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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라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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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8대 국왕
아달라 이사금 | 阿達羅 尼師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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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 삼릉 전경.
출생
(음력)
59년 이후(?)[1]
사로국 서라벌
사망
(음력)
184년 3월 (향년 110~120대?)
사로국 서라벌
능묘 배동 삼릉(拜洞 三陵)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8대 국왕
154년 2월 ~ 184년 3월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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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왕 일성 이사금
모후 왕후 박씨
왕후 내례부인 박씨
자녀 박벽방[2]
신장 172cm[3]
왕호 아달라 이사금(阿達羅 尼師今) }}}}}}}}}
파일:배동 삼릉 묘비.jpg
배동 삼릉 묘비

1. 개요2. 생애3. 기타4. 아달라 이사금 대의 인물5. 《삼국사기》 기록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제8대 국왕. 칭호는 이사금.

일성 이사금(제7대)의 아들이며, 왕비는 지마 이사금(제6대)의 딸 내례부인(內禮夫人) 박씨다. 이는 8촌 사이의 족내 근친혼인데 이 시기 석탈해의 후손인 석씨 일족의 힘이 강해지자 박씨 왕족의 힘을 규합하기 위해[4] 세력 연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전기 신라의 마지막 박씨로 기록된 왕이다. 《삼국사기》 기록 이전 《일본서기》에서 이사부가 '가나'(일본식 이두)를 사용해 '이질부례지'로 기록된 것처럼 한반도식 이름은 '아달라'이지만 신라 중대 무렵부터 한반도식 이름에 중국식 단성을 붙여 기록했기 때문에 선조들과 같이 《삼국사기》에선 박씨로 기록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성씨를 소급해서 붙인 것이고, 아달라 시대 당시에도 성씨를 박씨 단성으로 썼을 가능성은 낮다. 그의 사망 이후 왕위는 석씨와 김씨에게 이어졌고, 훗날 아달라 이사금의 머나먼 자손이자 김씨 헌강왕(제49대)의 사위인 박경휘가 제53대 신덕왕으로 다시 왕위에 오를 때까지 박씨는 기록상으로만 보면 무려 728년 동안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적어도 내물 이사금(제17대) 혹은 내물 마립간 이전 신라 임금들은 기년을 꽤 수정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즘 대세인 논의로 따져도, 꽤 긴 기간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박씨는 이 기간 동안 석씨처럼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고, 신라의 주요 귀족 가문의 지위를 수백년간 계속 유지했다. 왕비도 아달라 가문 출신이 많은 편이어서 신덕왕이 헌강왕의 사위였다. 비록 박씨 가문이 아달라 이사금 이후에 왕위를 잠시 잃기는 했지만 아달라 이사금 치세에 신라는 여러 전투를 겪으면서 영역을 지금의 경상도 북쪽 끝 죽령[5]과 조령(문경새재)이 있는 소백산맥까지 확장했다. 소백산맥 교통로의 개척은 이제 신라가 소백산맥 바깥 강원-충청-전라 지역까지 진출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고구려백제의 공격을 방어하기 쉬운 천혜의 지형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이 지역을 선점하고 굳혀서 진흥왕 이전까지 가야와 대결하며 내실을 다지는 것이 가능했다.

2. 생애

아버지 일성 이사금의 추정 생년을 감안하면 아달라 이사금 본인도 군주가 됐을 때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즉위 이전의 행적은 기록에 남은 것이 없다.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제6대 지마 이사금 때는 상당히 좋았고, 제7대 일성 이사금 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아달라 이사금 시기에는 백제와 다시 사이가 나빠졌는데 발단은 165년 10월에 아찬 길선(吉宣)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하다가 들켜버리자 백제로 도망가버린 사건때문이었다. 아달라 이사금은 신라의 범죄자니까 돌려보내라고 백제 왕한테 송환 요구를 했다. 그런데 백제가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길선에 대한 송환 요구를 거부했다. 아달라 이사금은 화가 나 즉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갔는데 백제는 우주방어로 일관했고, 일단 신라군은 군량이 떨어져 퇴각했다. 167년 7월 백제가 신라의 서쪽 2개 성을 공격하자 8월에 무려 28,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반격했는데[6], 당시 백제로서도 상당히 위협적인 군세였기에 결국 잡아간 신라 백성들을 돌려주면서 화친했다. 그러나 170년 백제는 다시 신라를 침략했는데 소소한 노략질 수준이었고, 백제가 쳐들어오기 직전에 서라벌지진 + 서리 + 우박 3단 콤보가 와서 어수선했기 때문에 그런지 이번에는 변변한 반격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156년(재위 3년) 계립령(鷄立嶺)[7]을 열었다는 기록과 158년(재위 5년) 죽령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달라 이사금 재위 당시 신라의 영역은 낙동강 서쪽 일부를 제외하면 지금의 경상북도 대부분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두 고개를 개척한 것은, 소백산맥이 험해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충청 등 바깥 지역까지 언제든지 진출이 가능해졌고 금강, 남한강을 통한 교역도 가능해졌다는 의미가 있다. 기년 수정을 좀 염두에 둔다 치면, 실제로 대전광역시 월평동 유적에서 비교적 이른 4세기 중후반의 신라 토기가 출토된 것도 그런 사정을 방증한다.

173년(재위 20년)에는 일본 야마타이국여왕 히미코{ひみこ,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과 간극이 70여 년인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위나라 명제 조예에게 조공한 히미코의 기록이 둘 다 연대가 정확하다면 신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 히미코는 막 즉위한 어린 여왕이었고, 중국 삼국시대에는 할머니 여왕이었을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과거의 짧은 수명, 고고학적 교차검증의 부재 등으로 보아 그랬을 개연성은 상당히 낮다. 오히려 한국과 중국 측 기록이 60년 정도 차이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의 기년이 한 갑자(60년) 정도 소급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또한 천재지변 기록도 선대 왕들 때처럼 여전하다. 아니, 더 심해졌다. 일식, 기근, 흙비 등등.

아달라 이사금은 가 7척이며 코가 매우 커 외모가 특별하였다고 한다.#말단비대증? 이외에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도 아달라 이사금때의 일이다.

그 외에, 벌휴 이사금(제9대)의 차남 석이매의 아들 내해 이사금(제10대)의 어머니가 '내례부인'으로 적혀 있는데 이 부분이 주목할만하다. 이 내례부인이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내례부인과 동일 인물이라면 막장이 된다. 내해의 어머니로 나오는 내례부인에 대해 별도의 설명이 하나도 없고, 벌휴 이사금의 맏손자인 조분 이사금(제11대)이 아닌 차남의 아들 내해 이사금이 먼저 즉위하는 정황을 봐서는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내례부인은 지마 이사금(제6대)의 딸로 아달라 이사금의 조카가 된다. 이전과 이후의 사례를 비추어보면 지마 이사금의 사위라는 것이 아달라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래도 내례부인과 아달라 이사금 사이에 금이 갔고, 내례부인이 석씨 일가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벌휴 이사금 사후, 석조분이 나이가 어려 내해 이사금이 즉위했는데 대략 15~20세였을 것이라 추정이 가능하고, 그렇다면 내해 이사금이 태어난 것은 아달라 이사금 말기가 된다. 만약 내례부인이 간통을 해 태어난 아이가 내해 이사금이라면 석이매는 큰 벌을 받았을 것이고, 이후 왕비와 벌휴 이사금은 힘을 합쳐 아달라 이사금을 제거하고 즉위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벌휴 이사금보다 석이매가 먼저 사망한 것도 이를 방증할 수 있다. 물론 그냥 아달라 이사금 사후 재혼했을 가능성도 있다. 재혼한 직후 내해 이사금이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즉위시의 나이는 12세. 다만, 신라시대에 비슷한 이름이나 같은 이름의 여성들이 많아 단순한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다.

《삼국사기》 -아달라 이사금조-에는 그에게 아들이 없었다고 했는데, 수백년 뒤 다시 등장한 박씨 왕인 신덕왕(제53대)은 아달라 이사금의 자손이라고 쓰여 있어 모순이다.[8] 《삼국사기》라는 같은 책 안에서도 초반과 후반의 말이 다르다. 이렇게 된 이유를 살펴보자면 먼저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었던 것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 과거에 서자는 일반적인 아들로 안 쳐주는 경우가 많았고[9] 특히 신라는 적녀는 물론 사위보다도 서자가 계승권이 낮은 경우가 꽤 보이기에 더 그렇다. 아들이 있었다면 당연히 아들이, 딸이라도 있었으면 사위가 왕위를 계승했을 텐데 석이매가 내례부인을 취했다면 그 사이에 자식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조선 시대라면 별 무리 없이 왕이 되었을 효공왕(제52대)마저도 서자라는 핸디캡 탓에 때문에 일단은 진성여왕(제51대)에게 왕위를 내준 다음 진성여왕이 죽은 후에야 즉위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신덕왕의 조상이 정말로 아달라 이사금의 서자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없다곤 할 수 없다. 물론, 신덕왕이 신라 하대의 어느 귀족이었을 뿐인데 정통성을 위해 자신이 아달라 이사금의 자손이라 주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한편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는 신덕왕이 원래 김씨인데 이후 즉위하는 고려 왕실이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박씨로 바꿨다는 설을 주장한 바 있으나 이는 지금봐선 아예 개연성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낭설이다. 훗날 부활한 신라 박씨 왕실을 가장 많이 탄압하고 큰 피해를 주며 미워한 건 후백제의 견훤과 그와 결탁했을 가능성이 매우 큰 김씨 족단 일부 반란 세력이었고, 이들과 정반대 입장에서 대립한 고려의 태조 왕건은 이 박씨 왕실 때 처음으로 정식 국가로 인정받았기에 구태여 그가 신덕왕계를 박씨로 격하해서 얻을 이익은 전혀 없었다. 신덕왕은 헌강왕의 사위이자 효공왕의 매제로서 왕위를 승계한 것인데, 딱히 신라 왕실 전통의 계승 원칙을 위배한 건 아니지만 오랜 김씨 계승을 끊고 즉위했으므로 가급적 그나마 가장 가까운 박씨 임금 혈통을 자처하는 것이 이득이었을 개연성은 있다. 신덕왕은 죽은 뒤 경주 시가지 남쪽의 배동 삼릉에 묻혔는데 원래 아달라 이사금 한 사람만 묻혀있던 무덤이었지만 수백년 뒤 부활한 박씨 왕의 후손들이 죽은 뒤 아달라 이사금의 바로 옆에 묻혀서 삼릉(三陵)이 됐고, 나머지 하나인 경애왕릉도 근처에 있다.

3. 기타

4. 아달라 이사금 대의 인물

5.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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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아달라 이사금 본기>

一年春二月 아달라 이사금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계원을 이찬으로 삼다
二年春一月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다
三年夏四月 서리가 내리고 계립령의 길을 열다
四年春二月 감물과 마산의 두 현을 설치하다
四年春三月 장령진에 순행하다
五年春三月 죽령을 열고, 왜인이 예방하다
七年夏四月 알천의 물이 넘치다
八年秋八月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
九年 사도성에 순행하다
十一年春二月 용이 서울에 나타나다
十二年冬十月 아찬 길선이 반란을 도모하다 백제로 망명하다
十三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四年秋七月 백제가 두 성을 함락시키다
十四年秋八月 군대를 보내니 백제가 화친을 청하다
十五年夏四月 흥선을 이찬으로 삼다
十七年春二月 시조묘를 중수하다
十七年秋七月 지진이 일어나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다
十七年冬十月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다
十八年 봄에 백성들이 굶주리다
十九年春一月 구도를 파진찬으로 삼고 구수혜를 일길찬으로 삼다
十九年春二月 시조묘에 병고가 생기고 전염병이 돌다
二十年夏五月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다
二十一年春一月 흙비가 내리다
二十一年春二月 우물이 마르다
三十一年春三月 왕이 죽다

대체적으로 백제와의 전쟁과 각종 자연재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지역을 순행하는 모습이 종종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재위 22년부터 죽을 때까지의 10년 동안의 기사가 없다. 신라 상대의 국왕들의 재위기간이 비정상적으로 길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지막 3이 2에서 오기된 것으로 보고 21년차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달라 이사금부터 《삼국사기》 제2권이 시작된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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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장왕
헌덕왕태자 ? 眞44
민애왕
眞43
희강왕
眞45
신무왕
眞47
헌안왕
 
 
 
 
 
의공왕 眞46
문성왕
궁예(?)
 
 
 
 
 
 
 
성무왕 ? 眞48
경문왕
혜성왕 문성왕태자 문성왕의 딸
 
 
 
 
 
 
 
선성왕 흥렴왕
박정화 眞49
헌강왕
眞50
정강왕
眞51
진성왕
의흥왕
 
양부 
 
 
 
 
 
 
 
朴53
신덕왕
김의성 김계아 眞52
효공왕
김억렴 신흥왕
 
 
 
 
朴54
경명왕
朴55
경애왕
眞56
경순왕
 
 
 
 
박언창 박언침 마의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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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 일성 이사금(제7대)의 추정 생년인 44년으로 성년이 되는 59년 이후로 추측할 뿐이다. 아버지인 일성 이사금의 생년이 불분명하므로 이도 추측이다.[2] 신라 박씨의 족보에서만 등장.[3]삼국사기》에 7척이라 나온다. 다른 각주에도 서술하지만 현재의 척은 일본이 개항 이후 피트를 척으로 번역한 것이 넘어온 것이다. 신라 당시 사용된 척단위인 24.5cm를 기준으로 한 것.[4] 다른 가문혼인하면 부인 가문으로 힘이 분산되므로 삼국시대~고려 시대 초기는 권력 분산을 막기 위한 근친혼이 자주 있었다.[5] 이 때 죽령을 설명하면서 이 곳에 길을 낸 사람 이름을 죽죽이라고 소개하는데 대야성 전투에서 전사한 죽죽과는 동명이인이다.[6]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앞서 파견한 흥선의 20,000명의 병력과 아달라 이사금 자신이 직접 이끈 기병 8,000명이었다고 하는데 고고학으로 파악되는 초기 신라의 국력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대군이라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을 깎아먹는 부분 중 하나이다.[7] 문경새재 동쪽 길, 지금의 하늘재로 추정된다.[8]밀양 박씨 세보》에 따르면, 아달라 - 벽방(碧芳) - 무영(武英) - 판득(判得) - 광흠(光欽) - 미일(美一) - 내물(乃物) - 상건(相建) - 인엽(仁燁) - 계보(啓輔) - 명신(明信) - 정환(貞環) - 노겸(露兼) - 남선(楠善) - 금산(金山) - 응찬(應燦) - 덕흥(德興) - 대녕(大寧) - 이순(尼淳) - 융검(隆劒) - 지곤(之坤) - 성순(成順) - 2남 예겸(乂兼) - 신덕왕 경휘로 계보가 이어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덕왕은 아달라 이사금의 24세손이 된다. 그러나 박아달라와 박예겸 사이의 인물들 21명 모두 역사서에 행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으므로, 오직 《족보》에만 나오는 이 가계는 후대에 창작된 것이다. 무엇보다 신덕왕은 모계가 아달라 이사금 계통이라 부계를 아달라의 후손으로 설정한 것은 모두 오류이다.[9] 태종 무열왕(제29대)에게는 7명의 적자와 3명의 서자가 있었는데, 당나라에게 보낸 국서에는 자신에게 7명의 아들이 있다고 기재했다.[10] 이사부는 《삼국사기》도 《삼국유사》도 김씨, 박씨 기록이 어긋난다. 당시 중국식 단성을 쓰지 않아서 기록이 상이한 것.[11] 물론 이 분도 성이 박씨로 풀네임박지마. 참고로 이 둘은 사촌지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