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네오나치, 일본 극우, 추축국 추종자들의 나치독일 피해자 만들기를 비판하는 문서2. 상세
그들이 행태는 아래와 같다.3. 나치독일의 전쟁범죄를 왜곡
연합국에 소속되었던 국가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들을 핑계삼아 나치 독일의 범죄를 미화하거나 변명하는 경우가 있다. 같은 밀덕이라도 전과 부풀리기 정도는 잘못된 지식 내지는 편향적인 빠심이 불러온 오류 정도로 이해해줄 수 있지만, 추축국 전쟁범죄 미화는 엄연히 현대 사회에서 금기시된 일이며, 도의적인 비판에 더하여 지역에 따라서는 법적인 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악질적인 죄이다. 물론 연합국의 죄과가 아예 없었다거나 필요악이었다는 식으로 옹호하는 것도 곤란[1]하겠으나, 2차대전 연합국과 추축국의 민간인 사망자 수만 비교해 보더라도 양측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규모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무엇보다 나치 독일처럼 국가가 공식적으로 나서서 특정 인종의 절멸을 시도했던 국가는 심지어 다른 추축국들을 포함하더라도 단 하나도 없었다.[2]3.1. 소련군과의 비교
나치 독일과 히틀러의 전쟁범죄나 야만성을 논할 때 흔히 소련의 스탈린이 카운터파트로 언급되곤 한다. 이는 양국의 이념이 극우와 극좌로 명확히 나뉘는 극단적인 전체주의 독재 국가였으며, 전후 냉전 체제에 접어들면서 소련이 나치의 뒤를 이은 자유세계의 주적으로 떠올랐고, 실제로 전시에도 교전 당사자들 사이에서 가장 격렬한 증오범죄가 오갔던 곳이 바로 동부전선이었기 때문이다.[3] 실제 반인륜적인 범죄의 추이를 살펴보면 일부 독빠들은 주로 소련의 잔혹 행위를 부각하면서 정작 나치 독일의 문제점에 대해 물타기를 시전한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 소련의 전쟁범죄는 겉보기에 엇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보면 차이점이 제법 있다.소련이 국가 주도하에 벌였던 전쟁범죄는 대전 초기 스탈린의 밀명 하에 폴란드인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졌던 카틴 학살 뿐[4]으로, 이후 독일과의 전쟁 과정에서는 공식적으로 모든 형태의 대민 범죄를 엄금하여 헌병 노릇을 하던 NKVD 부대, 부대 정치장교 등에게 적발되면 엄벌에 처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 지도부가 초중반부의 전쟁범죄를 암묵적으로 허용하다가 문제가 되니 그제서야 통제했다"는 주장도 옳다고 보기 힘든 것이, 소련군은 대숙청으로 장교단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나치 독일의 기습공격 여파로 초반의 지휘체계마저 거의 무너졌기 때문에 군에 대한 통제력이 다소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온갖 학살극을 저지르며 침공해 들어오는 "악마의 군대"[5]에 맞서는 데 남은 여력을 끌어모아야 했기 때문에 다른 범죄를 엄격하게 처단할 수 없었을 뿐이다. 게다가 소련군은 침략을 당한 대상이었기 때문에 초중반부에는 주로 자국 영내에서 전투를 벌였고, 당연히 독일 민간인을 마주칠 일 자체가 많이 없었다. 물론 자국민에 대한 범죄는 당연히 엄격하게 처벌했다.[6]
반면 독일군의 학살극은 조직적인 차원에서 발생하였다. 당장 아돌프 히틀러부터가 '강조명령'이라는 이름 하에 슬라브인에 대한 철저한 말살을 촉구했고, 현지 독일 장군들은 대부분 이를 충실하게 따랐다. 국방군과 SS를 구별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이,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국방군 장성인 발터 폰 라이헤나우였고, 이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7]를 포함하여 단 한 명[8]을 제외하면 장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1,360만 장병(=즉 징집된 독일 민간인) 중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2백만의 사망자를 낳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역시 대표적인 예시이며, 이외에도 독일군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는 셀 수 없이 많다. 소련군 포로 학살도 만만치 않아서, 기록에 따르면 많은 수의 소련군 포로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아우슈비츠 최초의 독가스 학살은 소련군 포로 600명과 유대인 250명에게 치클론B를 살포하여 살해한 것이었으며, 최종적으로 14만에서 50만 사이의 소련 포로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갔다. 독일군 내 소련인 포로의 사망자는 독일 측 기록에 따르면 570만 중 330만(약 57.8%)에 달했고, 이는 NKVD 문서에 따른 소련군 내 독일인 포로의 사망자 추산인 273만 중 38만(약 13.9%)[9]에 비해 네 배가 넘는 압도적인 수치이다.
한편 독소전쟁 말기 소련군이 동유럽을 진격하는 과정에서 200만 건이 넘는 강간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강간의 군대"라고 비난하기도 하나 정작 독일군에 의한 소련 여성 강간은 그 수십 배인 수천만 건에 달했으며 강간 후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10] 실제로 42년 한 해만 밝혀진 성범죄 건수가 1천만 건이 넘고, 75만 명의 신생아가 독일군의 강간에 의해 탄생했다.[11] 42년만 해도 이 정도인데,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41년부터 독일군이 소련 영토에서 거의 쫓겨나는 44년까지의 통계치를 다 합친다면 그 수치는 배로 늘어날 것이다.
반면 소련군은 1941년 이후 이런 식의 약탈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뿐더러, 승전이 가까워지고 점령지의 통제권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부터는 강간 등 중범죄자들을 즉결처분하는 식으로 군 기강을 다잡았다.[12][13] 소련군의 강간사례로 베를린의 여인이 흔히 인용되는데, 베를린의 여인의 주제가 그런 쪽이 아니라는 건 둘째치고 "독일군이 소련에게 한 만큼 소련군이 우리를 대했으면 독일 민족은 이미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것" 이라는 주인공의 대사는 절대 언급하지 않는 걸 보면 이율배반적인 태도이다.
물론 적군 포로의 사망률·민간인 대상 전쟁범죄 추이 등 객관적인 수치를 감안했을 때 소련군이 연합군 내에서 가장 악질적인 군대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를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복수라는 식으로 정당화하는 것 역시 잘못된 일이다.[14] 하지만 국가 단위에서 대놓고 인종청소를 자행한 것과, 국가에서 민간인 범죄를 금지하는 상황에서 병사/지휘관 개개인이 민간인에게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 죄질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독일 정부는 독일군이 먼저 동유럽 점령지에서 벌여놓은 짓이 있기 때문에 소련군의 만행들이나 전후 독일계 주민들에 대한 보복성 학살·추방에 대한 외교적인 항의를 가급적 피하고 있으며, 기껏해야 자국 내로 도망쳐온 독일계 실향민들에게 약간의 보조를 제공할 뿐이다. 오늘날 소련군이 동유럽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는 주로 학술적 차원에서 논의가 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대전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끼여 많은 피해를 입었고 전후에는 사실상 소련의 식민지배까지 받았던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같이 나치에 맞서 싸웠다는 명분이 있는 서방연합국 쪽에서 비판하는 편이다.
3.2. 다른 열강과의 비교
소련과의 비교 다음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 주로 대영제국 시기 영국의 행보나 콩고 자유국 시기 벨기에의 악행 등이 언급되지만, 이외에도 역시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나치만 욕먹는 것이 억울하다"는 식이다.[15]특히 윈스턴 처칠의 벵골 대기근이 주요 타깃. 심지어 이것과 히틀러와 손기정의 악수[16] 같은 사례를 버무려서 "식민 제국들은 비백인을 차별했지만 나치 독일은 비유럽권에 대해서는 인종주의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벵골 대기근은 당시 벵골 지방의 인프라가 엉망이었던 점,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 갈등으로 인한 지자체 간 비협조, 그리고 행정력의 미비, 태풍으로 인한 수확 감소, 전시 상황까지 복합적으로 겹쳐진 단순한 기근이기에 홀로도모르나 대약진 운동 당시의 기근과 같은 고의성이 없었다. 그리고 손기정과 히틀러가 악수한 것은 매우 지엽적인 사례이다. 인종주의가 만연했던 당시에도, 타국의 대표를 접견하거나 시상하는 공식 석상에서 인종의 차이를 이유로 악수를 하지 않을 정도의 인종차별적인 행태는 대부분의 경우 예의가 아니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가원수로서 이러한 당연한 외교적 관례를 지켰을 뿐이고, 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국제연맹 회의장에서 이탈리아 대표단은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에게 '깜둥이'와 같은 인종적인 욕설을 섞어 가면서까지 모욕하였다. 그러나 이 행태에 대해 다른 유럽 국가 대표들은 동조하기는 커녕 매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루마니아 왕국의 대표 니콜라에 티툴루스쿠는 아예 이탈리아 대표단을 가리켜 '야만인 놈들'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애시당초 식민지는 점령국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착취해도 무너지지 않고 유지가 가능할 정도만큼은 잘 경영해야 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점령국은 식민지를 착취할 땐 하더라도 어느 정도 개발하고 자국에 우호적인 엘리트들을 심어두려 했으며,[17] 오랜 식민지 경영 경험이 있는 대영제국은 이 분야의 대가였다. 반면 간디를 필두로 한 인도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히틀러는 영국 외무장관에게 조언이랍시고 이런 말을 한다. 간디를 사살하시오. 만약 그것으로도 복종시키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국민회의 지도부 열댓 명을 사살하시오. 그래도 충분하지 않다면, 200명 등 질서가 잡힐 때까지 사살하시오. 그리고 나치가 네덜란드와 폴란드를 점령하자 진짜로 이런 정책이 실행되어, 독일군 하나가 테러로 죽을 때마다 공포감 조성을 위해 수백 명의 무고한 인질들이 끌려와 처형당했다. 심지어 레벤스라움을 위해 자신이 점령한 지역의 '열등 인종'들을 국가 정책으로 철저히 말살해 나갔고, 이 과정에서 별다른 충돌이 없다면 억지로 명분을 만들어 내서라도 학살을 자행했다.
정반대로 서구권에서는 다인종·다민족화 된 오늘날의 미국·유럽에 반감을 표하며 나치 독일을 백인우월주의의 상징으로 추앙하는 경우도 있다. 소위 "조상의 뼈 위에서 춤추는 패륜아들"이라는 사설로 유명한 러시아의 네오나치들이 바로 이런 부류로, 이들은 히틀러가 러시아를 친 것이 실수였을 뿐 유대인과 기타 열등인종을 말살하고 '우월한 유럽 백인들만의 통합된 제국'을 건설하려는 방향성은 옳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은 나치 독일이 같은 백인 국가, 심지어 같은 권위주의 우파 정부에 불가침조약도 맺었으며 추축동맹국인 일본 제국(!)마저 반대했던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에도 폴란드의 저항운동을 무참히 진압하고, 네덜란드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으며, 동유럽 백인들은 아예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걸 보면, 결코 백인 민족주의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애초에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오로지 게르만 민족만을 앞에 놓았고, 그 외의 인종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명예 아리아인' 취급하면서 일시적인 우호를 맺기는 했어도 근본적으로는 열등 인종으로 여겼다.[18] "히틀러가 다른 민족은 탄압했어도 우리 민족은 우대해줬을 거야"라는 건 말 그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물론 제국주의 식민지 경영은 분명 보편윤리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으며, 인권이 발달된 현대 사회에서는 비판받아 마땅한 어두운 역사이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악행은 경제적 착취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식민지 경영과 궤를 달리하는 인종 말살이라는 이념적 잔혹성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근대화된 공장식 학살과 같은 국가 주도의 범죄를 낳았다. 그렇기에 제국주의를 이유로 나치즘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더불어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하여 유럽 열강들 중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운 나라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독일 역시 나치의 죄과와는 별개로 식민지 나미비아에서의 만행 역시 떠안고 가야 하는 처지이다.
3.3. 일본 제국과의 비교
일제의 만행을 강조하면서 나치 독일은 그나마 양호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주로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체계적인 학살 시스템을 마련한 나치가 일제보다도 더 큰 비판에 시달리기 때문에 일제가 주로 악행을 자행한 일선부대 수준에서의 비교가 많다.그러나 전선에서의 독일군의 만행도 일본군 못지 않았다. 비록 서부전선만 놓고 보면 독일군이 덜 잔혹했던 것이 사실이나[19], 동부전선까지 포함시키면 절대로 그렇게 볼 수가 없다. 일본군이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이니 신멸작전이니 하며 학살극을 벌일 때, 독일군 역시 폴란드에서의 바르샤바 봉기 진압이나[20] 소련 점령지의 홀로코스트 등 무차별 학살을 수도 없이 저질렀고, 이로 인해 죽어나간 사람들의 수는 인류 역사상 최대 수준이다. 게다가 독일군의 포로학대 역시 일본군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포로의 사망률만 비교해봐도 독일군에 잡힌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은 57%에 달한다. 일본군에 잡힌 미군 포로의 사망률도 27%로 매우 높은 편인데 독일군은 그것의 2배를 넘는 수준이다.[21]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둬놓고 치클론B 독가스 실험을 하여 살해하기도 하였다. 가끔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현장 사진을 몇 장 올려놓으면 "그래도 끝까지 고통스럽게 죽이는 일본군보다는 차라리 깔끔하게 죽이는 독일군이 낫네요."라는 식의 헛소리도 꾸준히 등장하는데, 독일군도 온갖 생체실험을 자행했음은 물론이고 수용소의 생리도 일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나치 독일이 일본 제국보다 나았다는 주장은 사실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주장과 달리 나치 독일의 특정 민족의 절멸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광신적이고 집착스러운 학살 행위는 일본 제국보다도 더 큰 충격을 주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 서양 철학계의 조류 자체를 바꿔놓았다. 당대 독일의 동맹인 일제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조차 특정 민족의 완전한 절멸을 국가대전략 목표로 삼지 않았으며, 그런 짓에 낭비할 만큼 국가 역량이 넘치지도 않았다. 반면 나치 독일은 아인자츠그루펜이나 홀로코스트에서 알 수 있듯 이념적인 이유로 전례없는 규모의 집단 학살을 벌였으며, 심지어 전세가 기울어가는데도 절멸수용소로 학살을 위한 물자를 끊임없이 배송했을 정도로 전쟁 수행보다도 유대인 대학살을 더욱 우선시했다. 오늘날 독일의 학살이 일본을 비롯한 기타 케이스보다 훨씬 주목받는 건 물론 나치즘의 피해자들이 서구 백인이라는 점도 있기는 하나, 기술적·구조적으로 선진화된 현대 관료제 국가가 특정 민족의 완전한 절멸을 위해 범국가적 규모의 학살 시스템을 마련한 유일무이한 사례이기 때문이다.[22]
독일은 주로 요제프 멩겔레, 일본의 731부대는 이시이 시로의 주도 하에 포로 대상의 각종 생체실험 역시 양국 모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두 국가 모두 인류에게 유례 없이 엄청난 재앙을 안겨 줄 물건을 만들고 있었다. 독일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책임자로 하는 '우라늄 클럽'을 조직하여 핵개발을 시도하였고, 일본 역시 니고연구 등을 통하여 핵개발을 시도하였다. 독일의 경우
국내에서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의 비교가 자꾸만 논란이 되는 이유는, 언론사나 교과서 책과 같은 매체에선 일본과 비교하기 위해 현대 독일의 전후 반성이 비교적 깔끔했다고 알려져 있는데다[27] 한국은 나치와는 달리 위안부와 731 부대로 대표되는 일제의 전쟁범죄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반일 정서가 팽배하고, 게다가 냉전의 영향으로 독소전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28], 국내 민간인 대다수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라고는 홀로코스트밖에 모른다.[29] 하지만 폴란드 침공과 독소전쟁 당시 그 못지않게 잔혹하고 규모가 큰 대학살이 수두룩했다.
물론 "나치 독일이 일본 제국보다 나았다"는 주장이 반드시 독일의 전쟁범죄를 미화하려는 의도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반일 성향의 단체 혹은 방송과 같은 언론사들이 일본 제국이나 현대 일본을 독일과 대조하여 비판하기 위한 반례로 독일의 사례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30] 하지만 ‘나치와 일제가 벌인 전쟁범죄의 잔학성’과 ‘전후 양국이 보인 다른 태도’는 서로 전혀 무관한 별개의 사안이다. 즉, 전후 독일의 태도가 일본보다 전향적인 것은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가 더 나았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며 전후 독일의 처사는 그것대로 칭찬할 문제이지 그것을 빌미로 전쟁 당시 나치의 전쟁범죄를 축소하려는 시도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쪽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대쪽을 미화하는 태도 역시, 악의적인 왜곡의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무지의 소산이라는 측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존재한다.[31]
물론 독일의 전후 움직임이 더 널리 인정받고 있지만[32] 이는 전쟁범죄의 잔혹성 여부와 논점 자체가 다르다. 현대 독일 정부의 전향성과 진정성은 높이 평가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나치가 저질렀던 전쟁범죄 자체가 별게 아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전후 독일과 일본 모두 나름대로 과거사를 청산했고[33] 두 나라 모두 오늘날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보편 인권의 개념을 중시하는 서방 세계의 선진국이다. 그러므로 21세기 두 나라의 외교적 행보에 대한 평가는 역사보다는 현실정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전쟁범죄와 어두운 과거사에 대한 청산은 각각의 사안에 얽힌 이해당사자들끼리 정부 간 혹은 시민외교를 통해 해결할 문제이지 굳이 누가 더 낫네를 비교하며 한쪽을 옹호하거나 깎아내릴 문제는 아니다.
3.4. 현 이스라엘과의 비교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이 세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과정에서 저지르는 만행을 바탕으로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단순히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핍박받은 역사를 망각했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나치와 이스라엘이 다를 바 없다는 물타기식 논리를 전개하거고 유대인들을 세계의 악 취급하며 나치 정권의 홀로코스트를 은근슬쩍 가볍게 치부한다.[34]그러나 당대 유대인들이 죄다 부자에 독일이 망하기를 바라는 매국노가 아니었다. 당장 프리츠 하버 같은 사람은 유대인이었음에도 독일 제국의 전쟁 수행을 위해 오명을 감수하고 독가스를 개발하는 등 충성을 다했지만, 바로 그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악화되는 사회적 분위기에 등떠밀려 조국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유대인들이 정말로 독일 경제를 쥐락펴락했다 한들, 독일이라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다해야 할 의무만 다했다면 마땅히 같은 독일인으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설사 유대인들이 집단화된 이익을 추구하며 다른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하더라도, 불이익을 주어 간접적으로 추방하는 정도면 모를까[35] 일방적으로 수용소에 가두어 놓고 집단 학살을 벌인 것에 대한 면죄부는 될 수 없다. 애초에 유대인 음모론부터가 거짓이지만, 설사 참이라 하더라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인되기 어려운 인류사 최악의 인종절멸작전이었다.
또한 현대 이스라엘이 비록 가자 지구 등에서 비인도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사실이나[36], 한편으로는 적성국가들로 둘러싸인 채 독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을 벌여온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예방공세를 취하는 면도 없지는 않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이집트와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진 7~80년대 이후로는 지나친 확전을 자제하고 있고, 국지적인 도발에 대해서 과할 정도로 보복하는 것이 문제일 뿐 무력충돌이 없을 때는 팔레스타인과도 나름 대화를 시도하는 편이다. 이스라엘의 정책은 공격성 면에서 일제의 충칭대공습이나 미국의 도쿄대공습 정도라면 모를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이는 족족 잡아넣어서 학살을 저질렀던 나치의 유대인 정책과는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 설령 이스라엘과 나치가 동급이라 해도 그건 각기 별도로 비판할 부분이지 한쪽이 다른 한 쪽의 면죄부가 될 수 없으며, 1930~40년대 나치의 범죄에 희생당한 유대인들 입장에서 미래에 세워질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해 책임질 이유는 당연히 없다.
게다가 오늘날 모든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개중에는 이스라엘 밖에서 태어났거나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많다. 나치에 반대했던 독일인들이나 독일계 미국인들에게 독일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치의 범죄에 대한 연대책임을 강요할 수 없듯, 유대계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연대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인류가 인권이라는 개념을 자각한 이래 특정 국가를 멸망시키려는 경우나 단순히 악에 받쳐 특정 민족을 전술적으로 전멸시키려고 한 경우는 많았어도 특정 민족을 전략적으로 완전히 절멸시키려는 범죄는 전무후무했으며, 오직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만이 유대인이라는 거대한 민족 집단[37]을 겨냥하여 벌어졌다. 그렇기에 이러한 관점에서의 나치 옹호는 반유대주의의 죄업을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유럽/북미 사회에서 특히나 금기시되고 있으며, 이들 국가에서 넷 우익 수준 이상의 공개적인 자리에서 함부로 이런 발언을 했다가는 나치 미화에 더해 인종차별적 증오 발언으로 간주되어 법의 심판을 받을 확률이 높다.
4. 연합군도 잘못했다는 식으로 물타기
나치를 정당화하는 주장은 단골이다. 이들의 요지를 정리하면, "나치는 필요 이상으로 욕먹는다. 유태인 학살도 너무 과장되었다. 그런 학살은 미국, 소련, 영국, 중국, 프랑스를을 비롯한 연합군들도 많이 저질렀으니까 나치도 결국 피해자였다."라는 것이다. 미리 결론부터 내리자면 이 따위 소리를 하는 건 그냥 보편적인 의미에서 네오파시스트라는 걸 스스로 인증 하는 꼴이다.이런 물귀신 논리에 대한 미국이나 영국 및 연합군 측 반응은 말이 필요없다. 물론 연합군 열강 또한 식민지인이나 소수민족 억압을 해서 그것대로 비판받지만 추축국 전체가 전쟁의 피해자라고 옹호하는 것은 말 그대로 완벽한 자폭이다.
그리고 현재도 많은 네오나치들이 나치독일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영국을 비롯한 구 서구 열강의 사례를 끌고 오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서유럽 모두 제국주의 국가들이었음에도 전쟁의 승패만을 이유로 독일이 모든 화살을 맞는다고 주장한다. 몇몇 이들은 이러한 이유로 뉘른베르크 재판이 불공평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의 주장처럼 제국주의의 경우 많은 강대국들이 공유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등한시되는 경향이 있는건 사실이다. 실제로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사죄와 배상은 매우 미흡하며 많은 서방국들이 식민지 문제를 시대상으로 치부하며 넘기는 경향이 있다. 과거사 청산으로 유명한 독일마저 독일 제국 시절에 벌인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다.
하지만 네오나치들의 이러한 인식과는 달리 2차 대전은 단순히 제국주의 국가들 내 싸움이 아니었다. 2차 대전의 추축국이 특히 문제시되는 이유는 군국주의 파시즘, 나치즘의 사상이 발호하여 ‘세계대전’을 벌였고 주변국들에 천문학적인 인명피해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유럽을 침략하여 많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으며 이 과정에서 무려 수천만 규모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일례로 독일이 벌인 독소전은 2차 대전의 일개 전역에 불과하나 이 전선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는 인류 역사상 두번째로 큰 전쟁이었던 1차 대전의 총합을 상회한다.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들에서 수만~수십만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한 제한전을 벌였을 뿐 이 두 추축국처럼 수천만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면전을 일으킨 바가 없다.
물론 제국주의 역시 21세기 들어 서구권에서도 비판받는 건 사실이고 또한 서유럽 국가들이 제국주의를 벌였다는 사실도 나치독일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치독일이 식민지가 아니였던 여러 국가들에게도 특히 비판받는 이유는 제국주의적 팽창이 아니라 군국주의 발호 후 천문학적 규모의 조직적 체계적인 인종말살과 t4 작전, 홀로코스트 같은 전쟁범죄이다. 따라서 1930~40년대 나치가 벌인 행각은 단순한 제국주의적 행보와 동일선상에서 치부할 수 없다.[38]
또한, 연합군의 전략 폭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점을 들어 "연합군도 민간인을 죽였다"고 물타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략 폭격은 적국의 군수산업 역량을 약화시켜 장기적인 보급 및 전쟁수행능력을 저해시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는 공격자의 입장에서도 최대한 억제하려고 노력한다.[39] 물론 도쿄 대공습처럼 적국 국민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거나[40] 히로시마 핵폭격처럼 수뇌부를 겁주려고 본보기로 국민을 날리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나마도 커티스 르메이와 아서 해리스가 지적했듯 "총력전 체제에서는 민간인들도 가내 수공업을 통해 군수물자 생산에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당화될 여지는 있으며, 실제로도 군수공장이 밀집한 지역을 선정하여 폭격하였다. 게다가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군사 목표물과 민간인이 섞여있을 경우 민간인만 피해서 공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41] 당시 연합군 장성의 일부가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인 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당시의 기술 수준상 민간 피해가 발생하지 않으면서 군사 목표물만을 타격하기는 불가능한데다 어쨌든 민간인들도 군수공장에서 일하며 전쟁 수행에 한몫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종종 지적받는 드레스덴 폭격이나 함부르크 폭격 역시, 드레스덴과 함부르크는 둘 다 주요 공업도시였으며, 드레스덴은 동부전선으로 가는 보급, 교통의 요충지였고 함부르크에는 유보트 기지가 있었다.
게다가 이런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폭격은 추축국이 먼저였으며,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도 전략 폭격 과정에서의 민간인 사상자를 이유로 기소된 독일 지휘관은 없었다. 당장 최초의 전략 폭격은 영국의 소도시인 코번트리에 행해졌고 이 이후 나치 독일은 대 피해를 입혔다고 여기며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표현으로 코번트리하다(coventrieren)라는 말을 썼다. 심지어 런던 대공습이나 충칭 대공습 등 대놓고 민간인에 대한 심리적인 효과를 노린 공격 역시 추축국 진영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5. 나치독일 전쟁범죄자들을 미화
일부 네오나치들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나 헤르만 호트와 같은 동부전선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나, 미국의 소환거부로 소련의 전범재판에 넘겨지지 않은 독일군 지휘권들에 대해, "소련이 어거지를 부려 넘겨달라고 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또한 소련의 형무소에서 사망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며 분개하곤 한다.[42][43]하지만 당대에 밝혀진 것만으로도 이들이 직접 전범행위를 지시했는지가 불확실했을 뿐 예하부대가 동부전선에서 벌인 전쟁범죄는 이미 부지기수였으며, 오늘날에는 추가적인 사료들이 공개되면서 유대인·포로 학살에 관여하였음이 다시 밝혀지는 등 애초부터 별로 면죄의 여지가 없는 자들이었다. 오히려 태평양 전쟁에서 비슷한 짓을 저지른 일본군 장성(마쓰이 이와네, 야마시타 도모유키, 혼마 마사하루, 홍사익 등)들이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도 감독부실의 책임을 물어 미국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것을 보면, 소련의 전범재판은 장성급에서는 거의 사형이 없을 정도로 관대한 편이었다.[44]
6. 나치독일 국방군의 행적을 미화
역시 큰 문제가 되었던 사례로 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는 SS가 아닌 독일 국방군과 국방군에 징집된 병사 개개인은 그저 자신들의 의무를 수행했기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깨끗한 국방군 개념을 신봉하는 한심한 작태를 보인 적도 있었다. 독일인들이야 섣불리 비판했다간 패드립이 될까 봐+정치적 이유 때문에 이걸 주워섬길 이유가 있었다지만[45], 아무 상관없는 이역만리 타국(그것도 추축국 정부, 군대, 민간인 모두의 발아래 고통받은 과거가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그걸 그대로 믿어버리면 어쩌자는 걸까?이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덕질 분야가 분야이다보니 독일 국방군과 나치의 관련성을 과도할 정도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악행으로는 무장친위대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았고 당시 독일 국방군 개개인 중에서는 나치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비판적인 사람, 심지어 정치엔 관심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가 징집영장 받아 끌려온 사람도 당연히 있다. 그러나 독일 국방군의 전공 즉 명령을 받고는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그런 명령을 (자의가 있었든 강제적으로든) 수행한 병사 각각의 전공이 곧 명백하게 나치 정권의 이득이 되어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국방군을 징병된 병사 개개인은 잘못이 없네 어쩌네 하면서 철저하게 나치와 분리하여서 꼬리 자르기를 하는 것은, 북한군(=즉 징집 대상/징집 예정인 모든 북한 민간인)을 북한 전체주의와 분리하는 시도만큼이나 파렴치한 짓이라 할 수 있다. 독소전쟁에서 이들에게 죽은 민간인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0만 단위이다. 당시 독일의 기술력이나 전술 등을 중립적인 차원에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하는 것이야 문제가 없지만, 독일 국방군과 그곳에 징병, 군수 형태로 인력을 제공한 독일 민간인들에서 나치를 분리하고 미화를 하는 것은 정말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봐야할 문제이다.
7. 오스트리아로 물타기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사실과, 오스트리아가 현대에도 네오나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현실로 인해, 나치에 대한 책임에서 물타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네오나치 문제는 독일도 오스트리아와 대동소이하며,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다문화, 다민족적 분위기가 싫어했고, 열등감 때문에 독일로 갔으며, 실패한 미대생 아돌프 히틀러를 전쟁과 학살을 벌인 정치 괴물로 키운 것은 엄연히 독일 내의 우경화 분위기였다.히틀러 출생지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당시에는 현지의 유력한 소수민족으로 존재했던 발트 3국, 루마니아 트란실베니아, 아니 심지어 러시아령 볼가 독일인이나 독일계 미국인 출신이었다 한들, 히틀러와 나치가 패악질 친 국가적 기반이 독일이었다면 결국 독일의 책임이 가장 크다. 애초에 히틀러 같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문화주의적 이념과 결코 융화될 수 없었던 인간을 싫어서 뱉어낸 오스트리아 입장에선 단순히 히틀러의 출신지가 오스트리아라는 이유만으로 비판받는 것이 억울할 일이다.[46] 따라서 당연히 모든 책임을 오스트리아에 뒤집어 씌우는 행태는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47][48]
8. 출저
[1] 국군이 정의의 편이었다고 한국 전쟁에서 국군이 저지른 학살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보다 더 심한 학살극을 벌였던 조선인민군의 죄질이 가벼워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진영논리와 좌우를 떠나서 전쟁범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 행위이다.[2] 그 악독했던 일본 제국조차 일제강점기 조선인이나 점령지의 중국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즉, 일본 입장에서도 조선인이나 중국인은 자국의 부족한 노동력과 산업력을 때워 줄 훌륭한 노예였기 때문에, 일본에 충성하되 권리는 제약당하는 2등 시민을 만들려고는 했어도 말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반면 나치 독일은 이미 나치의 등장 이전부터 독일을 위해 충성하던 유대계 독일인들조차 인종적인 이유로 완전히 절멸시키려 했고, 에르하르트 밀히처럼 극소수의 예외는 있었을지언정 수많은 유대계 엘리트들이 자기가 평생 조국이라 믿어왔던 독일에게 버림받은 채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대표적인 예시중 하나가 바로 괴링의 전우이자 1차대전 에이스였던 프릿츠 베크하르트였다. 그나마 그는 괴링의 비호로 수용소에서 탈출해서 외국으로 망명을 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다른 독일계 유대인들은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일제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치 독일의 절멸정책은 바로 그 자신과 동맹들에게도 비수가 되어 돌아왔을 만큼 이해할 수 없는 광기의 발로였고, 오늘날 나치 독일이 3대 추축국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다만 나치의 영향보다 일본의 영향이 큰 아시아권에서는 대부분 그냥 '나치는 나쁘다.' 정도의 피상적 인식 수준에 그치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3] 그나마 여기에 비견될 만한 전역은 태평양 전역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는 미군과 호주군이 강자이다 보니 옥쇄 운운하는 일본군의 기상천외한(...) 자살 행위가 주로 부각된 반면, 동부전선에서는 중반부까지는 독일군이 강자였던 관계로 조직적인 전쟁범죄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독소전의 인명피해는 태평양 전쟁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굳이 따져도 독일-소련 간의 증오심이 더욱 컸다. 소련의 반독 감정이 미국의 반일 감정보다도 훨씬 컸다는 사실은 전후 소련의 대독일 태도와 미국의 대일본 태도의 차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4] 이는 명명백백한 소련의 잘못이며, 소련이 전쟁 초기 나치 독일의 공범자였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독일이 폴란드에서 저질렀던 잔혹사를 살펴본다면, 폴란드나 다른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에 항의할 문제지 독일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카틴 학살조차도 이념적으로 반소 인사들을 숙청했던 것이지, 폴란드인에 대한 완전한 절멸 작전은 아니었으며 규모 역시 그 자체로는 상당했으나 수십만 단위의 학살을 방방곡곡에서 저지른 나치에 비할 바는 아니다. 애초에 당사국인 폴란드에서도 독일이 자국의 비극적인 역사를 명분삼아 전쟁범죄를 정당화하려 한다면 당연히 분노한다.[5] 실제로 소련에서는 이런 식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 문서 참고.[6]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NKVD가 기강을 잡기 위해 식인행위를 한 사람들을 즉결처형한 사례 등은 많이 알려져 있다.[7] 라이헤나우는 6군 사령관이었고 룬트슈테트는 6군이 소속된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다. 따라서 상명하복이라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8] 다름아닌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그러나 라이헤나우가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이후 6군 사령관이 된 다음 이 강조 명령을 폐기했다.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프로이센 원수봉은 버려도 자신의 양심을 버리지는 않았으며, 그 대가로 전후 전범재판에서 처벌받는 대신 오히려 증인으로 참관하였다.[9] 독일 포로 사망자 수는 독일 측 최대 추산조차도 33%, 약 100만 명을 넘기지 않는다.[10] 나치는 인종주의에 의거해 열등인종과의 성행위를 '인종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범죄로 여겼기 때문에, 이런 강간 범죄자들은 증거를 인멸한다는 측면에서라도 살인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11] 심지어 이것은 가해자인 독일 측의 보고서다. 보통 일제의 난징대학살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에서 알 수 있듯 전쟁범죄, 특히 성범죄는 가해자 측이 의도적으로 피해 규모를 쉬쉬하며 축소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 가해자 측에서 너무 많아서 축소하고 쉬쉬하며 적은 규모가 1천만 건에 신생아 75만 명 탄생이다. 실제론 이 몇 배 이상의 강간이 발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12] 소련을 디스해서 미국으로 추방당한 반체제 작가인 솔제니친의 자전적인 소설인 수용소 군도에서도, 스탈린에게 불경죄를 범해 굴라그로 온 주인공의 감방 동료 두 명은 독일 여인을 강간했다가 NKVD에 체포된 소련군 병사였다.[13] 결과론적으로 비슷한 얘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치가 열등인종과의 성행위를 금기시했다는 건 그들을 인종청소하는 건 허용하고, 심지어 장려했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소련군은 현실적인 패권국가로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을지언정, 어쨌든 해방자로 동유럽에 진주했다.[14]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담당하는 법적인 영역이며, 소련군이 이기고 있는 시점에서 전후 전쟁 범죄자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이 가능하리라는 것 역시 이미 명약관화했다. 하다못해 자기 부모를 죽인 직접적인 당사자를 만난 거라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떠한 국제법적 권한도 없는 개인이 복수심에 불타 사적제재를 벌이는 행위는 (정상적인 법치주의가 통하는 국가라면) 처벌받아도 할 말 없는 범죄이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소련 정부에서도 독일 민간에 대한 복수를 금지했던 것이며, 이를 무시하고 독일군에게 당한 화풀이를 독일 민간인에게 풀었던 소련 군인들 역시 죄에 대한 도의적 책임의식을 가져야 마땅하다.[15] 그래서 독빠가 아닌 사람들 중에서도 "히틀러가 그동안 유럽이 저지른 악행들을 덮을 만한 짓을 했으니 유럽은 고마워해야 한다" 이런 농담조의 드립 아닌 드립도 간간히 나온다.[16] 손기정은 안타깝게도 일본 선수의 신분이었다. 히틀러가 손기정을 이미 한참 전에 망한 나라인 대한제국의 국민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17] 예시로 일제강점기의 일본조차도 산미증식계획 당시 잡곡을 들여와서 풀게 하는 등 최소한의 인프라는 살려두려 했다. 반대로 이러지 않고 극단적인 학살을 벌였던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는 피해 당사자인 콩고뿐 아니라 유럽 내 다른 식민제국, 심지어는 벨기에 내에서도 욕을 먹는다.[18] 그래도 혈맹인 일본 앞에서는 나치 입장에선 동양인은 싫은데 그래도 동맹이라 좀 말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치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내놓은 적 있다. '일본인의 조상은 아이누인이다→아이누인은 결국 아리아인이다! 알아먹기 참 쉽죠?'[19] 그러나 병종에 따라서 서부전선에서도 잔혹한 보복 학살극이 벌어졌다. 우선 숨어서 적군 머리통만 따고 다니는 사람의 경우는 제네바 협약의 보호 대상이 아닌지라 서방연합군·독일군·소련군을 가리지 않고 즉석에서 잔혹하게 처형하였으며, 처칠 크로커다일처럼 보병 입장에서 상대하기 짜증나는 강력한 군사장비에 탑승한 승무원들이 생포되면 거의 죽은 목숨이었다.[20] 심지어 바르샤바 봉기 때는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로 잘 짜여진 요새를 때릴 때 쓰는 무식하게 큰것들까지 투입했을 정도였다. 다만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쨌든 비무장 민간인도 조직적 저항을 하는 시점에서 적군으로 간주할 수 있으므로 무슨 무기를 쓰든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항복한 포로나 점령지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대한 게 잘못이지.[21] 소련군 포로의 경우 소수의 견해로 70%까지 잡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57% 정도로 잡는다. 일본군의 경우 중국군을 집계에 넣으면 최대 40%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물론 어느쪽이든 영미권에 비해서 훨씬 많이 죽은건 변함이 없다.[22] 르완다 내전이나 스레브레니차 학살처럼, 전쟁 과정에서 특정 민족에 대한 혐오심과 증오심으로 학살이 일어나는 일은 물론 빈번하다. 그러나 독일처럼 열강의 반열에 드는 국가가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공정화된 학살을 직접 주도한 사례는 현대까지도 전무하다.[23] 하이젠베르크 본인은 자신이 핵개발을 막기 위해서 고의로 사보타주를 했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진위여부는 불명. 한가지 분명한건 독일의 개발자들이 핵무기 개발에 대해서 제대로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는 것이다.[24] 일본, 패망직전 흥남 앞바다서 원폭 실험했다[25] 물론 저 변명을 그대로 믿어주기는 어렵지만, 핵무기 개발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면 저런 변명은 나오지도 못한다.[26] 소련의 핵개발은 1942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소련은 맨해튼 프로젝트 참가자들의 일부를 포섭하여 정보를 빼온 것+소련 과학자들의 연구로 이루어진거지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근거는 없다.[27] 실제로는 독소전쟁이나 식민지배에 관해서는 그리 깔끔하다고 보기 힘들지만, 냉전의 영향과 식민지배에 관한 국제사회의 비교적 관대한 인식 덕분에 독일이 깨끗하게 과거사를 청산했다고만 알려져 있다.[28] 그나마 이쪽은 많이 개선된 편이라 소련의 기여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편이고 반대로 "그냥 노르망디 뚫은 후에 오합지졸들 쉽게 쓸어버리고 엘베 강까지 왔네." 이렇게 서방연합군에 대한 저평가가 일어나는 부작용도 있다. 다만 역시 전쟁범죄 피해는 주목을 못 받는 편이다.[29] 그나마도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이라고 생각하지 집시(총 인구 대비 비율로는 유대인보다 더 많이 죽었다), 사회주의자, 장애인, 성소수자 등도 수백만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항목 참고. 게다가 사실 홀로코스트만 해도 600만 명이 죽었기에 일반적인 학살과 규모의 궤가 다르다.[30] 예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에선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하거나 보인다 해도 딱히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과 SS 친위대와 같은 복장이 멋지다는 이유로 복장의 디자인을 인용을 해서 사용해도 큰 논란이 일어나지 않고 아예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를 카리스마 있는 리더로 미화 하는 것에도 별 반응이 없는 반면, 서구권에선 나치의 사소한 흔적에도 기겁하고 아예 위와 같은 사례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서구권에선 일본 제국의 범죄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며, 욱일기와 같은 일본 제국주의 성향이 강한 상징적인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거나, 심하면 카미카제 돌격과 같은 행위를 남자답고 멋지게 죽는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굳이 극단적인 예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일본을 마냥 '평화의 나라, 와(和)의 나라' 정도로 인식하는 퍼져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31] 어느 나라의 전쟁범죄가 더 악랄했는가의 논쟁은 서로 경쟁할 만한 것도 아니고, 한쪽의 전쟁범죄를 부각하기 위해 다른 쪽을 가볍게 치부하는 것은 그 나라에 희생된 피해자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꼴이다. 일본과 독일 모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저질렀던 여러 전쟁범죄의 멍에를 지고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앞세우며 독일의 전쟁범죄를 묻어가는 행위는 나치 독일에 비해 일본의 전쟁범죄는 별거 아니라는 일본 극우들의 주장과 하등 다를 바 없다.[32] 독일은 유럽연합의 주도국으로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폴란드와도 적어도 과거사 문제로 크게 충돌하지는 않는다. 반면 일본은 한국, 중국 등 주변국과 끊임없이 충돌하며, 특히 한일관계는 비슷한 체제와 문화를 공유하는 선진국들이기에 딱히 적대적일 이유가 없는데도 과거사가 양국 간의 주요 현안으로 남아있다. 국내 관점으로 보면 일본 또한 전후에 간 나오토 담화, 고노 담화 혹은 천황의 공식적 사죄 발언 등의 노력이 있었으나, 국내에선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일반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양국 국민들이나 정치권이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든, 독일이 현실적인 의미에서 과거를 더 잘 '청산'한 것은 맞다.[33] 국제사회에서 독일과 일본에 과거의 나치와 일제를 투영하는 국가는 많지 않다. 게다가 현대 독일과 일본은 과거의 팽창주의적 외교를 펼칠 역량이 거세당한 처지이다. 세계 3, 4위의 경제대국이 이제 와서 굳이 다시 폐허만 남길 전쟁을 벌이려 들 이유도 없겠지만, 미국에 의해 군사적 역량이 제약당한데다 중국과 러시아가 매의 눈으로 견제하는 이상 그럴 의도가 있더라도 무의미할 뿐이다. 때문에, 피해자의 입장에서 독일과 일본의 역사 인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할 권리는 당연히 있지만, 그들을 과거의 파시스트 체제와 동일시하며 비판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공감을 받기 어려운 국내 정치용 프로파간다일 뿐이다.[34] 심지어 일부 극우들은 히틀러가 세계 경제를 점령한 유대인 세력에 맞서 외로이 싸운 투사였다는 식으로 미화한다. 나치가 써먹은 배후중상설 같은 거짓 프로파간다와 판박이이다. 다만 이러한 주장은 너무 나간 주장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음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으며 양지에서는 나치와 이스라엘을 동일시하며 피장파장의 논리를 전개하는 경우가 더 많다.[35] 비슷한 예로 대한민국 군사정권 시기 화교에 대한 추방운동이 있었고, 동남아와 달리 한국 경제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국에 대한 종속을 피할 수 있었다.[36] 이는 팔레스타인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인 경우도 없지 않다.[37] 물론 현대 사회에서 유대인의 기준은 유대교에 대한 믿음이지만, 나치의 기준에서는 어쨌든 혈통이 중요했다.[38] 히틀러의 나치당 정권은 별명으로 제3제국으로도 불린다. 전대 독일제국과 귀족들은 그를 이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한 정당에서 출발한 나치 정권에게는 공산당과 함께 타파할 대상이었으므로, 복식이나 제도를 따라 한 외형적인 사실과는 별개로 사상, 정치적으로 상당 부분 단절되어 있었다.[39] 도의적인 이유를 떠나서, (징병할 만한 인원은 이미 전장에 끌려갔을 테니) 총을 잡지도 못할 적국 노약자 한둘을 살상할 폭탄으로 적국의 군수산업시설이나 기반시설을 파괴하는 것이 훨씬 가성비가 좋다.[40] 다만 이쪽은 일본이 모든 가정을 군수물자 생산 시설로 개조했기 때문에 공포감 조장 외에도 폭격의 목적이 명확했다.[41] 이는 지금도 완벽하지는 않아서 의도치 않게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하곤 한다. 하물며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더더욱 불가능한 이야기다. 디즈니 폭탄항목 참고.[42] 다만 전범임이 확실한 만슈타인과 호트, 룬트슈테트와 달리 클라이스트는 되려 점령지 유화 정책을 편 인물이었다.[43] 클라이스트의 경우에는 아예 말이 안되는 주장은 아니다. 게다가 유고슬라비아에서의 학살에는 반대하였다. 방임죄라는 죄를 짓긴 하였지만 재판 당시의 죄목은 러시아인들을 분열시킨 죄라는, 지극히 소련 중심적인 명분으로 기소당한 것.[44] 사실 소련은 전후 동독 건국과 유지를 위해서라도 나치에 부역한 독일군(독일 국방군 한정)들을 전방위하게 숙청하지는 않았다. 당장 동독군(국가인민군)의 초대 장성들과 지휘관들은 대부분 다 독일 국방군 출신 중 소련에 협조적인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는 서독의 독일연방군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45] 현재 독일에서는 국방군 출신들이 세운 기록 자체는 인정해 주지만, SS는 얄짤없다. 예를 들어 보자면 국방군 출신의 오토 카리우스는 현재 생전에 그가 세운 훈장과 기록은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SS 출신의 미하엘 비트만은? 전적이 말소되었다.[46] 애시당초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대표하던 당시 오스트리아의 왕실 복고주의 반동주의자들은 좌파와 나란히 나치에 저항한 몇 안 되는 오스트리아 내의 반나치 세력에 가담했고, 나치 정권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아 있는 일원들을 집중적으로 감시, 투옥 등 탄압했다.[47] 단,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가 대체로 나치 정권에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는 일방적인 피해자 행세를 하여 비난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이는 이것대로 나치 청산의 일부로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실제 현대인 대부분은 나치의 책임을 전적으로 독일에게 전가하지 오스트리아를 이와 잘 연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치빠들의 변명과 별개로 독일의 일부로서 오스트리아인들이 행한 과거 악행에 대해서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면은 있다.[48] 오스트리아의 여러 장성들과 병력들이 국방군에 편입되어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안슐루스 당시에 오스트리아는 병합을 환영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는 체코와 같이 강대국 놀음에 나라를 잃은 것도 아니고 폴란드, 네덜란드, 프랑스 등과 같이 무력으로 패해 점령당한 것도 아니다. 자국민이 자발적으로 나치 정권의 프로파간다에 감화되어 국민투표를 통해 독일로의 병합에 찬성했기 때문에 나치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 외 타 국가들과 책임의 무게가 다르다. 심지어 나치의 우호적 중립국이었던 스웨덴, 스위스조차 비판받는 판국에 단순한 부역국 정도도 아니고 아예 나치의 공범이었던 오스트리아가 전후 나치의 피해자로 둔갑한 것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