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게임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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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고대2.2. 1905년 유적 발견2.3. 1908년 퉁구스카 대폭발(Tunguska Event)2.4. 1920~1930년대2.5. 1940년대2.6. 냉전의 시작2.7. 1950년대2.8. 1960년대
2.8.1. 1961년 타바사르-B, 스타피쉬와 백치
2.9. 1970년대2.10. 1970년대 중후반2.8.1.1. "백치"(Идиот)
2.8.2. 1961년 10월 혁명 퍼레이드2.8.3. 1962년 쿠바 미사일과 백치 위기2.8.3.1. 쿠바 미사일과 백치 위기의 여파
2.8.4. 1962~1971년 Urkunde-01와 90Wunsch2.8.5. 1960년대 중후반 미국의 유적 기술 개발2.8.5.1. 록히드의 SR-71A 개발2.8.5.2. "오로라"(Aurora) 폭격기 개념
2.8.6. 1962년 "GAVIRUL" 발견2.8.7. 1967~1969년 유적 가스2.10.1. 1974년 "오로라"(Aurora) 폭격기 완성2.10.2. 1974~1975년 베트남전2.10.3. 1975년 "아파넷"(ARPANET)2.10.4. 1975년 "오가스"(ОГАС, OGAS)2.10.5. 1976년 "자유의 여신상"실험2.10.6. 1978~1980년
2.11. 1980년대2.11.1. 1980~1981년 스피라에나 실전 실험2.11.2. 1980~1981년 E.L.I.D. 위기
2.12. 1980년대 후반2.13. 1990년대2.11.2.1. 1981년 유적 무기 제한 조약
2.11.3. 1983년 제네바 성명2.11.3.1. 제네바 성명 이후
2.11.4. 1970~1980년대 마의 산(Der Zauberberg)2.13.1. 1991년 8월 쿠데타 & 오가스의 끝2.13.2. 1992년 UN 유적기구(Relic Agency)2.13.3. 1992년 판도라(Pandora)2.13.4. 1992년 흑백합과 백장미 프로젝트(Black Lily and White Rose Project)
2.14. 2000~2010년대2.15. 2020년대2.16. 북란도[clearfix]
1. 개요
소녀전선 시리즈 세계관을 다루는 문서로 해당 게임 시리즈 세계관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을 주로 서술한다.소녀전선 시리즈의 작품들이 계속 추가되고, 세계관이 확장됨에 따라 세계관의 설정이 달라져 세계관의 역사또한 변경될 수 있다.[1]
세계관의 여러 설정들은 소녀전선 시리즈/설정분류와 소녀전선/설정문서, 뉴럴 클라우드/설정문서 등을 참고.
해당 문서의 간단한 버전은 소녀전선 시리즈 연표와 밑의 틀을 참고.
시리즈 세계관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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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전선 이전 | 미지의 세력이 유적을 건설 후 사라짐 (약 6억년 전) | <nopad> |
현실 지구 역사와 동일 |
러시아 제국, 퉁구스카 주변 유적 최초 발견 (1905) | UN 소속 국가/단체 (1945~2045) |
미국·소련 냉전 돌입 (1947) | 미합중국 (1776~2064) | 범유럽연맹 (19??~2064)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소련) (1922~1991) |
소련 유적에서 붕괴액 누출 E.L.I.D. 발생 (1973) |
미국, '자유의 여신상'실험, E.L.I.D. 발생 (1976) |
미국, 소련. E.L.I.D.감염 억제 연구 전부 실패 (1980) |
미국·소련 냉전 종식 (1983)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해체 러시아 연방 성립 (1991) |
러시아 연방 (1991~2031) |
미국, 워싱턴 D.C.에 UN 산하 유적기구 설립. GAVIRUL 재현 계획 실행. (1992) |
미국, GAVIRUL 재현 계획 실패 선고 및 방치 (2012) |
남극 유적에 UN 산하 유적기구 소속 연구진 파견 (2023) |
북란도 사건 발생 (2030) |
| 러시아 연방 해체 신 소비에트 공화국 연맹 성립 (2031) |
신 소비에트 공화국 연맹 (신소련) (2031~2066) |
북극광 사건 발생 (2035) |
제3차 세계 대전 발발 (2045) | 남극 독립, 중립국 선언 및 진입로 폐쇄 (2045) | 제3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한 UN 해체 |
제3차 세계 대전 종결 (2051) | 폐쇄적 중립국 남극 연방 (남련) (2045~2078) | UN(국련) 재설립 (2062~2064) | 신 소비에트 공화국 연맹 (신소련) (2031~2066) |
(2062~) | 미합중국 (1776~2064) | 범유럽연맹 (19??~2064) |
(2063) |
(2062~) | 국련소속 국가들을 바탕으로 루크사트주의 합중국 연맹(루련) 성립 (2064) |
신소련, 협의를 통해 루크사트주의 합중국 연맹에 합병 (2066) |
(2074) | 해적 나포 선박 구조사건, 남련과 루련 접촉 및 교류 재개 (2075) | 루크사트주의 합중국 연맹 (루련) (2064~) |
GAVIRUL 재현 계획 후속 프로젝트 삼여신계획 시작, 남극 일대 국가 루련 탈퇴 후 남극 연방 가입 (2078) | 기존 남극대륙의 남극 연방을 주축으로 하여 남극 연방 성립 (2078) |
남극 연방 (남련) (2078~) |
제1차 남극 전쟁 발발 (2089) |
(2092) | 베이커리 작전 개시 (2092) |
남련과 루련 평화협정 채결 (2094) |
제2차 남극 전쟁 발발 (2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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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한 연표는 소녀전선 시리즈 연표를, 상세한 역사는 소녀전선 시리즈 세계관을 참고하십시오. |
2. 역사
이 문서가 최초 작성될시 문서의 1905년부터 2060년 까지는 "Marsormr"와 "Ferrari"에 의해 작성되고 "Ferrari"에 의해 재작성된 "The History of Girls' Frontline V1 - 1905-2060s"@ 문서의 내용을 위주로 하여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
2.1. 고대
"우리가 마주친 건물은 공룡이 살던 시대보다도 열 배는 더 먼 과거에 아마도 우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과학 수준을 가진 문명이 만든 것이다. 건축가는 오래 전에 이 땅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의 작품은 영겁의 시간을 버텨내고 지금 우리의 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천둥벌거숭이에 불과한 우리의 건물은 200년 내로 사라질 것이고 지형의 변화는 우리가 살았던 모든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릴 것이다. 고대의 현자들에 비한다면 우리는......"
<유적 및 유사 건축물의 기능에 따른 분류 가능성> 머리말, M.J. 실츠비아(M.J. Syrzrvia)교수[2]#@
현대로부터 약 6억년전[3] 고대 지구에 초고도 문명이 들어섰다.<유적 및 유사 건축물의 기능에 따른 분류 가능성> 머리말, M.J. 실츠비아(M.J. Syrzrvia)교수[2]#@
해당 문명을 건설한 지능체들은 유적과 같은 수많은 흔적을 남겼으나, 워낙 고대에 활동했던 이들이라 이들이 멸망했는지, 지구를 떠난것인지 전혀 알 수 없기에 그 행방은 묘연하다. 무엇보다 이들이 지구에서 발생한 지구 기원 생명체인지, 다른 행성에서 발생하여 지구를 정복했던 정복자인지조차 알 수 없다. 해당 지능체들은 지구 전지역을 지배하에 넣은것으로 추정되는데, 근대에 이르러 발견된 유적에 그 근거를 둘 수 있다. 해당 유적은 범지구적으로 장소에 제약을 두지 않고 발견되는데, 북미, 아시아, 유럽은 물론이고 북극과 남극같은 극지방에서 까지 발견되었으며, 각각의 유적은 한 유적이 다양한 기능을 지닌 것이 아닌 유적마다 역할이 생산공장이나 텔레포트 시설 등 천차만별인 것을 볼 때, 각 구역들을 나누어 각각의 기능의 시설들을 건설,관리했을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4]
또한 훗날 1960년대 초에 유적에서 GAVIRUL라는 유적문명을 창조한 지적생명체로 여겨지는 온전한 미확인생물의 사체가 발굴되었는데[5], 이것이 유일한 지능체의 실물이다.[6]
2.2. 1905년 유적 발견
당시 러시아 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2세 로마노프 | 현재 시베리아의 퉁구스카강 주변의 위치 |
2.3. 1908년 퉁구스카 대폭발(Tunguska Event)
퉁구스카 대폭발의 재앙급 여파로 박살난 숲 |
그리고 재앙은 시작되었다.
1908년 6월 30일. 퉁구스카 강 유적에서 연구원들은 일종의 원자로[9]를 연구하며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이 원자로의 불안정을 발생시켰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자로는 통제에서 벗어났고, 대규모 폭발이 벌어졌다. 해당 폭발은 원자폭탄이 터진 것같은 효과를 내어 주변에 재앙급 여파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후에 퉁구스카 대폭발(Tunguska Event)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인류 역사상 유적으로 인해 벌어진 첫 번째 사고로 기록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당시 군중들에게 연설하는 블라디미르 레닌 |
2.4. 1920~1930년대
2.4.1. 소련의 유적 연구
이오시프 스탈린 |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쯤 소련에서 유적 연구가 재개되었고, 과거에 진행되었던 로모노소프 주립대학에서 이루어진 유적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조사가 이어였다. 하지만 이 소련 연구진들의 노력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권력의 중심부로 떠오르고, 그 후 이어진 대숙청에 의하여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소련의 유적 연구는 완전히 중지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적 연구는 재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의 연구가 중단되던 시기, 유럽의 다른 나라가 유적의 연구를 시작하였으니...
2.4.2. 나치 독일의 유적 연구
나치 독일의 '프리츠 토트(Fritz Todt)'에 의해 만들어진 '토트 조직(Organisation Todt)'의 깃발 |
1930년대 중반 어느 시기, 토트 조직은 독일 노르트하우젠 주변의 하르츠 산맥 아래에서 거대한 구멍을 발견했다. 해당 구멍은 그 높이만 대략적으로 건물 7층정도의 높이로 측정되었고, 자연적으로 형성된것이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그렇게 밝혀진 구멍의 정체는 다름아닌 고대에 만들어진 유적이었으며, 이후 Urkunde-01라고 이름붙여졌다.
해당 유적의 제대로된 용도는 훗날 소련이 이 지역을 점령할 때 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치 독일또한 손을 놓고 있던것은 아니었다. 해당 유적을 연구하며 얻은 데이터를 통하여 자신들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당연하게도 해당 유적의 존재는 극비로 취급되었고, 나치 독일 정부와 토트 외에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비밀스럽게 유지된 덕에 다른 비밀스러운 것들을 숨기기엔 안성맞춤이었고, V형 로켓과 핵무기에 관한 연구자료가 제2차 세계 대전기간 동안 안전하게 보관되었다.
2064년의 붕괴액 캡슐 |
나치 독일은 1930년대 내내 Urkunde-01 유적을 연구하였고, 이 유적에 대한 정보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기간동안 가장 잘 지켜낸 기밀정보였다.
2.5. 1940년대
1945년 4월 알소스 미션(Alsos Mission)을 통해 영국과 미국 국적 맴버들이 나치 독일의 핵무기연구를 위해 제작한 원자로를 해체하고 있다. |
2.5.1. 전리품
1945년 4월 미군 보리스 파시(Boris Pash) 대령 (가장 오른쪽) |
전쟁이 끝나기 전, 미국과 소련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남긴 정보와 연구를 상대측보다 더 많이 수집하는것을 목표로 삼았다. 미국측은 보리스 파시(Boris Pash)대령이라는 러시아계 미국인이 이끄는 전리품 약탈 팀인 "알소스(Alsos)"를 꾸려렸고, 소련측은 작전 중 이오시프 스탈린을 의장으로 둔 국방위원회(State Defense Committee)에게 직접 보고하는 "무역 연합(Trade Federation)"부대를 꾸렸다.[10]
서로 원하는 기술과 정보, 자원은 "핵무기와 원자력 연구자료", "옐로케이크", "로켓 기술", "접시처럼 생긴 비행기"[11], "제트 추진 시스템", "후퇴익 항공기" 등이 포함되지만, 이 것들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련은 이용가능한 연구 자료가 넘쳐남에도, 대부분의 신경을 한가지에 기울인다.
알소스와 무역 연합이 추축국의 연구에 대한 약탈을 지속하면서 많은 독일인들이 연구를 멈추고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러한 프로젝트 중 몇개와 유적관련 정보가 블레이헤로데(Bleicherode)라는 마을에 비밀스럽게 보관되었다. 노르트하우젠의 하르츠산맥 근저애 있는 튀링겐(Thuringia)에 위치한 해당 마을은 꽤나 작은 곳이었기에 기밀들을 숨기기에 완벽한 곳으로 생각되었고, Urkunde-01 유적 또한 그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위치해 있었다. 나치 독일의 이러한 노력에도 알소스와 무역 연합은 해당 마을에 대한 정보를 알아챘고, 서로 먼저 그곳에 있는 토드조직의 정보를 누가 먼저 장악하느냐의 싸움이 되었는데, 무역 연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소스가 먼저 블레이헤로데에 진입하게 된다.
2.5.1.1. 블레이헤로데
블레이헤로데(Bleicherode)의 현재 지도. 오른쪽으로 노르트하우젠(Nordhausen)이 보인다. | 나치 독일 시절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 |
블레이헤로데에 저장된 정보의 양은 먼저 도착한 알소스팀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알소스팀의 인력은 모든 정보를 확보하기에는 시간과 인력이 부족하였고, 그들은 핵기술을 중심으로 정보를 취득했다. 거의 모든 원자로 및 로켓 연구와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을 포함한 여러 주요 독일 과학자들이 알소스에게 넘어갔다. 그 때, 유적에 대한 연구는 핵기술의 중요성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무시당했다. 이것은 알소스, 나아가 미국에게 뼈아픈 실수가 되었다. 알소스가 만약 이 연구 자료를 선점했다면, 소련은 그들의 주요 목적이었던 유적에 대한 연구자료를 얻지 못한채 돌아가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나치 독일이 보유했던 유적에 대한 연구자료와 모든 정보 대부분이 무역 연합에 의해 소련의 손에 들어갔다. 무역 연합이 확보한 유적에 대한 정보는 소련이 Urkunde-01 유적을 확보하는데 길잡이가 되었다. 소련은 일찍이 1943년 포로로 잡힌 추축국병사들로부터 이 장소에 대한 소문을 들었었지만, 말 그대로 소문만 무성할 뿐 유적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유적을 소련측이 획득함에 따라 요제프 멩겔레 박사를 비롯한 유적의 근무자들은 소련군에 의해 항복했고, 무역 연합은 나치 독일이 꽁꽁 숨겨두었던 최고의 비밀과 그들의 보물금고를 획득한 꼴이었다.
2.5.1.2. Urkunde-01
노르트하우젠 지역의 하르츠산맥 주변의 현재지도 Urkunde-01 유적은 해당 산맥 아래쪽에서 발견되었다. |
소련의 Urkunde-01 유적 발견은 마치 유적 연구에 대한 판도라의 상자를 연것과 같았다. 퉁구스카 유적은 더 이상 유일한 유적이 아니게 되었다. 무역 연합의 포로로 잡힌 요제프 멩겔레 박사의 기록과 연구자료, 그가 강제수용소에서 실행한 실험들을 주목했고, 요제프 멩겔레 박사에 의해 현장에서 보관되던 신비한 물질과 관련된 정보도 획득했다. 그 시점에는 모두 해당 물질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를 알지 못했지만, 요제프 멩겔레 박사만은 해당 물질이 질병을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5월에 나치 정권이 무너지고 Urkunde-01 유적을 획득한 소련은 나치 독일이 연구했던 10여년간의 연구 자료를 습득했다. 미국은 유적 분야 정보 획득에서 완벽한 실패를 했지만, 소련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고, 유적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알소스팀, 즉 미국은 연구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굳게 믿고있었다.
2.6. 냉전의 시작
1947년 3월 12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트루먼 독트린에 대한 연설을 하고있다. |
"전체주의 체제들의 씨앗은 불행과 결핍을 양분삼아 자라납니다. 그것들은 사악한 빈곤과 갈등의 토양에서 퍼지고 성장합니다. 그것이 완전한 성장을 이룩하는 것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사람들의 희망이 죽었을 때에 이뤄집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유지시켜야 합니다."
해리 S. 트루먼 미국 33대 대통령
베를린에서 나치 독일의 깃발이 떨어지고 일본 열도에서 일본 제국의 백기가 걸리며 전쟁이 끝나자, 세계는 또 다른 전쟁에 휘말렸다. 이때까지 겪어보지 못한 선전, 군수산업, 연구개발, 대리전으로 점철된 차가운 전쟁, 냉전의 시작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2년간 인류는 다시금 살아남았음에 기뻐하였고, 유럽은 비로소 재건에 착수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전체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위의 대사를 포함한 연설을 했다. 그에게 그리스와 터키를 포함한 모든 국가들에게 소련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의 위협은 용납될 수 없었고, 그가 제시한 트루먼 독트린은 냉전의 시작을 알렸다.해리 S. 트루먼 미국 33대 대통령
2.6.1. 소련의 Urkunde-01 유적 연구
이 기간동안 지구 반대편에서 소련은 다가올 여러 분쟁들에 대한 대응을 시작했다. 크렘린은 곧 핵기술, 항공우주기술, 유적 기술에 대한 연구와 조사를 두배로 늘렸다. 미국이 맨해튼 프로젝트와 알소스팀 덕분에 초기 다른 기술적 우위를 점한 반면, 소련은 이미 유적 분야에서는 50년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미국은 B-36과 같은 대규모 폭격기와 항공모함을 설계에 역량을 기울였다. 미국은 1955년까지 유적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949년까지 소련은 탄도 미사일의 기술 격차를 좁히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의 R시리즈[12] 미사일은 미국의 레드스톤과 주피터 미사일의 성능보다 우위에 있게 되었다. 훗날 OKB-456 설계국에서 발견된 잔해를 알마즈-안테이에 보냈고, 그곳에서 새로운 대공 미사일 기술이 개발되었다.그리고 소련은 Urkunde-01에서 권력의 균형을 자신들에게로 옮길만한 기념비적인 발견을 하게된다.
2064년의 소련 최대 유적 시설 타바사르-B(Tabasar-B)실험장의 스타피쉬 |
Urkunde-01은 "제 1유적"이라고 불리는 장소가 되었다. 나치 독일은 관련 연구자료에서 해당 유적을 일종의 "생산 시스템"이라고 판단했지만, 그것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소련이 해당 연구자료에 접근 할 수 있게 되자, 크렘린은 "스타피쉬 프로젝트"를 진행, 타바사르-B(Tabasar-B)실험장에 해당 유적의 복제품 "스타피쉬"제작을 승인했다. 해당 연구가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지, 어떠한 목적으로 사용될 것인지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950년까지 소련은 Urkunde-01의 데이터에 기초한 건설을 완료했다. 해당 사실은 매우 높은 등급의 기밀로 취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에 그 사실이 젼해졌다. 워싱턴은 타바사르-B에서 무엇을 테스트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부족했지만, 동맹 유럽 국가에 단거리 탄도 미사일(SRBM) 배치를 승인했다. 이 SRBM은 타바사르-B를 타깃으로 맞추어져 있었으며 본격적인 핵전쟁이 발발하는 비상사태 시, 해당 시설을 파괴하는 역할을 맡았다.
2.7. 1950년대
1949년 창설된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로고 | 1955년 창설된 바르샤바 조약 기구 (WTO,WP)[13]의 로고 |
냉전이 시작된 후, 새로 창설된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비하여 소련은 유적 기술에 대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미국은 1955년에 유적이 발견되기 전까지 그 존재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NATO가 핵무기를 국경에 배치하자 소련은 세계 최초의 유적 무기 및 기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타바사르-B(Tabasar-B)의 시설은 Urkunde-01의 제 1유적을 기반으로 제작된 유적 기술 역설계의 첫조각으로 여겨진다. 소련은 해당 시설을 제조하면서, 필연적이게도 유적의 특성과 그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 더욱 더 탐구하게 되었다.
1955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WTO,WP)가 창설되었을 때, NATO는 이것이 WTO가 공식적으로 공식적으로 창설되기 전에 침투하여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유일하고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해당 첩보행위동안 미국은 유적에 대한 실마리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어서 유적의 존재를 증명해 줄 정도는 아니었다.
2.7.1. 미국의 초기 유적 연구
맥머도 남극 감시 기지(McMurdo Antarctic Surveillance Station)의 2004년 전경 |
미국은 1955년에 유적을 발견하기 전까지 유적의 존재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지 못했다. 맥머도 남극 감시 기지(McMurdo Antarctic Surveillance Station)는 1955년 남극의 보스토크 호 해안 근처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미국은 해당 기지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서 유적을 발견한다. "문"(Door)이라고 이름붙여진 유적 D-1은 유적의 존재를 미국에게 그 자체로 증명하였으며, 미국은 이를 통해 소련과 같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었다. 해당 유적에는 일종의 "게이트"(Gate)와 다양한 기계의 잔해로 보이는 것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미국은 이것들을 연구와 역설계를 진행하기 위해 미국내부로 이송한다. 그리고 그와 맞추어 워싱턴은 유적과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은닉자금을 지원했다. 해당 자금을 지원받은 미 공군, 록히드, 고급 연구 프로젝트 기관의 과학자와 연구원들은 D-1의 잔해의 연구와 역설계의 진행에 발을 맞추었다.
이 과정동안 록히드는 해당 프로젝트를 숨기기 위하여 스컹크 웍스(Skunk Works)를 만들었다. D-1의 잔해들을 기반으로 연구하여 여러 항공기 시스템과 그 설계가 개발되었다. U-2, SR-71, F-117, F-22와 후속 차세대 전투기 들은 해당 프로젝트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들이다. 미국이 기술발전의 신시대로 점차 나아가기 시작하면서 소련의 유적에 대한 통제는 더욱 더 엄격해졌다. 그리고, D-1의 발견 이후 몇 년 동안, 미국은 자신들이 진실로 얼마나 뒤쳐져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2.7.2. 1958년 타바사르-B에서 미국의 U-2가 격추됨
U-2가 격추되어 추락한 현장 | 해당 사건 이후 1960년 5월 가상의 NASA 마크가 붙어있는 U-2 정찰기 |
1958년 5월 13일, 미국은 타바사르-B(Tabasar-B) 시설로 추정되는 시설의 비밀 정찰 임무를 진행했다. 유적 기술의 역설계에서 파생된 정찰기인 U-2가 이 임무를 위해 채택되었으며, 해당 정찰기가 공개되지 않은 어떤 장소에서 낮에 이륙하며 임무가 시작되었다. 정찰기가 실험장에 도착하여 상공을 나는동안, 기내 카메라는 여러장의 이미지와 비디오를 촬영했다. 해당 자료들은 소련이 이미 유적 기술에서 미국에 비하여 상당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워싱턴에게 증명할 자료들이었다. U-2에서 촬영된 해당 자료에는 그 구역 전체에 걸쳐있는 복합적인 구조물이 촬영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주변에 거대한 방어시스템이 배치되어 있는 타바사르-B가 있었다.
시설은 120° 각도로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방사되는 5개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중에서 공격이 있을경우, 고리에 배치된 여러 대공무기가 시설을 둘러쌌으며, 당시 다수의 S-75 지대공미사일(SAM) 시스템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사진에는 해당 시설로 가는 여러 도로들이 촬영되었고, 모든 도로는 항공기 연대가 대기중인 인근 공항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기중인 소련 항공기 연대와 S-75 미사일로 방어태세를 갖춘 타바사르-B는 공습에 의한 희생양이 될 가능성은 전무해 보였다. 해당 현장 사진들이 촬영된지 30여초 만에 U-2는 격추되었다. 타바사르-B 시설의 정확한 목적을 알 수 없었지만, 워싱턴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소련을 따라잡아야 함을 정확히 알고있었다.
2.7.3. ARPA의 설립
ARPA(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의 로고 |
워싱턴과 정보기관들은 이 사건 이후 공황상태에 빠져들어갔다. 소련의 이미지는 뒤바뀌었고, 미국이 가지고 있던 인식은 박살났다. 워싱턴은 즉시 유적 분야의 신속한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해 초,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대통령은 의회에 "고등연구계획기관"(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 ARPA)이라는 기관을 제안했다. ARPA의 주요 설립 목적은 미국이 군사기술의 최강자가 되도록 연구를 지속하는 것이다. ARPA는 의회로부터 광범위적인 지지를 받았고, 2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얻어 설립되었다. 미국이 유적 분야의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ARPA는 스컹크 웍스와 함께 메인 연구기관으로 배정되었다. 모든 프로젝트는 완료를 위한 엄격한 마감일이 정해졌고, 실패는 허용되지 않았으며, 그를 위한 모든 가능성들이 논의되었다.[14]
1959년 9월 니키타 흐루쇼프 미국 국빈방문 당시 저녁만찬. 오른쪽부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니키타 흐루쇼프 매미 아이젠하워, 니나 흐루쇼바 |
2.7.4. KGB, 제 16국
국가보안위원회 (KGB)의 로고 |
이 무렵, 소련은 미국이 타바사르-B(Tabasar-B)의 존재를 알고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소련은 서둘러 이 시설에서 무언가 가치있는 것을 만들어내야 했다. 니키타 흐루쇼프 제1서기[15]의 지시에 따라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새로 구성된 제 16국이 유적 발굴 및 연구를 담당하는 유적 연구 보호 부서와 함께 유적 문제를 직접 통제했다.
2.8. 1960년대
냉전의 첫 10년 동안 양측은 유적 조사와 역설계에 힘을 기울였다. 1950년대 말 무렵, 미국은 유적 기술의 격차를 좁히고 있는 반면, 소련은 타바사르-B(Tabasar-B)로부터 가치있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에 실패를 거듭했다. 이 모든 것은 1960년대에 바뀌게 된다. 이 기간동안 양측은 유적 기반의 무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960년대는 냉전이 끝날때까지도 끝나지 않을 광기의 시대의 시작이 되었다.2.8.1. 1961년 타바사르-B, 스타피쉬와 백치
"스타피쉬"라고도 알려진 소련의 타바사르-B(Tabasar-B)시설은 독일의 Urkunde-01 유적을 역설계하여 최초로 만들어진 거대한 생산시설이다. 이 시설은 소련의 타바사르-B 시험장 내부에 위치해 있었다. 시설의 방어는 유적 연구의 보호와 기밀 유지를 위한 최우선 과제로 간주되었다. 항공기 연대, 방공무기, 그리고 광범위한 미사일 탐지를 통해 해당 시설을 완전히 감싸고 보호했다. 이 시설의 가동 테스트는 1950년대에 시작되었지만, 성공적으로 가치있는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미국의 U-2 정찰기가 이곳을 조사하다가 격추된 후 1958년까지 이 상황은 지속되었다. 소련은 미국이 이 시설의 존재를 파악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성공적인 시설 가동 실험을 위해 많은 투자를 했다. 수많은 실패를 딛고 타바사르-B는 1961년 1월 28일, 성공적으로 가치있는 "결과"를 생산하는데 성공한다.2.8.1.1. "백치"(Идиот)
타바사르-B에 소련이 쏟아부은 노력이 구멍빠진 독에 부은 물이 아닌, 결실을 맺는 노력이란 것이 증명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결과"가 만들어졌을 때, 소련의 인내심은 결실을 맺었다. 해당 결과물은 일종의 비유기-기계적 덩어리였다. 소련은 그 덩어리를 백치(Идиот)라고 명명했다.[16]초기 실험에서 소련은 백치를 현재에 일으러 붕괴 입자라고 부르는 물질로 가득 찬 방에 배치했다. 방안에 배치되자 백치는 물질을 소비하기 위해 스스로 움직였다. 하지만 백치가 어떠한 방식으로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백치에 의해 물질이 소비되고, 금속 물질이 순수한 단일 원소 분말로 분해되는것이 관측되었다.
백치는 물질들을 기본 입자의 형태로 "붕괴"시킬 수 있는것처럼 보였다. 백치의 주변 환경에 물질이 투입될때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해당 반응을 통제할 수 있는 유도체계를 구축할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당시에는 백치를 통제가능한 무기체계로 만들 능력이 부족했음에도, 크렘린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흐루쇼프에게 백치의 공개전시는 소련이 앞으로도 유적 기술의 리더로서 남을 것이라는 미국에게 보내는 최후 통첩이었다.
2.8.2. 1961년 10월 혁명 퍼레이드
1961년이 끝나갈 즈음, 흐루쇼프는 소련의 힘이 거대해져감을 느꼈다. 쿠바에서의 중앙정보국(CIA)의 실패, 6월 빈에서 열린 미국의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와의 정상회담, 8월 베를린 장벽의 부상, 계속 이어지는 핵실험에 이어 흐루쇼프는 소련의 힘을 대규모로 공개적으로 과시하는것을 승인했다. 1961년 6월 빈 임페리얼 호텔에서의 정상회담, 니키타 흐루쇼프와 존 F. 케네디의 만남 |
흐루쇼프는 소련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우뚝 서있다는 것을 워싱턴에 분명하게 각인시켜주고 싶어했다. 그는 196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10월 혁명 퍼레이드에서 자신의 독트린을 분명히 밝혔다. 1961년 11월 7일, 역설계된 유적 기술에 대해 대중들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그 결과 미국은 사기에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다. 퍼레이드동안, 여러개의 "백치"가 차량 뒤에 배치되어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백치"의 모든 능력은 아직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련은 유적 기술이 무기화될 수 있다는 것을 "백치"로 증명했다. 다음날 워싱턴에서 케네디는 아폴로 계획을 포기하고 그 자금을 "유적 탐사"에 쏟았다. 그해 초 피그만에서의 실패 후, 케네디와 그가 이끄는 미국은 2위의 지위로 하락하는 것을 거부했다. 소련이 유일한 유적 기술 무기 무장 국가가 되는것을 허용하는것은 선택사항이 아니었고, 그에 따라서 유적 기술 무기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2.8.3. 1962년 쿠바 미사일과 백치 위기
미 국방부가 공개한 소련이 쿠바 내 구축해둔 병기들의 상황 |
백치의 성공적인 과시 이후 소련은 자신들의 지배력과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2년동안 소련은 백치의 제어시스템 초기 버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예멜리아-1(Емеля-1)라고 이름 붙여진 이 시스템은 백치의 유도를 위한 삼진법 제어 버스였다. 소련은 자신들의 지배력을 과시하기 위해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협의 후, 일년 내내 백치, 대공미사일, 차세대 전투기를 배치했다. 만약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소련은 이 지역에 배치해놓은 무기를 통해 선제공격이 가능하다는 커다란 이점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10월이 된 후, 그제서야 미국은 U-2를 통해 쿠바 상공에서 펼쳐진 정찰 임무를 통해 쿠바와 소련의 이러한 활동에 대해서 파악했다.
쿠바의 상황을 해결하려 애쓰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
쿠바에 백치를 비롯한 병기들이 배치된 것이 확인되자 워싱턴은 당황했다. 백치가 퍼레이드를 통해 공개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소련은 이미 미국 본토 근처에 배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본토 주변에 그러한 병기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10월의 남은 기간 동안 미국과 소련은 이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 긴장의 상승과 격렬한 협상을 벌였다. 소련이 협상을 거부한다면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여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충분했다. 물론 이것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선택해야할 최후의 옵션으로 간주되었지만, 미국은 미국 국경 근처에 소련의 무기를 허용하는 것을 격렬히 거부했고, 소련은 NATO의 핵 탄도 미사일이 자국 국경 주변에서 사라지기를 원했다.
2.8.3.1. 쿠바 미사일과 백치 위기의 여파
10월 말까지 양측은 협상을 지속했다. 소련이 쿠바에서 백치를 철수시키는 대가로 미국은 여러 NATO 동맹국에서 핵 탄도 미사일을 철수시키는데 동의했다.[17] 종말을 피한 세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북유럽의 NATO 동맹국들은 미국이 미사일을 철수시켜 소련을 달래고 있다고 느꼈고, 이것은 이들 국가 중 몇몇이 다음 해에 NATO를 떠나도록 자극했다.[18]2.8.4. 1962~1971년 Urkunde-01와 90Wunsch
양측은 긴장이 충분히 고조되면 핵전쟁을 동반한 제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이해했고, 쿠바 미사일과 백치 위기 이후 양측은 한동안 서로 한발 물러섰다. 유적 기술 개발은 끝나지 않았지만 이러한 유적 기술 무기 배치는 일시적으로 보류되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양측은 세계 전쟁의 위협이 낮아진 자국에서 유적을 조사하고 개발하기 시작했다.2.8.4.1. "제 1유적" 조사단
동독 국가안전부 (Ministerium für Staatssicherheit, Stasi, 슈타지)의 로고 |
소련은 "백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제 1유적의 그 기원과 작동에 대한 추가 연구를 계속했다.
백치 프로젝트와 타바사르-B(Tabasar-B)실험장이 Urkunde-01의 제 1유적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을 고려하여 소련은 프로젝트에 가능한한 지원을 하기위해 해당 유적을 더욱 연구하기로 결정한다. 새로운 제 1유적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독일 민주 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DDR,동독)의 장관들은 당시 라이프치히 카를 마르크스 대학교라고 이름이 바뀐 전 라이프치히 대학(Universität Leipzig)에서 새로운 프로젝트 팀을 구성하도록 명령했다. 제 1차 유적 조사팀은 일반적으로 슈타지로 알려진 동독 국가안전부의 대외정찰총국 국장인 마르쿠스 볼프(Markus Wolf)대령이 이끌었다. KGB 제 16국은 연구 목적으로 슈타지 정찰총국(Hauptverwaltung Aufklärung, HVA)에 제 1유적을 넘겼다.
1989년 12월 마르쿠스 볼프(Markus Wolf) 대령 |
마르쿠스 볼프는 Urkunde-01의 조사를 진행하는 동안 자신이 발견한것과 경험한 것들을 일지와 보고서들에 기록했다. 제 1유적이 있던 곳은 노르트하우젠 주변의 하르츠 산맥 아래 거대한 7층 높이의 움푹 들어간 곳 안이었다. 그 장소는 입구에 있는 두 개의 무거운 강철 문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그 입구가 있는 벽은 일련의 120° 홈이 있는 일종의 금속 물질로 보고되었다. Urkunde-01은 확실하게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독일 연구원들에게 이곳의 존재는 직접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저 뜬 소문에 불과했었다.
마르쿠스 볼프의 연구팀은 Urkunde-01 재탐사 초기는 그저 무용지물이었다. 소련은 이미 대부분의 유적의 시설과 잔해들을 외부로 가져갔고, 그저 움푹 패인 부분들만 남아있었다. 연구팀은 벽의 홈이 일종의 인터페이스처럼 배치되어 있다고 가설을 세워보았지만, 그 목적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벽의 성분 샘플을 채취하여 구성물질을 확인했으며, 이 테스트에서 벽에는 이산화티타늄, 산화철 및 기타 금속 산화물이 포함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테스트 후 팀은 Urkunde-01이 확실하게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자연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KGB의 지원 부족으로 인해 Urkunde-01 재조사는 적어도 1965년까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마르쿠스 볼프는 KGB의 국장 블라디미르 세미차스트니(Vladimir Efimovich Semichastny)가 유적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KGB의 정보를 봉쇄했기 때문에 조사를 돕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세미차스트니는 동독의 동지들에게 쿠바의 위기에 대해 사전에 사과했고, 배치된 무기가 결코 그들을 향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확신시켰다. 다행히 KGB 제 1국장인 알렉산드르 사하로프스키(Aleksandr Michael Sakharovsky) 장군은 마르쿠스 볼프의 연구팀의 조사를 위해 기꺼이 몇 가지 정보를 제공했다. 알렉산드르 사하로프스키는 당시 제 16국은 3진법 컴퓨터를 개발하느라 바빴고 소련 정부에서 유적 관련 조직이 통합되어 관리되지 못하고 매우 분리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그에 따르면 크렘린은 유적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유적 연구 조직 문제는 1973년 5월 OKB-10에서 사고가 벌어지기까지 바뀌지 않았다.
2.8.4.2. 유적으로부터의 전기 신호
유적 네트워크 "시온"(Zion)의 CG |
KGB의 제 16국이 예멜리아-1(Емеля-1) 제어 버스를 개발하는 동안, 동독 연구팀은 계속해서 제 1유적을 열심히 연구했다. 마르쿠스 볼프는 벽의 홈이 전기 인터페이스의 일종이라고 가정했다. 잠시 쿠바로 향하기 전, 마르쿠스 볼프는 전기 엔지니어들과 컴퓨터 지식을 가진 인력들로 구성된 연구팀에게 벽의 홈을 전기 인터페이스로서 분석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그는 연구 기간 동안 기밀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경찰이 현장 밖에서 경비를 설 것을 요청했다. 마르쿠스 볼프가 동독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요청한것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1965년 12월 19일, 연구팀 구성 명령을 받은 지 3년 만에 드디어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연구팀은 Urkunde-01 벽의 홈에 전기 신호를 입력하자 반응을 보였다. 이 순간은 마르쿠스 볼프의 가설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으며, 벽의 반응은 그 증거였다. 제 1유적은 통신 출력을 위해 벽의 홈으로 전달되는 3진법 전기 신호를 사용했다. 연구팀은 유적에서 방출되는 신호를 모니터링하고 처리하기 위한 건물을 지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신호들을 해독하는 일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과학자들에게 맡겨졌다.
2.8.4.3. 90Wun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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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wish의 로고. 원래의 90Wunsch는 로고가 존재하지 않았다. |
마르쿠스 볼프 연구팀의 Urkunde-01유적에 대한 조사는 못해도 1971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무렵, 대학에서 전자기 신호 감청센터가 설립되어 연구를 시작했고, 마르쿠스 볼프의 제 1유적 연구팀과 전자기 신호 감청센터는 마르쿠스 볼프에 의해 "90Wunsch"[19]라고 명명되었다. 원래의 코드명은 90번 잔해 감청소였으나, 해당 코드명을 바꾼 이유는 보안과 기밀 유지를 위해 감청소의 코드명을 일관되도록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프의 개인적인 기록에 의하면 "90Wunsch"라는 이름을 지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독일이 언젠가 통일되어 자신들의 동포를 적으로서 대하지 않길 바랬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소원을 담아 이름을 지었다.
"Es war immer mein Wunsch"
"이것은 항상 나의 소원이었다."
- 1971년 5월 마르쿠스 볼프의 기록 中
"이것은 항상 나의 소원이었다."
- 1971년 5월 마르쿠스 볼프의 기록 中
1989년 11월 베를린에서 연설중인 마르쿠스 볼프(Markus Wolf) 대령 |
대학에 위치한 전자기 신호 감청센터는 계속 유적이 내뿜는 신호를 감청했으나, 그것으로부터 어떠한 유의미한 해독 결과를 얻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신호에 대해서 유의미한 해독결과를 얻진 못하였어도 90Wunsch는 유적에서 발산되는 신호로부터 다양하고 흥미로운 전자기장 현상들을 발견해 내었다. 이러한 발견들은 많은 전자부품들과 무선 전신 설비의 개발에 도움을 주었다.
1987년 6월 네덜란드 총리 루드 러버스(Ruud Lubbers)를 만나러 간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동독서기장 |
90Wunsch의 특정 멤버들은 유적이 인간이 만든것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분명히 매우 위험할 것이라는 유적에 대한 강한 근심과 걱정을 내비쳤다. 하지만 유적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90Wunsch의 연구는 계속 지속되었다.
1971년의 어느시점에,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는 90Wunsch에게 유적에 대한 연구를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후 90Wunsch는 전자기 신호 감청센터로 전환하여 1985년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관련 작업을 계속하였다.[20]
90Wunsch는 유적을 감청하다 뜻밖의 발견을 하였는데, 베를린 외각 근처에 위치한 NATO의 무선 감시국 "베를린 지상 거점"의 존재였다. 90Wunsch가 새로 맡게된 임무는 이에 관한 임무였다. 그들은 유적 탐사가 시작된 이래로 발전된 기술을 이용하여, 해당 무선 감시국의 감청을 진행했다.
2.8.5. 1960년대 중후반 미국의 유적 기술 개발
쿠바 미사일 위기가 1962년에 끝났을 때, 미국은 유적 문제를 더 깊게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소련은 지금까지 전체 냉전 기간 동안 유적 기술개발에 있어서 미국을 앞서나갔고, 미국은 이 격차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소련은 유적을 직접 사용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미국은 유적 기술을 다른곳에 적용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유적 기술을 적용하여 설계된 최초의 시스템중 하나는 U-2 정찰기였다. 1964년까지 스컹크 웍스는 U-2보다 더 많은 기능을 지닌 다른 항공기를 설계에 매진해 있었다.2.8.5.1. 록히드의 SR-71A 개발
록히드가 개발한 SR-71A의 비행중 사진 |
미국이 보유한 유적의 잔해는 연구를 위해 록히드의 스컹크 웍스로 이송되었다. 유적을 분석하면서 그들은 이전 J58 엔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새로운 유형의 엔진 설계를 개발하였다. 이 엔진은 1년 안에 제작되어 그들이 만드는 미래적인 항공기의 제작에 투입되었다. 이 J64[21]라고 알려진 이 새로운 엔진은 J58의 후속 모델이 되었다. J64는 훨씬 더 많은 추력내는데 성공하였고, 이를 장착한 최초의 항공기는 1967년 록히드의 SR-71A였다. SR-71A의 첫 번째 성공적인 시험 비행은 1967년에 이루어졌으며 고고도, 고속 정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22]
SR-71A 외에도 미국은 유적 기술을 활용한 항공기 연구에 몰두했다. 제대로된 성과가 속속 나오고 있기에 당연하게도 이들의 야심은 더욱 비대해져갔다. U-2와 SR-71A 모두 정찰에서의 유용성을 입증했으며 이를 통해 공격 능력을 갖춘 유적 기술 기반 항공기를 만들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그리고 이 무렵, 제3차 세계대전 발발 시 소련군을 상대로 사용할 새로운 유형의 고고도 고속 전략 폭격기에 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2.8.5.2. "오로라"(Aurora) 폭격기 개념
새로이 이론적으로 구상된 이 신개념 폭격기는 "오로라"(Aurora)라는 이름이 붙혀졌다. 만약 이 오로라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그것은 미국이 맹렬한 속도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소련의 몇몇 대공방어 시스템 범위 밖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적 목표물에 대한 선제 타격 능력을 미국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폭격기가 될 것이었다. 이 오로라 폭격기는 1970년대까지 계속 컨셉으로 남아있었으나, 이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은 그 막강한 힘을 증명하려 했다.항공기 외에도, ARPA는 미 해군과 함께 해군 함정을 위한 유적 기술의 연구 개발에 공동의 노력을 시작했다. 1969년, 캘리포니아 중부 호수 지역의 어딘가에 위치한 "D-51" 유적에서 가져온 유적의 잔해가 연구를 위해 사용되었다. 이 유적들은 배의 추진 시스템의 일부로 확인되었다. 이 유적의 잔해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전자기 유체역학 추진 시스템이 미 해군을 위해 개발되었고, 이후 구축함에, 1978년에는 핵잠수함에 구현되었다. 구축함들은 더 탁월한 음파탐지기 성능으로 보다 더 넓은 탐색 범위를 얻었으며, 잠수함들은 물 속에서 유령과도 같은 거의 완벽한 침묵상태를 유지할수 있었다.[23] 1960년대 말까지, 미국은 쿠바 미사일과 백치 위기 이후 유적 연구에 인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으로, 미국은 기술적인 수준에서 격차를 좁히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유적 기술 기반 무기에서 뒤쳐져 있었다.
2.8.6. 1962년 "GAVIRUL" 발견
북란도 유적(제27호 갑(甲)등급 기술연구기지)은 중국 상하이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유적이다. 1962년, 해당 유적을 발굴하는 동안 엄청난 발견이 이루어졌다. 섬의 표면으로부터 67m 아래에서 기원을 알 수 없는 존재가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 존재는 유적을 만든 고대 문명의 지적 생명체로 여겨졌다. 이 개체는 "GAVIRUL"라고 이름붙혀졌으며, 중국 학명은 "위"(尉)라고 불렸다. "GAVIRUL"은 그 발견된 지역때문에 유적의 수호자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해당 발굴을 마친 이후 해당 유적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판단아래 "GAVIRUL"을 보존하고 폐쇄시켰다. "GAVIRUL"은 1990년대에 재현 계획에 사용되기 전까지 30년 이상 보관되었다.2.8.7. 1967~1969년 유적 가스
2064년 특이점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붕괴액 |
2.8.7.1. "D-9-베타-주마"(D-9-Beta-Zuma) 유적 가스 실험
현재 미국 와이오밍주의 워런(Warren)산 |
1955년에 D-1 유적이 발견된 후, 미국은 D-9-베타-주마(D-9-Beta-Zuma) 유적을 포함한 더 많은 유적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발굴해냈다. D-9는 1967년 11월 미국의 와이오밍주 워런(Warren)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D-9를 포함한 미국이 보유한 모든 유적은 ARPA에 의해 관리되었다. D-9의 깊숙한 곳에는 다른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던 미지의 물질이 가스 상태로 방대한 양이 보관되어 있었다. D-9 유적의 연구원들이 가스형태로 존재하는 해당 물질의 샘플을 채취하려고 했을 때, 해당 물질은 기존의 알려져 있던 방법으로는 액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흥미롭게도, 그 유체는 유기물에 노출되었을 때에만 액화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시설에 있는 ARPA의 과학자들은 해당 유체가 유기 생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한 특정 실험에서, 연구원들은 유체가 어떠한 반응을 하는지 관찰하기 위해 시험실 안에 살아있는 인간 피실험자를 배치했다. 실험이 시작되자, 연구원들은 피실험자가 있는 실험실에 해당 유체를 풀었다. 황록색의 가스가 방을 가득 채웠고, 이전에 관찰된 현상에 따라 유기물과 접촉된 해당 유체는 액화되었다. 하지만 유체가 피실험자의 살에 닿는 순간, 타는 듯한 통증 때문에 피실험자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연구원들은 해당 유체가 접촉 부위 주변의 살을 녹이고 부식시키며, 뼈에서 직접적으로 살을 "벗겨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실험 시작 후, 5분 이내에 피실험자는 사망했다. D-9의 일부 연구원들은 실험결과에 상당한 흥미를 느꼈고, 해당 유체가 무기화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만일 이 유체가 통제상태로 무언가를 완전히 쓸어버릴 수 있다면, 이 "유적 가스" 폭탄은 얼마나 치명적이겠는가?[24]
2.8.7.2. "촉매"(Accelerant)
소련이 계속해서 "백치"를 제작함에 따라, 미국도 유적 무기라는 개념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과 백치 위기의 종식과 1963년 11월에 발생한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이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B. 존슨 36대 미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갈망하게 되었고, 미국이 소련의 유적 무기에 필적할 만한 힘을 보여줄 것을 원했다.1964년 3월 린든 B. 존슨 미국 36대 대통령 |
"D-9-베타-주마"(D-9-Beta-Zuma)에서 수행된 실험은 "유적 가스"가 인체와 접촉할 때 파괴적인 반응이 일어나며, 이는 폭탄과 유사한 것으로 무기화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것을 폭탄으로 가공할 경우, 항공기에서 투하된 폭탄이 목표물 상공에서 폭발하여 가스가 주변 지역을 오염시킬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론적으로, 이 가스는 목표 지역을 전멸시키고, 주변 지역을 사람이 살 수 없게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미국의 구겨진 체면을 피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자 필사적이었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즉시 유적 가스 폭탄 프로젝트를 지원했고, 1968년에 무기화 프로젝트를 위해 유적 가스로 가득 채운 1톤짜리 가스탱크 3통을 요청했다.
2.8.7.3. 1969년 7월 "붕괴액" 폭격
유적 가스를 담은 가스탱크와 해당 프로젝트에 필요한 ARPA의 장비는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통킹만에 있는 USS 엔터프라이즈호(CVN-65)로 이송되었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ARPA는 가스통을 "촉매"(Accelerant)라고 명명하고 공식 문서에 코드명을 사용하는 것을 피했다. 1966년 베트남 연안에서 작전중인 USS 엔터프라이즈(CVN-65) | 북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 남베트남을 연결하던 호찌민 루트(Ho Chi Minh trail) |
1969년 7월, 북베트남군에 대한 "촉매"의 첫 번째 실전 시험이 승인되었다. 임무의 목표는 미군의 폭격 후 적군이 집결지로 사용하고 있는 호찌민 루트(Ho Chi Minh trail) 근처의 미공개 장소로 선택되었다. "썬더캣"(Thundercats) 편대[25] 로 알려진 F-4 팬텀 편대가 폭격을 수행할 것이었다. 이 계획은 B-52폭격기가 폭격을 수행한 후 이어서 적군이 목표 지점에 집결하면, 썬더캣 편대가 폭격을 수행할 것을 요구했다. 유적에서 파생된 무기의 첫 사용이 이제 시작될 것이었다.
1968년 12월 남베트남 상공을 비행중인 F-4C 팬텀 II 2대 |
1969년 7월 5일, 임무는 승인되었고 썬더캣 편대의 F-4 중 한대에 유적 가스 폭탄이 장착되었다. 편대는 USS 엔터프라이즈호에서 이륙하여 B-52폭격기가 폭격후 적들이 집결중인 목표지역을 향해 비행했다. 썬더캣 편대가 목표지역에 도착했을 때, 다수의 적들이 집결해 있었고, 그 직후 유적 가스 폭탄이 투하되었다. 폭탄은 목표지역의 300m 상공에서 폭발했으며 엄청난 파괴를 일으켰다. 폭탄이 터진 지 몇 시간 후에 정찰기가 촬영한 사진들을 통해 유적 가스 폭탄의 효력이 미치는 전체 범위와 그 막강한 효과가 드러났다.
2.8.7.4. 폭격의 여파
지름 500m 일대의 지역은 어떠한 생명체의 흔적도 없이 그을린 검은 흙이 되어 있었다. 트럭 뒤편에 있던 적군은 그 어디에서도 관측되지 않았고 즉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상하게도 AK-47 소총 여러 자루가 총신이 뒤틀리고 목재파츠가 사라진채로 발견되었다. 유기물을 "붕괴"시키는 물질의 특성이 숲과 나무 등의 유기물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이 부식된 원인이라고 여겨졌다. 총신의 뒤틀림에 대해서는 가스가 인근 지역에서 1000°C 이상의 고온을 유발했음을 시사한다. 이것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가 되는 사실은 지표면이 유리조각과 같이 번들거리는 결정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1000°C 이상의 강렬한 고온이 있어야만 땅 속의 광물 성분이 녹아 이렇게 변할 수 있다.또한 흥미롭게도, 그 가스가 주변에 극심한 수준의 방사능을 일으킨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온화 방사선은 정찰기가 2km 이상의 상공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찰기에서 촬영한 필름에 반점이 생기게 했다. 이 폭발로 인해 3,000헥타르의 지역이 그 폭탄에 의해 손상되거나 방사능에 오염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실험을 통해 해당 폭탄이 이례적일 정도로 우수한 성능을 지녔다고 결론지어졌다. 또한, 이 임무의 성공은 ARPA에게 전투 시험을 위해 더 많은 가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리고 펜타곤에게 이 실험의 결과를 알린 후, 그들은 더 많은 유적 가스를 요청했다. USS 엔터프라이즈호에는 약 200㎥의 유적 가스가 적재되어 있었지만, 이 양으로는 비슷한 수준의 폭격을 겨우 3~4회정도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사용된 유적 가스의 양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날 때, 회수품 목록에 해당 유적 가스 탱크는 없었고, 이는 모든 유적 가스가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파괴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유적 가스 폭탄의 압도적인 성공은 미국에게 그들이 원하는 유적 무기를 제공해 주었다.
2.9. 1970년대
미국이 마침내 성공적인 유적 무기를 생산함에 따라 유적에 대한 소련의 연구는 정체되기 시작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과 백치 위기 이후 소련은 백치를 이해하고 그들의 시스템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했다. 백치 프로젝트에 대한 추가 개발은 타바사르-B 실험장에서 적어도 1971년까지 발생하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에는 유적 무기 개발 외에도 초강대국들은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2.9.1. 1971~1972년 "스피라에나"(Sphyraena, Шука)
"스피라에나"(Sphyraena, Шука) 노드 |
소련에서 유적 연구가 정체되며 크렘린은 백치 프로젝트에 조바심을 느꼈다. 쿠바 미사일과 백치 위기 이후, 소련이 거의 발전하지 않은 동안 미국은 계속해서 이 분야에서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1971년에 주도권은 다시 한번 소련의 손에 넘어갔다. 타바사르-B의 스타피쉬는 백치를 안정시켰고, 연구원들은 곧 백치의 완전한 정체를 파악했다. 추가적으로, 백치를 제어하기 위해 프로토 타입인 에멜리아-1(Емеля-1)의 새로운 개량형 버전인 "예멜리아-M"(Емеля-M)이라고 불리는 3진법 제어 버스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1972년까지 소련은 백치를 예멜리아-M과 결합하여 전략병기를 완성시켰고 "스피라에나"(Sphyraena, Шука)라고 명명했다.
1959년 7월 리처드 닉슨 부통령[26]과 니키타 흐루쇼프 제1서기 | 1972년 2월 21일 닉슨-마오쩌둥 회담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주석 |
한편 1969년 대서양 건너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권력을 잡았다. 스피라에나가 완공될 즈음에 닉슨과 중국은 베트남에서 상호 철수를 위해 합의를 진행했다. 그 해 닉슨의 모스크바 방문과 함께 미중 공동 성명서는 완성된 스피라에나를 세계에 선보이려는 소련의 관심을 자극했다.
2.9.1.1. 1972년 10월 혁명 퍼레이드
1972년 소련의 10월 혁명 퍼레이드 영상의 한 장면 |
소련의 힘이 커지는 것을 느낀 크렘린은 지금이 그들의 창조물을 다시 한 번 세상에 선보일 때라고 느꼈다. 1972년 10월 혁명 퍼레이드 동안, "백치"가 공개된 지 11년만에, 32개의 "스피라에나"(Sphyraena, Шука)가 공개 전시되었다. 다시 한 번 소련의 유적 프로젝트에 대한 미국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전 ARPA의 보고서는 소련이 "백치"를 무기화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고 주장했지만, 분명히 그들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워싱턴에서 닉슨은 즉각 미국 국방의 최주요 목표가 스피라에나와 경쟁할 유적 무기의 개발이라고 요구했다. 게다가 닉슨은 1973년 미국의 초점이 베트남에서 유적 쪽으로 다시 한 번 옮겨가자 베트남 정부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2.9.2. 1972~1973년 소련의 유적 연구조직 개편
스피라에나(Sphyraena, Шука)의 성공적인 제작과는 별개로, 소련의 유적 연구는 1970년대 동안 계속해서 하락세였다. 이러한 연구의 정체는 소련이 유적 관련된 일을 할 때 사용한 조직의 구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KGB 제 16국이 전면 통제하는 "독립 연구소 시스템"은 유적을 연구하는 연구원들 간의 소통과 협력에 좋지 못했다. 거의 모든 유적관련 문제가 전부다 한 조직을 거쳐간다는 이러한 명령 구조로 인해 소련의 유적 연구는 부진해 질 수밖에 없었다. 타바사르-B(Tabasar-B)의 생산팀 수장인 M.J. 실츠비아(M.J. Syrzrvia)교수는 유적 연구조직의 구조를 개편하기 위해 제 16국에게 몇 가지 개선안을 제안했다. 실츠비아 교수는 미국이 사용하는 연구조직의 구조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는 점을 알아차렸고, 소련이 그러한 구조로 부터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제 16국은 유적 연구를 로모노소프 주립대학(Lomonosov Moscow State University)과 공유하고, 유적에 대한 정보 작업만 처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실츠비아 교수가 제안한 연구조직 개편안은, 상부의 고지식함과 미국과 같은 조직 구조를 사용하게 된다는 거부감 때문에 제 16국에게 무시되었다. 그로 인해 연구조직의 비효율적인 구조는 OKB-10 사건이 벌어지는 1973년 5월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2.9.2.1. 1973년 OKB-10 사건
OKB-10은 북극 극지방의 만년설 아래에서 소련이 발견한 유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외진곳에 있는 유적 중 하나였다. 1973년 5월 12일, 로모노소프 주립대학(Lomonosov Moscow State University)과 KGB 제 16국은 현장에 있는 연구원들과의 연락이 끊어졌다. 공격의 가능성이나 크나큰 혼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소련 북방함대의 해병들이 수색 및 구조 작전을 위해 OKB-10에 배치되었다.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정체불명의 적에게 공격을 받았다. 다행히 구조대가 적을 제압하고 상황은 안정되는듯 보였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구조대로 파견된 해병들 중 여럿에게서 신체에 생물학적 이상 징후가 포착되기 시작했고, 이것으로 인해 상황 통제력을 다시 한 번 상실했다. 실제 소련군에서 사용한 화생방보호복[27] 좌,우 : OZK(ОЗК)[28] / 중간 : L-1(Л-1)[29] |
OZK(ОЗК)[30] | OZK(ОЗК)[31] | L-1(Л-1) |
소련은 OKB-10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추가 부대를 OKB-10에 배치했다. 추가 배치된 부대는 위험상황에서 못해도 1시간은 생존할 수 있는 3급 생화학방호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부대 역시 현장에 진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연락이 두절되었다. 장비를 단단히 갖추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유적에서 두 번째 부대의 평균 생존시간은 20분 남짓이었다. OKB-10 사건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상세히 공개되지 않아, 사건의 진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구조대가 맞닥뜨린 정체불명의 적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은 광역성 저복사 감염증(Euroky Low-emission Infectious Disease, E.L.I.D.)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2.10. 1970년대 중후반
2.10.1. 1974년 "오로라"(Aurora) 폭격기 완성
수 년 동안, 미국은 유적 연구에서 파생된 폭격기 개념에 대해 상세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속한 전략적 공격을 위해 고고도 (극초음속일 가능성이 있는)고속 폭격기에 대한 연구였다. 오로라(Aurora) 프로젝트는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고, 첫 번째 성공적인 오로라 폭격기 시험 비행은 1973년에 완료되었다. 크렘린에 대한 우월감의 표시로, 미국은 오로라 폭격기의 장거리 비행을 소련 상공으로 정했다. 1974년 5월 1일, 오로라는 유콘의 활주로에서 이륙하여 모스크바로 향하는 비행을 시작했다. 정확히 아침 9시, 폭격기는 모스크바 영공에 진입하여 소련을 충격에 빠뜨렸다.[32] 오로라는 소련의 철의 장막을 뚫고 미국은 유적 기술의 1위를 놓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2.10.2. 1974~1975년 베트남전
오로라가 수도인 모스크바 상공을 비행하면서 소련은 미국이 유물 기술의 격차를 점점 따라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로라의 비행에 대한 간접적인 대응으로, 크렘린은 공식적으로 북베트남 정부를 지원하여 남베트남을 침공하는 것을 지지했다. 추가적으로, 미래에 사용할 수 있는 스피라에나 개발에 대한 노력도 증가했다. 1975년 1월,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의 사기와 지휘 체계의 부족으로 남부의 수도 사이공을 점령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의 군대가 소규모로 분열되는 동안 북베트남의 군대는 규모를 유지했고, 이는 남베트남의 급속한 패배로 이어졌다. 미국과 소련 모두 주의깊게 이 상황을 관찰했다.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군병력의 죽음은 사기의 저하, 지휘 체계 붕괴로 이어질 수 있음이 분명했다. 이 관찰은 양측이 군대를 위한 정보 지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에 동기를 부여했다.2.10.3. 1975년 "아파넷"(ARPANET)
남베트남과 그 군대의 몰락 이후, 미국과 소련은 군사 정보 지휘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남베트남의 군대는 사기저하와 지휘 체계 붕괴로 인해 분열되어 북베트남의 군대에게 쉽게 괴멸되었다. 두 강대국은 자신들의 군대가 그 체계가 무너진다면 더 많은 유적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중요치 않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보 네트워크에 대한 연구는 이미 수 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남베트남의 실패는 이러한 네트워크가 미래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1975년 이전에 ARPA는 이미 1960년대 후반에 더 작은 규모의 네트워크, "아파넷"(ARPANET)을 설계했으며, 남베트남이 함락된 후 DARPA[33]는 아파넷의 통제권을 미국 국방부의 국방정보체계국(Defense Information Systems Agency, DISA)에게 넘겼다.1973년 5월 "아파넷"(ARPANET)의 논리적 지도. |
아파넷은 미군에서 사용하기 위해 ARPA에서 만든 패킷교환방식을 이용한 네트워크다. 네트워크는 중앙 제어 노드가 필요하지 않고 분산 네트워크 프레임워크를 사용했다. 네트워크 노드와 터미널은 시스템에 연결된 다른 노드와 통신 데이터 및 메시지 패킷을 공유한다. 분산되고 중앙 집중화가 덜 된 구조이기 때문에 네트워크는 하나 이상의 네트워크 노드가 비활성화되더라도 여전히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아파넷에 연결된 사용자는 여러 노드가 오프라인 상태가 된 경우에도 다른 사용자와 계속 연결할 수 있다. 아파넷의 이러한 군사적 사용 외에도 DARPA는 1981년까지 오로라를 위한 아파넷 기반의 자율 제어 시스템 프레임워크를 만드는 과정에 있었다. 오로라 시스템이 만들어진다면 소련에 대항하는 완벽한 드론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10.4. 1975년 "오가스"(ОГАС, OGAS)
"오가스"(ОГАС, OGAS[34])의 상징문양[35] |
소련의 네트워크는 미국의 아파넷과 구조적으로 상당히 달랐다. ARPA는 덜 중앙집권화된 구조를 계획하여 만들었지만, 소련은 계속해서 중앙집권화된 명령 체계가 있는 구조를 선호했다. 오가스(ОГАС, OGAS)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이자 기술책임자인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글루시코프(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Глушко́в, Victor Mikhailovich Glushkov)는 남베트남의 붕괴 이후 크렘린의 인적, 물적 지원이 증가하는 것을 느꼈다. 추가적인 자원 덕분에 V. M. 글루시코프는 더욱 열정을 다해 프로젝트에 매진했다. 이 네트워크는 1960년대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오가스(ОГАС, OGAS, 자동화된 정보 처리 및 회계 네트워크 시스템)로 명명되었다. 시스템의 청사진은 민스크 근처의 OKB-413 유적에서 최초로 발굴되었다.
1972년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글루시코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Глушко́в, Victor Mikhailovich Glushkov) |
오가스는 아파넷과는 달리 트리구조 형태로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이 시스템에는 상위 메인프레임과 하위 메인프레임이라는 두 가지 수준의 메인프레임이 존재한다. 이 트리구조형태의 네트워크에서는 상위 메인프레임이 하위 메인프레임에 대한 제어 및 감독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하위 메인프레임간의 소통 또한 상위 메인프레임에게 권한이 있었다. 상위 메인프레임은 하위 메인프레임에 대한 권한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지만, 하위 메인프레임은 이러한 권한이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시스템의 주요 결함 중 하나가 상위 메인프레임을 무력화시키는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이다. 상위 메인프레임이 비활성화된다면 하위 메인프레임에서는 상위 메인프레임 없이는 권한이나 프로토콜을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쓸모없게 된다.
그럼에도, 오가스는 소련의 지휘체계에 도입되어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소련도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유적에서 파생된 여러 기계와 무기에 적용할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로모노소프 주립대학의 새로운 목표는 오가스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스피라에나 통제 시스템의 구현이었다.
2.10.5. 1976년 "자유의 여신상"실험
[36]몇 년 동안, 미국은 유적 자체를 실험했다. "자유의 여신상"으로 알려진 일련의 최소 11번의 실험들이 남극의 보스토크 호에 있는 "D-1" 유적에서 수행되었다. 이 실험들은 "D-1"유적의 "문"(Door)을 통한 4개의 자율 임무와 7개의 유인 임무를 포함되었다. 이 실험의 주요 목표는 소형 잠수정이 보스토크 호 아래의 "문"을 통과하여, 뉴멕시코의 로스 앨러모스에 있는 "D-2" 유적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7번의 유인 임무 중 6번은 성공했고, 1번은 실패했으며, 총 19명이 참가했고 그 중 3명은 살아남지 못했다.
미 육군 그린베레 기술 전문가 고먼 웨일랜드(Gorman Weyland)는 이전에 2번의 "자유의 여신상"실험에 참여했으며, 7번째 유인 임무는 그의 3번째 임무였다. 11번째 실험에서, 웨일랜드는 잠수정을 통해 "문"에 진입했다. "D-2"에 도착했을 때, 웨일랜드는 임무 중 부상을 입었고, 그는 도착한 후 격리된 감압실에 격리조치되었다. 연구원들과 의료진들은 그의 질병을 확인하기 위해 신체 검사를 실시했다. 검사 결과 웨일랜드는 여러 가지 이상한 증상을 가진 알려지지 않은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웨일랜드의 체내에 있는 체세포들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변이된 체세포들이 증식하였다. 신진대사가 빨라지고 혈중 적혈구가 비정상적으로 많아져 혈중 백혈구 수치가 감소하여 면역력이 저하되었으며 환청과 환시가 동반되었다. 심지어 신체 기관과 피부의 규소화가 진행되기 시작했으며, 골밀도가 증가하여 골격의 경도가 증가했다. 골격 내부의 변형으로 인해 강철의 경도를 능가하는 400 Hb(N/mm2)의 경도에 도달했다.
소녀전선에서 보여진 말기단계의 E.L.I.D.감염자 |
실험 후 61시간 만에 웨일랜드는 병으로 쓰러졌고, 질병의 이상한 특성과 "D-2" 연구팀의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웨일랜드의 사인은 방사선 질환으로 분류되었다. 현재, 웨일랜드는 죽기 전에 질병의 β-Time[37] 직전까지 진행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신체는 질병의 β-Time을 넘어설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았다. 고먼 웨일랜드의 죽음은 E.L.I.D.로 인한 미국의 첫 번째 사망자였다. 미국은 국민들 중 하나를 E.L.I.D.로 인해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E.L.I.D.가 끼칠 인류에 대한 재앙적인 영향을 계속해서 무시했다.
2.10.6. 1978~1980년
1970년대 후반, 두 강대국은 비밀리에 유적 기술과 무기를 개발하여 발전시면서 보안을 유지했다. 1978년에, 미국에서 최초의 자기유체역학 추진 시스템 잠수함이 개발되었고, 이는 잠수정 스텔스 기술에서 전략적 이점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1980년까지 세 척의 핵잠수함에 해당 추진 시스템을 도입했다. 한편, 소련에서는 로모노소프 주립대학이 "스피라에나"를 위한 오가스기반 통제 시스템을 계속 개발했다. 이 시스템은 "스피라에나 노드"(Sphyraena Node)라고도 알려졌으며, 스피라에나의 코어에 구현되었다. 오가스의 소스 코드는 각각의 "스피라에나 노드"에 저장되었다.2.11. 1980년대
각각의 나라들이 무기와 기술을 개발해 나가는 동안, 전 세계적으로는 매우 불길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E.L.I.D. 감염사례가 급증했지만 양측 모두 계속해서 이를 외면하고 무시했다. 1980년에는 유적을 사용한 다양한 실험, 연구 및 폭격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15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E.L.I.D.에 감염되었다. 전쟁 중 붕괴액 폭격으로 인해 베트남에서만 10,000명 이상의 사람이 E.L.I.D.로 사망했다. E.L.I.D.가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은 퍼져나가는 E.L.I.D.를 계속 외면했다. 1980년에는 점점 퍼져 나가는 E.L.I.D. 전염병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스피라에나의 실전 실험을 준비했다.2.11.1. 1980~1981년 스피라에나 실전 실험
미국과 마찬가지로 소련도 자신들이 만든 유적 무기의 효과를 측정하려면 결국 전투에서 이를 시험해 봐야 한다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 프로토타입인 "백치"와 완성된 "스피라에나"는 모두 실전에서 사용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실전에서 성능을 검증해 보아야 했다.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계속되자 소련은 이를 스피라에나를 시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2064년의 미하일 세메노비치 츠비군 (Михаил Семёнович Цвигун, Mikhail Semenovich Tsvigun) |
소련군 총참모부에 실전 실험을 승인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1980년 12월 5일, 총참모부는 KGB 제 16국 국장 "미하일 세메노비치 츠비군"(Михаил Семёнович Цвигун, Mikhail Semenovich Tsvigun)에게 이 계획을 승인했다. 임무를 위해 그는 '기술자문 보리킨'이라는 신분을 사용했다. 오늘날 "미샤"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미하일은, 이 작전에 참여하여 지휘한 공로로 적성훈장을 받았다. 이 작전은 1981년 1월 제794근위공병대(794th Guards Engineering Corp)에 의해 수행되었다. 1980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스피라에나 4대가 Mi-6 헬리콥터에 실려서 타지키스탄의 철도 중심지에서 카불 외곽까지 날아갔다. 제794근위공병대는 1981년 1월 2일 아프가니스탄에 배치되어 스피라에나의 준비를 시작했다.
미국 중앙정보국 (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의 문장 |
이번 실전 실험의 목표는 CIA의 자금 지원을 받는 파키스탄 카이베르 고개주변에 위치한 랜디 코탈 근처에 있는 무자헤딘(Mujahideen, مجاهد)의 훈련 캠프였다. 제794근위공병대가 스피라에나의 점검을 마친 후, 파키스탄의 국경과 더 가까운 잘랄라바드로 이동했다. 1월 4일 저녁에 최종 점검 및 조정이 이루어졌고, 곧 미션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5일 0시, 본격적으로 미션이 시작됐다. 무자헤딘에게 FIM-92 스팅어 맨패즈가 있었기 때문에, 제794근위공병대의 일부는 스피라에나의 수리와 오염 제거를 위해 잘랄라바드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제794근위공병대는 랜디 코탈의 외곽을 지나가는 동안 스피라에나를 호위하고 그 후 활성화시킬 예정이었다.
스피라에나가 남긴 흔적이 너무 많은 주의를 끌거나 발각되어 경보가 울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호위대는 자정에 출발했다.현지시각 07시 14분, 호위대는 작전지역 경계에 도착 후 공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기다렸다. 곧이어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호위대는 스피라에나의 에멜리아-M 제어 버스에 공격 명령을 입력했다.
2.11.1.1. 랜디 코탈 공격
1981년 1월 카이베르 고개 작전 지도. 이 지도는 작전 진행 경로에 대한 "적절한 추측"일 뿐, 정확한 것이 아니다. |
7시 30분, 스피라에나는 32km/h의 속도로 랜디 코탈을 향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15분 후, 스피라에나의 흔적이 경비대에 의해 포착되었고 경보가 울렸다. 스피라에나는 "포식" 모드로 들어가 눈에 보이는 모든 목표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0분도 안 되어 4기의 스피라에나는 2기씩 두 팀으로 나뉘어 훈련캠프의 양쪽을 한꺼번에 공격을 개시했다. 1팀은 북쪽 도로를 통해 기지 측면으로 배치되었고, 2팀은 산을 통해 계속 전진했다.
랜디 코탈 외곽의 북쪽 도로 |
8시, 무자헤딘은 다가오는 적에 대비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방어선에서 행해진 휴대용 대전차 로켓과 기관총을 포함한 무자헤딘 모든 공격이 스피라에나에 대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스피라에나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방어선이 구축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스피라에나는 방어선을 돌파했다. 무자헤딘은 더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랜디 코탈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스피라에나가 랜디 코탈에 접근하자 무자헤딘의 포병들이 스피라에나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105mm 곡사포가 스피라에나 2기를 향해 발사되었지만, 스피라에나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훈련 캠프가 돌파되고, 스피라에나를 향해 대전차 로켓, 60mm, 80mm 박격포가 발사되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전투에서 말그대로 스피라에나는 무적이었다.
8시 30분, 훈련 캠프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무자헤딘의 잔당들도 랜디 코탈에서 완전히 퇴각했다. 작전이 시작한 후 단 한 시간 만에 스피라에나는 여러 화기와 대전차 로켓, 포 등으로 무장한 천 명이 넘는 적군을 물리치면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무자헤딘의 기지를 점령했다. 스피라에나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2.11.1.2. 스피라에나 실전 실험 결과
기지를 점령한 지 10분 후, 스피라에나는 복귀를 위해 출발지점으로 집결했다. 이후 각각의 스피라에나들은 "통조림"(Can)[38]에 수납된 채로 Mi-6에 실려 잘랄라바드로 운반되었다. 30분 후, 목적지에 도착한 스피라에나는 즉시 검사를 위해 하역하여 이송되었다. 794근위공병대의 대원들은 곧바로 스피라에나의 제염작업을 진행하여 붕괴액 오염을 제거하고 추가적으로 누출 여부를 검사했다. 다행스럽게도 4기의 스피라에나 중 그 어느것도 커다란 손상을 입거나 심각한 붕괴액의 유출이 없었다. 이번의 실전 실험을 통해 스피라에나는 실질적인 저항력을 지닌 강력한 병기라는 것을 입증했다.랜디 코탈 공중 정찰 사진[39] |
스피라에나의 회수 이후, MiG-25편대가 정찰을 위해 남부 칸다하르에서 랜디 코탈로 이동했다. 해당 정찰을 통해 촬영된 사진을 통해 이번 공격으로 벌어진 참담한 광경이 드러났다. 스피라에나들은 이동하면서 폭 8m의 그을린 흔적을 남겼다. 이 그을린 곳에서는 여러가지 것들이 반짝이며 희미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결정화된 지표면으로 생각되었다. 이는 지표가 1000°C이상의 고온에 노출될 때 벌어지는 현상으로, 이를 고려한다면 스피라에나는 작동할때 매우 고온의 열기를 방출한 것으로 여겨졌다.
스피라에나가 해당 지역 전반을 이동하면서, 그 지역에 있는 집의 절반을 포함하여 이동 경로에 있는 모든 물체가 파괴되었다. 타바사르-B(Tabasar-B) 실험장에서 관측된 바에 따르면 스피라에나는 이동 경로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들을 기본 입자로 "붕괴"시켰다. 모든 유기물은 시야에서 지워졌고, 생존자는 단 한 명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훈련 캠프는 그저 잔해 더미로 바뀌어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고려하였을 때, 스피라에나의 작전 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스피라에나는 내부의 붕괴액을 동력원으로 사용하여 주변에 "역장"을 형성한다. 이 "역장"과 접촉되는 모든 물질은 기본 입자로 분해된다. 이 붕괴반응은 상당한 양의 열을 발생시키며, 이를 통해 예의 결정들과 그을린 흔적을 만들어 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스피라에나에 대한 정보가 NATO에 보고된다면, 소형화기와 포병은 완전히 쓸모가 없으며, 기갑 부대 또한 효과적이지 않다는것을 알게 될 것이다.
2.11.2. 1980~1981년 E.L.I.D. 위기
198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15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E.L.I.D.에 감염되었다. 미국의 붕괴액 폭격으로 인해 베트남에서 10,000명 이상이 "붕괴 방사선"에 피폭되어 감염되었다. 카이베르 고개에 배치되었던 스피라에나로 인해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도 E.L.I.D. 감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0년부터 1981년까지 50,000명 이상이 추가로 감염되었다. 새로 감염된 인원들 중, 5,000명정도는 E.L.I.D. 돌연변이로 완전히 변이해버렸으며, 전 세계적으로 돌연변이가 점차 증가해나갔다.E.L.I.D.는 감염 매개체와 파악된 치료법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였고, 이로 인해 E.L.I.D.에 감염되는 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몇몇 국가에서는 감염자와 싸우기위하여 특수부대를 창설하였지만 E.L.I.D.에 대한 지식과 경험 부족으로 인해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는 감염자의 다양한 상태와 돌연변이로 인한 것이었는데, 당시 존재했던 전투 데이터의 대부분은 E.L.I.D.를 상대하기에는 효과가 없었다. E.L.I.D.의 전파가 본격적인 규모로 현실화되면서, 초강대국들은 이 문제를 회피할 수 없음을 알게되었다.
2.11.2.1. 1981년 유적 무기 제한 조약
E.L.I.D.는 인류의 안녕에 대한 심각한 위헙임이 증명되었으며, 더 이상 이를 좌시할 수 없었다. 미국과 소련은 E.L.I.D. 위기 억제를 위해 초당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해당 논의 과정에서 양국은 서로의 유적 무기와 기술을 공개했고, 유적 무기의 사용이 E.L.I.D. 전염병의 근본적인 원인임이 분명해졌다. 양국은 이 무기들의 사용이 인류 종말을 필연적으로 초래할 것을 알고있었다. 1981년 말, 세계의 안전을 위해서 유적 무기 제한 조약이 비준되었다. 조약에는 모든 유적 연구를 중단하고 이미 배치된 모든 활성상태의 유적 무기들을 해체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백신 개발을 통해 E.L.I.D.를 억제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는 1983년까지 계속되었다.2.11.3. 1983년 제네바 성명
E.L.I.D. 위기 동안, 국가간의 단결이 이 위기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여겨졌다.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E.L.I.D. 위기를 억제하고 제 2차 유적 무기 군비 경쟁이 벌어질 가능성을 억제하기 위해,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 서기장(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Андро́пов)과 로널드 윌슨 레이건 대통령(Ronald Wilson Reagan)은 제네바 성명을 발표했다. 1983년 7월 1일, 제네바 성명이 발표되며, 35년간 지속된 갈등은 종식되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세계적으로 퍼져있던 긴장은 완화되었고, E.L.I.D.백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공식적인 제네바 성명은 다음과 같다.
1983년 7월 1일 - 제네바 성명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한 시대의 종결을 선언하고자 합니다. 냉전이라 불리는, 양 진영 사이에서 벌어진 전면적인 군사, 경제, 정치적 대립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우리는 현재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범세계적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편견과 이념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뭉쳐야 합니다. 단결만이 전 인류의 존속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양측은 이러한 정신으로 본 성명에 공동으로 서명합니다."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
로널드 윌슨 레이건
#@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한 시대의 종결을 선언하고자 합니다. 냉전이라 불리는, 양 진영 사이에서 벌어진 전면적인 군사, 경제, 정치적 대립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우리는 현재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범세계적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편견과 이념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뭉쳐야 합니다. 단결만이 전 인류의 존속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양측은 이러한 정신으로 본 성명에 공동으로 서명합니다."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
로널드 윌슨 레이건
#@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 서기장 (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Андро́пов) | 로널드 윌슨 레이건 대통령 (Ronald Wilson Reagan) |
2.11.3.1. 제네바 성명 이후
E.L.I.D. 위기를 끝내기 위해, 이전의 적대국들이 서로 단결하는 평화와 화합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81년 맺어진 유적 무기 제한 조약과 1983년의 제네바 성명 이후 많은 유적 기술과 유적 무기가 파괴되거나 봉인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협약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세상이 파괴되거나,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간의 선의의 협력뿐이라는 것을 알았다.소련 측에서는, 도난이나 오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피라에나와 이에 관련된 기술들을 소련 전역에 분산시켜 봉인했다. 스피라에나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위치한 여러 OKB의 시설에 봉인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봉인되어 있다.
KGB 16국 국장 미하일 세메노비치 츠비군은 오가스 네트워크를 군사적인 용도에서 경제적인 용도로 전환하는 것을 주도했다. 이 새로운 시스템은 지구과학을 기반으로한 소련 경제의 경제 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시스템인 "국가 경제 자동화 시스템"(National Economy Automation System, NEAS)이라고 알려졌다.
2.11.4. 1970~1980년대 마의 산(Der Zauberberg)
수 년 간, 동독의 90Wunsch는 Urkunde-01과 전자기 신호 감청센터에서 계속해서 연구작업을 진행 하고 있었다. 90Wunsch는 1970년대의 어느 시점에 서독에서 대규모 NATO의 무선 감시국을 발견했다. “베를린 지상 거점”은 서베를린 근처의 마의 산(Der Zauberberg)[40]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90Wunsch의 예측에 의하면, 이 거점의 감시 시스템은 군 내부 군사 지휘 통신망을 포함하여 바르샤바 조약 기구 내외부의 모든 무선 신호를 추적, 방해 및 교란을 할 수 있었다. 90Wunsch의 전자기 신호 감청센터가 이를 탐지해낸 덕분에 마의 산에 있는 해당 거점이 발견되었고, 해당 시스템에 침투 할 수 있었다.NATO의 첩보 체계에 구멍이 뚤림에 따라 동독은 서서히 원격으로 거점의 권한을 빼앗아 장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의 산에게로 허위 정보를 흘리며 기밀 정보의 유출을 막았다. 그러나, NATO 사령부에 가짜 명령을 보낼 수는 없었다. 국가안보 무선 방첩기관 덕분에, 해당 전문가들이 마의 산의 수비벽을 돌파하여 거점을 전자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그후 10년간 동독은 이 거점을 통해 NATO에 대한 전자전과 방첩작전을 시행했다. 1985년 독일의 통일 전까지, 막대한 양의 허위정보가 마의 산을 거쳐 워싱턴에게까지 전송되었다.
E.L.I.D. 위기 동안 유적 무기 제한 조약이 체결된 후, 90Wunsch는 해체되었고, 이들은 NATO와 소련, UN 등으로 흩어졌다. 또한 1985년에 독일이 통일되면서 90Wunsch가 보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정보들은 다른곳으로 전달되거나 파기되었다. 악화되고 있는 동독 경제를 위한 마르쿠스 볼프(Markus Wolf)의 마지막 희망은 오가스 시스템과 같은 경제 시스템의 도입이었다. 하지만 마르쿠스 볼프와 90Wunsch, Urkunde-01에 대한 추가 조사를 중단하기 위한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의 조기 개입으로 인해, 이 시스템은 독일에 적용되지 않았다. 90Wunsch가 해체된 후, 위 데이터들은 마르쿠스 볼프에 의해 심사를 받은 후 파기되거나 미하일 세메노비치 츠비군에게 넘겨졌다.
2.12. 1980년대 후반
유적 무기 제한 조약과 제네바 성명으로 여러 나라의 적대적인 행위는 점차 줄어들고, 점진적으로 단결의 시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E.L.I.D.의 위험은 세계 각국의 연합된 노력을 통해서만 싸울 수 있는 강력하고 위협적인 적임이 입증되었다. 80년대가 끝날 무렵까지, 미국과 소련 양측은 E.L.I.D.에 대한 치료법과 백신 개발을 앞다투어 연구했다. 또한 많은 국가에서는 중국의 SCAPF(Special Circumstances Armed Police Force, 특수상황 무장경찰기동대)와 같은 E.L.I.D. 대처를 위한 특수부대를 창설했다.2.12.1. 오가스 프로젝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글루시코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Глушко́в,Victor Mikhailovich Glushkov) |
소련의 황혼기인 1980년대 말, 상위 오가스 시스템의 지원 상실로 인해 비무장화를 위한 업그레이드를 설치하는 동안 문제가 발생했다. 이 업그레이드 문제로 인해 오가스 시스템은 효율성이 저하되어 전국적으로 다양한 경제적, 정치적 문제를 야기했다. 또한 당시 발생한 석유 파동으로 인해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오가스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KGB 16국은 오가스 시스템을 민간용으로 전환하려는 아이디어를 지지하며 이 프로젝트에 계속 참여하였다. 오가스 프로젝트 총 책임자이자 기술책임자인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글루시코프(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Глушко́в, Victor Mikhailovich Glushkov)와 KGB 16국의 국장 미하일 세메노비치 츠비군(Михаил Семёнович Цвигун, Mikhail Semenovich Tsvigun) 및 소련 공산당(КПСС, CPSU)은 모두 오가스가 정치 구조 개변, 효율적인 경제계획 및 자원 관리및 분배를 위한 도구로 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오가스 프로젝트 외에도 미하일 세메노비치 츠비군은 1980년대 후반에 전 세계적인 E.L.I.D.를 대처하고 있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E.L.I.D.발생의 원인을 제공했었다.
2.13. 1990년대
1991년, 국제질서에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유적 무기 제한 조약이 채결 이후 거의 10년 만에 유적 무기 제한 조약은 유적 기술 협약으로 확대되었다. 1991년 3월 31일, UN은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조약을 유적 협약으로 개정했다. 이 개혁은 유적의 연구와 활용 방식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UN은 유적과 유물을 다루는 새로운 기관을 설립하는 계획을 새로이 시작시켰다.2.13.1. 1991년 8월 쿠데타 & 오가스의 끝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붉은 광장의 전차 |
1991년 UN이 유적 기술 협약을 통과시킨 이후, 대부분의 유적 기술은 모든 국가에서 영구적으로 봉인되었다. 이 시기에 미하일 세메노비치 츠비군은 오가스 시스템의 비활성화 날짜를 연기하고 소련 유적 프로젝트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광범위한 정치적 분열과 불안으로 인해 소련은 붕괴되고 있었다. 그리고 8월 19일, 쿠데타 이후 오가스 프로젝트 팀이 품고 있던 희망은 그날 밤 붉은 별과 함께 무너졌다. 쿠데타의 시도 이후 1991년 8월 19일, 소련은 국기를 내렸다.[41] 소련이 분열됨에 따라 러시아의 과두 정치인들과 투자자들이 권력을 공고히 굳히는 동안, 이들은 모든 유적 문제를 제쳐두었다. 미하일 세메노비치 츠비군과 KGB 16국은 빠르게 쇠퇴되었으며, 오가스 시스템은 영구적으로 봉인되었다. 1999년, 블라디미르 푸틴(Владимир Путин, Vladimir Putin)이 총리가 된 후에야 유적 문제가 러시아에게 다시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2.13.2. 1992년 UN 유적기구(Relic Agency)
UN 유적기구(Relic Agency, 遗迹署)[42][명칭] |
유적 기술 협약에 체결된 직후, UN은 유적과 유적 무기를 특별히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기관에 대한 계획 초안을 작성했다. 1992년 3월 2일, UN 유적기구(United Nations Relic Agency, UNRA)[명칭]가 전세계 유적 무기의 개발과 제조를 중단하겠다는 목적을 표명하며 설립되었다. 유적기구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현재 존재하는 유적 무기의 폐기, 인류를 향상시키는 평화적인 수단을 위한 유적 기술 활용, 모든 인류를 위한 정의, 자유 및 평등을 달성하는 것이다. 유적기구의 창립 모토는 "인류의 관념 속에 평화를 건설하라"(Building peace in the minds of men and women)였으며, 주창하는 이념은 다음과 같았다.
"Since wars begin in the minds of men, it is in the minds of men that the defenses of peace must be constructed."
"전쟁은 인간의 관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관념 속에 평화를 지키는 장벽을 건설하여야 한다."
유엔 유적기구 선언 中 #@
"전쟁은 인간의 관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관념 속에 평화를 지키는 장벽을 건설하여야 한다."
유엔 유적기구 선언 中 #@
순수하게 인류에게 유익한 목적을 위해 유적 기술을 통제하고, 보호하고, 활용하는 것은 모든 국가의 의무가 되었다. 유적기구의 수장은 "최고 책임자"(Chief Director)로 알려져 있었고, 유적기구는 D-1부터 북란도 유적까지 전세계의 유적 문제를 다루었다. 유적기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한 명인 "래더 앨버트 루크사트"(Raeder Albert Rossartre, 雷德尔·罗克萨特)[번역]가 후일 최고 책임자가 되었고, 그의 일생 동안의 그의 가르침과 영향은 후에 루크사트주의(Rossartism, 罗克萨特主义)[번역]라고 알려진 이념을 낳았다.
2.13.3. 1992년 판도라(Pandora)
1992년 9월 11일 모스크바와 뉴욕에서 다수의 테러가 발생했으나 정확한 테러방식과 피해정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테러 이후 반 유적 극단주의 조직인 '판도라'(Pandora)가 선언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소행임을 선언했다."The urge to steal fire is mankind's original sin."
"불을 훔치려는 욕망은 인간의 원죄이다."
반 유적 극단주의 조직인 '판도라'(Pandora)의 선언문 中 #@
"불을 훔치려는 욕망은 인간의 원죄이다."
반 유적 극단주의 조직인 '판도라'(Pandora)의 선언문 中 #@
2.13.4. 1992년 흑백합과 백장미 프로젝트(Black Lily and White Rose Project)
[47]유적기구가 결성된 후. 많은 연구자와 과학자들이 유적과의 접촉에 관심을 보였다. GAVIRUL은 1992년에 보관소에서 꺼내졌고 유적 과학계는 GAVIRUL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구조적인 미흡함과 리더십의 부족으로 인해 유적 과학계는 두 집단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집단은 GAVIRUL이 유적을 활성화하는 "열쇠"라는 것을 지지했으며, 그렇기에 다양한 유적 기반 기술의 추가개발 및 재생산이 가능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두 번째 그룹은 유적문명의 위험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과 GAVIRUL의 혼종을 만들자는 것을 지지했다. 이 혼종은 이론적으로 유적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구조적인 미흡함으로 인해, 두 번째 그룹이 UN과 과학계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다. 그렇게 GAVIRUL 재현 프로젝트는 시작했다.
배아의 배양이 즉시 시작되었지만, 유전적인 불안성으로 인해 배아 배양의 실패율은 98.9%에 달했다. 단 두 개의 배아만이 테스트에서 살아남았으며, 염색체의 완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둘 다 여성이었다. 살아남은 피험자들은 사용된 난자의 유전적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외형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생성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무렵, 2명의 성공적인 GAVIRUL혼종이 탄생했다.
2.13.4.1. 흑백합과 백장미
관찰대상 G-37은 유전적인 결함으로 인해 흰 머리카락을 지닌 유럽계 혈통이었으며, 관찰대상 G-114는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아시아계 혈통이었고 유전적 결함은 없었다. 유아기 동안 그 둘은 평범한 다른 사람, 즉 일반적인 어린 소녀들과 구별할 수 없었다. 연구진들은 G-37과 G-114를 각각 "로즈"(Rose)와 "릴리"(Lily)라고 이름 지었다. 연구소는 그들의 머리 색과 이름을 따서 프로젝트의 이름을 "흑백합과 백장미 프로젝트"(Black Lily and White Rose Project)라고 이름 지었다. 또한, 이들의 유전자는 각각 "라케시스"(Lachesis)와 "아트로포스"(Atropos)라는 코드명으로 명명되어 -80℃의 저온 저장고에 보관되었다. 라케시스와 아트로포스는 모두 그리스어 "모이라이"(Moirai)에서 유래했으며, "운명의 세 여신"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인류의 운명을 엮은 세 자매 중 두 자매이다.[48]그들이 7살 때, 이미 그들의 발달에 이상이 관찰되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인간보다 두 배나 빨리 성장했고 둘 다 신체적으로는 14세 정도였다. 프로젝트가 시작된지 15년이 지났을 때, 두 소녀 모두 근력이 다소 강해졌다는 것과,전두엽 피질 활동이 증가한 것 외에는 특이한 특징을 보이지 않았다. GAVIRUL 재현 프로젝트는 20년이 지난 시점[49]에서 유물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어떤 능력도 보이지 못하였기에 실패로 기록되었다. 예비 배아 샘플과 보고서는 보관소에 봉인되었으며, 프로젝트 자금은 "하중 보조 등각 외부 지원 시스템"(Weight Bearing conformal external assistance system)으로 전환되었다. 이 하중 보조(Weight Bearing)시스템[-]은 나중에 E.L.I.D.에 대항하기 위한 돌격병(Assault Artillery, AA)플렛폼[51]으로 발전하였다.
2.13.4.2. 이후 행적
[52]릴리와 로즈의 생명과 행방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묘연해졌다. 단편적인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2030년의 북란도 사건 전에 반E.L.I.D. 작전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존재하나, 증거가 부족하기에 그 소녀들이 북란도 사건에 어느 정도 관여했다거나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정지을 수가 없다.
2.14. 2000~2010년대
1983년 제네바 성명이 발표되고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로 냉전은 완전히 끝났다. 군사, 경제, 유적에 대한 지배는 전적으로 NATO의 손으로 넘어갔다. 세상은 1990년대 내내 큰 문제가 벌어지지 않고 지나갔다. 그러나 새 천년이 시작되면서 세상은 첫 번째 시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1999년에 유적 거품이 시작되었고 세계는 점점 커지는 경제 위기에 대한 대안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2.14.1. 1999~2001년 유적 거품
1999년, 경제적 거품이 꺼지면서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닥쳤다. 전 세계의 기업들은 붕괴를 피하기 위해 생산 및 인건비를 낮게 유지하려고 고군분투했다. 산업계는 생산 비용을 최대한 낮추거나 생산 효율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적 돌파구를 찾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기 조치로 인해 경제위기 동안 거의 문제에 직면하지 않았다. 푸틴은 1999년 8월 10일 총리로 취임했고, 그 다음날 곧바로 미하일 세메노비치 츠비군 전 KGB 제 16국 국장에게 자신의 집무실을 방문해 유적 문제를 논의할 것을 요청했다. 그들의 대화의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화의 파급력은 러시아가 유적 거품 문제를 해쳐나가는데 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러시아는 해당 위기 동안 산업의 주도권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불황기에 준비되지 않은 여러 국가들에게는 심각한 경제적 피해가 닥쳤다. 생산 비용을 낮추거나 기술적 혁신을 이루어내지 못한 수많은 기업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키이우에서는 생산 비용을 낮추기 위한 방법으로 공업용 공작기계와 로봇 부속 장치에 대한 연구개발이 진행되었다. 이 방법을 활용하여 제조된 러시아 제품은 서유럽이나 미국 제품에 비해 품질이 높지는 않았지만, 생산 가격은 상당히 저렴했다. 러시아는 산업 기계 덕분에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고, 다른 나라들도 곧 그 뒤를 이었다. 전 세계의 산업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점차 자동화로 전환되었다. 유적 거품 시기에 일본을 포함한 서방은 무역 협상을 하지 않았다며 러시아를 조롱한 반면, 러시아는 계속 경제 리더로서 앞으로 나아갔다. 유적 거품 금융위기는 2001년에 끝났다.
2.14.2. 2001~2021년
그 후 20년은 그 당시의 역사에 대해 거의 기록되지 않은 채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2012년, 미하일 세메노비치 츠비군은 마침내 러시아에서 맡았던 유적과 관련된 직책에서 은퇴했다. 그 후 더 이상 유적과 직접적으로 접점이 있지는 않았지만, 유럽의 유적 문제와 완전히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지혜, 통찰력을 다음 세대의 유적 연구자들과 과학자들에게 전달할 후계자가 없다는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2.15. 2020년대
2020년대가 밝아오면서 전 세계적으로 산업 기술과 혁신이 진행되고 있었다. 전세계 산업계에서 자동화 공장이 일반화되었고 CNC 공작기계가 도입되었으며, 산업용 로봇의 본격적인 개발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인간과 유사한 로봇과 다족보행 로봇의 개발은 아직 유아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이러한 위험부담으로 인해 자금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산업의 혁신과는 별개로, 인류는 남극의 얼음 아래에서 가장 거대한 비밀이 발견되면서 다시 한번 대규모로 유적에 관심을 쏟게 된다.2.15.1. 2022년 미하일과 젤린스키의 만남
폴란드 포즈난 대학(Poznań University)[53]에서 열린 학술 대회에서, 미하일 세메노비치 츠비군은 참석자 및 청중들과 함께 유적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거의 운명적으로, 츠비군의 말을 듣던 한 청중이 삼항 논리(ternary logic) 연구에 관한 질문을 했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이 청중은 1981년 스피라에나 실전 실험에 대한 여러 정보와 데이터를 가지고 츠비군에게 접근했다. 이 사람은 공개적으로 이용 가능한 정보만을 사용하여 1981년 1월 5일의 사건들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를 정리할 수 있었다. 소련 작전의 내막을 알고있던 츠비군은 그 사람의 지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람은 자신을 대학 수학과 학생인 빅토르 파블로비치 젤린스키(Виктор Павлович Зелински, Victor Pavlovich Zieliński)라고 소개했다. 2064년 빅토르 파블로비치 젤린스키 신소련 국가안전국 국장 (Виктор Павлович Зелински, Victor Pavlovich Zieliński) |
2.15.2. 2023~2029년 남극 공동(Antarctic Hollow)
2017년 근해에서 촬영된 남극 해안가 |
2092년 역붕괴: 베이커리 작전에서 남극 연방의 상징 |
2.16. 북란도
북란도는 유적 문제와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장소이다. 1950년대에서 1962년 사이에 중국 상하이 연안에서 발견된 이 유적(북란도 유적, 제27호 갑(甲)등급 기술연구기지)은 섬의 지표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는 1962년에 지하 67m에서 발견된 "GAVIRUL"(중국 학명은 "尉"(위))이라 이름붙혀진 표본이었다. "GAVIRUL"은 고대 문명을 세운 지적 생명체의 구성원이자, 유적의 수호자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해당 발굴을 마친 이후, 해당 유적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판단아래 폐쇄시켰다.1970년대, 상하이가 점점 더 도시화됨에 따라 봉인된 유적 위에도 도시가 건설되었지만, 이 유적은 다음의 천년기까지 그대로 잠잠히 남아 있었다. 1960년대의 파괴적인 유적 탐사로 인해 크리스탈 캡슐에 담긴 붕괴액이 소량 유출되어 시설이 방사능에 오염되었다. 그 상황에서 상하이가 계속 확장됨에 따라, 섬에서의 이뤄지는 건설 작업으로 인해 도시 아래에 있던 방사성 입자가 누출되었다. 지하 건설 작업으로 인해 유적의 외벽이 손상되었고, 갇혀 있던 방사성 입자가 도시 위로 새어 나갈 수 있는 통로가 만들어졌다. 붕괴 방사선은 결국 지표면으로 스며나와 여러 사람들을 E.L.I.D.에 감염시켰다. 처음에는 도시의 정부 관리들이 점점 늘어가는 이 위협을 무시했지만, E.L.I.D. 감염자들이 폭력 범죄를 일으키기 시작하자, SCAPF(Special Circumstances Armed Police Force, 특수상황 무장경찰기동대)가 상황통제를 위해 개입을 시작했다.
SCAPF는 전 세계적으로 여러 나라에 냉전 중 발생한 E.L.I.D.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 부대 중 하나였다. 그들은 E.L.I.D.를 처리하고 유적의 보안을 유지하도록 특수히 훈련을 받았다. SCAPF가 상황에 개입한 후, 북란도는 즉시 도시의 다른 지역과 구분되어 격리되었다. 이 봉쇄 조치로 인해 E.L.I.D.와 관련된 범죄 사례가 감소했다. 그렇게 몇 달 후, 북란도의 봉쇄 강도가 완화되고, 구역의 경계가 점차 느슨해졌다. 그로인한 관리감독의 소홀로 인해 2030년 1월 17일, 대규모 보안 위반 사항이 발생했다. 이 날, 세계가 멈춰섰다.
2.16.1. 2030년 1월 17일 북란도 사건
2030년 1월 17일 오후, 7명의 현지 중학생들이 호기심에 모험삼아서 북란도 유적에 침입했다. 이 중학생들은 격리 구역에 들어가자마자 여러 E.L.I.D. 감염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보안 위반 사항을 알게 된 SCAPF 부대원들은 즉시 격리 구역 내 구조 작업을 위해 파견되었다. 그들의 카메라에 사건의 전 과정이 녹화되었는데, SCAPF가 아이들을 구출하는 동안 그들은 수많은 감염자들과 맞닥뜨렸다. 하지만 그때에는 앞으로 벌어질 상황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몇 분 후, 카메라에 폭파팀이 E.L.I.D.를 가두고 추가적인 침입을 막기 위해 유적 입구 근처에 폭발물을 설치하는 장면이 비추어졌다. 이윽고 현지 시간으로 정확히 15시 17분, 폭발물이 터지며 유적의 한 곳의 벽이 안쪽으로 무너졌다. 곧이어서 벽이 무너지면서 노출된 곳으로 붕괴액이 유출되기 시작했고, 압축되어 있던 붕괴액의 유출로 급격한 반응이 일어나며 주변이 고온으로 달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사건이 되었다.폭발 직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막대한 규모의 분출이 일어났다. 북란도에 있던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고, 그 즉시 모든 생명체가 목숨을 잃었으며, 표토는 공중으로 유리화되어 거대한 결정 구조물을 형성했다. 중국 당국에 따르면 상하이, 쑤저우, 우시, 난퉁 등의 도시가 폭발과 충격파로 인해 파괴되어 잔해로 변했다. 유적에서 벌어진 붕괴액으로 인한 폭발은 핵무기처럼 일어나지 않지만, 파괴 규모를 고려하면 엄청난 위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해당 지역은 오늘날까지도 파멸적인 블랙존으로 남아 있다.
블랙존의 풍경 |
2.16.2. 사건의 여파
[1] 실제로 빵집소녀 이후 소녀전선이 출시하여 세계관 확장 및 변화가 이루어졌으며, 과거에 개발사 Sunborn이 설정에 관한 소설을 외부 작가에게 외주로 맡긴 적이 있었는데, 해당 작가가 또 다른 냉전을 무단표절했던 것이 나중에 밝혀져서 해당 관련된 내용들이 삭제, 변경된 적이 있었다.[2] M.J.실츠비아(M.J. Syrzrvia). 여성, 소련 국적. 1940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55년 국립 로모노소프 대학 수학과에 입학. 1957년 KGB 제 16국에 흡수되어 유적 연구팀에 합류. 1966년 유적의 기능에 따른 분류법을 제안. 1971년 백치의 무기화 작업을 지휘. 1981년 소련 측의 수석 과학관으로 유적 무기 제한 조약 서명에 참여. 1983년 E.L.I.D. 백신 연구에 참여. 유적 연구 분야에 남긴 탁월한 공적을 인정받아 '유적의 어머니' 라 불림.[3] 공룡이 살던 시대보다도 열 배는 더 먼 과거라고 나와있기에 공룡이 주류를 이룬 중생대가 기원전 2억 5100만년부터 기원전 6600만년이므로 최소 6억년이상 에서 최대 25억년 이상 전의 과거라고 볼 수 있다.[4] 유적이 어떠한 미지의 기술을 활용하여 지구의 한 지점에 고정된 것이 아닌 이상 수억~수십억년의 세월동안 판 구조론에 근거하여 지각과 함께 이동되었을 것이다. 만약 해당 시절에는 판게아처럼 거대한 하나의 대륙이었다면, 그 대륙 곳곳에 각각의 기능을 지닌 유적을 지어놓고 사용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대륙이 쪼개져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유적이 분포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 거대한 대륙이 아니더라도 그 시기부터 현재까지 오랜 시간이 흐르며 비틀어지는 지각속에서도 시설이 멀쩡하게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해당 문명의 엄청난 기술력을 감안하여 볼 수 있다.[5] #@[6] 수억년~수십억년이 지났음에도 유전자를 추출하여 실험할 수 있을정도로 온전히 보존된 사체는 이 문명을 건설한 지능체의 엄청난 기술력과 지능체 자체의 신체가 엄청난 내구도를 지녔다는 것을 알수 있다.[7] 현실에서 시베리아 개척은 17세기에 끝났지만 시베리아 자원 개발은 19세기 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8] 제정 러시아 시절 이름은 모스크바 제국대학[9] 붕괴액을 활용한 반응로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후일 스바로그 중공업이라는 신소련의 기업도 해당 발전방식을 연구하는것으로 보인다.[10] 해당 명칭은 스타워즈 시리즈의 무역연합을 모티브로 삼은것으로 보인다. 현실에서 소련의 국방위원회가 나치의 전리품 획득에 관여한건 사실이지만 그 산하에는 무역연합이 아니라 NKVD의 제9사무국 내 전문 태스크 포스가 전리품을 획득을 주도했다. 여담으로 소련군의 진격과 같이 이동하며 전리품을 획득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트로피 여단(Trophy Brigades)이라는 이름의 전리품 약탈 부대을 운영했다. 이들은 점령지의 귀중품과 예술품, 산업 시설, 전략물자와 각종 청동물품(녹여서 자원으로 활용.) 등을 전리품으로서 약탈했다.[11] 실제로 현실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병사들의 UFO목격사례가 다수 존재했으며, 서로 상대측의 비밀병기인줄 알았다고 한다.[12] 소녀전선 시리즈 세계관에서는 알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해당 미사일의 발전형이 후일 소유즈 우주선을 우주로 올리는데 사용되었다.[13] 현실에선 최근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부를때 세계무역기구와 약자가 같다보니 혼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WP(Warsaw Pact)라고 줄여 부르는 추세이다. 이 세계관에서도 같은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해당 표기 또한 병기한다. 여담으로 소녀전선 세계관 내에서 3차세계대전 이후 다시 설립된 UN의 보건기구는 국제보건기구(IHO)라는 명칭을 사용한다.[14] 현실의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은 실패를 권하는 자유적인 부서이다. 물론 이 말은 진짜로 실패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획기적인 수혜가 기대되지만 실패할 우려도 큰 과제에 집중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15] 서기장과 같은 의미의 직책이며,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인 탓에 서기장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표하며 제1서기라는 직함을 사용했다.[16] 이름인 백치(Идиот)는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그 백치(白癡)라는 뜻이다. 다르게 말하면 바보나 멍청이. 영어로 번역하면 Idiot또는 Moron이다. 이름의 모티브 자체는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5대 장편 소설중 하나인 백치(Идиот)로 추정된다.[17] 실제 현실에서는 튀르키예에 배치한 탄도미사일만 철수했다.[18] 실제로 현실에서는 1966년 2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자적 핵무장을 개시한 프랑스가 NATO를 탈퇴한바 있다.(이후 1990년대에 재가입)[19] Wunsch는 독일어로 소원이라는 뜻이며, 해당 이름을 영어로 번역하면 90wish가 된다.[20] 소녀전선 시리즈 세계관에서는 독일의 통일이 1985년에 이루어졌다.[21] 소녀전선 시리즈 세계관 내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엔진이다[22] 현실에서는 이미 J58엔진만으로도 MiG-31 개발 전까지 소련의 영공을 들락날락 할 수 있었을 정도였는데, 그 개량형이니 더 말할것도 없을것이다. 그러나 소녀전선 시리즈 세계관에서는 소련의 유적 기술이 미국에 비해 현저한 격차를 둘 정도로 앞서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소녀전선 시리즈 세계관에서 유적 기술을 기반으로한 소련의 기술력이 어느정도로 발전해 있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23] 정황상 현실에서 1970년대 대잠 작전을 위해 뛰어난 음파탐지기를 장착해 건조한 스프루언스급 구축함과 기존 물방울형에서 탈피하고 높은 속력과 정숙성을 갖춘 로스앤젤레스급 잠수함을 모티브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24] 위 실험은 현실에서 존 커틀러가 실행한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을 비롯한 여러 인체 실험과 미국의 방사능 실험이 모티브로 보인다[25] 썬더캣 편대는 현실에서 팬텀 전투기가 실제로 소속되기도 했었던 1953년 창설된 미합중국 공군의 곡예비행팀 선더버드와 미국 애니메이션 썬더캣츠를 모티브로 삼은 것으로 보이며, 폭격 작전은 미국의 전략 폭격 작전 롤링썬더 작전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26] 당시에는 리처드 닉슨이 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기이다.[27] 위 이미지는 실제 현실에서 소련군이 사용한 방호복으로, 소녀전선 세계관의 소련은 유적 기술로 인해 현실의 소련보다 기술력이 발전되어 있기에 위의 이미지의 방호복과는 다른 더 발전된 형태를 사용했을것으로 추정된다.[28] 제병협동 방호 키트(Общевойсковой защитный комплект, Combined-arms protective kit) 주로 생화학부대에서 사용[29] 경량보호복 (Легкий защитный костюм, Light Protective Suit) 주로 화학 산업, 군대 및 민방위 화생방 방호복으로 사용[30] 모든 부분을 여미어 점프슈트 형태로 감싼 완전 착용[31] 모든 부분을 여미어 착용하지 않고, 우비형태로 약식 착용[32] 실제 역사에서 이러한 목적으로 개발한 폭격기가 바로 XB-70이다.[33] 1972년에 ARPA는 DARPA로 이름을 바꿨다. 1993년에 잠시 ARPA로 다시 이름을 바꿨으나 1996년에 다시 DARPA로 이름을 바꾸었다.[34] Обще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автоматизированная система учёта и обработки информации (자동화된 정보 처리 및 회계 네트워크 시스템)[35] 실제 존재하는 소련의 오가스 프로젝트가 모티브. 실제 오가스 프로젝트에서도 해당 문양을 사용했다. 물론 문양의 세부적인 부분은 조금 다르다.(색 등)[36] 소녀전선 설정집 외주를 받은 작가의 표절로 인해 후일 설정이 바뀌었으나, "자유의 여신상"실험 자체는 우중이 다시 작성한 신규 설정집에서도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1976년부터 미국은 몇 번에 걸쳐 시행된 유적기술 실험인 '자유의 여신상' 실험에서 최초의 E.L.I.D. 사망자를 냈다"#@라는 간단한 언급은 있으나, 해당 사건에 대해서 상세히 기술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문단은 과거 설정집에 있는 사건의 세부내용을 기반으로 새로 설정이 바뀐 E.L.I.D.의 최신 설정을 적용하여 작성하였다. 후일 시리즈가 진행되며 해당 사건의 상세 내용이 언급될 시, 이 문단의 내용 또한 그에 맞추어 달라질 수 있다.[37] E.L.I.D.질병의 진행도에 따라 초기, 중기, 말기로 구분하며, 초기와 중기의 경계는 α-Time, 중기와 말기의 경계는 β-Time라고 한다. 말기의 단계가 흔히 소녀전선에서 보여진 좀비와 같은 E.L.I.D. 감염자상태를 의미한다.[38] 스피라에나의 수납용기이며 스피라에나를 운송할때에는 이것에 수납하여 운송한다. 실전 실험을 위해 맨처음 Mi-6에 실려 운반될 때에도 이것에 수납되어 운반되었다.[39] 정식 역사적 사료 아님. 해외 소녀전선의 팬이 임의로 제작한 것이다[40] 이름의 모티브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의 동명의 작품 마의 산(Der Zauberberg)이 모티브로 보인다.[41] 소녀전선 세계관에서도 소련은 8월 쿠데타로 인해 소련의 분열이 시작되고, 같은 해 12월 러시아 연방이 수립되었다.[42]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해외팬이 UN로고를 활용하여 제작한 이미지일 뿐, 공식 설정의 정식 로고는 아니다.[명칭] 정식 명칭은 UN 유적과학기구 (United Nations Relic Science Agency, 联合国遗迹科学署)이다.[명칭] [번역] 래더 앨버트 루크사트와 루크사트주의라는 해당 명칭은 소녀전선 시리즈의 원어인 중국어 표기의 발음(罗克萨特, 루오커사터)을 기반으로 번역된 명칭이다. 후일 공개된 영문명의 발음을 기반하여 번역하면 "래더 앨버트 로사르트", "로사르티즘"이나 "로사르트주의"로 표기 할 수있다.[번역] [47] 흑백합과 백장미 프로젝트 문단과 그 하위 문단의 내용은 향후 소녀전선 시리즈의 출시와 추가적인 스토리 전개에 따라 상세 내용이 변경될 가능성이 존재함.[48] 상술하였듯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세 여신(Moirai, 모이라이)의 차녀인 라케시스와 막내인 아트로포스가 코드명의 모티브다.[49] 2012년[-] 해당 시스템의 개발목적은 유적을 탐사할 때, 붕괴액에게서 착용자를 보호할 수 있는 외골격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으며, 공학용, 군사용, 경찰용 등의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고도의 모듈화를 위한 많은 장비 장착 지점이 마련되었다.[51] 해당 돌격병 플렛폼을 활용하여 개발된 대표적인 예시가 소녀전선에 출연한 신소련의 병기 AA-02 아레스와 빵집소녀와 역붕괴: 베이커리 작전에 등장하는 루련의 병기 AA-03 돌격병, AAX-05 돌격병 등이 있다.[52] 현재 GAVIRUL 재현 프로젝트의 결과인 릴리와 로즈에 관해 드러난 정보가 적고 파편적이기에 그저 당시 작전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라는 가능성정도만 존재하는 상황이다. 후일 신규 시리즈와 추가적인 스토리, 설정이 공개됨에 따라 이 문단의 내용은 수정될 수 있다.[53] 아담 미츠키에비치 대학교(Adam Mickiewicz University)[54] 지금까지의 소녀전선 시리즈에서 알려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소녀전선 시리즈의 작품이 전개됨에 따라 차후에 알려질 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