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로자 파크스 Rosa Parks | |
본명 | 로자 루이즈 매콜리 파크스 Rosa Louise McCauley Parks |
출생 | 1913년 2월 4일 |
미국 앨라배마 주 터스키기 | |
사망 | 2005년 10월 24일 (향년 92세) |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 |
묘소 | 미국 워싱턴 D.C. 미국 국회의사당 캐피톨 힐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인권 운동가 |
신체 | 160cm |
학력 | 앨라배마 주 흑인교원대학교 (중퇴) |
배우자 | 레이먼드 파크스 (1932년 결혼, 1977년 사별) |
종교 | 개신교(감리회)[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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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흑인 인권 활동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이끌고 이를 성공시켜 미국 흑인의 인권 신장을 이뤄냈다.2. 생애
2.1. 평범한 주부
1913년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으로, 흑인을 차별하는 분위기로 인해 남편 레이먼드 파크스와 함께 NAACP(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에 가입했다.다른 미국 흑인들처럼 파크스 부부는 가난하여 몽고메리에서 여러가지 잡일을 하면서 사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파크스는 남편의 외조로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고[2] NACCP 지부에서 간사와 서기를 맡을 정도로 나름 열성적인 흑인 민권 활동가였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이전까지는 평범한 주부였다가 자리 이동 거부 사건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인권 운동에 뛰어들었다.'는 인상이 씌워져 있지만 이는 이후의 버스 보이콧 운동과 민권 운동 과정에서 대중에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어느 정도 만들어진 것[3]으로 실제로는 이전부터 이미 흑인 운동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2.2.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재연사진이며 뒤에 있는 사람은 당시 사건 보도를 맡은 UPI 기자 니콜라스 크리스(Nicholas C. Chriss)다. |
* 버스 기사는 반드시 백인이어야 한다.
* 흑인과 백인은 서로 지정된 좌석에서 격리된다.
* 버스 앞에서부터 네 줄은 반드시 백인들만이 앉아야 한다. 설령 버스 안이 비어 있어도 흑인은 앉지 못한다.
* 버스가 차면 흑인들은 백인들을 위해서 본인들의 자리를 비워야 한다.
*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경우 앞에서 뒤로 걸어가면 백인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으므로 앞문 쪽으로 가 요금을 내고 내린 뒤 뒷문으로 다시 타야 한다. 이 과정에서 흑인이 내리면 버스 기사가 흑인을 무시하고 돈만 받고 버스를 출발시키는 경우도 상당했다.
앨라배마는 지금도 보수적인 미국 남부에 위치하며 60년대에는 미국에서도 인종차별이 가장 심했던 곳으로 악명높았다. 전성기에는 KKK단이 대놓고 야간 행진을 했으며 도로 표지판으로 KKK 광고를 했을 정도다. 이로 인해 당시 인종차별 반대론자들은 미국 남부에서 활발히 행동했다.
이 날 그녀는 버스의 흑인 전용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버스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백인 탑승객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백인들이 앉을 자리가 없어지자 버스 기사는 흑인들에게 버스에서 흑인 좌석을 양보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그녀가 흑인 좌석에 앉아 있었고 흑인 좌석에 앉은 자신이 백인에게 양보할 이유가 없다고 하며 양보를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버스 기사는 그녀를 경찰에 신고했고 그녀는 경찰에 체포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 사건은 흑인 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흑인들은 이 사건으로 버스를 타지 않을 것을 결의하면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였다. 당국은 그녀에게 불법 보이콧을 했다는 명목으로 14달러라는 당시 흑인들의 경제력으로는 납부하기 어려울 정도의 벌금형을 선고했는데 이 결정은 오히려 버스 보이콧 운동에 불을 지피는 결과만 낳았다.
2.3. 흑백차별 철폐
결국 연방대법원이 버스 안에서의 차별을 철폐하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380여 일이 넘는 버스 보이콧 운동은 막을 내렸으며 이 사건에서 자신감을 얻은 흑인들은 유색인종 차별 반대 운동을 더더욱 활발하게 벌였고 결국 1970년대 들어서는 흑인과 백인 사이의 법적 차별은 완전히 사라졌다.반면 당사자인 그녀는 이 사건 이후 계속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협박으로 몽고메리에서 살 수 없어져 디트로이트로 이주했다.[4]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민주당 하원의원 존 콘이어의 비서로 1988년까지 19년간 일했다.
2.4. 세상을 바꾸다
그녀는 이 사건으로 20세기 중요한 인물 100인으로 뽑혔고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훈장을 받았으며 미국 의회로부터도 메달을 받는 영예를 누렸으며 2005년 건강이 악화되어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5] 12명의 조카들이 그녀의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미국 역사상 최초로 미국 국회의사당 로툰다에 이틀간(2005년 10월 30~31일) 관이 안치된 여성이자 첫 번째 민간인이 되었다. 장지는 디트로이트의 우드론 묘지(Woodlawn Cemetery)다.
3. 평가
그녀의 좌석 양보 거절사건은 현대 시민운동의 주요 유형 중 하나인 시민 불복종 운동을 보여준 사례로 꼽히고 있으며 미국과 전 세계의 차별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게다가 그녀는 시민단체 회원이기 이전에는 평범한 여성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미국 현대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전설이 될 수 있었다. 진지하게 미국사를 다루는 책 중에서 이 사건이나 그녀의 이름이 없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다. 미국 의회는 그녀를 '민권의 영부인'이자 '자유운동의 어머니'로 칭송했다.#그녀가 촉발한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평범한 주부의 저항활동에서부터 시작된 나비 효과는 아니었다. 실제로는 이전의 여러 실패 사례들을 고려해 이루어진 체계적인 시민불복 종 운동이었다. 그녀는 이전의 유사한 사건인 클로뎃 콜빈 사건에서는 직접 변호비용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로자 파크스 이전의 사례들은 대다수가 사례 당사자의 도덕적 흠결로 인해 대중의 호응을 제대로 얻지 못하거나 평범한 일반인이 주변의 압박을 받아 포기하면서 운동이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았다.[6] 그녀는 이러한 실패 사례들을 고려해 백인들이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요소들을 확실하게 배제하고 철저하게 순수한 피해자의 위치를 점했을 뿐만 아니라 인권 운동가인 만큼 인내심을 가지고 신념을 지켜서 버스 사건을 비롯해 이후의 흑인 인권 운동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사건에는 대중의 최적의 조건을 갖춘 인물을 대표로 내세워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그녀는 그런 부분에서 완벽한 조건을 가진 인물이었다.
물론 그녀가 완벽하게 준비된 조건의 인물이었다는 점이 이 운동의 의의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당시 흑인이 받던 차별은 실존하던 문제였고 그녀의 사례는 이전의 흑인 인권운동이 약점 하나에 꼬투리잡혀 무너지는 걸 봐 왔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녀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은 이유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그저 몸이 피곤했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난 신체적으로 힘들지 않았으며, 힘들다 하더라도 그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느날보다 더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종종 나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과 달리, 나이가 든 사람도 아니었다. 난 마흔두 살이었다. 내가 정말로 피곤함(진절머리)[7]을 느꼈던 것은 바로 참고 굴복해야 하는 일 그 자체였다.
People always say that I didn't give up my seat because I was tired, but that isn't true. I was not tired physically, or no more tired than I usually was at the end of a working day. I was not old, although some people have an image of me as being old then. I was forty-two. No, the only tired I was, was tired of giving in.
Parks, Rosa; James Haskins (1992). Rosa Parks: My Story. Dial Books. p. 116.
People always say that I didn't give up my seat because I was tired, but that isn't true. I was not tired physically, or no more tired than I usually was at the end of a working day. I was not old, although some people have an image of me as being old then. I was forty-two. No, the only tired I was, was tired of giving in.
Parks, Rosa; James Haskins (1992). Rosa Parks: My Story. Dial Books. p. 116.
4. 여담
- 아웃캐스트의 앨범 Aquemini의 싱글로 ’Rosa Parks’라는 곡이 있었는데 로자 파크스 재단이 해당 곡이 그녀를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며 소송한 적이 있다. 곡 자체에는 그녀에 관한 내용이 거의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소송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내용이였고 아웃캐스트가 승소하였다.
- 빅뱅 이론(시트콤) 시즌9 23화에서 셸든 쿠퍼가 자리를 새치기하는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 로자 파크스의 예를 들었다.
[1] 일각에서는 그녀가 2005년에 불교로 개종했다고 주장한다. 법보신문 기사 트라이사이클 신문. 실제로 불교에도 관심을 보였다. # 그러나 뉴욕 타임즈에 올려진 글에 의하면 법보신문이 인용한 더글라스 브린클리는 그녀를 아프리카 감리교 감독교회의 독실한 신자로 남아있었다고 작성했으며, 그녀의 전기를 집필한 잔느 테오하리스도 그녀를 기독교 신자로 묘사했다. 워싱턴 포스트에서도 그녀를 기독교인으로 언급했다.[2] 당시 흑인들 중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은 7%정도에 불과했다. 즉, 고등학교 교육만 받아도 당시의 흑인사회에서는 나름 엘리트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는데 심지어 로사는 남성들보다 훨씬 더 교육의 기회가 적었던 여성이었다.[3] 니전까지 흑인 일반인들은 흑인 차별에 환멸감을 느끼면서도 나서는 것은 다소 두려워하고 인권운동도 원래 하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있었는데 로자 파크스가 이 운동에 트리거를 당겼고 그 과정에서 '파크스 부인 같은 평범한 사람도 이런 식으로 저항을 할 수 있다.'고 일반 흑인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흑인 민권 운동가 사회에서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냈다.[4] 이 때 그녀가 디트로이트로 이사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이클 일리치는 그녀에게 좋은 아파트를 소개시켜줬고 10년 이상 월세도 대납해줬다고 한다.[5] 남편은 1977년 구강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로자 파크스는 재혼하지 않았다.[6] 대표적으로 클로뎃 콜빈은 15세에 백인 유부남과 관계를 맺어 임신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대중의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이전의 다른 피해자 중에는 직장의 백인 상사들이 해고한다는 협박을 해서 항소를 포기한 경우도 많았다.[7] 이 구절에서 나오는 tired는 앞에 나온 tired와는 묘하게 의미를 틀어 중의성을 함의하고 있다. 이쪽의 tired는 피곤함과 함께 진절머리가 난다는 의미도 들어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sick and tired of라는 숙어와도 상통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