貴賤相婚 | morganatic marriage |
1. 정의
서양에서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배우자와 결혼하는 경우를 말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그런 경우를 예외적인 것으로 지정하여 불이익을 준다는 의미이다.참고로 여기서 ‘자기보다 낮은 신분의 배우자와의 결혼’이란 뜻은 평민이나 천민이 귀족, 왕족과 결혼해 신분상승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왕족이 귀족과 결혼하는 경우, 어떨 때는 귀족이 자신보다 격이 낮은 귀족과 결혼하는 경우도 해당된다. 덴마크 등 일부 나라에서는 귀족 집안의 공식적인 급간이 나뉘어 귀천상혼 배제(불허, 반대)가 적용됐다.
쉽게 말해 왕족은 왕족끼리, 귀족은 귀족끼리 결혼해야 하는 것이다. 왕실의 입장에서는 다소 지체가 낮거나 변방의 후작, 백작 정도의 귀족과 결혼하는 것도 귀천상혼으로 취급하는 일이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더러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나 독일의 호엔촐레른 가문 등에서 그런 결혼관계를 인정하지 않아 상속권을 박탈하는 일이 간혹 존재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엄격하게 따지는 경우는 드물었고, 보통 귀족 집안끼리 또는 왕실끼리 결혼하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독립국의 통치 가문인 경우라면 공작 집안이나 대공 집안이라도 결혼에서는 다른 나라의 왕실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또 일부 통치 가문의 후손인 비통치가문 역시 귀천상혼이 적용되지 않는 통혼 상대로 인정받는 경우가 있었다.(ex: 슈탄데스헤어) 귀천상혼을 통해 태어난 자식은 부모 중 높은 신분의 작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공작 집안의 남자와 백작 집안의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아버지의 작위인 공작 작위를 계승할 수 없었고, 어머니의 작위인 백작 작위만 계승할 수 있었다. 위의 호엔촐레른 본가나 합스부르크 가문 역시 귀천상혼 취급하는 것은 통치가문이 아닌 백작, 후작 가문과 혼인했을 경우가 더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다.
단, 실제로는 슈탄데스헤어인 백작 집안들도 있었으므로 좀 더 복잡하다. 공-후-백-자-남 순서로 높고 낮음을 따지는 오등작 개념 자체가 중세 이래 유럽에서 사용하던 작위 개념도 대충 5단계이니 중국 역대 왕조가 사용하던 오등작 개념을 번역어로 사용한 것이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무조건 공작이 제일 높고 후작, 백작 순서로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중국에서 공후백자남의 5등작이 명확한 서열로 갈릴 수 있었던 것은 천자와 수도를 중심으로 한 봉건 질서와 종법제도를 바탕으로 최상위 공작은 천자 가문의 방계 가족들이 대부분 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의 강대국 초나라는 고작 자작, 통일의 주인공 진나라는 원래 자작이었다가 주나라 천자를 도운 공으로 백작으로 승급하는 등 실제 국력과 작위는 일치하지 않았다.[1][2] 유럽의 작위 개념에서는 번역상 백작이니 공작이니의 문제가 아니라 상위 주군이 수여하여 봉작된 공작인지 독립 영지의 통치 군주인지의 독립성이 중요했다.
유럽의 경우를 보면 당장 공작이라고 해도 규모만 약간 작을 뿐, 독립된 나라를 통치하는 공국의 영주도 공작이고, 왕의 신하인 대영주도 공작일 수 있으며, 차남 이하의 왕자에게는 영지는 없어도 명예직으로 공작의 작위가 주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백작이라도 그냥 백작이 있고 궁정백이나 변경백도 있고 가끔씩은 독립 세력인 백국도 있었으며 이러한 작위마다 각각 명목상의 높고 낮음과 실제 세력의 차이가 있는 것. 결국 귀천상혼 문제 역시 <공작이 백작보다 더 높으니 공작집 자식과 백작집 자식이 결혼하면 귀천상혼> 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해하면 안된다.[3]
그보다는 오히려 (영토가 크든 작든) 통치가문 여부가 더 중요했다. 흔히 싸잡아 다 '귀족'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만, 귀족 중에서도 자신의 영토를 통치하는 '영주'인 귀족과 그런 영주의 가신(신하)인 귀족은 (귀족과 평민 간의 신분격차처럼) 서로 다른 신분으로 여겨졌던 것이다.[4] 말하자면 독일 지역에서 신성로마제국이 형해화되면서 신성로마제국에 속해있던 각 영지들이 실질적인 독립국으로 부상했고, 이런 공국~백국들의 경우 명목상 작위가 낮더라도 '독립된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로써 통치가문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통치가문간의 결혼은 동등결혼이 되는 것이다. 물론 또 이 역시 나폴레옹이 쓸고간 뒤 군소 영주국들이 주변 대국에 합병되고, 이로 인해 영토를 잃게 된 옛 통치가문들을 슈탄데스헤어로 인정하여 <실질적인 통치가문은 아니지만 통치가문과 동등하다>고 관습적으로 인정해 주긴 했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는 등 복잡한 변화가 있긴 하다.
왕위 계승의 경우도 마찬가지. 정부나 첩과는 달리 정식 혼인인데 유럽 귀족이나 왕족들이 사생아를 많이 낳는 바람에 혼동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귀천상혼은 법률상으로는 유효한 결혼이다.
귀천상혼의 우리나라식 표현으로 자신 기준으로 배우자가 낮은 신분이면 낙혼(落婚) 또는 강혼(降婚)이라는 단어를, 자신 기준으로 배우자가 높은 신분이면 앙혼(仰婚) 또는 상혼(上婚)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또한 개념 자체는 다르지만 공주나 옹주의 혼인을 지체 낮은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이라 여겨 하가(下嫁)라고 칭했다.
귀천상혼의 반대의 개념은 동등결혼(equal marriage), 등족결혼(等族結婚). 동질혼(homogamy) 문서 참고. 끼리끼리 결혼한다는 뜻이다.
2. 유래
게르만족의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게르만족은 토지와 신분을 남자에게만 균등하게 상속했는데, 이러한 결과로 나중에는 공작의 모든 남계 후손들이 공작을 칭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따라서 귀족의 수를 줄이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는데, 이것을 위해 고안된 상속법칙이 귀천상혼이다.예를 들면 두 공작 가문에 각각 아들 둘 딸 둘이 있어서 각각을 상대방 가문에게 결혼시키면, 비록 인구, 가구의 절대 수는 2배로 늘었으나, 4명의 자녀가 평균적인 출산율이라고 가정하면 타 계층 대비 상대적인 공작의 숫자는 그대로 유지된다. 헌데 이 8명 중 절반이 더 낮은 신분의 배우자를 얻을 경우, 공작 커플은 두 커플인 반면 부모 중 한 명만 공작인 커플은 네 커플이 된다. 귀천상혼에 대한 제한[5]이 없을 경우 공작(의 후계자)의 숫자가 타 계층대비 증가하기 때문에 개별 파이 사이즈가 줄어듦을 알 수 있다.
왕의 배우자가 된다는 것은 막대한 권력을 얻는 수단이 될 수 있었으므로, 여러 나라에서 제한된 수의 가문이 왕비족(王妃族)으로 지정되거나 암묵적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사실 근세 이전에는 정확히 정립되지 않은 개념으로 18세기 후반 ~ 19세기쯤에 가야 개념이 완전히 정착된다. 그 이전에는 관습적으로 비슷한 신분의 상대와 결혼해 왔고, 가끔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의 상대와 결혼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아예 평민과의 결혼과 같이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동등결혼으로 인정되었다.
3. 서양의 나라별 사정
3.1. 독일어권 나라들
귀천상혼의 원조 지역답게 매우 엄격한 귀천상혼 배제원칙을 적용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동등결혼에서 태어난 남계 후손이 완전히 단절되었을 경우에 귀천상혼한 남계 후손이 존재하더라도 여계 후손에게 우선권을 주는 경우가 존재했다. 일례로 20세기 초에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다스리던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은 남계 후손이 단절되자 신주단지처럼 지키던 살리카법[6]까지 어겨가면서 마리아델라이드 여대공을 즉위시켰다.[7] 절대적 장자상속법이 정착된 지금에도 룩셈부르크는 귀천상혼을 적용하고 있지만, 예전처럼 신분을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니라 스캔들이 될 만한 결혼에 대해 적용한다. 1987년 당시 장 대공의 차남(셋째)이자 앙리 대공 (당시 대공세자)의 첫째 동생인 장이 프랑스 여성과 결혼할 때 보르보네파르마 가문 본가의 카를로스 우고[8]가 귀천상혼 논란을 제기하며 태클을 걸어 8년간 보르보네파르마 가문 본가와 절연하고 왕조 명칭을 모계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으로 고정시켜버린 사례가 있고, 2006년 앙리 대공의 셋째아들인 루이도 19살에 여자친구와 사고를 쳐서 속도위반으로 자식을 낳고 결혼해서 귀천상혼으로 규정되어 계승권을 포기했다. 이 둘은 결국 나중에 이혼하면서 계승권도 잃고 체면도 구기는 망신을 당했다.[9]그러나 바덴 대공국의 체링겐 가문처럼 동등 결혼에서 태어난 직계 남성 후손 계통이 끊어지자 여계 계승 대신 귀천상혼 계통으로 상속한 경우도 있었다. 카스파 하우저가 여기 얽혀있는 이야기. 동등결혼 출신 남계가 완전히 단절되었을 때 여계후손과 귀천상혼 계통의 남계후손 중 어느 쪽에게 우선권을 주는지에 대한 절대적인 원칙은 없었고 왕가마다 다르게 규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엄격한 집안에서는 여계 후손과 귀천상혼 후손을 모두 제외하고 머나먼 친척을 찾는다. 이 규칙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조카이자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자녀들에게는 계승권을 주지 않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아내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는 통치 가문의 왕녀가 아니라 백작 영애였기 때문에, 그녀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혼인은 명백한 귀천상혼(貴賤相婚)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황태자 본인도 이 귀천상혼을 이유로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할 수 있었지만, 이전의 계승권자이자 페르디난트의 사촌형인 루돌프 황태자가 스캔들에 휩싸인 끝에 의문스러운 자살로 사망해서 여론이 매우 뒤숭숭했기 때문에 이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황태자 본인의 계승권은 용납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황태자였지만 조피는 태자비가 아닌 호엔베르크 여공작 작위를 받는데 만족해야 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도 모두 제위계승권이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결혼식에도 의붓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와 그녀 소생의 이복여동생 두 명을 제외한 황족들은 아무도 참석해주지 않았고, 조피가 공식 행사에 참석할 경우 가장 서열이 낮은 대공녀보다도 더 아래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남편 근처에 가보기는 커녕 얼굴도 보지 못할 정도였다. 이는 유럽 왕실에서 거의 내연녀와 그 소생의 사생아를 대하는 수준의 대우였고, 페르디난트 가족과 황실 본가의 관계는 상당히 불편했다.
페르디난트는 이런 아내의 위신을 살려주기 위해 일부러 공식 행사에 아내를 자주 데리고 참석하였으나, 이 때도 본인이 황태자 자격으로 나가버리면 '수행원' 조피가 까마득히 먼 곳에 처박혀버리기 때문에 굳이 황태자보다 격이 낮은 직함을 택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10] 예컨대 사라예보 사건 당시에는 날짜도 결혼기념일이기도 했거니와 페르디난트가 황태자가 아닌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 총감찰관' 자격으로 참관한 것이므로 조피와 함께 다니는 것이 용인될 수 있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가문 중의 하나였던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의 예도 있다. 자식이 없던 선제후 카를 2세가 죽자 그의 아버지 카를 1세 루트비히가 남긴 귀천상혼의 아들(즉 카를 2세의 이복동생들)이 매우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20촌에 가까웠던 남계 친척인 필리프 빌헬름이 팔츠 선제후국을 물려받았다.[11]
이처럼 살리카 법+귀천상혼 배제의 까다로운 상속법을 적용시킨 독일에서는 정말 먼 친척이 작위를 물려받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독일에서는 균등상속을 받았기 때문에 먼 친척이라 해도 가문의 다른 영지를 상속받은 어엿한 제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다 근친결혼을 하다보니 부계로는 굉장히 멀어보여도 여계를 타고 실제 촌수를 확인해보면 생각보다 훨씬 가깝다.[12]
우리가 연필회사로 잘 아는 파버-카스텔도 원래 파버 여남작과 카스텔 후작의 결혼으로 귀천상혼이 되어 파버-카스텔 백작위가 탄생하였다.
러시아 제국의 로마노프 왕조[13] 같은 경우에는 알렉산드르 1세의 원래 후계자는 그의 첫째 남동생인 콘스탄틴 대공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틴 대공은 아내인 안나 표도로브나[14]와 이혼하고 폴란드 귀족 출신인 요한나 그루친스카와 귀천상혼으로 재혼하면서 계승권을 잃게 되었다. 이로 인해 차기 황위는 알렉산드르 1세의 둘째 남동생인 니콜라이 1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한 직후 니콜라이 1세와 콘스탄틴 대공이 서로 황위를 양보하는 통에, 한동안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다가 결국 니콜라이 1세가 러시아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전부터 콘스탄틴 대공을 따르던 군부 내 청년 장교들이 위로부터의 개혁을 주장하며, 콘스탄틴 대공을 옹립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니콜라이의 즉위식 때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기도 했다. 이를 데카브리스트의 난이라고 한다.
계승에서 배제되는 것 외의 다른 차별도 있었다. 필립 마운트배튼의 모계 조상이 되는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는 여동생 헤센의 마리의 시녀 율리아 하우케와 야반도주로 결혼하면서, 자신이 의탁하고 있던 니콜라이 1세의 러시아 제국에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군 소장이던 그는 파면 조치로 군 경력이 잘렸을 뿐만 아니라[15] 모국인 헤센 대공국이나 오스트리아 제국 어느 곳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아 스위스에서 가족들이 개인적으로 주는 생활비를 받으며 연명하다가 러시아가 파면을 전역으로 정정해주는 조치를 해준 이후에야 오스트리아 제국군에서 군 경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3.1.1. 귀천상혼의 예외
슈탄데스헤어 가문 출신은 명목상 귀천상혼이 아닌 동등한 결혼으로 취급되었다.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된 헤센카셀 가문, 하노버 왕조 역시 외국 왕실과의 동등결혼 자격이 있다. 헤센카셀 가문의 경우 친척인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이 다스리는 헤센 대공국이 독일 제국의 구성국으로 존속하고 있었고 하노버 가문 역시 영국 왕실의 친척이기에 나라가 없어져도 왕족혈통으로 인정받았다. 1871년 독일 제국 성립 이후에 그 구성국이 된 왕국들(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 6대공국, 5공국, 7후국 왕공실들은 프로이센에 합병된 게 아니라 독일 제국의 연방 구성국이었으니 이들 또한 외국 왕실과의 동등결혼 자격이 있었다.상기한 사례들 외에도 일반적으로 폐지된 왕공실 출신의 후손들은 대개 귀천상혼 문제에서 재위중인 왕가와 동등하게 대우받는다. 상술한 헤센카셀 가문의 사례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가인 토스카나 대공가, 보르본 왕가의 분가인 파르마 공가나 양시칠리아 왕가의 경우처람 폐지된 왕공가가 재위 중인 왕가의 분가인 경우도 있고,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유럽의 왕공가들은 대개 복잡한 혈연관계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3.2. 프랑스
프랑스의 경우는 법적으로 귀천상혼이 엄격하게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관습적으로 귀천상혼을 피했다. 프랑스 귀족들은 결혼하기 전에 프랑스의 군주나 자기가 모시는 영주의 허가를 받았어야 했기 때문에 귀천상혼이 알아서 걸러졌다.군주의 경우에는 훗날 앙리 2세로 즉위하는 오를레앙 공작 앙리와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결혼이 있었다. 다만 이 때는 오를레앙 공작 앙리의 형인 프랑수아 왕세자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카트린이 왕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후 앙리 2세가 즉위할 때 카트린의 신분이 문제가 되긴 했으나, 정해진 규정은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결혼으로 인정되었다. 사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부계로는 상인의 후손이라 천대받은 메디치 가문이었지만[16] 모계로는 엄연한 프랑스 왕족의 피를 이어받았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외할머니 잔 드 부르봉은 카페 왕조의 방계인 부르봉 가문의 딸이었으며[17] 잔의 딸 마들렌 드 라 투르 도베르뉴는 그 당시 이탈리아에 눈독을 들이던 프랑스 국왕의 뜻에 따라 교황의 조카였던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에게 시집을 가서 낳은 외동딸이 바로 카트린이었다. 로렌초 2세 데 메디치 또한 삼촌에게 '우르비노의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로렌초가 죽은 이후 우르비노는 다른 가문에게 넘어갔으나 우르비노 작위는 명목상으로 카트린에게 물려졌고 카트린은 '우르비노 여공작'으로써 앙리에게 시집갔다. 즉, 부계 혈통으론 귀천상혼일지 몰라도 모계 혈통으로는 모양은 어느정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앙리 3세의 경우 로렌의 루이즈 공녀와 결혼했는데, 루이즈는 격이 낮다는 말이 간혹 나왔을 뿐이고 역시 동등결혼으로 여겨졌다. 정확히 말해 루이즈 왕비가 격이 낮다고 여겨진 건 가문과는 관계가 없었다. 통치권과 거리가 먼 로렌 공작의 차남의 딸에다가 아버지가 두 번이나 재혼한지라 3살 많은 두 번째 새엄마 아래에서 신데렐라마냥 구박받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감상적이고 즉흥적인 걸로 유명했던 앙리 3세가 연인 콩데 공작부인[18]과의 결혼에 실패하고 결별한 후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관식을 치르러 가는 길에, 가족 여행 중이던 루이즈와 잠깐 만난 후에 갑작스레 청혼한지라 원래의 신부후보들 측에서 투덜대면서 했던 말들이었다.
로렌의 경우 엄연한 통치가문으로 로렌 가문 일원들은 다른 나라의 왕족들과 결혼이 가능하다.[19] 실제로 '격이 낮은' 가문은 로렌 가문이 아니라 그 분가인 기즈 가문으로, 통치가문보다 반 단계 정도 낮은 Foreign Prince[20] 대우를 받았다. 일례로 로렌 공작 샤를 5세[21]는 절친한 벗인 레오폴트 1세의 이복 여동생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했고 그 아들인 레오폴드 드 로렌 공작은 루이 14세의 조카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22]과, 손자인 프랑수아 에티앵 드 로렌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해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가 되었다. 이외에도 프란츠 1세의 여동생 엘리자베트 테레즈는 루이 15세나 본인의 외사촌 오를레앙 공작 루이[23]와 혼담이 오갔지만, 프랑스 수상인 콩데 공작에 의해 무산된 후 사르데냐 왕국의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와 결혼했다.
훗날 루이 14세의 경우 마담 드 맹트농과 비밀결혼을 했고, 서자(정확히는 사생아)들에게 계승권을 주려고 시도했던 것을 생각하면[24] 귀천상혼을 뭔가 피해야 할 금기이긴 한데 법적으로 규정이 안 되어 있는 관습으로 여겼던 것 같다.[25]
3.3. 영국
유럽 국가면서도 역사 내내 귀천상혼 법이 존재하지 않은 사례. 애초에 영국은 귀족이 매우 적었고[26] 엄격한 장자 상속제가 적용되었기에 공작의 자손이라도 장자만 후임 공작이 될 수 있었다.[27] 또한, 정식으로 작위를 잇기 전에는 엄밀히 말하면 평민으로 쳤기 때문이었다.[28] 헨리 8세만 해도 6명의 왕비 중 단 둘[29]만이 통치가문 출신이었다. 또 다른 예로 제임스 2세와 클라렌든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30]의 딸 앤 하이드[31]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2세와 앤이 여왕으로 즉위한 것을 들 수 있다.물론 과거 유럽에서 혼인동맹은 주요 외교수단 중 하나였기에, 영국도 차기 계승권자나 계승서열이 높은 왕족은 외국 왕족과 혼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귀족이나 젠트리 계층의 여인이 왕비가 되는 일은 매우 드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나라에 비해 신분 차이가 큰 결혼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가 1772년에 당시 영국의 국왕 조지 3세가 소위 1772년 왕실혼례법(Royal Marriage Act of 1772)이란 것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군주의 허락 없이 이뤄진 왕위계승권자의 결혼은 합법적이지 않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이 법이 사실상 귀천상혼을 강제하는 기준이 되었다.[32][33]
다만 해당 법은 독일계 나라들의 경우와 달리 어찌됐든 군주가 인정하는 결혼이라면 배우자의 신분이 어떻든간에 합법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이후로도 다른 나라면 빼박 귀천상혼으로 규정되었을 결혼이 영국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기도 했다.
일례로 조지 5세의 아내이자 에드워드 8세와 조지 6세의 모후인 메리 왕비(테크의 메리, Mary of Teck)는 독일 뷔르템부르크 왕가의 귀천상혼으로 만들어진 테크(Teck) 공작 가문 출신이었다.[34] 다른 나라였으면 왕족과 결혼하지 못했겠지만 귀천상혼의 개념이 그다지 없었던 영국이었던지라, 조지 5세와의 결혼은 동등결혼으로 인정되었고 메리가 낳은 자식들도 모두 적자로 인정받았다. 사실 당시에도 메리의 친정에 대해 귀천상혼 출신이라는 지적이 많았으나, 시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대대적으로 밀어준 결혼이라서 아무도 크게 반발하지 못했다. 원래 조지 5세의 형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장손인 앨버트 왕자와 약혼했으나, 앨버트 왕자가 독감으로 일찍 요절하는 바람에 형사취수(?)로 조지 5세와 결혼했다. 메리 왕비의 며느리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도 백작 가문 출신으로 조지 6세와의 결혼은 마찬가지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35] 오히려 메리 왕비를 비롯한 왕실에서도 '이런 처자라면 버티(조지 6세의 애칭)와 충분히 결혼시킬 만 하다'라며 찬성해서 결혼이 이뤄진 것. 게다가 영국의 백작은 그 근본이 부족의 족장(Earl)이기 때문에, 유럽만큼 왕실과의 결혼과 트러블이 생길 일이 많지 않았다. 조지 6세의 형인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인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퇴위한 것도 귀천상혼이라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왕실에서 에드워드 8세와 월리스 심프슨의 결혼을 극렬히 반대한 이유는 그녀가 미국인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한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이혼녀인데다 재혼한 남편을 두고 대놓고 에드워드 8세와 불륜을 저지르는 등 지저분한 사생활을 영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국왕이 수장으로 있는 성공회에서도 원칙적으로 이혼 후 재혼을 금지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찰스 3세의 결혼은 귀천상혼으로 취급받을 뻔했으나, 역시 귀천상혼 배제의 개념이 없는 영국인지라 이와 상관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영국의 전 왕조이자 하노버 왕국의 전 왕조였던 하노버 왕조도 20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독일식 귀천상혼제를 버리고 가문의 수장이 인정하는 결혼이면 동등결혼으로 인정해주는 영국식(?)으로 바뀌었다.
3.4. 그 외
- 사실 근대의 거의 모든(전부라고 해도 좋다) 유럽 왕실에서는 귀천상혼 배제 관행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영국이야 꽤 오랫동안 변방 섬나라로 취급받았다. 러시아나 그리스, 스페인의 경우처럼 귀천상혼 배제 관행이 원래 없다가 상속 등에 의해 왕조가 다른 왕가로 바뀌면서 그 왕가가 가지고 있던 귀천상혼 배제 풍속을 들여오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리스 왕국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국왕 알렉산드로스 1세는 통치 가문의 공주가 아니라, 자국내 파나리오테스 중에서도 가장 신흥 가문에 속하는 마노스 가문의 아스파시아 마노스와 결혼했다. 때문에 아스파시아는 Queen이 되지 못하고 princess 칭호를 받았다.[36] 둘 사이에선 유복녀인 딸 알렉산드라만 있어서 왕위를 물려받진 못했지만, 설령 알렉산드로스가 아들을 낳았어도 그리스 왕국의 왕이 되었을 가능성은 낮다.[37]
- 20세기 이후 대부분의 유럽에서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귀천상혼도 대부분 자연스례 폐지되어서 간혹 어이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왕족과 결혼하는 일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대부분 신분의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회나 가문 수장, 종친 회의 등에서 허가를 받지 못한 결혼을 귀천상혼으로 규정, 가문 계승권을 박탈하는 식으로 한다.
- 동로마 제국의 경우는 황제의 혈족을 외국 왕족과 결혼시켜 제위를 위태롭게 하기보다는 국내 귀족과 결혼시키는 쪽을 압도적으로 선호했다. 당장 바실리오스 2세의 의정서에서 외국에 절대 내보내서는 안 될 3가지 중 2가지[38]가 이와 관련된 것이다. 이 경우 해당 귀족 가문이 제위를 넘볼 여지가 생기지만, 그건 어쨌건 국내 문제이니 말이다. 로마 제국에서 황제 자리는 혈통 계승도 아니었고 사위가 제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흔했다.[39] 사실 이런 특징은 동로마 제국뿐 아니라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나 조선 왕실 등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즉 국내에서 왕권이 강한 나라일수록 외국의 왕조와 왕실 결혼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귀천상혼 배제는 하나의 광역 문화권 내에서 동등한 왕조 여럿이 영역을 분할하던 서유럽의 특수한 풍습이라 보는 것이 옳다.[40]
4. 동양의 경우
사실 동양에도 귀천상혼과 비슷한 개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근대 이전까지 전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다 비슷하긴 했다.- 신라의 경우 골품제 아래에서는 다른 골품끼리 결혼하면 자식이 부모 중 낮은 신분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이 정설로, 일반적인 동아시아식 왕조 형태보다는 유럽의 그것에 가깝다. 이것 때문에 성골이 매우 희귀해진 6~7세기에는 근친혼이 자주 이루어졌다. 남녀 차별보다 골품 차별이 더 견고했기 때문에 남성 성골이 사라진 뒤에는 여성 성골이 후계자가 되면서 한국사에 전례없는 여왕도 등장했으며, 여성 성골까지 소멸하고 나서야 진골 남성이 즉위할 수 있었다. 물론 김춘추도 여성 성골이 죽을 때까지 놀고 있었던 게 아니라 김용수, 김춘추 2대에 걸쳐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동륜태자파[41]와 정치적으로 타협하는 동시에 수장인 김춘추가 직접 외교 전선에 뛰어들고, 비담같은 반대파들을 척결하는 등 온갖 고생을 하고 나서야 겨우 왕위를 손에 넣었다. 이러고도 결국 성골로는 인정받지 못하여 진골로 즉위할 수밖에 없었으니 골품의 벽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 수 있다.
- 고려의 경우 왕족 남성이 귀족 여성과 혼인한다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의 신분이 귀족이 되는 건 아니었으나, 여성의 상속권도 인정했기 때문에 왕이 되는 데엔 어머니의 신분이 생각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왕의 자식이라도 어머니가 천출이면 출가시켜 버렸고, 왕의 딸이 시집가면 외손이 왕씨 성을 물려받는 사태가 벌어질까봐 왕족들 사이에선 종친 간의 혼인(족내혼)이 빈번하게 행해졌다. 그러다 충선왕이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15개 가문의 재상지종(宰相之宗)을 선정하고 이 가문만 왕실과의 통혼을 허락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공민왕이 종친의 딸인 3비 익비와 혼인하면서 익비의 성을 바꾼 거나, 방계 왕족들 사이에선 종친들 간에 혼인(족내혼)한 사례가 있는 걸 봐선 철저히 지켜진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저 때부터 족내혼을 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 조선의 경우 초기에는 양천제로 인해 양반과 상민의 정식 혼인이 법적으로는 허용이 되었고 그 자식은 적자로 취급받을 수 있었으되, 정부인의 자식인 적자와 첩의 자식인 서얼의 차이가 존재했다. 하지만 양반 제도가 정비되고 점차 반상제로 바뀌면서 자연히 양반 집안끼리만 혼인하는 풍습이 정착되었고, 양반과 상민이 혼인하는 것은 상민 여성이 양첩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한편 천민과의 혼인은 일천즉천법이라고 해서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천민이면 자식 또한 천민으로 규정하였다. 다만 예외로 천첩이라 하여 천민 신분으로 양반의 첩이 될 경우 자식은 중인 신분인 얼자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 양인의 수가 지나치게 줄어들자 노비종모법을 제정해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 또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양반 계층 내에서의 통혼은 법적으로 제한이 없었다. 유력 명문가끼리 통혼하는 사례가 있긴 했으나 양반 계급이 공식적으로 분화되지는 않았다. 조선 왕실의 경우 법적으로 왕비는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나 간택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 때문에 실제로는 몇몇 유력 가문의 자제로 후보가 좁혀지는 사례가 많았다. 간택 후궁도 이와 비슷하다. 예외로 후궁 중에는 본래 궁녀나 비자였다가 국왕의 승은을 입고 후궁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있었다. 정실 왕비와 후궁의 자녀들 또한 각각 적자와 서자로 차별하였다. 하지만 후궁의 자녀들도 계승 순서에서 밀릴 뿐, 왕위 계승권 자체는 있었다. 또한 후궁의 자녀와 그 후손 또한 사대부 가문으로 인정받았다.
- 일본도 한때 귀천상혼 배제 관행이 존재했다.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1947년 사이 시행된 '舊 황실전범'에 따르면, 황족은 같은 황족이나 화족과만 결혼할 수 있었다. 특히 황실 직계의 정실 부인(황태자비, 황후)은 반드시 같은 황족이나 화족 중 고셋케(五攝家) 가문 또는 왕공족 출신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다만 이쪽은 서자의 계승권을 인정했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의 시행으로 화족들은 평민 신분으로 전락했다. 이어 10월 14일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들을 제외한 구황족이 황적이탈했다. 그래도 그들은 그들끼리만 결혼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굳게 지켜오고 있었다. 그런데 1959년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42] 출신인 쇼다 미치코와 연애결혼을 하면서 이 견고한 철옹성벽이 깨졌다. 물론 미치코 황태자비의 황실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40년 동안 갖은 시집살이와 모욕과 학대를 당했고, 황후가 된 뒤로도 고생하다가, 2000년 시어머니 나가코 태후가 사망한 후에야 겨우 좀 편안해졌다. 그러나 이후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의 2남 1녀도 모두 평민과 결혼하는 등, 일본 황실에서도 평민 사위/며느리를 맞이하는 일이 보통으로 되었다.
- 중국의 경우 서유럽처럼 하나의 광역 문화권 내에서 동등한 왕조 여럿이 영역을 분할하던 춘추전국시대만 하더라도 정실 배우자는 다른 제후국 공실에서 찾는 경우가 많았다. 이성(異姓) 제후국의 경우 주 천자의 딸에게 장가들거나. 다만 유럽과 다른 점은 서자도 왕/공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공자도 "諸侯는 不下漁色이라"고 했겠는가? 하지만 시황제에 의해 중국이 통일된 이후 상황은 급변했는데, 천하가 통일되었으니 자연히 '동등'하게 통혼할 다른 왕실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대 중원 왕조는 귀족과 누대에 걸친 명문집안끼리 통혼을 하고, 왕실의 배우자도 귀족명문집안에서 찾았다.[45] 당나라까지는 귀족 사회였기 때문에 폐쇄적인 혼인집단을 유지했고, 송나라에서는 신흥사대부 가문으로 확대되었지만 명문가 간의 통혼은 여전했다.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와 청나라의 경우, 몽골족과 만주족 간의 통혼이 장려되었고 한족과의 통혼은 기피되었다. 다만, 명나라의 경우 황실은 국초를 제외하면 귀족이나 명문가가 아니라 서민층에서 배우자를 맞이하는 관례가 정착되었다.[46] 물론 일반 사대부 가문에서는 그들끼리 혼인을 하였다.
5. 귀천상혼으로 유명한 인물
- 에드워드 8세
영국 윈저 왕조의 전 국왕. 현대의 귀천상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 미국인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스스로 영국의 왕위에서 퇴위했다. 다만 해당 문서에 나오듯이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할 정도로 영국 왕실 및 내각에서 결혼을 강하게 반대한 이유는 심프슨 부인의 신분 문제보다는 사생활 문제가 더 컸다.
-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로서 일국의 왕녀와의 혼인이 당연시 됐으나, 놀랍게도 프란츠가 결혼한 여인은 일개 백작 딸에 불과한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였다.[47] 이 때문에 프란츠와 조피의 2남 1녀도 황위 계승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어머니의 귀족 작위만 물려받았다.[48]
- 카롤 2세
루마니아의 국왕. 결혼 전부터 사생활이 워낙 문란하여 지지 람브리노(1898~1953)라는 여성과 사귀면서, 카롤 람브리노(1920~2006)이라는 사생아까지 낳았다. 이후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와 결혼해 적자인 미하이 1세를 낳았지만, 마그다 루페스쿠라는 여성과 대놓고 동거하며 불륜을 저지르다가 이혼당한다. 이런 추태로 아버지 페르디난드 1세와 국민들의 신뢰를 잃고, 왕위계승에서 배제당해 페르디난드가 승하하자 아들 미하이 1세가 대신 즉위한다. 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권모술수로 아들을 쫒아낸 뒤 본인이 다시 즉위했다. 결국 왕위에서 쫒겨나서 정착한 망명지에서 마그다와 결혼까지 한다.
- 루트비히 빌헬름
바이에른 왕국의 공작.[49] 바이에른의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외손자로 방계라 해도 엄연한 왕가의 후손이었지만, 극장 여배우 헨리에트 멘델과 딸을 낳고 둘째를 임신하자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1859년 바이에른의 왕위 계승권과 공작위 계승권까지 포기했다.[50] 여동생이 그 유명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로 그녀는 오빠의 사생아 딸을 귀여워했는데, 이 조카딸이 바로 루돌프 황태자와 마리 폰 베체라의 밀회를 주선하다가 그들의 자살로 궁정에서 쫓겨난 라리쉬 백작 부인이다. 이 일로 엘리자베트는 조카와 그 가족들까지 손절하고, 영원히 이름조차 불러선 안될 자로 선언했다.
-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의 4남으로,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 헤센의 마리의 오빠이기도 하다. 여동생이 시집간 러시아 제국에서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마리의 시녀이자 백작의 딸 율리아 하우케[51]에게 반해 그녀와 야반도주하여 결혼했다. 그래도 율리아는 알렉산더의 형인 헤센 대공 루트비히 3세에게 바텐베르크 공비 작위를 받아, 바텐베르크 가문을 창시했고 4남 1녀의 자식들을 낳으며 평생 알렉산더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살았다. 알렉산더와 율리아의 장남이 바로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의 외할아버지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이며, 3남이 영국의 베아트리스 공주의 남편인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다. 특히 루트비히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와 결혼하고, 하인리히는 빅토리아 여왕의 딸 베아트리스 공주와 결혼하는 등, 아들들이 하나같이 혼사를 잘 맺은 걸로 유명하다.[52] 이윽고 알렉산더의 손녀 대에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비, 스웨덴의 왕비, 스페인의 왕비까지 배출하는 등, 바텐베르크 가문은[53] 매우 번성한다.
- 쿠를란트 공작 카를
귀천상혼한 인물 중 뒷이야기가 매우 극적인 일화의 주인공.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인 아우구스트 3세의 3남으로, 카를로스 4세와 루이 16세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엄연한 왕공가의 자제였지만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의 공작으로 잠시 재위하던 기간인 1760년에 폴란드의 백작 출신인 프란치슈카 크라신스카와 비밀결혼을 했다.[54] 슬하에 딸 1명을 두었는데, 이후 이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사보이아 왕가의 방계 가문인 카리냐노 분가 출신의 카를로 에마누엘레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고, 그 중 아들인 카를로 알베르토는 뒷날 사보이아 왕가의 직계가 단절된 후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이후에 성립된 신생 이탈리아 왕가의 직계조상이 되었다.
6. 영향
- 귀천상혼을 배제하고 동질혼을 추구하던 특성상 결혼을 할 수 있는 집안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유럽 왕가들은 근친혼이 심해졌다. 가끔 한미한 가문이 높은 계급의 귀족이 되어서 새로운 혈통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으나, 이 경우도 세대가 흐르면 결국 근친혼을 하게 되었다. 독일은 오랫동안 많은 독립된 소국들로 분립되어 있었던 터라 비교적 나은 편이다. 그렇다보니 유럽 여러 왕실에서 독일 왕공실 출신 배우자와 결혼한 경우가 많다.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이 러시아 황실로 유전된 것도 이런 외국 왕가들 간 혼맥의 결과물이다.[55] 게다가 그 혈우병으로 인해 러시아 혁명까지 일어났으니 엄청난 나비 효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를 기준으로 볼 때, 친외가 따지지 않고 노르웨이의 하랄 5세는 6촌이자 8촌,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2세, 스웨덴의 칼 16세 구스타프,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 벨기에의 알베르 2세, 룩셈부르크의 앙리 대공과는 8촌이다. 여담으로 엘리자베스 2세와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은 서로 8촌, 7촌관계이다.[56]
- 유럽의 여러 왕가가 혼맥으로 서로 연결되어 멀고 가까운 친척 관계인 경우가 많다보니 왕가의 대가 끊기면 외국 친척 왕가의 사람을 왕으로 모셔오기도 했다. 아예 생판 다른 외국의 왕가에서 모셔오기도 하고, 상관없는 다른 나라의 계승권을 주장하고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사례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57]
- 나라별, 가문별로 귀천상혼 기준이 달랐기 때문에 적용방식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58] 그래서 유럽 왕실 족보를 윗 세대로 올라가서 보면 후손은 군주인데, 조상 중에 시골의 기사나 심지어 평민이 있는 경우도 흔하다.
- 칼 14세 요한이 즉위한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의 경우는 벼락출세한 미천한 가문이라는 악평을 면하기 위해 귀천상혼 배제 원칙과 살리카법을 엄격하게 적용했다.[59] 그 결과 왕위를 계승한 후손이 얼마 남지 않아 버리는 바람에[60] 결국 귀천상혼 배제와 살리카법을 둘 다 폐지해 버리고 절대적 장자 상속법(남녀 구분 없이 먼저 태어난 왕자나 공주에게 계승권을 주는 계승 법칙)으로 계승 규칙을 바꾸었다.
- 최근의 귀천상혼 사례로는 벨기에 왕 레오폴드 3세의 두 번째 아내인 레티 공비 릴리안 바엘이 있다. 레오폴드 3세와 릴리안 바엘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에 속도위반으로 결혼했는데 릴리안 바엘은 미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왕비 칭호를 받지 못했고 그녀가 레오폴드 3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3명의 자식들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릴리안 바엘의 아이들은 나중에 여러가지 트러블[61]을 일으키면서 벨기에 왕실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어찌 보면 릴리안 바엘의 자식들에게 계승권이 없었던 게 다행일지도. 아이러니하게도 릴리안 바엘을 레오폴드 3세에게 소개시켜 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였다. 사실 릴리안 바엘의 자식들이 장성한 뒤에 일으킨 사고가 문제였지, 레오폴드 3세와 릴리안의 재혼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레오폴드 3세는 릴리안 바엘을 만나기 2년 전에 이미 아스트리드 왕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해서 홀아비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레오폴드가 재혼한다고 할 때 아스트리드 왕비의 부모이자 레오폴드 3세의 전 장인장모인, 스웨덴의 칼 왕자와 덴마크의 잉에보르 공주도 툭하면 이혼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외손주들도 환영하는 사별 후 재혼이 무슨 문제가 되냐고 벨기에 국민들을 향해 쓴소리를 했다.[62] 여담으로 릴리안은 죽기 전 말년에 여생을 보낸 워털루 인근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왕실의 체면 때문에 남편과 남편의 전처와 같이 합장되었다.
- 귀천상혼으로 인해 왕가에서 파생되어 생겨난 귀족 가문도 상당히 있다. 예를 들면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호엔베르크 공가(1900년)[63], 헤센 대공가(헤센 대공국)로부터 바텐베르크 공가(1858년)[64], 뷔르템베르크 왕가로부터 테크 공가(1871년. 1981년 단절)[65], 우라흐 공가(1867년)가 파생되었다.
- 스페인의 전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즉위에도 귀천상혼이 영향을 끼쳤다. 원래 계승자인 후안 카를로스의 백부 아스투리아스 공 알폰소가 귀천상혼으로 결혼하면서[66] 계승권을 포기했었다.
- 브라질 황가의 경우 귀천상혼의 적용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두 계통으로 분열되었다. 마지막 황제 페드루 2세의 장녀 이자베우의 아들들 중 본래 장남 페드루 지 아우칸타라가 후계자였다가 페드루가 1908년에 체코인 귀족과 결혼하면서 귀천상혼 논란이 생기자 계승권을 포기하면서 후계자가 차남 루이스로 교체되었는데,[67] 1940년에 페드루가 사망하자 그 장남 페드루 가스탕이 구 브라질 제국 헌법에 황위 계승권자가 왕족과 결혼할 것을 규정한 조항이 없기 때문에 부친의 계승권 포기는 무효임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황가의 수장으로 선언한 것이다.
- 귀천상혼 논쟁으로 인해서 본가와 연을 끊은 경우도 있는데 룩셈부르크의 부르봉파르마 가문[68]이 대표적이다. 룩셈부르크의 전 대공 장은 아버지가 부르봉파르마의 펠릭스 공자였기 때문에 본가는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일원이였다.[69] 룩셈부르크 공가는 어찌되었건 현재까지도 통치 가문이기 때문에, 공실 일원들도 상대적으로 귀천상혼 논쟁에서 자유로웠다. 그로 인해 장 대공의 아들들은 모두 평민과 결혼했고 장 대공 본인도 그 결혼에 전혀 반대하지 않았지만, 정작 통치지역을 잃어버린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수장 카를로스 우고가 이를 귀천상혼이라고 주장하면서 논쟁이 발생되었다. 이에 장 대공은 본가 부르봉파르마 가문과 결별하고, 자신을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70]이라면서 성을 갈아버렸다.
- 귀천상혼은 국가를 왕가의 재산으로 보던 시절의 유산이기 때문에 현대 왕실에게 있어서는 굳이 지키지 않아도 국민들의 지지가 지속되는데다, 덕분에 자신들의 가문이 계속 군주직을 유지하는게 가능하며 평민과의 결혼이 오히려 국민들의 지지를 모아줄 이벤트가 되기도 한다.
- 20세기에 유럽 국가들 대다수에서 군주제가 폐지되었고, 폐지된 왕실의 왕자들은 같은 왕족 출신 배우자를 찾기 힘들어져 자연스레 귀천상혼이 폐지 내지 대폭 완화한 가문들이 많아졌다. 합스부르크 가문 역시 상속자(카를 폰 합스부르크)가 남작 작위를 받은 재벌 영애와 결혼하는 등 귀천상혼 규정을 대폭 완화했고, 호엔촐레른 가문 정도만 아직까지 까다로운 귀천상혼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그 호엔촐레른 가문조차 군주정 폐지 이후 귀천상혼을 다소 완화해서 일반 귀족 출신과 결혼해도 동등결혼으로 인정하고 있다.
- 러시아의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벌어진 이유에 이 귀천상혼이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할 당시 본래 계승권은 그의 형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우선 순위가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틴은 폴란드 귀족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면서 귀천상혼에 걸려 그의 자녀들은 황위 계승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콘스탄틴은 황위 계승을 포기하고 동생인 니콜라이에게 계승권을 양보하였다. 그런데 청년 귀족 장교들이 콘스탄틴의 황위 옹립을 명분으로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1] 반대로 춘추시대의 샌드백 정나라와 송나라는 가장 높은 작위인 공작이었다.[2] 다만, 작위가 아직 의미가 있던 춘추시대 진나라는 변방국가에 불과했기 때문에 백작이라는 작위는 사실 실제 국력과 오히려 일치하는 편이었다. 특히 이웃 진(晉)은 사실상 춘추시대 최강국이자 패자였으므로 전국시대에 와서 진나라가 조, 한, 위로 갈라설 때까지는 그 위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3] 예를 들어 슈탄데스헤어에 포함되어 있는 백작 가문과 군주의 가신으로써 받은 공작위를 지닌 가문이 통혼한다면 백작 가문 쪽이 더욱 상위의 가문으로 인정되었다.[4] 중세 전기~중기라면 영주인 귀족이라도 독립적인 영주와 상위 영주의 봉신인 영주 사이의 격차도 있었지만, 귀천상혼 관습이 명확해진 근세~근대에 이르면 중앙집권화의 진행으로 봉건적 지방영주들은 대부분 도태되었으니 이 문제에서는 논외다.[5] 신분이 다른 남녀 혼인 금지, 또는 하더라도 자식은 자동으로 두 부모 중 낮은 신분이 된다.[6] 망국의 군주였던 아돌프의 룩셈부르크 대공 즉위를 가능하게 하여,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을 다시 통치 가문으로 만들어준 법이었다.[7] 남계 후손이 있긴 있었으나 귀천상혼을 한데다 그 상대가 흑백혼혈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자손이라, 보수적인 대공가는 흑인의 후손이 군주가 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남계 혈통도 1965년에 단절되었다.[8] 장 대공의 큰아버지인 보르보네파르마의 사베리오 공자의 맏아들.[9] 장 공자와 루이 공자의 자녀들은 Prince(ss) 칭호를 받기는 했으나 계승권은 없다.(위키백과 참고.)[10] 대표작위가 아닌 이름으로 방문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표트르 대제도 유럽 시찰 때 한 적이 있었고 루이 16세의 처남 요제프 2세도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부부관계가 어떤지 보려고 방문했을 때 황제이면서도 백작 자격으로 방문했다. 하지만 저 사례들은 대표 작위로 가도 되는데 그러면 국빈 방문 내지는 정상회담이 되어버려 불편하니까 본인이 의전상 편하게 가려고 그런 거고 페르디난트의 경우 조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차이가 있다.[11] 여담이지만 이 계승에 태클을 걸었던 사람은 엉뚱하게도 프랑스의 루이 14세. 그의 제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가 카를 2세의 누이였기 때문에 그녀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물론 살리카 법을 엄격하게 적용시킨 독일지역의 분위기상 그의 주장은 씹혔고 이는 팔츠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다.[12] 가령 현재 비텔스바흐 가문의 차차기 수장으로 예정된 루이트폴트는 부계 혈통만 따지면 현 수장 프란츠 폰 바이에른 및 차기 수장 막스의 6촌 동생이지만, 루이트폴트의 어머니가 프란츠 공과 막스 공의 고모이기 때문에(루이트폴트의 부모가 친사촌간이다) 실제 촌수는 사촌이 되어 더욱 가깝다.[13] 예카테리나 2세도 그렇고 남편이자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의 직계 조상인 표트르 3세도 원래 독일인이다. 표트르 3세의 어머니인 안나 페트로브나가 표트르 1세의 장녀였기 때문에 혈통에 집착한 이모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후계자가 되었다.[14] 본명은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 공녀. 앨버트 공의 고모다.[15] 연금조차 수령받지 못했다.[16] 하지만 이후 메디치 가문은 토스카나 대공국을 지배하면서 통치가문의 반열에 올라섰다. 부르봉 왕조의 시조 앙리 4세의 두번째 왕비가 바로 마리 드 메디시스다.[17] 루이 1세 드 부르봉방돔의 친손녀다.[18] 직함에서 알 수 있겠지만 유부녀였다.[19] 뒤에 나오지만 훗날 로렌 가문은 프란츠 1세가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숙적이자 프란츠 1세의 외가인 프랑스 왕실[71]을 달래기 위해 본거지인 그 로렌을 프랑스에게 할양했지만. 격이 낮은 가문이었으면 이런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20] 왕실과 타국 통치가문보다는 낮지만 오등작보다 높고 통치가문과 결혼시에 귀천상혼 취급을 받지 않는다.[21] 얀 3세 소비에스키와 함께 제2차 빈 공방전 당시 빈을 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로렌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으로 로트링겐 공국으로 불리기도 했으므로 카를 5세 폰 로트링겐으로도 알려져 있다.[22]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3녀.[23] 1703~1752.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의 외아들로, 고모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이 엘리자베트 테레즈의 어머니였다. 참고로 루이의 어머니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은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사생아딸이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계의 마지막 왕 루이필리프의 증조부이기도 하다.[24] 이건 앙리 4세도 그랬다.[25] 루이 14세와 마담 맹트농은 비밀리에 결혼했지만 공표되지 못했다. 따라서 맹트농 부인은 사적으로는 왕의 부인이었지만, 공적으로는 왕비가 아니고 그저 후작부인일 뿐이었다. 루이 14세의 아들인 왕세자 루이도 낮은 신분의 슈앵양과 비밀결혼을 했고 슈앵양도 결코 왕세자빈이 된적이 없다. 이러한 비밀결혼은 이름만 다를 뿐이지 귀천상혼과 상당히 유사한 면을 보인다.(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종종 마담 맹트농이 루이 14세의 귀천상혼한 부인이라고 오기되기도 한다) 즉 프랑스라고 귀천상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는 이야기다.[26] 다만 이는 앵글로색슨족이 막 잉글랜드를 세웠을 때의 영향보다는 다수민족인 앵글로색슨족이 피지배층으로 전락하고 소수의 노르만족이 지배층으로 군림했던 노르만 왕조와 플랜태저넷 왕조의 영향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앵글로색슨계 왕조인 웨식스 왕조 시절에는 왕족을 포함한 지배층부터가 앵글로색슨족이었기 때문에 귀족의 수도 상대적으로 많았겠지만(앵글로색슨족에게 복속당한 켈트족도 언어, 문화적으로 앵글로색슨족에 동화된 상태다.)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노르만 왕조를 세운 뒤에는 노르망디 공국의 침략에 저항했던 앵글로색슨 귀족들이 대거 피지배자로 전락해버리고 소수의 노르만족이 지배층으로 군림하면서 웨식스 왕조 때에 비해 귀족으로 군림하는 이들의 인구가 줄어들고 반대로 피지배층의 수가 늘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27] 반면 독일계 나라들은 영지는 장남에게만 상속되더라도, 차남 이하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작위를 칭할 수 있었다.[28] 상술한 것처럼 귀천상혼 자체가 게르만족의 풍습에서 유래되었는데 비록 영국이 게르만계 국가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섬나라인 만큼 앵글로색슨족이 유럽 본토의 게르만족과 다른 자신들만의 풍습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선주민인 켈트족으로부터 귀천상혼을 따지지 않는 문화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사실은 완전 평민이라기보단 법적으론 평민이 맞는데 의전상으론 한 단계 낮은 귀족 대우를 해주었다. 공작의 후계자는 후작, 백작의 후계자는 자작 이런 식으로.[29] 아라곤의 캐서린, 클레베의 앤. 다만 헨리 8세의 경우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둘의 경우 다른 왕들이 흔히 하는 정략결혼이었지만, 나머지 네 부인은 일반적인 정략결혼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다.[30] 원래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 출신이었으며, 찰스 2세를 지지하여 왕정복고 이후 클라렌든 백작의 칭호를 받고 귀족이 되었다. 이랬기에 영국 언론들은 웨일스 공 윌리엄 왕세손과 캐서린 미들턴의 결혼을 "영국 왕실의 두 번째 평민과의 결혼"이라 보도했다.[31] 제임스 2세가 즉위하기 전에 사망해서 왕비가 되지는 못했다.[32] 참고로 이 법을 제정하게 된 이유는 조지 3세의 동생 컴벌랜드 공작 헨리가 형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민 출신의 과부 앤 호튼과 결혼해버렸는데, 하필 이 결혼을 제지할만한 법률이 당시 영국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에 합법으로 결론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컴벌랜드 공작 헨리의 결혼은 이 법이 소급적용되지 않아 합법적인 결혼으로 인정되었다. 마찬가지로 조지 3세의 또다른 동생 글로스터 공작 윌리엄도 몇년 전에 사생아 출신의 과부 마리아 월폴과 소위 근본 없는 비밀 결혼을 했지만, 왕실혼례법이 제정되기 전에 결혼했다는 이유로 합법적인 결혼으로 인정되었으며 두 사람의 자녀도 영국의 왕족으로 인정받았다. 다만 독일어권 기준으로는 명백한 귀천상혼이었기 때문에 하노버의 왕족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33] 이 법률은 2015년까지 유지되다 폐지되었고, 2013년 제정되어 2015년부터 시행된 새로운 왕위 계승법에서는 결혼 시 승인이 필요한 왕족은 계승 서열 1 ~ 6위에 해당하는 인물에 한정하는 것으로 적용 범위가 축소되었다.[34] 그나마 어머니인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가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이고 영국의 공주이긴 했다. 메리 애들레이드는 영국의 공주인만큼 귀천상혼 가문이 아니라 더 좋은 가문으로 시집갈 수 있었지만, "Fat Mary(뚱뚱한 메리)"로 불릴 정도로 뚱뚱해서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결혼을 하지 못했다. 결국 사촌 빅토리아 여왕이 적극적으로 신랑감을 찾아주어 테크 공작과 결혼할 수 있었다.[35] 다만 조지 6세의 경우 차남이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도 작용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조지 6세와 세 왕의 해 문서 참조.[36] 귀천상혼한 왕의 배우자에게 princess 칭호를 주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37] 다행히 딸 알렉산드라는 이로 인한 피해는 별로 보지 않았다. 공주(Princess)의 지위를 받았고, 후에 유고슬라비아 페타르 2세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가 여왕이 되지 못한 것은 귀천상혼 때문이 아니라 당시 여성의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8] 포르피로게니타, 황제의 관[39] 동로마에서는 콤니노스 왕조 이후 집권한 왕조들은 혼맥이 얽혀서 그냥 한 집안이었다.[40] 동양만 해도 하나의 광역 문화권 내에서 동등한 왕조 여럿이 영역을 분할하던 춘추전국시대에는 다른 제후국 공실이나 (이성 제후국의 경우) 주 천자의 딸에게 장가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또한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던 당시의 군주들에게 있어 통치가문 구성원들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들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 역시 존재했다.[41]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42] 말이 평민이지, 쇼다 미치코의 친가는 일본 굴지의 재벌 집안이며 외가는 옛 화족이다.[43] 즉, 신하 집안[44] 다만 고대 중국은 유럽과 달리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일부일처다첩제였으므로, 신하 집안 출신 측실 소생 서자가 주나라 왕위나 제후국의 공위를 계승하는 건 가능했다.[45] 천한 신분으로서 황후의 지위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드문 일이었고, 기본적으로는 중국 역시 상층부에서는 폐쇄적인 혼인집단을 유지했다.[46] 명나라 황실의 배우자들은 서민층, 특히 중하류 군인호(軍人戶)에서 많이 배출되었다.[47]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테셴 공작 카를 루트비히의 후손인 테셴 공작의 궁전에 자주 방문하자 당연히 오스트리아 황실은 프란츠가 테셴 공작의 딸들 중 한 명과 결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실상은 테셴 공작의 딸의 시녀였던 조피를 보기 위해 테셴 공작의 궁전에 방문했던 것이었다.[48] 원래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왕의 조카인 대공이었는데 당시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하면서 황태자 자리를 물려받았고 당연히 조피와의 결혼은 그 이전이었다. 만약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황태자 자리에 오른 상태였다면 조피와의 결혼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49] 비텔스바흐 가문의 방계 구성원들에게 주어지는 작위.[50] 의사가 되려던 남동생 카를 테오도르가 대신 공작위를 물려받았는데, 그의 딸이 벨기에의 왕비 엘리자베트.[51] 유럽의 시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율리아 또한 폴란드 입헌왕국의 전쟁부 차관이었던 한스 모리츠 폰 하우케 백작의 딸로 엄연히 상류층 귀족이었다. 하우케 백작은 독일계 폴란드인으로 평민 집안 출신이었으나 그를 눈여겨 본 니콜라이 1세에 의해, 폴란드 입헌왕국 전쟁부 차관에 발탁되고 백작 작위까지 수여받을 정도로 전도유망한 자였다. 그러나 하우케 백작은 1830년에 폴란드 총독이었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니콜라이 1세의 형)을 노린 반란이 일어났을 때 살해당했고, 그 아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자 율리아를 포함해 고아가 된 하우케 백작의 자식들을 니콜라이 1세가 거두어 그의 며느리인 헤센의 마리의 시녀가 된 것이다.[52] 비단 루트비히와 하인리히뿐만 아니라 막내아들인 프란츠 요제프 공자도 니콜라 1세의 6녀인 몬테네그로의 안나 공주와 결혼했다.[53] 이후 마운트배튼 가문으로 개명한다.[54] 명백한 귀천상혼이었던데다, 당시의 복잡한 정치사정 탓에 둘의 결혼 사실은 카를이 쿠를란트 공작위를 상실한 지 1년 후인 1764년에야 공표되었다.[55]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다.[56] 필립 공 기준으로 필립 공과 엘리자베스 2세는 모계로는 8촌, 부계로는 7촌관계이다.[57] 현 스페인 왕가가 전통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온 부르봉 가문인 것도 사실 이 때문이었다.[58] 가령 직계왕족이 아닌 다소 먼 방계 왕족 같은 경우에는 군주의 사생아나 귀천상혼한 왕족의 자녀와 결혼하더라도 동등결혼으로 인정해주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보니 귀천상혼한 왕족의 딸이 먼 방계 왕족과 결혼했는데 동등결혼으로 인정받고, 나중에 그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어서 그 자손이 왕이 되는 식의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실제 사례로 카를로 알베르토가 있는데, 카를로 알베르토의 어머니가 귀천상혼한 왕족(아우구스트 3세의 3남 카를)의 딸이다. 프랑스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도 백부 루이 14세의 사생아딸이자 친사촌인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과 결혼했다. 비슷하게 귀천상혼으로 창시된 가문 출신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는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결혼했고, 앨리스의 여동생인 루이즈 마운트배튼 역시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결혼해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으며, 이 둘의 사촌이자 같은 가문 출신인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는 알폰소 13세와 결혼해 스페인의 왕비가 되었다. 당연히 카를로 알베르토의 부모, 필리프 2세와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 바텐베르크 자매들의 결혼 전부 동등결혼으로 인정받았다.[59] 다만 이는 베르나도테 왕가 성립 초기에 기존 왕실들이 나폴레옹의 도움으로 벼락출세한 베르나도테 왕가와 통혼하는 걸 기피하는 바람에 반강제적인 면도 있었다. 칼 14세 본인부터가 이름 없는 가문 출신인 데지레 클라리(나폴레옹의 前 약혼녀로 유명하다)와 즉위하기도 전에 결혼했고, 그의 아들인 오스카르 1세도 외젠 드 보아르네(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의 딸이자 똑같이 벼락출세한 가문 출신인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와 결혼했다.[72][60] 남계 후손은 많았는데 상당수가 귀천상혼을 해버렸다. 현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가 태어날 때쯤에는 사실상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리고 이 후계자 문제는 지구 반대편 일본에서도 겪고 있다. 물론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화족 제도가 폐지되면서 귀천상혼 배제도 폐지했지만 여성과 여계 승계 금지가 멀쩡히 살아있다.[61] 릴리안 바엘은 어느 정도 장성한 의붓자식들[73]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정작 본인의 친자식한테 다소 소홀히 대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계모 항목 참조.[62] 벨기에의 이혼율은 옛날부터 유명했다.[63]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자손들.[64] 바텐베르크 가문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마운트배튼 가문으로 성씨를 바꾼다. 필립 공의 외가이자 루이 마운트배튼의 가문이다.[65] 조지 5세의 왕비인 테크의 메리의 친정 가문[66] 다만 알폰소의 귀천상혼은 스페인 왕조 붕괴 이전에 이루어진 데다가 슬하에 자식도 없었고, 혈우병 환자였던 탓에 오래 살아 자식을 남길 가능성도 낮아서 결과는 어차피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67] 루이스는 어머니보다 1년 일찍 사망하여 명목상의 황위는 루이스의 아들 페드루 엔히크가 이었다.[68] 부르봉 왕조 항목 참고[69] 룩셈부르크 대공위는 어머니 샤를로트 여대공에게 물려받은 것이다.[70] 기존 룩셈부르크 대공가이자 자신의 어머니의 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