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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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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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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주요 도시들의 현재 지명
파일:1510194457947.jpg
1. 개요
1.1. 들어가기에 앞서1.2. 한자의 독음 문제
2. 후한 13주3. 위(魏)
3.1. 주요 지역
4. 촉한(蜀漢)
4.1. 주요 지역
5. 오(吳)
5.1. 주요 지역

파일:260년삼국시대주군지도.png

1. 개요

삼국지에 등장하는 지명을 정리한 문서.

, , , 삼국이 활약해 남긴 기반은 이후 서진-남북조시대-·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삼국시대는 실질적으로 중국 중세의 시작이다.

1.1. 들어가기에 앞서

각 군·현이 중복되어 기재되는 것을 막고자, 삼국 정립 체제가 본격적으로 막바지로 들어서는 260년 연말을 기준점으로 잡아, 260년 무렵의 상황을 기준으로 주·군·현 지명을 정리하였다. 그 결과 문서 내용이 길어진 관계로 각 군·현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주마다 하위 문서를 나눠 작성했다.

'양주'의 경우에는 이것이 '揚州'인지 '涼州' 구분하기 어렵다. 따로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 이에 하위 문서 이름과 연혁 정보에 한정해서 揚州는 '양주'로, '涼州'는 '량주'로 표기하였다. 비록 서진 때에는 익주에서 '양주(梁州)'가 분할되어 제3의 '양주'가 등장하긴 하지만, 별도로 하위 문서로 분리된 익주 지방에서만 등장하는 지명이므로, 따로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에 그대로 '양주'로 표기하였다.

연혁 정보는 『한서』 지리지·『속한서』 군국지·『진서』 지리지에 등재된 정보를 기준으로 하여, 이를 각각 '[전한]'·'[후한]'·'[서진]'으로 약칭했다. '[전한]'과 '[후한]'의 연혁 내용이 겹칠 때는 이를 '[한]'으로 줄여 표기했다. 진(秦)나라 때 실존이 확인되는 군·현은 그 연혁을 '[진]'으로 표기했고, 후한 말부터 280년 사이의 일이지만 정확한 연도를 확인할 수 없을 때는 '[삼국]'으로 표기했다. 그 외의 연혁은 대괄호([ ]) 안에 서력기원 연도 숫자만 표기했는데, 기원전 연도의 경우 '기원전'을 '-'로 표기했다. 예를 들면 '[-100]'은 '기원전 100년'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연혁 변동은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고, 『진서』 지리지 또한 후한 말 이후의 일들을 모두 서진 때 발생한 변동으로 뭉뚱그려 기술하는 문제가 있다. '[삼국]'이나 '[서진]'으로 줄여 표기한 정보들은 이 점을 주의하여 살펴볼 것을 권한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기울임꼴로 표기했다.

참고로 『한서』 지리지의 기준 연도는 군 이름과 호구 정보는 기원후 2년이고 현의 소속은 기원전 8년이며, 『속한서』 군국지의 기준연도는 140년 무렵이고, 『진서』 지리지는 283년을 전후를 기준으로 하지만 태강(太康) 연간인 280~289년의 정보가 혼합되어 있다. 후한 초기인 기원후 30년에 대규모의 현(縣) 통폐합이 있었기에 후한 때 폐지된 현들은 대체로 이 시점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되나, 이를 명확히 알 수 없으므로 『속한서』 군국지를 기준으로 하여 '[후한]'으로 표기하였다. 위나라 때에는 253년에 군·현 통폐합이 있었고, 촉한 멸망 이후인 263년에 익주를 재편했다. 서진 때에는 280년 통일 후에 전국을 재편하여 그 결과를 283년에 『태강지리지』로 정리하였는데, 『진서』 지리지는 이를 모본으로 한다. 지리지마다 다소 부정확한 점이 있어, 이를 정정했을 때에는 그 사항을 본문이나 각주로 명시하였다.

각 주별로 나눠진 하위 문서에서는 260년에 운영된 군(郡)을 기준으로 문단을 구성했고, 문단마다 표를 작성하여 그 군의 연혁을 정리했다. 지명·소속·치소(治所) 정보는 서진 때까지 그 군의 가능한 파악할 수 있는 연혁을 기술하였으며, 그 외에는 180~290년 사이에 발생한 변동과 그 군의 출신 인물이나 군을 식읍으로 수여받은 인물 정보도 표시하였다. 또한 한때 독립되었던 군이거나, 오(吳) 멸망 이전에 분리되는 군은 별도로 하위 문단으로 구분하여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는데, 구분된 하위 문단에는 원칙적으로 연혁표를 작성하지 않았으나 오원군·삭방군·운중군·정양군·상군은 예외로 폐지 이전의 연혁을 따로 작성했다. 각 연혁표마다 서진 이전 시대의 연혁 정보를 따로 첨부하고 이를 접어두었다. 진나라의 연혁은 실존이 확인되는 현들의 목록만 적어두었다. 신나라 때 각 현의 소속은 명확히 알 수 없으므로 그 연혁은 대체로 왕망이 개명한 사례만 기재했는데, 왕망이 삼보를 6위군(尉郡)으로 재편한 것은 확인할 수 있으므로 그 경우에만 소속 변동을 반영하였다.

각 현(縣) 이름 아래에는 필요한 경우 그 현에 대한 설명을 적었다. 그 아래로는 하위 항목으로 현 이름 변동 연혁을 기재하고, 그 현의 소속에 관한 연혁 정보, 위치 정보, 봉작 정보 순으로 적었다. 현의 소속 연혁은 군 소속이 변동될 경우에만 기재했으며, 단순히 군(郡)의 이름만 바뀐 경우 역시 생략했다.

위치는 현 치소로 비정되는 곳을 원칙으로 표기했으며, 정확한 위치를 표현하고자 10진수의 위·경도 좌표를 겹화살괄호(《 》) 안에 표시하여 이를 웹 지도로 쉽게 확인할 수 있게끔 작성했다. 예를 들어, 낙양현(洛陽縣)의 위치는 "《34.72867, 112.62253》 허난성 뤄양시 멍진현 한·위낙양고성유지"로 표기했는데, "《34.72867, 112.62253》"는 위·경도 좌표를 의미하며, 각각 '북위 34.72867도'와 '동경 112.62253도'를 의미한다. 웹 지도에서 "34.72867, 112.62253"를 검색하면 해당 위치가 표시된다.(해당 좌표를 구글 지도에서 검색한 링크) 참고로 구글 지도는 중국 지역에 대해서는 실제 장소와 왜곡 처리가 되어 있어 일반 지도 모드에서는 이상한 위치가 표시되며, 정확한 실제 위치를 확인하려면 레이어를 '위성' 유형으로 변경해야 한다. 위치 정보가 나오지 않는 현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봉작 정보는 해당 지역에 봉토가 설정된 인물의 목록을 기재하며, 원칙적으로 처음 봉작을 받은 시봉자(始封者)의 이름만 기재하였으나, 후한 당시 황족들의 봉작에 한해서 황건적의 난 이후 작위를 승계한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의 이름을 기재하였다. 연도는 그 지역에 봉토가 설정된 기간을 의미하며, 실제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의 봉작은 취소선으로 표시하여 이를 구분하였다.

각 현의 마지막 항목에는 그 현에 소속되어 있거나 주변에 위치한 지역 중에 삼국시대에 언급되는 주요 지명들을 나열하고, 그 위치에 대한 위·경도 좌표를 기재했다.

1.2. 한자의 독음 문제

일부 한자에는 복수의 음(音)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어, 몇몇 지명은 여러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이 문서에서는 현대 한국어의 한자음을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현대 한자음에 복수의 음이 있을 때는 기록된 반절음에 가까운 것을 우선하여 표기하였다. 특히 지명으로 쓰인 아래의 글자들은 일률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司隸校尉'의 '隸'는 본음이 '례'이므로 두음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이상 그대로 발음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를 '예'로 읽는 속음 현상으로 특별한 예외 규정이 없음에도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奴隸'는 '노례'라 하지 않고 '노예'로 등재되었으며, 마찬가지로 '家隸' 또한 '가예'로 등재되어 있다. 속음에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에, 전문 서적들에서도 司隸를 '사례'와 '사예' 양쪽으로 일관성 없이 표기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는 일관성을 위해 이를 '사례'로 표기하나, 어느 쪽 표기가 옳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2. 후한 13주

한나라에서 주(州)는 원래 행정구역이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에 유래한 구주 관념에 따라 중원 지역을 구분하는 '지방' 개념이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 경상북도 등을 통틀어 '영남'으로 부르지만 그것이 행정구역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무제가 기원전 107년 자사(刺史)라는 감찰관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각 자사의 관할구역을 의미하는 '자사부(刺史部)'의 범위가 얼추 구주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그저 그 명칭에 따라 명명한 것에 불과하다. 자사의 감찰권 또한 태수를 직접 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태수나 현령 등을 보좌하며 행정을 총괄하는 승(丞) 이하의 관리들을 대상으로 할 뿐이었다.

중앙 정권의 권위가 무너지면 각지의 지방관들이 군웅으로 돌변하는 현실을 직접 목격한 광무제는 태수(太守)에게 지나친 군사권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고자, 원래 감찰관에 불과했던 자사들을 각 지방에 주둔시키면서, 여러 군(郡)이 공동으로 대처해야 하는 변란이 발생했을 때는 각 군에서 병력을 각출해 자사에게 보내고, 자사가 감군(監軍)이 되어 그 병력을 지휘하여 이를 대처하게 했다. 각 군에서 보내는 병력은 그 군의 일부에 불과했었으므로, 이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사가 태수의 상관으로써 태수를 지휘하는 입장은 되지 못했다.

영제 때 후한의 통치 질서가 붕괴하게 되자, 각지에서 할거할 세력을 도모하고 있던 이들은 여러 개의 군(郡)을 장악함과 동시에 세력 확장에도 나름의 명분을 부여할 수 있는 직책으로 자사의 가치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유언은 이에 한술 더 떠서, 공식적으로 독자적인 군(軍)을 편성할 권한까지 갖는 주목(州牧) 자리를 만들어 내 익주목으로 부임했다. 반동탁연합이 결성된 이래 후한의 정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고 각지에서 군벌들이 할거하게 되자,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춘 군벌들은 제각기 주목이나 자사직을 자처하며, 부하들을 각지의 태수 등으로 임명해 보내 그들의 상관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여러 주(州)를 장악한 뒤에는 자신의 친족이나 측근을 자사로 임명하고, 독자적인 징병권을 갖는 장군직과 임지 내에 주둔한 모든 부대에 대한 군사적 작전통제권을 의미하는 도독(都督)직을 겸임시켜, 자사 직책을 명실상부한 태수의 상관 직책으로 만들어 냈다. 바로 이때부터 각 주(州)는 소속된 군(郡)의 상위에 위치하는 행정구역으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자사 직책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감찰관에 불과할 뿐, 어디까지나 장군직과 도독직이 결합하여 초유의 권한을 갖게 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구품관인법이 시행되면서 자사에게 공식적으로 각 군·국의 중정(中正) 임면 권한이 주어짐으로써 자사는 인사권까지 갖게 되었고, 결국 그 자체로 명실상부한 태수의 상관으로 입지를 다졌다.

사마염이 삼국통일 이후에 이렇게 각 주의 자사가 태수의 상관으로 군림하게 된 것을 시정하고 특히 각 군에 대해 치민(治民) 권한을 더 이상 행사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구조적으로 태수를 압도하는 권한을 갖게 된 자사가 원래대로 감찰관으로 돌아갈 리는 당연히 없었다.

후한 13주
사례
司隸
연주
兗州
예주
豫州
기주
冀州
유주
幽州
병주
幷州
옹주
雍州
양주
涼州
익주
益州
청주
靑州
서주
徐州
형주
荊州
양주
揚州
교주
交州

2.1. 지방 행정구역 단위

군현제에 따른 지방 행정구역 단위는 군-현·도-향 3단계로 나뉜다.
관례상 제후의 식읍은 '국(國)'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를 봉국(封國)이라 한다. 봉국을 소유한 제후가 통치권을 가지고 있어, 제후가 임명한 상(相)이 그 통치권을 대행하는 구조였다. 진(秦)나라 때는 이러한 식읍들 위에 현(縣)이 설치된 개념이었기에, 식읍에 어느 정도 독자성이 인정되어도 현의 행정력과 사법권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양립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진나라가 무너지면서 여러 개의 군(郡)을 자신의 영토로 갖는 왕(王)이 등장했고, 열후나 공주가 장악한 봉국은 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통치를 하게 되었는데, 전한이 성립된 이후에도 이런 양상이 지속되어 군국제의 형태로 정립되었다. 오초7국의 난을 거치고 추은령(推恩令)이 시행되자, 왕(王)의 봉국은 점차 1개 군(郡) 수준으로 줄어들었으며, 각 국의 상(相)은 더 이상 제후가 아니라 황제가 임명하는 관직이 되어, 왕·열후·공주 등은 명목상 봉국의 통치자일 뿐, 실제로 그 봉국은 황제가 통치하는 지방 행정구역 단위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또한 열후 등의 수조권도 박탈하여 수여된 식읍의 호(戶) 단위에만 맞춰 그에 해당하는 급여를 지급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따라서 왕의 봉국은 군(郡)과 동급의 행정구역으로 간주되었고, 그 아래에는 현(縣)이 있었다. 열후에 책봉되거나 이왕삼각의 예에 따라 공(公)의 칭호를 받게 된 제후들의 봉국은 현(縣) 동급의 행정구역으로 간주되어, 새로운 책봉이 이뤄지면 그 봉국을 현에서 독립시켰다. 현과 동급의 봉국은 왕의 경우와 구분하기 위해 보통 '후국(侯國)'으로 통칭했다. 공주와 같이 열후로 책봉되지 않는 사람이 명목상 통치권을 갖는 식읍을 하사받으면 마찬가지로 현에서 독립시켰는데, 이 경우 국이라 하지 않고 '읍(邑)'이라고 불렀다. 읍에는 상이 임명되지 않고 그대로 령(令)·장(長)이 임명되었다.

후한 광무제는 열후 등이 책봉되면 그 봉국을 무조건 현에서 독립시키는 것이 인력 낭비가 심하고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여, 열후를 식읍의 규모에 맞춰 현후(縣侯)-향후(鄕侯)-정후(亭侯) 3단계로 구분하고, 정후는 정부(亭部)를, 향후는 향을, 현후는 현을 봉국으로 삼아, 현후의 경우에만 봉국을 현에서 독립하도록 만들었는데, 사실 그마저도 기존의 현을 국으로 개편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후한 말에는 현후-도향후(都鄕侯)-향후-도정후(都亭侯)-정후 5단계로 늘어났는데, 마찬가지로 열후가 보유한 식읍의 규모에 따른 구분이었다. 본래는 식읍의 규모만 의미하고 서열을 의미하는 개념은 아니었는데, 위나라 때부터는 열후 내의 서열로 규정되었다.

후한 말에는 군웅들이 열후를 자칭하는 것은 물론이고 친족·부하나 동맹 측 인물들까지 제멋대로 열후로 책봉했다. 자신의 영역 내 지역에 열후를 책봉한 것도 아니었고, 멋대로 임명된 열후의 식읍이 실제 봉국으로 운영될 리도 없었다. 작위의 이름만 있을 뿐 봉국은 운영되지 않고, 그저 수여한 식읍 규모만큼 규정된 별도 급여를 받는 형태의 책봉을 학자들은 '허봉(虛封)'이라고 하는데, 삼국시대에는 이러한 허봉이 일반적인 책봉 형식이 되었다. 촉한과 오는 황족들마저 대놓고 위나라의 영역을 식읍으로 수여했다.[4] 위나라의 경우에는 황족들만 봉국을 설치하고 그 외에는 허봉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264년에 사마소가 도입한 오등작이 실제 봉국을 설치하는 것으로 열후와 차별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오등작도 현왕 미만은 실제 군·현이 아닌 관념상 리(里) 단위로 설정된 봉국을 받았으므로, 왕으로 책봉되거나 이왕삼각의 예우를 받는 경우에만 식읍으로 받은 군·현이 봉국으로 개편되었다. 군공이나 군후 또한 원칙적으로 그 식읍이 봉국으로 개편되지는 않았으며, 275년에 개국공신으로 추숭된 인물들의 식읍만 봉국으로 격상되었다. 따라서 군급 봉국 아래에 다른 제후의 봉국이 설정되기도 했고, 같은 현에 여러 봉국이 설정되기도 했다. 이런 경우에는 별명이나 옛 지명을 사용하여 봉호(封號)를 달리하였다. 현후 이상이 책봉된 군·현의 장관은 이전처럼 상(相)으로 임명했다. 289년에 왕국의 상이나 왕국에 소속된 지군(支郡)의 태수는 내사(內史)로, 오등작 봉국이 있는 현의 상은 국상(國相)으로, 현후 식읍이 있는 현의 상은 후상(侯相)으로 구분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지방 행정구역 단위는 실질적으로 군·국(왕국)-현·도·국(후국)·읍-향·국 3단계의 6종류가 되었다. 각급 단위에 임명되는 지방관은 아래와 같다.
진(秦)·한(漢)에는 '부(部)'라는 이름을 갖는 권역도 있는데, 이것은 어느 관리의 그 임무 책임이나 권한이 미치는 범위, 즉 관할구역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정부(亭部)'는 정장(亭長)의 책임 범위에 가까운 개념으로 몇 개의 리(里)에 걸쳐 있는데, 그렇다고 하여 그 정장이 정부에 소속된 리를 담당하는 행정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장 본연의 책임과 권한이 그 리에만 미친다는 개념이다. 따라서 '○○부'가 여러 행정구역에 걸쳐 설정되더라도, 그 관리가 그 부에 소속된 행정구역 장관들의 상관이거나, 그의 지시를 받는 개념이 결코 아니다. 감찰관의 감찰 범위 개념인 자사부(刺史部)나 독우부(督郵部)도 마찬가지 개념이며, 도독부(都督部) 또한 어디까지나 도독의 작전통제권 행사 범위만을 의미할 뿐, 결코 태수나 현령 등을 통할하는 개념의 행정구역 단위는 아니다.

도위부(都尉部)는 경우에 따라서 행정구역이기도 했다. 진나라와 전한에서는 원칙적으로 군(郡)에 도위 1명만을 두었으나, 군의 관할 영역이 넓을 경우에는 여러 명의 도위를 두었는데, 이럴 때 도위부는 본 군의 도위와 별개로 임명된 도위가 맡는 단순한 경비구역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후한 때에는 원칙적으로 군에 도위를 두지 않게 되었으므로 특수한 사정으로 도위가 설치되면 그 도위가 담당하는 권역이 곧 도위부가 되었는데, 후한 때 설치된 도위들 중에는 간혹 치민(治民) 권한이 부여된 경우가 있었다. 치민 권한을 갖는 도위부는 당대에도 군과 동격의 행정구역으로 인식되었고, 정식으로 군으로 독립한 상태가 아님에도 이를 군(郡)으로 칭하는 사례들도 보인다. 마찬가지로 도위를 태수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런 도위부는 결과적으론 군으로 독립하기에 도위부 설치를 군 분할의 준비단계 정도로 볼 수 있다.

속국도위(屬國都尉)는 더 복잡하다. 이 관직은 흉노의 혼야왕(渾耶王)이 투항하자 혼야왕의 영지에 장액군(張掖郡)을 설치하면서, 장액군에 원래 중앙의 전속국(典屬國)이 담당해야 할 임무를 대신할 관리로써 도위를 파견하여 만들어진 관직이다.[10] 후한안제는 이민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변경 지역에는 최소한의 한인(漢人)만 몇 개의 현(縣)에 남겨두어, 별도로 속국도위를 파견해 그로 하여금 이민족들을 징집하여 치안 업무를 담당하게 하고, 도위 관할구역 내의 현에 있는 한인의 치민 권한까지 부여했다. 따라서 안제 때 설치된 건위·광한·요동·촉군·장액거연·주천속국도위와 그 이후에 설치된 경우에는 그 도위부를 군과 독립된 동격의 행정구역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다른 속국도위들은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볼 수 없다.

또한 둔전제가 시행되고 있던 구역에는 전농도위(典農都尉)·전농교위(典農校尉)·전농중랑장(典農中郞將) 등이 보내졌는데, 이들은 명백히 치민 권한을 갖는 지방관들이라, 이들의 부(部)는 엄연한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봐야 한다.[11] 오나라에는 현 자체를 폐지하고 그 대신에 교위나 도위 등을 임명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각 군의 도위·속국도위나 전농관들은 원칙적으로 해당 지역 태수의 관할을 받는 관직이었으며, 공손도가 요동태수로 부임한 뒤에 사적 원한이 있던 속국도위 공손소를 양평으로 소환해 때려죽인 사례가 있을 정도다.

혹자는 속국도위부를 이민족 특별자치구역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후한은 기본적으로 어디에서든 이민족들을 직접 군·현에 소속시켜 통치하려 하지 않았고, 그저 이민족 수장들을 읍장(邑長)·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솔중왕(率眾王) 등으로 책봉해 조세와 징병의 의무 정도만 부과하는 방식을 선호했기에, 이를 자치구역 개념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속국도위는 어디까지나 별개의 군(郡)으로 분할해 운영하는 것이 지나친 낭비라 여겨서 설치했던 것에 불과했다. 간혹 이민족들을 징집할 수 있는 권한을 중랑장·교위·호군 등의 관직 형태로 부여하고, 이민족 각 부락을 그 예하 부대인 부(部)로 편성하여, 이민족들에 대한 징병을 법제화하기도 했다. 이런 관직은 보통은 태수나 자사가 겸임했지만, 따로 독립적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또한 위나라 때는 이민족 수장들도 이민족 편성 부대의 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 등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2.2. 군웅할거 세력도(190~220)

 
[[삼국지/지명/량주|
양주(凉州)
]]
(한수, 장맹, 조조)
[[삼국지/지명/병주|
병주(幷州)
]]
(정원, 장연, 고간, 조조)
[[삼국지/지명/유주|
유주(幽州)
]]
(공손찬, 공손도, 원소, 조조)
[[삼국지/지명/기주|
기주(冀州)
]]
(한복, 원소, 조조)
[[삼국지/지명/옹주|
옹주(雍州)
]]
(동탁, 이각, 마등, 조조)
[[삼국지/지명/사례교위부|
사례(司隸)
]]
(동탁, 장양, 왕읍, 조조)
[[삼국지/지명/연주|
연주(兗州)
]]
(교모, 장막, 유대, 조조)
[[삼국지/지명/청주|
청주(靑州)
]]
(장각, 공융, 원담, 조조)
  [[삼국지/지명/예주|
예주(豫州)
]]
(공주, 원술, 조조)
[[삼국지/지명/서주|
서주(徐州)
]]
(도겸, 유비, 여포, 조조)
 
[[삼국지/지명/익주|
익주(益州)
]]
(유언, 장로, 유비, 맹획)
[[삼국지/지명/형주|
형주(荊州)
]]
(원술, 유표, 장수, 조조, 손권, 유비)
[[삼국지/지명/양주|
양주(揚州)
]]
(원술, 유요, 엄백호, 왕랑, 손책, 조조)
 
 
[[삼국지/지명/교주|
교주(交州)
]]
(사섭, 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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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사례교위부(司隸校尉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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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연주(兗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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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예주(豫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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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기주(冀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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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유주(幽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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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병주(幷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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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옹주(雍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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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년에 장안으로 천도한 이후 동탁이각·곽사의 세력은 관중 지방에 위치하였으나 편의상 사례교위부 문단에 포함시켰다. 한수는 관중제장 중 한 명으로 분류되지만, 농우 지방에 근거한 세력인 만큼 량주 문단에 별도로 포함시켰다. 또한 관중제장의 세력이 존속한 시점에 관중 지방은 사례교위부 소속이었고 농우 지방은 양주(涼州) 소속이었으나, 두 지방 모두 220년 이후로는 옹주에 소속되었으므로 이 문단에 표기하였다.

2.10. 양주(涼州), 일명 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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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웅할거 시기 당시에는 옹주(雍州)였으며, 213년에 양주(涼州)와 통합되었다가 220년에 다시 분할되면서 원래 옹주였던 지역이 양주가 되었다.

2.11. 익주(益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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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청주(靑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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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서주(徐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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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형주(荊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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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양주(揚州), 일명 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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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교주(交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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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魏)

국호인 '魏'는 예서 이전까지는 '委'와 '鬼' 외에도 '山'자까지 결합하여 쓰였는데, 대체로 '山'이 글자의 아래쪽에 붙어있거나 '鬼'자에 작게 붙는 형태로 쓰였다. 해서에서는 보통 '山'자를 생략하는데, 간혹 '巍'자를 쓰는 일도 있긴 하다. 삼국시대의 금석문에 '山'자가 결합한 형태로 쓰인 것을 '巍'로 판독하고 이를 멋대로 위조의 증거로 여기는 경우가 간혹 보이는데, 오히려 '山'자가 탈락된 것이 위조가 의심스러운 경우이다.

213년에 조조헌제에게 구석을 하사받으면서 위공(魏公)의 존칭을 받고 10개 군(郡)에 책봉되었는데, 이에 따라 위국(魏國)은 하동군·하내군·위군·조군·중산군·상산군·거록군·안평군·감릉군·평원군을 그 영역으로 삼았고, 위군 업현에 수도를 두었다. 이듬해에는 공식적으로 위공의 서열을 황족이 책봉되는 왕(王)보다 높게 했는데, 사실 이건 조조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공들은 이왕삼각에 따른 특전으로 천자의 빈객 대우를 받았기에 원래부터 공(公)은 왕보다 의전상 서열은 높았으며, 조조도 같은 대우를 받은 것뿐이다. 조조가 위공을 칭하다가 위왕으로 격을 높였기에 왕이 무조건 공보다 높았던 것으로 오해된다. 216년에 위공을 위왕(魏王)으로 높였고, 220년에 조조의 지위를 물려받은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으면서 공식적으로 후한을 흡수했다. 이때 다시 하남윤 낙양현으로 수도를 정했다.

이런 짓은 사마소도 반복하여, 263년에 구석을 하사받으면서 진공(晉公)의 존칭을 받고 10개 군에 책봉되었다. 이에 따라 진국(晉國)은 태원군·상당군·서하군·낙평군·신흥군·안문군·하동군·평양군·홍농군·빙익군을 그 영역으로 삼았다. 264년에는 진공을 진왕(晉王)으로 높이면서 10개 군이 증봉(增封)되었는데, 이때 어떤 군을 더 받았는지는 사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의미가 없어 기록 안 한 듯 265년 사마소의 지위를 물려받은 사마염조환에게 선양을 받으면서, 위나라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구석을 하사받아 공의 존칭을 받으면서 10군에 책봉되고 이후 왕으로 승작하여 10군을 추가로 받는 관행(...)은 이후 육조시대에 찬탈의 기본 형태로 자리 잡았다.

삼국시대 위나라는 익주와 교주를 제외한 모든 주(州)에 영역을 두었는데, 그중 형주와 양주(揚州)는 일부만 장악했다. 263년에 촉한이 멸망하면서 익주를 차지했고, 같은 해 교주의 교지군·구진군·일남군이 위나라에 투항하면서 교주의 일부를 점거했으며, 서진으로 이어졌다.

271년에 오나라가 다시 교주 3군을 탈환했으나, 280년에 서진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오나라가 멸망하면서 삼국 통일을 완수했다.

3.1. 주요 지역

4. 촉한(蜀漢)

유언이 후한 왕조가 망할 것을 직감하여 지방에서 할거하고자 했는데, 당초에는 교지자사부로 가려고 했으나 익주에 천자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도참설에 혹해 188년에 익주목으로 부임했다.[17] 유언은 삼촉 지방을 신속히 장악하고, 오두미교 세력과 연계하여 파군과 한중군까지 장악했다. 한중군을 차지한 이후로는 오두미교의 교주 장로를 한중태수로 임명해 놓고 익주와 왕래하는 한나라 조정 관리들을 살해하면서, 오두미교 교도들을 일컫는 '미적(米敵)'이 익주의 길을 막는다는 핑계를 대며 사실상 독립하여 할거했다. 이후로는 익주에서 황제 흉내를 냈는데, 같은 시기 형주를 장악한 유표도 똑같이 황제 노릇 하던 때라 서로를 황제 행세하는 역적놈이라고 디스전을 펼쳤다. 이각곽사가 서로 반목하고 한수가 그 틈을 노려 그들을 공격하려 하자 유언은 관중 지방을 차지할 기회라 여겨 한수를 지원했으나, 이각 등이 한수를 격퇴하고 그 일로 아들 3명이 연달아 죽게 되어, 이로 인한 상심 때문인지 유언 또한 얼마 못 가 194년에 사망했다.

유언의 4남인 유장이 유언의 후계자로 추대되었으나, 유장은 장로와 반목했고 익주 내의 호족들을 완전히 제어하지도 못했다. 특히 장로와의 반목은 큰 위협이 되었는데, 당시에는 유장의 본거지인 삼촉 지방에도 오두미교가 큰 교세를 떨치고 있었고, 파군은 애초에 오두미교의 본거지였기에 장로가 독립하자 장로 세력으로 합류했기 때문이다. 재빠르게 파군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를 폈으나 결국 파군 일부가 장로의 수중에 남게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211년엔 조조가 장로를 멸하고 익주를 차지하려 한다는 소문마저 돌자, 유장은 당시 적벽대전의 승리로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던 유비를 데려와 장로와 조조에 대비하려 했다. 그러나 유비는 익주를 차지하려는 흉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런 유비를 믿지 못한 유장이 먼저 유비를 배신하여 장로와 연합을 맺어 유비를 공격했다. 그러나 익주의 호족들이 유비를 지지했고 유장은 결국 213년에 유비에게 항복하여, 익주는 유비의 차지가 되었다.

이 소식에 놀란 조조는 급히 장로를 정복하기로 했다. 장로는 곧바로 조조에 항복할 생각이었으나 동생 장위의 반대로 항전했는데, 장위가 양평관에서 나름 성공적으로 조조를 막아내고 있었으나 야생 사슴 떼의 습격을 받아 진형이 무너졌고,안될 놈은 뭘해도 안 된다 양평관이 함락당하자, 장로는 한중을 포기하고 파중(巴中)으로 도주했다. 파중은 장로가 차지하고 있던 파군의 일부를 장로 세력 내부에서 지칭한 지방 이름이라 여겨진다. 장로가 215년에 조조에 항복하여 한중과 파중은 조조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한중 공방전을 거치며 조조가 패퇴하여 결국 유비가 익주 전역을 차지했고, 유비의 추가적인 북상을 우려한 조조는 무도군과 음평군 주민들을 옹주 우부풍으로 이주시켜 2군을 무인지대로 만들었다.

익주 전역을 차지한 유비는 한중왕(漢中王)을 자칭하여 인생의 최정점에 오른다. 한중왕표에 따르면 한중왕의 식읍은 한중군·파군·촉군·광한군·건위군 5개 지역으로 설정되었는데, 당시에는 이들 군에서 자동군·파서군·탕거군·고릉군·부릉군 등이 분할된 상태였기에, 실제로는 10군의 위국(魏國)과 맞먹는 10군의 한중국(漢中國)을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 해에 손권이 형주 분할의 합의를 깨고 유비의 형주 영역을 차지했다.

220년에 조비황제를 시해하고 제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이 돌자, 유비는 발상하여 죽은 황제에게 효민황제(孝愍皇帝)의 시호를 올렸고, 이듬해에 정식으로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에 오른 유비는 손권에 대한 보복을 개시했으나, 이듬해에 이릉에서 크게 패배하여, 손권이 차지한 형주를 수복하는 데 실패했고, 이로써 촉한의 영역은 익주 한 지역으로 한정되게 되었다.

유비 사후 촉한의 익주 지배는 한때 위기를 맞이했으나 제갈량이 안정시켰고, 오히려 북벌이 시도되었다. 250년대에는 강유가 옹주 농서군의 임조현 일대를 점령하였으나, 262년 후화 전투로 상실하였다. 사마소가 찬탈을 위한 명분을 찾던 도중 촉한을 정복한 공으로 조조의 전례에 따르는 찬탈을 계획하면서, 263년에 정촉(征蜀)을 착수했으며 결국 그 해에 유선종회에게 항복하여 멸망하였다.

촉한의 정식 국호가 '한(漢)'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위와 오는 사실상의 수도였던 성도현이 소속된 촉군의 이름을 따와 '촉(蜀)'으로 불렀다. 오에 사신으로 간 촉한 관리들이 오나라 관리들이 촉(蜀)자로 디스하는 것을 맞대응하는 모습도 보인다.

4.1. 주요 지역

5. 오(吳)

연의에서는 손견18로 제후 중 하나로 등장하여, 이미 그 시점부터 독립 세력이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원술에 예속된 군소 군벌에 가까웠다. 원술이 손견에게 군량을 보내지 않았던 것 자체는 사실인데, 손견이 한창 싸우던 중에 했던 것은 아니었고, 손견이 단독으로 낙양에 입성하자 손견 세력이 성장하여 독립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행동에 가까웠다. 191년 무렵에 손견이 유표를 공격하다 전사한 것 역시 원술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193년에 여강태수 육강이 군량을 빌려달라는 원술의 요구에 응하지 않자, 원술은 손책에게 여강태수 자리를 약속하며 육강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195년에 육강이 멸망했으나, 원술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유훈을 여강태수로 임명해 보냈고, 이 일로 손책은 독립을 모색했다.

당시 원술은 구강군을 점거하고 멋대로 양주자사를 임명했는데, 조정에서 정식으로 양주자사로 임명된 유요가 오군 곡아현에 거점을 두어 원술을 구축하려 했다. 손책은 이를 기회로 여겨 유요를 공격할 것을 자청하여, 자력으로 유요와 회계태수 왕랑 등을 멸망시켜 장강 이남에 세력을 구축했다. 마침 원술이 황제를 자칭했는데, 손책은 이를 빌미로 원술에게서 완전히 독립했고, 197년에 조조가 장악한 한나라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관직을 받았다. 처음에는 회계태수에 기도위(騎都尉)를 겸하게 했는데, 다음 해에 기도위 직책이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승진하고 오후(吳侯)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200년에 사망하고, 그 세력은 동생인 손권이 물려받았는데, 조조에게 회계태수 직책을 물려받는 것을 인정받고 토로장군(討虜將軍)으로 임명되었다. 손권은 관직을 높이 데 관심을 두지 않고 아버지를 죽였던 유표에게 복수하는 것에 전념했고, 결국 208년에 유표 휘하의 강하태수 황조를 죽여 강하군·장사군·남군 등 3군의 일부 영역을 점거했다.

그러나 같은 해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에 남하했다.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인 손권은 유비와 동맹을 맺어, 적벽대전에서 승리하여 조조의 남하를 저지했다. 이에 본격적으로 핵심 군벌로 대두했으나, 손권의 공식적인 관직이 회계태수 겸 토로장군인 점이 세력을 확장하고 유지하는데 발목을 잡게 만들었다. 군·현을 점거하여 사실상의 태수나 현령 등을 임명하는 것은 사실 그동안 해왔던 일이긴 했으나, 장군을 임명할 경우에는 그 직책상 손권의 권위로는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임명할 수 없었고, 토로장군의 부관 격인 비장군·편장군 등을 임명할 수 있는 것이 한계였다. 209년에 유비가 손권을 거기장군 겸 서주목으로 추대하는 형식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211년에 창오태수 오거를 멸망시켜 본격적으로 교주로 진출했다. 219년에 유비를 배신하여 형주를 차지하자, 조조는 손권을 정식으로 형주목으로 임명하면서 남창후로 책봉했다.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은 뒤에, 손권 세력을 공식적으로 위나라에 편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손권을 오왕으로 책봉했다. 그러나 손권은 작위만 받고 손등을 낙양으로 보내라는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고, 점점 압박이 거세지자 유비와 화해했다. 222년에 조비가 직접 손권을 공격했으나, 이를 격퇴하여 사실상 오나라로 독립했다.

손권의 영역은 양주(揚州) 대부분과 형주 일부, 그리고 교주 전역에 달했다. 229년에 정식으로 황제를 칭했을 때, 촉한과 맹약을 맺어 천하를 분할하기로 정했는데, 촉한은 익주와 더불어 병주·양주(涼州)·기주·연주를 차지하고, 오는 양주(揚州)·형주·교주와 더불어 서주·예주·유주·청주를 차지하며, 사례교위부 지방은 함곡관을 기준으로 양분하는 것이었다.현실은 시궁창 250년대에는 서주 남부의 일부 현을 점령했으나, 이미 213년 무렵에 조조가 무인지대로 만들었던 지역이라 실익을 얻지는 못했다. 오히려 263년에 교주의 교지군·구진군·일남군이 위나라에 점령당했으며, 269년에는 건평군의 일부가 서진에게 점령되었다. 비록 271년에 교주 3군을 탈환하긴 했으나, 280년에 서진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당초 손책은 공식적으로 회계태수였으나, 오후에 책봉되자 자신의 식읍이 된 오군 오국(吳國)에 거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적벽대전 이후인 209년에 손권이 오군 단도현의 경성(京城)으로 세력의 거점을 옮겼다. 이후 211년에 단양군 말릉현으로 이전하였고 이듬해 건업성이 완성되자 말릉현을 건업현으로 개명하고 건업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219년에 유비를 배신하여 관우를 죽인 뒤에는 정식으로 형주목으로 임명되어 형주목 치소인 공안으로 이전했다. 223년에 조비를 격퇴한 뒤로 무창군(강하군) 무창현을 수도로 삼아 무창궁에 거주했다. 229년 황제로 즉위한 뒤에 건업성으로 천도했으나, 손호가 265년에 잠시 무창궁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건업성에 소명궁(昭明宮)을 세우고 환도했다.

5.1. 주요 지역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 강원도의 강릉과 양양은 장강 유역 도시의 지명을 따온 것이다.
[1] 조비가 손권을 회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손권이 차지하고 있는 양주(揚州)와 형주 영역을 형주로 합치고, 위나라 영역에 속한 형주 북부는 별도로 영주로 분할한 것인데, 곧 손권이 종속할 뜻이 없음을 확인하여 이를 취소했다.[2] 사섭이 죽은 뒤 교주자사 여대가 사섭 일가의 영향력이 강한 합포군·교지군·구진군·일남군 4군만 교주에 남기고 나머지 구역을 광주로 분할하는 구상으로 광주자사를 자처하여 손권의 승인을 받았다. 이에 격분한 사섭 일가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망하면서 환원되었다.[3] 위나라 때부터 사례를 '사주'로도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말엽에는 조환(曹奐)의 조서에서도 쓰일 정도가 되었다. 삼국 통일 뒤에 이 별칭이 공식화 된 것.[4] 손권이 황제에 오르면서 촉한과 천하를 분할하는 맹약을 했는데, 이때 예주는 오나라의 영역으로 설정되었다. 이로 인해 촉한에서 책봉된 노왕(魯王) 유영과 양왕(梁王) 유리는 촉한의 영역으로 설정된 기주 지역으로 봉호를 고쳤다.(...) 봉국이 수반된 제후 외에도, 명목상 교주자사에 임명되어 있던 내항도독 이회가 건녕태수로 보직이 변경된다. 촉한은 그 외에도 자신들의 영역 밖인 지역임에도 사례교위, 양주(涼州)자사 등을 임명하기도 했다.[5] 사실 수(守)의 원래 임무는 이쪽에 가깝다. 처음에 군(郡)은 지방에 설치된 군사 기지 개념이었고, 징병·훈련과 병기의 제작·보급 등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영토가 넓어지다 보니 본래 중앙 담당이었던 현(縣) 관할 업무를 일부 분담하게 되면서, 현 위의 상급 행정 단위가 돼버린 것.[6] 진나라와 전한에서는 태수의 군사권 발동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로 상비병력을 지휘하는 관직인 도위를 따로 두어 치안을 전담하게 했으나, 후한 때에는 자사를 지방에 주둔시키고 유사시에 군권을 부여하여 태수의 군사권 발동을 제약하였기에 도위를 둘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7] 간독에는 현의 인구가 성장해 1만 호가 넘더라도 현장이 현령으로 승격하지 않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어, 처음 현을 세울 당시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8] 규모가 큰 현에는 여러 명이 임명되었는데, 조조가 역임했던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 외에도 주요 관(關)·진(津)에 임명되기도 한다.[9] 간독에서 승의 업무행태가 너무 포괄적이고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나머지, 학자 중엔 승이 실질적인 장관이라 보는 경우도 있을 정도. 하지만 태수나 현령 등이 행정 외적으로도 바쁜 사람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승은 어디까지나 실질적인 행정 일을 도맡는 총무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2인자의 숙명[10] 전한 때에는 장액군·안정군·오원군·상군·서하군·북지군·금성군·천수군에 속국도위가 운영되었고, 이들 가운데 후한 초에는 장액군·안정군·오원군에만 남았다가 89년에 서하군·상군에 다시 속국도위를 설치했다.[11] 도위는 1현만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현령을 대체하는 개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위와 중랑장은 여러 현을 관할에 두었는데, 교위는 치민권을 갖는 도위와 비슷한 개념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중랑장은 태수처럼 주민들을 징집해 독자적인 부대를 운영할 수 있는 군사권이 더해진 것으로 추측된다.[12] 『삼국지』 등 역사기록에서 장막의 행동을 반역으로 기술한 영향으로 장막이 조조의 수하였다가 약해진 틈을 타서 배반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당시 주목이나 자사는 태수의 상급자가 아니었으며, 조조는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된 주목조차 아니었다. 도리어 장막은 이 시점에 조조의 실질적인 상급자인 원소를 자극할 정도로, 조조의 권위로는 수하처럼 부릴 수 없는 독자세력에 가까웠다. 마찬가지로 장막이 여포를 연주목으로 내세운 것이 일종의 반조조 연합의 맹주 역할을 맡긴 것으로 해석할 수는 있더라도, 장막이 여포를 자신의 주군으로 옹립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13] 이들 가운데 괴리후(槐里侯) 작위를 보유한 마등이 공식적인 서열은 가장 높았다고 할 수 있으나, 세력은 농우 및 하서 지방을 통할하던 한수가 가장 강대했다.[14] 『삼국지연의』에서는 마등 일족을 서량(西涼)의 맹주처럼 묘사하고 있고, 코에이 테크모의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대체로 마등의 세력을 무위에 출현시키고 있기에, 마등의 세력이 무위군 일대의 하서 지방에 있던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시점에 무위군은 장맹이라는 인물이 할거하고 있었으며, 마등의 독자 세력은 하서 지방과는 전혀 무관한 관중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15] 후한 말에 학정을 펼쳤던 것으로 거론되는 일남태수로 황개라는 인물이 있는데, 어느 시점에 태수를 맡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시점에 사섭이 일남태수를 보내지 않은 점으로 보아, 황개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일남태수로 재임하고 있던 인물이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16] 교주로 부임한 보즐은 남해군 번우현에 치소를 마련했는데, 본래 교주목의 치소였던 창오군 광신현이 오거의 영역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보면 사섭이 임명했던 남해태수 사무는 210년 이전에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17] 그 외에도 유언은 오의여동생이 황후가 될 관상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3남 유모와 혼인시켰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황제에 오른 것은 유비였고, 오의의 여동생 역시 유모와 사별했다가 유비가 익주목을 차지했을 때 유비와 재혼하여 황후가 된다. 즉, 모두 유언 자신과는 상관없는 예언이었던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