정원(庭苑)을 돌아본 적이 없었다. 난리를 만나고부터는 온갖 고생을 다하였는데 이런 기력을 가지고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진실로 이치 밖의 일이니, 천도(天道)가 무지(無知)하다 하여도 가할 듯하다. 전에도 민박(悶迫)한 뜻을 가지고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호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조의(朝議)에 저지당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원수인 적을 토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리상 병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강서(江西)에 머물면서부터는 몇 달을 먹지 못하였고, 지금은 오직 죽만을 마실 뿐이다. 밤이면 병풍에 기대어 밤을 새우고 낮이면 정신이 혼란(昏亂)하여 멍청이가 되는데, 그런 와중에 광병(狂病)·목병(目病)·비병(痺病)·습병(濕病)·풍병(風病)·한병(寒病) 등 온갖 병이 함께 일어나서 이 한 몸을 공격하니, 한 줌의 원기(元氣)로써 어찌 그 병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광병으로 말하면 때때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곡(哭)을 하기도 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고함을 치며 달려가기도 하며, 무언가를 보고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놀라 머리털을 곤두 세우기도 하니, 예로부터 어디에 광병을 앓은 임금이 있었던가. 목병으로 말하면 두 눈이 어두워 사물을 분별할 수 없어 모든 계사(啓辭)의 글씨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머지 않아 소경이 될 것인데, 예로부터 어디에 소경의 임금이 있었던가. 비병으로 말하면 몸의 반쪽이 허약한 데다가 안개와 이슬을 맞은 뒤로는 그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오른쪽 수족을 전혀 움직일 수 없고 밤이면 쑤시고 아픈데 손으로 만져도 감각이 없어 마치 마른 나무 토막 같으니, 예로부터 어디에 한쪽 수족만 가진 임금이 있었던가.
이 밖에 고질이 된 더러운 병들은 일일이 들어 말할 수도 없다. 가을이 아직 깊지 않았는데도 갖옷을 껴입고 있으니 쇠약하여 숨이 거의 끊어지려는 형세가 하루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이러한데도 체면을 무릅쓰고 그대로 임금 노릇을 한 사람은 일찍이 전고에 없었던 바이니,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지금은 흉적이 이미 물러갔고 옛 강토(疆土)도 수복되었으므로 나의 뜻이 이미 결정되어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세자(世子)가 장성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치적을 이룩할 임금이 되기에 충분하니 선위(禪位)에 관한 여러 일들을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8월 30일 신해 2번째기사

세자(世子)가 내선(內禪)441)[102] 의 명이 내렸다는 것을 듣고 즉시 예궐(詣闕)하여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신은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어 어려서부터 학식(學識)이 없었으므로 비록 장성하긴 했으나 덕업(德業)이 전혀 없습니다. 분수 넘게 세자가 된 뒤로 능력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난리를 만날 즈음에 질병이 생겨 반년 동안을 고생하였으므로 정신이 희미하여 평범한 일을 처리하는 것도 결코 감당하기 어려운데, 어찌 감당할 수 없는 명이 변변치 못한 이 몸에 내릴 것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명을 들으니 놀랍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심정을 통찰(洞察)하시고 속히 성지(聖旨)를 거두시어 신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분수를 보존할 수 있게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미신(微臣)의 민박(悶迫)한 심정을 천지 신명이 굽어 살피고 계시니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8월 30일 신해 7번째기사

세자가 새벽에 대궐에 나아가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기를,
"신이 민망 절박하고 답답한 심정에서 날마다 혈성(血誠)으로 대궐 뜰에서 호소하였으나 오래도록 유음(兪音)은 받지 못하였고 성지(聖旨)는 더욱 엄하니 두려움에 떨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어제 성상의 비답을 보건대, 심지어 ‘병이 들어서 감당할 수가 없게 되면 자식으로서는 마땅히 부모의 마음으로 마음먹어야 한다.’고까지 하셨는데, 꿇어앉아 재삼 읽으니 감격하여 눈물이 흐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어리석다고 하더라도 부모의 마음을 받들어 따르는 것이 곧 자식된 직분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명을 감히 따를 수가 없었던 것은 실상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을 위하고 성상을 위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날이 갈수록 천청(天聽)은 더욱 막연하게 되고 있으니, 가슴 조이며 안절부절하다가 통곡할 뿐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용렬하고 불초한 점과 시세의 어렵고 위태로운 점에 대해서는 전후 남김없이 모두 말씀드렸으므로 성상께서는 반드시 충분하게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매양 민망 박절함으로 인하여 천위(天威)를 번거롭혀 드렸습니다. 물러와서 생각해보니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만 그보다 더 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의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면 만번 죽는 한이 있어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슴속에 있는 진심으로 다시 감히 우러러 번거롭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미미한 정성이나마 통촉하시어 특별히 가엾게 여기시어 속히 윤허하여 주신다면 이는 병들어 죽게 된 목숨이 천지 부모의 은혜에 의해 보존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에 있어서도 매우 다행스러울 것입니다.
신은 앓던 병이 다시 극심해져서 심신(心神)이 이미 저상되어서 기(氣)가 막히고 말도 어눌하여 민망스럽고 망극한 심정을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간곡한 정성을 제대로 아뢰지 못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을 것으로 여겨져 머리를 들고 대궐문을 우러르며 애절하게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러한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세 번 더 깊이 생각하셔서 속히 윤허의 명을 내리심으로써 국가의 무궁한 복이 연장되게 하소서. 신은 민망 절박하여 간절히 비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 땅에 엎드려 아룁니다."
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7일 무오 1번째기사[103]

좌의정 윤두수(尹斗壽)가 백관을 인솔하고 선위하지 말 것을 계청하면서 재차 아뢰니 답하였다.
"민망스럽고 절박하여 눈물까지 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 견딜 수만 있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했겠는가. 서울에 돌아가서 능침(陵寢)을 배알한 다음에는 즉시 나의 뜻을 받아 주겠는가? 그렇게 해준다면 지금은 억지로라도 따르겠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8일 기미 1번째기사

봉서(封書) 한 장을 도승지 심희수(沈喜壽)에게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봉서를 대신들에게 내리라."
하였다. 그 봉서의 대략에,
"과인(寡人)이 왕위에 있은 지 20여 년 동안에 지성으로 사대(事大)해 온 것에 대해 황천(皇天) 후토(后土)는 진실로 내 마음을 알 것이다. 불행히도 역적(逆賊)이 창일하여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파천(播遷)했다가 다행히 황제의 위령(威靈)을 힘입어 환도(還都)하게 되었는데, 온갖 병이 얽히고 설켜 감당하지 못할 듯싶다. 세자(世子)가 영예(英睿)하고 배신(陪臣) 중에 현명한 사람이 많이 있으니 족히 봉번(奉藩)544)(註 544)(봉번(奉藩) : 번방(蕃邦)으로서의 할 일을 해감.) 하게 될 것이다. 이에 선위(禪位)하고자 한다. ……"
하였다. 이어 비망기(備忘記)로 이르기를,
"이 봉서를 소매속에 간직했다가 연회가 끝날 즈음에 승지에게 보이고 나서 장 도사(張都司)에게 친히 주려고 했는데, 뜻밖에 장 도사가 갑자기 일어나므로 나도 창황하여 주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마음에 맹세했으므로 끝내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오늘 송 경략이 한 말을 보건대 매우 불칙했다. 나의 죄는 진실로 주벌을 받아야 하지만 배신들을 무슨 까닭으로 베려 하는가? 이른바 ‘구인(句引)’이라는 것은 또한 무슨 말인가?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게 될 것이다. 바라건대 경들은 국가를 위해 침착한 마음으로 선처해 간다면, 나 한 사람만 경들에게 두터운 은혜를 받는 것일뿐만 아니라 사직(社稷)에 대한 충성도 큰 것이 되니, 구구하게 고집할 생각을 하지 말라.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다."
하였다.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 11월 16일 병인 5번째기사

동궁이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망극하고 미안한 분부를 또 내리셨다 하니 놀랍고 몹시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미신(微臣)의 못난 점과 나랏일의 망극함을 다시 거론하여 성청(聖聽)을 더럽히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근자에 성지(聖旨)가 엄준하여 신을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셨는데 신은 본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황제의 명이 이미 내려져서 피할 길이 없으니, 하루 바삐 달려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병에 걸려 이토록 지체하고 있으므로 두렵고 떨려서 밤낮으로 근심하는데다가, 더구나 이 막대한 명이 어려움이 많은 때에 또 내려졌으니, 두루 돌아보아도 떨어져 죽을 것만 같아 몸 둘 곳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위로 종사(宗社)의 큰 계책을 생각하시고 몹시 절박한 미신을 굽어 살피어 다시 성은(聖恩)을 내리시어 하루 속히 성명(聖命)을 거두소서. 그러면 신의 어리석은 분수가 잠시나마 편안할 수 있을 뿐더러, 국가와 백성 모두가 더없이 다행할 것입니다. 못내 하늘을 바라보고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축원하는 바입니다. 삼가 엎드려 아룁니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7일 정유 9번째기사

윤11월 16일: 선위에 관한 일을 유성룡에게 전교하다
윤11월 16일: 유성룡이 선위하는 일이 시기가 아니라고 비밀히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선위하는 일의 불가함을 비밀히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재차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네 번째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다섯 번째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8일: 유성룡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선위하는 일에 관해 대신에게 전교하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네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5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5일: 유성룡이 2품 이상과 육조 당상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유성룡이 2품 이상과 육조의 당상을 거느리고 재차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유성룡이 2품 이상과 육조의 당상을 거느리고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이헌국·이제민·이수광·박동현 등 간원과 헌부가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문관이 올린 차자
윤11월 27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양사가 선위의 불가함을 합계하다
윤11월 27일: 정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다시 아뢰다
윤11월 27일: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네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한 홍문관 부제학 이기와 직제학 백유함 등이 올린 차자
윤11월 27일: 이헌국·이제민·이수광 등 헌부와 간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이헌국·이제민·이수광 등 헌부와 간원들이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정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양사가 합계하여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양사가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문관 부제학 이기 등이 올린 차자
윤11월 28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다시 올린 차자
윤11월 29일: 정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양사가 합계하여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대신이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대신이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양사가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양사가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해풍군 이기 등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분관 부제학 이기 등이 올린 차자
윤11월 29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문관 부제학 이기 등이 다시 올린 차자
12월 1일: 영의정 유성룡 등이 4번에 걸쳐 선조의 양위를 적극 반대하다
12월 1일: 왕 세자가 돌아오면 양위하기로 하다
선조 26년 11월부터 12월까지 벌어진 선조의 선위 소동에 대한 선조 실록의 기록
그러나 문제는 선조의 양위 파동과 세자 홀대가 후계자 교육의 실패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 탓에 이후 조정에 피바람이 불어닥치는 원인을 제공했다. 개중에 선조 옹호론자 중에는 광해군이 선조의 잠재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견제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당시 광해군은 라이벌이 어쩌고를 떠나서 결국 선조가 언젠가는 왕 자리를 물려주어야 하는 아들이자 후계자였다. 당현종당숙종에게 한 것처럼 제위를 평화롭게 물려주지는 못할망정, 정식으로 세자 책봉이 되지 않은 것을 빌미로 세자인 광해군의 지위를 흔들려고 해서는 안 되었다. 이는 왕이기 이전에 사사로운 부모자식간의 관계로 보더라도 매우 파렴치하고 패륜적인 행위였다. 심지어 선조는 전쟁 후에 맞아들인 후처에게서 태어난 영창대군을 이용해 공공연히 광해군의 입지를 위협하고, 형제간의 갈등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더구나 전쟁 직후 선조는 47세, 아들 광해군은 24세였는데 선조의 경우 평균 수명이 짧았던 당시의 시대를 감안할 때 이미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설상가상으로 이 때부터 선조는 소화불량, 편두통, 신경질환을 심하게 앓으면서 건강까지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미 능력이 검증된 장성한 세자가 존재했기에 보통 이 때가 되면 세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거나 대리청정을 시키는 게 상식이다. 당장 조선 초기의 태종이나 세종의 경우 세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거나 대리청정을 시켰다.

광해군이 특별히 성정이 못되었거나 선조에게 불손하게 굴었던 것도 아니고, 결국 광해군은 왕자이므로 어차피 선조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에 오를 인물이었다. 광해군을 잘 키워 성공적으로 양위만 했더라면 그가 임진왜란 시절 분조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도 결국 '내가 자식을 이렇게 잘 키웠으니 광해군도 이 정도씩이나 된 것이다'라면서 방귀 좀 뀔 수도 있었다. 어차피 임진왜란 때 피똥싸며 고생도 했겠다, 태종마냥 적당한 시점에서 상왕으로 물러났더라면 광해군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아 행복했을 것이고, 계축옥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선조도 괜히 쓰잘데기없이 정치질하면서 지 혼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아랫목에 배 깔고 귤이나 까먹으며 느긋한 말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잇속 챙길 욕심만 가득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선조는, 다른 사람도 아닌 제 자식인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긴커녕 전쟁이 끝나자 마자 보란듯이 새 중전을 들여 적자를 낳는 것에 열중했다. 더불어 광해군에게 대리청정과 양위도 절대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사사롭게 질투와 시기를 숨기지 않았다. 당시 선조에게는 정비인 의인왕후가 사망한 이후로 왕비가 없었기에 중전을 새로 들이는 것은 조선의 법도 상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선조가 대놓고 적통대군의 탄생을 대놓고 노리며 신하들조차 안좋게 볼 정도로 계비 간택을 서둘렀고, 결국 계비인 인목왕후가 기어코 영창대군을 낳자 대놓고 영창대군을 총애하면서 후계 구도를 개판으로 만들었다. 이후에도 선조는 계속 권력을 독점하며 영창대군을 빌미로 광해군을 견제하는 등 파국의 씨앗을 남겼다.

이러한 선조의 주제넘은 권력욕과, 처세 말기에 저지른 분탕질 때문에 발생한 후계구도 붕괴는 가뜩이나 전쟁으로 혼란하던 조선 왕실의 질서를 완전히 박살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굳이 쓸데없는 부통령을 같이 뽑는다거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무런 실권도 행사하지 못하는 국무총리를 당선되자마자 먼저 선임하는 것은 단순히 유고 대체뿐 아니라 이것이 권력의 질서라는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엄격한 성리학 원칙과 법도하에 세워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선조는 스스로의 업보로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킨 주제에, 자기 외에는 누구도 권력의 칼자루를 쥐어 주지 않겠다는 권력독점욕으로 후계자들 간의 질서와 관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음은 물론 후대 종묘에도 크나큰 폐를 끼쳤다.[104]

때문에 조정신료들은 이런 분열된 후계자들의 구도 속에서 혼란에 빠졌다. 2백년 동안 유교 질서와 법도하에 세워진 왕권과 왕위 계승의 룰을 국왕이 갑자기 뒤흔들기 시작한 것이다..[105] 광해군과 영창대군 중 어느 쪽에 줄을 서도 윗줄부터 썩어버린 이 끈을 함부로 꽉 잡을 수 없으니 조정이 완전히 분열되어 버렸고, 차기 권력으로써 온갖 궂은 일은 다한 광해군과 그의 지지세력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된 끝에 그들이 영창대군을 숙청 대상 톱으로 세우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이는 선조 사후 광해군의 즉위 이후에 벌어진 계축옥사로 현실화 된다.[106] 또한 그런 광해군의 견제에 휘말려 애꿎은 인목왕후(영창대군의 친모)와 정명공주(영창대군의 친누나)마저 사실상 폐위되어 갖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오죽했으면 광해군이 폭군이자 암군으로 역사에 길이 남은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폐주될 때 백성들의 동정을 받았겠는가. 저런 한심한 아버지 밑에서 전시군주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나름의 전쟁 영웅이었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3.4. 공신 책봉 문제

전란이 종료되면 의례 공신 책봉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공신 책봉에도 많은 문제가 있어 전후 선조의 평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는데 바로 선무공신 책봉문제이다. 선조는 전란 후 전란에서 공을 세운 장수에게 주는 선무공신[107] 왕을 따라 호종한 자들에게 주는 호성공신,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자들에게 내려준 청난공신을 선정하였는데 문제가 되는 부분이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이다. 아래는 선조실록에 기록된 공신 책봉 과정이다. 애초 등급이 확정된 호성공신과 달리 고작 18명을 선정하는 선무공신은 선정 과정에서 추가 혹은 누락이 계속 발생하고, 심지어 등수까지 변경이 일어난다.
공신 도감이 아뢰기를,
"정왜(征倭)의 공(功)에 대해서 지금 마련했는데, 신들은 모두 진중(陣中)에 있으면서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이 아니므로 단지 그 당시의 장계와 소문에 뚜렷하게 드러난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임진년에 순안(順安)에 진을 치고 적로(賊路)를 차단하여 행조(行朝)의 성원(聲援)이 되고 중국군으로 향도(嚮導)하고 토병(土兵)을 수합(收合)하여 모양을 이룰 수 있게 한 것은 순찰사 이원익의 공인 듯합니다. 전에 신들이 왜적을 치는 데 구관(句管)한 공이 있었다고 계청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바다에서의 승전과 권율의 행주에서의 승전은 전교대로 마련하였습니다. 이억기(李億祺)는 전라 수사로서 초반의 한 곳 싸움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그 후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였습니다.
권응수(權應銖)는 영천(永川)에 있는 적을 공격하여 좌도(左道)를 보전시켰고, 김시민(金時敏)은 진주(晉州)를 지키면서 성을 보전하고 적의 명장을 죽여 왜국에가지 소문이 나게 하였습니다. 이정암(李廷馣)은 연안성(延安城)을 지켜 보전하므로써 강화(江華)를 통행하기에 지장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드러나게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진주성을 지킬 때 이광악(李光岳)이 곤양 군수(昆陽郡守)로 성중(城中)에 들어가 처음에는 성 지키는 일을 지휘하다가 시민이 전사한 뒤에는 힘껏 싸워 적을 물리쳤습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海上戰)에 있어서는, 이순신은 권준(權浚)·이순신(李純信)·안위(安衛)·배흥립(裵興立)의 공이 크다고 하였고 원균은 이운룡(李雲龍)·우치적(禹致積)의 공이 다른 사람보다 크다고 하였습니다. 이순신과 원균은 이미 수공(首功)에 참여되었으니 그들의 편장(褊將)들의 논공(論功)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권율의 행주의 싸움에서 조경(趙儆)이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협력하여 지휘하였으니 이 편비(褊裨)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응서(金應瑞)와 고언백(高彦伯) 등은 대진(對陣)하여 승전한 공은 없으나 여러해 동안 싸움을 한 공이 있는데 이들 역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병들은 비록 크게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으나 그 가운데에서 먼저 의병을 일으켜 한쪽 방면을 보전한 자는 불가불 논상하여야 합니다. 경상우도가 보전된 것은 실로 곽재우(郭再祐)의 힘에 말미암은 것인데,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개 녹훈(錄勳)을 마련할 때에 호종(扈從)에 대해서는 많게 하고 이들에게는 너무 소략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실망할 뿐만 아니라 공로에 보답하고 뒷사람들을 권장함에 있어서도 미안한 듯하기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장사(將士)들이 왜적을 막는 것은 양(羊)을 몰아다가 호랑이와 싸우는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이 수공(首功)이고 그 이외에는 권율의 행주 싸움과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사람들의 뜻에 차며 그 나머지는 듣지 못하였다. 간혹 그 가운데에 잘하였다고 하는 자도 겨우 한 성을 지킨 것에 불과할 뿐이다. 논공(論功)을 함에 있어서는 조정의 의논을 따르겠다. 다만 반드시 지극히 공평하게 하여 외람되지 않게 하라. 또 여러 해 동안 싸운 공을 논한다면 김응서와 고언백 두장수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막중한 행사이다. 막중한 행사인데도 사람들에게 가볍게 시행하였으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호종한 것을 녹공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육지(陸贄)[108]가 일찍이 말하였다. 가령 육지가 조금이나마 공로에 보답하는 방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시에 호종한 신하들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더구나 요리나 하고 말고삐나 잡던 천한 자들까지 모두 익운의 반열에 참여시켜 이름이 맹부(盟府)020)(註 020)(맹부(盟府) : 공신을 기록한 문서.) 에 들어 있는 자가 35인이나 되게 하였으니 어떻게 후세의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정왜(征倭)의 공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비록 중국 장사(將士)들의 공이라고는 하나 대진(對陣)하여 승전한 공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호종한 신하들은 많이 참여시키고 싸움에 임한 장사들은 소략하게 하였으니, 공에 보답하는 방도를 잃었다고 할 만하다.
선조실록 159권, 선조 36년 2월 12일 기해 5번째기사

공신 도감(功臣都監)이 【당상(堂上)은 이항복(李恒福)·이호민(李好閔)·황진(黃璡)·홍가신(洪可臣)·박명현(朴名賢)이다. 】 아뢰기를,
"전후의 왜적을 정벌할 때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을 의의(擬議)하여 취품(取稟)한 것은, 이원익(李元翼)·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곽재우(郭再祐)·이억기(李億祺)·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이운룡(李雲龍)·우치적(禹致績)·배흥립(裵興立)·박진(朴晉)·고언백(高彦伯)·김응서(金應瑞)·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정기룡(鄭起龍)·한명련(韓明璉)·안위(安衛)·이수일(李守一)·김태허(金太虛)·김응함(金應緘)·이시언(李時言) 등 26인이었습니다. 지금 상의 분부를 받들고서 다시 참작하여 헤아려 보건대, 김시민과 이광악 등을 이미 녹공(錄功)하였으니 이정암이 연안(延安)에서 성을 지켜낸 공도 또한 마땅히 김시민 등의 예에 의해 마련해야겠습니다.
주사(舟師)의 편비(褊裨)058)(註 058)(편비(褊裨) : 비장.) 에 있어서는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는 권준·이순신(李純信)·배흥립이고 원균의 휘하에는 이운룡·우치적인데, 그 당시의 각 장계(狀啓)를 조사해 보건대, 이순신의 장계에는 권준·이순신의 이름이 일 등의 첫 머리에 있고, 원균의 장계에는 이운룡·우치적의 이름이 등급을 논할 때는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고 또 다른 장계에는 ‘이 두 사람의 공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당초에 뽑아 내어 취품한 것은 단지 들은 바 주사(舟師)들의 의논이 그와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마는 원균과 이순신의 두 장수가 공을 다투느라 틈이 있는데다가 또한 이운룡·우치적 등의 은상(恩賞)이 복구된 일로 인하여 유감이 더욱 깊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성명을 먼저 들게 된 것입니다. 나타나 있는 문안(文案)으로 말한다면, 이순신의 장계는 비록 과장한 것인 듯하나 분명히 의거한 데가 있는데 비해 원균의 장계는 당초부터 군공(軍功)의 등급에 있어 분명하지 못하여, 어느 때는 이운룡과 우치적 두 사람을 다른 사람들 밑에다 넣었다가 그 뒤의 장계에는 으뜸 공이라고 했으니 앞뒤의 전도가 심한 편입니다. 공론이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군공은 녹공하기 곤란할 듯합니다.
이순신의 장계에, 이름이 일등에 든 사람은 권준이순신(李純信) 두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운(鄭運) 같은 사람에 있어서도 이름이 1 등의 셋째 번에 들었고, 본디 역전(力戰)한 사람으로 일컬어져 왔는데, 상께서 수효가 지나치게 많다고 경계하셨습니다. 정운이 이미 녹공되지 않았으니 배흥립도 마땅히 삭제되어야 합니다.[109] 다만 그때의 편비 중에 일등에 든 사람들은 우열이 없을 듯한데, 이미 주장(主將)이 없으므로 신들이 들은 것을 참작하여 첫머리에 든 두 사람만 뽑았습니다만 공이 같은데 탈락된 사람들이 반드시 원성이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날마다 머리를 마주대고 의논하여 감정했지만 합당하게 하지 못했으니, 부득이 이대로 처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억기는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서 이미 해상의 전투에 참여하였으니 녹공에 들어가야 함이 의심할 것 없겠으나 안위는 그 당시 일곱 번의 전투에 한 번도 참여 하지 않았으니 삭제하여야 할 듯합니다. 육장(陸將)들에 있어서는 별로 대단하게 적봉(敵鋒)을 겪었거나 적진을 함락시켰거나 한 공이 없었음은 과연 성상께서 분부하신 것과 같습니다. 고언백(高彦伯)은 비록 왜적을 사로잡고 능(陵)을 수호한 공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공로가 고언백과 비등한 사람이 또한 많은데, 고언백은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모두 들어가지 못한다면 뭇사람들의 마음이 반드시 섭섭하고 원통하게 여길 것입니다. 또 호종(扈從)했던 사람들은 많은 쪽으로 마련하고 왜적을 정벌한 사람들은 이처럼 약소하게 한다면 뒷날에 생길 근심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일에 취품하였던 육장(陸將)들 중에서 다시 참작하여 뽑아내서 공로가 있는 사람은 모두 녹공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그 사람들의 공로는 내가 어떻게 알 수가 없으니, 충분히 헤아려 반드시 공평하고 올바르게 하여 사람들의 비난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 속담(俗談)에 ‘친구 덕으로 공신(功臣)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농담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런 일이 혹은 틀림없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일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 다만 그 일을 신중하게 하여 종정(鍾鼎)에 녹훈(錄勳)하는 일을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고 혹시라도 외람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만약 실지로 공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논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조실록 161권, 선조 36년 4월 28일 갑인 2번째기사

비망기로 이르기를,
"원균을 2등에 녹공해 놓았다마는,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에 원균이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해 주기를 청했던 것이지 이순신이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왜적을 토벌할 적에 원균이 죽기로 결심하고서 매양 선봉이 되어 먼저 올라가 용맹을 떨쳤다. 승전하고 노획한 공이 이순신과 같았는데, 그 노획한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을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어서는 원균이 재삼 장계를 올려 부산(釜山) 앞바다에 들어가 토벌할 수 없는 상황을 극력 진달했으나, 비변사가 독촉하고 원수가 윽박지르자 원균은 반드시 패전할 것을 환히 알면서도 진(鎭)을 떠나 왜적을 공격하다가 드디어 전군이 패배하게 되자 그는 순국하고 말았다.[110] 원균은 용기만 삼군에서 으뜸이었던 것이 아니라 지혜도 또한 지극했던 것이다.
당(唐)나라 때 가서한(哥舒翰)이 가슴을 치면서 동관(潼關)을 나섰다가 마침내 적에게 패전하게 되었고, 송(宋)나라 때 양무적(楊無敵)이 반미(潘美)의 위협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싸우러 나갔다가 적에게 섬멸된 것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고금(古今)의 인물들을 성공과 실패만 가지고는 논평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원균이 지혜와 용기를 구비한 사람이라고 여겨 왔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운명이 시기와 어긋나서 공도 이루지 못하고 일도 실패하여 그의 역량이 밝혀지지 못하고 말았다. 전번에 영상이 남쪽에 내려갈 때 잠시 원균을 민망하게 여기는 뜻을 가졌었는데, 영상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공로를 논하는 마당에 도리어 2등에 두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정운(鄭運)은 배흥립(裵興立)의 일 때문에 삭제하였다. 이순신이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구원하러 가기를 의논할 적에 정운이 극력 찬동했었고, 왜적을 토벌할 때에도 정운의 공이 많았었다. 결국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으니 이는 정운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배흥립이 범람하다는 것 때문에 마땅히 녹공해야할 정운까지 아울러 삭제할 수는 없는 일이니, 정운을 녹공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다.[111]
회복(恢復)하게 된 공로가 오로지 중국군에게 있었으니, 청병(請兵)하러 가서 소청을 얻어낸 사람들을 호종하지 않았다 해서 빠뜨릴 수는 없다. 심희수·유몽정이 이미 청병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은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 사람들은 버려 둘 수 없으니 다시 참작해야 한다.
홍여순(洪汝諄)은 처음부터 호종했었는데도 지금 빠졌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홍여율(洪汝栗)은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부터 직접 영정(影幀)을 지고 고초를 겪으면서도 온전하게 보호했었다. 이러한 그의 공로도 역시 빠뜨릴 수가 없으니, 녹공의 합당 여부를 의논해서 아뢰라.
당초에 4등급으로 구분한 뜻을 알지 못해서 이봉정(李奉貞)을 원종(原從)에 녹공하라는 것으로 전교했었다. 지금에 와서 이 녹공된 사람들을 보건대,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사람이 아닌데도 역시 다른 공로로 참여된 사람이 있다. 이봉정의 경우는 승전색으로서 처음부터 호종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아비의 상사를 듣고서 고향으로 돌아갔었으니 사사로이 스스로 물러간 것과는 다르다. 그는 본향(本鄕)인 용천(龍川)에서부터 다시 호종하고 의주까지 가느라 고초가 많았고, 주선한 일도 있었으니, 정훈(正勳)에 녹공하지 않을 수 없음이 또한 이러하다.
내가 비록 잘나지는 못했지만 어찌 감히 한 사람의 환시(宦寺) 때문에 경들을 턱없이 속여서 당연히 녹공해서는 안 될 사람을 함부로 여러 훈신들 사이에도 두려 하겠는가. 이봉정은 4등에 녹공해야 한다.
같은 등급 속에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므로 차례를 논할 수 없으면 당연히 직품에 따라서 기록했어야 할 것인데, 많은 사람이 바뀌어 놓여 있으니 좌차(坐次)에 있어서 온당지 못한 듯하다. 또 각 등급에 있어서의 상격(賞格)에 관한 전례를 알고 싶으니 모두 고찰해서 아뢰라.
산하대려(山河帶礪)의 훈공을 종정(鍾鼎)에 기록하는 것은 국가에 더없이 큰 일이니, 반드시 공평 정대하게 하여 공이 있는 사람을 빠뜨려서도 안 되며 공이 없는 사람을 함부로 써서도 안 된다. 우리 나라에는 전부터 친구 덕분에 공신이 되었다는 비난이 있었다. 이 말이 비록 맹랑하기는 하나 이로 인해 경계하기에는 좋은 말이니, 아무쪼록 조용하게 잘 살펴서 처리하라."
하니, 회계하기를,
"이번의 공신은 원수(元數)가 너무 많으니, 전에는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낮추어 2등에 녹공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112]
정운은 수록하겠습니다만, 심희수와 유몽정은 청병하여 소청을 얻어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삭제하여 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여순은 평양까지 호종했다가 북도의 요해지(要害地)를 파수하는 일로 명을 받고서 대가(大駕)를 배사하고 의주로 들어갔었고, 뒤에는 경기의 삭녕(朔寧) 등지에 나가 군사를 모집하다가 9월 초에야 비로소 의주로 들어갔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명이 당초부터 원훈들이 의논하여 결정하는 속에 나오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감히 제기(提起)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홍여율과 이봉정은 또한 마땅히 수록하겠습니다. 상격에 관한 전례는 문서가 없어서 사고(査考)할 여유가 없었으니 곧바로 고찰하여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하자,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위 헌공(衛獻公)이 망명했다가 위나라로 돌아올 적에 교외에 이르러 수종했던 사람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준 다음 들어오려 하자 유강(柳莊)이 말하기를 ‘만일에 모두가 사직을 지켰더라면 누가 고삐를 잡고 따라갔을 것이며, 모두가 따라갔더라면 누가 사직을 지켰겠습니까. 임금께서 나라에 돌아와 사정(私情)을 쓰려 하시니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하니, 나누어 주지 않았었다. 환시는 나라 임금의 가노(家奴)로서 녹훈한 일은 고찰해 볼 데가 없다.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
선조실록 163권, 선조 36년 6월 26일 신해 2번째기사

공신(功臣)들의 명칭을 정하여 대대적으로 봉(封)했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始終)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은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은 청난 공신(淸難功臣)으로 하고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
호성 공신 1등은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崐壽)인데 충근정량갈성효절협력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力扈聖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정원군(定遠君) 이부(李桴)·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심우승(沈友勝)·이호민(李好閔)·윤근수(尹根壽)·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이산보(李山甫)·유근(柳根)·이충원(李忠元)·홍진(洪進)·이괵(李𥕏)·유영경(柳永慶)·이유징(李幼澄)·박동량(朴東亮)·심대(沈岱)·박숭원(朴崇元)·정희번(鄭姬藩)·이광정(李光庭)·최흥원(崔興源)·심충겸(沈忠謙)·윤자신(尹自新)·한연(韓淵)·해풍군(海豊君) 이기(李耆)·순의군(順義君) 이경온(李景溫)·순령군(順寧君) 이경검(李景儉)·신잡(申磼)·안황(安滉)·구성(具宬)인데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탁(鄭琢)·이헌국(李憲國)·유희림(柳希霖)·이유중(李有中)·임발영(任發英)·기효복(奇孝福)·최응숙(崔應淑)·최빈(崔賓)·오정방(吳定邦)·이응순(李應順)·절신정(節愼正) 수곤(壽崐)·송강(宋康)·고희(高曦)·강인(姜絪)·내시(內侍) 김기문(金起文)·내시 최언준(崔彦俊)·내시 민희건(閔希蹇)·의관(醫官) 허준(許浚)·이연록(李延祿)·이마(理馬) 김응수(金應壽)·이마 오치운(吳致雲)·내시 김봉(金鳳)·내시 김양보(金良輔)·내시 안언봉(安彦鳳)·내시 박충경(朴忠敬)·내시 임우(林祐)·내시 김응창(金應昌)·내시 정한기(鄭漢璣)·내시 박춘성(朴春成)·내시 김예정(金禮楨)·내시 김수원(金秀源)·내시 신응서(申應瑞)·내시 신대용(辛大容)·내시 김새신(金璽信)·내시 조구수(趙龜壽)·의관(醫官) 이공기(李公沂)·내시 양자검(梁子儉)·내시 백응범(白應範)·내시 최윤영(崔潤榮)·내시 김준영(金俊榮)·내시 정대길(鄭大吉)·내시 김계한(金繼韓)·내시 박몽주(朴夢周)·이사공(李士恭)·유조생(柳肇生)·양순민(楊舜民)·경종지(慶宗智)·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 최세준(崔世俊)·사알(司謁) 홍택(洪澤)·이마 전용(全龍)·이마 이춘국(李春國)·이마 오연(吳連)·이마 이희령(李希齡)인데 충근정량호성 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이라 하여, 각각 작위(爵位)를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다. 모두 86인인데 내시(內侍)가 24명, 이마(理馬)가 6명, 의관이 2명이고, 별좌(別坐)와 사알(司謁)이 또 2명이다.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은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 세 대장인데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113] 2등은 신점(申點)·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이억기(李億祺)인데 효충장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유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인데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는데 모두 18인이다.
청난 공신(淸難功臣) 1등은 홍가신(洪可臣)인데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2등은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114]인데 분충출기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3등은 신경행(辛景行)·임득의(林得義)인데 분충출기청난 공신(奮忠出氣淸難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으로 봉했는데 모두 5인이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임진년의 왜변을 만나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했으며 원릉(園陵)이 화를 입었고 생령들이 해독을 받았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한 일이다. 다행히 황은(皇恩)이 멀리 미침을 힘입어 팔도(八道)가 다시 새로워졌으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여 공로에 보답하는 특전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호종신(扈從臣)을 80여 명이나 녹훈(錄勳)하였고 그 가운데 중관(中官)이 24명이며 미천한 복례(僕隷)들이 또 20여 명이나 되였으니, 또한 외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이르러서는 주군(州郡)에서 불러 모은 도적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토평한 것이 어찌 공이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만든 것이 당초 어찌 이처럼 구차한 데에 쓰려고 한 것이겠는가. 아, 김응남(金應南)은 신묘년100)(註 100)(신묘년 : 1591 선조 24년.) 에 부경(赴京)하였을 적에 정신(廷臣)들의 의논을 극력 변론하여 실제 상황을 들어 주문(奏聞)함으로써 마침내 황상(皇上)이 감림(監臨)하게 하였으니, 그의 공이 진실로 크다. 그리고 신점(申點)은 중국에 있다가 국가가 병화(兵火)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서 7일 동안이나 먹지도 않고 울면서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주청했으니, 중국군이 나오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공이겠는가. 정곤수(鄭崐壽)는 구원병을 주청하고 군량을 주청한 공로가 있고, 이호민(李好閔)은 사명(辭命)을 전담한 공로가 있고, 이순신·원균·권율은 혈전(血戰)한 공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삼공(三公)은 조금이나마 대책을 결단한 일이 있었으니 부득이하다면 이들 몇 사람만 녹훈했어야 했다.
선조실록 175권, 선조 37년 6월 25일 갑진 7번째기사
이상이 실록에 기록된 공신 책봉 과정이다. 선무공신은 1등에 이순신과, 권율, 원균을 포함하여 총 18명인 반면 호성공신은 80명이 넘어가며 그 신분도 다양하다.[115] 1602년 4월 공신도감이 공신록에 들 만한 장수 26명을 추려 올린 기사를 보면 선조는 선무공신의 숫자가 늘어나는 걸 꺼린 정황이 분명하다. 일단 선무공신에 원균이 1등으로 들어간 것은 전적으로 선조의 의지였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 원균옹호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116] 애초 원균은 신하들이 2등에 놓았으나[117] 선조가 원균의 공이 작지 않다며 1등으로 강제로 올렸으며, 그래도 이순신의 공을 부정은 못해 이순신을 1등 중에서도 원훈에 봉했다.[118]

이 선무공신 가운데 대다수는 이미 죽어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호성 공신과 비교했을때도 그 수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이전에는 선무공신 가운데 의병장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처음은 의병장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관군이 된 사람들로서 선무2등공신 권응수이정암이 있다.[119] 대표적인 의병장인 곽재우는 1600년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 왕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경상좌병사직을 내버리고 낙향해 대놓고 왕의 권위를 무시했는데, 공신도감에선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넣어주려고 했기 때문에 이때 선조의 신뢰를 잃지 않았다면 이름을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김천일, 고경명, 김면, 조헌, 이정형, 이수일 등 이때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의병장들은 사후 추증이건, 생전에 중용되건 어떤 식으로든 대우를 받긴 했다. 별도로 이몽학의 난 진압으로 선정된 정난공신에 최호 등 일부 무장들이 들어가기도 했다.

공신 책봉 관련해서 진짜 할 말 있는 쪽은 의병이 아니라 관군, 특히 이순신 밑에서 활약한 수군 장수들이다. 소소한 전과는 꾸준히 세웠지만 큰 공은 없는 고언백도 들어갔는데[120] 정운, 우치적, 배흥립, 안위, 김응함은 공신도감에서 들어갈만 하다 했음에도 선조의 견제로 전부 못 들어갔다. 정운은 선조가 공신수가 너무 많다고 경계하는 바람에 기각,[121] 임진년부터 정운과 함께 활약한 배흥립도 같은 이유로 기각, 1594년에 거제현령으로 제수되어 임진년 해전에는 참여할 수 없었던 안위는 임진년에 공이 없다고 기각. 전공 많은 수군 장수들을 이런 식으로 다 자르고 무의공 이순신과 권준 둘만 위에서 뚝 잘라서 집어넣었다.[122]

선조의 공신 책봉이 비난받는 이유는 원균에 대한 무리한 1등 공신 책봉과 전란으로 선정된 공신임에도 갖은 이유를 들어 선무공신은 그 수를 줄인 반면, 자신을 호종하고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호성공신은 그 수가 선무공신의 4배 이상이 되는데 있다. 한마디로 자신과 함께 의주까지 도망친 관료들 위주로 공신을 책봉한 것.

원균을 1등으로 강제로 올리기 위해 선조가 한 발언을 보면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한 공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비록 도성을 버리고 도망은 쳤으나 결국에는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선조 자신 역시 똑같은 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이른바 재조지은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호성공신(선조를 호송한 공을 세운 신하들, 그러니까 피난길 식구들)은 86명인데(내시가 25명이다), 선무공신(무장 혹은 대명 외교의 성과를 거둔 자)는 18명이다. 이 중에는 원균도 포함된다.

오죽했으면 이덕형은 본인이 호성공신이 되자 더러워서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호성공신을 거절했는데 진짜 임금 면전에서 저렇게 말하면 불경죄가 되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으므로 일본 및 명과의 외교 교섭 문제 때문에 선조의 곁을 떠나 있었던 시간이 길어서 본인은 임금을 충분히 모시지 못했다는 적당한 명분으로 둘러댔다. 이항복도 분개하긴 마찬가지였으나 이항복은 장인어른이 선무공신에서 제외당할까봐 호성공신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았다. 이렇듯 사람들 사이에서는 선조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되려 선무공신을 영광스럽게 생각한 반면 호성공신을 부끄럽게 생각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123]

3.5. 왕자 관리 실패

선조의 자식 농사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망했는데, 광해군과 어린애들을 제외하면 왕자들의 정신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단순히 능력이 부족하거나 부패한 정도가 아니라, 횡령, 폭행, 강간, 연쇄살인을 저질러 왕족만 아니었으면 즉시 목이 잘릴 수준의 흉악범들이었다. 순화군은 수원으로 귀양을 간 뒤 귀양지에서도 온갖 흉악한 짓을 저질러, 백성들과 지방관들이 도망을 가 수원이 허허벌판이 될 정도였다. 민란이 일어났거나 왜구가 침략한 것도 아닌데, 사람 하나 때문에 수원처럼 규모가 큰 고을이 망할 지경이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순화군의 범죄가 일 단위로 적혀 있으니 그 행패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임해군 같은 경우 순화군을 넘을 수준의 패악질을 벌여 신하들이 대놓고 죽이라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평시에는 물론 웬만한 전시에도 신하들이 왕에게 자식들을 죽이라고 하면 대역죄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대놓고 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임해군의 패악질이 단순히 왕족이라는 이름으로 면죄를 받기엔 매우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왕족 중에서도 단연 최악의 인성을 가졌다 꼽을 수 있는 임해군, 순화군, 정원군이 모두 선조의 자식들인데, 선조는 죄를 저지른 자식들을 훈계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감싸고 돌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성격도 유전적 영향이 상당 부분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 역사상 손에 꼽힐 흉악한 망나니들이 한 대에 나온 것을 보면 선조의 왕자 교육 방식 수준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알 수 있다. 임해군 등 일부 왕자들이 저지른 만행은 임진왜란 때 항전하는 백성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쳤고, 결국 백성들이 임해군과 순화군을 일본군에게 넘겨버리는 반역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큰 처벌을 면했다. 일본군도 오죽했으면 임해군을 넘겨버린 조선 백성들을 멸시하거나 욕하기는 커녕 그럴 만했다며 이해했을 정도였다.[124] 이들 3인방에 묻히지만 늦둥이 아들인 흥안군, 경평군 또한 잦은 비행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그 중 경평군은 조카인 인조가 직접 실성했다고 할 정도였다.[125]

그나마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활약하여 대신들의 인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차남 광해군조차도 의심이 많고 권위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인물이 되어버려서, 정작 왕위에 오른 후에는 암군이자 폭군으로 흑화했다.[126] 조선 왕 가운데 친국(親鞫)[127] 실행 기록 2위이라는 업적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128] 재위 시작부터 재위 내내 궁궐 공사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여 백성의 고혈을 심학게 쥐어짜고 민생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어 끝내 의심병과 궁궐병 때문에 참다 못한 신하들에게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망하기에 이르렀다.

재위 중반 들어 슬슬 후계자를 선정하자는 움직임[129]이 나왔는데, 서장자 임해군은 워낙 자질이 엉망이라서 차순위 광해군에게 시선이 쏠렸다. 왕조 국가에서 후계자 선정은 필연적으로 왕의 권위와 연결되는 문제라 전쟁 이전의 선조는 세자 선정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가 전쟁 이후에 도저히 책봉을 미룰 수 없게 되자 광해군을 책봉한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임무를 잘 해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이 사이 왕으로서의 권위가 심각하게 추락한 선조의 가장 큰 정적이 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선조의 이런 행적은 매우 부적절한 게, 광해군은 적장자가 아닐 뿐 엄연한 선조의 생물학적 자식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정적으로 삼을 일이 과연 몇이나 존재하는가?[130] 그나마 있는 사례를 꼽자면 형제가 많아 그 중 하나가 미리 선수를 쳐서 쿠데타를 벌여 아버지의 권력을 찬탈하고 경쟁자를 숙청하는 경우(태종)가 말이 되는 상황인데 형제들이 하나같이 변변찮은 광해군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다. 영창대군 이전까지는 적장자가 없었던 상태였기에 광해군을 책봉한다고 해서 선조의 권위가 떨어질 리는 없었고, 본래 아들이 걸물이면 그렇게 키워낸 아버지의 권위도 올라간다. 선조 자신의 괴상한 감투 욕심, 관심병이 아니라면 광해군에게 힘을 실어줘도 선조는 전혀 손해볼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거기다가 광해군은 선조에게 불손하게 굴지도 않았고, 권력욕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던데다 세자로서의 능력이 없는 인간이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왕이 될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다.[131]

때문에 정종이나 태종처럼 세자에게 양위를 하거나, 세종처럼 대리청정을 맡겨보거나, 아니면 다른 일반적인 왕들이 하는 것처럼 아들에게 신뢰를 보여주는 수준이면 족했다. 문제는 선조는 권력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는 왕인데다 질투심도 심했기에 권력을 끝까지 양보해 주지 않았고, 후계자인 광해군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티를 계속 내며 정신적으로 크게 압박했다는 것이다. 이는 선조의 비정상적인 자기애에서 기인하였으며, 쓰레기라는 말을 들어도 마땅한 자식들에게는 애정을 쏟았으나 조금이라도 자질을 보이는 자식은 자신의 라이벌로 보고 지나칠 정도로 냉정하게 굴었다. 결국 광해군을 몰아낼 명분은 없지만 견제는 해야 하는 불편한 관계를 10년 이상 지속해야 했다. 이 와중에 전쟁 직후인 1600년에 광해군의 큰 심리적 지지자인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광해군은 선조의 견제에 더욱 심리적으로 내몰리기만 했는데, 광해군을 다독이던 의인왕후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엄밀히 말하면 왕비 대우 정도만 하고[132] 인빈 김씨[133]만 총애하며 거의 홀대하다시피 해 스트레스를 준 남편 선조의 책임도 분명 있었다. 그리고 광해군은 의인왕후와 달리 성격도 정반대에 가깝고, 눈치 없고 철없는 행동으로 본인을 자극하는 계모 인목왕후를 더욱 미워하였고 이것은 광해군이 엇나가고 폐모살제를 저지르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처벌할 수 없다면 교육이라도 시켜야 한다. 아무리 왕족이 특별해도 왕의 자식이라고 못된 짓만 골라서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다. 아무리 왕의 아들이라도 개망나니짓만 하고 다니면 백성들은 "왕이 저 모양이니 왕자도 이 모양이지!"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다. 게다가 그것을 넘어서 애당초 왕족이라 해서 뭐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왕족을 처벌하는데 신하들은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다. 즉, 왕족이라도 사고를 쳤다간 논란거리에 오르고 신하들이 처벌하라는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선조는 이것에도 제대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 이미 임진왜란 전부터 임해군, 순화군의 행동은 막장이었지만, 선조는 이를 단속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결국 임해군과 순화군이 일본군에 붙잡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선조는 그 후에도 이 둘을 방치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악행에 맞는 처벌은 차치하더라도 아들들에게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당부라도 해야 하건만 선조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임해군은 광해군 즉위 후 역모 혐의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지만, 영창대군 때와는 달리 이항복이덕형 등 일부 이들이 은전론[134]을 펼친 걸 빼면 당파를 가리지 않다시피한 채 임해군을 처벌하라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순화군은 패악이 얼마나 지나쳤는지, 결국 선조도 더는 봐줄 수 없었고 신하들의 재촉에 못 이겨 순화군을 폐서인하여 가택 연금시켰다. 당대에 순화군의 악행이 어찌나 극심했는지 순화군한테서 아버지를 살린 자식이 효자로 인정받았을 정도였다. 게다가 임해군은 그래도 남의 재산을 뺏는 짓만 주로 했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인 것은 아니었는데 순화군은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는 살인범이었다. 임해군조차 살인을 일삼는 순화군에게 질색하여 지나치다고 질책할 정도였다.

3.5.1. 다른 왕들과 비교

선조는 다른 왕들과 비교 해봐도 답이 나오는데 조선의 건국자이자 초대왕인 태조도 왕자의 난이 있긴 했었지만 모두들 인간말종들은 아니었고 2대왕 정종도 그의 서자들 모두 왕위에 욕심을 낼 정도에 인간말종들도 아니며 왕자의 난으로 이복동생을 죽이고 동복형을 몰아낸 전적이 있던 3대왕 태종도 양녕대군 1명을 제외하면[135] 적자들인 효령, 충녕, 성녕뿐 아니라 서자들도 문제가 있던 왕자들은 없었고 4대왕인 세종 또한 계유정난이란 뒷통수만 맞았을뿐 그의 생전엔 모두들 모범생이 었고 자식이 적은 문종과 세조의 아들 예종, 자식이 일찍 요절한 명종 자식이 없었던 단종과 인종은 건너뛰더라도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선조의 조상 세조 또한 적자인 의경세자와 해양대군과 서자 덕원군은 서자인 창원군을 제외하면 상당히 올곧은 성품들이 였으며 세조의 손자인 성종 또한 나중에 폭군으로 흑화하는 연산군과 서자 계성군을 제외하면 다른왕자들은 멀쩡했으며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의 왕자들 또한 아버지와 달리 아무 문제들이 없었고 성종과 연산군의 뒤를 이어 왕이된 선조의 할아버지 중종의 아들들도 선조의 생부를 제외하면 다들 멀쩡하였고 또다른 폭군인 광해군도 자식농사에 대해 선조보다 나은 수준이다. 오히려 선조를 닮은것이 자신의 손자인 인조와 자기 아들인 사도세자를 학대하고 죽인 자신의 고손자 영조와 맞먹을 수준이였다.

3.6. 말년의 인재 등용 실패

상기한대로 전란 전에 선조의 인재등용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권위가 떨어지고 욕심을 너무 부린 탓인지 나이가 들어 사람 보는 눈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인지 집권 후반기 인사에서 계속 실책을 저질렀다.

대표적인 예가 선조 말기 영의정을 독점했던 재상 유영경인데, 그는 선배들인 이산해, 이항복, 이덕형 등 명신들에 비해서 이렇다할 능력이 없고 왜란 중에도 보신주의적인 행태만 보이며 제대로 된 신하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윗사람의 심기를 잘 읽고 그걸 그대로 청하는 아첨꾼의 능력이 뛰어나서 줄을 잘 대고 승진하더니 북인 파벌의 영수에 영의정까지 올라간 것. 문제는 그 다음인데 당시 선조가 세자 광해군을 싫어하고 영창대군을 밀어주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노골적으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미는 정치적 도박수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광해군에 대한 선조와 조정의 압박이 심해졌다. 결국 유영경은 광해군의 원한을 사면서 그의 즉위 이후 자신의 업보를 그대로 돌려받는다. 유영경은 광해군 즉위 이후 대북의 탄핵을 받아 영의정 자리에서 쫒겨나 파직과 삭직을 거쳐 유배당한 다음, 끝내 광해군의 명으로 유배지에서 자결하고 시신마저 도로 끄집어내 부관참시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나중에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난 뒤에야 명예회복이 되었다.

그밖에 유영경을 비롯한 탁소북이 워낙 유영경의 거수기 체제다보니 "유영경당", 유당(柳黨)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질이 좋지 못한 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장악하는 등[136] 여러모로 건전하지 못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말년의 세자에 대한 견제 등을 볼때, 왜란 중에 끝도 없이 박살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친위 세력만을 조성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137]

계비인 인목왕후 또한 실패한 인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인목왕후는 흔한 "광해군 명군설"만큼 악랄한 여걸도 아니었고 역심을 품은 것도 아니었지만, 양반집 귀한 아가씨로 자라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라 눈치도 없었고 처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이미 왜란 당시 충분히 활약해서 세자로 확정된 것과 다름없는 광해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자 영창대군이 벌써 세자가 된 양 설레발을 치며 궁중 법도를 어기고 영창대군을 세자처럼 차려입히는 위험한 실책을 저질렀다. 또한 인목왕후는 자신의 중궁전 소속 나인들이 광해군의 동궁 소속 나인들을 핍박하거나, 광해군 앞에서 방자하게 구는데도 이를 제어하지 못하며 측근관리에 있어서 무능한 모습만 보였다.[138] 인목왕후 본인도 광해군의 동궁 소속 나인 100명을 멋대로 데리고 가버리는 등, 수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도 치부에 힘을 써서 재물을 모으는데 열중하여 세간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결국 인목왕후도 광해군의 원한을 사고 그의 즉위 이후 보복을 정통으로 맞아 계축옥사로 아들 영창대군은 폐서인이 되어 유배지에서 비명횡사하고 아버지 김제남부터 형제들까지 싸그리 처형당해 친정이 멸문당하는 걸로도 모자라[139], 본인마저 딸 정명공주와 함께 비공식적으로 폐서인당해 서궁에 유폐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나 대비로 복권될 때까지 생필품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도저히 일국의 대비라곤 상상치 못할만큼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며 온갖 고생을 하는 비극을 겪고만다. 이는 나중에 인조가 즉위한 뒤에도 변하지 않아서 딸 정명공주의 남편인 홍주원에게 어구마(왕만이 탈수 있는 말)까지 하사하는 등,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생각이 짧다고밖에 할 수 없는 행동을 자꾸 범했다.[140] 인목왕후의 간택에 선조 본인의 의중이 상당히 반영되었던 전후 사정을 생각하면 그저 인목왕후의 외모가 선조의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집안같은 여러가지 사정이 고려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별 고민도 없이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고 아들까지 권력다툼에 이용되고만 것이 인목왕후의 비극이었다.

이 때문인지 목릉카카오맵 리뷰 별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141]

3.7. 치세의 핵심 업적이 부족하다는 견해

명종 대에 화담 학파의 박순, 허엽, 퇴계 학파의 류성룡, 김성일[142] 등은 물론 서인인 정철 등이 이미 출사한 점과 명종이 모친 사망 직후[143] 친사림적 성향의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이명, 권율의 부친 우의정 권철 세 사람의 삼상체제를 완성시킨[144][145] 점을 들어 명종 대에 이미 사림계가 장악한 정국을 선조 즉위 직후 인선 사항과 관련해 선조가 이어받았을 뿐이라는 시각도 있으며 명종 대에 비해 이렇다 할 업적이 없다는 학계의 비판도 존재한다.[146]

직전을 폐지해[147] 국고를 통일시키고[148] 경국대전의 주석서[149]를 편찬하는[150][151] 등의[152][153] 입법실적[154]이 있었던 명종 대에 비해서 치세의 명군이니 하는 헛소리들이 나오는 전란 전에 25년간 확실히 제도적 개선이나[155] 그 밖에 정부가 주도하는 문화사업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할만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156] 즉 25년간 그 인재를 가지고 장기적 관점에서 무슨 발전에 기여했느냐 하는 지적이다.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기의 한문학 융성이 있지 않았느냐고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것에 선조가 기여한 부분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명종 대에[157] 사단칠정논변이 명종의 업적은 아니지 않은가? 민간주도 성격의 선조 대에 성리학 발전은 정부주도 성격의 정조 대에 문예부흥과 그 주체부터 다르다고 하겠다.

일단 통치(내정) 면에서 보면 노비 인구 증가, 토지 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 같은 중종 대에 제기되고 이어진 민생문제에 대한 개혁담론들이 선조 대에 활발히 논의되었다.[158] 물론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를 말한다면 조선은 건국 이후로 체제의 모순이 쌓여 와서 다양한 병폐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는데 선조 시기에 이에 대한 공론화가 점차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공납제도와 관련해서는 대동법프로토타입인 수미법(收米法)을 율곡 이이 같은 신하들이 제시하자 선조 또한 농업국의 한계에서는 적절한 정책이라며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본인의 한심한 추진력과 무원칙하고[159] 보신적인 행태로[160][161][162][163][164] 제대로 된 결실을 맺지도 못했으며[165][166] 문제는 그 과정에서도 논의가 점차 진행되면 될수록 당대에는 사주인(私主人)들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167][168][169] 등의 소극적인 모습만 보였다는 것이다.[170] 감시강화[171] 처벌강화[172] 이따위의 것들이나 대책이랍시고 내놓기나 하면서 그 어떠한 진전도 없이 제자리걸음만 걸었는데[173][174] 물론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175][176][177][178][179][180][181][182]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하고[183][184][185][186] 하기는 했으나 얼마 못가 폐지되었다.

사실 이상한 말이 아닌 것이 선조에 대한 옹호론이 대중적 비난에 대한 반동에서 상당부분 비롯된 면이 있고 명확한 결과물이 없으니까 그 의도나 능력이 훌륭했다는 식의 변명으로만 대부분 점철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당장 본 문서 선조(조선)/평가긍정적 평가 문서만 봐도 이렇다 할 업적이 있는가? 명군의 치세라 불리는 전란 전에 25년 그조차도 아니 그 시기야말로 조선 역사상 붕당정치가 가장 비효율적으로 작동되던 시기였다. 성리학이 교조화 되고 붕당정치가 문제가 많았다고 흔히 일컬어지는 현종 대에 숙종 대에 그정도로 아무 결론도 못내리거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같은 하나마나한[187] 일을 하려다가 바로 백지화 되는 식의 지지부진한 시기가 반세기 가까이나 이어졌는가?[188] 그리고 여기에서야말로 선조라는 인간은 전란 전후 가릴 것이 없이 자기보신 외에 대체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가 의아할 정도로 군주로서 일관되게 보였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약간의 비판의식만 있었더라도 치세의 명군이니 하는 헛소리들은 애초에 나올 수 없었다.

3.8. 인사관리 차별과 줏대없는 행보

선조의 인사는 자신이 공평함을 가져야하는 한 국가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공정하지 못하고 차별적인 모습을 매우 강하게 보여왔다. 일례로 선조는 신립 하면 거의 껌뻑 죽는 모습을 많이 보여왔으며[189], 녹둔도의 일은 되려 이일의 목을 베어도[190] 말이 되는 상황인데도 이일은 커녕 만만한 하급군관이던 이순신이경록을 백의종군 시켰다. 다만, 이일은 선조에게 이순신이경록의 목을 베라고 했지만 선조는 적과 싸워 이긴 장수들의 목을 베는 게 얼척 없는 짓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이순신이경록을 죽이지는 않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에도 그저 명나라라고 하면 껌뻑 죽는 모습을 보여왔으며, 심지어 몽진을 가면서도 어떻게든 명나라 등 뒤로 숨을 궁리만 했다. 그나마 제4차 평양성 전투를 이겼기에 망정이지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면 선조는 계속 한반도 밖으로 나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곽재우, 김덕령 등 의병장들을 잔인하게 조져서 결국 김덕령을 사망하게 했다. 결국 선조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크게 선전할 만한 일을 한 장수에게는 후하게 대접해 준 반면 별것 아니게 보이는 상대는 잔인하게 찍어 눌렀다.[191][192]

4. 논란

4.1. 선조의 온전치 못한 정신상태

선조가 유독 멘탈이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로, 그가 앓고 있던 심질, 현재로써는 조현병으로 추정되는 정신질환을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나는 본시 심질(心疾)이 있어 때 없이 발작하는데 지금 걱정과 병이 겹치고 있으며, 성격 또한 소졸(疏拙)하여 잡다한 일을 좋아하지 않은 지 오래이다. 그런데 어찌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하여 번거로이 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혹 나를 사랑한다면 제발 다시 거론하지 말라.
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5월 21일 계묘 1번째기사

나는 본디 불민한 사람으로 반생(半生)동안 신병을 지니고 있어 심질(心疾)이 더욱 심하기 때문에 평소 생각하는 것은 금궤(金櫃)속의 약일 뿐, 인사(人事)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 만약 여러 날 고집한다면 반드시 광질(狂疾)이 발작할 터이니, 이는 조정이 인군을 사랑하는 뜻이 아닐 것 같다. 제발 제경(諸卿)의 덕을 힘입어 일찍 물러나 쉬었으면 하니,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말라.
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윤6월 1일 임오 1번째기사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존호 올리는 일에 대해 재차 아뢰니, 답하기를,
"나에게 본시 심질(心疾)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정신이 혼미하고 기분이 좋지 않아 허리의 둘레가 점차 줄고 있는데 대신들은 어찌 가엾이 여길 줄 모르는가. 만약 해야 할 일을 하여 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수 있다면, 어찌하여 감히 그대로 따르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12월 21일 갑오 3번째기사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선조의 정신건강은 임진왜란으로 벼락 끝까지 밀리면서 그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옛날 제(齊)나라에 맹인 재상 조정(祖珽)이 있었지만 어찌 맹인 임금이 있었는가. 거기다가 심질(心疾)이 날로 고질이 되어 불을 대하고도 춥다는 소리가 나오고 눈을 씹어도 오히려 열이 생긴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 달리며 혼미하여 동서를 구별하지 못해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모두 아연 실색을 하는데, 유독 경들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병 가운데 한 가지만 있어도 백성들 위에 군림할 수가 없는 것인데 더군다나 몇 가지가 겸해 있고 허다한 죄악을 지은 자이겠는가. 내가 하루를 더 왕위에 있으면 백성들이 하루를 더 걱정하게 된다.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8일 갑자 3번째기사

전에 여러번 나의 충정을 토로하였으나 다 시행이 안 되어, 밤에는 잠을 못 이루고 낮에는 먹지를 못하여 심병(心病)이 날로 심해지고 눈은 날로 어두워지니 기무(機務)에 관한 일을 감당하기 어려운 형세이다. 근래에 장소가 자주 올라오는데 어찌 채용할 만한 말이 없겠는가마는 ‘비변사에 내리라.’고만 하였다. 혼미하고 잘못됨이 이러하니 마음이 괴롭다.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23일 기묘 3번째기사

지난밤에는 심병이 더욱 위급하여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슬프게 울기도 하여 좌우(左右)의 사람들이 놀라와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옛날부터 이와 같은 임금이 있었던가? 일찍이 어떤 종류의 변고(變故)를 만났는데 나에게 심병이 없다고 여기는가?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29일 갑신 2번째기사

병세(病勢)가 날로 악화되어 깊이 고황(膏肓)에까지 들어가서 죽음에 임박하여 조석(朝夕)에 달려있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심질(心疾)이 더욱 심하여 이제는 미친 증세로 변하였으며 그 동안 놀라왔던 증상은 차마 다 말할 수가 없다. 무릇 미친 증세가 있는 사람은 약으로 다스릴 수가 없는 것이어서 반드시 인사(人事)를 사절하고 문을 닫고 홀로 있으면서 몸은 마른 나무처럼 되게 하고 마음은 불꺼진 재처럼 되게 한 지 10여 년 뒤에 가서야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증세를 끝내 다스릴 수가 없게 되어 갈수록 더욱 심해질 것인데, 더구나 서무(庶務)를 재결(裁決)하고 군기(軍機)를 책응(策應)하기를 기대하는 일이 이치에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민망하게 여기는 정사(情事)는 단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 생각하고 내일도 생각하고 이달에도 생각하고 다음 달에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반복하면서 생각해봐도 끝내 그대로 있을 수가 없다. 이대로 미루어 나가면서 즉시 결정짓고 물러가지 않는다면 뒷날의 일이 더욱 더 차마 말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속히 시행하도록 하고 다시는 번거롭히지 말라.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4일 을묘 2번째기사

한번 보고는 가슴이 뛰어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혼매한 나의 심사를 경은 아마 살필 수 있을 터인데도 오히려 이해해 주지 않으니, 다른 사람이야 말할게 뭐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두렵고 민망 절박하여 마치 돌아갈 데가 없는 곤궁한 사람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심병(心病)이 날이 갈수록 더욱 극심해지고 정신도 날이 갈수록 더욱 쇠모해지고 지려(志慮) 또한 날로 더욱 폐색해짐으로 인하여 일의 처리가 날로 더욱 전도되고 언어도 날로 더욱 착오를 일으키고 있다. 이와 같은 처지인데도 억지로 왕위에 무릅쓰고 있다는 것은 진실로 이렇게 해야 할 이치가 없는 일임은 물론, 사세를 참작하여 헤아리지 못하고 분개한 말만을 하고 있으니 망령됨이 더욱 심하다.
선조실록 51권, 선조 27년 5월 28일 을사 4번째기사

더욱 한없이 마음이 아파오며 답답하기 짝이 없는 속에서도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질병이 고황(膏肓)에 깊이 박혀 정신이 없어지고 단지 형체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제는 양쪽 귀가 완전히 먹었고 두 눈이 모두 어두워져 지척의 사이에서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없고 몇 줄의 글도 자획(字劃)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심병(心病)마저 생겨 날로 더욱 고질이 되어 하는 말이 잘못되기만 하고 하는 일도 어그러지기만 하여 혼망(昏妄)과 전도(顚倒)를 거듭하고 있으니 놀랍고 당황스럽다. 두 팔은 삼대처럼 뻣뻣하고 두 다리는 잘 펴지지 않아 사지(四肢)와 백체(百體)가 아프지 않은 데가 없는데 특히 가슴 속의 답답한 기운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
죽을 날이 이미 가까와져 의술(醫術)이나 약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이러면서도 정무(政務)를 듣고 학문을 강론하고 온갖 기무(機務)를 수작(酬酢)하다니, 천하에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 때문에 하루 넘기기가 1년 같으며 낮이나 밤이나 눈물만 흘리므로 질병이 갈수록 더해지는데 그런데도 이 몸은 매여 있는 형편이다. 아, 예나 이제나 돌아갈 데가 없었던 궁한 사람을 말하자면 어찌 한이 있겠는가마는 나와 같은 사람이 어찌 다시 있었겠는가
선조실록 78권, 선조 29년 8월 27일 임술 1번째기사

상이 이르기를,
"나에게 민박(悶迫)한 일이 있다. 여러 병이 있는 가운데서도 담증(痰症)과 흉통(胸痛)이 더욱 심한데 금년 겨울 추위가 유별나서 흉통이 자주 일어나 머리를 내밀 수가 없다. 근일에 행례(行禮)하는 일로 인하여 자주 옷을 벗느라 조섭(調攝)을 잘못하여 감기에 걸렸다. 수일 전부터 흉통이 크게 일어나 아파서 울부짖느라 숨이 끊어질 것 같아 거의 살지 못할 지경이다가 크게 토(吐)하고 나서 겨우 면할 수 있었다. 몸이 나른하고 기운이 지탱할 수가 없는데 기무(機務)가 몰려들고 있다. 평소에도 좌수 우응(左酬右應)하다 보면 현기증이 나서 재결을 할 수가 없었는데 더군다나 병중이겠는가. 참으로 인생살이가 난감하다.
...
나의 수척한 병의 증상에 대해서는 중국 관원 역시 말을 했다. 만일 내가 먼저 죽으면 경들도 후회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나와 경들은 처음부터 사이가 없었는데 어찌 괴롭게도 편벽된 의논을 고집하여 나의 고민을 풀어주지 않으며 병을 구원하지 않는가. 장차 원통함을 품고 죽어 지하에서 서로 만나면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좋게 처리하라. 영접하고 위로하는 예(禮)를 대행하게 하는 것이 어찌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겠는가. 감히 적에게 봉작을 했다 해서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병세가 이러하므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만일 기운이 허하고 다리에 힘이 없어 허다한 읍양(揖讓)과 수작(酬酢)을 하는 즈음에 혹시 넘어져 실수라도 하면 중국인들에게 웃음을 살 것이니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다. 이상이 나의 고민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마땅히 아뢴 대로 행하겠다. 이 뜻을 함께 언급하는 바이다."
하였다.
선조실록 84권, 선조 30년 1월 6일 정유 5번째기사

지금 병 때문에 침상에 앓아 누워 있는데도 구름 쌓이듯이 많은 국가의 기무(機務)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응수(應酬)하느라 일각(一刻)도 쉴 수가 없다. 아, 병을 무릅쓰고 일을 한다 한들 나랏일에 있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몸만 손상시킬 뿐이다. 또 반드시 나라를 상망(喪亡)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대신들이 유의할 일이 아니겠는가. 심질(心疾)이 더욱 극심해져서 전광증(顚狂症)으로 크게 부르짖으며 인사(人事)를 살피지 못하니 곁에 있는 자들이 놀라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다. 이는 심장이 먼저 상한 것이어서 상하지 않은 것이라곤 오직 한 줌의 기(氣)뿐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선조실록 97권, 선조 31년 2월 25일 경진 2번째기사

평소 심병(心病)이 있으므로 늘 눈을 감고 조용히 숨쉬어도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는 실정인데, 요즈음 계사(啓辭) 때문에 온갖 생각이 가슴속에 맺혀 낮에도 눈썹을 펴지 못하고 밤에도 눈을 붙이지 못하여 허리가 날로 가늘어져 황황하고 답답한 나머지 마치 경들에게 죄를 거듭 얻는 듯하니, 이것은 경들이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다.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오늘은 정계(停啓)할 것인가고 여겼다가 이윽고 계사가 다시 들어오면 그때마다 두려워 실의(失意)하고 심화(心火)가 끓어오르는데 오늘도 이러하고 내일도 이러하니 참으로 슬프다.
선조실록 177권, 선조 37년 8월 21일 기해 3번째기사

또 이르기를,
"나는 하나의 심병(心病)을 앓는 사람이다. 내가 말하면서도 말의 시비를 알 수 없다. 또 내가 일전에는 입으로 토설하지 못하여 벙어리 같았는데 오늘날 이 자리에서 경들과 함께 말할 줄을 예측하였겠는가."
하였다.
선조실록 193권, 선조 38년 11월 3일 계유 1번째기사

비망기로 시약청에 전교하였다.
"중풍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중풍에 가까운 것인가? 여러 가지 병 중에 심병(心病)이 극히 중한 것이다. 어제는 일의 까닭을 몰랐는데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부축하고서 조심스럽게 말하였으므로 놀라고 의혹하여 정신이 더욱 상하고 심기(心氣)가 더욱 크게 발하여 스스로 부지할 수가 없다. 알고서 약을 쓰는 것이 좋겠다.
선조실록 217권, 선조 40년 10월 11일 경오 2번째기사

비망기로 일렀다.
"나는 본디 질병이 많아서 평일에도 만기(萬機)의 정무는 절대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지금은 병에 걸린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조금도 차도가 없어 정신이 혼암하고 심병이 더욱 침중하다. 이러한데도 왕위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세자 나이가 장성하였으니 고사에 의해 전위(傳位)해야 할 것이다.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攝政)하는 것도 가하다. 군국(軍國)의 중대사는 이처럼 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속히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선조실록 217권, 선조 40년 10월 11일 경오 3번째기사

답하기를,
"이와 같이 하고서 조섭하고자 한다면 이는 먹기를 거절하면서 살기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가련키 그지없다. 그러던 중에 심병이 갑자기 발작하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몹시 민망스럽다. 오직 이 일념뿐 그밖에 다른 생각은 없다."
하였다.
선조실록 217권, 선조 40년 10월 11일 경오 4번째기사
특히 선조는 심질을 이유로 여러 번 양위 소동을 벌였다. 하지만 후세의 해석도 선조의 양위 소동을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쓴다고 해석할 정도인데, 당시의 대신들은 오죽할까? 대신들은 '이제 민망하고 답답합니다'라고 대놓고 일축할 정도였다.[193] 그럼에도 결국에는 심질이 심해져 실어증에 걸리거나 새벽에 쓰러지기도 하는 등 실제로 선조의 정신질환이 심했으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납득이 갈 것이다.

4.2. 선조와 이순신

전라좌수사 시절까지만 해도 이순신과 조선군에게 선조는 은인이었다. 그것도 난중일기에 임진년 공 정도르는 선조에 대한 은혜를 다 갚기에는 부족하다고 쓰여있을 정도다. 선조는 의외로 국방 및 군사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 지식도 제법 갖춘 임금이었다. 우선 '북쪽 변방에서 오랑캐가 중요한 농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니 해당 책임자인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을 징계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탄원서가 두 사람의 상관이었던 이일에 의해 올라온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0월 16일 신미 1번째기사
이는 이전에 여진족 침입 당시 전장에서 도주한 죄목에 대해 현장에서 참수하라는 왕명이 내려졌고 그 사례의 예에 해당하지 않으니 사형은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순신이경록은 삭직 및 백의종군 처분에 처해졌다. 이후 1589년에 하삼도 병사 및 수사 선발에 대해 비변사에서 올라온 목록에서도 확인된다.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서득운을 전라 병사로, 이혼을 우수사로, 신할을 경상 좌수사로, 조경을 제주 목사로 삼고자 한다. 이옥과 이경은 본처(本處)를 고수해야 하고 이빈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니 경솔히 수용(收用)할 수 없다. 또 이경록(李慶祿)·이순신(李舜臣)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議啓)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7월 28일 계유 1번째기사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 2월 16일 계미 2번째기사
전라좌수사 임명엔 당시 진급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이유로 사간원에서 체차(遞差)[194]를 청하자 감싸주기도 했다. 위의 이야기대로 평화로웠던 시절엔 원균을 쫒아내고 이순신을 앉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을 보는 눈이 아주 날카로웠음을 알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원균은 후에 경상우수사로 다시 부임했기 때문이다.[195] 선조는 원균도 상당히 높게 평가했기 때문에 아마 이순신과 함께 왜군들이 침공해올 바다를 방어하게 시킬 생각으로 자신이 신뢰하는 두 인물을 수군에 앉혔을 것이다. 자기 딴에는 투톱으로 생각한 셈. 선조가 야심차게 그려낸 이 큰 그림은 훗날 절반만이 옳았음이 아주 참혹하게 드러난다. 아무튼, 해당 사간원의 말을 선조가 씹어버린 후 이틀 후 다시 사간원에서 이순신을 쫒아내라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나주(羅州)는 남쪽의 거진(巨鎭)으로 본시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이름난 곳인데 변경(邊境)에 일이 생기면 원수(元帥)는 영(營)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웃 고을 수령과 본주(本州)의 판관들이 모두 무변(武弁)인 만큼 군대를 이끌고 적을 방어하는 데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체차하고 재략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 나주 목사는 천천히 발락(發落)하겠다."
하였다.
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 2월 18일 을유 1번째기사
이리저리 길게 말을 늘어놓으면서 이순신을 끌어내리라고 아우성치는 사간원의 상소를 일축하면서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깊은 신임을 보였다. 선조는 종친도 아니고 나라에 명망높은 사대부도 아니었던 이순신을 사간원이 경악할 정도로 엄청나게 빠르게 승진시켰는데 당시 이순신의 벼슬의 변동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현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수로 승진했으니 짐싸서 부임할 준비를 하라는 교지가 와서 준비를 하고 있었더니 다시 첨절제사로 승진했다는 교지를 받아서 읽고 있을 무렵에 다시 전라좌수사로 임명하겠다는 교지가 날아온 것이었다. 수군절도사는 정3품으로서 당상관에 드는 직책이었고 타인으로부터 영감으로 불리며 존대받는 위치였다.[196] 종6품으로서 지방의 현감에 불과했던 이순신이 품계로 무려 9단계를 2년만에 건너뛰어 전라도 수군의 절반을 다스리는 수군절도사로 초고속 승진한 것이다. 사간원이 이순신을 시기하거나 능력을 낮잡아 봐서 상소를 올린 것은 아니었고 조선사에 유례가 없는 고속 승진이라 우려의 여지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선조의 강력한 후원이 없었다면, 이순신은 임진왜란 개전까지 지휘권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초반까지만 해도 선조는 이순신이 승리할 때마다 승진시켜주기 바빴다.[197] 그도 그럴 것이 전란 발발 후 육지에서는 번번한 승전이 없는 반면 바다에서는 자신이 특별히 발탁한 이순신이 싸우는 족족 대승을 거두니 의주까지 도망가 있는 선조 입장에선 이순신의 승전 장계가 반가울 수 밖에 없다. 선조는 당시 속속 날아오는 이순신의 승전보와 왜군의 수급을 보고 뛸듯이 기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직접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고 치하하라는 명을 많이 내렸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李舜臣)은 밖에서 의논하기를 어떠한 사람이라고들 하는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쓸 만한 장수입니다. 원균(元均)으로 말하면 병폐가 있기는 하나 몸가짐이 청백하고 용력(勇力)으로 선전(善戰)하는 점도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 동궁(東宮)이 남으로 내려갔을 때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불러도 오지 않았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원균이 당초에 사람을 시켜 이순신을 불렀으나 이순신이 오지 않자 원균은 통곡을 하였다 합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군사를 청하여 성공하였는데, 도리어 공이 순신보다 위에 있게 되자, 두 장수 사이가 서로 벌어졌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의 사람됨으로 볼 때 결국 성공할 수 있는 자인가? 어떠할는지 모르겠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알 수 없습니다마는, 장사(將士)들은 이순신이 조용하고 중도에 맞는다 합니다. 그러나 지금 거제(巨濟)의 진(鎭)에는 원균을 보내야 하니, 거제를 지키는 일이라면 이 사람이 아니고 누가 하겠습니까."
하였다.
선조실록 76권, 선조 29년 6월 26일 임술 2번째기사

상이 이르기를,
"통제사 이순신은 힘써 종사하고 있던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그 사람은 미욱스럽지 않아 힘써 종사하고 있을 뿐더러 한산도(閑山島)에는 군량이 많이 쌓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는 왜적들을 부지런히 사로잡았다던데, 그후에 들으니 태만한 마음이 없지 않다 하였다. 사람 됨됨이가 어떠하던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많은 장수들 가운데 가장 쟁쟁한 자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는 동안 처음과는 달리 태만하였다는 일에 대해서는 신이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절제(節制)할 만한 재질이 있던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으로는 경상도에 있는 많은 장수들 가운데 순신이 제일 훌륭하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81권, 선조 29년 10월 5일 무진 1번째기사
그러나 이순신의 명성이 너무 올라가버린 임진왜란 중반에 가면 선조가 이순신을 정말 싫어한 것이 확실하다.[198] 파직 건에 대해서는 누가 봐도 무리인 게 뻔히 보이는 데도 잡아온 후 임금과 조정을 기만했다고 고문[199]을 한 것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결국 백의종군으로 끝나긴 했지만 이원익정탁이 총대 메고 나서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있어났을지는 상상에 맡긴다.[200] 여기서 신하들도 이순신 조지기에 반대하지 않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선조가 대놓고 "얘 잘못 없는건 지나가는 개도 알지만 내 마음에 안들어. 이새끼 조질건데, 반대하는 놈은 같이 조져지고 싶은 놈으로 알거임" 수준으로 밀어붙여서였다. 물론 이원익정탁이 나섰을 때 이순신을 백의종군하게 하고 이 둘에게도 뭐라 안한걸 보면 정말 그랬을 리는 없었겠지만 그럴거라는 분위기 정도는 조성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전사했을때 선조의 반응도 가관인데 이순신의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전해들은 선조는 무덤덤하게 뒷일은 내일 비변사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답해 소식을 전하는 신하가 도리어 놀랐다는 반응이 적혀있다. 이런 경향은 그 뒤에도 이어져 이순신은 장례 문제에 관해 예조가 알아서 처리하라거나 # 차례 순서가 구애 받지 않는 상황임에도 등자룡의 장례를 먼저 치루겠다고 짧고 냉담하게 반응한다. # 그것도 비변사에서 충의를 지닌 명장 그 자체였던 이순신의 장례에 대해 강조한 상태임에도 이런다. # 훗날 도독인 유정이나 여러 명나라 장수와 선조를 마주할때 이순신과 같은 이들이 나라를 위해 몸바친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거나 이순신은 충신이라고 말하는 등 한마디씩 그에대한 말을 하는데 ### 그때마다 말을 넘겨 짚는다.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구국의 영웅이 죽었는데 보인 반응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차가운 반응이였다.

즉 선조가 이순신에 냉대한 것은 왕정 체제의 운영자인 군왕으로서 난세의 유력 무신인 이순신을 경계한 것이 컸겠지만, 개인적인 시기, 질투, 열등감 등도 많이 들어갔다고 봐야할 것이다. 정적으로서 이순신을 경계하는 것은 이순신이 살아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전사한 이상 그 후광과 세력을 그대로 이어받을 후계자가 있는게 아니라면 더 이상 견제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적으로서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경계는 이순신이 전선에서 선조의 출격명령을 여러번 어기자 선조는 '무신이 조정을 가벼이 여기는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발언과 함께 이순신에 대한 징벌을 행했던 것으로 볼 때, 조선 왕국 자체가 전쟁영웅인 이성계가 건국한 국가이자 문치주의 왕국인만큼, 제2의 전쟁영웅의 출현과 무신정권의 탄생을 경계하는 전통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위기상황에서 이를 안가리고 숙청을 시도한 결과 칠천량 해전이라는 임란 최대의 비극을 초래했기에 아무리 옹호적으로 봐줘도 근시안적이라는 비난은 피하기 어렵다.[201]

다만 이일과의 마찰, 온갖 모함과 백의종군을 여러번 거치며 이순신 스스로 의심을 자초한 것도 있긴 하다. 굳이 이순신이 아니더라도 사심 없이 그저 본분에만 충실하고 높은 명성에 비해 스스로를 변호할 수단은 하나도 마련해 두지 않는 명장들은 내쳐지거나 죽는일이 많았다. 이순신도 그런 케이스 인 것이다. 이순신이란 구국의 영웅에게는 안타깝지만 만일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더라도 이후 여러 공신들이 조정을 떠나버린 것을 생각하면 가장 큰 명성을 차지한 이순신에 대한 견제는 어느정도 예상되는 일이 었다.

그럼에도 선조는 일본군이 아직 부산포에 진을 친 상황에서 개인적인 감정, 근시안적인 판단 하에 권력 조차 없는 이순신을 무작정 밟으려 들었다. 이런 결정은 이순신이 충성의 상징이 된 후대에 들어서 선조가 두고두고 악평을 듣는데 가장 큰 일조를 하고 말았다. 견제의 수단이라도 잘 정했다면 좋았겠지만 선조의 인격적 그릇은 작았고, 가장 거대한 공헌과 승전보를 안겨주며 나라를 구한 신하에게 할만한 견제라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수단을 선택하고 말았다. 물론 자기말을 잘따라줄것 같은 원균이 제2의 이순신이 되어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저지른 도박이었겠지만 원균은 그저 전공 가로채기에 열심히인 공갈빵과 다름없는 인물이었고 결국 칠천량 해전 대패로 이어짐과 동시에 국가의 전운이 통째로 뒤집혀 엎어질 정도로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정부차원에서 견제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견제의 의도가 어찌됐든 그 결과가 칠천량 해전이라는, 희대의 대패전이라는 점에 그 의도조차 타당하다고 평가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를 이해하는 것과 그것이 이해할만 한 일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고 상식적으로도 가장 거대한 전과를 올린 장수라면 견제를 하더라도 일단 상황이 수틀리면 바로 다시 원상복귀시킬 수 있도록 선을 맞추고 견제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당시 선조는 무정부 상태고 뭐고 국가 자체의 존망이 걸린 상황임에도, 국가가 전복되면 정부고 뭐고 없는데도 본인의 자존심을 우선한 것이다.

4.3. 방계승통 열등감 낭설

선조에 대해 방계 출신으로 즉위한 것이라 정통성 문제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꼈다는 주장이 대중에게 몇년 전부터 널리 퍼져있는 상태다. 그러나 이는 유교 종법과 조선 왕실에 이해가 부족해서 나온 주장이다. 종법을 안다면 선조의 정통성은 결코 문제가 있거나 컴플렉스를 느낄 상태라고 보기 어렵다. 요지부터 언급하자면, 조선 중기 당시의 예법(법리적)으로나 풍토상(문화/도덕적)으로나 선조의 정통성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명종에게 정통성 있는 아들이 있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애당초 명종의 후계자인 순회세자는 일찍 죽었기에 명종이 죽으면 유교 예법상 아래 항렬의 조카들 중에서 후계자를 고르는게 당연했다.

명종이 설령 직접 지명하지 않고 갑자기 죽었어도 왕실 여성 웃어른과 대신들이 상의해서 명종의 조카 중에 가장 적합해 보이는 사람 한 명을 골라 왕위를 물려주는게 당연한 절차인데, 심지어 선조는 명종이 죽기 전에 이미 낙점을 받은 상태였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명종은 사망하기 2년 전에도 한번 심하게 병을 앓고 사경을 해맨 적이 있는데, 이때 이미 명종이 죽을 가능성을 걱정한 신하들이 조카들 중에서 한 명을 후계자감으로 정해두라고 에둘러 권했기에 명종 본인이 직접 조카들 중에 하성군으로 골라서 자신의 병수발을 들게했다. 자기가 급사하는 돌발 상황이 일어날 경우에는 하성군이 사실상의 후계자라고 인정한 것이다. 다만 이때는 명종이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났고, 아직 젊은 자기가 직접 아들을 낳아서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는지[202] 하성군을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고 사저로 돌려보냈기에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2년 뒤 명종이 다시 병으로 급사하자 명종의 정실 왕비인 인순왕후가 직접, 추가로 회의할 필요도 없이 이미 2년전에 명종 본인이 점지했던 하성군을 불러 바로 명종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명종이 직접 명시적으로 정식 후계자로까지 인정하지는 않은 것이 선조 입장에서 약간의 아쉬운 점일 뿐 절차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조선의 왕실 법도에 따르면 혈연 관계보다 종법 계통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선조의 종법상 아버지는 엄연히 명종이었다. 양자로 입적된 이상 생부는 친척에 해당하며 덕흥군은 신하의 지위에 머물렀기 때문에 따라서 선조는 추숭은 커녕 덕흥대원군의 제사에 절도 할 수 없었다. 즉위 초에 덕흥군 봉사손(자신의 큰형 하원군)을 1품 세습으로 하려다 신하들 반대로 무산되고 한참 지난 즉위 39년차에 잠깐 얘기만 나왔던 게 전부였다.[203] 혈연 관계로만 따져도 중종의 7남인 덕흥대원군의 3남인 선조는 중종의 차남 명종과는 삼촌과 조카 사이로 매우 가까운 촌수다. 혈통상 멀기 때문에 열등감을 가져야 한다면 이후 국왕들 중에선 훨씬 더 먼 사람들도 많았다.[204]

서자를 차기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자기의 생부를 적극적으로 추숭하려 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적자가 아니라서 열등감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 왕실은 사대부와 달라서 서자라도 문제 없이 승통이 가능했고,[205] 따라서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적자로 입적하는 상식이었기 때문에 서자나 서손 출신이라서 열등감을 느낄 일이 없었다. 열등감을 느끼려면 선조보다 종법질서상 앞서는 대체 왕실 후손이 있어야 하나, 당시 명종의 친조카 하성군이던 선조보다 앞서는 순위의 후보자는 없었기 때문이다.[206] 즉위 초반에 그 흔한 역모 사건도 찾아볼 수 없다. 정통성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려면 쿠데타로 왕이 된 세조, 중종, 인조 같은 케이스에나 해당된다.[207]

51세 때 19세의 인목왕후를 계비로 들이고 영창대군을 총애한 걸 방계 콤플렉스의 증거라 주장도 있는데 내명부 수장인 왕비가 죽으면 새로 왕비를 간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종 이후의 왕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208][209] 외려 그렇게 하지 않은 문종은 결국 계유정난 당시 단종의 보호자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210] 새 왕비 간택은 일종의 보험이다.[211] 또한 이때 이미 선조는 광해군을 적대시하고 있었으므로, 계비를 들여 적자를 세자로 삼으려 한 것은 딱히 방계로서의 콤플렉스가 아니라 그저 광해군을 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왕위를 넘기기 싫어했을 뿐이라고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선조는 그 혈통적 명분 때문에 역모가 일어난 적도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선조가 임진왜란 몽진길에 올라 호종하는 군사들의 수가 적었음에도, 이보다 훨씬 강한 군사력을 지닌 장수들과 의병장들도 감히 왕권에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왕권이 강력했다. 이는 물리적 무력을 압도하는 그 어떤 정신적 사상이 당시 조선 지배층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212][213] 혹자들이 선조가 정통성 컴플렉스를 가진 증거라고 주장하는 임진왜란 중에 선조가 보인 의심병이나 불안 증세 같은 건 정통성 컴플렉스 때문이 아니고 따라서 동정의 여지 따위는 없다. 그냥 선조 자체가 순수하게 추한 소인배였던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더 적절하다.

[1] 이황은 주희 철학의 계승자이다. 리학 발전사의 입장에서 중요한 점은, 이황이 주희의 어떤 사상을 다시 서술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희의 사상을 어떻게 발전시켰는가에 있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이황은 주희의 철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였으며, 주희의 철학이 지닌 어떠한 모순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인식하였다.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까지도 제시함으로써, 주희의 철학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던 논리적 연결 고리를 드러내 주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관점에서 볼 때, 주자학의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 가는 과정이 있었다. 명대 중기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생명력 있는 주자학자를 다시는 배출해 내지 못했다. 주자학이 명대 중기에서 청대까지 여전히 정통 철학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이 당시 주자학은 중국에서 날로 생명력을 잃어가는 철학이었다. '심학'의 성행에 때맞춰, 가정嘉靖 연간 이후의 주자학은 진일보하여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활력을 조선에서 얻게 되었다. 퇴계 철학의 출현은 조선 성리학의 완전한 성숙을 표명해 주는 것임과 함께 주자학의 중심이 이미 조선으로 옮겨져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었으며, 그 뒤 동아시아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이미 마련하고 있었음을 표명해 주는 것이다. (<송명성리학>, 475)[2] 선조에게 발탁되기 전에 이순신은 만호 직을 두 번 역임했는데 한 번은 전라좌도수영 휘하 발포 만호, 다른 한번은 함경도 북병영 휘하 조산보 만호였다.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임명되기 전까지는 종4품 이상의 직책을 역임한 적이 없었으며 조산보 만호에서 파직되고 백의종군을 마친 이후에는 한직을 전전하고 있었다.[3] 그러나 광해군 역시 즉위 초 이러한 대규모의 역사와 칙사 접대에 따른 貢·役의 과중함을 주지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다. 광해군은 즉위년 3월 비망기를 내려, 조사의 접대에 만반을 기할 것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 지방의 해묵은 逋欠과 급하지 않은貢賦, 군졸들의 逃故, 토호세력의 侵凌 등의 폐단을 일체 견감, 개선하도록 조치하였다. 특히 供上하는 方物과 內需司의 일에 대해서도 감세하도록 지시하였다.20)[214] 당해 5월에 설치된 선혜청은 광해군의 이 비망기로부터 직접적인 설립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선혜청이 설립되기 두 달 전, 영의정 이원익이 사직을 청하자, 광해군은 이조, 호조, 예조의 당상으로 하여금 직접 이원익의 집에 가서 時事를 의논하고 오도록 지시하였는데21)[215], 이때의 주요 논점이 바로 비망기에 언급된 사안이었다. 광해군의 지시가 있던 다음날 좌찬성 柳根(1549∼1627), 병조 판서 李廷龜(1564∼1635), 호조 판서 金信元(1553∼1614) 등은 이원익과 논의한 내용을 광해군에게 바로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전일의 傳敎 가운데 詔使를 접대하는 일이 더욱 긴급하니, 館伴使와 遠接使를 먼저 차출해야 됩니다. 그런 뒤에 儀注·支待·用軍 등에 관계된 일은 마땅히 호조·예조·병조 등과 함께 마련하여 시행하겠습니다. 군졸들의 逃故에 대한 일들에 이르러서는 該曹에서 지금 거행하고 있습니다만 事目은 미처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이밖에 해묵은 逋欠, 긴급하지 않은 貢物 등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단에 관계된 것은 일체 견면하고 혁파하고 통렬히 금하라는 것으로 전교가 있었기 때문에 차자에서 하나의 局을 설치하여 전적으로 그 일을 주관하게 하시라고 청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차자의 내용대로 백성들의 일을 잘 아는 사람 4, 5원을 차출한 뒤 회의하여 마련해서 시행하게 하소서....”22)[216]...기사의 밑줄 친 부분에서처럼 각 읍의 해묵은 포흠과 긴급하지 않은 공물 등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서 ‘하나의 국’을 별도로 설치하는 방안은 이원익의 차자에서 나온 것이나, 그 논의의 발단이 된 것은 광해군의 비망기였다. 그리고 이 비망기는 사실상 즉위 초 산릉과 조사(중국사신 방문)의 일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번잡한 민역을 해소하려는 의도에서 발의된 것이었다. 위의 기사 첫 부분을 통해 보듯이 광해군은 조사의 접대를 최우선 과제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호조, 예조, 병조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케 하는 대신, 사신 접대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다른 부역을 견감시켜주고자 했던 것이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8-10)[4] 비록 지방관수로 쓰일 유치미를 충분히 설정하지 않았고, 광해군 스스로 정책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지 못한 점 등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경기선혜법은 대동법의 뼈대를 갖춤으로써 이후 대동법의 전범으로 인식되었다.10)[217]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5)[5] 호서대동사목에는 月課軍器를 제작할 때의 군량미는 경기선혜청의 예대로 停罷하는 대신 이를 대동세에서 지급하도록 정해 놓았다.44)[218]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17)[6] 다만 분호조의 경우, 애초에 명목이 없는 은이나 포목, 곡물 등의 재원을 중앙의 필요에 따라 조도하였던 것과 달리, 선혜청은 공물을 ‘作米’하던 관행을 공식화하여 운영함으로써 외방에서 그때그때 차출해 쓰던 현물과 노동력이 서서히 대동세 안에 수렴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인조대 삼도대동법이 시행되었다가 3년만에 폐지됨으로써 공물작미의 관행이 다시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병자호란 이후 金堉(1580∼1658)에 의해 호서지방에 대동법 시행 논의가 재개되면서 그때그때 적용되던 공물작미 방식은 폐지되고, 각도마다 고정된 대동세를 거두는 방식으로 정비되어갔다. 이처럼 경기선혜법은 17세기 전반 당면한 재정현안을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되었으며, 경기선혜법을 시행을 통해 정해진 원칙, 즉 공물을 일관된 기준의 대동세로 거두고, 민역 동원을 給價체제로 전환하는 방식은 이후 중앙의 재정구조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29)[7] 그러나 시행과정에서 다소 난항을 겪었던 경기선혜법은 향후 대동법 시행에 중요한 원칙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것은 잡다한 민역을 수시로 동원하는 역체계를 급가체계로 변화시킨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현존하는 대동사목에는 각종 요역을 대동세로 지급하는 조항이 열거되어 있으며, 이러한 역체계의 변화는 향후 중앙 뿐아니라 지방재정의 지출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였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30)[8] 참고로 선조 대에 그나마 꼽을 수 있는 문화사업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편찬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중단되고 대부분이[219] 광해군 초에 허준이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 받아서[220][221] 작성되고 완성되어[222] 간행되었기에[223] 일반적으로 허준의 개인저작이거나 광해군의 전후복구 내역[224] 중 하나로 간주된다.[9]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당장에 조선이 '자국이 침공을 당하는' 전쟁 대비에 미흡했다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타국을 침공하는' 전쟁에는 더 어려울 수 밖에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이 할 수 있는 것은 전쟁 준비밖에는 없다. 태종 때 대마도를 정벌했는데 그 후에 재정벌을 하지도 않았고 태종 생전에는 다음에는 10만 대군으로 초토화시켜버리겠다는 등 열심히 협박만 했다. 물론 협박은 잘 먹히기는 했다. 대마도도 조선의 공격이 현실이 되는 것에 기겁했고 마침 중국에서도 왜구를 작살을 내버려 깨갱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계해약조를 맺어 문제를 종결시켰다.[10] 징비록을 비롯한 현대 사극에서는 조정이 했던 전쟁 준비는 일부러 무시하면서 백성들과 지역 양반들의 안보 불감증에는 너무 쉽게 면죄부를 주기에 모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선조를 비롯한 조정에서는 전쟁 준비를 할 만큼은 했다. 진짜 문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상식을 무시한 엄청난 규모의 침공을 너무나도 빠르게 감행했던 것 단 하나 뿐이었다.[11] 동아시아 역사상 10년 만에 요와 송 두개의 제국을 무너뜨렸던 금나라가 그나마 예외지만 이것은 금나라가 유목 제국으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 대부분은 일단 몇 년씩 준비를 했다.[12] 이 급박한 전쟁 준비는 당연히 상당한 민심 이반을 불러왔는데 조선 남도 민심이 굉장히 흉흉해져셔 경상감사 김수는 지역유림과 크게 부딪쳐서 뒷날 곽재우가 그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지경이었고 김수는 역으로 곽재우가 위험한 놈이라고 조정에 보고하는 판이었다. 이광이 파견된 전라도에서는 개전 직후 왜적에 맞서야 할 군병들이 소요사태를 일으켜 관리를 공격하고 성을 점거하는 바람에 왜군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전에 이들부터 진압해야 했다.[13] 다만 원균이 초기에 자기 휘하의 함대로 일본군 저지를 막지 않고 육지로 도주해 버린 것이 큰 오점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상우수영은 조선 수군 중에서 최대 규모였기에 원균이 나가 싸워서 지더라도 상당한 피해를 입혀줬을 것이고 이겼다면 우리가 오늘날 임진왜란 때에 찬양하는 영웅으로 이순신, 권율 그리고 원균을 꼽았을지도 모른다. 이 경우 원균이 적을 이긴 후 "얘네들 막 병력 몰고 쳐들어 오는데요?" 라고 알리면 조정에서는 미리 짜놓은 메뉴얼에 따라 병력을 진격 루트가 될 경상도의 병력들을 제승방략에 따라 모아놓았을 것이고 더 좋은 점은 원균이 적을 막고 있었으니까 조정에서는 한결 여유가 있어서 상주 전투와 같은 어이없는 졸전은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도 병사는 다 흩어지고 어제까지 농민이던 사람들로 싸우는 일까지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225][14] 참고로 선조 대에 그나마 꼽을 수 있는 문화사업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편찬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중단되고 대부분이[226] 광해군 초에 허준이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 받아서[227][228] 작성되고 완성되어[229] 간행되었기에[230] 일반적으로 허준의 개인저작이거나 광해군의 전후복구 내역[231] 중 하나로 간주된다.[15] 우부승지 이이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에 관한 것과 재변을 없애고 덕을 진취시키는 것에 대한 설을 극진히 아뢰었다. 그 소에, "신은 삼가 아룁니다. 정사는 시의(時宜)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실공(實功)을 힘쓰는 것이 중요하니, 정사를 하면서 시의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적(治績)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오늘 한 가지 계획을 진언하여 명목 없는 조세(租稅)를 없앨 것을 요청해 보아도 각 고을의 세금 징수는 여전하고, 다음날 한 가지 일을 건의하여 전호(田戶)의 부역(賦役)을 고르게 할 것을 요청해 보아도 호족(豪族)이 부역에서 빠지는 것은 전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선상(選上)을 줄인 것은 공천(公賤)을 소복(蘇復)시키기 위한 것인데도 치우치게 고통을 받은 자들은 예나 다름없이 떠돌아다니고, 방납(防納)을 금한 것은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도 뇌물을 받으며 백성을 갈취하는 자들은 더 심하게 뛰고 있습니다. 탐욕을 부리는 관원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면 그 후임자가 반드시 앞 사람보다 훌륭한 것도 아닌데 공연히 마중하고 전송하는 폐나 끼치게 되고, 변장(邊將)을 가려 보낼 것을 청하면 인망(人望)이 두터운 자가 반드시 신진(新進)보다 우수하지도 않은데 도리어 방자하여 조심성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 밖에 훌륭한 명이 내려지고 아름다운 법이 반포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주현(州縣)에 그저 몇 줄의 문서 쪽지만 전달할 뿐, 시골 백성들은 그것이 무슨 일인지조차 모릅니다....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에는 그 요강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심을 열어 뭇 신하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공안(貢案)을 개혁하여 지나치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애는 것이고, 셋째는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스런 풍조를 개혁하는 것이고, 넷째는 선상(選上)의 제도를 바꾸어 공천(公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고, 다섯째는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이른바 ‘공안(貢案)을 개혁하여 심하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앤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조종조에서는 쓰임새를 매우 절약하여 백성들에게 거두는 것도 매우 적었는데, 연산군(燕山君) 중년에 이르러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바람에 일상적인 공물로써는 그 수요를 충당하기에 부족하게 되었으므로, 공물을 더 책정하여 그 욕망을 충족시켰던 것입니다. 신은 지난날에 노인들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듣고도 감히 그대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정원에서 호조의 공안을 가져다 보건대, 여러 가지 공물이 모두 홍치(弘治)010)(註 010)(홍치(弘治) :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신유년011)(註 011)(신유년 : 1501 연산군 7년.) 에 더 책정한 것을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었는데, 그때는 바로 연산군 때였습니다. 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안을 덮고 탄식하기를, ‘이럴 수가 있는가. 홍치 신유년이라면 지금부터 74년 전이니, 그 간에 성군(聖君)이 왕위에 있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현사(賢士)가 조정에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런 법을 어찌하여 개혁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그 까닭을 추구해 보건대 그 70년 동안은 모두 권간(權奸)들이 국사를 장악한 때로서 두세 명의 군자가 간혹 조정에 있었다고는 하나 뜻을 펴보기도 전에 사화가 꼭 뒤따랐으니, 이에 대하여 논의할 겨를이 어찌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그 일을 오늘날에 기대하는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물산(物産)은 수시로 변하고 백성들의 재물과 전결(田結)도 수시로 증감하는 것인데, 공물을 나누어 책정한 것은 바로 국초(國初)의 일이었고 연산군 때에는 다만 거기에 더 늘려 책정한 것일 뿐이니, 역시 시대마다 적절히 헤아려 변통해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에 와서는 각읍에다 바치는 공물이 그곳 산물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어서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고 배를 타고 물에서 짐승을 잡으려 하는 일이나 같게 되었으니, 다른 고을에서 사들이거나 또는 서울에 와서 사다가 바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의 비용은 백 배로 늘어나고 공용(公用)에는 여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민호(民戶)는 점점 줄어들고 전야(田野)는 갈수록 황폐해져서 몇 년 전에 백 명이 바치던 분량을 작년에는 열 명에게 책임지워 바치게 하고, 작년에 열 명이 바치던 분량을 금년에는 한 사람에게 책임지워 바치게 하고 있으니, 이 상태로 나간다면 반드시 그 한 사람마저 없어진 뒤에야 끝장이 날 형편입니다. 오늘날 공안을 개정하자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조종의 법은 가벼이 고쳐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핑계를 대곤 합니다. 그러나 조종의 법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의 곤궁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고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연산군 때의 법이 아닙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일을 파악할 만한 슬기가 있고, 장래의 일을 미루어 알 만한 심계(心計)가 있으며, 일을 잘 처리할 만한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공안에 관한 일을 전담하게 하되 대신으로 하여금 그들을 통솔하게 함으로써, 연산군 때에 더 책정한 분량을 모두 없애 조종의 옛 법을 회복하게 하소서. 그리고 각읍의 물산 유무와 전결의 다소와 민호의 잔성(殘盛)을 조사하고 상호 조절해서 한결같이 고르게 하고 반드시 본색(本色)을 각사(各司)에 바치도록 하면, 방납(防納)은 금하지 않아도 자연히 없어지고 민생은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시급한 일로서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이른바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 풍조를 개혁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재물이 고갈된 것이 오늘날에 와서 극도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공물을 감해 주지 않을 수가 없는데 만약 소비하는 것을 조종의 법대로 하지 않으면, 수입에 맞추어 지출할 수 없게 되어 마치 모난 그릇에 둥근 뚜껑을 덮는 것처럼 앞뒤가 들어맞지 않을 것입니다....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자세히 보시고 익히 검토하시며 신중히 궁구하고 깊이 생각하시어 성상의 마음 속에서 취하고 버릴 것을 결정하신 다음, 널리 조정의 신하들에게 하문하시어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한 뒤에 이를 받아들이거나 물리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전하께서 신의 계책을 채택하신다면 그 진행을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 정성껏 그것을 시행하게 하고 확신을 갖고 지켜 나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보수적인 세속의 견해로 인하여 바뀌게 하지 말고, 올바른 것을 그르다 하며 남을 모함하는 말로 인하여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3년이 지나도록 나랏일이 여전히 부진하고 백성이 편안해지지 않으며 군대가 정예로와지지 않는다면, 신을 기망(欺罔)의 죄로 다스리어 요망한 말을 하는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요순 시대를 만들겠다는 뜻을 볼 수 있었다.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아무리 옛 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하가 있는데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어찌 걱정하겠는가.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다만 일이 경장(更張)에 관계된 것이 많아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다." 하고, 이 소를 여러 대신에게 보여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는 한편, 또 소를 등서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 당시 인심이 불안하던 차에 이이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고서는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선조수정 7년 1월 1일)[16] 또 기록한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상께서 즉위하신 뒤로 형벌이 맞지 않는 일이 드물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백성들의 부역(賦役)이 공평하지 못합니다. 이는 본래 그전부터 행해져 내려온 것이지만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무(時務)를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전일에 올린 이이의 상소에 대해 상께서 답하신 말씀이 매우 권장하고 허여하신 것이므로, 각기 보고듣는 사람마다 모두 감격하였습니다. 소신도 역시 재질과 학식이 이 사람만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만일 이 사람만 하다면 어찌 이처럼 권장받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이번에 이이의 상소로 인하여 공물(貢物)·선상(選上)013)[232] ·군정(軍政)에 관한 일을 강구해서 시행한다면 백성들의 곤고함이 소복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추기(追記)한다. (선조 7년 1월 21일)[17] 또 ‘임금이 백성을 위해 평안하도록 도모하지 못함은 또한 도리어 백성을 학대하는 짓이다.’ 한 대문을 강하고 아뢰기를, "지금의 민생들 고통은 바로 공물(貢物) 및 신역(身役)이 균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마땅히 이이(李珥)의 만언소(萬言疏)대로 변통(變通)하여 병폐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였다. (선조 7년 3월 6일)[18]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민생(民生)이 과거에 비해 어떠한가?" 하였다. 이이가 답하기를, "권간(權奸)이 국정을 담당할 때에 비교해 보면 가렴 주구(苛斂誅求)는 줄어든 듯하지만, 공부(貢賦)와 요역(徭役)의 법이 매우 사리에 어긋나서 날로 잘못되어 백성이 그 폐해를 입고 있으니, 만약 고치지 않는다면 비록 날마다 백성을 사랑하라는 전교를 내려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 8년 10월 24일)[19] 이때 가뭄이 대단히 심하여 농사가 또 장차 흉년이 들게 되었는데 평안·황해 두 도는 더욱 심하였다. 상이 경연에 나아가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흉황(凶荒)이 이러한데 서도(西道)는 더욱 심하다. 기근이 계속된 데다가 병난마저 일어난다면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겠는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모름지기 미리 재력을 축적하여 구제해야 합니다." 하고, 이이가 아뢰기를, "만약 폐단이 되는 법을 변통하여 어려움을 구제하지 않고 다만 곡식을 옮겨 백성을 살리려고 한다면 곡식 또한 이미 절핍되어 옮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이와 같이 위급하니 상께서도 마땅히 변통할 대책을 생각하셔야 하고 모든 경비도 또한 마땅히 재감(裁減)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쓰임새는 별로 늘린 것이 없이 단지 옛 규례만 따르는데도 오히려 부족하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세금의 수입이 매우 많았으나 지금은 해마다 흉년이 들어 세금의 수입이 매우 적습니다. 그런데 경비는 그대로 구례를 따르고 있으니 어찌 절핍되지 않겠습니까. 세금의 수입을 적절히 늘려 정해서 나라의 경비를 넉넉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지만 백성의 생계가 매우 곤궁하여 형편상 더 거둘 수 없으니, 반드시 먼저 누적된 고통을 풀어 민심을 기쁘게 한 다음에 세금을 거두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공안(貢案)은 민가(民家)의 빈부(貧富)와 전결(田結)의 다소(多少)를 헤아리지 않은 채 무원칙하게 나누어 배정하고 또 토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방납(防納)하는 무리가 모리(牟利)를 할 수 있어 평민이 곤궁과 고통을 겪습니다. 이제 공안을 개정하되 민가와 전결을 헤아려 균등한 수량을 공평하게 배정하고 반드시 토산물로 바치게 한다면 백성의 쌓인 고통이 풀어질 것입니다." 하고, 유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이 일은 서둘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얻은 다음에 비로소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형세로 보아 필시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의 휴척(休戚)은 수령에게 달렸고 수령의 근면과 태만은 감사에게 달렸는데, 감사가 자주 바뀌기 때문에 누구나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면서 정사에는 마음을 두려하지 않고 관례에 따라 오가고 있으며, 그 중에 직책을 다하는 자가 있더라도 또한 미쳐 시행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니 모름지기 큰 고을로 감영을 만들어 감사가 그 고을에 머물러 가족을 데리고 가서 다스리게 하여 책임을 맡겨 공효를 독책(督責)하면서 그 직에 오랫동안 있게 하고는 조정의 신하 가운데 법도를 제정해서 다스릴 만한 재간이 있는 자를 특별히 가려서 제수한다면 반드시 그 공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랫동안 맡기면 권세를 잡고 제멋대로 독단할 우려가 없겠는가."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이는 사람을 가리기에 달렸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어찌 가려 보내는 데 합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주현(州縣)이 매우 많이 수령을 정선할 수가 없다. 나는 병합하여 줄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여러 신하가 다 대답하기를, "상의 분부가 매우 지당합니다. 만약 극히 쇠잔한 고을을 병합하여 다른 고을에 붙인다면 백성의 부역이 매우 수월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변혁하는 일은 경솔히 시행하기 어렵다. 나는 고을의 이름은 없애지 않고 한 고을 수령이 두세 고을을 겸임해 다스리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도 자주 변혁한 일이 있었으니 이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 때 국고가 이미 바닥이 나서 이듬해에는 구황할 대책이 없었다. 이이가 그것을 깊이 염려한 나머지 동료와 상의하고 차자를 올려, 나쁜 법을 변통하고 공안을 개정하며 주현을 병합하여 줄이고 감사를 오랫동안 맡길 것을 청하고, 또 어진이를 써서 인재를 진작하게 하고 몸을 닦아 다스리는 근본을 맑게 하며 붕당을 없애 조정을 화목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니 참으로 좋은 말이다. 옛법을 변경하는 일은 경솔히 하기 어려울 듯하다. 마땅히 대신과 의논하여 조치하겠다." 하였다. (선조 14년 5월 24일)[20] 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서도(西道)가 더욱 극심하다. 기근이 겹친데다 병란이 일어난다면 어떠한 계책을 써야 하겠는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미리 재력을 비축하여 구제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이는 아뢰기를, "폐법(弊法)을 변통시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지 않고 단지 곡식만을 옮겨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한다면 곡식 또한 핍절되어 옮길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매우 위태로우니 상께서는 변통시키는 계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경비의 수요도 재량하여 감소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용도는 별로 증가시킨 것이 없이 예전 규례대로 준행하였을 뿐인데도 부족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세입(稅入)이 매우 많았지만 지금은 해마다 흉작이어서 세입이 매우 적습니다. 그런데 경비만은 예전 규례를 그대로 존속해 나가고 있으니 어떻게 궁핍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의 경비를 풍족하게 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헤아려 세공(稅貢)을 더 배정해야 할 것 같지만 민생이 곤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서 부가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쌓인 고통을 해소시켜 민심을 기쁘게 해준 다음에야 조세(租稅)를 거두는 데 있어 적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공안(貢案)은 민호(民戶)의 성쇠와 전결(田結)의 다소를 고려하지 않고 난잡스럽게 분정하였는가 하면 바치는 물건도 모두가 토산물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방납(防納)하는 무리들만이 이익을 취득하므로 백성들만 곤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공안(貢案)을 개정하는 데 있어 민호와 전결을 참작하여 균등하고 공평하게 배정하고 토산물로만 바치게 한다면 백성들이 쌓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 일을 속히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무엇보다도 인재를 얻어야만 폐단을 구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민의 휴척(休戚)은 수령의 현부에 달려 있고 감사는 수령의 근만(勤慢)을 규찰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주 교체되기 때문에 모두가 구차스럽게 세월만 보내면서 정사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개중에는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려는 자가 있기도 하나 그들 역시 어떠한 일을 시행하지는 못합니다. 큰 고을에 감영(監營)을 설치하고 감사로 하여금 그 고을 수령을 겸임하게 하되 가족을 데리고 가서 다스리게 하여 책임을 완성하도록 위임시키되 조정의 신하들 중에 백성을 거느려 다스릴 만한 재주를 지녔거나 공보(公輔)의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별도로 선발하여 제수하면 필시 공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구임(久任)시키면 권세를 부리고 독단하는 폐단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점에 있어서는 인재를 얻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주현(州縣)이 너무 많기 때문에 수령을 정하게 뽑을 수 없다. 나는 병합시켜 줄이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하니, 군신들이 모두 대답하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만일 몹시 잔폐된 고을을 병합시켜 다른 고을에 붙인다면 백성들의 부역이 어느 정도 완화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혁하는 데에는 폐단이 있게 마련인데 경솔하게 거행할 수 없다. 나는 그러한 명칭을 거론하지 않고 단지 한 고을 수령이 두세 고을을 겸하여 다스리게 하고 싶은데 어떠할는지 모르겠다."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도 자주 개혁한 일이 있었으니 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이는 상의 뜻이 재변을 걱정하고 다스려 보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물러나와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폐법(弊法)을 변통시킬 것, 공안(貢案)을 개정할 것, 주현(州縣)을 병합시킬 것, 감사(監司)를 구임시킬 것 등을 청하고, 또 현자를 등용하여 인재를 진작시킬 것, 몸을 닦음으로써 치본(治本)을 맑게 할 것, 붕당을 제거시킴으로써 조정을 화합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보았는데 참으로 가상하다. 구법(舊法)을 변통시키는 일은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는 것인 듯하다. 그러나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고, 소장은 정부에 내렸다. (선조수정 14년 5월 1일)[21] 이이를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하였다가 곧바로 숭정(崇政)의 품계로 올렸다. 이이가 세 번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바로 배명(拜命)하고 얼마 뒤에 봉사(封事)를 올려 시폐(時弊)에 대해 극력 진달하였는데 그 상소의 대략에, "신은 듣건대, 상지(上智)의 사람은 미연에 환히 알고 있으므로 난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스리고 나라가 위태롭기 전에 미리 보전하며, 중지(中智)의 사람은 사태가 발생한 뒤에 깨닫게 되므로 난이 일어나 나라가 위태롭게 된 다음에야 다스려 안정시킬 것을 도모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난이 닥쳤는데도 다스릴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태로움을 보고도 안정시킬 방도를 강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지(下智)의 인물이 될 것입니다....제거시켜야 할 누적된 폐단에 대해서는 지금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우나 어리석은 신이 늘 경연에서 아뢴 것은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수령을 줄이고 감사를 구임(久任)시키는 세 가지뿐이었습니다. 이른바 공안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은 여러 고을의 토지와 인민의 많고 적은 것이 동일하지 않아 더러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데도 공역(貢役)의 배정에 있어서는 그다지 차등이 없기 때문에 고달프고 수월한 것이 균등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대부분 토산품이 아닌 온갖 물건을 모두 마련하여 각 관사에 나누어 바치게 합니다. 따라서 농간을 부리는 폐해가 백성들에게 돌아가 서리(胥吏)들만 이익을 취하고 국가의 경비에는 조금도 보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근래 조세(租稅)의 수입이 적은 것이 북쪽 오랑캐의 제도와 같아서 1년의 수입으로는 지출이 부족하여 늘 전에 저축한 것을 보충하여 쓰게 되므로 2백 년 동안 저축해 온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도 없어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부세를 증가시키자니 민력이 이미 고갈되었고 전례를 그대로 지키자니 얼마 안가서 저축이 바닥날 것이니, 이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공안을 개정하는 데 있어서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 규획(規畫)을 잘 하게 할 것은 물론, 단지 토산품으로만 균평하게 배정하고 한 고을에서 바치는 것이 두세 관사에 지나지 않도록 한다면 원액(元額)의 수입은 별로 감소되는 것이 없으면서 백성의 부담을 10분의 9쯤 줄일 듯싶습니다. 이렇게 민력이 여유를 갖게 해서 백성들의 심정을 위안시킨 다음 적당히 조세를 증가시킨다면 국가의 경비도 점차 충족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안을 개정하려는 것은 단지 백성을 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경비를 위해서입니다....매양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영명하신 자질과 맑고 순수한 덕을 지니시고도 인(仁)한 마음을 미루어 넓혀 정사에 베풀지 못하기 때문에 옛날 황음 무도한 군주와 똑같이 위망의 전철을 밟으려 하니, 이에 대해 신은 밤낮으로 안타까와 하며 마음 졸이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신의 말을 망령되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깊이 생각하고 오래 강구한 다음 대신에게 문의하여 조금이라도 채용해 주소서. 이것이 신의 구구한 소원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고 충성스러움을 잘 알았다. 나 역시 마음을 가다듬고 일을 해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도 몽매하고 재주와 식견이 부족하여 지금까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으니, 생각해 보면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더욱더 경계하여 살펴 유념하겠다." 하였다. 그뒤 며칠이 지나서 이이가 경연에 입시하여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를 진달하자, 상이 흔쾌히 수작하여 종일토록 토론하고서 파하였다. 이때부터 이이는 입시할 적마다 전설(前說)을 반복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신의 계책을 채용하여 인재를 얻어 정사를 맡겨 기강을 바로잡고 오랜 폐단을 개혁시키는 데 있어 유속(流俗)이나 부의(浮議)에 저지되거나 동요되지 마소서. 3년간 이와 같이 하였는데도 세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신에게 기망한 죄를 내리소서." 하였다. 상이 그의 봉사(封事)를 입시한 신하들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우찬성이 전부터 이런 논의를 해왔는데 나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모르겠다만 경장시키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좌우 신하들이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는데, 장령 홍가신(洪可臣)이 대답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급무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비유하건대 이 궁전은 본시 조종이 창건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질 형편이라면 조종이 창건한 집이라 하여 수리하여 고치지 않고 그저 앉아서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필시 재목을 모으고 공장(工匠)을 불러들여 썩은 것은 갈아내고 허물어진 데는 보수한 뒤에야 산뜻하게 새로워지는 것인데 경장시키는 계책이 무엇이 이것과 다르다 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부제학 유성룡이 이 말을 듣고 이튿날 차자를 올려 이이의 논의가 시의(時宜)에 적합하지 않다고 극론하자, 그 의논이 끝내 중지되었다. 홍가신이 유성룡에게 가니 성룡이 그가 이이의 논의에 부회하였다고 힐책하였다. 가신이 말하기를, "공은 과연 경장하는 것을 그르다고 여기는가?" 하니, 성룡이 말하기를, "경장하는 것은 진실로 옳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재주로 그 일을 해내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다." 하였다.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자, 유성룡은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을 키우는 것이다.’라고 하며 매우 강력히 변론하였다. 이이는 늘 탄식하기를 ‘유성룡은 재주와 기개가 참으로 특출하지만 우리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죽은 뒤에야 반드시 그의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진년 변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국사를 담당하여 군무(軍務)를 요리하게 되었는데, 그는 늘 ‘이이는 선견지명이 있고 충근(忠勤)스런 절의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선조수정 15년 9월 1일)[22]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극진하게 진달하였다. 그 상소에, "삼가 아룁니다. 흥망은 조짐이 있고 치란은 기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닥치기 전에 말을 하면 흔히 신임을 받지 못하고 일이 닥친 뒤에 말을 하면 구제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폐정(弊政)을 혁신하는 문제에 대하여 신이 전부터 간청한 바는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군적(軍籍)을 고치고, 주현(州縣)을 병합하고, 감사(監司)를 구임(久任)시키는 4조항이었을 뿐입니다. 군적을 고치는 일에 대해서는 윤허를 받았으나 신이 감히 일을 착수하지 못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신의 당초 의도는, 군졸의 설치 목적이 어디까지나 방어에 있는 만큼 군졸이 공물을 진상하는 역(役)을 감소시켜 전결(田結)에 이전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여유를 갖고 힘을 기르며 훈련에만 전념하여 위급함에 대비케 하고자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안을 고치지 말도록 명하셨으니, 군적을 고치더라도 양병(養兵)하는 계책은 반드시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옛말에 ‘이익이 10배가 되지 않으면 옛것을 고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만약 경장(更張)한다는 헛 소문만 있고 변통하는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옛날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아, 공안을 고치지 않으면 백성의 힘이 끝내 펴질 수가 없고 나라의 쓰임이 넉넉해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 변방 사태가 점점 심각해져서 안정될 기약이 없으니, 우선 시급한 것은 군사인데 식량이 모자랍니다. 그렇다고 부세를 더 징수하게 되면 백성이 더욱 곤궁해질 것이고 더 징수하지 않으면 국고(國庫)가 반드시 바닥날 것입니다. 더구나 군기(軍器)를 별도로 만들고 금군(禁軍)을 더 설치하는 등의 일 모두가 불가피한 것으로서 경비 이외에 조달할 곳이 매우 많은데, 어떤 특별한 계책을 내어 경비의 용도를 보충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주현 병합 계획은 본래 성상께서 생각해내신 것으로서 시행하기도 어렵지 않고 이해관계도 분명합니다. 전하께서는 매양 연혁(沿革)이라는 것을 중대하게 생각하십니다만, 옛날부터 연혁해 온 것도 꼭 대단하게 변통시킨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나누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기록에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소읍(小邑)의 쇠잔한 백성이 많은 역사(役事)에 시달리고 있는데, 만약 하루아침에 몇 고을을 병합하여 하나로 만들 경우 그 백성들은 마치 거꾸로 매달렸다가 풀려난 것처럼 기뻐할 것입니다. 지금 한 가지 일만 보아도 그 효과를 알 수 있습니다. 황주 판관(黃州判官)을 혁파하자 관리와 백성이 뛰고 춤추며 서로들 경하하였는데, 두 고을을 하나로 병합하는 일도 판관을 혁파할 때의 경우와 다름이 없으리라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 백성들의 괴로움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수가 있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한번 혜택을 베풀어 주려 하지 않으십니까....의논하는 사람들은 혹 소요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근심하여 변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을 고치고 군적을 고치고 주현을 병합하는 등의 일은 모두가 조정에서 상의하여 결정하면 되는 일일뿐 백성에게는 한 되의 쌀이나 한 자의 베의 비용도 들지 않는데, 백성들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소요할 근심이 있단 말입니까. 양전(量田)027)(註 027)(양전(量田) : 농지 측량.) 과 같은 경우는 백성에게 약간의 동요가 없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풍년이 들 때를 기다려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안의 개정은 반드시 양전한 뒤에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은 전결(田結)의 다과(多寡)로써 고르게 정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양전한다고 해서 전결의 증감이 어찌 크게 차이가 나기야 하겠습니까. 따라서 공안부터 먼저 고치고나서 뒤따라 양전한다 해도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전결에 면적이 차고 모자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들 어찌 오늘날의 공안처럼 전결의 다과를 따지지 않고 멋대로 잘못 정한 것과 같기야 하겠습니까....아, 비도(匪徒)의 난리는 방비가 없는 데에서 일어나고 승패와 안위는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은 오히려 조용히 담소하며 서서히 옛 규정이나 상고할 뿐인데, 게다가 중론이 분분하게 일어나서 절충될 기약이 없으니, 만약 조정의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린다면 변방의 성은 이미 함락 되고 말 것입니다. ‘모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일이 성취되지 않는다.(謨夫孔多 是用不集)’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아, 형편없고 어리석은 신이 성명(聖明)을 만나 은총을 믿고는 조금도 숨김없이 망령된 말을 전후 여러 차례에 걸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계책이 소루하여 열에 하나도 시행되지 않으니, 외로운 처지에서 심정만 쓸쓸할 따름입니다.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받아 마땅한 것이므로 밤낮으로 슬퍼하고 탄식하며 머리털이 하얗게 되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지경인데도 수고롭기만 할 뿐 유익함이 없습니다. ‘힘껏 직무를 수행하다가 능력이 없으면 그만둔다.’030)[233] 라고 하였으니, 의리상 물러나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것이 마땅하나, 간담을 헤치고 심혈을 기울여 지금까지 슬피 부르짖으며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은, 진실로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다 보답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뭇더미에 불이 붙는 것을 환히 보면서 감히 제몸만 돌보는 생각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다시 말하지 않는다면 신에게 그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가엾게 살피시어 받아들여 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내가 우연히 연전에 경이 올린 상소를 보던 중이었는데 이번에 올린 경의 상소가 마침 들어왔다. 전후에 걸쳐 정성스런 상소를 보건대 용렬한 임금을 잊지 않는 경의 고충(孤忠)이 정말 아름답게 여겨진다. 나라 일은 훌륭한 대신들에게 맡겨야 마땅하다. 남행(南行)을 대간(臺諫)으로 삼았던 것은 이미 지나간 일로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다. 한 번 실수한 것도 이미 충분한데 어찌 차마 두 번씩이야 잘못할 수 있겠는가. 공안에 관한 일은, 조정에 의논하게 하였는데 그 논의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감히 다시 고치지 못한 것이다. 설혹 고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아울러 거행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군적에 관한 일은 본조에서 이미 명을 받았으니, 경이 어떻게 시행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주현을 병합하는 문제는 과연 나의 밝지 못하고 얕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다른 폐단을 끼치게 될까 하여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겨 변경하지 못하였는데, 경이 지극히 청하여 마지 않으니 한 번 시험해 봐야 하겠다. 감사를 구임시키는 일은 새로 제도를 만들기 어려워 지금까지 미루어왔으나, 그것도 경의 계책을 따라 먼저 양남(兩南)에서 시험하도록 하겠다. 서얼과 공천·사천을 허통해 주는 일은, 처음 사변이 일어났을 적에 경의 헌책(獻策)으로 인하여 즉시 시행하도록 명했으나, 언관(言官)이 논박하고 있으니 다시 비변사에 물어서 상의하여 거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세속에서 문·무과를 거치지 않고 입사(入仕)한 자를 남행(南行)이라고 한다. 이이(李珥) 등이 미출신인(未出身人)으로서 대간(臺諫)을 삼기로 청한 한수(韓修)·유몽학(柳夢鶴) 등이 이것이다. 성혼(成渾) 등은 일민(逸民)으로서 추천된 자이므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선조수정 16년 4월 1일)[23] 공안(貢案)을 상정(詳定)하도록 명하였다. 전란이 일어난 뒤로 공법(貢法)이 더욱 무너졌으므로 구안(舊案)을 감하여 한결같이 토산(土産)의 증감(增減)에 따르도록 명하였는데, 완전히 바로잡지 못한 상태에서 그만 두었다. 공물(貢物)을 쌀로 바치게 하자는 의논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선조수정 27년 1월 1일)[24] 영의정 유성룡이 차자를 올려 시무(時務)에 대해 진술하였다. 그 대략에, "‘깊은 근심 속에서 성명(聖明)한 지혜가 열리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국가가 흥기된다.’ 하였습니다....신은 또 듣건대 난리를 평정하여 정상을 되찾게 하는 방법이 충분한 식량과 군사에 있다고는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민심을 얻는 근본은 달리 구할 수 없고 다만 요역(徭役)과 부렴(賦斂)을 가볍게 하며 더불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 주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전세(田稅)는 십일세(什一稅)008)[234] 보다 가벼워서 백성들이 무겁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전세 이외의 공물 진상이나 각 절기 때마다 바치는 방물(方物) 등으로 인해 침해당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당초 공물을 마련할 때에 전결(田結)의 수로써 균일하게 배정하지 않고 크고 작은 고을마다 많고 적음이 월등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1결(結)당 공물값으로 혹 쌀 1, 2두(斗)를 내는 경우도 있고 혹은 쌀 7, 8두를 내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10두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에게 불공평하게 부과되어 있는데 게다가 도로를 왕래하는 비용까지 가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관청에 봉납(捧納)할 때는 또 간사한 아전들이 조종하고 농간을 부려 백 배나 비용이 더 들게 되는데, 공가(公家)로 들어가는 것은 겨우 10분의 2, 3에 불과할 뿐, 나머지는 모두 사문(私門)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진상에 따른 폐단은 더욱 심하게 백성을 괴롭히는 점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당초에 법을 마련할 때는 반드시 이와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시한 지 백 년이 지나는 동안에 속임수가 만연하여 온갖 폐단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곧바로 변통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다시 소생할 가망이 없고 나라의 저축도 풍부히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신은 늘 생각건대 공물을 처치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도내 공물의 원수(元數)가 얼마인지 총 계산하고 또 도내 전결의 수를 계산하여 자세히 참작해서 가지런하게 한 다음 많은 데는 감하고 적은 데는 더 보태 크고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모두 한가지로 마련해야 되리라 여겨집니다. 이를테면 갑읍(甲邑)에서 1결당 1두를 낸다면 을읍·병읍에서도 1두를 내고, 2두를 낸다면 도내의 고을에서 모두 2두를 내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백성의 힘도 균등해지고 내는 것도 한결같아질 것입니다. 방물 값 또한 이에 의거해서 고루 배정하되 쌀이든 콩이든 그 1도에서 1년에 소출되는 방물의 수를 전결에 따라 고르게 납입토록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결마다 내는 것이 그저 몇 되 몇 홉 정도에 불과하여 백성들은 방물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진상할 때에도 이런 식으로 모두 쌀이나 콩으로 값을 내게 해야 합니다. 이상 여러 조건으로 징수한 것들은, 전라도는 군산(群山)의 법성창(法聖倉)에, 충청도는 아산(牙山)과 가흥창(可興倉)에, 강원도는 흥원창(興元倉)에, 황해도는 금곡(金谷)의 조읍창(助邑倉)에 들이도록 하고, 경상도는 본도(本道)가 소복(蘇復)될 동안엔 본도에 납입하여 군량으로 하고, 함경도·평안도는 본도에 저장하고, 5개 도의 쌀과 콩은 모두 경창(京倉)으로 수송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 관청에 공물과 방물을 진상할 때 물건을 따져서 값을 정하는 것은 마치 제용감(濟用監)에서 모시·베·가목(價木)을 진헌하던 전례와 같이 해서 유사(有司)로 하여금 사서 쓰게 하고, 만약 군자(軍資)가 부족하거나 국가에서 별도로 조도(調度)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공물과 방물을 진상하는 수를 헤아려 재감(裁減)해야 합니다. 그러면 창고 안에 저장되어 있는 쌀과 콩을 번거롭게 환작(換作)하지 않고도 한량없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명나라에서는 외방에서 진상하는 일이 없이 다만 13도(道)의 속은(贖銀)을 광록시(光祿寺)에 두었다가 진공할 물품을 모두 이것으로 사서 쓰고, 만약 별도로 쓸 일이 있을 경우에는 특명으로 감선(減膳)하여 그 가은(價銀)을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 지방 백성들이 수레에 실어 운반하는 노고를 치르지 않는데도 사방의 공장(工匠)이 생산한 온갖 물품이 경도(京都)에 모여들지 않는 것이 없어 마치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것처럼 무엇이든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경사(京師)는 날로 풍부해지고 농촌 백성들은 태평스럽고 편안한 마음으로 직업에 종사한다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제도이니 우리 나라도 본받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그러면 일세의 유능하고 지혜있는 선비들이 모두 모여들어 국가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맡아 수행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차자를 비변사에 내려 모두 채택해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진관(鎭管)의 법은 사람들이 모두 편리하게 여겼는데도 끝내 시행되지 않았고, 공물 진상을 쌀로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의 뜻이 모두 강구하고 싶어하지 않아 거행되지 못하고 파기되었다. (선조수정 27년 4월 1일)[25] 비변사가 아뢰기를, "오늘의 위태로운 형세는 참으로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사람들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인데도 팔짱을 낀 채 아무런 계책도 세울 수 없는 것은 오직 군량 한 가지 문제일 뿐입니다. 서울에 비축해 놓은 것은 겨우 몇 달을 지탱할 정도며 외방의 창고도 한결같이 고갈되었습니다. 지금은 가을이라 곡식이 익을 때인데도 공사(公私)의 형편이 이와 같으니 명년 곡식이 익기 전에는 다시 무슨 물건을 가져다가 이어 구제하겠습니까. 불행히도 적의 형세가 다시 치열해져 명군(明軍)이 들어온다면 우리 나라 신료들은 비록 군수물을 대지 못했다는 죄로써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일을 그르친 죄를 족히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문제를 의논하는 사람들이 어떤 이는 은(銀)을 채굴하여 곡식을 사들이자고 하고 어떤 이는 포목을 방출하여 곡식을 사들이자고도 합니다. 대개 은은 비록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기는 하지만 그 산출되는 양이 많지 못하여 힘이 많이 드는 반면 소득은 적고, 포목을 가지고 곡식을 사들인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역시 소량이니 국가의 씀씀이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때문에 오늘날 재용을 늘리는 방법은 각도의 공물(貢物) 진상을 모두 쌀로 하게 하고 또 상번 군사(上番軍士)의 호봉족(戶奉足)과 각사 노비(各司奴婢)의 신공(身貢)을 전부 쌀로 마련케 하며, 아울러 바닷가 소금 굽는 곳에서 많은 양을 구워내어 산협(山峽)의 소금이 귀한 지역에 배로 운반하여 곡식으로 바꾸어들인다면 소득이 반드시 많을 터이니, 이것이 오늘날 재용을 늘리는 방법입니다. 이외에 또 둔전(屯田)이 있으니 마땅히 시기에 맞추어 강구하고 힘써 실행할 것을 호조로 하여금 마련해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27년 9월 20일)[26] 결국 군량도 뜯고 공물도 또 뜯는 식으로[235]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애초에 군량 자체도 못 모았다.[236][237][238][239][240][241] 사기를 치려다[242] 제대로 치지도 못한 셈이다.[27] 사간원에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양전(量田)하는 일이다. 】 (선조 34년 2월 28일)[28] 사헌부가 아뢰기를, "경계를 바루는 것은 국가의 급무인데, 한번 병화(兵火)를 겪은 뒤로는 의거할 전적(田籍)이 없어지고 나라의 기강이 탕패되었으므로 호강(豪强)한 자가 널리 차지하여 가난한 백성이 생업을 잃고, 간사한 관리가 연줄을 따라 폐단을 지어 많은 것을 적다 하고 경작하는 것을 묵은 것이라 하는 등, 갖가지 간사한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양전(量田)하는 일을 경자년199)(註 199)(경자년 : 1600 선조 33년.) 에 시작하면서 사목(事目)을 엄하게 세워 각도에 공문을 보내어 알렸으나, 각도의 수령이 고식적으로만 행하려 할 뿐 봉행할 뜻이 없습니다. 봄에는 가을로, 가을에는 겨울로 구습(舊習)을 따라 미루므로 거의 이루어질 듯하면서도 끝내지 못한 지 이제 4년이나 되었으니, 국가의 중대한 일이 어찌 이러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지난 가을에 호조(戶曹)가 사목을 다시 만들어 올 겨울 안에 측량을 끝내 성책(成冊)해서 올려보내게 한 이상 기한이 이미 정해졌으니, 착실하게 잘 봉행하면 미치지 못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적(成籍)이 오지 않기 때문에 어사(御史)의 행차를 또 중지시키고 다 올려 보내기를 기다려 보내게 되었으니 어사가 언제나 가게 될지 기약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이 내려지면 봉행할 뿐인데, 어찌 그 수령이 게을러서 하지 않는 대로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각도의 성책을 각각 그 기한 안에 미처 올려보내지 못한 자는 해조를 시켜 한결같이 사목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각도의 목마장(牧馬場)은 난후에 거의 다 폐기되어 공가(公家)의 둔전(屯田)이 되기도 하고 백성이 사사로이 차지하기도 하여 마음대로 경작하며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말이 있는 목장일지라도 도리어 내쫓아서 기르지 못하게 하니, 많이 번식 되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이후로 목장 안에서 함부로 경작하는 자는 낱낱이 적발하여 법에 따라 도로 묵히고 연유를 갖추어 계문(啓聞)하라고 각도의 감사에게 하서(下書)하여 마정(馬政)을 중히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 36년 12월 20일)[29] 호조(戶曹)가 아뢰기를,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좌의정 윤승훈(尹承勳)은 의논드리기를 ‘양전(量田)이야말로 경계를 바루는 중대한 일로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 이미 4년을 경과하고도 끝내지 못하였으니, 이는 조정의 기강이 아주 없어지고 관리가 법을 농간하여 제때에 거행하지 않는 탓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무슨 일인들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 만약 농사철이 다가온다는 핑계로 어사를 보내지 않을 경우, 우리 나라의 인심은 나라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고식적으로만 처리하려 하는데, 아마도 외방(外方)에서 어사의 행차가 정지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태만한 마음이 더해져 거의 완성되어 가는 일도 도리어 늦추어지게 할까 염려된다. 신이 해사(該司)의 사목을 보건대 한 고을의 전결(田結) 중에서 제비를 뽑아 복심(覆審)하게 했을 뿐, 남김없이 다시 측량하지는 못하게 하였으니, 좌도(左道)·우도(右道)에 두 어사를 나누어 보내 사목대로 제비를 뽑아 복심하게 한다면 오래 머물러 농사를 방해할 염려는 없을 듯하다. 설사 지금 어사를 보내는 것을 멈추고 내년 추수 때를 기약한다 하더라도, 인심이 게을리 세월만 보내다가 추수할 때가 되어 다시 지금처럼 성적(成籍)하지 못할지 어찌 알겠는가. 그렇다면 어사의 행차를 또 다시 멈추겠는가. 신이 듣건대 수령(守令)이 이 양전하는 일을 빙자하여 민간에서 지필(紙筆)을 장만하도록 요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백성 역시 해마다 논밭 사이에서 분주하게 되는 것을 자못 괴롭게 여겨 다들 빨리 끝내기를 바란다 하니, 오늘날 어사의 행차는 멈출 수 없을 듯하다. 다만 영남(嶺南)은 황정(荒政)이 바야흐로 급하고 서북(西北)은 길이 멀어서 왕래할 즈음에 농사철을 범하게 될 것이니, 이 세 도만은 다시 내년 추수 때를 기다려 어사를 보내는 것을 의논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하다.’ 하고, 우의정 유영경(柳永慶)은 의논드리기를 ‘양전의 중대한 일에 대해 영을 내린 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끝내지 못하였으니, 지극히 한심하다. 따라서 해조가 어사를 나누어 보내서 성적을 재촉하려는 의도가 우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삼동(三冬)이 다 가고 농사철이 다가오는데, 이런 때에 어사가 각도에 나뉘어 가서 소관 업무를 처리하느라 오래 지방에 머무르게 되면 필시 농사를 방해할 걱정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폐를 염려하여 대충 어설프게만 순력(巡歷)하면 복심하는 일이 필시 자세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선 차관(差官)을 보내 감사에게 하유하여 빨리 성적하게 하고, 내년 추수 때를 기다려 어사를 보내 종용히 복심하게 하면, 백성은 농사를 그르칠 일이 없고 전적도 소루하게 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좌상의 의논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 36년 12월 21일)[30] 전라우도 양전 어사(全羅右道量田御史) 조존성(趙存誠)이 치계(馳啓)하기를, "양전(量田)에 관한 일을, 지난해 가을에 해조(該曹)가 신명(申明)하여 계하한 뒤에도 각 고을에서 버려두고 거행하지 않다가, 신이 도내(道內)에 당도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조정의 사목(事目)이 지극히 엄하다는 말을 듣고 죄책을 면하기 어려운 줄 스스로 알고서, 현재 타량(打量)하고 있다고 하거나 지난해에 이미 타량하였으나 아직 장적(帳籍)을 만들지 못하였다고 속여서 신보(申報)합니다. 열읍(列邑)을 돌면서 그 곡절을 살펴보니, 이른바 현재 타량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 신이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목마름에 임박하여 우물을 판다는 격이었고, 이른바 지난해에 이미 타량하였다고 하는 것은 경자년012)(註 012)(경자년 : 1600 선조 33년.) 이전에는 낙종(落種)한 두수(斗數)로 결부(結負)를 정하던 것을 신축년013)(註 013)(신축년 : 1601 선조 34년.) 에 비로소 자로 측량했는데 이를 임인 타량(壬寅打量)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수령(守令)들이 조정에서 도(道)마다 추생(抽栍)한다는 말을 듣고 죄를 면하기에 바빠 오직 많게 하는 것만을 상책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전형(田形)이나 등제(等第)가 백에 하나도 실답지 않습니다. 게다가 일이 황급하였기 때문에 관원이 직접 집행하지 않아 아전이 농간을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많고 적은 것이 고르지 않고 진전(陳田)과 기경전(起耕田)이 서로 뒤섞였는데 곳곳이 다 그러합니다. 지금 수령이 그것이 부실한 줄 알고 고치고자 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일이 이미 미칠 수 없으므로 드디어 그대로 답습하여 면책하려는 생각을 하니, 그 정상이 가증스럽습니다. 신이 한 고을에 갈 때마다 고을 사람이 떼로 모여 다시 양전(量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극진히 호소합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조정에서 양전하는 것은 본디 위를 이롭게 하자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닌데 이에 의거하여 복심(覆審)해서 그대로 책벌(責罰)을 행한다면 백성을 속여서 법망에 걸리게 하는 정사(政事)에 가깝다고 여깁니다. 나주(羅州) 등 7고을은 어쩔 수 없이 모두 다시 양전하게 하였고 전주(全州) 등 9고을은 신이 도착한 즉시 스스로 타량하였으나 아직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임인타량으로 시행하되 가장 부실한 곳은 다시 적간(摘奸)한 뒤에 성적(成籍)한다고 했지만 도행장(導行帳)은 한 고을도 와서 바친 데가 없어서 오래도록 모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독촉하면 일이 허술해질 것이고 늦추면 봄철이 다 가버릴 것입니다. 신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은 하루 이틀에 불과하여 백성을 동원하는 것이 농사철에 큰 방해가 되지는 않으니, 농사철을 헤아리지 않고 기어이 심사를 끝내겠습니다. 이제 성책(成冊)만을 받고 적간하지 않는다면 다 이루어진 공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걱정이 있을 듯하니, 유사(攸司)를 시켜 상의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입계하니, 호조에 내렸다. (선조 37년 2월 10일)[31] 전라우도 양전 어사(全羅右道量田御史) 조존성(趙存性)이 아뢰기를, "이번 양전하는 일에 대해 감관(監官)·색리(色吏)가 맡은 일이 경하지 않음은 물론 이익도 따르기 때문에 백성의 고혈을 박탈하면서 마음대로 내렸다 올렸다 합니다. 결부(結負)가 줄고 등급이 균일하지 않게 된 것은 모두가 이들이 한 짓인데, 복심(覆審)하라는 명령을 듣고서는 스스로 사리에 어긋난 짓을 한 것을 알고서 문득 달아나 숨어버립니다. 그 정상을 따지자면 정상을 알면서 숨기고 누락시킨 죄보다 더 심하니, 이러한 부류들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전에 흥덕(興德)에 이르러 복심하려 하자 양전 도서원(量田都書員)인 정병(正兵) 유한손(柳汗孫), 조군(漕軍) 최인세(崔仁世) 등이 처자를 거느리고 밤을 타서 달아났으므로 그 친족들을 잡아 가두고 현신(現身)하도록 독촉하였습니다. 금구(金溝)에 이르러서는 면서원(面書員)인 정병 주언복(朱彦福)이 또한 달아나 태인(泰仁) 땅에 숨었는데 그 고을에서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상의 유한손·최인세·주언복 등을 우선 전가 사변(全家徙邊)시켜 한편으로는 양전하는 일을 중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완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버릇을 징계시키소서." 하였는데, 호조에 계하하였다. (선조 37년 2월 29일)[32] 언급된 정황이 불분명하고 이후[243][244] 십 년 이상[245] 관측되는 세수 증가분이 없기에 결수 증가분에 논란이 있다.[33] 12) 오인택은 임란 직전 결총을 300,000만결로, 癸卯量田(1603)의 결총을 광해군 3년(1611)에 집계된 삼남의 結總數 542,000여결로 파악하였다.(오인택, 1995, 朝鮮後期 癸卯·甲戌量田의 推移와 性格 역사와 세계 19, 345쪽 참조) 이는 광해군대 호조판서 황신이 추계한 결총수로 판단되며 이것이 증보문헌비고에 그대로 반영된 듯하다. (增補文獻備考 권148, 田賦攷 八) 다만 이 결총수는 삼도가 아닌 8도에 걸친 전결수이다. 또한 황신은 계묘양전 당시 田品이 낮게 책정되어 결수 산정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당대의 전결수를 자신이 직접 산출하였다. 따라서 이 542,000여결을 계묘양전의 결총수로 직결시키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황신이 산출한 결총수에 대해서는 아래 각주[246]를 참고하라.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6-7)[34] 평소에 전라도는 44만 결(結)이었는데, 난리 후에는 절반쯤 경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보고한 바는 6만 결 뿐이니, 나라에서 손실보는 것이 그 얼마이겠습니까. 다른 도 역시 이런 식이라면 국용(國用)이 어찌 넉넉하겠습니까....신이 일찍이 호조 참의가 되었을 때에 고제(古制)를 살펴보았더니, 국초에는 세입(稅入)이 40여 만석이었는데, 군사들의 봉록이 4만여 석이고, 제향조(祭享條)가 4만여 석이었으며, 공물(貢物)로 쓰는 것도 그 정도뿐이었습니다. 그때 봉록을 반급(頒給)하는 제도로, 형조의 도관 정랑(都官正郞)의 녹이 45석이라 하였으니, 이 정도면 많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받아들여 쓰는 것은 적고 저축은 많았기 때문에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3창(倉)의 저축이 2백 3만 석이나 되었습니다. 그후에는 제향(祭享)이 점차 많아지고 잡용(雜用) 역시 많아져 임진년 초에 이르러서는 저축된 것이 겨우 50여 만 석이었으니, 이미 3분의 2가 줄어든 것입니다. 인구수는 평시에 비해 겨우 10분의 1입니다. 그런데 평시에는 사족(士族)만 전장(田庄)을 소유하고 백성들은 모두 없어 다 함께 아울러 갈아 먹었는데, 난리 후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경작하기 때문에 개간(開墾)한 것은 평시에 비해 크게 감소되지 않았으나, 전제(田制)가 이와 같으므로 잔약한 백성들만 유독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결(田結)의 숫자는, 전라도가 40여 만 결, 경상도가 30여 만 결, 충청도가 27만 결인데, 근세 이래로 잇따라 하지하(下之下)로 세를 받아들여 비록 평시라 해도 세입이 겨우 20만 석이어서 국초에 비하면 절반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런데 난후에 팔도의 전결이 겨우 30여 만 결로, 평시 전라도 한 도에도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나라의 모양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 양전(量田)하는 한 가지 일은 반드시 큰 어려움을 물리치고 실행한 연후에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폐단 또한 많을 것이나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선조 34년 8월 13일)[35] 호조가 아뢰기를, "경상 좌우도의 전결이 임진 왜란 전에는 40여만 결이었는데, 계묘년046)(註 046)(계묘년 : 1603 선조 36년.) 에 양전해 보니 단지 4만 3천 4백 결이었습니다. 그런데 본조에는 평상시의 전적(田籍)을 증빙할 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이번에 양전할 때 본도로 하여금 따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평상시 시행한 장부에 ‘어느 지방은 원전(元田) 몇 결에 측량한 결수는 얼마이다.’라는 내용을 명백하게 치계하도록 하여 증빙하고 상고하여 처치하는 자료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인조 1년 8월 4일)[36] 삼가 기내(畿內)에 양전(量田)을 하는 것이 신의 처음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금년 농사가 전혀 결실되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심한 흉년에 이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팔도 가운데 기전(畿甸)이 가장 심하게 흉년이 들었는바, 신이 몹시 걱정스러웠습니다. 이에 매번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별도의 조치를 취하여서 근본이 되는 지역을 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어느 겨를에 양전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겠는가.” 하였습니다. 호서(湖西)의 백성들은 1결당 10두의 쌀을 내는 것도 산군(山郡)에서는 오히려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기전 백성들의 부역은 1결당 16두를 내는 데이겠습니까. 그리고 16두 이외에도 또 전세조(田稅條)로 내는 공물(貢物)이 있으며, 칙사의 행차를 맞이하고 전송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다른 도에서는 거두지 않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양전을 하고자 했던 것은, 대개 기내의 전지가 모두 2만 6000결인데, 지금 양전을 하면 2, 3배만 불어날 뿐이 아닙니다. 비록 1결만 더 얻더라도 그곳에서 거두는 쌀의 숫자는 호서와 같을 것으로, 이와 같이 한다면 경기 백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풀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비록 하루 아침에 감면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가을철에 거두는 쌀 8두 가운데에서 5두는 쌀로 거두고 3두는 돈으로 거두되, 봄철에도 이와 같이 한다면 흉년에 쌀이 귀할 때 백성들이 반드시 편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돈 역시도 이를 인하여 경외(京外)에서 크게 통행될 것이며, 부족한 쌀에 대해서도 역시 조처할 만한 방도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삼가 성상께서는 신의 이 차자를 내려서 본청으로 하여금 상의한 다음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신은 늙어 병든 나머지 혼매함이 더욱 심해졌으니, 말한 바가 반드시 쓸 만한 것이 못 될 것입니다. 양전에 대해 논의함을 인하여 일찍이 진달드리고 싶었던 말을 감히 진달드립니다. 황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잠곡속고(續稿)[247] / 차자(箚子)>, 가을에 거두는 쌀 8두 가운데 3두의 값을 돈으로 거두기를 청하는 차자)[37] 호조가 비변사의 계사에 따라 아뢴 납속 사목(納粟事目)은 다음과 같다. "향리의 경우, 3석(石)이면 3년간 역을 면제하고 14년에 이르도록 매석마다 1년씩 더하여 15석이 되면 당사자는 역이 면제되고, 30석이면 향리의 역을 면제하여 참하(參下)의 영직(影職)을 제수하고, 40석이면 그의 자식 두 명까지 역을 면하여 참하의 영직을 제수하고, 45석이면 상당한 군직(軍職)을 주고, 80석이면 동반의 실직(實職)을 제수한다. 사족(士族)인 경우, 3석이면 참하의 영직을 주고, 8석이면 6품 영직, 20석이면 동반 9품, 25석이면 동반 8품, 30석이면 동반 7품, 40석이면 동반 6품, 50석이면 동반 5품, 60석이면 동반 종4품, 80석이면 동반 정4품, 90석이면 동반 종3품, 1백 석이면 동반 정3품을 주고 원래 관직이 있는 자는 10석마다 품계를 올리며 자궁(資窮)인 자는 30석이면 당상관으로 올린다. 서얼(庶孽)인 경우, 5석이면 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 혹은 서반 군직(西班軍職)의 6품을 주고, 15석이면 허통(許通)034)(註 034)(허통(許通) : 서얼의 차별을 없앰.) 하고, 20석이면 이전에 난 자식까지 허통하고, 30석이면 참하의 영직을 제수하고, 40석이면 6품 영직, 50석이면 5품 영직, 60석이면 동반 9품, 80석이면 동반 8품, 90석이면 동반 7품, 1백 석이면 동반 6품을 제수한다." (선조 26년 2월 16일)[38] 비변사가 아뢰기를, "많은 왜적이 변방에 주둔해 있고 중국 군대가 국내에 주둔해 있어 우리 나라의 물력(物力)이 두 진영 사이에서 녹아나 온 나라의 신민들이 안정할 곳을 찾지 못하고 숨돌릴 여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왜적이 이미 물러갔고 중국 군대는 곧 철수할 것으로, 나라 안은 텅비고 울타리는 모두 걷혀 마치 아무도 호위해 주는 사람이 없이 빈 산에 홀로 앉아 휘파람 소리만 들려도 깜짝 놀라는 듯한 형세입니다. 민심이 불안해 하고 근본이 서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의 급선무는 오직 백성들을 휴식시키고 안정된 속에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차츰 상처가 회복되고 신음이 걷히며 어깨가 펴져 공사의 저축이 조금이나마 믿을 만한 다음이라야 나라를 지키고 적을 무찌를 방도를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8년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여러 가지 할 일들이 대부분 무너졌으니 때맞춰 처리하여 정돈해야 할 일과 때맞춰 제거하여 민심을 위로해야 할 일들을 겨를이 없다는 핑계로 강구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신들이 각자 어리석은 생각으로 사사롭게 혼자서 강구하여 본 것들 중 우선 그 요체가 되는 것을 뽑아 조목조목 기록하여 예재(睿裁)를 품합니다. 중국 군사들이 모두 철수하여 거둥하실 일이 드무니 때때로 한가한 시간에 신들을 인접하여 각자의 견해를 다시 아뢰게 하고 친히 전교를 내리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1. 경리(經理) 이하 두서너 대아문(大衙門)과 뒷일을 잘 처리하기 위해 오랫동안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이미 모두 철수하여 돌아갔으니, 따로 사신을 보내 진사(陳謝)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1. 정유년186)(註 186)(정유년 : 1597 선조 30년.) 이전의 갖가지 포흠(逋欠)을 해조해서 헤아려 초출하여 입계하게 해서 탕감하소서. 지금 중국 군대가 모두 철수하였으니 우선 몇 년을 한정하여 백성들을 휴식시킨다는 뜻과 아울러 그 조목을 낱낱이 들어 특별히 교서를 만든 다음 중외에 포고(布告)하여 민심을 위로하고 달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1. 난리를 겪은 이후로 도성이 텅 비었습니다. 중국 군대가 모두 철수해 버리자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서울에 호적이 실려진 자조차도 사방으로 흩어져 떠다니는 자가 아직까지 많이 있습니다. 이제 그들을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하려면 억지로 붙잡아 오거나 강제로 몰아붙여서 될 일이 아닙니다. 오직 대가 거족(大家巨族)들만이 사민(士民)을 앞장서 이끌 수 있는데 난리로 인해 피난가 지방에 흩어져 있는 자들이 매우 많으니, 지금 의당 지방에 하서하여 그들로 하여금 서울로 돌아오게 하여 왕경(王京)을 호위케 해야 합니다. 그 중 침체해 있는 인재들을 당연히 나아오는 대로 서용해야 할 터인데 대부분 파산(罷散) 중에 있습니다. 이들 역시 해조로 하여금 마련하여 계품토록 해서 별도로 서용함으로써 사람을 등용하는 길을 넓히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1. 부상(富商)과 대고(大買)들 중 난리로 인해 흩어져서는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또 많이 있습니다. 판출하는 것을 모두 저자 사람들에게 책임지우고 있는데 저자의 가게가 텅비어 있으니 또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이제 외방에 행이(行移)하여 흩어져 있는 경상(京商)들을 모두 적발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1. 경기에 함부로 시장을 열지 못하도록 한 것은, 경기의 백성들이 토산품을 서울에 가져와 사고 팔게 하여 서울과 경기가 서로 의지하게 하고자 해서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경기에 시장이 서면서 그 수가 차츰 많아져 물화(物貨)가 유통되는 길이 더욱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개성(開城) 이외에 경기에 열리는 시장을 일체 금지시키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1. 병조가 외방의 한산 무사(閑散武士)들을 따로 모아 무용(武勇)이라 이름 붙이고 7번(番)으로 나눈 것은 매우 좋은 규정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당번인데도 오지 않는 자들은 모두 중벌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호조로 하여금 번료(番料)를 헤아려 지급토록 하되, 참하(參下)187)(註 187)(참하(參下) : 7품 이하의 관원.) 인 사람들은 본청으로 하여금 책을 만들어 출사한 날짜를 기록하였다가 연말에 본원으로 보내게 하여 당번으로 출사한 날짜를 합계하여 천전(遷轉)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1. 군사가 상번(上番)하는 데는 정해진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난날 많은 군사들이 서울에 있음으로 인해 크고 작은 아문들의 방자(幇子)를 병조가 공급할 계책이 없자 갖가지의 여러 군사들을 모두 합번(合番)함으로써 1년 안에 네 번이나 상번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번의 역가(役價)가 베 6∼7필(匹)이나 되어 마침내는 유리하는 자가 많게 되었습니다. 병조로 하여금 속히 합번의 규정을 없애고 한결같이 옛날대로 번을 서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1. 서울과 지방의 각 아문의 인신(印信)이 난리를 치르면서 없어졌는데도 새로 만들지 않고 혹 나무 도장을 사용하기도 하여 도장이 쉬 이지러집니다. 문서를 전하는 데 있어서 간사함을 막는 뜻이 없게 되었으니 해조로 하여금 재료를 모아 때맞추어 주조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1. 백관(百官)의 장복(章服)은 복색(服色)으로 귀천을 분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종조로부터 정한 법제대로 착용케 하여 각기 등급을 두었던 것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대로 지어 입으면서 서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하기만 힘쓰고 있고 상하 등급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인심과 사풍(士風)이 이토록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당연히 기한을 정해 일체 고치도록 해야 합니다. 다만 지금은 물력이 부족하니 만약 일체를 급히 혁파하면 사치를 억제하고자 하는 것이 도리어 재산을 손상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미리 기한을 정하도록 하되, 명년 국상(國喪)의 소상(小祥) 이후로는 모든 당하관들은 절대로 명주(絲)를 입지 못하도록 하고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명주(紬)·모시·무명 등의 옷을 입게 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1. 팔도의 공안(貢案)은 이미 평시부터 고르지 않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난리를 겪은 뒤로 해조에서 이런 점을 참작하여 새로 제정하였으나 곧바로 여러 가지 일이 많아 미처 결말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호조로 하여금 책임지고 처리토록 하되, 신구 공안(新舊貢案)과 갑오년에 상정(詳定)한 숫자를 비변사의 당상관 중 몇 명을 동참시켜 대신들과 의논하여 때맞추어 결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1. 전제(田制)가 한번 어지러워지자 공부(貢賦)가 고르지 못해 국가의 세입이 이로 인해 감축되었습니다. 지금 나라에는 잠시나마 지탱할 저축이 없으니 무엇을 가지고 나라가 유지되겠습니까. 양전(量田)에 관한 일은 경솔히 의논할 수 없지만 해조로 하여금 사목(事目)을 만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로 하여금 직접 수령들을 독촉해서 현재 기경(起耕)한 숫자를 각기 타량(打量)하되 해마다 기경하는 대로 타량하여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고 감사가 전계(轉啓)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재상 경차관을 보낼 때에도 해조에서 한 고을을 추생(抽牲)해 빠짐없이 타량하게 하되 착오가 있을 때에는 그 수령을 중하게 죄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해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경계가 차츰 바로잡힐 것이며 세입도 저절로 넉넉해질 것입니다. 1. 각 고을에는 모두 상평곡(常平穀)이 있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고 있으며, 또 아료(衙料)가 있어 관청의 비용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난리를 겪은 뒤로 곡식이 전혀 없어서 각 고을의 수령들이 수시로 중하게도 매기고 가볍게도 매겨 무단히 백성들에게 내게 하여 관아의 잡비에 충당하므로 취하는 것에 절도가 없습니다. 해사로 하여금 별도로 사목을 만들어 각 고을로 하여금 전결을 헤아려 한계를 정해 수조(收租)하여 점차 저축해서 원곡(元穀)을 삼게 하고, 별도로 고을 안의 진전(陳田)을 가려 둔전을 만들어 아료(衙料)를 지공하되 전제(田制)를 정해 함부로 경작하여 양민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1. 기인(其人)의 폐단에 대해서 전후로 그것을 말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신묘년에 특별히 수교(受敎)하여 각도의 감사가 직접 납부하는 것을 독촉해서 별도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해 공조에 납부하면 공조에서는 수효대로 따져 해당 관사에 내리는 것이 이미 공사(公事)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변을 겪은 뒤로는 옛날의 폐단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각사와 각도에 신칙하여 한결같이 신묘년 수교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1. 경강(京江) 주사(舟師)의 부역이 날이 갈수록 폐단이 생겨나 마침내는 거민(居民)들을 강제로 속오(束伍)에 편입시켜 부리기까지 하여서 삼강(三江) 백성들의 원망과 고생이 날로 심해져가는데 강안(江岸)은 좁고 배는 커 실상 소용도 없습니다. 이제 주사를 혁파하여 큰 배는 경기 수영(京畿水營)에 보내 변란을 대비하는 데 쓰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1. 양 경리(楊經理)가 서울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 나라로 하여금 때맞추어 둔전을 설치해 군량을 지공하라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한때의 독촉으로 인해 지방에 분정하여 책임만 메꾸려고 하였었습니다. 이로 인해 본 비변사에 따로 둔전청을 설치하였었는데, 난리를 치르는 중에 도움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또한 백성들에게 준 폐해도 적지 않았었습니다. 이제 이미 군대도 혁파되었으니 둔전도 혁파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윤허한다. 장복(章服) 등의 제도는 거기에 대한 법전이 있는데도 근래에는 분수에 넘치는 짓을 꺼리지 않고 하고 있으며 아랫사람들까지도 그러하여 내가 늘 놀랍게 여겨왔었다. 이 일은 금전(禁典)이 있고 그 책임은 헌부가 지고 있는데, 시습(時習)이 이 같은 것은 헌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탓이다. 헌부는 어째서 자기의 직책을 잘 살펴서 조관(朝官)의 경우에는 논박하고 서인은 추신(推訊)하지 않는가. 수령의 아공(衙供)같은 일들은 거기에 대한 법전이 있으니 단지 법 밖의 분수없이 날뛰는 간교한 자들만 다스려야지 별도로 둔전을 허락하면 반드시 큰 폐단이 생겨날 것이다. 주사를 둔 것은 뜻이 있는 것이니 폐단이 있을 경우 그 폐단만을 제거하여야지 혁파하기까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지 모르겠다.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조 33년 9월 26일)[39] 간원이 와서 아뢰기를, "난리를 겪고 난 뒤로 공사의 재정이 탕갈되어 군수(軍需)가 바닥났습니다. 그런데도 계책을 수립할 방도가 없자 유사들이 당장 눈앞의 급한 것만을 생각해 조치함으로 인해 계획과 운영이 잗달고 구차스러움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오늘 한 가지 명령을 내고 내일 한 가지 법조문을 세워 호령과 절목(節目)이 쏟아지면서 재물을 소비하고 백성을 못 살게 함이 이미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 어제 비망기를 보니, 변을 치른 이후로 법 외에 새로 세운 구차한 정령(政令)과 사목(事目)을 일체 혁파하라고 하셨는데, 민생을 진념하시어 폐단을 제거하고 바로잡으시려는 뜻이 더없이 지극합니다. 보고 듣는 사람들치고 누가 감격하지 않았겠습니까. 중국 군사가 주둔하고 있던 때에는 비록 법 이외의 징수하는 일이 있더라도 백성들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하였었습니다. 지금은 대군이 막 철수하여 경비가 많이 소용되지 않으니, 바로 조금 휴식시켜야 할 시기입니다. 지난번에 호조가 정유년191)(註 191)(정유년 : 1597 선조 30년.) 이전의 각종 포흠(逋欠)을 견감(蠲減)하자고 청한 것도 이런 뜻에서입니다. 조정에서 애써 구휼하는 정사가 이와 같은데도 널리 알리지 않는다면 외떨어진 지역의 백성들이 어떻게 모두 알 수 있겠습니까. 비망기의 뜻으로 교서를 만들되, 호조에서 견감하자고 한 일도 아울러 삽입하여 중외에 널리 알려 크나큰 은전을 보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 33년 9월 29일)[40] 호조 판서 황신(黃愼)이 아뢰기를, "보잘것없는 신의 질병이 고통스러워 벼슬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정고(呈告)하였는데, 윤허해주지 않으시고 특별히 규외(規外)의 은가(恩暇)를 내리시니, 신은 정말 황공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분국(分局)의 얘기는 선대 조정에서 들어보지 못한 얘기이다. 본조에 가합하거든 사람을 골라 임명하도록 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재화를 관리하는 직임은 예로부터 어렵게 여겨 온 것입니다. 난리를 겪은 후 국가의 재용(財用)이 제모양을 갖추지 못하자, 지난 을사 연간에 비로소 공안(貢案)을 상정(詳定)하였으나 세입(歲入)이 평소에 비해 10분의 2, 3도 못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요사이 몇 년 동안에 크고 작은 수용(需用)이 점차 예전의 규모를 회복하여, 한 해에 바치는 공물이 한 해 용도를 지탱하기에 모자라, 반드시 별도로 조처하여 마련해야만 꾸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득이하여 이 조도(調度)의 관호(官號)058)[248] 가 있게 된 것인데 몹시 구차한 것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조도(調度) 일사(一事)는 나라의 체모에 방해로울 뿐, 단지 눈앞의 급한 것만 해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수삼 년 기다렸다가 민력(民力)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뒤에 가서, 다시금 실전(實田)을 조사하여 공안을 재정함으로써, 국가의 재용이 조금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든 다음에, 서서히 개혁을 의논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일에 닥쳐 군색하고 다급하게 시전(市廛)에서 근거도 없이 빼앗는 일에 비하면, 이 방법이 약간 낫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각사가 한결같이 고갈되어 해당 관원은 단지 빈 창고만을 지키고 있으니, 만약 조도(調度)에서 조처하여 갖추는 것이 없다면, 어디에서 가져다 마련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신의 계사로 인하여, 이미 본조에 합치고 정·좌랑(正佐郞) 각 1원(員)을 가설하여 그들로 하여금 맡아 다스리도록 하여, 이제는 분조(分曹)의 이름이 더이상 없습니다. 다만 조도의 직임이 오로지 이병(利柄)을 관장하는 만큼, 조금이라도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으면, 비방과 욕설이 뒤따르게 되니, 차라리 없애버리므로써 사람들의 입방아를 그치게 하고 체면을 보존하는 것이 낫습니다. 대체로 조도를 설치한 것은 애당초 대신의 계사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로 둘 것인지 없애버릴 것인지 아니면 변통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계책을 대신으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구임(久任)시켜 효과를 거두려고 경을 번거롭게 한다마는, 앞으로는 비록 질병이 있더라도 사직한다는 말을 하지 말고, 다시금 더욱 직무에 전념하라. 그리고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광해 3년 7월 20일)[41] 5년이 지나서 대체되었다.[249] 지속가능성이 없는 감세정책의 사례라고 해야 할 것이다.[42] 사신은 논한다. 쓸만한 물건이 쓰이지 않고 있으니, 우리 나라의 재물을 생산하는 길이 참으로 좁다. 다만 권력가가 앞을 다투어 차지하고 이익을 독점하려고 할 것이라는 호조의 아룀은 실로 시대의 폐단을 적중시켰다. 해수(海水)나 천곡(川曲)도 모두 입안(立案)을 받았으므로 백성들이 감히 그 사이에서 고기잡이를 못한다. 더구나 은이 생산되는 은광을 민간이 채취하는 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선조 39년 7월 14일)[43] 사간원이 【좌목(座目)은 같다. 】 아뢰기를, "산림(山林)·천택(川澤)을 백성과 함께 쓰는 것은 왕정(王政) 중에서도 먼저 할 일인데, 근래에는 인심이 예전 같지 않아서 이익이 있는 것이면 염치를 돌보지 않고 이익을 독차지합니다. 그 폐단이 날로 더하여 가까이는 근기(近畿) 부터 멀리는 원방(遠方)까지 산림·천택의 하찮은 이익을 권세가에서 앞다투어 입안(立案)을 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고는 백성이 손대지 못하게 하므로 어디에서나 원망하는 것이 같으나 하소할 곳이 없으니, 백성을 괴롭히는 근본이 참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라건대, 해조와 각도의 감사를 시켜 낱낱이 적발하고 사핵하여 법을 어겨 입안을 낸 것은 일체 취소하는 한편, 이 뒤로 수령 가운데에 법을 어기고 내어 주는 자가 있거든 나타나는 대로 엄히 다스려서 이익을 독차지하는 폐단을 고치소서. 무릇 명을 받든 관원이 외람되게 중방(中房)을 거느리고 열읍(列邑)에 폐단을 끼치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수세관(收稅官) 권설(權渫)은 마음대로 본원(本院)의 서리(書吏)를 거느리고 중방이라 칭하고는 강상(江上)의 시장에서 멋대로 횡행하니 극히 무엄합니다. 권설은 파직(罷職)하고 그 서리는 본도(本道)의 감사를 시켜 가두고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선조 39년 9월 4일)[44] 강원 감사(江原監司)가 장계하였다. "삼가 유지(有旨)를 받들건대 ‘옛날을 상고하면 산해(山海)에 대한 관직과 우형(虞衡)에 대한 직책을 둔 것은 대체로 풍요롭고 후한 이익을 거두어 조렴(調斂)하는 무거운 요역(徭役)을 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근년 이래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산림과 천택(川澤) 가운데 조종조에서 백성에게 마음대로 고기잡고 채벌하게 하면서 사람에게 위임하여 세금을 거두지 않았던 것들이 모두 호족과 세가에게 점유되어 그들의 이익을 독점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심지어는 조운(漕運)하는 해로(海路)와 공상(供上)하는 어장(漁場)을 입안(立案)된 땅이라고 칭하는가 하면 심한 경우에는 제비가 집을 짓는 방죽과 음귀(淫鬼)를 제사지내는 사당까지도 세금 징수의 대상이 되어 있어 풀 베고 고기잡는 이들이 범하면 잡혀서 갇히지 않는 이가 없다. 농민과 상인이 이 때문에 본업을 잃고 있으니 식자들이 천정을 우러르며 탄식한 지 오래되었다. 전례에 따라 겉치레로만 하지 말고 십분 착실히 조사하여 입안을 취소시키되, 비단 여러 궁가(宮家)와 사대부·호족·세가의 어장·시장(柴場) 뿐만 아니라 해택(海澤)·제언(堤堰)까지도 거짓으로 입안하여 이익을 독점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는 것은 일일이 적발하여 금단시키거나 공가(公家)에 귀속시킨 다음 그 상황을 날짜별로 적어서 계문하라. 지금부터는 각도의 관찰사 가운데 혹 승전을 무시하고 소장에 의하여 각 고을로 이문(移文)하는 사람 및 각 고을의 수령 가운데 조정의 지극한 뜻을 본받지 아니하고 입안을 내어주는 사람은 모두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에 의하여 처단한다는 뜻을 경은 자세히 알라.’ 하셨으므로, 어장·시장·해택·제언 등의 입안을 외람되이 받은 경우는 이를 적발하여 첩보(牒報)할 것으로 각 고을에 이문하여 통지하였더니 모두 그런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한 번 국헌(國憲)이 거행되지 않아 언로(言路)가 막힘으로부터 여러 궁가의 조례(皂隷)들이 멋대로 횡행하여도 잡아 다스릴 수가 없게 되었다. 심지어 시정(市井)의 간사한 무리가 권세 있는 호족과 결탁하여 백성의 이익을 침탈하는 자들이 각 지역에 가득하여 법을 무시하고 간특한 짓을 하는가 하면 이권을 마음대로 농락하므로 근심과 탄식이 바야흐로 일어나고 있다. 그리하여 백성은 나날이 더욱 곤핍하게 되었고 세금의 징수는 더욱 번다하여졌어도 국가는 더 부유해지지 않았다. 이는 마치 농사를 해치는 해충과 같고 나무를 갉아 먹는 벌레와 같아서 반드시 국가를 망치고야 말 것이다. 왕언(王言)은 한 번 나오면 사방에서 눈을 씻고 바라보므로 법을 봉행하는 신하는 당연히 철저하게 찾아 가려내어 무거운 법으로 처단함으로써 낮도깨비같은 무리들이 용납되어 숨을 곳이 없게 했어야 하였다. 그런데 끝내 겉치레로 봉행하는 것을 면치 못하여 방백은 각 고을에 위임하고 각 고을은 서리에게 위임하였다. 그래서 눈을 부라리고 중지하라고 꾸짖으나 적발하지 못해 마침내 없다고 일컫고 말아서 밝아진 태양의 빛이 가려지며 흩어지려던 간사한 무리가 다시 날뛰게 되었으니 못내 통탄스럽다. (선조 40년 4월 11일)[45] 선혜청이 아뢰기를, "제궁가와 사대부가 절수(折受)로 증명서를 발급받았다고 하는, 주인이 있는 전답과 염전·어살·산림·천택에 대하여 증명서를 허위로 낸 곳은 낱낱이 본 주인에게 환급하여 백성들이 경작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사패(賜牌)한 공문이 있는 곳의 문기(文記)가 명백한 것은 자세히 조사하여 선처해야 하겠으며, 찾아내서 본 주인에게 보내는 물건도 개좌(開坐)하여 입계하고 시행하겠습니다. 절수라고 범칭하는 것은 당연히 수리하지 말 것이며, 그 뒤에는 내수사가 추후로 계하하여 해조에 자주 이문(移文)하는 것이 사리에 미안한 듯합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당초의 공문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산림과 천택을 백성과 함께 갖는 것은 실로 훌륭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다. 다만 일은 점진적으로 하는 것이 귀하니, 궁가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만일 명백한 공문이 있으면 정확히 조사하여 처치하지 않을 수 없다. 절수한 문권을 가져다가 상고하여 날짜의 선후에 따라서 귀천(貴賤)에 구애하지 말고 평반(平反)하여 지급하는 것이 좋겠다. 어찌 꼭 승전을 받들어 일체로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것이 내수사가 겸병하는 시초가 되었다. (광해 즉위년 10월 14일)[46]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원래부터 살던 백성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힘써 농사를 지어 착실히 식량을 보충시키게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여러 가지의 폐단들은 생각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말세가 되어 나라의 기강이 죄다 무너져서 사사로운 인정이 크게 설치고 있으니, 한 번 개간을 허락하는 길이 열리면 서울의 강성한 세력을 가진 집안들이 불법으로 입안(立案)을 받아내 북새를 떨며 마구 점령하고, 마음껏 농사를 지어 배로 실어내어 이익을 독점하는 자료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속수 무책으로 구경만 할 것이고 목장의 말들은 제자리를 잃어 모두 죽게 되어, 국가의 곡식을 저축코자 한 계획과 말을 치려던 정책은 한꺼번에 다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설사 권반(權盼)이 길이 부사로 있는다 하더라도 힘에 눌려 빼앗기는 걱정을 면하기 어려울 터인데, 하물며 부사의 자리를 이어받는 자들마다 반드시 적임자를 얻을 수 없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광해 즉위년 11월 9일)[47] 지난번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여 쌓인 폐단을 제거하기에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안으로 거두는 것에는 복호(復戶)가 여전히 남아 있고, 천택(川澤)에는 사패지(賜牌地)가 아직도 점유하고 있습니다. (광해 즉위년 12월 3일)[48] 우부승지 목장흠(睦長欽)이 서계하기를, "신이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지역에 가서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을 조사하였는데, 봉산현의 민폐로는 노전(蘆田)보다 더 심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른바 노전이란 것은 본현 서북쪽 바닷가의 갈대풀이 자생하는 짜고 척박한 땅으로 인력을 들여 쌓은 제방 안의 땅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이 그 갈대풀을 베어다가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고 소와 말을 먹이고는 호조에 약간의 세금을 납부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토대였습니다. 그런데 난리를 지낸 뒤에 세력 있는 부호가(富豪家)들이 문안(文案)을 만들어내어 점유한 다음 가포(價布)을 강제로 거두어 들이는데, 1년에 거두어 들이는 목면(木綿)이 거의 7, 8백 동(同)에 이르고 있어 도로에 원성이 자자합니다. 그러니 평시대로 관가에 쌀을 바치게 하고 문안을 만들어 절수(折受)하는 폐단을 영원히 고치소서." 하니, 왕이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의논이 끝내 행해지지 않았다. 【그 뒤로 노전의 해가 점점 커져 제방을 쌓고 농토를 개간하여 다시는 국가의 용도가 되지 않고 지금까지 근방 백성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 (광해 4년 12월 7일)[49] 그나마 왜란 종결 후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는 기조를 내세워 토지 복구, 국가 재정 감축, 세금 감면 등을 행하기는 했으나 당장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기발한 정책을 내놓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후 현종 대에 숙종 대에 입안절수(立案折受) 규제강화[250][251][252][253][254][255][256][257][258]와 같은 선조 대에 규제완화[259][260][261][262][263][264][265][266][267]의 부작용[268][269]들을 수습하기 위한 해결책들을 제시해야 했던만큼 세부계획에 있어서 치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장기적으로 성과를 내기에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이거나 하는 대안을 선조 대에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이후에 실시된 대동법 같이 국가의 구조적 문제를 직접 건드리는 대안을 제시하고 제대로 실시한 적은 선조 대에 전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고상하게 돌려서 이것을 원칙으로 간주하겠다고 승인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선조라는 왕이 집권한 동안에는 무엇인가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온 개선책이 실시되고 성과를 낸 적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전란 전에는 원칙이 없었고[270] 전란 후에는 그나마 여민휴식(與民休息) 같은 그것 자체로는 합리적인 원칙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세부계획이 뻔하고 허술해서 민간의 자생능력에 대부분 의지하는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50] 그러나 훈련도감의 삼수병 체제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여 년이 되어 가던 1607년(선조 40) 유명무실한 모습으로 전락하게 된다. 삼수병들이 군사 훈련에 뜻이 없어서 시재(詩才)하는 날이 되면 구차하게 책임만 메우려고 할 뿐 모든 군사 훈련에 대해서는 게을러졌으며, 심지어는 장난과 농지거리를 일삼는 우인(偶人)과 같아서 까마귀나 솔개도 쫓을 수 없다는 평가까지 받기도 하였다(『선조실록』 40년 4월 13일). 삼수병의 문란은 중앙군만이 아니라 지방의 삼수병도 마찬가지였다. 지방의 삼수병은 역(役)이 있는 농민들로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기예(技藝)가 미숙하며 춥고 배고픔에 시달려서 군대다운 위용을 갖추지 못하는 실정이었다(『선조실록』 40년 9월 26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대까지도 중앙군에서 훈련이 된 군사는 삼수군(三手軍)뿐이었다. 훈련도감의 삼수병 이외의 정군(正軍)은 평소에 조련하는 법이 없고 부방(赴防)의 역에만 응하는데 채목(債木)을 거두어 모아 사람을 사서 방(防)으로 보내고 있으므로 이름만 있고 군사의 실상이 없었다(『광해군일기』 3년 3월 27일). 삼수병(三手兵)/개설[51] 선조 임금과 조총(鳥銃)[52] 선조의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그의 인품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내용이다.[53] 원균이 워낙 졸장인 것도 있지만 엄연히 권율과 자신이 독촉해 출전했던 것인데 하늘 운운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54] 위의 문장을 쉽게 해석하자면 명에서 온 경리인 양호에게 선조가 아부를 떨며 왜군을 무찌른 공적이 이순신과 같은 관군들과 의병들에게 있는데 엉뚱하게 그 공을 양호 덕분이라고 말한 것과 양호가 이순신이 명량 해전의 승리를 축하해 주기 위해서 백금과 각종 고급품들을 보내주었는데 선조는 그것이 원래 장수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짓인데 왜 보냈냐고 따진 것이다. 즉 외국 신하도 칭찬해주는 자국의 성웅을 왕이라는 사람이 "그냥 자기가 할 일을 한 것뿐이지 뭐 대단한 거라고"라며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린 것이다. 오히려 양호가 이에 맞서 이순신을 감싸주어 "아니, 칠천량 해전 때문에 작살나버린 조선 수군을 다시 통합하고 적은 수의 함선으로 왜군들을 무찔러 나라를 구한 그런 충신에게 왜 그런 말을 하시오?"라고 따졌다. 명량해전 항목을 보면 양호는 이순신과 직접 만나고 싶었으나 돌아갈 길이 멀어 어쩔 수 없이 소소한 답례로 보내는 물건들이라도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편지를 쓰고 갔다.[55] 장수와 병졸을 아울러 이르는 말[56] 요약해서, 이번 전쟁이 이긴 것은 모두 명나라의 덕분이고 우리나라는 한 일이 별로 없다. 그리고 그 명나라가 우릴 도와준 이유는 나와 함께 중국에 가서 명에게 호소한 대신들 덕분이기에 일본도 토벌하고 땅도 회복한 것이다.라는 말이다! 목숨바쳐 싸운 자국군들의 희생정신과 공적을 폄하하는 말이다.[57] 그야말로 개소리로 자신의 조상인 이성계 부터 원나라와 명나라에도 무시무시하다는 평가를 받은 무패의 장수다. 거기다 태조이래 15~16세기 조선군은 여진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귀화한 여진족인 동청례(童淸禮)가 조선의 강성함을 금나라[271]에 비유하며 다른 여진족들을 회유했던 기록도 있다.[272] 이렇기에 임진왜란 전만해도 중국인이 조선을 두려워한다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도 있으며 옛 고구려, 고려의 명성과 여진족과의 전투의 성과까지 임진왜란 직전 명나라에서 조선의 인식은 강군이었다.[58] 명나라에서 조선의 위상이 추락하게 된 이유인 임진왜란 초반 조선의 고전도 알고 보면 왜군이 너무 강한 것이지 조선이 약한게 아닌 것이 당장 명나라군도 왜군을 상대로 벽제관 전투,사천성 전투등에서 크게 패했다.[59] 근데 고려도 카다안의 침입당시 쿠빌라이한테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는가?" 라고 디스당한적이 있으며 이를 보면 무작정 고려가 왜란시기 조선보다 국방에서 더 나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멸망하지 않았다 뿐이지 어쨌거나 몽골에 굴복한 건 사실이고 그 몽골을 상대로 치열한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이 쇠하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 문자 그대로 나라의 이름만 내걸려있는 상황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시기와 비교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애초에 무신정권여몽전쟁으로 나라가 개판된게 고려의 자업자득이니 이걸로 고려를 쉴드하는건 어불성설이다.[60] 근데 이것은 당대 조선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동시기 명나라도 1억이 넘는 인구와 장부상 300만 병력이 무색하게 실질 동원가능병력은 50만에 이마저도 질적으로 좋지 못한 병력이 태반이었는데 이에 비하면 임진왜란 직후 전국토가 황폐화 되었음에도 자체적으로 수천의 기병으로 여진정벌을 나갈 여력이 있던 당대 조선의 인구대비 병력동원은 대단한 것이다.[61] 정작 이 시기 조선군도 군소 여진 부락들을 상대로는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여기서 조선군은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62] 즉 변경의 군사거점.[63] 정작 일본에서 포로 생활을 한 강항간양록에는 당시 일본인들마저“조선은 진실로 낙국(樂國)이요, 일본은 진실로 더러운 나라다.”라고 조선을 부러워 했다는 기록이 있다.[64] (註 444) 가복(賈復)과 구순(寇恂)에게 하듯 :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장수끼리 대의(大義)를 들어 화해를 시킴. 가복(賈復)과 구순(寇恂)은 서로 감정이 있었으나 광무제(光武帝)가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는데 두 범이 서로 다투면 되겠는가." 하여 서로 화해를 시켜서 절친하게 되었음. 《후한서(後漢書)》 권16 구순전(寇恂傳).[65] 아직 요시라 사건을 계기로 이순신을 내치기 수년 전임에도 이미 이순신 대신 원균으로 갈아치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66] 물론 가장 큰 책임은 되지도 않는 억지와 모함으로 이순신을 음해하여 파직시키고 졸렬하기 짝이 없는 지휘로 말아먹은 원균에게 돌아가겠지만, 원균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원균을 그 자리에 임명한 최종 책임자가 선조인 만큼 선조의 책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21세기 민주 국가에서 대통령이 이랬어도 탄핵은 기본이요 사회적 매장감인데,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가 밀어닥쳐도 임금이 부덕해서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이라고 하던 조선 시대다. 정작 원균도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말을 뒤집었으니 단순 허풍을 넘어 임금에게 사기를 쳤다고 봐도 될 수준이다. 원균은 권율에게 육군이 돕지 못해 못 싸우고 있다며 책임전가로 음해를 가하다가 장형까지 맞은 적까지 있다.[273][274][275][276] 어쨌든 선조의 멍청한 판단 탓에 조선이 아주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조선 수군의 9할 이상이 몰살당한 칠천량 해전은 정유재란이 크게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일본군을 저지하지 못했으면 극단적으로는 나라가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 벌어졌을 수 있었던 만큼 실로 끔찍한 실책이었다. 한 마디로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멸망했다.[67] 정조 대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본에는 왕이 내린 선물을 비통하다고 한 표현이 위험해서 그대로 옮길 수 없었는지 “감동, 감동이다”라고 수정했다.[68] 사실 모친상을 당한 신하에게 고기 선물을 내린 사례는 세종도 있다. 바로 황희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이다. 하지만 세종의 의도는 선조와 명백히 달랐는데, 세종은 어떠한 불순한 의도 없이 순수하게 신하를 위해 내린 것이었다. 애시당초 세종은 끝까지 황희를 중용하고 큰 처벌을 내린 적이 없지만, 선조는 이순신을 정당한 이유 없이 의심하고 푸대접하다 자신의 명령을 한 번 어겼다고 그것을 졸렬하게 빌미로 삼아 바로 백의종군시키고 유배까지 보냈으며 그 때문에 충격을 받아 이순신의 어머니가 사망했다. 그런데 그 상중에, 그것도 무슨 목적으로 보냈는지 뻔히 다 보이는 고기를 내놓았으니 이순신에게는 그냥 "너 엿 먹어봐라" 정도도 아니고 패륜적인 모욕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이순신이라고 해도 일기에 대놓고 비통하다는 글을 썼을 정도면 정말 선조가 증오스러웠던 듯하다.[69] 이를 소재로 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시기를 하며 무슨 상을 줘야 할지 고민하던 중 윤두수가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에 "사명을 걸고 싸웠으니 면사첩(지난 죄를 사하는 증서)을 줍시다"라는 말에 동조하여 보내는 선조의 찌질한 전개로 나왔고, 이를 받은 이순신은 조용히 책에 끼어 덮어버리고 휘하 장수들은 13척으로 300척 이상의 일본군을 이긴 장수에게 어떻게 이런 개망신을 주냐며 분개했다.[70] 사실 선조가 했던 짓을 보면 이순신에게 무슨 죄라도 뒤집어씌워서 죽이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큰 공이 있는 임진왜란 이후 이순신을 숙청하자니 이순신은 너무나도 큰 공을 세운 장수라서 명나라 황제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장수였고 정탁을 비롯한 조정 신하들의 여론도 신경써야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백의종군으로 박탈시켰고,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였기 때문에 선조 본인의 손으로 직접 죽이는 짓까지는 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을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라 죽이고 싶어도 상황 탓에 끝내 죽이지 못한 것에 가깝다. 만약 선조가 윗선(명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입장이었다면 달랐을 가능성도 크다. 이순신 자살설 또한 바로 이 때문에 나온 음모론이다.[71] 차마 왕에게 대놓고 막말을 하지 못해 완곡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정철이 듣고는 기가 막혀서 "아비로서 어찌 아들을 전쟁터에 두고 떠난다고 하느냐."며 그를 질책하는 것이다.[72] 쉽게 말하면 '니가 왕이냐, 필부냐? 그럴 거면 왕 자리도 내버리고 가지 왜?' 고 깐 거다. 자기 왕에게 하는 짓이 하찮은 놈 같다고 한 건데 그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당연하게도 조선왕조실록에서 대놓고 왕에게 필부를 운운하며 왕의 행동에 반대하는 예는 사실상 선조가 처음이라고 볼 정도이다. 그 연산군에게도 필부라는 말은 없었는데…….[73] 신립·신급(申礏)·신할(申硈)의 형.[74] 요동으로 가겠다는 선조에게 대놓고 요동가면 왕위에서 사퇴할 것을 요구한다.[75] 선조의 어가[76] 여기있는 군신들을 말함[77] 상술한 다른 사례에서도 볼 수 있지만,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은 선조를 빨리 잡기 위해 하삼도에 대한 교두보를 확보하지도 않고 곧바로 한양을 향해 닥돌했는데, 선조가 도주하면서 이 계획이 틀어져 후속 대책을 세우느라 한 달이나 진격이 지체되었고, 이 틈을 타 조금이라도 해놨던 전쟁 준비를 기반으로 한 의병들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걸 마주해야만 했다.[78] 실제로 이렇게 도망을 치려다 실패하여 붙잡혀서 패전한 전쟁이 바로 병자호란이고 그 결과는 삼전도의 굴욕이었으며, 명나라도 나중에 이 비슷하게 망했으니[277] 왕이 잡히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는 역사가 증명한다.[79] 일본군은 조선에서 엄청난 피해를 보면서도 장수들만큼은 반드시 지키려 했다. 반대로 전투 시에는 적장부터 노리려 한 것 또한 당연하다. 일본군의 무사들이 딱히 충성심이 높아서가 아니라, 주군을 잃은 무사들은 떠돌이 낭인이 되어 죽음보다 비참한 삶을 살다 죽기 때문이다. 이에 충실한 대표적인 장수가 시마즈 요시히로이며, 자세한 내용은 노량 해전시마즈의 퇴각으로도 유명하다.[80] 분명히 국왕을 비롯한 전쟁을 책임질 사령부가 적군에게 생포되는 것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고, 때문에 됭케르크 철수작전처럼 후대에 크게 인정받는 철수 작전도 분명히 있다. 당연하지만 왕이 잡히면 그 순간 구심점을 잃은 조선은 질 확률이 증가하므로 도망치는 것 자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겁쟁이라고 놀리든 뭐든, 나라를 위해서라도 국가의 상징인 왕은 살아야 한다. 사실 제일 좋은 것은 도망칠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겠으나,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라면 제대로 도망치는 건 욕을 먹긴 커녕 일을 잘 한 것으로 칭찬해 마땅한 행동이다.[81] 왕이든 대통령이든 적에게 잡힐 경우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점은 분명히 사실이므로 이승만이든 선조든 피난 자체로 비판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물론 이승만은 피난을 해서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피난하려는 사람들을 안심시킨 후 자기만 튀었기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이다. 일단 왕이 붙잡힐 경우 최선의 경우가 인조가 청나라에게 당했던 수모. 좀 나쁜 경우가 원나라의 부마국·속국이 된 고려 말기의 경우이며, 최악의 경우가 식민지가 되어서 나라가 사라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고 이것이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이 출성항복을 끝까지 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이다. 대통령의 경우도 그 정치적 파급력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고, 전쟁은 공산군의 승리로 그대로 끝날 수 있는 문제이다. 이승만의 경우는 수도 함락이 기정사실화 되었을 때의 패닉과 그로 인한 혼란을 막아야 했다. 실제로 고려 현종은 거란의 2차 침공 당시 무사히 피난하는 데 성공하여 공세종말점에 도달케 하여 회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이 틈을 탄 양규 등이 반격의 기회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덤으로 현종은 전쟁의 최고 에이스인 강감찬에게 궤장을 주고 손수 모자에 꽃도 꽂아주는 등 대접을 제대로 해 줬으니 선조와 철저히 대비되는 임금이다. 다만 선조도 공을 세운 장수들을 푸대접하지만은 않은 것이 니탕개의 난에서 신립이 공을 세우자 자기가 먼저 신립을 마중나갔고, 심지어는 자기가 직접 곤룡포를 벗어서 신립에게 입혔을 정도로 신립의 공훈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사실 선조가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은 몽진을 시작한 후다.[82]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수도를 쭉 지키면서 전선 유지를 독려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라는 훌륭한 반례가 21세기에 존재하긴 하지만 이것도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 위험한 행동이다. 그러한 도박이 제대로 먹혀 들었으니까 망정이지. 다만 젤렌스키와 선조를 비교하는 것을 옳지 않은 것이 현대 우크라이나는 민주주의 국가고, 조선은 절대왕정 국가다. 조선은 왕가 곧 나라이니 잡히거나 죽으면 끝이지만, 젤렌스키의 경우 죽어도 내각의 다른 인물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83] 왜란 당시에 선조는 도망만 쳤고 이순신권율이 잘 해서 전쟁을 이긴 것이란 판단은 굉장히 짧은 이해다. 전술했듯이 우선 그 이순신과 권율을 등용한 군주가 바로 선조이고, 도성까지 점령당한 판국에 국가 원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인 외교적 방법으로 명군의 파병을 얻어낸 것도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사실 명군이 별 활약도 없이 민폐만 끼쳤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명군은 존재 자체도 큰 도움이 되었다.[278] 일본군 입장에서는 적을 둘이나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니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더 컸다.[84] 선조도 나름대로 전시 대응체계를 가동하기는 했다. 임진강 방어선, 평양성 방어선 등 병력 모으고 방어선을 짜기는 했다. 문제는 둘 다 담당 지휘관의 삽질로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것. 그래서 전국에 격문을 돌려 조선이 의병들이 스스로 일어나서 승리한 민중의 승리라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조선은 의병들을 신속하게 정규 군사체계에 편입시키고[279] 군권과 식량 조달을 위한 조세권을 주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했고 소집, 즉 민방위 체계를 작동시키고 혹여나 자신이 잡힐 경우를 대비하여 세자였던 광해군에게 권한 일부를 이양하여 전시 체제에 돌입하였다. 일본군의 진공이 생각보다 빠르고 신속하여 오버를 한 경향이 있다.[85] 물론 선조는 조선의 명맥 자체가 망하지는 않게 구심점을 삼도록 자기 딴에는 버리는 패인 광해군을 던졌는데 아마 선조는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고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 모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예상 외로 광해군이 뛰어난 활약을 하면서 선조가 쩌리가 되는 효과가 생겨버렸다. 그리고 선조는 자신의 실책으로 잃은 권위를 내내 광해군을 갈구면서 회복할 생각을 한다. 이는 나중에 멀쩡한 황제를 버려두고 칭제를 했음에도 대계적 관점에서 아들을 인정하고 기꺼이 태상황으로 물러난 당현종과 너무나 대비되는, 누가 봐도 근시안적이고 한심한 일이었다. 당현종은 권력에 집착했고 자식에게는 상당히 잔혹한 인물이었음에도 배포는 컸고 아직 총기는 남아있었는지 나라의 통합을 위해서 자식의 권위를 높이는 방법을 선택했다.[86] 국내에서 피난을 하며 버티는 게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다른 나라로 튄 왕이 난이 평정된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는 확률이 생각보다 그렇게 높지 않다. 몽골의 침입 때 고려가 강화도에 짱박혔음에도 어쨌든 나라를 유지한 건 그래도 그것이 국내였기 때문이었다.[280] 그렇기에 기를 쓰고 신하들이 반대했고, 명나라는 처음에는 선조를 일본의 첩자라고 의심했다가 나중에 진실을 알고선 기가 찼으며, 조선의 명맥을 유지할 왕이라는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신하들이 양위를 시켜서 '왕'의 권위를 광해군에게 넘겨줄 생각까지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하들이 왕을 적대하는 지경까지 간 것이다.[87] 하다못해 손자인 인조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괄의 난 때는 호남으로 도주했는데 이때 신하들이 영남으로 도주하느냐 호남으로 도주하느냐 의견이 갈렸는데 김류는 충의로운 선비가 많으니 왕의 뜻에 따라 일어설 이들이 많을 거라며 영남으로 가자는 의견에 문을 숭상하는 영남보다는 무를 숭상하는 호남이 낫다고 해서 호남으로 갔다. 즉 반격을 위해서 호남으로 간 거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도주하긴 했어도 이 역시 이런 일에 대비한 매뉴얼에 따른 것이었으며, 병자호란 당시의 몽진 역시 할아버지가 제 목숨 하나 살겠다고 토낀 것과는 다르다. 인조 자신도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맞서긴 했으며 그 사이 왕을 지원하러 온 병력이 왔고 대체적으로는 숫자 때문인지 지는 게 많았지만 광교산 전투 등 이긴 전투도 없잖아 있었다. 비록 졌기 때문에 왕이 도망을 못 치면 어떤 꼴이 벌어지는지를 본인 스스로 증명해버린 게 문제지만, 마음가짐만은 할아버지랑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다.[88] 흔히 현대인들에게 전황이 매우 좋지 않다고 말을 하지도 않고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라며 서울 사수 의지를 표명하는 왜곡 방송을 틀어놓고 야음을 틈타 대전으로 도주한 6.25 전쟁 초반 '런'승만과 함께 엮여서 런조로 까이지만, 살펴보면 이승만과 비교하는 것도 실례인 수준이다. 일단 이승만은 옆나라도망칠 생각은 없었고 적어도 한강 인도교 폭파는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어 공세종말점을 앞당기는 한편 그렇게 번 시간을 활용해 UN군의 충원을 기다리고 국군을 확충하고 반격할 기회를 모색하려는 군사적 의도가 있었지만 선조는 애초에 세자인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며 그렇게 번 시간을 가지고 국왕인 선조 자신이 어떻게 하겠다는 그런 식의 계획조차도 없이 전쟁을 완전히 포기하고 나라가 침략자들에게 망하든 말든 명나라로 도망칠 계획만 잡고 무리수를 둬 가며 강행했다. 차라리 반대로 했다면 욕이라도 안 먹었을지도 모른다.[281][89]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짐작컨대 후 쩐 왕조 얘기일 가능성이 높다. 명나라가 복국하…는 것 같더니 아예 점령해버렸지만.[90] 이러한 일들은 결국 선조가 광해군을 경쟁 상대로 여기게 되고 결국 광해군이 이 시절 보여주었던 총명한 모습을 다 잃고 암군으로 전락하는데 일조한다.[91]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시간이 다소 지난 뒤 고구려의 왕이었던 보장왕을 안동도호부의 도독에 앉혔는데, 이는 고구려 유민들에게 옛 왕이 우리를 섬기고 통치하니 너희도 충성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다. 조선에 비하면 지방 분권적인데다 이미 멸망한 나라의 옛 군주에게 모여들 민심이 이 정도였다.[92] 만에 하나 선조의 목적대로 요동 망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미 해외로 도망간 국왕을 위해서 상술했던 의병이나 명나라의 원군이 얼마나 소극적으로 변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좋은 예시로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 황실이 일제에 협조하게 되고 일제의 특혜를 받아 호의호식하게 되자 유림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이나 독립운동이 약해졌고 동시에 복벽이니 군주제니 하는 것도 약해져 1919년쯤 되면 모두가 방향은 달라도 군주정이 아닌 공화정을 외치게 된다. 물론 이때야 공화국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새 왕조가 수립되었겠지만 어쨌든 진짜로 선조가 도망쳤다면 선조는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거나 광해군이 어찌어찌하여 유지시켜도 귀국을 못하거나 귀국해도 탈문의 변 같은 사건이 없는 이상은 다시는 왕으로 복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망명 전에 선조가 폐위당하고 광해군이 즉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추태 때문에 파병 온 이여송을 일국의 국왕인 선조가 버선발로 나가 맞이한 사실 등은 선조가 국격을 얼마나 가볍게 해서 실추시켰는가를 가늠하게 하며, 그 절박함이나 명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전쟁 내내 이여송을 비롯한 명군 장수들로부터 면박을 당하는 단초가 되었다.[93] 만약 선조가 이때 요동으로 넘어갔다면, 왜군 입장에서도 한반도는 더 이상 '도요토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략한 조선 왕국'이 아니라 '도요토미에게 하사 받을 수 있는 무주지'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선조를 잡기위해 최단기간 한양 점령이 목표였던 것이 보여주듯, 전국시대의 일본은 지도자가 매우 중요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봉토를 이용해 무사들을 굴리는 방법을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이미 굉장히 잘 사용해왔기에, 다이묘가 되고자하는 왜군 장수들은 더욱 치열하게 싸웠을 수 있다. 특히 왜란 말기에도 왜군이 한반도에 세운 왜성을 거의 점령하지 못했을 정도로 왜군은 수비전이 강한 군대인데[282], 스스로를 다이묘라고 인식한 왜군 장수들을 상대로한 공성전은 훨씬 험난해졌을 것이다.[94] 육군과 수군에게 부산으로의 진격을 계속해서 명령했다. 당시 부산이 일본군의 상륙지점이라는 점을 보면 분명 부산에 있는 일본군을 다 없애면 큰 타격을 줄 수 있는건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곳을 일본이 그냥 방치할 리가 없으며 기본적으로 육지에서 싸우는 건 육군이 할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조선 육군과 수군 모두 선조의 명령대로 부산의 일본군을 공격할 형편이 안 되는데도 계속 공격하라고 닥달하여 육군 총사령관인 권율과 해군 제독인 이순신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이순신이 거듭 그럴려면 육군이 이쪽으로 와서 합동으로 작전해야 한다고 했겠으며 심지어 그 멍청한 원균마저 나중에는 이를 깨달았겠는가?[95] 물론 당시에는 실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다. 오죽하면 칠천량 해전 후 원균을 까던 신하들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 전까지는 이원익 등 일부를 빼면 원균의 실체를 모른 채 그런대로 싸우는 장수 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원균이 허위보고를 올려도 알 길이 없던 당시 상황도 문제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조를 실드칠 수 없는 노릇인게 아무리 원균이 공을 부풀리더라도 그게 이순신의 공을 능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잘하고 있던 이순신을 끌어내리고 원균을 세운다는 건 누가 봐도 삽질 오브 삽질이다. 게다가 이순신에게 명을 내리고 '어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면시키고 백의종군시키며 욕을 보이고 지휘권과 명예를 박탈한 것은 전적으로 선조의 권한으로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그 책임과 이후 일어난 원균의 실책도 온전히 선조의 잘못이 원인으로 일어난 결과로 읽힐 수 밖에 없다.[96] Run과 선조의 합성어다.[97] 실제로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임금에게는 시호 등에 나갈 출(出)자를 써서 표현한다. 시법상 정식으로 있는 표현은 아니지만.[98] (註 452) 당저(當宁) : 현재의 임금을 가리키는 말. 본래는 임금이 조회 때에 서 있는 곳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99] 요약하자면 열심히 나라 망치던 왕이 갑자기 왕 그만하겠다는데 아주 훌륭한 생각 아니냐. 그걸 왜들 시답잖은 핑계로 말렸냐. 말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매우 안타깝다는 뜻이다. 보다보다 열받은 사관의 심정이 드러난다.[100] 선조 대 정치 양상은 한 가지 깊은 의문을 낳는다. 선조 즉위 후 사림들은 정치권력을 얻음으로써, 마침내 긴 세월 주장했던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을 구현할 기회를 얻었다. 이렇게 열린 정치 공간에서, 오랫동안 이념적 동질성을 유지했던 그들은 왜 화해할 수 없는 정치적 갈등으로 빠져들게 되었을까? 본 논문은 일차적으로 선조 8년 ‘동서분당’ 이후 선조 13년까지의 정치적 전개의 양상을 복원하여 이 문제의 해답에 접근하려 했다. 선조 즉위 전후 조정에 진출한 신진사림은 선조8년에서 선조13년 사이에 정치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다. 계기가 되었던 사건들은 몇 가지 공통점들을 가졌다. 먼저, 정치적 갈등의 단서는 주로 이조 전랑이나 삼사 언관들이 제공했다. 또 갈등이 한번 시작되면 몇 달씩 끌면서 확대 재생산되었다. 이렇게 된 배후에는 정치적 리더쉽의 문제가 놓여있었다. 이 시기 조정의 특징은 대신권이 대단히 약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앞 시대가 정치적으로 파행적인 훈척의 시대였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당시 조정에 있었던 누구도 안정적인 리더쉽을 갖지 못했다. 그 결과, 문제에 대한 대응은 대개 집단적이었고, 문제는 해결되기 보다는 증폭되었다. 이 점에서 당시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는 선조였지만, 그는 정치행위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림들 개인 간의 사소한 갈등들이 서로에 대한 의심을 통해서 점차 정치적 갈등으로 증폭되었다. 동인과 서인이 더 이상 화합하기 힘든 사이가 되었을 때, 동인과 구신(舊臣)들이 결합하기 시작했다. 사림을 지배하였던 정치적 이상이 약화되자, 동인은 서인이 아니라 구신들을 선택했다. 바로 이때 사림의 정치는 현실의 정치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선조 12, 3년에 등장한 조제보합론은 이렇듯 구신과 동인이 결합하고, 서인이 사당과 소인으로 규정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다. <선조대 ‘동서분당’ 전개의 초기 양상 : 이이를 중심으로>[101] 앞선 선조 25년 요동을 건너는 것은 필부나 하는 짓이라고 신하들이 비판한 것을 활용해 자신을 병이 들어 흙으로 만든 등신 같은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냥 보면 선조가 아프니까 선위하겠다는 것 같지만 선조의 저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선조를 병이 들어 흙으로 만든 등신이라고 해버리는 불충을 저지르는 것이다.[102] (註 441) 내선(內禪) : 세자(世子)에게 왕위(王位)를 물려 주었으나, 아직 즉위(卽位)의 예(禮)를 행하지 않은 것.[103] 9월 1일부터 6일자 까지의 세자의 상소를 중간에 생략하였는데 선조의 선위 소동으로 인해 광해군은 8월 30일부터 7일까지 매일 아침 대궐에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선위를 거두어줄 것을 요청하였다.[104] 현실에서도 1인자가 죽을때까지 권력을 내려놓기 싫어서 후계구도를 엉망으로 만든 탓에 결국 분쟁이 일어나는 사례는 한국의 수많은 재벌가 왕자의 난을 통해 알 수 있다.[105] 선조의 행위로 신하들이 누구를 따라야 할지 혼란에 빠졌다고 했는데 정작 신하들의 혼란은 그리 크지 않았다. 위에 서술된 대로라면 초기 광해군은 대규모 숙청을 벌이거나 눈치 보느라 소극적인 행보를 보여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광해군 초에 숙청이 있었지만 이는 유영경과 그 일파를 대상으로 하였을 뿐이고 북인 주류, 서인, 남인도 있는 당시 조정에서 유영경 일파는 북인 중에서도 소북, 소북 중에서도 탁소북, 탁소북 중에서도 일부에 불과했다. 유영경은 그에 대한 선조의 총애로 커보여 그렇지 실제로는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손쉽게 날려버릴 정도로 별것 없는 인물에 불과했던 것. 당연하겠지만 신하들 대부분은 대북이 적극적으로 광해군 편이라 그렇지 그렇다고 서인, 남인 등이 영창대군 편이었던건 아니다. 선조 역시도 영창대군을 편애하긴 했지만 건강이 나빠지자 세자에게 선위나 대리를 할 생각이 있다고 한 것이나 어쩄거나 진짜로 광해군에게 왕 자리를 주었으니 진짜 광해군을 쫓아내고 영창대군을 앉히고 싶다는 것보다는 영창대군이라는 무기로 광해군을 압박하고자 했던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당시 사정상 광해군을 쫓아내고 영창대군을 앉힌다고 하면 찬성할 이도 없고...[283] 당장에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숙청한 대표적인 사람은 겨우 유영경과 임해군 정도로 그나마도 임해군은 자기 처신 잘못으로 괜히 의심 사 죽은거고 평소 행실이 워낙 개판이라 당파를 초월하고 임해군을 처단하라고 외친 사람이라 아무 문제가 없었다.[284][106] 계축옥사에서 반역의 수괴로 지목된 영창대군은 폐서인이 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갔고, 결국 그곳에서 만 8세의 어린 나이에 살해되어 비명횡사했다.[107] 처음은 왜적을 정벌했다는 뜻의 정왜공신이었으나 선무공신으로 최종확정된다.[108] 陸贄, 중국 당나라 시대 관료이자 학자.[109] 충무공의 승전장계를 보면 알겠지만 장수와 병사에 이르기까지 그 공을 세세히 적어 보고했으며, 그 보고 과정에서 충무공은 1등, 2등, 3등이라고 순위를 매기지 않았다. 다만 권준과 무의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기간동안 충무공 휘하에서 경상우수사, 충청수사로 승진까지 하였고 전란이 끝난 후에도 주요 요직을 맡고 있었다. 정운은 전란이 터진 그 해 너무 일찍 전사하였고, 배흥립은 끝까지 생존하였으나 어찌보면 수사로 승진은 못하다 보니 조금 묻힌 감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호성공신에 비하면 결코 선무공신의 수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끝내 정운과 배흥립은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110] 선조의 책임 회피용 발언으로 부산 진격을 명한 것은 비변사도, 권율도 아닌 선조 본인이다. 비변사와 권율은 선조의 명을 전달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애초 원균은 본인이 통제사가 되면 부산을 공격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장계를 이미 올렸다.[111] 이미 선조는 선무공신의 수가 많다고 정운과 배흥립을 빼라고 했었고 다시 녹공하라고 말을 바꾸나 최종적으로 정운은 들지 못한다.[112] 이것이 소위 원균옹호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원균의 선무일등공신 근거이다. '그래도 공이 있기 때문에 1등에 선정되지 않았겠냐'는 것이 그 논리인데 실록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 원균은 2등이었다. 그마저도 선조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2등에 녹훈한 것인데 선조의 무한한 원균 사랑과 책임 회피용으로 원균은 결국 1등에 책봉되고 만다.[113] 원균이 비록 1등에 들었다고는 하나 이순신과 권율은 이미 정승의 반열에 올라 두 사람은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이며 원균은 그보다 한단계 낮은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숭록대부로 차이가 있다. 또한 이순신은 선무 1등 공신 3인 중에서도 으뜸인 원훈으로 선정되었다.[114] 최호는 칠천량 해전 당시 충청수사로서 전라우수사였던 이억기와 함께 끝까지 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한 몇 안되는 장수 중 한 명이다. 공신에 선정이 되긴 했으나 최호는 선무공신이 아닌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해서 청난공신에 선정되었다.[115] 문제는 호성공신 중에는 왕조안 신성군, 정원군 등도 있는 등 호성공신의 선정 기준은 굉장히 개판이었다. 호성공신을 봉해도 납득될 만한 사람들만 봉했다거나 최소한의 선을 보아가며 봉했다면 욕을 덜 먹었을텐데 이 신성군과 정원군이 선조가 가장 총애하는 인빈의 아들들임을 생각해보면 그 선정 기준은 굉장히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116] 역사저널 그날 시즌2에서도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포함되었다는 거 하나만으로도 원균에 대한 되도않는 재평가에 들어갔다.[117] 그나마도 왕 눈치 봐서 올린 것. 즉 신하들은 누구나 원균을 1등으로는 죽어도 불가능할 것이라 본 거다. 사실 1등은 고사하고 원균이 공신이라는 것에 책봉되는 것조차 납득이 가지 않았다는 게 당대 문무백관들의 논지였다. 당연한 게 일국의 해군 전체를 아예 씨를 말려버린 짓을 저질렀는데 공신이라면 누가 생각해도 어이 집나갈 노릇이다.[118] 시호는 인조 때 붙여진 것이다.[119] 권응수는 박진과 함께 경주성 전투에서 싸웠고 이정암은 연안 전투의 주인공(이 공으로 이정암은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120] 1602년 4월 공신도감에서 26명을 추려내며 대놓고 겨우 고언백도 들어갔는데 고언백 정도의 공을 세운 장수는 많으니 이대로면 섭섭하고 원통하게 여길 사람이 많을거라 보고했다.[121] 앞서 말했지만 선무공신은 호성공신의 반도 안 된다. 그럼 그렇다고 정운이 원균급 인물로 올라갈 자격이 없는 거냐면 이순신 휘하에서 맹장으로 활약할만큼 대단한 장군이었다. 그런데도 공신이 많다고 못 올려준다는 게 넌센스[122] 무의공 이순신과 권준은 이순신 밑에서 수사로 승진할 정도로 일단 눈에 두드러지는 공을 세웠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전란 후 벼슬도 올랐으니 공신으로 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이유로 당시 원균 휘하에 있었으나 이순신 장군이 아껴 경상 좌수사로 승진까지 했던 이운룡 역시 3등 공신에 봉해졌으며, 수군 출신으로 공신으로 봉해진 마지막 인물은 정유재란 당시 전사한 기효근이 있다.[123] 생각해보면 당연하다할만도 할 것이 선무공신은 선조의 의도대로 수를 최대한 추렸던 만큼 오히려 선무공신에는 공신이 될만한 자들이 들어간 편이고(한 명 빼고) 반대로 호성공신은 수를 최대한 늘이다 보니 별 허접스런 사람들도 다 들어갔을 것이다. 실제로 그 많은 호성공신 중에 현대에까지 위인으로 기억되는 인물은 이항복, 류성룡, 허준, 이원익, 정탁 정도지만 선무공신 중에 왜 이런 사람이 들어갔냐 싶은 사람은 원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호성공신이 마냥 폄하받을 사람들은 아니다. 임진왜란 초기만 해도 나라와 임금을 버리고 도망치려던 사람도 많았다고 하니 왕을 따라 의주까지 따라간 이들이 비난받을 사람들은 아니고 실제로 마냥 선조에게 예스맨인 것도 아니라서 아니다 싶을때는 선조를 비판하기도 했다.[124] 다만 함경도에서는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과 조선인 순왜들의 횡포로 나중에는 정문부의 북관 대첩으로 대표되는 의병 투쟁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다.[125] 물론 이는 조선 시대에 역모가 아닌 비행을 저질렀다고 종실의 일원, 그것도 왕의 아들을 중형에 처하는 임금은 거의 없다는 것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건 명군, 성군 소리를 듣는 태종, 세종, 문종, 성종 등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역대급 군왕들조차 왕실은 철저하게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함을 당연하게 여겼다. 과실을 저질러도 최대한 보호[285]하고 왕족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이는 단순한 법적,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전근대 전제 왕조 국가들에서 왕실의 힘과 위신은 곧 국왕 자신의 권위와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역모가 아닌 이상 신하들의 말에 따라 왕자를 처벌하는 선례를 만들 국왕은 없었다. 예외라고 해야 영조 정도인데, 이쪽은 성격이 워낙 유별난데다 세자와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세손이라는 확실한 대체재가 존재했다. 심지어 신하들은 제발 왕세자를 핍박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간언을 올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영조의 이런 행보는 왕위 계승자가 극히 귀해지는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또한 영창대군처럼 역모를 저지르지 않아도 정치적 위험 인물의 경우 왕에 의해 숙청되기도 했다.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되던 시기에 자신 같은 신세에 이른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126] 허나 광해군은 선조나 인조만큼 평가가 나쁘지는 않고 긍정적 평가도 오르고 있다..현재는 평가가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고,광해군이 영창대군,인목왕후 사건이랑 궁궐 공사만 안 했으면 병자호란을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전 왕이랑 다음 왕이 지만 치사하게 도망치고 죄없는 백성들만 죽게 했기에....[127] 그 애비도 친국을 자주 실시하며 옥사를 즐기는 등의 가학적이고 잔악한 모습을 보였다.[128] 1위는 영조이나 영조는 재위 기간이 광해군의 3배 이상인, 조선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임금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실제 1위는 광해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29]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기를 기점으로 보면 선조의 나이 42세,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이 단명한 왕들을 빼면 보통 50대에 죽었음을 생각해 보면(선조 본인도 50대에 죽었다.) 책봉할 시기가 된 건 맞았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130] 단 이것은 동양사나 일반인의 기준일 뿐 서양사나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들은 다르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눌 수 없다는 진리, 영국의 유명한 왕 리처드 1세도 본인의 아버지를 치고 나서야 왕이 된 것을 보면 인성 이전에 권력이라는 무서움이 있다. 즉 단순한 사항으로 아들이니 인정하는 것이 아닌 권력이라는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 조선 초기 태조태종의 관계가 훗날 화해할 때 까지 험악했고, 훗날 아들과 원수를 진 흥선 대원군 같은 사례도 있었다.[131] 실제로 재위 초반 4년까지는 괜찮았다. 박시백화백 광해군평가[132] 여담으로 훗날 영조는 한술 더 떠서 정비 정성왕후를 왕비 대우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겨우 딸 하나만 낳은 숙의 문씨가 자신보다 품계도 높고, 세자인 아들과 여러 옹주들까지 낳은 영빈 이씨에게 대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조차도 내명부 수장이자 왕비인 정성왕후가 아니라 국왕인 영조에 대한 발언권이 강했던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직접 해결해야 할 정도로 정성왕후는 왕비 대우를 영조에게 못 받다시피했다.[133] 신성군 사후 눈치 빠르게 광해군의 편에 붙으면서 광해군과 사이가 좋아지긴 했지만, 광해군 입장에서 인빈 김씨는 어렸을 때부터 본인을 아끼고 키우며 친아들처럼 여긴 적모 의인왕후만큼의 애정이나 친밀도는 없었고 애초에 신성군 생전까지는 본인을 견제했기에 그녀의 속내는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결국 이를 반증하듯 인빈 김씨 사후 인빈 김씨의 아들들도 광해군의 숙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134] '죄가 있는 놈이긴 한데 불쌍하니 은전을 베풀어주자' 정도가 되겠다.[135] 애초에 양녕대군도 순화군과 임해군에 비교하면 말썽이 거의 천사였을 정도이다물론 부정적 평가가 다수나 적어도 남의 여자를 들여오거나 공부를 내팽게치는 것으로 그쳤지,저딴 식으로 연쇄살인을 하진 않았다.[136] 당연하지만 1인 독재 당이 정권을 장악하면 비판을 할 수 없게 되니 건전성이 몹시 악화된다.[137] 거기에 이순신을 견재하려고 똥별 원균을 중용하다가 조선수군 전체를 말아먹고 정유재란까지 확전하여 나라를 멸망직전으로 몰아가는 등 공과 과가 너무나도 극명하기에 이런 극과 극인 결과물 때문에 '선조가 뽑은 명신보다 죽인 명신이 더 많다'며 악평하는 사람도 있다.[138] 정작 이 나인들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바로 꼬리를 내리고 영창대군이 역모에 휘말리자 자신들이 언제 인목왕후의 나인이었냐는 듯 있지도 않은 거짓 고변을 하면서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139] 그나마 인목왕후의 가장 어린 남동생 하나가 살아남아 완전한 멸문은 피했다.[140] 이쯤 되면 인목왕후는 그 성격상 엄격한 조선 왕비 간택 과정에서 진작 걸러져야 될 정도로 수준 미달인 인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비는 정치적 지위이기도 하기에 성격만 좋아서 되는게 아니고 눈치도 빨라야 하며 이에 따른 사회성도 좋아야하고 의외로 선량한 인성 자체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인목왕후의 행적을 보면 글에 조예가 깊고 이에 대한 재능도 있으며 유영경과 달리 광해군의 왕위를 인정하는 교서를 내리고 휘하의 궁인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눈치없는 행동 몇 번 벌인 것을 제외하면 딱히 권력을 탐하거나 광해군을 건드리고 도발한 행적은 없기 때문에 아예 지능이 낮거나 인성이 악랄한 건 아니었다. 문제는 왕비에게는 평범한 사람 이상의 눈치와 이에 걸맞는 처신이 필요했고 인목왕후처럼 딱 평범한 사람 수준의 눈치없는 행동이야말로 과거의 전제군주국은 물론 현대의 입헌군주국에서도 왕비로서 부적합하고 문제가 많은 자질이다. 조선사의 다른 왕비들도 인목왕후처럼 눈치없이 굴거나 위험한 돌발행동을 하는 경우는 없었으며, 그에 버금가는 패악을 부린 폐비 윤씨도 정황상 산후우울증을 극심하게 앓기 전까지는 정상이었다.[141] 선조왕릉의 카카오맵 별점은 왜 1.4인가 (이명지의 IT뷰어)[142] 통신사로 왜에 다녀오고 전쟁을 우려하는 황윤길과 상극의 의견을 낸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후술할 선조의 문제점상 분명 책임을 김성일에게 모두 돌려 참형을 명할 수도 있었는데 주변의 옹호가 있었다고는 하나 결국 그에게 기회를 준건 선조 본인이었다.[143] 영의정 윤원형이준경으로 교체시킨[286] 6일 만에 파직시키고[287] 좌의정 심통원을 사직시켰다.[288] 심지어 이즈음에는 명종의 처남인 심의겸[289][290]을 위시한 명종의 족인 청송 심씨 외척마저도 반강제적으로 사직당한 심통원을 제외하면 친사림적 성향이 뚜렸했다.[291][292][293][294][295][296][144] 영의정 이준경, 우의정 이명을 명초하여 복상(卜相)하였다. 【세 사람을 뽑았다. 곧 윤개·홍섬·권철이다.】 (명종 21년 1월 11일)[145] 이명을 의정부 좌의정으로, 권철을 우의정으로, 이탁(李鐸) 【기상이 의연하고 청탁이 번거롭지 않으므로 조정이 믿고 의지하였다.】 을 호조 판서로, 박충원(朴忠元)을 병조 판서로, 조언수(趙彦秀)를 공조 판서로, 심인겸을 남부 주부로 삼았다. (명종 21년 1월 12일)[146] 종래의 조선시대 당쟁에 대한 연구는 당쟁 자체에 대한 해명보다는 그것의 평가에 치중했다는 느낌이 있다. 처음에는 주로 부정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후에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붕당정치론’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현상으로서의 당쟁 그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객관적 인식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일 것이다. 선조 초 조정에서 나타난 두 가지 정치적 현상은 사림의 집권과 당쟁의 발생이다. 정치구조의 측면에서 보면 구체제는 대신권의 전횡과 언관권의 파탄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사림의 집권 그 자체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문정왕후의 사망과 함께 시작된 구체제에 대한 공격은 기존의 대신권과 언관권의 심각한 불균형이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이동은 균형점을 가볍게 지나서 또다시 극단적 불균형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사림세력의 집권 이후 조정은 이전보다 덜 부패했을지 몰라도, 국정 운영 및 현안에 대한 해결 능력이 더 향상되거나 효율적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림의 집권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나타난 ‘동서분당’은 그러한 비효율이 표현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이이의 보합론과 변통론이었다. 확실히 이 두 가지 개념은 당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안이었다. 하지만 이이 자신이 나중에 말했듯이, 그의 제안이 현실의 추이에 기반한 방법이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조 대 당쟁의 양상과 전개 양상 : 이이를 중심으로>[147] 백관의 직전은 진작 없어졌는데 거승의 위세는 그대로 있으며, 육경으로 있는 사람들은 황공히 죄를 기다리는데 승려들은 기뻐 날뛰며 서로 축하하니 매우 성덕에 누가 됩니다. (명종 11년 6월 9일)[148] 특정수입(직전수조)-특정지출(녹봉) 연계해체[297][149] 嘉 註 011(註 011 “청주본”에는 행을 바꾸지 않았다.)靖三十四年正月日 註 012(註 012 ‘청주본’에는 “二十日”로 되어 있다.) 崇政大夫 行兵曹判書 兼知經筵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 成均館事 臣 鄭士龍 謹序。 (經國大典註解 經國大典註解 前集 經國大典註解 前集 卷首 經國大典註解 前集 序)[150] 다.≪수교집록≫ ≪경국대전≫이 시행된 후 성종 24년에≪대전속록≫을, 중종 38년에≪대전후속록≫을 간행하였고, 명종 9년(1554)에는≪經國大典註解≫가 이루어짐에 따라 명확한 통치의 기본법제가 완비되었으며, 법조문의 해석·적용상의 疑義도 밝히게 되어 법의 충족성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李珥를 비롯하여 인조대의 崔鳴吉, 숙종초의 朴世采 등이 變法更張論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법의 개혁과 재정비를 위한 동기 유발과 깊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더구나≪대전후속록≫의 시행 후 새로운 법이 제정되면서 구법을 변통하는 법조치가 이루어져 많은 법이 계속 쌓이고 상호 저촉하여 관리들이 법을 해석하고 적용함에 혼란을 가져와 법령집 편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대전후속록≫의 간행 후 15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법령의 정비가 없었으니 그간의 사정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며, 왜란과 호란은 법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5.≪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 > 6) 법전편찬의 계승과 법사상의 변화 > (1) 속록 등 법령집의 편찬)[151] 특히 사찬(私纂) 주해서에 머물러 있다가 전란 중에 실전될 뻔한 《후집(後集)》[298]을 공공기록물로 보존조치한 것도 평가할만 하다.[299][152] 이외에도 명종 대에 수교들은 인조 대에 《각사수교(各司受敎)》[300]로 정리되었고 선조[301]광해[302][303] 부자는 사실상 입법실적이 전무에 가까웠기 때문에[304][305] 중종 대에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이후 조선은 명종 대에 마무리된 법체계와 명종 대에 발령된 수교로 반세기 이상을 버틴 셈이다.[153] 공납제도와 관련해서는 명종 대에 군현에서 현물로 거두어들이던 공물을 쌀이나 포목으로 거두고 이를 사주인 등에게 지급하여 공물을 마련하던 방식인 사대동(私大同)이 등장했고[306] 이에 대응해서 중앙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시혜적 목적의 공물작미(貢物作米)도 명종 대에 최초로 관찰된다.[307][154] 선조 대에 발령된 입법실적이 처참한 것은 국정에서 핵심적인 이호예(吏戶禮) 삼전(三典) 통틀어 후대에 쓸만한 조(條)가 꼴랑 9개(《이전(吏典)》 3개;《호전(戶典)》 5개;《예전(禮典)》 1개)에 불과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308] 반면 《수교집록(受敎輯錄)》에 등재된 명종 대에 발령된 조(條)는 50개(《이전(吏典)》 7개;《호전(戶典)》 14개;《예전(禮典)》 29개)이다. 전란 전에 기록부족을 거론할 수도 있겠으나 《병전(禮典)》 군제조(軍制條) 수교(受敎)를 보면 41개인 이 항목에만 무려 12개를 선조 대에 박아 놓았으며 전란 전후 가릴 것이 없이 년도(4년;4년;6년;13년;13년;15년;20년;24년;35년;37년;37년;38년)도 굉장히 꾸준하고 고르게 분포되었다. 역대국왕 통틀어도 압도적인 1위인데 한마디로 관심 있는 부분에만 몰입했다고 할 수 있다.[155] 이는 <각사수교>를 책으로 묶은 관서는 승정원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12)(12)(具德會, 1997, <<各司受敎>.<受敎輯錄>.<新補受敎輯錄> 解題> 서울대학교 규장각 영인본 참조.)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졌던 '丙子'년은 1636년(인조 14, 崇禎 9)으로 보이는바,(13)(13)(이 '병자'년조는 앞의 '萬歷 元年 癸酉'(1573, 선조 6) 기사의 흐름을 잇는 것으로 보면 萬歷 4년(1576, 선조 9)가 되겠고, 뒤의 '己巳'(인조 7, 崇禎 2)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면 1636년(인조 14, 崇禎 9)가 될 수 있다. 그 내용으로 보건대 <각사수교>를 필사한 뒤에 이와 관련되는 내용을 추기한 것으로 볼 수 있겠으며, 그렇게 본다면 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명종 연간의 <각사수교>를 필사하고 거기에 추록을 추기하여 책으로 묶은 것으로 보인다. 명종 이후 선조, 광해군 연간에는 수교를 정리하여 輯錄하려는 논의가 이루어졌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후기 法編纂推移와 政治運營의 변동>, 177)[156] 성종25년 vs 선조25년 두개의 태평성대[157] 이황은 주희 철학의 계승자이다. 리학 발전사의 입장에서 중요한 점은, 이황이 주희의 어떤 사상을 다시 서술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희의 사상을 어떻게 발전시켰는가에 있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이황은 주희의 철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였으며, 주희의 철학이 지닌 어떠한 모순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인식하였다.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까지도 제시함으로써, 주희의 철학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던 논리적 연결 고리를 드러내 주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관점에서 볼 때, 주자학의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 가는 과정이 있었다. 명대 중기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생명력 있는 주자학자를 다시는 배출해 내지 못했다. 주자학이 명대 중기에서 청대까지 여전히 정통 철학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이 당시 주자학은 중국에서 날로 생명력을 잃어가는 철학이었다. '심학'의 성행에 때맞춰, 가정嘉靖 연간 이후의 주자학은 진일보하여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활력을 조선에서 얻게 되었다. 퇴계 철학의 출현은 조선 성리학의 완전한 성숙을 표명해 주는 것임과 함께 주자학의 중심이 이미 조선으로 옮겨져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었으며, 그 뒤 동아시아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이미 마련하고 있었음을 표명해 주는 것이다. (<송명성리학>, 475)[158] 전라 감사가 치계(馳啓)하였다. "영암(靈巖)·강진(康津)·해남(海南) 세 고을은 양영(兩營) 사이에 끼여 있는 데다가 제주가 곧장 갈 수 있는 길목의 요충지여서 공부(貢賦)가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많습니다. 특히 을묘 왜변(乙卯倭變)을 겪은 뒤로는 방비에 대한 제반 일이 매우 많아 백성들이 심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세 고을에는 녹미(鹿尾)·녹설(鹿舌)·쾌포(快脯)가 생산되지 않으니 장록(獐鹿)이 많이 생산되는 제주에 옮겨 정하게 하소서. 교서관의 책지(冊紙)와 장흥고(長興庫)의 견양지(見樣紙)는 정공 도감(正供都監)018)[309] 으로 하여금 일이 덜한 내륙 지방으로 옮겨 마련하게 하소서." (선조 4년 9월 12일)[159] 선조는 조선왕조에서 처음으로 방계(傍系)에서 왕이 되었던 만큼, 즉위 직후의 왕권의 정당성은 취약했다. 그런 그가 오랫동안 왕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신세력으로 등장한 사림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적절하기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선조 이전의 국왕들은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주도권을 유지해야겠다는 의지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군주와 신하가 한 몸이자 통치의 주체라는 ‘군신공치(君臣共治)’의 관점에서 입각하여 신하들 간의 반목을 허용하지 않았다.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쟁의 기원 혹은 분당의 고착화와 관련하여 주목해야할 또 다른 점은 동인과 서인이 당파를 형성하여 전개된 투쟁국면에서 선조가 각 당파를 《대명률》에 따라 처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도리어 ‘이이·성혼의 당’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당파를 처벌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당파를 이용한 것이다. 그 결과 당파의 형성을 죄악시하고 처벌하는 법 규정을 사문화(死文化)시켰다. 당쟁이 정치적 관행으로 허용됨으로써 붕당정치의 길을 열었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160]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준경(李逡慶) 등이 건의하여 국(局)을 개설하고 상밀하게 의논함으로써 대납(代納)의 간람(奸濫)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청에 따라 설치한 것으로, 삼공(三公)이 주관하고 식견 있는 조사(朝士)를 선임하여 낭속(郞屬)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폐단을 없애고 백성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설치했던 것인데, 상의 뜻이 전례를 따르기에만 힘쓰고 대신들 역시 경장(更張)을 싫어해서 단지 문서로 필삭(筆削)하며 감정(勘定)만 하였으므로, 결국 아무 이익도 없었다. (선조수정 3년 11월 1일)[161] 다시 대사간으로 이이를 부르자 이이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약 신이 쓸 만한가의 여부를 아시고 싶으시다면 마땅히 시사(時事)에 대하여 물어 보소서. 그리하여 신의 말이 쓸 수가 없다면 다시 부르지 마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사직 상소를 보았다. 간장(諫長)006)(註 006)(간장(諫長) : 대사간.) 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어서 이에 본직을 체직한다. 그대에게 좋은 의견이 있으면 사실대로 봉서하여 아뢰라." 하자, 이이가 드디어 상소하기를, "성비(聖批)에 ‘그대에게 좋은 의견이 있으면 사실대로 봉서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받들어 보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신은 성은을 받고 감격하여 순국(徇國)할 뜻을 갖고 있었으므로 보잘것없는 저의 충심을 다 바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어떠한 형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신은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성상께서 넓으신 도량으로 후하게 용서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말을 올리게 하시는 데이겠습니까. 신은 이제 간담에 쌓인 회포를 모두 짜내어 성상의 뜻에 저촉된다 하더라도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도(道)에서 찾아보소서....그리고 연산군이 정했던 공안(貢案)같은 것은 바로 임사홍(任士洪)이 설치한 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 임사홍같은 무리가 만들어 놓은 폐법(弊法)을 반드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개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가령 오늘날 이 잘못된 전례를 고치지 않는다면 비록 성주(聖主)가 위에서 걱정하고 훌륭한 정승이 아래에서 몸이 지치도록 충성을 다한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못살게 되는 폐해를 구제할 길이 없어서 마침내는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를 일반 가정에 비유해 보건대, 그 자손이 선인(先人)이 물려준 큰 집을 지키면서 오래도록 중수하지 않아서 들보와 기둥이 썩고 기와와 벽돌이 깨져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고 그 형세가 장차 무너지게 되었다면, 어찌 팔짱을 끼고 앉아서 그 쓰러져 가는 현상을 보고만 있는 자를 계술을 잘한다고 하고 반대로 깨진 기와를 바꿔 끼우고 썩은 기둥과 들보를 갈아내는 자를 잘 유지하여 지키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신이 이미 성상의 물음을 받들었으므로 감히 의견을 다 아뢰지 않을 수 없었고 충정에 복받쳐 말을 억제할 줄 몰랐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사랑을 내리시어 살펴 받아주소서." 하였다. 상이 충성된 바른 말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고 답하였으나, 별로 채택하여 사용한 실상은 없었다. 정원이 다시 거두어 등용하기를 청하니, 상이 불렀다. 그러자 이이가 다시 상소하여 사양하였는데 얼마 후에 다시 대사간에 제수하였다. 【이때에 간관이 자주 갈린 것을 또한 볼 수 있다.】 상이 소명(召命)을 사양하는 이이의 상소를 보고 즉시 이이를 대사간에서 체직하라고 명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이이가 전 날의 소명만을 사양하였고, 아직 새로 제수한 간관은 사직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스스로 처치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체직시켜야 합니다." 하고, 간원과 홍문관이 모두 차자를 올려 논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찌 이이 한 사람을 위하여 오래도록 간관의 직책을 비워놓는단 말인가." 하였다. 이것은 상이 이이가 교격(矯激)하여 사직하고 물러간 것을 혐의롭게 여겨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뒤 수일 만에 다시 이조 참의에 제수하였으나 이이는 또 사직하고 오지 않았다. 【성혼이 그 상소를 읽어보고 ‘참으로 이른바 곧은 말로 극진히 간한 경국 제세의 글이다.’ 하였다.】 (선조수정 11년 5월 1일)[162]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아뢰었다....형세가 이러한 데에 이르렀으니 비록 어진 수령(守令)이라도 감히 급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민생(民生)은 날로 곤경에 빠지고 요역(徭役)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곤경에 처하게 된 원인은 해결해 주지 않고서 오직 급재를 하지 않는 것만이 나라를 저버리지 않는 길이라 한다면 적자(赤子)들이 더욱 지탱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인인(仁人)·군자(君子)로서 어찌 차마 할 짓이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무엇보다도 공안(貢案)을 개정하여 전역(田役)으로 하여금 10분의 7∼8 정도를 절감받게 한 후에 경우에 따라 가세(加稅)할 것은 가세하도록 하여 국용에 여유가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끝내 공사간에 풍족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선조 16년 2월 15일)[163] 이이를 인견했을 때 아뢴 일이 무엇이었는지 정원(政院)이 취품(取稟)하니, 답하였다. "변장(邊將)의 식량에 대하여 의정(議定)하였고, 목장의 말들을 관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되 우선 한 곳을 선정하여 시험해 보도록 비변사에서 논의하여 아뢰게 하자는 것, 의서 강이(醫書講肄)와 천문 습독(天文習讀)을 태거(汰去)하는 건은 해조(該曹)에서 승전(承傳)을 받아 처리할 것, 공안(貢案) 태거 논의와 설국(設局)의 개정 건은 정2품 이상이 헌의(獻議)하여 결정할 것, 군적(軍籍)의 고헐(苦歇)을 균등하게 정하는 일을 기관을 설치하고 전임하여 처리하도록 할 것, 승전을 받들어 군현(郡縣)을 합병(合倂)할 것 등이었는데, 가볍게 처리할 것들이 아니어서 내가 다시 헤아려 보아야 하겠다." (선조 16년 윤2월 24일)[164] 이이(李珥)가 시폐(時弊)를 들어 상소하니, 답하였다. "내가 우연히 경이 몇 해 전에 올린 상소문을 보던 중 마침 경의 상소문이 올라왔는데 예나 이제나 정성스럽도다. 이 못난 임금을 잊지 않고 있는 경의 고충(孤忠)에 대하여 매우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나라 일은 어진 대신(大臣)이 당연히 맡아 해야 할 것이고, 남행(南行)이 대간(臺諫)이 되는 일에 있어서는 기왕의 후회스러움은 어차피 뒤쫓아갈 수 없는 일이지만 한 번도 너무 후회스러운데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를 수야 있겠는가. 내 이미 뜻을 결정하였다. 공안(貢案) 건은 조정과 논의하면 논의가 합일되지 못할 것이라 가볍게 고치지 못하고 있는 일이지만, 설사 고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다사(多事)한 때에 한꺼번에 거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군적(軍籍) 건은 본조(本曹)가 이미 명령을 받들었으니 나머지는 경이 설시(設施)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주현(州縣)을 합병(合幷)하는 건은 그것이 과연 과매(寡昧)하고 경천(輕淺)한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다른 폐단을 남길까 염려스러워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겨 변경하지 못하였던 것인데, 경이 권하고 청하여 마지않으니 한번 시험해보겠다. 감사(監司)를 구임(久任)하는 건은 그 제도를 창설하기 어려워 지금까지 미루어왔던 것이나 지금 마땅히 경의 의견을 따라 우선 양남(兩南)에서 시험해볼 것이고, 서얼(庶孽)과 천인(賤人)을 허통(許通)하는 건은 지난 사변 때 경의 헌책(獻策)에 따라 즉시 시행을 명하였던 것인데 그때 그것을 논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다시 비변사에 물어 헤아려본 후 마련하여 거행하도록 하겠다." (선조 16년 4월 14일)[165] 조칙(詔勅)을 맞이하는 습의(習儀)를 1차는 8일에, 2차는 13일에 할 것으로 개정하여 부표(付標)해서 아뢰었다. 상이 우성전(禹性傳)이 아뢴 바에 따라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하였다. (선조 5년 9월 30일)[166] 며칠 전에 수찬 우성전(禹性傳)이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할 것을 청하여 상이 따랐는데, 오늘 대간이 혁파하지 말고 시의(時宜)에 합당한 것을 가려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 5년 10월 6일)[167] 헌부가 아뢰기를, "공판(公辦)에 관한 일은, 그 폐해를 논한다면 반드시 개혁해야 할 것인데 고루한 소견에 견제되고 있습니다. 신들이 사옹원(司饔院)·예빈시(禮賓寺)·풍저창(豊儲倉)이 궐내(闕內)·궐외(闕外)에서 공궤하는 식례(式例)와 횡간(橫看)132)[310] 및 《대전(大典)》133)(註 133)(《대전(大典)》 :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약칭.) 의 본의를 살펴보니, 사옹원 옹인(饔人)의 일은 궐내의 공궤를 맡는 것이고 예빈시의 직무는 빈객(賓客)의 연향(宴享)에 대한 공궤를 맡는 것이었습니다. 이밖에 크게는 육조(六曹)부터 작게는 소각사(小各司)의 당상(堂上)과 참상(參上)·참하(參下)에게 지공(支供)하는 미태(米太)·염장(鹽醬)·어염(魚鹽) 따위는 나누어 주는 데 정수가 있고 차등이 있으나 본아문(本衙門)이 익혀 장만하여 공궤한다는 글이 따로 없으니, 법을 세운 당초에는 필시 중국에서 월봉(月俸)으로 주는 것을 본떠서 각각 스스로 공궤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공판의 창설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백성을 해롭게 하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첫째, 폐해가 백성의 목숨에 미치는 것입니다. 각사(各司)의 음식을 전복(典僕)에게 장만하도록 책임지우는데 주인이 항상 먹는 음식물을 바치는 이외에 유연(遊宴)에 드는 것과 영전(迎餞)에 드는 것을 제멋대로 외람되이 요구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전복이 파산하여 떠돌게 되고 사주인(私主人)이 멋대로 탐학을 부리는 것은 형세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공판을 없앤다면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그 이로움이 어찌 넓고도 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이조(吏曹)가 생각을 국가에 두지 않고 사람들의 청탁에 따라 구차하게 빈 벼슬자리에 채울 것만을 생각하는 것에 대해 논하고 인하여 그 사례(事例)를 거론한 다음 파면하기를 청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고 공판에 관한 일은 대신에게 의논하여 조처하겠다고 하였다. (선조 6년 9월 26일)[168] 사헌부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공판(公辦) 1가지 일은 온갖 폐단의 근원이 되고 민생들의 모두(蟊蠧)155)(註 155)(모두(蟊蠧) : 해충.) 가 되는데, 우물쭈물하여 과감히 개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성명(聖明)의 때를 만나 예의(銳意) 경장(更張)해서 오래 되었던 큰 폐단이 하루아침에 통쾌하게 고쳐졌는데, 다만 자기만 편하려고 생각하는 인정이 마침내 싫어하고 괴로와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시행한 지 한 해도 못되어 갑자기 혁파하려는 생각을 하여 세우자마자 곧 혁파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정치하는 체통이겠습니까. 해조로서는 공판을 할 때에 비록 쌀을 주지 않더라도 본시 본사가 공급해 주는 것이 있으므로 전복(典僕) 및 사주인(私主人)156)(註 156)(사주인(私主人) : 지방에서 서울에 와 벼슬하는 사람들이 묵던 사삿집.) 에게 마련하도록 하면 되는데, 상례의 식사 이외에 놀이에 쓸 거리나 영접하고 전송할 때의 차림 따위를 멋대로 외람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의논에 흔들리지 말고, 국고(國庫)가 풍족하면 단지 조종조(祖宗朝)의 횡간 규정에 의하여 영구히 가공(家供)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가공에 관한 일은 공판을 개혁함으로 인하여 도리어 새로운 폐단을 일으키게 되었다. 여러 차례 다시 의논하도록 명했지만 좋은 계책은 보지 못했다. 혹은 마땅히 도로 그만두어야 한다고도 하고 혹은 구차한 의논만 올리고 있으므로 내 마음이 자못 쾌하지 못하다. 지금 계사(啓辭)를 보건대 횡간대로만 하자고 했는데, 이는 역시 쉬운 일이다. 다만 앞서 호조가 아뢴 것처럼 거행하기 어려울까 두렵다. 그러나 마땅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선조 7년 10월 28일)[169] 특진관 신식(申湜)은 아뢰기를, "기강이 퇴폐하여 아랫사람들이 폐단을 부리고 있습니다. 중국 사신이 나오더라도 소용되는 물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중간에서 폐단을 부리는 일이 끝이 없는 탓입니다. 본디 우리 나라는 부세는 가볍고 공물(貢物)은 많아 민력이 여기에서 손상됩니다. 각 고을의 공물은 각각 사주인(私主人)이 있어 자기네끼리 서로 나누어 점유하여 부자간에 계속 전하고 있는데 본색(本色)의 물건이 좋더라도 10배의 값을 내지 않으면 바칠 수가 없습니다. 을해년168)(註 168)(을해년 : 1575 선조 8년.) 과 병자년169)(註 169)(병자년 : 1576 선조 9년.) 사이에 조정에서 이런 일을 염려하여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두고 사주인을 모두 혁파하였더니, 저들이 그 명맥을 잃자 원망이 분분하였으므로 얼마 안 되어 다시 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의 작폐가 난후에 더욱 심하니 지금 공안(貢案)을 수정할 때에 중간에서 방해하는 일을 통렬히 혁파하여야 합니다. 근래 중국 사신이 또 나온다는데 국가에는 제반 물건이 모두 고갈되었습니다. 본색만 바치게 한다면 민생이 어찌 곤궁에 빠지기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선조 34년 10월 30일)[170] 여러 신하들이 다 아뢰고 나니, 상이 박순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여러 신하가 아뢴 말 중에서 어떤 일이 시행할 만한가?" 하니, 순이 차례로 분석하여 아뢰기를, "경제사 설치 문제는 사유를 갖추어 아뢰지 않았기 때문에 상께서 시행하기 어렵다고 여기시는데 마땅히 이이를 다시 불러 물으셔야 합니다." 하였다. 이이가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창졸간에 그에 대한 말을 자세하게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 뜻을 다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갖가지로 폐단이 쌓여 군왕의 은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으니 반드시 시무(時務)에 마음을 둔 사람을 얻어 한 곳에 모여 서로 대책을 강구해서 시폐를 개혁하게 해야 합니다. 폐단만 다 개혁되면 또한 도로 관서를 혁파할 수도 있으며 관서를 설치하여 오래도록 보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오활하다고 본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맡긴단 말인가? 지난날 정공 도감(正供都監)도 폐단이 있었는데 이것도 폐단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였다. 박순이 아뢰기를, "각사의 관원을 각기 그 관사가 공궤하게 하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선조 14년 10월 16일)[171]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로 왔던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전에는 각 고을의 공물을 목면(木綿)으로 평균하여 사주인(私主人)에게 지급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상납하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전규(前規)에 의거하여 납부할 것을 독촉하고 있지만 목면이 매우 귀하기 때문에 모든 계책을 다 써도 목면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별도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그 물건 값을 계산하도록 신에게 계달하여 변통케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색(本色)으로 상납하게 할 수는 없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전복(典僕) 등이 상사(上司)에 납부할 때 인정(人情)404)(註 404)(인정(人情) : 뇌물.) 을 바치는 것을 고달파하여 이와 같이 남징(濫徵)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외간의 사사로운 의견은 본색(本色)을 그대로 바치게 하되 호조(戶曹)로 하여금 납부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여 사주인(私主人)이 방납(防納)하는 폐단을 없애게 하고, 작목(作木)은 법대로 상납시키는 것이 마땅하며 사주인에게 급부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납의 폐단이 이미 고질이 되었는데, 우상(右相)의 의견은 별도로 차사원을 정하여 스스로 공물을 납부하게 하면 폐단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전에 들으니, 백인걸(白仁傑)이 【인걸은 선조(先祖) 대의 유직(遺直)으로 관직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을 때, 시탄 공물(柴炭貢物)을 자신이 직접 관할하여 납부하였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농간을 부릴 수 없었으므로 양주의 주민들이 공물이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역시 차사원을 별도로 정하되, 이와 같이 한다면 폐단을 막을 수 있겠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인걸과 같은 명사(名士)라면 가능하겠지만 미관 말직에 있는 관리들이야 필시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노비 신공(奴婢身貢)의 경우에 있어서도 차사원을 데리고 온 적이 있었는데, 뇌물에 관한 일 때문에 감당해내지 못하였다고 하니, 매우 해괴합니다." 하였다. 원익이 아뢰기를, "납부하는 자와 차사원을 일시에 상경(上京)시키되 만일 인정을 남징하는 자가 있거든 호조에 호소하게 하여 자연히 규찰(糾察)하도록 하고 법사(法司) 또한 드러나는 대로 바로잡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개 내가 허락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와 같이 올라올 때에는 호조의 당상과 상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원익이 아뢰기를, "별도로 상의하여 잘 처리할 방도를 찾아보았으나 적당한 대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정당한 공사(公事)로써 말한다면 본색(本色)을 가지고와서 납부하는 것이 일에 매우 온당합니다만 형편상 할 수가 없을 따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쪼록 편리한 방향으로 처리하도록 하라." 사신은 논한다. 국가의 기강이 느슨해지고, 나라의 법도 쓸어버린 듯 없어져 해관(該官)은 직무에 태만하고 하리(下吏)는 문서를 조작하며, 중간에서 사주인(私主人)이 일을 저지르는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 뇌물을 핑계하고 크게 해독을 부려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수량이 본색(本色)보다도 더 많으니, 민생(民生)이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익(元翼)은 전하가 마음을 비운 날을 당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폐단을 통렬히 혁파하고 유신(維新)의 정사를 크게 베풀었어야 마땅한데도, 도리어 사세에 얽매여 누적된 폐단을 결연히 제거시키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선조 29년 10월 21일)[172] 간원이 아뢰기를, "공조 참판 허진(許晉)은 아무런 탈이 없이 집에 있었는데 예조가 망령되이 하리가 전하는 헛소문을 믿고서 죽었다는 공사(公事)를 만들었고 심지어는 정원에 올리고 조보(朝報)에 싣기까지 하였습니다. 재신(宰臣)의 생사를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이처럼 전도되게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토록 명하시고 색리(色吏)를 수금하고 치죄하소서. 공물을 방납(防納)하는 폐단이 날로 더욱 외람되어져 본토에서 생산되는 물건이라도 모리배가 먼저 자진 납부하여 본 고을에서 손을 쓸 수 없게 만듭니다. 행여 본색(本色)을 가지고와서 납부하는 자가 있으면 사주인(私主人)들이 백방으로 조종하여 그 물건이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퇴짜를 놓게 하고 결국은 자기 물건을 납부하도록 도모하였으며, 값을 마구 올려 10배의 이익을 취하니 생민의 고혈(膏血)이 고갈되었습니다. 이익의 길이 한 번 열리자 소민(小民)만 다툴 뿐 아니라 세가(勢家), 귀족(貴族)도 공공연히 대납하는 것은 물론 간혹 사대부의 집안에서도 장사꾼과 더불어 납부를 도모하고 이익을 나누면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니 이미 고질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만약 법금을 거듭 밝혀 통렬히 개혁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지금 이후는 각도 관찰사로 하여금 월령(月令)을 상고하여 시기에 임박하여 간품(看品)해서 각별히 선정하게 하고 차사원이 직접 받아오면 해관(該官)이 대감(臺監)과 함께 입회하여 거두어들이되, 그 사이에 간혹 방납했다가 탄로된 자가 있으면 조관(朝官)은 장오죄로 논하고 장사꾼은 법전에 따라 전가 사변(全家徙邊)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 40년 10월 3일)[173] 광해군 시기는 경기도 외에도 최초로 임시적인 공물작미(貢物作米)들이 광역단위로 시행되기도 했는데 선조 40년 정미년에 이루어진 공물작미(貢物作米)의 근거라고 알려진 기사[311]의 정미년은 광해 9년 정사년의 오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즉 광해 9년 정사년에 충청전라 해읍에서 공물작미(貢物作米)가 실시된 것이다. 이충(李沖)은 선조 대에 호조판서가 아닌 광해 대에 호조판서이고 병진년은 정사년 바로 전해이다. 병진년 이후 납입할 충청전라 해읍의 공물을 정사년에 작미(作米)해서 납입할 것을 광해군이 결재했다는 기사이다. 광해군 의문의 1승 이충(李沖)이 호조판서로 있을때 실제로 했었던 다음의 발언[312]을 참고하라[174] 하는 짓은 딱 중종 같은 암군인데 막상 중종보다 제대로 한 것이[313][314] 많은가 하면 중종이 명군으로 보일 지경이니 그렇지도 않은 것이 문제다.[175] 우부승지 이이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에 관한 것과 재변을 없애고 덕을 진취시키는 것에 대한 설을 극진히 아뢰었다. 그 소에, "신은 삼가 아룁니다. 정사는 시의(時宜)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실공(實功)을 힘쓰는 것이 중요하니, 정사를 하면서 시의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적(治績)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오늘 한 가지 계획을 진언하여 명목 없는 조세(租稅)를 없앨 것을 요청해 보아도 각 고을의 세금 징수는 여전하고, 다음날 한 가지 일을 건의하여 전호(田戶)의 부역(賦役)을 고르게 할 것을 요청해 보아도 호족(豪族)이 부역에서 빠지는 것은 전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선상(選上)을 줄인 것은 공천(公賤)을 소복(蘇復)시키기 위한 것인데도 치우치게 고통을 받은 자들은 예나 다름없이 떠돌아다니고, 방납(防納)을 금한 것은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도 뇌물을 받으며 백성을 갈취하는 자들은 더 심하게 뛰고 있습니다. 탐욕을 부리는 관원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면 그 후임자가 반드시 앞 사람보다 훌륭한 것도 아닌데 공연히 마중하고 전송하는 폐나 끼치게 되고, 변장(邊將)을 가려 보낼 것을 청하면 인망(人望)이 두터운 자가 반드시 신진(新進)보다 우수하지도 않은데 도리어 방자하여 조심성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 밖에 훌륭한 명이 내려지고 아름다운 법이 반포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주현(州縣)에 그저 몇 줄의 문서 쪽지만 전달할 뿐, 시골 백성들은 그것이 무슨 일인지조차 모릅니다....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에는 그 요강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심을 열어 뭇 신하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공안(貢案)을 개혁하여 지나치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애는 것이고, 셋째는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스런 풍조를 개혁하는 것이고, 넷째는 선상(選上)의 제도를 바꾸어 공천(公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고, 다섯째는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이른바 ‘공안(貢案)을 개혁하여 심하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앤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조종조에서는 쓰임새를 매우 절약하여 백성들에게 거두는 것도 매우 적었는데, 연산군(燕山君) 중년에 이르러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바람에 일상적인 공물로써는 그 수요를 충당하기에 부족하게 되었으므로, 공물을 더 책정하여 그 욕망을 충족시켰던 것입니다. 신은 지난날에 노인들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듣고도 감히 그대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정원에서 호조의 공안을 가져다 보건대, 여러 가지 공물이 모두 홍치(弘治)010)(註 010)(홍치(弘治) :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신유년011)(註 011)(신유년 : 1501 연산군 7년.) 에 더 책정한 것을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었는데, 그때는 바로 연산군 때였습니다. 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안을 덮고 탄식하기를, ‘이럴 수가 있는가. 홍치 신유년이라면 지금부터 74년 전이니, 그 간에 성군(聖君)이 왕위에 있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현사(賢士)가 조정에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런 법을 어찌하여 개혁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그 까닭을 추구해 보건대 그 70년 동안은 모두 권간(權奸)들이 국사를 장악한 때로서 두세 명의 군자가 간혹 조정에 있었다고는 하나 뜻을 펴보기도 전에 사화가 꼭 뒤따랐으니, 이에 대하여 논의할 겨를이 어찌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그 일을 오늘날에 기대하는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물산(物産)은 수시로 변하고 백성들의 재물과 전결(田結)도 수시로 증감하는 것인데, 공물을 나누어 책정한 것은 바로 국초(國初)의 일이었고 연산군 때에는 다만 거기에 더 늘려 책정한 것일 뿐이니, 역시 시대마다 적절히 헤아려 변통해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에 와서는 각읍에다 바치는 공물이 그곳 산물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어서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고 배를 타고 물에서 짐승을 잡으려 하는 일이나 같게 되었으니, 다른 고을에서 사들이거나 또는 서울에 와서 사다가 바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의 비용은 백 배로 늘어나고 공용(公用)에는 여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민호(民戶)는 점점 줄어들고 전야(田野)는 갈수록 황폐해져서 몇 년 전에 백 명이 바치던 분량을 작년에는 열 명에게 책임지워 바치게 하고, 작년에 열 명이 바치던 분량을 금년에는 한 사람에게 책임지워 바치게 하고 있으니, 이 상태로 나간다면 반드시 그 한 사람마저 없어진 뒤에야 끝장이 날 형편입니다. 오늘날 공안을 개정하자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조종의 법은 가벼이 고쳐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핑계를 대곤 합니다. 그러나 조종의 법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의 곤궁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고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연산군 때의 법이 아닙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일을 파악할 만한 슬기가 있고, 장래의 일을 미루어 알 만한 심계(心計)가 있으며, 일을 잘 처리할 만한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공안에 관한 일을 전담하게 하되 대신으로 하여금 그들을 통솔하게 함으로써, 연산군 때에 더 책정한 분량을 모두 없애 조종의 옛 법을 회복하게 하소서. 그리고 각읍의 물산 유무와 전결의 다소와 민호의 잔성(殘盛)을 조사하고 상호 조절해서 한결같이 고르게 하고 반드시 본색(本色)을 각사(各司)에 바치도록 하면, 방납(防納)은 금하지 않아도 자연히 없어지고 민생은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시급한 일로서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이른바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 풍조를 개혁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재물이 고갈된 것이 오늘날에 와서 극도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공물을 감해 주지 않을 수가 없는데 만약 소비하는 것을 조종의 법대로 하지 않으면, 수입에 맞추어 지출할 수 없게 되어 마치 모난 그릇에 둥근 뚜껑을 덮는 것처럼 앞뒤가 들어맞지 않을 것입니다....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자세히 보시고 익히 검토하시며 신중히 궁구하고 깊이 생각하시어 성상의 마음 속에서 취하고 버릴 것을 결정하신 다음, 널리 조정의 신하들에게 하문하시어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한 뒤에 이를 받아들이거나 물리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전하께서 신의 계책을 채택하신다면 그 진행을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 정성껏 그것을 시행하게 하고 확신을 갖고 지켜 나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보수적인 세속의 견해로 인하여 바뀌게 하지 말고, 올바른 것을 그르다 하며 남을 모함하는 말로 인하여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3년이 지나도록 나랏일이 여전히 부진하고 백성이 편안해지지 않으며 군대가 정예로와지지 않는다면, 신을 기망(欺罔)의 죄로 다스리어 요망한 말을 하는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요순 시대를 만들겠다는 뜻을 볼 수 있었다.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아무리 옛 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하가 있는데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어찌 걱정하겠는가.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다만 일이 경장(更張)에 관계된 것이 많아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다." 하고, 이 소를 여러 대신에게 보여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는 한편, 또 소를 등서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 당시 인심이 불안하던 차에 이이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고서는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선조수정 7년 1월 1일)[176] 또 기록한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상께서 즉위하신 뒤로 형벌이 맞지 않는 일이 드물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백성들의 부역(賦役)이 공평하지 못합니다. 이는 본래 그전부터 행해져 내려온 것이지만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무(時務)를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전일에 올린 이이의 상소에 대해 상께서 답하신 말씀이 매우 권장하고 허여하신 것이므로, 각기 보고듣는 사람마다 모두 감격하였습니다. 소신도 역시 재질과 학식이 이 사람만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만일 이 사람만 하다면 어찌 이처럼 권장받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이번에 이이의 상소로 인하여 공물(貢物)·선상(選上)013)[315] ·군정(軍政)에 관한 일을 강구해서 시행한다면 백성들의 곤고함이 소복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추기(追記)한다. (선조 7년 1월 21일)[177] 또 ‘임금이 백성을 위해 평안하도록 도모하지 못함은 또한 도리어 백성을 학대하는 짓이다.’ 한 대문을 강하고 아뢰기를, "지금의 민생들 고통은 바로 공물(貢物) 및 신역(身役)이 균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마땅히 이이(李珥)의 만언소(萬言疏)대로 변통(變通)하여 병폐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였다. (선조 7년 3월 6일)[178]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민생(民生)이 과거에 비해 어떠한가?" 하였다. 이이가 답하기를, "권간(權奸)이 국정을 담당할 때에 비교해 보면 가렴 주구(苛斂誅求)는 줄어든 듯하지만, 공부(貢賦)와 요역(徭役)의 법이 매우 사리에 어긋나서 날로 잘못되어 백성이 그 폐해를 입고 있으니, 만약 고치지 않는다면 비록 날마다 백성을 사랑하라는 전교를 내려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 8년 10월 24일)[179] 이때 가뭄이 대단히 심하여 농사가 또 장차 흉년이 들게 되었는데 평안·황해 두 도는 더욱 심하였다. 상이 경연에 나아가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흉황(凶荒)이 이러한데 서도(西道)는 더욱 심하다. 기근이 계속된 데다가 병난마저 일어난다면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겠는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모름지기 미리 재력을 축적하여 구제해야 합니다." 하고, 이이가 아뢰기를, "만약 폐단이 되는 법을 변통하여 어려움을 구제하지 않고 다만 곡식을 옮겨 백성을 살리려고 한다면 곡식 또한 이미 절핍되어 옮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이와 같이 위급하니 상께서도 마땅히 변통할 대책을 생각하셔야 하고 모든 경비도 또한 마땅히 재감(裁減)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쓰임새는 별로 늘린 것이 없이 단지 옛 규례만 따르는데도 오히려 부족하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세금의 수입이 매우 많았으나 지금은 해마다 흉년이 들어 세금의 수입이 매우 적습니다. 그런데 경비는 그대로 구례를 따르고 있으니 어찌 절핍되지 않겠습니까. 세금의 수입을 적절히 늘려 정해서 나라의 경비를 넉넉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지만 백성의 생계가 매우 곤궁하여 형편상 더 거둘 수 없으니, 반드시 먼저 누적된 고통을 풀어 민심을 기쁘게 한 다음에 세금을 거두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공안(貢案)은 민가(民家)의 빈부(貧富)와 전결(田結)의 다소(多少)를 헤아리지 않은 채 무원칙하게 나누어 배정하고 또 토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방납(防納)하는 무리가 모리(牟利)를 할 수 있어 평민이 곤궁과 고통을 겪습니다. 이제 공안을 개정하되 민가와 전결을 헤아려 균등한 수량을 공평하게 배정하고 반드시 토산물로 바치게 한다면 백성의 쌓인 고통이 풀어질 것입니다." 하고, 유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이 일은 서둘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얻은 다음에 비로소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형세로 보아 필시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의 휴척(休戚)은 수령에게 달렸고 수령의 근면과 태만은 감사에게 달렸는데, 감사가 자주 바뀌기 때문에 누구나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면서 정사에는 마음을 두려하지 않고 관례에 따라 오가고 있으며, 그 중에 직책을 다하는 자가 있더라도 또한 미쳐 시행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니 모름지기 큰 고을로 감영을 만들어 감사가 그 고을에 머물러 가족을 데리고 가서 다스리게 하여 책임을 맡겨 공효를 독책(督責)하면서 그 직에 오랫동안 있게 하고는 조정의 신하 가운데 법도를 제정해서 다스릴 만한 재간이 있는 자를 특별히 가려서 제수한다면 반드시 그 공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랫동안 맡기면 권세를 잡고 제멋대로 독단할 우려가 없겠는가."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이는 사람을 가리기에 달렸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어찌 가려 보내는 데 합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주현(州縣)이 매우 많이 수령을 정선할 수가 없다. 나는 병합하여 줄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여러 신하가 다 대답하기를, "상의 분부가 매우 지당합니다. 만약 극히 쇠잔한 고을을 병합하여 다른 고을에 붙인다면 백성의 부역이 매우 수월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변혁하는 일은 경솔히 시행하기 어렵다. 나는 고을의 이름은 없애지 않고 한 고을 수령이 두세 고을을 겸임해 다스리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도 자주 변혁한 일이 있었으니 이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 때 국고가 이미 바닥이 나서 이듬해에는 구황할 대책이 없었다. 이이가 그것을 깊이 염려한 나머지 동료와 상의하고 차자를 올려, 나쁜 법을 변통하고 공안을 개정하며 주현을 병합하여 줄이고 감사를 오랫동안 맡길 것을 청하고, 또 어진이를 써서 인재를 진작하게 하고 몸을 닦아 다스리는 근본을 맑게 하며 붕당을 없애 조정을 화목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니 참으로 좋은 말이다. 옛법을 변경하는 일은 경솔히 하기 어려울 듯하다. 마땅히 대신과 의논하여 조치하겠다." 하였다. (선조 14년 5월 24일)[180] 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서도(西道)가 더욱 극심하다. 기근이 겹친데다 병란이 일어난다면 어떠한 계책을 써야 하겠는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미리 재력을 비축하여 구제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이는 아뢰기를, "폐법(弊法)을 변통시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지 않고 단지 곡식만을 옮겨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한다면 곡식 또한 핍절되어 옮길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매우 위태로우니 상께서는 변통시키는 계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경비의 수요도 재량하여 감소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용도는 별로 증가시킨 것이 없이 예전 규례대로 준행하였을 뿐인데도 부족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세입(稅入)이 매우 많았지만 지금은 해마다 흉작이어서 세입이 매우 적습니다. 그런데 경비만은 예전 규례를 그대로 존속해 나가고 있으니 어떻게 궁핍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의 경비를 풍족하게 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헤아려 세공(稅貢)을 더 배정해야 할 것 같지만 민생이 곤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서 부가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쌓인 고통을 해소시켜 민심을 기쁘게 해준 다음에야 조세(租稅)를 거두는 데 있어 적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공안(貢案)은 민호(民戶)의 성쇠와 전결(田結)의 다소를 고려하지 않고 난잡스럽게 분정하였는가 하면 바치는 물건도 모두가 토산물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방납(防納)하는 무리들만이 이익을 취득하므로 백성들만 곤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공안(貢案)을 개정하는 데 있어 민호와 전결을 참작하여 균등하고 공평하게 배정하고 토산물로만 바치게 한다면 백성들이 쌓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 일을 속히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무엇보다도 인재를 얻어야만 폐단을 구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민의 휴척(休戚)은 수령의 현부에 달려 있고 감사는 수령의 근만(勤慢)을 규찰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주 교체되기 때문에 모두가 구차스럽게 세월만 보내면서 정사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개중에는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려는 자가 있기도 하나 그들 역시 어떠한 일을 시행하지는 못합니다. 큰 고을에 감영(監營)을 설치하고 감사로 하여금 그 고을 수령을 겸임하게 하되 가족을 데리고 가서 다스리게 하여 책임을 완성하도록 위임시키되 조정의 신하들 중에 백성을 거느려 다스릴 만한 재주를 지녔거나 공보(公輔)의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별도로 선발하여 제수하면 필시 공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구임(久任)시키면 권세를 부리고 독단하는 폐단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점에 있어서는 인재를 얻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주현(州縣)이 너무 많기 때문에 수령을 정하게 뽑을 수 없다. 나는 병합시켜 줄이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하니, 군신들이 모두 대답하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만일 몹시 잔폐된 고을을 병합시켜 다른 고을에 붙인다면 백성들의 부역이 어느 정도 완화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혁하는 데에는 폐단이 있게 마련인데 경솔하게 거행할 수 없다. 나는 그러한 명칭을 거론하지 않고 단지 한 고을 수령이 두세 고을을 겸하여 다스리게 하고 싶은데 어떠할는지 모르겠다."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도 자주 개혁한 일이 있었으니 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이는 상의 뜻이 재변을 걱정하고 다스려 보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물러나와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폐법(弊法)을 변통시킬 것, 공안(貢案)을 개정할 것, 주현(州縣)을 병합시킬 것, 감사(監司)를 구임시킬 것 등을 청하고, 또 현자를 등용하여 인재를 진작시킬 것, 몸을 닦음으로써 치본(治本)을 맑게 할 것, 붕당을 제거시킴으로써 조정을 화합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보았는데 참으로 가상하다. 구법(舊法)을 변통시키는 일은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는 것인 듯하다. 그러나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고, 소장은 정부에 내렸다. (선조수정 14년 5월 1일)[181] 이이를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하였다가 곧바로 숭정(崇政)의 품계로 올렸다. 이이가 세 번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바로 배명(拜命)하고 얼마 뒤에 봉사(封事)를 올려 시폐(時弊)에 대해 극력 진달하였는데 그 상소의 대략에, "신은 듣건대, 상지(上智)의 사람은 미연에 환히 알고 있으므로 난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스리고 나라가 위태롭기 전에 미리 보전하며, 중지(中智)의 사람은 사태가 발생한 뒤에 깨닫게 되므로 난이 일어나 나라가 위태롭게 된 다음에야 다스려 안정시킬 것을 도모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난이 닥쳤는데도 다스릴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태로움을 보고도 안정시킬 방도를 강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지(下智)의 인물이 될 것입니다....제거시켜야 할 누적된 폐단에 대해서는 지금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우나 어리석은 신이 늘 경연에서 아뢴 것은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수령을 줄이고 감사를 구임(久任)시키는 세 가지뿐이었습니다. 이른바 공안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은 여러 고을의 토지와 인민의 많고 적은 것이 동일하지 않아 더러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데도 공역(貢役)의 배정에 있어서는 그다지 차등이 없기 때문에 고달프고 수월한 것이 균등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대부분 토산품이 아닌 온갖 물건을 모두 마련하여 각 관사에 나누어 바치게 합니다. 따라서 농간을 부리는 폐해가 백성들에게 돌아가 서리(胥吏)들만 이익을 취하고 국가의 경비에는 조금도 보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근래 조세(租稅)의 수입이 적은 것이 북쪽 오랑캐의 제도와 같아서 1년의 수입으로는 지출이 부족하여 늘 전에 저축한 것을 보충하여 쓰게 되므로 2백 년 동안 저축해 온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도 없어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부세를 증가시키자니 민력이 이미 고갈되었고 전례를 그대로 지키자니 얼마 안가서 저축이 바닥날 것이니, 이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공안을 개정하는 데 있어서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 규획(規畫)을 잘 하게 할 것은 물론, 단지 토산품으로만 균평하게 배정하고 한 고을에서 바치는 것이 두세 관사에 지나지 않도록 한다면 원액(元額)의 수입은 별로 감소되는 것이 없으면서 백성의 부담을 10분의 9쯤 줄일 듯싶습니다. 이렇게 민력이 여유를 갖게 해서 백성들의 심정을 위안시킨 다음 적당히 조세를 증가시킨다면 국가의 경비도 점차 충족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안을 개정하려는 것은 단지 백성을 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경비를 위해서입니다....매양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영명하신 자질과 맑고 순수한 덕을 지니시고도 인(仁)한 마음을 미루어 넓혀 정사에 베풀지 못하기 때문에 옛날 황음 무도한 군주와 똑같이 위망의 전철을 밟으려 하니, 이에 대해 신은 밤낮으로 안타까와 하며 마음 졸이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신의 말을 망령되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깊이 생각하고 오래 강구한 다음 대신에게 문의하여 조금이라도 채용해 주소서. 이것이 신의 구구한 소원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고 충성스러움을 잘 알았다. 나 역시 마음을 가다듬고 일을 해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도 몽매하고 재주와 식견이 부족하여 지금까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으니, 생각해 보면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더욱더 경계하여 살펴 유념하겠다." 하였다. 그뒤 며칠이 지나서 이이가 경연에 입시하여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를 진달하자, 상이 흔쾌히 수작하여 종일토록 토론하고서 파하였다. 이때부터 이이는 입시할 적마다 전설(前說)을 반복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신의 계책을 채용하여 인재를 얻어 정사를 맡겨 기강을 바로잡고 오랜 폐단을 개혁시키는 데 있어 유속(流俗)이나 부의(浮議)에 저지되거나 동요되지 마소서. 3년간 이와 같이 하였는데도 세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신에게 기망한 죄를 내리소서." 하였다. 상이 그의 봉사(封事)를 입시한 신하들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우찬성이 전부터 이런 논의를 해왔는데 나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모르겠다만 경장시키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좌우 신하들이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는데, 장령 홍가신(洪可臣)이 대답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급무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비유하건대 이 궁전은 본시 조종이 창건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질 형편이라면 조종이 창건한 집이라 하여 수리하여 고치지 않고 그저 앉아서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필시 재목을 모으고 공장(工匠)을 불러들여 썩은 것은 갈아내고 허물어진 데는 보수한 뒤에야 산뜻하게 새로워지는 것인데 경장시키는 계책이 무엇이 이것과 다르다 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부제학 유성룡이 이 말을 듣고 이튿날 차자를 올려 이이의 논의가 시의(時宜)에 적합하지 않다고 극론하자, 그 의논이 끝내 중지되었다. 홍가신이 유성룡에게 가니 성룡이 그가 이이의 논의에 부회하였다고 힐책하였다. 가신이 말하기를, "공은 과연 경장하는 것을 그르다고 여기는가?" 하니, 성룡이 말하기를, "경장하는 것은 진실로 옳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재주로 그 일을 해내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다." 하였다.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자, 유성룡은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을 키우는 것이다.’라고 하며 매우 강력히 변론하였다. 이이는 늘 탄식하기를 ‘유성룡은 재주와 기개가 참으로 특출하지만 우리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죽은 뒤에야 반드시 그의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진년 변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국사를 담당하여 군무(軍務)를 요리하게 되었는데, 그는 늘 ‘이이는 선견지명이 있고 충근(忠勤)스런 절의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선조수정 15년 9월 1일)[182]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극진하게 진달하였다. 그 상소에, "삼가 아룁니다. 흥망은 조짐이 있고 치란은 기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닥치기 전에 말을 하면 흔히 신임을 받지 못하고 일이 닥친 뒤에 말을 하면 구제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폐정(弊政)을 혁신하는 문제에 대하여 신이 전부터 간청한 바는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군적(軍籍)을 고치고, 주현(州縣)을 병합하고, 감사(監司)를 구임(久任)시키는 4조항이었을 뿐입니다. 군적을 고치는 일에 대해서는 윤허를 받았으나 신이 감히 일을 착수하지 못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신의 당초 의도는, 군졸의 설치 목적이 어디까지나 방어에 있는 만큼 군졸이 공물을 진상하는 역(役)을 감소시켜 전결(田結)에 이전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여유를 갖고 힘을 기르며 훈련에만 전념하여 위급함에 대비케 하고자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안을 고치지 말도록 명하셨으니, 군적을 고치더라도 양병(養兵)하는 계책은 반드시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옛말에 ‘이익이 10배가 되지 않으면 옛것을 고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만약 경장(更張)한다는 헛 소문만 있고 변통하는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옛날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아, 공안을 고치지 않으면 백성의 힘이 끝내 펴질 수가 없고 나라의 쓰임이 넉넉해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 변방 사태가 점점 심각해져서 안정될 기약이 없으니, 우선 시급한 것은 군사인데 식량이 모자랍니다. 그렇다고 부세를 더 징수하게 되면 백성이 더욱 곤궁해질 것이고 더 징수하지 않으면 국고(國庫)가 반드시 바닥날 것입니다. 더구나 군기(軍器)를 별도로 만들고 금군(禁軍)을 더 설치하는 등의 일 모두가 불가피한 것으로서 경비 이외에 조달할 곳이 매우 많은데, 어떤 특별한 계책을 내어 경비의 용도를 보충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주현 병합 계획은 본래 성상께서 생각해내신 것으로서 시행하기도 어렵지 않고 이해관계도 분명합니다. 전하께서는 매양 연혁(沿革)이라는 것을 중대하게 생각하십니다만, 옛날부터 연혁해 온 것도 꼭 대단하게 변통시킨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나누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기록에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소읍(小邑)의 쇠잔한 백성이 많은 역사(役事)에 시달리고 있는데, 만약 하루아침에 몇 고을을 병합하여 하나로 만들 경우 그 백성들은 마치 거꾸로 매달렸다가 풀려난 것처럼 기뻐할 것입니다. 지금 한 가지 일만 보아도 그 효과를 알 수 있습니다. 황주 판관(黃州判官)을 혁파하자 관리와 백성이 뛰고 춤추며 서로들 경하하였는데, 두 고을을 하나로 병합하는 일도 판관을 혁파할 때의 경우와 다름이 없으리라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 백성들의 괴로움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수가 있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한번 혜택을 베풀어 주려 하지 않으십니까....의논하는 사람들은 혹 소요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근심하여 변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을 고치고 군적을 고치고 주현을 병합하는 등의 일은 모두가 조정에서 상의하여 결정하면 되는 일일뿐 백성에게는 한 되의 쌀이나 한 자의 베의 비용도 들지 않는데, 백성들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소요할 근심이 있단 말입니까. 양전(量田)027)(註 027)(양전(量田) : 농지 측량.) 과 같은 경우는 백성에게 약간의 동요가 없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풍년이 들 때를 기다려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안의 개정은 반드시 양전한 뒤에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은 전결(田結)의 다과(多寡)로써 고르게 정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양전한다고 해서 전결의 증감이 어찌 크게 차이가 나기야 하겠습니까. 따라서 공안부터 먼저 고치고나서 뒤따라 양전한다 해도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전결에 면적이 차고 모자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들 어찌 오늘날의 공안처럼 전결의 다과를 따지지 않고 멋대로 잘못 정한 것과 같기야 하겠습니까....아, 비도(匪徒)의 난리는 방비가 없는 데에서 일어나고 승패와 안위는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은 오히려 조용히 담소하며 서서히 옛 규정이나 상고할 뿐인데, 게다가 중론이 분분하게 일어나서 절충될 기약이 없으니, 만약 조정의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린다면 변방의 성은 이미 함락 되고 말 것입니다. ‘모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일이 성취되지 않는다.(謨夫孔多 是用不集)’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아, 형편없고 어리석은 신이 성명(聖明)을 만나 은총을 믿고는 조금도 숨김없이 망령된 말을 전후 여러 차례에 걸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계책이 소루하여 열에 하나도 시행되지 않으니, 외로운 처지에서 심정만 쓸쓸할 따름입니다.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받아 마땅한 것이므로 밤낮으로 슬퍼하고 탄식하며 머리털이 하얗게 되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지경인데도 수고롭기만 할 뿐 유익함이 없습니다. ‘힘껏 직무를 수행하다가 능력이 없으면 그만둔다.’030)[316] 라고 하였으니, 의리상 물러나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것이 마땅하나, 간담을 헤치고 심혈을 기울여 지금까지 슬피 부르짖으며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은, 진실로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다 보답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뭇더미에 불이 붙는 것을 환히 보면서 감히 제몸만 돌보는 생각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다시 말하지 않는다면 신에게 그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가엾게 살피시어 받아들여 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내가 우연히 연전에 경이 올린 상소를 보던 중이었는데 이번에 올린 경의 상소가 마침 들어왔다. 전후에 걸쳐 정성스런 상소를 보건대 용렬한 임금을 잊지 않는 경의 고충(孤忠)이 정말 아름답게 여겨진다. 나라 일은 훌륭한 대신들에게 맡겨야 마땅하다. 남행(南行)을 대간(臺諫)으로 삼았던 것은 이미 지나간 일로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다. 한 번 실수한 것도 이미 충분한데 어찌 차마 두 번씩이야 잘못할 수 있겠는가. 공안에 관한 일은, 조정에 의논하게 하였는데 그 논의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감히 다시 고치지 못한 것이다. 설혹 고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아울러 거행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군적에 관한 일은 본조에서 이미 명을 받았으니, 경이 어떻게 시행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주현을 병합하는 문제는 과연 나의 밝지 못하고 얕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다른 폐단을 끼치게 될까 하여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겨 변경하지 못하였는데, 경이 지극히 청하여 마지 않으니 한 번 시험해 봐야 하겠다. 감사를 구임시키는 일은 새로 제도를 만들기 어려워 지금까지 미루어왔으나, 그것도 경의 계책을 따라 먼저 양남(兩南)에서 시험하도록 하겠다. 서얼과 공천·사천을 허통해 주는 일은, 처음 사변이 일어났을 적에 경의 헌책(獻策)으로 인하여 즉시 시행하도록 명했으나, 언관(言官)이 논박하고 있으니 다시 비변사에 물어서 상의하여 거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세속에서 문·무과를 거치지 않고 입사(入仕)한 자를 남행(南行)이라고 한다. 이이(李珥) 등이 미출신인(未出身人)으로서 대간(臺諫)을 삼기로 청한 한수(韓修)·유몽학(柳夢鶴) 등이 이것이다. 성혼(成渾) 등은 일민(逸民)으로서 추천된 자이므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선조수정 16년 4월 1일)[183] 공안(貢案)을 상정(詳定)하도록 명하였다. 전란이 일어난 뒤로 공법(貢法)이 더욱 무너졌으므로 구안(舊案)을 감하여 한결같이 토산(土産)의 증감(增減)에 따르도록 명하였는데, 완전히 바로잡지 못한 상태에서 그만 두었다. 공물(貢物)을 쌀로 바치게 하자는 의논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선조수정 27년 1월 1일)[184] 영의정 유성룡이 차자를 올려 시무(時務)에 대해 진술하였다. 그 대략에, "‘깊은 근심 속에서 성명(聖明)한 지혜가 열리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국가가 흥기된다.’ 하였습니다....신은 또 듣건대 난리를 평정하여 정상을 되찾게 하는 방법이 충분한 식량과 군사에 있다고는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민심을 얻는 근본은 달리 구할 수 없고 다만 요역(徭役)과 부렴(賦斂)을 가볍게 하며 더불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 주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전세(田稅)는 십일세(什一稅)008)[317] 보다 가벼워서 백성들이 무겁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전세 이외의 공물 진상이나 각 절기 때마다 바치는 방물(方物) 등으로 인해 침해당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당초 공물을 마련할 때에 전결(田結)의 수로써 균일하게 배정하지 않고 크고 작은 고을마다 많고 적음이 월등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1결(結)당 공물값으로 혹 쌀 1, 2두(斗)를 내는 경우도 있고 혹은 쌀 7, 8두를 내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10두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에게 불공평하게 부과되어 있는데 게다가 도로를 왕래하는 비용까지 가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관청에 봉납(捧納)할 때는 또 간사한 아전들이 조종하고 농간을 부려 백 배나 비용이 더 들게 되는데, 공가(公家)로 들어가는 것은 겨우 10분의 2, 3에 불과할 뿐, 나머지는 모두 사문(私門)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진상에 따른 폐단은 더욱 심하게 백성을 괴롭히는 점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당초에 법을 마련할 때는 반드시 이와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시한 지 백 년이 지나는 동안에 속임수가 만연하여 온갖 폐단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곧바로 변통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다시 소생할 가망이 없고 나라의 저축도 풍부히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신은 늘 생각건대 공물을 처치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도내 공물의 원수(元數)가 얼마인지 총 계산하고 또 도내 전결의 수를 계산하여 자세히 참작해서 가지런하게 한 다음 많은 데는 감하고 적은 데는 더 보태 크고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모두 한가지로 마련해야 되리라 여겨집니다. 이를테면 갑읍(甲邑)에서 1결당 1두를 낸다면 을읍·병읍에서도 1두를 내고, 2두를 낸다면 도내의 고을에서 모두 2두를 내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백성의 힘도 균등해지고 내는 것도 한결같아질 것입니다. 방물 값 또한 이에 의거해서 고루 배정하되 쌀이든 콩이든 그 1도에서 1년에 소출되는 방물의 수를 전결에 따라 고르게 납입토록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결마다 내는 것이 그저 몇 되 몇 홉 정도에 불과하여 백성들은 방물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진상할 때에도 이런 식으로 모두 쌀이나 콩으로 값을 내게 해야 합니다. 이상 여러 조건으로 징수한 것들은, 전라도는 군산(群山)의 법성창(法聖倉)에, 충청도는 아산(牙山)과 가흥창(可興倉)에, 강원도는 흥원창(興元倉)에, 황해도는 금곡(金谷)의 조읍창(助邑倉)에 들이도록 하고, 경상도는 본도(本道)가 소복(蘇復)될 동안엔 본도에 납입하여 군량으로 하고, 함경도·평안도는 본도에 저장하고, 5개 도의 쌀과 콩은 모두 경창(京倉)으로 수송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 관청에 공물과 방물을 진상할 때 물건을 따져서 값을 정하는 것은 마치 제용감(濟用監)에서 모시·베·가목(價木)을 진헌하던 전례와 같이 해서 유사(有司)로 하여금 사서 쓰게 하고, 만약 군자(軍資)가 부족하거나 국가에서 별도로 조도(調度)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공물과 방물을 진상하는 수를 헤아려 재감(裁減)해야 합니다. 그러면 창고 안에 저장되어 있는 쌀과 콩을 번거롭게 환작(換作)하지 않고도 한량없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명나라에서는 외방에서 진상하는 일이 없이 다만 13도(道)의 속은(贖銀)을 광록시(光祿寺)에 두었다가 진공할 물품을 모두 이것으로 사서 쓰고, 만약 별도로 쓸 일이 있을 경우에는 특명으로 감선(減膳)하여 그 가은(價銀)을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 지방 백성들이 수레에 실어 운반하는 노고를 치르지 않는데도 사방의 공장(工匠)이 생산한 온갖 물품이 경도(京都)에 모여들지 않는 것이 없어 마치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것처럼 무엇이든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경사(京師)는 날로 풍부해지고 농촌 백성들은 태평스럽고 편안한 마음으로 직업에 종사한다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제도이니 우리 나라도 본받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그러면 일세의 유능하고 지혜있는 선비들이 모두 모여들어 국가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맡아 수행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차자를 비변사에 내려 모두 채택해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진관(鎭管)의 법은 사람들이 모두 편리하게 여겼는데도 끝내 시행되지 않았고, 공물 진상을 쌀로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의 뜻이 모두 강구하고 싶어하지 않아 거행되지 못하고 파기되었다. (선조수정 27년 4월 1일)[185] 비변사가 아뢰기를, "오늘의 위태로운 형세는 참으로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사람들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인데도 팔짱을 낀 채 아무런 계책도 세울 수 없는 것은 오직 군량 한 가지 문제일 뿐입니다. 서울에 비축해 놓은 것은 겨우 몇 달을 지탱할 정도며 외방의 창고도 한결같이 고갈되었습니다. 지금은 가을이라 곡식이 익을 때인데도 공사(公私)의 형편이 이와 같으니 명년 곡식이 익기 전에는 다시 무슨 물건을 가져다가 이어 구제하겠습니까. 불행히도 적의 형세가 다시 치열해져 명군(明軍)이 들어온다면 우리 나라 신료들은 비록 군수물을 대지 못했다는 죄로써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일을 그르친 죄를 족히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문제를 의논하는 사람들이 어떤 이는 은(銀)을 채굴하여 곡식을 사들이자고 하고 어떤 이는 포목을 방출하여 곡식을 사들이자고도 합니다. 대개 은은 비록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기는 하지만 그 산출되는 양이 많지 못하여 힘이 많이 드는 반면 소득은 적고, 포목을 가지고 곡식을 사들인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역시 소량이니 국가의 씀씀이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때문에 오늘날 재용을 늘리는 방법은 각도의 공물(貢物) 진상을 모두 쌀로 하게 하고 또 상번 군사(上番軍士)의 호봉족(戶奉足)과 각사 노비(各司奴婢)의 신공(身貢)을 전부 쌀로 마련케 하며, 아울러 바닷가 소금 굽는 곳에서 많은 양을 구워내어 산협(山峽)의 소금이 귀한 지역에 배로 운반하여 곡식으로 바꾸어들인다면 소득이 반드시 많을 터이니, 이것이 오늘날 재용을 늘리는 방법입니다. 이외에 또 둔전(屯田)이 있으니 마땅히 시기에 맞추어 강구하고 힘써 실행할 것을 호조로 하여금 마련해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27년 9월 20일)[186] 결국 군량도 뜯고 공물도 또 뜯는 식으로[318]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애초에 군량 자체도 못 모았다.[319][320][321][322][323][324] 사기를 치려다[325] 제대로 치지도 못한 셈이다.[187] 공물을 일부도 대체가 불가능한 예산 규모인 1결당 2두를 책정해놓고 그마저도 군량미로 먼저 쓰려고 했었다.[326] 대국민사기극이 따로 없었다.[188] 사실 견제와 균형이라는 허울 좋은 이미지가 덧입혀진 선조 대에 붕당정치는 통념에 가깝다. 그 시기 조차도 그러한 건전한 정치 발전은 커녕 후대에 숙종 대에 환국 보다 더한 살육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대동(大同)과 균역(均役)으로 대표되는 양대의 경장(更張)을 완수해 붕당정치가 제대로 된 성과를 낸 시기는 오히려 일당 우위하의 정국에서 한쪽이 정책을 추동한 때였다.[189] 신립이 북방에서 오랑캐를 토벌하고 한양에 입성하자 선조는 자기가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신립에게 입혀줬다.[190] 적전도주죄. 당시에는 이게 참수가 가능한 죄목이었고 실제로도 신각이 이 누명을 써서 죽었다.[191] 다만 이건 반드시 선조의 잘못으로 보기는 어려운 게 원래 김덕령은 공적이 없었던 데다가(곽재우나 조헌, 김천일, 사명당 등 유명한 의병장들과는 달리 김덕령은 그를 대표할 만한 전투가 없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등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다. 오히려 왜 이런 인물을 이렇게 띄워준 건지 의심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192] 반대로 곽재우나 기타 의병장들은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이몽학 측의 유명한 의병장들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에 불과했으며 선조 역시 이들에 대해서는 불문에 붙였다.[193] 과거 태종이 이런 식으로 민무구와 민무질을 숙청했던 사례도 있었으니 덜컥 양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194] 동사,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다.[195] 전라좌수사보다 경상우수사가 격이 더 높다. 왜냐면 일본이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던 유성룡의 천거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조판서시절 유성룡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권율을 광주목사에, 원균을 경상우수사로 천거한다.이때문에 유성룡의 천거를 두고 "원균옹호론"의 논거로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196] 사극에서 흔히 다른 부하들이 이순신을 '장군'으로 지칭하는데 이순신은 1591년부터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의 품계였기에 영감으로 불러야 맞다. 제일 정확한 호칭으론 수사 영감. 이순신이 정헌대부가 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후로는 통제사 대감으로 불렸다.[197] 첫 승전인 옥포해전에서 가선대부, 2차 출동 승전 후 자헌대부, 3차 출동인 한산대첩이 있은 후엔 정헌대부로 1차례씩 승진을 시켜주고 1593년 8월엔 삼도수군통제사 직을 신설하고 초대 통제사로 임명한다.[198] 전쟁이 발발해 이순신을 의심하기 시작한 이후론 류성룡에게 이순신이 글을 아냐고[327] 갑자기 모르는 사람 대하듯 물어보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진짜 믿을 수 있는 인물인지 의심스러워서 의문을 가지는 거지 선조가 바보라서 진짜 잘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328][199]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출소 후 멀쩡히 말도 타고 사람들과 술을 마신 걸 보면 고문은 그래도 약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갖춰놓고 안했을 뿐이지 사실상 죄도 없는 사람을 파직한것도 모자라 붙잡아와서 가둬놓고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한 것은 고문이나 다름이 없다.[200] 정유년 3월 13일 실록을 보면 이순신이 의금부로 압송되자 선조는 '참으로 역적이다.' '이젠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이제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라고 명하는 부분이 나온다.[201] 또 그런 측면에서 이해해주려 해도 구체적인 조건들을 따지고 들면 힘들다. 이성계는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전쟁 영웅으로서의 명망뿐 아니라 당장 기용 가능한 육군 병력을 전부 쥐어짠 5만여명의 통솔권을 가지고 있었다. 조민수와 지휘권을 반으로 나눠놨다곤 해도 그간의 군공이 그저 그랬던 조민수에 비하면 이성계는 화려한 전공으로 군영 내에서 실제 영향력 차이가 확연했다. 게다가 그 중 질적 주력은 이성계 집안의 사병가별초였고, 이들은 당시 고려 육군에서도 가장 강력한 부대였다. 여기에 더해 이성계 집안은 함경도와 만주 일부 지역에 걸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이었다. 반면 이순신은 정치 활동을 일절 안하는 완고한 인물이라 이성계와 같은 권력을 가지진 못했다. 거기다 인원수가 적은 수군이라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다른 수만명의 육군을 이끄는 장수들이 적극 동조할 가능성도 매우 낮았다. 이성계가 배극렴, 박위 등 자신과 비슷한 계급의 장수들에게까지 교분으로 개인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것에 비해서 이순신은 자신의 상관인 도원수 권율이나 체찰사 이원익과 만나 술이나 한잔 마시는 정도였지 병마절도사와 같은 요직에 있는 인물들과 친분을 쌓은 바가 없다. 류성룡과 깊은 친분을 가지긴 했으나 이것이 중앙 정치에서의 권력 문제와 크게 연결되지도 않았다. 이순신의 집안 자체도 일반적인 사대부 집안이었지 이성계와 같은 대가문은 아니었다.[202] 명종은 송인종-송영종의 예를 받아들여 후계자로 책봉은 하지 않고 공인 정도만 하는 정도로 의사표시를 했다. 왜냐하면 책봉 후에는 무를 수 없는게 유교 예법이기 때문에 친자가 태어나면 정쟁이 생기거나 둘 중 한 명의 목숨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203] 훗날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자신의 아버지 정원대원군을 어떻게든 원종으로 추숭시켰는데, 비정상적인 무리수였기 때문에 반정 공신 가운데도 이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다. 인조가 명목상 인목대비의 양자였으나 항렬은 손자 뻘이라 어거지 논리라도 주장한 것이고, 명종의 아들 항렬인 선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204] 고종 역시 종법으로야 사도세자의 직계지만, 혈연으로만 놓고 따지만 인평대군의 후손이었다. 그 왕들도 먼 방계 출신임으로 인한 정통성 컴플렉스를 크게 가지고 있진 않았다. 철종과 고종 역시 선왕이 승하한 당시에 남아있던 왕족들 중에선 가장 높은 정통성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애당초 계승할 때 그런 상황까지 고려해놨기 때문이다. 선조보다 훨씬 먼 방계였고 조정의 상황도 훨씬 열악했던 고종조차도 방계 컴플렉스의 흔적이랄 건 그다지 찾아보기 힘든 막강한 왕권을 행사한 편이다.[205] 사대부도 원래 예법으로는 율곡 이이 처럼 친척이나 조카 대신 서자가 승통해야 하나 서얼은 과거 응시가 불허되므로 가문의 격이 떨어져서 양자를 들이는게 일반적이 된 것일 뿐이다. 조선 왕조의 모범인 중국 왕조와 향신 계층은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승통했고, 황제들도 후궁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206] 명종의 조카들은 의외로 정실부인에게 낳은 종친들이 적었고 덕흥대원군의 세 형제 정도였는데, 양자는 되도록이면 정실 소생의 친척에게 그리고 어릴때 들이는게 관례였다. 왜냐하면 어제까지 같은 신분으로 교류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주군으로 모시는걸 당시에도 껄끄러워 했기 때문이다. 작은형 하릉군은 중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직첩이 박탈되어 '전 하릉군' 이었고, 큰형 하원군도 장자라서 입양을 못하는 게 아니라 후에 기록으로 보면 행실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207] 서자나 서손 출신으로 승계하거나 세자가 된 왕, 왕세자가 조선 후기 영조, 경종, 효장세자, 사도세자, 문효세자, 순조, 철종 등이 있다. 왕비가 소생이 없기 때문에 후궁에서 낳았지만 왕비의 자식으로 인정 받으며 적장자로 세워졌지 누구도 출신이 후궁이라하여 부적격이라 여기지 않았다.[208] 조선 외척사 : 광해군 (1) - 인목왕후의 간택과 선조말 정국의 변동[209] 조선외척사 : 광해군(2) - 문화유씨의 성장과 광해군의 세자시절[210] 수렴청정할 대비가 없다보니 결국 신하들이 이를 대신할 이른바 '황표정치'라는 것을 하다가 수양대군 등 왕족들에게 꼬투리를 잡힌 게 바로 계유정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211] 선조 재위기를 예시를 들어 가정해보자, 당시 세자인 광해군이 갑자기 급사하고 선조 또한 급사하게 되면 이지(광해군의 아들)가 즉위할 가능성이 높은데 선조 사망 년도로 쳐도 이지는 겨우 10살인지라 만일 대비가 없다면 수렴청정할 사람이 없다. 물론 왕족들과 신하들이 조용하던 시대라면 모르겠지만 이 시기는 다행히 권신은 없었지만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 같은 막장 왕자들이 있던 시대다. 당연히 이러면 계유정난 시즌2 행이다. 이러니 차라리 대비라는 보험을 들어놓으면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므로 계유정난 시즌 2같은 일을 방지할 수 있다. 당시 평균수명이 낮다는걸 감안하면 50이 가까운 선조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셈이고 광해군 역시도 젊지만 언제 죽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212]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를 무력으로 손에 넣었지만, 그의 천하는 그가 죽기 전부터 불안한 조짐이 보이더니 그가 죽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사실상 남에게 넘어가고 결국 오사카 전투로 인해 완전히 무너진다. 임진왜란 내내 선조는 굴욕을 여러번 겪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딱히 굴욕이란 걸 겪은 것 같지 않았으나, 그들이 죽은 후 그들의 체제의 운명을 생각해 보면 선조는 임진왜란 때 보인 행보로도 무너지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직 그의 생존으로만 보장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213]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애시당초 오다 노부나가의 집안부터가 가신의 가신 집안이었는데 힘만으로 정상에 오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 때문에 변사하자 그 자리를 오다 노부나가의 선례를 따라 냉큼 가로챈 인간이었다. 당연히 정통성따윈 없다시피했고 그나마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고 조선에서 들여온 성리학을 정식으로 채택함으로써 안정화되었다. 그래도 도쿠가와 막부조차도 오고쇼같은 직책을 만들어서 쇼군의 승계를 보장받으려 했을 정도다. 거기다 역대 쇼군들은(도쿠가와 막부 외에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 포함해서) 대부분 다른 다이묘들이 공가의 벼슬을 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이런 벼슬자리는 쇼군들에게 반역할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182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182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214] 20) 光海君日記卷2, 광해군 즉위년 3월 2일 己丑, “備忘記傳曰 惟予寡昧 罪逆深重 不弔于天 罹此酷禍 頑命未絶 已過一朔 哀疚之中 念及國事 憂惶悶迫 罔知攸濟 北虜之守禦 南倭之接待 自在先朝講究已悉 廟堂必爲之善處矣 姑以目前切迫者言之 生民之事 極可愍惻 山陵之役 詔使之行 其所需用秋毫盡出於民力 哀我赤子 若之何能堪 儻不爲急講撫恤之策 邦本先搖 將無以爲國 予甚瞿然 卿等百爾思度 務宣一分之惠 如積年逋欠 不急貢賦 軍卒逃故 豪勢侵凌 此外凡干病民之弊 一切蠲革 無或有弊端 如供上方物 內需之事 則予當量減焉 且令中外盡陳所懷, 使嘉言罔伏, 不勝幸甚 此意言于大臣.” (*밑줄은 필자)[215] 21) 光海君日記卷2, 광해군 즉위년 3월 26일 癸丑[216] 22) 光海君日記卷2, 광해군 즉위년 3월 27알 甲寅[217] 10) 忠淸道大同事目(奎1594)은 현존하는 가장 앞선 시기의 대동사목으로, 조목 중에 京畿例에 의거한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는 경기선혜법 시행 당시 사목을 가리키는 것이다.[218] 44) 忠淸道大同事目 72條[219] 선종왕(宣宗王)은 몸조리를 하는 방법으로써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의학에 관심을 두고 백성들이 병으로 앓는 것을 걱정하여 병신년(1596년, 선조 29)에 태의(太醫)로 있던 허준(許浚)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요즘 조선이나 중국의 의학책들은 모두 변변치 않고 보잘 것이 없는 초록(抄錄)들이므로 그대는 여러 가지 의학책을 모아서 좋은 의학책을 하나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사람의 병은 다 몸을 잘 조섭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므로 수양하는 방법을 먼저 쓰고 약과 침, 뜸은 그 다음에 쓸 것이며 또 여러 가지 처방이 번잡(煩雜)하므로 되도록 그 요긴한 것만을 추려야 할 것이다. 산간벽지에는 의사와 약이 없어서 일찍 죽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약초가 많이 나기는 하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니 이를 분류하고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도 같이 써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 허준(許浚)은 유의(儒醫) 정작(鄭碏, 1533~1603)과 태의(太醫) 양예수(楊禮壽, ?~1597)⋅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례남(鄭禮男) 등과 함께 편집국(編輯局)을 설치하고 책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대략적인 체계를 세웠을 때 정유년(1597년, 선조 30) 난리를 만나 의사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편찬은 할 수 없이 중단되었다. 그 후 선조가 또 허준에게 혼자서라도 편찬하라고 하면서 국가에 보관하였던 의학책 500여 권을 내주면서 참고하라고 하였다. 편찬이 아직 절반도 못 되었는데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새 왕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경술년(1610년, 광해군 2)에 비로소 이 사업이 끝나서 왕에게 바쳤다. 이 책의 이름을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고 지었으며 모두 25권으로 되어 있다. (『월사선생집』권39, 서, 동의보감서)[220] 사간원이 아뢰기를,...죄인 허준(許浚)의 죄악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라 다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배된 후에도 기탄없이 방자하여 태연스럽게 출입하기를 평인과 다름없이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잠상인(潛商人)들과 내통하며 꺼리는 일이 없습니다. 본래 흉악 패려한 사람으로서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뜻밖의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위리 안치를 명하여 출입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조의에 대해서는 객사(客使)가 지금 막 와서 해변의 방비가 참으로 긴급하니 우선 추고하고, 허준에 대해서는 그가 어찌 방자하게 원망을 품는 일이 있겠는가.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광해 1년 4월 21일)[221] 전교하였다. "허준(許浚)은 호성 공신(扈聖功臣)일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근래에 내가 마침 병이 많은데 내국(內局)에는 노성한 숙의(宿醫)가 적다. 더구나 귀양살이한 지 해가 지났으니,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는 충분하다. 이제 석방하는 것이 가하다." 〈사신은 논한다. 허준은 온 나라의 죄인이니, 상이 어떻게 사사로이 할 수 있겠는가. 허준이 선왕의 말년을 당하여 궁중에서 사랑을 받았으며 많은 잡약(雜藥)을 올려 마침내는 선왕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슬픔을 당하게 하였으니, 그의 죄상을 캐어보면 시역(弑逆)하였다고 말하여도 가하다. 이미 그의 죄를 밝게 바로잡아 신명과 사람의 분노를 시원하게 할 수 없었는데 지금 도리어 해가 지나도록 귀양살이한 것이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 충분하다고 말을 하니, 아, 상에게 병이 많은 것은 진실로 염려할 만하지만 선왕의 병을 잊을 수 있겠으며, 상에게 공로가 있는 것은 진실로 기록할 만하지만 선왕에게 죄가 있는 것은 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상의 이번 일은 삼사(三司)에 달려 있으니, 삼사는 당연히 합사(合辭)하여 성토하도록 청원해서 우리 임금을 잘못이 없는 곳에 이르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이 뒤에 간원이 홀로 발론하였다가 즉시 정지하였으니, 오늘날의 이목 구실을 하는 신하는 임금이 하고 싶어하는 대로 따르는 자라고 말할 만하다.〉 (광해 1년 11월 22일)[222] 전교하기를,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의방(醫方)을 찬집(撰集)하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유리(流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찬집하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1 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방서(方書)를 내의원으로 하여금 국(局)을 설치해 속히 인출(印出)케 한 다음 중외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하였다. 【책 이름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인데, 대개 중조(中朝)의 고금 방서를 널리 모아서 한 권에 모은 다음 분류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 (광해 2년 8월 6일)[223] 내의원 〈관원이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하삼도(下三道)에 나누어 보내서 간행하게 할 일을 앞서 이미 계하하여 각도에 공문을 발송한 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책 수가 매우 많고 공사가 적지 않기 때문에 각처에서 탈보(頉報) 및 장계가 올라온 것이 전후로 한둘이 아니었지만, 각도에 재료를 준비해서 해가 바뀌면 즉시 나누어 간행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이 책은 다른 책과 달라서 두 줄로 소주(小註)를 써놓아서 글자가 작아 새기기가 매우 어려우며, 약명(藥名)과 처방은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사람의 목숨에 관계가 되는데 애초에 본책(本冊)이 없어서 필사본으로 한 부를 간행했을 뿐이므로 다시 의거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외방(外方)에 맡겨 두면 시일이 지연되어 일을 마칠 기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착오와 오류가 생겨서 결국 쓸모없는 책이 되어 버릴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이것을 염려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본원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여 활자로 인쇄하여 과거에 의서(醫書)를 인쇄해 낼 때처럼 의관(醫官)이 감수(監修)하고 교열(校閱)한다면 반드시 일의 성취가 빠르고 착오가 생길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해사(該司)의 물력(物力)이 곤란하기는 하나, 한 달에 들어가는 요미(料米)와 가포(價布)를 계산해 보면 미(米)·태(太)가 아울러 18석이고 무명이 20여 필인데 그 공정이 1년의 공사에 불과하므로 통계가 크게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해사로 하여금 혼자 마련하게 한다면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삼도가 앞서 재료를 마련해 놓았으니, 들어갈 무명을 헤아려서 각각 수송하여 경국(京局)을 돕게 한다면 공사간에 다 편리하고 이로울 것입니다. 신들이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 계획이 제일 낫습니다.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 3년 11월 21일)[224] 예조가 아뢰기를, "근래 사시의 운행이 차례를 잃어서 염병이 재앙이 되고 있습니다. 천행반진(天行斑疹)이 가을부터 크게 성해서 민간의 백성들이 많이 죽고 있는데, 이는 예전엔 거의 없던 증상입니다. 혹은 금기(禁忌)에 구애되고 혹은 치료할 줄 몰라 앉아서 죽는 것을 쳐다만 보고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돌림병에 일찍 죽는 것이 진실로 측은하니, 내국의 명의로 하여금 의방(醫方)에 관한 책을 널리 상고하여 경험해본 여러 처방을 한 책으로 만들어서 인쇄 반포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허준(許浚) 등으로 하여금 속히 편찬해 내게 하고, 여단(厲壇)에도 다시 기도하여 빌도록 하라." 하였다. 【가을과 겨울 사이부터 이 돌림병이 생겼는데, 세속에서는 당홍역(唐紅疫)이라 하였다. 또 염병이 간간이 돌아, 이때부터 끊인 해가 없었다. 수구문 밖에 시체들이 서로 겹칠 정도였는데, 사람들은 살육을 당한 억울한 혼령들이 초래한 것이라 하였다. 】 (광해 5년 10월 25일)[225] 물론 원균이 이 정도 수준이 되었다면 여기에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좌수영 등에도 소식을 알려 "지금 왜놈들 쳐들어 왔는데 빨리 와주셈" 이라고 하면 이순신, 이억기 등의 모든 수사들이 당연히 왔을 것이니까 일본군 입장에선 조선 수군의 대규모 함대와 해전에서 맞붙어 이기는 것부터 고민해야 할 것이며 최악의 경우 아예 해전에서 진 것 때문에 전쟁 자체를 포기하거나 설령 수군을 격파했다고 치더라도 이미 그 뒤에는 부산진성, 동래성에서 준비해 두었을 것이며 그것을 또 격파해도 제승방략으로 모인 조선군이 상대할 것이다. 그러니까 해전에서 조금 더 대응만 잘 했었어도 일본군의 임진왜란에서의 난이도는 훨씬 더 상승했을 것이다. 일본군도 한번에 10만명이 밀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1군, 2군, 3군 이러한 식으로 릴레이 방식으로 왔기 때문에 첫 1군쯤이야 원균에게 능력과 의지가 뒷받침 되었다면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규모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시간은 최소한 이순신과 이억기를 불러올 시간은 된다. 어쨌든 원균이 싸우기만 했다면 조선은 2중 3중 방어망을 구축하고 조선 수군이 결집해서 일본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226] 선종왕(宣宗王)은 몸조리를 하는 방법으로써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의학에 관심을 두고 백성들이 병으로 앓는 것을 걱정하여 병신년(1596년, 선조 29)에 태의(太醫)로 있던 허준(許浚)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요즘 조선이나 중국의 의학책들은 모두 변변치 않고 보잘 것이 없는 초록(抄錄)들이므로 그대는 여러 가지 의학책을 모아서 좋은 의학책을 하나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사람의 병은 다 몸을 잘 조섭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므로 수양하는 방법을 먼저 쓰고 약과 침, 뜸은 그 다음에 쓸 것이며 또 여러 가지 처방이 번잡(煩雜)하므로 되도록 그 요긴한 것만을 추려야 할 것이다. 산간벽지에는 의사와 약이 없어서 일찍 죽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약초가 많이 나기는 하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니 이를 분류하고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도 같이 써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 허준(許浚)은 유의(儒醫) 정작(鄭碏, 1533~1603)과 태의(太醫) 양예수(楊禮壽, ?~1597)⋅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례남(鄭禮男) 등과 함께 편집국(編輯局)을 설치하고 책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대략적인 체계를 세웠을 때 정유년(1597년, 선조 30) 난리를 만나 의사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편찬은 할 수 없이 중단되었다. 그 후 선조가 또 허준에게 혼자서라도 편찬하라고 하면서 국가에 보관하였던 의학책 500여 권을 내주면서 참고하라고 하였다. 편찬이 아직 절반도 못 되었는데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새 왕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경술년(1610년, 광해군 2)에 비로소 이 사업이 끝나서 왕에게 바쳤다. 이 책의 이름을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고 지었으며 모두 25권으로 되어 있다. (『월사선생집』권39, 서, 동의보감서)[227] 사간원이 아뢰기를,...죄인 허준(許浚)의 죄악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라 다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배된 후에도 기탄없이 방자하여 태연스럽게 출입하기를 평인과 다름없이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잠상인(潛商人)들과 내통하며 꺼리는 일이 없습니다. 본래 흉악 패려한 사람으로서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뜻밖의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위리 안치를 명하여 출입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조의에 대해서는 객사(客使)가 지금 막 와서 해변의 방비가 참으로 긴급하니 우선 추고하고, 허준에 대해서는 그가 어찌 방자하게 원망을 품는 일이 있겠는가.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광해 1년 4월 21일)[228] 전교하였다. "허준(許浚)은 호성 공신(扈聖功臣)일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근래에 내가 마침 병이 많은데 내국(內局)에는 노성한 숙의(宿醫)가 적다. 더구나 귀양살이한 지 해가 지났으니,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는 충분하다. 이제 석방하는 것이 가하다." 〈사신은 논한다. 허준은 온 나라의 죄인이니, 상이 어떻게 사사로이 할 수 있겠는가. 허준이 선왕의 말년을 당하여 궁중에서 사랑을 받았으며 많은 잡약(雜藥)을 올려 마침내는 선왕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슬픔을 당하게 하였으니, 그의 죄상을 캐어보면 시역(弑逆)하였다고 말하여도 가하다. 이미 그의 죄를 밝게 바로잡아 신명과 사람의 분노를 시원하게 할 수 없었는데 지금 도리어 해가 지나도록 귀양살이한 것이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 충분하다고 말을 하니, 아, 상에게 병이 많은 것은 진실로 염려할 만하지만 선왕의 병을 잊을 수 있겠으며, 상에게 공로가 있는 것은 진실로 기록할 만하지만 선왕에게 죄가 있는 것은 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상의 이번 일은 삼사(三司)에 달려 있으니, 삼사는 당연히 합사(合辭)하여 성토하도록 청원해서 우리 임금을 잘못이 없는 곳에 이르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이 뒤에 간원이 홀로 발론하였다가 즉시 정지하였으니, 오늘날의 이목 구실을 하는 신하는 임금이 하고 싶어하는 대로 따르는 자라고 말할 만하다.〉 (광해 1년 11월 22일)[229] 전교하기를,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의방(醫方)을 찬집(撰集)하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유리(流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찬집하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1 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방서(方書)를 내의원으로 하여금 국(局)을 설치해 속히 인출(印出)케 한 다음 중외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하였다. 【책 이름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인데, 대개 중조(中朝)의 고금 방서를 널리 모아서 한 권에 모은 다음 분류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 (광해 2년 8월 6일)[230] 내의원 〈관원이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하삼도(下三道)에 나누어 보내서 간행하게 할 일을 앞서 이미 계하하여 각도에 공문을 발송한 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책 수가 매우 많고 공사가 적지 않기 때문에 각처에서 탈보(頉報) 및 장계가 올라온 것이 전후로 한둘이 아니었지만, 각도에 재료를 준비해서 해가 바뀌면 즉시 나누어 간행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이 책은 다른 책과 달라서 두 줄로 소주(小註)를 써놓아서 글자가 작아 새기기가 매우 어려우며, 약명(藥名)과 처방은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사람의 목숨에 관계가 되는데 애초에 본책(本冊)이 없어서 필사본으로 한 부를 간행했을 뿐이므로 다시 의거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외방(外方)에 맡겨 두면 시일이 지연되어 일을 마칠 기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착오와 오류가 생겨서 결국 쓸모없는 책이 되어 버릴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이것을 염려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본원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여 활자로 인쇄하여 과거에 의서(醫書)를 인쇄해 낼 때처럼 의관(醫官)이 감수(監修)하고 교열(校閱)한다면 반드시 일의 성취가 빠르고 착오가 생길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해사(該司)의 물력(物力)이 곤란하기는 하나, 한 달에 들어가는 요미(料米)와 가포(價布)를 계산해 보면 미(米)·태(太)가 아울러 18석이고 무명이 20여 필인데 그 공정이 1년의 공사에 불과하므로 통계가 크게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해사로 하여금 혼자 마련하게 한다면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삼도가 앞서 재료를 마련해 놓았으니, 들어갈 무명을 헤아려서 각각 수송하여 경국(京局)을 돕게 한다면 공사간에 다 편리하고 이로울 것입니다. 신들이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 계획이 제일 낫습니다.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 3년 11월 21일)[231] 예조가 아뢰기를, "근래 사시의 운행이 차례를 잃어서 염병이 재앙이 되고 있습니다. 천행반진(天行斑疹)이 가을부터 크게 성해서 민간의 백성들이 많이 죽고 있는데, 이는 예전엔 거의 없던 증상입니다. 혹은 금기(禁忌)에 구애되고 혹은 치료할 줄 몰라 앉아서 죽는 것을 쳐다만 보고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돌림병에 일찍 죽는 것이 진실로 측은하니, 내국의 명의로 하여금 의방(醫方)에 관한 책을 널리 상고하여 경험해본 여러 처방을 한 책으로 만들어서 인쇄 반포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허준(許浚) 등으로 하여금 속히 편찬해 내게 하고, 여단(厲壇)에도 다시 기도하여 빌도록 하라." 하였다. 【가을과 겨울 사이부터 이 돌림병이 생겼는데, 세속에서는 당홍역(唐紅疫)이라 하였다. 또 염병이 간간이 돌아, 이때부터 끊인 해가 없었다. 수구문 밖에 시체들이 서로 겹칠 정도였는데, 사람들은 살육을 당한 억울한 혼령들이 초래한 것이라 하였다. 】 (광해 5년 10월 25일)[232] (註 013) 선상(選上) : 서울의 각 관사(官司)에서 부리기 위해 외방(外方)의 각 고을에 소속된 노비(奴婢) 등을 뽑아 올리는 것.[233] (註 030) ‘힘껏 직무를 수행하다가 능력이 없으면 그만둔다.’ : 이 말은 공자(孔子)가 옛날 주임(周任)의 말을 인용하여 염구(冉求)의 실책을 꾸짖은 말이다. 《논어(論語)》 계씨(季氏).[234] (註 008) 십일세(什一稅) : 당년 총 수확량의 10분의 1을 거두던 옛날의 세법.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십일세를 논한 것이 보인다.[235] 비변사가 아뢰기를, "해주(海州) 16사(司)에서 납입할 공물을 이미 반감하였는데, 이제 만일 전수를 감해 준다면 경중(京中)에서 쓸 것도 부족할 것이 염려됩니다. 요역마저 감한다면 중국군의 지대(支待) 등에 관한 물자가 다른 데서는 나올 데가 없으니, 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전(內殿)의 공상(供上)까지도 이미 인근의 관아에 나누어 보냈으니, 본주의 공물은 비록 반수만 감한다 하더라도 은휼(恩恤)을 입는 것이 많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요역을 아울러 감하는 편이 마땅할 듯하니, 다시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선조 27년 11월 16일)[236] 호조가 아뢰기를, "삼가 접반사의 장계를 살펴보고 또 형편을 헤아려 보건대, 명사가 경성에 머무르는 기간은 반드시 수 개월에 그치지 않을 것인데, 신들은 계책이 궁하고 힘이 다하여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해사의 모든 물건은 한결같이 탕진되었고 이번에 접대 도감에서 마련한 것이 10일을 지공할 수 있는 것인데도 현물이 없어 부족한 물건이 또한 많습니다. 대체로 현재 군자감에 남아 있는 미곡과 두태는 모두 1만 4천여 석인데 1개월의 급료는 3천여 석 전후로서 수시로 달라져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에는 명사가 와서 경비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더구나 양향청(糧餉廳)의 1개월간 잡비는 1천 4백여 석인데 저축한 것은 거의 동이 나서 며칠 못가 모두 없어질 지경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거느린 장관(將官)과 가정(家丁)·군병(軍兵)이 모두 5백여 명이고, 말이 5백여 필이며, 관전병(寬典兵)이 또 3백여 명이라고 하니, 1개월간 지공하는 데 드는 미곡과 두태는 대개 1천 6백여 석이 됩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당인(唐人)의 출입이 일정하지 않아 짐작하여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각도의 전세(田稅)의 작미(作米)와 신공(身貢) 및 사신을 접대할 잡물을 서찰을 보내어 재촉하기도 하고 혹은 곧바로 이문(移文)을 발송한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마는,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어 전혀 상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해운 판관(海運判官) 조존성(趙存性)과 본조 정랑(本曹正郞) 최동망(崔東望)의 이문(移文)을 보니, 법성(法聖) 【포구(浦口) 이름이다. 】 에서 처음 운반한 미곡과 두태는 모두 1만 3천 7백여 석으로 이달 2일에 배를 띄웠고, 아산(牙山)에서 두 번째로 운반할 미곡과 두태는 모두 5천 8백여 석으로 23일 경에 나누어 싣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리를 조운하여 한강에 도착하는 숫자는 꼭 맞는다고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달리 조치할 만한 일이 없으니 오늘의 급선무는 쓸데없는 관원을 줄여서 경비를 절약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러나 계하(啓下)한 이후에도 해조가 아직까지 거행하지 아니하여 금군(禁軍) 중에는 재주 없고 용렬한 사람이 헛된 이름으로 소속되어 있는 자가 평시보다 배나 되는데, 깨끗이 없애도록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오래도록 액수(額數)를 정하지 아니하여 낭비가 여전합니다. 대체로 전혀 소관(所管)이 없는 부서가 늠료(廩料)만 허비하며, 비록 소관이 있는 부서라고 하더라도 사무는 한가한데 인원이 많아서 공론이 모두 온당치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동 포수(兒童砲手)는 미리 양성하는 것이 절실하기는 하나 현재 적을 방어하고 있는 군사가 아닌 듯하고, 출전한 장사(將士)의 처(妻)에 대한 급료도 장사를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는 좋은 뜻이기는 하나 군량을 잇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이것도 의논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환시(宦寺)의 숫자가 60명에 가까운데 문을 지키고 청소하는 일은 한 사람이 10가지 일을 겸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유사(有司)로 하여금 적당하게 줄이어 군량을 이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아동 포수와 출전한 사람의 처에 대한 급료는 감할 수 없다." 하였다. (선조 28년 4월 19일)[237] 대저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는 군량이 우선이므로 옛 사람이 이르기를 ‘저축된 군량이 없으면 이는 영토를 버리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군량이 떨어지면 영토를 보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변란이 일어난 이후로 부고(府庫)는 잿더미로 화했고 전야는 쑥밭이 되어버려 한두 말의 식량도 마련할 길이 없게 되었으니, 그 많은 군량을 무슨 수로 조치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조정에서 처리하는 방법으로 하책(下策)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니, 모속(募粟)을 권하는 문서가 열읍(列邑)에 빗발치고 독촉하는 사신이 제로(諸路)에 바쁘게 달리어 가난한 집도 빠뜨리지 않고 상공미(常貢米)를 내게 하고 권문 세가나 호족들에게도 대동미(大同米)로 군량을 징수하여 다방면으로 모집하고 아주 적은 것도 가리지 않았으니, 군량을 조달하는 방법은 미진한 점이 없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더러 사사로이 사자(使者)의 수중에 들어가기도 하고 열읍의 백성들 사이에서 축이 났는데도, 호조에서는 군량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살피지 않고 방백은 군량이 많고 적음을 알지 못한 채, 멋대로 사용하고 되는 대로 낭비하여 나라의 용도로 쓰려고 보면 이미 하나도 없으니, 피폐된 집에서 강제로 징수하는 폐단은 많고 사가(私家)에 더해주는 폐해는 한이 없습니다. (선조 28년 7월 2일)[238] 1. 각읍의 공물을 작미(作米)하는 일은 한편으로는 민막(民瘼)을 제거하려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군량을 도우려는 것이니 그 뜻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법을 시행하는 데는 형편상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태평 시대에는 혹 시행할 수 있으나 오늘날에는 시행할 수 없습니다. 대개 전지 1결(結)에 미곡 2두씩을 내게 하면 그 내는 것이 적어서 백성에게 편리한 듯합니다. 그러나 상란(喪亂) 이후로 전야(田野)가 버려지고 묵어서, 한 장정이 경작하는 바는 겨우 식구의 식량을 이을 수 있을 뿐이므로 공사(公私)의 빚, 호역(戶役)의 수용(需用), 전세(田稅)의 미곡을 마련해 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또 이 때에 공물의 작미까지 아울러 징수하면 결코 소민(小民)이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전부터 공물의 댓가를 모두 토산(土産) 잡물을 편의에 따라 마련하여 바치게 하였으니 그 사이에 비록 각사(各司)의 하인이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구례(舊例)가 이미 이루어지고 민정(民情)도 익숙하여졌으므로 지금 갑자기 변경할 수 없습니다. 또 정해진 2두 이외에 이관(吏官)의 농간질과 갯가로 가지고 가서 배로 운반하고 경창(京倉)에 납입하는 비용이 있으니, 소민이 내는 바가 어찌 2두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올해 수납해야 할 미곡이 5만여 석인데 현재 경창에 도착한 수효는 4천 석도 되지 않아 온갖 경용(經用)을 장차 이을 수가 없으니 앞으로 백관의 요미(料米)를 무엇으로 반급하고 중국군의 양식을 무엇으로 방출하며, 제색(諸色)의 군병을 무엇으로 먹이겠습니까. 이것이 절박한 근심입니다. 설사 5만 석의 미곡을 다 징수하여 경창으로 실어온다 하더라도 공물을 교역할 때 또한 불편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서울이 잔파(殘破)되어 여러 가게가 썰렁하고 물력이 탕진하여 각색의 공물을 사들이고자 해도 얻을 수가 없으며, 또 물가의 경중이 무상하여 쌀값의 높낮이를 공평히 하기 어려우므로 해사(該司)는 억제하려 하지만 백성들은 비싼 값을 받으려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억제하면 소민이 이익을 중히 여겨 조금만 더 취해도 원망이 무더기로 일어나고, 비싼 값을 주고 구입하면 관용(官用)이 매우 급하여 그 값이 몇 갑절이 되어 경비를 대기 어려우니, 이 또한 심히 공평하지 못합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밖으로는 소민의 불편함이 이와 같고 안으로는 시행하기 어려운 형편이 이와 같아 당초 군량을 도우려던 계책마저 허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설령 외방의 백성에게 편리한 바가 있고 군병의 양식에 도움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안으로 시행하기 어려운 사세가 이처럼 극심하다면 끝내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해사(該司)로 하여금 올해 수납할 작미(作米)의 원수(元數)를 얼음이 얼기 전에 각별히 납입하도록 독촉하게 하소서. 경창에 실어들인 것이 비록 5만 석에 차지 않더라도 그 수량이 3∼4만 석에 이르면 그래도 용도에 충족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명년의 국계(國計)는 결코 지공할 방도가 없으니 일찍 계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훈련 도감에 소속된 군사는 당초 한때 굶어 죽게 된 상황에서 절박한 요식(料食)을 위하여 지원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금년은 약간 풍년이 들어 여염 사이에 곡식이 천한 듯하니 비록 유리(流離)하여 생업을 잃은 백성도 다 살아갈 방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감의 군사는 모두 날마다 분주하여 역(役)의 괴로움이 갑절이나 심한데도 요미(料米)의 박함은 전과 같으니 자신의 의식도 오히려 부족한데, 하물며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아내와 자식을 기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기 때문에 다 싫어하고 괴로와하는 마음을 품고 모두 도피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속오군(束伍軍)의 초병(哨兵) 중에도 이미 차츰 도망해 가는 자가 있습니다. 이러한 군사를 급한 때에 쓸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양료(糧料)를 더 지급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자니 국가의 저축이 고갈되어 이어나갈 길이 없고 약속한 명령을 그대로 지켜 전처럼 부리자니 군인이 살아갈 수 없어 원망만 날로 심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백방으로 생각해봐도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먼저 호조(戶曹)로 하여금 올해 수납한 미곡(米穀)이 얼마인가를 조관(照管)하게 하여, 1년 경비를 덜어내고 그 나머지로 군량을 삼아 군량의 다소에 따라 군의 원액(元額)을 정하고, 무예가 성취되어 쓸 만한 자는 가려서 올려주고 무예가 용렬하여 쓸모없는 자는 살펴서 내리며, 내린 자의 요미(料米)를 올라간 자에게 더 주어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아내와 자식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게 한다면 군정(軍情)의 원망이 반드시 오늘날처럼 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선조 28년 9월 24일)[239]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군국(軍國)의 수용(需用)을 마련해 낼 길이 없습니다. 임진년부터 외방의 공물을 작미(作米)로 정하니, 백성이 내는 미곡이 많아져서 1결(結)에 혹 7∼8두에 이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뒤에 호조에서 작미(作米)를 항식(恒式)으로 정하여 2두씩을 내도록 하였으니, 민정(民情)이 원망하고 괴로와하는 지경에 이름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해조(該曹)에서 처치한 곡절이 혹 미진한 바가 있고 또 중국 사신과 장수들의 지대(支待)가 번거로와 민간에 별복정(別卜定)305)[329] 함을 면할 수 없으며, 또 시장에서 무역하도록 독책(督責)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의논이 혹 그것을 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의심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 차사(箚辭)도 앞으로 계속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을까 염려된다는 것이니, 지금 곡식이 천할 때에 해사(該司)로 하여금 금년에 납입해야 할 작미(作米)의 원수량을 기한 안에 독납(督納)하도록 하고, 이미 거두어 들인 뒤에 계속 시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바야흐로 다시 의논하여 그 중에 변통할 것이 있으면 또한 뒤따라서 자세히 참작하여 구처해야 합니다. 훈련 도감에 소속되는 군사도 이미 액수(額數)를 정하였으니, 그 중에 금군(禁軍)으로 승진되어 금군의 요미(料米)로 6두를 받는 자는 더 지급해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양곡이 넉넉하지 못하여 충급(充給)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인원을 감하여 양곡을 더 주자니 군인의 수효가 너무 적어 모양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훈련 도감으로 하여금 호조와 협동해서 다시 상량(商量)하여 양곡을 계속 공급할 계책을 강구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무예는 어느 한 쪽도 폐할 수 없으니 앞으로는 무사 및 포수·살수 등을 일체로 권장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서쪽 변경에 이미 근심스러운 단서가 있으니 우리의 비어하는 방도를 진실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안주 목사(安州牧使) 조호익(趙好益)은 비록 무장은 아니나 일찍이 사변의 초기에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였으니 이는 이미 시험해 본 사람이므로 바꿀 필요가 없고, 정주(定州)의 전 목사 김수남(金壽男)은 이미 그대로 잉임(仍任)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밖에 요새를 지키고 형세를 이루는 등에 관한 일도 본도에 이문(移文)하여 거행하도록 신칙함이 마땅하겠습니다. 관서에서 연습하는 군사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니 서울의 포수를 뽑아 보낼 필요가 없고, 해서에 정예군을 이미 뽑게 하였으니 행장을 꾸려 기다리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변경의 군량이 바닥이 났으므로 미리 첨방(添防)하기는 어렵습니다. 강화는 보장(保障)의 땅이어서 진실로 팔방을 공제(控制)하는 형세가 있으니 그 규모와 포치(布置)를 병조로 하여금 본사(本司)와 의논하여 사목(事目)을 마련해서 경기 관찰사에게 신칙하여 착실히 조치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28년 9월 28일)[240] 신잡이 아뢰기를, "군사는 징발할 수 있으나 양식은 나올 곳이 없습니다. 만일 양식이 없으면 수만 명의 군사가 곧 흩어져 버릴 것이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본도에는 부민(富民)이 없고 다른 데에서는 얻을 만한 방법이 없습니다. 연전의 전세(田稅)는 콩이 1만여 석이고 쌀은 겨우 2천 석뿐이니, 이것으로는 중국군을 공궤하는 것도 부족할까 근심스럽습니다. 오늘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각사(各司) 노비의 신공 작미(身貢作米) 및 내수사 노비의 신공을 모아서 쓸 뿐입니다. 그런데 신이 일찍이 삼번 군사(三番軍士)의 봉족(奉足)과 대량미(代糧米)를 각각 그 계수관(界首官)으로 하여금 거두어들이게 하는데 거의 2만 2천여 석이나 되었습니다. 이를 각처에 저축해 두고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명년 봄에 무사하면 방수(防戍)하는 군인에게 보내줄 수 있으니 이것은 약간 넉넉합니다." 하고, (선조 28년 10월 17일)[241] 그러나 이 대공수미법은 시행된 지 1년도 못되어 폐지되고 말았다. 징수한 쌀의 수량이 예정과는 달리 매우 적어서 군량 조달에 차질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정부의 소요 물품을 구입하는 일도 여의치 못하여 수시로 원래의 현물로 징수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가 아직도 전란 중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주요 원인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기반의 취약성이나 제도상의 결함에 있었다기 보다는 유성룡의 말대로 방납·호우배의 이권회복 운동에 있지 않았나 생각되고 있다. 이리하여 임진왜란의 종식과 더불어 공납제의 폐해는 다시 일어났다. 阿多介(虎皮방석) 1坐의 代價가 무명 200필(백미 70여 석)로 치솟는 가운데 농민은 날로 유망하여 갔고, “가난한 농민은 처자를 먹이지도 못하는 형편인데 부자들 중에는 1년의 쓰임새가 쌀 수천 석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0941)0941)(趙 翼,≪浦渚集≫卷 2, 因求言論時事疏.) 극심한 빈부의 차이를 형성하여 갔다. 농민의 대대적인 항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위태로운 사태가 빚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242] 공물을 일부도 대체가 불가능한 예산 규모인 1결당 2두를 책정해놓고 그마저도 군량미로 먼저 쓰려고 했었다.[330] 대국민사기극이 따로 없었다.[243] 호조의 계목(啓目)에, "국가의 경비는 오로지 세입(稅入)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국가로서는 이보다 더한 급무(急務)가 없는 것입니다. 근년에는 1년의 세입이 겨우 4만여석에 이르고 있는데 1년의 경비는 7만여석을 믿돌지 않아 부족한 숫자가 거의 반이나 됩니다. 그리하여 부득이 매년 수미(收米)하는 일이 있게 되고 이에 의지하여 어렵게 지탱하고 있는데 이른바 수미라는 것은 바로 법규 이외의 부세인 것입니다. 1년에 두번 세금을 내므로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색목(色目)064)(註 064)(색목(色目) : 세금의 조목.) 에 대해 어리둥절하고 비용이 정도에 지나치므로 곳곳에서 원망이 치솟고 있으니 실로 계속할 수 있는 방도가 아닙니다. 국가의 용도가 점점 상규(常規)를 회복하고 있는데 이미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수가 없다면 부득불 지출을 헤아려 수입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한 때의 권도(權道)인 것으로 폐할 수 없는 방도입니다. 지난번 양전(量田)에 대한 일은 난이 막 끝난 때에 거론되었었는데 거론되자마자 곧 폐기된 채 수년 동안을 미루어왔으므로 허위(虛僞)와 간람(奸濫)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등제(等第)의 고하와 결부(結負)의 다과가 모두 실제와는 틀리게 되어 있는데 그때그때 두찬(杜撰)하여 책임을 메우기만 힘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옛날의 상품전(上品田)이 지금은 바뀌어 하품전이 되었고 전의 일결답(一結畓)이 지금은 반결답(半結畓)으로 줄었습니다. 세입(稅入)이 넉넉지 못하고 국계(國計)가 모양을 이루지 못한 것이 모두 여기에 연유된 것입니다. 국가에서 분전(分田)을 함에 있어서는 육등법(六等法)을 두었고 수세(收稅)할 적에는 구등제(九等制)를 두고 있어 규획(規畫)이 매우 엄밀한데도 국가의 법이 시행되지 않고 인정이 타성에 젖어 세상에서 양리(良吏)라고 이름난 사람도 백성들에게 호감을 사고 은혜를 베푸는 것만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등급을 나누고 세금을 매김에 있어 모두 하지하(下之下)를 따를 뿐 중(中)이나 상(上)이 있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이를 그대로 답습하여 드디어 상전(常典)이 된 것입니다. 경차관(敬差官)이 복심(覆審)하는 것 또한 한바탕의 겉치레인 것으로, 각 고을에서 영송(迎送)하는 폐단과 전부(田夫)가 지대(支待)하는 비용이 끝이 없는데 반하여 국가의 경비에는 털끝만큼도 유익함이 없습니다. 세입(稅入)을 조사하는데 있어서는 전의 장부(帳簿)만을 그대로 따를 뿐 조금도 가감하는 것이 없는데, 이는 답험(踏驗)을 사실대로 하지 않고 수세를 모두 하지하를 따른 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재(水災), 한재가 지난해처럼 극심했던 경우에도 사실에 따라 급재(給災)065)[331] 함으로써 혜택을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관(朝官)을 가려 보내어 재상(災傷)을 복심(覆審)했다는 것은 명칭만 있었을 뿐 실상은 조금도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지금 국가의 경비는 판탕이 극심하니 잠시라도 국가에 이롭고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편의한 권의(權宜)가 있다면 반복하여 강구해서 구시책(救時策)을 만드는 것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각도의 전세(田稅)를 모두 하지중(下之中)으로 한정을 정하고 경차관이 복심하는 법을 제거한 다음 각 고을로 하여금 스스로 부책(簿冊)을 작성하여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되, 그 가운데 더욱 극심하게 재해를 입은 곳이 있으면 전부(田夫)들에게 고장(告狀)하게 한 뒤 수령이 답심(踏審)하여 그 사실을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며, 감사는 도사(都事)를 보내어 복심하여 사실에 따라 급재(給災)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세입(稅入)이 국가 경비의 근본이 되는 것인 줄 알게 되어 한두 말의 곡식을 더 바치더라도 명목없는 수미(收米) 때와 같이 억울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며, 복심으로 인한 폐단도 제거되어 반드시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1년의 세입으로 1년의 비용을 지탱하기에 충분하여 지금처럼 궤핍(匱乏)된 상황에 이르지 않을 것이며, 명목없이 수미하여 1년에 두 번 세금을 내게 하는 폐단도 이로 인하여 조금은 제거될 것입니다. 따라서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고 민정(民情)을 편리하게 하여 양쪽 모두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경기·강원도의 토질이 척박한 지역과 서북 양계(兩界)의 방비가 급박한 곳에는 1두(斗)라도 재감하여 아랫 백성을 도와주는 의리에 대한 배려가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그 이익 얻는 점과 폐해를 제거하는 것을 따져본다면 몇배나 많을 뿐만이 아니어서 경중과 완급이 마땅함을 얻을 것 같습니다. 오래도록 시행하면 폐단이 없을 수 없지만 또한 한 때에 시험해 보면 유익함이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이 신규(新規)에 관계되어 경솔히 조처하기가 어려우니 대신들과 의논하여 정탈(定奪)해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호조의 계목에, "계하하신 것을 점련하였습니다. 대신과 의논하니,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복심법(覆審法)은 경솔히 폐해서는 안되고 하지중(下之中)으로 억지로 정하는 것 역시 백성에게 불편할 것 같다. 위의 재결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대신들의 의논이 이러하니 위에서 재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의논한 대로 하라고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복심법은 방헌(邦憲)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니 경솔히 폐할 수 없다는 의논이 진실로 옳다 하겠다. 그러나 법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행하는 데 있어 사실대로 하지 않는다면 단지 백성의 피해만 가중시킬 뿐 실효(實効)에 도움이 없는 것이니, 호조의 계목도 시행해 볼 만한 것이다. (선조 39년 6월 25일)[244] 사간원이 아뢰기를, "금년의 가뭄은 전고에 없던 바입니다. 지난번에 여러 차례 기우제를 지내어 비록 비를 조금 얻기는 하였지만 곧바로 개었습니다. 이에 농가에서는 지금까지도 더욱 괴롭게 비를 바라고 있는데, 제관들은 이미 은상(恩賞)을 받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제관에게 논상하는 것을 거행하지 마소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예는 지극히 엄중한 것이니, 정원은 마땅히 미리 해사를 신칙하여 예물을 살펴보고 잘 정돈해 두고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대신이 빈청에 앉아서 독촉한 뒤에 이르러서도 느릿느릿 포장하였으며, 쥐가 파먹고 색이 바랜 물품이 섞여진 것을 해관(該官)이 삼가지 않은 탓이라고 핑계대면서 범연히 추고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정원이 어찌 잘못한 바가 없겠습니까. 색승지를 파직하고 당해 관원을 잡아다 국문하소서. 신들이 삼가 듣건대, 삼 년 동안 농사지어서 일 년 먹을 저축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나라가 나라꼴을 갖추지 못한다고 합니다. 지금 국가의 경비는 7만여 석인데 세입은 4만여 석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해조가 여기저기서 끌어모으고 있으나, 오히려 부족한 숫자를 채우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일용의 잡다한 차하(上下)를 만약 조선(漕船)이 오기를 기다려서 받아들이는 대로 지급해 줄 경우, 그 군색한 상황이 형언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십분 줄여야만 거의 계속 이어갈 가망이 있습니다. 나인(內人)들이 내외의 창료(倉料)를 받는 것이 비록 태평할 때의 옛 규례라고는 하나, 난후에는 경비가 부족함으로 인하여 단지 한 창고의 요미(料米)만 받았는데, 이것도 50석이나 되어 1년 치를 합계하면 거의 7백 석이나 됩니다. 쓸데없는 경비를 줄이고자 할 경우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나인들에게 단지 한 창고의 요미만 지급하여서 번잡한 비용을 제거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나인들이 창고에서 요미를 받는 것은 선조에서 이미 정해놓은 것일 뿐만 아니라, 대궐 안 하인들이 의뢰하는 것은 단지 이것뿐이어서 지금 줄이기는 어렵다. 제관에 대해서는, 이미 비가 내렸으니 논상하는 것이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색승지는 이미 추고하였다. 이러한 때 파직시킬 수 없다." 하였다. 【이 뒤로도 연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광해 1년 5월 29일)[245] 호조가 아뢰기를, "근래에 조세가 들어오는 것은 많지 않은데 경비는 날로 넓어져서, 1년 동안 들어오는 쌀로 반 년의 비용도 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응당 서울로 바치는 수는 겨우 5만여 섬뿐인데 1년에 필요한 쌀은 10만여 섬이며, 불시에 필요한 수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일을 담당하는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지난 정미년058)(註 058)(정미년 : 1607 선조 40년.) 에 이충(李沖)이 본조의 판서로 있을 때에 전라도와 공홍도 등의 바닷가 고을의 공물을 병진년059)(註 059)(병진년 : 1616 광해군 8년.) 이후의 것에 대해서 제사에 필요한 공상(供上)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미(作米)하도록 하여 경비에 보태자는 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겨우겨우 마련하여 지탱해가고 있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인데, 〈실상 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기미년060)(註 060)(기미년 : 1619 광해군 11년.) 에는 바닷가의 각 고을이 〈모두〉 매우 심한 흉작이어서 작미하여 〈서울로 바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에 한하여 본색(本色)으로 바칠 것을 청하였으므로 본조에서 부득이 허락하고, 그 다음해인 경신년 조는 예전처럼 작미하여 바칠 일로 일찍이 행회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건 도감의 계사를 보니 이런 공물의 작미(作米)를 도감에서 갖다 쓰겠다는 일이었는데, 계하하여 본조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대개 도감이 다른 조(曹)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해서 이런 계사가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만약 국가의 경비가 전적으로 여기에 의존하는 것을 알고 있다면 반드시 이런 계사를 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조에 이 작미(作米)가 없다면 백관에게 줄 녹봉과 삼수(三手)에게 줄 요미(料米) 및 잡다한 비용과 뜻밖의 수요를 어떻게 계속 댈 수 있겠습니까. 〈비단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중국 사신의 접대를 모두 이런 공물을 가지고 하였는데, 긴요하고 긴요하지 않은 것에 따라 혹은 쌀·베·은·인삼·종이로 바꾸어서 이쪽을 덜어 저쪽을 보충하는 식으로 형편에 따라 요리하며 지탱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약 이것을 잃는다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도(諸道)의 산간 지방 각 고을의 공물은 분호조 참판 윤수겸(尹守謙)과 분호조 참의 이창정(李昌庭) 등이 관할하여 작목(作木)하고 작미(作米)해서 전적으로 서쪽 변경의 군량으로 넘겨주고 있으니 관계된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이 정해지기 전에는 또한 다른 용도에 쓰기 어렵습니다.〉 국가의 경비와 군대의 양식은 모두 긴급한 일에 속하니, 대신들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광해 12년 6월 15일)[246] 13) 黃愼, 秋浦集권2, 地部獻言啓 六條別單 “且我國六等之分 各以其道有禹貢上下之分 各以其州 是以京畿黃海江原兩界 則五六等多而二三等少 下三道 則一二等多而五六等少 此祖宗朝已定之舊規也 癸卯量田則不然 下三道五六等之多與上五道無異 田結之減縮 專由於此也 至於各道各邑流寓人所耕之地 則量田時雖以時起懸錄 旋卽移徙抛荒者 亦多有之 而收稅差役 每責於本土之人 偏受其弊此亦不可不 亟爲之變通者也 臣試以平時各道田結之數 較之於今日見在田結...(표 참고)八道見在田結 僅過平時全羅道田結之數而已....”(*밑줄은 필자) 황신이 추산한 임란 전과 광해군대 전결규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332] 한편 유형원은 임란 전 8도의 토지규모를 1,515,591결로 산출하였다.(磻溪隨錄 卷6, 田制攷設 下)[247] (주-B001) 속고(續稿) : 내용 중의 ‘증부도사득일서(贈浮屠師得一序)’는 제9권의 ‘현등산(懸燈山)의 득일노사(得一老師)에게 준 서문(序文)’과 내용이 같고, ‘석자헌원씨(昔者軒轅氏)’와 ‘천하지소위보자(天下之所謂寶者)’로 시작되는 두 편의 책문(策文)은 제10권 중에 있는 책문과 내용이 동일하므로 속고에서는 번역하지 않았다.[248] (註 058) 조도(調度)의 관호(官號) : 임진 왜란 이후 어려워진 국가 재정을 원활히 하기 위해, 광해군(光海君) 때에 조도관(調度官)·조도사(調度使) 등의 임시 직명(職名)을 두어 운영하였는데, 민간으로부터 부당하게 물자를 징발하는 등 폐해가 많았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3·《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직관고(職官考).[249] 호조가 아뢰기를, "반정(反正)한 초기에 재성청(裁省廳)과 대동청(大同廳) 등을 설치하고 전후의 공안(貢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갑진년116)(註 116)(갑진년 : 1604 선조 37년.) 에 상정(詳定)한 것이 가장 적었기 때문에 계해년117)(註 117)(계해년 : 1623 인조 1년.) 이후로는 갑진년의 공안대로 시행할 것으로 결정해서 각 도에 알렸었는데, 임술년118)(註 118)(임술년 : 1622 광해 14년.) 조의 미수된 공물 등은 경술년119)(註 119)(경술년 : 1610 광해 2년.) 의 공안에 의하여 그대로 바치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 각 해사(該司)의 비용이 부족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년120)(註 120)(갑자년 : 1624 인조 2년.) 환도(還都)한 뒤에 호조와 예조가 함께 의논하여 대신(大臣)에게 결재를 받고, 또 양사(兩司)의 장관에게 물어서 견감할 만한 것은 견감하고 아래에서 감히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부표(付標)하여 입계(入啓)해서 성상의 재가를 받았으므로 견감한 것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인조 4년 10월 22일)[250]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궁가(宮家)의 면세전(免稅田)을 6백 결(結)로 하는 것은 너무 많다고 진달드렸는데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으므로 삼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내가 결수(結數)를 정하려고 하다가 못했는데, 5백 결로 한도를 정하면 어떻겠는가?" 하자, 명하와 민적이 모두 너무 많다고 하였는데, 김좌명(金佐明)은 아뢰기를, "전일 인견한 뒤에 신들이 물러가 상의했었는데, 모두들 5백 결이라면 너무 많은 것은 아닌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좌우에 하문하자 삼사(三司)의 제신(諸臣) 역시 대부분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군(大君)과 공주는 5백 결로써 한도를 정하고, 왕자와 옹주는 3백 50결로 한도를 정하되, 절수(折受)한 것 가운데 진결(陳結)이 있으면 모두 실결(實結)로 보충해 주도록 하였다. (현종 3년 9월 5일)[251] 민적(敏迪)이 아뢰기를, "신이 저번에 면세(免稅)의 한계를 정하는 일에 대해 진달한 바가 있었으나, 상께서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영원한 계책은 지속해 나갈 만한 방도를 생각해야 하니, 그 수치를 알맞게 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내가 수치를 정하려 하였는데,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5백 결로 한도를 정하면 어떻겠는가?" 하자, 명하는 아뢰기를, "외방의 의논은 모두 5백 결은 많다고 합니다. 설령 4백 결로 제도를 정하더라도 직전(職田)보다 두 배나 되는 수치입니다." 하고, 민적은 아뢰기를, "일이란 적당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백 결로 정해주더라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병판 김좌명(金佐明)은 아뢰기를, "전일 인견하신 뒤 신들이 물러나와 상의하였는데, 모두 5백 결로 하면 그리 지나친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민적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다투는 것은 6백 결에 대해서이니, 5백으로 한정하면 그래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하는 것보다는 낫겠습니다." 하였다. 정중과 만기(萬基)가 아뢰기를, "5백의 수치는 뭇 의논이 모두 많다고는 하지만 다투는 바가 그리 대단하지 않으니, 5백의 수치로 정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고, 장령 송시철(宋時喆), 정언 김만균(金萬均)이 아뢰기를, "신들의 뜻도 그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사의 뜻이 이러하니, 대군과 공주는 5백 결로 한정하고, 왕자와 옹주는 3백 50결로 한정하라. 그리고 떼어 준 것 가운데에 진결(陳結)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시기(時起)로 채워 주도록 하라." 하였다. (현종개수 3년 9월 5일)[252]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응교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오늘 경연에서 신하들이 진달드린 것 가운데 긴요치 않은 말들이 많았습니다마는, 신은 그래도 다행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은 대체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조금도 의심하거나 막힌 것이 없이 조용한 기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궁가(宮家)의 면세전(免稅田)을 참작해 정해야 한다는 논에 또한 일찍이 참여했었는데, 해가 넘도록 쟁집하면서 그칠 줄을 모르고 있으니, 공의(公議)가 어디에 있고 여정(輿情)이 얼마나 격렬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대신에게 자문을 구하시어 통쾌하게 단안을 내려주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제궁가가 5백 결(結)을 모두 소유할 수 없고, 또 만약 민전(民田)이 그 속에 섞여 들어가면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대간이 강력하게 쟁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고, 원두표가 아뢰기를, "처음에 6백 결로 한정했다가 지금 5백 결로 낮추어 정했는데, 그래도 외부의 의논이 많다고 하기 때문에, 다시 정하자는 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참작해서 한도를 정하는 것은 오직 전하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군과 공주는 4백 결로 정하고, 왕자와 옹주는 2백 50결로 정하라." 하였다. (현종 4년 4월 13일)[253]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여러 궁가의 면세를 다시 의논하여 참작해 정할 것과 여러 궁가와 각 아문 사대부들이 산전·해택에 주인이 없다고 일컬으며 전장(田庄)을 설치해서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는 것들을 조사해 내어 혁파하자고 힘껏 요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응교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궁가의 면세를 다시 참작해 정하는 일에 대해 신도 일찍이 의논에 참석하여 해가 지나도록 다투어 주장한 적이 있는데, 지리하기가 너무도 심했습니다. 만약 공론이 있는 바가 아니고 백성들의 원하는 바가 아니라면 어찌 감히 이처럼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오늘 대신과 여러 재신 및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모두 들어왔으니, 결단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직전(職田)과 다른데 어떤 예에 따라 한계를 정한단 말인가?"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당초 다시 정하자는 의논은 대체로 결수(結數)가 너무 많음으로 해서 나온 것이니, 지금 대신 및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해 개정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좌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애초 면세전이 6백 결이던 것을 줄여 5백 결로 하였는데도 밖의 의논은 오히려 지나치게 많다고 합니다. 지금 참작하여 한계를 정한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4백 30결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30결은 그리 심하게 관계되지는 않으니 4백 결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하였고, 민적이 아뢰기를, "왕자와 옹주에게도 한계를 정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군과 공주는 4백 결로, 왕자와 옹주는 2백 50결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헌부가 애초에는 궁가의 면세와 전장을 설치하는 두 가지 일을 혁파하자고 몇 달 동안 다투어 고집하다가, 면세를 참작해 정하자는 요청만 겨우 허락을 받고 다행으로 여겨 산전과 해택에 설치한 전장을 혁파하자는 의논까지 모두 정지했다. 헌납 송시철(宋時喆)이 앞서 올린 계사에서 어장(漁場)을 떼어 주는 폐단을 혁파하자는 일에 대해 거듭 아뢰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단지 화전(火田)만 혁파하도록 하였다. (현종개수 4년 4월 13일)[254] 궁가(宮家) 면세전(免稅田)의 결수(結數)를 정하였다. 대군과 공주는 4백 결, 왕자와 옹주는 2백 50결로 하였는데,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집 만은 상이 특별히 명하여 수를 정하지 말고 옛날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현종 4년 9월 18일)[255] 궁가의 면세(免稅)에 있어 대군(大君)·왕자(王子)·공주(公主)·옹주(翁主)에 대한 결수(結數)를 이미 정하였는데, 인평 대군(麟坪大君) 집만은 종전대로 결수에 한정을 두지 말도록 특별히 명을 하였다. (현종개수 4년 9월 18일)[256] 여러 궁가(宮家)에서 민전을 침범하여 절수(折受)받는 폐단과 조신(朝臣)들이 장복(章服) 외에 입는 옷에 당물(唐物)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신명하였는데, 옥당의 상차를 따른 것이다. (현종 9년 4월 13일)[257]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쌀과 콩 각 1만 곡(斛)을 경기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진휼하고, 남쪽에서 운반해 온 쌀 4천 곡으로 충청·황해 두 도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진구하며, 광주(廣州)는 수어사(守禦使) 김좌명으로 하여금 전담하여 진휼하게 하였다. 또 제궁가(諸宮家)가 절수(折受)받으면서 민전(民田)을 침범하는 폐단이 없도록 금하고, 조정 신하들의 장복(章服) 외에는 당물(唐物)을 쓰는 것을 금하도록 신명하였다. 이는 옥당의 차자 내용을 따른 것이다. (현종개수 9년 4월 13일)[258] 이달 13일 대신과 비국당상을 인견할 때에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지난번 비국의 회계에 대해 재가내리신 것에 내용이 매우 준엄하여 그지 없이 송구하므로 차자를 올려 죄를 청하였는데 견책(譴責)은 입지 않고 아직도 직명(職名)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로 인하여 다시 중죄를 입더라도 구구한 생각을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재가내리신 내용을 보고, 또 경연(經筵)에서의 하교를 들은즉 성의(聖意)는 대체로 임자사목(壬子事目)은 오로지 궁관(宮官)의 지나침을 위한 것이요, 새로이 설치한 궁가(宮家)에 절수(折受)를 불허(不許)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하교하셨는데 이에는 임자년에 결정한 본 뜻을 모두 살피지 못하신 점이 있는 듯합니다. 대체로 조종조 이래, 본래 전토를 절수하는 일이 없었고 관전(官田) 및 몰수하여 속공(屬公)된 땅이 있는 경우에 내려주는 규정은 있었습니다. 선묘조의 임진란 뒤에 인민은 적어 땅이 거의 묵었고, 왕자·옹주는 계속하여 출합(出閤 : 분가 또는 출가)하였으나 내려줄만한 전토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고 상신 한응인(韓應寅)이 당시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예빈시 소속 백관의 식사 및 왜인과 야인의 접대에 사용할 생선·소금·땔나무·탄 등의 물건이 나오는 땅을 나누어서 지급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변통을 잘 했다고 하였으나 뒤에는 절수가 그릇된 규례로 이루어 졌습니다. 현묘(顯廟) 초년에 이르러 5공주의 출합으로 절수가 점점 넓어지자 산골과 연해(沿海)의 백성은 생활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삼사(三司)에서 3년에 걸쳐 다투어 그 폐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 당시 신도 삼사에 출입하면서 전하여 아뢰거나 입시하여 매번 상교(上敎)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에 '절수가 비록 법제는 아니나 선조(先朝)에서 있었던 일이므로 모두 혁파하기는 어렵다. 앞으로 다시 절수를 허용치 않는다면 근원(根源) 없는 폐단은 자연 단절이 될 것이다' 하고 인하여 대전(大典)의 직전(職田)에 관한 법에 따라 그 결수(結數)를 추가하고 면세(免稅)의 한계를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널리 점유하는 폐단은 또다시 전과 같았습니다. 신해년(현종 12년 (1671)) 간에 8도에 크게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사망한 것이 마치 병화(兵火) 뒤와 같았으니 조정에서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므로 간원(諫院)에서 절수에 대한 폐단을 역설하였고, 묘당에서 회계하여 8도에 물어본 뒤에 다시 복계하여 여러 궁가(宮家)에 내려 준 지 오래된 것 및 절수를 폐지하기 어려운 것은 헤아려서 그대로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시정하였습니다. 그 계사에 이르기를 '지금의 이 시정은 백성들의 병폐를 염려한데에서 나온 지극한 뜻이요, 전토도 잃고 백성도 잃어 유지하기 어려운 각 읍의 폐단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이미 폐지된 뒤에 다른 아문·여러 궁가 및 권세 있는 집에서 나누어 점유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시정한 본 뜻이 아닙니다. 금령에 따르지 않고 임의로 둔전(屯田)을 설치한다면 감사가 일일이 적발하여 안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폐지한 것은 본래 전토도 없고 백성도 없어 군·읍이 될 수 없음을 우려해서이며 또 계속 침범·점유하여 원망이 사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으니 어찌 미리 앞날의 새 궁가를 위하여 절수를 금하지 말라는 뜻이겠습니까? 그때의 문서가 아직도 있으니 상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정령(政令)이 결정된 뒤에 그대로 준수되지 못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므로 임자년 이후 절수(折受)는 특히 궁가뿐이 아니라 각 아문도 많이 있습니다. 경신년(숙종 6년 (1680)) 환국(換局)註001)[333] 의 초두(初頭)에 물러났던 신하가 일시에 등용되었으므로 혁신될 회망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대신이 첫째로 임자년(현종 13년 (1672)) 이후 절수한 것을 폐지하자 청하였고, 여러 도에 물어 묘당에서 아뢰어 청하여 모두 폐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궁가의 경우는 대부분 특별 전교로 인하여 그대로 두었고 각 군문은 소임을 맡은 신하가 각자 그 의견을 고집하여 묘당의 논의도 성과가 없어 폐지된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년 내지 반년이 지나기도 전에 각각 그 소임을 맡은 신하가 차례로 연석(筵席)에 드나들면서 모두 복구를 요청하므로 당초 묘당에서 조사하여 폐지한 것도 모두 헛일이 되었습니다. 조정의 명령이 일정하지 않아 나라 일이 정해지는 바가 없으니, 기강이 해이해지고 인심이 따르지 않음은 지금에 와서 극에 달하였습니다. 현재 인민의 번식은 임자년간에 비하여 또 여러 갑절이니 산골과 연해(沿海)의 자그마한 토지도 모두 개간하였으므로 실은 한 이랑도 비어 있는 곳이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임자사목(壬子事目)의 성교(聖敎)에 설령 '새 궁가에 절수를 금하지 말라'는 명문이 있다 하더라도 민전(民田)을 거저 빼앗는 외에는 결코 얻을 수 있는 땅이 없습니다. 이러므로 작년과 금년에 여러 도의 절수(折受)가 몇 곳이나 되는 지 알 수는 없으나 고을 백성의 격쟁(擊錚)과 도신의 장문(壯聞)과 대간의 논계로 말할 수 없이 시끄러웠습니다. 성명(聖明)도 백성들의 호소를 차마 어찌하지 못하여 모두 도로 지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갓 여러 도에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만을 빚었을 뿐, 궁가에도 이익되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를 호조판서 유상운(柳尙運)에게 하문하시면 그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하늘이 종사(宗社)를 도와 왕손들에게 경사가 많아 본손·지손이 번창하여 새 궁가가 한 없이 생기는 경우, 조정에서 어느 곳의 어느 땅으로 무한한 전답의 절수를 할 수 있어서 민전이 빼앗기는 일이 없겠습니까? 그렇다면 임자사목에 새 궁가에게 절수를 금하지 말라는 여부를 막론하고 결코 변통이 없을 수 없습니다. 조종조의 직전(職田) 결수(結數)에 따라 그 조세로 내는 쌀을 법전에 실려 있는 바와 같이 나누어 지급해야 할 것이며 이를 시행하기 어렵다면 마땅히 선처할 방법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절수하는 규례에 있어서는 끝내 앞으로 계속 시행이 되어서는 불가합니다. 감히 이에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번거롭게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후책(善後策)은 생각지 않고 절수하는 규정을 갑자기 폐지하면 새로이 설치한 궁가는 낭패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선처할 방법을 강구하게 한 뒤에 상의하여 품정(稟定)해서 변통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비변사등록>, 제목: 領議政 南九萬 등이 인견하여 여러 宮家의 折受를 금할 것에 대해 논의함, 연월일: 숙종 14년 1688년 04월 15일 (음))[259] 간원이 아뢰기를, "충훈부의 어전(漁箭)과 염세(鹽稅)를 재생청(裁省廳)이 입계하여 감면토록 했는데, 이미 선유 어사(宣諭御史)가 지방으로 내려갈 때에 그 사실을 각도에 반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충훈부가 감히 자기들의 수요를 채우는 데 급급하여 다시 설치하기를 계청하자 정부가 그대로 따라 주었습니다. 이는 군국(軍國)에 관계되는 비용이 아닌데도, 성상으로 하여금 백성에게 믿음을 잃게 하고 고질적인 폐단이 전일과 같게 하는 등 정령이 전도되었으니, 전에 계하한 대로 시행하소서. 그리고 궁가(宮家)와 권세가의 어염세(魚鹽稅)·해세(海稅)를 신설하기로 입안하여 백성에게 피해가 미치게 된 것도 제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금지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염세는 무신년050)(註 050)(무신년 : 1608 광해군 즉위년.) 이후의 일이 아니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인조 1년 8월 10일)[260] 헌부가 아뢰기를, "예전에는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 금법이 없이 백성들과 함께 이용하였으나, 근년 이래 내수사(內需司)와 여러 궁가(宮家) 및 사대부들이 서로 앞다투어 불법으로 점유하는가 하면, 심지어 주인이 있는 전지를 공공연히 빼앗기까지 하므로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시장(柴場)·제언(堤堰)·해택(海澤)·어전(漁箭) 중 입안 절수(立案折受)하는 것은 일체 금단하여 불법으로 점유하는 폐단을 개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산림과 천택을 백성과 함께 이용하는 것은 참으로 오늘날 시행해야 될 일이다. 그러나 선왕 때 내려준 곳만은 금혁(禁革)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인조 1년 윤10월 28일)[261] 상이 주강에 문정전에서 《대학》을 강하였다. 검토관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봉산(鳳山)·재령(載寧) 등의 지방에 경작할 만한 해택(海澤)이 있었으므로 선조(宣祖) 때에 둔전 판관(屯田判官)을 보내 제방을 쌓고 농사를 지어 군량에 보탬이 되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군자감에 소속시켰다가 계사년081)(註 081)(계사년 : 1593 선조 26년.) 간에 훈련 도감으로 옮겼고 그 뒤에 영창 대군에게 사급(賜給)하였는데, 폐조 때에 빼앗아 김 상궁(金尙宮)에게 주었으므로 정몽필(鄭夢弼)·박응남(朴應男)의 무리가 오가며 폐단을 일으켜 하나의 범죄자 소굴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응남이 본도 기인(其人)의 가포(價布)를 방납(防納)한다는 이유로 온 도의 백성을 동원하여 널리 제방을 쌓았으므로 백성들이 원망하는 정상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반정 후에 감사 이명(李溟)이 백성들이 일제히 분노를 터뜨리며 정소(呈訴)하자 응남을 잡아 가두고 효시(梟示)하려 하였으나, 그 때에 이른바 종사청(從事廳)에서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서울에 올려 보내게 하는 바람에 죽음을 면하게 되었으므로 온 도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울분에 차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그 땅이 도로 관향사(管餉使)에게 소속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듣건대 영창 대군이 사급 받은 곳은 대비전(大妃殿)에서 사람을 보내어 관장하게 하고 박응남이 제방을 쌓은 곳은 달성위(達城尉)가 강제로 점유하고 있다 하니, 궁방(宮房)에서 보낸 사람이 폐단을 일으켜 백성이 실망하는 것이 필시 다시 예전과 같게 될 것입니다. 지금 도로 관향사에게 소속시키는 것이 마땅하니, 원하옵건대 상께서는 자전에게 진달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달성위가 점유한 것도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강석기가 아뢰기를, "이것은 입안(立案)082)(註 082)(입안(立案) : 관에서 인가한 문서.) 을 내세워 핑계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응남이 이미 백성의 힘을 사용하여 제방을 쌓았으니, 어찌 사가(私家)가 점유해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인조 1년 12월 7일)[262] 간원이 아뢰기를, "요즈음 각 아문과 여러 궁가(宮家)에서 산택(山澤)의 이익을 독점하여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고 있으니, 통렬히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나라의 어염(魚塩) 생산은 세상 어느 나라도 미칠 수가 없는데 한 해에 거둬들이는 세금은 1백 곡(斛)도 안 되어 매일 상공(上供)하는 것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고 있으니, 감히 부강하게 될 밑천으로 취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지난번 탁지(度支)를 맡은 신하가 차자를 올린 것은, 경 아문(京衙門)과 여러 궁가와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에 소속된 것들로 하여금 반드시 표(標)를 받아 해조에 납세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비록 폐단의 근원을 완전히 제거할 만한 거조는 못된다 하더라도 약간 변통을 가하여 목전의 위급만이라도 풀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비(聖批)가 여러 궁가에 소속된 것은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하교하셨으니, 어찌 무사(無私)해야 되는 왕자(王者)의 도리를 손상시키는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절수(折受)를 한 것이 비록 한때의 사은(私恩)에 관계된 것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심한 지경에 이른다면 어찌 조종조의 본뜻이라 하겠습니까. 해조로 하여금 낱낱이 조사해 내어 국가에 환속시킴으로써 나라를 경영하는 비용을 돕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여러 궁가에 소속된 선척(船隻)이나 어염(魚塩)은 선조(先祖) 때에 하사한 것들이다. 어찌 지금에 와서 도로 빼앗을 수가 있겠는가. 논하는 것이 지나치다. 다시는 번거롭게 말라." 하였다. (인조 3년 11월 24일)[263] 이에 앞서 양사(兩司)가 어염(魚鹽)의 일에 대해 극력 간쟁하였는데 해조(該曹)에 명하여 사처(査處)하게 하였다. 호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지금 양사가 논한 것은 폐단을 제거하여 국가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대정(大政)인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척(船隻)·어전(漁箭)·염분(鹽盆)은 전부터 사여(賜與)한 잘못된 규례가 있었습니다만, 큰 바다를 왕래하는 어선(漁船)들은 정박하거나 출입하는 곳을 종잡을 수 없고 게다가 명호(名號)도 없는데, 어떻게 절급(折給)하고 입안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필시 근래에 시작된 일로 그 유폐(流弊)가 심지어는 왕래하는 어선을 일일이 세어 모두 세금을 받기까지 합니다. 지금 이 폐단을 고치지 않으면 산림이나 천택에 고기잡고 나무할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지금 사처(査處)하라는 명을 받고 본조의 문안(文案)을 상고하여 보았으나 특별히 해변의 염장(鹽場)을 절급한 치부(置簿)가 없었으므로 사출(査出)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에 소속된 선척·염분·어전은 아울러 전일에 계하한 단자(單子)와 사여한 공문(公文)에 의해 다시 명백하게 절급하여 세금을 받게 하소서. 그리고 대간의 계사에 이른바 명파 척로(溟波斥鹵)는 절급했다고도 하고 입안했다고도 하지만 아울러 혁파하고 수세(收稅)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명파 척로라도 선조(先朝) 때 사여한 곳이니 혁파하지 말라." 하였다. (인조 4년 2월 11일)[264] 헌부가 아뢰기를, "여러 궁가(宮家)들이 외람된 짓을 하는 폐단을 아직 개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민생에 해를 끼치고 국법을 어기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염(魚鹽)이 생산되는 명해 척로(溟海斥鹵)의 지역을 선조(先朝)에서 일시 사여(賜與)했다는 것으로 자기가 영원히 점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불가한 것이 명백합니다. 대간이 논계하고 해조가 사계(査啓)한 것은 당금의 폐단을 바로잡는 제일의 급무인 것인데 성비(聖批)에 사급(賜給)한 곳이니 혁파하지 말라고 전교하셨습니다. 따라서 전일 사처(査處)하라는 명은 마침내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 호령을 시행하는 데 있어 실상이 없으면 폐정(弊政)만 더해질 뿐입니다. 산림(山林)·천택(川澤)과 대야(大野)·장주(長洲)가 어찌 임금이 사사로이 사여할 수 있는 물건이고 또 어찌 궁가에서 검거할 수 있는 곳이겠습니까. 이는 전사(前史)에도 없었던 일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해조의 공사(公事)대로 시행하고 혁파하지 말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세금을 면제하고 복호(復戶)시키는 일은 법전에 실려 있는 것인데 말류(末流)에 와서 잘못되어 그 폐단이 만연되었습니다. 궁가에서 법에 어긋나게 점거하는 것이 이제 와서 극심하여지고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일일이 사핵(査覈)하여 법전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하고, 어염(魚鹽)에 대한 일을 간원이 또한 논하니, 답하기를, "여러 궁가에 소속된 어염과 해택(海澤)은 비록 외람되기는 하지만 선조(先朝) 때 사여한 땅이므로 이제 와서 환수하는 것은 실로 미안한 일이다. 전결(田結)에 대한 면세(免稅)도 선조 때의 일이라서 결코 사감(査減)하기가 어렵다. 아울러 다시 논하지 말라." 하였다. (인조 4년 2월 13일)[265] 양사가 합계(合啓)하기를, "신들이 논한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의 해택(海澤)·어염(魚鹽)에 대한 면세(免稅) 등 건에 관하여 할 말을 다한 지 이미 몇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막막하게 윤허를 하지 않으시니, 이는 신들의 성의가 부족한 죄가 아님이 없습니다. 이 일이 그다지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면 이 정도로 그만두어도 좋겠으나, 이 일에 인심의 이합(離合)이 달려 있고 국가의 안위가 관계되기 때문에, 또 한번 목소리를 같이 하여 호소함으로써 상의 일대 각성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을 백성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왕정(王政) 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이라 하여 사사로이 남에게 줄 수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신하로서도 무작정 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왕조에서 혹시 일시적으로 누구에게 하사한 오은(誤恩)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그것이 비도(非道)임을 알면서 어찌 고치지 않고 그대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해택(海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땔나무를 하는 산림까지도 모두 입안(立案)하여 금하고 있어 백성들이 그 속에서는 땔나무를 하고 가축을 칠 수 없게 하고 있는데, 이 폐단이 혁파되지 않는다면 후일에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일어나게 되어 백성 모두 흩어져 결국 나라가 나라 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여러 산 속의 사원(寺院)들까지도 각 궁가의 원당(願堂)이라는 구실로 많은 위전(位田)을 점유하고 있으면서 면세까지 받고 있고, 각 아문도 면세의 전답을 많이 갖고 있는데, 이야말로 매우 놀라운 일로서 단 하루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문제들입니다.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 소속되어 있는 해택과 어세 그리고 전결(田結)에 대한 면세 규정을 일체 혁파하도록 명하시고, 아울러 땔나무를 하는 산림을 점거하고 있는 경우와 사원의 면세받고 있는 위전에 대하여도 해당 관아에서 철저히 조사하여 혁파하도록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의 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혁파할 수 없으므로 따르기 어렵다는 뜻을 이미 남김없이 밝혔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만두지 않고 이렇게 집요하게 논하고 있으니 너무 지나친 것 같다." 하였다. 세 차례 아뢰자 각 아문의 면세전만을 조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인조 4년 3월 16일)[266] 대사헌 박동선(朴東善)과 집의 엄성(嚴惺), 장령 강대진(姜大進), 지평 윤전(尹烇)·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어제 부의 하인이 공주의 집에 가서 소란을 피웠다는 하교를 보니 경악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근래 여러 궁가(宮家)와 사대부가에서 불법으로 시장(柴場)을 점거하고 입안(立案)한 것이라 칭하면서, 경성 수십 리에 꼴이나 나무를 하는 자를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는 고질적인 폐단의 답습으로 민원이 적지 않기 때문에, 지난번 본부에서는 여러 읍에 공문을 보내어 적발해서 보고하도록 했었습니다. 그 결과 경기의 읍에서 먼저 약간의 궁가에 입안된 곳이 있다는 보고를 해왔으므로, 보고를 받고서 그대로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엊그제 모여앉아 궁가의 종을 불러다가 그 곡절을 물어보고 이어 속히 파하라는 뜻으로 약간 경계를 가했을 뿐입니다. 이는 법부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지만, 불러올 적에 거침없이 들어가 소란을 피운 일이 있었는지는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은 비록 소란을 피운 사실 여부는 모르지만 성상께서 하교하기까지 하셨는데, 이러한 실상을 신들에게 알렸다면 나졸 하나 징치하기가 무엇이 그리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잗다란 말을 어찌하여 구중에 계신 성상에게까지 아뢰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궁궐의 위엄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이로부터 더욱 조장될까 걱정됩니다. 힘없는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의 폐단을 앞으로는 금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자신도 모르게 한심해집니다. 신들이 아랫사람을 제대로 검속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말이 있게 하였으니, 파척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그리고 선조(先朝) 때 하사한 땅을 곡직을 구분치 않고 억지로 혁파하려는 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다." 하였다. (인조 4년 12월 13일)[267] 제궁가(諸宮家)와 훈신의 사패지지(賜牌之地)를 면세하는 것과 절수(折受)를 입안하는 등의 일이 크게 불어나서, 간혹 백성의 전답을 광범하게 차지하고 죄를 짓고 도망한 자를 불러 모으는 일도 있으며 심지어는 노전(蘆田), 어전(魚箭), 염분(塩盆), 해택(海澤)의 이익까지도 함부로 점령하고 있어, 백성들이 손을 놀릴 곳이 없습니다. 이는 모두 원망과 화를 불렀던 혼조(昏朝)의 일을 본받고 있는 것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임금은 이미 감손(減損)한 바가 있는데, 훈척 대신들이 자청하여 공가(公家)에 보충하도록 건의한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가 임금의 뜻을 본받는 도리이겠습니까. 그리고 각 아문의 저축이 걸핏하면 만으로 계산되는데 둔전, 어전, 염분을 강제로 점거한 폐단이 궁가와 똑같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찌 감히 스스로 사사로이 하여 무익한 소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계문하고 모두 혁파하여 그 수입으로 군수(軍需)를 보충케 하소서....답하기를, "제궁(諸宮)에 소속된 것인즉 선왕조(先王朝)에 하사하신 것이니, 차마 갑자기 관부(官府)에 떼어 붙일 수 없다. 내관과 나인은, 사령이 부족하기는 하나 헤아려 감손하겠다. 땔나무는, 대내(大內)의 아궁이 둘을 감하겠다." 하였다. 대신이 이어 각처에서 보내는 땔나무 값을 감하도록 주청하니, 감해진 무명이 9백 36 필이었다. (인조 14년 8월 1일)[268] 임진왜란 이후 절수 관행은 더욱 확대되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중의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 왕자와 공주에게 어전(漁箭)·염분(鹽盆)·시지(柴地) 등을 임시변통으로 떼 주었는데, 이를 절수로 표현하였다. 이후 이를 선례로 하여 왕실과 왕족에 대한 궁방전 절수가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궁방전은 일명 궁장토(宮庄土)·사궁장토(司宮庄土)라고도 하였다. 조선후기에 후비·왕자대군·왕자군·공주·옹주 등의 궁방에서 소유하거나 또는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토지이다. 이는 궁방의 소요 경비와 그들이 죽은 뒤 제사를 받드는 명목으로 지급되었다. 절수(折受)/개설[269] 임진왜란 이후 각 궁방은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주인 없는 진황지와 한광지를 입안절수(立案折受)의 방식으로 불하를 받아 개간하였다. 즉, 정부가 각 궁방의 청원을 받아들여 주인 없는 토지를 떼 주어 개간하여 소유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 절수는 궁방에 토지소유권을 부여한 것이지만, 정부가 수조지(收租地)를 궁방에 할급하여 절수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정부가 가졌던 일반 민전의 수조권을 궁방에 양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형성된 조선후기의 궁방전이 이른바 무토면세전이었다. 궁방전 절수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민전 침탈 등 여러 문제점이 생겨났고, 정부 재정에도 점차 부담을 주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궁방전을 혁파하지는 못하고 더 이상 절수하지 않고 축소하는 수준에서 정리되었다. 그 결과가 『속대전』의 결수 제한으로 나타났다. 절수(折受)/내용 및 특징[270] 선조는 조선왕조에서 처음으로 방계(傍系)에서 왕이 되었던 만큼, 즉위 직후의 왕권의 정당성은 취약했다. 그런 그가 오랫동안 왕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신세력으로 등장한 사림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적절하기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선조 이전의 국왕들은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주도권을 유지해야겠다는 의지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군주와 신하가 한 몸이자 통치의 주체라는 ‘군신공치(君臣共治)’의 관점에서 입각하여 신하들 간의 반목을 허용하지 않았다.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쟁의 기원 혹은 분당의 고착화와 관련하여 주목해야할 또 다른 점은 동인과 서인이 당파를 형성하여 전개된 투쟁국면에서 선조가 각 당파를 《대명률》에 따라 처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도리어 ‘이이·성혼의 당’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당파를 처벌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당파를 이용한 것이다. 그 결과 당파의 형성을 죄악시하고 처벌하는 법 규정을 사문화(死文化)시켰다. 당쟁이 정치적 관행으로 허용됨으로써 붕당정치의 길을 열었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271] 여진족들은 금나라를 세우기전에도 고려가 무려 17만 대군을 동원하였음에도 갈라수 전투에서 패하는등 상당히 고전시켰고 금나라 시절에는 2차 여요전쟁에서 멸망직전까지 갔던 고려와는 달리 요나라를 상대로 멸망위기까지는 가지 않고 버티던 북송에게 정강의 변이라는 굴욕을 줬는데 그런 금나라도 실패한 군사적 업적을 조선 성종은 달성했다고 금나라 후손이 직접 인정하는것이다.[272] 대금(大金)은 바로 우리 원조(遠祖)로 그 강성함이 더할나위 없었지만, 올적합(兀狄哈)을 치려 하되 마침내 얻지 못했습니다. 근년에 올적합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하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대군을 일으켜서 정벌하여 그 가옥을 불태워 탕진시켜서 편안히 살 수 없게 하니, 올적합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종(諸種)의 야인에게 종이 되고 말았소. #[273] 물론 약간의 변명을 해주자면 현대인들이야 원균이 무능한 장수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임진왜란 당시의 인물들은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는 원균이 무슨 전공을 세워 경상우수사가 될 정도의 인물이었고, 큰 실책은 아직 저지르지 않았으니 인물 됨됨이를 파악할 수 없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두자. 그러나 원균은 임진왜란 전 인사 행정이 멀쩡하게 돌아갈 때도 자기 혼자 인사고과 최하점을 받아 탄핵당하는 등 무능한 밑천을 어느 정도 드러냈던 인물이었다. 더불어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개전 초기에 대규모의 경상우수군을 날려먹기까지 했지만, 당시 인력난에 시달리던 조선군에서는 도망갔거나 패했다고 일일이 다 죽이면 그 당시 경상도에 있던 관군 지휘관 중에 살아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일 뿐이다. 김시민, 박진, 유숭인, 이광악, 박홍 등은 모두 자질을 인정받은 지휘관들이지만 임진왜란 초기에 패했거나 공포에 질려 달아났던 전적이 있다. 이런 분위기 덕에 운 좋게 목숨줄을 달아뒀던 것이다. 게다가 원균의 이미지 메이킹과 처세는 현대 기준으로 봐도 정말 기가 막힌 수준이었다. 임금뿐만 아니라 당파를 불문하고 조정 중신들까지 전부 속여넘겼다. 칠천량 해전 이전에는 원균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던 이원익조차 평시에는 못 쓸 인물이지만 용맹하여 전시에는 쓸 만하다는 지금 보면 정신 나간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욕을 얻어먹을 소리를 했다. 원균은 무인으로서의 역량과 인격을 자기 포장과 처세술로 맞바꿈한, 정치가에나 어울리지 장군으로서는 절대 써먹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274] 그리고 아무리 원균이 이순신을 일방적으로 모함하고 음해했다고 하지만 결국 그를 믿지 못하고 시기한 나머지 파직시키고 백의종군하게 만든 것은 모두 선조의 손으로 직접 한 일이다. 긍정적 평가로 상술된 선조의 인재 등용은 선조가 류성룡의 추천이 있었든 없었든 선조의 선택에 의해 행해진 일이었고, 마찬가지로 이순신의 파직 역시 선조의 선택이었다. 원균도 원균대로 한심한 인간이지만 그에 앞서 절대적인 인사권을 가진 전근대 국가의 국왕인 선조가 비록 자기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는 지었더라도[334] 그 이외의 실책은 없는 유능한 장수를 함부로 파직하고 그 자리에 무능한 자를 올려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으니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무능한 장수를 자기 마음에 안 들어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르고, 자기 마음에 드는 유능한 장수로 앉혔다면 '결과는 좋았다'거나 '사실은 인재를 보는 엄청난 눈이 있어서 그랬다'라고 비호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335][336][275] 승기가 보이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상대를 얕잡아보고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순신이 없어도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을 압도한다라는 낙관만으로 유능한 장수를 팽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당장 위에서 선조와 비교 대상이 된 한고조 유방이 비정하다는 소리를 들었을지언정 후세에 욕을 먹지 않는 것은 항우를 죽임으로써 전쟁을 확실히 끝난 뒤 후환이 없을 만한 시점을 노려 한신을 비롯해 경포, 팽월을 토사구팽했기 때문이다. 토사구팽은 토끼 사냥이 끝난 후사냥개를 삶아죽이는 거지, 토끼 사냥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사냥개를 삶는 게 아니다. 거기다 유방은 비록 일부 지방 내정에 혼란이 있었을지언정, 제위에 오른 후 공신에게 적절한 보상과 벼슬을 내려 중앙집권을 확고히 했다. 반면 선조는 전시에 내정과 외정 모두가 혼란스러웠지만, 민심은 땅에 떨어졌을지언정 대소신료들이 왕권을 존중하고, 제일 큰 우군인 명나라도 조선의 국방을 지켜주고자 돕던 상황이었다. 그마저도 점차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우군인 명도, 아군인 조선도, 적군인 일본도 모조리 지쳐가는 마당에, 육해군 전체에서 최고의 전공을 올리고 명망이 드높던 장군을, 적절한 대체제와 전술 전략 없이 헌신짝 내던지듯 버려버린 것이다.[276] 또한,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태도를 토사구팽이라 말한다면 다른 대표적인 토사구팽 사례들과 선조 및 이순신의 사례를 비교해 볼 필요도 있다.[337][338][339][340][341][342][343] 그런데 위의 인물들의 행적에 비해 이순신이 '왕의 권위를 위협했다'고 하는 행동은 현대로 치면 초급장교 즉 군관을 비롯한 하위무관들의 부족으로 인해 자기 영역에서는 직접 과거를 열어 현지에서 관리를 등용하면 안 되겠느냐고 요청했다는 그것 하나뿐이다. 물론 시대와 상황의 차이를 감안하면 중앙집권체제인 조선시대 기준에서 감히 일개 장수가 나라의 관리를 직접 등용하겠다는 것은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겠다"는 식으로 들릴 정도로 도발적으로까지 받아들여질만한 요청임은 사실이고, 선조에게는 "어? 이 놈 봐라. 지역 군벌 만들려는 거 아닌가?"라는 위협으로 받아들였을 수는 있다. 하지만 '토사구팽'이라는 점에서 보면 다른 유명 토사구팽 사례들에 비해 선조의 (국내 정치적) 기반은 단단했고, 상술한 이순신의 행동이 선조의 위상에 끼친 위협은 그리 대단치 않았다. 즉 분명 심기가 좀 거슬릴 만한 일이기는 하나 봐 주려면 얼마든지 관대하게 봐 줄 수도 있었던 대단치도 않은 일로 유능한 장군을 함부로 토사구팽하려 들고, 그나마도 실패하여 국가의 안위까지 위협했다는 점에서 비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이순신에게 단순히 경고만 하는 선에서 끝났어도 선조는 실제보다 욕을 훨씬 덜 먹었을 것이다.[277] 정통성을 보유하고 있던 숭정제가 북경에서 그냥 자결하는 바람에 남명은 구심점 없이 여러 정권이 난립하여 교통 정리가 안 되었고, 그래서 청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했다. 청나라는 도망을 안 쳐서 망한 점은 명나라와 비슷하나, 이쪽은 위안스카이신해혁명을 지지할 가능성을 배제한 탓에 그 권신 때문에 망한 케이스다. 명나라가 신하의 배신이 아니라 순수하게 반란군에 의해 멸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278] 비록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기도 하고 민폐도 많았지만 명나라군의 전투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조선이 거둔 승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유재란 때는 명군이 지상군의 주력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5만~7만 4천 명 가량, 정유재란 때 파견된 명군 규모가 무려 9만~11만 7천 명이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나라 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 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김시덕의 임진왜란 열전) 김응서 vs 고니시 유키나가③[279] 참고로 의병장은 전부 양반이었다. 물론 그 양반들 밑에 자발적으로 모인 건 결국 민중이니 민중의 힘도 없는건 아니다.[280] 이쪽은 그냥 본토 방어를 완전히 포기하고 니들이 한반도 점령하든 말든 우리도 한반도 약탈하면서 강화도에서 버틸 거다 수준의 마인드였기에 선조보다 나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무신 정권은 한반도 본토를 방어할 의지 자체가 없는 상태로 몽골이 쳐들어오면 도망쳤다가 몽골군이 물러나면 다시 본토로 군대를 보내서 세금만 약탈해갔다.[281] 그나마 비슷한 예를 찾으라면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의 페타르 2세가 있는데 자신의 당숙이던 페타르 왕자는 친독 정책을 펼치며 국가를 보존했는데[344] 페타르 2세가 반독 성향 측근들과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친연합 내각을 설립했다. 물론 페타르 2세도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했지만 쿠데타 과정에서 충분히 독일에게 모욕적인 행동을 한 것에 모자라 친연합 내각을 내세우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이 사태를 자초한 왕이니 유고 국민들을 통합시켜 끝까지 싸워야 마땅했겠지만 영국으로 도망쳤다. 덕분에 유고는 거의 무혈에 가깝게 독일에게 점령당했고 잃어버린 명예는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들이 목숨을 걸고 항쟁하면서 지킬 수 있었다. 그 덕에 전후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은 페타르 2세에게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주재 어디 왕노릇하려나며 강하게 반발하며 항쟁 영웅 티토를 지도자로 내세우고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하기에 이른다.[345][282] 실제로 정유재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왜군이 철수하며 끝나게된다.[283] 당시 그 둘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다. 광해군은 세자가 되기 전부터 자질을 인정받은데다 임진왜란으로 세자가 된 후 분조 활동을 통해 전쟁영웅이 된 상태였으며 즉위 당시 32세였으나 영창대군은 이제 겨우 두세살 어린아이였다. 거기다가 영창대군의 후원인이 될 인목대비나 그 아버지인 김제남이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장에 인목대비도 선조의 선위, 대리도 가능하다는 말에 동참하는 교지를 내릴 정도로 자기 아들도 자신도 광해군의 경쟁 상대가 못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284] 나중에 인조반정 세력이 내세운 구호만 봐도 폐모살 즉 광해군이 임해군 죽인건 명분거리가 못된다는 거다.[285] 세종은 유달리 형제와 자식에게는 넘어갈 건 넘어가 주고 따듯하게 대했다. 그나마 큰아버지 정종의 자식이자 자기 사촌에게는 엄격하고 냉정하게 대했는데 그래도 죽이지는 않았다. 그나마 죽인 사람이 한 명 있는데, 어머니가 바람을 피워서 정종의 자손임이 확실치 않은 자가 정종의 아들이라고 계속 떠벌려대고 세종 본인의 경고까지 무시해서다.[286] 이준경(李浚慶)을 의정부 영의정으로 삼았다. 윤원형을 체직하고 이준경을 영상으로 삼으니 온 조정이 기뻐했다. (명종 20년 8월 15일)[287] 양사가 윤원형을 귀양보내라고 주청하니, 답하기를, "공론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떻게 공신의 작위와 봉록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파직하라. 귀양보내는 것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네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문관이 귀양보내라고 두 번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명종 20년 8월 21일)[288] 좌의정 심통원이 와서 사직하니, 답하였다. "경의 계사(啓辭)를 보니 지극한 충정에서 나온 것 같다. 대신의 진퇴가 비록 중하지만 내 어찌 감히 완강히 거절하여 조용히 물러가려는 뜻을 해치겠는가. 경의 원을 힘써 따르겠다." 【심통원은 사람됨이 탐욕스러워 물릴 줄을 몰랐다. 벼슬을 팔고 뇌물을 받은 것이 윤원형에게 다음가는데도 관작을 지켜 왔기 때문에 물의가 들끓었다. 혹자는 거리에 방을 붙여 그의 추악함을 극단적으로 욕했고 혹자는 그를 조롱해 ‘오늘날 재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수정 영자(水精纓子)에 오목(烏木)이 사이에 끼었다.’ 하였으니, 이는 대개 영의정 이준경과 우의정 이명에게는 깨끗한 덕행이 있으나 심통원이 그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조롱한 것이다. 심통원은 스스로 죄있음을 알고 또 공론에 압박되어 힘써 정승의 자리를 사퇴해 허락을 받은 것이다.】 (명종 20년 12월 21일)[289] 박호원(朴好元)을 사헌부 집의로, 김계휘(金繼輝)를 의정부 사인으로, 안종도(安宗道)를 사헌부 장령으로, 심의겸(沈義謙)을 홍문관 응교로, 유전(柳琠)을 부응교로, 백인걸(白仁傑)을 승문원 교리로 삼았다. (명종 20년 12월 21일)[290] 전교하였다. "고(故) 위사 공신 영중추부사 청천 부원군 심연원의 적장손(嫡長孫)인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 심인겸(沈仁謙)에게, 고 위사 공신 숭선 부원군 임백령(林百齡)의 적장자(嫡長子)인 임진(林溍)의 전례에 의거하여 곧바로 6품직을 제수하도록 하라." 사신은 논한다. 심인겸은 바로 중전의 동모제이다. 별제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이 명이 내려졌으니, 외척에 사정을 두고 조종의 성헌을 따르지 않음이 심하다. 임진의 경천(徑遷)은 문정 왕후의 잘못된 은총이다. 그 전례 자체가 잘못된 것인데, 어찌 재차의 잘못이 용납될 수 있겠는가. 만기가 차야 승천(陞遷)하는 것이 조종조의 전례인데 이를 적용하지 않고 공신의 후손을 후대한다 하여 적용할 필요가 없는 전례를 적용하려 하니 심인겸에게는 후한 일이나 어찌 정체의 문란함을 생각하지 않는가. 또한 한 몸으로 만기의 번거로움을 처리하므로 비록 임진의 전례가 있었다 하더라도 주상 자신이 미리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상에게 이 전례를 알도록 한 자는 누구란 말인가. 관작은 조정의 공기인데, 자급과 서열을 뛰어넘는 일이 다 심인겸의 사의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외척의 권세가 이로부터 제어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이다. 타오르는 불길을 잡지 않으면 반드시 벌판을 태우게 마련인데, 대간의 말이 강력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척리가 기세를 부리게 될 조짐을 만들어 놓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명종 21년 1월 12일)[291] 환관 정번(丁蕃)에게 말미와 말(馬)을 주어 그의 어버이에게 귀성(歸省)하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정번은 총애받는 환관으로 아첨하는 사령(使令)으로는 그 무리들이 따라갈 수 없었다. 이양(李樑)이 총애받게 되자 번이 서로 결탁하여 심복이 되어, 임금의 동정을 번번이 이양에게 내통했다. 서로가 칭찬하며 부자 관계를 맺고 마침내 임금의 뜻을 현혹시켜 계해년150)(註 150)(계해년 : 1563 명종 18년.) 에 사림(士林)의 화를 빚을 뻔하였다. 만일 심의겸(沈義謙)·기대항(奇大恒)이 미리 주선하여 이양과 그의 수족들을 내치지 않았다면, 을사년 같은 화가 다시 이 해에 생겼을 것이니, 한심한 일이라 하겠다. 환시가 총애받게 되자 끝내는 척완(戚畹)들과 더불어 이처럼 국가에 화를 만들어 내었으니 두려운 일이다. (명종 9년 7월 30일)[292] 사신은 논한다. 세상에서는 이양의 당이 박소립 등과 조그만 혐의가 있어서 중죄에 얽어 넣었다 하는데, 겉으로 보면 근사한 말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체로 군자와 소인은 언제나 상반되는 것이 훈유(薰蕕)와 빙탄(氷炭)이 한 그릇에 담길 수 없는 것 같을 뿐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저쪽이 성하면 이쪽이 쇠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다. 그렇다면 비록 혐원이 없다손 치더라도 어찌 원수로 여기지 않겠는가. 만약 소인에게 시기하고 모해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소인이 되겠는가. 이때에 이양의 무리가 하는 짓이 극히 불안정하였으므로 그들이 마음쓴 것은 오직 자기들을 비난할까 염려하는 데 불과했으니 자기들과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을 서둘러 몰아내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인데 더구나 본래 혐분이 있는 자이겠는가. 이것이 박소립 등이 맨 먼저 중상을 당한 이유이니, 앞으로 몇 사람이 또 당할는지를 어찌 알겠는가. 심하다, 양의 어리석음이여. 언젠가 심의겸(沈義謙)을 나무라기를 ‘너는 박소립·기대승·윤두수를 무엇 때문에 좋아하는가? 이문형은 너더러 동방의 성인(聖人)이라고 한다는데 네가 과연 성인인가?’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양의 질시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소립 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겸에게도 감정이 없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거사하는 처음에는 을사년의 사건을 들어서 모조리 얽어 넣어 기필코 중죄로 다스리게 하려고 했었는데 심의겸이 애써 구원함에 힘입어 죄가 이에서 그쳤으니 그 또한 다행한 일이다. 애당초 야기된 발단은 실상 윤백원이 윤원형과 이양의 말을 가지고 양쪽 사이를 드나든 데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심통원도 많은 작용을 했었다. 아, 기묘년의 일이 아직도 성명(聖明) 아래에서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을 잡는 덫과 함정이 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명종 18년 8월 17일)[293] 【이에 앞서 이양이 일찍이 자기가 이랑(吏郞)이 되어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그 자식 정빈의 천거를 도모하였는데 박소립과 윤두수가 때마침 이랑으로 있으면서 정빈이 어리석다 하여 난색을 보이다가 권세에 못이겨 추천하였다. 그런데 완석(完席)에서 난색을 표했다는 이야기를 이양에게 누설한 자가 있어 이로 인해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모두 모함하여 ‘거짓으로 선을 좋아하는 척하면서 조정의 정사를 비방한다.’고 지적하여 내쫓았던 것인데, 그 으르렁대는 형세가 장차 여기에만 그치지 않을 판이어서 인심이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였다. 그의 하는 짓은 예측할 수가 없었는데 때마침 심의겸이 극력 구제하였고, 안으로 중전에게 아뢰는 한편 기대항으로 하여금 차자를 올려 논하게 했던 것이다. 상의 뜻이 빨리 돌아서니 조야가 모두 시원해 했다. 사림이 큰 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의겸의 힘이었던 것이다. ○이 때에 이양과 이감 등의 음모가 이루어져 사림의 화가 헤아릴 수 없게 되었는데 마침 18일이 이감의 집 기일이었다. 그래서 미처 일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고 이 날을 기다려서 하려고 했던 것이다. 부제학 기대항은 이양이나 이감과 교유가 없지 않았던 터라 그 모사를 듣고 말렸으나 듣지를 않자, 드디어 청릉 심강(靑陵沈鋼)의 집으로 가서 의논을 정하고 옥당에 모여 그의 독단하던 죄악과 양사가 악에 동조한 사유를 낱낱이 적어 차자를 올렸기 때문에 이런 명이 내리게 된 것이다. 대항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대저 양이 득지(得志)한 것이 중전의 지친이었기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는 내시 몇 사람을 통하여 내폐(內嬖)들에게 아부해서 그렇된 것이다. 일찍이 중전께 어떤 일을 간청했으나 중전은 성덕(盛德)이신지라 조금도 봐주지 않자 이미 불평이 많았다. 또 심의겸이 급제한 뒤로 그 인품이 좋아서 사류의 허여(許與)하는 바가 되고 사귀는 사람들도 이름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자신의 문정(門庭)이나 정빈의 문객(門客)들은 모두가 형편없는 사람들이므로 양이 항시 얽어 넣으려고 했었으니 이번 일이 만약 뜻대로 되었더라면 사람의 화뿐만이 아니라 또한 국가의 화환(禍患)이 되었을 것이요 문정의 흔단(釁端)도 혹독하게 벌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심강과 기대항이 결단을 내려 제거했던 것이다. 이 날에 참지 김백균은 내병조(內兵曹)에 당직해 있었고, 백균의 사위 고경명은 옥당에 있었는데, 차자를 기초할 때에 그는 집에 왕복하는 편지라고 핑계하여 이미 백균에게 알렸고 백균은 양에게 누설했다. 이 때에 양이 정청에 있다가 이를 듣고 크게 화가 나서 정사를 파하고 나왔으나 오히려 은총이 한창 융성함을 믿고 별탈은 없으리라 여겼다. 공론이 한번 터지자 청릉이 극력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끝내 면하지 못한 것이다. 대항이 건의할 때 스스로 꼭 죽을 것을 각오한지라 말이 몹시 강개하니 동렬에서 이를 들은 자들은 모두 몸을 움추리고 탄복했다. 그 뒤에야 이 일이 청릉에게서 나온 것이고 대항 스스로 한 일이 아님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항이 양을 배반하기가 또한 어렵지 않았겠는가.】 (명종 18년 8월 19일)[294] 판윤(判尹) 기대항(奇大恒)이 졸하였다. 자(字)는 가구(可久)이다. 아버지 기준(奇遵)은 기묘년간에 명망이 높았었으나 끝내 간악한 자들에게 벼슬이 깎이고 죽임을 당하니 사람들마다 모두 원통해 하였다. 대항이 과거에 오르면서 그러한 아버지의 연유로 빠르게 승진하였다. 사람됨이 덕성스럽고 담론을 곧잘하여 지식이 있는 듯하였으나 성품은 실상 교활하였고 하는 일도 대부분 거칠고 비루하였다. 겉으로는 어진 사람을 좋아한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안으로는 검속(檢束)하는 행실이 없었다. 그가 황해도의 관찰사가 되어서는 순전히 욕심스럽고 깨끗지 못한 행동만을 일삼아 해주(海州) 사람들이 침뱉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부임함에 이르러서는 큰 뗏목들을 연달아 강에 띄워 수송하여 마침내 집을 크게 짓고서 극도로 사치하였고 임기가 차 체직 기한이 닥쳐오자 부민(府民)들을 시켜 서장(書狀)을 올려 호소하여 그대로 유임(留任)이 될 것을 원하도록 하였다. 그 소장의 글에 ‘개의 발바닥에 털이 났다.037)[346] ’라는 말도 있어 듣는 사람들이 냉소하였다. 이양(李樑)이 한참 세력이 치솟을 때는 대항이 새벽 저녁으로 분주하게 드나들었다. 그러나 대항은 심강(沈鋼)과는 친척이었고 사이도 서로가 깊었으며 또 이양과는 성세가 서로 엇비슷하여 몹시 불평스런 생각을 가졌었다. 이양이 이감(李戡)을 사주하여 박소립(朴素立) 등을 논박하여 축출하고 사림(士林)들을 화란에 얽어넣으려 하였는데, 그 형세가 심의겸(沈義謙)에게 미치려 하였다. 대항은 그때 옥당(玉堂)의 장관(長官)이었다. 강이 이에 내전(內殿)을 통해 상지(上旨)를 여쭙고 밤에 그 아들을 보내어 그 내용을 알리면서 옥당이 상차(上箚)하도록 부탁하였다. 대항이 마침내 양의 부자(父子)를 논박하고 아울러 대간들을 체직시켰다. 이로 인하여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마침내 간악한 무리를 제거하는 일을 끝내니 사림들이 그의 힘을 입어 화란을 면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전조(銓曹)의 아경(亞卿)이 되었고 한성 판윤에 발탁되었으나 배사하지 못하고 죽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양을 제거시킨 꾀는 실상 대항이 강에게 역설한 데서 발단된 것인데 강이 바로 결단을 내려 상께 아뢰어 윤허를 받고 나서야 일이 이뤄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논평하는 사람들이 그의 공을 칭송하는 것이다. 또 대항이 애초에 만일 양과 친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맨 먼저 조정에서 쫓겨남을 당하여 사림의 화를 결국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니, 대항이 이양에게 붙은 것은 바로 양을 제거하고 사림을 구원하고자 함에서인 것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정(貞)이란 시호를 얻은 것이니 【시호는 정견(貞堅)이다.】 정(貞)은 크게 헤아려 능히 이룬다(大慮克就)는 말이다. (명종 19년 7월 13일)[295] 심의겸(沈義謙) 【국구(國舅) 심강(沈鋼)의 아들로 부귀한 가정에서 생장하였으나 조금도 교만하고 사치스런 습성이 없었으며 은혜를 끊으면서까지 간신을 제거하였으니 자못 선(善)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 천성이 관후하여 가찰(苛察)을 일삼지 않았으니, 이 점이 취할 만하다. 그러나 독실하고 조집(操執)하는 공력이 없으니 견정(堅定)한 선비라 이를 수 없다. 그런데 출신(出身)한 지 5년 만에 문득 옥관자(玉貫子) 차림으로 이조 참의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적합한 자리가 아닌 것이다.】 을 이조 참의로, 오건(吳健)을 승정원 주서로 삼았다. (명종 22년 1월 5일)[296] 영돈녕부사 심강(沈鋼)이 졸(卒)하였다. 심강은 심연원의 아들로, 계묘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활인서 별좌(活人署別坐)에 음보(蔭補)되었다가 상이 즉위하자 중궁(中宮)의 아버지로 영돈녕부사에 제수되었다. 은총을 빙자하여 재물을 탐하고 뇌물을 받아 인심을 사며, 많은 전택(田宅)을 차지하고 남의 노비를 탈취하는 등 마구 거둬들였다. 그러나 성격이 시기하지 않고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다. 박순(朴淳) 등이 임백령(林百齡)에게 좋은 시호(諡號)를 허여하지 않자 그의 자제(子弟)들이 윤원형에게 울면서 호소하여 상에게까지 알려졌다. 상이 크게 노하여 대죄를 가하려는 생각으로 가만히 심통원(沈通源)에게 물으니, 심통원이 상의 뜻대로 아뢰었다. 심강이 듣고 즉시 달려가 구제하자 심통원이 다시 심강의 뜻대로 궁중 안에 아뢰어 사건이 마무리되고 박순 등이 드디어 형화(刑禍)를 면하게 되었다. 심강의 아내는 이양의 누이동생이다. 이양이 그 세도를 믿고 갑자기 일어나 용사(用事)하여 권세가 혁혁하였는데 심강의 아들 심의겸(沈義謙)이 등과(登科)한 뒤로는 심씨의 세도가 더욱 커지자 자기와 맞서는 것을 미워하는 한편 자신이 공론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 이감(李戡) 등과 더불어 명류(名流)들을 공격하므로 온 조정이 두려워하였다. 심의겸이 이양을 만날 적마다 그 불가함을 지적하자 이양이 심의겸까지 아울러 제거하려 하였다. 심강이 이를 가만히 궁중에 알리고 기대항(奇大恒)을 시켜 논핵하여, 이양 등이 축출되기에 이르니, 온 사림이 고맙게 여기었다. (명종 22년 1월 20일)[297] 물론 이후로도 직전세의 명목은 한동안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말기로부터 국가재정의 부족을 이유로 직전 명목을 혁파하려는 논의가 속출하고 있었다. 또 직전세의 환급을 중지하고 그것을 국고로 귀속케 하는 시도가 단속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더구나 16세기에 가서는 연분등제가 ‘下下’로 책정되는 것이 관례화하자 직전세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명종대에 가서는 유명무실해진 명목조차 흉년의 빈번, 변방의 소요 등에 따른 국가재정의 부족으로 소멸되었다.061)061)(金泰永,<朝鮮前期의 均田·限田論>(≪國史館論叢≫5, 1989), 金泰永, 위의 책, 140∼141쪽. 李景植,≪朝鮮前期 土地制度硏究≫(一潮閣, 1986), 李景植, 앞의 책, 265∼279쪽.) 그리고 이로써 적어도 고려 초기 이래 운용되어 온 관인층에 대한 신분제적「分給收租地제도」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2.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 1) 과전법체제의 붕괴)[298]후집(後集)》 《호전(戶典)》에 있는 조문[347]의 예시를 하나만 보자면 주해의 대상인 원래의 조문[348]과 대조해 봤을때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상을 당하거나 사망"이라는 대전제를 두 번 반복하지 않고 경우를 나눠서 전자(기한 이전)는 다시 경우를 제한하고 후자(기한 이후)는 경우를 제한하지 않아 논리적 관계를 명료하게 하는 《후집(後集)》의 조문이 원래의 조문보다 훨씬 간결하고 해석 또한 명확하게 되는 것을 단박에 쉽게 알 수 있다.[299] 『경국대전주해』의 편찬 때에 부수적인 작업으로서 주해관들이 『경국대전』의 간단한 자구를 주석했는데, 이것은 국왕의 결재를 받지 않고 참고용으로 간직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해관인 안위가 1554년 3월에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 : 忠淸道觀察使)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 안위에게 『경국대전주해』와 자구 주해를 함께 인쇄, 간행하게 하여 10월에 청주에서 발간한 것이 있다. 이것은 『경국대전주해』를 전집으로 하고 자구 주해를 후집으로 하여 꾸며져 있는데, 이 후집도 유권적 해석으로서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후집의 항목은 경국대전이라는 명칭의 자구 주해를 비롯하여 이전 283항, 호전 70항, 예전 314항, 병전 52항, 형전 96항, 공전 16항, 도합 831항목이다. 『경국대전주해』는 정사룡이 서문을 썼으며 국내에는 갑인자본 1권 21장의 유일본이 전한다. 후집은 안위가 서문을 썼으며 일본에 원본이 유일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경국대전 (출처: 경국대전주해 (經國大典註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300] 각사수교[301] 선조 대에 발령된 입법실적이 처참한 것은 국정에서 핵심적인 이호예(吏戶禮) 삼전(三典) 통틀어 후대에 쓸만해 《수교집록(受敎輯錄)》에 등재된 조(條)가 꼴랑 9개(《이전(吏典)》 3개;《호전(戶典)》 5개;《예전(禮典)》 1개)에 불과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349] 반면 《수교집록(受敎輯錄)》에 등재된 명종 대에 발령된 조(條)는 50개(《이전(吏典)》 7개;《호전(戶典)》 14개;《예전(禮典)》 29개)이다. 전란 전에 기록부족을 거론할 수도 있겠으나 《병전(禮典)》 군제조(軍制條) 수교(受敎)를 보면 41개인 이 항목에만 무려 12개를 선조 대에 박아 놓았으며 전란 전후 가릴 것이 없이 년도(4년;4년;6년;13년;13년;15년;20년;24년;35년;37년;37년;38년)도 굉장히 꾸준하고 고르게 분포되었다. 역대국왕 통틀어도 압도적인 1위인데 한마디로 관심 있는 부분에만 몰입했다고 할 수 있다.[302] 다만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 같은 업적[350]은 이후 백년간 개혁의 효시[351][352][353][354]가 되었다.[303] 광해군 시기는 경기도 외에도 최초로 임시적인 공물작미(貢物作米)들이 광역단위로 시행되기도 했는데 선조 40년 정미년에 이루어진 공물작미(貢物作米)의 근거라고 알려진 기사[355]의 정미년은 광해 9년 정사년의 오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즉 광해 9년 정사년에 충청전라 해읍에서 공물작미(貢物作米)가 실시된 것이다. 이충(李沖)은 선조 대에 호조판서가 아닌 광해 대에 호조판서이고 병진년은 정사년 바로 전해이다. 병진년 이후 납입할 충청전라 해읍의 공물을 정사년에 작미(作米)해서 납입할 것을 광해군이 결재했다는 기사이다. 광해군 의문의 1승 이충(李沖)이 호조판서로 있을때 실제로 했었던 다음의 발언[356]을 참고하라[304] 수교집록[305] 이는 <각사수교>를 책으로 묶은 관서는 승정원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12)(12)(具德會, 1997, <<各司受敎>.<受敎輯錄>.<新補受敎輯錄> 解題> 서울대학교 규장각 영인본 참조.)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졌던 '丙子'년은 1636년(인조 14, 崇禎 9)으로 보이는바,(13)(13)(이 '병자'년조는 앞의 '萬歷 元年 癸酉'(1573, 선조 6) 기사의 흐름을 잇는 것으로 보면 萬歷 4년(1576, 선조 9)가 되겠고, 뒤의 '己巳'(인조 7, 崇禎 2)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면 1636년(인조 14, 崇禎 9)가 될 수 있다. 그 내용으로 보건대 <각사수교>를 필사한 뒤에 이와 관련되는 내용을 추기한 것으로 볼 수 있겠으며, 그렇게 본다면 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명종 연간의 <각사수교>를 필사하고 거기에 추록을 추기하여 책으로 묶은 것으로 보인다. 명종 이후 선조, 광해군 연간에는 수교를 정리하여 輯錄하려는 논의가 이루어졌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후기 法編纂推移와 政治運營의 변동>, 177)[306] 時務에 보다 적극적이었던 일부 관료와 재향 사족들은 이러한 실정의 개선을 위하여 국지적으로나마 나름대로 匡救策을 마련하고 시행하여 갔다. 大同除役으로도 일컬어졌던 이른바 私大同은 그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명종말기에 처음 시행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사대동은 몇몇 군현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그 군현에 부과된 모든 京納物(중앙정부와 왕실에 바치는 공물과 진상물들)을 군현 내의 모든 田土에서 균등하게 징수한 쌀을 가지고 시장에서 구입하여 납부했던 데서 대동법의 선구를 이루는 관행이었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307] 호조가 아뢰기를, "청홍도 관찰사 민기(閔箕)가 해미현(海美縣)이 가장 잔폐하였기 때문에 견감(蠲減)할 일을 【유민(流民)의 전답(田畓)에 요역을 면제할 것, 미수 공물을 양감하거나 이정하거나 쌀로 대신 바치게 할 것, 미수 소금을 풍년이 든 뒤에 수납할 것, 미납된 선상대포(選上代布)를 견감할 것, 왕년의 공채(公債)를 양감할 것 등 95조목이었다.】 조목별로 열거하여 계문하였습니다. 해미현의 잔폐가 더욱 심하니 진계(陳啓)하는 것이 과연 마땅합니다. 풍년을 기다려 미수염(未收鹽)을 거두고 공물(貢物)을 쌀로 대신하게 하는 것은 본조(本曹)의 공사(公事)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묵은 토지에 대하여 요역(徭役)을 면제하고, 공물을 이정(移定)하는 것과 왕년의 공채와 선상대포와 미납공물을 견감하는 것은 모두 특은(特恩)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품계하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진지(陳地)의 요역을 면제하고, 공부(貢賦)를 다른 관아로 이정하며, 미납공물과 선상대포는 반감하고, 왕년의 공채는 3분의 2를 감하라." 하였다. (명종 17년 7월 28일)[308]수교집록(受敎輯錄)》 전체 986개(《이전(吏典)》 115개;《호전(戶典)》 161개;《예전(禮典)》 130개;《병전(兵典)》 181개;《형전(刑典)》 392개;《공전(工典)》 7개) 중 이호예(吏戶禮) 삼전(三典) 406개(《이전(吏典)》 115개;《호전(戶典)》 161개;《예전(禮典)》 130개)[309] (註 018) 정공 도감(正供都監) : 각 고을의 공물을 균등하게 징수하기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관직.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宣祖) 3년 11월 조(條)에 "정공 도감을 두었는데 이는 이준경(李浚慶) 등이 민폐를 구제하기 위하여 특별히 도감을 두어 삼공이 이를 관장하고 조정 선비로서 재주와 학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낭관에 충차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310] (註 132) 횡간(橫看) : 보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줄줄이 내려 붙여 적지 않고 요즈음의 일람표처럼 항목에 따라 줄을 긋고 가로 벌여 적은 세출 예산표.[311] 호조가 아뢰기를, "근래에 조세가 들어오는 것은 많지 않은데 경비는 날로 넓어져서, 1년 동안 들어오는 쌀로 반 년의 비용도 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응당 서울로 바치는 수는 겨우 5만여 섬뿐인데 1년에 필요한 쌀은 10만여 섬이며, 불시에 필요한 수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일을 담당하는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지난 정미년058)(註 058)(정미년 : 1607 선조 40년.) 에 이충(李沖)이 본조의 판서로 있을 때에 전라도와 공홍도 등의 바닷가 고을의 공물을 병진년059)(註 059)(병진년 : 1616 광해군 8년.) 이후의 것에 대해서 제사에 필요한 공상(供上)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미(作米)하도록 하여 경비에 보태자는 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겨우겨우 마련하여 지탱해가고 있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인데, 〈실상 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기미년060)(註 060)(기미년 : 1619 광해군 11년.) 에는 바닷가의 각 고을이 〈모두〉 매우 심한 흉작이어서 작미하여 〈서울로 바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에 한하여 본색(本色)으로 바칠 것을 청하였으므로 본조에서 부득이 허락하고, 그 다음해인 경신년 조는 예전처럼 작미하여 바칠 일로 일찍이 행회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건 도감의 계사를 보니 이런 공물의 작미(作米)를 도감에서 갖다 쓰겠다는 일이었는데, 계하하여 본조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대개 도감이 다른 조(曹)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해서 이런 계사가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만약 국가의 경비가 전적으로 여기에 의존하는 것을 알고 있다면 반드시 이런 계사를 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조에 이 작미(作米)가 없다면 백관에게 줄 녹봉과 삼수(三手)에게 줄 요미(料米) 및 잡다한 비용과 뜻밖의 수요를 어떻게 계속 댈 수 있겠습니까. 〈비단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중국 사신의 접대를 모두 이런 공물을 가지고 하였는데, 긴요하고 긴요하지 않은 것에 따라 혹은 쌀·베·은·인삼·종이로 바꾸어서 이쪽을 덜어 저쪽을 보충하는 식으로 형편에 따라 요리하며 지탱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약 이것을 잃는다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도(諸道)의 산간 지방 각 고을의 공물은 분호조 참판 윤수겸(尹守謙)과 분호조 참의 이창정(李昌庭) 등이 관할하여 작목(作木)하고 작미(作米)해서 전적으로 서쪽 변경의 군량으로 넘겨주고 있으니 관계된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이 정해지기 전에는 또한 다른 용도에 쓰기 어렵습니다.〉 국가의 경비와 군대의 양식은 모두 긴급한 일에 속하니, 대신들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광해 12년 6월 15일)[312] 호조가 아뢰기를, "〈내섬시 제조의 계사에서 말한 ‘공물(貢物)을 납부하지 않은 수령을 파직하고, 또 작미(作米)하지 말며, 봉자전(奉慈殿)에 복정(卜定)하였다가 도로 혁파한 물품을 해사(該司)에 옮겨서 납부케 하고, 또 부족한 물품이 있을 경우에는 호조로 하여금 사들여서 쓰게 하라.’는 일에 대해서, 상께서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시었습니다.〉 각사의 외공(外貢)을 난리 뒤에 상정(詳定)할 때 눈앞에 당장 쓸 것만 계산하고 뒷날에 늘어날 것은 미처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외방의 공물이 일제히 한꺼번에 올라온다고 하더라도 각사의 지용(支用)이 태반이나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해가 다 가도록 납부하지 않고 있는 자가 있는데, 〈내섬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각사가 모두 똑같습니다.〉 이에 공문을 보내어 독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팔도가 모두 마찬가지이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내섬시 외의 다른 각사도〉 일제히 조사해서 3년이 지나도록 공물을 납부하지 않은 수령은 일일이 파직하되, 사면령을 내리기 전의 일이더라도 구분하지 말고 파직하여 뒷사람들을 징계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다만 ‘내섬시에서는 스스로 마련할 길이 없으니 호조로 하여금 무역해서 진배(進排)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본조를 설립한 것은 본디 각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기 위해서 설립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여러 각사를 두루 살피고 규검(糾檢)하여 거행하기 위해서 설립한 것입니다.〉 지난날에 난리가 끝난 지 얼마 안되어서 각 해사가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하였을 때, 마침 조사(詔使)가 나옴에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될까 염려되어, 본조에서 각사의 공물을 모두 거두어들여서 호조로 곧장 봉입(捧入)하여 있고 없는 것을 서로 변통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분호조(分戶曹)’라고 이름하였는데, 부족한 것을 옮겨 쓰면서 그대로 설치해 두고 철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뒤로는 이른바 ‘분호조’란 것이 하나의 시장으로 되었습니다. 이에 좌아(坐衙)하고 있을 때에는 시정의 무뢰배들이 각자 물화(物貨)를 가지고 와 관아의 뜰을 가득 메운 채, 서로 이끗을 다투느라 뒤섞여서 떠들어대는데, 차마 보고 들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런데다가 또 담당 낭관을 적임자를 뽑지 못해서, 연줄을 타고 청탁을 해 놀랄 만하고 침뱉을 만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또 각사의 하인들은 공물의 수취권을 빼앗긴 뒤로는 살아갈 길이 없어서 날마다 와서 하소연하는데, 그 정상 역시 가련합니다. 성상께서 갖가지 폐단을 모두 통찰하시고 여러 차례 정파(停罷)하라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지난해 송순(宋諄)이 본조의 판서가 되었을 때 폐단의 정상에 대해 통렬히 진달하면서 정파하기를 청하여 입계해서 윤허를 받았는데, 그 뒤에 송순이 마침 체차당하여서 정파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신 이충(李沖)이 본조의 판서가 된 뒤에 더욱더 각사가 감당할 수 없고 하리(下吏)들이 이끗을 노리는 것을 보고는, 전에 이루어진 공사(公事)를 준행해서 각사에 소속된 물품을 하나하나 도로 내려보낸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각사의 공물을 본조에서 한 데 거두어 모을 때에는 지공하기에 부족한 각사의 모든 물품을 본조에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며, 본조에서도 사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해사의 잡물(雜物)을 모두 도로 내려준 뒤에도 부족한 물품을 그대로 본조에 요청할 경우, 본조에서 무엇을 가지고 해사의 일을 대신 행할 수 있겠습니까. 비단 사체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단코 계속해서 시행할 만한 방법이 아닙니다. 1년 원공(元貢)의 숫자가 1년의 지공(支供)에 부족할 경우에는 긴요치 않은 공물을 줄여도 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더 정해도 되는 것입니다. 만약 지난해의 잘못된 규례로 인하여 도로 내려준 것을 생각지 않고 전과 같이 진배(進排)하게 한다면, 호조에서도 역시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각사 중에서 내섬시(內贍寺)는 다른 곳에 비해 조금 나은 편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으니, 내자시(內資寺)나 예빈시(禮賓寺) 등과 같이 형편없는 아문 역시 내섬시의 예에 의거하여 본조로 하여금 똑같이 진배하게 할 경우, 모르겠습니다만, 본조에서는 어느 곳을 취하고 어느 곳을 버리겠습니까. 이것은 아무리 거행하고자 하더라도 결단코 시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시(本寺)에서 진배하는 어공(御供)이 실제로 많은데도 원공(元貢)이 적은 듯하므로 지난해 12월에 본시에서 보고한 것을 인하여서 부족한 물품을 그대로 항공(恒貢)으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작미(作米)한 숫자에 포함되지 않아서 숫자에 준하여 더 정하여 계하받아 행이(行移)한 지 겨우 몇 달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관서에서는 허락받지 못한 것을 얻은 지 얼마 안되어서 또다시 본조에서 도와주기를 요구하니, 역시 온당치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4, 5년이 지나도록 납부하지 않은 참기름과 꿀의 수효가 8백여 두(斗)나 된다고 합니다. 이 거두어들이지 못한 물품에 대해서 각도의 감사에게 각별히 하유해서 3월 안으로 남김없이 상납하게 한다면, 족히 몇 년 동안은 지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 쓴 뒤에, 계속해서 쓰기에 부족한 것에 대해서 천천히 의논하여 시행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공물을 작미(作米)하는 일에 있어서는, 이번에 본 호조에서 각사를 취사 선택해서 작미하거나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체 전의 규정에 의거해서 하였으며,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에 관계되는 것은, 성상의 분부에 따라서 작미하는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의 규례에서 상고해 보니, 봉상시(奉常寺)·전생서(典牲署)는 제향에 관계되고, 상의원(尙衣院)·사도시(司䆃寺)·사재감(司宰監)·장원서(掌苑署) 및 장흥고(長興庫)의 공상지(供上紙)는 어공에 관계되는데, 내섬시는 어공하는 각사 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초출(抄出)해서 본시에 행회(行會)하였습니다. 어공하는 각사로 논할 것 같으면, 내자시(內資寺)·사포서(司圃署)·제용감(濟用監)·의영고(義盈庫) 등 각사는 모두 어공을 진배하는 각사라고 말할 수 있으니, 만약 내섬시를 제외할 경우에는 이들 각사 역시 아울러 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모르겠습니다만 아무 탈 없이 작미할 수 있는 각사가 유독 어느 각사이겠습니까. 더구나 이들 각사의 공물은, 전에 모리배들이 방납(防納)할 때에는 이른바 사주인(私主人)이라고 하는 자들이 아무말없이 있었는데, 본조가 국가의 경비가 부족해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해 우연찮게 성사시킨 뒤에 미쳐서는 떠들어 대는 바가 있으니,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방납하는 사람들이 ‘본색(本色)의 숫자 역시 맞추어서 지급해 주지 않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조에서는 각종 공물에 대한 대가(代價)를 한결같이 그들의 말에 따라서 맞추어서 지급해 준 뒤에, 인정(人情)과 작지가(作紙價)에 이르러서도 다 지급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그들의 뜻에 차지 않는 점이 있기에 반드시 그들의 마음에 맞게 된 연후에 그만두려고 한단 말입니까. 이 일은 또한 해마다 그대로 시행할 규정이 아니라, 금년에만 그렇게 하고 그만둘 것입니다. 이미 거두어들여서 반 정도를 구처(區處)하였으니, 지금 다시 합하여서 도로 줄 수 없습니다. 다른 각사의 예에 의거해 시행하소서. 그리고 시급히 써야 할 부족한 물품이 있을 경우에는 상규(常規)에 의거해서 여유가 있는 다른 각사에서 차하(上下)해 주도록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어찌 그 사에 보탬이 됨이 적겠습니까. 봉자전(奉慈殿)의 제향조(祭享條)에 이르러서는, 참깨·찹쌀·꿀 등의 물품을, 이러한 물품이 항상 부족할까 걱정되는 내자시·예빈시·내섬시 등 각사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내섬시 제조의 계사가 이와 같은데, 본시의 어공은 과연 다른 각사에 비해서 배는 됩니다. 그러니 수량 전부를 내섬시에 옮겨주도록 각도의 감사에게 다시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이번의 작미에 대한 곡절을 상세히는 알지 못하겠으나, 공물을 상납하는 것은 2백 년 동안 해내려온 규례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작미하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다. 금년에는 하되, 내년에는 절대로 작미하지 말라. 그리고 지난해에 이미 납부한 공물과 각사의 어공은 다른 사도 아울러 작미하지 말라. 이상의 일을 착실하게 거행하라." 하였다. (광해 9년 3월 8일)[313] 어쨌든 자신의 아버지인 성종을 본받겠답시고 《동문선(東文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覧)》, 《대전속록(大典續錄)》 이것들을 각각각 《속동문선(續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이것들로 각각각 이른바 속찬증보(續撰增補)[357] 한 것 정도의 업적은 남겼다.[314] 이 시기에 평안도 양전이 1544년(중종 39년)에 이루어졌고[358] 이 시기에 강원도 양전이 1522년(중종 17년)에 이루어졌고[359] 이 시기에 전라도 양전이 1524년(중종 19년)에 이루어졌다.[360][361][315] (註 013) 선상(選上) : 서울의 각 관사(官司)에서 부리기 위해 외방(外方)의 각 고을에 소속된 노비(奴婢) 등을 뽑아 올리는 것.[316] (註 030) ‘힘껏 직무를 수행하다가 능력이 없으면 그만둔다.’ : 이 말은 공자(孔子)가 옛날 주임(周任)의 말을 인용하여 염구(冉求)의 실책을 꾸짖은 말이다. 《논어(論語)》 계씨(季氏).[317] (註 008) 십일세(什一稅) : 당년 총 수확량의 10분의 1을 거두던 옛날의 세법.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십일세를 논한 것이 보인다.[318] 비변사가 아뢰기를, "해주(海州) 16사(司)에서 납입할 공물을 이미 반감하였는데, 이제 만일 전수를 감해 준다면 경중(京中)에서 쓸 것도 부족할 것이 염려됩니다. 요역마저 감한다면 중국군의 지대(支待) 등에 관한 물자가 다른 데서는 나올 데가 없으니, 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전(內殿)의 공상(供上)까지도 이미 인근의 관아에 나누어 보냈으니, 본주의 공물은 비록 반수만 감한다 하더라도 은휼(恩恤)을 입는 것이 많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요역을 아울러 감하는 편이 마땅할 듯하니, 다시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선조 27년 11월 16일)[319] 호조가 아뢰기를, "삼가 접반사의 장계를 살펴보고 또 형편을 헤아려 보건대, 명사가 경성에 머무르는 기간은 반드시 수 개월에 그치지 않을 것인데, 신들은 계책이 궁하고 힘이 다하여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해사의 모든 물건은 한결같이 탕진되었고 이번에 접대 도감에서 마련한 것이 10일을 지공할 수 있는 것인데도 현물이 없어 부족한 물건이 또한 많습니다. 대체로 현재 군자감에 남아 있는 미곡과 두태는 모두 1만 4천여 석인데 1개월의 급료는 3천여 석 전후로서 수시로 달라져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에는 명사가 와서 경비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더구나 양향청(糧餉廳)의 1개월간 잡비는 1천 4백여 석인데 저축한 것은 거의 동이 나서 며칠 못가 모두 없어질 지경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거느린 장관(將官)과 가정(家丁)·군병(軍兵)이 모두 5백여 명이고, 말이 5백여 필이며, 관전병(寬典兵)이 또 3백여 명이라고 하니, 1개월간 지공하는 데 드는 미곡과 두태는 대개 1천 6백여 석이 됩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당인(唐人)의 출입이 일정하지 않아 짐작하여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각도의 전세(田稅)의 작미(作米)와 신공(身貢) 및 사신을 접대할 잡물을 서찰을 보내어 재촉하기도 하고 혹은 곧바로 이문(移文)을 발송한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마는,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어 전혀 상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해운 판관(海運判官) 조존성(趙存性)과 본조 정랑(本曹正郞) 최동망(崔東望)의 이문(移文)을 보니, 법성(法聖) 【포구(浦口) 이름이다. 】 에서 처음 운반한 미곡과 두태는 모두 1만 3천 7백여 석으로 이달 2일에 배를 띄웠고, 아산(牙山)에서 두 번째로 운반할 미곡과 두태는 모두 5천 8백여 석으로 23일 경에 나누어 싣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리를 조운하여 한강에 도착하는 숫자는 꼭 맞는다고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달리 조치할 만한 일이 없으니 오늘의 급선무는 쓸데없는 관원을 줄여서 경비를 절약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러나 계하(啓下)한 이후에도 해조가 아직까지 거행하지 아니하여 금군(禁軍) 중에는 재주 없고 용렬한 사람이 헛된 이름으로 소속되어 있는 자가 평시보다 배나 되는데, 깨끗이 없애도록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오래도록 액수(額數)를 정하지 아니하여 낭비가 여전합니다. 대체로 전혀 소관(所管)이 없는 부서가 늠료(廩料)만 허비하며, 비록 소관이 있는 부서라고 하더라도 사무는 한가한데 인원이 많아서 공론이 모두 온당치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동 포수(兒童砲手)는 미리 양성하는 것이 절실하기는 하나 현재 적을 방어하고 있는 군사가 아닌 듯하고, 출전한 장사(將士)의 처(妻)에 대한 급료도 장사를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는 좋은 뜻이기는 하나 군량을 잇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이것도 의논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환시(宦寺)의 숫자가 60명에 가까운데 문을 지키고 청소하는 일은 한 사람이 10가지 일을 겸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유사(有司)로 하여금 적당하게 줄이어 군량을 이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아동 포수와 출전한 사람의 처에 대한 급료는 감할 수 없다." 하였다. (선조 28년 4월 19일)[320] 대저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는 군량이 우선이므로 옛 사람이 이르기를 ‘저축된 군량이 없으면 이는 영토를 버리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군량이 떨어지면 영토를 보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변란이 일어난 이후로 부고(府庫)는 잿더미로 화했고 전야는 쑥밭이 되어버려 한두 말의 식량도 마련할 길이 없게 되었으니, 그 많은 군량을 무슨 수로 조치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조정에서 처리하는 방법으로 하책(下策)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니, 모속(募粟)을 권하는 문서가 열읍(列邑)에 빗발치고 독촉하는 사신이 제로(諸路)에 바쁘게 달리어 가난한 집도 빠뜨리지 않고 상공미(常貢米)를 내게 하고 권문 세가나 호족들에게도 대동미(大同米)로 군량을 징수하여 다방면으로 모집하고 아주 적은 것도 가리지 않았으니, 군량을 조달하는 방법은 미진한 점이 없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더러 사사로이 사자(使者)의 수중에 들어가기도 하고 열읍의 백성들 사이에서 축이 났는데도, 호조에서는 군량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살피지 않고 방백은 군량이 많고 적음을 알지 못한 채, 멋대로 사용하고 되는 대로 낭비하여 나라의 용도로 쓰려고 보면 이미 하나도 없으니, 피폐된 집에서 강제로 징수하는 폐단은 많고 사가(私家)에 더해주는 폐해는 한이 없습니다. (선조 28년 7월 2일)[321] 1. 각읍의 공물을 작미(作米)하는 일은 한편으로는 민막(民瘼)을 제거하려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군량을 도우려는 것이니 그 뜻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법을 시행하는 데는 형편상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태평 시대에는 혹 시행할 수 있으나 오늘날에는 시행할 수 없습니다. 대개 전지 1결(結)에 미곡 2두씩을 내게 하면 그 내는 것이 적어서 백성에게 편리한 듯합니다. 그러나 상란(喪亂) 이후로 전야(田野)가 버려지고 묵어서, 한 장정이 경작하는 바는 겨우 식구의 식량을 이을 수 있을 뿐이므로 공사(公私)의 빚, 호역(戶役)의 수용(需用), 전세(田稅)의 미곡을 마련해 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또 이 때에 공물의 작미까지 아울러 징수하면 결코 소민(小民)이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전부터 공물의 댓가를 모두 토산(土産) 잡물을 편의에 따라 마련하여 바치게 하였으니 그 사이에 비록 각사(各司)의 하인이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구례(舊例)가 이미 이루어지고 민정(民情)도 익숙하여졌으므로 지금 갑자기 변경할 수 없습니다. 또 정해진 2두 이외에 이관(吏官)의 농간질과 갯가로 가지고 가서 배로 운반하고 경창(京倉)에 납입하는 비용이 있으니, 소민이 내는 바가 어찌 2두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올해 수납해야 할 미곡이 5만여 석인데 현재 경창에 도착한 수효는 4천 석도 되지 않아 온갖 경용(經用)을 장차 이을 수가 없으니 앞으로 백관의 요미(料米)를 무엇으로 반급하고 중국군의 양식을 무엇으로 방출하며, 제색(諸色)의 군병을 무엇으로 먹이겠습니까. 이것이 절박한 근심입니다. 설사 5만 석의 미곡을 다 징수하여 경창으로 실어온다 하더라도 공물을 교역할 때 또한 불편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서울이 잔파(殘破)되어 여러 가게가 썰렁하고 물력이 탕진하여 각색의 공물을 사들이고자 해도 얻을 수가 없으며, 또 물가의 경중이 무상하여 쌀값의 높낮이를 공평히 하기 어려우므로 해사(該司)는 억제하려 하지만 백성들은 비싼 값을 받으려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억제하면 소민이 이익을 중히 여겨 조금만 더 취해도 원망이 무더기로 일어나고, 비싼 값을 주고 구입하면 관용(官用)이 매우 급하여 그 값이 몇 갑절이 되어 경비를 대기 어려우니, 이 또한 심히 공평하지 못합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밖으로는 소민의 불편함이 이와 같고 안으로는 시행하기 어려운 형편이 이와 같아 당초 군량을 도우려던 계책마저 허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설령 외방의 백성에게 편리한 바가 있고 군병의 양식에 도움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안으로 시행하기 어려운 사세가 이처럼 극심하다면 끝내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해사(該司)로 하여금 올해 수납할 작미(作米)의 원수(元數)를 얼음이 얼기 전에 각별히 납입하도록 독촉하게 하소서. 경창에 실어들인 것이 비록 5만 석에 차지 않더라도 그 수량이 3∼4만 석에 이르면 그래도 용도에 충족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명년의 국계(國計)는 결코 지공할 방도가 없으니 일찍 계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훈련 도감에 소속된 군사는 당초 한때 굶어 죽게 된 상황에서 절박한 요식(料食)을 위하여 지원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금년은 약간 풍년이 들어 여염 사이에 곡식이 천한 듯하니 비록 유리(流離)하여 생업을 잃은 백성도 다 살아갈 방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감의 군사는 모두 날마다 분주하여 역(役)의 괴로움이 갑절이나 심한데도 요미(料米)의 박함은 전과 같으니 자신의 의식도 오히려 부족한데, 하물며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아내와 자식을 기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기 때문에 다 싫어하고 괴로와하는 마음을 품고 모두 도피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속오군(束伍軍)의 초병(哨兵) 중에도 이미 차츰 도망해 가는 자가 있습니다. 이러한 군사를 급한 때에 쓸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양료(糧料)를 더 지급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자니 국가의 저축이 고갈되어 이어나갈 길이 없고 약속한 명령을 그대로 지켜 전처럼 부리자니 군인이 살아갈 수 없어 원망만 날로 심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백방으로 생각해봐도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먼저 호조(戶曹)로 하여금 올해 수납한 미곡(米穀)이 얼마인가를 조관(照管)하게 하여, 1년 경비를 덜어내고 그 나머지로 군량을 삼아 군량의 다소에 따라 군의 원액(元額)을 정하고, 무예가 성취되어 쓸 만한 자는 가려서 올려주고 무예가 용렬하여 쓸모없는 자는 살펴서 내리며, 내린 자의 요미(料米)를 올라간 자에게 더 주어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아내와 자식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게 한다면 군정(軍情)의 원망이 반드시 오늘날처럼 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선조 28년 9월 24일)[322]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군국(軍國)의 수용(需用)을 마련해 낼 길이 없습니다. 임진년부터 외방의 공물을 작미(作米)로 정하니, 백성이 내는 미곡이 많아져서 1결(結)에 혹 7∼8두에 이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뒤에 호조에서 작미(作米)를 항식(恒式)으로 정하여 2두씩을 내도록 하였으니, 민정(民情)이 원망하고 괴로와하는 지경에 이름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해조(該曹)에서 처치한 곡절이 혹 미진한 바가 있고 또 중국 사신과 장수들의 지대(支待)가 번거로와 민간에 별복정(別卜定)305)[362] 함을 면할 수 없으며, 또 시장에서 무역하도록 독책(督責)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의논이 혹 그것을 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의심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 차사(箚辭)도 앞으로 계속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을까 염려된다는 것이니, 지금 곡식이 천할 때에 해사(該司)로 하여금 금년에 납입해야 할 작미(作米)의 원수량을 기한 안에 독납(督納)하도록 하고, 이미 거두어 들인 뒤에 계속 시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바야흐로 다시 의논하여 그 중에 변통할 것이 있으면 또한 뒤따라서 자세히 참작하여 구처해야 합니다. 훈련 도감에 소속되는 군사도 이미 액수(額數)를 정하였으니, 그 중에 금군(禁軍)으로 승진되어 금군의 요미(料米)로 6두를 받는 자는 더 지급해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양곡이 넉넉하지 못하여 충급(充給)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인원을 감하여 양곡을 더 주자니 군인의 수효가 너무 적어 모양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훈련 도감으로 하여금 호조와 협동해서 다시 상량(商量)하여 양곡을 계속 공급할 계책을 강구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무예는 어느 한 쪽도 폐할 수 없으니 앞으로는 무사 및 포수·살수 등을 일체로 권장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서쪽 변경에 이미 근심스러운 단서가 있으니 우리의 비어하는 방도를 진실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안주 목사(安州牧使) 조호익(趙好益)은 비록 무장은 아니나 일찍이 사변의 초기에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였으니 이는 이미 시험해 본 사람이므로 바꿀 필요가 없고, 정주(定州)의 전 목사 김수남(金壽男)은 이미 그대로 잉임(仍任)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밖에 요새를 지키고 형세를 이루는 등에 관한 일도 본도에 이문(移文)하여 거행하도록 신칙함이 마땅하겠습니다. 관서에서 연습하는 군사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니 서울의 포수를 뽑아 보낼 필요가 없고, 해서에 정예군을 이미 뽑게 하였으니 행장을 꾸려 기다리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변경의 군량이 바닥이 났으므로 미리 첨방(添防)하기는 어렵습니다. 강화는 보장(保障)의 땅이어서 진실로 팔방을 공제(控制)하는 형세가 있으니 그 규모와 포치(布置)를 병조로 하여금 본사(本司)와 의논하여 사목(事目)을 마련해서 경기 관찰사에게 신칙하여 착실히 조치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28년 9월 28일)[323] 신잡이 아뢰기를, "군사는 징발할 수 있으나 양식은 나올 곳이 없습니다. 만일 양식이 없으면 수만 명의 군사가 곧 흩어져 버릴 것이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본도에는 부민(富民)이 없고 다른 데에서는 얻을 만한 방법이 없습니다. 연전의 전세(田稅)는 콩이 1만여 석이고 쌀은 겨우 2천 석뿐이니, 이것으로는 중국군을 공궤하는 것도 부족할까 근심스럽습니다. 오늘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각사(各司) 노비의 신공 작미(身貢作米) 및 내수사 노비의 신공을 모아서 쓸 뿐입니다. 그런데 신이 일찍이 삼번 군사(三番軍士)의 봉족(奉足)과 대량미(代糧米)를 각각 그 계수관(界首官)으로 하여금 거두어들이게 하는데 거의 2만 2천여 석이나 되었습니다. 이를 각처에 저축해 두고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명년 봄에 무사하면 방수(防戍)하는 군인에게 보내줄 수 있으니 이것은 약간 넉넉합니다." 하고, (선조 28년 10월 17일)[324] 그러나 이 대공수미법은 시행된 지 1년도 못되어 폐지되고 말았다. 징수한 쌀의 수량이 예정과는 달리 매우 적어서 군량 조달에 차질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정부의 소요 물품을 구입하는 일도 여의치 못하여 수시로 원래의 현물로 징수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가 아직도 전란 중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주요 원인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기반의 취약성이나 제도상의 결함에 있었다기 보다는 유성룡의 말대로 방납·호우배의 이권회복 운동에 있지 않았나 생각되고 있다. 이리하여 임진왜란의 종식과 더불어 공납제의 폐해는 다시 일어났다. 阿多介(虎皮방석) 1坐의 代價가 무명 200필(백미 70여 석)로 치솟는 가운데 농민은 날로 유망하여 갔고, “가난한 농민은 처자를 먹이지도 못하는 형편인데 부자들 중에는 1년의 쓰임새가 쌀 수천 석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0941)0941)(趙 翼,≪浦渚集≫卷 2, 因求言論時事疏.) 극심한 빈부의 차이를 형성하여 갔다. 농민의 대대적인 항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위태로운 사태가 빚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325] 공물을 일부도 대체가 불가능한 예산 규모인 1결당 2두를 책정해놓고 그마저도 군량미로 먼저 쓰려고 했었다.[363] 대국민사기극이 따로 없었다.[326] 비변사가 아뢰기를, "마 도독이 보내온 자문의 뜻은 어사가 이미 알고 갔습니다만, 도중에 질병이나 사고가 있게 되면 반드시 속히 전달되지 못할 것입니다. 자문에 보고해 온 내용으로 살펴보면 쳐들어올 근심이 조석 사이에 일어날까 염려스러우니 방비에 관한 일을 잠시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급속히 선전관을 보내어 밤낮을 가리지 말고 본도로 달려가서 감사와 병사(兵使)에게 비밀히 유시하고, 그들과 함께 의논하여 청천(淸川) 이남의 포수를 급급히 정선(精選)하고 화약과 화기도 아울러 수송하여 요해처에 첨방(添防)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시급한 것은 양곡을 저축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본도의 창고가 텅 비어 조처할 길이 없으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갑오년324)(註 324)(갑오년 : 1594 선조 27년.) 과 을미년325)(註 325)(을미년 : 1595 선조 28년.) 에 응당 납입해야 할 공물과 노비의 신공(身貢)을 추곡을 내기 전에 추출하여 쌀로 만들어 군량에 보용(補用)하도록 하소서. 그러나 관리하는 사람이 적격자가 아니면 반드시 제때에 마련하지 못할 것입니다. 본도의 도사(都事)를 시종(侍從)이나 대간(臺諫)을 거친 사람으로 각별히 가려 보내어 양곡 조달하는 소임을 맡기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오늘날 적을 방어하는 대책은 들판을 청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우리 나라는 지모가 졸렬하고 사려가 부족하여 호령이 행해지지 않으니, 만일 양곡을 모았다가 적을 도와주는 경우가 된다면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다. 풀을 태우고 양곡을 거두어 들판을 청소하고서 기다리면 저들이 1백만 명이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들판을 청소하는(淸野) 두 글자에 대해 다시 지수(指授)하기 바란다." 하였다. (선조 28년 10월 9일)[327] 한문을 읽을 줄 아느냐는 뜻이 아니라 유학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묻는 것이다.[328] 이순신은 무관이다. 무관의 경우 유학적 소양을 문과보다는 덜 해도 되었는데(정작 이순신은 평균적인 무관과는 다르게 문관에 가까울 정도로 배운 사람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무과시험에서도 유교 경전 독해 시험이 있었기에 문관만큼은 아니더라도 무관에게도 유교 소양이 필수였다. 국교가 유교인 국가라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 실제로 고려시대에는 무관들의 글이 짧거나 심하면 아예 문맹도 부지기수라 총사령관은 문관이 맡고 무관은 바로 밑에서 실무자 역할밖에 못 했다. 강감찬서희도 사실 문관이었다.) 선조의 경우 어쨌거나 혼란한 상황속에서 유교적 소양, 정확히 말해서 충효가 중요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류성룡에게 이순신이 글을 아냐고 물어보는건 적절한데 만에 하나 이순신이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여태껏 승승장구해오던 이순신의 반란은 이몽학[364]의 반란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할 수 있고 임진왜란이라는 최악의 악재 속에서는 끔찍한 악몽이다. 그나마 충효라도 확실히 갖추고 있다면 반란만은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점을 다 떠나더라도 이미 역사상 힘 있는 무신이 나라 뒤엎는 일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