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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vs 명장/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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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서기 500년 이전까지3. 501년부터 1500년까지4. 1501년부터 1900년까지5. 1901년 이후6. 실현되지 못한 명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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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각 사례의 순서는 반드시 시기순이다.

2. 서기 500년 이전까지

3. 501년부터 1500년까지

4. 1501년부터 1900년까지

5. 1901년 이후

6. 실현되지 못한 명장전



[1] 초한지의 영향과 이후에도 항우와의 전투에서 매번 깨져서 평가절하당하지만 상대가 항우여서 그럴 뿐 역사속의 유방은 명백히 명장이었다.[2] 초한전쟁 바로 이전의 최초 통일 국가였던 진나라가 통계한 인구 현황이 약 2000만 명이었는데, 유방이 통일한 후에 낸 인구 통계에서는 고작 500만 명이었다. 물론 난민, 행정 붕괴로 인하여 인구 파악이 힘들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당시로서는 국가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싸운 셈이다. 실제로, 역사서 사기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시체가 즐비했던 당시 초한전쟁의 상황을 인외마경이라고 칭했다.[본문] 안량, 문추 모두 원소명장이었는데 두 차례 싸움에서 모두 격파되자 원소군이 크게 동요하였다.[4] 단순히 한중을 차지한 지리적 이점뿐만이 아니라, 한중 땅을 기반으로 한중왕을 선언함으로써 황족이라는 이점을 한 고제와 연결시키는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다.[5] 거기다 유비는 여기에 형주를 방어하던 관우를 제외한 자신이 가진 거의 대부분의 장수들(장비, 마초, 조운, 황충, 위연 등)을 투입했다.[6] 병사, 말과 낙타, 무기와 깃발까지 성한 게 없었다고 한다.[7] 참고로 보두앵 4세는 아래의 리처드 1세의 당숙부이다.[8] 이슬람 연대기 작가 이븐 알 아티르는 도시를 통치하고 방어하는 능력을 가진 화신한 악마이며, 비상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그를 평가했다. 또한 이슬람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크인들 가운데 가장 책략이 뛰어나고 용맹스러운 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9] 티레는 함락 직전까지 갔다. 포위 공격 끝에 티레 시민들은 결국 항복하기로 결정했고, 협상도 끝이 나서 살라딘은 성벽 위에 게양할 자신의 깃발까지 보냈다. 그러나 그때 콘라드 1세가 도착했다. 그의 실력과 용맹함은 지중해를 건너 예루살렘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티레의 수비를 맡아 항복을 철회한 다음 직접 살라딘의 깃발을 시궁창에 버렸다. 살라딘은 다시 티레를 공격해온다. 살라딘은 콘라드의 아버지를 포로로 잡고 있었기에, 그는 콘라드에게 그가 도시를 자신에게 넘긴다면 아버지를 풀어주고 큰 선물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 굴리엘모 5세는 이집트인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을 때에도 아들에게 굳건히 위치를 지키라고 하였으며, 콘라드는 아버지가 충분히 살았다고 선언하며 직접 석궁으로 아버지를 겨누었다. 콘라드는 도시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으며, 1188년 굴리엘모 5세는 토르토사에서 석방되어 아들에게로 돌아왔다. 얼마 후 콘라드는 살라딘의 해군을 새벽에 급습하여 많은 선단을 나포한다. 살라딘은 해전에 티레 수비군이 관심이 쏠려 있다고 여기고 다시 티레를 공략했지만 콘라드는 부하들을 이끌고 다시 성 밖으로 나가 적을 격파한다. 살라딘은 다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10] 아리크부카를 아끼고 보호하는 몽케지만 이번일은 매우 화가 나서 추방을 시킨것 같다.[11] 세르비아 민담에서 인기 있는 인물 중 하나이며, 생전에는 왕도 아니고 공밖에 칭하지 못했음에도 "라자르 황제" 라고 부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12] 현대로 치면 거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수준이다.[13] 어차피 패배는 패배라는 점에서는 달라지는 게 없지만, 이 2패도 전투가 여러날 씩 길어지자 잠시 다른 일을 보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당한 것이다. 즉 적어도 스컨데르베우 자신이 오스만군 앞에서 등을 돌리고 달아난 적은 없다.[14] 당시 교황청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으며, 교황과 로마 주민들을 이탈리아 밖으로 피신시키려는 계획도 수립되고 "튀르크 놈들" 을 몰아내자는 십자군도 호소되고 했다. 헝가리와 스페인, 심지어 지중해나 이탈리아와 그닥 깊은 관련이 없던 포르투갈 등이 이에 응했는데, 오스만 측에서는 이듬해에 메메드 2세가 승하하면서 원정군을 물린 탓에 도시는 어렵지 않게 기독교 측에 함락되었다.[15] 그도 그럴 것이, 1501년에 사파비 제국을 세우고 불과 10년 만에 오늘날의 이란과 그 주변을 모조리 제패한 사람이다.[16] 다만 오스만 제국은 지배층이 이슬람을 믿었을 뿐이지 이슬람 이외의 종교에 대해서도 폭넓은 관용을 베풀었으므로, 오스만을 이슬람으로 못박는 건 부적절하다.[17] 이에야스가 학익진을 사용했으나 신겐이 어린진으로 학익진을 파훼시켰다.[18] 이순신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장계의 내용 때문에 오해를 할 수가 있는데, 이순신이 저 장계를 쓸 상황에는 배설로부터 인수한 판옥선 12척이었다. 장계를 보낸 이후 전라 우수사 김억추의 판옥선 1척이 더 추가된 것. 그래서 명량 해전 개시 기준으로는 13척이다.[19] 게다가 전투 초반에는 조선 군선들 중 이순신의 기함이 홀로 전속력으로 적을 향해 돌격하여 적선들을 박살내고 있었다.[20] 논란이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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