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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24:40

파독 근로자

파독 광부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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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매체에서의 등장4. 관련 문헌

Programm zur vorübergehenden Beschäftigung koreanischen Bergarbeitern im westdeutschen Steinkohlenbergbau
서독 광산에 한국인 광업종사자를 임시채용하는 프로그램
Programm zur Beschäftigung qualifizierter koreanischen Krankenschwestern und Krankenpflegehelferinen in deutschen Krankenhäusern
독일 병원에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자격있는 한국 간호인력 채용하는 프로그램

1. 개요

실업 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한 해외인력수출의 일환으로 1960~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가 한독근로자채용협정(Anwerbeabkommen zwische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und Südkorea) 등을 통해 서독에 파견한 노동자로 직종은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였다.

2. 상세

파독 근로자(광부,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는 일반적으로 1960~70년대 경제 개발을 위한 원조 및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파견된 광부, 간호요원 및 기능공을 뜻한다. 한국 정부의 협정에 의한 것 이외에도 민간 알선을 통해 서독으로 파견된 소수의 간호사가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

파견 시기와 파견 인원은 출처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현재 정부의 공식적인 집계인 2008년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는 1963~1977년 사이 광부 7,936명, 간호요원 11,057명 및 기능공 931명 등 총 18,899명으로 밝히고 있으나[1] 1963년 이전에 주로 민간 알선을 통해 파견된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의 파견은 포함되지 않는다.

1960년대 한국은 이전까지 주로 미국에서 무상원조를 받아오던 상황에서 미국이 서구 경제 회복과 자국 국제수지 악화에 따라 기존의 무상원조를 줄이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 다른 서방 국가에 대해서도 경제 지원의 유치를 시도했다. 이는 박정희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하기 이전부터 진행된 것으로[2] 서독은 1961년 3월 기술원조협정 체결을 시작으로 정부 차원의 협력이 시작되었으며 1961년 12월 '한․독 정부간의 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공공과 상업차관 합계 1억 5천만 마르크(당시 환율로 3,700만 달러 상당)의 유상원조를 제공하였다.[3]

한편 한국은 인구 급증으로 인한 실업난에도 처해 있었으며 전후 부흥에 의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서독의 수요와 맞는 상황이었다. 5.16 군사정변 이전에는 대한석탄공사지멘스와 광부 송출 각서를 맺었다가 쿠데타로 흐지부지된 바도 있다. 그러나 서독 광산업계가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면서[4] 1962년 기업별로 인력 유치 의사를 밝히며 서독 정부를 압박하고 1963년 5월에 공식적으로 서독 노동부 차원의 유치 의사가 전달되면서 1963년 12월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한․독 정부 간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광부와 달리 간호인력(간호사, 간호조무사)은 1963년에 정부가 파견하기 이전인 1950년대부터 이미 민간에서 파견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독의 고도성장으로 간호 인력이 부족해지자 마인츠 대학교 병원에 재직하던 이수길 박사를 비롯한 한국계 의사들이나 독일 종교인들의 주선으로 1950년대부터 간호사 송출이 시작되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오히려 주독대사관이 가뜩이나 광부들이 대거 들어온 통에 관리가 어렵다고 간호사 파송을 반대할 정도로[5] 미온적이었으나 1966년 광부 송출을 전담하던 한국해외개발공사가 이수길과 업무 계약을 맺었고 1969년에는 독일병원협회와 협정을 맺어 파송이 진행되었다.

다만 1972년을 정점으로 간호인력 파송은 감소했는데 이는 간호인력 상당수가 계약기간을 어기고 이탈하여 미국, 캐나다 등지로 이주하는 문제가 있었고[6] 서독으로 파견된 인력은 곧 한국의 의료 공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973년 서독 정부가 외국인 노동력 도입 중지 방침을 내림에 따라 유예를 거쳐 간호 인력은 1976년, 광부는 1977년 파송이 종료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서독이 차관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한국 측의 지급보증이 불가능하여 파독 근로자의 임금을 담보로 잡는 방식으로 해결했다는 통념이 있는데 이하의 근거를 볼 때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파견 조건으로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9] 적금과 함께 1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계약조건을 달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불확실하다. 조사에 의하면 송금을 전혀 안 하는 경우도 많이 존재했다. 물론 파독 노동자들이 간 것이 정부 주도이든 아니든 간에 경제발전에 어느정도 기여한 것은 확실하다.

「파독광부 30년사」에 따르면, 1963년에서 1979년까지 독일에서 광부 65명, 간호사 44명, 기능공 8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작업 중에 사망한 광부가 27명, 자살한 광부가 4명, 자살한 간호사가 19명이었다.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정해본 교수조선일보 인터뷰[10]에서 "1967년 당시 서독 파견 간호사들이 보내온 송금액을 한국 상품수출액의 35.9%, 무역외수입의 30.6%를 차지했다"면서 "이들이야말로 한국민들이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게 도운 일등공신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상기 과거사정리위원회 자료에 의하면[11] 1965~1967년 3년간 서독 근로자의 송금액은 총수출 대비 1.6~1.9%로 정해본의 발언과는 격차가 크다. 이는 정해본이 전체 본국 송금액과 혼동했거나[12] 혹은 다른 기사에서 정해본의 발언이 잘못 인용된 것이다.[13]

당시 파독 간호사로 재직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기본 간호(대변 치우고 식사수발 등)가 주요 업무였다고 하며 직업 현장에서 무시와 차별은 상상 이상이었다고 한다. 파독 가서 당장 IV 꽂고 각종 처치 업무를 담당했던 것이 아니었다. 광부도 지하 1,000m가 넘는 석탄광산 막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더구나 이렇게 중노동을 한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광부가 아니라 고졸로 현재의 대졸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었고[14] 심지어 대학까지 나온 인텔리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지원자들은 선발 심사전형에서 떨어질까 싶어 일부러 손에 연탄 가루를 묻히는 등 험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애국가를 부르면서 떼를 쓴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이것보다 더했다.

왜 이렇게 고학력자들이 많았냐면 정부에서 정한 자격 요건부터 중졸 이상으로 제한했고 워낙 경쟁이 치열했다 보니 소위 빽 있는 사람들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빽이 있는 사람들이 좋은 학력을 가질 확률도 높았다. 이렇게 온 인텔리 출신 광부들은 일은 서툴렀을지언정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오히려 실제 광부 출신들보다 독일 생활에 잘 적응했고 광부 일이 끝난 뒤 타 직업으로 전직하여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대 환자를 포기하지 않고 악바리 같은 집념을 보여주면서 독일에 남게 된 한국 간호사도 있으며 이들의 노고로 지금도 한국 간호사, 한국 간호조무사 자격이 있으면 독일에서 해외취업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15]

계약기간 이후에는 대다수 간호사들이 계약을 연장하고 독일에서 살게 되었다. 광부들 가운데 60% 가량도 독일에 남아[16] 유럽 한인사회의 중심을 이루었다. 1960년대는 합법적인 이민이 시작된 때였기 때문에 이 기회에 독일 및 타 국가로 이민하는 인구가 늘었다.

한편 독일 사회의 파독 근로자들에 대한 대접은 모범적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어느 나라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대접은 시궁창이기 쉬운데 독일에서 근로한 한국인 광부나 간호사들은 해외생활에서 오는 향수병이나 현장에서 차별 외엔 사회적으로 큰 핍박을 받지 않았고, 급여나 복지도 독일인과 똑같이 대우 받았다. 60년대 독일에 파견된 광부들은 자신들도 독일인과 동등하게 손가락을 조금 다쳐도 공상 환자로 분류되어 100%의 임금을 받고, 배탈이나 감기에도 80%의 임금을 받으며 쉴 수 있는 독일의 선진 노동 환경에 깜짝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국내에서 현재 꾸준히 일어나는 외국인 노동자 처우와 차별문제를 생각하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 없을 정도다.

더구나 한국인들은 범죄나 부정에 연루되는 일도 적었기 때문에 현지인들에게 크게 배척받을 까닭도 없었다.[17]

파독 광부들은 광부 일을 할 때 들었던 '글뤽 아우프(glück auf)'라는 말을 자신들의 모토로 쓰고 있으며 이 인사말에서 이름을 따온 '글뤽아우프 복지회'라는 단체도 있다. 독일 광부들의 전통적인 인사말로, 광산에서 일할 때 사고가 생기지 않고 무사히 작업을 마치길 바라는 뜻의 인사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살아서 만납시다'로 번역되었다.

파독 근로자 중 노후는 고국에서 보내고 싶어 독일인 배우자와 함께 귀국한 사람도 많은데 그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 남해독일마을이며 파독역사전시관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현재 40여 채가 넘으며 이 중 절반은 민박업을 겸하고 있다. 남해군청이 땅을 분양할 때 반드시 파독 근로자이거나 그들의 가족일 것[18], 독일식으로 집을 지을 것, 민박업 외에는 불가 등 엄격하게 기준을 만들었기 때문에 동네가 무척 깔끔한 편이다. 독일 주택 외에도 독일식 광장도 있고 독일 관련 행사도 열려서 독일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다.

초기 에피소드로 1964년 박정희 대통령 서독 공식 방문 당시 파독 노동자 위문 건이 있다. 나라 사정으로 외국 순방 한번 하기 어려운 대통령과 타지에 취업 나온 노동자의 만남인 만큼 감동이 없지 않겠으나 2000년대 들어 개발독재 향수 정서가 부각되면서 많이 부풀려져 유포되었다. 가령 박정희와 독일 대통령이 함께 울면서 광부들을 껴안았다는 풍문이 있으나 실제로는 독일 대통령은 그 자리에 없었고 박정희도 눈시울을 붉히면서 위로한 것은 사실이지만 껴안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

한편 근로자 파독이 박정희 재임기 경제개발의 아이콘과 같이 부각되는 것과 상반되게 독일 근무 후 현지 정착하지 않고 귀국한 노동자들이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거나 심지어 간호사들이 몸을 팔고 다닌다는 등의 헛소문이 돌아 명예가 실추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파독 광부 위문 시 약속한 재취업 주선 등의 건의사항이 묵살된 것은 물론이고 현지 사망자의 유해를 형편없이 처리하고 심리 상담 등 관리가 소홀하여 자살자가 나오기도 했다.

2020년 파독 근로자의 예우를 목적으로 한 "파독 광부ㆍ간호사ㆍ간호조무사에 대한 지원 및 기념사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2023년 8월 독일위 국적법 개정에 따라 67세 이상 파독 근로자는 어학증빙 없어도 독일 국적 취득이 가능해졌다.#

3. 매체에서의 등장

4. 관련 문헌



[1] 원 자료는 주서독한국대사관(현 주독한국대사관 분관) 및 독일병원협회 집계.[2] 이전의 장면 정부도 서독에게서 차관 제공 용의를 들은 적은 있다.[3] 상기 의정서의 국문 문구는 "이후에 상세히 설명되겠지만 7,500만 DM은 장기개발차관의 형식으로 공여할 것이고 그밖에 7,500만 DM은 장기수출거래로부터 발생하는 청구에 대한 보증을 하는 형식으로 할 것이다."이다.[4] 특히 1950년대에는 일본인 광부가 미국 대외사업부(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의 중개로 서독에 취업했는데 이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노동력 부족을 부추긴 것도 있었다.[5] 물론 행정 이기주의적인 요소도 있겠으나 1960년대의 재외국민은 북한의 공작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에 관리가 민감했다. 특히 서독공산권과 바로 대립하는 지역이었으며 실제로 1967년에 동백림 사건이 일어났을 때 연루 의혹을 받던 광부를 한국 정부가 무단으로 본국 송환하고 이를 빌미로 서독 측이 1969년까지 광부 송출을 거부하는 일도 있었다.[6] 1966~1969년 4년간 파송된 간호 인력이 2,600명 정도인데 1969년 한 해 무단이탈한 인력만도 231명에 달했다. 이 중 41명이 한국으로 복귀했고 164명이 미국-캐나다로 이주하였다.[7] 회고에는 광부와 간호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 시점에서 공적 채널의 파독 간호사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므로 패스.[8]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 이들의 임금이 지불된 은행은 대체로 지역 신용금고(Volksbank) 또는 도이체방크로 나타난다.[9] 계약 기간이 3년인 것을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10] 매일경제 기사.[11] 1차 자료는 관세청 통계(2008), 노동청 "한국노동통계연감"(1976).[12] 한국노동통계연감에서 인용된 1967년 전체 해외 노동자 송금액이 1억 1,470만 달러로 수출액 3억 2,023만 달러의 35.8%에 해당한다. 다만 이 해는 베트남 전쟁 특수의 최전성기로 전체 송금액의 절반 가까이가 베트남에서, 다시 1/3이 미국에서 왔다.[13]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는 파독 출신자의 진정에 의해 진행된 것이며 조사 과정에서 정해본의 자문을 받기도 하였기 때문에 정해본의 지식과 크게 모순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14] 60년대의 중학교 진학률이 40~50%였다.[15] 단, 영미권과 다르게 독일에서는 간호사의 사회적 지위가 비교적 낮은 편이기 때문에 급여 또한 높지 않다는 것에 주의하자. 애초에 독일에서 간호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더라면 독일인들이 간호사가 되는 것을 기피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독일어에 서툰 외국인을 간호사로 쓰려고 불러들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간호사 면허증을 취득하는 데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EU에서 교육제도 통합이 논의되면서 대학의 간호학과를 졸업해야 간호사가 될 수 있는 다른 유럽국가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간호사 면허증을 취득하려면 최소 고등학교 졸업장은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간호사가 되려면 대학은 졸업해야 하고 심지어 대학원 출신까지 있는 영미권 간호사와는 사회적 지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론 독일에서도 의사약사는 대졸 이상이다.[16] 이들의 1/3은 이후 미국으로 이민했다.[17] 당시는 국가주의, 전체주의, 집단주의적 사상이 훨씬 강할 때라 자기 하나의 잘못이 곧 한국 전체의 잘못으로 평가받는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에 이들로써는 처신을 잘해야 했다. 휴일 외출할 때도 타 국가 노동자들은 평소 입던대로 후줄근한 차림으로 외출을 나갔지만 한국인 노동자들은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갈 정도였으니.[18] 실제로 한국인 간호사와 독일인 남편, 이들의 자녀도 거주 가능 대상자였다.[19] 심지어 당시 오말순은 임신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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