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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이씨의 역사를 기술한 문서다.2. 고대(신라)
시조는 신라(新羅) 6부(六部) 중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인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부 촌장들은 조선[1] 유민으로 진한(辰韓)으로 남하하여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이알평은 6부의 대표 회의인 화백회의의 의장이었고, 다른 촌장들과 함께 양산(楊山) 기슭 나정(蘿井) 곁에서 발견한 보랏빛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키워 신라의 초대 군주로 추대했다. 배위는 태화공주 기씨(泰華公主 箕氏)[2], 부인 박씨[3]이다. 535년(법흥왕 23) 시호를 충헌(忠憲)[4]이라 하였고, 656년(태종 무열왕 3)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5] 이때 배위인 태화공주 기씨(泰華公主 箕氏)는 성렬왕비(聖烈王妃)로 추봉되었다.[6]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 이제현(李齊賢)[7]의 문하인 이색(李穡)이 찬한 이제현 묘지명을 보면, 그 선계(先系)로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인 이알평(李謁平)을 적은 후 그 후손인 소판(蘇判)[8] 이거명(李居明)[9]부터 차례대로 나열하고 있다. 신라 관제에서 소판은 오직 진골이라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이거명의 아들을 병부령(兵部令) 이금현(李金現)[10]이라고 적고 있다. 병부령은 신라 법흥왕 때 둔 것으로 대아찬~각간[11]이 맡았고 재상(宰相)을 겸직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이제현 묘지명은 문헌[12]으로만 전해졌으나, 지난 2007년에 황해북도 개성시 장풍군 십탄리 서원동에 위치한 이제현 무덤에서 길이 1.68m, 너비 63.2cm, 두께 20.5cm, 무게 600kg에 달하는 묘지석이 실제로 발굴되었다. 송도사범대학 전용철 교수는 "이 묘지석은 고려말 조선초의 우수한 금석문 유물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면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묘지석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크고 내용도 풍부한 걸작"이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묘지석의 글은 고려시기 이름난 문장가이며 학자인 목은 이색이 지었는데 모두 34줄에 2,745자나 된다"면서 "고려사에 없는 내용도 적지 않기 때문에 특히 14세기 고려사 연구에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현 묘지석에는 전서체로 '문충공이씨묘지명'(文忠公李氏墓誌銘)이라고 새겨져 있고 해서체로 시조 신라 좌명대신 이알평 및 원대손 소판공 이거명, 병부령 이금현, 삼한공신 이금서를 비롯한 그의 가계와 행적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려시대 사료 DB, 관련 방송, 관련 기사)
문충공이씨묘지명
(文忠公李氏墓誌銘)
...공의 이름은 제현(齊賢), 자는 중사(仲思), 성은 이씨(李氏)이다. 신라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인 소판(蘇判) 거명(居明)이 병부령(兵部令) 금현(金現)을 낳고, 병부가 삼한공신(三韓功臣)인 태수(太守)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金溥: 敬順王)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으로 귀순한 뒤 태조(太祖)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다. 그 딸이 금서에게 출가하여 윤홍(潤弘)을 낳았다...
금석문 DB, 판독문, 해석문
(文忠公李氏墓誌銘)
...공의 이름은 제현(齊賢), 자는 중사(仲思), 성은 이씨(李氏)이다. 신라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인 소판(蘇判) 거명(居明)이 병부령(兵部令) 금현(金現)을 낳고, 병부가 삼한공신(三韓功臣)인 태수(太守)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金溥: 敬順王)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으로 귀순한 뒤 태조(太祖)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다. 그 딸이 금서에게 출가하여 윤홍(潤弘)을 낳았다...
금석문 DB, 판독문, 해석문
한편 시조 이알평부터 원대손 이거명 사이의 계대가 실전되어 상대의 정보는 알 수 없으므로 이거명을 중시조로 하여 계대수를 헤아린다. 다만 후술하다시피 조선시대 말 합천 이씨(陜川李氏) 세보에서 실전된 35대 계보가 발견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3. 중세(고려)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13]의 장남인 신라(新羅) 병부령[14] 이금현(李金現)[15]의 장남 이금서(李金書)[16]는 신라(新羅)말 고려(高麗)초에 중원태수[17]를 역임했고,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신라 경순왕(敬順王)과 고려 태조(太祖)의 장녀 낙랑공주 왕씨(樂浪公主 王氏)[18] 사이의 딸인 신란궁부인 김씨(神鸞宮夫人 金氏)와 혼인하였으니, 이로써 경주 이씨 집안과 신라 왕실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후술하다시피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실의 선원(璿源)[19]이 경주 이씨라고 하고 있으니, 이로써 경주 이씨가 신라(新羅)·고려(高麗)·조선(朝鮮) 왕실과 혈연적으로 통함을 알 수 있다. 더하여 고조선[20] 마지막 군주이자 마한의 초대 군주인 기준(箕準)[21]의 딸 태화공주 기씨(泰華公主 箕氏)가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의 배위가 맞다면[22] 고조선(古朝鮮)·마한(馬韓) 왕실과도 혈연 관계가 된다.고려 전기·중기에는 이금서(李金書)[23]의 장남인 이윤홍(李潤弘)[24]이 병정[25]을 지냈고, 이윤홍의 장남 이승훈(李承訓)[26]의 장남 좌사간[27] 이주복(李周復)[28]의 장남 증 문하시중[29] 이칭(李稱)[30]의 장남 이치련(李侈連)[31]의 장남 이총섬(李寵暹)[32]이 가문을 빛냈다.[33] 988년(성종 7) 문하시중[34]으로 있으면서 오인유(吳仁裕)[35], 남궁원청(南宮元淸)[36], 이윤관(李允寬)[37] 등과 함께 사직(社稷), 오묘(五廟), 국자감(國子監) 등의 창건을 주청함으로써, 989년(성종 8) 태묘(太廟)를 짓기 시작하여 991년(성종 10) 처음으로 사직(社稷)을 세웠으며 992년(성종 11) 태묘(太廟)가 낙성되고 국자감(國子監)이 창립되었다. 이총섬의 장남 순흥부사[38] 이춘정(李春貞)[39]의 계보로부터 경주 이씨 8대파[40] 및 판전공파[41]가 분파되었다. 이총섬의 차남 문하시랑[42] 이춘림(李春林)[43]의 장남 이녹천(李錄千)[44]은 1142년(인종 20) 공부상서[45] 상장군[46]을 지냈다. 이녹천의 손자인 이중화(李仲和)[47]는 병부상서[48] 응양군 상호군[49]을 지냈다고 한다. 이중화의 장남인 이정핵(李廷翮)[50]은 1229년(고종 16) 낭중[51]을 거쳐 진양부사[52], 자문지유[53]를 지냈다. 족보에서는 어사중승[54]을 지냈다고 한다. 이정핵의 장남 이숙진(李淑眞)[55]은 1270년(원종 11) 삼별초(三別抄)가 재물을 약탈하고 남하하자 중서사인[56]으로서 낭장[57] 윤길보(尹吉甫)와 함께 적을 쫓아 격퇴했고, 1271년(원종 12) 안렴사[58]로서 금주방어사[59] 김훤(金晅) 등과 함께 밀성군(密城郡)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했다. 이숙진의 증손인 이길상(李吉祥)[60]의 네 아들로부터 직장공파, 석탄공파, 진사공파, 교감공파가 분파되었다. 이승훈의 손자[61] 이신우(李申佑)[62]는 병부시랑[63]을 거쳐, 목종 때 병부상서[64]를 지냈다고 하고, 이신우의 장남 이작량(李作良)[65]은 천호장[66] 혹은 공부상서[67]를 지냈다고 하며, 이작량의 장남인 이선경(李善景)[68]은 천호장[69] 혹은 사간[70]을 지냈다고 한다. 이선경의 차남 이방렬(李芳烈)[71]은 검교대장군[72]을 지냈다고 하고, 이방렬의 6대손 이충요(李忠堯)[73]는 병부시랑[74]을 지냈다고 한다. 이충요의 장남 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A]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76]에 이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고 하며, 그로부터 월성군파가 분파되었다. 이충요의 차남 이지연(李之衍)[77]은 이부시랑[78]을 역임했다고 한다. 이승훈의 3남 이주좌(李周佐, ?~1040)[79]는 1016년(현종 7) 감찰사헌[80], 1023년(현종 14) 시어사[81], 1027년(현종 18) 기거사인[82], 1030년(현종 21) 어사중승[83],1033년(덕종 2) 우간의대부[84], 1037년(덕종 3) 국자좨주 좌간의대부[85], 1036년(정종 2) 우산기상시[86]를 지냈고, 이후 형부상서 판어사대사[87]에 이르렀으며, 1040년(정종 6)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자 왕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여 사공[88] 상서우복야[89]에 추증하였다.# 다만, 중시조 9세 이총섬과 중시조 6세 이주좌의 기록이 일견 연대상 모순으로 보여 더욱 연구가 필요하다.[90] 이윤홍의 차남 이승겸(李承謙)[91]은 판예부사[92], 시중[93]을 지냈다고 한다.
이후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경주 이씨의 세계(世系)는 8파로 대별(大別)되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대소 70여 파로 분파(分派)된다. 8대파에는 평리공파(評理公派)[94], 이암공파(怡庵公派), 익재공파(益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국당공파(菊堂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가 있으며, 이외에 판전공파(判典公派), 직장공파(直長公派), 석탄공파(石灘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교감공파(校勘公派), 월성군파(月城君派)가 버금간다.
원 간섭기에는 이총섬(李寵暹)[95]의 장남 이춘정(李春貞)[96]의 5대손 문하평리[97] 증 상서좌복야[98] 열헌공(悅軒公) 이핵(李翮)[99]의 집안이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자손들로부터 경주 이씨 8대파가 나왔다. 이핵의 장남 성암공(誠菴公) 이인정(李仁挺)[100]은 평리성암공파(評理誠菴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이인정의 장남 이부(李榑)[101]는 1283년(충렬왕 9) 국자감시[B]에 장원하였고, 1286년(충렬왕 12) 문과[103]에서도 장원하였다. 1314년(충숙왕 1) 우사보[104]가 되었고, 이후 내서사인[105]을 역임했다. 이인정의 차남 이규(李樛)[106]는 1287년(충렬왕 13) 국자감시[B]에 장원하였다. 1314년(충숙왕 1) 우헌납[108]으로 있을 때, 조계종(曹溪宗) 승려 경린(景麟)과 경총(景聰)이 상왕(上王,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궁중[禁闥]에 출입하면서 대선사(大禪師)를 제수받았는데, 간관(諫官)으로서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아 상왕과 갈등을 빚었고 유배되었다 다시 소환되어 파직되었다.# 이핵의 차남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109]은 1264년(원종 5) 국자감시[B]에 장원하였고, 1297년(충렬왕 23) 우사의대부[111], 1298년(충선왕 즉위년) 2월 문한학사[112], 동년 5월 사림학사 시우산기상시[113], 동년 7월 좌승지 비서윤 지병조사 사림학사[114], 1303년(충렬왕 29) 전법판서[115], 1304년(충렬왕 30) 경사교수도감사[116], 1307년(충렬왕 33) 3월 판위위시사 권수밀직부사[117], 동년 8월 정당문학[118]을 거쳐 찬성사[119]를 지냈다. 1314년(충숙왕 1) 상의회의도감사[120], 검교첨의정승[121]을 지냈다. 이진의 장남 이관(李琯)[122]은 이암공파(怡庵公派)의 파조로 1295년(충렬왕 21) 국자감시[B]에 장원하였고, 이후 가락군(駕落君)에 봉해졌다.[124] 이관의 장남 이수득(李壽得)[125]은 판밀직사사[126]를 지냈고, 시중[127]에 추증되었다. 이수득의 장남 이성림(李成林, ?~1388)[128]은 1363년(공민왕 12) 감찰집의[129]로 있으면서 신축호종공신(辛丑扈從功臣) 1등(1363)에 책록되었고, 1365년(공민왕14) 서해도 순문사[130], 군부판서[131], 1367년(공민왕 16) 동북면 도순문사[132], 1368년(공민왕 17) 양광도 도순문사[133], 1373년(공민왕 22) 서해도 도순찰사[134]를 지냈다. 1384년(우왕 10) 수문하시중[135]을 지냈고, 1386년(우왕 12) 숙녕옹주(肅寧翁主)가 헌비(憲妃)[136]로 봉해지고 숙녕부(肅寧府)가 설치되자 우시중[137]으로서 백관을 인솔하여 헌비의 궁궐에 하례를 드렸다. 1387년(우왕 13) 좌시중[138]이 되었고, 1388년(우왕 14) 우시중[139]으로 있던 중 염흥방(廉興邦), 임견미(林堅味)의 일파로 몰려 하옥된 후 죽임을 당했다.[140] 이관의 차남 이복득(李福得)[141]은 민부상서[142]를 지냈다고 한다. 이복득의 차남 이중실(李仲實)[143]은 판서[144]를 지냈다고 한다. 이진의 차남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 이제현(李齊賢, 1287~1367)[145]은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로서 1301년(충렬왕 27) 15세 나이로 국자감시[B]에 1등 합격했고, 동년 문과[147]에 급제했다. 1314년(충숙왕 1) 백이정(白頤正)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하고, 이 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 학자 조맹부(趙孟頫), 염복(閻復), 우집(虞集), 요수(姚燧)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1323년(충숙왕 10) 류청신(柳淸臣), 오잠(吳潛) 등의 권신(權臣)들이 고려를 원나라의 행성(行省)으로 편입시키고 심왕(瀋王) 왕고(王暠)의 통치를 받게 하려고 획책한 제2차 입성책동(立省策動)이 발생했으나 이제현(李齊賢)과 왕관(王觀)[148]의 상서(上書)로 무산됐다.#1#2 제30대 충정왕이 폐위된 후 원나라에서 귀국길에 오른 제31대 공민왕은 그 사이의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1351년(공민왕 즉위년) 신진사대부들의 수장격인 이제현을 섭정승권단정동성사[C]에 임명하였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반란이 진압된 후 우정승[D]에 임명되어 정국을 수습하였고, 1354년(공민왕 3) 다시 우정승[D]을 거쳐, 1356년(공민왕 5) 문하시중[152]을 역임하였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고려가요 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익재난고[153], 고려시대 3대 비평문학서인 역옹패설[154]을 저술하였다. 이들은 각각 보물 제1892호, 제1893호이다. 또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346년(충목왕 2) 본조편년강목[155]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만년에는 국사(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 이달충(李達衷)[156]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하지는 못했다.[157]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1320),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1325), 수종공신(隨從功臣)(1342),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1351),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1352) 등 5차례 공신(功臣)에 책록되었고, 사후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제현 묘지명[158]을 찬한 이색은 도덕지수 문장지종(道德之首 文章之宗)[159]이라고 평했다. 이제현의 장남 이서종(李瑞種)[160]은 봉상대부[161] 종부시부령[162]을 지냈고, 문하시랑[163]에 추증되었다. 이서종의 장남 이보림(李寶林, ?~1385)[164]은 공민왕 때 우사간[165], 안렴[166]을 역임했고, 우왕 초 판안동부사[167]를 거쳐, 1375년(우왕 1) 사헌부 대사헌[168]를 역임했다. 이후 밀직부사[169], 정당문학[170]을 지냈다.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제현의 차남 이달존(李達尊, 1313~1340)[171]은 보문각 직제학, 전리총랑[172]을 역임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8) 부친 이제현과 함께 충숙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1340년(충숙왕 복위9) 귀국하는 길에 병을 얻어 급사했다. 이달존의 장남 이덕림(李德林, 1330[173]~?)[174]은 판서[175]를 역임하였고, 1390년(공양왕 2) 회군공신(回軍功臣)(1390)에 책록되었다. 이달존의 차남인 이수림(李壽林, 1332~1369)[176]은 1354년(공민왕 3) 군부판서[177], 1356년(공민왕 5) 이부판서[178]를 지냈고, 1363년(공민왕 12) 원나라에서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동지밀직사사[179]로서 원나라에 가서 공민왕을 옹호하는 백관기로서(百官耆老書)를 제출하였다. 1369년(공민왕 18) 막북(漠北)에서 북원(北元)의 조서를 받들고 황주(黃州)에 도착한 노은(盧訔)을 국문할 때 그가 허위로 자복하기를 "전 감찰대부 왕중귀(王重貴), 추밀원사 이수림(李壽林) 및 이명(李明) 등과 함께 첩자 일을 모의하였습니다."라고 하였기에, 그 일파로 몰려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고, 화의옹주 기씨(和義翁主 奇氏) 또한 북원(北元)과 통모했다고 몰려 비구니가 되어야 했으니, 이들은 모두 기황후(奇皇后)의 일족이었기 때문에 화를 입은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들에게 죄가 없다고 불쌍히 여겼다.# 이제현의 4남 이창로(李彰路)[180]는 봉익대부[181] 개성부윤[182]을 역임하였다. 이제현의 5녀 혜비 이씨(惠妃 李氏)[183]는 1359년(공민왕 8) 공민왕의 제2비로 간택되어 입궁하였으나 후사가 없없고,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이 시해된 직후 출궁하여 정업원(淨業院)의 비구니가 되었다. 이진의 3남 이지정(李之正)[184]은 호군공파(護軍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이핵의 3남 이세기(李世基)[185]는 밀직부사[186], 보문각 대제학[187], 검교정승[188]을 역임했다. 이세기의 장남 이천(李蒨, ?~1349)[189]은 국당공파(菊堂公派)의 파조로 1299년(충렬왕 25) 국자감시[B]에 장원하였다. 우사보[191]등을 지낸 후, 1343년(충혜왕 복위 4) 첨의평리상의[192], 1344년(충혜왕 복위 5) 동지공거[193]를 지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6월 48명의 서연관[194]에 선발되었다. 당시 이천의 사촌 판삼사사[195] 이제현(李齊賢), 판밀직사사[196] 이천(李蒨) 본인, 이천의 아들 전리정랑[197] 이달충(李達衷) 등 일문(一門)에서 3명이나 선발되었다. 동년 10월 정당문학[198], 1345년(충목왕 1) 첨의참리[199]를 지냈다. 이후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책록되고 월성군(月城君)[200]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족보에는 추가로 예문관 대제학[201]을 지낸 기록도 있다.[202] 이세기의 차남 이매(李邁)[203]는 부정공파(副正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이세기의 3남인 이과(李薖)[204]는 상서공파(尙書公派)의 파조로 상서[205]를 지냈다고 한다. 이세기의 4남인 이조(李蓨)[206]는 사인공파(舍人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판전공파(判典公派)는 파조(派祖) 이강(李)[207]이 정순대부[208] 판전객시사[209]를 역임했다. 범 삼성그룹 일가의 조상이다. 이강의 장남 이신유(李臣裕)[210]는 봉익대부[211] 예의판서[212]를 지냈다고 한다.
석탄공파(石灘公派)는 파조(派祖) 이존오(李存吾, 1341~1371)[213]가 공민왕 때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다. 1366년(공민왕 15) 불과 26세의 나이로 당대의 권력자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강직함과 기개를 떨쳤다.[214] 비록 공민왕의 노여움을 사 좌천된 후 낙향하여 울분 속에 지내다 1371년(공민왕 20)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나, 그 해 신돈이 반역죄로 처형되고 공민왕의 친정(親政)이 실시되면서 명예가 회복되고 성균대사성[215]에 추증되었다. 공민왕은 당시 10살이던 그의 장남 이래(李來, 1362~1462)에게 손수 간신존오지자안국(諫臣存吾之子安國)[216]이라고 써서 정방(政房)에 내리고 장거직장(掌車直長)에 임명함으로써 그의 충정(忠情)을 기렸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신돈을 전횡을 풍자한 시조 1수를 비롯하여 시조 3수가 전한다.
월성군파(月城君派)는 파조(派祖) 이지수(李之秀)[A]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219]에 이르렀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이지수의 장남 이규(李揆)[220]는 1324년(충숙왕 12) 우대언(右代言)을 거쳐, 1327년(충숙왕 15) 밀직부사[221]가 되었고, 1321년부터 1325년까지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충숙왕을 수종한 공으로 수종공신(隨從功臣)[222] 2등(1327)에 책록되었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에는 첨의참리(僉議叅理)[223]가 되었다. 1346년(충목왕 2)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이규의 장남 이원림(李元林)[224]은 판사복시사[225]를 지냈다. 이원림의 장남인 이만실(李蔓實)[226]은 판도총랑(版圖摠郞)[227]을 거쳐 동지사(同知事)[E]를 지냈다.
계대 불명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인기(李仁璂, ?~1316)는 고려사에 계림 사람(鷄林人)[229]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관 출신으로 호군[230]을 거쳐, 지언부사[231], 판중문사[232]를 역임했다. 이성서(李成瑞, 1319~1379)는 고려사에 계림부 사람(鷄林府人)[233]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야은일고[234]에 경주 사람(慶州人)[235]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광주 이씨(廣州 李氏)라는 설과 원나라 노왕(魯王)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으나 근거가 빈약하다. 1351년(충정왕 3) 밀직부사[236], 1352년(공민왕 1) 성절사[237], 동지밀직사사[238]를 지냈고, 이후 상서우복야[239]를 지냈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의 1차 침입을 격퇴하였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왕이 안동(安東)으로 파천했을 때 양광도도순문 겸병마사[240]로서 왕을 호종하였으며, 1363년(공민왕 12) 흥왕사의 변을 토벌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흥왕토적공신(興王討賊功臣) 1등(1363)[241], 첨병보좌공신(僉兵補佐功臣) 1등(1363)[242], 기해격주홍적공신(己亥擊走紅賊功臣) 1등(1363)[243]에 책록되었다. 동년 삼사우사[244]에서 찬성사[245]로 승진하였다. 1368년(공민왕 17) 원나라에서 태위감대경[246]을 제수받았고, 이후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으며, 1379년(우왕 5) 죽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4. 근세(조선)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국당공파(菊堂公派)의 파조 이천(李蒨)[247]의 후손들이 현달했다. 특히 3남 이달충은 태조와, 4남 이성중은 태종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이천의 장남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이경중(李敬中)[248]은 고려에서 중서문하판병부사[249]를 지냈다. 이경중의 손자 이정보(李廷俌)[250]는 고려에서 1390년(공양왕 2) 좌상시[251], 조선에서 형조전서[252]를 지냈다. 태종의 잠저시부터 같이 문연(文硏)하여 가까운 사이였고, 조선 개국 후인 1398년(태조 7) 경기좌도관찰사를 지냈고, 1399년(정종 1) 1월 1일 하례(賀禮)시에 정종에게 역년도(曆年圖)를 바쳤다. 세종 때 청백리에 선발됐다. 이천의 차남 이배중(李培中)[253]은 고려에서 전리판서[254]를 역임했다. 이천의 3남 이달충(李達衷, 1309~1385)[255]은 고려에서 1326년(충숙왕 13) 국자감시[B]에서 장원하였고, 1352년(공민왕 원년) 전리판서[257], 1358년(공민왕 7) 동북면 병마사[258]를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고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으며, 동북면 도순문사[259]로 있을 때 젊은 날의 태조와의 일화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이달충이 동북면 도순무사[260]의 직무를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갈 때 환조[261]가 환송을 나왔는데 환조가 주는 술은 서서 마셨으나 그 아들인 태조가 주는 술은 무릎을 꿇고 마셨다고 하며, 태조가 참으로 비범하므로 가업을 번창하게 할 것임을 예견했다고 한다.[262] 1359년(공민왕 8) 호부상서[263], 1366년(공민왕 15) 밀직제학[264]을 지냈다. 이후 계림부윤[265]을 지냈고, 1385년(우왕 11) 계림군(鷄林君)으로 있다가 죽으니 시호를 문정(文靖)이라고 하였다. 이달충의 차남 강원도관찰사 이전(李竱)[266]의 장남 이승상(李升商, ?~1413)[267]은 고려에서 1382년(우왕 8) 국자감시[B]에 장원을 하였는데 이때 잠저시절이었던 태종도 함께 합격한 인연으로 훗날 태종의 후대를 받았다. 조선 개국 후인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태종의 왕위 등극에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1401)에 책록되었다. 1412년(태종 12)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달충의 3남 증 공조판서 이수(李䇕)[269]의 4남인 이흥상(李興商, 1390~1465)[270]은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당시 의금부 진무[271]로서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1453)에 책록되고 후에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이천의 4남 이성중(李誠中, 1332~1411)[272]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밀직제학[273] 등을 지내다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판공안부사[274]를 거쳐 검교좌정승[275]을 역임했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태종과 친교가 있어 태종이 대언(代言)으로 있을 때 아들[276]로 하여금 가보인 금으로 장식한 보검(寶劍)을 바치게 하며 국가와 백성을 위해 큰일을 하라고 권면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277] 시호는 정순(靖順)이다. 이성중의 3남 이휴(李携, 1372~1448)[278]는 검교판한성부사[279]를 지냈다.석탄공파(石灘公派)에서는 파조 이존오(李存吾)[280]의 장남 계성군(鷄城君)[281] 이래(李來, 1362~1462)[282]가 현달하였다. 1401년(태종 1) 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이 제2차 왕자의 난을 계획하였을 때 그의 처조카[283]였던 이래는 이방간의 거병계획을 이방원에게 알려 난을 진압함으로써 좌명공신(佐命功臣) 2등(1401)에 책록되었다. 후에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다. 1405년(태종 5) 사헌부 대사헌, 예문관 대제학, 1406년(태종 6) 공조판서를 거쳐, 1408년(태종 8) 지의정부사[284] 겸 판경승부사[285]를 역임하였다. 사후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익재공파(益齋公派)에서는 파조 익재(益齋) 이제현(李存吾)[286]의 장남 이서종(李瑞種)[287]의 3남 이원익(李元益)[288]이 성균관 대사성[289]을 지냈다고 한다. 이원익의 장남인 이선(李瑄)[290]은 병조판서[291]를 지냈다고 한다. 이선의 장남 이지회(李之會)[292]는 태상소경[293]을 지내고 세종 때 치사[294]했다고 한다. 이선의 차남 이지대(李之帶)[295]는 1416년(태종 16) 가선대부[296] 검교한성윤[297]을 역임했다. 이지대가 태종으로부터 받아 경주이씨 양월문중(慶州李氏 楊月門中)에서 소장 중이던 '이지대 왕지'(李之帶 王旨)[298]는 보물 제1474-2호로 지정되어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가뭄으로 인한 민심 대책으로 검교한성윤[299] 134명을 임명했다.#
월성군파(月城君派)는 파조 이지수(李之秀)[A]의 증손 동지사(同知事)[E] 이만실(李蔓實)[302]의 장남 계천군(鷄川君) 이종직(李從直)[303]의 차남 양평공(襄平公) 이양생(李陽生, 1423~1488)[304]이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1604)에 책록되었고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다. 1470년(성종 1) 포도대장[305]을 지냈다. 이양생의 장남 이태악(李泰岳)[306]은 호조판서[307]를 지냈다고 한다. 이만실의 차남 이양직(李良直)[308]은 세종 때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309]를 지냈고,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이후 예조판서[310]를 지냈다고 한다. 이만실의 3남인 이승직(李繩直)[311]은 1427년(세종 9) 경상도관찰사, 1429년(세종 11)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이공린(李公麟) 집안, 국당공파(菊堂公派)의 매죽헌(梅竹軒) 이완(李浣) 집안, 상서공파(尙書公派)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집안이 경주 이씨의 주축이 되어 훌륭한 상신(相臣)[312] 및 대제학(大提學)[313]을 다수 배출하였다.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이공린(李公麟)은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차남 이달존(李達尊)[314]의 장남 판서[315] 이덕림(李德林)[316]의 4대손으로, 증조부는 고려 때 안찰사(按察使) 이신(李伸)[317], 조부는 증 병조참판 이계번(李繼蕃)[318]이다. 이계번의 장남 이윤인(李尹仁, 1415~1471)[319]은 이공린의 부친으로 조선 성종 때 평안도관찰사를 지냈고, 4남 이유인(李有仁)[320]은 성종 때 강원도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공린(李公麟, 1437~1509)[321]은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朴彭年)의 외동딸과 혼인하였는데 첫날밤 꿈에 용왕이 나타나 자신의 여덟 아들의 목숨을 살려주면 은혜를 갚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깨고 보니 장모가 사위 주려고 잡아놓은 자라 8마리가 있기에 연못에 방생하였고 그 와중에 1마리는 죽고 말았다. 이후 8명의 아들을 낳아 한자 부수(漢字部首) 黽[322]과 魚[323]를 넣어 오(鰲), 구(龜), 원(黿), 타(鼉), 별(鱉), 벽(鼊), 경(鯨), 곤(鯤)[324]이라 이름을 지었다. 8형제가 모두 학문에 뛰어나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문과에 급제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선비들이 순씨 팔룡(荀氏八龍)[325]이라고 불렀다.[326] 8별집(八鱉집)[327]이라고도 한다. 이런 연유로 이공린의 후손들은 자라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자라 1마리가 목을 다쳐 죽었기 때문인지, 3남 이원(李黿)[328]은 호조좌랑을 거쳐 성균관 박사(博士) 겸 봉상시(奉常寺)[329]로 있으면서 1493년(성종 24) 스승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내려줄 것을 논의하였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김종직의 사림파(士林派)로 몰려 1498년(연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유배되었고 1504년(연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형당했다. 사림(士林)은 이를 절의를 지킨 행의(行義)[330]로 크게 추앙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신원(伸寃)되어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다. 아이러니하게 2번의 사화 속에서 8형제 중 유일하게 목숨을 잃은 3남 이원의 후손들이 가장 현달하였는데[331] 이것은 그를 추앙하던 사림파가 선조(宣祖) 이후 집권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원의 4대손 이시발(李時發, 1569~1626)[332]은 서인(西人)[333]으로 중국어 및 군사·행정 실무에 능한 유능한 관료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병조좌랑·정랑[334] 등을 역임하면서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 도체찰사 류성룡(柳成龍)을 보좌하였고, 1593년(선조 26)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통역을 맡아 그의 군대를 안내하였다. 낙상지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명나라의 병법을 배웠고, 그의 재주에 감탄한 낙상지는 본국에 귀국하면서 선조(宣祖)에게 중용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1596년(선조 29)에는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 보급을 관장했다. 1601년(선조 34) 선조의 두터운 신임하에 4년간 3차례 경상도관찰사를 지내며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1604년(선조 37) 함경도관찰사를 지내며 6진(六鎭)의 번호(藩胡)[335]를 진정시켰다. 1608년(광해 즉위년) 여진족이 침입하자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북방의 방비를 맡았다. 1623년(인조 1) 한성부판윤, 형조판서를 지냈고, 1624년(인조 2) 부체찰사(副體察使)가 되어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후금(後金) 세력이 강성해지자 강화도의 군비 시설을 강화하였고 뒤이어 남한산성 수축을 감독하던 중 사망하였다. 군사관계 서적인 주변록(籌邊錄)을 저술하였으나 실전되었다. 사후 80여 년 뒤인 1708년(숙종 34)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이시발의 차남 이경휘(李慶徽, 1617~1669)[336]는 현종(顯宗)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과 가깝게 교유하며 서인(西人)의 예론(禮論)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경휘의 장남 이인환(李寅換, 1633~1699)[337]은 숙종 때 경상도관찰사, 이조참판을 지냈다. 이시발의 3남 이경억(李慶億, 1620~1673)[338]은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및 이조·호조·예조·형조 등 각조 판서를 두루 거쳐 1672년(현종 13) 우의정, 1673년(현종 14) 좌의정에 이르렀다. 1659년(효종 즉위년) 기해예송(己亥禮訟) 당시 앞장서서 서인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을 적극 지지하고 남인 윤선도(尹善道)의 3년설(三年說)을 맹렬히 배척하였다. 이경억의 차남 이인병(李寅炳)[339]은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1697년(숙종 23) 경기지방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1699년(숙종 25)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701년(숙종 27)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고, 3남 회와(晦窩) 이인엽(李寅燁, 1656~1710)[340]은 1692년(숙종 18)[341] 전라우도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지냈고, 1697년(숙종 23)에는 평안도 감진어사(監賑御史)로 파견되었다. 1703년(숙종 29)을 시작으로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등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했고, 같은 해 사헌부 대사헌도 역임하였다. 1707년(숙종 33)에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342]를 지냈고, 이 시기에 대제학(大提學)도 지냈다. 1710년(숙종 36)에는 수어사(守禦使)[343]를 역임했다. 장녀[344]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에게 출가하였다. 이경억의 5대손 이집두(李集斗, 1744~1820)[345]는 예조·형조판서, 한성부판윤를 지냈고, 판돈녕부사[346]로 치사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집두의 손자 이규팽(李圭祊)[347]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헌종 때 성균관 대사성, 황해도관찰사를, 철종 때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한편 이달존의 3남 이학림(李學林)[348]의 손자 이희(李暿, 1404~1448)[349]는 형조·공조참의, 홍문관부제학,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달존의 5대손 이사균(李思鈞, 1471~1536)[350]은 강원도·함경도·전라도·충청도관찰사를 두루 거쳐, 1532년(중종 27) 이조판서, 1533년(중종 28) 중종(中宗)의 특명으로 병조판서, 호조판서를 차례로 지냈고, 1534년(중종 29) 지중추부사[351] 겸 지의금부사[352]를 지냈다. 1535년(중종 30) 호조판서를 다시 지낸 후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찬성이 되었다.
국당공파(菊堂公派)는 파조 이천(李蒨)[353]의 장남 이경중(李敬中)[354]의 손자 형부전서[355] 이정보(李廷俌)[356]의 5대손인 증 영의정 오산부원군(鰲山府院君) 이탕(李宕)[357]의 아들 8명이 모두 현달해 세칭 8정집(八廷집)[358]이라고 하였다. 이탕의 차남 사류재(四留齋) 이정암(李廷馣, 1541~1600)[359]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황해도 초토사(招討使)로 임명된 후 연안성 전투에서 일본 제3군 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직속 병력 5천여 명에 맞서 싸워 격퇴하였고, 이 공으로 품계는 정2품이 되었고,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각도 관찰사를 지냈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도 초토사가 되어 황해도 일대를 수비하였다.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이정암의 증손 이정(李靖)[360]은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1624)에 책록되었다. 훈국 천총[361]을 지냈고, 1628년(인조 6) 품계가 가선대부[362]에 이르렀다. 이후 동부승지[363], 김해부사[364] 등을 지냈다. 이정암의 5대손 이성룡(李聖龍, 1672~1748)[365]은 1729년(영조 5) 충청도관찰사, 1731년(영조 7) 사간원 대사간, 1733년(영조 9) 전광도[366]관찰사를 지냈고, 1735년(영조 11) 재차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1736년(영조 12)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1738년(영조 14) 도승지를 거쳐 1740년(영조 16) 다시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고, 1741년(영조 17) 공조판서가 되었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43년(영조 19) 지돈녕부사[367]에 이르렀다. 1781년(정조 5) 혜정(惠靖)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탕의 3남 지퇴당(知退堂) 이정형(李廷馨, 1549~1607)[368]은 1592년(선조 25) 경기도관찰사를 지내고, 1594년(선조 27)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1595년(선조 28)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1603년(선조 36) 호조참판을 지내고, 1604년(선조37) 동지중추부사[369]를 지냈다. 이정형의 5대손인 병마절도사[370] 이달(李鐽)[371]의 아들인 동지중추부사[372] 이부만(李溥萬)[373]의 장남 이격(李格)[374]은 1790년(정조 14)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793년(정조 17) 함경남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1798년(정조 22)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격의 아들 이현직(李顯稷, 1795~?)[375]은 1846년(헌종 12) 경상좌도수군절도사, 1848년(헌종 14) 전라도병마절도사, 1854년(철종 5) 삼도수군통제사, 1857년(철종 8) 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1865년(고종 2) 총융사[376], 1866년(고종 3) 어영대장[377], 공조판서를 지냈다. 1867년(고종 4) 재차 삼도수군통제사를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고, 1870년(고종 7) 재차 형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가 지냈으며, 1871년(고종 8)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이현직의 아들 이학영(李鶴榮, 1824~?)[378]은 1863년(철종 14) 경상도수군절도사, 1866년(고종 3) 충청도병마절도사, 1871년(고종 8) 좌변포도대장[379], 1872년(고종 9) 금군별장[380]을 지냈다. 이부만의 차남 이벽(李蘗, 1754~1785)[381]은 한국천주교회(韓國天主敎會) 창립성조(創立聖祖) 5위[382] 중 한 명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문인으로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庸), 이승훈(李承薰), 권철신(權哲身), 권일신(權日身)과 깊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이벽의 5대조 이경상(李慶相)[383]은 소현세자를 수행한 인물로 청나라에서 서학(西學) 서적을 들여왔고 여기에는 천주교 및 서구의 과학, 천문, 지리 등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벽은 이를 연구하면서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벽은 1784년(정조 8) 이승훈이 서장관(書狀官)인 부친을 따라 청나라 베이징에 갈 때 세례를 받을 것을 부탁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집[384]에서 권일신, 정약용 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후 이벽은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에게 세례를 주면서 공동체를 창설하였고 이를 통해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되었다. 이부만의 3남 이석(李晳)[385]은 포도대장을 지냈다. 이천의 4남 검교좌정승 이성중(李誠中)[386]의 5대손 증 영의정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이란(李鸞)[387]의 후손들 중에 현달한 자가 많았다. 이란의 장남 이유일(李惟一)[388]은 병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이유일의 4대손 이중협(李重協)[389]은 1736년(영조 12) 강춘도[390]관찰사, 1745년(영조 21) 사간원 대사간, 1746년(영조 22) 공조참판, 도승지를 지냈다. 이중협의 아들 이형(李珩)[391]은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으며, 이형의 아들 이장한(李章漢)[392]은 정조 때 경상좌수사[393],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장한의 손자 이용상(李容象)[394]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이란의 3남 충무공(忠武公) 이수일(李守一, 1554~1632)[395]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 활동으로 공을 세워 품계를 넘어 우병사로 발탁되었고,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왜군을 격퇴하여 회령부사[396]가 되었다. 1605년(선조 38) 임진왜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북도·남도·경상우도·평안도병마절도사를 두루 지냈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서 4도 부원수[397]를 겸해 반란군을 무찔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1624)에 책록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1628년(인조 6) 형조판서가 되고, 1631년(인조 9) 남한수어사[398]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수일의 장남 이정(李淀,1589~1668)[399]은 1646(인조 24) 죽산부사[400], 1653년(효종 4) 대구부사[401], 1655년(효종 6) 상주목사[402], 장례원 판결사[403]를 지냈다. 1668년(현종 9) 가선대부[404]에 이르렀고,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사후 좌참찬[405]에 추증되었다. 이정의 차남 이인하(李仁夏, 1602~1674)[406]는 1654년(효종 5) 어영대장[407], 1656년(효종 7) 충청도수군절도사, 1660년(현종 1)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이후 경기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79년(숙종 5) 삼도수군통제사, 1682년(숙종 8) 병조참판, 1683년(숙종 9) 총융사[408], 한성부좌윤[409]을 역임했다. 이수일의 3남 정익공(貞翼公) 이완(李浣, 1602~1674)[410]은 조선시대 단 7명[411]뿐인 무과 출신 정승으로 1649년(효종 즉위년) 효종 즉위 후 효종(孝宗),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였고 관련 요직을 두루 맡았다. 문무 관직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1631년(인조 9)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644년(인조 22)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고, 포도대장[412]을 거쳐, 1650년(효종 1) 어영대장[413]에 올랐으며, 김자점의 모역을 다스리기 위해 포도대장을 거듭 맡았다. 1653년(효종 4년)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천거로 훈척(勳戚)만이 임명되던 관례를 깨고 훈련대장[414]에 임명되어 효종~현종 양조에 걸치도록 약 16년 동안 직책을 유지하는 한편, 한성부판윤·공조판서·형조판서·포도대장 등을 겸임하였다. 훈련대장 최장 연속 재임 기록[415]과 한성부판윤 최다·최장 역임 기록[416]을 갖고 있다. 1666년(현종 7) 8월에는 판의금부사[417]에 올랐고, 그 해 12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위중하고 또한 병조와 훈련도감을 겸할 수 없다고 사양하며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도 두 차례나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지만 끝내 나가지 않고 훈련대장으로만 있었다. 1669년(현종 10)에 훈련대장에서 물러난 이래 관직을 계속 사양하였으나, 1671년(현종 12) 수어사[418]를 거쳐, 1674년(현종 15) 우의정이 내려졌고, 그해 사망했다. 파조 이천(李蒨)[419]의 6대손 이극정(李克正)[420]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1506년(연산 12)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1506)에 책록되었고 문천군(蚊川君)[421]에 봉해졌다. 내금위장[422]을 역임했다. 이극정의 아들 이번(李番)[423]은 나주목사[424]를 지냈다. 파조 이천의 11대손 이태화(李泰和, 1694~1767)[425]는 1758년(영조 34) 승지를 지냈고, 이후 한성우윤[426],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1765년(영조 41)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사후 좌찬성[427]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영민(榮敏)이다.
부정공파(副正公派)의 파조 이매(李邁)[428]의 8대손 이사공(李士恭, 1554~1632)[429]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1604)에 책록되고 경양군(慶陽君)에 봉해졌으며, 이후
조선시대 경주 이씨가 배출한 상신(相臣) 대부분은 상서공파(尙書公派)의 이항복(李恒福) 집안에서 배출되었다. 파조 상서공(尙書公) 이과(李薖)[432]의 증손 이연손(李延孫, ?~1463)[433]은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하고 왕으로 즉위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는 그가 세조의 동서였기 때문이다. 즉 그의 처가 판중추원사[434] 윤번(尹璠)의 딸로서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언니였던 것이다. 이후 1459년(세조 5) 전라도관찰사, 1460년(세조 6) 한성부윤, 1462년(세조 8) 공조참판을 지냈다. 이연손의 손자 이성무(李成茂)[435]의 3남 이예신(李禮臣)[436]의 차남 이몽량(李夢亮, 1499~1564)[437]은 1539년(중종 34) 경상도 어사(御史)를 지냈고, 1551년(명종 8)과 1560년(명종 15) 2차례나 도승지를 역임할 만큼 명종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1551년(명종 6) 경상도관찰사, 1553년(명종 8) 충청도관찰사, 1557년(명종 12) 경기도관찰사를 지냈고, 1560년(명종 15) 한성부판윤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1562년(명종 17) 형조판서와 의금부지사를 겸임하였고, 1563년(명종 18) 우참찬,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이몽량의 장남 증 좌의정 이운복(李雲福)[438]의 3남 이탁남(李擢男, 1572~1645)[439]은 1627년(인조 5) 강원도 횡성현감으로 있을 때 이인거의 난이 일어나자 이인거 부자를 생포하여 난을 진압한 공으로 소무공신(昭武功臣) 2등(1627)에 책록되었고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다. 이몽량의 4남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440]은 선조, 광해군 양조에 걸쳐 도승지, 대제학(大提學)[441], 이조·병조판서를 거쳐 4도 도체찰사[442] 겸 도원수를 비롯하여 우의정을 3차례, 좌의정을 4차례, 영의정을 2차례 역임하였다. 붕당정치(朋黨政治)를 극복하고자 힘썼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기간 8차례[443]나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전란 극복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5번이나 공신(功臣)에 책록되었는데,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1590)[444],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1604)[445][446],
계대 미상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해룡(李海龍)은 조선 중기의 서예가이다. 역관, 사자관[511], 내섬시주부[512]를 역임했다. 금석문으로 사현(沙峴)[513]에 있던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514]를 썼다. 이해룡의 후손은 대대로 서예가였고, 그의 10대손 이종태(李鍾泰, 1850~?)[515]는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자 학자였다. 덕수궁 대한문의 액서[516]가 그의 필적이다. 진명휘론(進明彙論)을 저술하였다. 이정원(李挺元, 1567~1623)[517]은 1613년(광해 5) 계축옥사에 참여한 공으로
5. 근·현대
평리성암공파(評理誠菴公派)의 춘산(春山) [[이유필|{{{#0F0FE1 이유필}}}]](李裕弼, 1885~1945)[532]은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1900년대 초 신민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1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태극기와 선전문을 제작·배포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 수배를 받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내무부 비서국장을 지냈다. 1922년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이사장을 지냈고, 1923년 교민단 단장 겸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을 지냈으며, 1924년 한국독립당의 기관지 상해한문(上海韓聞)의 사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5대 내무부장·제7대 법무부장·제7대 재무부장을 지냈다. 1944년 조선건국동맹, 광복 후인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고, 평안북도 임시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소련군이 한반도 이북에 진주한 후 반공지도자로 활동하였으나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월남하던 중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인물은 다음과 같다. 성리학자 만당(晩堂) 이관준(李寬俊)[533]의 장남 이종영(李宗榮)[534]의 장남 이인(李仁, 1896~1979)[535]은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으며 김병로, 허헌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다.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조선과학협회 회장, 조선물산장려회장, 고려발명협회 회장, 과학지식보급회 회장, 조선어학회 간부, 한국민주당 총무 겸 당무부장 등을 지냈다. 이후 미군정청 대법원장·검찰총장, 제헌 국회의원[536], 제헌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초대 법무부장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제3대 국회의원[537], 제5대 국회의원[538], 제5대 제헌동지회 회장, 유엔 인권옹호 한국연맹 이사, 민족통일촉진회장,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지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이관준의 차남 우재(又齋) 이시영(李始榮, 1882~1919)[539]은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으로 국운이 기울져 가는 것을 한탄하여 1906년(고종 43)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무인적 기질과 과단성 있는 성격을 바탕으로 중국 베이징, 만주 지역과 국내를 오가며 활약하였기에 도산 안창호는 '날개 달린 호랑이'라고 평하였다. 애국단, 광복단 등을 조직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의 재무부장 서리 직책도 마다하고 항일 무장투쟁에 전념하였다. 1919년 한인무관학교를 설립하였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에 저항하려고 하였으나 동년 피로와 식중독이 겹쳐 사망했다. 도산 안창호가 통곡하고 성재 이시영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이상설(李相卨, 1871~1917)[540]은 성균관 대사성[541], 법부·학부협판, 의정부 참찬을 지냈고, 국제법 전문가였다. 1906년(고종 43) 만주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초대 숙장(塾長)을 지냈고, 1907년(고종 44) 고종이 제2차 한일협약의 부당함을 알릴 목적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헤이그 특사 3인 중 정사(正使)였다. 1911년 권업회[542]의 대표격인 의사부 의장에 선출되었고,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 초대 정도령(正都領)[543]에 선임되었으며, 1915년 신한혁명당 본부장[544]으로 추대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시우(李時雨)[545]의 장남 이상정(李相定, 1897~1947)[546]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국민혁명군[547] 중장을 지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후처 권기옥(權基玉, 1901~1988)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서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다. 이시우의 차남 이상화(李相和, 1901~1943)[548]는 민족시인으로 1922년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1923년 <나의 침실로>, 1924년 <이중의 사망>을 발표하였다. 1926년 '개벽'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였다. 1927년 '의열단 이주암 사건', 1928년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시우의 3남 이상백(李相佰, 1904~1966)[549]은 와세다대학 농구팀 대표[550], 일본 대학 농구연맹 농구부 주장[551], 일본 농구협회 창립회원·상무이사, 일본체육회 전무이사, 제11회 도쿄 올림픽 대회 유치·준비위원[552], 조선체육회 이사장, 대한체육회 위원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되었고, 임기 후에는 종신위원이 되었다. 또한 경성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박물관장·동아문화연구소 초대 소장, 문교부 편수관·대학교수자격 심사위원회 위원, 3·1 문화상 심의위원회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한국사회학회 1·2대 회장을 지냈고,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1963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고, 1966년 일본 훈3등욱일중수장[553],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시우의 4남 이상오(李相旿, 1905~1969)[554]는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자유민족바둑동호회 회장을 지냈고, 수렵가, 문필가로도 활동하였다.
상서공파(尙書公派)에서는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나왔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도 배출되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친일파로 조선 귀족 남작 이주영과 자작 이하영 및 그 직계후손이 있다. 이주영(李胄榮, 1837~1917)[555]은 파조 상서공(尙書公) 이과(李薖)의 5대손 이성무(李成茂)의 3남 이예신(李禮臣)의 차남 이몽량(李夢亮)의 4남 이항복(李恒福)의 장남 이성남(李星男)의 장남 이시중(李時中)의 장남 이세장(李世章)의 5대손 증 내부협판 이계상(李啓商)[556]의 장남 증 내부대신 이유헌(李裕憲)[557]의 장남이자 이항복의 봉사손(奉祀孫)으로, 1874년(고종 11) 문과에 장원급제[558]했고, 1879년(고종 16)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1881년(고종18)부터 수차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고, 1892년(고종 28)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1897년(고종 33)부터 수차례 궁내부 특진관을 지냈으며, 1900년(고종 37) 장례원 경(掌禮院卿)을 거쳐, 1908년(순종 1)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에 들어 원로대우를 받았다. 일제에 국권이 피탈된 1910년 조선 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12년 종4위에 서위되었다. 이주영의 장남 이규환(李圭桓, 1858~1931)[559]은 1905년(고종 42) 평리원 판사·수반검사를 지냈고, 1906년(고종 43) 일본 훈2등서보장[560]을 수훈하였고, 동년 평리원 재판장 서리를 지냈다. 1907년(고종 44) 학부협판, 학부차관, 경기도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했고, 1914년 종5위에 서위되었으며, 1918년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습작하였다. 이규환의 손자 이경우(李卿雨, 1918~?)[561]는 1931년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습작하였고, 1939년 종5위에 서위되었다. 광복 후인 1949년 반민특위에 자수하여 조사받은 후 특별검찰부에 송치되었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을사삼흉 이하영(李夏榮, 1858~1929)[562]은 이항복(李恒福)의 장남 이성남(李星男)의 장남 이시중(李時中)의 3남 이세형(李世馨)의 5대손 증 의정부 참찬 이응효(李膺孝)[563]의 장남 증 내부대신 이유수(李裕修)[564]의 차남으로, 1895년(고종 32) 궁내부 회계원장, 1896년(고종 33) 경기도관찰사, 주일공사관 전권공사, 주일대사관 특명전권대사를 지냈고, 1897년(고종 34) 일본 훈1등욱일장[565]을 수훈했다. 1898년(고종 35) 대한제국 중추원 부의장, 귀족원 경(貴族院卿)을 거쳐 중추원 의장을 지냈고, 1899년(고종 36) 의정부 찬정, 주차일본국특명전권공사, 특명 주일전권공사 겸 대사를 지냈다. 1900년(고종 37) 훈2등태극장[566]을 수훈했고, 1904년(고종 41) 외부대신을 역임했으며, 1905년(고종 42) 훈1등팔괘장[567]을 수훈했고, 동년 법부대신을 역임했고, 1907년(고종 44) 훈1등태극장[568]을 수훈했다. 191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동년 종3위 훈1등 조선 귀족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22년 대륙고무주식회사 사장이 되었고, 사후 1929년 일본 훈1등욱일동화대수장[569]이 추서되었다. 이하영의 차남 이규원(李圭元, 1890~1945)[570]은 대한제국 궁내부 시종원 시종[571], 이왕직 찬시[572]를 지냈고, 대륙고무주식회사 이사,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조선불교단 이사, 조선실업구락부 평의원, 동방직물판매주식회사 대표이사를 지냈다.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습작하였고, 조선귀족회 부회장, 창복회[573] 위원을 지냈다. 이규원의 장남 이종찬(李鍾贊, 1916~1983)[574]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군 소좌를 지냈고, 1941년 일본 훈6등서보장[575], 1942년 일본 공5급금치훈장[576]을 수훈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 수도경비사령관, 육군 제3사단장, 제6대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육군대학 초대 총장[577], 제8대 국방부장관, 주이태리 대사 겸 재희랍 대사, 재향군인회 고문, 한이협회 회장, 한일불교협의회 부회장, 성우구락부[578] 회장, 한일의원안보협의회 회장, 제9·10대 국회의원, 코리아엔지니어링 대표이사, 한국 후지필름 회장을 지냈다. 1950년 을지 무공훈장, 1951년 미국 공로훈장[579], 1976년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훈하였고, 사후 보국훈장 통일장이 추서되었다.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일본군 장교 경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지만, 조선귀족 자작 습작 거부, 친일행위 공개 반성, 군의 정치적 중립성 유지 등의 행적으로 참군인으로 칭송되기도 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상서공파(尙書公派)에서는 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운 인물들도 다수 배출되었다. 고종 때 우찬성 이유승(李裕承)[580]은 이항복(李恒福)의 차남 이정남(李井男)의 장남 이시술(李時術)의 차남 이세필(李世弼)의 6대손으로, 그의 아들 6명[581]은 일제에 국권이 강탈된 1910년 전 재산[582]을 처분하고 만주(滿州)로 망명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에 헌신함으로써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朴殷植)은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명문거족이나 권문세가 출신이 대규모로 망명한 경우는 이시영 형제가 유일하다고 평가했다. 이유승의 장남인 이건영(李健榮, 1853~1940)[583]은 1891년(고종 28) 익위사 부사를 지냈고, 1905년(고종 42) 품계가 정3품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1926년 장단으로 돌아와 장남으로서 선산을 돌보았고, 1940년 병사하였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건영의 장남 이규룡(李圭龍, 1887~1955)[584]은 1911년 만주로 이주하는 교포들의 정착지원을 목적으로 한인 자치기관 경학사(耕學社)가 창설되자 서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1911년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585]가 창립되자 교사로서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활동하였고, 1920년 8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폐교될 때까지 10년간에 걸쳐 활동하였다. 1924년 귀국 후 농업에 종사하며 독립운동가들에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유승의 차남 이석영(李石榮, 1865~1943)[586]은 1885년(고종 22) 조선 최고 부자[587] 중 한 명으로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588]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903년(고종 40) 장례원 소경을 지냈고, 1905년(고종42) 품계가 종2품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이유원의 사후 상속받은 막대한 재산을 전부 팔아 경학사·신흥무관학교의 창설 운영자금을 비롯한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하였으며, 1934년 중국 상하이에서 아사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李圭駿, 1899~1927)[589]은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삼촌인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의 지시로 1920년 국내로 들어와 독립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고, 이회영의 차남 이규학(李圭鶴) 등과 함께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을 중심으로 행동조직 다물단(多勿團)[590]을 조직하여 활동하다 베이징에서 암살되었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유승의 3남 이철영(李哲榮, 1863~1925)[591]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1925년 병사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유승의 4남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592]은 독립운동의 대부로서 헤이그 특사 기획, 고종 망명 시도, 신민회 활동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만주 삼원보에 신흥강습소[593]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932년 일본 관동군 사령관을 암살하기 위해 다롄으로 가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던 중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회영의 후처 이은숙(李恩淑, 1889~1979)도 독립운동에 공헌하였고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회영의 차남 이규학(李圭鶴, 1896~1973)[594]은 흥선대원군의 외손녀 조계진(趙季珍)과 혼인하였고,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군 양성에 헌신했다.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李圭駿) 등과 함께 신흥학우단을 중심으로 행동조직 다물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이회영의 둘째 사위 장해평(莊海平, 1905~1965)[595]도 독립운동에 공헌하였고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회영의 3남 이규창(李圭昌, 1913~2005)[596]은 1929년 화랑청년단(花郞靑年團)을 거쳐, 1930년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서 활동하였고, 1933년 이 연맹의 행동단체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여 일제 요인 및 친일파 암살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동년 육삼정(六三亭) 의거[597]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35년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암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중국 경찰에 체포된 후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 인도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1936년 경성복심법원에서 1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으나, 1945년 광복과 함께 출소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다. 이유승의 5남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1868~1953)[598]은 조선 승정원 동부승지, 대한제국 평안남도관찰사, 한성재판소 수반판사[599], 외부 교섭국장, 법부 민사국장 등을 지냈다. 1910년 7월 훈3등팔괘장(1910)[600]을 수여받았다. 동년 12월 망명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19년 법무총장, 1919~1926년 재무총장, 1935~1940년 법무부장, 1942년 재무부장, 1944년 감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광복(光腹) 후에 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서 귀국하였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했다. 이시영은 조선, 대한제국, 임시정부, 대한민국의 관직을 모두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다. 서울 수유 국가관리묘역[601]에 안장되어 있다. 이시영의 장남 이규창(李圭昶, 1889~1963)[602]은 신흥강습소 제1회 특기생으로 1913년 이후 신흥무관학교 학감 후임 및 군사과 교무·교사로 활동하였다. 200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이시영의 차남인 이규열(李圭悅, 1905~1951)[603]은 광복 후 부친 이시영이 초대 대한민국 부통령이 됐을 때 부통령 비서실 이사관을 지냈다. 이유승의 7남 이호영(李頀榮, 1875~1933)[604]은 만주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고, 1931년 베이징 근교에서 일제의 습격으로 온 가족이 몰살되었다.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와 같이 이유승의 아들 6형제 및 부인, 자녀, 사위 등 일가 13명[605]이 건국훈장·포장[606]을 받았다. 이유인(李裕寅, 1843~1907)[607]은 경상남도 김해의 중인 출신으로서 파조 상서공(尙書公) 이과(李薖)의 5대손인 이성무(李成茂)의 4남 이지신(李智臣)의 11대손이다. 1891년(고종 28)부터 1893년(고종 30)까지 6차례 한성부판윤을 지냈고, 1894년(고종 31) 함경남도병마절도사, 1896년(고종 33) 중추원 1등의관을 지냈다. 1898년(고종 35) 법부대신이 된 후 중추원 1등의관에 임용되고 칙임관 2등에 서임되었다. 1898년(고종 35) 조칙 위조 혐의로 고금도(古今島)로 종신 유형에 처해지나, 동년 10년 유배 처분으로 감해진 후 특별사면되었다. 1899년(고종 36) 중추원 의관, 경무사[608], 궁내부 특진관을 거쳐, 1900년(고종 37) 평리원 재판장[609] 서리, 1902년(고종 39) 경상북도관찰사, 시종원 경[610], 평리원 재판장 서리, 궁내부 특진관을 지냈다. 1903년(고종 40) 한성부판윤, 시종원 경[611], 경무사 서리를 거쳐, 1904년(고종 41)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고, 동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되고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다. 1907년(고종 44) 유배형을 받은 후 사망하였다.
월성군파(月城君派)의 이인식(李寅植)[612]은 철종 때의 악사로 피리 명인이다. 국악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그의 후손들 중에서도 훌륭한 국악인이 많이 나왔다. 가전악(假典樂), 전악(典樂)을 거쳐 악사(樂師)를 지냈다. 이인식의 아들 이원근(李源根, 1850~1918)은 고종 때의 악사로 피리 명인이다. 1860년(철종 11) 장악원(掌樂院) 악공을 역임했고, 1869년(고종 6) 가전악(假典樂), 1906년(고종 43) 악사(樂師), 1908년(순종 1) 전악(典樂), 1913년 이왕직의 아악수장(雅樂手長)을 역임했다. 이원근의 장남 이수경(李壽卿, 1882~1955)은 거문고와 정재춤의 대가이다. 1892년(고종 29) 장악원(掌樂院) 악공이 되어 거문고와 정재춤을 배웠고, 1902년(고종 39)에 전악(典樂), 1911년 장악(掌樂)이 되었다. 1913년 이왕직 아악수장(雅樂手長)을 거쳐, 1933년 아악사(雅樂師)를 역임하였다. 1892년(고종 29) 무동(舞童)이었던 관계로 궁중정재(宮中呈才)에도 뛰어나 현재 국립국악원에 전승되는 춤은 모두 그의 지도에 의한 것이고, 종묘대제 때 추는 일무(佾舞) 악장(樂章)도 대부분 그의 지도에 의한 것이다. 이수경의 아들 이병성(李炳星, 1909~1960)은 일제강점기에 아악수, 아악수장, 아악사를 지냈고 피리와 양금의 명인이자 가곡의 명창이다. 광복 후 국립국악원 국악사를 지냈다. 이병성의 아들 이동규(李東圭, 1945~ )는 1958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613]에서 부친 이병성에게 가곡을 배웠고, 1961년부터 국가무형문화재 '가곡' 보유자였던 이주환에게 본격적인 교육을 받았다. 1982년 국가무형문화재 '가곡' 전승교육사가 되어 후학 양성에 힘써왔고, 1997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이 되었고, 2022년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무형문화재 '가곡'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1] 후대에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보통 고조선이라고 칭한다.[2] 위작 논란이 있는 35대 실전세계의 기록으로서 마한 태조 기준의 딸이라고 한다. 경주 지역 전설에 따르면 시조왕 혁거세 거서간의 왕비인 알영부인의 친정어머니라고 전한다.[3] 신라 박씨의 족보들, 예컨대 신라(밀양)박씨선원속수세보, 월성박씨대동세보中신라선원세보, 강릉박씨세보中선원세보 등을 보면, 신라 시조왕 혁거세 거서간의 장남 남해왕, 차남 박특, 3남 박민 다음에 성명미상의 공주(公主)가 1명 있고, 그 남편이 좌명공신 급량부 대인 이알평(李謁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남해왕의 여동생이 아로공주(阿老公主)라고 하므로 위 공주는 아로공주인 듯하다. 위작 논란이 있는 35대 실전세계에 의하면 공주의 남편은 이알평이 아니라 그의 증손 이중가(李仲嘉)라고 한다.[4] 경주 정씨 족보에서는 535년(법흥왕 23)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했다고 하고, 경주 설씨 족보에서는 시호를 충헌군(忠憲君)이라 했다고 한다. 위작 논란이 있는 35대 실전세계에서는 시호를 문선은열왕(文宣恩烈王)으로 적고 있다. 535년(법흥왕 23) 문선(文宣)이라는 시호를 받고, 656년(태종 무열왕 3)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는 뜻인 것 같다.[5] 경주 정씨 족보, 경주 설씨 족보의 기록이다. 경주 이씨 족보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6] 태화공주 기씨, 성렬왕비 등은 위작 논란이 있는 35대 실전세계에 나오는 호칭이다.[7] 중시조 17세.[8] 17관등의 제3관등. 제1~5관등은 진골만이 오를 수 있었다.[9] 중시조. 35대 실전세계에 의하면 시조 36세이다.[10] 중시조 2세.[11] 大阿飡 角干. 17관등제에서 대아찬(大阿飡)은 제5관등, 각간(角干)은 제1관등이다. 제1~5관등은 진골만이 오를 수 있다.[12] 목은문고(牧隱文藁) 권16, 동문선(東文選) 권126.[13] 중시조. 35대 실전세계에 의하면 시조 36세이다.[14] 兵部令. 병부령(兵部令)은 신라 법흥왕 때 설치한 것으로 대아찬(大阿飡)~각간(角干)이 맡았고 재상(宰相)을 겸직할 수 있었다. 17관등제에서 대아찬은 제5관등이고 각간은 제1관등으로서 제1~5관등은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었다.[15] 중시조 2세.[16] 중시조 3세.[17] 中原太守. 중원(中原)의 태수(太守). 중원(中原)은 본래 고구려 국원성(國原城)이었으나, 신라가 차지하여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한 후, 757년(경덕왕 16)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고, 고려에 들어와서 940년(태조 23) 충주(忠州)로 고쳤다.# 한편 이금서(李金書)의 관직명을 경주이씨 대종보에서는 중원태수(中原太守), 호부낭중(戶部郞中)이라고 적고 있으나, 문하시중 이제현 묘지명(목은문고 권16, 동문선 권126)##, 가장(上)-증 좌참찬 이몽량(양와집 책10)#, 좌의정 이경억 묘지명(서계집 12권)# 및 행장기(명곡집 권28)#, 증 이조참판 이서 묘지명(초려집 권22)#, 세보(지퇴당집 권14)#에서는 중원태수(中原太守) 또는 태수(太守)라고만 적고 있다.[18] 고려 태조 왕건과 제3비인 신명순성왕태후 유씨(神明順成王太后 劉氏) 사이의 장녀이다.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라고 하였고, 혼인 후에는 낙랑공주(樂浪公主)로 고쳤다. 신란공주 또는 신란궁부인이라고도 한다. 고려 제3대 정종, 제4대 광종과는 동복남매가 된다.[19] 선원은 왕실조계(王室祖系)를 서술한 것이다. 한편 35대 실전세계에 의하면 전주 이씨 시조 이한(李翰)은 경주 이씨 시조 36세가 된다.[20] 기자조선이라고도 하나 논란이 있다.[21] 고조선 준왕, 마한 태조.[22] 위작 논란이 있는 35대 실전세계의 기록이다.[23] 중시조 3세.[24] 중시조 4세.[25] 兵正. 족보에서는 '고려가 병부령(兵部令) 및 병정(兵正)을 그대로 두었는 바 그 직급은 재상(宰相)에 견준다'고 적고 있다. 족보에 따라서는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적고 있기도 하다. 신라에서는 병부(兵部)의 장관인 병부령(兵部令) 아래에 차관직으로 병부대감(병부시랑)을 두었고, 태봉이 신라의 관제를 계승하였으며, 이를 다시 고려가 계승하여 병부에 장관직인 병부령과 차관직인 병부경(兵部卿)을 두었다. 918년(태조 1) 6월 고려 태조가 즉위 직후 발표한 조서를 보면, 수상직인 광평시중(廣評侍中) 1명, 병부령을 비롯한 재상직인 영(令) 9명, 병부경을 비롯한 차관직인 경(卿) 14명을 임명하였다. 이후 983년(성종 2)에 병부경은 병정(兵正)으로 개칭되었다.[26] 중시조 5세.[27] 左司諫.[28] 중시조 6세.[29] 門下侍中.[30] 중시조 7세. 사록(司錄)을 지냈고, 보조공신(補祚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31] 중시조 8세. 아들의 귀함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어야 하나 기록이 없다.[32] 중시조 9세. 경주 이씨 14개 대파의 공동선조이다.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이제현(李齊賢)의 8대조.[33] 고려사에는 사직, 태묘, 국자감 창건 등에 대한 기록은 나오나 이총섬(李寵暹)을 비롯하여 이를 주청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고려사 자체가 조선왕조실록에 비하여 기록된 분량이 적고 고려 초기의 기록은 특히 부실하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편 경주 이씨 족보에는 이총섬의 관직인 문하시중만 기록되어 있으나, 해주 오씨 족보, 함열 남궁씨 족보에는 이총섬의 관직과 함께 사직, 오묘, 국자감 창건 주청 등 상세한 행적까지 기록되어 있어 있다.[34] 門下侍中.[35] 해주 오씨 경파(京派) 시조. 송나라 학사로서 984년(성종 3) 고려로 건너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고 황해도 해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36] 함열 남궁씨 시조. 961년(광종 12) 출생. 976년(경종 1) 동당시(東堂試)에 급제하여 비서랑(秘書郞)이 됐고 그 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하고 977년(경종 2) 대과(大科)에 급제한 뒤 귀국하였다.##[37] 전의 이씨(全義李氏) 시조 5세.[38] 順興府使. 순흥(順興)은 현재의 김해이다.[39] 중시조 10세.[40] 이춘정(李春貞)의 5대손 이핵(李翮)의 3자 9손(三子九孫)으로부터 분파되었다.[41] 파조는 중시조 14세 이득견(李得堅)의 3남 이강(李)이다.[42] 門下侍郞.[43] 중시조 10세.[44] 중시조 11세. 고려사에는 이녹천(李祿千)으로 기록되어 있다.[45] 工部尙書.[46] 上將軍. 중앙군인 2군 6위(二軍六尉)의 최고 관직인 정3품 무관직. 당시에는 병부상서(兵部尙書)도 정3품이었다.[47] 중시조 13세.[48] 兵部尙書.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49] 鷹揚軍 上護軍. 중앙군인 2군6위(二軍六尉) 중 2군 중 하나인 응양군(鷹揚軍)의 최고지휘관인 상호군(上護軍)으로 정3품 무관직이다. 이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불렸다. 응양군의 상장군(상호군)은 중방회의(重房會議)의 의장으로 무반(武班)의 대표였으므로 반주(班主)라고 불렸다. 고려 후기에는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겸할 만큼 무반 최고의 실권자였다. 다만 이중화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등에 없다.[50] 중시조 14세.[51] 郎中.[52] 晋陽副使.[53] 紫門指諭. 1229년(고종 16) 정상(鄭相)이라는 자가 살인을 하였는데 청탁을 받은 법관들이 죄를 묻지 않으려 할 때 이정핵은 낭중(郎中)으로서 홀로 처벌을 고집하였으나 막진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 무신정권의 집권자였던 최우(崔瑀)가 이를 가상히 여겨 자문지유(紫門指諭)에 임명하여 포상하였다.#[54] 御使中丞. 어사대(御史臺)의 종4품 관직.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55] 중시조 15세.[56] 中書舍人. 중서문하성의 종4품 관직.[57] 郎將.[58] 按察使. 기록에 따라 안찰사 이숙진(李淑眞) 혹은 안렴사(按廉使) 이오(李敖)로 기록되어 있다.[59] 金州防禦使.[60] 중시조 18세.[61] 중시조 7세 이신우(李申佑)의 선계(先系)는 불분명하다. 중시조 5세 이승훈(李承訓)의 장남 이주복(李周復)의 차남으로 보기도 하고, 이승훈의 차남 이제정(李齊廷)의 장남으로 보기도 한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홈페이지에는 이신우의 선계를 표시하지 않고 중시조 7세로만 두었다.[62] 중시조 7세. 이신우(李申佑)는 경주이씨 월성군파와 (신)원주이씨의 공동 선조이다. 즉 경주이씨 월성군파의 파조 이지수(李之秀)의 10대조이면서 (신)원주이씨의 시조가 된다. 기존 족보에서는 이신우(李申佑)를 중시조 12세로 기록했으나 연대상 모순이 분명하여 경주이씨중앙화수회 홈페이지에서도 (신)원주이씨측 주장대로 중시조 7세로 수정하였다. 이 경우 이지수(李之秀)는 중시조 21세에서 중시조 16세로 수정해야 옳겠지만 중시조 11세 이황승(李黃升)의 장남과 차남으로 기록된 이용평(李用平)과 이극량(李克良)은 부자관계가 맞기 때문에 이를 반영하여 중시조 17세로 수정하였다. 이 부분은 아직 경주이씨중앙화수회 홈페이지에 반영되어 있지 않다.[63] 兵部侍郞.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64] 兵部尙書. 경주이씨족보에서는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냈다고만 기록하고 있으나, (신)원주이씨족보에서는 이후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65] 중시조 8세.[66] 千戶長.[67] 工部尙書. 경주이씨 족보에서는 천호장(千戶長)을 지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신)원주이씨 족보에서는 천호장(千戶長) 혹은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68] 중시조 9세.[69] 千戶長.[70] 司諫. 경주이씨 족보에서는 사간(司諫)을 지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신)원주이씨 족보에서는 천호장(千戶長) 혹은 사간(司諫)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71] 중시조 10세.[72] 檢校大將軍. 검교(檢校)는 명예직을 의미한다. 대장군(大將軍)은 중앙군인 2군6위(二軍六衛)의 종3품 무관직이다.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73] 중시조 16세.[74] 兵部侍郞.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A] 중시조 21세.중시조 17세. 중시조 7세 병부상서 이신우(李申佑)의 10대손이다. 이신우는 경주이씨 월성군파와 (신)원주이씨의 공동 선조이다. 기존 족보에는 중시조 11세 이황승(李黃升)의 아들 중시조 12세 이용평(李用平)과 이용평의 아들 중시조 13세 이극량(李克良)이 이황승의 장남과 차남, 즉 형제관계로 오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수정하여 반영하면 이지수(李之秀)는 중시조 16세가 아니라 중시조 17세가 된다.[76] 족보에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또는 삼중대광광록(三重大匡光祿)·월성군(月城君) 또는 광정대부(匡靖大夫)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라고 되어 있다. 금자광록대부 및 광정대부는 문관 정2품 품계이고, 삼중대광은 문관 정1품~종1품 품계이다. 상서우복야는 상서성의 실질적 장관으로 정2품 관직이다.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77] 중시조 21세.중시조 17세. 중시조 7세 병부상서 이신우(李申佑)의 10대손이다. 이신우는 경주이씨 월성군파와 (신)원주이씨의 공동 선조이다. 기존 족보에는 중시조 11세 이황승(李黃升)의 아들 중시조 12세 이용평(李用平)과 이용평의 아들 중시조 13세 이극량(李克良)이 이황승의 장남과 차남, 즉 형제관계로 오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수정하여 반영하면 이지연(李之衍)은 중시조 16세가 아니라 중시조 17세가 된다.[78] 吏部侍郞.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79] 중시조 6세. 정조시랑(正朝侍郞) 이승훈(李承訓)의 아들이다. 이승훈의 아들들을 장남 이주복(李周復), 차남 이제정(李齊廷), 3남 이주좌(李周佐)로 보기도 하지만 확실치 않다. 이주좌의 후손 이서(李舒)가 아주백(牙州伯)에 봉해지면서 이주좌는 아산 이씨(牙山李氏)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이주좌와 이서 사이의 계대가 실전되었다.[80] 監察司憲.[81] 侍御使.[82] 起居舍人.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낭사(郎舍)에 속하는 종5품 관직. 간쟁(諫諍), 봉박(封駁), 서경(署經) 등을 담당하였다.[83] 御使中丞. 어사대의 종4품 관직. 사헌중승이라고도 한다.[84] 右諫議大夫. 중서문하성의 정4품 관직. 간쟁(諫爭), 봉박(封駁) 등을 담당하였다.[85] 國子祭酒左諫議大夫.[86] 右散騎常侍.[87] 刑部尙書判御史臺事. 형부상서 겸 판어사대사. 형부상서(刑部尙書)는 조선시대의 형조판서와 비슷한 관직으로 현대의 법무부장관에 해당한다.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는 어사대의 판사를 말하며 재상이 겸직하였다. 어사대는 고려의 감찰기관으로 현대의 검찰 및 감사원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했다.[88] 司空.[89] 尙書右僕射.[90] 일단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된 이주좌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총섬의 기록은 경주 이씨 족보뿐만 아니라 함열 남궁씨, 해주 오씨 측 자료에도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어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쉽지 않다. 이론상 중시조 5세 이승훈이 장수하면서 장남 이주복을 일찍 낳고 계대가 빠르게 이어져 현손인 이총섬이 이승훈의 3남 이주좌보다 먼저 태어났다면 연대상 모순이 해결될 수 있겠으나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쪽 또는 양쪽 기록의 전부 또는 일부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추후 관련 자료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91] 중시조 5세.[92] 判禮部事. 상서예부(尙書禮部)의 최고 관직으로 재신(宰臣)이 겸하였다.[93] 侍中. 경주이씨 족보에는 판예부사(判禮部事)를 지낸 것만 기록되어 있으나, 강릉박씨 족보에는 시중(侍中)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박광렴(朴光廉)의 처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시중(侍中) 이승겸(李承謙)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광렴은 효자로서 관직과 품계 등을 받은 것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승겸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등에 전하지 않는다.[94] 2008년 평리공파(評理公派)와 성암공파(誠菴公派)가 평리성암공파(評理誠菴公派)로 통합되었다. 중시조 16세 이인정(李仁挺)의 관직명이 평리(評理)이고 호가 성암(誠菴)이다.[95] 중시조 9세.[96] 중시조 10세.[97] 門下平理.[98] 尙書左僕射.[99] 중시조 15세. 이득견(李得堅)의 장남이다.[100] 중시조 16세.[101] 중시조 17세.[B] 國子監試. 최종고시인 예부시(禮部試)의 전 단계인 예비고시로서 국자감(國子監)에서 진사(進士)를 선발하는 시험이다. 진사과(進士科), 사마시(司馬試), 성균관시(成均館試) 등으로도 불렸다.[103] 최종고시인 예부시(禮部試)를 의미한다. 동당시(東堂試)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합격하면 바로 관리가 된다.[104] 右思補[105] 內書舍人.[106] 중시조 17세. 이조은(李朝隱)이라고도 한다. 고려사에는 두 이름이 모두 나온다.#1#2[B] [108] 右獻納.[109] 중시조 16세. 초명은 이방연(李方衍)이다.[B] [111] 右司議大夫.[112] 文翰學士.[113] 詞林學士 試右散騎常侍.[114] 左承旨 秘書尹 知兵曹事 詞林學士.[115] 典法判書.[116] 經史敎授都監使. 안향의 유학 진흥책의 일환으로 밀직부사로 치사(致仕)한 이산(李㦃)과 함께 선발되었다.[117] 判衛尉寺事 權授密直副使.[118] 政堂文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2품 재상직(宰相職).[119] 贊成事.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2품 재상직(宰相職).[120] 商議會議都監事. 약칭은 상의(商議). 재추(宰樞), 즉 재신(宰臣)과 추신(樞臣)들의 합좌기구인 회의도감(會議都監)의 상의사(商議事)로 재추에 준하였다. 초기에는 재추회의에 참여하되 문서 서명권이 없었으나 이후 문서 서명권까지 갖게 되어 재추와 구별이 없게 되었다.[121] 檢校僉議政丞. 검교(檢校)는 실직(實職)의 정원으로 말미암아 승진하지 못한 관료에게 승진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산직(散職) 또는 고위 관료의 공훈에 대한 포상을 위한 훈직(勳職)을 의미한다. 첨의정승(僉議政丞)은 고려 최고의 의사결정기관인 첨의부의 정승으로 종1품 재상직(宰相職)이다. 문하시중이 관제 변화에 따라 첨의중찬, 도첨의시중, 첨의정승 등으로 불렸다.[122] 중시조 17세.[B] [124] 배위는 합천 이씨로 찬성(贊成) 이신손(李信孫)의 딸이고 상서(尙書) 이순목(李淳牧)의 손녀이다. 족보에는 이순목이 이존순(李存淳)으로 오기되어 있다.[125] 중시조 18세.[126] 判密直司事. 밀직사(密直司)의 으뜸벼슬인 종2품 판사(判事). 족보에는 관직명을 밀직(密直)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에 판밀직사사 홍징(洪徵)의 관직인 판밀직사사를 밀직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판밀직사사의 약칭인 듯하다.#[127] 侍中.[128] 중시조 19세.[129] 監察執義.[130] 巡問使.[131] 軍簿判書.[132] 都巡問使.[133] 都巡問使.[134] 都巡察使. 고려 후기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에 관한 업무를 처리하던 임시 관직이다. 재상급 고위 관료들이 주로 도순찰사라는 관직명으로 파견되었다.[135] 守門下侍中. 1384년(우왕 10) 문하시중 임견미(林堅味)와 함께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1385년(우왕 11) 9월 11일 건립된 태고사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 뒷면을 보면 이때까지도 수문하시중으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136] 우왕의 제7비. 어머니는 이인임(李仁任)의 노비로, 그녀 역시 이인임의 노비 출신이었다.[137] 右侍中.[138] 左侍中. 고려의 최고 관직은 광평시중, 문하시중, (도)첨의중찬, 도첨의시중, 도첨의정승 등으로 이어진다. 도첨의정승은 다시 우정승과 좌정승으로 나뉘었는데 상우(尙右) 원칙을 취해 우정승이 좌정승보다 높은 고려 최고 관직이었다. 이후 관제 개편으로 최고 관직으로 다시 문하시중을 두었고, 문하시중은 다시 문하좌시중과 문하우시중으로 나뉘었는데 이때는 상좌(尙左) 원칙을 취해 문하좌시중이 문하우시중보다 높은 최고 관직이었다. 이후 관제 개편으로 문하좌시중은 문하시중으로, 문하우시중은 수문하시중으로 하였다.[139] 右侍中.[140] 이성림은 염흥방의 이부형(異父兄)이다.[141] 중시조 18세.[142] 民部尙書. 국초에 민관(民官)이었던 것을 995년(성종 14) 상서호부(尙書戶部)로 고치고, 문종 때 관제를 정하여 관원으로 판사, 상서, 지부사, 시랑, 낭중, 원외랑을 두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서호부를 판도사(版圖司)로 고치고, 관원으로 판서, 총랑, 정랑, 좌랑을 두었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다시 민조(民曹)로 고쳤으나,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다시 민부(民部)로 고치면서 삼사(三司)·군기(軍器)·도염원(都鹽院)을 병합시켰다. 관원으로는 전서, 의랑, 직랑, 산랑을 두었다. 이후 판도사(版圖司)로 고쳤고, 1356년(공민왕 5) 다시 호부(戶部)로 고치고, 관원으로 상서, 시랑, 낭중, 원외랑을 두었다. 1362년(공민왕 11) 다시 판도사(版圖司)로 고치고, 판서, 총랑, 정랑, 좌랑을 두었다. 1369년(공민왕 18) 다시 민부(民部)로 고치고, 상서, 의랑, 직랑, 산랑을 두었다. 1372년(공민왕 21) 다시 판도사(版圖司)로 고치고, 다시 판서, 총랑, 정랑, 좌랑을 두었다. 1389년(공양왕 1) 호조(戶曹)로 고쳤다.# 이복득(李福得)에 대한 기록은 족보에만 있다. 그가 민부상서(民部尙書)를 지낸 것이 맞다면 1369년~1372년 사이에 역임한 것이 된다.[143] 중시조 19세.[144] 判書. 족보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145] 중시조 17세. 익재공파(益齋公派) 파조. 고려사 권110, 열전23 이제현 참조.[B] [147] 최종고시인 예부시(禮部試)를 의미한다. 동당시(東堂試)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합격하면 바로 관리가 된다.[148] 원나라 통사사인(通事舍人).[C] 攝政丞權斷征東省事. 섭정승 겸 권단정동성사. 섭정승(攝政丞)은 고려의 수상(首相)격인 도첨의정승을 대리하는 직책이다.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는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던 정동행성의 업무를 임시로 총괄하는 직책이다. 명목상 고려왕이 정동행성의 승상(丞相)을 겸임했었다. 요컨대 1351년 10월 6일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고려왕으로 임명되자 고려로 귀국할 때까지의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제현을 정승 대리로 삼아 임시로 정동행성의 업무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왕권(王權)을 대행하게 한 것이다. 동년 11월 왕보다 먼저 귀국한 찬성사 조일신(趙日新)이 가져온 비목(批目)에 의하여 이제현은 정식으로 도첨의정승에 오르게 되고, 동년 12월 귀국한 공민왕은 정식으로 고려 국왕으로 즉위하였다.[D] 右政丞. 2차례 우정승을 역임하였다. 당시에는 상우(尙右) 원칙을 취해 우정승이 좌정승보다 높은 고려 최고 관직이었다. 참고로 이후 관제 개편으로 최고 관직으로 문하시중을 두었고, 문하시중은 다시 문하좌시중과 문하우시중으로 개편되는데 이때는 상좌(尙左) 원칙을 취해 문하좌시중이 문하우시중보다 높은 최고 관직이었다.[D] [152] 門下侍中.[153] 益齋亂藁. 보물 제1892호.[154] 櫟翁稗說. 보물 제1893호.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과 아울러 고려시대의 3대 비평문학서로 꼽힌다.[155] 本朝編年綱目.[156] 중시조 18세. 이제현(李齊賢)의 숙부 이세기(李世基)의 손자. 즉 이제현의 5촌 조카이다. 공민왕 때 호부상서, 동북면병마사 등을 역임.[157] 이제현이 태조(太祖)부터 숙종(肅宗)까지, 백문보와 이달충이 예종(睿宗) 이하를 맡기로 하였는데, 백문보는 겨우 예종(睿宗)과 인종(仁宗) 2대의 초고를 작성하였고 이달충은 아직 원고 작성에 착수조차 못하였는데, 남쪽으로 피난할 때 그 원고들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고 오직 이제현이 편찬한 태조기년(太祖紀年)이 남아 있다.[158] 墓誌銘.[159] 도덕지수(道德之首) : 도덕의 으뜸이요, 문장지종(文章之宗) : 문장의 모범이라.[160] 중시조 18세.[161] 奉常大夫. 고려시대 정4품 문관의 품계.[162] 宗簿寺副令. 종부시(宗簿寺)의 차관직인 부령(副令). 종부시는 고려 후기에 왕실의 족보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부령은 정4품~종4품 문관의 품계이다.[163] 門下侍郞.[164] 중시조 19세.[165] 右司諫.[166] 按廉.[167] 判安東府使.[168] 司憲府 大司憲.[169] 密直副使. 밀직사(密直司)의 부사(副使)로 정3품 관직.[170] 政堂文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2품 재상직(宰相職).[171] 중시조 18세.[172] 典理摠郞. 전리사(典理司)의 차관직으로 정4품 관직. 전리사는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간섭으로 상서성(尙書省)의 이부(吏部)와 예부(禮部)를 병합하여 설치한 관서이다. 1298년(충선왕 1) 전조(銓曹)와 의조(儀曹)로 분리되었고, 공민왕과 공양왕 때 다시 전리사라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문관의 선임(選任)·공훈(功勳)·예의(禮儀)·제향(祭享)·조회(朝會)·교빙(交聘)·학교(學校)·과거(科擧)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173] 족보에는 지원(至元, 원나라 제11대 황제 혜종(惠宗)의 3번째 연호.) 경오(庚午)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순(至順, 원나라 제8대 황제 문종(文宗)의 연호)의 오기로 보인다.[174] 중시조 19세.[175] 判書. 이덕림(李德林)은 고려에서 판서를 지냈다. 원래 고려는 2성6부제(二省六部制)를 채택하여 6부의 수장으로 상서(尙書)를 두었는데, 원간섭기에 2성6부제가 1부4사제(一府四司制)로 격하되면서 4사의 수장으로 판서(判書)를 두게 된다. 이것이 조선으로 이어져 1부6조제(一府六曹制)하의 6조의 수장인 판서(判書)가 된다.[176] 중시조 19세.[177] 軍簿判書.[178] 吏部判書.[179] 同知密直司事.[180] 중시조 18세. 부인 청주 한씨는 호부상서 청성군(淸城君) 한공의(韓公義, 1307~1365)의 차녀이자 도첨의중찬, 우정승 등을 지낸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악(韓渥, 1274~1342)의 손녀이다.[181] 奉翊大夫. 고려시대 정2품 문관의 품계.[182] 開城府尹. 개성부(開城府)의 윤(尹)으로 종2품 관직.[183] 중시조 18세.[184] 중시조 17세.[185] 중시조 16세.[186] 密直副使. 밀직사(密直司)의 부사(副使)로 정3품 관직.[187] 寶文閣大提學.[188] 檢校政丞.[189] 중시조 17세.[B] [191] 右司輔.[192] 僉議評理商議.[193] 同知貢擧.[194] 書筵官.[195] 判三司事. 삼사(三司)의 수장인 판사(判事)로 종1품 관직.[196] 判密直司事. 밀직사(密直司)의 수장인 판사(判事)로 종2품 관직.[197] 典理正郞.[198] 政堂文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2품 재상직(宰相職).[199] 僉議叅理. 첨의부(僉議府)의 참리(叅理)로 종2품 재상직(宰相職)이다. 叅은 參의 속자(俗字)이며 고려사, 고려사절요에서는 叅으로 쓰고 있다. 족보에는 중서문하성의 정2품 재상직인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관제 격하 전의 명칭으로 원 간섭기였던 당시에는 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격하되어 있었다. 첨의참리가 삼재(三宰)라면 첨의찬성사는 아상(亞相)으로 한 단계 높은 재상직이다.[200] 족보에는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으로 기록되어 있다.[201] 藝門館大提學.[202] 이천의 어머니가 이천 서씨(利川 徐氏) 예빈윤(禮賓尹; 예빈시의 종3품 윤) 서찬(徐瓚)의 딸인데, 이천 서씨 족보에도 서찬의 사위 이세기(李世基)를 대제학이라고 적고 있고 외손자 이천(李蒨)을 대제학, 월성군으로 적고 있다.[203] 중시조 17세.[204] 중시조 17세.[205] 尙書. 족보에는 기록이 있으나,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206] 중시조 17세.[207] 중시조 15세. 이득견(李得堅)의 3남으로 문하평리 열헌공(悅軒公) 이핵(李翮)의 동생이다.[208] 正順大夫. 고려시대 1308년에 시행하여 1356년에 폐지된 정3품 상계 문관의 품계이다.[209] 判典客寺事. 전객시(典客寺)의 판사(判事). 전객시는 예빈성(禮賓省)이라고도 하며 고려시대 외국의 빈객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하던 관청이다. 전객시의 장(長)은 정3품 판사로 하였다.[210] 중시조 16세.[211] 奉翊大夫. 종2품 문관의 품계.[212] 禮儀判書.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213] 중시조 19세. 계성군(鷄城君) 이래(李來)의 아버지. 고향인 공주(公州) 석탄(石灘)에 은거하여 석탄공(石灘公)이라 불리며, 경주 이씨 석탄공파 파조이다. 고려사 권112, 열전 25 이존오 참조.[214] 당시 신돈이 국권을 잡아 참람한 짓을 하여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26세의 청년 이존오가 격분하여, "요망한 물건이 나라를 그르치게 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며 친척인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정추(鄭樞)와 함께 상소를 올렸다. "신 등이 삼가 3월 18일 전내(殿內)에서 베푼 문수회에 참석하였는데 영도첨의(領都僉議) 신돈이 재신의 반열에 앉지 않고 감히 전하와 나란히 앉아 사이가 몇 자 떨어지지 아니하니 나라사람이 놀래어 물 끓 듯하였습니다. … 그윽이 보건대 신돈이 지나치게 임금의 은총을 입어 나라 정사를 전단하여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니 신돈을 총애하고 있던 임금이 반도 못 읽어보고 크게 노하여 불태워버리라 명령하고 정추와 이존오를 불러 꾸짖었다. 이때 신돈이 임금과 더불어 평상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이존오가 "늙은 중이 어찌 이와 같이 무례한가?"하고 소리쳐 신돈으로 하여금 황망히 평상에서 내리게 하였다. 임금도 "이존오의 성난 눈이 두려웠다."고 고백할 정도의 서슬이었다.[215] 成均大司成. 성균관의 대사성.[216] '간신(諫臣) 이존오(李存吾)의 아들 이안국(李安國)'이라는 뜻이다. 간신(諫臣)은 간관(諫官)의 별칭이다. 간신(奸臣)이 아니다. 안국(安國)은 이래의 어렸을 때의 자(字)이다. 고려사 권112, 열전 25 이존오 참조.[217] 【시조】구롬이 무심(無心)탄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 / 중천(中天)에 떠 이셔 임의(任意)로 단이면셔 / 구타야 광명(光明)한 날빗찰 따라가며 덥나니 ※아래아는 'ㅏ'로 대체 표기함. 본문 중 '떠'의 ㄸ은 본래 ㅅ과 ㄷ의 합용병서임.【어휘풀이】*구롬 : 구름. 여기서는 간신(奸臣)이나 소인(小人)을 빗대어 이른 말. 신돈(辛旽)을 가리킴. *무심(無心)탄 : 아무런 마음의 움직임도 없다는. 여기서는 ‘사심(邪心)이나 나쁜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의 뜻. *허랑(虛浪)하다 : 허황하고 믿기 어렵다. 언행이 허황하고 착실하지 못하다. *중천(中天) : 하늘의 한복판. 여기서는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지닌 높은 권세(權勢)’를 이른 말. *떠 이셔 : 떠 있어. (권세 등을) 누리고 있어. *임의(任意)로 : 마음대로. ‘신돈’의 횡포를 말함. *날빗찰 : 햇빛을. 여기서는 ‘임금의 총명’을 비유한 말. *덥나니 : 덮느냐. 가리느냐. ‘나니’는 의문형 종결어미.【해설】고려 공민왕 때 임금의 총애를 믿고 국정을 어지럽히던 요승(妖僧) 신돈(辛旽)의 횡포와 그를 방치하는 공민왕을 안타깝게 여기던 작가가 풍자적 기법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자신의 충정을 표현한 우국시(憂國詩)이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있다.[A] [219] 족보에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또는 삼중대광광록(三重大匡光祿)·월성군(月城君) 또는 광정대부(匡靖大夫)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라고 되어 있다. 금자광록대부 및 광정대부는 문관 정2품 품계이고, 삼중대광은 문관 정1품~종1품 품계이다. 상서우복야는 상서성의 실질적 장관으로 정2품 관직이다.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220] 중시조 22세.중시조 18세.[221] 密直副使. 밀직사(密直司)의 부사(副使)로 정3품 관직이다. 밀직사는 원 간섭기에 관제를 격하하면서 추밀원이 바뀐 것으로, 왕명의 출납, 궁궐 경호 및 군사 기밀에 관한 일을 맡았던 관청이다.[222] 시종공신(侍從功臣)·호종공신(扈從功臣)·친종행리공신(親從行李功臣)이라고도 한다. 정확한 호칭은 전하지 않는다.[223] 첨의부의 참리. 종2품 재상직(宰相職). 참지정사(叅知政事), 평리(評理), 참지문하부사(叅知門下府事), 문하평리(門下評理)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叅은 參의 속자(俗字)이며 고려사, 고려사절요에서는 叅으로 쓰고 있다.[224] 중시조 23세.중시조 19세.[225] 判司僕寺事. 사복시(司僕寺)의 판사(判事). 정3품 관직. 고려 후기~조선시대 여마(輿馬)와 구목(廐牧) 및 목장(牧場)을 중심으로 마정(馬政)을 총괄한, 병조 직속의 관청이다.[226] 중시조 24세.중시조 20세.[227] 판도사(版圖司)의 총랑(摠郞). 총랑은 고려시대 전리사(典理司)·군부사(軍簿司)·판도사(版圖司)·전법사(典法司)의 정4품 관직이다.[E] 족보에는 동지사(同知事) 또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정2품)라고 되어 있다. 실록에는 기록이 없고, 순흥 안씨 족보에서는 대호군(大護軍, 오위(五衛)의 종3품 관직)을 지냈다고 한다. 동지사(同知事)는 설치 관서에 따라 동지원사(同知院事), 동지사사(同知司事), 동지관사(同知館事) 등으로 불렸는데, 관서마다 품계가 달라 자정원은 정2품이었고, 중추원이나 추밀원·밀직사·춘추관은 종2품이었다. 이후 공민왕 때 내시부를 신설하면서 동지사를 두었는데 여기서는 정4품이었다. 여러가지 정황상 대호군과 비슷한 품계의 동지사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관청별, 시기별로 동지사의 품계가 달랐는데 이를 정2품 관직으로 오해하여 이조판서로까지 와전된 듯하다.[229] 계림(鷄林)은 현재의 경주 지역이다. 족보에는 기록이 없다.[230] 護軍.[231] 知讞部事. 언부(讞部)의 지사(知事). 언부(讞部)는 이전의 형조(刑曹)를 고진 것이다.[232] 判中門事. 중문(中門)의 최고 관직인 판사(判事)로 품계는 정3품. 중문(中門)은 이전의 통례문(通禮門)을 충선왕 때 고친 것으로 후에 다시 통례문으로 고쳤다.[233] 계림부(鷄林府)는 현재의 경주 지역이다. 족보에는 기록이 없다.[234] 野隱逸稿.[235] 족보에는 기록이 없다.[236] 密直副使.[237] 聖節使.[238] 同知密直司事. 밀직사(密直司)의 동지사(同知事)로 종2품 관직.[239] 尙書右僕射.[240] 楊廣道都巡問兼兵馬使.[241] 1363년 3월 책록. 흥왕사의 변을 토벌한 공으로 인한 것이다.[242] 1363년 3월 책록.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인한 것이다.[243] 1363년 11월 책록. 홍건적의 1차 칩입 때 적을 격퇴한 공으로 인한 것이다.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즉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다.[244] 三司右使. 삼사(三司)의 우사(右使)로 정3품 관직.[245] 贊成事. 문하부(또는 첨의부, 도첨의사사)의 찬성사로 종2품 관직.[246] 大尉監大卿.[247] 중시조 17세. 문하평리(門下平理) 증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열헌공(悅軒公) 이핵(李翮)의 3남 이세기(李世基)의 장남이고, 문하시중(門下侍中)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사촌이다.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역임하였다.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책록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248] 중시조 18세.[249] 中書門下判兵部事.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재신(宰臣)이 겸직하는 판병부사(判兵部事). 판병부사는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의 준말로 상서병부의 최고 관직인 판사이다.[250] 중시조 20세.[251] 左常侍.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3품 관직. 시기별로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또는 좌상시(左常侍)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좌산기상시일 때도 보통 약칭으로 좌상시라고 불렀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에는 문하부(門下府)의 정3품 관직으로 두었고, 1401년(태종 1) 낭사(郞舍)가 사간원으로 독립할 때 폐지되었다.[252] 刑曹典書. 족보에는 조선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좌상시(左常侍), 형부전서(刑部典書)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좌상시(左常侍)의 경우 고려말인 1390년(공양왕 2)에 역임한 것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형부전서(刑部典書)의 경우 시기상 조선조에서 역임한 관직으로 보이는데 형조전서(刑曹典書)의 오기로 보이고,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이 없다.[253] 중시조 18세.[254] 典理判書. 전리사(典理司)의 최고 관직인 판서(判書). 전리사는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간섭으로 상서성(尙書省)의 이부(吏部)와 예부(禮部)를 병합하여 설치한 관서이다. 1298년(충선왕 1) 전조(銓曹)와 의조(儀曹)로 분리되었고, 공민왕과 공양왕 때 다시 전리사라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문관의 선임·공훈·예의·제향·조회·교빙·학교·과거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255] 중시조 18세.[B] [257] 典理判書. 전리사(典理司)의 최고 관직인 판서(判書). 전리사는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간섭으로 상서성(尙書省)의 이부(吏部)와 예부(禮部)를 병합하여 설치한 관서이다. 1298년(충선왕 1) 전조(銓曹)와 의조(儀曹)로 분리되었고, 공민왕과 공양왕 때 다시 전리사라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문관의 선임(選任)·공훈(功勳)·예의(禮儀)·제향(祭享)·조회(朝會)·교빙(交聘)·학교(學校)·과거(科擧)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258] 東北面兵馬使. 고려 때 동·북 양계(兩界)의 군권을 전담하던 지휘관으로서 품계는 정3품이며, 989년(성종 8년)에 처음 설치하였다. 옥대(玉帶)와 자금(紫襟)을 달며 왕이 친히 부월(斧鉞, 도끼)을 주어 진(鎭)에 부임했다. 문하시중·중서령·상서령 등으로써 판병마사(判兵馬使)를 삼아 서울에 남아서 동·북면의 병마사를 영도케 했다. 1042년(정종 8년)에 병마사 제도를 정비하면서 동북면(東北面), 서북면(西北面)에 병마사(兵馬使, 3품), 지병마사(知兵馬事, 3품), 2명의 병마부사(兵馬副使, 4품), 4명의 병마녹사(兵馬錄事 , 5~6품), 3명의 병마판관(兵馬判官, 5~6품)을 두게 했다.[259] 都巡問使. 원래 군사관계의 임무를 띠고 재추(宰樞: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재신(宰臣)과 중추원(中樞院)의 추밀(樞密))로서 임명되어 지방에 파견되던 임시관직이었으나, 양계(兩界)에 있어서는 공민왕 후년까지 그 지방장관의 임무를 맡고 있던 존무사(存撫使)의 민사적 업무까지 흡수하여 군사, 민사를 모두 관장하는 지방장관이 되었다. 서북면의 도순무사는 평양윤(平壤尹)을 겸하고 동북면의 도순무사는 화령윤(和寧尹)은 겸하였다. 1389년(공양왕 1) 도절제사(都節制使)로 고쳐졌다.[260] 都巡問使.[261] 이자춘. 이성계의 부친.[262] 고려사 권112, 열전25 이달충, 태조실록 1권, 총서 32번째 기사. 용비어천가 제28장.[263] 戶部尙書.[264] 密直提學. 공민왕이 이달충을 이름난 선비라고 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발탁한 것이었다.[265] 鷄林府尹.[266] 중시조 19세. 이달충의 아들들의 이름에 사용된 立(설 립)은 태조의 명에 의한 것이다. 동북면에서 태조의 비범함을 알아봤던 이달충의 옛일을 생각한 것이었다.[267] 중시조 20세. 조선왕조실록에는 李升商으로 되어 있으나 족보에는 李升啇으로 되어 있다. 족보를 들어 적(啇)이 옳다는 주장도 있으나, 啇을 상(商)의 속자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같은 항렬의 인물들 중 상(商)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B] [269] 중시조 19세. 이달충의 아들들의 이름에 사용된 立(설 립)은 태조의 명에 의한 것이다. 동북면에서 태조의 비범함을 알아봤던 이달충의 옛일을 생각한 것이었다.[270] 중시조 20세. 조선왕조실록에는 李興商으로 되어 있으나 족보에는 李興啇으로 되어 있다. 족보를 들어 적(啇)이 옳다는 주장도 있으나, 啇을 상(商)의 속자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같은 항렬의 인물들 중 상(商)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271] 義禁府鎭撫. 의금부의 정3품 낭관직.[272] 중시조 18세.[273] 密直提學. 밀직사(密直司)의 제학(提學)으로 정3품 관직.[274] 判恭安府事. 공안부(恭安府)의 판사(判事). 공안부는 조선 초기 상왕이 된 정종을 위하여 설치한 관청이다. 최고 관직은 판사로 하였다.[275] 檢校左政丞. 검교는 임시 증원직 또는 명예직을 가리킨다. 좌정승은 좌의정과 비슷하다.[276] 3남 이휴(李携).[277] 태조실록 1권, 총서 130번째 기사.[278] 중시조 19세.[279] 검교는 명예직을 말한다. 판한성부사는 한성부판윤이라고도 하며 오늘날의 서울시장에 해당한다.[280] 중시조 19세.[281] 태종실록, 세종실록 등 대부분의 기록에는 계성군(鷄城君)이라고 하고 있다. 다만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 2월 6일 임자 3번째 기사에서는 계림군(鷄林君)이라고 적고 있다. 계성이나 계림이나 경주를 가리키는 옛말이나, 단순 오기인지 명칭이 바뀐 것인지 확실치 않다.[282] 중시조 20세.[283] 이방간의 처인 삼한국대부인 여흥 민씨와 이래의 어머니는 증 문하찬성사 민선(閔璿)의 딸들로서 자매지간이다.[284] 知議政府事. 의정부의 정2품 지사(知事).[285] 判敬承府事. 경승부(敬承府)의 종1품 판사(判事). 경승부는 1402년(태종 2) 원자 제(褆)를 위하여 성균관의 동북 모퉁이에 별도로 설치한 교육기관이다. 즉 이래는 양녕대군의 스승이었다.[286] 중시조 17세.[287] 중시조 18세.[288] 중시조 19세.[289] 成均館 大司成. 족보에 관직명만 기록되어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조선조에 대사성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는 기록이 없다.[290] 중시조 20세.[291] 兵曹判書. 족보에 관직명만 기록되어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조선조에 판서를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는 기록이 없다.[292] 중시조 21세. 소경공파(少卿公派)의 파조.[293] 太常少卿. 태상시(太常寺)의 소경(小卿). 태상시(太常寺)는 고려시대 국가의 제례를 주관하고 왕의 시호와 묘호 등의 제정을 담당하던 관청이다.문종 때 태상부(太常府), 1298년(충렬왕 24) 봉상시(奉常寺), 1308년(충렬왕 34) 전의시(典儀寺), 1356년(공민왕 5) 태상시, 1362년 전의시, 1369년(공민왕 18) 태상시, 1372년(공민왕 21) 전의시로 바뀌었다. 부친 이선(李瑄)이 조선조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고 하고, 이지회(李之會)가 조선 세종조에 치사(致仕)했다고 하므로, 여기서의 태상소경은 고려조의 관직이 아니라고 보인다. 그래서 태상소경을 예조참판(禮曹參判)의 이칭으로 보기도 한다.[294] 致仕.[295] 중시조 21세. 판윤공파(判尹公派)의 파조. 출생년은 1356년(공민왕 5) 이전으로 추정된다.[296] 嘉善大夫. 종2품 하계 문관의 품계.[297] 檢校漢城尹. '검교'는 명예직을 의미한다. '한성윤'은 한성부의 윤으로 현재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한다. 족보와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경주이씨 양월문중에서 소장 중이던 이지대 왕지(李之帶 王旨)를 통해서 1416년(태종 16) 6월 2일 이지대가 검교한성윤에 임명된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러한 내용이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수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당시 가뭄으로 인한 민심 대책으로 134명의 검교한성윤이 임명되었다.[298] 정식 명칭은 경주이씨 양월문중 고문서 및 향안 - 이지대 왕지 (慶州李氏 楊月門中 古文書 및 鄕案 - 李之帶 王旨)이다.[299] 檢校漢城尹. '검교'는 명예직을 의미한다. '한성윤'은 한성부의 윤으로 현재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한다.[A] [E] [302] 중시조 24세.중시조 20세.[303] 중시조 25세.중시조 21세.[304] 중시조 26세.중시조 22세.[305] 捕盜大將. 포도청의 대장. 현재의 경찰청장에 해당한다.[306] 중시조 27세.중시조 23세.[307]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실록에는 기록이 없다.[308] 중시조 25세.중시조 21세.[309] 군자감의 으뜸벼슬인 정3품 판사.#[310]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실록에는 기록이 없다.[311] 중시조 25세.중시조 21세.[312] 조선시대의 최고관직으로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3인을 가리킨다. 3상(三相), 3공(三公), 또는 3정승(三政丞)이라고도 한다.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하였다.[313] 문형(文衡)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의 최고 책임자로 정2품직이며 전임직(專任職)이 아니라 타관이 겸임하는 겸직이다. 관직은 둘이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이 두 관서(官署)의 대제학(大提學)을 겸하는 것이 상례였으며, 국가의 모든 문한(文翰)을 장악하여 사령(辭令), 과거시험(科擧試驗) 등을 통괄하고 학문과 관계되는 제반 일을 관장하였다. 대제학(大提學)은 정2품의 관계이지만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고 가문에도 하자가 없는 석학(碩學), 석유(碩儒)만이 오를 수 있는 지위로서 정승 3명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학자와 인격자로서의 최고 지위라 할 수 있어 본인은 물론 일문의 큰 명예로 여겼다. 대제학 후보 선정은 전임 대제학이 후보자를 천거하면 이를 3정승, 좌우찬성, 좌우참찬, 육조판서가 모여 다수결로 정하게 된다. 대제학의 임기는 본인 의사에 따라 결정하며 종신직이었다. 이와 같은 위상으로 볼 때 관직 중에서 최고의 꽃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뜻으로 문형(文衡)이라고 평가되기도 한 대제학은 학문의 권위가 높다고만 해서 오를 수 있는 관직이 아니었다. 원칙적으로 문과의 대과 급제자이면서도 임금의 특명을 받아 문신들이 공부하던 호당(湖堂) 출신만 가능하였고, 또한 문형(文衡)의 별칭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는데, 반드시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과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및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등 나라 전체의 학문 관련 3가지 최고 직위를 모두 겸직하는 경우에 한하였다.[314] 중시조 18세.[315] 判書. 이덕림(李德林)은 고려에서 판서를 지냈다. 원래 고려는 2성6부제(二省六部制)를 채택하여 6부의 수장으로 상서(尙書)를 두었는데, 원간섭기에 2성6부제가 1부4사제(一府四司制)로 격하되면서 4사의 수장으로 판서(判書)를 두게 된다. 이것이 조선으로 이어져 1부6조제(一府六曹制)하의 6조의 수장인 판서(判書)가 된다.[316] 중시조 19세.[317] 중시조 20세.[318] 중시조 21세. 이신의 차남. 천안군수.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319] 중시조 22세.[320] 중시조 22세.[321] 중시조 23세.[322] 맹꽁이 맹.[323] 고기 어.[324] 1남 鰲(자라 오), 2남 龜(거북 구), 3남 黿(큰자라 원), 4남 鼉(자라 타), 5남 鱉(자라 별), 6남 鼊(거북 벽), 7남 鯨(고래 경), 8남 鯤(곤어 곤). 중시조 24세.[325] 한나라 학자 순숙(荀淑)이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학문에 뛰어나서 출세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순씨 팔룡’이라고 불렀다.[326] 성호전집(星湖全集) 권8.[327] 八(여덟 팔), 鱉(자라 별). 8마리 자라의 집.[328] 중시조 24세.[329] 시호를 심의하는 일을 맡았다.[330] 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331] 이름 원(黿)에 들어있는 元(으뜸 원)이 이를 이미 암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332] 중시조 28세. 첫째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서 1남 3녀를 두었으나 일찍 사별하였고 둘째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와 재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인 현종 때 이조판서 이경휘(李慶徽)와 현종 때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은 신씨 소생이다. 부친 오촌(梧村) 이대건(李大建)은 익재공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오촌공파(梧村公派)의 파조로 경주이씨화수회(慶州李氏花樹會)가 오촌공파 문중이 세거하고 있는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에서 창립된 바 있다.[333] 1594년(선조 27) 정철(鄭澈)의 탄핵을 반대하는 등 서인에 속했고, 이경휘, 이경억 등 그 후손들도 대체로 서인에 속했다.[334] 좌랑(佐郞)은 6조의 정6품 관직, 정랑(正郞)은 6조의 정5품 관직이다. 좌랑은 상급자인 정랑과 한 조가 되어 행정실무를 총괄했는데, 6조의 권한이 강화되고 국정의 중심기구가 된 조선시대에는 대표적인 청요직(淸要職)이었다. 특히 이조·예조·병조의 정랑·좌랑은 중시되어 문과 출신의 문관으로만 임명하였다. 각 조의 정랑·좌랑을 아울러 낭관(郎官)·낭청(郎廳) 또는 조랑(曹郎)이라고도 하였다. 이조와 병조의 정랑·좌랑은 인사행정을 담당했기 때문에 전랑(銓郎)이라고 하였다.[335] 6진 주변에 살던 오랑캐.[336] 중시조 29세. 부인 해평 윤씨에게서 6남을 두었다.[337] 중시조 30세.[338] 중시조 29세. 부인 해평 윤씨에게서 3남 2녀를 두었다.[339] 중시조 30세.[340] 중시조 30세.[341]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임명된 해는 분명치 않다. 1690년(숙종 16)과 1692년(숙종 18) 사이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342] 의금부의 수장인 판사로 종1품 관직이다.[343] 조선후기 오군영(五軍營)의 하나인 수어청(守禦廳)의 최고 관직.[344] 중시조 30세.[345] 중시조 34세.[346] 判敦寧府事. 돈녕부(敦寧府)의 판사(判事). 돈녕부는 태종 때 설치된 왕과 왕비의 친인척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정1품 영사(領事)가 수장이었고, 종1품 판사(判事)가 차상위였다.[347] 중시조 36세.[348] 중시조 19세.[349] 중시조 21세.[350] 중시조 24세.[351] 知中樞府事. 중추부의 지사. 중추부의 정2품 관직이다. 주로 판서급 원로대신들이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영중추부사, 판중추부사보다 낮고, 동지중추부사, 첨지중추부사보다는 높은 자리이다. 주로 6조 판서, 대제학, 한성부판윤, 지의금부사, 도총관 등을 지낸 사람이 이 관직에 임명되었다.[352] 知義禁府事. 의금부의 지사. 의금부의 정2품 관직이다. 판의금부사보다는 낮고, 동지의금부사보다는 높은 자리이다. 주로 판서급 인사들이 지의금부사를 많이 겸임했다. 그리고 또한 우참찬이나 좌참찬이 지의금부사를 많이 겸임하기도 했다.[353] 중시조 17세. 문하평리(門下平理) 증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열헌공(悅軒公) 이핵(李翮)의 3남 이세기(李世基)의 장남이고, 문하시중(門下侍中)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4촌이다.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역임하였다.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책록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354] 중시조 18세.[355] 刑部典書.[356] 중시조 20세.[357] 중시조 25세.[358] 八(여덟 팔), 정(조정 정). 아들 8명의 이름에 모두 '정(廷)'이 들어갔다.[359] 중시조 26세.[360] 중시조 29세.[361] 訓局千摠. 훈국(訓局)의 천총(千摠). 훈국은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별칭이다. 천총은 정3품의 고급지휘관이다.[362] 嘉善大夫. 종2품 하계 문관의 품계.[363]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관직.[364] 金海府使.[365] 중시조 31세.[366] 현재의 전라도. 전주와 광주에서 따온 말이다.[367] 知敦寧府事. 돈녕부(敦寧府)의 지사(知事). 정2품 관직이다.[368] 중시조 26세.[369] 同知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동지사(同知事)로 종2품 관직.[370] 호남병마절도사를 지냈다.[371] 중시조 31세.[372] 同知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동지사(同知事)로 종2품 관직.[373] 중시조 32세.[374] 중시조 33세.[375] 중시조 34세.[376] 摠戎使. 총융청(摠戎廳)의 주장(主將)으로 정2품 관직.[377] 御營大將. 조선후기 오군영(五軍營)의 하나로 인조대에 설치한 어영청(御營廳)의 대장. 훈련도감(訓鍊都監)과 금위영(禁衛營)의 대장과 같이 삼군문(三軍門)의 대장으로 도성의 방어는 물론 궁궐의 숙위까지 담당하던 수도방위의 책임자였다. 또한 국왕의 행행을 수행하던 수가대장(隨駕大將)의 임무도 맡았다. 따라서 어영대장은 왕권을 보위하는 무력을 담당하는 정치적인 지위였다.[378] 중시조 35세. 초명은 이학주(李鶴周)이고, 생부는 이현대(李顯大)이다.[379] 左邊捕盜大將. 포도청(捕盜廳)의 대장으로 종2품 관직이다. 오늘날의 경찰청장에 해당한다. 1481년(성종 12) 포도청을 좌변(左邊)·우변(右邊)으로 나누어, 서울의 동부·남부·중부와 경기좌도는 좌변이 맡고, 서울의 서부·북부와 경기우도는 우변이 맡았다.[380] 禁軍別將. 금군청(禁軍廳)의 종2품 관직이다. 1755년(영조 31) 금군청은 용호영(龍虎營)으로 개칭되었다.[381] 중시조 33세.[382] 세례자 요한 이벽, 베드로 이승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일신, 암브로시오 권철신, 복자 아우구스티노 정약종.[383] 중시조 28세.[384] 서울 수표교 근처에 있는 이벽의 집터는 한국에서 최초로 세례가 이루어진 곳이 되었다.[385] 중시조 33세.[386] 중시조 18세.[387] 중시조 23세.[388] 중시조 24세.[389] 중시조 28세.[390] 조선시대 강원도(강릉+원주)의 명칭은 원양도(원주+양양), 강춘도(강릉+춘천), 원춘도(원주+춘천) 등으로 10여 차례 변경과 복원이 반복되었다. 어느 지역에서 중죄인이 발생할 경우 그 지역도 강등되어 도의 이름에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391] 중시조 29세.[392] 중시조 30세.[393] 경상좌수영의 지휘관인 수군절도사. 정3품 당상관.[394] 중시조 32세.[395] 중시조 24세.[396] 會寧府使.[397] 四道副元帥.[398] 南漢守禦使. 조선 인조 때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이를 수어하기 위해 설치한 수어청(守禦廳)의 종2품 장관직.[399] 중시조 25세. 초명은 이종(李淙)이었으나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른 후 인조의 휘인 이종(李倧)을 기휘하여 이호(李滈)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효종(孝宗)이 1645년(인조 23)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왕세자의 휘인 이호(李淏)를 기휘하여 다시 이정(李淀)으로 개명하였다.[400] 竹山府使.[401] 大邱府使.[402] 尙州牧使.[403] 掌隷院判決事. 장례원(掌隷院)의 으뜸 벼슬인 판결사(判決事)로서 정삼품(正三品) 문관직.[404] 嘉善大夫. 종2품하의 문관직 품계.[405] 左參贊.왕실족보에 나온다.[406] 중시조 26세.[407] 御營大將. 조선후기 오군영(五軍營)의 하나로 인조대에 설치한 어영청(御營廳)의 대장. 훈련도감(訓鍊都監)과 금위영(禁衛營)의 대장과 같이 삼군문(三軍門)의 대장으로 도성의 방어는 물론 궁궐의 숙위까지 담당하던 수도방위의 책임자였다. 또한 국왕의 행행을 수행하던 수가대장(隨駕大將)의 임무도 맡았다. 따라서 어영대장은 왕권을 보위하는 무력을 담당하는 정치적인 지위였다.[408] 摠戎使. 총융청(摠戎廳)의 주장(主將)으로 정2품 관직.[409] 漢城府左尹. 한성부(漢城府)의 종2품 관직.[410] 중시조 25세. 국당공파(菊堂公派) 파조 이천(李蒨)의 4남 검교좌정승 이성중(李誠中)의 7대손. 호는 매죽헌(梅竹軒).[411] 조영무(1338~1414, 한양 조씨, 우의정), 최윤덕(1376~1445, 통천 최씨, 좌의정), 홍달손(1415~1472, 남양 홍씨(당), 좌의정), 박원종(1467~1510, 순천 박씨, 영의정), 신경진(1575~1643, 평산 신씨, 영의정), 구인후(1578~1658, 능성 구씨, 좌의정), 이완(1602~1674, 경주 이씨, 우의정).[412] 捕盜大將. 포도청(捕盜廳)의 대장으로 종2품 관직이다. 오늘날의 경찰청장에 해당한다.[413] 御營大將. 조선후기 오군영(五軍營)의 하나로 인조대에 설치한 어영청(御營廳)의 대장. 훈련도감(訓鍊都監)과 금위영(禁衛營)의 대장과 같이 삼군문(三軍門)의 대장으로 도성의 방어는 물론 궁궐의 숙위까지 담당하던 수도방위의 책임자였다. 또한 국왕의 행행을 수행하던 수가대장(隨駕大將)의 임무도 맡았다. 따라서 어영대장은 왕권을 보위하는 무력을 담당하는 정치적인 지위였다.[414] 訓鍊大將. 조선후기 오군영(五軍營)의 하나로 임진왜란 중에 설립한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대장. 훈련도감은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한 취지에 따라 조총과 같은 개인화기를 다루는 포수의 훈련과 양성을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훈련도감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설립 초기 군사 양성의 목적에서 궁궐 방어부터 국왕의 시위, 도성 방어에 이르는 수도방어체제의 핵심군으로 자리 잡게 된다. 숙종대에는 도성 방어 체제를 갖추면서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과 함께 삼군문(三軍門)이라고 불렸으며, 국왕의 행행 시 도성의 방어를 책임지면 유도대장(留都大將), 행행의 시위를 책임지면 수가대장(隨駕大將)의 직책을 담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후기로 갈수록 훈련대장의 지위도 단순한 군영의 지휘관이 아니라 왕권과 신권 사이의 균형을 유지 내지 견제할 수 있는 정치적인 위치로 격상되었다.[415] 1653년(효종 4) 10월 20일부터 1669년(현종 10) 5월 13일까지 효종~현종 양조에 걸쳐 약 15년 7개월 동안 훈련도감 대장, 즉 훈련대장을 역임했다. 효종, 현종의 신임이 두터워 중간에 면직된 적이 없기 때문에 통산 재임기간과 연속 재임기간이 동일하다. 통산 재임기간은 영조조의 훈련대장 김성응(金聖應, 1699~1764)(약 20년 7개월~21년 1개월)에 이은 역대 2위이고, 연속 재임기간은 역대 1위이다.[416] 총 11번 역임하여 숙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이언강(李彦綱, 1648~1716)과 함께 최다 역임 기록을 갖고 있다. 총 재임기간은 7년 6개월~10년 4개월에 달해 세조 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이석형(李石亨, 1415~1477)과 최장 재임 기록을 다툰다.[417] 判義禁府事. 의금부의 판사.[418] 守禦使. 수어청(守禦廳)의 대장. 수어청(守禦廳)은 조선후기 오군영(五軍營)의 하나.[419] 중시조 17세.[420] 중시조 23세. 부친은 문성군(蚊城君) 이석정(李碩貞, 1420~?)이다.[421] 문천(蚊川)은 경주(慶州) 남천(南川)의 옛 이름이다. 지명에 蚊(모기 문)자가 들어갔지만 모기와는 전혀 상관없다.[422] 內禁衛將. 조선시대 임금을 호위하던 군대인 내금위(內禁衛)의 최고지휘관으로 종2품 관직이다. 임진왜란 후에는 관제 개편으로 정3품으로 품계를 내렸다.[423] 중시조 24세.[424] 羅州牧師. 목사(牧師)는 지방행정구역인 부(府) 아래 목(牧)을 관할하던 지방 장관으로 정3품 관직이다.[425] 중시조 28세.[426] 漢城右尹. 한성부(漢城府)의 우윤(右尹)으로 종2품 관직. 현재의 서울특별시 부시장에 해당한다.[427] 左贊成.[428] 중시조 17세. 문하평리 증 상서좌복야 열헌공(悅軒公) 이핵(李翮)의 3남 검교정승 이세기(李世基)의 차남.[429] 중시조 25세. 부친은 진용교위(進勇校尉) 충순위(忠順衛) 이장경(李長庚)이고, 형은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 이사온(李士溫)‧이사량(李士良)이다. 아들은 충의위(忠義衛) 이란(李欄)이다.[430] 다만 광해군 때 책록된 익사공신은 인조반정 이후 삭제되었다.[431] 正憲大夫. 조선시대 문산계 정2품 상계의 품계명. 정2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지사, 판서, 판윤, 대제학, 도총관, 제조 등이 있다.[432] 중시조 17세.[433] 중시조 20세.[434] 중추원(중추부)의 판사로 정2품 관직.[435] 중시조 22세.[436] 중시조 23세.[437] 중시조 24세. 첫째 부인 함평 이씨에게서 1남 2녀를 두었고, 둘째 부인 전주 최씨와 3남 2녀를 두었다. 이항복은 최씨 소생이다.[438] 중시조 25세.[439] 중시조 26세.[440] 중시조 25세.[441] 1595년(선조 28) 2월 1일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임명되었다.[442] 四道都體察使. 1600년(선조 33) 좌의정이었던 이항복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 등 남부 4도 도체찰사를 겸직하였다. 이후 1608년(광해 즉위년) 역시 좌의정이었던 이항복은 평안도·함경도·황해도·경기도 등 북부 4도 도체찰사를 겸직하였다.[443] 흔히 5차례 병조판서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록을 살펴볼 때 재임기간이 불분명한 부분이 있으나 1592년(선조 25) 6월 1일 처음으로 병조판서에 임명됐을 때부터 1597년(선조 30) 9월 29일 마지막으로 임명됐을 때까지 8~9차례 병조판서에 임명된 것을 알 수 있다.[444]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난을 진압.[445]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중 도승지로서 선조를 평안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당초 선조는 함경도로 몽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항복이 밤새 간하여 평안도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반대로 함경도로 가게 된 왕자들은 왜군의 포로가 되었으니, 만일 이항복의 설득이 없었다면 선조가 왜군의 포로가 되었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임진왜란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또한,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넘어가려던 선조를 설득하여 의주에 머물게 하였다. 임금이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론을 통일하고 백성들이 힘을 합하여 국난을 극복하는 토대를 만들었다.[446] 호성공신 교서에는 이항복의 공을 기리며 忠勤疇衛予於顚越備嘗終始艱險孰逾鄕之賢勞(충성스럽고 건실하게 나(선조)를 잘 호위하며 엎어지며 달아나느라 온갖 고생을 고루 맛보았다. 시종 어려움과 험난한 것을 겪은 것이 어느 누가 경(卿)의 어질고 수고한 것을 넘을 수 있겠는가!) 擢置大司馬獨任幾務者數年人意恃而差强朝廷倚以爲重(대사마(병조판서)에 발탁되어 홀로 수년간이나 그 책임을 맡고 있어서 사람들이 든든히 믿고 마음을 차츰 떨치게 하여 조정에서도 그에 의지하며 소중히 여겼다.)라고 적혀 있다.[447] 다만 광해군 때 책록된 위성공신, 익사공신, 형난공신은 인조반정 이후 삭제되었다.[448] 처음에는 서인(西人) 이항복이 총재관으로서 실록 편찬을 주관하였으나 이후 북인(北人) 기자헌(奇自獻)이 총재관이 되어 1616년(광해 8) 선조실록(선종실록)이 완성되었다.[449] 유배지를 계속 고쳐 정배하였다. 1617년(광해 9) 11월 24일 인목대비 폐비 반대 상소를 올린 이후, 동년 12월 17일 용강(龍岡)으로 귀양 보내라 하였으나, 동월 18일 흥해(興海), 21일 창성(昌城), 24일 경원(慶源), 29일 삼수(三水)로 고쳤고, 이듬해인 1618년(광해 10) 1월 6일 최종적으로 북청(北靑)으로 고쳐 정배하였다. 삼수에서 북청으로 고친 이유는 대신(大臣)을 변경에 둘 수 없다는 임금의 하교 때문이었다.[450] 실록에는 "기자헌과 이항복이 유배된 뒤로는 온 조정이 조용히 침묵만 지킬 뿐 한 사람도 의기를 떨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라고 적혀 있다.[451] 중시조 26세.[452] 중시조 27세. 이항복의 손자.[453] 중시조 28세. 이항복의 증손.[454] 중시조 30세. 이항복의 5대손.[455] 중시조 31세. 이항복의 6대손. 족보상 조부는 이세장의 장남 증 좌찬성 이문좌(李文佐), 부친은 증 영의정 이종악(李宗岳)이나, 혈연적인 조부는 이세장의 4남인 증 이조참의 이홍좌(李弘佐), 생부는 증 이조참판 이종열(李宗說)이다.[456] 중시조 32세. 이항복의 7대손.[457] 중시조 33세. 이항복의 8대손. 생부는 이경일의 3남 이병규(李秉奎)이다.[458] 중시조 34세. 이항복의 9대손.[459] 중시조 35세. 이항복의 10대손.[460] 중시조 36세. 이항복의 11대손.[461] 중시조 38세. 이항복의 13대손.[462] 중시조 28세. 이항복의 증손.[463] 중시조 33세. 이항복의 8대손.[464] 중시조 34세. 이항복의 9대손.[465] 중시조 35세. 이항복의 10대손. <경주이씨 대종보>(1984刊)에 의하면 이하영의 증조부는 이항복(李恒福)의 장남 이성남(李星男)의 6대손인 이흥혁(李興赫)이다. 이하영의 후광으로 조부 이응효(李膺孝)는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부친 이유수(李裕修)는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증되었다. <경주이씨 상서공파세보>(1999刊)에서는 이하영의 증조부 이흥혁부터 그 이하 후손들의 이름이 지워져있다.[466] 중시조 36세. 이항복의 11대손.[467] 중시조 35세. 이항복의 10대손.[468] 協辦. 각부 대신(大臣)의 하위직. 갑오개혁 이전에 각조 판서(判書)를 보좌하던 참판(參判)과 유사함.[469] 중시조 27세.[470] 중시조 28세. 이항복의 증손.[471] 오례(五禮) 가운데 하나로, 백성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의례를 말한다. 여기에는 왕비·왕세자·왕세자빈의 책봉, 왕세자와 왕세손의 관례, 국왕과 왕세자의 혼례, 왕실 가족에게 존호를 올리거나 축하 잔치를 여는 등의 행사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협의의 가례는 왕실 가족의 혼례를 가리키며, 이를 위해 가례도감(嘉禮都監)이 설치되었고 혼례가 끝난 다음에는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가 작성되었다.[472] 조선후기 문신·학자 이세구의 시·서(書)·문목·제문 등을 수록한 시문집으로 13책으로 되어 있다. 규장각 도서로 소장되어 있다.[473] 중시조 29세. 이항복의 현손(4대손). 부친은 이세구(李世龜)이다.[474] 조선시대 호위청(扈衛廳)의 주장(主將)으로 정1품이다. 호위청의 대장 중 1인은 국구(國舅), 2인은 훈신(勳臣)‧척신(戚臣)인 원임대신(原任大臣)이나 시임대신(時任大臣)이 겸직하는 것이 상례였다.[475] 정공신이 아니라 원종공신이므로 정공신 명단에는 없다.[476] 중시조 27세. 이항복의 손자.[477] 중시조 28세. 이항복의 증손.[478] 중시조 29세. 이항복의 4대손(현손). 그의 누이가 박문수(朴文秀)의 어머니이다. 즉 박문수는 그의 생질(甥姪)이다. 박문수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가에 의탁하여 살 때 박문수와 아들 이종성(李宗城)을 함께 가르쳤다. 이종성은 박문수보다 1살 어린 외종제이다. 박문수는 이태좌의 재종동생인 이광좌(李光佐)에게도 수학하였고 이광좌를 사표(師表)로 삼았다.[479] 이광좌는 이항복의 장남 이성남의 증손이고, 이태좌는 이항복의 차남 이정남의 증손으로, 6촌 관계이다.[480] 정공신이 아니라 원종공신이므로 정공신 명단에는 없다.[481] 潔(깨끗할 결) 身(몸 신) 忠(충성 충) 君(임금 군).[482] 중시조 30세. 이항복의 5대손.[483] 광무 3년.[484] 중시조 32세. 이항복의 7대손.[485] 중시조 34세. 이항복의 9대손.[486] 중시조 35세. 이항복의 10대손. 고종 때 우찬성 이유승(李裕承)의 아들 7명 중 5남.[487] 신흥무관학교의 전신.[488] 중시조 29세. 이항복의 4대손.[489] 중시조 30세. 이항복의 5대손.[490] 중시조 32세. 이정좌의 장남 이종주(李宗周)의 양자 이경관(李敬寬)의 아들이다. 이경관의 생부는 이정좌(李鼎佐)의 차남 이종철(李宗喆)이다. 이항복의 7대손.[491] 조선시대 충청도의 명칭은 수차례 바뀌었다. 충주와 청주를 따서 충청도로 한 것처럼, 공주와 청주를 따서 공청도, 공주와 홍주를 따서 공홍도라고 하기도 하였다.[492] 判義禁府事. 의금부의 판사로 겸직이며 품계는 종1품이다.[493] 輔國崇祿大夫. 조선의 산계 중 정1품 하계에 해당하는 품계로서, 위로는 정1품 상계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와 아래로 종1품 상계 숭록대부(崇祿大夫)가 있다.[494] 중시조 33세. 이항복의 8대손.[495] 判義禁府事. 의금부의 판사로 겸직이며 품계는 종1품이다.[496] 중시조 34세. 이항복의 9대손.[497] 倚(의지할 의) 注(물댈 주) 繾(곡진할 견) 綣(정다울 권) : 의주(倚注)는 '의지하고 신임하다'라는 뜻이고, 견권(繾綣)은 '아쉬움에 헤어지기 힘들다'라는 뜻이다.[498] 중시조 30세. 이항복의 5대손.[499] 중시조 34세. 이항복의 9대손. 부친은 이계정(李啓楨)이다. 이계정의 생부는 증조부 이경양(李敬養)의 6남 이용규(李容奎)이나 증조부의 차남 이영익(李永翼)에게 입양되었다.[500] 중시조 30세. 이항복의 5대손.[501] 중시조 29세. 이항복의 현손(4대손).[502] 조선시대 충청도의 명칭은 수차례 바뀌었다. 충주와 청주를 따서 충청도라고 한 것처럼 공주와 홍주를 따서 공홍도라고 한 적도 있다.[503] 중시조 30세. 이항복의 5대손.[504] 중시조 23세.[505] 중시조 34세.[506] 警務使. 경무청의 장관직. 현재의 경시총감 또는 경찰청장에 해당한다.[507] 평리원은 현재의 대법원에 해당하고, 평리원 재판장은 현재의 대법원장에 해당한다. 다만 현재의 대법원은 법무부 산하의 기관이 아닌데 반하여 대한제국의 평리원은 법부에 소속되어 있었다.[508] 侍從院卿.[509] 侍從院卿.[510] 중시조 21세.[511] 寫字官. 승문원(承文院), 교서관(校書館), 오위(五衛), 규장각(奎章閣), 장용영(壯勇營) 등에 속하여 문서를 정사(正寫)하거나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은 기술직 관원이다.[512] 內贍寺主簿. 내섬시의 주부로 종6품 관직이다. 내섬시는 조선시대 각 궁과 전에 대한 공상(供上)과 2품 이상 관리에게 주는 술 및 왜인과 야인에 대한 음식물 공급, 직조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서이다.[513] 현재의 서울 무악재.[514] 정식 명칭은 흠차경리조선도어사양공거사비(欽差經理朝鮮都御史楊公去思碑)이다. 양호거사비는 4차례 건립되었다. 이해룡이 썼던 묘비는 1835년(헌종 1)에 불이나 훼손되어 비문을 읽을 수가 없게 되어 이전의 비문을 모각해 다시 세웠고 현재 서울 대신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515] 중시조 37세.[516] 현판의 大漢門(대한문)을 썼다. 원래는 大安門(대안문)이었으나 개칭한 것이다.[517] 증조부는 이숙한(李淑漢), 조부는 이세분(李世芬), 부친은 이충량(李忠良)이다.[518] 정운공신은 인조반정 이후 삭제되었다.[519]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관직.[520] 이조의 정3품 관직인 참의. 위로 판서와 참판이 있다.[521] 春信使.[522] 摠督使.[523] 현재의 충청도. 공청도는 공주와 청주에서 따온 말이다. 이석룡의 고변으로 반란이 평정된 후에는 홍청도로 바뀌었다.[524] 漆原縣監.[525] 槐山郡守[526] 세례자 요한 이벽, 베드로 이승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일신, 암브로시오 권철신, 복자 아우구스티노 정약종 등 5명이다.[527] 중시조 33세.[528] 이존창의 딸과 세례명이 동일한 듯하다.[529] 경주 이씨인지 불분명하다. 이 멜라니아의 남자형제의 딸이라면 경주 이씨이겠지만, 여자형제의 딸이라면 이씨이지만 본관이 다를 수 있다.[530] 경주이씨세보 임진보(광서 19년) 서문을 썼다.[531] 경주이씨세보 정미보(융희 원년) 서문을 썼다.[532] <춘산 이유필 연구>(이현희, 1994)에서는 이유필이 경주 이씨 평리공파 39세손이라고 하나 34세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아버지 이계초(李啓初)(또는 이기초(李基初))는 啓를, 이유필(李裕弼)은 裕를 항렬자로 쓴 것 같다. 일견 대동항렬 이전의 상서공파 33세, 34세 항렬자와 같지만 상서공파세보에서는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상서공파가 아니고 평리공파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장남은 이만영, 차남은 이회영, 3남은 이준영(1930~2020, 美 감리교 목사)으로 대동항렬 35세 항렬자 榮을 사용하고 있다.[533] 중시조 34세.[534] 중시조 35세.[535] 중시조 36세.[536] 지역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을.[537] 민의원의원. 지역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양원제를 채택한 제2공화국에서 국회 하원에 해당하는 것이 민의원이다.[538] 참의원의원. 지역구는 서울특별시 제2부. 양원제를 채택한 제2공화국에서 국회 상원에 해당하는 것이 참의원이다. 참의원은 제5대 국회에서만 구성되었다.[539] 중시조 35세. 상서공파인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과 동명이인.[540] 중시조 39세.[541] 이후 관직 변경으로 성균관 관장으로 변경[542]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된 독립운동단체.[543] 대한광복군정부는 1914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외 망명정부이다. 정부 수반으로 정도령(正都領)을 두었다. 정통령(正統領)이라고도 한다.[544] 명목상 당수로 고종을 추대하였다.[545] 중시조 38세. 슬하에 이상정, 이상화, 이상백, 이상오 등 4남을 두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작사한 국당공파의 이시우(李時雨)와는 동명이인이다.[546] 중시조 39세.[547] 중화민국(대만) 국군의 전신.[548] 중시조 39세.[549] 중시조 39세.[550] 전일본 선수권대회 우승.[551] 미국 원정경기에서도 수차례 우승.[552] 이상백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는데 제11회 도쿄 올림픽 유치 등 일본체육계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에서도 그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553] 勲三等旭日中綬章. 일본의 훈장으로 2003년 영전 제도의 개정으로 현재 명칭은 욱일중수장(旭日中綬章)이다.[554] 중시조 39세.[555] 중시조 35세. 이항복의 10대손. 이주영의 고조부는 이항복(李恒福)의 장남 이성남(李星男)의 장남 이시중(李時中)의 장남 이세장(李世章)의 손자 이경일(李敬一)이다. 이주영의 후광으로 증조부 이수영(李受永)은 비서원 승(秘書院丞), 조부 이계상(李啓商)은 내부협판(內部協辦), 부친 이유헌(李裕憲)은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증되었다.[556] 중시조 33세. 이항복의 8대손.[557] 중시조 34세. 이항복의 9대손. 이유헌의 생부는 이계년(李啓年)으로, 이계년은 이항복의 차남 이정남의 장남 이시술의 차남 이세필의 차남 이정좌의 3남 이종적의 증손이다.[558] 증광시 갑과 1위.[559] 중시조 36세. 이항복의 11대손.[560] 勲二等瑞宝章. 일본의 훈장으로 2003년 영전 제도의 개정으로 현재 명칭은 서보중광장(瑞宝重光章)이다.[561] 중시조 38세. 이항복의 13대손.[562] 중시조 35세. 이항복의 10대손. <경주이씨 대종보>(1984刊)에 의하면 이하영의 고조부는 이항복(李恒福)의 장남 이성남(李星男)의 5대손인 이경한(李敬漢)이다. 이하영의 후광으로 증조부 이흥혁(李興赫)은 비서원 승(秘書院丞), 조부 이응효(李膺孝)는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부친 이유수(李裕修)는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증되었다. <경주이씨 상서공파세보>(1999刊)에서는 이하영의 증조부 이흥혁부터 그 이하 후손들의 이름이 지워져있다.[563] 중시조 33세. 이항복의 8대손.[564] 중시조 34세. 이항복의 9대손.[565] 勲一等旭日章. 일본의 훈장으로 2003년 영전 제도의 개정으로 현재 명칭은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이다.[566] 勳二等太極章.[567] 勳一等八卦章.[568] 勳一等太極章.[569] 勲一等旭日桐花大綬章. 일본의 훈장. 1887년 기존의 욱일장(旭日章) 최고등급인 훈1등욱일대수장(勲一等旭日大綬章)의 상위등급으로 추가한 것이다. 궁중석차에 있어서 공1급금치훈장이 훈1등욱일대수장보다 상위이지만 훈1등욱일동화대수장보다는 하위이다. 2003년 영전 제도의 개정으로 현재 명칭은 동화장(桐花章)이다.[570] 중시조 36세. 이항복의 11대손.[571] 이규원은 종2품까지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리는 일)되었다.[572] 찬시(贊侍). 한일병합 이후 일제가 이왕직(李王職)에 개설한 시종과 같은 관리이다.[573] 昌福會. 1929년 일본정부가 몰락한 조선귀족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국채 250만 엔의 자금으로 설립한 단체이다.[574] 중시조 37세. 이항복의 12대손.[575] 勲六等瑞宝章. 일본의 훈장으로 2003년 영전 제도의 개정으로 현재 명칭은 서보단광장(瑞宝単光章)이다.[576] 功五級金鵄勲章.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일본군이 해산되면서 1947년 폐지되었다.[577] 합동군사대학교 창설 이후에는 학장으로 변경.[578] 星友俱樂部).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579] 리전 오브 메리트(Legion of Merit)라고도 한다. 3등급 Officer급을 수훈하였다.[580] 중시조 34세. 이항복의 9대손.[581] 1남 이건영(李健榮), 2남 이석영(李石榮), 3남 이철영(李哲榮), 4남 이회영(李會榮), 5남 이시영(李始榮), 7남 이호영(李頀榮). 원래 7명이나 6남인 이소영(李韶榮)이 일찍 사망하였다.[582] 1910년 12월 30일 이석영 6형제와 가족, 해방시킨 노비까지 약 60명이 압록강을 향해 한양을 떠나기까지 만여 석의 재산과 가옥을 방매했다. 그때 돈으로 40만 원, 당시 한일·한성·천일 등 3개 시중은행 설립 자본금 총액이 36만 5천 원이었으니 이석영의 결심으로 현재 시가 2조 원 이상의 거액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자금이 확보된 것이다. 지금의 명동 입구에 있던 이유승 저택과 이석영이 이유원에게서 상속받은 8천 평 규모의 명동 땅은 일제의 감시로 팔지 못한 채 이듬해 조선총독부에 강탈당하고 말았다.[583] 중시조 35세. 이항복의 10대손. 고종 때 우찬성 이유승(李裕承)의 아들 7명 중 장남.[584] 중시조 36세. 이항복의 11대손. 생부는 이회영이나 이건영에게 입양되었다.[585] 신흥무관학교의 전신. 만주, 간도 일대의 무장항일투쟁의 초석이 되었던 곳이다. 청산리 전투에도 이곳 출신이 대거 참여하였다. 1930년대 기준으로 약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586] 중시조 35세. 이항복의 10대손. 고종 때 우찬성 이유승(李裕承)의 아들 7명 중 차남.[587] 기록에 따르면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사는 곳 양주(현재 경기도 남양주)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오르내렸다'고 한다.[588] 부친 이유승의 12촌 형제이다.[589] 중시조 36세. 이항복의 11대손.[590] 독립운동가였다가 일제의 회유로 변절하여 독립운동 진영에 피해를 주는 자들을 체포·암살하던 조직.[591] 중시조 35세. 이항복의 10대손. 고종 때 우찬성 이유승(李裕承)의 아들 7명 중 3남.[592] 중시조 35세. 이항복의 10대손. 고종 때 우찬성 이유승(李裕承)의 아들 7명 중 4남.[593] 신흥무관학교의 전신. 만주, 간도 일대의 무장항일투쟁의 초석이 되었던 곳이다. 청산리 전투에도 이곳 출신이 대거 참여하였다. 1930년대 기준으로 약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594] 중시조 36세. 이항복의 11대손. 이회영의 전처 달성 서씨(達城徐氏, 1866~1907) 소생.[595] 이회영의 차녀 이규숙(李圭淑, 1910~2009)의 남편이다.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장운동(莊雲洞)의 아들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안악지국장, 무한한인혁명청년회원,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원 등을 역임하였다.[596] 중시조 36세. 이항복의 11대손. 이회영의 후처 이은숙(李恩淑, 1889~1979) 소생. 이시영의 장남 이규창(李圭昶)과는 한자가 다르다.[597] 독립운동 방해공작을 펼치던 주중일본공사 암살 시도.[598] 중시조 35세. 이항복의 10대손. 고종 때 우찬성 이유승(李裕承)의 아들 7명 중 5남.[599] 首班判事.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의 최고위직. 수반판사 1인, 판사 2인, 부판사 1인, 검사 1인을 두었다.[600] 勳三等八卦章.[601]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소재. 종래 수유리 애국선열 묘역으로 불렸으나 2020년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되었다. 이시영을 비롯하여 김창숙, 손병희, 신익희, 여운형, 이준 등 독립유공자 32명이 안장되어 있다.[602] 중시조 36세. 이항복의 11대손. 초명은 이규봉(李圭鳳). 족보에서는 1888년 생으로 기록함.[603] 중시조 36세. 이항복의 11대손. 초명은 이규홍(李圭鴻). 족보에서는 1952년 사망으로 기록함.[604] 중시조 35세. 이항복의 10대손. 고종 때 우찬성 이유승(李裕承)의 아들 7명 중 7남.[605]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등 6형제,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이건영의 장남 이규룡(생부는 이회영),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 이회영의 차남 이규학·3남 이규창, 이회영의 사위 장해평(이규숙의 남편), 이시영의 장남 이규창(초명은 이규봉).[606] 건국훈장 12명, 건국포장 1명.[607] 중시조 34세.[608] 警務使. 경무청의 장관직. 현재의 경시총감 또는 경찰청장에 해당한다.[609] 평리원은 현재의 대법원에 해당하고, 평리원 재판장은 현재의 대법원장에 해당한다. 다만 현재의 대법원은 법무부 산하의 기관이 아닌데 반하여 대한제국의 평리원은 법부에 소속되어 있었다.[610] 侍從院卿.[611] 侍從院卿.[612] 월성군후 용재공파이다. 월성군파의 파조 이지수(李之秀)의 증손 이만실(李蔓實)의 3남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의 5남 이시민(李時敏)의 차남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의 후손이다.[613] 국립국악고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