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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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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노르웨이 노벨연구소는 전 세계 54개국의 유명 작가들을 대상으로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중심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책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위는 50%의 이상의 표를 얻은 돈키호테이며 나머지 순위는 밝히지 않았다. 가장 많은 책을 올린 작가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4권)이며, 프란츠 카프카, 윌리엄 셰익스피어, 레프 톨스토이는 각각 3개의 책을 올렸다.
1984
조지 오웰
인형의 집
헨리크 입센
감정 교육
귀스타브 플로베르
압살롬, 압살롬!
윌리엄 포크너
허클베리 핀의 모험
마크 트웨인
아이네이스
베르길리우스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알프레드 되블린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욥기
작가 미상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
토마스 만
캔터베리 이야기
제프리 초서

프란츠 카프카
우리 동네 아이들
나기브 마푸즈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시선집
자코모 레오파르디
단편집
프란츠 카프카
단편집
에드거 앨런 포
제노의 의식
이탈로 스베보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죽은 혼
니콜라이 고골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데카메론
조반니 보카치오
오지에서의 곤경
주앙 기마라에스 로사
광인일기
루쉰
신곡
단테 알리기에리
수상록
미셸 드 몽테뉴
동화집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파우스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프랑수아 라블레
길가메시 서사시
작가 미상
금색 공책
도리스 레싱
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집시가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햄릿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야기
엘자 모란테
굶주림
크누트 함순
백치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일리아스
호메로스
해방된 민중
할도르 락스네스
보이지 않는 인간
랠프 엘리슨
운명론자 자크와 그 주인
드니 디드로
밤의 끝으로의 여행
루이페르디낭 셀린
리어왕
윌리엄 셰익스피어
풀잎
월트 휘트먼
트리스트럼 샌디의 삶과 의견
로렌스 스턴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콜레라 시대의 사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보바리 부인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의 산
토마스 만
마하바라타
브야사
특성 없는 남자
로베르트 무질
마스나위
잘랄 웃 딘 루미
메데이아
에우리피데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
미들마치
조지 엘리엇
한밤의 아이들
살만 루시디
모비 딕
허먼 멜빌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냘의 사가
작가 미상
노스트로모
조지프 콘래드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고리오 영감
오노레 드 발자크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백년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과수원
세이크 무스하리프 웃-딘 사디
오셀로
윌리엄 셰익스피어
뻬드로 빠라모
후안 룰포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시선집
파울 첼란
악령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라마야나
발미키
샤쿤탈라
칼리다사
적과 흑
스탕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북으로의 이주 시절
타옙 살리흐
단편집
안톤 체호프
아들과 연인
D. H. 로렌스
음향과 분노
윌리엄 포크너
산소리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방인
알베르 카뮈
겐지모노가타리
무라사키 시키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
천일야화
작가 미상
양철북
귄터 그라스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소송
프란츠 카프카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3부작)
사뮈엘 베케트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
전쟁과 평화
레프 톨스토이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출처1출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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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히브리어 ספר איוב (세페르 이요브)
그리스어 Ἰώβ (Iṓb, 고대)·Ιώβ (Ióv, 현대)
라틴어 Liber Iob
영어 Book of Job
한자(한국어) 욥記
중국어 約伯傳
일본어 ヨブ記 (ヨブき)
기본 정보
저자 미상
기록 연대 B.C. 7세기 ~ B.C. 3/2세기(성서 비평학 추측 연대)[1]
분량 42장
주요 인물 욥, 엘리바스, 빌닷, 소밧, 엘리후

1. 개요2. 내용3. 해석
3.1. 신학적 해석3.2. 악신론적 해석
4. 욥기의 논쟁 해석5.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6. 여담7. 욥의 언약

[clearfix]

1. 개요

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다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욥기 23장 10절 (공동번역 성서)

성경의 22번째/18번째 권. 오디오 바이블 욥기 듣기[2]

북부 아라비아의 '욥(איִובֹ / iyóv, 이요브)'이라는 사람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3]

성경 중간 부분에 있지만, 시간대는 창세기 부근이다.[4] 성경은 시간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5]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등의 '조상 시대'라고 불리는 기원전 21~19세기경이라는 견해[6]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했을 무렵인 기원전 15세기 또는 기원전 13세기경이라는 견해[7], 히브리 지혜 문학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솔로몬 시대(기원전 970년 ~ 기원전 931년)라는 견해[8], 바빌론 유수 이전 또는 이후 무렵(기원전 6세기)이라는 견해[9], 기원전 1세기경이라 보는 견해[10]까지 매우 다양한데, 이 중 앞의 두 개는 현대 성서 비평학에서는 거의 무의미한 견해이고, 에제키엘서에 욥이 의인으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욥기 혹은 욥의 이야기가 에제키엘서의 작성 연대인 기원전 6세기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욥기의 집필 연대에 대한 추정은 기원전 7~3세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욥기의 언어학적 특징이라면, 당대(즉 기원전 7-3세기)의 다른 성서들에 비해 히브리어 철자법이나 단어 사용이 매우 보수적이고 독자적이다. 욥기의 언어는 외국의 영향을 매우 적게 받은 것이다.

아랍어로는 욥을 아이유브(أيوب / ʾayyūb)로 부른다.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하며, 결과로 살라흐 앗 딘이 창건한 아이유브 왕조(الأيوبيون / al-ʾayyūbiyyūn)란 이름 자체의 유래가 되었다.

구약 성서의 다른 문서와는 다르게 액자식 구성인데 운문체로 쓰인 본문 앞뒤로 산문체로 쓰인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달려 있다. 하느님사탄이 대화하거나 중반부부터 친구들과의 기나긴 이야기가 나오는 등 고대 그리스희곡 한 편을 읽는 듯 착각할 만큼 문학 양식상 색다르다.

특히 욥의 재앙 이후에 친구들과 논쟁을 벌이는 부분의 경우, 어떻게 보면 흔한_현대_네티즌들의_키보드_배틀.txt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양상이 낯익다. 즉 문제 제기 → 겸손한 태도로 주장 시작 → 의견 대립 → 논쟁 과열 → 빈정 상함 →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억지 → 상호 간의 인신공격 → "됐습니다, 더 이상 당신과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시전 → 게시판 관리자에게 판단 요구 → 열기가 식어가던 중 눈팅 회원 뒤늦게 난입[11]관리자가 나타나 중재 후 회원 제재 조치. 그래서인지 욥기라는 책 자체가 아예 이런 식으로 다수 저자에 의해 덧붙여져 가며 쓰였다는 발상도 간혹 있다.

저자가 욥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경의 관점에서 욥의 세 친구들과 같은 인과응보식 고난의 개념은 잘못됐다."는 주장이다. 친구들은 고통 속에 있는 친구를 향해, 처음에는 일주일간 말없이 울면서 욥과 같이 있어주었지만,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며 절규를 할 때에는 재산도 가족도 잃고 병까지 걸려 바닥에서 나뒹구는 친구에게 "네가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합당한 벌을 받은 거겠지, 어서 반성하고 다시 착하게 살아" 운운하는 망언만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고난'의 개념을 단순히 '죄악에 따른 벌'로 봤기 때문이었다.[12]

처음에는 욥에게 세 친구가 와서 이런저런 충고를 하는데 세 친구들이 다 이야기하고 나면 제32장에 '람 종족 출신인 부스 사람 바라켈의 아들 엘리후'란 사람이 갑툭튀한다. 이후 그가 말하기를 앞서 말한 욥의 세 친구보다 나이가 어려 먼저 나서기 어려웠기에, 지금껏 묵묵히 지켜보다가 이제야 말을 꺼낸다고.[13] 엘리후는 양쪽 주장의 문제점들을 짚어내며 양비론을 펼치는데, 엘리후가 옳은 인물인지, 틀린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후세에 평이 갈리는 편이다.

욥기의 영어 명칭은 Book of Job인데, 여기서 job은 동철이음어이며, 직업을 뜻하는 /dʒɑːb/이라고 읽지 않고 /dʒəʊb/으로 읽는다.

2. 내용

어느 날, 사탄이 하느님에게 내기를 걸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상에 '욥'이라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깊은 사람이 있는데, 욥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면 하느님을 욕할 것인지 아닌지 내기하게 되었다. 우선 사탄이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보십시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14]라고 부추기고, 하느님은 "좋다! 이제 내가 그의 소유를 모두 네 손에 붙인다. 그러나 그의 몸에만은 손을 대지 마라." 라고 하며 허락하고, 사탄은 욥에게 재앙을 가져다준다.[15]

사탄은 우선 사고와 전염병으로 욥의 재산을 모두 날려버린다. 그다음에는 도적 떼가 몰려들게 하여 낙타[16]를 죽이고 집이 무너지게 하여 욥의 자식들까지 몰살시켰다.[17]

이럼에도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 욥기 1장 21절(공동번역 성서)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재산과 자식들 모두 하느님이 주신 것이니 이를 거두는 것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다.

사탄이 다시 하느님을 만났을 때 하느님은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나를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없다. 그는 여전하지 않느냐? 네가 나를 충동하여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 다 헛일이었다."라고 하자 사탄은 "사람이란 제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내놓지 못할 것이 없는 법입니다.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뼈와 살을 쳐보십시오. 제가 보장합니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역시 하느님은 "좋다! 이제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인다. 그러나 그의 목숨만은 건드리지 마라." 한다. 이에 사탄은 마지막으로 욥을 피부병(부스럼)에 걸리게 했다.

재산과 자식들을 모두 잃은 것도 모자라 본인까지 병에 걸려 기왓장으로중동 문명에 기와가 있나?[18][19] 몸을 긁는 불쌍한 신세가 된 욥[20]을 향해, 욥의 아내는 하느님을 저주하고 그냥 죽어 버리라고 악담한다.[21][22] 그러나 욥은 태연자약하게 "바보 같은 소리. 하느님께서 복을 주셨으니 재앙을 내리시는 것도 당연하지 않소?"라고 대답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ob_friends.jpg

병에 걸려 드러누운 욥에게 친구들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 나아마 사람 소발, 수아 사람 빌닷이 찾아오는데, 처음에는 욥의 상황이 너무 참담해서... 말로는 위로도 못 하고 옷을 찢으며 울면서 그냥 1주일간(!) 밤낮을 말없이 있어주었다.[23] 하지만 욥이 왜 자기가 고난을 겪는지 이해를 못 하고 절규하자, "이렇게 화를 당하는 것을 보면, 네가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으니 인정해!"라고 강요하지만, 욥은 "내 잘못이 이렇게 큰 재난 당할 정도로 크지 않은데[24] 내가 이토록 혹독한 재앙을 당함은 억울한 일이야!"라고 소리 높여 주장한다. 그다음은 욥과 친구들의 언쟁으로 욥과 친구들의 언쟁이야말로 욥기의 본문으로, 욥기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담는다.

친구들이 찾아온지 7일 후 욥은 마침내 입을 열고, "차라리 내가 태어난 날 재앙이 일어나 내가 죽었으면, 내가 죽어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이라며 자기가 태어난 것 자체를 저주하고, 그 말을 들은 엘리바스는 "너는 그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을 고통에서 구해주더니 본인이 고통에 빠지니 그대로 절망하는구나."라고 한탄하며, "네가 무슨 죄를 지어서 하느님이 벌을 내리시는 모양이다. 그러니 용서를 구해라. 설사 벌을 받는다 해도 벌이 끝나면 반드시 복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욥은 "나는 이런 끔찍한 벌을 받을 만큼 하느님께 잘못을 한 기억이 없다"라고 반박하고, 이어서 "하느님, 저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고, 오래 살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그러니 지금 말하겠습니다. 왜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드셨습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라며 항의 가까운 기도를 한다. 그러자 빌닷이 "불평만 하고 있을 거냐? 하느님이 정의와 공의를 어기실 분이냐? 네 자식들이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일지도 모르니 네가 회개를 해라. 그럼 넌 다시 복을 받고 행복해질 거다"라며 욥에게 반박한다.

그러나 욥은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세상에 어딨냐? 그분이 뭘 하시겠다 하면 막을 수 있는 자가 어딨어? 차라리 벌을 받아도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비는 게 낫지."하고 다시 "하느님! 당신은 사람의 시선으로 판단하는 분도 아니시고, 제가 악하지 않은 것도 아시면서 왜 이런 재앙을 내리십니까? 얼마 안 남은 인생 좀 편하게 보내게 해주시면 안 됩니까?"라고 다시 항의 기도를 한다. 그러자 소발이 듣다가 마침내 꼭지가 돌았는지 "네가 지금 하느님 앞에 깨끗하다고 하는 거냐? 네가 하느님 생각을 무슨 수로 알아? 죄를 범했으면 버리고 마음을 바로잡아라. 그러면 네가 다시 일어나게 될 거다"라며 욥을 꾸중한다.

욥은 "이야,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네? 내가 바보냐? 나도 너희만큼 알아. 너희가 하느님의 대변자라도 되냐? 나는 그분이 날 죽인다 해도 내 행위에 대해 증언 정도는 할 수 있어."라고 대놓고 말하며, 또 "하느님, 저를 그냥 덮어놓고 원수 취급 하면서 벌만 내리지 마시고 그냥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시원하게 알려주십시오. 아니면 저를 저승에 보내셨다가 화가 풀리면 그때 다시 데려와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엘리바스는 "네가 아주 하느님 섬기기를 때려쳤구나. 하느님이 너한테 하시는 말이 다 별것 아닌 말이냐? 하느님이 악인을 용납하고 의인을 버리는 분이시냐? 세상에 하느님 보시기에 깨끗한 사람이 어딨냐? 악인은 하느님께 대항하지만 오로지 망하기만 할 뿐이야"[25]라고 욥을 비난한다.

욥은 다시 "너희는 나한테 위로가 아니라 비난을 하러 온 거냐? 나도 너희들처럼 할 말 많고 똑같이 반론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래봤자 이 고통이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또 "하느님, 제 친구들까지 지금 저를 조롱하고 이 모양입니다. 하느님이 제가 무죄하다는 증인이 되어 중재해 주십시오"라고 아예 변호사 고용 신청을 넣는다. 빌닷은 이젠 아주 할 말이 없다는 듯 욥에게 악인의 끝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참혹하다며 욥을 비난하고, 결국 이 설전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여기서 특징이 있는 부분은 욥의 친구 셋이 인과응보 논리에 의거해, 욥에게 죄악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욥이 자신의 정당함을 논리로 삼아서 인간을 초월하는 하느님이 내린 고난을 한탄하고 하소연한다면, 친구들은 하느님이 너에게서 부정(否定)을 보았기 때문에 벌했을 것"이라는 논리로 욥을 공격한다. 이 상황만 보면 위로하러 온 게 아니라, 욥을 나쁜 놈으로 몰아가 회개하게 하려는 의도로 온 듯하다.

마지막에 갑툭튀한 엘리후는 인과응보적 논리에서 탈피함과 동시에, 욥의 태도가 하느님에 대해 불경스럽다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인다.[26] 이에 욥은 하느님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자.

정말로 하느님이 나타났다. 하느님은 욥의 고통에 대답하는 대신, 당신의 초월적인 권능을 감히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답한다. 여기서 레비아탄, 베헤모스 이야기도 나온다. 이 부분의 묘사는 에제키엘요한복음의 초반부와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으니 주의 깊게 살펴보길 권한다. 서로 시대 상황에 따라 묘하게 바뀐 내용일 뿐 근본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동일하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그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어디에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중략)
바다가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 그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바다를 구름으로 싸고 먹구름으로 묶어둔 것은 바로 나였다. 바다가 넘지 못하도록 금 그어놓고 문에 빗장을 내려놓은 것은 바로 나였다. (중략)
네가 언제고 동이 틀 것을 명령해 본 일이 있느냐? 새벽의 여신에게 "이것이 네 자리다." 하고 일러준 일이 있느냐? 땅의 옷깃을 휘어잡고 불의한 사람들을 그 속에서 털어내라고 명령을 내려본 일이 있느냐? (중략)
네가 천상의 운행 법칙을 결정하고 지상의 자연 법칙을 만들었느냐? 너는 구름에 호령하여 물을 동이로 쏟아 땅을 뒤덮게 할 수 있느냐? 네가 "나가라."라고 명령하면 "알았습니다." 하며 번갯불이 번쩍 퉁겨 나가느냐?(중략)
― 욥기 38장(공동번역 성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욥은, 하느님의 권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순응했다.
욥이 야훼께 대답하였다.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린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 욥기 42장 1~6절(공동번역 성서)
결국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은 욥은 하느님에게 이전보다 크게 은총을 받아, 전보다 많은 재산많은 자손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욥의 모든 재산이 2배로 늘어났다. 내기 이전 양 7,000마리, 낙타 3,000마리, 소 500마리, 암나귀 500마리였던 재산이 양 14,000마리, 낙타 6,000마리, 소 1,000마리, 암나귀 1,000마리로 늘어났고 욥이 그 이후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아[27] 4대까지 140년 동안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욥이 고난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70살(140년의 절반)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죽은 자식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피엔딩인지 의문이지만[28]

사실 하느님의 편을 들었다고 할 만한 욥의 세 친구들이 하느님에게 "너희의 말한 것은 내 종 욥의 말같이 알맞지(right) 않았다."[29]라며 단죄받지만, 욥이 그들을 배려해 빌어준다면 용서해 주겠다고 한다. 욥기 글쓴이가 무슨 생각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 욥기의 주제가 단순히 신앙을 계속 유지하면 복받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하느님에게 알맞지 않다고 직접 지적받은 욥의 세 친구들 측의 의견이 '신앙을 계속 유지하면 복받는다.' 쪽이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피해자나 낙태아를 위시해 현실에서 실패하거나 미온한 채 사망한 사람이나 별다른 잘못도 없었는데 고통받고 보상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실재하는 상황에서 믿으면 복받는다는 논리가 알맞을 리가 없으니,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욥의 세 친구들은 '하느님이 있다면 왜 선한 사람이 고통받는가?'라는 질문에 똑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고통받는 놈이 악한 놈(첫째 친구 엘리바즈)이라든지 고통받는 놈의 관계자, 자식들이 악해서 연좌로 걸렸다든지(둘째 친구 빌닷) 고통받는 놈의 벌이 그가 지은 죄보다는 가벼우니 입 닥치라는 식(셋째 친구 소발)의 말장난으로 대답하여 질문을 회피했고 이는 당연히 알맞은 대답이 될 수 없었다. 특별한 악의도 없었는데 고통받고 보상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좋은 일만 생긴다는 논리와도 다른 결론이다. 즉, 욥이 복받은 내용이 서술된 에필로그는 하느님의 행동을 예측하려고 하거나 토 다는 것은 불경하며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인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말해줘도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3. 해석

3.1. 신학적 해석

욥기의 주제를 이야기하면 '하느님은 왜 착한 사람이 고통받을 수 있게 하였는가.'이다. 또 의인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여야 하는지를 중점으로 선하고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있는데도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생각할 거리는 되지만 중심 주제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때 하느님과 사탄이 욥을 대상으로 굳이 내기할 필요도 없고 후반에 하느님이 직접 강림하지 않고 심부름꾼인 천사가 욥을 섣부르게 훈계하고 욕한 욥의 친구들이 틀렸다고 알리며 고통받는 사람을 잘못 받아들였다고 질책하고 욥을 축복하는 정도로도 충분한 데다가 창조주인 하느님이 예언자로 고르지도 않은 일개 피조물(하느님도 신실하다고 인정한 욥은 그렇다고 쳐도 알맞지도 않은 쩌리들까지)들 앞에 친히 강림하여 "너희 나 알아? 너흰 나 몰라." 하며 클라이막스에서 직접 일갈한 내용이 주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욥기의 주인공인 욥이 고통받고 절규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대상이 누구인지 그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또한 사람이 하느님에게 할 근원이 되는 질문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고려한다면 더욱 명확하다.

사람이 겪는 고통을 대상으로 해 사람들이 희망하는 고전이 될 만한 내용이 있는 관점은 나쁜 짓을 하면 벌받거나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욥기의 저자는 이 문제를 두고 욥이라는 사람을 이용해 착한 사람이 고통받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나쁜 짓을 해서 벌받는다고 하는데, 이런 관점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나쁜 짓을 했으니까 벌받는다고 해석할 이유가 된다.[30] 이에 욥기의 저자는 고통받는 사람이 선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기독교도는 욥기가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라고 희망을 주는 내용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이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제시한다고도 간주한다.

한편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크게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누군가를 시험하기 위해 제3자를 죽이는 것이 옳은가'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욥의 가족들과 하인들은 어떡하는가'라는 점이다. 하지만 욥의 가족들이나 하인들이 죽지 않는다면, 욥이 극을 관람하듯이 인상 깊고 감동스러운 재앙으로 나락에 떨어져 신세를 한탄한다는 구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의 중심 내용이 '고통받는 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고찰' 대신, '고통받지만 지상에서 언젠가 보상받을 수 있는 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고찰'로 좁아지게 된다. 이럴 때 보상받지 못한 고통받는 선한 사람들을 무시하게 되고 원래 주제와 고찰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가 완전히 무의미해진다. 여기서 자세히 생각해 보자. 그들 모두가 확실하게 결백했는가?

세상을 떠난 하인들과 가족들은 결백하지 않았으니 문제없다는 소리는 욥기에서 그토록 설명했던 바를 거스르는 억지이자 무지다. 살아남아 재기한 욥마저도 본인이 결백해서 기회를 얻은 게 아니다. (실제로 욥은 스스로가 결백한 사람이 아님을 인지하고 시인하고 있다.) 세 친구와 욥의 논쟁에서 알 수 있듯, 사람이 겪는 고난과 불행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질 뿐, 절대 개개인의 잘못에 상응하는 처벌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욥의 하인들과 가족들 또한 욥과 마찬가지로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은 아니다. 자세히 생각해 보자. 하느님이 '욥의 가족들과 하인들을 벌하기 위해' 사탄을 보낸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견들이 따로 있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욥의 재산이 모두 배증했는데 아들과 딸은 배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7,000마리가 있었는데 마지막 부분에 늘어난 양을 보면 양이 14,000마리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 나온 아들 7명과 딸 3명은 아들 14명과 딸 6명이 되는 게 아니라, 그대로 아들 7명과 딸 3명이다. 이 부분을 다룬 해석은 여러 가지이고 넷으로 대분하면 다음과 같다.
  1. 당시(창세기 인근)의 자녀와 하인은 현대의 가족의 개념과는 달리 '재산'의 개념에 가까웠을 수 있다. 이 일화에서 하인과 가족들은 인격체가 아닌 욥의 재산으로 등장한다는 주장이다. 말 그대로 가축보단 조금 나은 집 같은 존재로 취급한다는 것. 성경에 묘사된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이나 아이들, 하층민들은 가장으로서 기능하는 자유민 성인 남성에게 부속된 자본으로 여겨졌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욥의 가족과 하인들을 욥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개인'으로 인식하지만, 전근대인들의 눈에는 재화로 환산할 수 있는 '자산'의 성격도 컸다는 것. 결국 이 또한 성경이 서술된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혹자를 좇으면, 부성애 같은 개념은 중세 이후 대두된 사람으로 당연히 얻는 기본권과 생명 존중 사상에서 비롯되어 퍼진 것으로, 사람의 본능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주장하며 이 이론을 지지하나 위에서 설명했듯 '재산이 모두 배'가 된 것에 비해 자녀의 수는 그대로이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며, 창세기 시절이라고 해서 꼭 그런 식으로 여겼다고 하기에는 아브라함이사악의 관계 등을 고려할 때 조금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자식들에 관해서, 욥기는 히브리어로 저술되었는데, 여기서 아들 일곱은 히브리어로 7의 배수로 해석되기도 하므로 조금 감안해야 한다.
  2. 신앙이 깊고 순명하는 욥은 "자손들의 생명도 하느님이 준 것이므로 거두어 가시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 새로 얻은 자식들이나 잘 키우자"라고 여겼을 수 있으나 이것도 욥이 절망하는 원인과 앞뒤가 맞지 않고 아무리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도 현대에 사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납득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생각이다.[31]
  3. 실제로 부활했다. 허구에 가까운 이야기이라서 가능할 법도 하나, 죽은 사람이 그것도 최소 10명 넘게 부활했다면 아무리 기적이 많이 일어난 창세기 당시 일이라도 너무 대단한 사건이다. 욥기 저자가 이것을 대상으로 해 크게 쓰지 않았을 리 없다.
  4. 다른 소유물은 바뀐다 하더라도 2배면 괜찮지만 자식은 바꿀 수 없다. 욥의 이전 자식들과 새 자식들이 모두 천국에 있으면 갑절이 맞는다. 강의 내용 넷 해석 중 가장 타당성이 있으며 이를 근거로 보았을 때, 욥의 모든 자식들은 천국에 갔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위에서도 적었듯이, 욥기의 주제(의인의 고통)를 '언젠가는 지상에서 보상받을 의인의 고통'으로 줄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해석도 무종교인이 보면 신이 변덕을 부려서 자식새끼 다 죽여놓고 그래서 마지막에 "죽은 아이들은... 뭐 다 천국 갔겠죠? ^^;"로밖에 안 보이는 것이 문제.
욥의 세 친구들의 대화는 인과응보의 논리에 따라 욥에게 숨은 잘못이 있다거나 지나치게 오만하다고 비난하는 내용이라면 엘리후는 다른 각도, 즉 사람이 하느님보다 과소거나 하느님이 사람에게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주장한다.[32] 엘리후가 하는 말은 조금 더 후기 사회상을 반영하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의 말에는 욥이 다 대답해 주는데 엘리후의 말에는 욥이 대꾸하지 않는다는 점, 어투가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고 수많은 아람어 단어를 사용하는 점, 그의 논증 바로 뒤에 하느님이 대답한다는 점 등을 들어, 이 부분은 조금 후대에 본문에 삽입한 부분이고 이스라엘 민족 전통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주위의 설화에서 따오거나 혼합된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욥기는 성경의 다른 장들과 매우 다른 내용으로, 저술 시기는 바빌론 유수 이후로 추측된다. 성경의 다른 장들이 이스라엘의 전성기에 작성되어 하느님이 권선징악을 하는 존재로 묘사되어 왔지만(신명기다운 역사관), 욥기는 이스라엘이 고난을 겪을 때 작성되어 하느님은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왜 이러한 징벌을 내리셨는가 하는 온 민족이 관계된 질문을 하는 것이다(욥기다운 역사관).

그런데도 욥기가 성경에 편입된 이유는 "하느님이 있다면 왜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 하는 세계 모든 사람의 유구한 궁금증 때문이다. 욥은 "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다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욥기 23장 10절, 공동번역 성서)라고 고백하며 고통의 이유를 짐작한다. 하느님은 나중에 "야훼께서 욥과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즈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너의 두 친구를 생각하면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 없구나. 너희는 내 이야기를 할 때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욥기 42장 7절, 공동번역 성서)라고 욥의 신학관을 입증해 준다. 이를 보았을 때 고통의 목적이 단련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욥같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좋은 일을 해봐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거라 천국 상급이 안 쌓이기 때문에, 믿음도 단련시킬 겸 고통 가운데에서 극한의 믿음을 발휘하게 하여 상급을 쌓게 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욥기는 결코 완전히 선한 사람은 없다고 이 질문 자체를 반박하고 있다(!) 욥기에서 하느님은 레비아탄, 베헤모스 같은 자연의 다양한 경이를 보여주면서 사람의 한계를 지적한다. 사람이 인식하는 범위와 논리 체계를 벗어난 것들을 이용하여, 불완전한 사람은 하느님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하느님을 원망하며 고통받던 욥에게 결국 은혜가 부어진 것을 볼 때, 영혼 구원의 관점에서 하느님을 원망할 만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서 하느님을 찾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도 있다.

하느님이 욥에게 던지는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욥기 40장 7~8절, 공동번역 성서)는 말은 곧 "네가 옳기 위해 나를 심판하겠느냐?"라는 질문이다. 심지어 하느님이 직접 인간인 욥에게 "너 나랑 입장 바꿔서 니가 하느님 한번 해볼래?" 라고까지 한다.(…) "나 착한 사람이야"라는 주장은 결국 "창조주가 틀렸어"라는 교만한 맥락과 상통한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건, 욥기는 인간이 하느님을 이해하는 게 아예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약 성서를 제외하더라도 구약 성서에서 이미 인간이 하느님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요엘에서는 하느님이 말세에 당신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부어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외의 부분에서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영'이 임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아니, 그런 건 둘째 치더라도 인간이 하느님을 아예 이해할 수 없다면, 욥부터가 어떻게 하느님과 대화하고 그 뜻이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즉, 욥기의 주제는 인간이 하느님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전부는 이해할 수 없고, 네가 선하더라도 고통을 받을 수 있지만, 분명 거기에는 하느님의 선한 뜻이 있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라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욥이 겪었던 인간의 생각으로 보기에는 불합리한 상황도 어떤 선한 뜻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해 믿음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그러면 나의 옳았음을 아시게 될 것이고, 나는 나대로 승소할 수 있을 것일세. 그런데 앞으로 가보아도 계시지 않고,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는구나. 왼쪽으로 가서 찾아도 눈에 뜨이지 아니하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도 보이지 않는구나. 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다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위의 내용은 욥기 23장 7~10절로, '욥기의 전체적인 주제'를 함축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플롯상 도입부에 나왔던 사탄이 중간에 실종되는 문제가 있다. 성서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과 사탄과의 대결은 단순한 문학적 기법으로 봐야 한다고 한다. 욥기 자체가 어느 정도 문학성을 띠는 서적이지만, 앞부분은 특히 그런 부분이 더 심하다고. 욥이 고난을 받은 걸 실제로 있었던 일로 보더라도 하느님과 사탄의 대화를 사실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다.[33]

3.2. 악신론적 해석

반면 상기된 기독교나 아브라함 계통 종교의 관점에서 서술된 해석을 떠나, 악신론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악신론을 채택한다면 욥기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핵심 주제 중 하나인 악의 문제는 물론 쉽게 해명이 되며, 하느님에 대한 아브라함 계통 종교적 변증이란 그저 "권력만 많고 책임은 제로인 신이 알면서도 싸질러 놓은 현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자들이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생기는 인지부조화를 인정하지 않고 2-3천 년째 새로운 핑계를 내놓으며 정당화, 희망고문, 가스라이팅하는 것"쯤에 불과하게 된다.

하느님이 욥에게 "내가 XX를 창조하고 있을 때 너는 어디서 뭘 하였느냐?", "네가 옳기 위해 나를 심판하겠느냐?"는 식의 고압적인 태도에 대해선 소위 계급장 떼놓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경우, 논쟁에서 할 말이 없어졌지만 권위밖에 남아있지 않은 높으신 분들이나 꼰대들이 겁주는[34] 압력 정도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욥은 자신에게 동문서답을 하는 하느님의 논점일탈의 오류를 지적하며 "그래서 어쩌라고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도 없는 멀고 원대한 곳에서 답을 가져오는데요? 그래서 누가 내 동의 없이 나를 창조하라 했나요?"라는 식의 반출생주의(욥기 3:1-13)적 관점으로 반박[35]해도 틀릴 건 없게 된다.

소위 고차원의 무한한 하느님은 저차원의 유한한 피조물들의 사정이나 문맥 따윈 이해할 필요 없이 조금만 실수를 지어도 죽을죄[36]로 만들어 유한한 존재의 유한한 죄에 무한을 곱해 지옥[37]이라는 형벌을 줘도 되는 한편; 자신의 선택 없이 타인의 의지로 "태어남을 당한" 저차원의 유한한 피조물들에겐 종교적 변증론들이 "고차원의 무한한 하느님께서 그 당시 그래야만 했던 시대상의 문맥을 고려해야만 하는", "복잡 미묘한 사정과 영원을 내다본 '놀랍고 원대한 계획'과 지혜가 있으셔서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끝없이 인내를 가지고 이해하려고 노오력해야 하는[38]" 결론으로 귀결되는, 피조물 개인이 동의 한 적도 없는 불공정 계약, 말 그대로 노예 계약이며 갑질일 뿐이다.

하느님이 욥에게 고압적인 태도와 동문서답을 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창조주의 원대한 계획'이고 '공의'고 '사랑'이고 말고를 떠나 현대적 윤리관 및 상식만 적용해서 해석해 본다 한들: 1) 남이 싫어하는 것을 동의나 이해조차 구하지도 않고 더 높은 뜻과 창조주라는 이름하에 자기가 맞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멋대로 사탄과의 도박 내지 내기[39][그러나]나 강행한 것이 핵심 문제고; 2) 남의 소중한 것(특히 가족)을 지 멋대로 주고 뺏고 병 주고 약 주면서 자신을 오직 긍정적인 마인드로만 봐주길 바라는, 인간이었다면 아이들 떼 쓰는 수준의 유치한 자기중심적 논리를 "더 높은 차원", "더 높은 뜻" 같은 신비의 베일 뒤에 숨어서 펼치는 것이 핵심 문제며; 3) 자기가 남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인정하거나 반성하는 모습조차 없이 적반하장의 뻔뻔함을 보이는 것이 또 핵심 문제다. 이런 논리는 단지 창조주이자 신이라는 권위을 가졌다는 이유(로마서 9:18-23)와, "욥 네 자신이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내지 "의인은 없다"(로마서 3:10-19) 따위의 현실성 없는 이상만 아득한 신적 기준을 내세워 학대를 정당화하며, 자신의 뜻, 자신의 영광, 자신의 무결함만을 관철하는 전 우주적 독재자이자 폭군의 논리일 뿐이며, 코즈믹 호러임을 보여줄 뿐이다.

더 나아가 객관적으로 피조물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한들, 사람이 전지전능한 신이 선하든 악하든 싫다고 덤벼서 무슨 이득을 볼 것이 한 푼도 없다. 피조물이 미쳤다고 자신의 파괴를 각오하고 대들지 않는 이상, 인간의 현실은 진실이 어떻든 단지 자신의 생명 하나 건져 살아남기 위해 꼬리를 내리고 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부나 해야 하는, "자유의지"라는 책임만 많고 권리는 말뿐인 강요된 선택밖에는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계통 종교가 이런 식으로 주장한 신의 선함에 대해 그 마음을 진심으로 느끼지도 설득되지도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선, 내세의 영원한 요덕수용소에 가지 않기 위해 폭군 앞에서 설득당한 척 눈물을 흘려 살아남아야만 하는 북한 주민이 자신의 폭군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은 억지 감동일 뿐이다.[41][42]

실제로 리스본 대지진이 이러한 사례와 비슷했다. 지진이 일어난 날은 모든 성인 축일이었고 이 날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성당에 모여있다가 가장 먼저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사창가는 재난의 피해를 가장 받았고 포르투갈 하면 경건한 가톨릭 국가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자 철학자들은 '전지전능하면서도 한없이 선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다 죽인 대지진을 막지는 않은 주님'에 대한 회의감을 쏟아냈고, 교회에서는 이러한 냉소를 막을 수 없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바티칸 역시 곤혹스러워할 뿐이었고 뒤늦게 리스본 대주교가 "이번 재난과 하느님의 섭리 사이에는 관계가 없다" 하고 간신히 입장을 밝혔을 뿐이었다.

4. 욥기의 논쟁 해석

욥기는 선한 사람[43]이 고통에 빠지고, 남이 보기에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부터 논쟁을 시작한다.[44] "욥은 명백히 선한 사람이다."란 명제를 항상 참인 것으로 밝히고 시작한다는 것에 주의하자.

선한 사람인 "욥"이 빠진 고통을 인과응보적 개념으로 단죄한 3명은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모르는 친구를 향해 자의적으로 인민재판을 한다. 욥은 명백히 선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욥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욥의 고통을 욥의 잘못으로 돌리는 논리를 풀어놓고, 욥은 이것을 반박한다. 이 4명의 사람은 4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며, 해당 부류의 사람들 특유의 주장을 펼치고, 해당 부류다운 오류를 범한다. 이들 중에서는 율법에 능한 자(나이가 많은 자)도 있지만, 잉여한 인물도 있다. 이 세 부류의 사람은 하나같이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그것이 욥에 의해 반박되고 있다.

세 친구들은 처음엔 욥을 위로하지만 욥이 "내가 이렇게 잘 살았는데 하느님은 왜 도대체 왜!!"라고 부르짖으며 엇나가기 시작하자, "아니, 그래도 네가 뭔 잘못을 했으니까 벌을 받은 거겠지. 권선징악도 모르냐?"고 맞받아쳤고, 이에 욥과 키배를 뜨게 된 것이다.

당연하다. 세 친구들에게는 욥의 고통을 능가하는 위로(야훼만 가능한)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들의 논리를 방어하다 서로에게 인신공격을 하게 되고, 열받은 욥은 아예 자신의 선함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선함이 하느님을 능가하거나 최소한 대등하다는 신성 모독까지 시전하자, 가장 어리다는 엘리후가 "그건 아니지, 선 넘지 마세요"라고 욥의 인간적인 한계를 그어주는 식으로 전개가 되고 있다.

맨 마지막에 나타난 하느님도 비슷한 논리를 펼치는데(인간인 네가 하느님인 날 온전히 이해할 수 있냐?), 엘리후와 하느님의 차이점은 엘리후가 욥의 세 친구들보단 나았지만 엘리후에게도 욥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그 상황을 반전시켜 줄 능력이 없어서 "그래도 하느님이 인간보단 선하시다"라는 원론적 얘기만 반복하며 욥의 속을 박박 긁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반박됨에도 불구하고 욥에 대한 다굴은 끝이 나지 않을 듯하다가, 하느님이 나타나 선한 사람 인증을 하고 인민재판을 펼친 자칭 친구들을 꾸짖는데, 그 요지만 정리하면, "지식은 진리가 아니기에 결국 '모름'이다. 너희들이 지식은 많다만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럼 결국 모르는 것이지 않느냐? 그럼, 대관절 무얼 안다고 욥을 까고 있는 거냐?"가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는 것에 대한 꾸짖음이 이어지는데, 이것의 요지도 욥의 자칭 친구들과 비슷하긴 하지만, 욥이 선한 사람, 곧 하느님의 종이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에, 사실은 굉장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45] 다만, 자세한 내용은 역시 율법사들이나 알 법한 내용들이라... 참고로, 욥기에 사용되는 기법은 유대 랍비들은 알아듣지만[46], 랍비들의 경우 "욥이 도대체 누굴 지칭하는 것인가?"라는 문제 때문에 역시 완전한 해석은 못 해준다.

욥기의 제일 큰 문제는 진정한 정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해석이 되게 되어 있는데 (욥기 8장 3절 같은 식), 정작 그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부분 부분 나온다는 것이다. 성경 내용의 상당수가 대관절 무슨 소린지 알 수 없거나,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아 보이는 것은 대부분 이 문제 때문이다. 논리의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여러 가지 명제들이 교과서처럼 정리되어 있지 않고 "알아서 찾으슈" 같은 느낌으로 죄다 숨어 있으니 이해가 쉬우면 그게 더 이상하다.

애당초 성경은 고서이다. 당장 500년 전 조선 시대 문헌도 제대로 못 읽으면서 신약으로만 따져도 2000년 가까이 지난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한글로 번역되어 있어서 만만해 보일 뿐이지.... 성경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고대인이 썼기 때문에 구약이고 신약이고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대인의 생각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 통용되던 문화 등을 알아야 더 폭넓은 이해가 가능하다.[47] 그나마 어떻게든 핵심적인 배경 논리를 찾아 넣어도, 세부적인 배경 논리들이 누락되면 일단 뭔가 굉장히 논리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기는 한데 뭔 소린지는 여전히 모르는 상황이 이어진다. 제일 유명한 케이스는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욥기 19장 25절, 공동번역 성서). 만약 독자가 하느님이 땅 위에 우뚝 설 수 있다고 믿으면 말 그대로 예수 같은 인물이 상상되겠지만, 그런 하느님을 믿지 않는 독자라면 이해가 잘되지 않을 만한 구절.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인간 기준으로) 선한 사람들이 받는 이유 없어 보이는(그러나 사실 신만이 알고 있는) 고통에 대한 질문과 저자의 대답을 적어놓은 책인 것이다.

5.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개신교 성경 개역개정 4판)
자네의 시작은 보잘것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 (가톨릭 성경)
욥기 8장 7절에 욥의 세 친구 중 하나인 빌닷이 말한 이 구절이 유명하다. 이걸 사업 번창하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개업하는 날 가게에 걸어두는 개신교 신자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앞의 구절들을 고려하면 그다지 긍정적인 맥락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빌닷은 "자네 아들들이 몰살당한 것은 걔네가 뭔 죄를 지어서일 것이고, 자네가 죄가 없다면야 그분이 신세를 고쳐주시겠지"라는 선인선과(善因善果)의 인과응보(因果應報)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절 자체는 틀림이 없다. 본 구절이 나온 입의 주인이 야훼가 아닌, 심지어 엘리후도 아닌 빌닷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이고, 기복신앙적인 성향이 위험 요소일 뿐이지 결국 야훼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기독교 세계관 내의 주장과 영 동떨어진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에서 칭송하는 야훼의 일꾼들은 시작은 보잘것없었지만 끝이 창대한 경우가 많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야곱도 그러하며, 모세도 그러하고, 다윗도 그렇고....

하지만 이 구절에 마음이 끌리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누가복음 16:13)

6. 여담

욥기는 구약 성서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위치와 의미가 있는 편으로, 이것을 대상으로 한 해석 중에 제일 특이한 해석으로 철학자 겸 심리학자인 카를 융이 쓴 책 <인간의 상과 신의 상>에 포함되어 있는 '욥에의 응답'이란 것이 있다. 욥기를 대상으로 해 흥미가 있다면 한 번은 읽어볼 볼 가치가 있다.

슬라보예 지젝과 존 밀뱅크의 공저 <예수는 괴물이다(The Monstrosity of Christ)>에서 지젝은 G. K. 체스터턴[50]의 "욥기 개설"을 인용하여 욥이 하느님의 침묵에 만족한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이 욥 자신의 고통에 축어적인 대답 대신 질문과 침묵을 동반한 더 큰 수수께끼로 덮어서 욥은 "하느님의 절규"를 알게 되었으며 결과로 심판대에 오른 것은 욥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라고 해석한다. 자세한 것은 본서를 읽어볼 것.

테드 창의 소설 지옥은 신의 부재 또한 욥기에서 영감을 얻어 쓴 작품으로 위에 나온 악신론적 해석을 따르는 작품.

물리학자 앨런 모엔은 욥기에서 하느님이 욥에게 한 질문들을 현대식으로 바꾼다면 그 중 일부는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저술했다.
내가 태초에 공간의 중심을 중성자로 채웠을 때 넌 어디에 있었느냐? 알고 있다면 말해보아라. 중성자의 붕괴는 전자와 양성자를 낳고 원소를 생성시키는데 그 중성자 붕괴의 반감기는 누가 정했느냐? 땅에 기초를 세운 방법이 이런 방법이었다고 생각하느냐? 물질은 가속도에 저항할 질량 에너지를 어디에서 얻느냐? 가속도에 저항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냐? 말해봐라, 생각을 하는 두뇌 안에는 무엇이 있느냐? 지금 너는 뇌의 RNA 분자가 뇌세포에 화학 자극을 가해 생각하게 하며 기억을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인이여, 네 생각은 어디에 있느냐? 역시 뇌에 있느냐?

요한 볼프강 폰 괴테파우스트에서는 욥기 초반 부분을 오마주 형식 일종으로 가져왔다. 메피스토펠레스하느님에게 파우스트 박사 유혹해 보자고 제안하자 하느님이 허락은 하지만 파우스트는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는 대목이 나온다.

레비아탄(리바이어던)과 베헤모스(바하무트)는 욥기에서 언급된 덕분에 네임드 거대한 괴수로서 엄청난 인지도를 얻었고 토머스 홉스가 국가의 본질/기원/조직/형태/발달 따위에 관한 이론을 주제로 저술한 <리바이어던>을 필두로 수많은 창작물에 등장하게 되었다. 함께 유대교 전설에 등장했으나 여기서 언급이 안 되어 인지도가 낮은 지즈와 대비된다.

한국 플래시 애니메이터 북서니의 플래시 '찔러맨'에 등장하는 사람 중 하나인 스펜타는 욥의 일대기를 그대로 따왔으며 찔러 리메이크판은 기독교 성경 구절을 토대로 재구성했기 때문. 여기서 스펜타는 지구의 신이 되었다. 참고로 북서니의 세계관에서 신은 절대자가 아니라 천사보다 조금 높은 수준으로 간주되고 있다. 작중 주인공인 찔러의 무기의 원래 주인들도 신인데 꼬리 형태의 채찍 주인인 라큄은 물의 신, 물을 검으로 바꾸는 장갑의 주인인 베알제불은 생명의 신 출신이며 친구인 라큄을 배신하고 그의 무기도 빼앗으려다 그에게 최후를 맞았으며 그때의 피로 무기가 오염되었다고 한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영화 1편에서 욥의 철자가 Job(영어 발음은 조브)으로 '직업, 일'을 의미하는 단어와 철자가 같은데 발음은 약간 다르다는 점을 이용했다. 상관이 'Job'을 언급했을 때 이든 헌트(톰 크루즈)가 몇 시간 삽질하던 것은 Job을 '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이 번역될 때 매끄럽게 살려지지 못해 그냥 '욥'이라고 언급되어 관객 중에는 "'욥'이면 '욥기' 얘기 아냐? 이든이 바보인 듯."이라던 사람도 있었다. 이 같은 패러디는 스티브 잡스와도 엮이곤 하는데, 그중 압권은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내놓은 것. 아예 제목을 대놓고 'The Book of Jobs'라고 썼다. 예수 대신 스티브 잡스가 주인공이고, 성경책 대신 아이패드가 손에 들려 있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사우스 파크에 등장하는 카일은 평소에 악행을 저지르던 카트맨이 거액의 유산을 물려 받았는데 자신은 치질로 고통받는 게 분해서 신을 믿지 않게 된다. 그러자 부모가 욥기를 읽어주며 마음을 돌리려 했는데, 카일은 왜 하느님이 사탄한테 증명하려고 그런 끔찍한 짓을 하냐며 화를 냈다. 나중에 카트맨이 IRS에게 물려받은 돈을 죄다 세금으로 뜯기는 걸 보고 나서 신앙을 회복한다.

고태호 작가의 웹툰 당신의 과녁에서 주인공 최엽의 친구 최요한이 욥기의 구절을 읊는다. 주인공 최엽의 이름 또한 욥기의 욥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되며 웹툰 줄거리도 욥기와 굉장히 유사하다.

산돌 손양원(1902 ~ 1950) 목사는, 일제강점기때에 옥에 갇힌채로 자신의 아내 정양순과 편지로 연락할때에 그 내용 중의 한 말 "솔로몬의 부귀 및 지혜보다 욥의 고난과 인내를 귀하고 아름답다"고 한 말이 제일 유명하다.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CCM 꽃피는 봄날에만을 강훈이 작곡했으며, 새찬송가에는 김국진이 작곡했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멋진 징조들의 시즌 2에서는 시대 배경이 기원전 2500년으로 설정되었으며, 욥의 자식들이 배증하지 않는 것에 대해 패러디한다. 크롤리가 신의 허가에 따라 욥에게 재앙을 가져오면서도 불편해하다가 욥의 아들과 딸을 죽여야 할 때가 되자 아지라파엘이 이를 막고, 크롤리는 죽이는 척을 하면서 자녀들을 도마뱀으로 변신시킨다.[51] 이후 욥이 신앙을 증명함으로써 신이 욥의 재산을 배증해 줄 때, 몰래 도마뱀으로 변신시켰던 자녀들을 원래대로 돌려놓는데, 욥의 아내는 눈치를 채고 "우리의 새 아이들이 옛 아이들하고 많이 닮았네!"라고 하며 원래의 자녀들임을 천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이때 크롤리가 신발장이이자 산부인과 전문인 수아 사람 빌닷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데, 이 과정에서 가브리엘은 "정상적인 인간 탄생 과정이야. 전에 봤어."라며 눈치를 못 채고 넘어간다.

욥기 23장 10절을 바탕으로 박정은이 작사, 작곡하고 어노인팅 미니스트리에서 부른 것으로 유명한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이라는 CCM이 있다.

욥기의 내용을 뮤지컬 신창섭에 빗대어 해석한 영상도 있다. #

7. 욥의 언약

욥의 언약에서는 욥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나오지 않는다.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지만 욥은 가난한 자들을 도우며 선을 행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네가 섬기는 우상들이 창조주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에 욥이 우상들을 모두 제거하고 하나님을 숭배하려고 하자 천사가 앞으로 엄청난 고난을 당하겠지만 이 고난 후에 복이 온다고 말하는데, 욥은 가짜신들을 버리고 진정한 창조주를 섬기기 위해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온다. 사탄이 거지로 변장하여 욥에게 찾아가 빵을 달라고 말하는데, 사탄임을 알아챈 욥은 시종에게 타버린 빵을 주라고 한다. 시종은 그런데 새빵을 사탄에게 주자 사탄은 이 빵 말고 욥이 주라고 했던 빵을 달라고 한다. 타버린 빵을 받은 사탄은 욥에게 경고(혹은 저주)하며 하나님에게 고발하러 간다. 이후는 욥기와 비슷한데, 다른 점은 욥의 원래 이름은 요밥이었다고 하며, 친구들이 욥에게 이집트왕이었던 욥이 맞느냐며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엘리후는 악한 자로 번역이 되었는데, 이게 번역이 잘못된 것인지 애매하다. 그리고 친구들의 진정한 죄는 욥을 정죄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고난을 당하는 욥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1] 추측되는 연대의 폭이 타 성경에 비해 굉장히 넓다. 이유는 후술 참고.[2] 성우 배한성이 욥 역을 맡았다.[3] 성경에서는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이자 경건한 신도라고 나오는데, 고대 유다인들은 요르단강 동부 지역에 살고 있는 이스마엘의 후손인 북부 아라비아의 부족들을 동방인이라 불렀다.[4] 국내 주석에는 대부분 욥이 아브라함과 동시대라고 하지만, 해외 주석에는 요나 시대라고 한다. ex. 클라우스 베스터만의 성서입문.[5] 한결이 지은 만화 성경은 시간대별로 나열하고 있다. 구약 편의 욥기는 구약의 맨 마지막인 말라기 직전에 등장한다.[6] 이 경우 저자는 욥 본인으로 간주된다.[7] 이 경우 저자는 유대 전승 및 탈무드를 근거로 하여 모세로 간주된다.[8] 이 경우 저자는 욥기 28장과 잠언 8장의 문체가 유사함을 근거로 하여 솔로몬으로 간주된다.[9] 이 경우 저자는 욥기와 예레미아서의 문체가 유사함을 근거로 하여 예레미야로 간주된다.[10] 이는 욥에 대한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져 왔으나 이것을 기원전 3~2세기경의 유대인들이 그들이 처한 상황과 현실의 문제의식을 반영하여 새롭게 각색했다고 보는 입장이다.[11] 엘리후 왈, "저는 여기 계신 올드비님들에 비하면 뭣도 모르는 눈팅 뉴비지만 보자 보자 하니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성경이 워낙 점잖은 어조라서 안 느껴질 뿐이지 실제로 이런 식으로 말한다. 사실 욥과 친구들이 논쟁을 벌이는 모습 속에서도 굉장히 적나라한 인신공격이 많이 보인다.[12] 이런 관점이 유대교 내에서는 일반적이었던지, 요한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조차 맹인을 보고 "이 맹인은 누구의 죄 때문에 이리되었는가"라고 예수에게 물어보았을 정도였다.[13] 성경에서 나이나 외모 등은 보통 그 인물의 지혜로움을 묘사한다.[14] 사탄이 말을 건 당시 욥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부유한 사람이었고 사탄은 그가 하느님을 잘 섬기는 이유는 하느님이 그에게 이런 부유한 인생을 허락했기 때문이라고 했다.[15] 생명을 해치는 것은 창조 권세를 주관하는 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사탄이 욥의 일가족과 100명이 넘는 종들을 죽였으니 이 관점이면 하나님이 죽인거라고 해석이 가능하다.결과론적으로는 욥이 자신에게 수많은 시련이 닥쳤는데도 그 목숨을 스스로 버리지 않았으므로 수많은 복을 받아 누렸다.[16] 이 당시 낙타는 예전 우리나라의 말이나 소 같은 개념이었다. 당시 고대인들에게 정말 중요하고 가치 있던 재산인 것이다.[17] 욥의 가축들이 도살되고 머슴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심부름꾼이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라고 말한 이 구절은, 소설 모비 딕에서 피쿼드호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자 일인칭 관찰자 주인공인 이스마엘이 살아남은 이야기를 담은 마지막 장의 시작이다.[18] 원어는 히브리어 헤레쓰(חֶ֔רֶשׂ)로서 이전에는 '기와 조각'으로 번역되었다가 개역개정판에서는 질그릇 조각,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토기 조각으로 번역되었다. 영문 성경에서는 potsherd(질그릇 조각)라는 단어로 표현된다.[19] 이 단어의 의미는 명확하게 해석되었다기보단 유추되어서 해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예레미야서 19장에 '하시드 문'이라고 하는 기묘한 표현이 등장하는데 원어는 '솨아르 하르쑤트(שַׁ֣עַר חרסות)'에 가까우며 이 역시 토기 조각 + 문(門)이기 때문에 토기 조각으로 장식된 문이거나 혹은 인근에 토기에 관련된 어떤 요소가 존재했기 때문에 저런 이름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본문의 헤레쓰의 경우 '문지르다(긁다)', 혹은 '피부병'이라는 의미가 담긴 헤레쓰(חָ֑רֶס)라는 히브리어 단어와도 관련이 있다. 이 둘을 조합해 보면 '몸을 긁는 용도의 토기 조각' 정도가 되는 것이다.[20] 참고로 욥이 몸을 긁는 것은 가라드(גָּרֵ֖ד)라는 단어로 표기되는데 직역하면 '문질러 벗겨지게 하다' 라는 의미다. 즉 욥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토기 조각으로 몸의 껍질이 벗겨져 나갈 정도로 긁어대고 있었다는 것이다.[21] 정말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도 요지부동이군요?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 욥기 2장 9절, 공동번역 성서[22] 욥의 아내처럼 불경건한 말을 하지 말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욥의 아내의 처지가 되어 생각해 보면 그렇게 욥의 아내를 함부로 신앙이 없다고 나쁜 여인이라고 정죄할 수 없다. 갑자기 자신이 낳은 자식들과 집의 재산들을 한꺼번에 잃고 남편마저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욥뿐 아니라 욥의 아내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욥의 아내의 악담은 당연한 인간의 반응이다.[23] 그래도 일주일간 울면서 같이 있던 것을 보면 좋은 친구는 맞긴 맞다. 다만 고난에 대해서 "죄=고난", "죄 없음=행복"이라는 인과응보적인 이분법 사고를 가졌기에 언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24] 욥기 7장 7~21절. 하지만 도입부의 서술과 자신의 증언으로는, 욥처럼 완전하고 진실되며 악행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지상에 다시 없다고 한다.[25] 사실상 욥이 망할 악인이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다.[26] 엘리후에 대한 평판은 논리적으로 옳다 vs 인정머리 없이 디스밖에 모른다는 논란이 오가고 있다. 일단 성경 자체에서 엘리후가 옳은 인물이었는지, 잘못된 인물이었는지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 다만 국내 개신교 쪽 성경이나 교리 책에선 엘리후에 대한 태도는 대체적으로 우호 중립 쪽이다.[27] 이 세 딸은 전부 그 지방에서 제일가는 미녀로 성장했다고.[28] 자식들에 대한 해석은 하단 참조.[29] 즉 옳다, 그르다(judgement) 한것이 아니라 욥의 친구들의 말이 욥의 상황에 합당하지 않다고 한것이다. 즉 신학적으로 봤을때 친구들의 말은 ‘옳은 말‘ 이 맞지만 욥의 상황엔 맞지 않는 말이었던 것이다.[30] 이런 식의 윤회관은 불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빈부 격차나 현세의 고통을 설명하기 위한 개아적 윤회는 현대 불교에서 비판받는 개념이다. 불교에서 '윤회'는 세상 모든 것이 자신과 인과 관계로 묶여 있다는 '연기'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되었을 뿐이다. 본디 윤회는 브라만교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부처 시대에 통용되던 세계관이었기 때문에, 부처는 강하게 부정하진 않았지만 긍정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논쟁해 봤자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못 박아놨다. <다제경>에서는 심지어 윤회에 대한 믿음을 꾸짖기도 한다.[31] 자동차 사고로 가족들이 전부 다 죽고 자기만 살아남았을 경우 우리가 일반적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늘상 일어나는 천재지변이나 불행한 사고로 여기고 안타까워할 뿐이지 그것을 모두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고 반박한다지만 "도울 수 있었음에도 무시하고 지나간 사람들"이 왜 비난을 받는지 생각해 보면 현대 도덕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위험한 사상인 건 둘째 치고서라도.... 욥이 어쩌다가 성경에 나온 고난에 처했는지 생각해 보면 이런 반박을 하는 사람은 애시당초 성경조차 제대로 읽지 않은 사짜다! 단순히 사탄이 혼자서 깽판 치게 내버려뒀다 해도 문제인데, 신이 사탄의 이야기를 듣고 "오 좋네 해보자"(...)고 명시적으로 허용했기에 더 문제인 거다. 이 때문에 욥은 실존 인물이 아니고, 성경 저자가 신에 대한 교훈을 위해 쓴 글이라는 게 정설이라고 말한다지만, 소설이라고 해도 그 소설에서 다루는 내용이나 그 소설에 투영되는 작가의 윤리관과 세계관이 지나치게 위험해 보이면 격렬한 비판을 받거나 출판 금지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욥기 저자가 그렇게 사람들이 죽어나갔는데 무슨 리모컨 다 쓴 배터리 가는 것마냥 간편하게 새 자식새끼 줬으니 해결~이라고 말하는 부분을 부정적으로 서술했으면 몰라....[32] 그런데 당신의 말에 한마디 답변도 않으신다고 해서 어떻게 하느님을 비난할 수 있겠소? - 욥기 33장 13절, 공동번역성서[33] 문제는 한국의 기독교 중 특히 개신교들이 축자영감설같은 근본주의적 관점을 미는 경향이 워낙 강하다 보니 한국에선 설득력이 그만큼 없다는 것이다.[34] 소위 "불평은 적당히 했으면 눈치껏 기어라. 니가 지금 신을 이기려는 것이냐? 그럼 니가 하느님 해볼래?"[35] "반박"이라고 표현했지만, 하나뿐이었던 가족을 모두 잃은 욥의 입장에선 정신줄 똑바로 잡고 이성으로 반박하며 감정적이 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36]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서 6:23)[37] 혹 기독교에서 그 끔찍함이 강조되듯 굴라그, 아오지 탄광보다 끔찍한 곳에 비유도 가능할 것이다.[38] 골 때리게도 정반대의 논리도 자주 볼 수 있다. 예정설 혹 이중 예정설을 강력히 주장하는 장로교 같은 개신교 교파들의 경우 노오력보다는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를 강조하다가 선민사상스러운 논리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39] 호교론자는 이를 "믿음을 시험하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도 생각해 보면 성경에 사람이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경고(예로 출애 17:2, 마태오 4:5-7)는 강조하면서 역으로 하느님이 사람을 시험하는 건 괜찮다는 얘기인지 질문을 할 수 있다. 그저 '창조주'라는 이유로? 그것도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에 시험할 필요부터가 없는 높디높은 전지적인 존재께서?[그러나] 시간을 초월한 야훼가 미래의 결과를 알고 있다는 것은 어쨌든 필연적으로 그 일이 이미 과거나 현재에 일어나야 하는 것이기에 "미래를 알고 있으니 시험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우문이다. 오히려 시험의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시험이 필연적이다. 시간을 초월한 야훼는 시간의 흐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야훼가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미래라는 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무수한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변수가 아니라 이미 실현이 예정된 단 하나의 결과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기독교 세계관에는 평행세계 이론 따위가 없다 즉, 욥이 시험을 통과한 미래가 있고 시간을 초월하는 야훼가 그걸 알고 있기에 현재의 욥은 시험을 통과한 미래의 욥이 되기 위해 현재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41] 앞서 야훼의 시간 초월성을 간과하여 나왔던 우문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야훼의 전지성을 간과한 것이다. 억지 감동으로 야훼를 속일 수 없으며, 무신론적 관점이라면 모를까... 야훼라는 신의 전제에는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의 근원이라 존재함 그 자체로 모든 피조물의 공허함을 충족, 다른 말로 모든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는 점이 깔려있다. 앞서 천국 갔겠죠^^ 역시도 그렇고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야훼가 주는 위로를 넘어서는 고통은 존재할 수 없다. 야훼가 그 크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이라는 말이다. 흔히 창작물에서 나오는 "내가 이렇게 힘들었는데 당신이 뭘 알아?!"라는 사이다적 대사는 기독교 세계관 안에선 나올 수가 없다. 불경해서... 따위의 이유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야훼가 욥 자신보다 욥에 대해 그것이 욥의 기쁨이든 고통이든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42] 실제로 야훼가 사탄에게 하는 말도 야훼의 전지성을 보면 "오 그래 한번 해보자"가 아니라, "그래, 어디 한번 해봐라. 네 뜻대로는 절대 안 되겠지만"이라든가 "그러셔? 어디 니 말이 맞나 아닌가 한번 볼까?"라는 뜻인 것이다.[43] 책에서 사용한 인물로는 욥.[44] 이 욥이란 인물이 지칭하는 대상은 히브리 문학/비문학에서 사용되는 기법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마땅한 해석은 아쉽게도 없다.[45] "네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내 탓 하지 마"란 식이 아니다.[46] 선민으로서의 자부심이 굉장한 유대교 랍비들은 전승되어 온 해석 기법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공개하지 않는다.[47] 이건 심지어 그나마 읽기 편한 서신들도 마찬가지. 가만 살펴보면 서신들에 나오는 내용이 묘사하는 그 무언가는 완전한 맥거핀. 신약 전체를 뒤져봐도 띄엄띄엄 읽으면 안 나온다.[48] 성경에 따르면 신 외에는 온전히 선하고 의로운 존재가 있을 수 없으므로 이 또한 교만이다. 자세한 것은 선악과 참조.[49]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선한 유일한 존재인 신을 원망한다는 것은, 욥 스스로가 나는 벌을 받을만한 나쁜 사람이 아닌데, 신께서 죄인을 착각하셨거나, 혼자 미치셔서 그런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다. 성경에선 욥은 분명 인간 기준에선 선한 존재이나, 신에게 비빌 정도는 절대 아니기 때문.[50] 영국의 작가로, <영원한 사람>과 같은 종교 논증 저작물도 다수 남겼으나 일반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작품은 다름 아닌 추리 소설 브라운 신부 시리즈다. 실제로 작가 본인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51] 이전에 신의 허가를 받아 염소들을 학살하는 것처럼 보인 것도 사실 염소들을 숨긴 후에 새들로 변신시킨 것이다. 아지라파엘은 크롤리가 염소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가 아이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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