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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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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룡포의 양 어깨[6], 가슴과 등 중앙에 장식한다.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국성 전주 이씨
초대 군주 태조(太祖) (1392년 ~ 1398년)
말대 군주 순종(純宗) (1907년 ~ 1910년)
국호 고려 (1392년 ~ 1393년)
조선 (1393년 ~ 1897년)
대조선국 (1894년 ~ 1897년)
대한제국 (1897년 ~ 1910년)
군주 직함 국왕 (1392년 ~ 1894년)
대군주 (1894년 ~ 1897년)
황제 (1897년 ~ 1910년)
통치 국가 조선 (1392년 ~ 1897년)
탐라국 (1392년 ~ 1404년)
대한제국 (1897년 ~ 1910년)

1. 개요2. 목록3. 기록4. 조선의 장자 수난
4.1. 장자 이외
5. 글씨체6. 여담7. 왕실 문화
7.1. 궁중 용어7.2. 궁중 예법
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ᄒᆡᆼ도ᇰ·륙료ᇰ·이 ᄂᆞᄅᆞ·샤 :일:마다 天·복·이시·니。
해동의 여섯 용이 날아오르시어[7] 마다 하늘의 복이시니.
용비어천가(1447)》 제1장 중.
·솅:ᄌᆞᆼ·ᄅᆞᆯ 하·ᄂᆞᆯ·히 ᄀᆞᆯ·ᄒᆡ·샤 帝·뎽·며ᇰ·이 ᄂᆞ·리·어시·ᄂᆞᆯ 聖·셔ᇰ:ᄌᆞᆼ·ᄅᆞᆯ :내·시니ᅌᅵ·다。
세자를 하늘이 가려내사 임금의 명(命)이 내리시거늘, (하늘이) 성자(聖子)를 내셨습니다.
용비어천가(1447)》 제8장 중.
조선의 역대 군주에 대한 정보를 정리한 문서.

2. 목록

3. 기록

4. 조선의 장자 수난

조선왕조는 전통적으로 장자가 수난을 당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문종, 단종이며 이들 외에도 해당되는 인물이 상당히 많다.

이들 중 40세를 넘긴 인물은 양녕대군숙종밖에 없다. 의학 기술 및 위생관념이 부족했던 전근대 시대였음을 감안하더라도 그 수는 매우 적다. 이 중 병사가 아니라 정치적 숙청을 이유로 목숨을 잃은 장자도 있다. 단종 외에도 폐세자 이황, 복성군, 임해군 등이 그 예시다.

사망하지 않고 생을 유지했더라도 수난을 겪은 장자도 많다. 정종의 서장자 의평군 이원생은 별다른 결점이 없었음에도 고작 서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숙부 정안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고, 양녕대군은 오래 살았으나 폐세자가 되었다. 정원군의 적장자 인조는 자신의 업보로 매우 끔찍한 삶을 살았으며 순종은 망국의 군주라는 불명예를 떠안고 평생을 살았다.

포르투갈브라간사 왕조도 한국의 조선 왕조와 유사한 장자 수난의 역사를 가졌다. 이것은 (Curse of the Braganzas)로 알려져 있다.

4.1. 장자 이외

헌데 조선시대에는 비단 장자만 수난을 많이 당한게 아니라서 장자 이하의 왕자들도 숱하게 피해를 보았다. 이는 정변이나 역모사건 때문인데 정변이 일어났을 때 반대파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문제는 역모사건이 일어나면 추대된 인물은 자의든 자의가 아니든 사약받는게 거의 당연시되는 수준이었다. 초중기야 그래도 조선 왕들과 왕자들이 아들을 많이 낳아서 큰 문제는 아니었는데 효종 때부터 조선 왕실에는 아들이 귀해졌음에도 이 짓거리가 반복된다.[16] 덕분에 생물학적으로 효종의 가계는 직계로는 철종 대에 완전히 끊겨버리고 족보상으로야 철종의 3촌이지만[17] 혈연적으로는 17촌 수준의 아주 머나먼 지간인 고종이 즉위하게 된다.

5. 글씨체

파일:조선 왕 글씨체.jpg

열성어필》(烈聖御筆)에 수록된 태종, 세종, 문종, 세조, 성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정조의 친필 글씨체.출처

6. 여담

7. 왕실 문화

7.1. 궁중 용어

이 항목에 적힌 것은 극히 일부로, 황경환 교수의 논문 <宮中用語>(1963)[41]와 김종훈 교수의 논문 <宮中語 攷>(1969)[42], 김용숙 교수의 저서[43] 《조선조궁중풍속연구》(1987)에서 더 많은 궁중어 어휘를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워낙 오래된 자료라 한문이 엄청 많거나, 그동안 수많은 문헌의 발굴과 해석으로 잘못된 정보로 밝혀진 것들이 간혹 있다는 것(...). 그래도 궁중어를 다룬 자료가 워낙 희귀한지라 아주 귀한 자료들이다. 궁중어는 하오소서체, 하소서체 항목 참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외에도 상황이나 상대에 따라 다양한 어투를 사용했다.

아래는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87)에 실린 궁중용어 중 일부다.

7.2. 궁중 예법


밤 초경(初更)에 궁중 사람들의 초사(招辭)를 내렸다. 이어 전교하기를,

"그 날 오후에 내가 남고란(南高欄)으로 들어갈 때는 아무 물건도 못보았었다. 그런데 앉아서 세수를 끝내고 나서 남고란 아래를 내려다보니 쥐가 엎드려 있었으므로 내가 집어다 버리라고 명했었다. 이 곳의 처마밑에 있는 판루(板樓)와 섬돌이 매우 낮아서 유렴(油簾)으로 막았지만 여기저기 큰 틈이 있었으며, 유렴 밑과 섬돌 위의 사이가 너무 벌어져 있었으므로 쥐구멍이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무슨 쥐인지 알아보지 않은 채 무심히 보아넘겼다. 이어 나는 즉시 공사청(公事廳)으로 나왔고, 그 뒤 쥐는 남수구(南水口)에 버렸다. 그러므로 이 쥐를 도로 가지고 와서 자전께 아뢴 줄은 나도 당초에는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그 쥐가 바로 이 쥐였다고 한다."

하였다. 경빈(敬嬪)의 공초(供招)에는,

"소첩(小妾)이 지난 3월 초하룻날 오후 거처하는 방에서 귀인(貴人)[69]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 뒤 귀인은 대비전(大妃殿)으로 나아가고 소첩은 침실로 올라왔습니다. 대청으로 들어섰을 때 시녀(侍女) 김씨(金氏)가 전교를 받들어 동침실(東寢室)의 서책(書冊)을 가지러 왔다가 서침실(西寢室)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뒤 소첩은 그 대청 서남쪽 분합문(分閤門) 밖에 앉아 있었습니다. 앉아 있는 사이 다른 나인(內人)들이 퇴선(退膳)을 나누어 먹기 위해 안씨(安氏)·돈일(頓逸)·천이금(千伊今)·효덕(孝德) 등을 시켜 동침실 동쪽 모퉁이에 있는 빈 그릇을 대청으로 가져오게 했습니다. 퇴선을 나누어 먹기 위해 나누려 하므로 그대로 앉아 있기가 거북해서 동침실로 갔습니다. 조금 있다가 상(上)께서 그 침실로 나오셨고 마주 대하여 앉아 있다가 세수하러 나가셨습니다. 소첩은 제 아비의 병이 위중하기 때문에 의원(醫員)에 관해서 아뢰려 할 때 상께서 ‘저기에 쥐가 있다……’ 하셨습니다. 소첩은 미처 보지도 않은 채 아뢰기를 ‘쥐가 어디로 들어왔을까요?’ 했더니, 상께서 ‘남고란(南高欄) 유렴(油簾) 밑으로 들어왔는가보다.’ 했습니다. 소첩이 즉시 그 곳으로 가보니 남고란의 유지의(襦地衣) 위에 쥐가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때 상께서 아랫것들을 불러 ‘집어다 버리라.’ 하셨습니다. 안씨는 그 쥐를 보자 ‘저 쥐, 저 쥐……!’ 하고 기겁했으므로 김씨(金氏)가 치마[赤亇]로 쥐를 덮어싸서 집어들고 동전(同殿)의 서쪽 뜰에다 내버리려 할 때 상께서 보시고는 ‘쥐구멍이 있는 곳에다 내버리라.’ 하셨습니다."

하고, 안씨의 공초에는,

"저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오전부터 계속 침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점심 때 양전(兩殿)의 별수라(別水剌)를 대비전(大妃殿)의 뜻에 따라 강녕전(康寧殿) 서침실(西寢室)에다 합전(殿合)으로 진선(進膳)했었습니다.[70] 퇴선(退膳)[71]할 때 경빈(敬嬪)이 자기의 방에서 나와 강녕전의 대청 남쪽 분합문 밖에 앉아있었습니다. 저는 옷을 벗어 비자(婢子)에게 주고 퇴선을 나누어 먹기 위해 빈 그릇을 가지러 시녀(侍女) 돈일(頓逸)·효덕(孝德)·천이금(千伊今) 등과 동침실(東寢室) 동쪽 모퉁이로 함께 왕래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와 다른 나인(內人)들은 다같이 분합문을 닫고 퇴선을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72] 그때 경빈(敬嬪)이 동침실로 갔고, 상(上)께서는 그대로 전(殿)에 앉아서 중궁(中宮)과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고 있었으며, 시녀 김씨도 같이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저희들은 퇴선을 다 먹었고, 김씨도 강(講)을 들은 뒤에 역시 와서 먹었습니다. 조금 있다 경빈이 세숫물을 올렸는데 그때 상께서 ‘이곳에 쥐가 있다.’ 하셨고, 경빈도 ‘모두들 와서 이 쥐를 보라.’ 했으므로, 저와 김씨와 시녀 돈일 등이 함께 가서 보았습니다. 그 쥐는 전(殿) 앞 남고란(南高欄)[73] 지의(地衣)[74] 위에 엎드려 있었는데, 김씨가 치마로 덮어싸서 집어가지고 서쪽 뜰에다 버렸습니다. 상께서는 공사청(公事廳)[75]으로 나가셨고, 그 쥐는 그때까지도 생기(生氣)가 있었지만 움직이지를 못했습니다. 돈일 등이 소리개가 채갈까봐 종이로 쥐를 싸서 수모(水母) 종가이(從加伊)를 시켜 쥐구멍이 있는 곳에다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계속 침실에 있었습니다. 시녀 향이(香伊)가 북고란(北高欄)[76]으로부터 들어오면서 ‘저 곳에 볼만한 물건이 있다.’ 하기에 향이와 함께 북고란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시녀 금비(今非)가 가지고 온 쥐를 보았는데 네 발은 끊겼고 꼬리와 주둥이는 모두 지져져 볼꼴사나왔습니다. 저는 향이와 그 쥐를 가지고 와서 중궁전(中宮殿)에 계달(啓達)했더니, 이어 분부하시기를 ‘이는 매우 황당(荒唐)스런 짓이니 대비전(大妃殿)에 전달하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향이와 함께 대비전에 아뢰었습니다. 대전(大殿)에 아뢰지 않은 것은 요괴스런 물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김씨의 공초에는,

"저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오전부터 계속 침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점심 때 양전(兩殿)의 별수라를 대비전의 뜻에 따라 강녕전 서침실에다 합전(合殿)으로 진선(進膳)했습니다. 퇴선(退膳) 때 경빈(敬嬪)이 자기 방에서 나와 강녕전 대청 남쪽 분합문 밖에 앉아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동침실로 갔습니다. 상께서는 그대로 서침실에 앉아 중궁과 《대학연의》를 강론하셨고, 저도 같이 배우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강을 마친 뒤 강녕전 대청으로 나오니 다른 시녀들은 퇴선을 이미 다 먹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뒤따라 가서 먹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상께서 동침실로 옮겨가시자 경빈이 세숫물을 올렸습니다. 그때 상께서 ‘이 곳에 쥐가 있다.’ 했고, 경빈도 ‘모두들 와서 이 쥐를 보라.’ 했습니다. 저와 안씨·돈일이 함께 가서 보았는데 제가 치마로 덮어싸서 집어들고 서쪽 뜰에다 버렸습니다. 상께서는 공사청(公事廳)으로 나가셨고, 그때까지도 쥐는 살아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돈일이 소리개가 채갈까 저어하여 종이로 쥐를 싸서 수모 종가이(從加伊)를 시켜 쥐구멍이 있는 곳에다 버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계속 침실에 있었습니다. 안씨와 시녀 향이(香伊) 등이 그 쥐를 가지고 와서 중궁전(中宮殿)에 계달할 때 저와 다른 나인(內人) 등이 다같이 보았는데, 네 발이 끊겼고 꼬리와 주둥이가 모두 지져져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보고 알았습니다."

하고, 시녀(侍女) 돈일(頓逸)의 공초에는,

"지난 3월 초하룻날은 계속 침실에 있었습니다. 점심 때 양전(兩殿)의 별수라를 대비전의 뜻에 따라 강녕전 서침실에 합전(合殿)으로 진선(進膳)했습니다. 퇴선(退膳) 때 경빈이 방에서 나와 강녕전 대청 남쪽 분합문 밖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퇴선을 나누어 먹기 위해 빈 그릇을 가지러 저와 시녀 효덕·천이금 등이 동침실이 있는 동쪽 모퉁이로 왔다갔다 했습니다. 안씨도 옷을 벗어 비자(婢子)에게 주고 함께 왔다갔다했으며, 다른 나인(內人)들과 같이 분합문을 닫고 퇴선을 먹었습니다. 경빈은 동침실로 나가고, 상께서는 그대로 전(殿)에 앉으시어 중궁과 《대학연의》를 강론했습니다. 김씨도 같이 배우기 위해 들어가 강을 들었습니다. 그 사이 저희들은 음식을 다 먹었고, 김씨는 강을 다 끝낸 뒤에 와서 먹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상께서 동침실로 옮겨가시니 경빈이 세숫물을 올렸습니다. 그때 상께서 ‘저 곳에 쥐가 있다.’ 하셨고, 경빈도 ‘모두 와서 이 쥐를 보라.’ 하기에, 저와 안씨·김씨가 함께 가서 보았습니다. 김씨가 치마로 덮어싸서 집어다가 서쪽 뜰에 버렸고, 상께서는 공사청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때까지도 그 쥐는 살아 있었으나 움직이지를 못했기 때문에 저희들은 소리개가 채갈까 저어해서 종이에다 쥐를 싸서 수모 종가이를 시켜 쥐구멍이 있는 곳에다 버리게 했습니다. 그 뒤 안씨와 시녀 향이 등이 그 쥐를 가지고 와서 중궁전에 계달할 때 저와 다른 나인들이 함께 보았는데, 네 발이 끊겼고 꼬리와 주둥이가 모두 지져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고 알았습니다."

하고, 수모(水母) 종가이(從加伊)의 공초에는,

"저는 세숫간을 담당하고 있는 수모입니다. 지난 3월 초하룻날 점심 수라(水剌) 뒤에 세숫물을 물릴 일로 침실이 있는 강녕전 동남쪽 뜰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침실(寢室)의 시녀 돈일이 종이에 싼 물건을 주면서 ‘이것이 쥐니 갖다버리라.’ 했습니다. 제가 즉시 살펴보니 아직 죽지 않은 쥐였습니다. 그래서 남수구(南水口)[77]에 버리고 곧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시녀 금비(今非)·사랑(思郞)과 무수리 칠금(七今)·오비(吳非) 등이 소주방(小廚房) 앞에 앉았다가 저를 향해서 ‘버린 물건이 무슨 물건인가? 하기에, 제가 ‘이것은 사향쥐[麝香鼠]다.’ 했더니, 오비가 나에게 도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가져다가 금비에게 준 뒤에 드디어 세숫간으로 돌아갔습니다."

하고, 무수리 오비(吳非)의 공초에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시녀 금비·사랑과 무수리 칠금과 함께 소주방(小廚房) 앞에 앉아 있었는데, 수모 종가이(從加伊)가 강녕전 남수구에서 오기에 ‘너는 무슨 일로 갔다오는가?’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침실의 시녀가 쥐를 내주면서 갖다버리라고 하기에 갔다오는 길이다.’ 했습니다. 다시 무슨 쥐냐고 물었더니 종가이가 사향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 쥐를 도로 가져오라 하였더니 가져다 시녀 금비(今非)에게 주었습니다. 금비가 손으로 받았을 때는 등만 보였을 뿐이었고, 이를 소주방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기타 다른 사연은 모릅니다."

하고, 무수리 칠금(七今)의 공초에는,

"저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오후 시녀 금비·사랑과 무수리 오비(吳非)와 함께 소주방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수모 종가이(從加伊)가 강녕전 남수구(南水口)에서 오기에, 무수리 오비가 ‘너는 무슨 일 때문에 갔다오는가?’ 하니, 답하기를 ‘침실의 시녀가 쥐를 내주면서 내다 버리라고 하기에 갔다오는 길이다.’ 했습니다. 오비가 또 무슨 쥐냐고 물으니, 종가이(從加伊)가 답하기를 ‘여우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사향쥐 같다.’ 했습니다 그 쥐를 도로 가져오게 하여 시녀 금비가 손으로 받아보았고 저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네 발이 끊겨져 있었으므로 황당(荒唐)하게 여겨 자세히 보려 할 즈음에, 시녀 향이(香伊)가 소주방(小廚房)에다 말을 전하기 위해서 침실이 있는 북고란(北高欄)에서 나왔습니다. 와서는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시녀 금비(今非)가 쥐라고 대답했습니다. 향이가 와 보고 ‘황당하기 짝이 없구나.’ 하고 침실쪽으로 가져 갔습니다.

하고, 시녀 금비(今非)의 공초에는,

"저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오후에 시녀 사랑(思郞)·무수리 오비(吳非)와 같이 소주방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수모(水母) 종가이(從加伊)가 강녕전 남수구(南水口)에 갔다오기에 무수리 오비가 ‘너는 무슨 일 때문에 갔다오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침실의 시녀가 쥐를 내주면서 버리라고 하기에 갔다오는 길이다.’ 했습니다. 오비가 다시 묻기를 ‘무슨 쥐인가?’ 하니, 종가이가 답하기를 ‘여우 냄새가 나니 사향쥐인 것 같다.’ 했으므로, 종가이를 시켜 도로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받아보니 네 발이 끊겨 있었습니다. 매우 황당하게 여기고 있던 차 시녀 향이가 소주방에 전할 말이 있어 침실이 있는 북고란(北高欄)에서 와서 보고 묻기를 ‘무슨 일인가?’ 하므로, 저희들이 답하기를 ‘쥐다. 작은 쥐의 발은 본디 이런가?’ 하니, 향이가 들어서 보고는 ‘나도 모르겠다. 고란(高欄)에 방치해 놓고 다른 나인을 불러서 보여보라.’ 하고는 곧 내전(內殿)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와 같이 보고 알았을 뿐 다른 사연은 모릅니다."

하고, 시녀 사랑(思郞)의 공초에는,

"저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오후 시녀 금비와 무수리 칠금·오비와 같이 소주방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수모(水母) 종가이(從加伊)가 강녕전 남수구(南水口)에 갔다오므로 무수리 오비가 ‘너는 무슨 일로 갔다오는가?’ 하니, 답하기를 ‘침실의 시녀가 쥐를 내주면서 나에게 갖다버리라 하기에 갔다온다.’ 했습니다. 오비가 다시 묻기를 ‘무슨 쥐인가?’ 하니, 종가이가 대답하기를 ‘여우 냄새가 나니 사향쥐인 것 같다.’ 했으므로, 종가이에게 도로 가져오게 했습니다. 시녀 금비가 손으로 받아보았고 저는 침방(針房)으로 돌아갔으므로, 그 뒤의 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시녀 향이(香伊)의 공초에는,

"저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점심 때 양전(兩殿)의 별수라(別水剌)를 대비전(大妃殿)의 뜻에 따라 강녕전 서침실(西寢室)에다 합전(合殿)으로 진선(進膳)했습니다. 퇴선(退膳)할 때 경빈(敬嬪)이 자기 방에서 나와 강녕전 대청 분합문 밖에 와서 잠시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다른 나인(內人)들과 같이 분합문을 닫고 퇴선을 먹기 시작할 때 경빈은 동침실(東寢室)로 갔습니다. 상께서는 그대로 전(殿)에 앉아서 중궁(中宮)과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고 계셨고 시녀 김씨도 같이 배웠습니다. 그 사이 저희들은 다 먹었고, 김씨는 강을 끝내고 와서 역시 먹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상께서 동침실로 옮겨가셨고 저는 서침실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궁전(中宮殿)에 세숫물을 올릴 때 동침실 근처에서 쥐를 잡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소주방(小廚房)에 전할 일이 있어 북고란(北高欄)으로 나가니, 시녀 금비(今非)·사랑(思郞)과 무수리 오비(吳非)·칠금(七今)이 앉아서 어떤 물건을 돌려가며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묻기를 ‘무슨 물건이냐? 했더니, 금비가 ‘쥐다.’ 하고, 이어 ‘작은 쥐의 다리는 본디 이런가?’ 하기에 제가 자세히 살펴보니 살아 있는 쥐였는데 발이 없고 꼬리도 끊겼으며 주둥이는 지져졌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못보던 물건이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보아야겠다.’ 하고, 고란(高欄)에 두고서 대내(大內)로 들어가 안씨와 함께 동시에 나와보았습니다. 안씨가 ‘이는 황당(荒唐)한 짓이다. 중궁전에 계달(啓達)해야 한다.’ 하고, 즉시 안씨와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중궁께서 하람(下覽)하신 뒤 이어 전교하기를 ‘이는 황당한 짓이니 대비전에 계달해야 한다.’ 하셨으므로, 즉시 저와 안씨와 함께 대비전에 계달했습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22년 4월 3일 기유 아홉 번째 기사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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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왕조 및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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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으로는 1392년 7월 17일, 율리우스력으로는 8월 5일.[2] 대한제국으로 존속한 기간(1897~1910)을 포함. 참조.[3] 태조, 세조의 어진에서 확인되는 용이 측면을 바라보고 있는 형태이다.[4] 영조, 순조의 어진에서 확인되는 용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형태이다.[5]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과 사진에서 확인되는 용이 전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테두리가 물결 모양인 형태이다.[6] 견화(肩花)라 한다.[7] 중세 국어 어형은 'ᄂᆞᆯ-+-ᄋᆞ샤-+-아'와 같이 분석되므로 매개 모음이 있는 형태의 선어말 어미가 들어간 것이 확인되나, 이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선어말 어미인 '-(으)시-'는 'ㄹ'로 끝난 어간 뒤에서 매개 모음 없는 -시-로 실현되며, 이때 어간 끝 'ㄹ'도 탈락한다. 이를 반영하여 표기하면 '나시어~나셔'가 되나, 이렇게 표기하면 어간의 원형인 '날-'이 드러나지 않아 어간이 '(태어)나-'로 오해될 수 있으므로 어간을 합성어 '날아오르-'로 바꾸어 다소 의역하였다.[8] 헌종은 딸이 있었지만 일찍 죽었다.[9]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사망한걸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두번째로 아들을 많이 낳은 왕비는 인열왕후이다.[10] 조선시대엔 정실 부인은 왕이라도 동시에 단 1명만 둘 수 있으므로 여기서 '많이' 두었다는 것은 왕후(중전)가 자주 바뀌었음을 의미한다.[11] 희빈 장씨는 폐비 후 복권되지 못했으므로 예외. 단경왕후중종반정 이전 대군 부인 신분으로 들어왔다가 반정 이후 반정 세력의 압력(명분은 단경왕후의 일가가 연산군 처남과 같은 일족이라 후에 어떤일 벌일지 모른다는 것)으로 쫒겨났고, 이후 1739년(영조 15년)에 복위되었다.[12] 이쪽은 수난보다는 자기 스스로 그르친 게 많았다. 본인보다는 그 큰아들에게 수난(피해)을 안겨준 셈.[13] 사실 서자를 포함하면 늦둥이이자 막내라서 적장자란 표현이 다소 난감하지만 임해군은 양녕대군과 연산군처럼 자기 스스로 그르친 게 많았다.[14] 현종(1대 독자)과 숙종(2대 독자)은 조선 왕조의 장자론 유일무일한 외아들이다.[15]순종은 그 다음 소생이다.[16] 아이러니하게도 이 짓거리를 최초로 주도한 왕실 인물이 바로 효종의 며느리인 명성왕후 김씨이다.[17] 철종은 순조의 아들로 입적되어 즉위했고 고종은 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적되어 즉위했다.[18] 현재 함흥으로 추정, 당시는 고려 땅이 아니었다.[19] 참고로 태종은 형식적이나마 정종의 양자로 있는 식으로 계승.[20] 물론 철종이 순조의 양자로 들어가 당시로썬 조카-삼촌이었다.[21] 딱 하루 상왕 하고는 죽었다. 최단 재위 상왕. 최장기 상왕은 정종.[22] 장수했던 만큼 그 식단과 식생활이 채식으로 이루어져서 아주 건강했다.[23] 원래 무인이었고, 격구를 즐겨하여 체력이 튼튼했다.[24] 이때는 의학이 급성장할 때이다.[25] 다만 이쪽은 전반적인 건강이 안 좋았다.[26] 지금이야 대한민국 대통령의 어느 정도 격한 운동은 열량 소모 및 체지방 연소를 이유로 권장되고있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격하게 몸을 움직이는 활동은 부상과 같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국왕의 건강과 안위를 거의 국가 안보급으로 취급하던 조선 시대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27] 국왕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식욕이 없어 식사를 하지않을 때도 있지만 그랬다간 무슨 근심이나 걱정이 생겨서 식사를 안하는가 싶어 궁궐이 노심초사 하는 바람에 그조차 안된다. 어쨌든 이유없다. 그저 잘 먹어야 한다.[28] 만에 하나 이러한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을 제공했던 신하는 왕비나 대비에게 호출되어 갈굼당할 각오를 해야한다. 뭐 왕비가 만만하게 보이니 실효가 없을것이라 생각한다면 대비가 직접 나서고 대부분 대비의 호령 하나로 교통정리가 끝난다.[29]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제후국 예법으로 9첩 반상을 받았음이 알려졌다. 12첩 반상은 대한제국 성립 후 바뀐 것이다.[30] 물론 9첩이라고 해서 반찬 아홉가지 한정식 따위를 생각하면 안 되고, 하나하나가 연회요리급 정성이 들어간 수준이다. 위 사진은 오히려 실제에 못 미치는 수준일 수 있다는 것.[31] 단 세종은 엄청난 책벌레이자 공부벌레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경연을 말이 배우는 자리지 사실상 신하들을 가르치는 수준으로 할 정도였으니 그 학구열과 학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역사상 경연을 배움의 장이 아닌 가르치는 장으로 쓴 왕들은 세종과 정조 두 사람밖에 없었다.[32] 다만 중종의 복성군 사사는 김안로의 압력 때문이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중종은 도승지 양연을 통해 김안로를 순식간에 처리해버렸다.[33] 영조도 간장게장으로 경종을 죽였다는 말이 있다.[34] 덕흥대원군과 정원대원군.[35]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36]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37] 전계대원군[38] 정작 선정릉 도굴사건에서 정릉에서 발견된 중종의 것으로 보이는 시신이 키가 포백척으로 3척 2촌(약 149cm) 정도의 키를 가졌는데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는 확정되지는 않았다.[39]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키도 150cm 정도에 불과했다.[40] 단 중종은 선정릉 도굴사건때 정릉에서 발견된 시신이 중종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중종도 사후에 키에 대한 측정 기록이 있는 국왕이 될 수 있다.[41] 1960년 발표 논문을 1963년 국어국문학회 국어국문학 26권에 실은 것이다.[42] 국어국문학회 국어국문학 42·43권[43] 발표 논문을 모아 출간한 것이다.[44] 왕실에서 특정 계열의 음소를 기피하는 전통은 옆나라의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일본 황실의 경우 탁음을 기피한다. 때문에 왕실과 혼인한 여자는 자신의 이름에 있던 탁음을 전부 청음으로 교체해야 했다.[45] 왕자 대군과 군이 대감이라 불렸다는 주장은 60년대 황경환 박사의 궁중용어사전에 나온 것으로 잘못된 자료이다. 자가 항목 참고[46] 자가의 표기가 慈駕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김용숙박사가 조선 말기 한 자료만을 보고 한 주장으로 지금은 반박되었다.[47] 사극에서 '중전께서 용종을 잉태하셨다'라는 식의 대사로 많이 접했을 것이다.[48] 시대에 따라 다르다.[49] 기본 뜻은 '기쁘다'지만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풀이되었다.[50] 왕, 왕세자, 왕세손 역시 종친부 소속이 아니다.[51] 다만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엄연히 정실부인이자 왕비라서 내외명부의 수장인 중전을 역임하였기에 중전 입장에서도 내외명부에 대비가 개입하는 것 자체는 완벽히 막지 못했다.[52] 조선에서 승은후궁으로서 왕비가 된 것은 희빈 장씨가 유일하다. 희빈 장씨 이전에 후궁에서 정실이 된 인물들은 모두 양반가의 간택후궁 출신이다.[53] 영빈은 인현왕후가 승하할 당시 종1품 귀인이었지만 서인에 속한 명문가 출신이기에 후궁 중 누군가를 중전으로 승격할 경우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가 중궁전에 입성할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에 이 법도를 만들었다. 숙빈 최씨는 정일품 빈이긴 하였으나, 출신이 미천하여 가망이 없었다. 숙빈은 '빈'이 된 것만으로도 조선 최고의 신데렐라 소리를 듣는 인물이다.[54] 정확히는 중전이 공석이었던 임금. 즉, 왕비의 3년상이 끝난뒤에도 중전을 공석으로 둔 임금은 총 3명으로 태조, 세종, 문종 밖에 없었다. 태조는 조선왕조 초대 임금이기 때문에 딱히 문제가 없었으나 세종과 문종은 중전을 공석으로 둔 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계유정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조선 왕실은 중전을 절대 공석으로 만들지 않게 되었다.[55] 후궁을 중전으로 책봉할 수 없으니 다른 처자 중에 간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영조 또래의 미혼 여성이 있을 리가.[56] 수렴청정은 왕비로서 선왕을 도와 나라를 운영한 공을 인정받아 어린 왕의 정치를 돕는다는 개념이다. 왕이 친정할 수 있는 때가 되면 물러났으며, 대비가 정치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다. 섭정(攝政)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57] 물론 광해군인목왕후 같은 사례도 있기는 하다. 다만 이 경우는 다소 예외적인 사례이다.[58]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에서는 왕, 왕비, 대비, 세자에게만 마마를 바치고, 이에 세자빈은 제외되는 것이 정식 궁중법이라고 서술한다. 저자는 한국사 전공자가 아닌 국문학 전공자다.[59] 세자 저하, 동궁 저하 등[60] 덕혜옹주가 남긴 글에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61] 순조가 세자로 책봉된 게 1800년 음력 1월 1일인데, 정조는 같은 해 음력 6월 28일에 붕어했다. 순조는 세자가 되고 일 년도 안 되어 즉위했다.[62] 그냥 대비는 왕대비와 대왕대비가 모두 있는 상황에서 또 왕이 승하할 경우에 왕대비 밑에 임시로 만드는 작위이므로 대비가 최고 어른일 수 없다.[63] 심지어 수빈 박씨는 세자빈도 아닌데 저하 경칭을 받는다. 이전 시대였으면 꿈도 못 꾸었을 일이다. 문종 대에 숙빈 홍씨조차 이런 대접은 못 받았다.[64] 단종의 능(강원도 영월군 소재)이 대표적인 예외 사항이다.[65] 왕비가 먼저 승하할 경우, 왕이 그 옆에 묻히기 위해 능을 치우치게 조성하는 것[66] 군국 기밀을 전달할 때 내리는 표신으로, 왕명을 내리거나 다른 긴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사용했다. 표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67] 왕세자가 왕을 대신하여 궁성을 지킬 때 급히 명을 내릴 목적으로 사용하는 표신.[68] 두 개의 건축물을 연결하는 벽체가 없는 복도. 창경궁 명정전에 실물이 남아있다.[69] 희빈 홍씨를 가리킨다. 이때까지만 해도 종1품 귀인이었다.[70] 평상시에는 왕이 동침실에서 수라를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71] 밥상을 물리는 것[72] 궁녀가 강녕전에서 분합문을 닫고 퇴선을 나누어 먹었다. 왕이 있는데도.[73] 남쪽의 높은 난간[74] 천으로 가장자리를 꾸미고 여러 개를 이어서 크게 만든 제사용 돗자리[75] 왕명을 전달하는 내관들이 근무하는 곳[76] 북쪽의 높은 난간[77] 수구(水口): 물을 끌어들이거나 흘려보내는 곳[78] 엄밀히는 가락지가 반쪽만 있다 하여 반지다.[79] 가락지와 반지[80] 출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81쪽[81] 본방나인, 본곁나인, 본집나인, 본궁나인 등으로 불린다.[82] 출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2쪽[83] 이해경 여사는 의친왕비의 손에 자란 의친왕의 자녀 중 한 명이다. 세 살 때부터 의친왕비 김씨가 키웠다. 그의 증언에서 '어머니'라고 불리는 인물은 특별히 생모를 언급하는 게 아닌 이상 의친왕비를 뜻한다.[84] 비변사등록, 일성록, 승정원일기에 헌종 12년에 연경당을 신건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고종 2년에 연경당을 공사했다는 기록이 있다.[85] 소속된 것은 아니다.[86] 세자와 세자빈은 동격이다.[87] 원래 적의는 왕가의 적통을 잇는 여인만이 입을 수 있다.[88] 울산박물관에 소장된 소장품번호 울산 2822를 보면 치수가 222*7.5cm다.[89] 흔히 말하는 깨끼바느질[90] 옷감을 짤 때 금사를 넣어 壽, 福자를 새긴 천으로 지은 당의[91] ~자가라고 경칭을 꼭 붙여주면서 얘기해야 한다.[92]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가 딸 숙녕 옹주에게 무심코 '너'라고 했다가 효종이 격분한 것을 중전이 중재해서 무마한 일이 있었다.[93] 《경국대전》에서는 적서 구별 없이 왕세자의 중자(衆子)라고 표현한다. 세손을 제외한 왕세자의 나머지 아들을 규정한 것. 이들은 종법상 국왕의 적자인 대군보다도 왕위 계승권 순위가 더 높다. 자세한 것은 종친부 항목으로[94] 이에 비해 중국은 적장자(=태자) 정도나 따로 구분하지 나머지 황자, 황녀들은 생모가 누구인지에 관계없이 모든 황제의 아들은 친왕, 모든 황제의 딸은 공주로 책봉했다. 단, 황제의 자식이더라도 후궁사이에서 나온 딸은 공주가 아니라 옹주로 칭해진다. 대표적으로 덕혜옹주.[95] 각하합하를 사용했다.[96] 만일 대한제국이 전통 예법을 유지했다면 친왕은 물론이고 (만일 존재했다면) 태손 역시 전하라고 불릴 수 없었을 것이다.[97] 책봉 전[98] 세자나 세손이 아닌 이상 책봉이나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너'와 해라체 모두 사용했다.[99] 보통 7~8세 정도에 책봉했다.[100] 출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29쪽, 137쪽[101] 다만 희빈 장씨를 왕후급으로 예우하여 사사 후에 세자로 하여금 장례에 참석하여 곡을 할 수 있게 했고, 상복도 입게 해주었다.[102] 영조사도세자의 장례에 세손이 참석하지 못하게 했지만, 호적상 남남이었던 영빈 이씨의 장례에는 세손과 혜경궁 홍씨 모두 참석케 했다.[103] 왕, 왕비, 왕대비, 대왕대비, 세자, 세자빈, 세손, 세손빈 등의 적통과 대군, 공주, 왕자군, 옹주 등[104] 숙빈 최씨는 정1품 후궁이자 왕자의 생모다.[105] 마주 앉는 것은 대좌(對坐)라 한다. 지위, 신분, 사사로운 관계 등에서 완전히 동격이거나 한 가지는 앞서고 한 가지는 뒤쳐서 누가 절대적인 우위라고 확언할 수 없는 경우 대좌를 한다. 국왕과 대비가 만날 경우 나라의 예법으로는 임금이 위고 집안의 예법으로는 어머니나 할머니인 대비가 위이므로 서로 대좌한다. 중전과 대비 역시 중전이 집안에서는 며느리나 손자며느리가 되지만 나라에서는 국모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대좌한다.[106] 출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5쪽[107] 옹주는 왕의 서녀로서 외명부의 무품 하계에 불과하지만 세자빈은 세자의 정실로서 내명부의 무품 상계다.[136] 게다가 왕비와 세자빈은 남편인 왕이나 세자와 동격이다. 이를 묵과하면 차기 중전인 세자빈과 그 남편인 세자의 권위를 동시에 무시하는 꼴이 된다.[108] 출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5쪽[109] 남성 왕족은 종친부의 품계를 매기지만 여성 왕족은 외명부의 품계를 매긴다.[110] 대군의 정실 부인[111] 이우의 아내인 박찬주 여사는 박영효의 서손녀다. 박영효는 영혜옹주의 남편, 즉 철종의 부마였지만 영혜옹주가 결혼 석 달 만에 죽었다. 이에 고종은 특명으로 영혜옹주가 데려간 궁녀들을 첩으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원칙상 서자녀지만 대우는 적자녀와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112] 군(君)으로 봉하는 것을 말한다.[113] 예를 들면 장희빈은 취선당(趣宣堂)이라고 불렸다.[114] 금사로 수놓은 발톱이 다섯 개인 둥근 용보[115] 금사로 수놓은 발톱이 네 개인 둥근 용보[116] 어깨에 다는 보[117] 검푸른 색. 사극에서 세자가 입는 곤룡포를 떠올리면 쉽다.[118] 발톱이 세 개인 용을 수놓은 네모난 보[119] 혜경궁 홍씨는 13기~15기, 정조는 7기[120] 출처: 마지막 황실의 추억(이해경, 유아이북스)[121] 당시 황족들은 상황이 복잡했던 게, 황실에 아이가 태어나도 일제가 승인하지 않으면 호적에 올릴 수 없어 사생아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종친의 호적에 대신 올려 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의친왕의 경우 자식이 워낙 많아 다른 종친의 양자로 가기도 했다.[122] 출처: 마지막 황실의 추억(이해경, 유아이북스)[123] 출처: 마지막 황실의 추억(이해경, 유아이북스)[124] 섣달 그믐 저녁에 그 해를 보내는 인사로 웃어른께 하는 절[125] 영선군의 부인[126] 출처: 마지막 황실의 추억(이해경, 유아이북스)[127] 절메주라고 한다.[128] 황혜성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상아젓가락과 은접시이나, 이는 구한말 시기의 증언이므로 시대마다 다를 수도 있다.[129] 현대에도 통용되는 예절이다.[130] 현대에도 통용되는 예절이다.[131] 찔릴 수 있기 때문이다.[132] 뭉그러져 국물이 튀기 때문이다.[133] 조잡하기 때문이다.[134] 혹은 바늘을 들고 대기했다라는 설도 있다. 국왕이 위급할 때 침을 놓으려고...[135] 영의정, 도승지, 예조판서