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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아놀드의 원수 진급 당시 공군은 육군 항공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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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18f><colcolor=#ffffff> | |||
본명 | 존 조지프 "블랙 잭" 퍼싱 John Joseph "Black Jack" Pershing | ||
출생 | 1860년 9월 13일 | ||
미주리 래클리드 | |||
사망 | 1948년 7월 15일 (향년 87세) | ||
워싱턴 D.C. | |||
묘소 | 알링턴 국립묘지 | ||
재임기간 | 제10대 육군참모총장 | ||
1921년 7월 1일 ~ 1924년 9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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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 미합중국 육군 | ||
1886년 ~ 1924년 | |||
최종 계급 | 대원수 (미합중국 육군) | ||
최종 보직 | 육군참모총장 | ||
주요 보직 | 육군사관학교 교수사관 겸 생도중대장 필리핀 제도 미국군정부 민정차관 주 일본 미합중국 대사관 국방무관 미국 원정군 총사령관 | ||
주요 참전 | 미국-인디언 전쟁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필리핀 전쟁 판초 비야 원정 제1차 세계 대전 | ||
주요 서훈 | 수훈 십자상 수훈 십자 훈장 바스 훈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훈일등욱일대수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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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살아가면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때 늦은 때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기 하루 전날일지라도 하고자 한 일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늦은 때가 아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게 뭐냐면 말이죠, 저는 담배, 아주 많은, 총탄보다 더 많은 담배가 필요하다고 답하겠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자 당시 미국 원정군 총사령관이었으며, 미군 최초의 현역 원수[1]이자 조지 워싱턴, 율리시스 그랜트와 더불어 미군 역사상 단 셋밖에 없는 육군 대원수[2]이기도 하다. 별명은 블랙 잭이다.[3] 미국 육군 대원수 3명 중 유일하게 미국 대통령을 역임하지 않았다.
2. 생애
2.1. 청년 시절
청년 때 1878년에 고등학교 졸업 후 흑인 아동을 위한 교사가 된 후 1880년 북 미주리 노멀 스쿨에 입학한다. 이후엔 웨스트포인트 입학을 목표로 하게 된다.2.2. 초기 군 경력과 생애
1882년에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한다.이후 1886년에 졸업 후 미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 6기병연대 소속으로 아파치 부족에 대한 전쟁에 참가하였다.
1893년, 로스쿨을 졸업하고 1895년에 중위로 진급하여 제 10기병연대(버펄로 솔저)의 장교로 근무하며 전투에도 참여하여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1897년에 육군사관학교 교수사관 및 생도중대장으로 재직했는데 상술한 블랙 잭이란 별명을 이때 얻었다.[출처]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미 의용군의 소령으로 임명되었고, 여기서 자신이 이끌던 제 10기병연대를 다시 이끌며 활약한다. 이후 미국-필리핀 전쟁에서도 활약하는데 의용군 소령 계급을 반납, 정규군 대위로 복귀한 후 제 1기병연대와 제 15기병연대에서 복무하며 모로스족과 싸웠다. 1903년, 그는 다시 미국으로 복귀하였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가 대령으로 진급하길 원했다. 그러나 당시 미 육군은 진급에 공로보단 연공서열에 중점을 두는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퍼싱은 대위 계급에 머물게 된다.
1904년, 그는 미 육군 대학을 졸업하였고. 1905년, 러일전쟁의 참관한 후 복귀했다. 또한 와이오밍 주 출신 상원의원 프랜시스 E.워랜[5]의 딸 헬렌 프랜시스 워랜과 결혼하였다. 이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를 준장으로 임명하길 원했고, 의회는 이를 승락했다. 장교 800여명의 연공서열과 3개의 계급을 한 방에 넘어버린 이 파격적인 진급이 군사적 능력이 아닌 정치적 연줄에 의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많은 군인들이 그를 지지해주었다.
이후 네 명의 자녀들을 얻었고 ,포트 빌리스에서 근무 하던중.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자택에서 화재가 일어나 아내와 3명의 자녀를 잃고, 5살 난 막내아들 워렌만이 살아남는다.
1916년, 그는 판초 비야를 잡기 위해 맥시코로 원정군을 이끌었다. 지도조차 없어 현지 가이드만을 따르며, 보급에 차질[6]을 빚는 등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는 맥시코에서 활약했으나 판초 비야를 붙잡는데는 실패하고 만다. 이때 소장으로 진급한다.
2.3. 제1차 세계 대전
1917년 4월 6일 치머만 전보를 계기로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퍼싱 소장은 중장을 건너뛰고 대장으로 진급하여 27,000명 규모의 미국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 본토에 파견된다. 물론 파병 초부터 미군이 지대한 역할은 할 수 없었고 1918년 7월에 돼서야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미군은 압도적인 육군, 해병대 지상군의 병력비로 독일 제국을 패망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 하였다. 전쟁 기간 중 퍼싱 대장은 볼품없고 경험도 부족한 1개 군단 수준의 파견군에서 급격히 규모가 불어나 약 3개 야전군 규모[7]로 재편된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국 원정군을 총지휘하였다. 아미앵, 아르곤 숲, 생미이엘, 벨로 우드 등 여러 곳에서 독일 제국군을 격파하여 그 공로로 종전 후, 율리시스 S. 그랜트 대장, 윌리엄 테쿰세 셔먼 대장, 필립 셰리든 대장[8] 이후 최초의 원수 (General of the Armies) 계급을 받는다.[9]그는 전쟁 중에 그가 본 영국과 프랑스의 Mk 전차, 생샤몽 전차 같은 전차에 영감을 받아 르노 FT 전차들을 사들여 최초의 미 육군 기갑부대를 창설하였고 지금의 미국 기갑의 기틀을 마련했다. 휘하 기갑 부대장으로 그 유명한 조지 S 패튼을 임명하였고, 원정군 보급 및 작전참모로 조지 마셜, 레슬리 맥네어 등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래의 미 육군을 이끌 인재들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이는 퍼싱이 인력 운영에서도 탁월했음을 보여준다.[10]
2.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1년 퍼싱 원수는 미합중국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며 페르디낭 포슈 및 필리프 페탱 등 1차대전 동맹국 지휘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였다. 이 시기에 1차대전 기념관을 조성하였고, 정치권에서는 인기가 높아진 퍼싱에게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 출마를 권하기도 했으나, 민주당 소속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출마를 고사하였다. 퍼싱 원수는 1924년에 육군참모총장직에서 이임하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에는 1차대전의 회고록을 출판하여 퓰리처 상을 수상한다.퍼싱 원수는 1948년까지 생존하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다시금 무너지는 장면과 냉전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소련의 영향력을 지켜보았다. 진주만 공습과 미국 정식 참전 이전부터 적극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 대한 미국의 지지와 지원을 호소했으며, 특히 1941년 12월에는 진주만 공습 직후 휠체어를 탄 채로 모병사무소에 나타나 현역 복귀를 자원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11] 영국의 정치인 로이 젠킨스가 쓴 처칠 평전의 내용에 따르면 1944년 미국 방문 당시 자유 프랑스의 샤를 드골 장군은 미불 우호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퍼싱에게 경의를 표하는 겸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 당시 양로원에 있었던 퍼싱에게 찾아갔는데, 이 시점에선 이미 많이 노쇠했는지 드골에게 "내 오랜 벗, 페탱 원수는 어찌 지내시는가?" 물었고, 드골은 센스 있게 "마지막에 제가 뵈었을 때에는 잘 지내시던 것 같았습니다."라 대답했다고 한다. [12]
그의 아들 프랜시스 워런 퍼싱 대령은 2차 대전 당시 참모총장 마셜 장군의 부관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 차남, 즉 퍼싱 원수의 손자인 리처드 퍼싱은 1968년 베트남전 당시 보병 소대장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미국은 퍼싱 장군을 기념해 이후 그의 이름을 M26 퍼싱 중전차(중형전차)와 MGM-31 퍼싱 탄도 미사일에 붙였다.[13] 또한 미 육군은 1차대전 말기이던 1918년에 군번 제도를 도입하는데, 퍼싱 장군은 군번 O-1 즉 미 육군 장교 군번 1번을 부여 받는다.
3. 기타
미군에서 6성 장군 계급인 대원수 계급을 받은 네 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해 미 의회가 대륙군 총사령관이자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14]에게 퍼싱과 같은 계급인 'General of the Armies' 계급을 추서했는데 이 때 "'General of the Armies' 는 미군의 모든 계급에 선임한다"고 명시해서 자동으로 대원수가 되었다.[15] 이와 비슷하게 조지 듀이가 받은 'Admiral of the Navy' 역시 받을 당시에는 원수 계급였으나 워싱턴에게 대원수 계급을 추서할 때 'General of the Armies'와 동등한 계급이 되면서 조지 듀이 역시 대원수 계급이 되었다. 그래서 미군 역사상 대원수 계급을 받은 사람은 워싱턴과 퍼싱, 그랜트, 듀이까지 해서 총 네 명이다.이른바 '퍼싱 원칙'의 유래를 제공했다는 평을 받는다. 타국과의 연합작전에서 자국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데, 미군은 퍼싱의 지휘로 1차대전 막바지에 싸울 때도 프랑스군의 포슈 원수가 총사령관을 맡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싸웠다.[16]
한국에서 전작권 전환 후 들어설 새 연합군사령부의 사령관을 한국인 장성이 맡게 되면서, 이것이 퍼싱 원칙의 예외 내지 변경인가를 두고 설왕설래가 나오기도 했다.기사 그러나 데이비드 맥스웰 미국 민주주의수호재단 선임 연구원은 전작권 전환 이후에도 군사위원회가 연합군사령부보다 높은 지위를 유지하기 때문에 한국인 장성이 연합군사령부의 사령관 자리를 맡는다고 해도 퍼싱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기사
조지 패튼의 매제가 될 뻔한 일도 있었다. 퍼싱은 패튼의 여동생인 애나 윌슨 패튼(Anna Wilson Patton)과 한때 약혼 관계였다. 그러나 퍼싱이 1차대전 참전 때문에 프랑스로 떠나면서 관계는 자연스럽게 멀어진 데다 이 양반이 프랑스 아가씨랑 바람까지 피는 바람에 결국 약혼을 취소했다. 퍼싱은 1860년생, 애나는 1887년생이므로 나이 차이가 상당하다.
퍼싱은 애나 패튼과 만나기 전에 이미 혼인을 한 적이 있다. 퍼싱은 1905년 공화당 소속의 프랜시스 워런 와이오밍 상원의원의 딸인 헬렌 프랜시스 워런(Helen Frances Warren)과 결혼했다. 퍼싱은 헬렌 사이에서 1남 3녀의 자식을 얻었다. 그러나 1915년 8월 27일 자택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아내와 딸들은 질식사하고 6살인 아들 프랜시스 워런 퍼싱만 살아남았다. 그 뒤에 안나와 교제하게 된 것. 이후 퍼싱은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라는 여성과 사귀다가[17] 구혼까지 했는데 이 여성은 퍼싱을 차고 다른 미군 장교와 결혼하는데 그 장교가 더글라스 맥아더다. 1946년 프랑스 출신의 미술가인 미슐린 레스코(Micheline Resco)와 결혼했다. 미슐린과의 나이 차이는 35살 차이였다.
아들인 프랜시스 워런 퍼싱(1909년 ~ 1980년)은 아버지를 따라 군에 입대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의 참모로 활동했다. 최종 계급은 대령. 전역한 뒤엔 성을 딴 Pershing LLC란 증권 회사를 설립해서 경영했으며 1980년에 사망했다.
4. 진급 이력
- 1906년 9월 20일: 준장
- 1916년 9월 25일: 소장
- 1917년 10월 6일: 국군 대장
- 1919년 9월 3일: 대장
- 1924년 9월 13일: 예비역 대장
- 1944년 12월 14일: 대원수
5. 대중매체
5.1. 게임
5.1.1. 도미네이션즈
영웅 전술성 병력 및 저부조가 전설 유물로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영웅 퍼싱(도미네이션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전설 유물/영웅 퍼싱의 저부조 문서 참고하십시오.
[1] 미국의 두 번째 현역 원수는 해군의 조지 듀이이다. 이들의 계급은 현재 미군 대원수 계급을 나타내는 General of the Armies/Admiral of the Navy이지만 받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은 이 계급을 사실상 원수 계급으로 받은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2] 이른바 6성 장군[3] 이 별명은 육군사관학교 교관 시절 그를 싫어하던 생도들이 그가 흑인 부대였던 제10기병연대에서 근무했던 것을 비꼬아서 붙였다. 원래는 Nigger Jack이었던걸 나중에 순화시킨 것인데 부정적인 의미였음에도 그를 대표하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출처] https://historicmissourians.shsmo.org/john-pershing/[5] 1863년, 남북전쟁에서의 공으로 명예훈장을 받은 경력이 있다.[6] 당시 미 육군이 보유한 트럭은 1000대도 되지 않았다. 때문에 보급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7] 세 번째 야전군은 종전 후 창설됨.[8] 남북 전쟁의 영웅 그랜트, 셔먼, 셰리든 세 대장은 별 4개의 대장 계급장을 패용했지만 3성장군이 육군 선임 장교 (참모총장 직제 설립 이전의 미 육군 최선임 보직) 이던 시절이라 이들의 실질적인 대우 및 의전은 오늘날 원수에 가깝다.[9]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때 정식으로 5성 장군 계급인 원수(General of the Army, 퍼싱의 계급인 General of the Armies가 아니다) 계급이 생겼고 이 때 퍼싱은 여전히 살아있었기 때문에 이에 퍼싱의 계급을 어디에 맞춰줘야 하나 문제가 생긴 것이다. 미군은 "퍼싱이 원수보다 더 높은 계급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연공과 진급 일자로 보아 그 계급은 다른 원수 계급에 선임한다"고 해석하면서 퍼싱은 사실상 6성 장군 대우를 받았고 이 문제는 나중에 워싱턴에게 대원수 계급을 추서하는 과정에서 해결된다.[10] 더글러스 맥아더 역시 1차대전 당시 퍼싱의 휘하 장교로 원정군 생활을 했으나, 퍼싱과 작전에 대한 견해의 차이를 좁히지 못해 시시때때로 충돌이 있었다. 물론 당시로서는 맥아더가 계급에서 한참 위였던 퍼싱의 작전안을 감히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맥아더와 퍼싱의 대립은 퍼싱의 후계자인 마셜과의 경쟁으로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어진다.[11] 물론 당시 이미 80세가 넘은 퍼싱의 현역 복귀는 누가 봐도 말이 안되고, 일종의 프로파간다로서 각본에 따라 이뤄진 행사일 가능성이 높다.[12] 참고로 페탱 원수는 프랑스가 패배한 후 독일의 꼭두각시로써 앉혀진 비시 프랑스의 수장으로 드골의 입장에서는 퍼싱이 이 사실을 알게되어 충격을 먹을까봐 본인 나름의 머리를 굴렸을수도 있다.[13]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전차를 생전에 볼수 있었던 드문 사례다. 조지 S 패튼과 월튼 워커, 크레이튼 에이브람스 등의 후대 장군들이 갖지 못했던 행운인 셈.[14] 생전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Lietenant General)이다.[15] 엄밀히 따지면 이 'General of the Armies' 계급이 6성 장군이라고 명확히 정한 것이 아니다. 그냥 미군의 모든 계급에 선임한다고 했고 미군은 5성 장군인 원수 계급까지 있기 때문에 5성 장군보다 높은 6성 장군이 된 것.[16]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 '퍼싱 원칙'은 미군 사령부 위의 연합군 총사령부의 지휘는 용인하더라도, 미군 사령부의 지휘에서 벗어난 부대(다시 말해 타군에 미군 부대를 빌려주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는 원칙인 것이다.[17] 비슷한 시기의 대여배우인 루이스 브룩스와는 동명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