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됭케르크 철수작전 영어: Dunkirk evacuation[1] 프랑스어: Évacuation de Dunkerque | ||
| | ||
| ▲ 해안가에서 기다리는 연합군 | ||
| 장소 | ||
| 프랑스 북부 됭케르크 | ||
| 기간 | ||
| 1940년 5월 26일 ~ 6월 4일 | ||
| 교전국 | [[프랑스 제3공화국| | |
| 지휘관 | [[막심 베이강| [[장마리 아브리알| | |
| 결과 | ||
| 연합군 338,226명의 철수 성공 | ||
Meanwhile, the Royal Navy, with the willing help of countless merchant seamen, strained every nerve to embark the British and Allied troops; 220 light warships and 650 other vessels were engaged. They had to operate upon the difficult coast, often in adverse weather, under an almost ceaseless hail of bombs and an increasing concentration of artillery fire. Nor were the seas, as I have said, themselves free from mines and torpedoes. It was in conditions such as these that our men carried on, with little or no rest, for days and nights on end, making trip after trip across the dangerous waters, bringing with them always men whom they had rescued. The numbers they have brought back are the measure of their devotion and their courage.
한편, 수많은 상선의 지원을 받아, 왕립해군은 영국군과 연합군의 구출에 총력을 다했고, 220척의 군함과 650척의 선박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악천후 속,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탄과 증가하는 포병 사격의 집중 아래에, 해안 위에서 어려운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바다는 기뢰나 어뢰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병사들은 며칠 밤을 쉬지 않고 위험한 바다를 건너, 사람들을 옮기며 구조해 냈습니다. 그들이 되찾아 온 숫자는, 그들의 헌신과 용기의 척도입니다.
윈스턴 처칠, 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후 연설
한편, 수많은 상선의 지원을 받아, 왕립해군은 영국군과 연합군의 구출에 총력을 다했고, 220척의 군함과 650척의 선박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악천후 속,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탄과 증가하는 포병 사격의 집중 아래에, 해안 위에서 어려운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바다는 기뢰나 어뢰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병사들은 며칠 밤을 쉬지 않고 위험한 바다를 건너, 사람들을 옮기며 구조해 냈습니다. 그들이 되찾아 온 숫자는, 그들의 헌신과 용기의 척도입니다.
윈스턴 처칠, 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후 연설
1. 개요
| <rowcolor=white>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1분 전개 |
작전 당시에는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철수 작전이었으나, 이후 나치 독일 멸망 직전에 카를 되니츠가 동프로이센 등지에서 벌였던 한니발 작전이 규모가 더 커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철수 작전으로 남게 됐다. 현대 한국사에서는 6.25 전쟁 당시의 흥남 철수작전이 비슷한 사례로 꼽힐 수 있다.
2. 배경
| <rowcolor=white> 프랑스 침공의 전개 |
| |
| <rowcolor=white> 독일군에게 포위 당한 연합군 |
게다가 영국에게는 이들을 탈출시켜야 하는 이유가 더 존재했다. 본래 영국 육군은 상비군의 수가 적은 편이었고, 포위망에 갇힌 영국 육군 병력, 즉 '대륙 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은 영국 지상군의 실질 주력이었다. 본토에 일부 부대가 남아 있고, 예비역을 소집하고 신병들을 징집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제 역할을 하려면 당연히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해외의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 식민지에 주둔한 병력들은 식민지를 계속 수탈하기 위해 함부로 영국 본토로 빼지 않았고, 뺄 시간도 없었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의 병력도 마찬가지로 당장 영국 본토를 증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즉 이 대륙 원정군 병력을 구출하지 못하면 영국 본토는 빈약한 잔여 병력만으로 지켜야 하는 속 빈 강정이 된다는 뜻이었다.
연합군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 바다를 건너 영국으로 빠져나가는 것뿐이었다.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는 사상 최대규모의 탈출작전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3. 작전 직전 상황
3.1. 독일군의 상황
패배라는 걸 모르고 전진해오던 독일 육군은 아라스 전차전에서 역습을 당했지만, 이내 격퇴하고 다시 진격을 재개하고 있었다. 독일 육군 최선두부대는 사기가 드높았으며, 하인츠 구데리안은 5월 22일, 예하 제1기갑사단에게 칼레로, 제2기갑사단에게 불로뉴쉬르메르[2]로, 그리고 10기갑사단에게 운명의 땅 됭케르크로 각각 진격할 것을 지시했다.이들 3개 항구도시는 포위망 안에 있던 연합군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항구들이었으며, 독일 육군이 이들 항구도시를 진입, 점령하면 철수는 불가능했다. 다행히 이들 3개 도시에 대한 방어 준비는 그 직전에 간신히 끝났는데, 여기에는 독일군이 연합군의 역습 정보를 듣고 5월 21일, 24시간 공격중지 명령을 내린 행운이 겹쳤기에 가능했다. 또한 결정적으로 됭케르크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10기갑사단이 19기갑군단에서 배속이 해제되어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예비대로 전환이 되었다.
02.45 Uhr kommt der schriftliche Gruppenbefehl Nr.12 für den 22.5. Ausscheiden der 10.Pz.Div. aus dem Verbande des XIX.A.K. zunächst zur Verfügung der Gruppe in den Raum um Doullens. Die vom Gen.Kdo. aus gesehen unverständliche Wegnahme der 10.Pz.Div. bedeutet für das Korps eine empfindliche Schwächung, wenn an der Absicht: "Angriff auf Calais und Boulogne" festgehalten werden soll, da diese Angriffe insbesondere auch starke Kräfte an Schützen erfordern. Die mehrmalige Bitte um Belassung der Division im Hinblick auf diese bevorstehende Aufgabe wird von der Gruppe abschlägig beschieden
02.45시 5월 22일 자 서면 집단 명령 제12호가 도착하였다. 제10기갑사단이 배속에서 해제된다. 제19군단예하에서 제외되어 일단 둘랑 지역에서 집단의 예비대로 전환한다. 군단 사령부 입장에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제10기갑사단의 차출은, 만약 "칼레와 불로뉴 공격"이라는 의도를 고수해야 한다면 군단에 심각한 전력 약화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격은 특히 보병의 강력한 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임박한 임무를 고려하여 사단을 잔류시켜 달라는 거듭된 요청은 집단에 의해 거절되었다.
1940년 5월 22일자 구데리안의 제19군단 작전 상황 일지 중[3]
다급해진 구데리안은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사령부에 10기갑사단의 재배속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2기갑사단은 22일 볼로뉴 시내에 진입하는데 성공했지만 항구를 중심으로 짜인 영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10기갑사단이 빠진 공백을 메꿀수 없었다. 5월 23일 12시 30분 구데리안의 항의가 받아들여져 10기갑사단이 다시 제 19기갑군단으로 배치되었다. 18시 경 1기갑사단은 칼레-생토메르 운하를 도하해 칼레와 그하블린느 남쪽 구역으로 진격했고 10기갑사단 역시 빠르게 칼레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됭케르크는 코앞이었다. 하지만 5월 23일 23시 45분 구데리안이 수령한 5월 24일자 집단 명령 제14호는 구데리안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02.45시 5월 22일 자 서면 집단 명령 제12호가 도착하였다. 제10기갑사단이 배속에서 해제된다. 제19군단예하에서 제외되어 일단 둘랑 지역에서 집단의 예비대로 전환한다. 군단 사령부 입장에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제10기갑사단의 차출은, 만약 "칼레와 불로뉴 공격"이라는 의도를 고수해야 한다면 군단에 심각한 전력 약화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격은 특히 보병의 강력한 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임박한 임무를 고려하여 사단을 잔류시켜 달라는 거듭된 요청은 집단에 의해 거절되었다.
1940년 5월 22일자 구데리안의 제19군단 작전 상황 일지 중[3]
23.45 Uhr trifft Gruppenbefehl Nr.14 für den 24.5. ein. Er steht zu dem 21.50 Uhr gegebenen Funkbefehl des Korps an die Divisionen nicht im Widerspruch. Dem Korps wird zur Verstärkung seiner Schützen-Kräfte noch die Leibstandarte Adolf Hitler unterstellt; sie soll bis 24.5. nachmittags nach Hesdin zugeführt werden. Gruppe weist darauf hin, die Städte Boulogne und Calais "nicht im schwerem Häuserkampf zu erobern", sie sollen nur unter "wirksamen Artl. Feuer liegen. Die Kanallinie St.Omer-Gravelines soll nur gesperrt (jedoch nicht überschritten) werden. Damit wird der bisherige Angriffsgedanke praktisch fallen gelassen.
23.45시 5월 24일 자 집단 명령 제14호 도착했다. 이는 21:50시에 하달된 군단의 무선 명령과 모순되지 않는다. 군단의 보병 전력 보강을 위해 아돌프 히틀러 경호대가 추가로 배속되었다; 이 부대는 5월 24일 오후까지 에스댕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집단은 불로뉴와 칼레 도시를 "격렬한 시가전으로 점령하지 말고", "효과적인 포격 하에만 둘 것"을 지시하였다. 생토메르-그라블린의 운하 방어선은 차단만 한다.(넘어가지 말것) 이로써 지금까지의 공격 구상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구데리안 19기갑군단의 1940년 5월 23일자 작전 일지 중
23.45시 5월 24일 자 집단 명령 제14호 도착했다. 이는 21:50시에 하달된 군단의 무선 명령과 모순되지 않는다. 군단의 보병 전력 보강을 위해 아돌프 히틀러 경호대가 추가로 배속되었다; 이 부대는 5월 24일 오후까지 에스댕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집단은 불로뉴와 칼레 도시를 "격렬한 시가전으로 점령하지 말고", "효과적인 포격 하에만 둘 것"을 지시하였다. 생토메르-그라블린의 운하 방어선은 차단만 한다.(넘어가지 말것) 이로써 지금까지의 공격 구상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구데리안 19기갑군단의 1940년 5월 23일자 작전 일지 중
| |
독일 육군 제4군 사령부는 5월 24일을 기해, 예하 부대에 부대 간격 단축 명령을 내렸다. 기갑 부대와 보병 부대 간의 거리가 너무 벌어졌으니 이를 좁히라는 명령이었고, 당연하게도 보병을 빨리 걷게 할 방법이 없으니 사실상 기갑 부대에 이동을 정지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으로 인해 4군에 배속되어 있던 호트의 15군단은 그대로 발이 묶여버렸다.
이후 룬트슈테트는 전군에 진격 중지 명령을 내렸고, 이미 룬트슈테트에게 전적으로 권한을 위임했던 히틀러도, 현장의 판단을 믿고 13호 명령을 통해 이를 재가했다.[4] A집단군 예하 기갑부대들은 물론이고 육군최고사령부도 이 명령에 뒤집혔다.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는 물론이고 육군총사령관 브라우히치도 펄쩍 뛰면서 강경하게 반발했다. A집단군 사령부와 4군 사령부 그리고 히틀러와 달리 프란츠 할더는 아라스 역습에 대해 그다지 우려하지 않았다. 할더는 아라스 방면의 연합군 압박이 심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남쪽 측면의 프랑스군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들어 재공격이 임박하지 않았으며 보병 사단들이 순리대로 도착하여 우려받고 있던 측방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정지 명령에 반발했다. 한편 됭케르크에 진입하여 연합군의 완전 격멸을 꿈꾸고 있던 19군단은 작전 일지에 '집단 사령부와 달리 적이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해상 철수를 위해 그하블린느와 됭케르크 항구의 교두보를 유지하고자 끈질기게 방어할 것'이라고 적으며 반발했다. A집단군 전체를 중단 시킨 이 명령은 5월 26일이 되어서야 철회되었고, 독일군은 5월 27일에야 공세에 나섰다.[5]
3.1.1. 독일군 오판의 원인
- 우선 아라스 전차전에서의 예상치 못한 연합군의 거센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독일군내에 선두 기갑부대가 고립되어 전멸할 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었다. 아라스에서 영국군 주도의 연합군의 반격은 롬멜의 제 7기갑사단의 보급부대를 유린하고 1차 방어선을 돌파하며 정말로 7기갑사단을 섬멸시킬 뻔했다. 물론 롬멜이 급히 전선에 있던 전차부대들을 소환하고 88mm 대공포와 슈튜카의 협공으로 역으로 연합군의 전차전력을 섬멸시켰지만 이를 알지 못한 독일군 최고사령부에서는 오히려 저놈들이 뒤에 저렇게 강력한 기갑전력으로 선두 기갑부대를 섬멸하려한다!라는 확신을 주게 된 것이다. 1940년 5월 15일 스당 방면에서 프랑스군의 마지막 저항시도를 분쇄하고 나서부터 너무 작전대로 잘 되어가자 아돌프 히틀러와 A집단군사령관 룬트슈테트 등은 연합군이 반격해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둘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마른 전투에서 이 같은 상황을 보았던 탓에 지휘부의 걱정은 매우 컸었으며 이들은 구데리안과 만슈타인의 급격한 기동전술에 대해 이해도가 상당히 부족한 편이었다.[6] 하지만 정작 육군 총사령부인 OKH에서는 히틀러가 쓸데없이 걱정한다고 여기고, 적극적인 공세를 요구했다. 문제는 일선의 야전군사령관들의 상당수가 육군사령부의 주장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공세의 주역인 A집단군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참모장 조덴슈테른은 기갑부대와 보병부대 간의 간격이 크게 벌어져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끊임없이 클라이스트에게 진격 속도를 낮추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쳐야 한다는 육군 총사령부 및 최일선 야전 지휘관들의 의견과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히틀러 및 일선 사령관의 의견이 완전히 대립된 상태였다.
- 이런 상황에서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이 공군만으로 뒹케르크에서 연합군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했고,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의 나머지 부분들을 마저 공격하려면 기갑부대가 필수임을 절감한 히틀러가 괴링을 믿기로 한 것이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연합군의 아리스 반격도 루프트바페의 가세로 쉽게 물리처버렸으니 히틀러 입장에선 한번 믿어보자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문제라면 당시 너무 연합군 공군이 하도 약하다 보니 전과 뻥튀기로 인한 괴링의 오판과 예상 외의 신예전투기 스핏파이어의 등장으로 덩게르크 철수작전에서는 고전하였다는 거다. 이 때문에 일설에 따르면 에르빈 롬멜 장군은 이때부터 히틀러의 능력에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7]
정지 명령으로 인해 독일군은 됭케르크 직전의 지역을 폭우가 오기 전에 하루빨리 통과해서 아직 방어가 상당히 허술한 됭케르크를 비교적 소수의 병력만으로도 손쉽게 점령하여 연합군의 해상 철수를 손쉽게 차단할 수 있었던 기회를 그만 눈앞에서 날려먹고 말았다.
진격 정지 명령이 지닌 큰 군사적인 실책 중 하나로 이미 아 운하를 도하하여 교두보를 만든 기갑 집단의 선견 부대들까지 운하 너머로 되돌린 것을 들 수 있다. 구데리안은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예비대로 돌려졌던 10기갑사단이 돌아오자 즉각 1기갑사단에게 아 운하로 나아가라고 명령했고 히틀러의 정지 명령이 전달된 5월 24일 20시 경 올크, 생피에르-브루크, 생니콜라, 생폴캥 총 4곳에서 아 운하 교두보를 확보하고 사단의 선두부대는 연합군의 됭케르크 방어선인 그하블린느와 부르부르빌에서 전투를 치루고 있었다. 정지 명령 그 자체는 당시의 전술적 상황과 부대 운용상의 기술적 조건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타당성이 없지는 않다는 의견을 내는 연구자들조차 이미 만들어진 교두보에서 철수시킨 것은 크나큰 실수라고 지적한다. 운하 너머의 독일군 교두보가 사라진 동안 연합군은 앞서 1기갑사단이 침공해온 그하블린느와 부르부르빌을 비롯한 외곽 방어 진지를 어떻게든 강화하는데 성공하여 철수 기간 동안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할 절호의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독일군 교두보가 소규모나마 운하 너머에 존재하고 있었다면 연합군은 독일군의 진격 정지 기간 동안 방어 진지 구축보다 교두보 소멸에 중점을 두고 공세적으로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에 독일군의 진격 정지 명령이 해소된 후에는 도리어 반격을 받아 보다 적은 수의 병력만이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3.2. 연합군의 상황
불로뉴와 칼레의 연이은 함락으로 마지막 남은 됭케르크로 철수를 서두르던 연합군은, 독일군의 갑작스런 공격 정지에 당황하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됭케르크로의 철수를 완료했으며, 프랑스 해군 북부해군사령관(commander-in-chief of the northern naval forces)인 장마리 아브리알 해군중장[8]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시 외곽에 진지를 구축하고 영국군의 철수를 위해 방어에 돌입했다. 그러나 아무리 우주방어라 해도, 결국 독일 측은 돌격전차와 슈투카 등 전력이 훨씬 우세한 것은 사실이었고, 이들이 패배하는 순간 영국군은 바다 속으로 쓸려나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지휘 체계도 혼란에 빠져있어서, 서부 전선의 총지휘를 맡은 프랑스군 지휘부는 여전히 포위망 내·외부에서의 협격이란 망상에 빠져 있었고,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3세는 5월 28일 독일에 항복한 반면 벨기에 내각은 런던으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항전을 선언, 지휘 체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영국은 됭케르크에 냅두면 포위 섬멸될 경우 무려 40만에 가까운 육군병력이 사라지고 식민지군이 올 때까지 거의 무방비된 영국본토에서 독일의 상륙을 저지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기 전에 포위된 연합군에 대한 구출을 단독으로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실행하기 위한 충분한 선박을 확보하지 못했다. 세계 최강 대영제국의 해군이었으나, 그만큼 영국에겐 지켜야 할 바다가 많았다. 지중해와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모든 바다에 전력이 분산되어 있어서 충분한 철수 선박의 제공이 어려웠다. 더군다나 영국군은 노르웨이 전역에서의 철수까지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노르웨이에 파병된 부대는 규모 면에서 대륙 원정군에 비하면 수가 한참 적고 본토와의 거리는 훨씬 멀었지만, 어느 정도의 선박을 할당해야 했다.
결국 영국은 어떻게든 최소 300,000명 이상의 병력 철수를 위한 선박을 하나라도 더 긁어모을 필요가 있었다.
4. 작전 준비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5월 26일에 첫 실행하기로 한 영국군이지만 선박이 부족했다. 프랑스 해군, 벨기에, 네덜란드 해군[9]에게 협조 요청을 해서 선박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봤으나 턱없이 부족했다.결국 영국 정부는 선박 징발령을 내렸는데... 예상보다 더 많은 선박들이 몰려왔다.
| |
| <rowcolor=white> 당시 모습을 묘사한 그림 |
| |
| <rowcolor=white> 라이톨러 중령의 선다우너호 |
"이건 진짜 전쟁입니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진짜 전쟁이에요."
하고 말리는 관구 사령관에게 소형 선박을 몰고 온 한 선주가 하고는 배를 몰고 갔다는 에피소드까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은 무려 약 900여 척의 대규모 철수 선단을 확보했는데 그 중의 핵심 전력은 누가 뭐라 해도 속도가 빠른 220여 척의 해군 구축함들이었다.그동안 서부 전선에서 온갖 굴욕을 당한 영국 공군도 반격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이 철수 작전을 위해 영국 공군의 투입 가능한 전투기가 총동원되어 됭케르크와 영불 해협의 제공권을 장악하기로 계획했으며, 비장의 신예기인 스핏파이어도 출격을 기다렸다. 프랑스는 지상에서의 반격을 통한 포위망 돌파를 뒤늦게 포기하고, 영국 측에 자국군도 데리고 가달라고 요청하면서 지휘권 문제도 해결되었으며, 프랑스 육군 2개 사단이 후위를 맡아 필사적인 지연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한편, 독일은 지상에서의 공세를 강화하는 가운데, 대대적인 항공 작전을 준비했다.
5. 작전 진행
| 됭케르크에서의 전과를 선전하는 1940년 6월 12일자 나치 독일 선전뉴스[12] |
당시 됭케르크 전투에서의 양측 항공력의 충돌은 영국 본토 항공전의 서곡이었다. 이 항공전을 영화화한 <Battle of Britain>(국내에서는 <공군 대전략>으로 소개) 은 철수 작전이 끝난 됭케르크를 배경으로 스토리가 시작된다.
5월 29일부터의 기상 변화로 영국군은 훨씬 양호한 상태에서 작전이 가능해졌다. 항구뿐만 아니라 해변에서도 탈출 병력의 승선이 가능해졌고, 바다가 고요해지면서 탈출선들의 항해 속도도 빨라졌다. 어느 귀족의 보트는 정원의 30배가 넘는 사람들을 태우고 무사히 도착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때 흘수선이 갑판까지 올라오는, 말 그대로 가라앉기 직전까지 갔다고. 어떤 선박은 해안에 지나치게 접근하다 모래톱에 걸려 좌초되자 오히려 그걸 역이용, 다른 선박을 접현시켜 안전하게 승선시키는 마치 임시 부두 같은 역할을 맡기도 했다. 5월 31일과 6월 1일에 걸쳐 병력 철수는 최고조에 달했고, 이후 후위부대들의 철수가 이루어지다가 6월 4일을 기해 작전은 종료되었다.
6. 작전 결과
6.1. 철수작전은 성공
| 작전 기간 철수 병력 통계 | |
| 5월 27일 | 7,669명 |
| 5월 28일 | 17,804명 |
| 5월 29일 | 47,310명 |
| 5월 30일 | 53,823명 |
| 5월 31일 | 68,014명 |
| 6월 1일 | 64,429명 |
| 6월 2일 | 26,256명 |
| 6월 3일 | 26,746명 |
| 6월 4일 | 26,175명 |
| 총 합 | 338,226명 |
이는 가장 큰 성과로써 전시에 그것도 200,000명이나 되는 전문 직업군인[14]들을 성공적으로 탈출시킨 것이다. 전쟁이 아무리 첨단화되어도 결국 사람 손에 결정되기에 전투 경험이 많은 군인들은 필수적인데[15], 이러한 인적자원을 한 번의 철수작전으로 상당수 지켜냈다는 것 자체가 연합국에게는 고무적이었다. 이들은 훗날 북아프리카 전선부터 노르망디를 거쳐 독일까지 진격하게 된다.
6.2. 프랑스군의 후방 사수
이렇게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 육군 후방 사수 부대는 독일군 800,000명의 진격을 저지하며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성공에 큰 공헌을 했다. 이들은 프랑스 육군 제12기계화보병사단, 제68, 21, 32, 60보병사단들의 예하 부대 및 제8주아브 연대였다.후방 사수를 맡았던 이들은 철수작전이 끝날 때까지 진지를 사수했고, 최후의 부대까지 해협을 건너 도피하는 데 성공하는 것을 본 후, 군기가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를 불태우고 독일군에게 일제히 항복했다. 이렇게 된 프랑스 육군 병력은 34,000명에 달했다. 이들의 엄호가 아니었으면 철수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됭케르크 철수에서 이들의 맹활약은 상대적으로 묻히고 있다.[16]
6.3. 연합군의 손실
냉정하게 보면 철수가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다. 단기적으로는 서부 전선 전황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해 프랑스는 결국 항복했다. 철수 병력은 대부분의 장비를 버리고 와야 했다. 각종 차량, 화포 등은 물론이고 소총이나 기관단총 같은 개인화기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거기다 이 장비들을 파괴하고 처분할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독일군에게 고스란히 노획되기까지 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영국군이 버리고 온 무기는 8~10개 사단을 무장시키는 데 충분한 양이었다. 페도어 폰 보크 육군 상급대장은 자신의 일기에'무수한 차량들, 야포, 전차와 각종 지상군 장비들이 좁디좁은 공간에 밀집해 있었으며, 서로 뒤엉켜 폐기물 처리장을 방불케 했다 (중략) 여기 버려진 물자는 족히 1개 야전군 분량은 되었으며 적들의 장비는 훌륭하고 완벽해서 너무나 빈약한 장비를 가진 우리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후략)
라고 썼다.영국군이 버리고 간 장비는 막대한 분량의 식량과 피복, 탄약, 야포 880문, 대구경포 310문, 대공포 500문, 대전차포 850문, 기관총 11,000정, 전차와 장갑차량 475대, 오토바이 20,000대, 그리고 차량 약 63,000대 등이었다.[17] 이때 영국 본토에는 오직 2개 사단을 무장시키는 데나 충분한 장비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철수에 성공한 병력들은 사실상 빈털터리 상태에서 재무장을 시작해야 했으나 당시 영국의 산업력으로는 당장 쳐들어올 독일 공군에 맞설 전투기를 뽑기에도 벅찬 상황이었으며, 재무장을 하기 위해 긁어모아 보니 너무 적은 무기였기에 영국 정부는 어떻게든 무장할 수단을 만들기 위해 고민 끝에 만들어진 것이 스텐 기관단총이었다. 이들의 재무장은 결국 스텐 기관단총과 리엔필드 소총, 그리고 미국이 장비지원을 하는 걸로 해결했다. 덕분에 영국군은 1942년까지 북아프리카 전역에 호주군 및 뉴질랜드군을 투입해야 했다. 대신 철수에 성공한 병력은 1943년부터 연합군 반격의 선봉이 된다.
작전 기간 동안 철수 선단은 구축함 13척, 대형 선박 9척, 그리고 소형 선박 200여 척 등, 총 272척이 침몰 및 파괴되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이는 기상 조건 때문이기도 했지만 영국 공군의 결사적인 반격과 엄호 덕분이기도 했다.
영국 공군은 작전 기간 동안 총 4,822 소티[18]를 띄워 무려 177기의 전투기의 손실을 입어야 했다. 프랑스 항복까지 영국이 서부 전선에서 입은 전투기 총 손실이 432기이다. 전체 손실의 40%를 됭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잃은 것이다. 곧 있을 영국 본토 항공전을 생각하면 엄청난 전력 손실이었으나 독일이 프랑스를 먼저 공략하는 동안 필사적으로 전투기를 뽑아내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됭케르크에서 영국 공군이 보여준 투혼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Ju 87에게 신나게 두들겨맞은 지상군 병력은 오히려 '공군 놈들은 독일 놈들이 폭격하고 있는데 어디서 뭐하는 거냐'면서 공군을 비난했다. [19] 이런 반응이 나왔던 것은 공중전 자체가 철수 작전이 진행중인 해안가와 좀 떨어진 곳에서 전개되고 있었으며 철수 후 벌어질 영국 본토 항공전을 위해 영국 정부도 공세보다 철수작전을 돕는 선에서만 투입했기에 정작 상공에서는 영국공군 전투기를 거의 볼 수 없었기 때문으로, 그 결과 격추당한 조종사들이 철수 병력 대열에 합류하면 그야말로 싸늘한 시선에 푸대접을 받았다.
이 작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명전투기로 꼽히는 스핏파이어와 Bf109가 처음으로 맞대결을 벌였으며 조종사들은 드디어 "호적수"를 만났다는 반응과 함께 서로 상대편 전투기를 칭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더불어 영국 공군에서 투입한 전투기 디파이언트가 후방부 터렛형 무장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여 많은 독일 공군 조종사들을 당황하게 만들면서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렸다.
6.3.1. 보름호우트 학살
자칫 전원이 몰살당할 뻔했지만, 아우구스투스 제닝스(Augustus Jennings) 원사(Warrent officer class 2)와 스탠리 무어(Stanly Moore) 중사가 헛간에 투척된 수류탄 몇 개를 몸으로 막아내어 여러 생존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파헤이 일병의 경우도 그 두 부사관들의 영웅적인 희생으로 생존한 경우였다. 그는 폭발 이후 독일군에 의해 끌려나와 가슴에 총을 맞았지만 다행히 즉사하지는 않았고, SS 부대가 확인 사살을 하지 않은 채 헛간에 공격을 재차 퍼부은 후 곧 자리를 떠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헛간 안에도 몇 명이 기적적으로 살아 있었는데, 그들 중 알프레드 툼스(Alfred Tombs) 일병을 포함한 4명은 SS가 물러간 후 헛간을 탈출하여 다른 독일군에 포로로 잡힘으로써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파헤이 일병과 남은 생존자들은 약 2일간 헛간에서 버티다가 근처를 지나던 독일군 부대에 구조되었다.
또 다른 생존자로는 버트 에반스(Bert Evans) 일병이 있다. 그는 수류탄이 터졌을 때 오른손이 박살났지만 살아남았고, 폭발 속에서도 다친 곳 없이 멀쩡했던 제임스 린앨런(James Lynn-Allen) 대위가 그를 헛간 밖으로 끌어내어 같이 포복으로 탈출했다. 그들은 수십m 가량을 기어 근처 연못에 숨어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그곳에서 독일군 병사 한 명을 마주치고 말았다. 결국 앨런 대위는 그 독일군 병사가 쏜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에반스 일병 또한 두 발을 맞았지만 치명상을 입었을 뿐 죽지는 않았다. 그는 근처 농가로 500m 가량을 기어갔고, 그곳에서 만난 한 독일군 장교가 그를 야전 병원으로 직접 데려다주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7. 작전 이후
우리는 항복하거나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땅을 지켜 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21]
We shall not flag or fail. We shall go on to the end. We shall fight in France, we shall fight on the seas and oceans, we shall fight with growing confidence and growing strength in the air, we shall defend our island, whatever the cost may be.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we shall fight on the landing grounds, we shall fight in the fields and in the streets, we shall fight in the hills, we shall never surrender![22]
윈스턴 처칠,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됭케르크 철수, 엄밀히 말해서는 철수 후에 다시 프랑스로 상륙해서 프랑스군을 돕지 않은 것을 영국의 배반이라며 격분했는데, 항복 직후 영국 해군이 캐터펄트 작전으로 메르크 엘 케비르 공격을 감행, 자국 함대를 박살내면서 이런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북아프리카에 미군이 상륙해 프랑스군과 교전하자 "영국놈들이 머저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영국놈들하고 같은 짓을 할 줄은 몰랐군!"라면서 까댔으며, 비시 프랑스 군대 중에는 연합군과 죽자살자 교전한 부대도 나왔을 정도였다.[23]We shall not flag or fail. We shall go on to the end. We shall fight in France, we shall fight on the seas and oceans, we shall fight with growing confidence and growing strength in the air, we shall defend our island, whatever the cost may be.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we shall fight on the landing grounds, we shall fight in the fields and in the streets, we shall fight in the hills, we shall never surrender![22]
윈스턴 처칠,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본 작전에서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던 크릭스마리네도 덩달아 쏠쏠한 부수입을 챙겼는데, 영국 원정군이 버리고 간 수많은 물자들 중 하나로 미사용 신품 상태로 대량 노획된 영국 육군 전투복(Battle Dress)이 그것이었다. 육군 기준에선 쓰기는 양이 적고 피아 식별 문제도 큰데다 버리기는 양이 많아서 애매하던 전투복들 중 하계용을 해군이 가져다가 약간 개조하여 U보트 승조원들의 함상 작업복으로 지급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대박을 친 것이다. 밑단이 짧아 걸리적거리지도 않고, 갈색 계열의 색상은 기름때 등을 잘 가려 줬으며, 면의 일종인 데님은 덥고 습한 잠수함에서 기존의 모직보다 덜 덥고 잘 마르는 데다 작업복에 적합하게 질겼기 때문이다. 서로 얼굴 보고 싸울 일도 없는 대잠전 특성상 피아식별 문제도 없었다. 거기에 더해 전용 피복을 받았다는 점이 이들로 하여금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자부심도 심어 주었다. 이런 호평에 놀란 해군 지휘부는 노획품이 소진되자 비슷한 디자인의 보다 개량된 잠수함 작업복을 자체생산하여 종전시까지 지급해주었다.
2023년 8월 10일, 본 작전에 참전했던 영국 해군 중 마지막 생존자인 로렌스 처처(1920~2023)가 향년 102세로 사망했다. #
8. 만약 됭케르크 철수작전이 실패했다면?
됭케르크 철수가 실패했다면이라는 전제는 2차 대전을 연구하는 군사학자들과 밀덕들 사이에서 여전히 열띤 토론을 부르는 존재다. 당시 영국은 1938년부터 공군을 위주로 차차 재무장을 시작했던 터라 육군이 매우 약했고 프랑스에 보내진 20만 명의 원정군이 영국 육군의 핵심이자 사실상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다 섬멸했다면 영국은 독일과 협상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본토함대로 독일 상륙군을 원천 봉쇄했을 것이고 전쟁의 흐름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물론 주류학계는 영국이 지중해 전역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선전하기 힘들었겠지만 강력한 본토함대와 왕립 공군력으로 독일의 영국 침공을 봉쇄했을 것이라는 의견에 손을 들어준다. 다만 저 20만 명은 영국의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 숙련병들이 몰려 있었던 정예라서 저들을 상실한 상황에서 육성한 군대는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히틀러가 이런 결정을 한 것도 사실은 영국과는 협의할 생각으로 일부러 치지 않았다는 주장도 많다. 만약 됭케르크에서 영국군을 쓸어버렸다면 영국이 자신들과 협의를 영원히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일부러 반은 좌시했던 것이라는 것. 이에 다른 사학자들은 이건 히틀러의 실책을 무마 시킬려는 나치의 날조라고 주장한다. 진실이 뭐였던 간에 영국까지 무너진다면 미국의 참전을 앞당길 수도 있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바뀔 일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저 유럽 대륙 석권을 했을테니 나치를 무너뜨리는 데 시간과 사상자가 더 많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것뿐이다.
9. 덩케르크 잭
전쟁이 끝난 뒤인 1965년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참가한 민간 선박 선주들의 모임인 덩케르크 작은 배들 협회(The Association of Dunkirk Little Ships)#가 생겼는데 여기서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참가한 배들은 성 조지의 십자가를 선수기(Jack)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영국 정부로부터 받았다. 보통은 이를 살짝 변형해 성 조지의 십자가와 됭케르크의 문장(Coat of Arms)을 합쳐서 만든 덩케르크 잭(Dunkirk Jack)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훈장 같은 의미이다. 이 단체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영불해협을 건너는 행사를 하는데 이 행사에 참가하는 배들은 모두 이 깃발을 단다.[24]
국내에선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에서 이 이야기를 와전시켜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참가한 배들은 총기함에만 달수 있는 성 조지의 깃발을 달고 작전에 참가했다." 고 서술하는 바람에 사실이 잘못 알려졌다. 저 깃발을 달 수 있는 권한이 인정된 것은 1967년의 일이다. 총기함에만 성 조지의 깃발을 달 수 있다는 것도 엄밀히는 좀 오류. 군함에 승선한 최고 지휘관에 따라 지휘 깃발을 다르게 거는데, 영국 최고 함대 지휘관인 Admirals of the Fleet의 경우 유니언잭을 단다. 성 조지의 십자가기는 일반 제독(Admirals)이 승선시 다는 깃발이다. 기함이라도 제독이 안 타면 못달고, 기함 아니라도 제독이 타면 지휘 깃발을 단다.
그럼 됭케르크 작전 때는 어떤 깃발을 달았냐면 당연히 영국 배들이 항상 하던대로 군함은 White Ensign, 정부 공인 선박은 Blue Ensign, 민간선박은 Red Ensign을 달았다.[25] 물론 민간 선박에 지휘깃발은 달지 않았다. 영화 <덩케르크>를 보면 아주 잘 나와있다. 참고로 이 영화에서 비중있게 나오는 문스톤 호는 Blue Ensign을 달았는데 이것은 이 배의 정장인 도슨이 왕립 요트 협회의 회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여담으로, 선수기를 달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것은 선주가 아니라 선박이라 배가 팔릴 경우 선수기를 달 수 있는 권한도 새 소유자에게 이전된다. 영화 <덩케르크>에서는 실제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참가한 선박 12척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10. 창작물에서의 등장
-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김모세 병장이 하늘에 기도를 올리자 허경영이 나타나 바다를 가르는 기적이 일어난다.(여기까지는 웹 연재본) 출판본에서는 더 나아가 드러난 바닥에 운하를 파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로 인해 연합군은 운하를 타고 철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작가의 정치적 성향을 고려하면 한반도 대운하와 4대강 사업의 패러디인 것으로 보인다.
- 겁스 무한세계에 나오는 세계 중 하나인 라이히-1에서는 독일이 됭게르크에서 영국의 철수를 막아 영국을 무찌르는 데 성공하고 소련까지 격파했으며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을 공격하여 최종적으로 미독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졌으나 북대서양에서 결국 전선이 교착된다.
-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는 이를 패러디한 철수작전이 나오는데 《테메레르》 시리즈가 나폴레옹 전쟁 시절을 다루다보니 상황이 정반대로 프랑스 제국군으로 부터 독일군을 영국군이 철수시켜주는 작전으로 등장한다.
- 카를로 젠의 1, 2차 세계대전의 재구성 소설인 《유녀전기》에서 약간 다르긴 하지만 됭게르크 철수작전과 비슷한 경우가 나온다. 군 수뇌부가 안일한 선택을 해 적의 전력을 놓아주었고, 주인공은 완벽한 승리를 쟁취할 기회였다며 분통을 터트린다. 이때 배경으로 보아 프랑스가 모티브인 공화국 군대는 일부 전함들까지 몰고 탈출에 성공했으며, 영국이 모티브인 왕국 함대의 엄호로 인해 제국군 수뇌부는 해군을 동원한 추격을 포기한다.
- 2007년,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어톤먼트>에 이 됭케르크 철수 작전이 나온다. 그 중 도입부의 5분 간의 롱테이크씬은 가히 압권. 참고로 이 씬에서 영국 파견군 패잔병들이 부르는 찬송가의 제목은 <Dear Lord and Father of Mankind>이다.
- 2015년 12월 29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차기작이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다룬다고 워너 브라더스에서 공식 발표했으며, 2017년 7월에 <덩케르크>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다. 국내에서는 2017년 7월 20일 개봉.
- 2017년 6월부터 <워게이밍>에서 해당 영화 개봉 기념으로 영화 홍보를 시작한 데 이어서#, 같은 해 7월에 육해공 컬래버레이션을 시작했다. 다이나모 작전에 관련된 영상을 많이 올리기는 했으나, 정작 메인인 이벤트의 내용은 애매한 느낌이다. PC 월탱은 북미서버에서 언제나 진행하던 Tankreward 이벤트고, 월탱 콘솔판에서는 3티어 골탱 셋 중 하나를 받는 이벤트와, 5티어가 되면서 엔진 마력이 올라간 풀업 마틸다랑, 20파운더 A바렐 달린 채리어티어를 골탱으로 묶어파는 패키지 판매가 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워플레인은 덩케르크 컨셉의 프리미엄 기체 2종을 받을 수 있는 미션이 진행되는 정도, 그나마 철수작전 PVE 시나리오모드 '다이나모 작전'[26]을 진행하는 워쉽 쪽이 그럴싸하다.
- <월드 오브 탱크 블리츠>에서 <덩케르크> 영화 개봉 기념으로 4.0.0 업데이트때 "덩케르크" 위장을 추가했다.
- 알파캣이 월드 오브 워쉽에 연재하는 폭풍의 바다에 2연작으로 연재되었다.
[폭풍의 바다] 9화 - 덩케르크(상)
[폭풍의 바다] 10화 - 덩케르크(하)
- 2017년에 제작된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선 배우 게리 올드만이 됭케르크 철수작전 당시의 윈스턴 처칠을 연기했고, 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과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는 히틀러가 영국군들이 버리고 간 장비와 영국군의 시신을 보면서 영국군이 패잔병들의 모습을 보고 사기를 잃을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보내줬다고 허세를 부린다.
- 헬싱 외전 편에서는 나치가 구울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원탁에 있던 한 인물이 만약 이 괴물이 군대화 되어서 투입되면 다시한번 됭케르크 바다에 빠지게 될 것이고, 더 이상 노르망디를 할 힘이 없게 되며, 전세는 다시 독일에게 역전된다고 말한다.
- 에이스 컴뱃 제로 The Belkan War의 8번 미션은 작전명이 "다이나모"이다. 작전명만 같은 게 아니라 임무 최종 목표가 무사히 도망쳐나오는 것이라서 현실의 됭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모티브를 많이 따온 것으로 추정한다.
- Gates of Hell의 영국군 DLC 3번째 미션으로 등장한다.
[1] 작전암호명(code name)은 Operation Dynamo. '됭케르크의 기적(Miracle of Dunkirk)'으로 칭하기도 한다.[2] 파리 근교 불로뉴가 아니다.[3] 여기서 집단이란 19군단의 상급부대인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을 말한다.[4] 전후 룬트슈테트는 자신의 명령서와 13호 명령의 문서를 조작해, 히틀러가 먼저 전군에 진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고 왜곡했다.[5] B집단군의 경우엔 해당 사항이 되지 않았다. 됭케르크 코앞 까지 온 A집단군과 달리 B집단군은 아직 벨기에 중부 지역 리스강 일대에서 격전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6] 다만 이들이 이해도가 부족하다고 하기도 뭐한 게 낫질 작전은 정말로 신이 도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운이 따라줘 성공한 것이기 때문에 뭐 하나라도 잘못되는 순간 독일의 주력이 송두리째 궤멸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없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7] 물론 말 그대로 일설에 불과한 게 히틀러를 찬양하는 편지를 롬멜은 계속해서 보냈었다. 사료적으로 롬멜이 직접 히틀러에게 의문을 표한 것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히틀러가 후퇴를 반대하고 나서부터였다.[8] Jean-Marie Charles Abrial. 프랑스 항복 이후 비시 프랑스의 해군장관을 맡았다가 종전 후 10년간 강제노역형을 받았으나, 1947년에 가석방되었고, 1954년에 완전히 사면되었다. 1962년 사망.[9]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해외 식민지가 꽤 남아 있었고, 해운업이 발달한 네덜란드는 국가 규모 대비 해군력이 매우 강력했다. 전쟁 초반 대다수의 해군 함정과 해군 항공대, 상선단이 영국으로 망명해 왔을 때, 영국에서 이들을 대환영했다.[10] 어째서 대령이 중령을 존대하는지는 <덩케르크(영화)> 문서 참고.[11]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가 침몰할 때 승객들이 혼란에 빠지자 빈 총을 겨누며 제지하는 항해사가 라이톨러이다.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다룬 영화 <덩케르크>에서도 도슨(Dawson) 선장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담당 배우는 마크 라이런스. 이후 1952년 그레이트 스모그로 인한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2] 선전뉴스이니만큼 당연히 영국군이 전멸했으며 수송 선단 또한 대부분이 가라앉았다고 과장하고 있다. 또한 철수를 엄호하는 프랑스군의 사투를 두고는 영국 귀족들에게 복종하는 프랑스 부르주아들이 무고한 프랑스인들의 피를 흘리게 하고 있다며 까고 있다.[13] 게다가 독일군이 해안 근처에 대공포들을 쫙 깔아놨기 때문에, 이로 인한 손실까지 걱정해야했다.[14] 영국은 예나 지금이나 징병이 아닌 모병제 국가로써 전시에만 추가로 상비군과 예비군을 따로 뽑아 모집한다. 그렇기에 영국은 당시 영토에 비해 군인수는 적었지만 징병제이던 독일, 소련과 달리 수년간 훈련을 받은 엄청난 정예부대였다.[15] 멀리 안 가고 독일 공군과 일본 해군 항공대가 초반의 명성에 비해 후반에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지 생각하면 이러한 인적자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준다.[16] 이는 프랑스 침공 당시 보여주었던 프랑스군의 졸전 임팩트가 너무 큰 탓도 있다. 지금도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제2차 세계대전 프랑스군의 굴욕이 밀리터리와 역사 관련 놀림소재로서 쓰이고 있는 걸 보면 더욱 그렇고 2차 세계대전에서 자유 프랑스는 프랑스 내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이 유명하지 2차 세계대전에서도 프랑스 파리 수복 후, 자유 프랑스는 독일에 의해 유린된 국토 안정 및 비시정부 잔당을 소탕하느라 사실상 최전선에서 열외되었다. 애초에 영국군들이 이렇게 빠르게 도피해야 했던 것도 프랑스군이 예상 밖의 졸전을 벌여 독일군에게 속절없이 밀려버린 게 원인이었다.[17] 《폭풍 속의 씨앗》을 보면 작가와 동료가 프랑스제 트럭과 영국제 오토바이를 모는 내용이 있다. 실제로 당시에는 물론 1차 대전에 비해 차량의 보편화가 실행되었다곤 하나 아직까지도 차는 중산층 이상이 모는 사치품 내지는 고급물자였다. 심지어 이는 군대에도 해당되어 기계화의 상징이라던 독일군도 보병의 완전 기동화는 실패하여 패망 직전까지 대부분의 군사들은 야전에서 걷거나 마차를 타고 다녔다. 유일하게 전군에 자동차가 풍족하게 지급된 국가는 미국이었고, 소련 역시 차량화 비율이 전쟁 말기로 가며 상당히 높아졌지만, 이 역시 미국의 랜드리스로 트럭이나 지프 등을 원조받았고, 또 독소전쟁에서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 편제대비 실제 가용가능 병력이 적었기 때문에 가능했다.[18] 단독 출격 횟수. 전투기의 총량이 아니라 출격 횟수이다.[19] <덩케르크(영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병사 한 명이 공군은 대체 어딨냐며 화를 낸다. 다만 작중 후반에선 공군 전투기가 병사들 바로 위를 지나가며 공중전을 벌이고, 이를 보고 환호하는 병사들이 나온다.[20] 다만 미리 눈치를 챈 5명은 다행히도 헛간의 뒷문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근처 민가에서 다른 독일군에게 다시 잡혀 전쟁 끝날 때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21] 전장의 무대를 프랑스, 바다, 하늘, 해변, 상륙지점, 들판과 거리, 언덕으로 옮겨가며 설령 영국이 계속 패배해서 독일군이 영국본토에 상륙하더라도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생략되었으나, 뒤에 자신은 그럴 가능성은 믿지 않으나, 만에 하나 영국본토가 점령되더라도,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함대와 함께 계속해서 항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비장미로 인해서 굉장히 많이 회자되는 연설이다.[22] 영화 덩케르크에서도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23] 상반된 평가로는 대체로 프랑스군의 졸전과 전력을 제대로 운용하지도 못한 지휘부가 주로 까이고, 캐터펄트 작전이나 횃불 작전은 당시 연합군의 상황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애초에 캐터펄트 작전을 영국의 배신이라고 보는 관점 자체가 지나치게 프랑스 입장에서만 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고 친독적인 비시 프랑스가 성립된 이상 영국(연합군)의 입장에서 보면 프랑스의 군사적 자산이 곧 적국인 독일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어떤 정신나간 군대가 전쟁 중에 적군이 강해지도록 가만히 내버려둔단 말인가. 더구나 섬나라라는 특성상 해상 교통에 의존해야 하는 영국의 입장에서 독일의 해군력 강화는 곧 자국의 파멸로 다가가는 일보였다는 점 역시 감안해야 할 것. 당시 프랑스 해군이 영국에 굴복하여 배를 넘기거나 아니면 격침이라는 '어딜 봐도 답이 안 보이는' 선택을 강요당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많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이 둘 중 하나가 아니면 남은 선택지는 '독일로 배가 넘어가는 것'뿐이었다. 프랑스 해군에서는 프랑스의 군함을 영국에게 넘길 수는 없다고 분개했지만 그 프랑스가 항복해서 비시 프랑스가 된 이상 영국 입장에서 보면 비시 프랑스=독일의 동맹국(=괴뢰국)이므로 프랑스 군함=적함이 되어버린다는 것. 결국 프랑스 해군이 어떻게든 알아서 혼자 살아남지 못하는 이상, 다른 답은 없었던 셈이다.[24] 2020년에도 계획되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2021년으로 연기되었다가 취소되었다.[25] 좌상단에 공통적으로 유니언잭이 있고, 바탕이 하얀색, 파란색, 빨간색으로 다르다. Blue Ensign은 영국 왕립 요트 클럽에 소속된 배와 영국 해군 예비군 장교가 지휘하는 배 등에 한해서 달 수 있다.[26] 적군의 기뢰와 항공기를 돌파하며 병력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